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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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강대중(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윤동호(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이동우(변호사),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장은주(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신하영옥/ 여성활동가 기억이 뇌의 어딘가 저장되어 필요할 때 끄집어 쓸 수 있다는 것이 의학적 정설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기억이 뇌라는 저장매체에 응고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왜 같은 경험을 한 집단에서도 어떤 이는 사건의 이러한 면을, 다른 어떤 이는 사건의 또 다른 면을 기억하게 되는 걸까? 아마도 이것은 사건이나 경험이 각각의 사람이 처해있는 특수한 맥락과 상황 속에서 다르게 해석되어지거나, 혹은 개인적 차원에서 재구성되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만약 이렇게 기억이 구성 내지 재구성되어지는 것이라면, 집단으로서의 기억은 그 자체로 권력쟁투의 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기억이 불리한 집단은 그 기억을 통째로 지우거나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각색하려 할 것이다. 반대로 그 기억이 진실로 인정받고 역사 속에 존속해야 한다고 생각되는 집단은 그 기억을 보존하고 나아가 각인되길 바랄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인간은 자신(들)의 입장과 사회적 위치에 따라 기억을 둘러싼 보존이냐 물타기냐를 두고 투쟁이 벌어지게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 역사를 둘러싼 해석 및 재해석은 이러한 기억을 둘러싼 투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식민지근대화론 역시 마찬가지이고, 박정희 시절에 대한 평가와 해석도 결국 경험 그대로의 날 것이 아니라 해석과 분석이 덧칠해진 과거의 기억에 대한 투쟁으로 볼 수 있다. 현재에 와서는 대표적으로 세월호 사건이 있다. ‘대형교통사고...’, ‘항공사고와의 비교발언’, ‘보상금정치’, ‘이제는 다시 생활로 돌아갈 때...’라는 세월호사건을 둘러싼 담론들은 대표적으로 ‘세월호’의 기억을 지우려고 시도하거나 각색을 통해 물을 흐리고 싶은 대표적인 현상들이다. 그래서 ‘집합적 기억’을 둘러싼 투쟁은 역사적 사실을 둘러싼 투쟁이기도 하고, 진실을 둘러싼 투쟁이기도 하다. 기억이란 오감을 통한 경험에서 출발해서 감정을 거쳐 이성의 단계라는 과정을 통해 걸러지고 정화되어 미래에 대한 대안이 되기도 하지만, 감정이나 오감의 단계에 머물러 버리기도 한다. 미래의 대안으로서의 기억은 추억으로 기억될 수 있는 것들이다. 그것은 삶의 힘과 활력, 성찰의 토대로 작동할 수 있다. 그러나 감정 혹은 나아가 오감의 단계에 머물러 있게 되는 기억은 가볍게 잊혀 지거나, 증폭된 감정으로 잔류할 수 있다. 그것이 희극이 아니라 비극일 경우 증폭의 폭은 더욱 커질 수 있을 것이고 이는 희망이거나 대안이거나 성찰이기보다 슬픔 그 자체, 상처로 남게 된다. 상처 입은 개인의 삶이 개인과 그를 둘러싼 이들까지 왜곡되게 만드는 것을 우리는 종종 보게 된다. 상처가 분노로, 분노가 폭력으로 돌연변이 하는 것도 보게 된다. 현재 발생된 군대폭력은 그 단적인 예일 것이다. 억압당한 며느리 시절을 보낸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그 억압을 고스란히 물려주는 것도 마찬가지다. 상처는 제대로 치료되기 전에 봉합되면 안 된다.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은 감정을 충분히 나누고 공감하라는 말일 것이다. 누구와? 이웃과, 공동체와 나아가 사회와. 개인의 경험도 이렇듯 주변과의 충분한 공감과 교감을 통해 확장할 것은 확장하고 축소할 것은 축소하라는 지혜가 있는데, 하물며 집단적 경험이야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는 지금 어떠한가? 여기저기서 터지고 있는 대형 안전사고는 어느 순간엔가 ‘피해자 책임론’으로 화살이 되어 날아오고 있다. 책임의 주체를 확장해도, 우리의 안전을 책임지라 지불한 세금으로 존재하는 집단인 정부, 그를 감시할 국회나 지방의회 등에 대한 책임은 직접적이 아니라고 비껴내고 있다. 그리하여 대통령이하 여당대표 앞에서 바닥에 무릎 꿇은 피해자 가족의 호소-이미 벌어진 일을 책임지라는 것도 아니고 향후 발생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달라는-를 버젓이 자가용 안에 앉아서 일별하고 외면해버리는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법과 질서는 진실과 사실을 규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건만, 진실과 사실을 호도하고 덮기 위해 존재하게 되었다. 기억을 진단하고 미래를 처방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그러므로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이제 기억을 기억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로 넘어온 듯하다. 그것은 개인의 상처와 경험으로부터 이 집단적 상처에 공감하고 이를 나누고 진단함으로써 처방전을 내오고자 하는 권력이 없는 개인들, 시민들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들 또한 기억의 왜곡과 삭제를 주장하는 편으로 기울고 있다. 어쩌면 당연하다. 권력은 많은 자원들을 보유하고 또한 이를 기억과의 투쟁에 동원함으로써 막대한 힘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우리는 맞설 수 있을 것인가? 기억을 재생할 수 있고 유지할 수 있는 기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집단적 의례나 제도, 상징이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다시 나의 모든 프로필을 노란리본으로 다시 바꾼다. 상징으로서. 그리고 인천의 모 여성단체는 개인의 이름으로 ‘세월호’를 ‘잊지 않겠다’는 노란리본 현수막을 거리에 달았다. 상징이자 집단적인 의례행위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떤 이는 ‘잊지 않는 모임’을 지인들과 만들었다고 한다. 모임과정이 의례의 과정이 된다. 집회에 가면 우리는 그 집회의 성격에 맞는 역사적 사실과 그 역사적 사실을 살아간 분들을 위해 묵념의 시간을 갖는다. 이 역시도 기억을 위한 의례의 과정이자 그 자체가 하나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아픈 과거는 되도록 잊어버리자고 말하는 것이 일반적인 흐름이자, 지나간 것은 버리고 새것을 탐닉하는 것이 미덕이 된 시대에 “잊지 않기!”위해 싸워야 하는 현실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잊어야 할 것과 잊지 말아야 할 것. 그것은 국가가 지정해줘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과 그 개인들의 집단의 선택의 문제이다. 우리는 나의 기억마저 조종당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내 기억을 기억하게 하라! 현재 우리가 당면한 과제이자 투쟁의 방향이기도 하다. 각자 선 자리에서 기억을 위해 투쟁할 방안을 마련하고, 기억이 왜곡되지 않도록 무엇을 실천할 수 있을지 모색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활동을 통해 자신을 정립, 재정립해가는 존재이다. 생각도 활동이고 그 생각을 실천하는 것도 활동이라고 한다면, 슬픔과 분노와 비난을 넘어 기억할 동지들을 확장할 방안부터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2017-08-07 | hrights | 조회: 301 | 추천: 0
박현도/ 종교학자 시리아와 이라크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는 무슬림 무장 단체인 소위 자칭 ‘이슬람국가’가 자신들이 이교도라고 정의내린 타종교인들을 노예로 삼는 것을 이슬람법, 즉 샤리아에 부합한 바른 행동이라고 정당화하고 있다. 공식 온라인 잡지 ‘다비끄(Dabiq)’ 4호에서 이들은 ‘그 시간이 오기 전 노예제의 부활’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꾸란의 가르침에 따라 이교도인 야지디인을 노예로 간주하여 매매하였고, 여성은 첩으로 삼아 전사들에게 분배했다고 밝혔다. 영국의 인권단체 시리아인권관측소에 따르면 ‘이슬람국가’ 전사들이 인신매매한 야지디인 여성이 무려 300명에 육박한다. 이가 갈리고 피가 솟구치는 천인공노할 범죄다. 지난 9월 19일 전 세계 무슬림 지도층 지식인 126인은 이슬람의 경전 꾸란과 전통적인 해석에 근거하여 ‘이슬람국가’의 행위가 왜 이슬람적이 아닌지 구구절절 날카롭게 지적하며 ‘이슬람국가’ 괴수 알-바그다디에게 A4용지로 무려 15장에 이르는 장문의 공개서한을 보냈다. 이 서한에서 무슬림 지식인들은 자격을 갖춘 법학자가 법해석을 하여 판결문을 내놓아야하고, 꾸란과 예언자의 전승을 고려하지 않고 자의적으로 꾸란을 해석해서는 안 되며, 무장전사들이 죽이고 노예로 삼은 야지디인은 이교도가 아니라고 밝혔다. 또 노예제는 모두의 동의하에 폐지된 것으로 재도입을 금지하는 것이 전 세계 무슬림들의 합의사항임을 강조하였다. 한마디로 자칭 ‘이슬람국가’ 무장전사들은 진정한 무슬림이 아니라 이슬람을 빙자해서 정치적 목적을 이루려는 과격분자로, 이슬람도, 국가도 아닌 ‘이슬람국가’의 살인마임을 명백히 한 것이다. 비무슬림인 내가 굳이 ‘이슬람국가’가 왜 비정상적인 종교 집단임을 구구절절 밝힐 필요조차 없이 공개서한은 조목조목 이들의 야만성, 비인간성을 낱낱이 폭로하고 있다. 금수와 같은 이들은 꾸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고 있다. 역사적 문맥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문자적 해석에 몰입하고 있는 것이다. 컨텍스트(context)는 완전히 도외시하고 숭배하듯 텍스트(text)만 떠받드니 인간이 할 수 없는 만행을 저리도 쉽게 저지르는 것이다. 불가의 지혜를 빌자면 달을 보라고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켰더니 보라는 달은 안 보고 손가락만 보느라 정신을 놓은 것이다. 사진 출처 - 노컷뉴스 경전에 적힌 말씀이 발화된 상황을 일체 고려하지 않은 채, 종교인들이 문자 그대로 기록된 말씀 그대로 지키면서 살아왔다면 아마도 오늘날 인류는 멸종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 성서, 특히 구약성서라고 부르는 히브리성서만 보더라도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을 죽이라는 구절이 얼마나 많은가! 야훼께서 나에게 이르셨다. “그를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그와 그의 온 백성과 그의 땅을 네 손에 부쳤다. 헤스본에 사는 아모리 왕 시혼을 해치웠듯이 그도 해치워라.” (신명기 3:3)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에게 넘겨주는 민족을 전멸시켜야 한다. 그들을 가엾게 보지 말고 그들의 신을 섬기지 마라. 그것이 너희에게 올가미가 되리라. (신명기 7:16) 지금 그리스도교인들은 그 누구도 위에 인용한 성서 말씀을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오랫동안 다듬어 온 역사해석의 힘이다. 우리는 이를 두고 계몽된 신앙이라고 부른다. 잔인의 극치를 달리는 가르침을 그대로 따랐다면 오늘날 유럽인이 과연 제대로 남아있을까? 마찬가지로 꾸란에도 역시 불신자에 대한 공격을 승인하는 구절이 있다. 그러나 꾸란을 제대로 읽는 사람들은 말씀의 역사적 문맥을 제대로 짚어 해석하였고, 그 결과 오늘날 무슬림 문화권에 이슬람 외에도 다른 신앙인들이 존속할 수 있는 것이다. 말씀이 나온 문맥을 이해하는 힘이 왜 중요한지, 손가락보다 달이 왜 중요한지, 무슬림 지식인들이 자의적인 꾸란 해석을 하지 말라고 ‘이슬람국가’ 전사들에게 왜 가르쳤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계몽된 신앙! 미치광이 ‘이슬람국가’ 전사들의 믿음과는 달리 이슬람교의 경전 꾸란은 종교간 대화를 가르친다. “사람들이여, 너희를 남자와 여자, 민족과 부족으로 만들었나니, 서로 서로를 알도록 하라.”(49:13) 서로가 서로를 알려면 대화와 친교 외에 별다른 방법이 없다. 나와 신앙이 다른 이교도라고 무조건 죽이고 보는 극단주의자의 잔악함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꾸란은 신이 사람들 모두에게 각기 다른 삶의 방식을 가르쳐주었다고 가르치면서 이렇게 말한다. 파-스타비꿀 카이라트! (5:48 바른 일을 하도록 서로서로 노력하라!) 전 세계 깨어 있는 무슬림들이 이슬람도 아니고 국가도 아니라고 한 자칭 ‘이슬람국가’ 살인마들이여, 보편적 인권의 이름으로, 진정한 무슬림들이 보여주는 관용의 이름으로, 다채로운 삶과 선행에 대해 가르치는 꾸란 구절을 들려주니 총을 들기 전에 곱씹어보라. 신이 주신 징표 중 하나는 천지창조와 다양한 언어와 색. 보라, 그 속에 배운 이들을 위한 가르침이 담겨 있으니. (30:22) 파-스타비꿀 카이라트! (5:48 바른 일을 하도록 서로서로 노력하라!)
2017-08-07 | hrights | 조회: 342 | 추천: 0
정보배/ 출판 기획편집자 “하지 말란 말이야!” “저리 가!” “저리 치워!” 딸아이의 목소리가 한껏 고조된다. 근래 부쩍 엄마 아빠에게 소리를 지르는 일이 많아졌다. 정확하진 않지만 두어 달 전부터 그런 것 같다. 얘가 어린이집에서 소리 지르는 것만 배워왔나. 일부러 목소리가 갈라질 때까지 악을 쓰면서 소리를 지른다. 가만 생각해 보니 어린이집에서 배워온 것보다는 엄마에게 들은 소리를 다시 되돌려주고 있는 것 같다. 엄마가 자신에게 화내고 혼낼 때, 억울하고 무서웠던 감정을 고스란히 내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1시간. 밤에 같이 누워서 잠들 때까지 아이를 토닥거리며 포근한 엄마 노릇을 해낼 수 있는 최대의 시간. 1시간을 넘기면 토닥거리느라 아픈 손목과 옆으로 어정쩡하게 누워 있는 불편한 자세에 속이 부글거리고 화가 난다. 아이는 잠이 잘 들지 않는지 계속 딴소리다. “엄마, 배 아파.” “엄마, 물마시고 싶어.” “엄마, 여기가 간지러워” 등등. 이럴 때 나는 “네가 자지 않으니까 엄마가 너무 힘들다”고 애를 협박하면서 네가 잘못해서 그렇다는 식으로 아이가 죄책감을 느끼게 한다. 아이는 집에서 돌봐주시는 할머니와 식사를 할 때는 무난히 밥을 먹는다. 휴일이 돼 엄마와 같이 밥을 먹을 때는 몇 배는 더 엄마를 힘들게 한다. 잘 먹지도 않고 (내가 볼 때)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며 밥상머리를 정신없이 만든다. 물론 할머니가 엄마보다 몇 배 아이를 잘 구슬리기도 한다. 돼지꼬리만큼 짧은 나의 인내심은 금방 바닥을 드러낸다. 한두 번 구슬려도 밥을 먹지 않으면 즉시 불같이 화를 내버린다. 밥을 먹지 않을 거면 굶으라며 거칠게 식판을 치우면서 소리를 질러댄다. 나는 왜 아이가 징징거리면서 터무니없는 생떼를 쓰거나 요구를 하면 화가 나는 것인가. 아이는 바빠서 자신과 시간을 잘 보내지 못한 엄마에게 어리광을 피우고 있다고 짐작된다(40개월쯤 되는 아이들이 보이는 평범한 행동일 수도 있지만). 그럼 난 왜 이렇게 아이의 어리광을 받아주지 못하는 걸까. 외동인 아이가 어리광쟁이가 되지 않도록 엄하게 키우려고 하다 보니 그렇다기엔 아이를 너무 받아주지도 견디지도 못하는 것 같다. 그러다 문득, 엄마가 어린 나의 어리광을 받아주지 않았던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1남 5녀 중 막내인 내가 기억하는 어릴 때의 엄마는 ‘엄격한 엄마’이다. 어리광을 받아줘야 할 때는 마음껏 품어줘야 엄마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충족감을 가질 텐데, 내가 정한 시간과 규칙대로 애가 따라오지 않는다고 다그치기만 하니 아이의 욕구불만은 커지고 스트레스는 더 심해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진 출처 -맘&앙팡 안다고 행동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작년 봄 재취업을 하면서 아이에게 버럭 화를 내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그건 단지 직장에 나가서 아이와 함께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하기 때문은 아니다. 나의 화는 너무나 갑작스럽고 폭력적이라는 걸 스스로 깨달았기 때문이고 주변에서 가장 약한 존재인 아이를 맘대로 제압하려는 나를 봤기 때문이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계속 참는 것일까. 마치 금연이 담배를 끊는 게 아니라 피는 것을 계속 참는 것이라는 말처럼. 분명 무언가 깨달아서 행동을 바꿨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스스로에게 어떤 교육적인 학습 내용을 주입한 것에 불과했는지도 모르겠다. 막상 작년보다 아이가 말을 잘하게 되고 말귀를 더 잘 알아듣는다고 판단한 순간, 이제는 엄마의 요구를 당연히 이해하고 따를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기대를 하게 되었다. 아이를 제대로 모르니까 터무니없는 기대를 한 것이고, 엄마에겐 더없이 달콤한 기대는 수행하기 어려운 학습효과보다 더 강력했던 것이다. 늦게 아이를 낳은 데다 맞벌이를 하면서 떨어진 체력이 바닥 근처에서 올라오질 않으니 인간적으로 자제력을 발휘하기 싶지 않다. 최근 공동육아 어린이집에서 보낸 면담설문지에 이런 질문이 있었다. “자녀의 바람직한 성장을 위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계십니까?” 나름대로 답을 달아서 제출하긴 했다. 내 아이가 이런저런 아이로 자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긴 하지만 솔직히 그것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아이의 양육을 그렇게까지 목적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수행해야 하는 어떤 것이라면, 나는 지금보다 더 나은 엄마가 될 자신이 없다. 아이가 이해할 수만 있다면 정말이지 꼭 말하고 싶다. 엄마도 처음이라 모르는 게 많아. 네가 성장하면서 생기는 변화들을 너도 엄마도 겪어나가면서 알게 되면, 좀 더 나은 관계가 되지 않겠니. 안다고 다 잘하는 건 아니라 해도.
2017-08-07 | hrights | 조회: 325 | 추천: 0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1. 철학을 향한 변 철학을 업으로 삼다보면 인생 전체를 싸잡아 크게 묻는 질문을 받게 된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왜 이런 걸 묻게 되는 것일까? 물음을 던지는 사람 역시 인간이기 때문이고, 인간으로서의 삶 즉 인생을 살고 있고 또 앞으로도 계속 그 인생을 가능하면 의미 있게 살아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럴 때면, 질문을 받은 나는 대답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심지어 강박이라 할 수도 있는 의무감에 사로잡힌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글을 쓴다는 것은 불특정한 누군가가 던진 물음에 대해 대답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특정한 익명의 사람들이 나의 두뇌를 붙들고서 한 시도 놓아주지 않는다. 이때 나 역시 여기 이 불특정한 익명의 사람들 속으로 녹아들어가 한통속이 된다. 그런데도 ‘조광제’라는 고유명사의 명패를 내려놓지 못한다. 다들 그러할 것이다. 익명과 기명의 결합과 교환, 어디에서부터 그 경계를 그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네트워크 속에서 삶을 영위한다. 그런 가운데 그 네트워크를 재형성한다. 방금 쓴 글에서처럼 철학은 추상적인 대규모의 사유를 예사로 자행한다. ‘익명과 기명의 결합과 교환의 네트워크’라는 말은 이른 새벽 일일 노동시장에 나가 과연 가능할지조차 함부로 기약할 수 없는 하루벌이 일을 얻기 위해 단칸방 월세의 집 문을 나서는 어느 가장의 무거운 발걸음과 애타는 심경에 비하면 얼마나 추상적이며 또 얼마나 큰 이야기인가. 이렇듯 관념의 허기진 구조물 속으로 자진해서 걸어 들어가기를 서슴지 않는 철학자의 심경 역시 그 성격은 다르지만 한껏 시리다. 그러나 현실을 관념으로 담아내지 못하는 풍토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 관념에서부터 현실에 대한 방향이 나오고, 현실에 대한 방향에서부터 현실을 제대로 살 수 있는 방법이 나오고, 그 방법에서부터 힘을 끌어 모아 현실을 바꾸어낼 수 있는 실천의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관념 속에 파묻혀 살자는 것이 결코 아니다. 관념은 현실의 수단일 뿐이다. 설사 관념이 현실을 구성하는 중요한 뼈대가 된다고 할지라도, 관념 그 자체는 파생적인 현실에 불과하다. 문제는 의식되지 않고 성찰되지 않는 관념이 삶의 현실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때 관념은 욕망과 뒤범벅이 된 이른바 은폐된 관념이다. 성찰되어 의식된 관념을 함부로 무시하는 자는 이런 은폐된 관념에 휘둘리고 있기 십상이다. 은폐된 관념이라고 해서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철학은 은폐된 관념들을 끄집어내어 함께 성찰해서 그 좋고 나쁨을 가려내고 나쁜 은폐된 관념은 버리고 좋은 은폐된 관념을 부추겨 욕망을 좋은 방향으로 몰고 가기 위한 또 하나의 관념이다. 근원에 있어서 욕망은 감정을 이끌고 사유를 낳으며 의지를 일으켜 행동으로 이어진다. 현실은 다름 아니라 행동의 연속이요 복합이다. 이에 철학이 현실을 해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현실을 변혁하는 데 동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2. 은폐된 공동의 관념, 약속 글을 읽다보면, 특히 목숨을 걸고서 자신의 사상을 피력해마지 않는 인물의 글을 읽다보면 크게 배우게 된다. 히틀러의 파시즘뿐만 아니라 스탈린의 이른바 공산독재에 대해 비판적 사유의 날을 세웠던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이 쓴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발터 벤야민 전집 5』, 최성만 옮김, 도서출판 길, 2008)를 읽다가 크게 깨닫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과거는 구원으로 지시하는 어떤 은밀한 지침을 지니고 있다. 우리 스스로에게 예전 사람들을 맴돌던 바람 한 줄기가 스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귀를 기울여 듣는 목소리들 속에는 이제는 침묵해버린 목소리들의 메아리가 울리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구애하는 여인들에게는 그들이 더는 알지 못했던 자매들이 있지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과거 세대의 사람들과 우리 사이에는 은밀한 약속이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지상에서 기다려졌던 사람들이다.(위 책, 331-2쪽, 강조는 인용자가.) “은밀한 약속”, 이 말에 눈이 번쩍 뜨이면서 크게 고무된다. 순간적으로 추상적이지만 결코 스쳐 지나가서는 안 되는 긴요한 인간관계의 원리를 포착하게 된다. 과거 사람들과 우리 세대 사이에만 은밀한 약속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 서로 은밀한 약속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현실의 모든 일들은 약속으로 점철되어 있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만남 자체가 곧 약속이다. 그 눈빛과 표정에, 설사 흘깃 쳐다보고 지날 뿐인 행인들 서로간의 눈빛과 표정에도 이미 늘 약속이 서려 있다. 함부로 얕잡아 보거나 노려보아서는 안 된다는 약속, 서로의 불행에 대해 안타까운 나머지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약속, 누가 어떻게 약속을 어기는지에 대해 제대로 판단해야 한다는 약속, 자칫 약속을 어길 경우 부끄러워해야 마땅하다는 약속, 누구나 단 한 번 살다가 죽어갈 수밖에 없음을 깨달아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운명적인 인생을 사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고 긍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약속, 어쩌다 욕망과 행동이 서로 대립되면 상대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약속, 그렇듯 모든 삶의 여정이 이미 늘 약속을 했고 그 약속을 이행하고 약속을 이행하는 것 자체가 생의 의미와 가치가 된다는 것이다. “은밀한 약속”, 그것은 인간이 태어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약속의 얼개 속에서 태어난다는 것을 일컫는다. 인간의 욕망과 행동 자체에 이미 늘 은폐된 관념인 약속이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도 약속을 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아무도 약속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약속은 더욱 굳건하게 자리를 잡고서 우리의 생을 이끌고 있는 것이다. 약속은 지켜야 한다. 설혹 어쩌다가 하나의 약속을 어긴다 할지라도 그렇게 어길 수밖에 없는 까닭은 더 크고 중요한 다른 약속을 지키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나는 약속을 하지 않았는데, 저쪽에서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경우에건 근본적으로 약속을 하지 않은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누가 어느 쪽이 폭 좁은 아둔한 약속을 믿고서 행동하는가를 놓고서 모든 대립과 분쟁이 일어난다. 배타적인 약속은 약속이 아니다. 약속을 하지 않을 수 없기에 약속을 하는 척 해 놓고서 상대방이 그 약속을 믿고서 행동하도록 함으로써 그를 통해 그저 나 혼자만 이득을 보겠다고 하는 그런 약속은 약속이 아니라 사기다. 모든 대립과 분쟁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배타적인 사기에 의한 대립과 분쟁이야말로 잘못된 것이다. 자신은 제대로 약속을 한다고 했는데, 자기도 모르게 사기가 될 수도 있다. 자신은 제대로 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대립과 분쟁에 목숨을 걸기까지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사기에 연루되고 심지어 적극적으로 가담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욕망과 행동에 은폐된 관념으로서 작동하는 약속을 끊임없이 가능한 한 더 큰 공공의 장을 바탕으로 성찰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말은 약속이다. 은폐된 관념이었던 약속은 말을 통해 공공의 장에 명시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공공의 장을 책임지는 자는 그만큼 약속의 규범에 엄격해야 한다. 한 나라의 통치를 책임진 자는 그 나라 곳곳에서 이루어지는 약속들에 민감해야 한다. 약속은 곧 생의 의미와 가치를 결정하는 것임을 정확하게 깨달아야 한다. 생의 의미와 가치를 향한 약속이 결집될 때, 생을 기약할 수 있고 긍정할 수 있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옛 선인(先人)들이 왜 한 마디 말이 천금처럼 무겁다는 것을 강조했겠는가. 하물며 통치자의 말은 오죽하겠는가. 인간성은 약속을 통해 이루어진다. 약속이 깨지면 관계가 깨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관계가 깨지면 공동의 삶이 깨진다. 공동의 삶이 깨지면 각자 한 마리의 짐승처럼 발버둥 치면서 기약 없는 발가벗은 존재로 전락한다. 인간성을 바탕으로 한 인권은 바로 서로 약속을 할 수 있고, 그 약속을 지킬 수 있고, 약속을 어기는 일에 대해 힘껏 추궁할 수 있는 권리에 다름 아니다. 인권은 약속의 삶을 누릴 수 있는 권리이고, 그에 따라 남은 생을 기약할 수 있는 권리인 것이다. 당연하지만 약속은 일방의 것이 아니다. 쌍방을 전제로 한 것이 약속이다. 철학자 레비나스(Immanuel Levinas, 1906~1995)는 타인의 얼굴 자체에 ‘살인하지 말라’라는 계명이 새겨져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타인은 곧 약속을 통해 성립하는 나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근본 조건인 것이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여러 다양한 처지에 놓인 타인들이다. 그들은 이미 늘 나에게 그렇게 다양한 만큼 여러 다른 약속들을 맺은 것이고, 그 약속들을 이행할 것을 나에게 요청한다. 나의 존재는 내가 얼마나 많은 다른 종류의 약속들을 염두에 둘 수 있고, 또 그 약속들을 얼마나 어떻게 다채롭게 이행할 수 있는가에 따라 열리기도 하고 또 닫히기도 한다. 여러 약속과 이행을 향해 열린 나의 존재는 그만큼 남은 생의 의미와 가치를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약속은 항상 미래를 향해 있다. 그러나 또한 약속은 항상 과거에 맺은 것이다. 약속을 통해 우리는 과거와 미래를 연결한다. 두툼하게 축적된 과거를 지니지 못하게 되면, 그만큼 미래가 한없이 얇아진다. 개인도 사회도 국가도 민족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약속은 결코 무한정하게 연기될 수 없다. 약속 불이행은 더 크고 알찬 새로운 약속을 위한 것이고,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더 두툼하고 심중한 과거를 새로운 약속의 밑돌로 분명하게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 약속 불이행은 그 자체로 악일 뿐이다. 악이란 근본적으로 약속을 어기는 데서 성립하기 때문이다. 법은 국가적인 공공의 약속이다. 만약 약속 아닌 약속, 특별히 배타적인 약속, 사기로서의 약속에 입각한 현행법이 있다면, 그 법은 이미 법이 아니다. 하물며 함부로 약속을 해서 국가의 통치권을 획득하고, 그 약속을 예사로 어기고도 한 점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하는 태도를 보이는 통치자를 선택한 국민들은 얼마나 불행할 것인가. 국가는 그야말로 공공의 열린 약속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체계이다. 약속을 역용하고 무시하는 통치자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 그 국가에서 생을 영위해야 하는 국민들은 더 이상 생을 기약할 수 없는 암울함으로 인해 비참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 그러니 약속 어기기를 밥 먹듯이 하는 통치자는 곧 국가적인 악의 표상이 아닐 수 없다. 신용은 약속 이행의 능력에서 비롯된다. 그러고 보면, 신용은 다른 사람들을 이용해서 내가 이득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과거와 미래를 공유하고 그럼으로써 다함께 남은 생을 기약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신용 자체를 화폐로 바꾸어 약속 아닌 약속, 사기인 배타적인 약속으로 전락시키는 금융자본주의는 얼마나 그 자체로 악인가. 더욱이 이런 금융자본주의에 국가 통치자마저 편승해 있다면, 악에 악을 더한 현실을 형성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심사가 현실 전체에 편만하게 되면, 그것으로 공동의 생은 끝이다. 공동의 생이 끝나면, 내 개인의 남은 생을 전혀 기약할 수 없다. 남은 생을 기약한다는 것은 곧 약속과 이행의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것이고, 약속이란 이미 늘 타인들과의 공동의 생을 위한 약속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민주공화국이라는 명패를 높이 치켜 든 오늘날 대한민국은 얼마나 어떻게 계속 새로운 약속을 하고 이행해 가며, 그럼으로써 과연 얼마나 어떻게 각인들이 자신의 남을 생을 기약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과연 우리들의 약속은 어디에, 어떻게, 어디로 사라지고 만 것인가?
2017-08-07 | hrights | 조회: 325 | 추천: 0
홍미정/ 단국대 중동학과 조교수 ■ 최악의 인도주의 위기 유엔은 시리아 위기를 우리시대의 최대 인도주의 비상사태로 규정했다. 2011년 3월 시리아 내전이 발발한 이후 2014년 8월 말까지 20만 명 가까이 사망하고, 시리아 전체 인구의 절반인 9백 5십 만 명 정도가 고향에서 축출되어 난민이 되었다. 유엔 보고서에 따르면, 6백 5십만 명 정도는 시리아 내부에서 난민이 되었고, 3백 만 명 이상이 외국에서 난민이 되었다. 이들은 레바논에 1백19만 명. 터키에 84만 7천명, 요르단에 61만 8천명, 이라크 21만 4천 명, 이집트에 14만 명이 난민 캠프 등에서 생활한다. 이 엄청난 재앙을 일으킨 주요한 세력이 ‘이슬람 국가(Islamic State, IS)’라는 증거는 아직 없다. 시리아 위기를 설명하면서, 대부분의 세계 주류 미디어들은 전통적인 중동분쟁 설명방식인 종교 또는 종파, 인종간의 분쟁 담론을 채용하거나 특히 이슬람극단주의자들의 활동을 강조한다. 이러한 널리 퍼진 진부한 전쟁담론은 이 전쟁이 시리아 영토분할을 통하여 이익을 취하고자하는 ‘외국세력의 개입’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과,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건설을 통한 이란과 카타르 사이의 ‘가스판매망 확보투쟁’이라는 사실을 은폐한다. ■ 통합세력으로 부상하는 ‘이슬람국가’를 공격하는 미국 2014년 9월 23일 미국은 이슬람극단주의자 ‘이슬람국가(Islamic State, IS)’를 해체시킨다는 명분으로 전격적으로 시리아 공습을 시작하였다. 미국의 ‘이슬람국가’ 공격에는 사우디, 카타르, 요르단,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등 걸프 주변 아랍왕국들이 동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반정부군을 간접 후원하던 단계에서 벗어나 ‘이슬람국가’를 직접 공격하면서, 이 지역 분쟁에서 가장 주요한 군사적 행위자라는 것을 입증하였다. 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2014년 9월 현재 ‘아사드 정부’는 시리아 영토의 30% 정도를 통치하고 있으며, 나머지 70%는 ‘이슬람국가’, ‘쿠르드자치정부’, 소수 반군파벌들이 분할통치하고 있다. 2014년 6월 29일 ‘이라크와 레반트 지역의 이슬람국가(Islamic State of Iraq and the Levant, ISIL)’가 ‘이슬람국가’를 선언하면서 급속도로 그 지배 영역을 확장하였다. 게다가 2014년 8월경, ‘이슬람국가’는 ‘국민연합’을 비롯한 자유 시리아군과 알 누스라 등 지난 3년 동안 미국과 사우디와 카타르 등 걸프왕국들이 후원해온 경쟁적인 반군파벌들 대부분을 흡수 통합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국민연합’은 2013년 3월 ‘시리아 임시정부’를 구성하여 아랍연맹 회의에서 아사드 정부를 대체하는 등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2014년 7월 22일 ‘국민연합’은 자체 투표를 통하여 ‘임시정부를 해체’함으로써 현재 제대로 된 기능을 거의 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 시리아 내부에 ‘이슬람국가’와 겨룰만한 반군파벌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전쟁: 카타르-사우디-요르단 VS 이란-이라크-시리아 2011년 3월 이후 시리아에서 진행되는 최악의 인도주의적인 위기의 중심에는 세계 최대의 가스 유전으로 알려진 이란의 남부 파르스 유전(South Pars)과 카타르 북부 유전(North Dome)지대에서 생산되는 천연가스 판매망 확보 경쟁이 있다. 그 판매망의 중심지에 시리아가 위치한다. 카타르가 2011년 이후 시리아 반군을 적극 후원하면서 시리아분쟁에 깊이 개입해 온 주요한 이유는 바로 천연 가스 판매망 확보를 위한 투쟁이다. 2009년 카타르는 천연가스 판매를 위해서 시리아의 아사드 정부에게 [카타르-사우디-요르단-시리아-터키]를 통과하여 유럽으로 가는 가스 파이프라인을 건설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아사드 대통령은 이러한 카타르의 제안을 거부하였다. 대신에 아사드는 2010년 이란과 가스 파이프라인 건설 협상을 시작하였다. 그 결과 2011년 7월 25일 시리아, 이라크, 이란 석유장관들이 이란에서 회의를 갖고, 100억 달러의 건설비용으로 [이란-이라크-시리아-레바논-지중해]를 통과하여 유럽으로 가는 가스파이프라인 건설을 위한 예비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협상과정에서 이라크는 하루 당 2천 5백만㎥, 시리아는 하루 당 2천만-2천 5백만㎥의 이란 가스를 구입하는 협정을 체결하였다. 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이 가스 파이프라인은 이란 해역의 남부 파르스로부터 이란-이라크-시리아-레바논-지중해를 가로질러 유럽의 고객들에게 남부 파르스에서 생산되는 가스를 공급하기로 되어있다. 이 파이프라인은 길이가 3,480 마일(5,600 km)이고 직경이 56인치(142㎝)이며,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 정제소와 관련 기반시설을 건설하기로 예정되었다. 이 계획에 따르면, 이란은 2015년부터 유럽에 가스를 공급할 것이다. 그런데 2012년 11월 미국무부 대변인 빅토리아 눌랜드는 이란-이라크-시리아 가스 파이프라인 건설이 시작되었다는 보고를 묵살하면서, 이 가스 파이프라인 건설 계획이 결코 실현될 수 없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워싱턴은 이란-이라크-시리아 파이프라인 건설에 관한 유사한 보고들을, 6번, 7번 혹은 10번, 15번 받은 적이 있다. 이 파이프라인은 결코 실현되지 못할 것이다.” 이로써 미국은 이란에서 생산되는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건설과 운영을 통하여 이란-이라크-시리아가 하나의 협력체가 되는 것을 결코 묵과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미국이 이란의 파이프라인 건설 사업을 막는 최선의 방법은 시리아 영토통합을 저지하고, 영토분할을 통하여 경쟁적인 파벌들이 시리아를 분할 통치하도록 유인하는 것이다. 이것이 시리아 분쟁이 계속되는 주요한 이유 중의 하나인 것이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474 | 추천: 0
이광조/ CBS PD 얼마 전 강원도 원주의 한 골프장에서 성추행 사건이 발생해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골프장 경기보조원으로 일하던 여성이 성추행을 당했다며 경찰에 신고하면서 사건이 언론에 알려졌는데,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은 대한민국의 국회의장을 지낸 사람이었다.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은 사건을 무마하려고 노력을 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손녀 같고 딸 같아서 귀엽다는 수준에서 ‘터치’한 것”이라며, “손가락 끝으로 가슴 한번 툭 찔렀는데 그걸 어떻게 만졌다고 표현하느냐”며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하지만 피해자의 설명은 이와는 사뭇 다르다. 피해자는 “홀을 돌 때마다 계속 성희롱과 성추행을 당했고, 성적 수치심을 느낄 정도의 신체접촉이 있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뿐만 아니라 가해자가 예전부터 행실이 좋지 않아 캐디들 사이에 기피 고객으로 소문이 났다는 주변의 주장까지 나왔다. 외신에까지 보도된 이 성추행 사건의 가해자는 모두 아는 대로 박희태 전 국회의장이다. 힘 있는 사람들의 성추행이 제대로 처벌되는 걸 보지 못한 터라 이번 사건이 어떻게 처리될지 관심이 크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나의 관심을 끄는 건 이 분의 생존비법이다. 박정희, 전두환 독재정권 아래서 검사로 승승장구하다 1988년 민정당 국회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한 사람이 어떻게 그 오랜 세월동안 국회와 정부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지금까지 무대 위에 남아 있을 수 있었는가는 하는 점이다. 인터넷에서 이 분의 프로필을 검색해 보면 1938년 생으로 1966년에 검사 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나온다. 검찰에서 요직을 두루 거치고 1988년 민정당 소속으로 13대 국회의원이 된 뒤 17대까지 내리 5선을 했고 2008년에 공천을 받지 못했지만 2009년 양산 재선거에서 당선됨으로써 6선 국회의원이 되었다. 1993년 김영삼 정부 법무부 장관, 2003년 한나라당 대표, 2007년 국회 부의장을 지냈고 같은 해에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 경선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 이명박 정부의 1등 공신이 되었다. 그리고 또 한 차례의 당대표와 국회의장까지. 대단한 이력 아닌가. 그런데 이 화려한 이력과 함께 따라 나오는 것이 미국 유학 시절 낳은 딸의 이중국적을 유지하다 국내대학의 외국인 자녀 특례입학 혜택을 받기 위해 1991년 한국국적을 포기하고 외국인 자격으로 편법입학한 일과 2008년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돈 봉투를 뿌린 일이다. 딸의 특례입학 문제는 1993년 법무부 장관 임명 이후 논란이 불거지면서 장관직 사퇴로 이어졌고 돈봉투 살포와 관련해서는 국회의장직에서 물러나고 법원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 사진 출처 - 노컷뉴스 전과가 있는 정치인이 한 둘도 아니고 온갖 엽기적인 일이 다 일어나는 대한민국에서 이 정도 과오는 별 것 아닌 걸로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분에게 따라 다니는 과오는 쉽게 보아 넘기기 어렵다. 두 경우 모두 그가 맡은 공직의 직업윤리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유신독재와 전두환 독재에 복무한 전력이야 흠도 되지 않는 세월이니 얘기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것 같고 자녀의 이중국적과 편법입학 정도는 소위 이 땅의 ‘지도층’ 사이에는 워낙 흔한 일이라 접어두는 게 좋겠다. 하지만 2008년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돈으로 표를 사려했던 행위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것 아닌가. 더구나 이 문제가 불거진 시점에 그는 의회를 대표하는 국회의장이었으니 대한민국 국회의 명예에 제대로 먹칠을 한 셈이다. 그는 이 일로 인해 국회의장에서 물러나고 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쯤 되면 정치무대에서 물러나 여생을 조용히 보내는 게 상식일 텐데,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면을 받고 박근혜 정부 들어 새누리당의 상임고문으로 추대 되었다. 그리고 골프장을 드나들며 ‘딸 같은 캐디들을 손으로 격려하다’가 성추행 혐의로 경찰의 조사를 받을 처지에 놓였다. 젊었을 때 그는 아마 고향에서 ‘천재’라는 소리 꽤나 들었을 것이다. 학교에서는 당연히 우등생이었을 거다. 검사생활을 하면서는 ‘영감님’ 소리를 들었을 것이고 그 뒤로는 ‘의원님’, ‘장관님’, ‘대표님’, ‘의장님’으로 불리며 평생을 대접받고 살았을 것이다. 그 오랜 세월동안 그는 권력을 가진 패거리들에게만 잘하면, 그들에게만 인정을 받으면 사고를 쳐도 얼마든지 후일이 보장된다는 걸 몸으로 체득했는지도 모른다. 그가 이렇게 권력게임을 즐기는 동안 유권자들은 ‘우리 지역’이 배출한 인재가 중앙정치무대에서 승승장구하는 걸 보면서 박수치고 대리만족을 얻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건 아닐까. 전국에서 모인 ‘우리 지역’의 우등생들은 중앙정치무대에서 누가 서로 잘났는지를 겨루며 점점 더 ‘일그러진 영웅’으로 변해간다. 그들에게 유권자란, 국민이란 어떤 존재일까? 골프장 캐디는?
2017-08-07 | hrights | 조회: 307 | 추천: 0
정재원/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세월호 사건이 발생한지 불과 2주일도 안 된 시점에 도저히 열거하기조차 힘들만큼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비리와 결탁, 거짓과 추태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왔다. 교신 자체가 없다던 해경의 말 바꾸기와 교신 기록 편집 및 삭제 의혹, 지상 최대의 작전이라는 말과는 정반대인 사고 초기 구조 상황에 대한 폭로로 인해 이제 심지어 남은 사람들을 일부러 구조하지 않은 것 아닌가 하는 의문까지 갖게 할 정도로 극심한 불신을 낳았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고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터져 나온 국가의 무능력과 현장에서의 혼란도 심각한 문제지만, 그것은 이제 사태의 본질이 아니라는 사실이 철저하게 밝혀지면서 상황은 질적으로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국가의 총체적 무능력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는 언제나 그랬듯,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그라들고 점점 기억에서 멀어지는가 싶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정부 스스로도 이번 사건이 단순한 무능력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고, 따라서 향후 폭로될 수도 있는 문제들이 가져 올 심각한 파국을 진정시키는 것이 우선적인 목표가 되었다. 세월호의 침몰 원인에 대한 관심을 돌리기 위해, 배를 본격적으로 조사하기도 전에 ‘과적’으로 규정하고, 선장과 선원들, 청해진해운과 세모 그룹, 유병언과 구원파, 그리고 해수부와 해경, 관피아 등 본질을 호도하기 위해 동원 가능한 모든 요소들을 총동원했다. 그러나 SNS의 발달로 인해 총체적인 은폐와 축소, 거짓이 대중에게 쉽게 통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분노와 슬픔을 가라앉히기 위한 지상파 등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갖고 있던 휴대전화 속에 남겨진 죽어가던 순간의 영상들의 확산으로 인해 일시적으로나마 대통령에게도 ‘필요하면 언제든지 직접 연락하라’는 쇼까지 하게 강제하는 국면에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매우 놀랍게도 그러한 쇼와 동시에 박근혜 정부는 검찰, 경찰, 군, 교육부 등 거의 모든 기관들을 총 동원하여 유언비어에 대해 단호하게 대응할 것이라는 등의 위협과 방통위 등을 통한 언론 통제, 그리고 분향소 설치 제한 등을 통해 과거의 그 어떤 재난 상황과 비교해도 괴이할 정도로 전방위적인 압박을 가했다. 국정원과 군의 선거 개입 등으로 심각한 정통성의 위기를 맞고 있었던 박근혜 정권은 추모 분위기의 진화를 막으려는 국가의 법제도적 제약과 함께 ‘종북 좌파’와 ‘시위 선동꾼’론을 통해 기존의 수구 집단 뿐 아니라, 중간에 동요하는 집단들을 확보해서 향후 항의집회와 시위가 확대될 경우 대중들의 분열을 노리는 전략을 취했다. 집회와 시위를 조직하는 이들에 대한 ‘낙인찍기’ 전략은 ‘순수한’ 추모와 ‘불순한’ 저항으로 구별 지어 추모를 넘어 대중적 저항으로 확산되는 것을 차단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지만원, 서승만, 한기호, 권은희, 정규재, 송영선, 정미홍, 김장겸, 박상후, 조광작, 이완영, 조원진, 주호영, 홍문종, 김태흠, 안흥준, 김동길, 오장현, 박승춘 등등... 차마 일일이 그 내용을 적기조차 민망한 우리네 지배 집단들의 천인공노할 막말과 망언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망언들이 처음부터 일사분란하게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이러한 망언들이 자제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어진 데에는 분명 노림수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세계 10위권에 육박하는 경제력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에서 복지 예산 비율은 OECD 국가들 중 최하위를 차지하고 있다. 거의 모든 연령과 집단들의 자살률이 세계 수위를 다투고 있고, 최장 시간의 노동, 산재, 양극화 등등 거의 모든 지표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막연하게나마 이러한 공감대 속에서 지난 대선 당시 국민들에게 경제민주화와 복지 국가론이 확산되어 갔지만, 이 땅의 지배 집단들은 결단코 자신들의 이익을 조금이라도 침해되는 꼴을 볼 수 없다. 따라서 이들은 이 국면에서조차 대중들 사이에서 그 어떠한 정의, 연대와 협력이 일어나지 않고, 정당한 문제제기와 저항을 가로 막기 위해 대중들을 하루라도 빨리 서로 증오하고 혐오하며 억누르고 배제하는 일상의 삶으로 돌아가게 만들어야 했다. 이러한 전략은 맞아떨어졌다. 이미 타인의 고통에 대한 동정심과 타자들과의 연대보다는 정글 자본주의 속 경쟁과 비난에 더 익숙한 많은 대중들은 소위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정권의 문제가 아닌 세월호 문제 때문에 경제가 어렵다는 거짓 선동에 급속하게 동의하기 시작하며, 비난의 화살을 세월호 유족들과 야당에게 돌리기 시작했다. 여기에 SNS를 통한 유족들의 주장에 대한 조직적인 왜곡은 한층 더 여론을 악화시켰다. 특히 총체적 난국 속에서도 대통령과 여당의 지지율은 크게 떨어지지 않았고, 이를 바탕으로 재보궐 선거에서의 승리를 통해 자신감을 갖게 된 지배 집단들은 이후 태도가 돌변, 최소한의 성의조차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런 자신감을 바탕으로 최근 과감한 ‘서민 증세’를 예고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어버이연합 회원들이 지난 11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 인근 도로에서 세월호 유가족과 시민사회단체 회원이 광화문광장에서 물러날 것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 출처 - 뉴시스 이 과정 속에서 일등공신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어버이연합과 같은 집단보다도 일베로 상징되는 우리 사회 곳곳에 뿌리내린 젊은 반사회적 범죄자 집단들이었다. 이들의 확산과 증가는 권력을 가진 지배 엘리트들에게 너무나 반가운 우군이다. 여성과 장애인, 호남사람들과 이주노동자와 같은 약자 혹은 소수자들, 그리고 민주화 투쟁에 헌신한 사람들에 대한 모독과 차별을 서슴지 않으며, 그들의 고통을 희롱하는 일베는 이번에도 일찍부터 희생자 가족을 ‘유족충’이라고 칭하며, 심지어 죽은 여성에 대해 성적 모욕까지 가한 글에 낄낄거리며 댓글들을 달았다. 반사회적 범죄자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한 집단은 바로 수구보수 정당과 국가 관료, 그리고 특권적 기득권 집단들이었다. 이들의 비호 아래 일베와 같은 젊은 범죄 집단은 당당하게 오프라인으로 커밍 아웃했다. 그것도 유족들 바로 앞에서 ‘폭식’과 거짓 선동, 희롱을 일삼는 아주 더러운 방식으로. 국가를 막론하고 역사적으로 사회경제적 위기 상황에서는 좌파 혁명가들과 극우 파시스트의 양 극단의 집단들이 대두해 왔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전자의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할 때, 정치적 민주화가 사회경제적 민주화로 이어지지 못 한 상황에서 대중들의 불만은 이제 극우적인 모습을 띠고 나타나고 있다. 아니, 이 보다 더 나아가 매우 반사회적인 범죄 행위를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자행하는 단계로 갑자기 뛰어 올라와 있다. 이를 보장해 주는 강력한 세력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기존의 특권 지배 집단과 이들의 이익을 수호하는 젊은 극우 파시스트적 행동대원들의 망동에 대처하지 못 하고 있다. 진보 정당을 비롯한 노동자, 시민사회단체들의 획기적인 대응이 절실한 시기가 도래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257 | 추천: 0
최정학/ 방송대 법학과 교수 사고가 일어난 지 다섯 달이 다되어 간다. 처음에는 마치 온 국민이 집단 우울증에라도 걸린 듯이 추모와 자책, 그리고 분노의 열기가 나라 안에 가득하더니, 역시 시간은 모든 기억을 삼켜버리는 괴력을 지니고 있나보다. 이젠 “유가족이 양보해야 한다”거나 “세월호 문제는 민생법안 문제와는 분리해서 처리해야 한다”는 주장이 상당히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고 있다고도 한다.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별별 사고가 다 터지는 이 사회에서 언제까지 한 문제에 온 국민이 매달려 있을 수도 없을 것이고, 더욱이 세월호 사건으로 인해 특히 관광이나 숙박과 같은 자영업자들이 심각한 어려움을 겪는다는 지적은 사고 발생 직후부터 나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다 동의하듯이, 이 사건이 그리 간단하게 정리되고 또 잊혀질 수 있는 것은 명백히 아니다. 수백의 젊은 목숨들이 희생되었음은 물론 기업과 관료, 그리고 권력으로 이어지는 우리 사회의 총체적 부실을 극명하게 드러냈기 때문이다. 역시 합리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다 인정하는 이 사건의 첫 번째 해결방향, 즉 ‘진상규명’이 이토록 어려운 이유 또한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들의 치부가 드러나고 그들의 책임이 밝혀져야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현재 핵심적인 쟁점인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부여하느냐 하는 것이 다만 형식적‧제도적인 이유뿐만이 아니라 실질적‧내용적인 탓으로 합의에 이르고 있지 못한 까닭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먼저 형식적인 면을 살펴보자. 새누리당이 내세우는 이유는 조사위원회가 수사권을 갖는 것은 법률이 인정하는 수사기관 이외에 별도의 기관을 창설하는 것으로 3권 분립이나 법치주의에 반하는 위헌적인 결과가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유족이 주장하는 특별법안 어디를 보아도 새롭게 만들어지는 ‘별도의 수사기관’은 찾을 수가 없다. 다만, 위원회 내부에 검사의 자격과 권한이 있는 (따라서, 당연히 수사권과 기소권이 있는) 특별검사가 참여할 뿐이다. 그러니까, 현재 시행되고 있는 ‘특별검사의 임명 등에 관한 법률’(이른바 상설특검법)이 위헌이 아니라면 이 특별법도 위헌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더욱이 새누리당은 이미 세월호 사건에 대해 진상조사위원회의 조사가 끝나는 대로 특별검사의 수사를 하기로 야당과 합의하였다. 결국 특별검사의 수사는 당연히 예정되어 있는 것이고, 문제는 이 검사가 위원회와 함께 수사를 하느냐 아니면 추후에 별도로 하느냐 하는 차이만 있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 가족대책위와 국민대책회의가 지난 2일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특별법 청원 1차 취합분 350만 명 이후 2차 취합분 135만 명(총 485만 명)의 국민 서명을 청와대에 전달하기 위해 삼보일배를 하고 있다. 사진 출처 - 미디어오늘 그래서 수사권 등에 반대하는 이유는 아마도 ‘수사의 내용과 범위와 같은 실질적인 부분에 있지 않나’ 하는 의심이 짙어진다. 다시 말해, 새누리당은 아마도 특별검사가 위원회 내부에 참여하는 경우 그 조사의 결과에 영향을 받아 수사의 대상이나 범위가 지나치게 넓어지거나 혹은 편파적인 (즉, 지나치게 가족의 입장에 기우는) 것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하는 듯하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반론이 가능하다. 첫째, 수사 혹은 조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그 대상이나 범위를 설정하는 것은 당연히 바람직하지 못하다. 특히 세월호 사건과 관련해서는 이미 여러 의혹이 제기되어 있고, 불행히도 이것은 청와대를 포함한 최고권력기관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더더욱 그 범위를 한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둘째, 특별검사가 조사위원회의 영향을 받아 수사의 방향이나 범위를 달리 할 것이라는 우려는 특별검사의 자질을 의심하는 것이다. 위 특별검사법에 따르면 특별검사는 15년 이상의 경력변호사 가운데 특별검사 추천위원회의 추천을 받아 임명된다. 세월호 특별법에 이와는 다른 별도의 절차가 규정될 수는 있지만, 아마도 그 자격이나 절차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특별검사는 공적인 절차를 통해 특별한 수사권한을 부여받은 사람으로서 자신의 수사방향이나 내용, 결과에 대해 사회적인 책임을 지게 된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조사위원회에 참여하는 특별검사는 조사결과의 수사가능성에 대해 법률적인 의견과 조언을 제시할 것이며, 다른 위원들과의 토론을 거쳐 자신의 책임 하에 수사대상과 범위를 설정해 갈 것이다. 이것이 조사결과의 영향을 받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설령 특검의 수사가 조사위원회의 조사 이후에 이루어지더라도 이러한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조사결과 수사가 필요하다고 판단된 사안에 대해서 특별검사는 수사를 하거나, 그렇지 않다면 수사가 필요하지 않은 이유를 제시해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특별검사의 공정성에 대한 이러한 변명은 사실 조사위원회 자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사실 문제의 핵심은 진상조사위원회가 지나치게 유족의 입장을 대변하는 편파적인 태도를 갖지 않을 것인가 하는 우려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피해자들에게 수사권을 준다’는 세간의 표현은 아마 여기에서 나온 것 같다), 이 또한 지나친 의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조사위원은 상당한 식견과 경험이 있는 각계의 인사들이 국회, 정부, 변협과 같은 공적 기관의 추천을 받아 임명된다. 세월호 특별법의 경우 유족의 추천위원이 있다고는 하지만 전체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 또한 사회적 명예와 책임을 가지게 됨은 특별검사의 경우와 마찬가지일 것이고, 따라서 합리적인 상식과 이성을 넘어서는 무리한 조사가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문제는 조사대상의 대부분이 상당한 권력을 가진 기관일 것이므로, 잘못하면 이들의 권한과 활동이 크게 위축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애초에 조사위원회에 수사권을 부여하자는 주장은 아마 이와 같은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할 것이다. 피해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위원회가 문제라고 하지만, (진상규명을 원하는) 피해자의 입장과 국민의 입장이 같은 한에서 위원회는 당연히 이를 대변해야 할 것이다. 불필요한 논란을 줄이기 위해 필요하다면 정치적 배경이 고루 분포되도록 위원들의 구성도 조정해야겠지만, 반대로 조사에 필요하다면 충분한 권한과 수단도 주어야 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충분한 진상규명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억울한 유족의 입장에서 뿐만 아니라 분노하는 국민의 입장도 이를 원할 것이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253 | 추천: 0
정지영/ 서울DPI 회장 장애인생활시설, 장애인거주시설, 장애인수용시설. 이름은 달라도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 이런 곳에서 살다 지역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시설생존자연대’라는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장애인의 자립을 보장하기 위한 정책마련, 장애인활동보조 하루 24시간 지원 등을 요구하는 일인시위를 국회 앞에서 200일간 진행하기도 하고, 장애인대회에서 퍼포먼스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퍼포먼스를 준비하는 중에 시설생존자연대의 회원이었던 한 후배가 시설이 완전히 없어져야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하자 설전이 벌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본인같이 부모에게 버림받은 중증장애인에게 그런 시설이라도 없었다면 지금까지 살아올 수 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나를 거두어준 그 시설이 고맙다고 했습니다. 단지 옷을 입고 비를 피하며 잔다고, 죽지 않을 정도의 음식을 먹고 산다는 게 자유를 빼앗기며 사는 것보다 나을 것이 없다며, 그런 시설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반 인권적이라는 주장도 부모가 양육을 포기해서 당장 오갈 곳 없어진 중증장애아 앞에선 마땅히 반박할 말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 때의 논쟁이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의 꽃동네 방문으로 다시 떠올랐습니다. 이미 많은 기사에서도 보셨다시피 장애인활동가들은 교황의 꽃동네 방문을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방문 일정이 발표되자마자 장애인활동가들은 명동성동 앞(결국 명동성동 안에는 못 들어갔죠) 등에서 온몸을 바닥에 던지며 저항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장애인당사자들도 의견이 엇갈립니다.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중증장애인에게 그나마 그런 곳이라도 필요하고 한국에서 세월호 유가족 분들의 인간적 고통에 공감해주시는 모습 등 물질과 경쟁에 매몰되어있는 한국사회에 낮은 곳과 소통하고 사람이 중심되라는 메시지를 전달해 주실 교황의 방문에 ‘너무 작은 일’로 큰 가르침을 그르치지 말자는 뜻인 듯합니다. 꽃동네에 살다가 탈시설지원프로그램을 통해 자립을 하신 분께 물었습니다. “교황님이 가신데요”, “거길 왜 가신데요.” 장애인활동가들이 그토록 교황의 꽃동네 방문을 반대했던 이유는 ‘방문 후’의 상황전개입니다. 역시나 교황님은 ‘어린 천사’와 같은 장애아동을 한 명 한 명 안아주시며 내미는 손가락을 입에 가져가 축복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생명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헌신과 사랑을 배웠겠지요. 음성 꽃동네가 그런 역할을 했던 시절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국 최대의 수용인원으로(시설 소규모화 정책에도 끄떡없는) 전국 최대의 지원금을 통해 운영되고 있을 뿐입니다. 돈이라는 댓가를 받더라도 TV에서나 나오는 그런 장애인을 돌보는 일은 아무나 못하는 일이다라고 칭송하실 분도 많으시겠죠. 그러나 주위를 조금만 둘러보면 여러분이 직업으로 택하지 못할 일을 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앞으로 낮은 곳에 임하신 교황님의 축복을 받을 곳은 꽃동네이지, 결코 교황이 손을 잡은 꽃동네의 아이들은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수많은 언론에 보도된 사진 속의 아이들에게 축복이 갈 것이라고 착각하고 꽃동네를 비롯한 전국의 장애인시설들에게 축복을 내려줄 것입니다. 사진 속 아이들의 인생은 ‘희망’만으로는 변할 수 없습니다. 서울장애인자립생활센터 김정훈 권익옹호국장이 지난 9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장애인차별철폐연대 등 장애인 단체들이 진행하는 프란치스코 교황 장애인수용시설 꽃동네 방문 취소를 위한 릴레이 1인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 출처 - 뉴시스 책도 많이 읽고 글도 잘 쓰는 선배가 있습니다. 책 소개와 함께 ‘내 인생에 있어 책의 의미’라는 주제로 원고를 청탁받은 후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 선배에게 책은 그저 ‘시설에서 살면서 현실을 견디기 위해 세상의 가치를 파괴하는 도구로 사용했을 뿐’인데. 장애인시설에서 살았을 때는 ‘시’를 잘 쓰던 지적장애인분이 ‘자립’한 이후 ‘시’를 도통 쓰지 않아 걱정이라는 사회복지사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저 자립하니 ‘시’도 좋지만 그보다 더 흥미로운 게 많았을 뿐일 지도요. 장애인인 친구에게 “내가 너라면 못 살고 죽어버렸을거야”라고 말한 친구에게 화를 내니 “어려움을 극복하고 열심히 노력하는 너를 칭찬한 말인데 왜 나에게 화를 내냐”며 도리어 ‘몸도 마음도 삐뚤어진 장애인’ 취급을 받았던 사람도 이 땅의 흔한 장애인의 모습입니다. 보도에 턱도 없이 잘 정비된 인도를 휠체어 타고 지나가니 ‘친절한’ 시민이 도와주셨습니다. (사실은 긴말하기 귀찮아) 도움을 받아들이니 “정말 대단하십니다”라고 인사를 건네셨습니다. 길거리를 활보하는 일이 ‘대단한’ 일이 될 때 도 많습니다. 교황의 방문으로 아마도 이런 ‘친절한’ 시민이 더 많아질 듯합니다. 친절한 시민이 많아지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왜 ‘장애인’에게는 친절‘만’할까요. 가족이 될 기회, 부모가 될 기회, 동료가 될 기회는 ‘보호’, ‘선의’, ‘친절’로 유예(사실은 박탈)되고 덩달아 ‘권리’까지 양보해야하는 것이 장애인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국민으로서의 역할이라는 암묵적 동의의 배경은 바로 이 ‘온정주의’입니다. 물론 유럽의 복지국가들도 노인을 위한 요양원도 있고, 중증의 장애아를 돌보는 의료시설도 있습니다. 그러나 꽃동네와 다른 것은 그런 곳에 살아도 여전히 ‘인격’은 남아있고 ‘관계’는 단절되지 않는 ‘편의’가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신체적 후유증이 남은 상태로 목숨만은 살려내는 진일보한 의료기술이 단순한 의사들의 기술 자랑이 아니라면 우리 사회는 ‘어떤 모습’의 ‘사람’이라도 살 수 있게 되어야 합니다. 교황님의 방문을 손꼽아 기다렸다는 그들의 말. 시설생존자들은 그 말을 믿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들도 한번쯤은 ‘후원자’의 방문만을 손꼽아 기다린 날이 있었고, 어떤 이에게는 그런 날도 없었겠지요. 왜냐면 독지가와의 만남을 위해서는 그들의 선의에 가장 많은 만족을 줄 수 있는 ‘장애아’가 선택되었을 테니까요. “가난한 사람을 돕는 활동은 자선사업에 국한되지 않고 인간 성장을 위한 구체적인 노력으로 확대되어야한다.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고 좋은 일이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인간적인 자립과 성장을 이룰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여 달라”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메시지는 전해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꽃동네가 한 때 우리사회의 소외되고 소외된 자를 위한 곳이었다면, 이제는 그 ‘힘’을 교황님의 말씀처럼 ‘인간적인 자립과 성장’을 위해 장애인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256 | 추천: 0
신하영옥/ 여성활동가 오늘 아침 너무 이른 새벽에 눈이 떠지고, 컴컴한 창밖을 내다보다 문득, 왈칵 설움에 목이 메였다. 이유도 원인도 모를 그런 서러움에 ‘삶이 지랄 같다!’는 말을 한숨처럼 토해내고는 스스로 어리둥절해졌다. 갱년기?, 교황이 떠나서?, 방학이 끝나가서?... 이런저런 이유가 될 만한 것을 찾아봤으나 헛일. 그저 비 오는 새벽의 감상이거니 하고 말아버린다. 그리고 70년대 청계천 피복노동자에서 노조간부로, 주부에서 학생으로 변모하고 성장한 한 여성노동자의 자기역사를 들여다봤다. “열세 살 여공의 삶”은 신순애가 열세 살부터 시작한 여공생활을 자기서사 형식으로 쓴 책이다. 60년대 한국은 맑스의 ‘자본의 본원적 축적’이라 불리던 현상이 발생하던 때다. 산업자본주의의 초기,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노동자들이 필요하게 된 국가는 저곡가 정책으로 노동자들의 재생산비용을 낮추려 했고 이는 농부들의 파산을 초래하게 된다. 이로 인해 농촌에서 도시로의 이주민이 증가하고, 이들은 도시 변두리에서 쪽방생활을 하면서 유일하게 가진 몸뚱이를 재산으로 노동현장으로 몰리게 되던 시기. 지은이가 지적한 것처럼 ‘일은 시키는 대로, 임금은 주는 대로’ 받아가며 하루 15-16시간씩 일하며 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임금으로 겨우 목숨만 연명하던 시기. 하루 종일 무릎 꿇은 자세로 허리 한번 펴지 못하는 노동조건에서 결핵과 같은 병과, 남녀 위계적인 노동조건에서의 성폭력, 노동자 수에 비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화장실로 인한 생리적 현상에 대한 두려움과 증오, 배고픔 등에 시달리던 현실에 대한 묘사는 ‘인간이, 인간이 아니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노동교실을 통해 한글을 배우던 어린 학생이자 노동자인 그가 그 과정을 통해 노동운동가로 성장하고 다른 여공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는 과정. 월 700원의 임금을 받아 10원(당시 대학생은 5원)하던 버스비를 30일 타게 되면 600원이 지출되어 밤11시가 넘어 끝나고도 2시간을 걸어 다녀야 했던 고통 속에서도 탈출구가 없었던 그는 노동교실과 노조활동을 통해 조금씩 승리와 자존감을 획득해 간다. ‘스스로 인간으로 우뚝 서는’ 과정이다. 결국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획득하는 것은 ‘투쟁’을 통해서임을 확인시켜준다. 인권은 피와 눈물의 역사이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럼 그 당시 그렇게 활발하던 여성노동활동가들은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 왜 그들의 존재감이 사라졌는가에 대해 밝히고 싶은 것이 실은 저자의 목적이다. 그들이 사라지게 된 배경이 남들이 말하듯이 ‘돌아갈 가정이 있기’ 때문이거나, ‘힘들어서 여성의 삶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가족 내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남성에 비해 여성이 부차적 존재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전제한 결론이다. 여기에는 국가의 치밀한 노조말살 정책과 폭력적 가부장성이 함께 작동했음을 알 수 있다. 전두환 정권의 노조정화정책으로 인한 ‘빨갱이’ 낙인, ‘블랙리스트’로 인한 해고와 빈곤의 나락,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수사관들의 성폭력은 여성노동자들이 현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수단이자 공포의 대상이, 나아가 공장 내에서의 남성들에 의한 성폭력은 여성노동자들이 피해자임에도 지탄의 대상이 되어 현장을 떠나게 하는 원인으로 작동했다고 지적한다. 그리하여 이 여성들은 자기를 감추고, 숨죽이고, 감시의 대상이 되어 10년에 14번을 이사하는 고통의 시간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즐겁게 시작했던 노조활동이 각각의 인생에 어떤 식으로든 고통과 상처로 남게 되었던 것이다. 두려움에 떠는 자신에 대한 회의까지 겹쳐 이중, 삼중의 고통으로 버텨내는 삶들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그들 대다수는 빈곤의 그늘에서 50-60대가 된 지금도 미싱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산업역군으로 불리며 박정희 군사정권의 급속한 경제성장의 동력으로 작용한 그녀들은 지금 그 정권의 딸이 집권하는 시대에도 여전히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거기에 더해 가부장적인 국가의 폭력과 성폭력으로 인한 상처까지 떠안고서, 필요할 때 동원되었다가 정치적으로는 배제되어 보이지 않는 존재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된 것이다. 서울 청계천 주변에서 빈민구호활동을 했던 일본인 노무라 모토유키가 1973년 7월에 찍은 평화시장 봉제공장 모습(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사진 출처 - 한겨레 열세 살! 초등학교 6학년. 대학생이 된 내 딸이 난 아직도 어린애만 같고 위태로워 보인다. 이러할진대, 13살에 여공생활을 하면서,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하고 종일을 구부려 일해야 했던 그와, 비슷한 다른 어린 여공들이 재단사나 공장장에 의해 성폭력을 당하고 그것이 노동착취의 협박도구로 쓰였다는 사실에 여성이기 때문에 당해야 하는 분노가 서러움으로 둔갑한다. 가족을 책임져야 했던 여공들, 그렇지만 가족 안에서 존중받지 못하고 당연한 도리로만 취급되던 그들. 노동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지 못해 성매매를 해서라도 가족을 부양했던 그들은 그러나 ‘화냥년’이 되어 가족으로부터도 외면당해야 했다. 그들은 지금 어떤 위로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을까. 교황이 다녀간 며칠, 위로와 치유의 리더십에 대한 가치와 필요성이 화제다. 우리 사회는 상처를 생산만 할 뿐 그 치유는 개인에게 맡겨버린다. 어린 여공이 노조활동가가 되어 자존감을 갖게 된 그 순간 국가는 다양한 폭력적 방법을 통해 그 자존감을 어김없이 짓밟아 자괴감으로 둔갑시켰다. 그나마도 저자는 ‘살아남은 자’에 속한다고 한다. 여전히 열악한 조건에서 미싱을 돌리며 숨죽인 존재로 살아가는 이들은 훨씬 많다. 그러나 반면, 그 때 그 여성들은 현재, 다양한 사회기관이나 조직에서 상담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 중이기도 하다. 그래서 70년대 여성노동운동가들은 여전히 사회민주화의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고 여성/노동자들의 인권, 시민권을 위한 활동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와 사회로부터 받은 상처와 아픔을 극복하고서. 지금 우리를 둘러싼 상처들, 그리고 그 상처를 둘러싼 투쟁들. 그 안에서 서로 위로하며 성장하는 또 다른 ‘여공들’이 있다. 세월호나 군대폭력을 둘러싼 아픔의 주체들은 노조활동을 통해 성장한 여공들처럼 그 투쟁을 통해 새로운 민주세력으로, 인권의 주체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아프지만 희망은 있다. 한번 깨우쳐진 권리의식은 법과 제도가 거꾸로 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인권의 지평이 확장되어 올 수 밖에 없던 이유이다. 인권의 목록은 지금도 확장되고 있다. 투쟁과 성장이 있기에 가능하다. 새벽, 눈물의 의미를 알 것도 같다. 세상을 둘러 싼 절망의 기운과 공기 속을 떠다니는 서럽고 아픈 자들의 한숨에 좀 울면 어떠리. 그럼에도 삶은 끝나지 않고 삶이 있는 한 가능성은 존재하는데. 인간이란 얼마나 아름답고 위대한 존재인가? 교황이 매일 보는 문구 중에 이런 글이 있다고 한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서로 아낀다는 뜻입니다!” 상처는 서로를 아끼게 만드는 힘이다. 힘이 도처에 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420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