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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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강대중(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윤동호(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이동우(변호사),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장은주(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정보배/ 출판 기획편집자 “야야 저기 저, 생물 선생 아이가?” “아 미쳐... 어어 우리 봤는갑다, 일루 온다!” “모르겠다, 일단 택시 타고 보자.” 그날은 여름방학 보충수업 마지막 날이었다. 여름방학 중 학교에 나오는 마지막 날이기도 했다. 나는 아침에 학교가 아니라 마산역으로 걸어갔다. 도착할 즈음 내 눈에 보이는 건 이리 저리 흩어져서 학생들을 찾는 분주한 선생들 모습이었다. 아차. 선생들이 알았구나. 심장이 쿵쾅쿵쾅. 마침 만난 친구와 버스 정류장 앞으로 급히 갔다. 내리는 여학생들마다 붙들고 “성지여고 학생? 선생들 깔렸으니까 남성동 성당으로 바로 가라.”고 낮게 소리쳤다. 그러던 중 우리를 발견한 생물 선생이 버스 정류장 쪽으로 급하게 걸어오는 것을 본 것이다. 생물 선생은 교련 과목과 학생 주임을 맡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서 좀 걷다 뛰다 하다 결국 택시 잡아타고 남성동 성당으로 갔다. 전교조 선생님들의 해직 결정이 그 날 마산 남성동 성당에서 이루어진다는 소식을 들은 우리들은 일단 마산역에 모여서 단체로 그 성당을 찾아가 항의하기로 했다. 1987년을 마산에서 보낸 고3이라면 뭔가 부당한 것에 대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는 건지 이미 체험했다. 고1 때 평소보다 일찍 하교하는 버스 안으로 선전 유인물을 던지는 수출자유지역 노동자들의 목소리와 눈, 코를 찌르는 최루탄 가스의 잔해들을 맡으면서. 1989년 5월28일 역사적인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대회가 정권의 전방위 탄압과 경찰의 철통봉쇄망을 뚫고 연세대 민주광장에서 열렸다. 사진 출처 - 한겨레 고3이던 1989년 봄. 나는 평소보다 일찍 학교에 등교해 그 전날 쓴 대자보를 교문 옆 담벼락과 교내 게시판에 붙였고, 빈 교실 책상 서랍들 속에 전교조에서 만든 유인물을 하나씩 넣곤 했다. 지금은 정확히 왜, 어떻게, 어떤 계기로 전교조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나는 어릴 때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았고, 민중가요를 방학 때마다 가르쳐준 대학생 언니가 있었고, 평교사협의회에 가입했다고 유치원에서 잘린 언니도 있었다. 그리고 친한 한 학년 위 고교 선배 언니들이 대학생이 되어서 보낸 편지들에 적힌 글들을 읽고 뭔가 세상이 올바르지 않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이 모든 것들이 조금씩 내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크게 영향을 주었던 것은 전교조에 가입한 선생들을 대하는 나이 든 간부선생들과 교장 수녀의 폭력적인 언행이었다. 학생들이 버젓이 바라보는 교정에서 교장 수녀는 젊은 여선생의 뺨을 날렸고, 그 학교에 20년 근속을 자랑하던 수학 선생은 복도에서 전교조 가입 선생들에게 폭력적인 언행을 서슴지 않았다. 그때 나는 이런 인간들을 선생이라고 여기고 학교를 다녔다는 데 심한 회의와 분노를 느꼈다. 결국 마지막까지 전교조를 탈퇴하지 않은 국사 선생과 윤리 선생은 해직을 앞두게 되었고, 이 모든 처사를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던 우리들은 해직 결정을 성당에서 한다는 정보를 듣고 항의집회를 하기로 모의하였다. 주동자들은 고3 반장들과 학생회장과, 간부가 아니었던 나와 역시 간부가 아니었던 같은 반 친구 1명. 학생회장도 같은 반이었으니 이 반에서만 주동자가 4명이었다. 물론 그날 학교에 나와서 자습하고 싶은 사람 있으면 그렇게 해도 된다고 반장들은 학생들에게 말했다. 단 모의 사실을 선생님한테 고자질은 하지 말라며. 정말 순진한 집회 모의였다. 택시를 타고 성당에 도착한 나는 또 한 번 놀랐다. 이미 많은 학생들이 성당 앞마당에 줄을 맞춰 앉아 있는 거였다. 먼저 도착한 선생들이 운집하는 학생들을 줄 세워 앉히고 있었다. 아마도 마산 MBC 방송 카메라가 도착해 있었기 때문에 폭력적인 해산을 종용하기엔 늦었다는 판단 때문이지 않았나 싶다. 주동자들끼리 집회를 모의하면서 각자 맡은 역할이 있었는데, 같은 반 친구가 구호를 적은 피켓을 몇 장 만들어오는 거였다. 뒤쪽에 서 있던 나랑 친구는 그 피켓을 가방에서 꺼내 옆의 학생들에게도 주고 우리도 들고 있었다. 그 순간 어디선가 “이거 누가 한기고? 누가 만들었어?” 하는 벼락같은 소리와 함께 누군가 피켓을 낚아채갔다. 학생 주임의 씩씩거리는 콧소리와 쌍심지에 불을 킨 것 같은 눈동자는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날 알았다. 피켓이나 대자보 같이 글로 적힌 문구가 방송화면으로 나가면 선전 효과가 아주 크다는 것을. 그래서 반드시 시위를 할 때는 피켓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쉽게도 그 날 집회는 아무런 성과 없이 해산했다. 학교가 소속된 천주교재단에서 그날 하기로 한 해직 결정을 연기했기 때문이었다. 학생들은 그 이상 계획한 집단행동도 없고 (지금 같으면 피켓 들고 행진이라도 하자고 했겠지만 ) 아침부터 돌아다닌 피로감에 다들 뿔뿔이 흩어졌다. 집에서 피켓을 만들어온 친구와 나는 학교에 들렀다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던 중,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던 학생 주임과 부딪혔다. 주임은 오토바이를 세우더니 나와 친구를 향해 엄청난 협박성 발언들을 날렸다. 특히 그 친구가 피켓 만들어온 것을 아버지에게 알리겠다며 협박했다. 그 친구의 아버지는 안기부 직원이었다. 그래서 처음에 집회를 모의할 때도 대자보를 쓸 때도 친구는 자기가 하는 일을 아버지가 알면 큰일 난다고 여러 번 걱정했었다. 선생이라는 작자가 어떻게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에게 저런 식으로 협박하고 위협하고 욕을 할 수가 있나. 설마 진짜 아버지에게 이르겠냐며, 아닐 거라고, 길에 서서 우는 친구를 위로하면서 치밀어오는 분노로 손이 부들거렸다. 아마 내 인생 최고로 긴 여름날일 것이다. 더 황당한 사건은 2학기 개학 후에 벌어졌다. 그 날 이후 일주일 만에 간 학교는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아마 해직 결정은 개학 전에 내려졌던 것 같다. 집회 주동자로 찍힌 우리들은 텅 빈 교실에 띄엄띄엄 앉아서 봄부터 무슨 일을 했고 그날 집회는 어떻게 하게 됐는지 시간 순으로 하나도 빠짐없이 적으라는, 이른바 선생들이 학생들에게 경찰이 조사하듯 진술서를 작성시켰다. 그 전에 우리들은 모여서 당시는 전교조에서 탈퇴했던 젊은 사회선생님 이름은 절대 써서는 안 된다 등 몇 가지 입을 맞췄다. 진술서를 쓰고 나자 교장실에 불려갔다. 회의실 탁자를 둘러싸고 서 있던 우리에게 던진 교장 수녀의 첫 마디는 쌍욕이었다. 아, 절대 잊을 수 없으리. 이런 말도 했다. “성지가 정말 너희들 것인 줄 알았냐, 웃기고 있네.” (운동장에 ‘성지의 주인은 우리’라는 팻말이 서 있었다.) 그 후 담임이 불러 ‘나는 뭔가 나쁜 짓을 했는데 다시는 하지 않겠습니다’ 류의 글귀가 적힌 종이를 주면서 부모님 도장을 받아오라고 했다. 나는 부모님께 말씀 드리지도 않았고 몰래 도장을 찍어갔다. 며칠 뒤, 담임은 이 정도로는 안 될 것 같다며, 부모님 한분을 학교에 모시고 오라고 했다. 학교에서 집으로 전화를 했는데, 얘기를 듣고 난 엄마의 첫 마디. “학교에서 벌어진 일인데 왜 부모더러 학교에 오라 가라 하냐? 난 못 가겠다.” 이미 개학 후 일주일 정도를 공부도 못하고 선생들에게 시달리던 나는 정신적으로 지친데다 계속 이러다간 대학도 못 가겠다는 위기감에 몸이 오그라들 정도였다. 결국 엄마 대신 같은 여고를 나온, 유치원에서 잘려서 집에서 쉬고 있던 셋째 언니가 와서 담임을 면담하고 갔다. 교무실에서 면담을 끝내고 교실에 찾아온 언니는 밝게 웃으며 ‘괜찮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공부하면 된다. 걱정 마라.’ 하고 내 등을 가볍게 두드리고 갔다. 그렇게 고3의 가을이 흘러갔고 대입시험을 보고 겨울이 됐다. 공교롭게도 내가 가는 대학의 신입 오리엔테이션 일정과 고등학교 졸업식 일정이 겹쳤다. 몇몇 신입생들은 하루만 오리엔테이션에 참가하고 졸업식에 갔다. 나는 부모님에게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은 절대로 빠지면 안 되는 것이라며 거짓말을 했고 결국 졸업식에 가지 않았다. 엄마가 대신 가서 졸업장과 졸업 앨범을 받아오고 친구와 사진도 찍었다. 졸업식도 가기 싫을 만큼 학교의 그 선생들 얼굴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교장 수녀의 그 욕을 들었어도 가톨릭이 무조건 싫다거나 하는 편견은 없다. 다만 모든 종교인들이 상상 속의 천사들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해직 교사 중 한분이 1학년 담임이었는데 떠나는 날 통곡하던 그 반 아이들 울음소리. 자신들의 담임이 왜 갑자기 해직된 건지 그들은 알았을까. 아마 나처럼 그 반 아이들도 전교조에 대한 지울 수 없는 강렬한 기억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 기억이 살면서 어떤 자리에서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에게 전교조와 함께한 고3의 기억은, 오래된 조직이 갖는 보수성, 장기근속 선생들이 보여주는 기득권자들의 모습, 나이 많은 것을 무조건적인 권위로 내세우는 한국적 정서... 이 모든 것들에 환멸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만약 사회가 이런 식으로 약자들을 못 살게 구는 거라면 비판하고 맞서 싸우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대학교 신입생이 된 나는 전교조 1세대이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438 | 추천: 0
신하영옥/ 광명시민인권센터장   오늘 신문을 통해 정부는 2014년도 성인지 예산을 올해보다 약 70%정도 늘어난 액수로 제출했다는 것을 보았다. 성인지 예산이란 양성평등을 정책 및 예산에 투영한 개념으로, 정책과 예산이 남녀의 차이에 기반하여 평등하게 배분될 수 있도록 고려하는 정책과 사업에 드는 예산을 말한다. 즉, 정책이나 예산이 성별에 미칠 영향을 평가하고 그 결과 어느 한 성이 다른 성에 비해 차별적인 결과를 가져왔다면 이의 개 을 위한 사업예산 쯤으로 생각하면 된다. 예산에 비례해서 사업과 참여기관도 늘어났다고 한다. 반가운 얘기다. 조금 구체적으로 사업내용들을 보면 ‘여성의 경제적 역량강화’, ‘돌봄 지원과 일/가정 양립기반 구축’, ‘폭력근절과 인권보장’, ‘복지와 건강권’이고 이 중 많은 예산이 책정된 분야는 ‘돌봄지원’으로 가정양육수당과 공공형 어린이집, 영유아 보육료 지원예산분야라고 한다. 그 외 여성정치참여를 지원하기 위한 연수예산으로 1억6800만원도 있다. 물론 근절해야 할 4대악에 포함되는 성폭력예산이 증액된 것은 너무 당연한 것으로 과연 어떤 방지대책인지가 관건이지만. 뭐 여튼 성별격차가 10%이상 나는 분야를 중점으로 예산 기획을 했다고 한다. 한편, 다른 기사에서는 중증장애인연금 공약이 파기되었다고 한다. 모든 중증장애인에게 월20만원씩 지급하기로 했던 공약은 소득수준에 따라 하위 70%의 중증장애인에게만 지급하기로 했다. 얼마 전 기초연금 공약파기의 기억이 되풀이 된다. 노인과 장애인에 대한 복지예산이 당초 약속에 비해 줄어드는 반면 여성관련 예산은 예년에 비해 훨씬 증가했다는 것을 여성인 나로서 반가워하고, 여성대통령이 되니까 여성들이 대접받는다고 좋아만 하기엔 석연치 않은 현 정부의 ‘성인지 감수성’이 포착된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여성문제는 여성과 남성의 위계적 권력관계에 응축되어 있고, 이로부터 여성들이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삶의 결정자로 살아가기엔 많은 걸림돌들이 파생된다는 것이다. 권력은 반드시 권력을 부리는 자와 따르는 자로 양분되게 마련이고, 성불평등은 성에 기반 하여 어느 한 성이 어느 한 성에 대한 권력행사를 통해 의사결정과 실행을 통제한다는 데 있다. 이러한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 즉 성별위계를 해체하지 않는 이상 여성의 문제를 예산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여성을 ‘남성’에서 ‘남성적인 국가’로 예속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예산의 분배가 여성들을 사회정책 결정의 참여자로 보는 정책보다는 국가유지의 수단 혹은 도구적 관점의 사업에 훨씬 많이 배분된 것 때문이다. 양육과 건강권을 중심으로 한 예산이 엄청나게 증액되었음에 비해 여성의 주류화 전략으로서의 여성정치참여지원금은 딸랑 1억 6000여 만 원이 전부이다. 나는 이 예산을 보면서 ‘돈 줄게 건강한 애들 많이 낳아줘!’ 라고 하는 것 같아 불쾌하다. 공보육과 공교육을 폄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보육의 공공성을 주장하고자 한다면 이는 ‘성인지’ 예산이 아닌 교육이나 일반 복지 예산으로 편성되었어야 한다. 성인지 예산에 보육 예산이 포함되었다는 것은 여전히 ‘양육’을 여성의 몫으로 보는 ‘반 성인지적 관점’을 내포하고 있는 ‘성역할 고착화의 조장’에 다름 아니기 때문에 현 정부의 ‘성인지’ 예산은 ‘성차별’예산이다. 한편, 여성의 ‘돌봄영역’은 ‘아이’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여성의 돌봄은 전체 가족을 그 대상으로 하며, 따라서 가족 중 누군가 병이라도 나거나 사고를 당하면 그 ‘사건’은 곧 ‘여성의 일’ 이자 ‘여성문제’가 된다. 이런 점에서 노인과 장애인은 여성들의 돌봄에서 핵심적인 대상들인 것이다. 가족 중 장애인이 있다면 그것은 장애인 개인의 문제를 넘어 가족의 문제이고 이는 곧 여성의 문제가 된다. 노인도 마찬가지다. 국가가 노인을 돌볼 수 없을 때 그 책임은 고스란히 여성들이 짊어지게 마련이고 그래왔다. 때문에 노인과 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 및 예산은 여성과 직결되는 사업이자 예산이 되는 것이다. 기존의 성 역할적 관점에서 본다면 그야말로 ‘성인지적’ 예산에 포함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과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국가의 책임-예산을 축소하고 성차별 및 성역할 고정관념에 기반한 이상한 예산을 ‘성인지’적이라고 하는 것은 여성들의 차별적 현실에 대한 반영도 아니고 성인지적인 미래를 반영한 정책도 아니다. 여성문제에 대한 단편적인 이해는 이러한 양립 불가능한- 한 쪽에선 돌봄에서의 해방과 한쪽에선 강화라는- 정책을 만들어 낸다. 나아가 양육에서의 해방과 사회참여-경제 및 정치-사이에 놓여진 수많은 기제들을 보지 못하고 있다. ‘시간이 많다고 여성이 해방되는가? 양육비가 덜 든다고 여성의 예속이 해소되는가? 문제는 시간과 돈에서 조금 자유로워진 여성들이 무엇을 통해 참여의 주체로 나서게 되는가?’의 과정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집중되어야 할 정책과 예산은 이 분야가 되어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비중 있는 고민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그렇지....’다. 양육비에 대한 예산을 양성평등예산으로 둔갑하고 여성의 부담이 되는 노인과 장애인의 복지예산은 삭감하면서 친여성적인 정책들을 전개하는 듯이 포장하는 것 같아 나는 이번 ‘성인지 예산’이 달갑지 않을 뿐 아니라 한심하다. 무지에서 출발하는 책임감을 누가 말릴 것인가? 혹시나 ‘여성’대통령으로서의 부담감을 갖고 있다면 나는 부탁하고 싶다. 제발, 그 책임감으로부터 벗어나라고.
2017-08-07 | hrights | 조회: 296 | 추천: 0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지난 10월 8일 한겨레신문의 <싱크탱크 광장> 란에 김보근 한겨레평화연구소장이, “세계적인 석학”으로서 지난 7월에 서울에서 열린 ‘정전협정 60돌 국제심포지엄’에 참석하기 위해 내한하기도 했던 미셀 초서도브스키 교수와 이른바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에 관련해서 이메일로 인터뷰한 내용이 실렸다. 김보근 소장의 말처럼 우리가 사회 내부에서 알지 못해서 발언하지 못하거나 알면서도 자기 검열에 의해 함부로 발언하지 못하는 내용들을 초서도브스키 교수가 명쾌하게 쏟아내고 있었다. 그 내용들을 최대한 왜곡하지 않고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도록 하는 선에서 그의 견해를 요약해 보면 이렇다.(논의의 편의상 ①, ② 등의 원문자로 표기한다.) ① 소위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은 의회 안의 정적을 대상으로 한 박근혜 대통령의 개인적인 복수라고 생각한다. 박근혜 정부는 민주적인 정부라고 표현할 수 없다. ‘민주라는 가면을 쓴 전체주의’다. 근본적으로 그것은 과거의 정치, 즉 군사독재 시절의 정치를 보여주는 것이다. ② 나는 이석기 의원이 한 말을 3만7천명의 미군이 남한 땅에 주둔하고 있고 한국군은 미군의 명령 아래 놓여 있다는 점을 비판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③ 반역이라는 말은 한국 사람의 이익에 반하여 외국 권력을 위해 일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정의에 따르면, 정말 반역을 한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다. 왜냐하면 박 대통령은 국군 통수권자로서의 전작권 환수를 위한 책임도 의무도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④ 모든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어떤 형식으로든 지도자를 비판할 수 있는 권리가 사회 구성원에게 있다. 다른 사람들이 이석기의 관점에 동의하든 하지 않든, 그는 그의 관점을 표현할 권리가 있다. 사상의 자유 역시 현대사회의 절대적인 기초다. 마찬가지다. 불행하게도 박근혜 대통령이 통치하는 남한 사회는 표현의 자유도 사상의 자유도 보장되지 않는 것 같다. ⑤ 국가 안보라는 이름으로 근본적인 권리를 침해되고 있는 미국에서도 상․하원 의원 중 누구도 정부를 비판했다고 체포되지 않는다. ⑥ 미국은 북한을 핵무기로 50년 이상 위협해왔다. 미국은 2013년 5월 현재 5113개의 핵탄두를 가지고 있다. 미국이 북한을 상대로 핵무기를 사용한다면, 필연적으로 한반도 전역을 황폐화할 것이다. ⑦ 남한에서 국가보안법으로써 반국가단체로 규정된 북한을 긍정적으로 표현하는 것까지 범죄 행위가 된다는 것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다. 북한에 대해서는 오직 부정적인 것들만 얘기하는 것이 허용된다. 국가보안법은 민주 사회에 걸맞지 않으며 명백하게 시대에 뒤떨어진 법이라고 생각한다. ⑧ 국가보안법은 자기검열의 형태로 박 대통령에게 반대되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위축 효과’를 발휘한다. 이석기 의원 관련자에게만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모든 진보적 요소에 대해 국정원이 의도한 효과가 바로 이것이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은 거짓말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미군의 주둔을 받아들이고, 역사에 대한 왜곡된 관점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 결과 진보진영마저 이석기 의원 사건을 보수적으로 해석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국가보안법을 활용하는 체제는 진실로 전체주의적 시스템이다. ⑨ ‘오는 전쟁 맞받아치자’라는 이석기 의원의 말은 외국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한반도의 한국인들에게 경고를 보낸 것이라고 추정한다. 미군 주둔은 1997년 미국 정부의 지시에 의해 한국 재무 장관과 한국은행 총재가 해임되도록 하는 데 배경으로 작동했다. 이를 염두에 두고 보면, ‘우리가 정치적 • 군사적으로 준비해야 한다’라고 한 것은 남한이 미군을 배제한 독자적인 무장력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의미로 말했을 것이다. 곁들여 말하면, 한국이 미국한테서 무기를 사는 것은 한국인의 세금으로 미국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이석기 의원과 관련된 소위 ‘내란음모 사건’에 대해 세계적 석학인 미셸 초서도브스키 캐나다 오타와대 명예교수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부정하는 사건이며, 박근혜 대통령의 남한 사회가 민주 사회가 아님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강조했다. 지난 7월 서울에서 열린 ‘정전협정 60돌 국제심포지엄’ 참석차 방한한 초서도브스키 교수의 모습. 사진 출처 - 한겨레 나는 그동안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에 대해 한겨레신문이 한동안 균형 잡힌 시각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있다고 여겼다. 그런 와중에 이 같은 초서도브스키 교수의 견해를 한 면 전체를 할애해서 ‘대서특필’한 것이다. 다행이라 여긴다. 초서도브스키 교수 나름의 시각으로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근본 문제의 일단을 제시함으로써 물밑에 숨겨져 있는 핵심 주제를 공론화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사건은 그저 객관적인 사실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사실이 사건이 되기 위해서는 의미가 부가되어야 한다. 의미는 해석을 필요로 한다. 일련의 사실을 일정하게 묶어 ‘사건’으로, 더욱이 ‘내란음모 사건’이라는 무시무시한 사건으로 제시하기 위해서는 최고도로 폭과 깊이를 갖춘 해석을 필요로 한다. 물론 사법적으로는 관련되는 현행법을 바탕으로 법적인 해석을 할 것이다. 그러나 법적인 해석을 넘어서서 해석의 기반을 향해 자꾸 치고 내려가면, 맨 밑바닥에서 한 인간이 제대로 된 인간으로서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기본 조건들이 부각된다. 그 조건은 해석학에서 말하는 체험-표현-이해의 순조로운 사회적 순환이다. 나는 초서도브스키 교수가 위에 요약한 ④와 ⑦의 발언, 즉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가 제대로 유지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발언을 이 같은 인간됨의 기본 조건으로 제시한 것으로 본다. 이와 관련된 ⑦과 ⑧의 그의 발언은 우리 남한의 현행법인 국가보안법이 남한 사회의 구성원이 제대로 된 인간으로서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기본 조건을 전혀 만족하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에 철폐되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철학자로서 나 역시 이러한 초서도브스키 교수의 입장에 동의한다. 심지어 사상의 자유를 명시하고 있지 않은 우리의 헌법도 수정하여 명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른바 ‘이석기 사건’은 수 천 년 간 한반도에 거주해 온 우리의 역사가 당면하고 있는 질곡에서 비롯된 것이다. 초서도브스키 교수의 말처럼, 수만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고 전시에 미국의 4성 장군이 우리 한국군 전체의 실질적인 최고사령관으로서 임무를 수행할 수밖에 없는 현재의 역사적인 상황을 질곡이라고 여기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유지 강화하는 것이 오히려 민족과 국가를 위한 최선책이라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사상의 자유이고 그러한 생각을 공개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에 해당한다. 그런 생각과 표현을 얼마든지 인정한다. 그렇다면 그 반대의 생각과 표현도 인정해야 하지 않는가? 초서도브스키 교수가 주장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남한이 당면한 역사를 질곡으로 볼 수도 있음에 대한 근거로서 ⑥과 ⑨의 일부 내용을 제시한 것이다. 그 외 ②와 ⑨로 요약된, 이석기 의원의 발언들에 대한 초서도브스키 교수의 ‘소프트한 방향’으로의 해석은 그 나름의 입장에 의거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한 그의 해석이 과연 정당한가에 대해서는 현재 나의 미흡한 관련 정보만으로는 결론을 내릴 수 없다. 심지어 ‘이석기 중심의 정치집단’이 철학자 크리스테바가 말하는바 ‘기이한 믿음’에 해당하는 반(反)믿음의 맹목적 추종을 수행하는 집단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초서도브스키의 이석기 의원의 발언들에 대한 소프트한 해석이 2차 대전 이후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전 세계에 대한 미국의 헤게모니와 그에 따른 여러 심각한 부작용을 연출하고 있는 현대의 세계사적인 맥락에 입각해서 폭넓게 해석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는 있다. 사회 정치적인 성찰과 실천을 수행하는 수 십 년의 세월이 흘러 역사의 시간이 우리의 각종 오염된 생각들을 정리해서 씻어낼 수 있는 날이 도래하면,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에 대한 지금 우리의 대처와 반응이, 특히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중심으로 해서 얼마나 성마르고 사회 정치적인 관용의 폭과 깊이가 얼마나 허약했는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역사적 현실에 대한 이해의 협애함을 역이용한 권력 지향적인 세력들이 얼마나 방약무인의 패도를 휘둘렀는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북쪽은 물론이고 한반도를 둘러싸고서 자행되는바, 인민의 자유와 권리를 함부로 무시․강탈하는 그 어떤 세력도 용납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미셀 초서도브스키의 이번 이메일 대담은 그 나름 인류 보편적인 가치의 이름으로 한국사회의 현행의 역사를 점검하도록 독려한다고 할 수 있다. 이에 한국사회의 지식인들이 어떻게든 실천적으로 반응해야 하지 않겠는가.
2017-08-07 | hrights | 조회: 337 | 추천: 0
이광조/ CBS PD 지난 해 3월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으로 집을 옮기면서 출퇴근 시에 서울외곽순환도로를 이용하게 되었다. 다른 길이 없는 건 아니지만 출퇴근 시간이 15분에서 20분 정도 줄어드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처음 이사했을 때 통행료가 얼마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외곽순환도로를 처음 이용했을 때는 요금이 900원이었던 듯하다. 언제부터인가 요금은 1,000원으로 인상되었고 지금은 1,100원이다. 편리함의 대가로 매일 2,200원씩을 꼬박꼬박 내고 있는 셈이다. 지금은 익숙해져서 그런지 통행료를 내는 것에 별 저항감이 없지만 처음엔 유료도로에 대해 사실 불만이 좀 많았다. 도로는 어릴 때 학교에서 배운 대로 대표적인 사회간접자본의 하나인데, 공적으로 투자해서 운영해야지 왜 돈을 받느냐, 이런 반감 말이다. 물론 지금도 어쩌다 인천공항고속도로를 타는 경우에는 통행료를 낼 때마다 열불을 내기도 한다. 너무 비싸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우리 주변에는 외곽순환도로처럼 민간자본을 유치해 사회기반시설을 건설하는 이른바 ‘민자 사업’이 유행처럼 번졌다. 인천공항고속도로, 지하철 9호선, 우면산 터널 등등. 정부 예산을 절감하면서 우리사회에 꼭 필요한 기반시설을 건설한다는 취지는 좋지만 민자 사업은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비싼 요금은 말할 것도 없고 특정 업체에 민자사업이 집중되면서 특혜의혹이 일었는가 하면 수요를 뻥튀기 해 막대한 정부 예산으로 민간기업의 배만 불려주고 있다는 비판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최근 민주당 김기준 의원이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잘못된 수요예측으로 6년 동안 민자 사업에 투입된 돈이 2조원이 넘는다. 당연히 바로잡아야 할 문제다. 하지만 민자사업의 폐해가 이렇게 큰데도 공공의 이익을 앞세워 도로나 철도, 교량을 몰수하자거나 싼 값에 매입하자는 주장은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사회기반시설에 투자(?)하는 혹은 투자할 것을 강요받는 주체가 농민이나 도시 서민 등 힘 없는 개인들일 경우에는 사정이 확 달라진다. 민자 사업으로 발생 가능한 최소한의 이익을 보장해주는 건 고사하고 공익을 앞세워 땅값을 후려친다. 사회기반시설 건설로 인한 혜택은 고사하고 건강에 심각한 위험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데도 과학적으로 검증된 바 없다며 안면몰수다. 달리 방법이 없어 몸으로 저항이라도 할라치면 지역이기주의라고 손가락질을 한다. 보다 못한 주변사람들이 도움의 손길을 뻗으면 불순한 외부세력이 개입해서 사태를 악화시킨다고 욕한다. 민자도로야 그것이 없으면 못살 정도로 필수적인 시설은 아니다. 불편을 좀 감수하고 다른 도로를 이용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전기야 어디 그런가. 밀양송전탑을 지나갈 고압전기가 어느 지역에 얼마나 사용될지는 모르지만 전기가 없다면 우리의 일상생활은 불가능해진다. 적어도 현재로서는 말이다. 이처럼 우리 삶에 필수적인 시설이라면, 공익을 위해 희생만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공익에 대한 그들의 기여를 높게 평가하고 보상하는 게 상식적인 일 아닌가. 하지만 2006년부터 시작된 밀양송전탑 건설을 둘러싼 논란과 갈등을 보면 앞뒤가 뒤바뀌어도 한참 뒤바뀌었다. 밀양 송전탑 반대대책위 기자회견 및 시위현장 사진 출처 - 노컷뉴스 사업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충분한 보상방안을 협의하고 그런 뒤에 주민들의 동의를 구하는 게 순서일 텐데, 급하니까 공사를 빨리해야 한다며 땅을 내놓으라고 했다가 사람이 죽고 주민들이 목숨을 걸고 항의하니 그제야 법을 만들어 보상을 하겠단다. 기존의 법에서는 허용되지 않았던 현금보상까지 넣었으니 정부는 할 만큼 했단다. 사회기반시설에 투자하는 민간자본에는 그렇게 관대하고 고분고분한 사람들이 힘없는 농민들이 자자손손 대대로 일군 그 소중한 자산과 그들의 기여를 평가하는 데는 왜 이리 인색하고 무자비한가. 원전 비리에 연루된 한수원 직원들의 금품수수 액수가 1인당 평균 1억 원을 넘고 한전, 한수원 등 발전 공기업에서 기획재정부의 지침을 어겨가며 공짜로 지급한 대학생 자녀 학자금이 1245억 원이 넘는다는 보도를 보며 밀양 송전탑 건설을 둘러싼 갈등을 다시 생각해 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지역이기주의라기보다는 갑의 횡포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314 | 추천: 0
홍미정/ 단국대 GCC 국가연구소 연구교수 ○ 사우디는 미국 총 석유 수입량 중 40%에 대한 영향력 행사 ○ 2011년 사우디는 세계 1위의 무기수입국으로 미국과 334억 달러 수입계약: 미국 전 세계 대상 무기판매에서 사우디 비중은 50%+α  사우디는 중동에서 가장 큰 미국의 무역 상대국이다. 2011년 미국국제무역부(U.S. International Trade Administration)에 따르면, 사우디의 미국수출은 475억 달러였고, 무기를 제외한 미국의 사우디아라비아 수출은 138억 달러였다. 미국-사우디 무역의 대부분은 사우디로부터 석유의 수입과 미국의 무기, 기계, 자동차 수출로 인한 것이다.   2012년 사우디는 세계 최대의 석유생산 국가였고, 총 석유수출 총량 중 16%를 미국으로 수출했으며, 이것은 미국 총수입량 중 13%를 차지했다. 더욱이 미국은 사우디가 통제하는 OPEC 국가들로부터 총수입량 중 40%를 수입했다. 결국 사우디는 미국 총 석유수입량 중 40%(순 수입량 중 55%)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 석유시장에 대한 사우디의 영향력은 매우 크다.  게다가 막대한 석유수익을 가진 사우디는 미국의 최대 무기판매 시장이다. 다음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2008년-2011년 사우디는 전 세계 대상 미국 무기판매의 40.35%를 차지했으며, 중동국가들에 대한 미국 무기판매는 전 세계판매 대비 81.40%를 차지했다. 이 수치는 현재 중동 지역이 다른 지역보다 왜 더 호전적인지, 그 이유를 잘 설명해 준다.   [2008-2011년 미국의 무기판매 협정] (단위: 백만US$) 중동 91,974 (81.40%) 사우디 45,600 40.35(%) UAE 14,300 12.65(%) 이집트 7,400 6.54(%) 이스라엘 5,900 5.22(%) 이라크 4,800 4.24(%) 기타 13,974 12.36(%) 아프리카 296     0.26(%) 라틴아메리카 2,590     2.29(%) 아시아 18,127     16.04(%) 전체 112,987     100.00(%) ※ 자료: 미국정부 제공 이 통계는 미국 군사원조 프로그램, 국제 군사교육·훈련 프로그램과 관련된 무기판매는 제외.  구체적으로 2010년에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미국의 총 무기판매협정 총액은 214억 달러(전 세계 무기거래총액 445억 달러)였으나, 2011년에는 약 663억 달러(전 세계 무기거래총액 약 853억 달러)로 급증하였다. 2011년 미국 무기판매가 전년도 대비 3배 이상 증가함으로써 미국무기 수출 역사상 최고 판매액을 기록했으며, 2011년 미국 무기판매액은 전 세계 무기판매액의 77.7%를 차지했다.   이러한 2011년 미국 무기판매 급증에는 사우디가 커다란 기여를 했다. 2011년에 사우디는 337억 달러 무기수입계약을 체결함으로써, 세계 1위의 무기수입국이 되었으며, 이 중 미국과 334억 달러(99%) 수입계약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미국이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무기판매에서 사우디아라비아가 차지하는 비중은 50%를 넘어섰다. 이 액수는 2010년에 미국이 전 세계에 무기를 판매한 총액 214억 달러보다도 120억 달러 정도 많다. 2011년 아랍민주화시위(아랍의 봄)가 격화되면서, 사우디에 대한 미국의 무기판매가 급증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국-사우디 교류 증진을 위한 회담 사진 출처 - USSABC (미국-사우디아라비아 기업위원회)  그런데 위 통계 숫자는 [사우디 왕국정규군]을 훈련시키는 [미군훈련사절단]과 [사우디 국가방위군]을 훈련시키는 [사우디 국가방위군 현대화 프로그램]과 관련된 미국의 사우디에 대한 무기판매(+α)를 포함하지 않았다. 따라서 미국의 사우디 무기판매 총량은 위에서 밝힌 수치를 훨씬 넘을 가능성이 있고, 필자가 접할 수 있는 통계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2010년 10월 미 국무부는 의회에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인 600억 달러가 넘는 F-15전투기 수십 대, 헬리콥터 및 관련 장비와 서비스를 사우디아라비아에 판매할 계획을 보고하였다. 이 무기판매에 대한 의회 승인을 얻기 위하여,  2010년 11월 16일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과 국방장관 로버트 게이트가 의회 외무분과 의장이었던 하워드 베르만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무기판매에 관하여 국무장관과 국방장관이 의회 보낸 편지] 1. 이번 무기판매는 걸프 지역에서 미국의 전략과 외교정책 분야 이익 증진 2. 이번 무기판매는 사우디-미국 간 긴밀한 안보협력관계를 유지한 60년 전통을 잇는 것. 60년 동안, 미국-사우디 안보협력은 중동 지역에서 제일 중요한 안보 축. 3. 이번 무기판매는 사우디군과 미군의 연동성 강화, 사우디의 대테러 능력 향상, 역내 불안정성을 포함하는 이란의 위협에 대처  현재 이 무기판매 계획에 따라, 미국-사우디는 계약을 체결하는 중이다. 결국, 미국-사우디 관계를 유지하는 핵심 기둥은 ‘석유지배와 무기판매’다. ‘무기판매’는 소위 ‘강력한 적, 이란’으로부터 ‘사우디왕가 보호’를 의미하는 ‘걸프지역 안보확보’라는 명분으로 합리화된다. 최근 아랍의 봄, 민주화 시위는 명백히 ‘사우디 절대왕정체제를 위협’하는 것으로 ‘미국 무기시장의 확대’를 이끌어 냈다. 이로써 아랍민주화 시위와 사우디 절대왕정체제의 불안정성을 통한 최대의 경제적 수혜자는 ‘사우디 안보를 책임지는 미국’인 셈이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327 | 추천: 0
위문숙/ 서울 DPI 회장 80년대 중반까지 장애인의 삶은 모든 것으로부터의 철저한 배제와 분리였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찍소리도 못하고 보내온 장애인 역사의 처절함입니다. 이 시기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진 장애인의 비관 자살과 입학거부에서 엿볼 수 있듯이 교육과 노동에서 배제와 무시를 당했고, 산 좋고 물 좋은 어느 산골 수용시설에서 그저 목숨을 연명하는 것이 장애인의 인생인양 곁의 가족들조차도 그리 알고 살아 왔습니다. 80년대는 한국사적으로 (누군가의 표현을 빌자면) ‘운동 권하는 사회’였고 노동자 대투쟁과 시민 혁명이 지속적으로 이어졌던 시기입니다. 86년을 시발로, 이 투쟁에 속했던 젊은 장애인들의 ’사회 구조적 모순‘에 대한 자각은, 이 후 이어지는 장애인의 삶에 큰 회오리를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이 회오리는 장애인복지법 개정과 장애인고용촉진법의 양대 법안 투쟁으로 이어졌고, 이러한 울림의 메아리는 장애인의 다양한 권리와 차별에 대한 더 큰 자각으로 이어졌습니다. 당사자들이 주체가 되는 ’장애인운동‘의 태동기가 시작되면서, 장애인복지에 대한 영역별 종합대책에 대한 요구가 이어졌습니다. 입학거부나 비관자살이 줄어드는가 싶더니 장애인 수용시설의 온갖 비리가 장애인의 또 다른 아픔을 보여줍니다. 평택 에바다 사태는 지난 1996년 11월 27일 강제노역·구타·인신매매·성폭행 등 구 재단의 인권유린에 견디다 못한 에바다 농아원생들의 절규 어린 농성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해, 장애 시설 비리의 참상에 대한 충격을 사회에 던져 주었습니다. 2005년 광주 인화학교 사태는 ‘도가니’라는 영화로도 제작되어 사회를 또 한 번 경악케 했습니다. 그리고 최근, 원주 사랑의 집이라는 곳에서는 장애인을 목숨처럼 사랑해서 자신의 이름을 ‘장목사’라 부르는 이와 그의 처가 보조금과 후원금 횡령, 시신 유기, 원생들 구타·고문 및 실종 등 시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비리의 종합 세트를 보여주었고,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어디선가에서 현재형으로 진행 될 듯 합니다. 영화 '도가니' 사진 출처 - 씨네21   장애인들이 삶과 권리에 대해 각성하고 요구하기까지의 시간은 30년이 채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한 세대라고 봄직한 시간이지만 차별의 장르가 바뀌었을 뿐 여전히 더불어 살기 어려운 존재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살고 싶은 곳에서 환경을 변화시켜 가며 살 수 있어야 한다는 ‘자립생활 운동’의 도입과 전개가 지금도 자행되고 있는 반인권적인 시설의 문제와 허망한 죽음과 상처들을 줄일 수 있으리라는 믿음과 함께 ‘반시설’의 깃발을 펄럭이게 하고 있습니다. 원주 사랑의 집을 운영하는 장목사가 직접 바늘로 새긴 장애인 팔뚝의 문신. 문신 내용은 장애인의 이름 전화번호, 장애급수 등 사진 출처 - SBS 한국의 장애인 복지는 ‘재활(론자)에 의한 재활(론자)을 위한 재활(론자)’로 근 50년을 보냈습니다. 장애인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복지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에 의한 장애인을 위한 장애인의 복지’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가령 장애인을 위한 용품을 만들어도 사용자의 욕구나 의견의 반영 없이 일방적으로 만들어 내다보니 막상 필요한 장애인에게는 충족되지 못하는 물건으로 골칫덩어리 취급받기가 일쑤입니다. 당사자의 의견과 참여를 참으로 한결같이 고려하지 않는 전문가 집단의 생각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장애인이 무서운 것일까요...? 원주 사랑의 집 수용 장애인의 모습. 수용된 장애인 모두가 머리카락이 없다 사진 출처 - SBS 이제는 장애인 자신이 우뚝 서서 대상에서 주체로, 차별에서 평등으로, 복지에서 인권으로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가볍고 죽어있는 존재에서 의미 있고 살아있는 존재로 거듭나야 할 때입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261 | 추천: 0
정재원/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현실 사회주의 체제는 사회주의 사회를 상정한 원전들에서의 예측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체제였지만, 자본주의 체제와는 더더욱 거리가 멀었다. 따라서 몇 가지 요인만으로 양 체제의 차이가 없다는 주장은 전형적인 단순 일반화의 오류이며 따라서 수많은 다양한 상부 구조에 대한 연구를 무의미하게 만들 가능성이 크다. 반면 이렇게 두 체제가 동질적이라는 주장과 정반대로, 구 소련식 현실사회주의는 모종의 사회주의 체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전자보다 더 큰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조금 다른 맥락이지만, 체제의 붕괴와 전환이 이미 오래 전에 이루어졌으므로 더 이상 그 유산이 현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쉽게 기각하고 연구하는 경향도 이러한 오류의 범주에 든다. 체제에 대한 혼란은 시장 경제 체제로 전환한 현대 러시아에서의 구체적인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연구에서 더욱 가중되고 있다. 이러한 혼란은 체제 전환 과정에서 소위 ‘보수파/개혁파’, ‘좌파/우파’의 잘못된 구분법과 더불어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민주화’라는 개념 규정 등에 있어 많은 혼동에서도 기인한다. 이론상으로는 더 직접 민주주의적 체제였어야 할 사회주의 체제가 현실에서는 정반대의 억압적 권위주의적 체제였다는 역사적 사실이 좌파적인 수사들이 등장할 때마다 우리에게 혼동을 주는 가장 근본적인 토대임은 분명하다. 체제 전환 이후에도 원래의 의미와는 달리 오랜 지배 정당의 역할에 더 익숙한 공산당 등 현실 사회주의 좌파 후신 세력들은 사회주의권 바깥에서 발달한 좌파적 의제들에는 물론 자유주의적 의제들에도 못 미치는 의식 수준을 보여 주고 있다. 세계화 과정에서 중심부 국가와 자본이 러시아를 비롯한 중심부 외 지역에서 가하고 있는 불공평하고 부정적인 행위에 대한 분석은 날카롭지만, 자국의 안팎에서 자국에 의해 행해지는 유사하거나 더 잔혹한 행태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무관심 혹은 아예 무지한 것이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서구에서는 우파보다는 좌파적인 운동 영역이었던 환경, 여성, 반핵, 인권 등의 문제가 러시아에서는 자유주의자들의 활동 영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러시아식 구좌파는 물론 이에서 벗어난 신좌파 양자 공히 위에서 언급한 시민 사회 문제에 대한 올바른 관점에서의 접근과 시민 사회 단체들과의 올바른 연대는 아직 요원하다. 그런가 하면 좌파적 정당과 시민 사회 운동의 사상적 동질성은 많지 않지만, 반면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연대도 이루어진다. 정치 외의 문제에는 신경을 쓰기 힘들만큼 권위주의적 정권의 정치적 탄압에 저항하는 데 집중해야하는 러시아 정치의 후진적 현실도 올바른 관점에 입각한 연대를 방해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지만, 이 보다는 그에 선행하는 위에서 언급한 더 근본적인 이유들이 존재한다. 즉 서구에서 수 백 년 동안에 걸쳐 이루어진 일들이 압축적, 복합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에 더하여 자본주의의 경험도 없고, 자유주의적 가치가 제대로 실험되지도 못한 채 사회주의 체제로 전환되었다가 다시 시장 경제로 회귀하면서 여전히 자유 자본주의적 가치조차 제대로 완수되지 못 한 단계에 있는 러시아의 특수한 현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것이다. 1994년부터 1996년까지 체첸의 독립을 놓고서 러시아와 체첸 공화국이 치른 첫번째 전쟁. 러시아군에 점령된 수도 그로즈니의 모습 사진 출처 - 네이버 체제 문제는 마치 별도의 연구 분야인 것처럼 보이는 민족 문제에 대해서도 그 연구의 핵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사회주의 소련의 대 소수민족 정책과 제국주의 국가들의 대 식민지 정책은 근본적으로 큰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억압적 지배 구조의 유사성만으로 파시즘이나 제국주의 체제를 현실 사회주의를 같은 질의 체제로 보는 주장들이 있다. 물론,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에 반강제로 편입된 비 러시아 소수민족에 대한 소련 중앙의 정책은 이상과 달리 식민지에 대한 그것과 유사한 점도 현저했다. 그러나 소련의 정책은 식민 본국을 위한 잔혹한 수탈과 억압, 동화 과정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오히려 그러한 서구 식민지-피식민지 관계와 다른 유산이 소련 붕괴 과정과 심지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서구와 다른 민족 문제의 양상을 보여주게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독립을 획득한 구 소련 소수민족 국가들의 입장에만 의존하거나 단순 일반화된 민족 자결주의 혹은 민족 국가 건설론에 입각한 구소련의 과거 민족 억압에 대한 논의는 경계해야 한다. 비슷한 문제는 종교 등 문화에 대한 영역에서도 존재한다. 특히 소수민족 문제와 관련하여 그들의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는 구 소련 내 이슬람에 대한 연구에서 주의가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구 소련 민족/국가들 중에서도 이슬람 화된 시기와 정도, 수용 양상이 매우 판이함에도 불구하고, 수용 과정에 대한 역사적 팩트는 비교적 정확하게 서술하는 반면, 수용한 민족과 지역의 여러 특수성을 세밀하게 분석하지 못 하는 경향이 있다. 더군다나 70년간의 소련 시기를 거치며 매우 세속화되고 변질된 이슬람, 종교로서가 아니라 관습으로 굳어져 종교적 요소가 약해진 면도 존재하는 구 소련 지역 이슬람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인한 또 다른 형태의 오리엔탈리즘적 분석도 눈에 띈다. 또한, 외부 세력에 대한 저항과 계급적 이익 표현으로 이용되는 이슬람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중동의 이슬람과 유사한 것으로 일반화되거나 이슬람주의자들은 모조리 근본주의자로 오해되기도 한다. 러시아는 그 자신 주변부 제국이면서도 동시에 내부에 주변부를 두고 있는 특이한 위치에서 연유하는 문제들이 많이 존재한다. 더군다나 주변부 제국주의 러시아와 현대 러시아 사이의 70년간의 전혀 다른 체제의 역사적 존재는 연속성과 단절의 경계와 내용 문제에 있어서 매우 까다롭고 복잡한 접근법을 요구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러시아와 구소련 지역 국가들의 고유한 문제들은 물론, 시장 체제로의 전환 이후 확산되고 있는 세계 보편적 문제들에 대해서도 현실사회주의 체제를 규명하는 연구는 진보적 연구자들에게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285 | 추천: 0
박현도/ 종교학자 욱일기(旭日旗)가 휘날리고, 야스쿠니 신사에는 전범의 죽음을 기리는 도덕이나 윤리의식이 완전히 마비된 일본정치인들이 득실거리고, 일본군의 천인공노할 강제적 성착취(性搾取)를 부인하고, 백주대낮에 한국인을 죽이자는 구호가 거리를 울리고, 일본은 침략전쟁을 한 적이 없다는 기막힌 역사해석이 난무하고. 반인륜적 범죄를 자행한 일본이 패망한 지 68년이 된 지난 8월 15일, 바다건너 일본의 일상이다. 남에게 폐 끼치는 것을 싫어한다는 일본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쯤 되면 민폐 끼치는 것을 제일 혐오한다는 일본인의 문명화된 생활양식은 타인에 대한 진정어린 공감과 이해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당하기 싫기에 남을 피해 다니는 극단적 이기주의의 소산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경제적으로는 부 하지만 정신적으로는 인륜의식이 마비된 집단처럼 보인다. 전후 손발이 닳도록 잘못을 빈 2차 대전 동맹국 독일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니 말이다. 누구를 탓하랴. 우리가 힘이 없어서 당했고, 아직도 약하여 일본정부가 우리를 아직도 우습게 여겨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니. 그저 힘을 길러 반드시 어디 한번... 분노가 치미니 극단적인 생각이 끊이지 않는다. 이래서 역사청산이 중요하다. 전후 청산을 실패하다보니 가해자 일본이 피해자로 둔갑하고 말았다. 전범(戰犯) 괴수 일왕(日王)을 정리했어야 했고, 우리가 아니라 일본을 둘이나 셋으로 나눴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였으니 전범 후손들이 수상이 되고 각료가 되어 일본을 기괴한 나라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돈만 많고 생각 없는 한심한 일본의 추악한 정치지도자들을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정부에 기대기보다는 우리 개개인이 치열하게 노력해야 한다. 소수라 할지라도 일본의 양심적인 지식인과 연대하여 전 세계에 보편적 가치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일본 정치인의 만행을 쉬지 않고 알려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본 우익의 자금줄이 되는 기업의 제품을 구매하지 않아야 한다. 시끄럽게 떠들면서 하는 것 보다는 조용하고도 철저하게 외면하는 시민 의식을 보여주어야 한다. 같은 값이면, 아니 조금 싸더라도 쓰지 말자.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휘두를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무기가 바로 소비니 말이다. 남양유업이 왜 고개를 숙였는지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안중근 의사는 왜 자신을 버리면서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쏘았는가? 이제는 우리가 이등박문 잔당을 굴복시켜야 한다. 지금 일본에서는 이등박문이 부활하고 있다. 우리는 안중근 의사 정신을 되살려야 한다. 다시 노예가 될 수 없지 않은가? 이슬람 전통은 거짓을 행한 자의 말로가 지옥불이라고 가르친다. 안중근 의사 사진 출처 - 한겨레   인간이 행한 것을 되돌아보는 그날 지옥이 보일 것이다. 잘못을 범하고 이 세상의 삶을 더 좋아한 자들은 지옥불에 머물 것이요 주님 앞에 서길 두려워하며 속된 욕망을 참은 자들은 천국에 머물 것이다. (꾸란 79장 35-41절) 나는 우리 한국인은 보편적 공동선을 숭상하고 사랑하기에 일본의 양심적인 사람들과 함께 결국 복락을 누리리라 믿는다. 인류 공동선을 도외시한 이등박문 잔당의 최후는 비참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보편적 가치를 지키기 위한 전장에 나섰다. 이등박문을 존경하던 이들이 부끄러움에 욱일기를 찢고,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를 수치스럽게 여기고, 일본군에 희생된 어린 소녀와 여인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전쟁피해국과 피해자들에게 사죄하고, 일본이 침략국이었음을 고백하고 속죄하는 날이 올 때까지 강건하고 흔들림 없이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수호하자.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 정신을 길라잡이로 삼아 드높이고 대한국인이 되자.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1장 5절)
2017-08-07 | hrights | 조회: 285 | 추천: 0
최정학/ 방송대 법학과 교수 겨우 국정조사에 합의했다. 하지만, 핵심적인 2명의 증인은 빠진 상태이다. 이제 청문회도 진행된다고 하니 지켜보아야 하겠지만, 과연 진실이 밝혀질지 상당히 의심스럽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대통령 선거가 있었고, 그 과정에 국가정보원이 개입했다는 의혹 제기가 있었다. 선거를 불과 며칠 앞둔 급박한 상황에서 경찰이 수사결과를 발표했고, 그 수사마저 왜곡되었다는 폭로가 나왔다. 상황이 이쯤 되면 국정조사가 아니라 그 이상의 무엇이라도 당연히 해야 할 것 같은데, 여당은 마치 선심쓰듯 조사일정에 합의하고 야당은 장외투쟁이라는 강공책을 쓰면서도 중요한 증인채택에는 결국 합의하지 못했다. 만약 사실이라면 중대한 국기문란 행위라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었다. 엄격하게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할 국가정보기관이 정치에, 그것도 선거에 직접 개입했기 때문이다. 과거 권위주의 군사정권 시대에나 있었던,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행위라는 말도 여러차례 들은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민주주의의 핵심을 부정하는, 민주화 시대에 있을 수 없는 행위’들이 너무나 많이 있고, 국민들은 이런 주장에 식상해 버린 것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권이 으레 서로를 향해 내뱉는 독설이겠거니 여기기 때문이다. 마치 재벌 총수들이 100억, 1000억을 횡령하고 비자금을 조성해도 으레껏 그러려니 여기는 둔감한 반응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한 야당의원의 발언을 트집 잡아 시작된 이른바 ‘NLL 논란’은 여당의 대성공으로 끝이 났다. 논쟁에 종지부를 찍자고 제안한 회의록의 공개는 느닷없이 ‘사초 증발’ 사태로 이어졌고, 검찰의 수사가 진행되고 있음은 물론 대통령마저 역사를 지우는 일이라며 이를 한 수 거들고 나섰다. 그 효과는, 역시 많은 사람들이 얘기하였듯이, 국정원 이슈의 희석이다. 이 와중에 청와대는 참모진의 개편을 단행했는데, 1993년 지역감정을 자극한 ‘초원복집’ 사건으로 유명한 김기춘 전 법무장관을 비서실장으로, 역시 공안검사 출신인 홍경식 서울 고검장을 민정수석으로 임명하였다. 이로써 마찬가지로 공안출신인 정홍원 총리와 함께 공안검사들이 내각을 장악하는 것과 함께, 이것은 국정원 사건에 대한 검찰의 대응을 청와대가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민정수석으로 하여금 검찰을 더 잘 장악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지 않는가라는 분석도 제기되었다. (사실 검찰이 국정원 사건을 열심히 수사했던 것은 자신에 대한 개혁을 피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면서 동시에 경찰에 대한 일종의 앙갚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알다시피, 경찰과 검찰은 최근 몇 년간 갈등과 견제 상태에 있었고, 검찰은 작년 부패와 성추문 등 개혁을 피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을 맞았는데, 대선 당시 국정원 사건에 대한 경찰의 축소수사 의혹은 검찰에게 좋은 반전의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지난 10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시청앞 광장에서 열린 '국정원 정치공작 대선개입 규탄 제6차 범국민대회'에서 참가자들이 국정원의 대선개입을 규탄하며 '민주주의'라고 적힌 대형 현수막을 펼치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1980년대 후반, 일단 외형은 군사정권의 틀을 벗은 국가권력이 북한의 존재 혹은 남한 일각의 통일운동을 이용하여 국내의 여러 정치적 이슈들을 잠재우는 상황을 ‘공안정국’이라고 불렀었다. 이제 시대가 바뀌어 이와 같은 공안정국은 더 이상 불가능할 것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국가안보와 공공불안을 자극하는 이와 같은 권력의 시도는 앞으로도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복잡한 사회현실과 넘치는 정보 속에서 대중의 관심을 사로잡아 정부에 대한 비판의식을 무디게 하는 데에는 안보와 공안만큼 좋은 소재가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오랜 세월 적대관계에 있어 온 강력한 독재국가가 바로 코앞에 군대를 배치해 놓고 있는 상황에서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아감벤은 "정치적 지배자들이 민주주의를 인정하기 시작한 지 한 세기도 되지 않았는데, 민주주의는 이미 아무런 내용이 없는 공허한 개념이 되고 말았다"고 지적한다. 모든 사람들이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해 논쟁하고 행동하고 심지어 위법행위까지도 감행한다.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 민주주의란 이렇게 아무런 내용이 없이 어떤 것으로도 채워질 수 있는 것인가. 이제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자랑스러운 ‘민주화’ 역사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 민주주의가 정치적 지배이념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은 것이 맞는가. 혹시라도 소수 세력 있는 사람들이 지배하는 전제정이나 귀족정을 보다 선호하는 정치세력은 없는가. 그러나, 이러한 모든 질문에 앞서 가장 기본적인 것 하나는 분명해졌으면 좋겠다. 적어도 국가의 정보기관이 선거에 개입하는 일은 민주주의에 반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책임은 엄중히 물어야 하고 제도적인 재발방지책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 대상이 국가안보에 아무리 중요한 정보원이거나 청와대라고 해도 말이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259 | 추천: 0
정보배/ 출판 기획편집자 첫 신고전화는 고등학교 때였다. 등굣길 버스 안에서 목격한 교통사고를 119에 신고한 것이다. 대학을 졸업한 후부터 나는 112에 한번, 동네 파출소에는 여러 차례 신고전화를 걸었다. 대학부터 결혼 전까지 서울에서 여덟 번 이사했고 결혼 후에도 다섯 차례 이사를 했다. 덕분에 여러 동네 파출소에 신고를 하게 되었다. 그 중 나를 정말 당황하게 만든 사건은 홍대 담벼락 아래에서 살 때였다. 앞집 다세대주택 이층에서 매일 저녁 같은 시간이면 부부싸움이 벌어지고 아이 울음소리가 이어졌다. 어느 날인가는 내가 사는 막다른 골목으로 부인이 맨발로 도망쳐 나왔다. 나는 황급히 파출소에 전화했고 상세한 위치 설명도 덧붙였다. 초조하게 경찰을 기다렸지만 두 시간이 지나도록 경찰은 나타나지 않았고 앞집 상황은 종료된 듯 했다. 황당한 건 그 다음부터였다. 졸고 있던 참에 희미하게 내 이름이 들리는 게 아닌가. 화들짝 정신 차리고 들으니 진짜였다. 경찰 2명이 골목에서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아, 진짜. 신고한 사람 이름을 물어볼 때부터 이상하다 했더니, 저렇게 동네방네 내 이름을 불러대다니, 신고한 사람의 신원은 지켜주는 거 아닌가.’ 속으로 별 생각을 다하며 경찰에게 나라고 했더니, 본인이 맞는지 주민증을 가져오라는 거다. ‘아,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그 다음엔 신고한 집이 어디냐, 벌써 상황 종료된 거 같다고 했더니 내 전화번호를 적어 가는 거다. ‘도대체! 왜! 내 주민증과 전화번호가 필요하냐고?’ 갓 대학을 졸업한 신참 사회인인 나는 항변하지 못했다. 왜 그런 꼴을 당한 건지, 원래 신고하면 이런 것인지만 궁금해 했다. 그때 잠시 앞으로 신고전화를 하면 안 되겠구나 이런 생각은 했다. 그 후 나의 신고정신 발현을 보면 그 경험이 내게 트라우마로 작동한 것 같지는 않다. 당연히 공익을 위해 내가 나서서 신고하는 것이라 여겼고 다른 사람들은 귀찮고 방법도 몰라 하지 않을 뿐이라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해 다산콜이 생겼다. 다산콜은 동네 파출소 전화번호나 구청 민원과 전화번호를 알아둬야 하는 수고를 덜어줬다. 나 같은 사람에게는 신속하다는 면에서 광케이블이 깔린 것 같은 느낌이랄까. 지난 일 년 동안 나는 세 차례 120을 눌렀다. 인도가 끝나는 지점에 설치된 낮은 턱 부분을 가로막은 차량 신고, 문 앞 스피커로 음악을 지나치게 크게 틀어놓은 가게 신고, 자신의 가게 전용 주차금지 입간판으로 마을버스 정류장 앞 도로를 점거한 홍대 앞 클럽 신고. 여전히 나는 광속으로 신고를 하지만 뭔가 다른 생각이 들었다. 꼭 신고전화로 해결해야만 했을까? 그 당사자들에게 왜 대놓고 말하지 못했을까? 직접 부딪히면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을 떠올리기도 전에 나는 120을 누르고 있었다. 그만큼 낯선 사람들과 불편한 상황을 대화로 풀어나갈 용기와 능력이 내겐 없었던 것이다. ‘혹시 입바른 소리 했다가 한 대 맞으면 어떡하나, 말싸움으로 번지면 피곤한데......’ 이 정도에서 나는 편하게 120을 누르는 걸로 나 스스로와 타협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언제부터 이렇게 모르는 사람들과 말을 섞는 게 어렵고 낯선 사람이 말을 걸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경계의 몸짓을 갖게 된 걸까. 무슨 일이든 대리자를 통해서 해결하거나 말을 전하는 게 편하게 생각되고, 그것도 아니면 목소리도 없는 인터넷 게시판이나 SNS를 통해서 상대방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한다. 그만큼 우리는 관계성을 잃어가고 있고 회복할 의지도 점점 약해지고 있다. 심지어 직접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하려고 애쓰면 원시적이라거나 너무 터프하다고 핀잔을 듣는 경우도 있다. 공권력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은 당연히 있다. 클랙슨을 울린다고 술 취한 사람에게 폭행을 당한다면 대화로 해결되긴 어렵다. 내가 한 신고전화의 경우를 하나하나 따져보면 신고전화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 대화로 풀 수 있는 상황들이 분명히 있었다. 언젠가부터 대화나 설득으로 문제를 풀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가 머릿속에 없다 보니 시도 자체를 하지 않게 되었다. 아마 현대사의 크고 작은 경험이 사람들에게 체화된 흔적이 아닐까라는 생각은 논리적 비약이 좀 심한가? 그렇다면 자신의 생각과 말을 제대로 대변할 수 있는 주체라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생각해보자. 경비실 아저씨가? 아니면 보험회사 직원이? 그것도 아니면 정부가? 지금은 귀찮고 힘들어도 내 삶의 터전을, 이웃을 만들어가는 데 내 몸을 움직이고 시간을 들여야 하는 때인 것 같다. 잘되면 작게는 공동 육아에서 크게는 협동조합이나 마을 공동체가 될 수도 있겠다. 적어도 대화와 타협으로 문제가 해결될 가능성을 누구나 염두에 두는 세상이 되려면 내 가족, 같은 회사 직원, 같은 아파트 주민 등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과 먼저 소통하려는 노력을 해봐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내가 직접 얼굴을 맞댈 수 있는 관계라면 대리자에게 부디 그 역할을 맡기지 않으면 좋겠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292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