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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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강대중(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도재형(이화여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윤동호(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이동우(변호사),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장은주(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유정배/ 춘천시민연대 상임집행위원장     한-미 FTA 타결도 침묵하게 하는 동계올림픽의 힘 - 민주주의 위협하는 국제 스포츠 행사 유치   지난 3월 27일, ‘2011년 세계 육상선수권 대회’를 대구가 유치했다는 ‘쾌거’가 보도됐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올림픽, 월드컵과 함께 세계 3대 스포츠 이벤트를 모두 치루는 7번째의 ‘자랑스런 나라’가 된다고 한다. 생산유발효과가 5,840억 원이며 고용창출 효과가 6,800명 이상이고 대구의 국제도시화가 기대된다며 대구지역 언론은 말할 것도 없고 전국의 언론이 들썩였다. 동계올림픽 유치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강원지역의 여론은 혹시 동계올림픽 유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까 걱정하면서도 사뭇 부러운 기색이다. 일부에서는 대구의 물량공세에 아프리카지역 IOC위원들이 감동을 받았기 때문에 오히려 동계올림픽 유치에 긍정적일 것이라며 안심시킨다. 김명곤 문광부 장관은 정부차원에서 국제 스포츠 행사 개최를 지원하기 위한 특별법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한다. 강원도보다 인구와 경제규모 사정이 훨씬 나은 대구의 성적에 이 정도 반응이니 변방 강원도가 동계올림픽을 유치하면 온 나라가 경악 할 것이 분명해 보인다.     2011년 세계 육상선수권 대회 유치로 대구의 국제도시화가 기대된다며 대구지역 언론은 말할 것도 없고 전국의 언론이 들썩였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국제 스포츠 행사 유치가 단체장 역량 검증 기준? 초등학교 때 박정희 대통령의 성을 딴 ‘박스컵’이라는 국제축구대회가 있었다. 어느 해인가 우리나라 축구팀이 킹스컵 대회에서 말레이시아에 진 뒤 같은 팀을 박스컵에 불러들여 대파한 일이 있었다. 강원도 궁벽한 시골에서도 그 경기는 대단한 화제였고 우리 또래 까까머리 꼬마들을 가을걷이가 끝난 논바닥에서 겨우내 축구를 하게 할 만큼 인기 있는 시합이었다. 프로야구가 출범하던 80년대 초반, 강원도 연고팀은 ‘삼미 슈퍼스타즈’였는데 너무 약한 팀이었고 전두환의 계산이 빤히 보이기도 해서 일부러 무관심해 하기도 했다. 88올림픽 때는 ‘상계동 올림픽’ 비디오를 보며 딴청을 피우기도 했지만 온 나라가 올림픽에 들떠있는 모습을 보며 심하게 우울해 하기도 했다. 이때만 해도 스포츠를 정당성 없는 권력이 국민을 동원하고 위로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긴 했지만 상업성이 많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던 것이 2002년, 2006년 월드컵부터는 대중의 자발적인 응원문화를 자본이 점령하고 애국주의 캠페인으로 치장하는 현상이 두드러진 듯하다. 지방자치제도 시행 이후 자치단체장들의 국제 스포츠 행사 유치를 위한 각별한 행동은 전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치열하다. 이미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2003년 대구 유니버시아드 대회를 치뤘고, 2014년 평창 동계올림픽과 함께 인천광역시도 같은 해에 아시안게임을 유치하기 위해 나서고 있다. 이처럼 광역자치단체장들 뿐 아니라 기초자치단체장들이 추진하는 크고 작은 국제 스포츠행사는 파악이 어려울 정도다. 국제 스포츠 행사를 유치하고 치루는 것이 국력을 보여주는 것이고 단체장능력의 시험대라는 약간 이상한 자의식에 너도 나도 ‘올인’하고 있는데 이것을 진지하게 검토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한참 부족하다.   민주주의 위협하는 국제 스포츠 행사 유치 우리 사회가 대규모 국제 스포츠 행사 추진에 이렇게 관대 한 것은 ‘성장콤플렉스’에 대한 심리적 의존이 크거나 아니면 우리 모두 ‘대발이’가 될 수 있다는 몽상에 빠져있기 때문인 듯하다. 평창 동계올림픽은 경제적 파급효과만도 총생산액 유발효과는 11조 5,166억 원, 부가가치 유발액은 5조 1,366억 원, 고용증대 효과는 14만 3,976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는데 이를 어떻게 검증해야 하는지에 대한 공론은 없다. 일단 지방자치단체장이 대규모 국제 스포츠 행사 유치전에 뛰어들면 지역에서 다른 견해 또는 비판적인 의견이 드러나거나 자리 잡을 여지는 거의 없다. 지역 언론은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필수라며 중앙정부의 소극적 지지를 질타하거나 시민사회의 소수의견을 묵살하고 외면한다.     국제올림픽조직위원회 실사단이 지난 2월 강원 평창을 방문하자 주민들이 거리에 나와 국기를 흔들며 열렬히 환영하고 있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대체로 지식인들은 유치타당논리를 만들어 내는데 앞장서고 유치위원회는 갖가지 이벤트를 통해 대중을 설득하며 지역기업들은 기부에 나서는 등 지역시민사회 전체는 하나의 동원체제가 된다. 지난 2월 IOC 동계올림픽 실사단이 경기장 시설 등을 평가하기위해 방문했을 때 강원도 사회가 ‘동계올림픽 실사 총동원체제’로 전환되었다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닌 듯싶다. 강원도를 방문하는 중앙정치인들도 진보 보수 할 것 없이 동계올림픽 유치를 지지하고 있으니 스포츠 행사가 이념과 사상을 ‘통합’한다는 말이 틀리지는 않은 듯하다. 국제 스포츠 행사의 가장 커다란 문제는 이처럼 무엇보다 ‘민주주의 위기’를 불러온다는 점이다.   한-미 FTA 타결도 침묵하게 하는 동계올림픽의 힘 강원도가 2010년 동계올림픽 유치에 실패 한 뒤 지적된 여러 문제점 가운데 특히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유치위원회의 자금 조성과 사용처였다. 강원도의회에서 여러 차례 문제제기가 있었지만 도비집행내역 이외에 민간에서 기부한 기금은 공개할 의무가 없다는 강원도의 주장에 유야무야 넘어가 버렸다. 들리는 소식에 따르면 대구도 세계육상대회에 참가하는 선수단과 임원의 숙박비 등을 대회 시작 3개월 전부터 면제해주는 조건을 제시하며 IOC 위원들을 설득했다고 한다. 한-미 FTA가 대통령의 해괴한 용단(?)에 의해 체결되면 강원도 농민 12,000명 가량이 실업자가 되고 농업생산액은 1,480억이 줄어든다고 한다. 강원도가 애쓰고 있는 민·외자 유치사업도 어려워지고 강원도민이 대거 수도권으로 이사를 갈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렇지만 강원도에는 5조의 부가가치가 발생하고 14만 여명의 고용이 창출된다는 동계올림픽이 있어서인가. 강원도는 한-미 FTA 타결에도 침묵하고 있다.
2017-06-13 | hrights | 조회: 465 | 추천: 0
송기춘/ 전북대 법학과 헌법학 교수 도로 위로 스러져가는 생명을 보며 - 인간을 위해서라도 모든 생명 존중해야   사방에 봄이 완연하다. 매화향기 날리고 산수유, 회양목도 꽃이 만개하였다. 보리밭이 파래지고 이름 모를 들꽃들이 피어나고 있다. 쑥이 고개를 내밀고 소나무도 신비한 색을 머금고 있다. 더 이상 아름다운 빛을 찾지 못할 만큼 아름답다. 가끔 어설프게 바람이 불고 비도 오지만, 봄은 그렇게 온다. 봄은 생명의 계절이다. 자동차 운전을 하다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차에 치여 죽은 동물의 시체를 본다. 그 위로 차들이 쉴 새 없이 지나가서 붉은 피는 마르고 가죽마저 닳아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져 버린다. 이 땅에서 가장 강한 종족인 인간이 좀 더 편하게 살고 빨리 가기 위해 닦은 길이 동물들의 삶을 변하게 하고 있다. 산길을 따라 먹이를 찾아 이동하던 산길이 뚝 잘려 나가고 길에는 차들이 질주한다. 동물들은 이동을 포기하거나 목숨을 무릅쓴 횡단을 하여야만 한다. 이러한 개발은 생태계를 흔들어 놓고 있다. 요즘 동물 이동통로를 만든다 하지만 예산 탓인지 실효성이 없다 여기기 때문인지 눈에 자주 띄지는 않는다. 얼마 전에는 도로교통으로 인한 동물살해인 이른바 ‘로드킬’(road kill)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이 발표된 적이 있다. 아예 도로 양편을 막다시피 하는 해결방법이다. 도로에 동물이 진입할 수 없도록 한다면 도로 위에서 동물들이 차에 치이는 일이 없을 테니 방법은 방법이다. 그러나 문제는 단지 도로 위에서 동물들이 죽는 것만은 아니다. 이 땅이 사람만 사는 곳이 아니라 동물들도 함께 살아갈 터전임을 생각한다면 그런 방법을 해결책이라고 제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동물들이 찻길에서 죽는 것은 도로가 동물들의 생활을 위한 이동경로를 단절시키기 때문이다.   ‘로드킬’ 막기 위해 도로 양편 막겠다는 ‘인간’ 지난 달 한 신문에 실린 사진기사는 참으로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 많은 것을 가르친다. 길을 건너던 개가 차에 치어 죽자 같이 가던 개가 차에 달려들고 짖어대는 모습이다. 거세게 차를 몰고 문명의 이기를 누리는 잘난 ‘사람들’을 향한 시위로 보인다.     ‘로드킬’ 견공(犬公)들의 항의[한겨레 07.02.24] (매일신문 박노익 기자의 사진기사) ① 22일 오후 대구 달성군 다사읍 세천리에서 강아지들이 도로를 건너고 있다. ② 앞서가던 강아지가 달려오는 화물차에 치이자 뒤따르던 강아지가 일으켜 세워보지만 이미 숨이 멈춰진 상태. ③ 주위에 강아지들이 도로 한 가운데 버티고 서서 떠나지 않고 있다. ④ 화가 난 강아지 한 마리가 지나가는 차량에 달려들어 범퍼를 물어뜯고 있다. ⑤ 사고 차량은 떠났지만 강아지들은 이곳을 지나는 같은 종류의 화물차만 보면 거칠게 짖으며 달려들었다. 인간 이외의 자연을 정복이나 지배의 대상으로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근대 과학적인 세계관에서 비롯된다. 자연은 인간에게 정복과 개발의 대상일 뿐이다. 사람을 품어주는 어머니도 아니고 신비한 그 무엇도 아니다. 다만 무생물인 지질일 뿐이다. 또한 동물들은 함께 살아가는 생명이라기보다는 이용할 물건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자연은 무참히 파헤쳐지고 잘리고 말 못하는 짐승은 상품으로 거래된다. 물건은 값어치가 없어지면 과감하게 버려진다. 철저히 개발의 대상이 되고 상품이 된 자연은 인간에게 무엇을 주고 있는가? 이러한 자연관은 현대의 과학세계를 가능하게 하였지만 또한 이 세계에서 발생하는 위험은 그로부터 오는 것은 아닌가? 이미 환경오염으로 인하여 피해를 보고 있고, 동물들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생각은 사람들의 생명마저도 가볍게 여기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로지 강자인 인간의 편의만을 위주로 한 삶은 가능할까? 개발 중심의 자연관에서 시작된 위험 예로부터 감을 딸 때도 몇 개를 남겨 두었고 흘린 이삭도 샅샅이 거두지 않는다 하였다. 쥐를 위하여 밥 한 덩이 남겨 두고 나방을 불쌍히 여겨 불을 켜지 아니한다(爲鼠常留飯 憐蛾不點燈)고도 하였다. 콩을 심으면 하나는 하늘 나는 새를 위해서, 하나는 땅에 사는 벌레를 위해서, 하나는 사람을 위해서라는 가르침을 떠올린다. 뜨거운 물을 함부로 버리지 말라는 말도 떠올린다. 법률상 소유자가 물건의 사용, 수익, 처분의 권능을 가진다 하지만 이 세상이 오로지 인간만 살아가는 곳이 아니라 여러 생명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곳임을, 사람으로 인하여 다른 생명들이 죽어서는 안 된다는 어진 마음이 담긴 가르침이라 생각된다. 어쩌면 인간이 살아가는 것 자체가 다른 생명 위에서 가능한 것인지 모른다. 선인들이 발걸음 무겁게 하라는 말씀도 단지 의젓한 걸음걸이만을 가르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신발 아래 깔리는 생명을 걱정하였던 것은 아닐까. 요즘은 까치 때문에 귀한 과실 농사 망치지 않을까 염려하여 과수원에 철망을 씌우고 폭발음을 낸다. 쥐는 퇴치의 대상이고 나방은 전기그물망에 태워진다. 이런 형편에서 앞의 얘기들은 한가로운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세상에 사는 온갖 생명들에 대해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우쳐 주고 있다 생각된다.   인간의 삶을 위해서라도 모든 생명 존중해야 살아 있는 것에 대한 존중과 연약한 생명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사람의 어진(仁) 바탕의 시작이 아닌가? 우리는 어느덧 이 본성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 이외의 생명에 대한 연민을 잃어버리는 것은 인간들만 모여 사는 세상에서 아무 뜻도 없을 것 같지만, 그것은 결국 인간에 대한 경시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노예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거나 여자를 남자와 동등한 권리를 가지는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던 것도 결국은 모두 같은 맥락이 아닐까? 인간이 인간 이외의 생명에 대해 가지는 마음과 사람 사이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마음에 무슨 질적인 차이가 있을까? 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보행자를 보호하려 하지 않는 것도 근본적으로는 생명에 대한 근본적인 경시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닌가? 근원적인 생명에 대해 경외와 존중을 하는 것은 사람에 대한 경외와 존중으로 이어진다고 믿는다. 사람이 편하자고 파헤치고 깎고 다듬고 하는 일이 인간의 삶을 파헤치지 않으려면 이것이 적어도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배려와 존중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인간의 풍요를 위하여 알지 못하는 사이에 희생되는 이름 모를 생명의 죽음 앞에서 경건하여야 한다. 이 땅에는 지배자, 강자만 사는 것은 아니다. 동물의 삶의 환경은 인간의 문제이다.
2017-06-13 | hrights | 조회: 571 | 추천: 0
홍미정/ 한국외대 연구교수 2003년 이후 미국의 이라크 공격과 점령으로 3만 4천여 명의 이라크 거주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대거 퇴거당했다. 1948년에 이스라엘 국가 건설과 함께 토착 팔레스타인 주민의 90%인 90만 명 정도가 축출되었던 대 참사는 이라크에서 되풀이되고 있다. 현재 퇴거당한 팔레스타인 난민들 대부분은 정착할 곳을 발견하지 못하고 이라크 국경 부근에서 머물고 있다. 바그다드에서 축출당한 한 팔레스타인 난민은 “일단의 이라크인들이 ‘너희들은 팔레스타인인들이다.’고 외치면서 나와 아버지를 공격했다. 그들은 우리가 바그다드를 떠나도록 강요했다.”고 말했다. 2007년 3월 14일 팔레스타인 난민부는 “이라크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지난 2월에만 31번 공격을 받아서 8명이 살해되었다.”고 밝혔다. 이 공격은 미군과 이라크 무장단체들이 주도하였으며, 적어도 15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납치되었다. 이들 중 두 명은 석방되었으나, 다른 두 명은 고문 흔적과 함께 사체로 발견되었으며, 나머지 사람들의 생사는 알 수 없다. 이라크에 거주하던 135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은 시리아로 피난하여 이라크-시리아 국경 근처에 설치된 난민 캠프에서 생활하고 있다. 1948년 이스라엘 국가 건설이후 이스라엘로부터, 1967년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서안과 가자를 점령한 이후 서안과 가자로부터, 걸프전 이후 쿠웨이트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인들과 그들의 후손 약 9만 명이 이라크에 거주해왔다. 이들은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 구제 사업국(UNRWA)에 난민으로 등록되지 않았고, 따라서 이 기구의 원조를 받지 못한다. 현재 이라크 거주 팔레스타인인들은 대부분 이라크에서 태어났지만 시민권을 부여받지 못했고, 정기적으로 거주권 갱신 신청을 해야 한다. 또 이들은 자동차, 집, 토지 등을 소유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은 사담 후세인의 통치하에서 보호를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이들은 정부 소유의 집을 제공받았고, 개인 소유 주택을 임대할 때에는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았다. 또 사담 후세인은 토지나 건물 소유자들에게 압력을 행사해서 낮은 가격으로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임대해주도록 했다. 이로 인해서 이라크의 가난한 시아파 주민들은 팔레스타인인들이 후세인 통치하에서 특혜를 받았으며, 후세인 통치의 유물이라고 생각한다. 후세인이 몰락한 이후 이라크인 소유자들은 높은 임차료를 요구하면서, 후세인 정권으로부터 특혜를 받아왔다고 생각되는 수 백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을 쫓아냈다. 이 상황에서 바그다드 거주 팔레스타인인들의 절반이 넘는 1만 9천명 이상이 퇴거당했으며, 남아있는 팔레스타인인들은 살해, 납치, 협박 등에 시달리고 있다. 요르단에는 이라크로부터 축출당한 팔레스타인인들을 위한 이라크 국경 근처에 위치한 알 루웨이시드(Al-Ruweished)난민 캠프가 있다. 이곳의 난민들은 요르단 정부의 허가 없이 이곳을 떠날 수 없고, 아이들을 교육시키지 못한다. 2007년 3월 14일 팔레스타인 난민부 장관인 아테프 아드완(Atef Adwan)은 “요르단은 60만 명의 이라크인 난민들을 수용하였지만, 폭력을 피해 이라크를 떠나온 280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요르단에 머무는 것을 거부하면서 캐나다로 이주시키려 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실제로 요르단 정부는 이라크로부터 오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거부하면서 비팔레스타인 난민은 기꺼이 수용하고 있다.   팔레스타인인들의 난민 캠프 사진 출처 - http://www.imemc.org 시리아는 2006년 이후 알 홀(Al-Hol), 알 타나프(Al-Tanaf), 알 왈리드(Al-Walid) 등의 팔레스타인 난민 캠프에 이라크로부터 축출된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수용하고 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합법적인 지위도 없고, 이동의 자유뿐만 아니라 일할 자유도 없다. 사실상 이들은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이라크-시리아 국경 근처에 위치한 난민 캠프들에 갇혀있는 죄수들이다. 현재 어떤 아랍 국가도 이라크에서 축출되어 이라크 국경 부근에서 정착할 곳을 찾고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에게 적절한 도움을 주지 않는다. 다만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이들을 받아들일 의사를 표현했지만, 이는 거의 실현 불가능한 희망 사항이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국경조차 통제하지 못하며, 이스라엘의 철저한 감시 하에 놓여 있다. 2004년 10월 사우디아라비아는 귀화법을 제정하여 10년 이상 장기 거주민들 중 100만 명 이상에게 시민권 취득을 신청하도록 허락했다. 그러나 이 법은 아랍 연맹의 지침에 따라 50만 명에 이르는 사우디 거주 팔레스타인인들을 배제시켰다. 아랍연맹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정체성이 상실되는 것을 피하고 팔레스타인으로의 귀환권을 보장’하기 위하여, 아랍 국가들이 팔레스타인 난민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현재 요르단을 제외한 어떤 아랍 국가도 공식적으로 팔레스타인 난민들에게 시민권을 주지 않고 있다. 요르단조차도 팔레스타인 출신들은 사적인 부문, 경제적인 부문에 집중되어 있고, 정부 기구 등 공적인 부문에서는 배제된다. 시리아와 레바논에서는 시민권을 받은 극소수의 팔레스타인인들도 정치적 권리를 행사하지 못한다. 1990년-1991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했을 당시에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가 이라크와 동맹을 맺었다는 이유로, 쿠웨이트와 걸프 아랍 왕국들은 40만 명 이상의 팔레스타인인들을 대거 추방하였다. 이렇듯 중동에서 발생하는 분쟁 중에 팔레스타인인들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관계없는 정치적 상황에 의해서 휘둘려지고 있다. 사실상 모든 아랍 국가들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은 정치적으로는 이미 사망선고를 받았으며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된다.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아랍 연맹 소속국가들은 팔레스타인으로의 귀환권을 보장한다는 명분으로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시민권을 주지 않고 있으면서도, ‘팔레스타인으로의 귀환’을 위한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 걸프 지역의 아랍 부국들은 정착할 곳 없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수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굶주리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경제적인 원조조차도 거의 중단한 상태다. 실제로 아랍 국가 권력자들은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를 해결할 어떤 의지도 없다.   팔레스타인인들의 난민 캠프 사진 출처 - http://www.imemc.org 단지 이들은 팔레스타인인들을 이스라엘이 주변 아랍 국가들을 공격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것을 막아주는 방패 혹은 완충기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다. 팔레스타인인들이 죽든지 살든지 그것은 이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1949년 12월 수립된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 구제 사업국(UNRWA)은 ‘팔레스타인 난민’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1946년 6월 1일과 1948년 5월 15일 사이에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던 사람들로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의 결과 집과 생계 수단을 잃은 사람들과 부계 후손들’로 규정하였다. 이후 1967년 전쟁에서 난민이 된 사람들이 추가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UNRWA의 구호활동은 이 기구에 등록된 난민들이 거주하는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서안과 가자 지역 등에 한정됨으로써 이라크,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등 다른 지역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배제시킨다.   2007년 1월 팔레스타인 인구 구성 분포(이스라엘 국내에 거주하는 140만 제외) 팔레스타인인 약890만 명 이스라엘 점령지 내부 - 약 400만 명 (UNRWA등록된 난민: 172만7천명) 가자- 150만 명 (UNRWA등록된 난민: 100만 명) 동예루살렘- 42만 명 (UNRWA등록된 난민: 1만7천명) 서안- 210만 명 (UNRWA 등록된 난민: 71만 명) 이스라엘 점령지 외부 - 약 490만 명 (UNRWA등록된 난민: 268만3천명) 요르단- 284만 명 (UNRWA등록된 난민: 184만 명) 레바논- 42만 명 (UNRWA등록된 난민: 40만 6천명) 시리아- 44만 명 (UNRWA등록된 난민: 43만 7천명) 기타 아랍국가들(이라크,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등)- 67만 명 기타 국가들- 53만 명
2017-06-13 | hrights | 조회: 675 | 추천: 0
이유정/ 변호사, 법무법인 자하연 76년 7월 동일방직의 여공들은 회사의 어용노조 결성에 반대하며 알몸시위를 벌였다. 당시 상황에 대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25일 아침이 되자 회사주변의 교통은 두절되었고 조합원들은 7월의 뜨거운 태양과 허기로 지쳐 쓰러져 있었다. 저녁 6시 반, 기동경찰은 연행버스를 대기시키고 방망이를 들고서 이들을 포위했다. 경찰은 5분간의 여유를 줄 테니 자진해산하라고 명령했다. 이때 놀랄만한 일이 일어났다. 여성노동자들은 작업복을 벗어던지고 노총가를 목이 찢어져라하고 불러대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리 비열한 경찰일지라도 반나체의 여성의 몸에 손을 대지는 않으리라고 믿은 이들은 여성의 수치도 잊은 채 지친 목소리로 절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경찰은 무자비하게 이들을 구타하고 연행해갔다. 곤봉이 난무하고 가냘픈 여성들은 피를 흘리며 신음하였다. 어떤 여성은 죽어도 조합을 사수하겠다며 내의까지 팽개쳤지만 경찰은 나체 그대로 차에 팽개쳤다. 몽둥이에 얻어맞고 머리채를 잡혀 차에 끌려가는 등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차바퀴 밑에 드러누워 연행을 저지시키려는 노동자도 있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2007년 3월 7일 울산과학대학교에서는 청소용역 노동자들이 농성을 하던 중 학교 관리사원들에게 맞서 끌려 나가지 않기 위해 알몸대치를 하였다는 신문기사가 실렸다. 이들 대부분은 5-60세의 여성들로서 생계를 책임지고 있으며, 월 70만원 정도의 급여를 받고 수년간 울산과학대학교에서 청소업무를 하였다. 그런데 지난 해 노동조합을 결성해 민주노총 울산 지역 연대노동조합에 가입하자 대학 측에서 이들이 속한 청소용역업체인 ㈜한영과의 도급계약을 해지하였고, 이들은 고용승계를 주장하며 농성을 하다가 농성장에 남자직원들이 들어오려고 하자 “옷을 벗고 있으면 못 들어올 것 같아서” 옷을 벗고 알몸대치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사회에서 가장 힘없는 위치에 놓여있는 이른 바 "청소아줌마", 여성이라는 성이 아닌 아줌마라는 제3의 성으로 남자 화장실을 무표정한 얼굴로 드나들어야 하는 그들, 최저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70여만 원의 급여로 서너 명의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그들이 갑작스러운 계약해지 통보를 받고, 농성을 하고, 알몸으로 끌려 나가면서 느꼈을 절망감을 생각하면 말문이 막힌다. 30년이라는 시간 동안 우리나라는 보릿고개를 넘나드는 빈곤한 나라에서 세계 10위안에 드는 경제대국으로 성장하였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여성 노동자들은 여전히 알몸으로 권력에 맞서야 하는 것이 우리의 서글픈 현실이다.   울산과학대의 여성노동자들은 알몸시위를 벌였으나 직원들에 의해 밖으로 끌려나왔다. 사진 출처 - 울산노동뉴스 여성 노동자에 대한 노동시장의 차별 한 연구에 따르면 생활보호대상자 중 3분의 2가 여성가구주이고, 도시빈곤가구주 중 3분의 1이 여성가구주라고 한다. 여성들은 전통적인 영역은 가정이라는 성별분업 이데올로기, 임신, 출산과 육아로 인한 고용의 단절, 여성의 노동을 남성의 노동에 비해 낮게 평가하는 고정관념 등으로 인하여 노동시장에서 차별적인 대우를 받으며 쉽게 빈곤층으로 몰락하게 된다. IMF이후 수많은 기업들이 구조조정이라는 미명하에 무차별 인원감축을 할 때 여성들은 가장 우선순위로 해고 대상이 되거나, 비정규직으로 전환되었다. 죽어라 일을 해도 빈곤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신빈곤층 가운데 비정규직 여성노동자, 그것도 혼자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여성가구주의 비율이 매우 높다는 사실은 빈곤이 성차별의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더욱 심각한 것은 오는 7월 비정규직법의 시행을 앞두고 기업에서 반복하여 계약을 지속하여 온 비정규직 노동자들과의 계약을 해지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2년 이상 계약직으로 일하면 사용자는 사실상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내용의 비정규직법안이 본래의 취지와는 달리 가장 취약한 계층에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더 열악한 환경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대량해고나 계약해지가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철저히 조사하고, 법률 적용을 회피하기 위한 계약해지를 부당해고로 보아 이를 금지하는 등의 실질적인 대책을 마련하여야 한다. 또한 여성노동자들이 많은 음식, 숙박, 서비스 부문 영세사업장의 고용보험가입 의무화와 최저임금의 현실화, 여성노동자의 자녀들을 위한 보육시설 마련, 빈곤여성에 대한 직업훈련의 확대 등 다양한 정책을 시행하여야 할 것이다. 빈곤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인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2017-06-13 | hrights | 조회: 723 | 추천: 0
최응렬/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 2006년에 한국형사정책연구원에서 수행한 국내 폭력조직범죄에 대한 협동연구과제에 참여하여 「폭력조직의 서식환경에 관한 연구」와 「폭력조직의 하위문화에 관한 연구」라는 과제를 수행한 바 있다. 연구결과가 지난 1월 29일 언론에 보도되면서 방송사로부터 인터뷰 요청에 시달려야 했다. 언론에 비친 조직폭력에 관한 기사를 읽고 나서 연구에 직접 참여했던 한 사람으로서 청소년들에게 오해의 소지를 줄 수 있는 표현이 있어 안타까웠다. 예를 들면, 폭력조직원의 직무만족도는 ‘보통’이 67.0%로 가장 많고, ‘만족’이 12.3%, ‘불만족’이 20.7%이었다. 그런데 경찰공무원 1천86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04년의 또 다른 연구에서 경찰의 직무만족도가 ‘보통’ 55.9%, ‘만족’ 9.5%, ‘불만족’ 34.7% 등으로 나타난 점과 비교되는 것으로, 경찰의 직무만족도가 오히려 폭력조직의 조직원보다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고 보도하고 있다. 이 보도를 접하는 청소년들은 경찰의 직무만족도가 낮으니 직무만족도를 높여주기 위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조직폭력도 할만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어떻게 경찰관의 숭고한 국가공권력 집행행위와 폭력조직의 불법행위를 동일선상에서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 설사 언론에서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의 보고서를 인용해서 보고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부분은 여과하여 신중하게 보도하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폭력조직의 세계를 미화하는 사회분위기 조직폭력에 대해서는 형사사법실무가나 학자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많은 관심과 흥미를 갖고 있다. 조직폭력배들의 활동에 대한 내용이 소설이나 영화로 소개되고 다루어질 때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모래시계’, ‘조폭마누라’, ‘친구’ 등 폭력조직의 세계를 소재로 해서 제작된 드라마나 영화가 많은 인기를 얻으면서 청소년들은 조직폭력에 대한 환상을 갖거나 그들의 세계를 동경하는 사회분위기마저 조성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폭력조직은 주로 불법적인 활동을 통하여 끊임없이 이익을 추구하며 심각한 사회문제를 유발하고 국가의 안정을 위협하는 암적 존재라는 점이다. 폭력조직은 시민들의 일상생활에 심각한 위협을 초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를 뿌리뽑기 위해 경찰과 검찰에서 지속적으로 단속해오고 있다. 그러나 폭력조직은 근절되지 않고 활동범위가 국내에서 이제는 국경을 초월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으며, 국민의 정부이래 공권력의 실추로 인하여 조직폭력서비스에 대한 수요 또한 미국 등에 비해 매우 높다. 실제로 연구 보고서를 보면 설문지 응답자의 10.7%는 “법에 의지할 여건이 안 되면 조직폭력을 이용하겠다”고 응답했다. 그리고 응답자의 12.2%는 “누가 조직폭력을 앞세워 공격한다면 나도 조직폭력을 동원하겠다고”고 답변해 조직폭력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만만치 않음을 보여줬다. 이처럼 지속적인 단속에도 불구하고 조직폭력이 근절되지 않는 이유로는 폭력조직은 엄격한 위계질서와 규율, 혈육을 능가하는 결속과 연대감, 정보 누설시 철저한 보복 등으로 인해 적발이 쉽지 않고, 조직폭력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여전하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우리 사회에서 조직폭력을 근절시키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조치와 더불어 언론의 협조가 기대된다.   혈육을 능가하는 결속과 연대감으로 운영되는 폭력조직 형사사법당국에서는 폭력조직의 실체를 파악해서 조직의 중추에서 조직을 유지·운영하고 있는 두목이나 간부들을 지속적으로 검거하여 장기간 사회로부터 격리시킬 필요가 있다. 그리고 폭력조직을 존속시키는 것은 분쟁해결에 필요한 비용, 폭력조직간의 대립항쟁시의 비용, 변호사비용 등 조직운영자금이므로 이들 자금원을 고갈시키기 위한 다각적인 대책이 수립되어 지속적으로 시행되어야 한다. 아울러 폭력조직의 서식환경이라고 할 수 있는 유흥향락업소와 사행성오락장에 대한 정비와 폭력조직의 인적 자원이라 할 수 있는 중·고교 학생들의 폭력서클을 찾아내 조기에 와해시키는 것이 보다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폭력조직의 피해자인 피해자, 참고인 또는 증인에 대한 철저한 신변안전조치를 통하여 보복의 두려움 없이 조직폭력의 수사에 협조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또한 폭력조직의 사회적 기반을 붕괴시켜 사회적으로 고립시키는 데 언론이 나서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언론은 입법·사법·행정에 이어 제4부로 불릴 정도로 그 영향력이 지대하다. 언론의 보도 태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청소년들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조직폭력에 대한 신중한 보도태도는 조직폭력을 근절시키는 데 있어서 크게 기여하리라고 생각한다. 흔히, 언론은 사회를 정화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조직폭력의 보도와 관련해서는 언론이 사회정화, 즉 조직폭력의 근절과 관련된 보도태도보다는 폭력조직의 진출 분야, 조직원의 월평균 수입, 폭력조직원의 직무만족도와 같은 흥미 위주의 보도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예를 들면, 조직원의 월평균 수입이 400만원이라는 보도는 ‘이태백’(20대 태반이 백수)이라는 극심한 취업난에 허덕이는 많은 청소년들을 조직폭력세계로 유인하지 않을까 염려된다. 앞으로는 언론에서도 조직폭력배들은 의리를 중시한다거나 남자답다고 조직폭력을 미화하거나 왜곡 보도하기보다는 조직폭력의 해악을 상세히 보도하여 청소년 불량서클 가입자를 비롯한 예비범죄자들에게 경종을 울릴 수 있도록 해 주었으면 한다.
2017-06-13 | hrights | 조회: 553 | 추천: 0
이광조/ CBS PD ‘바보 노무현’은 어디로 갔나? - ‘바보’를 잃어버린 한미 FTA 추진 96년인가, 97년인가의 어느 날이었던 것 같다. 지역주의의 아성에 정면으로 맞서 92년 총선과 95년 부산시장 선거에서 거푸 낙선의 아픔을 맛봤던 야당 정치인 노무현이 목동 CBS 스튜디오에 출연했다. 청문회 스타로, 원칙을 지키는 정치인으로 방송 출연이 한 두 번은 아니었지만 그 날의 장면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는 건 뒤풀이 자리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목동은 ‘버블 세븐’ 운운하는 요즘과는 달리 오목교역을 중심으로 서울 변두리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을 때였다. 오목교 역 주변에 있는 허름한 실내포장마차에서 노무현 변호사와 권양숙 여사, 그리고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 제작팀이 ‘쭈꾸미’를 안주 삼아 조촐한 술자리를 가졌다. ‘바보 노무현’은 아름다웠다 술자리의 화제는 물론 돈키호테 같은 정치인 노무현의 행보였다. 패배가 뻔히 예상되는 상황에서도 지역주의에 정면으로 도전한 정치인 노무현의 용기와 일관된 원칙에 대해 우리는 마음에서 우러난 존경과 격려를 전했고 그의 성공을 진심으로 기원했다.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4.19 세대, 6.3 세대, 긴조 세대, 전대협 세대…. 우리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현실정치의 틀 속에 너무도 쉽게 길들여져 가는 걸 봐왔기에 당시 정치인 노무현이 보여준 행동에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이 묻어 있었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허름한 잠바차림의 아저씨들이 만 원짜리 몇 장을 가지고 와 노무현씨에게 건 낸 것도 그런 감동 때문이었을 것이다. 노사모를 만든 힘이나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에게 쏟아진 수많은 돼지 저금통도 정치인 노무현에 대한 이런 감동과 격려의 결과물이었을 것이다. 수많은 정치엘리트들이 권력의 꿈을 좇아 현실에 타협할 때 정치인 노무현은 정당의 보스나 정치권의 관행을 좇는 대신 정도를 택했고 그의 이런 ‘바보’같은 행보가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던 한편의 정치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그런 점에서 눈앞의 정치적 이해를 좇기보다 국민들의 마음속에 있는 정의에 대한 갈구를 좇았던 정치인 노무현의 선택은 탁월했고 2002년 대선에서 그에게 승리를 안겨다준 대한민국 국민의 선택은 역사에 남을만한 위대한 사건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그 위대한 선택으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의 상황은 어떤가? 아직 임기가 끝나지도 않은 노무현 정부의 공과를 논한다는 것이 나 같은 평범한 인간에게는 너무 어려운 일이기도 하지만 합리적인 비판의 수준을 뛰어넘는 정치적 공세에 시달려온 노무현 정부를 비난하는 일에 일조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88년 정계에 입문한 뒤 2002년 대선에서 승리를 이루기까지 대한민국 국민의 마음을 움직였던 정치인 노무현의 미덕과 장점이 갈수록 희미해지고 있는 건 아닌지, 아쉬운 마음에 이 글을 쓰고 있다. ‘바보’는 가고 노무현만 남았다 정치인 노무현의 미덕과 장점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서민적인 풍모와 언행, 뛰어난 언변, 원칙을 지키는 일관성…. 하지만 대통령 스스로 인정하듯이 우리사회의 비주류인 정치인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든 가장 큰 힘은 ‘바보 노무현’이라는 애칭 속에 다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집안 좋고 학벌 좋고 언변까지 좋은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지만 국민들이 노무현을 선택한 건 ‘바보’라는 애칭 속에 담겨 있는 ‘진정성’을 높게 평가한 것일 게다. 정치인이 제 아무리 잘난 들, 선거 때마다 ‘국민의 종복이니 뭐니’ 떠벌린 들, 유권자들은 입에 발린 말에 속지 않을뿐더러 그런 잘난 인간 하나 없다고 나라가 안돌아가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말로만 국민의 뜻 운운하는 정치인들이 아니라 당장은 손해를 보더라도 지역주의에 맞서고 낡은 정치에 맞서겠다는 의지를 실천으로 보여준 정치인 노무현을 선택했던 것이다. 국민들이 노무현 대통령이 말 잘하고 똑똑하다는 걸 모르겠는가. 결국 ‘바보 노무현’이라는 애칭 속에는 정치적 득실보다는 민심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따를 줄 아는 민주적인 정치인, 목표 못지않게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겸손한 정치인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2002년 10월 15일 노무현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기자회견 모습. 사진출처 - 오마이뉴스     한데 이런 노무현의 미덕이 어디로 갔는지를 종잡을 수 없게 만드는 일이 요즘 한창 진행되고 있다. 참여정부의 실정에 대한 논란은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내게 ‘바보 노무현’의 미덕을 의심하게 만드는 가장 큰 사건은 한미 FTA의 추진이다. 한미 FTA가 대한민국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논외로 하자. 신자유주의 정책이니 진보․보수 논쟁도 제쳐놓자. 국민여론이 한미 FTA 체결에 부정적이라는 사실도 일단은 접어두자. 세상에 절대악과 절대선이 없듯이 한미 FTA도 장점이 있을 것이고 국가를 운영하는데 있어 족보가 서로 다른 정책을 사용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국민의 여론도 변할 수 있다. 하지만 한미 FTA의 손익계산을 둘러싼 조작 논란이 왜 이렇게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넘어가며, 4대 선결조건 같은 건 없다는 거짓말이 그렇게 쉽게 용서가 되는지, 토론을 그렇게 좋아하는 참여정부 아래서 한미 FTA 협상단과 협상지원단은 왜 그렇게 토론에 소극적인지, 정부의 주장에는 엄청난 홍보비를 쏟아 부으면서도 주머니 사정이 뻔한 서민들이 한푼 두푼 모아서 만든 의견광고는 왜 못 내게 하는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다. 뿐인가. 한미 FTA에 대한 반대를 구한말의 쇄국주의쯤으로 매도하는 데 이르러서는 분노가 치밀기도 한다. 한미 FTA에 반대하는 사람들 중에는 세계화 자체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는 갈수록 개방이 확산되는 현실에 적응하며 살고 있으며, 한미 FTA에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의 주장은 ‘FTA 결사반대’가 아니라 ‘어떤 FTA인가’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바보 노무현’의 미덕이 그립다 외환위기 10년을 맞는 2007년. 10년 전에 오늘과 같은 상황을 예상한 사람이 몇이나 있었겠는가. 물론 2017년쯤 되돌아볼 때 노무현 대통령의 주장이 옳았다는 평가가 나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월급쟁이의 절반 이상을 비정규직으로 만들어버린 외환위기 정도의 변화라면 아무리 좋은 변화라도 당사자들의 이해와 동의를 얻어야 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한미 FTA는 외환위기보다 더 큰 변화를 초래할 거라는데, 외환위기야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린 거지만 한미 FTA야 우리가 선택하기 나름인데, 국민들이 조금 덜 벌어도 조심스럽게 가자면 그 선택은 존중해야하지 않겠는가. 언제 없어질지도 모르는 정당들이 모여 있는 국회에, 그래서 나중에 누구도 책임지지 못할 국회에 국민의 생활과 미래가 걸린 일을 떠넘기는 일은 없길 바란다. ‘바보 노무현’은 어디로 갔을까.
2017-06-09 | hrights | 조회: 630 | 추천: 0
송기춘/ 전북대 법학과 헌법학 교수 서열에 충실한, 너무나 서열에 충실한 사법부 -과연 법원은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는가   연수원 몇 기? 법원의 인사이동 때면 언제나 연수원 몇 기가 승진했다느니, 정기인사를 앞두고 어느 판사가 사임했다느니, 어떤 판결을 내린 판사가 어디로 전보되었다느니 하는 식의 보도를 접한다. 얼마 전 있은 법원의 인사에서는 연수원 15기가 차관급인 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승진했다 한다. 후배기수가 선배를 앞지르기라도 하면 그것 자체가 뉴스거리가 된다. 법조인을 소개할 때면 어느 신문 할 것 없이 연수원 몇 기 또는 고시 몇 회가 따라붙는다. 기수에 따라 움직이는 조직, 서열에 따라 움직이고 뒤지면 후배를 위해 용퇴하는 곳이 이 나라의 사법부다.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는 이 풍경은 참으로 평화롭다. 적어도 그 조직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 풍경은 국민들에게 무엇일까?   법관인사의 법칙(?) 법관의 인사에는 몇 가지 법칙(?)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철저하게 서열을 매우 중시한다는 점이다. 물론 사법연수원 기수가 제일 중시된다. 같은 연수원 동기라 해도 사법시험과 연수원 성적에 의해 결정된 등수는 법원에 근무하는 동안 인사에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고 한다. 서울중앙지법을 필두로 등수에 따라 배치된다. 최근에는 여성 합격자의 성적이 좋아 법관 배치 방법이 일부 변하고 있다 한다. 대법원의 대법관 임명과정에서도 서열이 중시되는 점은 전혀 다르지 않다. 지금까지 대법원장은 대법관을 자신보다 몇 기수 아래의, 법원에 근무하는 판사 또는 법원근무경력을 가진 변호사 가운데서 제청해 오고 있다. 둘째, 승진이라는 개념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다. 법원이 최고법원인 대법원과 각급법원으로 조직되어 있긴 하지만, 어느 법원이나 재판에서는 독립되어 있다. 심급이 있을 뿐 어느 법원이 어느 법원의 상위 또는 하위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법관은 대법원장, 대법관, 고등법원장, 지방법원장, 고등법원 부장판사 등등으로 서열화되어 승진이라는 관념이 여전히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법관의 서열화는 법원의 서열화를 가져와 국민은 대법원의 최종적인 판단에 의해 비로소 설득된다. 재판을 받을 권리의 내용으로 대법원의 재판을 받을 권리를 언급하는 입장에서 이러한 서열화된 법원구조를 염두에 두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대법원장이 대법관임명제청권을 실질적으로 또한 결정적으로 행사하면 대법관도 ‘승진’ 임명되는 것이고, 대법원장이 지명한 헌법재판관후보자에 대한 국회의 청문절차가 의례적인 것이 되면 헌법재판관도 대법원장이 ‘승진’ 임명하는 꼴이 된다. 셋째, 승진에서 동기 또는 후배에게 ‘밀린’ 법관은 대부분 사표를 내고 변호사 개업을 한다는 것이다. 판사급여가 변호사 개업을 하는 것보다 ‘박봉’임이 분명하니 사임은 또 다른 기회가 되겠지만, 승진되었더라면 사표를 쓰지 않았을 법관들에게는 서열에 충실한 법원을 위한 희생이라 할 법하다. 넷째, 법원내의 엘리트코스로 법원행정처를 거친다는 점이다. 전도양양한 법관 상당수가 법원행정처에 발령받아 재판보다는 법원행정을 담당한다. 오랜 기간 동안 법원행정처에서 근무하다가 대법관이 된 분 가운데는 재판으로부터 너무 오래 떠나 있다보니 재판에 부담을 느끼게 되는 경우도 있다 한다. 1970년대 이래 임명된 대법관의 약 40%가 법원행정처의 고위직을 맡은 적이 있고, 법원행정처 차장(최근까지만 해도 법원행정처장은 대법관이 겸직하였다)의 경우 대법관으로 승진한 경우는 70%를 넘고, 한 명의 예외도 없이 헌법재판관, 고등법원장 등 상급의 직위로 승진한 것으로 나타난다.   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법정.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다섯째, 법원행정에 종사하는 법관이 더 우대된다는 점이다. 법원행정처에서 근무한 법관들이 우대되는 것은 물론, 대법관으로 ‘승진’ 임명된 법관의 대부분은 법원행정에 종사하던 법관들이다. 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재판을 담당하다가 대법관에 임명된 경우는 극소수(김영란 대법관, 윤일영 대법관, 안병수 대법원판사 등)이고 대부분은 법원장 등 행정에 종사하던 법관들이다. 사법부가 대법원과 법원행정처를 중심으로 통합되고 통제되는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섯째, 법원 내의 (인사)문제에 대한 비판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다. 얼마 전 책을 출판한 어느 변호사는 20년이 다 된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인사유감」이란 글을 썼다가 서울민사지방법원 발령 하루 만에 다시 울산지원으로 좌천당하는 일도 있었다. 당시 괘씸죄에 걸려 좌천당했다는 얘긴 들었지만, 본인이 증언하는 내용은 더 충격적이다. 책에 실려 있다는 내용을 빌자면, 당시 대법원장이 “나는 이 나라에서 나보다 높은 사람은 대통령밖에 없는 사람이다, 새까맣게 아래에 있는 젊은 판사가 나를 모욕에 가깝게 비판하는 것을 가만둘 수 없었다. 그런데 실제로 보니 순하게 생겼구먼. 서 판사가 비판한 인사는 다 이유가 있었다.……서 판사도 자숙하면 선처할 수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한다.「법관조직의 과도한 관료화, 계급화는 사법부 만악의 근본」이라는 글을 썼다가 재임용에서 탈락하고 지금은 어느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분도 비슷한 경우이다. ‘대통령 다음으로 높은’ 대법원장의 인사에 대해 감히 유감이라니 불경죄에 해당할 법하다. 아하, 대법원장이 그런 자리였던가? 며칠 전에는 2월 법원인사에 대해 현직 판사가 비판하는 글이 법원내부통신망에 올라 보도되기도 한 걸 보면 예전만큼은 아니라 생각되지만, 대법원장의 여전한 인사권 앞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서열에 충실한 법원 이런 인사법칙에 나타나는 공통점은 아무래도 서열에 충실하다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법원에 근무하는 분들에게는 그 모습이 자연스럽게 여겨질지 모르겠다. 그러나 밖에서 보면 참으로 이상하기 그지없는 것이 법원의 조직이고 인사이다. 냄새나는 방안에 오래 있는 사람은 그 냄새를 맡지 못하지만 방에 새로 들어온 사람은 그 냄새를 쉽게 맡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대법원장이 판결의 잘못에 대해 말을 해도 무반응인 까닭은? 이용훈 대법원장이 취임하면서 과거 사법부의 인권옹호노력이 부족했던 데 대한 반성과 사과를 하였고, 이에 대해 많은 국민들이 그 용기를 칭송하였다. 사법부의 수장이 그런 발언을 한 것은 참으로 시대가 변하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게 한 사건이라 할 법하다. 그러나 과연 그게 그렇게 긍정적으로만 바라봐야 할 일일까? 누군지를 특정하지도 않은 채 과거 정권의 압력에 저항하지 못하고 국민의 기본권보장에 충실하지 못한 때가 있었고 그런 잘못된 판결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런 판결이 한 두건도 아니고 천여 건이 넘는다고 한다면 그런 발언에 대해 법원의 법관들은 또는 과거에 법관이었던 사람들은 그저 대법원장님의 말씀이라고 경청만 하고 있어야 옳은 것일까? 그런 혐의를 받는 판결을 한 판사는 자존심도 없나? 헌법적으로 독립이 보장되는, 아니 요구되는 법원의 판결에 대해 재심을 거치지 않고 대법원장이라는 자격으로 판결이 잘못되었다고 말한다면 이는 법원의 독립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발언임이 분명하지 않은가? 결론이야 옳다지만 이런 발언의 맥락은 결코 적절하지 않을 뿐 아니라 헌법에 반할 위험도 있는데 말이다. 필자는 이런 무반응이 이러한 법원의 서열화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용훈 대법원장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서열화의 원인 이러한 서열화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다양한 분석이 가능하겠지만, 필자는 대법관의 임명방식, 대법원장의 인사권과 법관양성제도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법원장의 대법관 임명제청권 첫째, 대법원의 구성방식의 문제이다. 우리 대법원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특이한 방식을 취하고 있다. 대법원은 현재 13인의 대법관으로 구성되는 최고법원이다. 대법원장은 대통령이 국회의 동의를 받아 임명하고, 대법관은 대법원장이 제청하면 대통령이 국회의 동의를 받아 임명한다. 대법원장 임명에 국회와 대통령이 관여하는 것은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국민주권주의원리의 실현이라 할 수 있다.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것은 아니지만 국민의 대표기관의 관여를 통하여 대표성을 얻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대법관의 임명에 대통령과 국회가 관여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대법원장이 왜 대법관의 임명제청권을 갖느냐는 것이다. 대법원장이 사법부의 수장으로서 능력 있는 법률가를 잘 알 수 있기 때문에 정치적 입김보다는 법원의 전문성을 확보하는 데 장점이 있기 때문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왜 이러한 제도를 취하는 예가 없는가? 그것은 대법원이 합의부 법원이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합의제 기관은 구성원 사이의 대등성과 독립성을 그 본질로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법관들이 소망하는 대법관을 임명하는 과정에서 제청권을 가지는 대법원장에 대해 대법관이 얼마나 대등하며 독립될 수 있을까? 오랜 법조경력을 가진 분들이 대법원장에 대해 종속적이라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이런 임명과정을 거친 경우 적어도 대등하거나 독립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느 법관은 대법원장과 그의 제청을 받아 임명된 대법관의 관계를 합의부의 부장판사와 배석판사의 관계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대법원장의 대법관 임명제청권이 악법 중의 악법으로 지목되는 1972년 유신헌법에서 처음 채택된 제도라고 하면 좀 더 설득력이 있을까? 현재 대법원이 13인으로 구성되는 합의부인 최고법원이라는 점은 대법원장의 임명제청권과 어울리지 않는다.   대법원장의 인사권 둘째, 대법원장의 인사권이다. 대법원장은 결코 대등하지 않은 대법원을 구성하고, 대법관전원으로 구성되는 대법관회의의 의결을 거쳐 법관에 대한 인사를 한다. 대법원이 앞에서 말한 방식으로 구성된다면 대법관회의에서 대법원장의 영향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철저하게 행정조직으로 관료화된 법원은 이러한 인사권에 의해 조직된다. 자문위원회를 두고 있지만 활동은 미미하다. 대법원장의 강력한 인사권은 서열화를 촉진하고 강화한다. 대법원장의 사법행정을 보좌하는 법원행정처에 우수한 법관들이 임명되고 인사에서 우대됨으로써 법원의 관료화도 강화된다.     법관양성과정과 연수원 셋째, 법관의 양성과정의 문제이다. 사법연수원 과정을 통해 변호사가 양성되고, 이 중 예비판사가 임명되고 배석판사를 거쳐 법관이 양성된다. 합의부의 배석판사는 합의부 부장판사에 의해 법관으로 훈련되고 양성된다. 업무상의 지도와 함께 인간적 관계도 돈독해진다고 한다. 합의부는 배석판사 2인 중 한 명이 주심을 맡고 부장판사와의 ‘합의’를 통해 합의부의 의견이 나온다. 합의부라지만 판사는 둘뿐인 셈이다. 사법연수원 과정에서도 이러한 법원의 분위기를 반영해서인지 서열에 매우 충실하다. 전부는 아니겠지만, 간혹 접하는 연수원 선후배들의 모임을 보면 군대보다 엄격하게 돌아가는 모습을 본다. 연수원 교수와 연수생들의 관계는 고려시대 과거제에서 지공거와 과거급제자의 좌주와 문생의 관계라 할 모습이 나타난다. 스승을 공경하는 아름다운 모습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리 좋게만 보이지 않는 것은 필자의 시각이 삐딱해서일까? 법원의 판사가 판사로만 일로매진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때가 되면 변호사로 개업하려 하고 연수생들도 법원에 가거나 변호사로 개업하거나 선배법관들과 가까워져야 하는 처지에서 서로가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 단지 법률가로서의 공부와 관련해서만 아니라 현실적인 필요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잘라 말할 수 있겠는가?   서열화, 획일주의가 국민에게 미치는 영향은? 결국 대법관임명, 법관양성과정, 사법연수원 과정 등 여러 장치를 통하여 법원은 대법원장을 필두로 지방법원합의부 좌배석판사까지 철저하게 서열화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서열화를 깨는 것은 각 법원이 독립성을 확보함으로써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보장하는 재판을 하는 길이라 생각한다. 개개의 판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겠지만 이러한 서열화, 관료화된 법원의 상하위계질서 속에서의 획일주의적 압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법원의 서열문화는 법관의 사고와 행동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민사재판에서는 억울한 피해자가 나오고 형사재판에서도 적절한 제재를 하지 못함으로써 정의를 실현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는 없겠는가?     서울 서초동에 위치한 대법원 본관.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대법원의 구성방식 개선이 필요하다 법원의 서열화를 깨려면 대법원의 구성방식을 바꿔야 한다. 대법원장과 대법관의 임명방식을 같게 해야 한다. 대법원장이 제청권을 가지는 방식은 그야말로 대통령 다음의 권력을 대법원장에게 주는 위험한 구상이다. 이제 그만 갈아 치울 제도이다. 대법원장과 대법관을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제도도 생각해봄 직하다. 선거에 따른 부작용도 있으므로 그게 어렵다면 대법원장과 대법관 모두 국회의 동의와 대통령의 임명이라는 방식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대법원장이나 대법관은 법원만의 대표가 아니므로 법원의 판사 또는 법원의 판사와 직원이 선출하는 방식은 국민주권주의에 반한다고 생각한다. 법률가들만이 참가하여 선출하는 방식도 안된다. 국민으로부터의 대표성을 확보해야 한다.   법조인의 수를 늘려라 법조인의 양성과정도 문제이다. 근본적으로 법조인이 1만여 명에 불과한 현실에서 변호사 개업이 고소득을 보장해준다면 법원의 판사가 나중에 변호사개업을 하지 말라는 것은 요구하기 어려울 것이다. 법관들이 대법관이 되려 하고 헌법재판소 재판관보다 대법관을 선호하는 이유가 그 명예보다는 현실적인 것에 있을지 모른다는 것은 필자만의 어리석은 추측일까? 단 한 군데뿐인 법률가 양성기관을 통하여 일원화된 제도는 이러한 서열화된 시스템을 유지시키는 기능을 한다. 법원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법조인의 수가 획기적으로 증가되어야 할 것이다. 이 점은 사법개혁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러나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적어도 법률가 양성기관이 한 곳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독립성을 가지는 여러 기관을 통해 법률가가 양성되어야 한다. 사법시험제도를 유지하든 법학전문대학원제도를 도입하든 법률가의 수는 획기적으로 증가되어야 하며 법률가 양성기관은 다원화되지 않으면 안된다.   서열화를 불식하는 것은 국민의 신뢰를 받는 길 법원의 서열문화를 혁파하는 것은 법원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확보하는 길이다. 개헌논의가 활발한 요즘, 굳이 개헌을 하자면 국민에게 절실한 문제부터 접근해야 한다. 모든 논의의 시작과 끝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의 신장이어야 한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733 | 추천: 1
홍미정/ 한국외대 연구교수 2월 8일 아침 필자는 동예루살렘 소재 ‘수파트 난민 캠프’를 방문했다. 이 캠프는 예루살렘 구도시 버스 정류장에서 출발하는 7번 버스로 10분 정도 거리이며, 한 군데의 이스라엘 검문소를 지나서 이 버스 종점에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10 여명 쯤 되는 10대 소년들이 갑자기 나를 둘러쌌다. 그 중 덩치 큰 아이가 나에게 “너 어디서 왔냐?”고 물으면서 ‘태권도’ 하는 폼으로 내 얼굴 가까이에 발길질을 했다. 순간 나는 겁에 질렸다. 버스에서 함께 내린 아주머니와 아저씨들이 이 소년들에게 호통을 쳤고, 아이들은 흩어졌다. 조금 지나자 이 난민 캠프에서 일하는 ‘아말’이 마중 나왔고, 나는 그와 함께 난민 캠프로 들어갔다.   성급했던 나의 첫인상 필자가 난민 캠프 운동장에서 서성거리는데, 갑자기 축구공이 날아와 얼굴에 맞았다. 눈물이 왈칵 나왔다. 이곳의 어린이들은 정말 다른 팔레스타인 지역의 어린이들과 달리 무척 예의 없고 거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유모차의 아기를 돌보고 있는 어린이가 다가왔다. 조금 전에 나에게 축구공을 날린 그 아이다. 내가 “네 동생이냐고 묻자.” “아니다. 이 아기는 부모도 형제도 없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 캠프의 어린이들은 대부분 부모가 없는 고아들이거나, 부모가 있다하더라도 이스라엘 감옥에 있거나, 생활능력이 전혀 없는 마약 중독자이거나 매춘부들이다.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 내에서 문제를 일으킨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이 캠프로 몰아넣는다. 어린이들은 거리에서 어른들 사이에서 오가는 마약 중개를 하기도 하고, 일부 어린이들도 마약을 하지만 이를 제지하는 사람들이 없다. 잠시 후 필자는 아이들에게 팔레스타인 전통 과자를 나누어주려고 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선뜻 받지를 않고 뒷걸음질을 했다. 무안해서 아말에게 왜 그러냐고 물으니 아이들이 너무 수줍어해서 그렇단다. 버스 정류장에서 나에게 발길질 한 것도 내가 한국이나 중국에서 온 것으로 생각하고 친근함을 표시하기 위해서 ‘태권도’나 ‘쿵후’ 등을 선보인 것이라고 했다. 한 아이가 수줍은 표정으로 나에게 두 개의 초콜릿을 내밀었다. 나는 사양하다가 도리가 아니다 싶어 받아들었다. 순간 이 지역 아이들이 매우 예의 없고 거칠다고 생각했던 것에 대한 미안함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필자인 홍미정 교수와 난민 캠프에서 생활하는 소년 사진 출처 - 홍미정 교수 육지에 떠 있는 섬, 혹은 거대한 감옥 이 캠프에는 1만 8천 명 정도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들 중 절반의 주민은 예루살렘 영주권(하늘색 시민증)을, 나머지 절반 주민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시민권(초록색 시민증)을 소유하고 있다. 1990년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협상의 결과물인 오슬로 협정은 이 지역을 이스라엘이 통제하는 대 예루살렘 영역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가난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밀집한 이 난민 캠프를 분리장벽으로 둘러싸서 다른 동예루살렘 영역으로부터 고립시켰다. 현재 이 지역은 행정적으로는 동예루살렘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분리 장벽이 만들어낸 고립된 섬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정부도 팔레스타인 정부도 이 지역 주민들을 경제적으로 행정적으로 관리하거나 지원하지 않는다. 이 난민 캠프에는 유엔이 지원하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와 의료 지원 센터가 각각 하나씩 있을 뿐이다. 이 의료 지원센터도 오전 8시부터 오후 2시까지만 진료를 한다. 이스라엘 정부도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도 난민 캠프 주민들의 교육과 복지 등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스라엘은 수파트 난민 캠프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대 예루살렘 영역이라고 이름붙인 곳에 포함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밀집한 지역 곳곳을 이중 삼중의 분리장벽으로 고립시킴으로써 마을 단위의 거대한 감옥을 만들고 있다. 현재 서안 인근 대 예루살렘 지역은 분리 고립장벽 공사가 곳곳에서 한 창 진행 중이다. 이 분리장벽 건설과정에서 개인 주택들에 대한 출입이 금지되고, 부셔지고, 가족들이 분리장벽을 경계로 이산가족이 되기도 한다.     분리장벽 공사 현장 모습 사진 출처 - 홍미정 교수 생존 위해 일해야 하는 일상의 모순 라말라 인근 불도저 소리가 요란한 분리장벽 공사 현장을 지나다가 “공사장 인부들은 도대체 누구냐?”고 물었다. 자동차를 운전하던 ‘아이샤’는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팔레스타인인들이다.”고 답했다. 자신들의 고향을 부수고 강탈하는 그 일의 최전선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다름 아닌 팔레스타인 사람들이었다. 필자가 묵고 있는 동예루살렘 소재 호텔에 돌아와서 서안에서 거주하면서 이스라엘의 임시 노동 허가권을 얻어 월 50만 원 정도의 임금을 받고 이 호텔에서 일하는 몇몇 직원들과 이스라엘 분리 장벽을 비롯한 일상의 어려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진을 찍고 인터뷰 내용을 노트에 쓰자 이들은 얼굴색이 변하면서 “너 그것 왜 쓰냐?”고 물었다. “이것은 신문에 나갈 내용이다.”라고 답하자, 그들은 겁먹은 표정으로 “이것 신문에 나가면, 동예루살렘 호텔에서 일하기 곤란하다. 서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우리보다는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면서 사진을 지워달라고 요구하고는, 총총히 자리를 떴다. 일반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하루하루 가족의 생계를 유지해야할 일상이 더욱 중요하다.     수파트 난민 캠프 운동장의 놀이터 사진 출처 - 홍미정 교수
2017-06-09 | hrights | 조회: 679 | 추천: 0
유정배/ 참여와 자치를 위한 춘천시민연대 사무국장 꽤 늦은 나이지만 대학원 진학을 할까 고민 중이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시민운동 위기론이 확산되더니만, 바야흐로 활동가의 전문성이 없으면 인정해주기 힘들다는 상황이 찾아온 듯하고, 제도교육이 인정하는 ‘라이센스’가 전문성의 잣대가 되어버린 세태 때문에 머뭇거리다가는 이판에서도 뒤쳐지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이 뒤꼭지를 불안하게 하기도 한다.   노골적으로 내걸린 대학의 신세 한때 현장을 떠나 대학원을 찾아가는 것이 민중에 대한 배신으로 읽혀지는 바람에 진학을 하지 않는 것이 하나의 징표처럼 비쳐지던 시절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운동의 전문성이 필요하다면, 그래서 지속적으로 사회운동에 기여 할 수 있고 보다 충실한 삶이 가능하다면 나이 따질 것 없이 그 이상 노력이라도 못 할 것이 없다. 다만 시류에 연연하려 가방끈 길게 하려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못내 의심스러워 줄 곳 마음을 결정하지 못하다 학교를 찾아갔다. “도서관이 경쟁력이다!” 중앙도서관 꼭대기를 가득 채운 글귀가 어떤 계시처럼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     사진 출처 - 강원대학교 도서관 홈페이지 사실, 나는 학교 다닐 때부터 도서관과 담을 쌓은지라 도서관이 경쟁력인지 아닌지 잘 모른다. 오히려 내가 다녔던 학교 중앙도서관은 교문 바로 옆에 있어 허구헌날 최루탄에 몸살을 앓았고 나도 적잖이 기여를 한 사실이 있어 늘 미안 할 따름이다. 그래서 지금도 그 앞을 지날 때면 괜히 주눅 들기도 한다. 정녕 나는 요즘 이십 여 년 전, 사회는 넓고 풍부하며 내 진로 또한 참으로 다양해서 도서관에서 불을 밝히는 것도 당연하다는 점을 인정하기보다 군사정권의 반대편에서만 도서관 계단과 광장을 이해하려했던 짧은 시야를 회한으로 바라보려했다. 어쩌면 한때 나는 ‘시장’ ‘경쟁력’ ‘효율성’ 등과 같은 용어들에 대해 깊이 이해하지 못하면서 편협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는지 모른다. 더구나 이미 세상은 삶을 꾸려가는 데 경쟁력이 매우 중요하다는 교훈이 평범하게 다가올 만큼 한참이나 바뀌어 있지 않은가. 나는 연구와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대학이 비판적 지식인을 양성하는 것 못지않게 사회가 지탱 할 수 있는 훈련받은 인재를 배출하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시장효율성을 다른 가치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시대 추세에 부응하는 것이고, 지방대학이라는 불리한 조건과 사회적 멍에를 외면하고 한가롭게 “도서관은 상아탑이다”라고 여유를 부리는 것이 사치 아니냐는 절박한 주장을 반대할 만큼 물정 모르지는 않다. 무엇보다 사회가 시장중심으로 급격히 재편되고 정부가 교육을 ‘산업’으로 바라보며 경쟁으로 내몰고 있는데 일개 지방 국립대가 어쩌지 못한다는 것쯤은 이미 눈치 채고 있다. 그렇지만 오래전에 땅에 떨어진 대학의 신세를 꼭 그렇게 구호로 내걸어 확인해야만 하는지는 궁금하다. 또한 성인이 된 학생들을 경쟁력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학교가 정한 규범의 틀 안에 가두어 놓고 통제하면 ‘경쟁력’이 높아질까 하는 의심도 든다. 사회와 국가가 대학에게 기업형 인간만을 뽑아내기를 원하는 것이 또 다른 획일주의는 아닌가 하는 생각과 함께 우리는 경쟁력을 이렇게 밖에 이해를 못할까 하는 회의가 자꾸 고개를 치민다.   대학까지 ‘획일주의’ 조장해서야     사회와 국가가 대학에게 기업형 인간만을 뽑아내기를 원하는 것이 또 다른 획일주의이다. 사진 출처 - 프레시안 내가 과문한 탓에 ‘글로벌 스탠다드’의 원조인 미국의 유명한 대학들이 도서관에 펼침막을 걸어두고 오로지 기업형 인간을 찍어내는 일에만 몰두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회의 다양한 가치를 접하게 하고 타자에 대한 연대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교육하는 것이 경쟁력의 다른 측면을 키우는 것 이라는 점만은 시민의 상식으로도 쉽게 이해가 된다. 내 배움의 짧음이 의심을 억누르려 하지만 반 시장적인 선입견과 유전자가 몸속 깊이 뿌리박혔는지 세상 돌아가는 사정과는 동떨어진, 구닥다리 양심의 소리가 자꾸 나를 괴롭힌다. 아주 오래전 도서관에서 밧줄에 의존해 시위를 하며 외쳐대던 절규가 낯익은 양심의 울림이 되어 그 때처럼 다시 내 영혼을 흔들어 깨우고 있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523 | 추천: 1
이유정/ 변호사, 법무법인 자하연 독재권력에 눈 감고 귀 막은 사법부, 뼈저리게 반성해야 - 잘못된 판결 바로잡은 독일의 교훈 진실화해위원회에서 긴급조치 사건 판결을 공개한다고 해서 30여년 전의 일이 다시 논란이 되고 있다. 당시에 판결을 작성한 판사들의 실명공개 문제도 거론되고 있다. 판결문 공개 자체를 못마땅하게 보는 시각도 있고, 실정법이었던 긴급조치를 적용하여 판결을 한 것만으로 판사를 비판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우려를 표명하는 견해도 있다. 또 역사적인 차원에서 평가하고 사법부 전체가 잘못된 과거를 반성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으며, 일부에서는 사법부 인적 청산을 거론하기도 한다. 판결문은 비밀문서도 아니고 일반인들도 정보공개를 요구하여 열람할 수 있는 내용이므로 판결문을 공개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것이다. 문제는 그 판결을 한 판사들의 이름을 공개하는 것인데, 판사는 헌법과 법률, 그리고 양심에 의해 판결을 하는 독립적인 헌법기관이기 때문에 그 이름을 비밀로 할 이유도 없다고 본다. 판결문을 공개하는 주체가 사법부였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사법부 스스로 과거의 잘못에 대한 공식적인 반성이나 유감표명조차 하지 않은 채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기 때문에, 진실화해위원회가 먼저 판결문 공개를 한다고 하여 못마땅하게 여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사법부 스스로 들추기 어려운 과거의 잘못을 드러내고 잘못을 반성하는 계기로 삼는 것이 바람직하다.   진실ㆍ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31일 오후 긴급조치 위반사건 재판에 관여한 판사 실명이 포함된 `2006년 하반기 조사보고서‘를 언론에 공개할 예정이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판사 실명 공개, 반성의 계기로 삼아야 다만 긴급조치가 실정법으로 존재하고 있었고, 긴급조치에 대한 위헌주장에 대하여 상급심인 대법원이 위헌이 아니라는 판결을 수차례 하였던 상황에서, 판사 개인이 긴급조치위반에 대하여 무죄판결을 하지 않았다는 또는 못하였다는 이유로 비난하고 인적 청산을 주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판사 개인이 정의와 양심에 반하는 실정법의 적용을 거부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는, 법적 안정성과 정의가 충돌할 때 어느 것을 더 우선하여야 하는가라는 법철학자들의 해묵은 논쟁거리와도 관련이 있으며, 어느 쪽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단정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법부의 역사적인 책임마저 덮어주자는 것은 아니다. 긴급조치 제1호는 그 내용 자체만 보더라도 유신헌법을 반대하거나 헌법개정을 주장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고 이를 위반하는 경우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하여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긴급조치 제4호는 민청학련과 관련된 일체의 활동을 금지하고 심지어 학생이 정당한 이유 없이 시험이나 수업거부, 교내집회를 하는 경우에도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할 수 있도록 규정한 내용이다. 이는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영장주의의 원칙, 신체·양심의 자유, 언론·출판. 집회·결사의 자유, 재판을 받을 권리 등 기본권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하는 것으로서, 누가 보더라도 정당하지 못한 조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대법원이 여러 차례 긴급조치가 헌법에 반하지 않는다는 판결을 한 것은, 국민의 인권을 지켜야 할 사법부가 그 소임을 다하기는커녕 독재권력을 정당화하는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잘못에 대하여 역사적인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 사법부는 지금이라도 독재권력의 불법적인 권력행사에 대하여 눈 감고 귀 막은 과거를 뼈아프게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1974년 10월 서울 광화문에서 유신헌법 폐지를 주장하는 한국신학대 학생 50여 명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국보도사진연감 부정의한 법률은 정의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독일의 법철학자인 라드부르흐는 “법률적 불법과 초법률적 법”이라는 논문에서 “법률의 정의에 대한 위반이 참을 수 없는 정도에 이르렀다면 부정의한 법률은 정의에게 그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러한 논리는 나치시대의 실정법을 적용한 판결을 바로잡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일례를 들자면 나치시대에 사법공무원 푸트파르켄이라는 사람이 괴티히라는 상인이 공중화장실에 “히틀러는 학살자이고 전쟁은 그의 책임이다”라는 낙서를 하였다고 신고를 하였다. 괴티히는 이 낙서 이외에 외국방송을 청취했다는 사실이 인정되어 사형판결을 선고 받고 사형에 처해졌다. 2차 대전 이후 튀링엔 주 검찰총장은 푸트파르켄을 기소하면서 “히틀러 시대에 다른 사람을 밀고한 자는 자신이 피고인을 진실발견과 정당한 판결을 법적으로 보장하는 합법적인 소송이 아니라, 완전한 자의에 내맡긴다는 사실을 알아야 했고, 실제로 그러한 사실을 알고 밀고를 했다”고 하면서 “푸트파르켄은 괴티히가 사형에 처해지는 것을 적극적으로 의욕 했다는 사실을 기본적으로 시인했고, 이는 살인의 고의에 해당하며, 법원이 사형을 선고했다면 그는 살인의 간접정범이고, 만약 살인의 책임을 사형을 선고한 법관들에게 돌린다면 그는 살인의 방조범이 된다”는 논고를 하였다. 튀링엔 주의 배심법원은 푸트파르켄에게 살인방조죄의 유죄판결을 선고하였다. 식견이 부족한 탓에 위 판결이 그대로 확정되었는지 아니면 상급심에서 변경이 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전후 나치시대의 실정법을 적용한 수많은 판결에 대해 그 자체가 적법성이 없는 재판이므로 이에 대하여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움직임이 독일의 여러 주에서 있었고, 나치시대의 법률은 “법률적인 불법으로서 무효”라는 논리에 근거한 여러 판결들이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593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