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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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강대중(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윤동호(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이동우(변호사),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장은주(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최응렬/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 2006년에 한국형사정책연구원에서 수행한 국내 폭력조직범죄에 대한 협동연구과제에 참여하여 「폭력조직의 서식환경에 관한 연구」와 「폭력조직의 하위문화에 관한 연구」라는 과제를 수행한 바 있다. 연구결과가 지난 1월 29일 언론에 보도되면서 방송사로부터 인터뷰 요청에 시달려야 했다. 언론에 비친 조직폭력에 관한 기사를 읽고 나서 연구에 직접 참여했던 한 사람으로서 청소년들에게 오해의 소지를 줄 수 있는 표현이 있어 안타까웠다. 예를 들면, 폭력조직원의 직무만족도는 ‘보통’이 67.0%로 가장 많고, ‘만족’이 12.3%, ‘불만족’이 20.7%이었다. 그런데 경찰공무원 1천86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04년의 또 다른 연구에서 경찰의 직무만족도가 ‘보통’ 55.9%, ‘만족’ 9.5%, ‘불만족’ 34.7% 등으로 나타난 점과 비교되는 것으로, 경찰의 직무만족도가 오히려 폭력조직의 조직원보다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고 보도하고 있다. 이 보도를 접하는 청소년들은 경찰의 직무만족도가 낮으니 직무만족도를 높여주기 위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조직폭력도 할만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어떻게 경찰관의 숭고한 국가공권력 집행행위와 폭력조직의 불법행위를 동일선상에서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 설사 언론에서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의 보고서를 인용해서 보고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부분은 여과하여 신중하게 보도하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폭력조직의 세계를 미화하는 사회분위기 조직폭력에 대해서는 형사사법실무가나 학자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많은 관심과 흥미를 갖고 있다. 조직폭력배들의 활동에 대한 내용이 소설이나 영화로 소개되고 다루어질 때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모래시계’, ‘조폭마누라’, ‘친구’ 등 폭력조직의 세계를 소재로 해서 제작된 드라마나 영화가 많은 인기를 얻으면서 청소년들은 조직폭력에 대한 환상을 갖거나 그들의 세계를 동경하는 사회분위기마저 조성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폭력조직은 주로 불법적인 활동을 통하여 끊임없이 이익을 추구하며 심각한 사회문제를 유발하고 국가의 안정을 위협하는 암적 존재라는 점이다. 폭력조직은 시민들의 일상생활에 심각한 위협을 초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를 뿌리뽑기 위해 경찰과 검찰에서 지속적으로 단속해오고 있다. 그러나 폭력조직은 근절되지 않고 활동범위가 국내에서 이제는 국경을 초월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으며, 국민의 정부이래 공권력의 실추로 인하여 조직폭력서비스에 대한 수요 또한 미국 등에 비해 매우 높다. 실제로 연구 보고서를 보면 설문지 응답자의 10.7%는 “법에 의지할 여건이 안 되면 조직폭력을 이용하겠다”고 응답했다. 그리고 응답자의 12.2%는 “누가 조직폭력을 앞세워 공격한다면 나도 조직폭력을 동원하겠다고”고 답변해 조직폭력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만만치 않음을 보여줬다. 이처럼 지속적인 단속에도 불구하고 조직폭력이 근절되지 않는 이유로는 폭력조직은 엄격한 위계질서와 규율, 혈육을 능가하는 결속과 연대감, 정보 누설시 철저한 보복 등으로 인해 적발이 쉽지 않고, 조직폭력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여전하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우리 사회에서 조직폭력을 근절시키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조치와 더불어 언론의 협조가 기대된다.   혈육을 능가하는 결속과 연대감으로 운영되는 폭력조직 형사사법당국에서는 폭력조직의 실체를 파악해서 조직의 중추에서 조직을 유지·운영하고 있는 두목이나 간부들을 지속적으로 검거하여 장기간 사회로부터 격리시킬 필요가 있다. 그리고 폭력조직을 존속시키는 것은 분쟁해결에 필요한 비용, 폭력조직간의 대립항쟁시의 비용, 변호사비용 등 조직운영자금이므로 이들 자금원을 고갈시키기 위한 다각적인 대책이 수립되어 지속적으로 시행되어야 한다. 아울러 폭력조직의 서식환경이라고 할 수 있는 유흥향락업소와 사행성오락장에 대한 정비와 폭력조직의 인적 자원이라 할 수 있는 중·고교 학생들의 폭력서클을 찾아내 조기에 와해시키는 것이 보다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폭력조직의 피해자인 피해자, 참고인 또는 증인에 대한 철저한 신변안전조치를 통하여 보복의 두려움 없이 조직폭력의 수사에 협조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또한 폭력조직의 사회적 기반을 붕괴시켜 사회적으로 고립시키는 데 언론이 나서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언론은 입법·사법·행정에 이어 제4부로 불릴 정도로 그 영향력이 지대하다. 언론의 보도 태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청소년들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조직폭력에 대한 신중한 보도태도는 조직폭력을 근절시키는 데 있어서 크게 기여하리라고 생각한다. 흔히, 언론은 사회를 정화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조직폭력의 보도와 관련해서는 언론이 사회정화, 즉 조직폭력의 근절과 관련된 보도태도보다는 폭력조직의 진출 분야, 조직원의 월평균 수입, 폭력조직원의 직무만족도와 같은 흥미 위주의 보도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예를 들면, 조직원의 월평균 수입이 400만원이라는 보도는 ‘이태백’(20대 태반이 백수)이라는 극심한 취업난에 허덕이는 많은 청소년들을 조직폭력세계로 유인하지 않을까 염려된다. 앞으로는 언론에서도 조직폭력배들은 의리를 중시한다거나 남자답다고 조직폭력을 미화하거나 왜곡 보도하기보다는 조직폭력의 해악을 상세히 보도하여 청소년 불량서클 가입자를 비롯한 예비범죄자들에게 경종을 울릴 수 있도록 해 주었으면 한다.
2017-06-13 | hrights | 조회: 478 | 추천: 0
이광조/ CBS PD ‘바보 노무현’은 어디로 갔나? - ‘바보’를 잃어버린 한미 FTA 추진 96년인가, 97년인가의 어느 날이었던 것 같다. 지역주의의 아성에 정면으로 맞서 92년 총선과 95년 부산시장 선거에서 거푸 낙선의 아픔을 맛봤던 야당 정치인 노무현이 목동 CBS 스튜디오에 출연했다. 청문회 스타로, 원칙을 지키는 정치인으로 방송 출연이 한 두 번은 아니었지만 그 날의 장면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는 건 뒤풀이 자리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목동은 ‘버블 세븐’ 운운하는 요즘과는 달리 오목교역을 중심으로 서울 변두리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을 때였다. 오목교 역 주변에 있는 허름한 실내포장마차에서 노무현 변호사와 권양숙 여사, 그리고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 제작팀이 ‘쭈꾸미’를 안주 삼아 조촐한 술자리를 가졌다. ‘바보 노무현’은 아름다웠다 술자리의 화제는 물론 돈키호테 같은 정치인 노무현의 행보였다. 패배가 뻔히 예상되는 상황에서도 지역주의에 정면으로 도전한 정치인 노무현의 용기와 일관된 원칙에 대해 우리는 마음에서 우러난 존경과 격려를 전했고 그의 성공을 진심으로 기원했다.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4.19 세대, 6.3 세대, 긴조 세대, 전대협 세대…. 우리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현실정치의 틀 속에 너무도 쉽게 길들여져 가는 걸 봐왔기에 당시 정치인 노무현이 보여준 행동에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이 묻어 있었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허름한 잠바차림의 아저씨들이 만 원짜리 몇 장을 가지고 와 노무현씨에게 건 낸 것도 그런 감동 때문이었을 것이다. 노사모를 만든 힘이나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에게 쏟아진 수많은 돼지 저금통도 정치인 노무현에 대한 이런 감동과 격려의 결과물이었을 것이다. 수많은 정치엘리트들이 권력의 꿈을 좇아 현실에 타협할 때 정치인 노무현은 정당의 보스나 정치권의 관행을 좇는 대신 정도를 택했고 그의 이런 ‘바보’같은 행보가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던 한편의 정치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그런 점에서 눈앞의 정치적 이해를 좇기보다 국민들의 마음속에 있는 정의에 대한 갈구를 좇았던 정치인 노무현의 선택은 탁월했고 2002년 대선에서 그에게 승리를 안겨다준 대한민국 국민의 선택은 역사에 남을만한 위대한 사건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그 위대한 선택으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의 상황은 어떤가? 아직 임기가 끝나지도 않은 노무현 정부의 공과를 논한다는 것이 나 같은 평범한 인간에게는 너무 어려운 일이기도 하지만 합리적인 비판의 수준을 뛰어넘는 정치적 공세에 시달려온 노무현 정부를 비난하는 일에 일조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88년 정계에 입문한 뒤 2002년 대선에서 승리를 이루기까지 대한민국 국민의 마음을 움직였던 정치인 노무현의 미덕과 장점이 갈수록 희미해지고 있는 건 아닌지, 아쉬운 마음에 이 글을 쓰고 있다. ‘바보’는 가고 노무현만 남았다 정치인 노무현의 미덕과 장점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서민적인 풍모와 언행, 뛰어난 언변, 원칙을 지키는 일관성…. 하지만 대통령 스스로 인정하듯이 우리사회의 비주류인 정치인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든 가장 큰 힘은 ‘바보 노무현’이라는 애칭 속에 다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집안 좋고 학벌 좋고 언변까지 좋은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지만 국민들이 노무현을 선택한 건 ‘바보’라는 애칭 속에 담겨 있는 ‘진정성’을 높게 평가한 것일 게다. 정치인이 제 아무리 잘난 들, 선거 때마다 ‘국민의 종복이니 뭐니’ 떠벌린 들, 유권자들은 입에 발린 말에 속지 않을뿐더러 그런 잘난 인간 하나 없다고 나라가 안돌아가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말로만 국민의 뜻 운운하는 정치인들이 아니라 당장은 손해를 보더라도 지역주의에 맞서고 낡은 정치에 맞서겠다는 의지를 실천으로 보여준 정치인 노무현을 선택했던 것이다. 국민들이 노무현 대통령이 말 잘하고 똑똑하다는 걸 모르겠는가. 결국 ‘바보 노무현’이라는 애칭 속에는 정치적 득실보다는 민심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따를 줄 아는 민주적인 정치인, 목표 못지않게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겸손한 정치인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2002년 10월 15일 노무현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기자회견 모습. 사진출처 - 오마이뉴스     한데 이런 노무현의 미덕이 어디로 갔는지를 종잡을 수 없게 만드는 일이 요즘 한창 진행되고 있다. 참여정부의 실정에 대한 논란은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내게 ‘바보 노무현’의 미덕을 의심하게 만드는 가장 큰 사건은 한미 FTA의 추진이다. 한미 FTA가 대한민국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논외로 하자. 신자유주의 정책이니 진보․보수 논쟁도 제쳐놓자. 국민여론이 한미 FTA 체결에 부정적이라는 사실도 일단은 접어두자. 세상에 절대악과 절대선이 없듯이 한미 FTA도 장점이 있을 것이고 국가를 운영하는데 있어 족보가 서로 다른 정책을 사용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국민의 여론도 변할 수 있다. 하지만 한미 FTA의 손익계산을 둘러싼 조작 논란이 왜 이렇게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넘어가며, 4대 선결조건 같은 건 없다는 거짓말이 그렇게 쉽게 용서가 되는지, 토론을 그렇게 좋아하는 참여정부 아래서 한미 FTA 협상단과 협상지원단은 왜 그렇게 토론에 소극적인지, 정부의 주장에는 엄청난 홍보비를 쏟아 부으면서도 주머니 사정이 뻔한 서민들이 한푼 두푼 모아서 만든 의견광고는 왜 못 내게 하는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다. 뿐인가. 한미 FTA에 대한 반대를 구한말의 쇄국주의쯤으로 매도하는 데 이르러서는 분노가 치밀기도 한다. 한미 FTA에 반대하는 사람들 중에는 세계화 자체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는 갈수록 개방이 확산되는 현실에 적응하며 살고 있으며, 한미 FTA에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의 주장은 ‘FTA 결사반대’가 아니라 ‘어떤 FTA인가’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바보 노무현’의 미덕이 그립다 외환위기 10년을 맞는 2007년. 10년 전에 오늘과 같은 상황을 예상한 사람이 몇이나 있었겠는가. 물론 2017년쯤 되돌아볼 때 노무현 대통령의 주장이 옳았다는 평가가 나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월급쟁이의 절반 이상을 비정규직으로 만들어버린 외환위기 정도의 변화라면 아무리 좋은 변화라도 당사자들의 이해와 동의를 얻어야 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한미 FTA는 외환위기보다 더 큰 변화를 초래할 거라는데, 외환위기야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린 거지만 한미 FTA야 우리가 선택하기 나름인데, 국민들이 조금 덜 벌어도 조심스럽게 가자면 그 선택은 존중해야하지 않겠는가. 언제 없어질지도 모르는 정당들이 모여 있는 국회에, 그래서 나중에 누구도 책임지지 못할 국회에 국민의 생활과 미래가 걸린 일을 떠넘기는 일은 없길 바란다. ‘바보 노무현’은 어디로 갔을까.
2017-06-09 | hrights | 조회: 554 | 추천: 0
송기춘/ 전북대 법학과 헌법학 교수 서열에 충실한, 너무나 서열에 충실한 사법부 -과연 법원은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는가   연수원 몇 기? 법원의 인사이동 때면 언제나 연수원 몇 기가 승진했다느니, 정기인사를 앞두고 어느 판사가 사임했다느니, 어떤 판결을 내린 판사가 어디로 전보되었다느니 하는 식의 보도를 접한다. 얼마 전 있은 법원의 인사에서는 연수원 15기가 차관급인 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승진했다 한다. 후배기수가 선배를 앞지르기라도 하면 그것 자체가 뉴스거리가 된다. 법조인을 소개할 때면 어느 신문 할 것 없이 연수원 몇 기 또는 고시 몇 회가 따라붙는다. 기수에 따라 움직이는 조직, 서열에 따라 움직이고 뒤지면 후배를 위해 용퇴하는 곳이 이 나라의 사법부다.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는 이 풍경은 참으로 평화롭다. 적어도 그 조직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 풍경은 국민들에게 무엇일까?   법관인사의 법칙(?) 법관의 인사에는 몇 가지 법칙(?)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철저하게 서열을 매우 중시한다는 점이다. 물론 사법연수원 기수가 제일 중시된다. 같은 연수원 동기라 해도 사법시험과 연수원 성적에 의해 결정된 등수는 법원에 근무하는 동안 인사에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고 한다. 서울중앙지법을 필두로 등수에 따라 배치된다. 최근에는 여성 합격자의 성적이 좋아 법관 배치 방법이 일부 변하고 있다 한다. 대법원의 대법관 임명과정에서도 서열이 중시되는 점은 전혀 다르지 않다. 지금까지 대법원장은 대법관을 자신보다 몇 기수 아래의, 법원에 근무하는 판사 또는 법원근무경력을 가진 변호사 가운데서 제청해 오고 있다. 둘째, 승진이라는 개념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다. 법원이 최고법원인 대법원과 각급법원으로 조직되어 있긴 하지만, 어느 법원이나 재판에서는 독립되어 있다. 심급이 있을 뿐 어느 법원이 어느 법원의 상위 또는 하위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법관은 대법원장, 대법관, 고등법원장, 지방법원장, 고등법원 부장판사 등등으로 서열화되어 승진이라는 관념이 여전히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법관의 서열화는 법원의 서열화를 가져와 국민은 대법원의 최종적인 판단에 의해 비로소 설득된다. 재판을 받을 권리의 내용으로 대법원의 재판을 받을 권리를 언급하는 입장에서 이러한 서열화된 법원구조를 염두에 두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대법원장이 대법관임명제청권을 실질적으로 또한 결정적으로 행사하면 대법관도 ‘승진’ 임명되는 것이고, 대법원장이 지명한 헌법재판관후보자에 대한 국회의 청문절차가 의례적인 것이 되면 헌법재판관도 대법원장이 ‘승진’ 임명하는 꼴이 된다. 셋째, 승진에서 동기 또는 후배에게 ‘밀린’ 법관은 대부분 사표를 내고 변호사 개업을 한다는 것이다. 판사급여가 변호사 개업을 하는 것보다 ‘박봉’임이 분명하니 사임은 또 다른 기회가 되겠지만, 승진되었더라면 사표를 쓰지 않았을 법관들에게는 서열에 충실한 법원을 위한 희생이라 할 법하다. 넷째, 법원내의 엘리트코스로 법원행정처를 거친다는 점이다. 전도양양한 법관 상당수가 법원행정처에 발령받아 재판보다는 법원행정을 담당한다. 오랜 기간 동안 법원행정처에서 근무하다가 대법관이 된 분 가운데는 재판으로부터 너무 오래 떠나 있다보니 재판에 부담을 느끼게 되는 경우도 있다 한다. 1970년대 이래 임명된 대법관의 약 40%가 법원행정처의 고위직을 맡은 적이 있고, 법원행정처 차장(최근까지만 해도 법원행정처장은 대법관이 겸직하였다)의 경우 대법관으로 승진한 경우는 70%를 넘고, 한 명의 예외도 없이 헌법재판관, 고등법원장 등 상급의 직위로 승진한 것으로 나타난다.   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법정.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다섯째, 법원행정에 종사하는 법관이 더 우대된다는 점이다. 법원행정처에서 근무한 법관들이 우대되는 것은 물론, 대법관으로 ‘승진’ 임명된 법관의 대부분은 법원행정에 종사하던 법관들이다. 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재판을 담당하다가 대법관에 임명된 경우는 극소수(김영란 대법관, 윤일영 대법관, 안병수 대법원판사 등)이고 대부분은 법원장 등 행정에 종사하던 법관들이다. 사법부가 대법원과 법원행정처를 중심으로 통합되고 통제되는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섯째, 법원 내의 (인사)문제에 대한 비판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다. 얼마 전 책을 출판한 어느 변호사는 20년이 다 된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인사유감」이란 글을 썼다가 서울민사지방법원 발령 하루 만에 다시 울산지원으로 좌천당하는 일도 있었다. 당시 괘씸죄에 걸려 좌천당했다는 얘긴 들었지만, 본인이 증언하는 내용은 더 충격적이다. 책에 실려 있다는 내용을 빌자면, 당시 대법원장이 “나는 이 나라에서 나보다 높은 사람은 대통령밖에 없는 사람이다, 새까맣게 아래에 있는 젊은 판사가 나를 모욕에 가깝게 비판하는 것을 가만둘 수 없었다. 그런데 실제로 보니 순하게 생겼구먼. 서 판사가 비판한 인사는 다 이유가 있었다.……서 판사도 자숙하면 선처할 수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한다.「법관조직의 과도한 관료화, 계급화는 사법부 만악의 근본」이라는 글을 썼다가 재임용에서 탈락하고 지금은 어느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분도 비슷한 경우이다. ‘대통령 다음으로 높은’ 대법원장의 인사에 대해 감히 유감이라니 불경죄에 해당할 법하다. 아하, 대법원장이 그런 자리였던가? 며칠 전에는 2월 법원인사에 대해 현직 판사가 비판하는 글이 법원내부통신망에 올라 보도되기도 한 걸 보면 예전만큼은 아니라 생각되지만, 대법원장의 여전한 인사권 앞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서열에 충실한 법원 이런 인사법칙에 나타나는 공통점은 아무래도 서열에 충실하다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법원에 근무하는 분들에게는 그 모습이 자연스럽게 여겨질지 모르겠다. 그러나 밖에서 보면 참으로 이상하기 그지없는 것이 법원의 조직이고 인사이다. 냄새나는 방안에 오래 있는 사람은 그 냄새를 맡지 못하지만 방에 새로 들어온 사람은 그 냄새를 쉽게 맡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대법원장이 판결의 잘못에 대해 말을 해도 무반응인 까닭은? 이용훈 대법원장이 취임하면서 과거 사법부의 인권옹호노력이 부족했던 데 대한 반성과 사과를 하였고, 이에 대해 많은 국민들이 그 용기를 칭송하였다. 사법부의 수장이 그런 발언을 한 것은 참으로 시대가 변하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게 한 사건이라 할 법하다. 그러나 과연 그게 그렇게 긍정적으로만 바라봐야 할 일일까? 누군지를 특정하지도 않은 채 과거 정권의 압력에 저항하지 못하고 국민의 기본권보장에 충실하지 못한 때가 있었고 그런 잘못된 판결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런 판결이 한 두건도 아니고 천여 건이 넘는다고 한다면 그런 발언에 대해 법원의 법관들은 또는 과거에 법관이었던 사람들은 그저 대법원장님의 말씀이라고 경청만 하고 있어야 옳은 것일까? 그런 혐의를 받는 판결을 한 판사는 자존심도 없나? 헌법적으로 독립이 보장되는, 아니 요구되는 법원의 판결에 대해 재심을 거치지 않고 대법원장이라는 자격으로 판결이 잘못되었다고 말한다면 이는 법원의 독립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발언임이 분명하지 않은가? 결론이야 옳다지만 이런 발언의 맥락은 결코 적절하지 않을 뿐 아니라 헌법에 반할 위험도 있는데 말이다. 필자는 이런 무반응이 이러한 법원의 서열화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용훈 대법원장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서열화의 원인 이러한 서열화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다양한 분석이 가능하겠지만, 필자는 대법관의 임명방식, 대법원장의 인사권과 법관양성제도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법원장의 대법관 임명제청권 첫째, 대법원의 구성방식의 문제이다. 우리 대법원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특이한 방식을 취하고 있다. 대법원은 현재 13인의 대법관으로 구성되는 최고법원이다. 대법원장은 대통령이 국회의 동의를 받아 임명하고, 대법관은 대법원장이 제청하면 대통령이 국회의 동의를 받아 임명한다. 대법원장 임명에 국회와 대통령이 관여하는 것은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국민주권주의원리의 실현이라 할 수 있다.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것은 아니지만 국민의 대표기관의 관여를 통하여 대표성을 얻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대법관의 임명에 대통령과 국회가 관여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대법원장이 왜 대법관의 임명제청권을 갖느냐는 것이다. 대법원장이 사법부의 수장으로서 능력 있는 법률가를 잘 알 수 있기 때문에 정치적 입김보다는 법원의 전문성을 확보하는 데 장점이 있기 때문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왜 이러한 제도를 취하는 예가 없는가? 그것은 대법원이 합의부 법원이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합의제 기관은 구성원 사이의 대등성과 독립성을 그 본질로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법관들이 소망하는 대법관을 임명하는 과정에서 제청권을 가지는 대법원장에 대해 대법관이 얼마나 대등하며 독립될 수 있을까? 오랜 법조경력을 가진 분들이 대법원장에 대해 종속적이라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이런 임명과정을 거친 경우 적어도 대등하거나 독립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느 법관은 대법원장과 그의 제청을 받아 임명된 대법관의 관계를 합의부의 부장판사와 배석판사의 관계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대법원장의 대법관 임명제청권이 악법 중의 악법으로 지목되는 1972년 유신헌법에서 처음 채택된 제도라고 하면 좀 더 설득력이 있을까? 현재 대법원이 13인으로 구성되는 합의부인 최고법원이라는 점은 대법원장의 임명제청권과 어울리지 않는다.   대법원장의 인사권 둘째, 대법원장의 인사권이다. 대법원장은 결코 대등하지 않은 대법원을 구성하고, 대법관전원으로 구성되는 대법관회의의 의결을 거쳐 법관에 대한 인사를 한다. 대법원이 앞에서 말한 방식으로 구성된다면 대법관회의에서 대법원장의 영향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철저하게 행정조직으로 관료화된 법원은 이러한 인사권에 의해 조직된다. 자문위원회를 두고 있지만 활동은 미미하다. 대법원장의 강력한 인사권은 서열화를 촉진하고 강화한다. 대법원장의 사법행정을 보좌하는 법원행정처에 우수한 법관들이 임명되고 인사에서 우대됨으로써 법원의 관료화도 강화된다.     법관양성과정과 연수원 셋째, 법관의 양성과정의 문제이다. 사법연수원 과정을 통해 변호사가 양성되고, 이 중 예비판사가 임명되고 배석판사를 거쳐 법관이 양성된다. 합의부의 배석판사는 합의부 부장판사에 의해 법관으로 훈련되고 양성된다. 업무상의 지도와 함께 인간적 관계도 돈독해진다고 한다. 합의부는 배석판사 2인 중 한 명이 주심을 맡고 부장판사와의 ‘합의’를 통해 합의부의 의견이 나온다. 합의부라지만 판사는 둘뿐인 셈이다. 사법연수원 과정에서도 이러한 법원의 분위기를 반영해서인지 서열에 매우 충실하다. 전부는 아니겠지만, 간혹 접하는 연수원 선후배들의 모임을 보면 군대보다 엄격하게 돌아가는 모습을 본다. 연수원 교수와 연수생들의 관계는 고려시대 과거제에서 지공거와 과거급제자의 좌주와 문생의 관계라 할 모습이 나타난다. 스승을 공경하는 아름다운 모습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리 좋게만 보이지 않는 것은 필자의 시각이 삐딱해서일까? 법원의 판사가 판사로만 일로매진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때가 되면 변호사로 개업하려 하고 연수생들도 법원에 가거나 변호사로 개업하거나 선배법관들과 가까워져야 하는 처지에서 서로가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 단지 법률가로서의 공부와 관련해서만 아니라 현실적인 필요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잘라 말할 수 있겠는가?   서열화, 획일주의가 국민에게 미치는 영향은? 결국 대법관임명, 법관양성과정, 사법연수원 과정 등 여러 장치를 통하여 법원은 대법원장을 필두로 지방법원합의부 좌배석판사까지 철저하게 서열화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서열화를 깨는 것은 각 법원이 독립성을 확보함으로써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보장하는 재판을 하는 길이라 생각한다. 개개의 판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겠지만 이러한 서열화, 관료화된 법원의 상하위계질서 속에서의 획일주의적 압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법원의 서열문화는 법관의 사고와 행동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민사재판에서는 억울한 피해자가 나오고 형사재판에서도 적절한 제재를 하지 못함으로써 정의를 실현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는 없겠는가?     서울 서초동에 위치한 대법원 본관.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대법원의 구성방식 개선이 필요하다 법원의 서열화를 깨려면 대법원의 구성방식을 바꿔야 한다. 대법원장과 대법관의 임명방식을 같게 해야 한다. 대법원장이 제청권을 가지는 방식은 그야말로 대통령 다음의 권력을 대법원장에게 주는 위험한 구상이다. 이제 그만 갈아 치울 제도이다. 대법원장과 대법관을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제도도 생각해봄 직하다. 선거에 따른 부작용도 있으므로 그게 어렵다면 대법원장과 대법관 모두 국회의 동의와 대통령의 임명이라는 방식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대법원장이나 대법관은 법원만의 대표가 아니므로 법원의 판사 또는 법원의 판사와 직원이 선출하는 방식은 국민주권주의에 반한다고 생각한다. 법률가들만이 참가하여 선출하는 방식도 안된다. 국민으로부터의 대표성을 확보해야 한다.   법조인의 수를 늘려라 법조인의 양성과정도 문제이다. 근본적으로 법조인이 1만여 명에 불과한 현실에서 변호사 개업이 고소득을 보장해준다면 법원의 판사가 나중에 변호사개업을 하지 말라는 것은 요구하기 어려울 것이다. 법관들이 대법관이 되려 하고 헌법재판소 재판관보다 대법관을 선호하는 이유가 그 명예보다는 현실적인 것에 있을지 모른다는 것은 필자만의 어리석은 추측일까? 단 한 군데뿐인 법률가 양성기관을 통하여 일원화된 제도는 이러한 서열화된 시스템을 유지시키는 기능을 한다. 법원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법조인의 수가 획기적으로 증가되어야 할 것이다. 이 점은 사법개혁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러나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적어도 법률가 양성기관이 한 곳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독립성을 가지는 여러 기관을 통해 법률가가 양성되어야 한다. 사법시험제도를 유지하든 법학전문대학원제도를 도입하든 법률가의 수는 획기적으로 증가되어야 하며 법률가 양성기관은 다원화되지 않으면 안된다.   서열화를 불식하는 것은 국민의 신뢰를 받는 길 법원의 서열문화를 혁파하는 것은 법원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확보하는 길이다. 개헌논의가 활발한 요즘, 굳이 개헌을 하자면 국민에게 절실한 문제부터 접근해야 한다. 모든 논의의 시작과 끝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의 신장이어야 한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639 | 추천: 1
홍미정/ 한국외대 연구교수 2월 8일 아침 필자는 동예루살렘 소재 ‘수파트 난민 캠프’를 방문했다. 이 캠프는 예루살렘 구도시 버스 정류장에서 출발하는 7번 버스로 10분 정도 거리이며, 한 군데의 이스라엘 검문소를 지나서 이 버스 종점에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10 여명 쯤 되는 10대 소년들이 갑자기 나를 둘러쌌다. 그 중 덩치 큰 아이가 나에게 “너 어디서 왔냐?”고 물으면서 ‘태권도’ 하는 폼으로 내 얼굴 가까이에 발길질을 했다. 순간 나는 겁에 질렸다. 버스에서 함께 내린 아주머니와 아저씨들이 이 소년들에게 호통을 쳤고, 아이들은 흩어졌다. 조금 지나자 이 난민 캠프에서 일하는 ‘아말’이 마중 나왔고, 나는 그와 함께 난민 캠프로 들어갔다.   성급했던 나의 첫인상 필자가 난민 캠프 운동장에서 서성거리는데, 갑자기 축구공이 날아와 얼굴에 맞았다. 눈물이 왈칵 나왔다. 이곳의 어린이들은 정말 다른 팔레스타인 지역의 어린이들과 달리 무척 예의 없고 거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유모차의 아기를 돌보고 있는 어린이가 다가왔다. 조금 전에 나에게 축구공을 날린 그 아이다. 내가 “네 동생이냐고 묻자.” “아니다. 이 아기는 부모도 형제도 없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 캠프의 어린이들은 대부분 부모가 없는 고아들이거나, 부모가 있다하더라도 이스라엘 감옥에 있거나, 생활능력이 전혀 없는 마약 중독자이거나 매춘부들이다.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 내에서 문제를 일으킨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이 캠프로 몰아넣는다. 어린이들은 거리에서 어른들 사이에서 오가는 마약 중개를 하기도 하고, 일부 어린이들도 마약을 하지만 이를 제지하는 사람들이 없다. 잠시 후 필자는 아이들에게 팔레스타인 전통 과자를 나누어주려고 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선뜻 받지를 않고 뒷걸음질을 했다. 무안해서 아말에게 왜 그러냐고 물으니 아이들이 너무 수줍어해서 그렇단다. 버스 정류장에서 나에게 발길질 한 것도 내가 한국이나 중국에서 온 것으로 생각하고 친근함을 표시하기 위해서 ‘태권도’나 ‘쿵후’ 등을 선보인 것이라고 했다. 한 아이가 수줍은 표정으로 나에게 두 개의 초콜릿을 내밀었다. 나는 사양하다가 도리가 아니다 싶어 받아들었다. 순간 이 지역 아이들이 매우 예의 없고 거칠다고 생각했던 것에 대한 미안함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필자인 홍미정 교수와 난민 캠프에서 생활하는 소년 사진 출처 - 홍미정 교수 육지에 떠 있는 섬, 혹은 거대한 감옥 이 캠프에는 1만 8천 명 정도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들 중 절반의 주민은 예루살렘 영주권(하늘색 시민증)을, 나머지 절반 주민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시민권(초록색 시민증)을 소유하고 있다. 1990년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협상의 결과물인 오슬로 협정은 이 지역을 이스라엘이 통제하는 대 예루살렘 영역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가난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밀집한 이 난민 캠프를 분리장벽으로 둘러싸서 다른 동예루살렘 영역으로부터 고립시켰다. 현재 이 지역은 행정적으로는 동예루살렘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분리 장벽이 만들어낸 고립된 섬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정부도 팔레스타인 정부도 이 지역 주민들을 경제적으로 행정적으로 관리하거나 지원하지 않는다. 이 난민 캠프에는 유엔이 지원하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와 의료 지원 센터가 각각 하나씩 있을 뿐이다. 이 의료 지원센터도 오전 8시부터 오후 2시까지만 진료를 한다. 이스라엘 정부도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도 난민 캠프 주민들의 교육과 복지 등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스라엘은 수파트 난민 캠프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대 예루살렘 영역이라고 이름붙인 곳에 포함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밀집한 지역 곳곳을 이중 삼중의 분리장벽으로 고립시킴으로써 마을 단위의 거대한 감옥을 만들고 있다. 현재 서안 인근 대 예루살렘 지역은 분리 고립장벽 공사가 곳곳에서 한 창 진행 중이다. 이 분리장벽 건설과정에서 개인 주택들에 대한 출입이 금지되고, 부셔지고, 가족들이 분리장벽을 경계로 이산가족이 되기도 한다.     분리장벽 공사 현장 모습 사진 출처 - 홍미정 교수 생존 위해 일해야 하는 일상의 모순 라말라 인근 불도저 소리가 요란한 분리장벽 공사 현장을 지나다가 “공사장 인부들은 도대체 누구냐?”고 물었다. 자동차를 운전하던 ‘아이샤’는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팔레스타인인들이다.”고 답했다. 자신들의 고향을 부수고 강탈하는 그 일의 최전선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다름 아닌 팔레스타인 사람들이었다. 필자가 묵고 있는 동예루살렘 소재 호텔에 돌아와서 서안에서 거주하면서 이스라엘의 임시 노동 허가권을 얻어 월 50만 원 정도의 임금을 받고 이 호텔에서 일하는 몇몇 직원들과 이스라엘 분리 장벽을 비롯한 일상의 어려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진을 찍고 인터뷰 내용을 노트에 쓰자 이들은 얼굴색이 변하면서 “너 그것 왜 쓰냐?”고 물었다. “이것은 신문에 나갈 내용이다.”라고 답하자, 그들은 겁먹은 표정으로 “이것 신문에 나가면, 동예루살렘 호텔에서 일하기 곤란하다. 서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우리보다는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면서 사진을 지워달라고 요구하고는, 총총히 자리를 떴다. 일반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하루하루 가족의 생계를 유지해야할 일상이 더욱 중요하다.     수파트 난민 캠프 운동장의 놀이터 사진 출처 - 홍미정 교수
2017-06-09 | hrights | 조회: 597 | 추천: 0
유정배/ 참여와 자치를 위한 춘천시민연대 사무국장 꽤 늦은 나이지만 대학원 진학을 할까 고민 중이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시민운동 위기론이 확산되더니만, 바야흐로 활동가의 전문성이 없으면 인정해주기 힘들다는 상황이 찾아온 듯하고, 제도교육이 인정하는 ‘라이센스’가 전문성의 잣대가 되어버린 세태 때문에 머뭇거리다가는 이판에서도 뒤쳐지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이 뒤꼭지를 불안하게 하기도 한다.   노골적으로 내걸린 대학의 신세 한때 현장을 떠나 대학원을 찾아가는 것이 민중에 대한 배신으로 읽혀지는 바람에 진학을 하지 않는 것이 하나의 징표처럼 비쳐지던 시절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운동의 전문성이 필요하다면, 그래서 지속적으로 사회운동에 기여 할 수 있고 보다 충실한 삶이 가능하다면 나이 따질 것 없이 그 이상 노력이라도 못 할 것이 없다. 다만 시류에 연연하려 가방끈 길게 하려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못내 의심스러워 줄 곳 마음을 결정하지 못하다 학교를 찾아갔다. “도서관이 경쟁력이다!” 중앙도서관 꼭대기를 가득 채운 글귀가 어떤 계시처럼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     사진 출처 - 강원대학교 도서관 홈페이지 사실, 나는 학교 다닐 때부터 도서관과 담을 쌓은지라 도서관이 경쟁력인지 아닌지 잘 모른다. 오히려 내가 다녔던 학교 중앙도서관은 교문 바로 옆에 있어 허구헌날 최루탄에 몸살을 앓았고 나도 적잖이 기여를 한 사실이 있어 늘 미안 할 따름이다. 그래서 지금도 그 앞을 지날 때면 괜히 주눅 들기도 한다. 정녕 나는 요즘 이십 여 년 전, 사회는 넓고 풍부하며 내 진로 또한 참으로 다양해서 도서관에서 불을 밝히는 것도 당연하다는 점을 인정하기보다 군사정권의 반대편에서만 도서관 계단과 광장을 이해하려했던 짧은 시야를 회한으로 바라보려했다. 어쩌면 한때 나는 ‘시장’ ‘경쟁력’ ‘효율성’ 등과 같은 용어들에 대해 깊이 이해하지 못하면서 편협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는지 모른다. 더구나 이미 세상은 삶을 꾸려가는 데 경쟁력이 매우 중요하다는 교훈이 평범하게 다가올 만큼 한참이나 바뀌어 있지 않은가. 나는 연구와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대학이 비판적 지식인을 양성하는 것 못지않게 사회가 지탱 할 수 있는 훈련받은 인재를 배출하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시장효율성을 다른 가치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시대 추세에 부응하는 것이고, 지방대학이라는 불리한 조건과 사회적 멍에를 외면하고 한가롭게 “도서관은 상아탑이다”라고 여유를 부리는 것이 사치 아니냐는 절박한 주장을 반대할 만큼 물정 모르지는 않다. 무엇보다 사회가 시장중심으로 급격히 재편되고 정부가 교육을 ‘산업’으로 바라보며 경쟁으로 내몰고 있는데 일개 지방 국립대가 어쩌지 못한다는 것쯤은 이미 눈치 채고 있다. 그렇지만 오래전에 땅에 떨어진 대학의 신세를 꼭 그렇게 구호로 내걸어 확인해야만 하는지는 궁금하다. 또한 성인이 된 학생들을 경쟁력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학교가 정한 규범의 틀 안에 가두어 놓고 통제하면 ‘경쟁력’이 높아질까 하는 의심도 든다. 사회와 국가가 대학에게 기업형 인간만을 뽑아내기를 원하는 것이 또 다른 획일주의는 아닌가 하는 생각과 함께 우리는 경쟁력을 이렇게 밖에 이해를 못할까 하는 회의가 자꾸 고개를 치민다.   대학까지 ‘획일주의’ 조장해서야     사회와 국가가 대학에게 기업형 인간만을 뽑아내기를 원하는 것이 또 다른 획일주의이다. 사진 출처 - 프레시안 내가 과문한 탓에 ‘글로벌 스탠다드’의 원조인 미국의 유명한 대학들이 도서관에 펼침막을 걸어두고 오로지 기업형 인간을 찍어내는 일에만 몰두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회의 다양한 가치를 접하게 하고 타자에 대한 연대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교육하는 것이 경쟁력의 다른 측면을 키우는 것 이라는 점만은 시민의 상식으로도 쉽게 이해가 된다. 내 배움의 짧음이 의심을 억누르려 하지만 반 시장적인 선입견과 유전자가 몸속 깊이 뿌리박혔는지 세상 돌아가는 사정과는 동떨어진, 구닥다리 양심의 소리가 자꾸 나를 괴롭힌다. 아주 오래전 도서관에서 밧줄에 의존해 시위를 하며 외쳐대던 절규가 낯익은 양심의 울림이 되어 그 때처럼 다시 내 영혼을 흔들어 깨우고 있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443 | 추천: 1
이유정/ 변호사, 법무법인 자하연 독재권력에 눈 감고 귀 막은 사법부, 뼈저리게 반성해야 - 잘못된 판결 바로잡은 독일의 교훈 진실화해위원회에서 긴급조치 사건 판결을 공개한다고 해서 30여년 전의 일이 다시 논란이 되고 있다. 당시에 판결을 작성한 판사들의 실명공개 문제도 거론되고 있다. 판결문 공개 자체를 못마땅하게 보는 시각도 있고, 실정법이었던 긴급조치를 적용하여 판결을 한 것만으로 판사를 비판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우려를 표명하는 견해도 있다. 또 역사적인 차원에서 평가하고 사법부 전체가 잘못된 과거를 반성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으며, 일부에서는 사법부 인적 청산을 거론하기도 한다. 판결문은 비밀문서도 아니고 일반인들도 정보공개를 요구하여 열람할 수 있는 내용이므로 판결문을 공개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것이다. 문제는 그 판결을 한 판사들의 이름을 공개하는 것인데, 판사는 헌법과 법률, 그리고 양심에 의해 판결을 하는 독립적인 헌법기관이기 때문에 그 이름을 비밀로 할 이유도 없다고 본다. 판결문을 공개하는 주체가 사법부였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사법부 스스로 과거의 잘못에 대한 공식적인 반성이나 유감표명조차 하지 않은 채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기 때문에, 진실화해위원회가 먼저 판결문 공개를 한다고 하여 못마땅하게 여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사법부 스스로 들추기 어려운 과거의 잘못을 드러내고 잘못을 반성하는 계기로 삼는 것이 바람직하다.   진실ㆍ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31일 오후 긴급조치 위반사건 재판에 관여한 판사 실명이 포함된 `2006년 하반기 조사보고서‘를 언론에 공개할 예정이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판사 실명 공개, 반성의 계기로 삼아야 다만 긴급조치가 실정법으로 존재하고 있었고, 긴급조치에 대한 위헌주장에 대하여 상급심인 대법원이 위헌이 아니라는 판결을 수차례 하였던 상황에서, 판사 개인이 긴급조치위반에 대하여 무죄판결을 하지 않았다는 또는 못하였다는 이유로 비난하고 인적 청산을 주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판사 개인이 정의와 양심에 반하는 실정법의 적용을 거부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는, 법적 안정성과 정의가 충돌할 때 어느 것을 더 우선하여야 하는가라는 법철학자들의 해묵은 논쟁거리와도 관련이 있으며, 어느 쪽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단정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법부의 역사적인 책임마저 덮어주자는 것은 아니다. 긴급조치 제1호는 그 내용 자체만 보더라도 유신헌법을 반대하거나 헌법개정을 주장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고 이를 위반하는 경우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하여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긴급조치 제4호는 민청학련과 관련된 일체의 활동을 금지하고 심지어 학생이 정당한 이유 없이 시험이나 수업거부, 교내집회를 하는 경우에도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할 수 있도록 규정한 내용이다. 이는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영장주의의 원칙, 신체·양심의 자유, 언론·출판. 집회·결사의 자유, 재판을 받을 권리 등 기본권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하는 것으로서, 누가 보더라도 정당하지 못한 조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대법원이 여러 차례 긴급조치가 헌법에 반하지 않는다는 판결을 한 것은, 국민의 인권을 지켜야 할 사법부가 그 소임을 다하기는커녕 독재권력을 정당화하는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잘못에 대하여 역사적인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 사법부는 지금이라도 독재권력의 불법적인 권력행사에 대하여 눈 감고 귀 막은 과거를 뼈아프게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1974년 10월 서울 광화문에서 유신헌법 폐지를 주장하는 한국신학대 학생 50여 명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국보도사진연감 부정의한 법률은 정의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독일의 법철학자인 라드부르흐는 “법률적 불법과 초법률적 법”이라는 논문에서 “법률의 정의에 대한 위반이 참을 수 없는 정도에 이르렀다면 부정의한 법률은 정의에게 그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러한 논리는 나치시대의 실정법을 적용한 판결을 바로잡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일례를 들자면 나치시대에 사법공무원 푸트파르켄이라는 사람이 괴티히라는 상인이 공중화장실에 “히틀러는 학살자이고 전쟁은 그의 책임이다”라는 낙서를 하였다고 신고를 하였다. 괴티히는 이 낙서 이외에 외국방송을 청취했다는 사실이 인정되어 사형판결을 선고 받고 사형에 처해졌다. 2차 대전 이후 튀링엔 주 검찰총장은 푸트파르켄을 기소하면서 “히틀러 시대에 다른 사람을 밀고한 자는 자신이 피고인을 진실발견과 정당한 판결을 법적으로 보장하는 합법적인 소송이 아니라, 완전한 자의에 내맡긴다는 사실을 알아야 했고, 실제로 그러한 사실을 알고 밀고를 했다”고 하면서 “푸트파르켄은 괴티히가 사형에 처해지는 것을 적극적으로 의욕 했다는 사실을 기본적으로 시인했고, 이는 살인의 고의에 해당하며, 법원이 사형을 선고했다면 그는 살인의 간접정범이고, 만약 살인의 책임을 사형을 선고한 법관들에게 돌린다면 그는 살인의 방조범이 된다”는 논고를 하였다. 튀링엔 주의 배심법원은 푸트파르켄에게 살인방조죄의 유죄판결을 선고하였다. 식견이 부족한 탓에 위 판결이 그대로 확정되었는지 아니면 상급심에서 변경이 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전후 나치시대의 실정법을 적용한 수많은 판결에 대해 그 자체가 적법성이 없는 재판이므로 이에 대하여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움직임이 독일의 여러 주에서 있었고, 나치시대의 법률은 “법률적인 불법으로서 무효”라는 논리에 근거한 여러 판결들이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510 | 추천: 0
최응렬/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 우리는 살아가면서 직접적으로 범죄피해를 당하지 않더라도 언론보도를 통해서 범죄 발생 사실을 자주 접하게 된다. 살인, 강도, 강간, 절도 등 수없이 많은 종류의 범죄들이 연일 발생하고 있는 셈이다. 보통 범죄발생을 범죄시계로 표현하기도 한다. 2002년 9월 경찰청이 발표한 범죄시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는 9시간 30분마다 살인사건 1건, 1시간 30분마다 강도 및 강간사건이 각각 1건씩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보다 인구가 3배정도 많은 일본은 1999년에 살인 6시간 56분, 강도 2시간 4분, 강간 4시간 43분으로 인구수로 보면 한국에 비해 살인, 강도, 강간의 범죄발생빈도가 낮다. 반면에 인구가 5배나 많은 미국은 1999년에 살인 34분, 강도 1분, 강간 6분으로 한국보다 발생빈도가 높아 인구 10만명당 전체 범죄 발생률에서는 서구에 비해 아직은 안전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범죄시계를 통해서 보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도 전국 곳곳에서 많은 범죄가 발생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많은 범죄학자들이 범죄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범죄학이론을 개발하여 이를 규명하려 했고, 경찰을 비롯한 형사사법기관에서도 범죄통제를 위하여 힘쓰고 있다. 그런데 연초부터 우리의 뇌리를 자극하는 범죄사건이 보도되었다. 소위 화성에서 발생한 부녀자 연쇄 실종사건이 그것이다. 이 사건으로 1986년부터 1991년 사이에 10건이나 발생했던 화성연쇄살인사건의 망령이 되풀이되는 것이 아닐까 매우 우려하고 있다. “어느 사회든지 일정량의 범죄는 있을 수밖에 없다”는 뒤르껭(Emile Durkheim)의 범죄정상설의 주장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 사회에서 범죄를 완전히 없앤다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 아마도 인간의 욕망이 사라지지 않는 한 설사 요순시대라 할지라도 일정량의 범죄는 발생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면서도 “만일 범죄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평화롭고 살기 좋을까”라고 생각하며, “범죄가 더 이상 발생하지 않는다면 필자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실업자 신세를 면치 못하겠구나”라고 하며 부질없는 생각도 하곤 한다. 마치 환자가 한 명도 없다면 의사도 전혀 필요 없듯이 말이다. 어차피 범죄를 완전히 없앨 수 없다면 범죄가 발생하기 전에 이를 예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범죄가 발생한 후에 이를 진압하는 데는 많은 비용이 소요될 뿐만 피해의 완전한 원상회복도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범죄예방대책으로는 여러 가지 방안이 고려될 수 있다. 제지이론(deterrence theory)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엄격한 형벌을 부과하고 신속하고 확실하게 형벌을 집행하는 것도 한 가지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상황적 범죄예방이론(situational crime prevention theory)과 같이 범죄가 발생할 수 있는 기회를 사전에 제거하는 방법에 의해서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전문적인 방법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조금만 주의를 한다면 범죄피해의 위험으로부터 안전을 확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이를 적극적으로 실천했으면 한다. 첫째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는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우리 각자가 조금씩 욕심을 줄여갔으면 좋겠다. 자기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남에 대한 조그마한 배려를 한다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살인사건 피해자의 상당수는 원한관계에 의한 경우가 많다는 사실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지침이 되게 하고 있다. 둘째는 우발적인 범죄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문단속을 철저히 하는 것과 같이 가장 손쉬운 방법에서부터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만취하여 범죄표적이 되는 일을 삼가는 것 등이 중요하다. 그리고 부엌칼을 비롯하여 과도 등의 칼끝을 둥글게 하는 것도 범죄를 예방하는 좋은 방안이 될 수 있다. 이는 칼을 제작할 때부터 둥글 때 제작하게 의무화하는 것도 범죄를 줄이는데 크게 기여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미국처럼 국민들이 총기를 소지할 수 없어서 총기에 의한 살인사건이 거의 없다는 점이나 인도처럼 지참금 문제로 인한 살인사건은 거의 발생하지 않고 있는 점 등은 우리 국민이 큰 위안으로 삼을 수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부녀자 성폭행이나 실종사건 등이 끊이지 않고 발생하고 있는 것은 여전히 우리를 부끄럽고 슬프게 하고 있다. 앞으로는 우리 모두 범죄로부터 보다 안전한 사회를 조성하는 데 조그마한 힘이라도 보탰으면 한다. 그리고 화성에서 실종된 부녀자들이 안전하게 살아 돌아오기를 기원하며, 화성 주민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치안대책을 조속히 수립해 주기를 바란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498 | 추천: 0
이광조/ CBS PD 2006년의 막바지에 나는 두 대통령의 죽음을 목격했다.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과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 물론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의 죽음은 ‘대통령의 죽음’이라는 영화 속에서 벌어진 가상현실이었다. 하지만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죽음은 21세기 지구촌 곳곳을 공포와 절망으로 물들이고 있는 폭력과 증오의 악순환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가상이긴 하지만 현직 대통령의 죽음을 소재로 삼았다고 해서 미국에서 개봉조차 못했다는 ‘대통령의 죽음’은 한 아랍계 이민 여성의 하소연으로 시작한다. ‘그 사람은 무슨 생각으로 방아쇠를 당긴 걸까요, 자신이 방아쇠를 당김으로써 어떤 일이 벌어질지 한번이라도 생각해본 걸까요.’ 영화의 줄거리는 대충 이렇다. 가까운 미래의 어느 날 부시 대통령이 시카고를 방문해 한 호텔에서 열리는 경제인 행사에 참석한다. 부시 대통령은 경제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특유의 유머로 연설을 진행하지만 호텔 밖에는 부시의 방문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대가 곳곳에서 경찰과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베트남 전 반대 시위 이후 미국 역사상 가장 격렬한 시위가 벌어진 이유는 부시가 지구촌 곳곳에서 벌인 전쟁 때문이다. 시위대는 부시를 전쟁의 화신, 악의 화신으로 여기고 부시에 대해 극단적인 분노와 증오를 표출한다. 이런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연설을 마치고 호텔을 나서던 부시 대통령이 괴한의 총격으로 목숨을 잃고 현장 근처에 있었던 시리아 출신의 한 남성이 용의자로 체포된다. 명백한 물증은 없지만 수사당국은 그를 암살범으로 확신한다. 그는 ‘시리아’라는 깡패국가 출신인데다 이슬람 근본주의자의 꾐에 빠져 아프가니스탄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경험까지 있다. 하지만 수사가 진행되면서 대통령의 암살범은 이라크 전에서 목숨을 잃은 한 흑인병사의 아버지로 밝혀진다. 그는 군대를 지망하는 다른 흑인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차별과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군대를 택했고 전쟁에도 참가했다. 그는 미국의 대의를 믿었고 유복한 가정을 꾸렸다. 하지만 아버지처럼 군대를 택한 두 아들은 명분 없는 전쟁에 정신이 황폐화됐고 급기야 큰 아들은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자신이 평생을 바친 군대, 세계최강이자 정의로운 그 군대가 이라크라는 곳에서 명분 없는 학살을 자행하고 그 명분 없는 전쟁에서 소중한 아들까지 잃게 되자 이 노병은 자신과 아들의 삶을 망가뜨린 부시에게 책임을 물은 것이다. 하지만 진범이 밝혀진 뒤에도 암살 용의자로 체포된 시리아 출신 남성은 석방되지 않고 미국은 시리아에 대한 전쟁을 준비한다.   영화 '대통령의 죽음'의 포스터 사진출처 - 대통령의 죽음 홈페이지   ‘그는 자신이 방아쇠를 당길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도 안 해 본 걸까요.’ 영화의 시작부분에 등장하는 아랍계 여인의 눈물 젖은 하소연은 부시를 응징한 흑인 노병에 대한 원망이다. 아들을 잃은 노병의 복수로 애꿎은 그녀의 남편이 암살범으로 체포됐고 아랍계 불법 체류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추방이 이뤄졌다. 뿐만 아니라 미국 정부는 진범이 밝혀진 뒤에도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시리아에 대한 전쟁을 추진한다.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진부하다.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런 명백한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곳이다. 영화를 본 다음 날 후세인 전 대통령이 교수형에 처해졌고 그 모습은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에 중계됐다. 영화 속 부시 대통령의 죽음만큼이나 비현실적인 느낌도 들었지만 그것은 현실이었다. 후세인의 처형. 시간이 흐른 뒤 미국의 어느 곳에선가 자식을 혹은 남편과 아내, 부모를 잃은 누군가가 후세인을 처형한 사람들을 원망하게 될지도 모른다. 미국이 라틴 아메리카 독재정권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인권유린을 연구한 한 미국인 인류학자는 1973년 9월 11일 칠레에서 발생한 사건과 2001년 9월 11일 미국에서 발생한 사건이 무관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1973년 9월 11일 칠레에서는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피노체트가 군사쿠데타를 일으켰고 이 쿠데타는 이후 라틴 아메리카에서 벌어진 군사 쿠데타와 더러운 전쟁의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이 쿠데타 과정에서도 살바도르 아옌데라는 대통령의 죽음이 있었다. 그로부터 28년이 지난 2001년 9월 11일 뉴욕에선 수 천 명의 목숨을 앗아간 ‘9.11 테러’가 발생했다. 역사는 되풀이되는 걸까.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란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간에도 지구촌 어딘가에는 무고한 죽음에 서러운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사진출처 - 대통령의 죽음 홈페이지
2017-06-09 | hrights | 조회: 493 | 추천: 0
송기춘/ 전북대 법학과 헌법학 교수 노무현 대통령이 느닷없이 개헌 얘기를 꺼냈다. 단순한 화제거리가 아니라, 여론 수렴을 거쳐 헌법개정안을 곧 제안하겠다는 것이다. 개정하고자 하는 내용은 두 가지다. 대통령 임기를 4년 중임으로 하고, 국회의원과 대통령의 4년 임기와 그 개시시점을 일치시키겠다는 것이다. 개헌해야 할 여러 쟁점이 있지만 다른 것은 일단 배제하고 이 두 가지 쟁점에 집중하여 개헌을 추진하겠다는 구상이다. 제안된 헌법개정안은 20일 이상 대통령이 공고하고, 공고된 날로부터 60일 이내에 국회에서 의결된 후 국민투표에 붙여진다. 국회의결 이후 국민투표까지 30일 이내의 시간이 소요되므로 개헌안을 제안하여 90일 이내에 헌법개정이 완료되니 대통령 선거에 결정적인 장애는 되지 않는다고 한다. 대통령의 임기연장 또는 중임변경을 위헌 헌법개정은 그 헌법개정 당시의 대통령에 대해서는 효력이 없다(헌법 제128조 제2항)고 하고, 노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지지율도 바닥이므로 노대통령이 자신의 중임을 위하여 추진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물론 임기연장 또는 중임변경을 위한 헌법개정이 이뤄질 경우, 현행 헌법의 이 조항이 새로운 헌법에도 계속 규정되지 않는 이상 임기연장 또는 중임변경 조항이 개정안 제안 당시의 대통령에 대하여 효력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개헌구상은 대통령이 국민에게 드리는 말씀에서 말한 바와 같이 새로운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규범을 만들고자 하는 의도를 가진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임기 이전에 가시적인 정치적 성과를 내고자 하는 의도도 가진 것으로 보인다. 노대통령의 말처럼 시대가 변하면 새로운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규범을 만드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문제는 1987년 헌법이 담고 있는 가치나 정신이 개헌을 얘기할 만큼 변했는가 하는 점이다. 특히 초점은 개헌구상의 핵심으로 얘기되는 대통령 4년 중임과 국회의원 임기와 대통령 임기의 일치를 논의하는 것이 어떠한 시대정신의 변화를 반영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적어도 이 두 가지 내용의 개헌과 관련해서는 거창하게 시대정신을 얘기할 문제가 아니라 정치권의 필요에 의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더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1987년 헌법의 정신과 가치에서 몰아내야 할 정신과 가치는 여전한 군사문화의 잔재와 사법특권을 옹호하는 제도이며, 새로이 헌법에 담아야 할 시대정신과 가치는 더욱 강화된 기본적 인권의 보장이 아닌가. 노대통령은 1987년 개헌과정에서 장기집권을 제도적으로 막고자 마련된 5년 단임제는 이제 그 사명을 다했고, 오늘날 오히려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책임정치를 훼손하고, 국정운영의 일관성과 연속성을 어렵게 한다고 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9일 오전 11시30분 대국민특별담화를 통해 현행 5년 단임 대통령제를 4년 연임제로 바꾸는 헌법개정 논의를 제안하면서 추후 이 같은 방향으로의 개헌을 발의하겠다고 밝혔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옳은 지적이다. 국민의 대표를 선출하면서 국정수행능력이나 내용을 묻지 않고 임기를 딱 한 번만 수행하게 하는 것보다 잘 하면 더 오래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점은 누구나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단임제는 지나치게 작위적이라고 비판받을 수 있다. 선진국에서 단임제를 택한 경우도 찾아보기 어렵다. 과거 군부독재에서 이뤄진 장기집권의 가능성도 거의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유능한 정치인에게 장기적 국가과제를 설정하고 일관되게 국정을 추진할 수 있도록 하려면 중임을 제한하는 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4년 중임제는 5년 단임제보다 객관적으로 나은 제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5년 단임제는 역사적 맥락이 1인 장기집권의 가능성을 차단하려 한 의도를 가진 것이지만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재집권을 염두에 두지 않고 소신 있는 국정의 구상과 운영이 가능할 수 있다는 점이다. 재선을 위한 선거과정에서 어떤 평가를 받느냐를 의식하지 않고 국정을 운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책임정치가 가능할 수 있다. 물론 전두환, 노태우의 사례에서 보듯이 무책임정치도 또한 가능하다.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겠지만,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새로운 정치인을 선택할 기회도 많아진다. 모든 제도에는 장점과 단점이 공존한다. 단임제는 반드시 단점만 가진 제도는 아니라는 점이다. 중임제를 주장하는 입장에서 근거로 드는 단임제의 단점은 중임제의 경우에도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두 번째 임기에는 단임제와 동일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운영의 문제라고 생각된다. 또 단임제는 장기적인 국정과제를 일관성 있게 추진하는 데도 문제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국정운영이 대통령 한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통령이 소속된 정당이 차지하는 비중이 늘면 늘수록 정책은 정당 차원에서 구상되고 추진되기 때문에 대통령의 단임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다. 국회의원과 대통령의 임기를 일치시키는 구상도 문제가 있다. 이런 주장은 이미 학계에서도 제기된 바 있다. 수시로 치러지는 선거, 여소야대(與小野大)의 국회에서 겪는 대통령의 괴로움을 모를 바 아니다. 사회적 갈등이 일상화되고 선거비용도 만만치 않다고 한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와 임기개시시기를 일치시키면 문제는 없는가? 이 경우 대부분 여대야소(與大野小) 정국이 형성될 것이다. 지방자치단체의 장 선거와 의회의원 선거는 언제나 여대야소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의회다수당을 차지한 여당에 의해 뒷받침을 받은 대통령은 국정을 수행하기가 한결 쉬울 것이다. 그러나 여대야소의 정국에서 우리는 어떤 경험을 했던가? 이성적 토론이 실종된 국회, 타협에 의한 합리적 방안의 도출은 포기되고 일방적 관철이나 목숨을 걸었다는 ‘결사저지’가 다반사 아니었던가? 우리의 의회는 이제 변하였는가? 변화의 조짐은 보이지만 변했다고 하기엔 아직도 멀었다. 이런 현실에서 여대야소 구도는 여당의원들에 의한 대통령 국정운영의 일방적 지지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사안에 따라 합리적 대안이 제시되고 이성적 토론이 이뤄지기보다는 자기정파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와 반대파에 대한 무조건적인 결사저지가 나타날 수 있다. 헌법이 권력분립주의를 택한 근본적 이유가 적절한 견제를 통하여 국민의 기본권보장에 기여하게 하려는 것이라면 이러한 견제와 균형의 원리는 더욱 약화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2006년 7.26 재보궐선거일인 26일 서울 성북구 월곡4동 한 아파트 단지내에 마련된 투표소에서 주민들이 투표를 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수시로 이뤄지는 선거는 주기적으로 또는 수시로 국민의 의사가 표출되는 과정이며, 국정운영에 국민의 의사가 반영되는 기회라고 볼 수 있다. 비용이 많이 드는 선거문화를 바꿔나간다면 사회적 비용의 발생도 굳이 걱정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금권정치가 문제이지, 선거가 자주 있는 것이 문제는 아니다. 4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경과한 뒤에 국회의원총선거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다면 그 과열양상은 상상 이상일 것이다. 4년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지 않다. 미국 연방의 대통령 임기는 4년이지만, 의회 하원의원 임기는 2년, 상원의원은 6년이다. 상원의원은 2년마다 3분의 1씩 개선되어 2년마다 의회선거를 통하여 대통령의 정책수행에 대한 중간평가가 이뤄진다. 수시로 이뤄지는 선거를 좀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시키고 또 생각할 수는 없을까? 대통령 임기를 4년 중임제로 바꾸고, 국회의원과 대통령의 임기를 일치시키는 것은 현재의 제도보다 나은 부분도 있다. 하지만 반드시 그 장점만 나타나고 단점이 나타나지 않으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 제도를 바꾼다고 현재의 제도가 가진 문제점을 불식한다고 할 수도 없다. ‘국민적 합의 수준이 높고 이해관계가 충돌하지 않는’ 대통령 4년 중임과 국회의원과 대통령 임기의 일치 등 의제에 집중하여 ‘대통령에게 주어진 권한과 의무를 행사하지 않아야 할 뚜렷한 사유가 없는 한, 너무 늦지 않은 시기에 헌법이 부여한 개헌 발의권을 행사하고자’ 한다고 하니 노대통령은 조만간 개헌을 발의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개헌은 단순한 문구의 수정이나 조금 더 나은 제도로 만들고자 하는 단순한 발상에서 이뤄질 것은 아니다. 개헌은 그 대상이 헌법의 중요한 사항에 대한 것이어야 하고, 그 내용을 개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필요성이 있어야 하며, 그 사항에 대한 국민의 합의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내용에 대한 개헌을 하는 과정에서는 부수적인 내용의 개헌도 함께 이뤄질 수 있는 것이겠지만, 개헌을 추진하려면 우선은 이러한 중요한 대상과 그 개헌의 필요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대통령 임기와 선거일정의 조정이 다른 것보다 앞서서 개헌을 해야 할 만큼 그렇게 중요한 의제일까? 정치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다를지 모르지만, 국민의 기본권보장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국민들에게 대통령 임기와 선거일정 조정 등의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개헌논의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헌법이 가지는 기본권 제약요소를 찾아내고, 국민이 보다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제도를 확보하는 것이다. 군사문화의 잔재라 할 수 있는 일반국민에 대한 광범위한 군사재판 권한(제27조 제2항), 평등권을 침해하는 군인·군무원 등의 국가배상청구권 제한(제29조 제2항), 법관의 관료화·서열화를 초래하는 법원구성의 방법인 대법원장의 대법관임명제청권(제104조 제2항), 국민의 세금으로 이뤄지는 정당국고보조(제8조 제3항) 등 조항을 폐지 또는 개정하는 것은 몇 가지 예이다. 국민의 기본권보장에 정말 중요한 조문들의 개정이 없이, 그 장점이 나타난다고 장담할 수 없는 내용만을 위한 개헌이라면, 대통령이 그토록 우려하는 사회적 비용을 생각할 때 별 필요가 없다고 생각된다. 대통령 4년 중임제는 5년 단임제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4년 중임제로 바꾸면 5년 단임제가 나타내는 문제점을 없앨 수 있는가? 과연 다른 것을 미루고 그 내용을 바꿀 현실적인 필요성이 있는가? 좀 더 임기를 계속해서 수행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할 만한 정치인을 우리는 가졌던가? 단임제가 초래하는 정치왜곡이 그리도 심각한가? 국회와 대통령의 임기를 일치시켜 두 기관을 균질화하는 것이 그리도 필요한가? 오히려 국회의 의정활동의 내용을 바꾸는 게 먼저 필요한 게 아닌가?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헌법은 여러 문제점들이 있지만, 그래도 잘 손질하고 적절하게 메꾸면 우리 시대의 삶을 담아내는 데 큰 문제는 없다. 헌법을 바꾸면 정치가 바뀔 것이라는 안이한 환상은 금물이다. 일반적으로 헌법의 개정은 정치의 변화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다. 지금 굳이 개헌을 하자면 우선 국민의 기본적 인권의 보장을 먼저 생각하여야 한다. 정치적 계산은 그 다음이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599 | 추천: 0
유정배/ 참여와 자치를 위한 춘천시민연대 사무국장 춘천에도 ‘명동’이 있다. 서울사람들은 춘천에 명동이 있다는 말을 듣고 대개는 피식 웃어버리지만 드라마 ‘겨울연가’덕에 유명해진 그곳은 춘천사람들 정서에 큰 영향을 미친 곳이다. 소설가 한수산이 78년에 발표한 ‘안개시정거리’라는 작품에도 춘천명동이 언급되어 있듯이 그곳은 춘천의 청춘남녀들에게 사랑과 우정의 성장통을 앓게 했다. 내가 대학을 다닐 때만 해도 명동어귀에서 한 시간 정도만 서성이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날 수 있고, 가끔 풋사랑에 가슴 졸이던 그리운 얼굴들과도 조우할 수 있었다. 명동은 춘천에서 제일 큰 ‘중앙시장’이라는 재래시장을 끼고 있어 말 그대로 그곳은 춘천의 ‘중앙’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명동이 주변이 된듯하다. 중앙시장은 장사치들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어 졌고 명동에서 장사를 하는 이들은 오가는 인적이 줄어들고 있다고 하소연한다. 대형 할인마트들이 경쟁적으로 들어서면서 재래시장은 존립이 어려워졌고 노쇠한 상인들만 발길 끊긴 시장통을 쓸쓸히 지키고 있다. 또 도심지 활성화 사업의 일환으로 외지자본이 재래시장지역을 재개발하면서 그나마 그곳에서 생계를 이어가던 영세소상인들은 하나 둘 사라져가고 있다. 강원도와 춘천시가 수십억을 들여 중앙시장 외관을 알록달록하게 꾸미는 등 재래시장 활성화를 위해 애를 쓰지만 대형마트로 발길을 돌리는 소비자들을 막기에는 역 부족인 듯하다.   춘천시내 최고의 번화가인 명동 거리의 모습. 사진 출처 - 세계일보   강원도는 1999년부터 전국 최초로 해 마다 농어촌 주민들 가운데 자율적인 마을발전 역량과 의지가 높은 시범마을을 지정하여 사업비 5억원을 인센티브로 지원 하는 ‘새 농어촌건설운동’이라는 시책을 시행하고 있다. ‘내발적 발전론’에 근거한 이 사업은 주민이 마을 혁신의 주체가 되어 지역내부의 산업·기술·문화적 토대에 기반해 지역혁신을 꾀하는 자발적인 노력을 지원한다는 점에서 참여정부의 ‘신 활력사업’ ‘살기 좋은 지역 만들기 사업’등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시행과정에 대한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사업은 중국에도 수출되어 개혁개방 이후 발생한 지역 간 격차를 줄이고 농촌지역을 진흥하기위한 정책수단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고 한다. 만약 한미 FTA가 정부 뜻 데로 체결된다면 춘천 명동과 중앙시장은 어떻게 될까? 강원도가 자랑하는 ‘새 농어촌 건설운동’은 또 어떻게 될까? 춘천시가 중앙시장 현대화 사업을 위해 예산을 세워 집행한다면 월마트가 춘천시를 상대로 직접소송을 제기할 것이고 춘천시는 막대한 소송비용을 들이게 될 것이며 패소한다면 월마트의 손해를 보상해주지 않고는 견디기 힘들 것이다. 아마 강원도가 자랑하는 ‘새 농어촌 건설운동’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고 덕분에 예상치 않은 예산절감효과를 가져 올 것이다. 가뜩이나 공동화된 농촌지역에 한미 FTA가 밀려오면 ‘어메니티’를 살려 농촌을 일으킬 농민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아니면 그전에 내국인 대우 조항에 위배된다는 미국의 시비에 ‘새농어촌건설운동’을 알아서 폐기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2005년 기준 강원도내 총생산은 전국의 2.7%를 차지한다. 반면 전국의 수출액 가운데 강원도의 비중은 0.3%다. 강원도는 철저히 내수에 의존한 경제라는 이야기다. 한미 FTA가 체결되면 제조업이나 지식기반서비스업의 비중이 높은 수도권은 통상확대의 이익을 입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강원도 같이 제조업이 없으며 도소매업이나 음식숙박업 같은 영세서비스업이나 농업이 산업의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지역은 사실 어떤 대책을 세우기 어려운 일이다. 강원도 기업 중 그나마 산업적 의미가 있고 상대적 경쟁력이 있는 건설업도 지역의무 공동도급제 폐지 등 때문에 더 이상 지방공기업이 추진하는 대규모 사업에 우선권을 주장하기 어렵게 되는 등 도산 하는 업체가 늘어 날 것이다. 아니 어쩌면 강원도 건설업자들이 투정 부릴 지방 공기업자체가 없어지는 상황이 올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한미 FTA가 체결되면 수도권 규제완화가 지금보다 더 급격히 진행될 수밖에 없다. 2005년 9월, 춘천 명동의 대형 주상복합단지 시공업체가 죽림동 중앙시장 내 도로 포장공사 등을 이유로 중장비와 철거용역 직원을 동원, 점포 일부를 강제 철거하고 나서자 이에 놀란 상인들이 망연자실해 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세계일보   지난 11월 23일 경기발전연구원이 주관한 ‘한미 FTA에 대한 경기도의 대응방향’이라는 토론회에서 참석자 대부분은 FTA의 기본목표에 맞게 수도권 규제를 풀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이미 수도권 성장을 억제하기 위한 여러 제도와 정책이 무력화 되고 있고 외국자본이 투자하기 좋은 산업기반을 가지고 있어 FTA 체결 뒤 투자 효과는 수도권에 집중 될 것이다. 또 외국자본의 성장에 대해 국내 대자본이 내국인 역차별을 주장하며 수도권 규제철폐를 요구 하면 바야흐로 수도권의 덩치는 누구도 통제하기 어려울 만큼 비대 해질 게 분명하다. 한미 FTA는 국가의 운명과 미래가 걸린 중대한 일이라서 정부의 눈에는 국민경제기여도가 3%도 되지 않고 150만도 채 되지 않는 인구를 가진 강원도민이 희생하는 것이 당연하게 보일지 모른다. 아니, 오히려 세계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능력을 키워 세계에 도전하고 시장에서 승부를 거는 글로벌 인간형으로 바뀌어야 생존가능하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새기지 못한 탓을 톡톡히 치러야 한다고 강변할지도 모른다. 김진선 강원도지사는 새해에 강원도를 ‘경제선진도’와 ‘삶의 질 일등도’로 만들기 위해 기업을 100개 이상유치하고, 17개 재래시장에 186억원의 혁신사업비를 지원하며 농업진흥을 위해 도지사 품질인증제 100개 품목을 새로 지정 하는 등의 일을 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하지만 만약 정부의 질주에 의해 올 3월 한미 FTA가 체결된다면 도대체 우리 지사님은 강원도를 ‘삶의 질 일등도’로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춘천명동과 중앙시장을 잃어버린 춘천사람들은 어디에서 삶의 질의 뿌리가 되는 고향의 향기를 맡을 수 있을까? 원래부터 가진 것 없는 강원도는 대체 한미 FTA가 보여주는 휘황한 미래, 어디쯤에 있을 수 있을까?
2017-06-09 | hrights | 조회: 446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