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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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강대중(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윤동호(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이동우(변호사),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장은주(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마흐디 압둘 하디/ 팔레스타인 국제문제 연구소장 (Mahdi Abdul Hadi, Head of PASSIA, http://www.passia.org) 현재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난국과 최근 전개되는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요소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예루살렘, 서안, 가자 지구에서 이스라엘의 격화되는 만행; 팔레스타인 정파들 간 화해과정의 교착상태; 미 국무부장관 존 케리의 협상진행 실패; 주변 아랍 국가들의 정치 이슬람과 투쟁; 국제적인 위기들, 즉 미국, 유럽연합, 러시아와 중국과 같은 주요 국가들을 사로잡은 ‘크림반도위기, 이란과의 핵 협상, 그리고 시리아 내전’ 등이다. 이스라엘의 만행과 현재 상황 이스라엘의 만행의 새로운 단계는 예루살렘에서 목격할 수 있다. 예루살렘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이 알–아크사 모스크에 대해 전례 없는 공격을 받고 있는데, 이는 제2차 팔레스타인 인티파다로 이어진 2000년 9월 아리엘 샤론의 자극적인 방문이 발단이 되었다. 이슬람교에서 세 번째로 신성한 성지인 예루살렘을 장악하려는 이스라엘의 시도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최근 몇 달 사이 이 이슬람 성소는 다양한 이스라엘 종교계, 국방부, 정계 인사들에게 있어 중요한 이슈로 떠올랐다. 이스라엘 정책은 무슬림들과 기독교인들이 종교 휴일에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소를 방문하는 것을 방해함으로써 종교자유를 억압한다. 게다가 이스라엘 우파정치인들과 광신적인 동맹자들은 알-아크사 모스크 주변을 순회하면서, 1994년 이후 헤브론의 이브라힘 모스크에서 발생하고 있는 사건이 알-아크사 모스크에서 재현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1994년부터 헤브론의 이브라힘 모스크는 이스라엘 군의 통제하에 놓였고, 무슬림들과 유대인들에게 각각 기도 시간과 장소를 할당함으로써 무슬림들이 자유롭게 기도하는 것을 방해했다. 또한, 이스라엘은 동 예루살렘과 그 주변의 팔레스타인인들의 재산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점령촌을 확장하면서 거대한 점령민들의 조직망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스라엘 점령민들은 20만 명이다. 현재 37만 명의 예루살렘 팔레스타인인들을 수적으로 압도하기 위한 다양한 프로젝트들이 진행되고 있다. 또한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지하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있는데, 이는 알-아크사 모스크 건물 밑을 통과하는 터널을 만들어서 예루살렘 구 도시와 새로운 정착촌을 연결하려는 시도의 일환이다. 이와 더불어, 예루살렘의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 군의 폭력과 만행에 노출되어 있다. 이스라엘 군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집을 습격하고 파괴하며, 팔레스타인인들을 체포하고 검문소와 분리장벽을 통해 이동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궁극적으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여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지배를 합법화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의 종교적 민족적 정체성을 교란하려는 것이다. 한편 서안에서, 팔레스타인 영토가 끊임없이 이스라엘에 의해 몰수되고 있으며,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점령촌 확장을 강화하고 있고, 최근에는 2,300 채 이상의 점령촌 주택을 새로 건설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유대인들이 이 땅에 대해 ‘천부의 권리’를 갖고 있다는 사고방식이 이러한 행위를 뒷받침한다. 가자 지구에서, 하마스가 시리아, 헤즈볼라, 이란(현재 거의 모든 자금 지원 중단)과 이집트(무르시 대통령의 추방 이후)와 같은 전통적으로 동맹관계에 있던 국가들로부터의 지지를 잃었고, 1백7십 만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사실상 365 제곱킬로미터에 갇혀서, ‘세계에서 가장 큰 옥외 감옥’에 고립되어있다. 최근에 이집트는 가자지구로 이어지는 1,300개의 터널을 폐쇄했고, 이스라엘과 이집트 모두 세 개의 주요 국경선의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한편 가자의 또 다른 정치파벌인 이슬람 지하드는 미사일을 발사함으로써 이스라엘을 자극하려고 시도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인들을 가자에 다시 연루되게 함으로써, 국제사회가 가자 해안에 대한 포위 공격을 주목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전략은 가자 주민들에게 재앙을 초래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보복이 초기의 자극 보다 훨씬 더 파괴적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스라엘의 정치인들은 끊임없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인 마흐무드 압바스(아부 마젠)를 공격하고, 공개적으로 마흐무드 압바스의 리더십 자질을 문제 삼으며 평화협상에 적합하지 않은 인물임을 지적하고 있다. 이스라엘 미디어는 그의 나이를 암시하면서, 고 야세르 아라파트 수반의 최후시기에 비유하며 팔레스타인에 ‘새로운 지도자’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인들의 목표는 무엇인가?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점유를 멈출 의사는 없다. 그들은 현재 상황에 꽤나 만족하고 있으며, 계속해서 예루살렘을 이스라엘화시키고, 팔레스타인들을 나블루스, 라말라, 헤브론, 가자지구와 같은 커다란 감옥들에 가두고, 서안에서 ‘식민지화 쓰나미’를 계속 수행하고 있다. 그들은 팔레스타인들과 정치적 해결을 추구하기보다는, 하마스, 헤즈볼라, 이란과 시리아를 겨냥한 ‘전쟁 문화’를 조장하며, 중동 지역뿐만이 아닌 전 세계적 정치상황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팔레스타인 사회와 문제 팔레스타인 사회는 2007년 이래로 정치적, 지리적으로 분열되어왔다. 현재까지 하마스와 파타 지도자들 간의 화해 노력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두 분파 모두 각자의 정치적 ‘박스’ 안에 갇혀서 내/외부적으로 합법성의 문제에 직면해 있으며, 이집트, 사우디, 카타르 주도하에 통합회의를 끊임없이 진행해가고 있다. 하마스는 전통적인 동맹들인 이란, 시리아, 헤즈볼라, 이집트를 잃었고, 밀수 터널의 파괴와 라파 국경 차단 이후 외부 세계와 단절되었다. 하마스는 가자 내부로부터 점증하는 비판에 직면하고 있으며, 이 비판은 가자의 통치자라는 하마스의 지위를 위협한다. 파타 또한 리더십 위기를 겪고 있는데, 평화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미래를 위한 비전의 위기를 겪고 있다. 파타 내부의 분열은 압바스 수반이 최근 라말라에서 있었던 파타 회의에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중앙 위원회 공직에서 해임당한 파타 당원 무함마드 다흘란을 모반 혐의로 비난했을 때 더욱 분명해졌다. 이러한 파타의 ‘치부’ 노출은 ‘팔레스타인의 미래를 위한 외교에 있어서 결정적인 시기’에 일어났으며, 팔레스타인인들의 파타에 대한 신용을 뒤흔들고 있다. 이 상황이 어디로 이어질지는 확실치 않지만, 세 개의 시나리오가 가능하다: 첫째, 현상 유지, 서안을 ‘반-자치구역’으로 하지만, 사실은 이스라엘의 지배를 받으면서, 세 개의 작은 구역들, 나블루스, 라말라, 헤브론으로 분할된 상황의 연속; 둘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이끄는 후보로서 파타 지도자인 마르완 바르구티의 (재)출현. 그러나 그가 감옥으로부터 석방될 것 같지 않다. 셋째, 새로운 선거, 이 선거는 새로운 무소속 후보들에게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도 있다. 그 동안 점령지 팔레스타인 영토 주민의 60퍼센트를 차지하는 팔레스타인 젊은이들은, 민족적 자존심과 확고함을 결합하여 새로운 저항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들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보호를 요청하는 대신 스스로 이스라엘 점령민들의 공격에 점차 맞서면서, 자신들의 힘으로, 자신들의 재산과 존엄성을 지키고 있다. 심지어 이스라엘 점령민들을 ‘체포’하여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넘기기도 한다. 또 다른 예로는 ‘밥 알-샴스’ 나 ‘아인 히옐라’와 같은 텐트촌을 세우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재빨리 이 텐트들을 파괴하기는 했지만, 이러한 사례는 선행된 적이 없는 팔레스타인 젊은이들의 자신감을 보여주면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무능함에 도전하였다. 젊은이들은 BDS (보이콧, 투자 철회, 그리고 무역제제)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데, 이는 이스라엘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보이콧을 조장하는 것이다. 어떤 단체들은 심지어 이스라엘 방문객조차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팔레스타인의 이스라엘로부터의 완전한 분리를 촉구하기도 한다. ▲ 마흐디 압둘 하디(Mahdi Abdul Hadi) 팔레스타인 국제문제연구 소장   또한, ‘제드니’와 같은 문화 단체는 팔레스타인 청년들에게 그들의 권리를 일깨우고 정치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제드니’는 나블루스에서 책에 대한 비평에 집중하는 학생 독서모임으로 시작했지만 소셜 미디어를 통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 단체는 청년들이 직접 팔레스타인 문학, 영화, 그리고 비디오를 해석하고 토론하면서, 팔레스타인의 투쟁에 관하여 스스로 교육하는 젊은이들에게 기반을 두고 있다. 최근 미국이 중재하는 협상 현재 진행되고 있는 협상과 1948년의 협상을 비교해보도록 하자. 그 당시, 협상은 UN 안보리가 임명한 카운트 폴크 베르나도트의 중재로 이루어졌다. 오늘날은 오바마 대통령이 임명한 미 국무부장관 존 케리가 이 임무를 맡고 있다. 이러한 두 중재인들의 커다란 차이는 지난 수십 년에 걸쳐 일어난 전 세계적 권력 균형의 변화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인들에 비해 이스라엘인들이 얼마나 많은 힘을 얻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놀라운 관전 포인트는 난민, 예루살렘, 영토, 그리고 요르단과의 관계이다. 난민: 현재 존 케리의 임무에서는 난민문제는 2000년 클린턴의 제안과2003년 비공식적인 제네바 협약에 기반해 다루어지고 있다. 이에 따라, 난민에 대해 다섯 가지 옵션이 주어진다: (1) 미래 팔레스타인 국가로의 귀환 (2) 영토교환의 일환으로 팔레스타인에 양도되는 이스라엘 내 지역으로 귀환 (3) 현재 머물고 있는 국가에서 재정착 (4) 제 3국에서 재정착 (5) ‘이스라엘 주권적 결정 하에’ 이스라엘로의 재정착을 위한 귀환: 이스라엘이 귀환하는 팔레스타인 난민의 전체 수를 직접 결정한다. 존 케리의 난민계획 안에 따르면, 지난 60년간 팔레스타인 난민을 받아들인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는 난민들에게 시민권을 제공하는 것에 대한 보상을 받게 된다. 이 제안은 난민 문제를 난민 개인의 선택에 맡기기 때문에, 난민문제를 민족적인 PLO차원으로부터 난민 개인으로 옮겨온다. 압바스 수반이 이 계획을 승인하기 위한 조건이 국민투표를 실시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이 계획은 이스라엘이 난민 문제를 창출한 것에 대한 책임을 더 이상 지지 않아도 되는 위험이 따른다. 예루살렘: 현재 협상에서, 존 케리는 2000년 클린턴 제안을 약화시킨 안을 제안했는데, 그것은 팔레스타인이 예루살렘에 수도를 갖는데, 그 수도는 동 예루살렘의 특정한 지역에 존재한다고 밝힌다. 결과적으로, 이는 점령지 동 예루살렘 전체가 아니라 오직 동 예루살렘의 일부 지역에서만 단지 상징적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영토(교환): 존 케리는 제한된 영토 교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미래 팔레스타인 국가영역으로 예상되는 영역에 세 개의 주요 이스라엘 점령촌 단지를 그대로 유지시키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존 케리는 요르단과 이스라엘, 팔레스타인을 아우르는 ‘평화적 경제체제’를 주장했다. 미국은 이스라엘을 중동 내 ‘군사적 고립’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하여,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 정상화를 이루기를 바라고 있다. 2002년 이래로 아랍 평화 계획 이후, 관계 정상화가 협상 중에 있었으나, 이스라엘인들은 ‘군사적 고립’을 선호한다. 왜냐하면, ‘군사적 고립’은 이스라엘인들에게 중동에서 서방의 기지로서 쓸모 있다는 주장의 근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현재 미국과 유럽연합은 중동내의 사건과 관계들에서 크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반면, 이스라엘은 여러 면모로 방해를 해 왔기 때문이다. 존 케리는 현재 그의 임무와 인격(그를 기독교 광신자로 몰아가는 등)에 대해 전례 없는 이스라엘의 공격을 받고 있다. 이것은 그를 위협해서 결국 그의 노력을 무산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지난 몇 십 년 간 팔레스타인의 교섭력은 크게 줄어들었고, 이는 이스라엘에게 이익을 주었다. 존 케리는 자결권과 국가 지위를 원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존 케리는 팔레스타인의 비극을 종식시키지 못하고, 단지 대화를 ‘진행’하면서 양 측 사이에서 왕복외교를 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아주 최근에야 이 분쟁에서의 불균형성을 인식하면서, 이스라엘이 대화를 방해한다고 비난하며, 교착상태에 빠진 평화 과정에 관하여 팔레스타인의 입장을 강화시켰다.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이 팔레스타인을 방문한 지난 2013년 11월 6일 서안지구 베들레헴에서 팔레스타인 시위대가 ‘이스라엘의 정착촌 문제를 가장 먼저 해결하라’는 문구 들고 있다. AP. 사진 출처 - 경향신문 결론: 국제사회를 통한 난국해결 현재 팔레스타인-이스라엘 교착상태 하에서, ‘두 국가’ 해결책은 설 곳이 없음이 분명하다. 팔레스타인인들은 ‘한 국가’라는 정치 현실에 직면하게 될 것을 두려워한다. 이 ‘한 국가’ 내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은 ‘지방자치당국들’이 서비스를 제공하는 고립된 ‘구역들’에서 살게 될 것이고, 이스라엘 군사점령자들이 ‘지방자치당국들’을 지배할 것이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앞에 놓여있는 것을 제대로 판단할 수 없고, 미국, EU와의 확고한 전략적인 동맹과 막강한 군사력을 근거로 허영심이 가득 찬 궤변에 빠져있다. 반면 팔레스타인의 대의는 심각한 리더십위기, 정치적 분열, 비전에 대한 합의결여, 그리고 전통적 우호관계에 있던 아랍과 이슬람 세계로부터 거의 결여된 지원 등으로 인해서 약화되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인들은 40여 년 동안 이스라엘의 군사 점령에 맞서고 있으며, 민족 정체성과 문화 유산을 유지해 오고 있음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며, 계속해서 민족 대의-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을 위해서 헌신한다. 이스라엘이 약속과 달리 팔레스타인 포로를 석방하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고, 팔레스타인인들이 제네바협정을 비롯한 몇 가지 국제조약에 하나의 국가로서 가입하기를 신청함으로써, 존 케리가 진행하는 협상은 새로운 교착상태를 맞이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새로운 제재를 가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대신해서 걷은 세금을 되돌려주지 않고, 논쟁지역인 E-1 지역에서 유럽연합의 자금으로 세워진 인도주의적인 주택들을 부수는 일 등이 그 내용들이다. 결국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 해결을 위한 ‘전쟁터’는 국제무대로 옮겨가게 될 것이다. 이는 단순히 국가들만이 아닌 UN, 국제 사법재판소, 다양한 국제기구, 그리고 BDS (보이콧, 투자 철회, 그리고 무역제제) 운동이 벌어질 국제 시민사회를 포함할 것이다. * 영문 원고 번역은 김해서 님이 수고해주셨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286 | 추천: 0
이광조/ CBS PD 살면서 이렇게 참담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을 또 겪을까 싶다. 온 국민이 보는 앞에서 대형 여객선이 침몰하고 있는데, ‘자리에 그대로 있으라’는 승무원들의 지시가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가 버렸다. 해경이 현장에 출동해서 구조 활동을 벌이는 상황이었는데 말이다. ‘전원구조’라는 속보를 접하고 이렇게 빨리 구조가 이뤄졌나 하는 의문을 품기도 했지만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던 건 이렇게 허술하고 허망하게 배가 가라앉는 걸 방관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탓이다. ‘숨쉬기조차 미안한 4월’이라는 시인의 흐느낌에 속절없이 눈시울이 붉어진다. 하루에도 몇 번씩 참사의 새로운 진상이 드러날 때마다 눈물을 주체하기가 힘들다. 안타까움과 미안함이 쌓이는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분노는 커져 간다. 대형 재난이 발생할 때마다 원인으로 지적되는 안전 불감증과 책임자들의 직업윤리 부재는 이번에도 고스란히 되풀이되었다.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역대 최악이라고 할만하다. 노후 선박의 선령제한을 20년에서 30년으로 연장한 정부의 안이한 규제완화, 같은 패거리들끼리 적당히 눈 감고 지나친 안전검사, 승객들의 생명을 팽개치고 자신들의 목숨만 건사한 승무원들, 허둥대다 승객들을 살릴 수 있는 기회를 날려버리고 책임 모면에만 급급한 해경, 실종자 가족들을 위로하고 구조 활동을 격려한답시고 현장에 내려가 구조활동에 차질만 빚은 고위공무원들, 사과에는 인색하고 책임을 전가하는 대통령까지. 사고의 배경과 원인, 대처과정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구석에서도 제대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 곳을 발견할 수가 없다. 신생국가도 아니고 단기간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뤄냈다고 자랑하는 대한민국의 오늘이 왜 이 모양 이 꼴인가? 국가의 존재 이유 자체가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 대책은 과연 무엇일까? 선장을 살인자로 규정해 처벌하고 안전과 관련된 직종의 직업윤리를 강조한다고 해서, 혹은 청와대나 국무총리실에 재난컨트롤타워를 설치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까? 답답하고 무기력하기만 한 상태에서 국가정보원이 지난 대선 당시 국군사이버 사령부에 지원한 예산이 인터넷 댓글작업을 벌인 사이버심리전단 요원들에게 정보활동비 명목으로 전달됐다는 뉴스를 접하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세월호 참사를 낳은 원인들은 수도 없이 많겠지만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한 건 결국 공권력의 사유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다. 국가안보를 위해 복무해야할 국가정보원이 특정 후보를 지원하기 위해 국민을 상대로 이른바 ‘심리전’을 벌이고 댓글작업에 세금을 펑펑 써댔다. 국정원만으로는 모자라 국군사이버사령부까지 여기에 동원됐고 심리전단 요원들에게는 그 대가로 수당을 지급했다. 이뿐인가. 공기업에 낙하산 인사를 하지 않겠다는 공약을 헌신짝처럼 내던져버리고 여기저기에 낙하산을 투하했고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단체들에게 보조금을 아끼지 않았다. 지난 29일 오전, 박근혜 대통령이 안산시 단원구 화랑유원지에 위치한 세월호 희생자 합동분향소를 방문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떠난 후 조화는 합동분향소 밖으로 내보내 졌다. 사진 출처 - 노컷뉴스   국가공권력과 공조직이 이렇게 특정 정치세력의 사유물로 전락하는 상황에서 직업윤리에 투철한 인사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권력의 최정점에 있는 사람들이 공권력을 자신들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 움직일 때 공조직에서는 위만 바라보는 풍토가 자리 잡을 수밖에 없다. 생떼 같은 자식들의 생사를 걱정하고 있는 부모들이 있는 자리에서 ‘장관님 오셨다’며 의전을 먼저 챙기고 잠수사들의 구조작업을 지연시킨 공무원들을 보라. 권력자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제 1의 원칙이 되면 직업윤리 같은 건 세상물정 모르는 이상주의자들의 외침이 될 수밖에 없다. 권력자들과 해바라기들이 장악한 공조직에서 연고주의와 이너서클이 번성하는 건 당연한 귀결이다. 해경과 해양구조협회의 유착 의혹, 선박의 안전검사를 담당하고 있는 한국선급과 해운업체들 사이의 유착 의혹은 특수한 분야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권력이 사유화된 상황에서 예산의 효율적인 배분과 집행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세계에서 열 번째로 많은 국방비를 사용하면서도 국민의 안전을 보호하는 일에는 이처럼 무능한 게 2014년 대한민국의 현실 아닌가. 안보가 별 건가? 안보위협은 북한으로부터만 오는 것이 아니다. 사유화된 권력은 문제가 생기면 모든 책임을 아래로 전가한다. 이윤만을 앞세운 해운업체의 탐욕과 선장을 비롯한 승무원들의 직업의식 부재, 해경의 부실한 초동대응. 모두 비판 받고 책임을 져야 할 일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통제되고 개선되지 않은 건 누구의 책임인가? 공공의 이익을 위해 시장의 탐욕을 제어하기는커녕 규제완화라는 선동적인 구호로 욕망의 족쇄를 풀어준 건 누구 책임인가? 선박 안전검사를 객관적이고 엄정하게 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정비하지 않은 건 누구 책임인가? 해난사고 발생 시 해경과 해군이 신속하게 대처해 소중한 인명을 구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정비하지 않은 건 또 누구 책임인가? 모든 게 한꺼번에 개선될 수는 없겠지만 사고를 막을 수도 있었던, 피해를 최소화시킬 수 있었던 숱한 계기들이 모두 허망하게 지나가버린 건 누구의 책임인가? 그러고서 하는 일이 비판여론을 희석시키기 위해 언론대응지침을 만들고 분향소 설치를 축소하고 대통령의 이미지 연출에 매달린다. 그렇게 해서 여론의 비판을 모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국민을 계도와 조종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공직사회의 대처를 보면서 지금이 70년대인지 헛갈릴 지경이다. 대한민국은 누구를 위한 나라인가?
2017-08-07 | hrights | 조회: 278 | 추천: 0
세월호 사고와 국가, 특권 지배층, 그리고 일베 정재원/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세월호 여객선 전복 사고로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까지도 수많은 아이들과 승객들이 여전히 차디찬 바닷물 속에 방치되어 있다. 어느 나라에서도 예기치 않은 사건 사고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사건 초기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의 대응이나 탈출 과정, 해경의 거짓말과 변명들도 그렇지만, 지금까지의 구조작업 과정에서 보여주었던 국가의 총체적 무능력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분노스럽다. 저 상황에서 과연 나도 구명조끼를 남에게 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말만 앞세우는 나를 되돌아보기도 한다. 사고가 나기 바로 얼마 전 난데없는 정부의 규제 완화 쇼가 있었다. 규제를 완화하기 위해 생방송까지 해 가며 갑자기 규제가 모든 악의 근원인 것처럼 규정되었다. 기존의 규제를 '암 덩어리'라고까지 표현하며, 규제 해제에 몰두하는 정부는 잘못된 규제의 대표적 예로 학교 옆에 호텔 건축을 규제하는 것을 들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규제가 완화되어야 할 관료주의적 규제 완화가 아니라, 철저하게 자본을 위한 규제 완화가 목표라는 것은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그런데 이미 오래전부터 한국사회는 토목건축, 안전, 노동, 환경, 건강 등등 분야를 막론하고 자본의 이윤 극대화를 위해 경쟁적으로 그 규제의 정도와 범위를 끊임없이 낮춰 온 것이 사실이다. 이번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여객선의 사용연한을 20년으로 제한하고 5년 범위 이내에서 연장할 수 있도록 한 '해상운송사업법' 조항을 MB정부가 30년까지 운행 가능하도록 완화한 것은 수많은 사고를 이미 예비한 거나 다름없다. 2012년에 수명이 다한 월성 1호기 원자력 발전소 발전 연장 문제나 공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건축 허가가 떨어진 123층짜리 제2 롯데월드 건설 등 매우 굵직굵직한 대형사고 가능성이 있는 사례만 보아도 섬뜩하다. 한 교수님의 말처럼, 이미 오래 전부터 자본의 이윤을 위해 4대강과 갯벌 파괴, 핵발전소의 증설과 무모한 수명연장, 대학교육의 황폐화, 역사 문화적 공간의 파괴와 도시공간구조의 기형화, 그리고 지역의 공동화와 개발 명목의 자연파괴가 자행되어 왔으며, 이러한 파괴들은 이미 어마어마한 재앙을 예고하고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미국의 지속적인 광우병 가능성 소고기 수입 요구와 유전자 조작식품, 유해한 가짜 수입농수산물 유입, 조류 독감과 각종 신종 전염병들의 확산, 신뢰하기 어려운 신의약품 유통, 미세먼지와 황사 유입, 후쿠시마 원전으로 인한 방사능 오염 등등 도저히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시무시한 미래의 대형 사고의 위험을 우리는 안고 살아가고 있다.   세월호 여객선이 침몰한 전남 진도군 관매도 인근 해상에서 해경이 구조활동을 하고 있다. 사진 출처 - 노컷뉴스 이번 사고를 이러한 맥락에서만 보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화물들에 대한 결박이나 관리 문제 등 만연해 있는 안전 불감증에서 비롯된 대참사일 수도 있지만, 20년이나 된 노후화된 배의 수명을 연장시킨 것도 모자라 180 여 명을 더 태울 수 있게 용도를 바꿀 수 있게 허가하고, 그렇게 바꾸어도 안전하다고 한 것, 그리고 화물과 차량 적재를 더 허용한 것 등등은 단순한 안전 불감증에서 비롯된 것만이 아님을 보여 준다. 이윤과 탐욕 극대화를 추구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우리 사회의 기득권자들의 행태는 이런 국가적 비극 속에서도 쉽게 감춰지지 않는다. 사고 수습 과정의 엉성함은 그렇다 치더라도, 박수를 유도하고 라면 먹고 기념사진을 찍는 것과 같은 현장에서의 총리와 장관, 그리고 수행원들의 태도는 유족들과 국민들의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집권 여당의 세종시 교육감 후보는 출정식에서 폭탄주를 마시며 웃음꽃을 피웠고, 종편에서는 이런 상황에서도 대통령의 지지율이 떨어지지 않는 원인에 대해 토론을 벌인다. 이게 다가 아니다. 너무나도 정당한 항의를 막기 위해 사복경찰을 배치하고, 시위화하자 막아서서 채증하며, 너무나도 당연한 현장과 온라인상의 문제제기에 종북 좌파, 시위 선동꾼 운운하거나 유언비어 유포죄 등으로 사법처리한다고 엄포를 놓는다. 죽은 사람들 중에 종북 좌파가 있으면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는 한 언론인에 대해서는 아주 심각한 정신적인 질환을 앓고 있어 하는 헛소리라 칠 수 있지만, 집권 여당의 최고위원과 의원직을 가진 자들은 그와 똑같은 망발을 해 댄다. 막장 드라마의 끝은 바로 역시 일베였다. 유족들의 분노에 찬 모습이 ‘미개한 사람들’의 떼쓰는 짓으로 본 서울시장 여당 후보의 아들의 주장은 단순히 철없는 한 재수생의 생각일까? 절대로 그렇지 않았다. 여성과 장애인, 호남사람들과 이주노동자와 같은 약자 혹은 소수자들, 그리고 민주화 투쟁에 헌신한 사람들에 대한 폭력과 차별을 자행하고, 그들의 고통을 희롱하는 일베는 이번에도 희생자 가족을 ‘유족충’이라고 칭하며, 심지어 죽은 여성에 대해 성적 모욕까지 가한 글에 낄낄거리며 댓글들을 달았다. 사건 사고는 인재인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여기서 그 '인재'란 선장의 행위나 3등 항해사의 미숙함만을 일컬어서는 안 될 것이다. 미래에 닥칠 재앙을 예측하면서도 밀어붙이고 허용하고 이윤을 극대화하는 근본적인 ‘인재’부터 사라져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제거해야 할 ‘인재’에는 이제 저 위에서 아래까지 뇌구조가 심각하게 뒤틀려 있는 우리 사회의 극우 보수적, 범죄적, 암적 존재들도 이제 포함시켜야 할 것 같다. 이제 진정한 규제가 필요하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290 | 추천: 0
최정학/ 방송대 법학과 교수   대한민국 헌법 제33조는 제1항에서 “근로자는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하여 자주적인 단결권, 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라고 규정한다. 보통 노동3권이라 불리는 이 권리의 핵심은 물론 파업으로 대표되는 단체행동권이다. 자신의 노동력 밖에 제공할 것이 없는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들에게 강한 자본의 힘에 대항해서 집단적으로 노동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파업이 언제나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은 파업이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되기 위한 몇 가지 요건을 규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단체행동의 목적, 수단, 절차 등에 관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문제는 노동현장에서 파업이 이러한 요건들을 충분히 갖춘 채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보통 경제적인 것에 한정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파업의 목적에 정치적인 내용이 담길 수도 있고, 어떤 사정으로 법이 정하는 일련의 쟁의절차를 무시한 채 급박하게 파업에 돌입할 수도 있다. 기업에 근무해 보지 못한 나로서는 이렇게 ‘합법파업’을 진행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어떤 분들은 법이 얘기하는 요건과 절차를 모두 지키는 파업은 사실상 불가능할 정도라고 말하기도 한다. 여하튼, 만약 이러한 요건을 갖추지 못한 ‘불법파업’이 감행되었다면 어떻게 될까? 위의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은 합법파업에 대한 민, 형사상의 면책규정을 두고 있다. 이를 반대로 생각해 보면, 불법파업에 대해서는 민, 형사상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적나라한 결과가 그동안 우리가 접해 왔던 파업가담자에 대한 처벌과 가혹한 손해배상청구이다. 쌍용자동차 정리해고자들이 2013년 11월 27일 경기도 평택시 칠괴동 쌍용자동차 정문 앞에서 "또 다른 죽음을 부르는 정부와 사측의 손해배상·가압류를 즉각 철회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먼저 형사처벌은 형법 314조의 ‘업무방해죄’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 조항은 ‘다른 사람의 업무를 위력으로 방해한 경우’를 처벌하는 것인데, 파업이 이 때의 위력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와 일본 밖에 없는 이 범죄는 우선 ‘업무’, ‘위력’, ‘방해’와 같은 개념들이 지나치게 일반적이어서 그 처벌범위가 대단히 넓어진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렇게 된 이유는 이 조문의 역사를 보면 보다 분명해진다. 즉, 이 조항은 본래 노동쟁의를 처벌하기 위한 1864년의 프랑스 형법 414조를 일본이 받아들이면서 그 대상과 방법을 업무와 위력 등으로 바꾼 것인데, 이렇게 처벌대상범위를 확대한 것은 이 범죄가 노동운동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외관을 벗어버리려는 의도와 함께 불법파업을 빠짐없이 처벌하겠다는 노동탄압의 정치적 전략을 위해서였던 것이다. 이 조문은 이미 오래 전에 프랑스에서 폐지되었다. 일본에서도 근래에는 쟁의행위에 대해 이 조항을 적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오직 우리만 파업을 형사적으로 문제 삼고 있는 셈이 되는데, 따라서 이제는 이 문제에 대한 전향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점을 감안해서인지 지난 2011년 대법원은 쟁의행위에 대해서 ‘위력’의 개념을 제한적으로 적용해야 한다는 판결을 하기도 하였지만, 이것만으로는 여전히 부족하다. ‘폭행’이나 ‘협박’이 수단으로 사용된 경우와 같이 그 범위를 더욱 제한하거나, 아니면 아예 노동쟁의행위에 대해서는 업무방해죄를 적용할 수 없도록 하는 단서규정을 두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상의 형사책임과는 별개로 사업자는 불법파업을 한 노동조합 자체 혹은 이에 가담한 노동자 개인에게 민사상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배상액수는 때로 대단히 무거워질 수 있는데, 파업 중 발생한 실제피해에 그 기간 차질을 빚은 생산액수가 더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자 개개인에게 이것은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오게 될 터이고, 어떤 사람은 이러한 배상의 위협이 해고보다 더 무섭다고도 한다. 해고가 되면 다른 직장을 구할 수라도 있지만, 가압류를 동반한 배상의 책임은 평생 그 사람을 따라다닐 것이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러한 손해배상청구는 노동조합을 파괴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 일단 천문학적인 배상액을 청구한 다음 노조를 탈퇴하면 그 대상자에서 제외시켜 주겠다는 회유가 뒤따르는 것이다. 이런 치졸한 방법은 분명 헌법이 보장한 노동권을 부정하는 것이지만, 현행 민법상 아무런 문제가 없는 온전히 합법적인 것이고 따라서 법적으로는 이를 막을 도리가 없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해결책은 사용자가 실제의 사정을 감안하여, 극히 예외적인 때가 아니라면, 파업에 대한 배상청구를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묵시적 합의는 사회적, 정치적으로 약자인 노동자에게 특별한 권리를 부여한 법 전체의 정신을 존중하는 것이며, 이미 우리와 비슷한 경험을 했던 여러 다른 나라들에서 (법이 허용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배상청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까닭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의 분위기는 이와는 정반대로 가고 있는 듯하다. 2014년 4월 현재 불법파업으로 인한 손해배상이 청구된 사업장은 전국에서 20곳이 넘고, 그 배상액수는 1600억원을 넘어선다고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수 없이 제도적 보완책을 찾아보아야 한다. 파업으로 인한 배상액을 청구액보다 훨씬 낮게 인정한다거나, 아니면 아예 영국의 경우처럼 청구가능액을 법으로 제한할 수도 있다. 또 보다 근본적으로 위에서 본 노동법에서 정한 (합법)파업의 요건을 완화함으로써 불법파업을 줄이고 노동권을 더욱 넓게 보장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대안들은 제도적인 변화이므로 상당한 논의와 시간을 필요로 한다. 또 여러 이유로 이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실직과 가정파탄, 정신적 우울증과 사회적 삶의 포기로 이어지는 노동자들의 고통을 생각한다면 하루빨리 사회적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다행히 지난 2월 이러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시민들의 모임이 결성되었다고 한다. 건설적인 논의와 바람직한 대책,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실천과 결과를 바란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367 | 추천: 1
박현도/ 종교학자 선거철로 들어섰다. 6월 4일 지방선거를 앞두고 언론이 시끄럽고, 동네 주변도 여러 현수막과 홍보성 광고로 어지럽다. 아파트를 드나드는 어귀에는 선거에 나올 사람이 인사를 하고, 휴일에 좀 쉴라치면 생전 울리지 않는 집전화기가 여론조사에 참여해달라고 따르릉거린다. 앞으로 이러한 모습들이 더하면 더하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니 그냥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때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이번에는 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일이 하나 있다. 바로 공약이다. 공약을 한자로 쓰면 公約이다. 말 그대로 사람들에게 꼭 지키겠다고 대놓고 공개적으로 하는 약속이다. “뽑아주시면 지금 제가 여러분들께 하는 약속을 꼭 지키겠습니다”라는 선거입후보자의 비장한 말투가 그동안 얼마나 많이 울렸고, 앞으로도 그럴 것인가! 그러나, 울리기만 했지 제대로 약속을 이행한 경우가 얼마나 많았는지는 굳이 통계를 내보지 않아도 불 보듯 뻔하다. 이수일에게 한 심순애의 약속처럼 당선 만 되면 公約은 空約이 된다. 요즘 공천을 두고 말들이 많다.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는 지난 대선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의 공약사항이었다. 그런데 결국 지키지 못했고, 여당대표가 대국민사과까지 하였고, 야당은 왜 안 지키냐며 대통령 면담까지 요구하며 압박을 가하고 있는 추세다. 새정치민주연합 안철수 공동대표는 우리 정치를 벚꽃에 비유, “선거 때만 되면 마치 벚꽃이 피듯 갖은 공약들이 화려한 색과 향기로 치장되지만 선거가 끝나면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그 약속들도 모두 허공에 스러져버리기 때문”이라고 비판한다. 새로운 정치를 하자는 이야기인데, 사실 새정치민주연합의 한 축인 민주당 출신 대통령들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공약 준수율은 18%, 노무현 전 대통령은 8%에 불과하단다. 공천폐지를 두고 약속을 지키라는 야당의 속사정도 복잡하다. 공천폐지하려면 당을 해체하라는 강경반대파 목소리도 적지 않다. 정당공천폐지의 요체는 현역 국회의원들이 기초의원들이나 단체장에게 끼치는 막강하고도 아주 못된 영향력을 줄이자는 것인데, 이에 대한 성찰이나 반성은 사라지고 정쟁만 남는 우스운 꼴이 되었다. 사족을 더 붙이자면, 지난 대선 당시 지지율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던 문재인 후보가 안철수 현 야당 공동대표를 사전 약속 없이 찾아갔다가 문전박대 받은 적이 있고, 그때 안철수 대표 측근은 방송에서 “친구 집에 갈 때도 미리 연락하고 가는 거다. 이렇게 오는 것은 퇴로를 주지 않는 압박이다. 예의가 아니다.”라며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급한 안 대표가 사전 예고도 없이 대통령을 만나겠다고 찾아가서 면담을 신청하고 특정기한까지 답을 달라고 요청인지, 통보인지 모를 일을 하고 왔다. 모르겠다. 도대체 새정치가 무엇인지. 민주당으로 당선된 사람이 당선되자마자 몇 달도 안 되어 민주당을 구태의 소산으로 밀어붙이며 새(新)정치한다고 떠나 버린 사람이 있는데, 지금은 다시 자신이 욕하던 사람들과 정말 새롭게 정치를 한다. 새정치인지, 새(鳥)정치인지, 아리송하다. 아마도 이들은 자기편이 아니면 다 구정치고, 자기편이면 다 새정치로 보는 모양이다. 바야흐로 선거철. 모두들 이래저래 약속을 깨니 公約은 空約이 아니라 攻約인가보다. 봄이라 그런지 초록(草綠)이 동색(同色)이다. 노안 때문만은 아닌듯하니, ‘오호통재(嗚呼痛哉)라!’
2017-08-07 | hrights | 조회: 276 | 추천: 0
정보배/ 출판 기획편집자 마이 플레이스(My Place). 박문칠 감독이 7년 여 동안 가족들을 인터뷰해 만든 이 영화는 주인공 네 사람이 각자의 자리 - 각자가 있어야 할 자리 혹은 각자가 있고 싶어 하는 자리를 찾아 떠나고 또 다시 만나기도 하면서 가족의 의미를 재발견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캐나다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때 역이민을 온 감독과 여동생은 캐나다와는 너무 다르고 낯선 한국의 정서와 시스템에 혼란을 겪고 상처를 받았다. 자신을 감추기에 능했던 오빠에 비해 그러지 못했던 여동생은 상대적으로 성장과정에서 더 많은 상처를 겪었고, 결국 스무 살 넘어 혼자 캐나다로 떠났다. 그런 여동생이 뱃속 아이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평소 정치계로 진출할 꿈을 가진 아버지는 결혼도 하지 않고 임신해서 돌아온 딸을 못마땅해 하지만, 엄마는 그런 딸과 아이를 별 동요 없이 받아들인다. 결국 소울의 출생은 가족 구성원들에게 각자의 자리에 대해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고, 지금 이 가족은 자신만의 플레이스를 찾아 여전히 이합집산중이다. 이 영화는 여러 층위의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사람들에게 던진다. 보는 사람마다 이입되는 주인공이 다르다고들 하는데, 내 경우엔 네 명 모두에게 뭔가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상식과 조금만 달라도 쉽게 비난하고 배타적으로 구는 한국 사회에서 아무도 자신을 이해하거나 감싸주지 않아 더 힘들고 외로웠다는 여동생은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고 자신이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필요했던 것 같다. 소울을 키우면서 학교 공부를 하는 그녀의 바쁜 일상은 내 경험과 겹쳐 보였다. 하지만 화면 속의 그녀는 나보다 훨씬 더 긍정적이고 에너지가 넘쳐 보였다. 감독이 한 말이 가슴 한 구석에 와 박혔는데, 여동생은 정말 원해서 아이를 가졌고 낳았기 때문에 아이를 아주 많이 사랑한다는 것을 옆에서 봐도 알 수 있다고. 사진 출처 - 씨네21 일류 대학을 나와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에 들어갔지만 결국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 영화인이 된 오빠. 여전히 그 결정이 맞는지, 자신의 플레이스를 제대로 찾아가는 과정인지에 대해 뚜렷한 확신이 없었던 그는 캐나다에서 소울을 키우면서 자기 자리를 찾은 여동생을 보면서 느낀 바가 많다. 그의 결정과 고민을 들여다보면서 또 나를 바라본다. 나는 정말 내가 원하는 자리를 찾은 것인가. 정말 원해서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는 건 맞지만, 그 과정에서 얻은 것과 잃거나 놓치게 된 것은 교환가치가 다르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게다가 15년 이상 내 적성에도 맞고 하고 싶어 해온 것이라고 생각해온 일이 요즘엔 정말 그런가 하는 의문이 든다. 나만이 아니라 비슷한 고민을 하는 여러 사람들이 있을 텐데, 과연 과감하게 새로운 선택을 한 사람들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겨우 공고를 나와 캐나다에 가서 자리를 잡았지만 아내의 결정을 따라 학벌 따지는 한국에 돌아와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던 아빠. 그는 정치계로 진출할 꿈을 접고 새로운 자신의 플레이스를 찾아 몽골로 떠난다. “그런 얘긴 처음 듣는데?”라는 아들의 질문에 “당연하지. 내가 말한 적이 없으니까.”라는 그의 대답은, 나처럼 청년과 장년 시절이 당연히 있었을 내 아빠의 과거와 가족들에게 아직도 말하지 못한 그의 꿈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민주화운동으로 투옥된 아버지와 힘든 시간을 보내는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 등으로 역이민을 결정했던 엄마. 역이민 와서 청소년기에 많은 상처를 입은 딸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그녀의 선택을 사랑으로 받아주는 엄마. 비혼모라는 어려운 결정에 자신이 그녀를 보듬지 않으면, 다시는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고 딸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는 엄마. 이렇게 현명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과 함께 이 엄마의 마음은 누가 안아주는 건가 하는 물음이 떠올랐다. 가장 가깝지만 어쩌면 가장 서로를 모르는 관계. 아니, 가까운지 어떤지는 몰라도 결국엔 무시하지 못하는 이름, 가족. 너무 붙어 있어서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 내는 줄 모르는 고슴도치 같다고나 할까. 가능하다면, 이 영화의 가족처럼 적당히 간격을 두고 각자의 자리를 찾고 가끔은 뭉쳐서 서로를 위로해 줄 수 있는 그런 관계가 이상적인 가족이 아닐까 생각한다. 솔직히 그 가능성을 위해서 사람들이 이 가족 같은 고난의 과정을 기꺼이 치를 용기를 갖긴 쉽지 않을 것 같다. 이 가족도 여동생의 임신이라는 계기가 없었다면, 오빠의 끈질긴 질문을 통해 가족들 각자 생각하는 시간을 길게 갖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의 ‘마이 플레이스’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가족들이 마음 한편으로 부럽고 그 용기들에 질투가 난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286 | 추천: 0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재판’, ‘인민위원회’ 등, 해방 후 분단된 한반도 북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이 국가를 형성하면서 ‘인민’이라는 말을 선점했다. 그런 반면, 남쪽 사람들은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이라는 명칭으로 국가를 형성했다. 내외적인 압력에 의한 분단과 그로 인한 참혹한 전쟁이 수행되면서 냉전의 국제질서 속에서 남북 양쪽은 서로를 완전히 부정하는 강고한 대립적 대타성(對他性)을 마치 국체를 이루는 주축이자 기초인 양 여겼다. 그런 가운데, 남쪽에서는 북쪽이 선점한 ‘인민’이라는 말이 국가적인 금기어가 되었다. 그런 완전한 대립의 대타적인 관계가 분단을 더욱 고착시켰지만, 1991년 12월 소련이 붕괴되면서 국제적으로 냉전 질서가 함께 붕괴되자 사태가 일변한다. 한국 전쟁에 대대적으로 참전함으로써 대표적인 적성국이었던 ‘중화인민공화국’(‘중공’)과 대한민국이 1992년 8월 정식으로 수교를 맺는다. 그러면서 그 전에 이미 미국과 일본이 단교를 한 ‘중화민국’이라는 이름의 ‘차이니즈 대만’과 대한민국 역시 단교를 하게 된다. 그 결과,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해 그동안 적대적인 감정을 담아 불리던 ‘중공’이라는 약칭 대신에 중립성이 강한 ‘중국’이라는 약칭을 누구나 쓰기 시작하게 된다. 명시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는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국가 명에 들어 있는 ‘인민’이라는 말의 용법과 효과를 적어도 외교적인 관계에서 충분히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영어로 ‘People's Republic of China’다. 정치학적인 용어로 ‘인민’은 ‘people’임을 말해 준다. 그러니까 링컨이 1863년에 제시한 민주주의의 3원칙,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이 아니라,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으로 번역되어야 마땅하다. ‘국민’은 국가가 형성되고 인민 각자가 그 국가의 일원이기를 자의에 의해서건 타의에 의해서건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동의할 경우에만 성립한다. 그래서 예컨대 국제적으로 국가로 인정받지 못한 채, “국가와 비국가 사이에 처한 ‘아시아의 고아’ 대만” 1)의 거주민은 국민인지 아닌지를 결정하기가 쉽진 않지만, 당연히 그들은 인민인 것이다. 서경석 선생이 『디아스포라의 기행』에서 “오늘날까지 여전히 ‘조선적’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 중에는 자각적으로 북한의 국민이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본시 조선은 하나’라는 생각을 소중히 간직하려는 사람들, 재일조선인이 형성된 역사의 기록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 자발적인 난민으로서 기꺼이 불리한 지위를 택하고자 하는 사람들, 또는 기재변경을 할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 등 다양한 입장이 뒤섞여 존재한다.”라고 했을 때 2), 이들은 대한민국 국민도 아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민도 아니고, 일본국의 국민은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이들이 인민인 것만은 분명하다. 1) 백영서, 『핵심현장에서 동아시아를 다시 묻다』, 창비, 2013, 181쪽. 1) 2) 서경석, 『디아스포라의 기행, 추방당한 자의 시선』, 김혜신 옮김, 돌베개, 2008, 23쪽 지난 1992년 8월24일 베이징 댜오위타이(釣魚臺) 국빈관에서 이상옥 외무장관과 첸치천(錢其琛) 중국 외교부장이 `한중 외교관계 수립에 관한 공동성명'에 서명하고 악수하는 모습.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이처럼 ‘인민’은 ‘국민’과 다르고, 또 자발적으로 정치적인 참여의 권리와 의무를 갖는 ‘시민’과도 다르고, 당연히 군주제 하에서의 ‘백성’과도 다르다. 그런가 하면, 개개인의 특수성과 자율성이 삭제된 ‘대중’과도 다르다. 다만, 그동안 ‘people’이 한편으로 ‘민중’으로 번역되어 읽히면서 부당한 주권적 지배자들에 대한 저항적 ․ 혁명적 지배를 노렸던 점을 감안하면, ‘인민’과 ‘민중’이 일정하게 가장 가까운 개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만 볼 수도 없다. 주권적인 지배자들 역시 넓게 본 의미의 ‘인민’에 속하는바 다른 사람들과 동등한 한 사람의 인민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넓은 의미로 볼 경우, ‘인민’이라는 말이 추상화되면서 정치사회적인 함의가 약화되고, 그 활용에 있어서 한계를 드러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발휘되는 인민의 보편성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인민이 그저 ‘인간’ 또는 ‘인류’라는 일종의 생물학적인 내지는 진화론적인 종(種) 개념으로 환원되는 것도 아니며, 혈통 관계를 무시할 수 없는 민족도 아니다. 그렇다면, 인민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인민은 첫째, 그 어떤 형태의 사회정치적인 체제라 할지라도 그러한 체제를 구성하는 주체로서의 보편적인 바탕이다. 둘째, 각종 다양한 사회정치적인 체제와 그 하위 체제를 구성함으로써 주어지는 특징적인 여러 명칭들은 인민이 특정하게 규정됨으로써 나타나는 인민의 특수한 형태들이다. 셋째, 국가와 시민사회 또는 불특정한 각종 사회적 네트워크 등은 현실적으로는 인민의 삶을 제약하지만, 이념적으로 볼 때, 그것들은 인민의 삶을 널리 최대한 긍정적으로 향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넷째, 그러므로 주권은 오로지 인민의 삶을 위한 것이며, 만약 주권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인민주권이고, 이 인민주권이야말로 가장 근본적이고 절대적인 주권이다. 다섯째, 그러므로 인민의 삶은 사회역사의 전반적인 네트워크를 관통하는바, 그 내부에 온갖 특이성과 차이들이 들끓는 절대적인 위력으로서의 공통적인 문화로서 축적 ․ 계승되는 것이다. 이렇게 인민을 정의하고 보면, 국가와 국가의 주권이 문제로 등장한다.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바탕으로서의 인민의 현존과 상대적이고 특수한 국가 및 국가 주권의 현존이 어떻게 충돌하고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가의 문제가 근본적인 사안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대한민국 헌법의 제1조 ②항의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말은 인민주권의 관점으로 환원해서 보면, “대한민국의 주권은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인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그러한 인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것으로 된다. 이렇게 바꾸어서 보면, 먼저 국가가 있고 그래서 국민이 있는 것이 아니라(국가가 구성되기 전의 국민은 당연히 성립되지 않는다), 먼저 인민이 있고 그 인민이 국가를 구성함으로서 제 스스로를 국민으로 자기 규정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난다. 따라서 당연히 국가는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인민들 간의 공화(共和)에 의거해서 유지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대한민국 헌법의 제1조 ①항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선언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헌법 조항 역시 “대한민국은 대한민국을 만든 인민들이 서로의 동의와 합의에 의해 주권을 행사하는 나라이다.”라는 것으로 풀어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대한민국의 구성(헌법, constitution)은 다들 알다시피, 대한민국을 구성하고자 한 인민들에 의해 특별하게 예외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이른바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의 구성을 모델로 삼아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대의의 위기와 민주주의 형태들의 부패는 전 지구적 조건으로서, 모든 국민국가들에서 즉시 볼 수 있는 사례이며, 여러 인접한 국가들이 이루는 지역 공동체들에서 극복될 수 없는 요소이고, 전지구적 · 제국적 차원에서 폭력적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전지구적 위기는 세계의 모든 통치 형태에 영향을 미친다. 끝없는 전 지구적 전쟁상태는 ……”라는 말 3)을 들을 때 지성인이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물론 이러한 언명이나 이 언명을 인용하는 것이 이러한 왜곡된 현실을 당연하게 여기고 부정적인 방식이라 할지라도 이에 적응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 하는 비관적인 현실주의를 내세우기 위한 것은 결코 아니다. ‘전 지구적’ 운운 하는 경우, 예사로 그 어떤 대안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기가 쉬운 건 사실이다. 하지만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인민의 존재를 염두에 둘 경우, 적어도 사회정치적인 대안을 모색한다면, 그와 같은 거시적인 보편적 구도를 염두에 두는 것은 필수적이다. 3) 안토니오 네그리 · 마이클 하트, 『다중, 「제국」이 지배하는 시대의 전쟁과 민주주의』, 조정환 · 정남현 · 서창현 옮김, 세종서적, 2008, 418쪽. 중요한 것은 그런 가운데 인민 각자가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또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또는 한 사람의 지역민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반(反)인민적인 일이 국가 또는 국가 주권에 의해, 또는 국가 간 또는 국가 간 주권관계에 의해 자행되는가를 유심히 살펴 실천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간첩 조작을 위한 외교 문건의 위조 사건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 국정원이 마치 무소불위의 초헌법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군주제적인 괴물처럼 활동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국민에 의한 공권력을 대표하는 검찰총장마저 그 개인의 인민적인 권리인 사생활을 ‘조작하여’(아직 정확하게 결론이 난 것은 아니다) 이른바 ‘찍어내기’를 한 것은 이번 사건에 비하면 약과라고 할 수 있다. 국가의 주권을 지배적으로 점유하고 있는 정치적인 개인 내지는 소수 집단이 마음만 먹으면 그 자의에 의해,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의 현존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인민으로서의 현존마저 폭력적으로 아예 짓밟아 처참하게 파괴시킬 수 있다는 것이 백일하에 드러난 것이다. 국가 간의 문제이기도 하기에 더욱 심중하게 판단하느라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사건이 여실이 폭로되었는데도 최고의 통치자인 현직 대통령이 장기간 묵언으로 일관하다가 겨우 원칙적이고 일반적인 이야기만을 한 채 정작 해당 기관의 최고 책임자를 전혀 거론조차 하지 않은 것은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민주공화국의 헌법 정신을 정면으로 위배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반드시 총포로 무장하고서 대대적인 격돌을 해야만 전쟁인 것은 아니다. 개인적이거나 소수 집단이 그들의 자의에 의해, 진정 국가를 구성한 주체에 대해 그 주체로서의 권리를 철저히 유린하는 행위야말로 일종의 전쟁을 수행하는 것, 말하자면 일종의 내전을 일으키는 것이다. 임시로 국가의 주권을 담당해서 지배하는 자들이 자신들에게 맡겨진 권한을 권력으로 오인하고, 그럼으로써 국가권력을 사유화해서 진정 본래의 국가를 구성하는 주체인 한 사람 한 사람이 갖는 주권적인 위력을 파괴하고자 하는 것을 ‘반란’이라는 말 외에 어떤 용어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인가. 인민주권에 바탕을 둔 국민주권, 국민주권에 바탕을 둔 헌법, 헌법에 바탕을 둔 법률, 바로 그 법률에 따라 한 치 빈틈도 없이 철저히 처벌해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국가가 있기 전에 인민이 있고, 인민의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삶의 현존이야말로 국가의 존립 목적임을 분명히 일깨워야 할 것이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314 | 추천: 0
위문숙/ 장애인인권센터 대표 한국에 장애인 복지가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81년 세계장애인의 해를 맞아 전두환 정권이 만들어낸 심신장애자복지법과 4월 20일을 장애인의 날로 제정한 것이었습니다. 80년대 국제 사회에서는 장애인의 인권회복이 장애인과 관련한 문제의 핵심임을 알려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한국의 정권은 이런 인권적 사고로 심신장애자복지법을 제정한 것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국제사회에 대해 불온한 정권의 당위성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었고 잠재적 위험 존재인 장애인을 통제하기 위한 시작이었습니다. 복지의 목적은 각 개인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사회의 구조적 특성 등으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개인이 누려야할 인간다운 삶을 회복시키기 위한 노력이며 실천일 것입니다. 그러나 인권이 배제된 한국의 장애인복지는 시설중심의 장애인복지라는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장애인 복지의 서비스가 장애인 개인에게 당도해 인간적인 삶의 회복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시설, 복지관, 재활기관 등을 통해 전달되게끔 되어있는 것입니다. 말이 좋아 복지전달체계이지 장애인에게 자신의 삶의 통제권은 절대 내주지 않겠다는 시스템입니다. 장애인 개개인이 가진 신체적 부실함을 가능하면 정상적으로 돌리는 것이 장애인복지의 최우선 목표라고 생각하는 재활론자와 생산성이 떨어지는 장애인들은 가급적 눈에 띄지 않게 분리하는 것이 사회적 비용이 덜 드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정부의 입장이 잘 맞아 떨어진 것입니다. 80년대 이후 나타난 한국의 장애인운동은 여러 번의 격동기를 겪었습니다. 80년대 사회변혁의 흐름 속에 나타난 청년장애인들은 스스로를 조직하였고 심신장애자복지법을 장애인복지법으로 바꾸고 장애인고용촉진법을 만들어냈습니다. 장애인도 인간이라면 누려야하는 권리의 주체임을 선언하고, 2001년 사회기반시설의 미비로 지하철역사에서 장애인이 추락한 사건을 계기로 이동권투쟁은 사회적공감대를 이루어내며 기반시설의 변화를 이끌어냈습니다. 중증장애인도 시설과 집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자기결정권과 선택권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장애인자립생활운동은 활동보조서비스지원제도를 만들어 예전과는 다른 사회생활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동정적 복지서비스와 시설권력자들 사이에서 우리 장애인운동은 많은 것을 이루어 냈습니다. 장애인을 폭행하고 장애수당 일부를 빼내 직원 해외여행비로 사용했다는 의혹을 받는 서울시 한 장애인시설 출입문이 굳게 닫혀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그러나 2014년 현재, 장애인의 삶은 행복한가요? 엊그제도 시설직원의 폭행으로 다리가 부러지고 자신의 국가보조금을 시설에서 횡령당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다른 수용시설처럼 외딴 곳에 있는 시설이 아닙니다. 서울시내에 있는 시설입니다. 염전과 양식장에서 가출·실종인 100여명을 발견하고 이들에게 감금·폭행·임금 체불 등의 불법행위를 저지른 업주들이 조사 중입니다. 100여 명 중 지적장애인등 장애인이 24명입니다. 이와 같은 일들은 잘못된 생각을 가진 몇몇에 의해 벌어진 일들이 아닙니다. 장애인들은 여전히 일상생활에서의 인권유린에 노출되어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전동휠체어를 타고 산책 중인 장애인이 지역주민으로부터 이유 없는 폭언과 폭행을 당한 지인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음식점에 들어갈 때 자리를 많이 차지한다는 이유로, 다른 손님들이 불편해한다는 이유로 빨리 음식점을 나가주길 바라는 사장의 푸념을 듣고 있습니다. 지적장애인 동생이 회사 상사로부터 상습적인 구타를 당하고 있는데, 회사를 상대로 하면 해고당할 수 있으니 가해자만 처벌할 수 없냐는 식구들의 상담전화를 받고 있습니다. 제대로 된 치료가 보장된 것도 아니면서 보호의무자 2인의 동의와 정신과 전문의 1인의 의견만 있으면 정신장애인을 6개월간 강제 입원(감금)시킬 수 있는 정신보건법 제24조에 대한 위헌 소송은 7번째로 합헌 판결을 받았습니다. 2011년 실시된 전국시설인권실태조사 중 서울에 있는 한 시설에 대한 보고서는 이렇습니다. “폭행의 흔적은 없다. 음식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시설생활자들은 매사에 의욕이 없고 무기력해 보인다” 무언가에 의존하게 되는 존재는 무기력해집니다. 나의 의식주를 책임져주고 있는 시설장에 대한, 가족에 대한, 나의 일자리를 쥐고 있는 사장에 대한, 내가 음식을 사 먹고 있는 이 음식점에서, 그리고 나와 한 동네에 사는 이름 모를 지역주민에 대한, 얼마 되지 않는 복지서비스에서 탈락될까, 버림받을까 두려워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장애인들의 인권은 지금 누구도 지켜주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의 장애인운동은 많은 것을 이루어냈습니다. 인권으로의 전환, 당사자의 참여, 지역에서의 자립생활 보장. 그러나 여전히 장애인시설의 입소자와 지원예산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일상생활에서의 혐오와 동정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복지서비스를 중계하는 기관들이 새로운 권력자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장애인들이 손쉽게 인권유린과 범죄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보호와 온정’의 정서가 ‘인권’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장애인의 인권은 보호하지 않고 장애인을 보호한다는 미명으로 시설과 복지서비스에 의존하는 존재로 전락시켰기 때문입니다. 장애인에게 여전히 어쩌면 더 절실히 인권이 소중한 이유입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298 | 추천: 0
홍미정/ 단국대 중동학과 조교수 인도 출신의 아마르티아 센은 「정체성과 폭력」에서 “세계의 무수한 갈등과 만행은 선택이 불가능한 독보적인 정체성이라는 환영을 통해 유지된다. 증오심을 구축하는 기술은 다른 관계들을 압도하는 호전적인 정체성의 형태를 띤다. 정체성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그것도 닥치는 대로 죽일 수 있다.”고 경고하였다. 이러한 아마르티아 센의 주장은 현재 이스라엘을 포함한 중동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을 설명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팔레스타인 협상자들에게 “이스라엘을 유대국가”로 인정하라고 윽박지르고 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정책은 팔레스타인 난민 귀환권, 이스라엘 점령지, 서안과 가자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인들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도 폭력적인 추방과 배제 위협으로 작용한다. 지난달 26일자 팔레스타인 신문 알 쿠드스(Al-Quds)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협상자들과의 회동에서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은 이스라엘의 입장을 완전히 채택하면서,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이스라엘을 유대국가”로 인정하라고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스라엘을 유대국가”로 인정하라는 위협에 대답하여, 팔레스타인 알 쿠드스 대학(Al-Quds University)교수는 페이스 북에서 “전략적으로, 팔레스타인 무슬림들과 기독교인들이 집단적으로 유대교로 개종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특정한 정체성 규정이 폭력과 직결된다.”라는 아마르티아 센의 주장을 현실적으로 입증한다.   지난 2월 19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왼쪽)이 마흐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과 회담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지난 달 25일 이스라엘 신문 하레츠(Haaretz)는 이스라엘 의회가 무슬림들과 기독교 아랍인들을 구별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으며, 이것은 기독교인들을 이스라엘 사회 안으로 포섭하는 반면, 무슬림들을 배제하기 위한 조치라고 보도하였다. 비판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것은 종교 정체성을 활용하여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을 분할 통치하기 위한 이스라엘 전략의 일환이다. 아랍어를 사용하고, 팔레스타인 전통문화를 공유하는 팔레스타인 아랍인들 중에는 유대교도, 기독교도, 무슬림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스라엘 의회는 종교 정체성을 부각시키면서, 팔레스타인 유대교도와 기독교도들을 탈 아랍화함으로써 무슬림들과 분리시키려는 ‘분할통치 정책’을 구현하고 있다. 이러한 분할통치 정책은 ‘유대인의 민족고향 회복'이라는 기치를 내세운 시온주의의 몰역사적인 발상에 토대를 두고 있다. 7세기 이전에는 이슬람교가 존재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팔레스타인 무슬림들의 조상은 다수가 기독교인이었고, 유대교도였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인들이 개종을 통해서 형성된 것처럼, 오늘날 팔레스타인 무슬림들뿐만 아니라 유대교도와 기독교도들도 개종을 통해서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시온주의가 내세운 ‘유대인 민족고향 회복'이라는 주장은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몰역사적인 발상이다. 이렇게 몰역사적인 발상에 토대를 둔 종교 정체성 조작은 20세기 초 영국제국주의 중동 분할지배정책의 일환이었으며, 오늘날 시온주의자 유대인들이 헤게모니를 장악한 이스라엘 국가를 건설하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시온주의자란 ‘예루살렘(시온)을 포함하는 그 주변 지역에 유대인 국가 이스라엘 건설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정의된다. 영국의 분할 통치 전략에는 유대인 시온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아랍 무슬림 시온주의자들이 협력하여 ‘팔레스타인 토착주민들의 자결권을 희생’시키면서 ‘유대 시온주의 국가 건설’에 동의하였다. 그 보답으로 무슬림 시온주의자들 역시 영국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아 하심 왕국들(요르단, 이라크)과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을 건설하였다. 1919년 당시 영국의 후원을 받던 메카 통치자(하심가문)의 아들이었던 파이잘 후세인 하시미(1921년– 1933년, 이라크 왕)와 시온주의기구 의장이며, 1948년까지 영국 시민권자였던 하임 와이즈만(1949–1952, 이스라엘 초대대통령) 사이에서 ‘파이잘-와이즈만 협정(1919년 1월 3일)’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의 산파 역할을 하고 통역을 한 인물은 영국군 장교인 T.E 로렌스(일명 아라비아 로렌스는 하심가문을 통솔하여 오스만 제국을 붕괴시키는 아랍반란 주도)였다. 이 협정 서문은 아랍인들과 유대 민족 사이에서 고대부터 내려온 인종적 유대를 밝히고 있다(독보적인 유대민족 정체성이라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코메디다. 아랍인들 중에는 유대인, 기독교인, 무슬림들이 있다. 유대인들도 기독교인이나 무슬림들과 마찬가지로 인종적으로 너무나 다양하다). 이 협정에서 파이잘 후세인은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 민족 고향’을 건설한다는 1917년의 밸푸어 선언을 지지하고, 팔레스타인으로 대규모의 유대 이민과 유대 정착촌 건설에 협력하기로 약속하였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세계 시온주의기구는 파이잘이 열망하는 아랍국가 건설을 후원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 협정을 통하여 창출된 하심가-시온주의자 동맹은 오스만 제국의 아라비아 반도 영역을 시온주의 국가와 아랍국가로 분할 해체시키기 위한 영국의 전략이었다. 이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서 영국은 메카의 통치자 하심가문에게 대 아랍 국가를 건설시켜주겠다는 안을 제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2011년 11월 이란의 Press TV 보도에 따르면, 1920년대 초 사우디아라비아왕국 창설자 압둘 아지즈 이븐사우드는 영국의 메소포타미아 원정 대장 페리 콕스에게 다음과 같은 약속을 하였다. “나는 술탄 압둘 아지즈 이븐사우드다. 나는 가엾은 유대인들이나 비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을 넘겨주는데 반대하지 않는다고 영국 대표 페리 콕스 경에게 무수히 밝혔다. 나는 결코 영국의 명령을 어기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현재 두 이슬람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 수호자를 자처하는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의 역사다. 위의 두 가지 역사적인 사건의 예에서 주목할 것은 이스라엘 건국으로 비롯된 팔레스타인 문제를 주도한 주체는 영국 시온주의자들과 영국인들을 의지해서 국가를 세운 아랍 무슬림 통치자들, 하심가(현 요르단)와 사우드가라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14년 현재도 이 통치자들은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에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사안에 따라 이스라엘과 연대한다. 사실, 지난 20여 년 동안 두 국가 해결, ‘이스라엘국가와 팔레스타인 국가’안을 놓고, 이스라엘과 협상을 추진하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통치자들도 이스라엘 점령정책을 추인하는 정도였다. 이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종교 혹은 종족 정체성으로 편 가르기보다는 보편적인 인권에 토대를 두고, 모든 주민이 평등권을 누리는 국가-사회 건설을 목표로 새로운 해결 방안을 세울 필요가 있다. 현재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새로운 해결 방안을 들고 나오는 탁월한 정치세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319 | 추천: 1
신하영옥/ 광명시민인권센터장 지난 일주일간 태국을 다녀왔다. 도시빈민지역을 방문하고, 스스로 주거문제를 해결해나간 조직가들과 주민들을 만나 뵙고 왔다. 주로 CO(Community Organizer)라 불리는 조직가들은 PO(People Organization)을 조직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한다. 한국의 NGO와는 좀 다른 의미이고, 직접 이슈파이팅을 하기보다는 주민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조직하는 일을 중심으로 한다. 처음 그곳을 방문한다고 했을 때부터 그들은 왜 우리가 그곳을 방문하려 하는지, 무엇을 보고자하며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 왜 조직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 세세히 질문하였었다. 어쩌면 무수한 조직이나 모임이 그곳을 방문하지만, 그 이후 뭔가 달라졌다기 보다는 그저 한번 방문하고 말아버리는, 이후에 어떤 활동과도 연결되지 않는 것에 대한 우려가 느껴졌다. 사실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방문하였었다. 그들 조직가 및 주민들과 직접 대면하기 전까지는. 그리고 10년 전 필리핀에서 비슷한 주민조직과 조직가들의 활동을 접해본 터였는지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직접 주민들과 조직가들을 만나고부터는 마음이 무거웠다. 진정으로 이들을 통해 나는 무엇을 보고자 왔으며 이 경험이 나의 삶과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 에 대한 질문이 떠나지 않았다. 삶, 실천과 만나지 못하는 경험도 경험이긴 하지만, 이들의 귀중한 시간을 얻어내고, 그들로부터 환대를 받고, 짧은 순간의 만남이었음에도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그분들을 보면서, 한편 감사하지만 한편 죄스런 마음이 든 것도 사실이다. 너무나 가벼운 마음으로 쉬운 마음으로 갔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정직처분으로 강제휴가 중에 있는데, 처분이 결정되기까지의 과정에서 사람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새기게 된 듯하다. 까칠해졌고 남의 말이 귀에 들리지 않고, 남의 말을 들어주고 있기가 예전에 비해 귀찮다. 한 두 달여간의 짧은 순간에도 나는 사람에게 상처받은 짐승마냥 분노를 표출할 곳을 찾거나 나 자신에게로 그 분노를 돌려 자기 파괴적인 행위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10년 이상을 그 지겨운 주거권의 문제로 정부와 지주와 싸우는 그분들의 얼굴에서 나는 평화로움을 보았다. 그리고 행복하냐는 질문에 모두가 한 마음으로 희망이 있어 행복하다는 답변을 들으면서, 운동이 투쟁이 행복할 수도 있음에 경탄했다. 진정으로 그 분들은 행복해보였다. 그리고 그 분들의 개인적인 희망과 꿈은 공동체와 무관하지 않았고, 공동체의 발전과 그 공동체 구성원들의 안전과 행복이 개인들의 비전과 일치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어떻게 그렇게 행복하게, 그리고 서로 도우며 함께 마을의 비전을 만들고 실현할 수 있는지, 난 내가 얼마나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사고와 삶을 살고 있는지 그 순간에 알 수 있었다. 나는 내가 얼마나 나약하고 목적 없이 살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공동체운운하면서도, 나는 나의 개인적 미래를 걱정하고 있었고, 함께 운운하며 나는 ‘따로’를 꿈꾸어왔다. “따로 또 같이”에서 ‘같이’ 보다는 ‘따로’에 더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진 출처 - 필자 노숙인 쉼터에서, 그리고 방문한 도시빈민공동체에서 그들은 공동의 농작물을 생산하고 있었고, 점차로 공동의 생산물을 늘려갈 계획 중에 있다. 그리고 그 주민들 속에는 공동체마다 CO들이 자리하고 있다. 현지 활동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주장한다. “Learn by Doing", "Creating Culture of helping each other", "Making Alternative plane which is getting benefit for everyone" 더불어 이런 말도 덧붙였다. 한국은 주민조직가 트레이너 교육을 많이 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 사람들이 주민들 속으로 들어가 운동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고. 실제로 자기들은 현지 주민들 속에서 운동을 하면서 배운다고 한다. 트레이닝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 일단 해 보면서 터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동감이다. 배움이 실천과 연결되지 않으면 몇 년 안에 사장되어버린다. 그리고 배척이 아닌 서로서로 도와주는 문화를 만들고,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한다면, 투쟁의 대상이 누가되었든 그것에 동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투쟁하면서 대안보다는 반대를 하지는 않았는가 돌아본다. 그들이 행복한 것은 서로서로의 도움과 신뢰와 대안의 비전덕분에 가능하다. 75세의 주민대표인 할머니도 여전히 꿈을 꾸고 있다. 더 나은 공동체 주거대책과 그 곳 아이들의 삶의 질의 발전이다. 사진 출처 - 필자 광명지역도 재개발과 맞물려 주거권의 문제가 심한 곳들이 있다. 올 해 주요사업으로 그곳의 주민조직화를 위한 주민조직가훈련을 세워놓았다. 그러나 그 전에 중요한 것은 그 곳 주민들로부터의 신뢰를 얻는 것과 주민들을 만나는 것이다. 새롭게 각오를 다질 필요가 있다. 복귀 후 재계약의 심사가 있긴 하지만, 희망을 버리지 않을 생각이다. 우리라고 우리 주민들 스스로 자신의 주거관련 문제를 해결해나가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 한 번 해보는 거다. 그 속에서 희망을 재발견하면서, 사람이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지, 공동체가 어떻게 가능한지 한 번 실험해보는 것이다. 이번에 태국의 주민들로부터 받은 환대와 사랑이 우리의 가슴을 울린 것처럼, 사람에 대한 감동이 만들어지는 그런 지역 활동을 해보고 싶다. 사람이 싫어지고 사람들로부터 상처받고 분노하는 활동이 아니라, 사람들과 해맑게 웃고 행복할 수 있는 운동, 활동의 가능성을 태국에서 보았다. 나아가 헝가리 노숙인들을 격리하려는 정책에 맞서 헝가리 대사관앞에서 그 정책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고 끝내 대사관 직원들을 만나 정책을 전달하고 만 그 실천력을 보면서, 서로 돕는 문화가 국가를 넘어 관철되고 있음을 보면서 말이 아닌 실천으로서의 연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은 그들이 힘들 때마다 다른 공동체에서 그리고 조직가들이 그들에게 협조했던 기억을 갖고 있다. 때문에 연대와 협조가 얼마나 서로에게 힘이 되는 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국제연대의 실천이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연대를 실천하고 있는가 돌아봐야 할 때다. 밀양이, 용산이, 강정이, 쌍용차가 연대하였듯이 운동의 분야와 주제를 넘는 광범위한 연대가 필요하다. 자본주의가 파편화된 개인으로 하여금 개인적으로 자본축적을 강조하고 모든 사회적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기는 전략이라는 점에서도 우리는 연대가 필요하다. 사회적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는 자본주의의 음모를 밝히기 위해서도 그렇다. 미래의 불안이 우리를 집어삼키지 못하게 지키는 것도 결국 연대와 나눔이다. 그걸 확인해준 것이 이번 태국방문이었다. 실천하면서 배우라는 말도 잊지 못 할 것이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299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