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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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강대중(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윤동호(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이동우(변호사),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장은주(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홍미정/ 단국대 GCC국가 연구소 연구교수   2013년 3월 1일 사우디 경찰은 사우디아라비아 중앙(나즈드)에 위치한 까심 지역에서 보안 사범에 대한 공정한 대우를 요구하는 시위대 여성 15명을 포함하여 176명을 체포하였다. 까심 지역은 사우디 정치와 종교 영역에서 막강한 힘을 행사하는 가장 보수적인 와하비-살라피들의 보루이며, 2012년에도 이 지역에서 시위가 계속 발생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사우디아라비아 건설 이후 전통적으로 차별대우를 받아온 시아파가 밀집한 동부 지역에서도 산발적인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중앙에 있는 나즈드 지역과 걸프 연안에 있는 동부 지역은 지역 간 정치․종교 문화들 사이의 차이가 분명하다. 역사적으로 나즈드 출신들은 현대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을 건설하는 중추 세력이었고 현재까지 정치를 좌우하는 세력이다. 반면, 사우디 유전 대부분이 위치한 동부 출신들은 사우디왕국 건설과정에서 정복당한 사람들이며, 사우디의 주요 정치 영역에서는 거의 배제된 상태다. 그런데 2011년 2월 이후 개혁을 요구하는 시위들이 정치, 종교적인 상황이 전혀 다른 두 지역에서 동시에 빈번하게 발생한다는 것은 변화를 원하는 정부 반대파의 폭이 얼마나 넓은지를 가늠하게 한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인터넷 사용자들은 A-Z까지 모든 사람이 변화를 원한다면, 현재 제도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수감된 활동가의 사진을 든 사우디 여성들이 모든 정치범의 석방을 요구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이란의 프레스TV 인권 단체들의 주장에 따르면, 수천 명의 사우디 주민들이 ‘안보위협’이라는 이름으로 구금되어 있으며, 이들 중 많은 사람은 재판 없이 장기간 투옥되어 있고, 일부 사람들은 단지 정치 변화를 요구했다는 이유로 수감되어 있다. 그러나 사우디 당국은 정치범들을 수감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면서, 수감된 사람들은 모두 이슬람 과격분자들로 의심되는 ‘보안 사범들’이고, 2012년에 5천 명 이상의 이슬람 과격분자들이 구금되었으며, 이들 대부분은 이미 재판을 받았다고 밝혔다. 보도된 바에 따르면, 대다수 시위대가 내세우는 슬로건도 개인이나 집단들의 상황을 반영하여 수감자 석방, 바레인 파견 군대 철수, 실업 대책, 여성 운전 허용 등 다양하다. 특히 2011년 11월, 동부 지역에서 강경 진압으로 시위대가 사망한 이후에는 ‘사우드 왕가 타도’라는 반정부 슬로건도 등장했다. 2012년 12월 미국의 권위 있는 연구소인 카네기 국제평화재단이 내놓은 보고서는 시위가 사우디정부에 현재 시점에서 직접적인 위험은 아니지만, 이러한 불안정성이 영속할 수 있다고 보면서, 사우디아라비아의 정치적 불안정성은 ‘미국의 이익에 잠재적인 위협’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이 보고서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장기간 계속된 불만을 무시하고, 저항세력을 이란이 후원하는 급진주의자들로 취급하는 종파 카드를 활용함으로써, 진정시키기를 원하는 바로 그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사우디 정부의 강경 진압이 대화를 지향하는 온건 개혁파들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보고서는 ‘미국의 이익에 잠재적인 위협’인 정치적 불안정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사우디 정부가 저항 세력의 요구사항들을 전향적으로 수용하고, 정치 제도의 개혁을 추진해야한다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30년간(1977-2006) CIA 정책 분석가였으며, 미국의 중동 정책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브루킹스 연구소의 브루스 리델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점진적인 개혁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며, 미국은 임박한 혁명에 대비해야 한다고 밝힌다. 그는 2013년 1월 보고서에서 “미국은 사우디 개혁을 추진하거나 혁명을 막아낼 대안이 없다. ‘아랍 각성’은 사우디 역사상 최초로 혁명의 가능성을 창출하고 있다. 혁명은 오바마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 동안에 발발할 수도 있다. 2011년 2월, ‘아랍 각성’이 시작된 이후, 사우디 왕가는 자국 내의 불만 세력을 무마시키기 위하여 1천 3백억 달러 이상을 소비했다. 사우디 왕가는 여성들에게 권력이 없는 자문회의에 의석을 마련해 주는 무늬만의 개혁을 실행했다. 우리는 ‘최악의 상황’에 대해서 빨리 준비해야한다.” 2012년 12월 30일, 이란의 프레스 TV 인터뷰에서 알리 알 아흐마드는 “2013년은 사우디아라비아에게 매우 위태로운 한 해가 될 것이다. 사우디 전역으로 시위가 급격하게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전망하였다. 이와 같이 전문가들의 최근 분석에 따르면, 사우디 내에서 어떤 형태로든 변화는 불가피하게 보인다. 과연 절대 권력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사우디 왕가가 시민들과 권력을 공유하는 민주개혁에 성공할 수 있을까? 아니면, 혁명적인 변화가 초래되면서, 외부 세력들이 개입하고, 다양한 내부 파벌들이 경합하면서, 외부 세력과 내부 파벌 간의 이합집산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20세기 국가 형성기에 경험했던 커다란 지각 변동이 다시 한 번 초래될까?
2017-08-07 | hrights | 조회: 250 | 추천: 0
신하영옥/ 광명시민인권센터장   지난 25일 ‘최초의 여성대통령’이 취임했다. 그와 그의 부친의 생가 주민들은 징이며 꽹과리를 들고 나와 어깨춤을 추고, 많은 시민들이 기대와 희망에 부풀어 축하와 덕담, 소망을 전하는 장면들을 방송을 통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도 일말의 희망을 걸어본다. ‘여성’이니까... 여성주의 진영과 진보지식인들이 ‘여성이다, 아니다.’로 논쟁을 하는 동안 국민들, 많은 수의 여성국민들이 일생의 억압을 일소라도 할 듯, 진정 당당함으로 그/녀를 위해 투표장에 갔고 그/녀를 ‘찍’었다. 소위 여성운동 판에 있던 지인들 몇은 어머니가 자랑스럽고도 감격스런 모습으로 ‘다 너를 위해 찍은 거야.’ 라거나 ‘그동안 니가 주장한 여성대통령이니 얼마나 잘되었냐?’는 위로와 격려의(?) 말을 들어야 했다. 그리고 대다수 멘붕과는 다른 의미의 멘붕을 경험했다. “대체 왜? 여성들이...?”라는 질문, 그리고 “대체 그동안 나는 뭘...?”이라는 자괴와 ‘여성을 무엇으로 정의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 당혹해해야 했다. 여성주의를 지향하는 이들이 섹스와 젠더사이에서 방황할 때, 국민들, 특히 ’여성‘들은 주저 없이 ’여성‘인 그를 진보와 문화적 선진성이라는 자랑스러움- 그 안에는 물론 여성이니까 다를 것이라는 기대, 여성이므로 부정부패하지 않을 것 같고 사적이익추구보다 경제성장에 더 매진할 것 같은 기대를 포함할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으로 선택했다. 그리고 여전히 기대하고 있다. 다를 것이라는 것을... 나는 여기서 섹스와 젠더의 차이가 이미 국민들의 생활 속에서는 별 의미가 없음을 본다. 섹스와 젠더는 현실에서는 한 덩어리일 뿐이다. 그리고 실제로 섹스와 젠더는 상호의존하고 있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섹스는 젠더를 결정하고 젠더는 다시 섹스를 구속한다. 그것이 현실이다. 이론은, 그리고 여성해방을 기대하는 입장에서는 섹스와 젠더가 별개로, 혹은 젠더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 바람직한지는 모르지만, 현실에서 섹스는 딱 그만큼의 현실적 진보와 기대를 반영한 젠더를 기대하게 한다. 그를 찍은 대다수 여성들과 국민들은 만약 그가 여성이어서 선택했다면 ‘여성’이 가지는 남성과 다른 젠더적 특수성을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기대와 판단이 옳은가 그른가는 시간이 지나야 알 것이지만. 그러나 여성운동 세력은 그/녀가 생물학적 여성이긴 하지만 사회문화적으로 보통여성의 삶을 살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젠더적 여성이 아니라고 그/녀에게서 ‘여성’을 지우기 위해 애써왔다. 진보후보의 당선을 위한 것도 있고, 여성운동의 성과물이 그/녀에게 전유되는 것도 못마땅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반대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새로운 해석과 접근이 필요치 않나 싶다.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식이 지난 25일 여의도 국회의사당 광장에서 개최됐다. 이날 박 대통령은 현충원, 취임식장, 청와대 등 외부 행사에서 다른 복장을 선보였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하나는 ‘여성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 와 ‘여성도 대통령이 되어봐야 한다.’는 생각에는 섹스와 젠더를 구분 못하는 우매한 대중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남성중심의 ‘성정치’에 대한 신물과 낭패감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고 나아가 많은 여성들이 ‘여성 해방적 지향’을 내포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과연 대다수 여성들은 전체주의자의 후손, 그리하여 가부장적이고 독재적이고 성장주의적 자본지상주의자인 그를 선택한 우매한 대중인가? 아니면 남성들에 억압되고 소외되고 남성정치에 신물이 나 새로운 정치와 그로인해 새로운 남녀관계의 질서를 기대한 탈가부장제를 원하는 대중인가? 에 대한 명확한 분석이 나와야 할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성정치의 전략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공적인 삶과 사적인 삶의 경계 허물기를 위한 노력이 오히려 노이로제처럼 공/사 구분 틀에 여성해방세력들을 가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사적인 장에서 여성으로서의 삶의 경험이 없는 여성은 진정한 의미의 여성이 아니거나, 여성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이 그렇다. 생물학적 결정론으로 인해 억압당한 양성성을 회복하는 것이 여성주의해방이라고 한다면, 오히려 성역할구분을 해체하기 위해 여성은 공적인 영역에, 남성은 사적인 영역에서 더욱 많은 시간을 보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공적영역에서 남성처럼 사고하고 행동하던 여성들에게 ‘명예남성’이라 명명해왔다. 그러나 이 말은 여성들을 서로 소외시키는 말일 뿐, 진정 변해야 할 집단인 남성에겐 이로 인한 영향력은 없었다. 남성들은 누가 진짜 남자인지 묻거나 따지지 않는다.-물론 지난 대통령후보가 ‘진짜 남자’ 구호를 들고 나왔다가 대다수 여성들과 남성들에게 ‘팽’을 당했지만-그들이 인간과 시민을 대표하기에 그렇다. 정상인, 중산층, 남성이 아닌 이들은 인간과 시민의 범주에 포함되기 위해서는 검증절차를 거친다. 그런데 그 검증절차가 우습게도 인간과 시민의 범주에서 소외된 그룹들 내부에서 왜 먼저 발생되는 건지는 살펴봐야 할 일이다. 저 여성이, 장애인이, 성소수자가, 이주민이, 난민이, 청소년이, 빈민이 ‘레알’인가? 아닌가? 라는 검증절차... 다양성, 혼종성의 시대에 무엇을 ‘레알’ 이라고 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은 너무 근본적이고 복잡하다. 이제 질문을 바꾸어야 할 때가 아닐까 싶다. ‘준비된 여성’이라면 무엇을 준비했냐고? 그리고 보아하니 무엇이 준비가 덜 된 것 아니냐? 고, 더 잘 준비할 것은 이러저러한 것이 아니냐? 고 말이다. 여성/대통령으로서 취임식 당일 여러 차례 옷을 갈아입었듯이 정치문화도 새롭게 갈아엎길 기대해본다. 그러나 그/녀와 나를 비롯한 많은 여성들 간의 다름과 간극은 연대에는 틈과 거리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가능성이지만 그 틈에 배타성이 작동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는 위기이기도 하다. 5년 후에 그 위기는 여성전체에 대한 위기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어쨌든 가능성을 고민해본다. ‘국민행복’의 총량을 고려한 ‘경제성장’과 ‘복지’에 대한 가능성을... 국민의 행복이야말로 사람의 근본적 권리임으로.
2017-08-07 | hrights | 조회: 257 | 추천: 0
이광조/ CBS PD 요즘 인터넷에서는 조웅 목사라는 분의 인터뷰 동영상이 큰 화제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의 스위스 비자금 계좌와 사생활, 막후 실세에 관한 얘기부터 김정일과의 관계, 그리고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암살사건의 배후에 관한 얘기까지. 워낙 긴 인터뷰라 동영상을 다 보지는 못했지만 인터넷에 활자화 되어 떠돌고 있는 몇 가지 증언 내용만 보더라도 황당한 느낌을 피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증언의 사실 여부를 떠나 그가 스스로의 이력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나의 호기심이 발동했다.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얘기였기 때문이다. 책장을 뒤져 <김형욱 회고록>을 찾아내고는 황태성 간첩 사건 대목을 찾아봤다. 김형욱은 황태성 간첩 사건의 전모가 미군 당국에 전해진 경로와 관련해 당시에 떠돌던 두 가지 설을 언급하고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시중에 떠도는 풍문을 들어 알게 되었다고도 하고, 또 다른 일설에 의하면 황태성이 사형수로 수감되어 있던 중, 반혁명사건으로 복역 중이던 조응이라는 학생을 알게 되어 그를 통해 비밀이 폭로되었다고 한다.” 조웅 목사는 자신이 5.16 쿠데타에 참여했으며 황태성 간첩사건을 알게 되어 이를 미군에 알려주면서 5.16 쿠데타 세력과 갈라서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럼 김형욱이 회고록에서 언급했던 조응 이라는 학생이 조웅 목사인가. 그런데 학생 신분으로 5.16 쿠데타에 참여했다는 게 과연 가능한 얘기일까? 그런데 이와 관련해서도 조웅 목사의 증언이 전혀 근거 없는 얘기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단서가 있었다. <김형욱의 회고록>에는 쿠데타 모의 세력이 애초에 1961년 4월 19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쿠데타를 준비하면서 4.19 1주년에 맞춰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를 유도하기 위해 공작을 벌였던 일화가 나온다. 쿠데타 모의에 가담하고 있던 박종규가 기자로 신분을 위장한 채 몇몇 대학 학생회 간부들과 토론 모임을 가지곤 했다는 것이다. 학생들로 하여금 ‘4.19 혁명정신을 배신한’ 장면 정권을 뒤엎는 궐기를 하도록 유도하고 그 혼란을 진압하는 걸 명분으로 거사를 도모하려고 했다는 얘기다. 이 일화는 조갑제 씨가 “5.16 군사혁명 50주년 기념 연재”라는 제목으로 정리한 5.16 비사에도 나온다. 조응 이라는 사람이 학생신분으로 반혁명사건에 연루돼 복역하다 곧 출소했다는 것도 당시 쿠데타 세력 내부의 갈등으로 빚어진 일이 아니면 설명하기가 어렵기도 하다. 사진 출처 - 노컷뉴스 하지만 설사 조웅 목사가 얘기한 자신의 이력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의 여러 가지 주장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적어도 내가 아는 상식에서는 그렇다. 그런데도 내가 호기심을 갖고 책을 뒤져보게 된 데는 ‘도대체 조웅 목사라는 분이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저런 생각을 갖게 됐을까’ 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앞서 얘기했던 학생 데모 유도 같은 작업을 흔히 공작정치라고 부른다. 그가 만약 공작의 전모를 알고 계획적으로 거기에 가담했다면, 또 그의 증언처럼 지인으로부터 각종 암살사건의 내막을 전해 들었다면,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에게 세상은 권력자들의 음모로 가득 찬 암흑의 세계일 수도 있지 않을까. 진실은, 우리 눈에 보이는 환한 무대 위가 아니라 어두운 장막 뒤에 있는 것이다. 조웅 목사의 동영상이 화제가 되면서 걱정의 목소리도 적지 않은 것 같다. 사람들이 허황된 얘기에 너무 쉽게 휘둘린다는 거다. 맞는 얘기다. 내가 봐도 걱정스럽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보면 환한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곧이곧대로 진실로 받아들이다가는 바보 되기 꼭 쉬운 게 우리나라다. 대한민국의 치안과 법집행을 책임졌던 전직 경찰청장이 오늘 법정구속 되었고 국정원에서 내부의 불법행위를 외부에 알린 직원이 파면되고 고발되었다는 소식이 오늘 전해졌다. 둘 모두 공권력이 거짓을 조장하고 국민을 기망한 사건이다. 음모론이 없어지겠는가.
2017-08-07 | hrights | 조회: 242 | 추천: 0
정재원/ 서울대 국제대학원 강사 언젠가부터 어떠한 정치, 사회적 현상을 분석하는 틀들이 과도하게 단순해졌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게다가 어떤 용어나 개념, 그리고 논쟁 구도가 등장하면,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도 없이, 마치 요즈음의 유행가들처럼 잠시 들끓다가는 사회에 별다른 실질적 영향도 못 미친 채 사라지는 용어와 논쟁의 싸이클이 너무 자주 반복된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단순하게 나열되는 듯 한 과정 속에서 그 어느 누구도 문제의 본질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가령, 지난 대선에서 90%에 육박하는 투표율을 보였던 50대의 투표성향 변화는 분명 매우 중요한 이슈였다. 그러나 50대를 비롯한 투표성향에 있어서 세대 간 차이를 강조하는 학자들과 언론인들의 분석 글들은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짚어내지 못 하지 않았나 싶다. 주목을 끌었던 50대의 투표 성향 변화의 경우에도, 계급, 지역, 성별 등에 따른 자세한 분석을 하지 않은 채, 통째로 박정희, 전두환 두 독재 정권 치하에서 청년기를 보내며 격렬한 민주화 과정을 온 몸으로 겪었던 세대라고 일반화하는 것은 문제의 소지가 크다. 이들이 청년이었던 시절에 당시 대학생들 중 학부 시절 진지하게 운동의 정신을 이어갔던 학생들의 비율은 졸업 후 기득권층으로 적극적으로 편입하려고 하던 이들의 비율에 비해 극소수였다. 대학 시절의 정의감에 입각한 저항의 경험은 졸업 후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게 된 이들에게 더 많은 평등 지향적 민주화 요구와 맞닿기 보다는 이를 거부하게 마련이었다. 게다가 당시 대학생은 전체 청년들 중 1/4에서 1/3 정도의 수준에 불과했었다는 사실을 간과한 이러한 주장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 요컨대, 문제의 핵심은 다른 곳에 있다. 한 마디로 이러한 주장들은 민주화나 민주주의를 정치적인 측면만으로 보는 데에서 야기되는 매우 전형적인 오류이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이러한 비극은 사회경제적 민주화로 이어지지 못했던 한국의 정치적 민주화가 낳은 필연적인 비극인 것이다. 매우 안타깝게도 서구 중심부 국가들에서와는 달리, 한국을 비롯한 비중심부 국가들에서는 민주화 투쟁, 저항의 주체들이 상대적인 정치적 민주화를 달성한 후에는 급속하게 과거 독재자들이 구축해 놓은 사회경제적 기득권 구조에 편입되는 현상을 보여 왔다. 따라서 독재에 반대하는 수준에서는 많은 이들이 매우 용맹했지만, 독재 체제의 후퇴 이후 절차적, 제도적 민주주의를 일정정도 쟁취하고 난 뒤에는 사회경제적 민주주의, 즉 평등화를 추구하는 복지 사회로 나아가는 것에는 관심이 없거나 오히려 이를 거부했다. 따라서 이들은 부동산 투기, 탈세, 학연, 지연, 종교, 성접대, 부패 등이 서로 뒤얽힌 특권 구조와 기득권 질서를 타파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러한 구조를 향유, 강화해 왔다. 사진 출처 - 미디어오늘 50대는 바로 이러한 구조의 주체이자 산물이다. 이는 상당한 수의 서민들이 오히려 보수 정당을 지지하는 현상과 본질에 있어서는 같다고 할 수 있다. 복잡하게 설명하거나 안타까워할 일 없이 한 마디로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맛보지 못한 서민들에게는 민주주의란 혼란에 불과한 것이며, 이러한 혼란 속에서 누구보다 더 고통 받는 것은 사회적 보호막이 없는 자신들 뿐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들은 누구를 지지할 것인가? 어디 그 뿐인가? 정치를 떠나 사회를 보자. 예를 들어, 학교 폭력, 군대 폭력, 학벌 사회, 영어 광풍, 고시 열풍, 기러기 아빠, 부동산 투기 광풍, 사교육 광풍, 골프장 왕국, 최고의 자살율, 최고의 노인 빈곤율, OECD 국가 내 최고 수준의 자영업 비율, 최하의 복지 수준, 급증하고 있는 각종 범죄 등등... 특정 정권 들어 악화되었는지 아닌지를 논하기 앞서 이러한 문제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구조화된 우리 사회의 고유한 문제들이다. 이렇게 전 세계에서 우리 사회에서만 있는 매우 해괴한 이러한 사회 현상들의 본질은 유사하다. 즉, 사회 복지 시스템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국가에서 거의 모든 국민들이 나락으로 빠지지 않는 길이란 출세해서 안정적인 삶을 누리는 것 외에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서로를 짓밟고 속이는 극단적인 경쟁 사회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문제들인 것이다. 이렇듯, 한국 사회의 매우 특수한 현상들을 보지 못 하고, ‘신자유주의’나 ‘금융 세계화’ 등의 개념으로만 이러한 현상들을 설명하려는 많은 시도들은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다. 같은 맥락에서 50대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사회재구조화와 노동 불안정화로 인해 가장 타격을 입은 집단’, ‘명퇴 이후 영세 자영업으로 내몰린 이들’ 등으로 규정하는 것은 일리가 있지만, 그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음을 간과하는 주장이다. 이렇듯, 많은 지식인들이 ‘프레카리아트’라는 새로운 용어까지 굳이 사용해 가며 소위 불안정 노동이나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여론을 환기시키고 있지만, 그 어느 누구도 OECD 국가들 중 최고의 비중을 자랑한지 오래인 자영업과 같은 더 주변화된 사회 계층이나 집단들에 대해서는 커다란 관심이 없다. 그러다 보니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영향으로 50대 영세 자영업자들이 급증했고, 따라서 이들이 믿었던 민주화 세력이 추진한 신자유주의적 억압에 분노하여 퇴행적 투표를 한 것으로만 알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번 선거 분석을 통해서 세대에 따른 진보와 보수의 비율 차이에 과도하게 집중하는 것은 20대의 보수화라는 사회적 위기현상을 간과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특히 20대의 보수화는 이전의 보수화와는 궤를 달리하기에 매우 위험하다. 즉 이들 20대 보수주의자들은 정치적 보수집단 뿐 아니라, 사회, 경제적 관점에서 인종주의 등 서구식 극우와도 맞닿아 있다. 여기에 더해 한국 사회의 고질적 병폐인 지역주의나 반여성주의, 반공주의까지 마구 뒤섞여 그 어느 극우집단보다 심각한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일본의 ‘넷 우익’이 기존의 일본 우익들과 결합하며 실제 세력화되는 것을 일본의 진보 학자들도 예견하지 못 했듯, 현재 우리 사회에서도 이러한 현상을 과도하게 일시적 현상이거나 가볍게 보는 학자들이 너무 많다. 불안정 노동과 비정규직, 영세자영업이 만연한 시대에 서민들은 오히려 파시즘을 선택한 역사는 수두룩하다. 게다가 이러한 집단에조차도 속하지 못하는 엄청난 수의 주변화된 반범죄 집단들이 더 이상 확대되지 않도록 근본적인 사회 구조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단순히 고령층이 많아져서 중도 자유주의 세력의 집권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해야 하며, 다시 진지하게 사회경제적 민주주의, 보편적 복지로의 급진적인 변화를 구체적으로 논할 때가 왔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244 | 추천: 0
박현도/ 종교학자 나는 경기도 의왕시에 산다. 우리 시의 이름은 품격이 넘친다. 한자를 보라. 義王! 얼마나 멋진가. 조선시대 광주부의 ‘의곡면(義谷面)’의 의(義)자와 ‘왕륜면(王倫面)’의 왕(王)자가 합쳐져 된 이름이니 의로움과 제왕의 윤리가 홈빡 깃든 이름이다. 1914년 일제의 농간으로 義王 대신 ‘거동할 의(儀)’와 ‘왕성할 왕(旺)’의 儀旺으로 표기가 바뀌었다가 2007년에야 비로소 원래의 이름인 義王을 되찾았다. 국내 행정구역중 의왕만큼 멋진 이름이 어디 있을까 싶다. 그런데 우리 동네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동네 이름에 걸맞지 않게 천박하다. 우선 우리 동네 국회의원 행실부터 수준 이하다. 우리 동네 일꾼은 19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민주당 공천을 받아 당선되어놓고는 몇 달 되지 않아 그것도 자신을 뽑아준 지역주민들에게 단 한마디 의견도 묻지 않고 말없이 철새처럼 잽싸게 안철수 씨에게 날아간 “묻지마” 개혁정치의 기수 송호창 의원이다. 표 달라고 넙죽 인사하며 인덕원 전철 역 앞에서 명함을 건네던 송의원은 당선된 후 정말 전광석화처럼, 독불장군 독재자처럼 제멋대로 당을 옮겼다. 생각할수록 괘씸하다. 안철수씨 편에 선 것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다. 옮겨가는 과정이 몹시 추하다. 정치 초년생이라 뭘 모르고 한 것이니 용서해줄 수 있지 않느냐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시긴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는 정치 경력이 아니라 기본적인 정치 도의의 문제다. 배고파 아쉬울 때는 손 벌리고 배가 차면 언제 그랬냐는 듯 손을 거두고 표변하는 사람과 다를 바 무엇인가. 적어도 지역구민들의 의견을 묻거나 양해를 구해야 옳은 것인데, 제 살 길을 찾아 그냥 날아가 버렸다. 뉴스보고 당적변동을 알았으니 말 다한 거다. 고매한 동네 이름인 의왕에 걸맞지 않은 정치 철새다. 개혁정치라는 말이나 안했으면 좋겠다. 안타깝게도 우리 동네에는 철새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의왕(義王)의 왕(王)자가 연유한 원명인 왕륜(王倫)도 없다. 인덕원에서 판교 쪽으로 한 2분만 가면 왼편 깊숙한 곳에 서울구치소가 있다. 의왕시에 있지만 이름은 서울구치소다. 이곳에는 우리나라에서 힘 있고 돈 있는 분들이 자주 오신다. 노태우, 정몽구, 박지원, 권노갑 등 정재계 거물들이 드나들던 곳이고 현재도 대통령의 친형 이상득 전의원, 대통령의 사촌처남인 김재홍 KT &G 복지재단 이사장, 신재민 전 문화관광부 차관 등이 수감돼있다. 그런데 유력인사들, 이른바 ‘범털’들이 하도 자주 오길래 ‘구치소’가 아니라 ‘구치텔’이라고 까지 불리는 이곳에서 최근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해 국민의 분노를 자아내고 있다. 비리로 구속된 대통령의 측근들이 대통령의 특별사면의 은덕을 받아 줄줄이 구치소를 떠난 것이다. 법과 원칙을 그리도 강조하더니 특별사면에는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는 말이 되었다. 이명박 대통령의 설 특별사면을 받은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지난 1월 31일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에서 출소했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제 아무리 감언이설로 특별사면의 정당성을 이야기해보았자 특사의 원칙은 야당의 표현대로 대통령과 친하냐 친하지 않냐로 귀결될 뿐이다. “재임 중 발생한 권력형 비리에 대한 사면은 하지 않겠다는 원칙에 입각해 실시”한 특사라고 하지만, 대통령의 절친한 친구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은 대통령 임기 중인 2009년 세무조사를 무마해주는 대가로 임천공업으로부터 47억 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 사람이다. 얼마나 부끄러웠으면 구급차를 타고 황급히 빠져 나왔을꼬! 분노를 넘어서 애잔하기까지 하다. 대통령 측근으로 무소불위의 방송 권력을 누리다 구속된 최시중 전 방통위원장은 확정된 징역 2년 6개월 중 9개월만 살다 나왔다. 우리 대통령은 대학생 반값 등록금 약속을 못 지킨 것이 미안했나보다. 측근의 징역형을 30%로 깎아주는 것을 보니 말이다. 왕륜(王倫)은 어디 갔나? 있기나 했을까? 철새 의원과 왕륜 없는 대통령. 의왕 우리 동네 이름이 맞지 않는 말들이다. 제발 새해에는 개혁, 법, 원칙을 입으로만 나불대는 정치모리배들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우리 국민이 뱀처럼 지혜로워지도록 우리 동네 의왕의 의로운 기운이 더욱 강성해졌으면 좋겠다. 기사년(己巳年) 의로운 왕의 기운이 솟구쳐라! 의왕(義王)을 희구(希求)하며, 의왕만세(義王萬歲)!
2017-08-07 | hrights | 조회: 244 | 추천: 0
권보드래/ 고려대 국문과 교수 국제중학교라는 제도가 초등학생 학부모 사이에선 제법 화젯거리다. 아예 관심 두지 않는 사람이 외려 적어 보이고, 주변에서 아이를 국제중학교에 보냈거나, 보내려 했거나 한 경우도 상당수다. 듣자니 서울 시내에 있는 국제중학교 두 곳은 서류 전형으로 3배수를 뽑은 후 추첨으로 최종 입학 여부를 결정한단다. 서울시 교육청의 요청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몇 해 전 그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부터 부쩍 호기심이 동했다. 그냥 ‘성적순대로’가 아니라 마지막엔 ‘운에 따라’라니― 새로운 발상이 아닌가? 마침 ‘선거를 보충하는 추첨제’ 제안을 읽은 직후이기도 했다. 가라타니 고진의 어느 글에서 부딪힌 대목이었는데, 대표를 뽑아 결정권을 위임하는, 이른바 대의제 민주주의라는 게 대표들에게 엉뚱한 특권의식을 안겨주기 십상이라는 것이 문제의식의 요체였다고 기억한다. 선량(選良)이라는 말대로 뽑힌 사람들은 자신이 잘나서, 능력이 있어서 결정권을 갖게 됐다고 생각하기 쉽다. 투표로 뽑히는 각종 의원이며 기관장들이 내멋대로식 질주를 일삼곤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예 투표를 통해 2~3배수를 뽑되 최종적인 결정은 추첨으로 해 보는 편이 어떤가. 추첨제라면 능력 있어 대표 됐다는 환상을 부수는 데 적합할 테고, 의원이며 기관장들에게 조금이나마 겸손을 가르칠 수도 있을 터이다. 그러고 보면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도 본래 추첨제 민주주의가 아니었던가. 국제중학교 입시를 정치에서의 민주주의와 혼동해 버려선 곤란하겠지만, 어쨌든 ‘추첨’이라는 발상은 흥미로웠다. 중·고등학교 입시가 ‘뺑뺑이’로 바뀌던 무렵에도 비슷한 생각들을 했을까? ‘뺑뺑이’와 달리 요즘 국제중학교 식 추첨은 위계 자체를 해체하는 건 아니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주변 소식을 듣다 보니, 추첨에 대한 반응이 그리 호의적인 건 아닌 것 같다. 3배수에 들었는데 추첨에서 떨어져 버린 학생들은 그 사실을 납득하기 훨씬 힘들어하기도 한단다. 실력이 부족하다면 차라리 수긍하겠는데, 마지막엔 운에 맡기라니, 외려 공정치 못해 보이는 모양이다. 하긴, 어른들이 짊어지고 있는 ‘입시’와 ‘뺑뺑이’ 사이 딜레마를 10대 초반의 아이들에게 떠맡긴 셈이니, 그걸 다 이해하는 편이 더 이상하겠다 싶다. “준비하시고… 쏘세요!” ‘추첨’이라면 주택복권 당첨자 정하던 그 회전판이 먼저 생각난다. 0부터 9까지의 숫자가 빙빙 돌아가는 판에 화살을 쏴 숫자를 정하는 과정은, 어린 마음에도 나무랄 데 없이 공정해 보였다. 아파트 분양권을 얻고 동호수를 정할 때, 중·고등학교를 배정 할 때, 군 복무 근무지를 정할 때, ‘뺑뺑이’는 최상의 해결책이다. 성적대로, 실력대로, 하는 원칙이 미덥지 못할 때, 혹은 그 원칙이 적잖은 폐해를 일으키고 있다고 생각될 때, ‘뺑뺑이’만한 대안이 또 어디 있는가. 허나 한편, ‘뺑뺑이’만으로 질서가 구성되지 못할 것 또한 당연해 보인다. 그러니, ‘실력’과 ‘운’, ‘경쟁’과 ‘뺑뺑이’ 사이에서 무게중심을 옮겨가며, 평형을 잡기보다 우왕좌왕하기 쉬운 게 통례다. 1976년 경기고에서 중학교 배정 추첨을 하는 모습. 사진 출처 - 주간경향 1980년대 초·중반 ‘뺑뺑이’ 한복판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던 나로선 한 반에 온갖 이질적 분자가 공존했던 그 시절이 참 다행스러웠다. 강북의 공립이었던지라 분위기는 산만했고 입시 성적은 형편없었고 뒤 몇 줄은 제법 불량스럽기도 했지만, 그 덕에 간접적으로나마 세상을 조금 더 알 수 있었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걸러진’ 혹은 ‘살균된’ 분위기에서 지내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막상 경기 북부의 작은 아파트촌에서 아이를 키우고 있는 지금은, 고등학생 시절만큼 확고하게 ‘뺑뺑이’를 지지하기가 힘들다. 소문만인지, 그래도 험악하다는 고개 젓는 집 근처 중학교에 아이를 보내야겠다는 마음이 내키질 않는다. 다들 딴 길 찾는 대신 공교육을 탄탄하게 하는 게 정도겠지만, 추락해 버린 ‘뺑뺑이’의 세계를 피해 더 나은, 더 안전한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는 게 비단 나만은 아닌 것 같다. 매춘여성이 국회의원 되고(「대한민국 헌법 제 1조」) 평범한 공무원이 시장 되는(「7급 공무원」) 그런 상상력은 영화 속의 ‘뺑뺑이’에서만 가능한 걸까. 입시와 뺑뺑이 사이, 선거와 추첨 사이 또 어떤 실험이 필요한 것일까.
2017-08-07 | hrights | 조회: 274 | 추천: 0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한 개인이 지닐 수 있는 감정의 폭과 깊이는 어느 정도이며, 그리고 감정의 종류는 얼마나 될까? 이 물음을 던지게 된 것은 새벽 2시에 이르도록 진행된 MBC-TV의 <100분 토론>에서 사형제 존속이냐 아니면 사형제 폐지냐 하는 의제로 토론 하는 것을 보고 난 뒤였다. 한쪽에서는 인간이기를 아예 포기한 흉악무도한 자들은 그야말로 사형을 통해 사회에서부터 아예 제거해버려야 한다는 주장을 하면서 사형제 존속뿐만 아니라 사형 선고를 받은 사형수들을 하루속히 사형 집행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또 사형 선고와 집행이 무고한 시민들의 목숨을 함부로 해하는 범죄를 예방하는 심리적인 효과가 크다고 주장했다. 다른 쪽에서는 국가가 살인을 금하면서 국가가 사형 제도를 통해 살인을 하는 것은 정의에 어긋난다고 하면서 기본권 중의 기본권인 생명권의 고귀함을 국가가 나서서 숭상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인권 국가로 거듭날 수 있어야 한다고 하고, 또 국가가 피해자 가족의 감정을 헤아려 정의를 실현해야 하지만 그 실현에서의 정의로움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사형 제도보다는 절대적인 종신형 제도를 통해 가해자가 끝없이 후회하고 자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토론을 시청하는 내내 나 스스로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이끌리는 듯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 이유가 양쪽 모두의 주장이 분명히 대립되는 데도 전체적으로건 부분적으로건 양쪽 모두 옳은 것 같다는 느낌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가능성과 잠재성의 방향이 얼마나 극단적으로 대립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를 생각하게 되면서, 도대체 우리 인간이 그와 같이 극단적으로 나뉘는 방향으로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삶을 몰아가게 되는 원인에 대해 나 자신의 논리적인 상상력을 비롯한 일체의 합리적인 사유가 무능력한 상태로 빠져 버린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나에게서도 경우에 따라 살의가 알게 모르게 꿈틀거리기도 한 적이 있었음을 떠올리면서, 그런데도 내가 당당하게 그 책임을 지겠다는 결의에 의거한 살의가 아니라, 그 살의가 나도 모르게 솟구쳐 올라온 것과 마찬가지로 그런 살의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은 죽고 싶지 않다고 하는 생존에의 근본 욕망이 자연스럽게 발동되고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전쟁에서의 적국 군인들에 대한 살인이나 국가의 사형 제도에 의한 살인을 흔히 합법적인 살인이라고 말한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기도 하거니와 인류 역사를 통해 점철되어 온 온갖 종류의 전쟁을 통해 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 집단적인 삶이 근원적으로 배타적인 데서 비롯되었다는 것, 그 배타성에 강력한 폭력성이 잠재되어 있다는 것, 그 폭력성에 일상적으로는 느낄 수 없는 이질적 감각의 폭발성이 그 본질인 양 결합되어 있다는 것, 그 이질적 감각의 폭발의 충동에 몸을 내맡길 때 일체의 합리적인 판별력이 마비되어 파생될 자기 파괴적인 결과를 거의 예측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설사 어렴풋이 예측한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예측되는 결과마저 이질적 감각의 폭발력에 대한 그 괴물적인 향유를 강화하는 쪽으로 활용되고 만다는 것, 그런데 그런 집단적 삶의 형태가 개인에게 이관되어 언제 어디서든 나타날 수도 있는 새로운 사회구성체가 조직되어 현재 우리의 삶을 규정하고 있다는 것 등을 생각하게 된다. 서울 서대문형무소 사형장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대다수의 인간을 생명 내지는 생존 차원에 묶어 둠으로써 유지되는 사회구성체에서는 생명 간의 충돌과 격돌이 불가피하게 된다. 한 개인의 생명이란 다른 사람의 생명으로 대체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유일한 것이기 때문에, 이 생명들 간의 충돌과 격돌은 그야말로 처참하게 전개될 충분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절체절명의 배타성을 띤 생명과 생존의 차원에서 벗어나도록 해야 한다. 그럴 때에, 그리고 그런 만큼 인간이 인간적인 동물성을 넘어서서 인간만의 이른바 인간 고유의 인간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의 수준에 따라 생명과 생존이 제대로 유지되는가에 대한 기준은 달라지는 것은 물론이다. 아울러 인간 고유의 인간적인 삶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가 하는 기준이 달라지는 것 또한 물론이다. 중요한 것은 인간 고유의 인간성은 결코 배타적인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즐기면서 그 즐김의 강도와 밀도가 더욱 강화되는 대상들을 인식하고 개발하고 전승해서 심화 확대함으로써 이른바 전반적인 공향유의 세계를 중심으로 삶을 영위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체제는 근본적으로 대다수 사람들을 가능한 한 배타적인 생존의 차원에 묶어 둠으로써 유지된다는 데 그 본질적인 특징이 있다. 그 최상 최종의 매개가 바로 돈이다. 대다수의 사람을 돈에 묶어두는 것은 바로 대다수의 사람들을 배타적인 생존 차원 즉 인간적인 동물성의 차원에 묶어두는 것이다. 이를 넘어서는 인간 고유의 인간성의 차원마저 인간적인 동물성을 위한 하나의 장식으로 만드는 것이 자본주의 체제이다. 이런 생각에 이르게 되면서, 다소 역설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사형 제도에 의한 국가의 살인은 절체절명의 생명 개념을 대다수의 사람들의 뇌리 속에 심어 넣어 자본주의적인 배타적인 생존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드는 경향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 생명 자체의 고귀함을 강조함으로써 사형 제도를 폐지하고 그 대신 절대적인 종신형 제도를 두는 것은 어떤가? 그것은 절체절명의 생명 개념과 그에 따른 배타적인 생존의 절대성을 강화하는 것은 아닌가? 이 물음에 대해서는 왜 인간 생명이 고귀한가를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답변을 하게 된다. 적어도 사안이 되고 있는 사형 제도에 관련해서 볼 때, 인간 생명이 특별히 고귀한 까닭은 일체의 생명체의 생명이 고귀하기 때문은 분명히 아니다. 인간 생명의 고귀함이 일반 동물 생명의 고귀함에 비해 특별히 탁월한 까닭은 인간적인 동물성을 바탕으로 한 배타적인 생존 자체의 차원에서 연유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고유의 인간성을 바탕으로 한 공향유의 세계를 심화 확대해서 심지어 신성의 영역조차 안출하여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인간 생명이 특별히 고귀한 것은 그런 까닭에 흔히 하는 말 그대로 온 우주를 주고서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감안하지 않은 채 인간 생명의 맹목적인 고귀함만을 내세우게 되면 그 역시 자본주의적인 배타적인 생존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드는 경향을 띠고 말 것이다. 이런 등속의 생각을 하면서 다시 묻게 된다. 한 개인이 지닐 수 있는 감정의 폭과 깊이는 어느 정도이며, 그리고 감정의 종류는 얼마나 될까? 배타적인 소유에 의한 감정 역시 그 폭과 깊이가 다대하고 따라서 그에 따른 감정의 종류도 다양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 고유의 인간성을 바탕으로 한 공향유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감정은 그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무궁무진하며 그 감정의 종류도 그만큼 무궁무진할 것이다. 갑자기 니체의 말이 떠오른다. “아직 가보지 않은 천 개의 길이 있고, 천 개의 건강이 있다.” 배타성과 배타성에 내재된 폭력성 그리고 폭력성의 본질인 충동적인 이질적 감각의 잔인성 등으로 향한 길과는 전혀 다른 길인데도 그런 폭력적인 감각에 못지않은 강렬한 건강한 감각의 충만이 충분히 주어질 수 있음을 사회 전체적으로 예사로 확인할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276 | 추천: 1
이은규/ 일꾼 사람이,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시퍼렇게 살아도 설워라 할 생명들이 벼랑 끝에 서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고 세상은 ‘살아라!’‘살아라!’합니다. 지극한 이 위로의 말들이 벼랑 끝에 서있는 생명들에겐 더욱 허기진 말로 들릴 듯합니다. 함께 살자는 ‘윤리’가 나부터 살자는 ‘탐욕’에 짓눌린 현실에서 말입니다. 새해 덕담을 형에게 건네야 할 텐데, 내가 슬픕니다... 달리 뭐라 표현할 길 없는 깊은 슬픔을 느낍니다. 눈물조차 막아선 슬픔에 온 몸이 무겁고 마음은 끝도 모를 바닥으로 내려앉고 있습니다. 울고 싶은데 울음이 터지질 않고 복잡다단한 지금 이 심경을 글로 풀어보자는 마음에 밑도 끝도 없이 나오는 심사대로 토설합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하소연하고 싶은 마음 또한 생기기에 전생에 척을 진 원수도 아닐 터인데 형에게 이 짐을 나누자 청합니다. “세상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는 말로 대충 위로하고 더 이상 회피하고 싶지 않습니다. 가만히 머물면서 이 깊은 슬픔의 정체를 정면으로 응시하고자 합니다. 내가 나에게 묻습니다. “이 슬픔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존재하기 이전부터, 내가 있기 전부터 있은 아주 오래된 것이라 합니다. 태어남과 삶은 슬픔의 탄생이며 성장인 듯합니다. 그 열매는 마땅히 사랑과 평화이어야 합니다. 마땅히... 슬픔의 원인을 나를 둘러싼 세상에서 찾아보려 합니다. 사랑과 평화는 경쟁과 탐욕에 의해 판도라의 상자에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밀봉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약한 자를 탈락자로 자연 치부해버리기 일쑤이며 심지어 종교까지도 그들을 함부로 세상부적응자로 몰아세웁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소외시키는 세상입니다. 사랑과 평화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세상과 사람들은 변할 수 있을까요? 눈을 감았습니다. 고단한 무릎을 꿇었습니다. 마음이 분분히 흩어져 있습니다. 내 마음이 산산조각이 나있습니다. 그 마음들은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들과 분별력에 이리저리 흩어져 있습니다. 심판하고 단죄하며 이기고 싶은 욕망에 이리저리 촉수를 뻗고 있습니다. 세상은 둘째 치고 나 자신이 이미 세상입니다. 힘도 용기도 없습니다. 어찌 해볼 요량조차 떠오르지 않습니다. 하나하나 세상으로 뻗어있는 촉수들을 바라봅니다. 억울하고 분하고 그리고 화가 납니다. 인정받고 싶고 이기고 싶고 힘을 사용하고 싶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처럼 희망을 미끼로 사기치고 싶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세상을 쏙 빼닮아가는 것임을 알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슬픔을 멍하니 바라봅니다. 어린아이가 보입니다. 이제 삼십육개월이 된 내 딸 민서또래의 아이입니다. 모래를 가지고 놀고 있는 어린아이. 두 손으로 모래를 한 움큼 퍼 올려도 손가락사이로 모래는 빠져나갑니다. 그 빠져나가는 느낌이 생생합니다. 그 허망함이라니... 그리고 아이는 벽을 바라봅니다. 잠시 후 벽은 거대한 창공으로 변합니다. 끝도 없는 허공에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습니다. 슬픔에 오그라들었던 가슴이 천천히 펴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하아...” 깊은 숨이 터져 나옵니다. 맥이 풀리듯 온몸의 긴장이 풀어집니다. 아이는 혼잣말로 묻습니다. “저 수많은 별들은 무엇일까요?” “사랑...” 어린아이에게 어둠속의 별은 사랑이라 합니다. 볼 수 있어 행복하고 편안한 사랑입니다. 또한 아이는 스스로도 별이라고 여깁니다. 아이가 보는 별들 또한 이 아이를 별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별이 별을 발견하고 별이 별을 인정하고 별이 온 천지의 어둠만큼이나 많다고 합니다. 별들의 공동체에 절로 평안해진 아이는 양팔을 뒤로 젖힌 채 다리를 뻗습니다. 편안한 자세로 마냥 바라봅니다. 하늘의 별들을. 우연스럽게도 오늘은 그리스도교에서 기념하는 주님공현대축일입니다. 별의 인도로 세 명의 동방박사가 세상의 구세주가 탄생되었음을 알고 아기 예수님을 찾아가 경배한 일을 경축하는 날입니다. 세 명의 동방박사와 그들을 인도한 별, 아기 예수는 내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상징하는 듯합니다. 존재에 대한 신원회복이 동방박사의 아기예수 경배가 아닐까 여겨지는 까닭입니다. 밤하늘의 별을 응시하며 그 별의 안내에 충실했던 동방박사의 꿋꿋함이 부럽습니다. 가만히 유추해봅니다. 세상의 불완전함이 그들을 하늘의 별에게로 눈을 돌리게 한 것은 아닐까 하고... 슬픔은 별을 잉태합니다. 별은 내안의 세계를 발견하게 합니다. 이 깊은 슬픔은 여인의 자궁입니다. 태초로의 귀환 혹은 최후의 발견과 같습니다. 번뇌는 여래의 종자라 하듯 슬픔은 사랑의 종자입니다. 내안에서 일어나는 감정들을 깊이 들여다보니 훤한 대낮에 별이 보입니다. 그래요 회피하지 않겠습니다. 순응하지도 않겠습니다. 선동하지도 않겠습니다. 가만히 일어나는 감정들, 그것이 슬픔이거나 기쁨이거나 분노이거나간에 휩쓸리지 않는 가운데 찬찬히 살피며 한걸음 한걸음 꿋꿋하고 반듯하게 살겠습니다. 내가 사랑이 되고, 온전한 평화가 되어야겠습니다... 이를 양식으로 삼아 남아있는 생을 살겠습니다. 오늘 이 깊은 슬픔의 정체는 자기존재를 망실한 어리석은 사람에 대한 먼별의 초대장입니다. 두서없고 개요 없는 글을 인내심을 발휘해 사유해주시리라 믿으며 형에게도 먼별에서 보내온 초대장을 나눕니다. 인사가 조금 늦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17-08-07 | hrights | 조회: 245 | 추천: 1
홍미정/ 단국대 GCC 국가연구소 연구교수 민주화를 요구하는 ‘아랍의 봄’의 결과 중동 및 북아프리카에서 세속적 독재 정권이 붕괴되면서 튀니지와 이집트에서는 온건한 이슬람주의자 정당들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 과정에서 걸프 지역 강국들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가 대상 국가에 따라 때로는 함께, 때로는 서로 다르게 이슬람을 내세운 서로 다른 정당들에게 정치 자금을 제공하면서, 수니 이슬람 세계의 주도권에 대한 경쟁이 불붙고 있다. 2012년 10월 카이로에서 출판된 주간 알 아흐람은 “카타르와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집트와 튀니지에서 서로 다른 파벌들을 후원함으로써,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는 전환기의 아랍 세계에서 경쟁자가 되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카타르는 리비아 반란군을 지원했으며, 시리아 내전에서도 반란군을 지원하고, 이집트, 튀니지, 그리고 예멘에서 통치자를 몰아낸 거리 시위를 후원했다. 카타르 국영 알자지라가 국경을 넘어 시위들을 집중 보도함으로써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면서 독재자를 축출하는데 공헌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우디는 시리아 내전에서는 카타르와 협력하여 반란군을 지원하는 반면, 거리 민주화 시위로 위기에 몰린 요르단 왕국을 돕기 위하여 8억 달러의 기부금을 약속하고, 2012년 11월 28일 우선 2억 5천만 달러를 곧 요르단 중앙은행에 입금하기로 했다. 걸프 뉴스에 따르면, 2012년 1월 카타르 왕 하마드 빈 칼리파 알 싸니가 이슬람주의 파벌인 알 나흐다당이 선거에서 승리한 이후 혁명 기념을 축하하기 위하여 튀니지를 방문하였다. 이슬람주의자 알 나흐다당은 카타르에 기반을 둔 유스프 알 까르다위가 이끄는 국제 무슬림 형제단의 후원을 받았고, 카타르는 알 나흐다당이 튀니지 선거에서 승리하도록 수만 달러를 지원하였다고 알려졌다. 반면, 알 나흐다 당의 라이벌인 알 아리다 차비아당의 지도자인 하치미 알 하미디는 사우디아라비아의 후원을 받았다. 알 아흐람에 따르면, 카타르의 영향력 확장은 이집트 정권의 붕괴이후 이집트에서도 표면화되었다. 2011년 3월, 카이라트 알 샤터(당시 무슬림 형제단의 대통령 후보)가 앞으로 무슬림 형제단과 카타르 사이의 협력을 논의하기 위해서 며칠 동안 카타르를 방문했다. 이것은 카타르가 이집트의 민주 선거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의미한다. 카타르 왕 하마드는 무르시의 대통령 취임 이후, 걸프 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이집트를 방문하였다. 이 때 그는 악화된 경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하여 20억 달러를 예치하기로 무르시에게 약속하였다. 사우디아라비아는 2012년 5월, 10억 달러를 이집트 중앙은행에 예치했다. 이것은 이집트가 32억 달러의 IMF 차관을 확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것이다. 이집트 기획부 장관 파야자 압둘 나가는 사우디는 10억 달러 예치 이외에도, 5억 달러 개발 프로젝트, 2억 5천 달러의 석유 구입 재정 지원, 2억 달러의 중소기업 지원 등을 약속했다고 밝혔다. 팔레스타인 뉴스에 따르면, 카타르 왕 하마드는 2012년 10월 팔레스타인의 하마스가 통치하는 가자를 방문하였다. 그는 “가자가 확고하게 존재하는 것은 전 아랍세계의 자존심이며, 전 아랍 세계와 이슬람 국가들은 팔레스타인인들의 대의를 강력하게 지지해야한다. 팔레스타인의 대의를 지지하는 이집트에게 감사하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2008-2009년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파괴된 주택과 기반시설 건설비용으로 가자에 4억 달러를 지원하기로 약속하였다. 카타르가 적극 지원하는 보수적이고 민주적인 형태의 이슬람주의의 발흥으로 사우디아라비아가 실패하고, 카타르가 부상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이웃하고 있는 두 석유 왕국들은 레반트와 북아프리카에서의 정치적 변동기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것은 각 왕국의 지정학적인 이익을 증진시키고, 각 왕국의 국민들이 왕정에 대항하는 대중 봉기를 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카타르는 영내에서 민주적인 이슬람주의 운동을 강화하는데, 사우디아라비아보다도 훨씬 더 열중하고 있다. 그 결과 사우디-카타르 경쟁이 아랍 지역에서 ‘이슬람 보수주의의 보루’라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역할을 위협하는 것처럼 보인다. 독재정권으로 낙인 찍고도 그 정부에 자신들의 상업용 무기를 파는 미국 사진 출처 - 경향신문 최근 미국의 정책은 카타르와 무슬림 형제단 편에 서있는 것처럼 보인다. 국무 장관 힐러리 클린턴은 “미국은 튀니지의 민주주의의 출현을 열망하는 그들의 소망을 공유하며, 최근 튀니지 선거에서 승리한 알 나흐다당과 같이 부상하는 이슬람주의자 단체들과 협력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강조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사우디아라비아는 미국의 주요한 무기 판매시장 이다. 2012년 8월 26일 뉴욕 타임즈에 다르면, 2011년 미국이 사우디아라비아에 판매한 무기는 아파치와 블랙 혹크 헬리콥터 수십 대를 포함하여 총 334억 달러에 달했고, 미국의 걸프 지역 무기 판매량의 5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작년에 미국은 이란의 위협을 앞세워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걸프 동맹국들에게 주요한 무기를 판매함으로써 총 판매액이 663억 달러에 달했다. 이는 전 세계 무기 시장 총액 853억 달러의 3/4 이상을 차지했고, 2010년의 총 판매액 214억 달러와 비교하여 3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 미국 다음으로 세계 2위를 차지하는 러시아의 무기판매는 48억 달러에 불과했다. 이러한 미국-사우디 군사 협력은 아랍 민주화시위로 곤경에 처한 사우디라아비아가 중동 지역 내에서 지도적인 위치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강화시키는 중요한 요소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338 | 추천: 0
신하영옥/ 광명인권센터장 주변은 허탈함, 무기력, 분노가 한 편으로 출렁이고 무반응과 아무렇지 않은 일상이 한 편으로 흐른다. 그러나 환희와 열광과 같은 분출은 없다. 내 주변엔...그렇다. 나는...하루한나절 분노했다가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다. 적어도 겉으론, 그리고 아직은 그렇다. 이후 어떻게 일상이 침윤 당할지는 모르겠다. 폭풍전야 같은 긴장감이 잠깐씩 왔다가곤 한다. ‘엄마 5년을 어떻게 기다리지?’ 라고 했던 아이는 벌써 5년이란 기다림의 끝자락에 와있고, 그만큼 커버렸다. 지금 앞으로 5년에 대해 지난번과 같이 묻지 않는다. 그 아이에게 앞으로 5년은 자유와 책임이 공존하는 바쁜 5년이 될 터이고, 준비할 것이 많고 기대할 것이 많은 그런 시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당선인이 누구인가보다 일상의 변화가 더 크기 때문이다. 내겐 과거는 항상 압축된 것이었다. 그러나 앞으로 5년은 좀 중요하면서 그래서 어쩌면 더 길 듯하다. 40대를 지나 50대로 접어드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좀 여유롭게 다음 세대들을 위해 현재보다 나은 미래를 준비하는 과정, 희망이 보이는 기간이길 기대하는데, ‘과연?’ 이란 질문이 따라붙는다. 벌써부터 자기목숨을 던지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절망감에 코끝이 아리고 당선자를 대변하는 입은 막말이라는 걸레를 물고 있어 답답하다. 그래서 절망하고 어떤 가능성도 기대하지 말아야 하는 걸까? 엄마가 편찮으셔서 고향엘 갔다. 동생은 개표방송을 보면서, 그 결과를 보면서 너무 분해서 울었다고 한다. 평소에 잘 울지 않는 동생이다. 정치에 그다지 관심도 없다. 엄마는 부러진 팔을 들고서 80대 노구를 이끌고 투표장으로 가셨다고 하신다. 그러나 엄마도 허망해 하신다. 술 한 잔 하면서 국민성과 투표결과에 대해 분노하는 동생에게 해 줄 말은 없었다. 아니 그런 얘기, 실은 하기가 싫었다.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나? 그래서 달라질 수 있다면 욕은 서 말 아니라 서른 말이라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피곤함이 엄습한다. 어느 날 그런 피곤함에 이런 저런 검색을 하다 눈에 띈 글이다. “언제나 말했듯이 우리는 새로운 대통령이나 새로운 법률 및 제도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낡은 질서의 근절을 이루고 협력하여 평화롭고 평등한 새로운 사회의 가치를 받아들여야 한다.... 변화의 과정에 참여하기 위해 거대한 영웅적 행동에 착수할 필요는 없다. 작은 행동이라도 수백만의 사람들이 반복한다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 -하워든 진, 2002,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누가 누굴 탓하고 무엇 때문에 절망하는가? 그 화살은 어쩌면 각자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야 할 일이지 않을까? 민주당은 대선패배의 원인을 스스로의 성찰과 반성에 두지 않는 듯하다. 아니, 스스로에게 두되 내부의 적을 만들어내고, 탓을 돌리고 있다. 그걸 반성이라고 하고 있다. 어느 민주당 인사는 ‘민주주의를 너무 말해서 졌다’고 한다. 민주주의와 인권만 너무 강조해서, 사람들이 식상해서... 그것이 민주당의 패배에 대한 분석 결과인가 보다. 지난 12월 19일 밤 대선 패배를 인정한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는 "새 정치, 새 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역사적 소명을 제대로 다 하지 못해 송구스럽다"고 밝혔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그럼 무엇을 말해야 했나? 무엇을 중심전략으로 대선에 임해야 했을까? ‘민생’, ‘먹고사는 문제’...라고 한다. 그것은 인권이 아닌가? 민생과 먹고사는 문제, 돈벌이를 인권의 관점이 아닌 ‘개발’, ‘경제총량’ 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한 해결책은 없다. 더 이상 경제력이 총량에서 발전할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나아가 자본주의에서 총량의 증가와 그 결과는 누구에게 귀속되는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1%를 말한다. 나머지 99%는 그러한 이득에서 소외되거나 배제되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민생은 인권의 문제이다. 생존권이라는 기본권 중의 기본권의 문제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기본권으로서의 국민의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한 아래로부터의 절차를 말한다. 그런데 민생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은 민주주의가, 인권담론이 작동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더 민주주의와 인권을 말해야 한다. 민주주의를 강조해서 패배한 것이 아니다. 그 민주주의를 자기들만이 할 수 있다는 오만에서, 자기들만이 해야 한다는 강박증에서 패배가 비롯된 것이다. 좀 더 국민들의 삶을 쪼개고 쪼개어 살폈어야 한다. 정치적 민주화(?)가 국민들의 삶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경제적 비민주화가 각 국민들의 삶에서 어떤 질곡으로 나타나는지를 분석하고 그에 맞는 대안들을 내왔어야 했다. 그런데, 그들은 다만 거대담론으로서의 혹은 당위로서의 민주주의를 외쳐대기만 했을 뿐이었다. 국민들의 삶과 동떨어진 구호로 여기게 만들었을 뿐이다. 당위로 권력을 획득,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국민들의 인식은 낙후되지 않았다. 그들만 그걸 모르고 있나보다. 결국 국민들이 그 사실을 알려주었다. 국민이 이미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이틀 전 인권기본계획수립을 위한 토론회를 개최했다. 인권을 한물 간 개뼈다귀쯤으로 여기던 사람들의 인식이 좀 변했음을 느낀다. 기본계획을 잘 내와야 한다는 말도 한다. 인권이 이렇게 폭 넓은 거냐는 얘기도 한다. 그럼에도 민생과 인권은 별개라고 한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그리고 나는 점점 더 여유가 생긴다. 결국 버티고 틈새를 확장하고 한 번에 한 가지씩 인식의 지평을 넓히기 위한 활동과 사업을 하다보면, 그 틈새가 결국은 공간을 점유하면서도 새롭게 구성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대통령이나 제도가 변하지 않는다면 결국 사람들이다. 인식의 변화로부터 생활의 변화가 곧 변혁이다. 그 한 사람들이 결국은 한 사회를 바꾸는 힘이 된다. 절망은 없다. 그저 조금씩 살아내고 그 살아감을 변화시키는 길이 있을 뿐이다. 한 사람의 습관, 집단의 습관, 사회의 습관을 바꾸는 길. 대선패배에 대한 분석에 연연하기에 앞서 자신과 자기 집단의 습관을 살펴보는 것이 더 필요하다. 민주당은 절망할 주제도 안 된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248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