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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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강대중(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윤동호(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이동우(변호사),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장은주(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광조/ CBS PD   ▲ 내성천의 모습 이명박 대통령이 ‘4대강 휴가’를 권유해 화제다. 내수 위축을 걱정하며 국내 여행을 권장하면서 내친 김에 4대강 인근 명승지를 휴가지로 추천했다. 한강에서는 임진마을과 율곡리 화석정, 영월 한반도 마을, 금강에서는 옥천 도리뱅뱅과 진안 원촌마을, 낙동강에서는 영주 무섬마을과 함양 개평마을, 섬진강에서는 임실 구담마을과 무안 하늘백련마을을 꼽았다. 다 가보지는 못했지만 직접 가본 몇몇 곳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다. 친절도 하시지. 이번 휴가철에 많은 분들이 대통령이 추천한 휴가지에 좀 가봤으면 좋겠다. 가서, 인간의 막개발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아직도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남아 있다는 기적 같은 사실에 고마움을 느꼈으면 좋겠다. 그런데 대통령의 휴가 권유를 들으며 정말 궁금한 것이 하나 생겼으니, 같은 여행지를 좋아하는데 어쩌면 서로 생각이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몇 년 전 겨울 경북 영주 무섬마을에 다녀온 적이 있다. 낙동강의 지류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사행천인 내성천이 뱀처럼 물줄기를 휘감아 도는 곳에 있는 한적한 마을이다. 육지속의 섬이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얼핏 보면 강물이 마을을 둘러싼 듯하다. 드넓게 펼쳐진 모래톱과 맑은 물, 그리고 그 위에 꾸불꾸불 놓여 있는 외나무다리. 무섬마을에 가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외나무다리에 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내성천을 건너는 외나무다리는 모양도 강을 닮았다. 뱀이 길을 가듯 휘휘 돌며 강을 건넌다. 얼핏 보면 다리는 몹시 허약해 보인다. 여름철 큰물이 나면 다리는 아마 물길에 휩쓸려 내려갈 것이다. 하지만 외나무다리를 조심스레 걸어서 건너 본 사람이라면 강의 곡선과 조화를 이루며 뱀처럼 굽이치는 외나무다리가 가슴 속에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내성천의 강물과 외나무다리가 만나서 이루는 조화 속에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와 지혜가 담겨 있을까. 그런데 몇 년 전부터 그 아름다운 내성천의 풍광이 망가질 위기에 처했다는 경고가 나오기 시작했다. 4대강 사업으로 내성천의 모래톱이 점점 유실되고 있는데다 4대강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되고 있는 영주 댐이 건설되면 무섬마을을 포함한 내성천의 절경들이 훼손될 것이라는 경고였다. 이런 상황에서 4대강 사업을 고집스레 강행한 대통령이 무섬마을을 4대강 주변의 명소로, 휴가지로 추천하니, 거기다 대고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참으로 난감하다. 대통령이 추천한 4대강 주변의 명소들은 4대강 사업으로 유명해 진 것이 아니다. 오랜 세월 자연이 만들어 놓은 풍광과 그 자연에 거스르지 않고 조화를 이루며 살아온 인간, 그리고 그 위에 켜켜이 쌓인 역사가 있어 사람들의 발길을 끄는 것이다. 4대강을 청계천 같은 인공하천으로 만들고 있는 대통령, 그는 무섬마을 외나무다리를 걸어봤을까?
2017-07-21 | hrights | 조회: 277 | 추천: 0
고유기/ 민주통합당제주도당 정책실장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풀꽃’이라는 제목의 이 짤막한 시는 얼마 전 어느 회사의 간판에도 적혀 있었다. 마침 그 회사 건물이 늘 지나는 길가에 위치해 있어 한 계절 동안 이를 음미하고 다녔는데, 쓰지 신이치의 <<행복의 경제학>>에서 소개된 어린왕자의 이야기와 매우 상통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별에서 저 별로 여행을 하다 지구라는 별에 내린 어린왕자는 5000송이의 장미가 피어있는 정원을 발견하였다. 어린왕자는 자신의 작은 별에 혼자 두고 온 한 송이의 장미를 생각하며 엉엉 울고 말았는데, 그 때 여우가 나타나 어린왕자를 달래며 말한다. “ 너의 장미가 그토록 소중한 게 된 건, 바로 네가 그 장미꽃에게 많은 시간을 들였기 때문이란다.” 독일의 아동문학가 미하일 옌데가 오래 전에 발표한 <<모모>>라는 동화에서도 ‘시간’은 이야기를 관통하는 주제였다. 이야기의 주인공 모모는 단지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하는 아이였다. 그것이 그 아이의 ‘재주’였다. 그럼에도 마을 사람들은 모모를 통해 희망을 얻고, 고민하던 문제의 답을 찾았다. 싸우던 사람들도 화해하게 되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마을에 ‘회색 신사’들이 나타나 사람들에게 새로운 것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빨리 일하고, 시간을 아끼고, 명성을 쌓고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 마을 사람들은 여유 없이 바쁘게만 살아가게 되었고, 모모는 뭔가 잘못됐다 생각을 하게 된다. 회색신사들은 다름 아닌, 사람들 저 마다에게 있는 ‘시간의 꽃’을 훔치는 ‘시간의 도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결국 모모는 거북이와 시간 관리자인 호라박사와 힘을 합쳐 시간 도둑들을 물리쳤고, 사람들은 다시 밝아졌다. 시간이 예전처럼 풍부해진 것이다. 작년 여름, 얼마 동안 강정마을에 있으면서 나에게 가장 두려운 ‘적’은 공권력의 무분별한 탄압이나 안보의 이름으로 가해지는 여러 종류의 폭력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시간’이었다. 작고 약한 존재들에게 시간이란 거대한 물리력을 동반한 권력과의 싸움에서 참으로 힘겨운 적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그 ‘시간’이야말로 적이 아닌 작고 약한 존재들이 함께 꿈을 꾸는 방법을 알게 하고, 각자를 풍부하게 이끄는 매우 소중한 친구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시간’은 자세히 보는 것을 허락하는 유일한 친구다. 자세히 본다는 것은 오래 본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것을 통해 비로소 존재의 존귀함과 존재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할 수 있다. 빨리만 지나치는 세상살이에서는 자신을 둘러싸고 존재하는 것들을 놓치고 말기도 하지만, 정작 자신은 어떠한 태도로 살아가고 있는가 조차 지나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시간’을 친구로 한다는 일은 자신을 소중히 키워가는 일일 뿐만 아니라, 행복해지는 길일 것이다. 모모가 모든 마을 사람들의 친구가 되고 행복해질 수 있었던 것은 마을 사람들 각자에게 있는 ‘시간의 꽃’과 진정 친구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 '학교→ 학원→ 학원→ 학원→ 집으로' 한국의 어린이들은 올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행복도 꼴찌를 기록했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부탄은 가난하지만 사람들이 행복한 나라로 알려져 있다. 부탄의 4대 국왕, 지그메 싱기에 왕추크는 아직 이십 대의 젊은 나이이던 1972년에 각국의 정상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이 말을 했다고 한다. “GNP보다는 GNH가 더 중요합니다” 그는 경제선진국 영국 옥스퍼드대 출신이었다. 부탄은 2008년 공포된 최초의 헌법에 GNH(국민총행복)를 중심개념으로 반영하였다. 그야말로 행복이 국가발전전략인 셈이다. 쓰지 신이치에 따르면, 2006년 영국의 한 대학이 세계 각국 80만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행복도 조사에서 부탄은 세계 8위를 차지했다. 일본은 90위였고 한국은 103위를 기록했다. 올해 UN이 발표한 행복보고서에서 한국은 56위를 기록했지만, 보고서는 “특히 한국 등 동아시아 국가는 유엔 인간개발지수 같이 객관적 지표에 비해 설문조사 방식의 주관적 행복지수가 낮은 경향에 유념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부탄은 지구상 가장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지만 또한 행복한 사회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종교적 이유가 아닌 분명히 국가정책의 결과였다는 것도 상기해야 한다. 수년 전, 한 언론에 소개된 부탄 해외 유학생의 사례는 이를 잘 보여준다. 영국 케임브리지대에 다니던 한 부탄 유학생이 외국에서의 고소득 직장마저 포기하며 고국으로 돌아갈 결정을 했다는 것인데, 그는 다음과 내용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여행을 많이 하고 외국에서도 살아봤지만 그럴수록 우리나라에 있는 것들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아직도 부탄의 거의 모든 해외 유학생들은 고국으로 되돌아온다고 한다. 언론은 부탄이 국민보건, 교육, 환경 개선에 힘쓸 뿐 아니라, ‘뜬구름 잡는 일’이 될 수도 있는 국민의 ‘행복’을 증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라고 전하고 있다. 부탄이 ‘국민총행복지수’를 측정하는 핵심지표는 불과 아홉 개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시간의 활용’이다. 경제적 풍요와 물질적 만족이 곧 행복이라고 믿어왔던 세계에서 행복은 GDP순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내고 있는 부탄이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시간’이다. 행복의 뿌리를 시간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지속적인 성장이 불가능해지고,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미국과 유럽 선진국들도 GDP를 대체할 새로운 국가지표를 찾기 시작했다. UN도 올해 세계행복보고서를 내면서 “국내총생산(GDP)을 근거로 한 경제조사 방식이 국내총행복(GNP)을 측정하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고도의 산업성장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이미 충분히 불행한 사회가 되고 말았다. 단기간의 경제성장이라는 자랑이 그 불행의 씨앗이었음을 많은 사람들이 눈치 채기 시작한지는 오래다. 단기간에 이뤄놓은 경제업적을 지속하고 더 크게, 더 많이 쌓아가려 하다 보니 산업성장의 결과는 고통스런 일상을 힘겹게 버텨가는 대다수 국민들에게 더 이상 달콤한 열매로 남아있지 않다. 그럼에도 정부나 기업, 심지어 대부분의 지식인들조차 여전히 성장을 이야기한다. 아직까지도 경제성장은 국가의 중요한 목표이자 추구해야할 독보적인 가치이다. 성장은 크고 늘어나는 것인데, ‘마이너스 성장’이라는 틀린 말이 망연스레 유통돼 왔다. 성장이 마치 절대 진리의 키워드인냥 쓰이다보니, 나무도 ‘성장 시킨다’. 씨앗이 자라 ‘나무가 되는 것’인데 ‘나무를 성장시키는’ 것이 자연스러운 시대인 것이다. 채소 중 재배기간이 비교적 오래 걸린다는 시금치의 성장을 빠른 시간으로 단축시키는 파괴적 압축이 문명이 되는 시대인 것이다. 달걀도 부화되는 것이 아니라, 부화시키는 존재가 된다. 많은 사람들이 닭들의 평균수명이 30년이라는데 놀라곤 하는데, 단기간에 많은 양의 달걀을 부화시키는 닭들의 숨 가쁜 운명이 실은 그 달걀을 ‘만들고’, 사서 먹는 인간들을 놀라게 하는 것이다. 바야흐로 탈성장, 탈물질의 시대다. 최소한 경제적 풍요가 행복을 대체하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물질문명의 거대한 축적과 경쟁에 희생된 행복을 되찾으려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현상이 이를 증명한다. 이 때, 지금 한국은 새로운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다. 이번 대통령 선거는 한국 나름의 시간의 맥락에서나, 거대한 시대의 흐름 앞에서 우리 모두의 미래를 결정하는 참으로 중대한 갈림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라건대, 새로운 대통령은 거친 역사와 산업화의 험로를 통과해 온 국민 각자에게 ‘시간을 꽃’ 한 송이씩 선사해줄 수 있는 대통령이었으면 좋겠다. 물질의 성장을 바삐 따라야 하는 영혼들로서의 국민이 아닌, 영혼이 따라올 수 있는 충분한 걸음과 더불어 그 ‘시간의 꽃’을 가꿀 줄 아는 대통령이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국민의 행복을 가장 우선시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며 국민의 삶을 행복으로 이끄는 대통령이었으면 좋겠다. 쓰지 신이치 선생의 말대로, ‘시금치와 닭들의 시간을 기다릴 줄 아는 진정한 힘’을 갖춘 국가의 대통령이었으면 좋겠다.
2017-07-21 | hrights | 조회: 237 | 추천: 0
박현도/ 종교학자 “기름기로 번들번들해진 교수들이 학교 앞에서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날건달 같은 웃음을 흘리는 모습이 떠오른다. 물론 학교 돈으로 먹고 마시고 나오는 모습이다.” 이른 아침 다음에서 인문학 관련 검색을 하다가 귀곡자라는 블로거가 ‘교수 연봉을 줄이고 한국연구재단을 해체하는 것이 답이다’라는 제목으로 쓴 글에서 우연히 마주친 대목이다. 그는 지식이 아니라 연구비 따려는 욕구에 쾡 해진 교수들의 눈빛을 신랄히 비판하였다. 국가로부터 연구비를 얻어내기 위해 비판적 지식 탐구라는 학문의 정도에서 일탈한 대학사회에 대한 통렬한 일갈이다. 돈과 가장 멀어야 할 곳이 대학이고 훈장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 속담이 말하듯 선생 노릇하기가 쉬운 일이 아닌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연구비 수주하기 위하여 로비하고, 경쟁 교수와 학문이 아닌 개인적 감정으로 치고받고 싸우고, 연구비 빼돌리고 사적으로 횡령하고, 연구원이나 대학원생들의 업적을 뻔뻔하게 가로채고, 연구 계획서 만들 때는 나 몰라라 하다가 정작 선정되어 연구비를 받게 되면 슬쩍 이름 올려 공돈 받아가고. 말로 하자면 썩은 냄새 나는 비리가 끊이지 않는 곳이 대학가다. 낯짝이 두꺼워도 유분수지, 그래놓고도 지성의 최고 상아탑이라 자찬하면서 지보다 더 깨끗한 사회를 두고 감 놔라 배 놔라 한다. 어디 이뿐이랴. 사회정의, 약자보호 운운하면서 몇 년 째 똑같은 강의록을 우려먹으며 놀고먹는 교수들 연봉에는 손도 못 대면서 학내 청소는 인건비 아낀다는 명목 하에 용역에 맡기고 나 몰라라 한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모 대학 총장이 사석에서 필자에게 연구는 안하면서 억대 연봉 받아가는 교수들의 행태는 범죄와 다를 바 없다고 개탄하면서 대학 개혁의 주체도 대상도 교수라고 강조한 적이 있는데, 동감 백배다. ▲ 2010년 3월 '대학거부선언'을 한 김예슬(24)씨. 사진 출처 - 한겨레 우리 사회에서 가장 비판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대학이다. 이종찬 전 국정원장은 90년 3당 합당 이후 노태우 정권부터 유독 교수들을 중용하는 경향이 강해졌다고 했다. 폴리페서들이 많아지면서 대학은 권력에 기대어 기생하여 몸집과 힘을 키웠다. 사학은 자생독립하기 보다는 온갖 명목으로 국가 지원을 기대한다. 이를 위해 도움이 될 만한 전직 관료를 영입하고, 현직 관료는 훗날을 대비해 대학에 유리한 정책을 입안한다. 이러한 악순환이 지속되면서 자정이나 학문적 양심이라는 단어는 대학이라는 사전에서 삭제된 지 오래다. 반값 등록금 공약으로 순진한 20대 표를 얻은 대통령은 지난 5년간 공약(空約)을 성실히 잘 지켰고, 마지못해 압력을 넣어도 사학에 친한 언론의 힘을 빌려 반값 등록금의 비현실성에 대해 강력한 방어전선을 펼 수 있는 곳이 대학이다. 뭐, 반값 아니더라도, 굳이 오라고 애원하지 않더라도 입학하지 못해 안달병에 걸린 고객들은 널리고 널렸고, 이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꼬박꼬박 학비로 연 천 만원을 갖다 바친다. 그래놓고도 행여 마음에 들지 않은 과에 들어와서 전과라도 할라치면 해당 학과 교수는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고객의 입장이 아니라 판매자의 입장에서 손해 볼까봐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고객이 빠져 나가면 학과 존립이 어려울 수 있으니, 어떻게 해서든지 막고자 한다. 고객의 만족보다는 내 통장에 들어오는 월급이 더 중요하니까. 판매자와 고객, 갑과 을이 이렇게 완벽하게 바뀐 곳이 또 어디 있으랴. 지금처럼 공부보다 로비가 더 중요하다면 대학은 없어져야 한다. 연초 모 월간지에서 디지털 세계가 가속화되면서 지식의 대중화가 급격히 진행되어 100년 후 없어질 것 중 하나로 대학을 꼽았는데, 지금 같다면 그런 날이 빨리 오는 것이 더 좋겠다. 사회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는 이공계는 예외로 하고 말이다. 착취하면서 착취하는 줄도 모르고, 추악한 짓을 하면서도 추악한 줄도 모르고, 냄새나면서도 냄새나는 줄도 모르며, 고칠 곳이 있는 데도 고치지도 못하는 곳이 대학이라면 존립의 이유가 없지 않은가? 아님 지성의 보루, 상아탑이라는 말을 버리던가. 종교가 아편이 아니라 대학이 아편인 사회가 된 것 같아 못내 씁쓸하다. 아니라고 말 좀 해주소... * 이번호부터 박현도 선생님이 <수요산책>의 필자로 합류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2017-07-21 | hrights | 조회: 264 | 추천: 2
정재원/ 서울대 국제대학원 강사 최근 사채업자들과 소위 ‘주폭’들에 대한 대대적 단속이 한창이다. 전자는 구체적인 집단이고, 후자는 다소 추상적인 범주이기는 하지만, 공통적인 것은 이러한 문제들은 아주 오래 동안 사람들에게 공공연하게 고통을 주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국가나 시민사회의 그 어느 단위에서도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나 적이 없으며, 제대로 공론화된 적도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갑작스런 단속의 계기는 무엇인지가 궁금해지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사회의 반 범죄적인 요소들보다 자본주의 사회의 고유한 요소들이 우리네 평범한 삶을 일상적으로 위협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전적인 혹은 거대담론적인 착취와 억압, 갈등에 대한 관심에 비해서 일상적으로 우리의 삶을 위협하고 인권을 유린하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국가와 사회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사실상 국가가 사회적 보장을 포기한 채 벌어지는 무한 경쟁, 약육강식으로 점철된 우리 사회에서 국가는 수많은 주변적, 한계화 된 직업과 집단들의 양산을 방조해 온 것이 사실이다. 문제는 비정규직 문제나 성소수자 문제, 다문화 가정 문제, 이주 노동자 문제 등등 전 세계적으로 일반적인 의제화가 되어 있는 사회 문제들에 대해서는 연구의 대상이 되고, 여론화되기도 하지만, 비공식, 비생산, 반범죄적 영역에서 기생하는 집단들이 야기하는 심각한 사회문제들에 대해서는 무서우리만치 무관심하거나 범죄를 다루는 사람들의 업무 정도로 치부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한계적 집단들 중 가장 해악적인 집단이 바로 조직화된 범죄 집단이다. 문제는 이들이 지배하는 영역은 매우 다양하고, 비대하며, 인권유린의 사각 지대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존재는 코미디나 영화의 소재가 될 정도로 묵인되고, 일상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우리 모두가 방조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이들에 의한 여성 인권 유린은 우리 주변에서도 일상화되어 있다. 마약이나 무기 거래 등의 제약이 상대적으로 큰 우리 사회에서 이들이 기생할 수 있는 곳은 성매매 산업 등으로 한정되어 있다. 제약이 큰 만큼 여성을 성매매로 끌어들이려는 전략은 매우 집요하다. 기업과 관료, 언론계, 정계 등등 수많은 남성 ‘조직’들은 성접대 문화 등을 매개로 이들과 끈끈한 동맹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러한 성접대비는 이들의 주요 자금줄이 되어 왔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성매매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볼 필요가 있다. 즉, 이러한 남성 중심적 사회 내에서 주변화 되고 비공식적인 영역에 종사하는 이들 내에서의 착취 고리의 맨 아래에 성매매 여성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바로 성산업과 성매매 여성들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조직화된 범죄 집단들이 정치, 경제 엘리트, 관료들과의 결탁 속에서 공공연하게 백만 단위 이상의 여성들을 착취하여 막대한 이득을 올리고 있다. 여전히 각종 빚의 굴레에 묶여 있는 여성들도 많을 뿐 아니라, 성매매를 시작한 나이가 10대였던 여성들이 80%를 넘고, 정신적 장애를 가지고 있는 여성들이 10% 이상이며, 성매매 종사 기간 동안 각종 육체적, 정신적 질병을 겪는 비율과 남성들로부터의 강간 등의 폭력의 경험이 일반 여성의 2-3배에 이른다는 몇 가지 사실만으로도 성매매를 노동으로 보거나 합법화를 추구하는 이들이 주장하는 ‘당사자주의’나 ‘자발성론’은 어불성설이다. 게다가 이러한 주장은 조직범죄 집단과 같은 중간 매개체들의 존재와 역할을 알지 못하고 하는 주장이기에 그 문제가 심각하다. 성매매는 100% 가까이 남성이 구매하고 여성이 구매 당하는 일방적 형태가 주를 이루며, 여성이 상대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없어 ‘성적 자기 결정권’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인권 침해 행위이자 화폐를 통한 강간 행위이다. 또한 성매매의 특성상 특정 연령대를 넘어서는 성매매 종사를 지속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후 제대로 된 노동과 삶을 영위하기 매우 어렵게 만드는 인간 파괴 행위이기도 하다. 또한 한때의 호기심, 일탈 혹은 가정 문제와 빈곤 등의 이유로 시작한 성매매는 많은 여성들로 하여금 중요한 시기에 삶을 영위하기 위한 지식, 기술 등을 익히지 못 함으로 인해 평생 주변화 된 삶을 살도록 강제하는 끔찍한 범죄 행위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성매매 문제는 결단코 여성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복지 후진국인 우리 사회의 중하위 계층 남성들 중 상당수가 스스로 노동 시장에서 이탈하여 성매매 여성들을 매매하는 전 과정에 개입하여 이익을 얻거나 이와 직간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다. 조직화된 범죄 집단은 이렇게 언제든지, 얼마든지 자신의 조직원들을 확보할 수 있다. 성산업에 근간을 두고 있는 이들 집단들은 노동자들의 파업 파괴나 노점상, 철거민 탄압에 동원되는 용역 깡패의 주축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성매매 문제를 ‘여성’, 그것도 특정 여성 집단(현재의 성매매 여성)의 문제로만 보지 말고, 남성을 포함한 모든 인간에 대한 착취와 억압으로 보려고 노력하면, 성매매 문제란 우리 모두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그 축소 및 철폐를 위해 싸워 나아가야 하는, 우리 사회에서 방치하고 있는 인권 유린의 최악의 사각지대의 문제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지금과 같은 성산업과 성매매 접대 문화 구조가 지속될 경우, 향후 여성 이주 노동자나 결혼 이주 여성과 그 자녀들까지도 이러한 착취 구조에 얽매이게 될 것이며, 통일이 된다고 하더라도 시장 경제 체제에 적응하지 못 하는 수많은 북한의 여성들이 성매매 여성화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리고 강조하건데, 이러한 과정은 반드시 수많은 남성들도 주변화 시키는 일이 동반된 과정일 것이다. 성매매를 매개로 발생하는 수많은 부적절한 관계, 부패, 유착들이 맺어지는 성매매 업소에 대한 폐쇄 지향적 정책이 부재한 그 어떤 경제민주화, 양성 평등, 복지 논의도 다 허상이다. 여성에 대한 인권 파멸 뿐 아니라, 남성 역시도 스스로 여성에 대한 성착취라는 범죄를 자행하게 하는 집단의 일원이 되게 만드는 현재의 사회 구조는 하루라도 빨리 타파되어야 한다. 세계 10위의 경제 대국의 지위에 걸맞는 수준의 누진세 등을 도입하고, 이를 바탕으로 세계 최하 수준의 공공 서비스업의 확대와 세계 최고 수준의 자영업 축소, 그리고 현재 세계 최저 수준의 복지를 보편적 복지 원리에 입각한 복지 혁명이 국민의 복지 그 자체 뿐 아니라, 여성을 착취하며 살아가는 집단과 그들이 통제하는 성산업의 축소, 그리고 성매매 종사 여성들의 탈성매매에 있어서도 긍정적인 효과를 낳을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2017-07-21 | hrights | 조회: 291 | 추천: 0
최정학/ 방송대 법학과 교수 현대사회에서 나타나는 범죄현상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범죄인 연령의 저하, 즉 소년범죄의 증가라고 한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지난 수십 년 간 소년범죄는 꾸준히 늘어나는 경향을 보이고 있고, 2000년 이후에는 매년 약 3만5천 건이 넘는 소년보호사건이 법원에 접수되고 있다(사실 이 숫자는 소년형사사건, 그러니까 소년범죄가 정식의 형사사건으로 처리되는 사건 수는 제외한 것이다. 그러므로 전체 소년범죄 건수는 이보다 조금 더 많을 것이라고 보면 된다). 뿐만 아니라 범죄의 내용도 예전보다 더 안 좋아졌을 것이다. 폭력이나 현금 갈취, 친구에 대한 괴롭힘 등은 예사고 잔인한 상해나 살인 사건도 가끔 등장한다. 얼마 전에는 몇몇 청소년들이 온라인에서 만난 대학생을 집단으로 살해하고 사체를 유기한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 범죄와 같은 사회현상은 여러 차원의 복잡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그 원인을 단순히 어떤 하나에서 찾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 사회의 소년범죄와 관련해서 이것이 교육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으리라는 점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책상에 붙들려 있어야 하고, 한 달이 멀다하고 시험에 대한 부담에 시달려야 하며, 또 여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어른들로부터 냉대에 가까운 무관심과 장래에 대한 엄혹한 불안을 오롯이 혼자서 견뎌야만 하는 현실에서, 이를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가 범죄와 같은 비정상적인 일탈행위로 나타날 수 있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추측해 볼 수 있는 일이다. 때문에 교육부와 같은 관련기관에서 이를 개선하기 위한 여러 대책을 마련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거니와, 이와 함께 증가하는 범죄에 대한 단기적인 대책으로 늘 제시되는 것이 그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것이다. 이미 법무부와 검찰도 일정 수준이상의 소년범죄에 대해 엄격히 처벌하겠다는 방침을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사실 이러한 엄격처벌주의 또는 강성의 형사정책은 비단 소년범죄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수년 전에 몇 차례 발생한 미성년자에 대한 성범죄를 배경으로 해서 우리 형법은 이미 자유형의 상한을 30년으로(가중하는 경우에는 50년까지) 늘린 바 있고, 부가적인 대책으로 전자발찌의 착용과 성충동을 감소시키는 강제 약물복용조치(이른바 ‘화학적 거세’)까지 도입하였다. 또 상습범죄에 대해서는 이미 폐지된 ‘보호감호’제도도 부활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강하다. 소년법의 경우에도 이 법률이 적용되는 소년의 연령을 10 세로 낮추고, 관련 보호처분을 다양화하는 내용의 개정이 이미 지난 2007년에 이루어진 바 있다. ▲ 사진 출처 - 한겨레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그런데 이렇게 형벌을 강화하고 엄하게 처벌하는 것이 과연 범죄를 감소시키는 효과가 있을까? 전통적인 형법이론은 인간을 이기적이고 자기 행동을 철저히 계산할 수 있는 합리적인 존재로 보았다. 이와 같은 전제에서 범죄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초과하는 형벌을 부과한다면 그러한 범죄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이후 생물학이나 심리학, 심지어 사회학과 같은 지식의 발전은 인간이 그렇게 합리적이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쏟아내게 된다. 똑같은 상황에서도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일 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명백히 불이익이 초래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선택을 마다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다면 합리적인 형벌을 설정함으로써 인간의 범죄에 대한 충동을 제어할 수 있으리라는 전통적인 형법의 가설은 틀린 것일까? 지금도 이러한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의 이성에 대한 믿음이 우리 형법체계의 바탕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러한 전제가 적용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도 분명한데, 육체적·정신적인 어떤 결함으로 말미암아 범죄와 같은 일탈행위를 반복하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 즉 정신이상 범죄자와 상습범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가 된다. 여기에 사회적인 원인으로 말미암아 범죄로 나아가게 되는 성격 결함자들을 추가하는 것은 어떨까. 그리고 이 범주에 소년범죄도 포함될 수 있지 않을까. 기본적으로 범죄와 같은 해악을 이보다 더 큰 해악으로 제압하는 것은 최선의 형사대책은 아니다. 가능한 완화된 방법으로 범죄를 줄일 수 있다면 그것이 더욱 효과적인 것일테니 말이다. 형법이론이 범죄자의 ‘책임’으로 형벌의 양을 제한하려고 하는 것도, 특별한 범죄자들에 대해 형벌 이외에 다른 처분들을 마련해 놓은 것도 모두 이 때문이다. 소년 범죄인들에 대해 엄격한 형벌이 아닌 보호처분이 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모든 소년범죄에 대해 엄격한 형벌을 부과하면 어떻게 될까? 단기적인 범죄감소는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평생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직업 범죄인’을 양산하는 길은 아닐까?
2017-07-21 | hrights | 조회: 250 | 추천: 0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최근의 통합진보당 사건을 계기로 ‘사상 검증 논란’이 부각되면서 우리 사회의 정치사회적인 지형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달리 말하면, 우리 사회의 정치사회적인 역량이 과연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위기적인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비례대표 부정 선거’를 계기로 기본 인권 중 하나인 사상의 자유를 어떤 경우에 어느 정도로 어떤 방식으로 허용 혹은 제한할 수 있는가가 정치사회적인 의제로 떠올랐다. 이 의제가 공적으로 설립된 것은 MBC의 <100분 토론>에서였다. 시민논객 중 한 사람이 패널로 나온 통합민주당의 ‘구 당권파’에 속하는 이상규 당시 지역 국회의원 당선자에게 북한의 3대 세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이상규 씨가 그 물음 자체가 사상 검증의 의도가 함축되어 있고 사상의 자유를 침범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답할 수 없다고 하는 취지의 발언을 하자, 상대 진영의 패널인 진중권 씨가 이상규 씨에 대해 ‘일반 개인은 사상의 자유를 누릴 수 있지만 정치인으로서는 사상의 자유를 누릴 수 없다, 정치인은 자신의 사상적 입장을 정확히 밝혀 투표권을 지닌 시민들이 나름의 판단을 하는 데 도움을 줄 의무가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이다. 이른바 대표적인 진보 논객으로 손꼽히는 인물이 텔레비전 생방송 현장에서 정치인은 사상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없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주장한 것이다. 과연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며, 어떻게 받아들이고 혹은 어떻게 비판해야 할 것이며, 그에 따라 과연 현실적으로 어떤 사회정치적인 귀결들이 나올 것인가? 텔레비전을 보면서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직감적으로 <100분 토론>의 이 일련의 과정을 목격하면서 우리 사회가 대단히 위험한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회의원들이나 고위 관료들에게 불법적인 재산 형성을 방지하고 검증하기 위해 재산 등록을 하듯이, 만약 이들의 사상 형성의 과정에 대해 일일이 고백하도록 하여 ‘사상 등록’을 하도록 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유엔인권선언과는 달리 우리나라 헌법에는 ‘사상의 자유’나 ‘표현의 자유’에 대해 명시적인 규정이 없다. 유엔인권선언 제18조는 “모든 사람은 사상과 양심과 종교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 이 권리는 자신의 종교와 신념을 바꿀 자유를 포함하며, 혼자이건 다른 사람들과 공동적으로건 공적이건 사적이건 간에 교육, 관습, 예배 및 의식에 있어서 자신의 종교 혹은 신념을 표현할 자유를 포함한다.”라고 되어 있고, 제19조에는 “모든 사람은 견해와 표현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 이 권리는 방해받지 않고 견해를 주장할 자유를 포함하며, 어떤 매체건 제한 없이 정보와 생각들을 찾고 받고 나누는 자유를 포함한다.”라고 되어 있다.(강조 표시는 필자가) 그런 반면, 우리나라의 헌법에는 이와 달리 제19조에서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를, 그리고 제20조 ①항에서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그리고 제21조의 ①항에서는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를, 그리고 ②항에서는 “언론·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과 집회·결사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아니한다.”라고 되어 있을 뿐이다. 그런가 하면, 제37조 ②항에서는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라는 단서를 달고 있다. 물론 헌법에 정확하게 명기되지 않았다고 해서 사상의 자유나 표현의 자유가 인간으로서의 기본 권리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할 수 없다. 헌법 제37조 ①항에서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이유로 경시되지 아니한다.”라고 했을 때, 열거되지 않은 자유와 권리에 무엇보다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국회의원과 같은 정치인이라고 해서 이러한 자유와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고 하는 조항은 전혀 없다. 모르긴 하지만, 이에 관련된 법률도 없을 것이고, 만약 그런 법률이 있다면 헌법소원의 대상이 되어 위헌으로 결론이 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만약 역사의 진보를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 중에서 중요한 기준 한 가지는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얼마만큼 보장 확대해 왔는가일 것이다. 그래서 예컨대 헌법 제37조 ②항에서 특별한 경우에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다고 한 것은 한편으로 보면 일종의 독소조항이라 할 수 있다. 이 조항이 독소조항이 되지 않으려면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라는 단서를 ‘국민의 자유와 권리가 현저히 침해되는 경우가 아닌 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할 수 없다.’라는 원칙을 제시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사상의 자유는 국가와 사회로부터 자기 자신의 내면적인 존재의 자율성을 보호받을 수 있는 기본적인 권리이고, 각자의 이러한 내면적인 존재의 자율성을 바탕으로 해서 이른바 자유민주주의가 성립하는 것이다. 따라서 “국회의원 내지는 국회의원이 되고자 하는 정치인은 사상의 자유를 누릴 수 없다.”라는 주장이 과연 성립할 수 있는가를 따지는 것은 대단히 긴요하다. <100분 토론> 이후 계속 통합진보당 문제가 정치적으로 비화(飛火)가 되면서 이미 벌써 새누리당과 통합민주당 사이에 국회의원의 사상 검증 문제를 둘러싸고 정치적인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만 보아도 이 문제가 상당히 심중한 사회정치적인 사안임을 알 수 있다. 진중권 씨의 “일반 국민 개인은 사상의 자유를 누릴 수 있지만,”이라는 주장을 “일반 국민 개인은 사상의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라는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정치인은 사상의 자유를 누릴 수 없다.”라는 그의 주장을 “국민 개개인의 사상의 자유를 국가와 사회로부터 보호해야 하는 자가 바로 국회의원이다. 그런데 국회의원은 자신의 사상의 자유를 포기하지 않으면 국민 개개인의 사상의 자유를 보호할 수 없다.”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가? 진중권 씨가 그런 취지로 말한 것은 분명히 아니다. 저 앞에서 말한 것을 원용해서 말하면, 투표권을 가진 국민들이 국회의원 후보자가 지닌 사상이 자신의 사상과 일치하는지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정치인은 자신의 사상을 밝혀야 한다는 취지였다. 이러한 진중권 씨의 주장에는 심각한 오류가 게재되어 있다. 첫째, 사상이 행동을 결정한다고 하는 일종의 관념론적인 판단이 바탕에 깔려 있다. 둘째, 투표권을 행사하는 국민들이 이러한 관념론적인 판단에 의거해서 투표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셋째, 무엇보다도 투표를 포함한 정치적인 행위가 객관적으로 드러난 정치인들의 정치적인 행동에 의거해서 이루어지고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무시하고 있다. 윤리적인 판단의 대상도 당사자가 어떤 마음을 먹고 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행동했는가인데, 정치적 · 법적 판단의 대상은 말할 것도 없다. 사상의 자유는 한편으로 객관적으로 드러난 행동 외에 내면적인 주관적 상태를 대상으로 삼아 법적 · 정치적 판단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 헌법 제20조 ②항에서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에 근거한 것이다. 종교만큼 이른바 사상성이 강한 것은 없지만, 누구든지 간에 종교적인 사상을 근거로 정치적인 판단이나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종북논란, 양심의 자유 논쟁으로' 지난 22일 방송된 <문화방송> ‘100분 토론’에서 참석자들이 ‘통합진보당 어디로’라는 주제로 토론하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정치인의 사상을 검증해서 정치 영역에서 배제하려고 하는 것은 그 정치인이 향후 정치적으로 어떤 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은가를 미리 예측해서 그런 행동이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의 싹 자체를 잘라버리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책략은 특히 대적하고 있는 상대 진영에 대한 공격에 더없이 좋은 수단인 것처럼 비치면서 파당의 정치를 일삼는 자들에게는 대단히 현혹적이다. 그러나 그들의 정치적인 역량이 얼마나 협소하며 한편으로 파시즘적인 폭력성을 지닌 것인지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사상의 자유는 누구에게든지 자신의 내면적인 자율적 존재를 떠받치는 핵심이기에 이를 미연에 검증하고자 하는 것은 아예 개인성 자체를 삭제해버리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현실을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김일성이라는 개인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는 주체사상을 인민들의 뼛속깊이 새겨 예외 없이 일사 분란한 사회를 만들고자 하고 그 결과 심지어 ‘김일성 민족’이라는 말까지 만들어 쓰고 있지 않은가. 그런 상황에서 잘 모르긴 하지만, 정치인들은 물론이고 전 인민에 대해 국가적으로 사상 검증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제아무리 그럴 수밖에 없는 사회역사적인 조건을 제시할지라도 이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런 변명은 북한 사회의 정치적 역량이 부족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진중권 씨의 ‘정치인의 사상적 자유 불가론’은 이같이 말도 안 되는 체제 자체를 동조 내지는 옹호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냥 두고 볼 수 없다는 판단에서 나온 것이라 짐작된다. 어느 정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좀 더 거시적인 차원에서 슬기로운 판단을 했어야 하지 않은가 싶다. 좁게는 대선을 앞둔 민감한 상황에서 국민들의 대북 불안감을 한층 고조시켜 왜곡된 형태로 정치적 이득을 얻고자 하는 수구 보수 진영에 빌미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어야 한다. 넓게는 자칫 우리 사회 전체를 내면적인 사상을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되는 파시즘적인 고백 사회로 몰고 갈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어야 한다. 누군가가 나와 특히 첨예한 부분에 대해 사상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지면 불편한 건 사실이다. 그러한 불편함을 견디면서 서로의 입장에 따른 객관적인 결과를 최대한 조율해 내고자 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다. 나와 사상이 다른 자들을 발본색원하여 아예 정치적인 영역에서 몰아내고자 하는 자들이야말로 자유민주주의의 적이다. 정치적인 행위를 통해 서로의 정치 사상적인 입장이 일정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러한 정치적인 행위들이 서로 맞물리면서 논쟁을 불러일으킬 때, 왜 그런 정치적인 행위를 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해 그야말로 합리적으로 토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표현의 자유다.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한, 엄격하게 말하면 사상의 자유가 실현될 수 없다. 사상의 자유가 표현의 자유의 잠재태라면, 표현의 자유는 사상의 자유의 현실태이기 때문이다.물론 여기에는 현실의 권력 관계와 그 결과를 염두에 둔 여러 고려가 따를 것이다. 사회적으로 이질적인 사상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전제되어 있지 않고, 자신의 사상적 이질성을 합리적으로 옹호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의 사상적 입장을 고백하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폭력적이다. 그러고 보면, <피로 사회>를 통해 오늘날의 사회가 부정성을 바탕으로 한 억압과 배제의 규율사회가 아니라 긍정성을 바탕으로 한 성과사회로 패러다임이 전환되었다고 하는 재독 학자 한병철 씨의 주장은 적어도 여전히 국가보안법이 엄존하고 집단 무의식적으로 힘을 발휘하는 우리사회에는 들어맞지 않는다. 글의 모두에서 나는 현재 통합진보당 사건을 계기로 한국의 현실 정치에 불어 닥치고 있는 ‘사상 검증 논란’의 상황에 대해 우리 사회의 정치사회적인 역량이 과연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위기적인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고 말했다. 적어도 사상적인 차원에서만큼은 다양한 이질성을 수용함으로써 누구나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향유할 수 있도록 하고, 그 대신 그에 따른 정치적 행동의 결과에 있어서는 그러한 이질적인 입장들이 지닌 나름의 장점을 합리적으로 수렴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 문화가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만약 그 반대로 현재의 상황을 빌미로 파시즘적인 고백 문화가 사회적으로 크게 똬리를 틀게 된다면 비극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헌법 제69조에 나와 있는 대통령 취임 선서,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라는 내용을 최대한 열린 마음으로 미래지향적으로 해석하여 다양하면서도 균형 잡힌 합리적 사회를 건설하는 데 모든 정치인들이 노력하기를 바란다.
2017-07-21 | hrights | 조회: 230 | 추천: 0
권보드래/ 고려대 국문과 교수 제 1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완득이』(김려령 작)는 무엇보다 재미있는 책이다. 최근 영화화돼서도 좋은 호응을 얻었다고 들었다. 우연히 출간 전 한글 문서를 인쇄한 그대로 『완득이』를 처음 만났었는데, 독자를 혹하기 마련인 허튼 유명세나 화려한 표지나 말끔한 편집이 없었는데도 손에서 놓기 어려웠다. 한번 집어든 후엔 낄낄거리며 한달음에 읽어치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나님, 제발 똥주 좀 죽여주세요!”— 사실 진정으로 품은 살의라면 이런 식으로 발설할 리 없다. 무력한 어린아이도 아니고 짱짱한 10대 고등학생인데 말이다. 『완득이』는 주인공 도완득이 유독 자기만 괴롭히는 담임 ‘똥주’를 죽여 달라고 기도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담임 다니는 교회에 담임 죽여 달라는 부탁을 하러 오고, “안 들어주면 다음 주에 또” 온다고 협박하는 이 10대의 초상은 무섭기는커녕 마냥 흥겹다. 이놈은 적어도, 말 한 마디 없이 불온한 눈빛만 보내다 뒷골목에서 나를 겨냥할 재목은 아닌 것이다. 겉으로야 불량하지만 속으론 한없이 순량한, 첫 대사만 들어도 정이 가는 녀석 완득이. 녀석과 정 들이고, 난쟁이 아비며 핏줄 아닌 ‘삼촌’이며 알고 보니 속 깊은 ‘똥주’하고까지 낯을 익히고 있는데, 『완득이』가 갑자기 어리둥절한 제안을 건네 온다. 자, 이렇게 정들인 완득이가 베트남 여인의 자식이라면 어떻겠느냐고. 아마 초대면에서부터 완득이가 “저희 엄마는 베트남 사람입니다.” 이렇게 시작했더라면 반응이 전혀 달랐을지 모르겠다. 똑같은 완득이, 똑같이 불량한 듯 깊이 순량한 완득이였더라도 더디 정들이거나 달리 정들이지 않았을까. 적어도 ‘다문화’를 깊이 접한 적 없는 나로선 그러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이주민들이 많이 사는 동네인지라 거리에서 자주 부딪히긴 한다. 애들 다니는 학교며 어린이집에도 ‘다문화 가정’ 아이들은 있다. 이주민 밴드를 만난 적도 있고, 어쭙잖게도 사진전이며 강연회를 개최해야 했던 때도 있다. 그러나 ‘옆집 사는 완득이, 내 안의 완득이’를 만난 적이 없다고 해야 할까. 사진전을 주관했던 친구는 “그게, 다문화 가정 애들이라면 좀 달라 보여야 할 텐데요, 외모론 별로 분간이 안 되는데요, 사진전으론 글쎄….”라며 머리를 긁적거렸었다. 그러니 말이다. 이미 분간 안 될 만큼 ‘우리’이기도 한 사람들을 굳이 딱지 붙여 추려내고 싶어 했으니. ▲ 영화 『완득이』 사진 출처 - 씨네21 소설로서 『완득이』가 그러하듯, 인식론으로서 ‘그들은 이미 우리’라는 접근도 문제가 적진 않을 것이다. 『완득이』는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함직한 순간에도 우회만 하고 마는지 모른다. 보급품 햇반을 뺏어먹고 자율학습 시간에 드르렁 코 고는 ‘똥주’는 빈곤층 지원책이며 고교 교육의 문제에 딴지걸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 점이 깊이 드러나진 않고, 인물들의 유쾌한 건달기와 진지한 사회적 현안이 어떻게 통합 수 있을지 또한 속속들이 탐색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우리’이며 그들의 자산이 우리 자산이듯 그들의 문제 또한 우리 문제여야 한다는 접근법도, 어떤 점에선, 인정해야만 할 이질성을 해소시키고 사회․국가적 통합을 우선시하는 허점투성이 방안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설 한 편에 대해 세상 모든 문제의 해결을 요구할 수 없듯, ‘그들은 이미 우리’라는 생각이 지금 내 발판이 돼 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족하지 않을까 싶다. 대한민국에서 일하고 살고 성장해 가는 사람들 중 일부를 ‘밖’으로 따로 밀쳐내기란 불가능하다.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는 부차적인 문제다. ‘그들’이란 지칭이 우스울 정도로 완득이 들은 이미 이 사회에 깊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이주민을 ‘착하고 인간적인’ 존재로 그리려는 선의나 외국인 범죄율이 결코 높지 않다는 사실을 강변하려는 의분은 그것대로 값이 있을 것이나, 『완득이』는 ‘그들이 누구든’ 이미 같은 공동체의 성원으로서 살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새삼 일깨워 준다. 완득이의 생모가 베트남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정들인 완득이에 등 돌릴 수 없듯이, 설혹 ‘그들이 문제적인 존재일지라도’ 그 문제는 이미 ‘우리’ 공동의 것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또렷한 한국어에 익숙한 감성에― 완득이는 적어도 ‘이주민’에 대한 한국 사회의 초기값 설정이 더 이상 유효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지표다. 이주 노동의 역사가 20년을 넘고 ‘다문화 가정’의 2세들이 성년을 향해 자라나고 있는 오늘날, 상황은 ‘차이에 대한 관용’으로 접근할 수 있는 수준을 멀리 넘어서고 있다. 외국인 ‘며느리’들을 시부모다운 아량으로 품어주고 한국어와 한국 음식을 가르쳐 준다는 동화의 정책으로 과연 이 세월을 상대할 수 있을까. 이미 우리는 공동의 삶 속에 처해 있으며 공동의 미래를 향하고 있는데 말이다. 더 가야 할 길이 있겠지만 지금 나로선 『완득이』만도 좋은 참고서다. ‘다문화 가정’의 자식이기 전에 그냥 도완득이었던 완득이를 먼저 만났던 경험이 상기 새삼스러우니 말이다. 모쪼록 각색의 완득이를 만날 때 이 경험을 기억할 수 있기를. 나를 만나는 사람들 또한 성과 인종과 출신 이전에 나를 먼저 만나줄 수 있기를.
2017-07-21 | hrights | 조회: 259 | 추천: 0
마흐디 압둘 하디/ 팔레스타인 국제문제 연구소장, Head of PASSIA ‘팔레스타인 사례 : 무한 궤도 2012’ 삽화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팔레스타인 파벌과 시민사회가 사용하는 여섯 가지 궤도(경로)를 보여준다. 해당 궤도는 국가기구 건설, 화해, UN 청원, 협상 (요르단 주관), 선거(수반 및 의회), 그리고 대중저항 궤도이다. 위 궤도의 대부분은 동시에 진행되고 있으나 일부 궤도는 변화하는 상황과 외부 요인들로 인해 보류되고 있다. 1. 국가 기구건설 궤도 2009년 8월 25일, 살람파야드 총리가 이끄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13번째 정부의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팔레스타인 : 점령 종식과 국가건설>이라는 제목의 이번 2년짜리 프로그램은 <점령 상태에도 불구하고, 공정하고 효율적으로 국민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강력한 국가 기구건설>을 목표로 하였다. 세계은행(World Bank)은 이 프로그램의 진행 상황을 면밀하게 조사해서, 6개월마다 원조국의 포럼인 AHLC(특별 교섭 위원회)에 보고할 책임이 있었다. 프로그램의 막바지인 2011년 9월에 세계은행은 중요한 진전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강력한 국가 기구건설이라는 목표를 내세운 이 프로그램이 목적과 정책을 실행하는데 있어 상당한 진전이 있다. 정부의 실효성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분야인, 안보와 사법, 수익과 지출 관리, 경제 발전, 서비스 전달에서 팔레스타인 공공기관은 해당 지역과 그 이외 다른 국가의 그것과 비교해서 손색이 없다.> 그러나 세계은행은 팔레스타인 국가건설 과정을 더 진척시키기 위해서는 해결되어야 할 다음과 같은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고 밝혔다. <팔레스타인 민간 부문의 경제성장을 억압하는 이스라엘의 조치를 해제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조치들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천연 자원과 시장에 접근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민간 부문의 성장은 원조의 감소와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재정 위기에 따른 팔레스타인 경제의 취약성을 완화시킬 것이고, 여태껏 이루어진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 노력들을 강화시킬 것이다. 안보와 부패는 인적 자원이라는 문제에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당면한 또 하나의 문제다. 2. 파타와 하마스의 화해 궤도 2012년 2월 6일 도하에서 팔레스타인 수반이자 파타의 수장인 마흐무드압바스와 하마스 정치국장인 칼리드마샬은 경쟁 파벌인 양측이 이미 2011년 4월과 5월 화해 협정을 체결했지만, 실행되지 못했던 화해 과정을 회복하기 위하여 새로운 합의에 서명하였다. 이 새로운 합의는 주요한 쟁점 중의 하나를 해결하기 위한 것으로, 마흐무드압바스가 임시 합의 정부를 이끌며, 가자 지구의 재건과 함께 2012년까지 선거를 실시한다는 약속이다. 그러나 이 합의가 실행될 지 여부는 불투명하다. 왜냐하면 하마스 대표들과 다른 이들은 마흐무드압바스가 대통령과 총리 역할을 축적하기 전에, 팔레스타인 입법부가 먼저 기본법을 수정하여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하마스와 파타 양측의 움직임을 막는 다음의 문제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2011 화해 협정이 규정한대부분의 조항들이 실행되고 있지 않다. 예를 들어, 하마스와 파타 양측의 보안 부대의 통합이나 PLO(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의 개혁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3. UN 국가 지위 획득청원 궤도 2011년 9월 23일, 팔레스타인 수반 마흐무드압바스는 팔레스타인을 UN 회원국으로 인정해 달라는 팔레스타인 측의 정식 요청을 UN 사무총장에게 제출하였다. 2011년 12월에 129개 UN 회원국들이 팔레스타인 국가 지위를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유엔은 아직 결정을 하지 않고 있다. 유엔 청원이 받아 들여지기 위해서는 상임 이사국의 거부권 행사 없이 안전보장위원회 15개 국가 중 9개 국가의 지지가 필요하다. 안전보장위원회의 상임 이사국으로서 미국은 안전보장위원회의 9개국이 팔레스타인의 가입에 찬성할 경우 거부권을 행사하겠다고 여러 번에 걸쳐 단언하였다. 미국의 입장은 팔레스타인의 국가 승인이 UN 결의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상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2012년 10월 31일, UNESCO가 팔레스타인을 새로운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미국은 UNESCO에 대한 지원을 중단함으로써 빠르게 응답하였다. 4. 협상 궤도 – 요르단 2012년 1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대표단은 UN 국가 지위 획득청원의 대안으로 평화 과정을 재활성화 시키기 위한 마지막 돌파구를 찾기 위하여 요르단에서 회의를 시작하였다. 마흐무드압바스 수반은 요르단이 중재한 이스라엘과의 회담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직접 평화 협상을 재개함으로써 희망을 되살렸다고 말했다. 이스라엘이 마지못해 정착촌 건설 사업 중단을 10개월 연장하면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회담이 중단된 지 16개월만에 회담이 재개되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후원으로 압둘라 요르단 국왕이 이 회담을 주관하였다. “압둘라 국왕은 1967년 휴전선을 경계로, 독립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을 준비하면서 모든 최종 지위 문제(국가 지위, 예루살렘 지위 등)를 포함하는 모든 문제들을 다루는 팔레스타인-이스라엘 회담이 성사될 수 있도록 요르단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회담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 대표단으로부터 ‘협상’보다는 1월 초부터 암만에서 열린 이전 회담의 결과에 초점이 맞추어진 ‘예비적 회의’라고 여겨졌다. 팔레스타인측 최고 협상가인 사에브에레카트는 이스라엘 대표단에 안보 전문가가 포함된 것에 이의를 제기하고, 회의장에 들어가길 거부하면서 회의는 부드럽게 진행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이 정착촌 건설을 동결시키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한 1월 26일 이후의 회담에 참가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요르단의 특별한 관심사 5가지는 : 안보, 국경, 난민, 물, 그리고 예루살렘의 지위이다. 5. 선거 궤도 2011년 11월 중순, 파타와 하마스는 계속 진행돼 온 화해 회담의 일부분으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위한 선거(수반 및 의회)를 2012년 5월에 실시하기로 동의했다. 선거 실시는 민족통합정부의 구성,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구조조정, 선거 법정의 창설 보안대의 개혁에 달려있다. 2012년 3월, 하마스-파타 화해가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팔레스타인 중앙선거위원회가 선거를 실시할 수 없게 되었다. 중앙선관위의 최고 선거 책임자인 히삼쿠하일에 따르면, 최대한 빠른 선거일은 2012년 6월 이후일 것이라고 하였다. 가자 지구에서 하마스는 중앙선관위가 선거를 실시하기 전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절차인 가자 지구유권자 등록을 업데이트하는 것을 막았다(가장 최근의 업데이트는 2007년). 2012년 2월 중앙선관위 팀은 가자 지구를 통치하는 하마스 총리인 이스마일하니야 보좌관들과 회의에서 유권자 등록 업데이트를 거부당했다. 6. 대중 저항 궤도 국가기구들과 파벌들이 팔레스타인 문제를 진척시키지 못함으로써 팔레스타인 대중들의 양측에 대한 신뢰가 급격히 하락했다. 이로써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대중 행동(특히 비폭력적 행동주의)이 팔레스타인인들의 곤경에 대해서 국내 및 국제적 주목을 끄는 수단으로 더욱 중요해졌다. 대중행동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20세기 초부터 팔레스타인과 국제적 운동가들은 비폭력적 시위와 세금 파업을 대중저항운동으로 사용하였다. 5월 15일에 실시된 나크바(재앙의 날) 행사는 점령에 대항하는 국가가 후원하는 평화적 시위의 좋은 예이다. 2011년 11월 16일, 마흐무드압바스 수반은 팔레스타인 비폭력적 저항에 대한 자신의 지지를 공개적으로 약속하였다. 그는 “우리는 대중저항 등을 통해 우리의 권리를 지키는 방법을 안다. 나는 이 대중저항에 가능한 한 폭넓게 참가하기를 요청한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대중저항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단식 투쟁이었다. 이는 국제적 헤드라인을 오래도록 지배했던 무력 투쟁에서 팔레스타인이 돌아서고 있는 것으로, 팔레스타인 대중저항에 있어서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의미한다. 2011년 말 행해진 여론 조사에 의하면 팔레스타인의 61%가 고착된 협상에 반대하여 비폭력적 대중저항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카데르아드난은 이스라엘 사법 제도내에서 만연한 불법적인 행정 구금행위에 대한 국제사회의 주목을 이끌어낸 첫 팔레스타인 재소자였다. 행정 구금이란 구금된 자가 아무런 기소나 재판 없이 6개월까지 구금될 수 있는 관행이다. 그러나 이 상황은 무기한으로 연장될 수 있다. 이 관행은 국제 인권 기준, 기본적인 인신 보호법과 제4차 제네바 협정을 위반하는 것이다. 카데르아드난은 어떤 범죄로도 기소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역의 안보를 위협하는 활동’을 한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그는 체포된 후 2012년 4월 18일 석방까지 66일 동안 계속 단식 투쟁을 하였다. 그의 투쟁은 이스라엘 교도소 내 만연한 불법 행위와 상태에 국제적 언론의 관심을 끌었다. 4월 17일, 이스라엘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약 2,500명의 팔레스타인 정치범들은 '수감자에게 인간 존엄성을 회복시킨다'라는 매우 심플한 목적을 가지고 무기한 단식 투쟁을 시작하였다. 이들 중 몇몇은 13년 동안 독방에 감금되어 있었다. 그들은 또한 재판 없는 구금의 종결과 가족 방문의 복원, 교육적 자료와 언론에의 접근, 독방 감금 종결 등을 요구하였다. 단식 투쟁자들에게 영감을 준 인물은 66일의 단식 투쟁 이후 1981년에 죽은 아일랜드 반체제 인사 바비샌드가 아니고, 2011년 1월 국가 공무원의 괴롭힘과 수치심에 항의하며 분신 자살한 튀니지 시위자 무함마드 부아지지다. 이 단식 투쟁자 중에는 두드러지는 두 인물이 있다. 타에르할라흘라와 빌랄 디압이다. 이 두 사람 모두 70일 이상 단식 투쟁을 하였다 (기네스북은 가장 긴 이 단식 투쟁을 인정하지 않는다). 2012년 5월 15일자로 두 남자는 위독한 상태로 이스라엘 병원에 있다. 이스라엘의 상황 2012년 5월, 이스라엘 총리 베냐민네타냐후는 야당인 카디마에게리쿠드 연립정부 내각을 할당함으로써 연립 정부의 폭을 넓혀 가겠다고 밝혔다. 이는 하마스를 짓밟거나 헤즈볼라 및 시리아에 대항한 새로운 군사 행동을 준비하면서, 가자 지구에 대한 새로운 군사 작전을 하기 위한 ‘전쟁 정부’로 보인다. 이와 동시에 선제 공격을 개시하기 위해 ‘이란의 위협’을 계속 사용한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전선에서는, 이 새로운 연립정부는 두 국가 해결을 위한 1967년 경계에 대하여 여전히 어떤 합의도 하지 않을 것이고, 서안과 점령된 예루살렘에 이스라엘 정착촌 건설(500,000 이스라엘 정착민)을 계속해서 확장할 것이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이 인종차별적인 분리장벽 뒤에서 살고 있는 한, 이스라엘인들 대부분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보거나 상대하지 않는 것에 만족한다. 여섯 가지 궤도는 개방형이며, 모든 팔레스타인인들은 ‘무력화’된 상태로 존재한다. * 영문 원고 번역은 신영지(회원)님이 수고해주셨습니다.
2017-07-21 | hrights | 조회: 244 | 추천: 0
이은규/ 인권연대 '숨' 사무국장 . ? ?? . . . . . . !! 사무실 창문을 열었습니다. 5월의 따뜻한 숨이 후우욱 쏟아져 들어오며 환기를 시켜줍니다. 기분이 좋았습니다. 여기 이 공간에서 이렇듯 나른한 온도를 느낄 줄은 몰랐거든요. 그만큼 한겨울의 추위는 대단했으며 아직도 틈만 나면 그 한기가 되살아나고는 합니다. 따뜻한 햇볕, 잔잔히 일렁이는 바람. “여기 나의 5월이면 충분해.”호기롭게 널뛰기하는 마음을 가만히 다독이며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때 내 눈에 느닷없이(!) 선명하게 나타난 물체! “저것은 뭘까?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을까?” 횡으로 흐르면서 가만 가만 바닥으로 내려앉는 하얀 것. 천장을 올려다 보기도하고 창가 쪽을 바라보기도 하며 도대체 저 하얀 것이 어디에서 출현했는지를 분주히 추적했습니다. “뭐지? 먼지일까?” 다시 그 정체불명의 하얀 것에 집중했습니다. 모든 것이 일순간 정지된 가운데 침묵 속에서 그것만이 유일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천천히 허공을 흐르며 아래로 아래로... 내려앉는 궤적이 참 유려했습니다. “아 저 확실한 존재감... 멋진걸.” 궁금증은 곧 감탄으로 이어졌습니다. 처음엔 이것의 정체가 작은 거미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낡은 천장에서 하강하는. 그런데 거미는 나름 직선으로 내려오잖아요. 해서 다시 유심히 그것을 보았는데 아! 민들레 씨앗... “아 깜짝이야!” 바닥에 내려앉을 때쯤에야 녀석의 정체를 알고서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입니다. 영문을 모르겠더라고요. 왜 놀랐을까요? 여기 이 공간에 혼자 인줄 알았는데 다른 존재의 발견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전혀 의외의 것에서 깊은 존재감을 느꼈기 때문일까요? 분명한 것은 흐름을 타며 유유히 지상으로 낙하하는 민들레 씨앗의 위엄에 압도당했다는 것입니다. 엉거주춤 의자에서 일어나 책상너머로 목을 길게 뻗어 녀석의 낙하지점을 확인했습니다. 아주 느긋하게 누어버렸더라고요. 한참을 신기해하며 바라보았습니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여기서는 뿌리를 내리지 못할텐데...” 손으로 집어서 창밖으로 날려 보낼까 생각했지만 마음을 고쳐먹고 그냥 그 자리에 놔두기로 했습니다. 녀석은 또 흐를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어디로 가는지 어디에 뿌리를 내릴 것인지 정하지 않고 바람에, 공간에, 그리고 시간에 온전히 내어 맡기고서는 말이지요. “아! 저 미친 존재감! 나 너한테 반했다.” 가만히 누워있는 민들레 씨앗을 보고 고백을 했습니다. 깊고도 고요한 파문... 아마도 녀석은 이미 내 마음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린 듯합니다. 머지않아 내 몸 어디에선가 민들레꽃이 피어나겠지요. 상상을 해 봅니다. 입을 열어 말을 할라치면 민들레 씨앗이 풀풀 날리지 아닐까 하고. 생각만 해도 즐겁고 재미있네요. 그러고 보니 내 마음의 영토가 새삼 넓어진 것 같습니다. 이미 드러나 번다한 곳이 아니라 존재했으나 미처 몰랐던 혹은 버려두었던 미지의 영토가 말입니다. 민들레 씨앗은 그곳에 정착한 것 같습니다. 이 팽팽하고 뿌듯한 느낌대로라면 심장을 뚫고 금세 싹이 올라올 것 같습니다. 기분이 참 좋습니다. 그래요 지금 여기 5월은 민들레 홀씨를 품기에 참 알맞은 계절입니다. 한순간 한호흡이 경이롭습니다.
2017-07-21 | hrights | 조회: 254 | 추천: 0
신하영옥/ 전 여성단체 활동가 총선의 후폭풍이 가라앉고 있지 않은 듯하다. 소위 진보나 보수나 총선과정의 민주성을 문제 삼아 내홍을 겪고 있는 듯이 보이니 말이다. 한심할 따름이다. 광우병이며, FTA며, 여당의 밀어붙이기식의 부자정책이며, 산적한 정치적 과제를 앞에 두고 내분이라니, 더욱이 총선의 결과는 야당들에 긍정적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반성은커녕 내부 권력다툼에 연연해하는 모습이 불편하기만 하다. 원래 정치가 그런 것이라고? 그렇다면 앞으로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요구하는 일체의 언행을 삼가야 할 것이다. 정치란 선거철에만 반짝 국민 앞에 출현하는 것에 불과한 당신네들의 밥상 뺏기 놀음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 총선에서 후보공천과정의 비민주적 절차에 관한 얘기는 좀 들은바가 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총선의 결과에 실망했던 마음이 절망하다 못해 허망해졌다. 여성운동의 선배인 분이 야당의 예비경선후보로 출마했다. 여성운동을 통해 다져진 정책적 기반과 조직화의 노하우를 기반삼아 차근차근 지역에서의 입지를 넓혀가고 있었고,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키며 기대를 모아나가고 있었다고 한다. 지역의 수많은 여성들이 진보와 보수를 떠나서 여성의원을 만들어 새롭고 가치 있는 정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똘똘 뭉쳐 신나게 예비후보선거운동을 조직해나가고 있었다. 어쩌면 이대로 가면 공천 될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아니, 최소한 예비후보들의 경선이라도 기대하면서... 그러나 여성할당제가 버젓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후보를 배려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경선의 과정도 없이 위에서 내려꽂듯이 지역구후보를 선정하였다고 한다. 그의 그동안의 활동 방식과 내용을 보면 나로서는 그가 어떤 방식으로 지역민들을 조직하고 가치를 만드는 정치에 대한 희망을 불러일으켰을지 짐작이 간다. 아마도 후보공천을 받았다면 당선이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이것은 함께 활동했던 그 지역의 여성운동원들의 말이기도 했다. 여튼 짐작은 금물. 그동안 아무런 낌새도 없다가 총선이 임박해 다른 후보를 갑작스레 등장시켜 배신감도 들었으나 경선을 기대하면서 묵묵히 활동을 전개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과는 경선의 과정 없는 후보선정으로 끝나버렸다. 그리고 총선에서 패배했다. 책임은? 아무도 지지 않았다. 후보였던 선배와 선거운동원들은 상처를 입었다. 정치의 실체란 것이 권력을 잡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이 권력을 재생산하는 시스템일 뿐이라는 현실정치의 알몸을 보게 된 것이다. 그동안의 희망에 찬 활동과 노력은 권력의 끈이 없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한 여성은 그 과정을 똥통이라고 표현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우리는, 총선의 결과에 대한 실망보다 현실정치의 추악함에 더 절망했다. 그래도 그 선배는 차라리 좋은 경험이었다고 한다. 풀뿌리만이 희망이라는 것을 더욱 더 확신했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선거운동을 같이 했던 지역여성들과 함께 새로운 정치공동체를 꿈꾸고 일구어나가고 있다. 선거운동을 하면서 정치에 대한 희망과 가치 있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확산하고자 한 경험은 그 여성들을 다시 그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미련으로 작용했고 현실정치의 냉혹함 혹은 추악함을 본 경험은 정치를 정말로 변하게 해야겠다는 오기나 각오로 변화시켜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전의 자기 삶으로 돌아가기보다 무엇이든 선거운동기간동안 설레었던 그 느낌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먼저 무언가 해보자고,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선배를 추동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 새로운 정치, 여성들의 경험과 처지를 반영한 정치이면서 결과보다 과정이 깨끗한 양심적인 정치를 해보고자 시도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 스스로가 정치후보로 성장하고자 하며 나아가 지역민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킴과 더불어 가치를 만들어내는 정치에 대한 홍보대사로 활동하고자 하고 있다. 작은 공간을 만들어 지역민들의 소통의 장소로 만들고 자신들의 훈련의 장소로 만들며 무엇보다 즐거운 정치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중이다. 이것은 총선결과와 상관없이 그 지역여성들에게 좋은 경험이다. 이는 사적인 존재로만 살아왔던 여성들이 정치활동을 통해 사적인 것들이 결코 정치와 무관할 수 없다는 것, 그런데 그 정치란 것이 여성들의 경험의 장인 사적인 것들에 대해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사적공간의 질서가 통하지 않는 곳임을 경험함으로써 정치변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의 변화가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되고, 사적존재였으나 선거활동을 통해 공적존재로서의 자신을 경험함으로써 공적존재로서의 자존감의 경험이 있어서 사적인 존재로만 돌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의미를 가진다. 그동안 생활정치는 운동권으로부터 정치권으로까지 확대된 구호였다. 그러나 생활정치는 생활의 장을 담당하는 이들의 경험이 반영되지 않으면 그야말로 공허한 울림일 뿐이다.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들이 정치권에 들어가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소위 공적영역에서 일어나는 거대담론중심의 정책이 아니라 삶에서 겪는 다양한 문제들이 정책으로 입안되고 그 문제들이 거대담론들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으며 어떻게 해결이 가능한지를 사적인 공간에서 살아가는 자, 생활자들의 입장에서 접근해야 하기 때문이다. FTA는 경제논리나 정의의 문제로 접근하기 전에 삶의 문제, 생존권의 문제로 접근해야한다. 선거는 권력의 획득이라는 목표이전에 생활자들의 삶의 문제를 들여다보는 통로이자 소통의 과정, 민주적 정치를 실현하는 과정이다. 다만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선거과정이 엉망이라면, 그 논리는 약육강식의 논리 외에 다름 아니며, 결국 우리생활을 어렵게 하는 경쟁과 1% 신화논리의 답습일 뿐이다. 1%를 넘자는 작자들이 그런 행태를 해서야 그들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을까? 사적공간의 여성들이 그 경험을 가지고 공적공간으로 진입하고자 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미래가 희망적인 것은 풀뿌리들, 지역민들을 직접적으로 만날 수 있는 공간과 시간과 기술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활동이 좋은 결과를 맺는다면, 남성주도의 공적담론에 사적공간의 담지자인 여성들의 입장이 반영될 수 있다. 이는 공과 사의 경계를 허물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정치가 정치인들만의 말잔치나 진흙싸움이 아닌 생활의 문제를 다양한 입장에서 조율하고 희망을 논의하는 과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번의 경험을 통해 여성할당제가 지켜야 할 정의가 아니라 구색이었음이 확실해졌다. 할당제를 통해서는 남성정치를 바꾸어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여성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성적인 정치문화를 습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바꾸어낼 수 있는 것은 여성들 스스로 세력을 만들어 내는 것뿐이다. 현실정치 안에서 그리고 정치변화를 실현하기 위한 세력이 됨으로 해서. 그래서 그 선배와 여성들의 시도가 가치 있다. 이러한 시도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공=남, 사=여라는 공식이 해체되고 여성들의 많은 경험들이 공론의 장을 이루고, 이로 하여 정치적 담론이 변화하고 정치까지 변화했으면 하는 희망을 가진다. 어쩌면 이번선거는 실망보다는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희망이 될 수도 있겠다. 지금 정치권은 내분이 아니라 반성을 할 때이고 절망에도 새롭게 기지개를 켜는 이 여성들에게서 배워야 할 때이다.
2017-07-21 | hrights | 조회: 232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