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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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강대중(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윤동호(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이동우(변호사),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장은주(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어깨가 아파서 병원을 찾는다. 의사가 묻는다. “어떻게 아프세요?” 환자가 대답한다. “팔을 뒤로 돌릴 수가 없어요. 너무나 아파서.” 의사가 묻는다. “언제부터 그랬어요?” 환자가 대답한다. “3개월 쯤 된 것 같아요.” 의사가 묻는다. “혹시 다른 데 아픈 데는 없으세요?” 환자가 대답한다. “편두통인지 가끔씩 머리도 찌르듯이 아파요.” 의사가 고개를 갸웃한다. “그러세요. 또 다른 데는요?” 환자가 말한다. “우울증이 있는데. 그건 좀 오래 되었어요.” 의사가 말한다. “그러세요. 여러모로 힘드시겠어요.” 환자가 묻는다. “혹시 이 모든 질환들을 한꺼번에 싹 고치는 방법은 없을까요?” 의사가 환자를 멍하니 쳐다본다. “글쎄요. 좀처럼 길이 안 보이네요. 아무래도 생활방식을 아예 좀 다르게 바꿔 보면 어떨까 싶네요. 가장 큰 문제는 스트레스라고 하잖아요, 왜.” 다소 좀 조용해진 것 같지만 얼마 전만 해도 핵을 동원한 전쟁이 날까봐 전전긍긍했다. 결국은 애써 가꾸어 온 분단된 한민족의 유일한 희망의 끈이었던 개성공단이 전면 중단되고 남쪽 사람들이 전원 철수해버렸다. “좀처럼 길이 안 보이네요.” 지난 대선 때 국정원 직원들이 ‘그분의 말씀’을 지침으로 삼아 동시다발적으로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조직적인 정치 개입을 자행한 탓에 검찰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 아직 전혀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좀처럼 길이 안 보이네요.” 빙산의 일각이라고 여겨지는 남양유업의 갑을 사태가 불거져 유리한 지배적인 위치에 있는 자들이 피지배적인 처지의 사람들에게 얼마나 폭력적인지 아예 인간의 명색을 벗어버린 작태가 만연해 있음을 노출했다. 다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을 주고받으면서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당하고만 있다고 보니 정신병까지 앓게 되었다고 실토한다. “좀처럼 길이 안 보이네요.” 그런 와중에 신임 대통령은 세계 최상의 나라인 미국 의회에서 영어 연설을 하면서 수 십 차례의 기립 박수를 받기도 하면서 멋지게 기염을 토하고 있는데, 이런! 대통령이 국민들로부터 핀잔을 들으면서까지 애지중지 기어코 대변인 자리를 맡긴 인물이 방문 국가에서 성희롱을 하다가 고발을 당하자 아직 끝나지도 않은 일체의 임무를 저버리고 돌연 귀국해 버렸다. “글쎄요. 아예 길이 안 보이네요.” 그렇잖아도 분기의 경제성장이 0%대로 내려앉지를 않나 부모로부터 방임·방치된 나머지 밤늦게 거리를 떠도는 어린 아이들이 전국적으로 200만 명이 된다는 소식도 들려오면서 사회 양극화의 간극이 점점 더 커지는 속도가 ‘안 봐도 비디오’ 식으로 날로 높아가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창조경제”라는 한 마디로 어떻게 사회 전체의 역동성을 되살려보려고 안간 힘을 쓰고 있는데, 대통령 대변인이란 자가 그것도 가장 잘 보여야 하는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성희롱으로 고발을 당하다니, 정말이지 돌아버릴 지경이다. 해도 해도 너무 한다. 이 모든 일들이 정말 재수가 없어서 어쩌다가 당한 일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모든 일들은 지난 수 십 년간 반민주적·반민족적·반인간적인 독재와 가없는 폭력 그리고 그에 따른 부정과 부패의 세력을 발본색원하기 위해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온갖 고통과 희생을 지불했는데도 불구하고 생겨난 반민주적·반민족적·반인간적인 결과이다. 이 모든 일들에 적어도 나 혼자만은 결백하고 더러운 피를 묻히지 않았음을 입증하기라도 하려는 듯 기를 쓰고 한탄하고 비난해 마지않는다고 해서 무슨 뾰족한 수가 나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집권 통치 세력을 비롯하여 경제사회적으로 지배 계급에 속한 인물들, 특히 대통령 방미 때 대통령을 위시해서 연회석에서 대통령의 좌우에 도열했던 그 유명한 경제계의 거물들이 대오각성하기를 기대할 것인가? 아니면, 이른바 진보 진영이 아예 “사물의 명색만을 알뿐 인간의 명색은 전혀 모르는” 자본주의적 시장체제에 따른 의식/무의식의 아비투스를 싹 지어내고 그야말로 환골탈태하여 대대적인 사회혁명적인 실천에 나서기를 기대할 것인가? “글쎄요. 좀처럼 길이 안 보이네요. 아무래도 생활방식을 아예 좀 다르게 바꿔 보면 어떨까 싶네요.” 사진 출처 - 노컷뉴스 지배 계급은 대대적으로 심지어 세계적인 규모로 연대하여 흔히 서민이라 불리는 피지배 계급을 한편으로는 적절히 활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철저히 유린해서라도 그네들의 재산과 지위의 기득권을 유지 ․ 강화하고자 노력한다. 역사 이래로 모든 잉여의 생산은 아래에서부터 피지배 계급으로부터 산출되는데도, 그 잉여의 대다수를 독차지한 것은 상층의 지배 계급이지 않았던가. 1990년대 말 3백 48명의 억만장자들이 전 세계 부의 절반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 그 이후 이 수치는 더욱 증가했으리라. 그러면서 “낙수 효과” 운운하는 것이다. 이 낱말처럼 겉으로는 경제적인 원칙인 양 포장되어 실제로는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을 비인간적인 굴욕으로 몰아가는 잔인한 낱말도 드물 것이다. “글쎄요, 좀처럼 길이 안 보이네요.”라고 푸념을 늘어놓을 여유가 없다. 딱 한 가지 길이 있다. 이 길은 다소 부족했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후보 때 한껏 제시한 길이다. 박근혜 정권의 창조경제는 경제민주화의 창조여야 한다. 그리고 경제민주화는 재벌 대기업들에게 자본주의적인 시장 원칙을 준수하게 만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명실상부한 복지의 대대적인 확대를 목표로 시장에서의 착취를 국가적으로 최소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국민들의 질 높은 행복한 삶은 양극화의 깊은 골짜기로부터 벗어나도록 하는 데서 시작되고, 이는 복지의 대대적인 확대 외에는 길이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통감하고 이를 실행할 수 있는 정부 관료들을 재기용해야 한다. 모두가 모두를 오로지 자신을 위한 수단이나 기회로만 여김으로써 다들 미쳐버릴 수밖에 없는 사회의 풍토를 전격적으로 바꾸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말하자면 국가의 생활방식을 아예 색다르게 바꾸어야 한다.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현재로서는 역시 대대적인 복지사회를 향해 국가 전체가 매진하는 길 외에 다른 길은 없다. 그렇지 않을 경우, 국가의 기능은 대다수 국민들의 피땀 어린 노고의 성과를 상층의 소수 지배 계급의 이익을 위해 갖다 바치기 위해 진력하는 데 불과할 것이다. “낙수 효과”라는 말을 믿지 말고 “정당한 노력에 정당한 대가”라는 말을 믿어야 한다. 때로는 잔인하기 이를 데 없고 때로는 참신하기 이를 데 없는 아이디어 하나로 수 백 수 천 억 달러를 벌어들여 그들만의 지갑을 천문학적으로 부풀리는 세계자본주의의 논리에 국가가 휘말려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 헌법 제119조 제②항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라는 내용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대통령은 “균형 있는”, “적정한 소득의 분배”,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 방지”, “경제의 민주화” 등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경제에 대한 규제와 조정”이란 대목을 골똘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헌법 조항의 내용이 완전히 무시되고 있기 때문에, 정치가 모두를 부와 권력을 향해 그 좁디좁은 대롱 속으로 기어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도록 몰아 부치고 있기 때문에, 대통령 대변인이라는 자가 세계의 눈이 집중된 가운데 발가벗고서 버젓이 성희롱을 자행한 것이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258 | 추천: 0
홍미정/ 단국대 GCC 국가연구소 연구교수   지난 금요일(5월 3일) 이스라엘 전투기가 시리아 정부군 시설을 공격하면서, 시리아 내전이 역내의 모든 국가들이 연루되는 전면전으로 확산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2013년 2월 유엔 인권 위원회는 2011년 3월 이후 2년 동안 시리아 내전에서 7만 여명이 사망하였다고 발표하였다. 다음 주간 사망자 표는 시리아내전이 격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1) 사진 출처 - notthemsmdotcom 현재 시리아 정부군 편에는 러시아, 이란, 헤즈볼라, 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 팔레스타인 해방군, 이라크 시아 민병대 등이 참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정부군에 맞서는 반군은 거칠게 세 편으로 분류된다. 이들은 정치적으로나 이념적으로 통합될 가능성은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통제 지역을 놓고 서로 분쟁한다. 시리아 국민연합(Syrian National Coalition), 무자헤딘(Mujahideen), 쿠르드 최고 위원회(Kurdish Supreme Committee)가 그들이다. 현재 국제적으로 가장 인정받고 있는 시리아 국민연합은 2012년 11월 카타르에서 창설되었다. 걸프 지역의 6개 아랍 왕국들(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쿠웨이트, 바레인, 아랍에미리트, 오만), 아랍 연맹(알제리, 이라크, 레바논을 제외), 미국, 유럽연합, 터키 등은 시리아 국민연합을 아사드 정부를 대체하는 시리아인들의 대표로 인정하였다. 2013년 3월 19일 시리아 국민연합은 임시 정부 총리로 무슬림 형제단 출신의 가산 히토(Ghassan Hitto)를 선출하였다. 알카에다 등 지하드주의자들로 구성된 무자헤딘은 사우디 종교인들의 도움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2년 7월 쿠르드 민족주의자들이 창설한 쿠르드 최고 위원회는 이라크 쿠르드인들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투 현장에서 세 편은 다시 각 무장단체를 이끄는 조직들로 더욱 세분화되고, 내부적으로 세력들 간의 권력 투쟁이 존재한다. 흔히 시리아 내전과 관련하여 미디어들은 시리아 거주민들을 수니파, 시아파, 알라위파, 기독교도, 무슬림 형제단, 알카에다, 쿠르드족, 튀르크족, 팔레스타인인 등 종교나 종파 혹은 종족에 따라 구분하면서, 시리아 내부 사회가 내전으로 치달을 수 있는 충돌하는 정체성을 가진 집단들이 존재해왔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시리아 내부에는 이러한 집단들이 존재하며, 시리아 정부가 일부 집단들을 편향적으로 지원하고 다른 집단들에 대해서는 차별하는 정책을 펴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같은 종교나 종족 집단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이 획일적으로 시리아 정부군이나 반정부군편에 서있는 것도 아니고, 시리아 정부의 차별적인 정책이 결정적으로 내전을 확대 강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다음의 팔레스타인인들의 예가 그것을 증명한다. 현재 무슬림 형제단과 제휴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하마스 무장대원들이 다마스쿠스 동부 지역에서 반군인 시리아 국민연합과 연대한 자유 시리아군(Free Syrian Army)을 훈련시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마스 지도자 칼리드 마샬은 2001년부터 시리아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다마스쿠스에서 하마스 사무실을 운영하다가, 2012년 2월 시리아 위기가 고조되면서 다마스쿠스 소재 사무실을 폐쇄하고 시리아 반군을 지원하는 카타르로 이주하였다. 이러한 칼리드 마샬의 행보는 튀니지, 이집트 등에서 이미 카타르가 지원하는 무슬림 형제단 세력들이 정권을 장악한 사실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반면, 세속적인 팔레스타인인들이 이끄는 정치 단체인 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과 팔레스타인 해방군은 시리아 정부군에 합류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3년 5월 2일, Occupied Palestine보도에 따르면, 시리아 내전 발발 이후 시리아에 거주하는 1,267명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사망하였다고 한다.2) 현재 팔레스타인인들은 정부군과 반정부군 양 편에 모두 연루되어 있으며, 가장 많은 외국 민간인 사망자를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시리아 내전이 시리아 정부의 특정 종파나 종족에 대한 차별적인 정책을 넘어서서 역내 강국들의 개입과 지원이 중요한 동력이었음을 밝혀준다. 특히 이 내전에서는 카타르가 적극 지원하는 무슬림 형제단 세력이 시리아 국민연합에서 힘을 발휘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쿠웨이트, 요르단 왕국 내의 무슬림 형제단 분파들은 각 왕가에 대한 비판 수위를 높이면서 권력 공유를 의미하는 정치 개혁을 강력하게 요구한다. 따라서 무슬림 형제단이 시리아에서 권력을 장악할 경우, 그것은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와 요르단 왕국에게는 국내 정치 불안을 극대화시키는 강력한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이러한 역내 아랍 국가들의 복잡한 국내 상황이 시리아 내전을 장기화시키고 격화시키는 중요한 요인이다. 1) Terrorism has spread in Syria and so has chaos. This is reality: April 3, 2013 http://notthemsmdotcom.wordpress.com/2013/04/03/terrorism-has-spread-in-syria-and-so-has-chaos-this-is-reality/ 2) 1267 Palestinian martyrs since the outbreak of the Syrian revolution, May 2, 2013 http://occupiedpalestine.wordpress.com/2013/05/02/1267-palestinian-martyrs-since-the-outbreak-of-the-syrian-revolution/
2017-08-07 | hrights | 조회: 568 | 추천: 0
신하영옥/ 광명시민인권센터장 지난해 시민인권학당을 마치고, 그 수료생 중 일부와 인권세미나를 진행하고 있다. 여러 가지 역학적 관계로 인해 올 해는 인권센터사업이 아직 개점휴업 중이었고, 그러한 돌파구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무엇보다 소중한 시간이 되고 있다. 그동안 위에 떠 있었던 듯 하던 활동이 대지에 발을 붙인 듯 느껴지고, 무엇보다 세미나 과정의 역동을 통해 새로운 각오와 시민들의 건강함을, 힘을 흥분으로 느끼고 있다. 구성원은 10대부터 70대 어르신까지 다양한 연령층, 여성과 남성이 절반씩, 장애자녀부모, 제도권 밖의 학교 재학생과 선생님, 빈곤의 악순환에 시달리는 분, 시민단체 활동가 및 회원 등, 보편에서 제외되거나 보편을 거부한 소수자들이다. 그래서일까? 첫 시간부터 세미나는 지루할 틈이 없었다. 혹시 자칫 지루해지거나, 너무 다양해서 얘기들이 섞이지 않으면 어쩌나 했던 것은 기우일 뿐이었다. 처음부터 봇물 터지듯 자신의 경험과 소수자로서의 답답함을 토로하고 있다. 청소년인권을 다룬다고 청소년들만이 논의를 주도하지 않고 장애인 문제도 마찬가지이고, 빈곤의 문제도 모두다 자신과의 연관성, 즉 사회적 관계와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이해하고 있다. 나이도, 성별도, 지위도, 장애여부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안에서 70대 어르신의 경험이 현재 청소년들에게 재현되고, 빈곤문제는 청소년의 미래이며, 현재 우리들의 모습으로 환원된다. 청소년들의 권리에 대한 침해는 다시 어르신의 분노와 만난다. 이 모든 인권침해와 차별들은 결국 서로 만나고 있다. 나이, 성별, 장애유무, 빈곤, 인종, 심지어 주거 및 보행권의 문제도 하나로 만난다. 그것은 이 국가가 누구의 국가이며 누구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가? 에 대한 질문과 이로부터 오는 배신감이다. 광명시민인권센터 세미나 모습 사진 출처 - 광명시민인권위원회 블로그 그래서 '공분'한다. 그리고 그러한 공분이 서로의 연결됨을 확인하게 해주고, 그러한 유대감이 세미나의 활력과 역동의 배경이 된다. 나와 뜻이 같은 이들이 있다는 것, 내 아픔에 공감해주고 나의 분노에 지지해주는 타인들, 집단이 있다는 것은 내 존재, 정체성에 대한 존중과 확인이 된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혼자 산다면 무슨 인권이 필요하겠는가? 혼자 산다면 존중받고자 왜 애쓰겠는가? 정체성의 확인과 존중은 함께 사는 인간의 필요충분조건 일 테다. 그래서 인권은 존중과 정체성대로 인정받고 그 정체성대로 살아가고픈 인간의 욕망이 아닐까 싶다. 그가 누구이든 간에 사람은 생긴대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걸 제도화하는 게 인권일 것이다. 여전히 누군가는 별 근거도 없이 존중받는 집단의 구성원이 되고, 다른 어떤 이들은 ‘정체성’ 때문에 무시받거나 경멸의 대상이 된다. 무시하거나 경멸하는 근거조차 없다. 근거없는 무시와 경멸이 현실 속에선 힘을 갖고 있다. 그런 면에서 국가와 인권의 만남은 이중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현재의 국가는 그리고 그 국가의 의무로 실현되고 있는 인권은 여기 모인 '우리'를 대상이나 주체로 하고 있지 않다고... 그래서 또 우리는 찾고 있다. 이러한 '공분'에서 오는 문제와 해답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고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여성주의 상담의 원칙에는 ‘내담자의 문제는 내담자 자신이 해결할 힘이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있다. 세미나를 진행하면서 그동안 나는 이 말을 얼마나 잊고 있었으며, 그리고 요즘 다시 재발견하고 있는 중인지 깨닫는다. 세미나를 통해 변화하고 있는 것은 누구보다도 ‘나’인 듯하다. 문서자료와 토론석상, 워크숍을 통해서가 아닌 생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문서의 정당성을 확인하고 나아가 오류를 발견한다. 그리고 한 동안 잊었던 ‘부정의에 대한 공분’을 온 몸으로 느끼며 살아있음에 감사한다. 매번 세미나가 끝날 때 나는 감동이 온 몸을 훑고 지나는 듯한 원기 충만함을 느낀다. 이것이 날 잡아끄는 매력으로 작용하는 한 아마도 나는 이 상황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을 듯 하다. 배움을 다시 시작하면서 일과 배움 중 배움을 더 선택하고픈 욕망에 시달렸던 것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자리에 있도록 하는 것은 완전히 이 세미나가 주는 사람들과 나에 대한 재발견과 감동이다. 내게도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충분히 있다는 것에 대한 기쁨이다. 사람들이 함께하면서 만들어내는 힘과 역동, 공동체성의 회복, 인간에 대한 긍정적 희망, 이런 것들을 관념이 아니라 실체로 확인하고 느끼는 나에 대한 감사함이다. 이를 통해 나는 내 삶 즉, 활동의 방식에 대해 성찰해보게 된다. 관념과 추상과 오만으로 얼룩져있진 않았던가... 나를 너무 내세우지는 않았던가... 하는. 겸손해지고 기다릴 줄 알아야겠다. 세미나를 하면서 확인하는 또 다른 점은 우리는 누구나 다 소수자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 소수자성들로 인해 다른 형태의 인권침해나 차별, 부정의에 대해 공감이 형성된다. 그 소수자성이 우리를 많은 다름에도 불구하고 하나로 묶고, ‘우리’, ‘공통의 분노’라는 것으로 표현되게 하고 있다고 본다. 어떤 소수자성이 먼저 배려되어야 하는가? 누가 가장 사회적약자이고 그래서 가장먼저 인권의 정치학의 혜택을 보아야 하는가? 하는 이론적 문제가 여기서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소수자성이 한 개 이상으로서, 여성이고 장애아부모이고, 마땅한 직업은 없으나 사회활동은 하고 있다거나, 소상인이지만 빈곤하고 인권보장이 안 되는 학생자녀를 두고 있고 비정규직 가족이 있다. 노인이고 일자리 없고 병든 몸이거나, 탈 제도화로 인해 미래가 불확실한 청소년과 선생님이 있다. 정체성은 중첩되고 생애주기에 따라 변화는 것임을 서로를 보면서 확인한다. 따라서 무엇이 혹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단 하나라도 소수자정책이 제대로 실현된다면 이리저리 얽혀있는 정체성으로 인해 어딘가 에서는 만나게 된다. 그리고 내가 아닌 너의 문제해결이 선행된다고 해서 억울해하거나 질투하지 않는 것이 또한 소수자들의 연대의식임도 확인한다. 그러니 기다려주겠다. ‘우리 모두의’ 국가라는 확신이 들 그 날을... 모두의 국가가 아니라는 베일이 완전히 벗겨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리’의 국가적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어떤 현상이 빚어질 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일이지만, ‘공분하는 우리’가 늘어가는 이상 그것은 필연적이다. 상상만으로도 짜릿하지 않은가.
2017-08-07 | hrights | 조회: 255 | 추천: 0
이광조/ CBS PD 항공기 기내에서 승무원에게 트집을 잡고 욕설에 폭행까지 저지른 국내 한 대기업 임원이 보직에서 해임됐다. 문제의 임원이 재직하던 포스코 에너지는 이와 관련해 회사 공식 블로그에 사과문을 게재하고 진상 조사 후 결과에 따라 엄중 조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언론들도 대부분 이번 사건을 비중 있게 보도하며 이른바 ‘진상 승객’들의 행태를 유형별로 적시하고 재발방치 대책을 촉구했다. 사건의 진상을 접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공분을 느꼈을 거다. 파문이 커지면서 문제의 임원이 소속돼 있는 기업이 신속하게 사과하고 인사 조처를 단행하자 승무원들은 물론 사건을 지켜보던 이들도 통쾌함과 안도감을 느꼈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며칠 전 보도됐던 구미의 한 반도체 사업장 얘기가 떠오르며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사건의 얼개는 이렇다. 그 사업장에서는 오래전부터 작업 중에 부상을 당한 노동자가 산업재해를 신청하면 징계를 받는 게 관행이었다고 한다. 지난 1월에도 사업장에서 한 노동자가 기계에 손가락을 끼어 부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노동자가 회사에 산재 신청을 문의했을 때 회사에서는 “공상처리를 하면 치료비를 지급하고 치료기간 결근을 인정해주지만, 산재처리를 하면 징계위원회에 올라간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한다. 이 노동자는 산재 신청을 했고 회사는 ‘오랜 관례’에 따라 이 노동자를 징계했다. 징계 사유는 사고의 원인이 노동자의 부주의에 있고 무재해 목표 달성을 무산시켰으며 회사의 대외적인 이미지를 실추시켰다는 것이다. 징계의 수위는 높지 않았지만 노동조합에서는 일하다가 다친 것도 억울한데 징계는 부당하다는 입장이다. 사고의 원인에 대해서는 노사의 주장이 엇갈린다. 여기서는 일단 사고원인을 둘러싼 논란은 제쳐두자. 핵심은 안전사고의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는 작업장에서 작업도중 다쳤다는 이유로 노동자를 징계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하는 점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다쳐도 산재 신청을 하지 않으면 문제가 없고 산재 신청을 하면 징계를 받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점이다.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작업 도중 부상을 당했을 때 산재를 신청해서 인정받지 못 하면 혹시라도 생길 수 있는 후유증에 따른 부담을 개인이 고스란히 떠안아야 한다. 당연히 산재 신청을 하는 것이 좋다. 산업재해보상보험이 왜 있는가? 그런데 다친 것도 속상한데, 산재 신청을 할 경우 징계는 물론 회사에 밉보일 것을 각오해야 한다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그래서 이 업체에서는 다치고도 산재 신청을 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더구나 해당 사업장에서는 수많은 위험 화학물질을 다룸에도 불구하고 형식적인 안전교육 외에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노력이 없었다는 것이 노동조합의 주장이다. 항공사 승무원 폭행 사건을 보며 산재를 당한 노동자의 이야기가 떠오른 건 강자의 횡포에 분노하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는 우리사회가 노동자의 권리와 인권에 관해서는 너무 둔감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시민으로서의 정치적 권리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정작 나와 너의 문제이기도 한 노동자의 권리에 관해서는 너무나도 둔감한 우리의 모습은 때로 무섭기까지 하다. 권리침해가 너무 만연해서 감수성이 무뎌진 걸까, 아니면 문제의식은 있지만 법과 제도가 제대로 기능을 못해서 자포자기한 걸까. 아니면 내가 당하지 않는 한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사진 출처 - 노컷뉴스   지난 2012년 한 해 동안 우리사회에서는 산업재해로 인해 약 9만여 명이 다쳤고 1864명이 목숨을 잃었다. 5분에 한명 꼴로 부상을 입고 3시간에 한명 꼴로 목숨을 잃었다. OECD 국가 중 산재사망율 1위다. 노동자로서 너와 나의 권리에 대해 우리사회가 조금만 더 관심을 기울였다면 다치고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조금은 줄어들지 않았을까. 이번 항공사 승무원 폭행사건은 기업 안의 노사관계에서 발생한 사건이 아니다. 따라서 이를 노사관계에서 발생하는 노동자들의 권리 침해 문제와 바로 연관 짓는 건 무리가 따를 것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에 관해 한 전직 승무원이 라디오 방송 인터뷰에서 던진 얘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는, 만약 항공기의 목적지가 미국이 아니라 한국이었으면 사정이 달랐을 것이라고 말했다. “목적지가 우리나라였으면 좋게, 좋게, 좀 높으신 분이니까 그냥 좋게, 좋게 하자면서 일이 커지는 것을 어느 쪽에서든 다 원하지 않지 않았을까”(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4월 23일 인터뷰 중에서). 도착지가 미국이어서 피해자의 신고에 미국 경찰의 신속한 조치가 이뤄졌지 도착지가 한국이었으면 사건이 흐지부지 되지 않았겠냐는 얘기다. 너무 자조적인 얘기로 들리는가. 그렇다면 노조탄압, 직장 내 성희롱 등 노사관계는 물론 직장 내 위계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인권침해 사건들이 신속하고 속 시원하게 해결되는 걸 본 적이 있는지 되돌아보라. 우리에게 여전히 법은 멀고 권력은 가깝지 않은가.
2017-08-07 | hrights | 조회: 308 | 추천: 0
정재원/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십중팔구 한국에만 있는’이라는 책 제목처럼, 우리는 한국 사회에서 유독 강하게 나타나는 독특한 사회현상들이 오래 전부터 있어 왔음을 잘 알고 있다. 부동산, 조기 영어 교육, 과외와 학원 등 각종 사교육, 골프장, 기러기 아빠, 야근 문화, 성접대 문화, 학벌, 학력 문제, 고시와 학원 열풍, 과잉 상태의 자영업 등등... 대충 생각나는 것만 나열해도 매우 특이한 사회 현상의 종류가 꽤 다양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오랜 사회현상 외에도 한국에서만 특이하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지만, 최근 크게 문제가 되고 있는 학원과 군대에서의 폭력이나 묻지 마 살인, 성폭행, 자살, 보이스 피싱 등과 같은 사회문제들 역시 우리 사회에서 유독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는 사회 현상이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얼핏 보면 크게 연관성 없는 것처럼 보이는 상기한 사회현상이나 사회문제들은 서로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원인과 해결책에 있어서 공유하고 있는 지점들이 많다고 생각된다. 즉 거칠게 단순화하자면, 이 모든 문제들의 원인은 사회경제적 민주화와 복지 사회 건설을 방해하고 거부하고 있는 특권적 사회기득권 집단들과 그들의 이해를 반영하는 국가에게 있다고 할 수 있다. 국가는 그 동안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경제 수준에 턱없이 모자라는 수준으로 복지 제도를 유지한 채, 국민들로 하여금 무한경쟁 상태 속으로 빠져들게 해 왔고, 그러한 무한경쟁에서 살아남은 소수들에게만 모든 것을 누리고 지배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해 왔다. 그 범위는 사회에 상대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재벌이나 고위 관료 등의 집단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소수 기득권 집단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할 뿐 아니라, 지속, 확대시키기 위해 국가를 포획해 정글 상태에서의 경쟁이 낳는 이익들을 독점적으로 취해 오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생존권적인 위협을 느끼는 대다수의 국민들은 자신과 가족들을 지키고, 나락으로 빠지지 않기 위해 온갖 편법적 수단들을 강구해 왔다. 부동산은 갑작스런 가계의 붕괴를 대비하는 모종의 사회적 안전망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인식되었고, 고시를 통한 고위공무원으로의 길은 출세를 통한 가장 안전한 생계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지연과 학맥에 의한 폐쇄적 위계질서와 배타적인 기득권 네트워크로 특징지워지는 한국 사회 구조에서 각종 사교육과 조기 영어 교육은 출세와 성공, 그리고 그것의 지속성을 확보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그러한 경쟁 구도는 한국식 학벌 위계 사회에서 그 보다 더 경쟁력을 갖춘 글로벌 엘리트를 만들 수 있다는 논리로 조기에 자식들을 미국으로 유학 보내는 풍토까지 낳았다. 무한경쟁, 약육강식의 시장원리가 관철되는 사회에서 야간노동은 너무나 당연하며,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은 국가와 사회가 제공해 주는 복지 대신 성접대 문화 속에서 보상받으려 한다. 사업의 성공은 이러한 공간에서의 부패와 성적 쾌락이 좌지우지하게 된다. 저임금과 조기해고의 위협에 시달리는 노동 대중들은 국가가 보장을 포기한 영세한 자영업으로 뛰어 들어 서로를 속이고, 서로 갉아 먹다가 극소수의 성공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결국 심지어 성산업, 사채업, 보도방 등등 반불법적인 비공식 경제로도 기꺼이 뛰어든다. 이러한 삶 속에서 고통 받고 그로인해 감정을 참지 못 하는 부모들 밑에서 자라는 학생들 역시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자신들의 부모들의 삶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여러 학원에 다닐 수 있는 학생이나 다닐 수 없는 학생이나 모두 다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 하는 상태로 살아간다. 학교의 양극화 속에 아예 학교가 슬럼화된 학생들에게는 최소한의 희망도 없다. 이렇게 학교를 다녀서 졸업해 봐야 그 어떤 꿈도 꿀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억지로 몰아넣는 학교에서 폭력이 만연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하다. 일부는 자살로, 다른 일부는 폭력배로 스스로의 인생을 파괴하지만, 이들 외 다수의 학생들도 국가는 아무 것도 안 해주는 정글과 같은 사회에서 자신과 가족을 지키기 위한 편법과 불법에 더 익숙하게 됨으로써 스스로를 파괴한다. 이러한 현상의 연장선상에서 군대는 그러한 편법과 폭력을 더욱 가다듬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 공간이 되고 만다. 물론 상기한 사회 현상들은 빈곤 계층의 급박한 생존 문제 때문이 아니라, 실은 그 보다 더 안정적인 계층과 집단들에서 더 높은 명예나 더 출세하고자 하는 욕구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기도 하지만, 상대적으로 안정적으로 보이는 집단이나 계층조차 불안정한 지위로 인해 불안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찌 되었든 이러한 총체적인 분위기 속에서 기득권 집단들은 이러한 구조를 유지하려고 하며, 정당의 교체와 같은 ‘정치’는 실질적 지배 구조를 은폐하는 도구가 되고 만다. 그들은 그들만의 리그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대부분의 민중들로 하여금 남을 밟아야만 내가 생존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 속에서 살도록 강제한다. 그 과정 속에서 많은 이들은 쉽게 밟고 올라갈 수 있는 희생자들을 양산해 낸다. 비정규직이나 영세자영업자들 외에도 장애인, 여성, 이주자들은 가장 쉽게 희생되는 집단이다. 물론 세상은 이렇게 끔찍하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 사회 곳곳에서 썩어 들어가고 방치되어 있는 부분이 넘쳐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신자유주의의 공격이 이러한 현상들을 악화시키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와 별도로 존재해 온 우리 사회의 문제를 진지하게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김상곤 경기도 교육감이 제기한 무상급식 논쟁은 2012년 초미의 화두인 복지국가 논쟁으로 발전했다. 사진 출처 - 프레시안 모든 문제들의 원인은 상당부분 공통적인 데에 있기 때문에 대안은 의외로 무척 간단하다. 즉 대한민국의 경제적 지위에 걸맞는 사회복지제도가 현실화되어 교육과 의료의 무상 혜택, 토지와 주택 등의 공공성이 확보되고, 사회적 일자리가 유럽 평균 수준으로 크게 확대되며, 연금과 실업급여 등 각종 급여제도가 실질적인 사회안전망 역할을 하게 되면 굳이 정글에서 극단적 경쟁을 할 필요도 없으며, 그러한 경쟁에서 낙오되어 스스로 반범죄적 영역이라는 나락으로 빠지지 않아도 될 것이다. 문제는 국가의 의지이다. 재벌 자체의 개혁은커녕 중소기업 압박, 골목상권의 파괴가 버젓이 이루어지고 있고, 청문회 과정에서 드러난 소수 정부 각료만 해도 모조리 다 불법으로 특권을 챙기고 있는 판에, 제대로 파악조차 안 되는 우리 사회의 고소득 기득권층에 대한 서구 수준의 단호한 과세 압박 없는 경제민주화, 복지국가는 말장난에 불과하다. 최소한의 공공의료조차 파괴당하는 현실은 단 한 분야조차 그 방어가 쉽지 않음을 예고하고 있지만, 우리의 고질적인 사회문제의 근본적 원인과 그 해결책은 하나로 수렴되는 부분이 있기에 여러 사회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진정한 복지사회 건설이 그 중요한 고리가 될 수 있음을 인식하고 대응해 나가야 할 것이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7726 | 추천: 7
박현도/ 종교학자 이란의 보수 언론인 파르스(Fars) 뉴스에 터질 듯 뚱뚱한 얼굴의 북한 지도자 김정은이 꿈속에서 핵폭탄으로 변신하여 날면서 “오바마, 너를 죽일 거야”라고 말하는 만평이 실렸다. 북한과 핵 협력설로 인해 국제적 의혹을 받고 있는 이란에서 북한의 지도자를 우스꽝스럽게 그린 만평이 실렸다는 것이 참 이색적이다. 필자 혼자만의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만평에 나온 김정은의 모습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그런 돼지상이다. 의도하였는지 아닌지 직접 물어 확인할 길 없지만, 어찌되었든 간에 김정은이 뚱땡이 핵폭탄으로 이란 언론에 묘사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박근혜정부가 들어서자마자 시작된 북한의 위협적인 언사와 행동이 국제적 관심거리로 떠올라 해외에서는 한국이 안전한 곳이 아니라는 인식이 지배적인 듯 한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외국에서 들어오는 이메일마다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기원한다”라는 문구가 거의 관용어구처럼 적혀있다. 정작 우리 한국인들은 별 걱정 않고 살고 있는데 말이다. 외국인들이 지나치게 민감한 것일까? 언론이 조금 지나치게 호들갑을 떠드는 감이 없지는 않지만, 북한의 위협이 거의 반세기에 걸쳐 지속되다보니 우리네 안보 감각이 무뎌져도 너무 무뎌졌다는 것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매일매일 의도적으로 위협의 정도를 높여가는 북한을 보면서 딱함을 넘어서 분노가 이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인민의 낙원이라는 곳에서 인민들이 굶어 죽어가는 데 지도층은 사치품을 수입하느라 정신을 못 차리고 있고, 수십만 인민을 먹이고도 남을 돈으로 정권 안보를 위한 핵폭탄을 만들고 있으니, 도대체 이들을 어떻게 혼내주어야 할 지 막막하다 못해 화가 난다. 폭압적 정권을 지키기 위해 자국민을 수용소에 가두고 고문하고 죽이는 북한 사회를 언제까지 동포라는 이름으로 감싸주어야 하는가? 사담 후세인, 카다피, 무바라크의 인권유린에 대해서는 분노하면서 왜 우리는 3대 세습하며 정치적 반대자를 총살하는 극악한 북한 정권의 잔혹함에는 침묵해야 하는가? 이는 우리 사회에 마치 불문율처럼 통용되는 보수와 진보의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보편적 인권을 유린하는 폭압자들을 반대하고 규탄하는데 보수와 진보가 다를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 사회의 진보가 진정한 진보가 되려면 보수보다 한발 앞서 북의 잔인한 인권유린에 대해 당당하고 치열하게 비판하면서 인권상황 개선과 시정을 요구해야 한다. 인권보다 민족을 우선하는 사람을 진보로 여기는 우를 북의 3대 세습처럼 대물림해서는 안 된다. 진보의 가치는 보편적일 때 빛난다. 이제 보편적 인권의 이름으로 북한의 인권 유린을 지적하며 시정을 요할 때다. 북한의 생떼를 보면서 나는 우리 사회의 자칭 타칭 진보세력이 진정한 진보로 거듭나기 위해 북한이 뚱땡이 핵폭탄을 포기하고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한반도를 위해 개인의 기본적 자유를 존중하는 체제로 전환할 것을 과감하게 요구하길 바란다. 보편적 인권을 이야기하면서 남북한 특수상황을 절대적으로 우선하는 우를 다시는 범하지 않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뚱땡이 핵폭탄이 인권을 마음대로 유린하는 북의 위정자들에게 떨어지길 바라며.
2017-08-07 | hrights | 조회: 266 | 추천: 0
최정학/ 방송대 법학과 교수   ‘지슬’이라는 독립영화가 극장에서 상영 중이다. 오랜만에 보는 흑백영화인 지슬은 제주 4·3문제를 다룬 것으로 전쟁이나 이념과는 아무 상관없는 순박한 제주사람들의 희생을 기리는 신원(伸寃)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어둠 속에 비쳐지는 한라산의 묵직한 모습만큼이나 영화를 본 뒤끝의 가슴이 먹먹하다. 광기어린 국가나 권력에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이 다 그러하겠지만, 도대체 무엇을 위한 전쟁인지, 누구를 위한 희생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제주도민뿐만이 아니라 그 와중에 스러져간 젊은 군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영화는 양측의 원혼과 아픔을 어루만지려 한다. 어디 이 뿐이겠는가. 거창과 노근리의 양민학살, 여수, 순천에서의 반란진압, 전국에서 벌어진 보도연맹 사건 등 해방과 한국전쟁 시기에 까닭 없이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전쟁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 막대한 민간인의 피해이고, 이들에 대한 국가나 권력을 등에 업은 집단적인 공격이 인류역사에서 가장 크고 반인도적인 범죄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편, 북한의 핵실험으로 촉발된 한반도의 긴장은 갈수록 높아져 북한은 마침내 지금이 ‘전시상태’임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질세라 남쪽에서는 연일 미국의 최첨단 무기가 하늘과 바다에서 무력시위를 벌인다. 북한의 객관적인 군사력이 남한에 비해 절대적으로 열세이고, 따라서 만에 하나 전쟁을 개시한다면 미국의 이라크 전쟁만큼이나 빠르게 아니면 그보다 더욱 처참하게 북한이 붕괴할 것이라는 것이 명백한 사실이라 해도, 이런 식의 군사적 긴장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다. 오죽하면 새로 취임한 교황이 세계평화를 위한 기도의 첫 대상으로 한반도를 가리켜 지목을 했을까. 분명한 것은 한반도가 핵을 포함한 새로운 군사무기들의 실험장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점이다. 북한의 주민을 포함하여 우리 모두가 또다시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전화(戰禍)의 희생물이 될 수는 없다. 북한의 정권도 마찬가지이지만, 남쪽이나 미국의 당국자도 혹여, 털끝만큼이라도 한반도에서 전쟁을 상정한 북한 붕괴의 시나리오를 계획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군부나 권력층이 아니라 힘없고 가난한 일반 백성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 "지슬 - 끝나지 않은 세월2" 사진 출처 - 씨네21   4·3의 65주년이 다가온다. 전쟁의 상처는 반세기가 훌쩍 지나도 여전히 아물지 않고 있는데, 이 상황에서 우리 대통령은 4·3 기념식에도 참석하지 않겠다고 한다. 반대로 가능한 북한의 어떤 도발에도 즉각적이고 단호한 대처를 군부에 주문했다. 국가안보가 엄청나게 중요한 가치이고, 북한에 양보할 수 없는 대한민국의 이념이나 체제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힘들고 깊은 역사적 갈등을 풀 수 있는 힘은 지금 남쪽, 대한민국에 있지 않는가. 대한민국의 국력이 북한의 그것보다 월등히 앞서고 있으며, 경제와 사회, 문화 모든 면에서 비교할 수 없는 정도의 발전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고립된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 나아가 생존하기 위해 핵무장도 마다하지 않는 북한에게 따스한 지원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최적의 당사자는 바로 우리, 남한이 아닌가. ‘지슬’에서 기억나는 대사. 일제 강점기도 살아서 버텼다며 산으로 도피할 것을 거부한 한 할머니를 잔혹하게 살해하는 한 군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어머니도 빨갱이들에게 살해당했어. 나는 빨갱이가 싫어.” 한편, 영화는 마지막에서 동굴에 도피한 임산부가 출산한 새로운 생명의 울음소리를 보여준다. 아마도 삶은 계속되고, 그래도 희망은 있다는 메시지인 듯한데, 그러나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이제 이러한 원한은 끝내야 한다. 이 당대에 끝내지 못한다면, 적어도 지금의 젊은이들, 어린이들에게 이를 물려주어서는 안된다. 북한이 그렇게 철천지 원수라고, 빨갱이와는 같은 하늘아래 살 수 없다고, 전쟁을 불사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들에게는 조금도 양보할 수 없다고 부르짖는 뿌리 깊은 증오심을 이제는 버려야 한다. 그 적대감에 이유가 없어서가 아니라, 증오는 증오를 낳고, 복수는 복수를 자극하여 결국은 모두가 공멸하는 길로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북한을 정치적, 경제적으로 고립시키고 우리가 원하는 개방을 강요하는 정책이 낳은 결과를 우리는 지난 정권에서 잘 보았다. 북한은 강하게 반발하고, 결국 핵무장으로 나아갔다. 지난 정부와는 다르다며 한반도의 신뢰 프로세스를 들고 나온 새 정부. 신중하고 또 신중한 대북정책이 필요하다.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휘둘리거나 극우파의 주장을 잘 다스리지 못한다면, 또다시 한반도의 위기, 시간낭비는 물론 아까운 젊은이들의 희생과 대한민국의 북한의 국력쇠퇴라는 결과가 초래될 것이기 때문이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247 | 추천: 0
위문숙/ 서울DPI 회장 글과 그리 친하게 지내오지도 못한 제게 칼럼에 대한 문의는 참으로 고통스런 고민이었습니다. 전부터 자주 방문하며 공부도 하고 고민거리도 얻어가는 훌륭한 단체(사이트)여서 더 그랬습니다. 그러나, 장애운동이라는 영역이 사회운동 안에서 온전히 함께 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자연스러운 교감도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의 마음으로 건방을 떨어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도 떨리고 무섭습니다. 때로는 말보다도 글이 더 폭력적일수도, 더 무식할 수도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제가 처음 장애운동을 접하고 시작한 86년(장애인문제연구회 울림터)은, ‘장애운동’이라는 용어를 쓰기도 말하기도 어색한 시절이었습니다. 장애인인 모든 이유가 개인 혹은 가족의 탓으로 규정짓던 때여서 이 모든 것이 ‘사회구조적 모순’때문이라는 작은 울림터의 외침은 획기적이고 두 눈을 부릅뜨게는 만들었지만 부문운동으로 인정받거나 하물며 존중받기에는 많은 상황이 무리였던 시절이었습니다. ‘장애’라는 단어 때문이기 보다 운동의 총 깃발이 ‘전 세계 노동자가 단결해야 할 과업을 안고 있었던 ‘노동’운동이었기 때문입니다. (돌이켜보면 함께 했던 장애계 동지들 중에 노동자는 없었습니다. 장애인의 대학 입학 거부가 만연하고, 노동의 기회조차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당시, 의료 관련된 문건을 제외하고 장애인의 삶이나 문제 따위에 대한 논문 한편 없던 척박한 이론의 부재, 존재의 부재였던 시절입니다. 미국의 장애운동은 여성운동과 흑인운동의 영향을 받아 공민권운동으로 발전하고 진행되어 왔고, 일본역시 사회운동의 분위기아래 중증중심의 거친 운동으로 많은 영향과 성과를 이루어냈습니다. 한국의 경우, ‘전 세계 노동자여, 단결하라!’ 그리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가 노동운동의 이념과 실천의 기둥이었다면, 장애운동의 시발에는 (물론 사회운동의 분위기와 이념이 더욱 우선되게 영향을 미쳤지만) 故김순석 열사의 유서가 장애운동의 처절함을 잘 대변해줍니다. “...시장님, 왜 저희는 골목골목마다 박힌 식당 문턱에서 허기를 참고 돌어서야 합니까. 왜 저희는 목을 축여줄 한 모금의 물을 마시려고 그놈의 문턱과 싸워야 합니까. 또 우리는 왜 횡단보도를 건널 때마다 지나는 행인의 허리춤을 붙잡고 도움을 호소해야만 합니까...” 그리고 이어진 구호는 ‘장애인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아보자!’...였습니다. 이 얼마나 허망한 외침입니까. 장애인은 인간이 아니라니.. 학교가 있어도 다니지 못하고, 길이 있어도 가지 못하고, 버스가 다녀도 태워주질 않고, 식당엘 가도 걸인 취급이 일쑤니 보통의 ‘사람’이랄 수가 없기도 없었습니다. 김순석 열사의 자결 소식이 실린 당시 신문. 사진 출처 - 비마이너 현재, 국내에는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존재하고, UN 장애인권리협약이 시행되고 있다고는 하나 장애인의 삶과 인간으로서의 가치는 여전히 사회적 약자중의 약자, 무능한 부류의 집단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합니다. 장애인권리협약이 비준될 당시 유명한 발언이 있습니다. ‘.. 전 인류는 오래토록 외면해 오던 장애인의 인권을 가장 최후에야 결의했다. (중략) 장애인의 인권은 이 인류가 책임져야 할 가장 가치 있는 일이며, 인류를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주제인) 최후의 협약이 될 것이다....’ 비록 주먹구구식이고, 세련된 투쟁도 아니고, 무장된 논리가 부족하다 해도, 장애인운동은 계속됩니다. 장애, 그리고 장애인. 이 존재의 무거움이 또 다른 새로움과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음을 믿고 있는 한...
2017-08-07 | hrights | 조회: 291 | 추천: 2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지난 대선의 판도를 확실하게 정돈해 버린 사안 중 하나가 50대의 투표율이 82%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중론으로서의 해설은 그들의 삶의 지향에서 생존이야말로 절체절명의 과제였고, 그 과제에 대한 본능이 정치의식으로 표출되어 개혁보다는 안정 쪽으로 기울었다는 것이었다. 개혁은 그렇잖아도 먹고 살기 힘든 데 불안정한 요인을 강화할 가능성이 높고, 기존의 정치사회적인 틀에 가까운 정치세력이 그나마 돌발변수를 줄이는 쪽이 아니겠는가 하는 그들 50대의 판단이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도대체 그럴 수 있느냐? 대학시절 적어도 민주화를 향한 바람으로 여러모로 정의 운운 하면서 직간접적으로 투쟁을 한 세대가 바로 50대가 아닌가, 그런데 그럴 수 있단 말인가 하고서 한탄의 염을 쏟아내기도 했다. 한편에서는 1997년 이른바 IMF 시절 30대 후반 내지는 40대 초반 언저리라 바로 위 세대들이 쫓겨남으로써 오히려 반사이익을 본 세대가 아닌가, 그러고 보면 지금의 50대가 기회주의적인 속성에 물든 것 아닌가 하는 뜨악한 눈길을 보내기도 했다. 그런데 3월 19일자 한겨레신문에 사회진단을 위한 설문 조사의 결과를 바탕으로 “10대 청소년들, 기성세대보다 돈 · 권력 중요시”라는 큰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만연한 듯 한 학원폭력이 떠오르면서 불길한 예언이 실현되고 만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그렇구나! 저런!’ 마음이 솟아올랐다. 어쩌면 그렇거니 하면서 넘길 수도 있지만 조금만 달리 생각해보면 섬뜩하기 이를 데 없는 내용이다. ‘섬뜩하기 이를 데 없는’이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이러한 의식을 가진 10대의 세대가 앞으로 이 사회의 주역이 될 때 과연 이 사회는 어떤 아비규환의 지옥과 같은 세상이 될 것인가 하는 예감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런 지경이 되고만 오늘날 한국 사회라는 삶의 현장이 그야말로 ‘레 미제라블’, 참혹한 세상이구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전 세대 사고 및 행동양식 비교연구(클릭하시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철학자 하버마스는 사회가 체계와 생활세계로 구성된다고 말한다. 생활세계는 이해지향적인 합리성에 의거한 언어적인 소통을 통해 이루어지는바 사회의 바탕이고, 체계는 화폐를 소통의 수단으로 삼는 시장과 권력을 소통의 수단으로 삼는 국가라고 했다. 그러면서 결코 그렇게 되면 안 되지만, 현실적으로 화폐와 권력을 소통수단으로 하는 체계가 언어를 소통수단으로 사는 생활세계를 볼모로 삼아 이른바 식민화해서 포섭 · 지배한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어쩌면 가장 정의롭지는 못할지라도 가장 순수해야 할 10대의 청소년들이 그 어떤 세대보다 돈과 권력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이러한 통계수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젊은 세대일수록 이웃의 중요성을 낮게 평가한다는 설문 통계의 진단을 곁들이고 있는 이 보도를 과연 받아들여야 하는가? 다소 거칠게 뭉뚱그려 말하면, 10대의 청소년들은 50대의 자녀들이다. 대거 투표장에 나타나 대선의 판도를 뒤흔들어 오늘날의 박근혜 정권을 창출한 이들의 자녀들이 바로 이른바 돈과 권력을 선호하는 10대의 청소년들이다. 이를 그저 오비이락의 우연으로만 볼 수 있을까? 어른을 보고 배우는 아이들, 그 아이들이 얼마 있지 않아 또 투표권을 행사할 것이다. 돈과 권력에 더욱 ‘찌든’ 인간들이 법적으로 보장된 정치적인 권리를 행사한다는 이야기다. 그런가 하면 대다수의 국민들이 정당도 믿지 않고 국회도 믿지 않는다고 한다. 정당이나 국회 역시 돈과 권력에 찌든 것처럼 보인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그러고 보면, ‘안철수 신드름’으로 드러나는 기묘한 정치적인 현상도 그 기반이 결코 탄탄하지 않다. ‘안철수 세력’이 돈과 권력을 넘어선 근본적인 삶의 가치를 정치적인 대안으로서 정확하게 제시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돈과 권력에 ‘찌든’ 상태의 삶을 옹호하면서도 그러한 삶을 혐오 · 비판하는 분열증적인 정치의식을 지닌 다수의 바람을 충족시킬 것 같은 이미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돈과 권력이라는 삶의 좌표를 파괴하지 않는 선에서 그에 따른 힘을 ‘정당하게’ 형성 · 발휘하리라는 이미지를 지녔기 때문이리라. 사회구조적인 원칙상 돈과 권력을 정당하게 형성 · 발휘할 수 있는 길은 없다. 자칫 ‘정당한 돈과 권력’이라는 어구는 오히려 돈과 권력에 대한 알리바이 역할을 하기 십상이다. 레 미제라블, 우리의 삶 자체를 저 깊은 바탕에서부터 아예 도망갈 길이 없을 정도로 결정해버리는 돈과 권력, 암수동체적인 이 위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고 하는 이 참담한 현실을 그 어떤 정치사회 세력이 실효적으로 바꾸어 낼 수 있을 것인가. 예컨대 최근 새롭게 들어선 박근혜 정부의 요직을 담당한 인물들에 대한 청문회 내지는 언론의 평가에서 그야말로 상식적인 수준의 기준에서 보아 흠결이 없는 인물을 찾을 수가 없다는 이 참담한 현실을 그 어떤 세력이 철퇴를 내릴 수 있을 것인가. 어느 시인은 노래했다. “단단한 덮개 내려치는 망치, 그들도 그러했으리라.” 왜 역사를 되새길 수밖에 없는가? 죽어도 그건 인생이 아니라고, 도대체 인생을 연거푸 다시 산다 해도 결코 그건 아니라는 혁명적인 각오와 실천이 곧 역사의 원동력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통해 현실의 삶을 성찰하면서 돌파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기 위한 것 아닌가. ‘힐링’이라는 용어가 우리 한국사회의 등뼈를 후려치고 있다. 다들 비틀어지고 파열되고 그런데도 주어진 삶을 최대한 기회주의적으로 영위할 수밖에 없다는 데서 오는 그 절망, 우리 모두 그 막다른 골목에 처해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사실이지 정치적인 권력이나 경제적인 부의 위력에서 ‘힐링’의 비책을 기대하는 자는 단 한 사람이라도 없는 것 같다. 정치를 담당한 자들 그리고 사회의 부를 좌지우지하는 배부른 자들이야말로 맨 먼저 ‘힐링’을 필요로 하는 자들일 뿐만 아니라, 기실 우리 모두를 ‘힐링’이 필요한 자들로 비틀어 놓은 자들이 바로 그들이라는 인식이 편만해 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기분 좋다고 쇠고기 사 먹는” 것을 삶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지 않으면 안 되도록 몰아 부친 자들은 과연 누구이며, 그 역사적인 출발과 고리는 무엇인가? 인간은 누구나 단 한 번 주어진 인생을 살기 마련이다. 또한 각자에게 주어진 인생은 도대체 그 어떤 다른 사람도 대신 살 수 없는 절대적인 사건이다. 인민들의 인생도 그러하지만 돈과 권력으로 지체 높은 ‘양반들’의 인생 역시 마찬가지다. 어떡할 것인가? 돈과 권력으로 도배질 되어버린 이 땅의 인생의 현실을 어떻게 할 것인가? 돈과 권력을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기만 하다면 그 인생은 성공적이지 않겠는가 하고서 자위하고자 하는가? 그러면 그 자식들마저 돈과 권력을 그 자식의 자식들에게 물려줄 수 있기만 하면 성공적인 인생이라고 가르칠 것인가? 우리사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전 세계가 그런 것 아니냐고 엉터리없는 핑계를 대고 싶겠지만, 말한 것처럼 각자의 인생은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고 대체될 수 없는 절대적인 사건이다. 미치도록 안타까운 것이 바로 각자에게 주어진 인생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긴급하게는 특히 대통령직을 맡은 박근혜 씨가 이 물음에 대답해야 할 것이고, 그녀의 권한에 의해 장관직을 비롯해 여러 공공기관의 수장 직을 맡아 공공의 권한을 담당하게 되는 자들이 이 물음에 대답해야 할 것이고, 저 바탕에서는 대학교육을 비롯한 고등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총장과 교장들이 이 물음에 대답해야 할 것이다. 제발이지 공공적인 직위에 따라 주어진 법적인 권한을 내가 마음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권력이라고 오인하지 말기 바란다. 덧붙이자면, 세습해서 가진 부 또는 사회구조를 잘 활용할 수 있는 기회 활용의 능력에 따라 획득하게 된 부라고 해서 내가 마음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권력이라고 오인하지 말기 바란다. 당신들이 우리의 순수하기 이를 데 없어야 하는 청소년들을 “돈과 권력을 중요하게 여기도록” 만든 장본인들임을 대오각성, 불면의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돈과 권력의 위세’가 ‘세계 자살률 1위’라는 진단과 과연 무관하겠는가. 이 절체절명의 진단을 받고서도 어떻게 편안하게 잠들 수 있단 말인가.
2017-08-07 | hrights | 조회: 281 | 추천: 0
이은규/ 인권연대 '숨' 일꾼   사랑이 제일 어렵다. 사람의 머리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부서지고 부서져 고운 뼛가루조차 남아있지 않을 때라야 사랑이 맺힐까? 사랑은 사람이 아니고사람은 사랑이 아니다.사람이 사랑을 생각하니 어렵다. 사람이 사랑을 하려니 어렵다. 나는 사람이 아니고그저 사랑이고 싶다. 사랑은 온천지에 가득하나붙잡을 일 아득하다. 사랑이 말한다. 애쓰지 말라고사랑은 절로 이루어진다고... 나는여전히 사람인가보다. 부서질게 한참이나 많은 고약한. 지난겨울을 보내며 이런 저런 생각들로 몸조차 편치 않을 때 쓴 마음의 단상입니다. 당시 제 상황과 심정을 찬찬히 되짚어 보니 사람인 내가 정말 하기 어려운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인간인지라 관계에서 오는 불협화음에 꽤나 마음이 상해있었습니다. 흔히 이렇게들 표현하고는 합니다만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 그 느낌에 마음이 얼얼했습니다. 더욱이 존중과 배려를 통한 교감과 소통을 이야기하던 사람에게서 느꼈던 감정인지라 꽤나 힘들었습니다. 처음엔 큰 실망감에 화가 났었습니다. 그 사람이 왜 나를 함부로 대하는 지 묻고 싶어졌습니다. 그러다 ‘내가 잘못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문을 거듭하며 겨우 마음 끝을 붙잡아 퍼 올린 단상이었습니다. 사랑이 참 어렵습니다. 나이 들수록 점점 더 어려워요. 예수의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꼭 지켜야 할 새 계명이 되어야 했는지를 상처를 줄 만큼 주고, 받을 만큼 받은 이 나이쯤 돼서야 알 듯 합니다. 자기애를 전제로 한 사랑은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애 없는 사랑은 매우 힘듭니다. 그래서 귀하겠지요. 존경하는 성인들이 삶을 통해 행한 사랑은 더욱 빛나 보입니다. 성인은 누구나 될 수 있지만 아무나 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네 삶속에서 성인 대접을 받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대접을 받는 데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겠지요. 허나 유행처럼 번지는 말랑말랑한 힐링의 열풍이 너무나 가벼워 일회용 반창고만도 못한 위로가 유통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 또한 지울 수 없습니다. 영성도 유통하고 소비하는 사회... 얼마 전 영화 7번방의 선물을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린 영화답게 곳곳에 눈물폭탄을 위한 많은 장치들이 배열되어 있습니다. 한결 같은 딸 바보 용구는 장애에 가난에 억울한 처지에서 평범한 사람이 할 수 없는 비범한 사랑을 한 주인공입니다. 영화가 주는 감동에 관객들은 깊이 공감한 것 같습니다. 괜히 천만관객이 몰렸을 리 없겠지요. 이 영화를 보며 나는 눈물이 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불편했습니다. 장애와 가난에 대한 편견이 주인공을 살인자로 의심 없이 유죄추정하고, 억울한 처지에 대한 ‘자멸적 침묵’, 물론 이 침묵은 딸의 안위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만 결국 자신을 죽음에까지 이르게 합니다.(이 영화를 두고 경찰 일부에서 억울한 심정이 든다고 표현했다 합니다. 불편한 지점에서 새로이 거듭나기를 바랍니다) 판타지인 영화의 속성을 인정하면서도 이에 기대어 우리들을 둘러싼 삶의 처지가 나아질 수 있을까를 두고 생각합니다. 천만이 넘는 사람들이 자신의 일상에서 영화의 감동을 실현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자판기처럼 돈만 넣으면 나오는 감동과 눈물이 아니기를... 사진 출처 - 씨네21   동정과 연민에 대해 생각합니다. 동정과 연민은 한 끗 차이입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동정과 아무나 할 수 없는 연민의 경계에서 우리의 일상은 서로 다른 삶을 선택하는 것 같습니다. 타인과의 연대는 연민의 자연스러운 흐름이지요. 기실 타인이라는 개념이 사라지는 과정에서 사랑은 수줍게 본색을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하나인 나와 타인. 다르지만 나는 나가 아니고 너는 너가 아니고 우리. 그래요... 우리가 결국 나임을 느낄 때 동정의 경계를 넘어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네가 아프니 나도 아프다.’ 동정이 무가치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허나 때때로 동정에 그친 채 할 일을 다 한 것처럼 자만하는 모습들이 위선으로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우르르 극장 문을 나서는 각각의 사람들에게서 처연한 소외를 확인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나는 사랑을 하고 있는가?’ 자신이 없습니다. 감정의 소비와 생산 그 어디쯤에서 스스로를 보호하려 애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묻는 지점입니다. 온전히 나를 해방하여 타인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습니다. 원수조차 사랑하라는 말씀은 귓등으로 흘려보냅니다. 사랑, 참 어렵습니다. 나를 둘러싼 갖가지 장치들을 스스로 해방하지 않는 이상 머리카락조차 볼 수 없는 사랑. 사랑의 구호가 무한정 생산되고 있는 세상 한 복판에서 사랑타령을 하는 아이러니라니. 나를 아프게 한 나여, 우리여, 그래도 사랑합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253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