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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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강대중(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도재형(이화여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윤동호(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이동우(변호사),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장은주(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정재원/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늦은 결혼으로 인해 아이가 아직 어려 육아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보육이나 영유아 교육과 관련하여 많은 고민과 연구를 하게 되는 계기도 되고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아마도 연애를 제외하고는 이렇게 이론과 실천이 다른 영역도 많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특히 보편적인 이론이 아닌 당장 내 아이의 문제로 다가오는 이 영역에 대한 대응이 좀처럼 쉽지 않다. 심지어 이 분야 전문가, 교수들조차 자신의 아이에 대한 문제에 대한 대응은 자신의 지론이나 주장과 상당히 다른 경우도 꽤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이와 함께 놀이터나 ‘키즈 카페’ 등을 다니다가 종종 마주하는 현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유달리 폭력적인 행동이나 못된 행동을 거침없이 하거나 자신의 행동을 통제 못 하는 아이들을 꽤 자주 본다는 것이다. 아직은 유아들이라 과잉행동장애니 분노조절장애니 하는 말은 어울리지 않고 누구나 성장 과정에서 그런 과정을 겪는 것이라 생각해 왔지만, 초등학교 들어가기 1-2년 전의 아이들의 모습들 중에는 분명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 행동을 하는 경우가 꽤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궁금증이 생겨 알아 본 결과 이러한 아이들의 대부분이 영어유치원에 다니고 있거나 영어를 포함한 이러저러한 조기교육들을 하고 있었다. 물론 영어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이 다 이러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아니고, 정반대로 일반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이 다 착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또한 이러한 행동을 보이는 원인들 중에는 부모들의 양육 태도 등에도 원인이 있기에 섣부른 단정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설사 영어유치원이 아니더라도 일반 유치원에서도 영어를 포함한 조기인지교육이 경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 속에서 영어를 포함한 다양한 조기교육들이 아이들의 정서발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한국 사회의 보육과 양육과 교육에 다양한 문제가 있지만, 아마도 이러한 문제들 중 가장 큰 문제는 조기인지교육이라는 보도들을 접한 바 있다. 그리고 그러한 조기인지교육 중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영어인지교육이라는 사실도 크게 회자되어 왔다. 영어를 비롯한 이러저러한 조기인지교육의 효과성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끊이지 않고 있다. 언어 습득의 결정적 시기가 있다는 논리나 영유아의 뇌발달 이론을 이용한 정반대의 논리로 조기인지교육의 효과성을 이야기하는 사교육시장을 주도하는 집단들의 주장도 만만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여러 전문가들 중 소아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 대부분은 조기영어교육, 특히 영어유치원과 같은 영어전문학원 형태의 조기영어교육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보고 있다. 이들은 거의 공통적으로 학업 스트레스와 낮은 학습효과는 물론 다른 부분에서의 창의력이나 학습능력에서의 자율성 저하 등을 지적하고 있다. 영어 외에도 사교육의 종류가 많아질수록 아동들이 부모와의 애착이나 또래 상호작용 등을 하지 못 해 정서적으로 많은 부분이 형성되는 이 시기에 획득해야 할 것들을 획득하지 못 한다고 지적한다. 무엇보다도 정신건강에 부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데, 자신감과 집중력 저하, 부모 등 대인관계 형성의 어려움, 그리고 각종 정신적 장애를 겪는 등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여전히 많은 학부모들은 이러한 조기인지교육이 얼마나 심각한 정신건강을 파괴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학부모들조차 다양한 이유로 아이들을 영어를 비롯한 조기인지교육 시장으로 밀어 넣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어떠한 논란이 있든지 간에 이러한 인지교육이 아이들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있다는 점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인지교육이 어린 아이들을 고통 속에서 신음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많은 학부모들은 극심한 경쟁사회 속에서 자신의 아이가 뒤처지지 않도록 혹은 앞서서 나가도록 조기인지교육에 아이들을 보내고 있다. 그렇게 영유아 단계를 넘기고 나면 말 그대로 인지교육을 시켜도 되는 나이가 된 뒤로부터는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끔찍한 무한경쟁교육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이때는 이미 인지교육을 넘어 수 학년 뒤의 공부까지도 완결해야 하는 단계로 넘어간다. 영어, 국어(논술), 수학은 물론 거의 모든 과목에서 아이들은 슈퍼맨이 되어야 한다. 문제는 영유아 단계서부터 감정과 감성의 발달이 지체된 체, 억지로 구겨 넣어진 온갖 지식들과 테크닉들로 인해 아이들은 화려한 언변을 보이며 풍부한 지식을 갖춘 것처럼 보여지지만, 동시에 아이들의 마음속에는 무서울 정도로 이기적이고 폭력적이며 타인을 배려할 줄 모르는 괴물이 될 수 있는 요소들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이렇게 키워진 아이들은 공감능력이 떨어져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들을 천하게 보거나 얕잡아 보고 배제하는 데 익숙해지며 심지어는 폭력도 서슴지 않게 된다. 뿐만 아니라, 자주적이고 자율적인 학습 경험이 없어 비판적 사고를 할 줄 몰라 지배 이데올로기에 쉽게 세뇌되고 사회 문제를 가난하고 게으른 자의 문제로 보는 경향을 갖게 된다. 이러한 무한 경쟁 교육 속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되는 소수의 상층 학생들은 더 나은 출세를 향해 달려가면서 더더욱 사회적 연대나 책임, 그리고 민중에 대한 고민은커녕 정반대로 적극적으로 사회기득권이 되기 위한 궤변들을 만들어 내는 데 더 익숙해진다. 이제는 진리를 알아가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선대의 특권을 이어 받거나 새로이 만들고 지키기 위한 노력에 몰두한다. 이를 위해 정의나 공정, 민주주의와 인권, 평등과 복지 등을 쟁취하기 위한 희생이 아니라, 기성세대가 만든 보수 집단의 기득권과 특권 체제를 유지하고 확대하기 위한 편법과 아첨, 불공정과 부패, 배제와 차별과 같은 논리에 더욱 익숙해져 간다. 일베로 상징되는 한국사회의 병리적 현상의 사회적 토대 또한 바로 지금과 같은 끔찍한 ‘극단적 차별과 배제에 근거한 무한경쟁, 무한경쟁에 의한 국가 경제 발전’ 논리에 근거한 교육 시스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추락하는 이들에 대한 사회적 보장 제도는커녕 기본적인 인간적 애정도 없고, 추락은 하지 않았으나 경쟁 속에서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을 치유하는 제도 따위에는 관심도 없는 대한민국의 위정자들은 오히려 지금보다 더 많은 경쟁을 강요하고 그에 반하는 움직임에 반대하고 있다. 이러한 국가의 인위적 방치와 적극적 방조 속에서 기득권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의 탐욕을 위한 개혁 반대로 인해 이제는 이 끔찍한 현실을 마주하게 되는 나이가 심지어 2-3세까지 내려가 있는 대한민국 사회의 썩어 들어가는 상황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 이 글은 2015년 11월 18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489 | 추천: 0
이광조/ CBS PD  나이가 깡패라는 말이 있다. 장유유서로 대표되는 뿌리 깊은 유교문화에 위계를 강조하는 군사문화가 겹쳐져 어디를 가나 나이를 따진다.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한참 열을 내며 싸우다 나이를 따지는 모습은 우리의 흔한 일상이다. ‘너 몇 살이야!?’ 쌍욕을 하며 싸우던 마당에 ‘민증’을 깐들 뾰족한 수가 있을까만, 우리는 같은 해에 태어난 사람들끼리도 ‘빠른 몇 년 생’, ‘늦은 몇 년 생’을 따질 정도로 나이에 민감하다.  나이를 따져 서열이 정해지고 나면 자연스레 호칭이 정리된다. 형, 형님, 언니...  하루라도 세상을 더 산 사람의 경륜을 존중하는 건 나쁜 일이 아니다. 자기보다 어린 사람을 배려하고 보살피는 것도 좋은 일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너무나 잘 알고 있듯이 현실은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다. 말만 놓으면 좋으련만 나이를 따져 서열을 정하는 우리의 미풍양속은 너무도 쉽게 폭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1년 일찍 들어왔다고 신입생들을 이리 저리 굴리며 군인 흉내를 내는 대학생들을 보라. 전철이나 버스 안에서 젊은 사람이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고 쌍욕을 내뱉거나 심할 경우 손찌검까지 하는 노인들은 또 어떤가. 극소수의 사례라고 생각하지만 이런 경우 그 ‘싸가지 없는 젊은 것’이 임신부든 아니면 몸이 아파서 병원에 다녀오던 길이든 개인적인 사정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 상대방의 처지를 헤아리는 소통의 기본은 사라지고 일방적인 폭력만이 남을 뿐이다.  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나이에 따른 서열화에는 큰 장점도 있다. 학력, 재력,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사회가 나이에 따라 서열화 된다면 그만큼 평등한 질서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 어디 그런가. 모두에게 평등하게 주어지는 나이는 가장 미약한 권력 자원일 뿐이다. 거대한 권력 앞에서 나이 같은 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새파란 검사들이 ‘영감’으로 불리던 게 먼 옛날의 일이 아니다. 돈이든 지위든 사회적으로 희소한 무언가가 부가되어야 나이는 제대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이도 저도 없으면 하다못해 완력이라도 있어야 한다. 건장한 체격의 젊은 남성이 자리 양보를 안 한다는 이유로 쌍욕을 듣는 광경을 보기는 힘들다. 결국 핵심은 권력관계인 셈이다. 채널A ‘김승련의 뉴스10’가 지난 4일 보도한 영상. 사진 출처 - 미디어오늘  얼마 전 여당 대표가 “너는 뭐 쓸 데 없는 소리를 하고 앉아 있어”라고 말하며 기자를 타박했다는 기사를 접한 적이 있다. 기사를 꼼꼼히 읽기 전에는 두 사람이 사석에서 호형호제하는 친밀한 관계인 줄 알았다. 정치인이든 기자든 행세 꽤나 한다는 엘리트들이 지연, 학연으로 모두가 선후배로 연결되는 사회에서 친한 사이라면 그 정도 얘기도 못하겠는가. 한데 기사를 끝까지 읽고 보니 그런 게 아니었다. 기자는 여당 대표의 비공식 수행 비서를 지냈던 사람이 구속된 것에 관해 여당 대표의 입장을 물어본 것이었는데, 여당 대표가 기분이 팍 상해버린 것이었다.  그는 평소에도 기자들을 ‘야 이 놈들아’라고 격의 없이 부르며, “기사 잘 써야 돼. 기사 엉터리로 쓰면 나한테 두들겨 맞는다”는 발언도 스스럼없이 한다고 한다. 주변에서는 이런 ‘호탕한’ 언행을 부러워하는 분위기도 있는듯하다. 당사자는 젊은 기자들이 다 ‘아들 , 딸’ 같아서 그러는 거란다. 하지만 언론소비자의 한 사람으로 기자들이 정치인들에게 이런 대접을 받는 모습이 참 불편하다. 기자들에게 ‘니는 어디 소속이고?’라고 묻는 말이 ‘너그 아부지 머 하시노?'라는 말과 겹쳐진다. 학교 다닐 때 많이 듣던 말 아닌가. 이런 관계에서 권력과 언론의 긴장이나 언론의 파수꾼 역할 같은 얘기는 공허할 따름이다. 둘 중 하나다. 하대를 받아들이고 친숙해져서 ‘선배, 선배’ 부르며 권위에 복종하든가 돌아서서 욕하며 이를 갈든가. 어떤 선택을 하든 제대로 된 비판과 소통은 불가능하다. 마음에 안 든다고 기자들에게 ‘아군이냐 적군이냐’를 강요해서야 되겠는가. 우선 반말부터 그만뒀으면 좋겠다. 이 글은 2015년 11월 11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572 | 추천: 0
: ‘알 하람 알 샤리프, 알 아크사 모스크 현상유지’에 대한 이스라엘의 도전 홍미정/ 단국대 중동학과 조교수 □ 알 하람 알 샤리프, 알 아크사 모스크 ‘현상유지’란? 동 예루살렘에 위치한 알 하람 알 샤리프, 알 아크사 모스크는 메카, 메디나에 이어 이슬람교의 3번째 성지이며, 무슬림들이 메카를 향해 기도하기 이전에 최초로 기도하던 방향이었다. 624년까지 예언자 무함마드와 무슬림들은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했다. 그래서 알 아크사 모스크의 다른 이름은 끼블라(예배 방향) 모스크다. 2015년 4월 20일, 유네스코(UNESCO)는 ‘알 아크사 모스크란 알 무가라비 게이트를 포함한 알 아크사 모스크를 둘러싼 신성한 복합단지 전체’라고 정의하고, 이스라엘에게 ‘현상유지를 해치는 알 하람 알 샤리프, 알 아크사 모스크에서 모든 발굴 작업과 파괴 행위를 중단’하도록 요구했다. 일상적으로 이스라엘 군인들은 알 아크사 모스크의 모든 출입구를 통제하면서, 팔레스타인인들의 기도할 권리를 박탈해왔다. 게다가 이스라엘 정착민들과 군인들은 도발적으로 알 아크사 모스크에 들어와서 자유롭게 휘젓고 다니면서, 총격을 가하는 등 파괴적인 행위를 했다. 이러한 행위에 반대하면서, 2014년 11월 이스라엘 세파르디 랍비 수장인 이츠하크 요셉(재임 2013-현재)은 “유대인들의 템플 마운트(유대인들이 알 아크사 모스크 복합단지를 지칭하는 용어) 방문은 유대교법으로 금지되어 있다.”고 밝혔다. 2013년 2월 이스라엘 아쉬케나지 랍비 수장 데이비드 라우(재임 2013-현재)도 유대인들의 템플 마운트 방문을 금지하였다. 1921년 영국 위임통치하의 초대 아쉬케나지 랍비 수장이었던 아브라함 이츠하크 쿡이 유대인들의 템플 마운트 방문을 금지한 이후, 대부분의 이스라엘 유대교 랍비 수장들은 유대인들의 템플 마운트 방문을 금지하였다. □ 영국 위임통치 정부의 알 하람 알 샤리프와 서쪽 벽 소유권 정의 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하에서 알 하람 알 샤리프와 서쪽 벽에 대한 무슬림들과 유대인들의 분쟁이 시작되었다. 무슬림들은 이 벽이 ‘알 아크사 모스크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유대인들은 이 벽이 ‘과거 유대교 성전의 흔적을 보존’한다고 주장한다. 1922년 영국 위임통치 정부는 현상유지 협정(a Status Quo Agreement)을 공포하고, 유대인들이 서쪽 벽에 대한 소유권과 통제권을 주장하거나 이 벽과 그 주변을 강화하거나 가로막기 위하여 어떤 것을 설치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1928년 11월 영국정부 백서는 이 벽에 대한 무슬림들의 권리와 소유권을 다음과 같이 확증하였다. “이 벽은 알 하람 알 샤리프의 일부다. 이 벽은 무슬림들의 성지이며, 법률적으로 무슬림 공동체의 완전한 재산이다. 와끄프 관리자가 보전한 문서들이 보여주듯이. 그 앞에 있는 포장된 길쭉한 지역은 와끄프 재산이다.” 1930년 12월 서쪽 벽에 관한 영국 조사위원회 보고서는 “서쪽 벽은 알 하람 알 샤리프의 일부로 알 하람 알 샤리프 서쪽을 둘러싸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러한 공개적인 조사 발표와는 달리, 영국 당국자들은 유대인들이 기도하는 동안에 서쪽 벽에 대한 일반 대중의 접근을 제한했고, 예배 장치들을 설치하고, 사실상 이 벽을 ‘유대구역’으로 전환시키도록 허용하였다. 이러한 영국위임통치 정부의 이중적인 정책은 팔레스타인 무슬림들에게 예루살렘 성지, 알 하람 알 샤리프를 위협하는 유대인들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유발시켰다. 예루살렘 구도시 전경. 오른쪽이 바위돔 모스크(황금돔)이고 반대편 왼쪽의 검은돔이 알 아크사 모스크이다. 알 아크사 모스크는 예루살렘 구도시 중심에 있는 하람 알 샤리프의 매우 상징적인 장소이다 사진 출처 - 필자 □ ‘현상 유지와 유엔 결의 위반’하는 이스라엘의 정책 1967년 6월 7일 이스라엘은 요르단을 축출하고 알 하람, 알 샤리프를 포함한 동 예루살렘을 점령하였다. 1967년 6월 27일, 이스라엘은 법과 행정 조례를 변경하여 동 예루살렘을 서 예루살렘과 통합함으로써 이스라엘 영토로 전환시켰다. 1980년 7월 30일 이스라엘 의회는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 기본법’을 제정하면서,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라고 공포하였다. 한걸음 더 나아가 1984년 이스라엘은 일방적으로 서쪽 벽을 ‘이스라엘 국가 재산’으로 등록했다. 그러나 이미 1967년 11월 22일 유엔 안보리 결의 242호는 이스라엘에게 1967년 전쟁에서 점령한 영토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하였다. 1980년 6월 30일 유엔 안보리 결의 476호, 1980년 8월 20일 478호는 이스라엘의 점령 종결을 요구하고, 동시에 예루살렘 지위 변경 무효를 재차 선언하면서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 기본법 무효’를 선언하였다. 이와 같이 유엔은 이스라엘의 동 예루살렘 합병을 인정하지 않고, ‘예루살렘 성지의 특성과 지위를 변경시켜온 모든 조치와 행위들을 무효’라는 입장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2015년 10월 16일 이스라엘 유엔주재 대표 다니 다논은 알 아크사 모스크에 대한 유엔 차원의 논의를 거부하면서, 이스라엘은 현상유지를 해치는 알 아크사 모스크에 대한 어떤 국제적인 개입도 거부한다고 밝혔다. 2015년 10월 21일 유네스코는 알 아크사 모스크에 대한 무슬림들의 출입을 제한하는 이스라엘 조치를 비난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10월 20일 알제리, 이집트, 쿠웨이트, 모로코, 튀니지, 아랍에미리트가 제출한 이 결의안 초안은 이스라엘이 무슬림들에게 부과한 하람 알 샤리프(예루살렘 구 도시), 알 아크사 모스크 출입제한 조치를 비난하면서, 서쪽 벽을 ‘알 아크사 모스크의 일부라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유네스코는 이 결의안을 채택하기 직전에, 매우 논쟁적인 주제인 서쪽 벽을 ‘알 아크사 모스크의 일부라고 규정’한 조항을 빼버렸다. □ 팔레스타인인들은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최근 더욱 강화된 알 아크사 모스크에 대한 이스라엘의 출입제한 조치, 이스라엘 군인과 정착민들이 빈번하게 저지르는 알 아크사 모스크에서의 폭력적인 행위, 게다가 이스라엘이 알 아크사 모스크를 분할계획하려 한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면서 팔레스타인인들의 분노를 격화시킴으로써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유혈 폭력사태를 촉발시켰다. 올해 들어 팔레스타인 사회에 널리 퍼진 소문은 “1994년에 발생한 헤브론 아브라함 모스크 분할 전례를 따라, 이스라엘인들이 예루살렘 알 아크사 모스크도 분할하여 유대구역을 만들려고 한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인들은 1994년 헤브론 아브라함 모스크가 분할된 것처럼, 예루살렘 알 하람 알 샤리프, 알 아크사 모스크가 분할될까봐 매우 두려워한다. 1994년 2월 25일 미국 태생의 이스라엘 정착민 골드스타인이 헤브론 아브라함 모스크에서 예배 중이던 무슬림들을 공격하여 29명을 살해하였다. 이후,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모스크를 이슬람 모스크와 유대 시나고그로 분할하였다. 대부분의 미디어들은 아브라함 모스크 테러 사건을 골드스타인 개인의 행위로 보도하였으나, 팔레스타인인들 대부분은 아브라함 모스크를 분할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정부가 기획한 것으로 믿는다. 현재 이스라엘 군인들이 헤브론 아브라함 모스크와 그 주변을 완전히 통제함으로써, 이 지역은 팔레스타인인들이 거의 생활할 수 없는 구역으로 변화되었다. 2015년 10월 1일부터 10월 23일까지 57명의 비무장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 군인들과 정착민들의 공격으로 사망하고, 8명의 이스라엘인들이 팔레스타인인들의 공격으로 사망하였다. 베들레헴 대학 강사인 루바바 사브리에 따르면, 여학생들은 무서워서 혼자 다닐 수 없고, 남학생들은 거리에서 체포될까 두려워 학교에 오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2015년 10월 23일, 이스라엘 총리 네타냐후는 “이스라엘 정부는 ‘알 아크사 모스크 복합단지 현상유지’ 정책을 견지한다. 이스라엘이 현재상태를 변경시키려고 한다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주장은 실수이거나 고의적인 속임수다”고 주장했다. 2015넌 10월 24일 미 국무장관 존 케리는 요르단 암만에서 왕 압둘라와 팔레스타인 수반 압바스를 만난 이후, “긴장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알 아크사 모스크 전역을 24시간 감시하는 카메라를 설치할 것이다. 카메라 설치는 정말로 동 예루살렘 성지의 게임 체인저가 될 것이다. 알 하람 알 샤리프/템플 마운트에 대한 네타냐후의 변함없는 현상유지 정책을 재확인해서 기쁘다.”고 밝혔다. 유네스코-국제사회와 네타냐후-존 케리가 사용하는 ‘현상유지’의 의미는 명백히 서로 충돌하는 것으로 보인다. 유네스코-국제사회가 의미하는 현상유지는 ‘이스라엘의 공세적인 점령정책의 중단’이며, 네타냐후-존 케리가 의미하는 현상유지는 ‘불법적인 이스라엘 점령정책 강화’다. 이 글은 2015년 10월 28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628 | 추천: 0
정보배/ 출판 기획편집자 “음... 들살이 가기 전에 시우에 대해 부모님과 얘기를 먼저 나누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반기 부모 면담을 해야 하니 조금 당겨서 하는 것이 어떨까요?” 터전살이를 끝내고 며칠 뒤, 시우의 담임은 내게 부모 면담을 요청했다. 시우는 올 3월부터 공동육아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다. 올해 다섯 살이다. 시우가 다니는 어린이집은 매해 가을 5세부터 7세까지 1박2일로 들살이를 다녀오는 교육을 하고 있다. 민속마을에서 자연을 체험하고 하룻밤을 친구들과 선생님들과 함께 지내고 오는 일정이다. 5세 아이들은 부모 없이 집이 아닌 장소에서 잠을 잔 경험이 대체로 없기 때문에, 들살이의 전초전으로 터전(어린이집)에서 먼저 하룻밤을 부모와 떨어져 자는 연습을 한다. 그걸 터전살이라고 부른다. 나는 시우의 터전살이에 대해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시우는 큰고모댁에서 이미 이틀이나 부모 없이 자고 온 적이 있었고 평소 분리불안이 큰 아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터전살이를 한 다음날 아침 아이를 데리러 갔을 때 나는 뜻밖의 결과에 무척 놀랐다. 밤새 가장 많이, 가장 오래 운 아이가 시우였다는 것이다. 담임은 그날 밤의 경험과 그 즈음 시우의 행동들에 대해 부모와 얘기를 나누고 싶다는 사인을 보내왔다. 예정보다 부모 면담을 앞당겨서 할 만큼 시우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일까? 담임의 예상치 못한 이야기들에 나는 어떤 반응을 어디까지 보여야 하는 것일까? 취업 인터뷰도 이렇게나 신경이 쓰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내게 두 가지 숙제가 던져졌다. 하나는, 어째서 시우는 나의 예상과 달리 많이 울었던 걸까? 그 이유를 알아내고 어떻게 들살이를 보낼 수 있을지 판단을 하는 것. 두 번째는 시우의 즉각적이고 히스테릭한 감정 표현, 소리를 갑자기 지른다거나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울기부터 하는 행동이 왜 부쩍 심해진 것일까? 시우는 올해 두 번의 집 이사를 경험했다. 3월에는 새로운 어린이집에 다니게 됐고. 6월초와 8월말에는 집을 이사했다. 터전에서의 생활은 6개월을 넘어서면서 많이 익숙해졌지만, 새 집으로 이사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상황에서 경험하게 된 터전살이는 ‘무서웠’던 것 같다. 아직 새 집에서 1층이든 2층이든 혼자 있는 걸 무서워하는 정도니까, 공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는 상태에서 안정감을 주는 엄마가 옆에 없는 것을 견디지 못한 것이 아닐까. 큰 소리로 운 것이 아니라 훌쩍훌쩍 계속 울었다는 얘기를 들으니 시우가 안쓰러웠다. 밤에 아이들이 번갈아 울고 몇몇 아이들은 오줌으로 이불을 다 적시는 통에 한잠도 못 잔 담임도 안쓰럽기는 마찬가지. 두 번째 고민은 들살이 준비와는 무관하지만 실상 더 골머리를 앓고 있던 내용이었다. 결국 부모 면담에서 솔직하게 나의 ‘준비된’ 답은, 시우에게 나는 너무 엄격한 엄마라는 것. 사실이다. 나는 시우에게 많은 시시한 것들을 ‘엄격’하게 또한 엄하게 못하게 하고, 나쁜 감정 표현을 억눌렀다. 누구나 원하는 대로 안 되면 기분이 나쁘고 그 나쁜 기분을 어떻게든 해소하고 싶은 것인데, 아이라고 다를 리 없을 텐데. 아이가 그림 그리다 마음대로 안 그려졌다고 종이를 마구 구기는 게 뭐가 잘못된 것이라고 나는 종이 구긴다고 아이를 타박한 것일까. 종이는 찢어지고 구겨지라고 있는 것인데. 아이가 조금이라도 반듯하지 못하고 부정적인 표현을 행동으로 하는 것을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오히려 내 쪽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직장인으로 절제된 감정표현에 익숙하다 보니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에도 감정 표현이 밋밋하게 나온다. 직장생활로 돌아가기 전 아이와 온종일 집에서 지낼 때는 분명 이렇지 않았다. 기쁜 감정은 더 기쁘게, 아이가 즐거워하면 같이 온전히 즐거워할 수 있었는데 다시 직장인으로 돌아간 지 3년쯤 되니 무색무취한 감정 표현의 인간이 돼버린 것 같다. 감정에 충실하라, 직장인 콘셉트에서 엄마로의 빠른 전환이 짧디 짧은 저녁 시간에 얼마나 가능할지. 사진 출처 - 맘앤앙팡 부모 면담을 끝낸 후 들살이까지 일주일의 시간 동안, 우리 부부는 열심히 시우와 들살이를 준비했다. 시우는 여전히 자신은 들살이를 가면 분명 울 것 같은데 어떡하냐고 걱정이었다. 자신이 울면 다른 사람들이 힘들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울어도 괜찮아, 금방 자고 나면 엄마를 다시 볼 수 있잖아, 그러니까 조금만 울고, 응?” “시우야, 이 조그만 코끼리 인형이 너를 지켜줄 거야, 엄마가 가방에 달아줄게. 무서우면 코끼리 인형을 안고 자.” “여자 친구들 사이에서 자면 괜찮을 거야, 혹시 그래도 무서우면 태연아, 나 무서우니까 손 좀 잡고 자도 돼? 하고 물어봐.” 등등. 시우는 매번 알았다고 내 말을 따라 연습도 해보고 확인도 여러 번 했다. 들살이를 떠나는 아침, 다행히 시우의 컨디션은 좋았고, 지금껏 마음을 다져온 덕분인지 자신감도 있어 보였다. 들살이에서 돌아온 시우. “안 울었어. 토끼불이 있어서 안 무서웠어.” 누군가 들려 보낸 작은 토끼 수면등이 큰 역할을 했구나. 그러니까 무엇보다 깜깜한 것이 무서웠던 것이다. 잠도 같은 반 여자아이도 담임도 아닌, 6세 남자아이와 원장님 사이에서 누워 잤다고 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인 듯 무심하게 얘기하는 시우. 몇 주간 가슴 졸이며 걱정했던 아이의 첫 외박이 무사히 끝이 나서 정말 다행이긴 한데, 아이보다 더 불안해하며 혼자 앞서 소란 피운 것 같아 겸연쩍기도 하다. “교육이란 부모가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자신의 세계에서 갈고닦으며 쟁취해가는 것이 아닐까.”(시모주 아키코, 『가족이라는 병』 중에서) 이 글은 2015년 10월 21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501 | 추천: 0
정지영/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사무국장 헌법 제34조 1항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 헌법 제34조 2항 국가는 사회보장·사회복지의 증진에 노력할 의무를 진다. 이제 말하기도 지쳤지만 대한민국 국민들은 거꾸로 가는 시계가 언제 제자리로 돌아올지 암담하기만 합니다. 위의 헌법이 과연 대한민국의 헌법인지 확인하고 또 확인해 봅니다. 복지재정 효율화. 증세 없는 복지처럼 두 단어는 어색하기만 합니다. 최근 국무총리실 사회보장위원회는 ‘지방자치단체 유사·중복 사회보장사업 정비 추진방안’을 의결하고 보건복지부는 곧바로 정비지침을 각 지자체에 통보하였습니다. 2015년이 100일도 남지 않았지만 2016년 각 지자체 예산에 반영될 수 있게 긴박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유사·중복 사회보장사업이란 무엇일까요? 비슷하거나 겹치는 것이 있다면 정리하는게 당연하겠죠. 그러나 5,891개의 지자체 자체 사업 중 1,496개의 유사·중복사업 정비목록은 각 지자체 각 분야의 정비계획을 통해 드러나기 시작하는 걸 보며 ‘아!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고, 없는 사람 목을 조르는구나!’라고 탄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업들이 노인·장애인·아동·저소득 계층 등 우리 사회의 취약계층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입니다. 무려 1조원에 달하고 기존 사업들의 대상자만 650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장애인의 예만 몇 가지 들겠습니다. 먼저 장애인 활동지원 시 추가지원 사업은 보건복지부 발굴사업에 들어있습니다. 활동지원제도는 장애인의 일상생활과 사회참여를 지원하기 위하여 국가가 유급인력을 지원하는 제도입니다. 보건복지부에서는 최중증 장애인에게 최대 하루 13시간을 지원합니다. 하루 13시간 지원도 최중증으로 독거 상태여야만 가능한 시간입니다. 이 부족한 시간으로 인해 홀로 남아있던 김주영, 오지석 동지 등이 사망한 사건 이후로 지자체에서는 자체 조례를 통해 24시간을 채워 주었습니다. 광주광역시의 경우 처음 4명의 장애인에게 지원해주던 것을 20명까지 늘릴 계획이었으나 이미 보건복지부의 제동으로 10명만 지원받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 사업도 보건복지부의 지침에 들어있는 통폐합 대상에 들어있습니다. 사회보장사업 정비추진을 반대하며 국회에서 여야 원내대표 면담을 요구하고 있다. 사진 출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국가는 사회보장·사회복지의 ‘증진’에 노력할 의무를 져버리고 효율이라는 이름의 예산축소, 복지후퇴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농아인들을 위한 자막방송이나, 행사에서 수화통역을 해주시는 분들을 예전보다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각 지자체가 지원하는 수화통역센터에서 나오신 분들입니다. 수화통역센터를 통해 더 많은 청각장애인이 일반 행사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고 일상생활과, 병원, 법원, 학교 등 수화통역사를 파견 받아 사회활동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한국정보문화진흥원에서 운영하는 손말이음센터의 ‘농인영상중계통역서비스’와 유사하다며 예산지원을 중단하거나 축소하려고 합니다. 정부는 ‘맞춤형 복지’의 시대로 전환한다고 합니다. 누구 기준의 맞춤인지 모르겠습니다. 정부예산이 적자나는 것에 맞추는 복지 인가요? 당사자의 입장에서 필요한 서비스를 중앙정부가 담보해주지 못하기에 지역주민복지를 주 사무로 하는 지자체에서 주민이 뽑은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자치의원들이 조례를 제정하고 합의하여 만든 사회보장 사업을 정부가 무슨 권한으로 통·폐합을 요구하는 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정부가 생각하는 ‘협의’는 ‘합의’ 또는 정부의 ‘동의’입니다. 각 지자체에 검토하라고 했을 뿐 강제한다고 한 적 없다고 하지만, 중앙정부와 협의 없이 진행한 사업비만큼 지방교부세에서 제하고 내려줄 수 있게 관계법령을 개정하고, 통폐합 검토 성과에 따라 지방단체 평가에 반영할 수 있게 한 것이 강요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다시 한 번 헌법 34조 1항과 2항을 되새겨봅니다. 사회의 저소득층, 장애인들도 ‘모든’ 인간들이 가지는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가 있다는 것, 사회보장의 효율화가 국가의 의무인 사회보장 증진과는 다른 말이라는 것을 박근혜 대통령의 머릿속에 어떻게 넣을 수 있을까요! 이 글은 2015년 10월 14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396 | 추천: 0
이문영/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 광복 70년, 분단 70년을 맞는 올해는 한국과 러시아가 정식으로 국교를 맺은 지 4반세기가 되는 해이기도 하다. 지금부터 25년 전, 아직 소련이 해체되기 전인 1990년 9월 30일, 노태우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정상회담 결과에 따라 양국 외무장관이 유엔본부에서 ‘한·소 수교 공동성명서’에 서명했다. 일찍이 1884년 조·러통상조약으로 처음 서로 맺어졌지만, 러·일 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한 후 조약은 휴지조각이 되어버렸고, 이후로도 분단과 냉전 등으로 오랜 기간 적국일 수밖에 없었던 양국 역사를 떠올리면, 당시 수교는 거의 100년 만에 맞는 경사였다. 수교 25주년을 기념해 올해 한국과 러시아 양국에서 많은 행사가 열렸다. 수교일인 지난 9월 30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25주년을 축하하는 기념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정의화 국회의장이 이끈 방러 의원단을 포함해, 러시아 상하원 부의장, 정관계, 재계 인사 등 800여 명이 행사에 참석했고, 박근혜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의 축하 메시지가 오갔다. 올 여름을 뜨겁게 달군 ‘유라시아친선특급’, 즉 블라디보스톡에서 베를린까지 14,400km를 19박 20일에 걸쳐 관통하는 평화기원열차대장정의 주요 목적 중 하나도 한·러수교 25주년을 축하하는 것이었다. 그 외에도 한·러교류협회, 국제무역연구원, 한국노어노문학회, 한·러오페라단 등 다양한 관련 기관이 수교 25주년을 기념하는 학술행사나 페스티벌, 전시회를 열었다. 그 중에서 필자에게 확 다가온 것은 경주 우양미술관에서 열린 한·러 미디어아트 전시회 <실재와 가상의 틈>이었다. 전시회의 제목인 ‘실재와 가상의 틈’은 현실과 허구, 사실과 이미지 사이의 예술적 긴장에 주목하는 팝아트도 의미 있겠지만, 수교 25주년을 맞는 한·러 관계의 실상에도 정확히 대입될 수 있을 거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실재와 가상의 경계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미디어아트 작가들의 독특한 시선과 표현방식을 소개하는 경북 경주 우양미술관의 ‘실재와 가상의 틈, 한국-러시아 미디어아트의 오늘’전에 소개된 작품들. 레오니트 티시코프의 ‘타이완의 사적인 달’. 경주 우양미술관 사진 출처 - 서울신문 사실 수교 후 25년이 흐르는 동안 한·러 관계는 양적으로 커다란 진전을 보였다. 이를 가장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각종 경제 지표들이다. 일례로 한·러간 교역 규모는 1992년 1.9억 달러에서 2014년 258억 달러로 약 135배 증가했다. 한국의 대 러시아 연평균 수출규모는 22.4%, 수입규모는 27.5%씩 성장해, 1990년 수교 당시와 비교할 때 수출은 86배, 수입은 209배 증가했다. 2014년 기준으로 러시아는 한국의 12번째 수출상대국이자 11번째 수입상대국이다. 특히 박근혜 정부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와 푸틴의 신동방정책이 만나 그 전진기지가 되는 러시아 극동의 경우, 한국은 러시아 극동의 제1수출국이자 제3수입국으로, 해당 지역 전체 교역액의 약 26%가 한국을 파트너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이러한 지표들, 기호들 뒤에 숨은 실재는, 실상은 어떠할까? 나아가 4반세기에 걸쳐 교류하며 만들어져 한국에 소통되는 러시아에 대한 기호와 이미지는 그 사실과, 실재와 얼마나 일치할까. 러시아 전문가로서 필자가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러시아에 대해 말하기 전에, 러시아에 대해 말해야 할 필요를 늘 먼저 설득해야 한다는 점이다. 식민, 분단, 냉전과 탈냉전의 근현대사를 얼핏 떠올리기만 해도 제정러시아로부터 소련, 그리고 현재의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러시아가 한반도와 동북아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쳐왔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힘들다. 굳이 멀리 가지 않더라도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 등 현 정부의 주요 외교정책도 러시아를 제외한 채로는 실현이 어렵다. 경제적 차원의 의미는 이미 밝힌 바와 같다. 그럼에도 한국인의 의식 속의 러시아는 여전히 멀고 낯선 외국이고, 매번 새로이 관계의 의미가 해명되어야 하는 부차적인 파트너다. 러시아에 대한 표상은 사회주의 종주국이자 냉전의 주축이었던 과거의 위압적 모습, 다른 한편으로는 오일 머니로 좀 살만해진, 그러나 몰락한 제국의 이미지 사이를 극단적으로 오간다. 이 과장된 공포와 부당한 폄하 사이, 그 속 어디에도 진짜 러시아는 없다. 이렇듯 러시아에 대한 정치·경제지리와 심상지리 사이의 간극은 러시아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를 방해하며, 이것이 또 다른 차원의 ‘실재와 가상의 틈’을 만들어낸다. 러시아에 대한 선언적 이해만으로 추진되는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의 요란한 팡파레 아래, 실제 러시아 극동지역의 우리 기업이나 사업가들은 악전고투하고 있다. 일례로 현대중공업이 무려 5천만 달러를 들여 2013년 완공한 블라디보스톡의 고압차단기 공장은 한 번도 기계를 돌려보지 못한 채 쭉 멈춰 서 있다. 한국 영농기업인 아그로상생은 농수로 권리를 두고 현지 중국인은 물론, 러시아 연해주 정부와 힘겨운 소송 중이다. 올 여름 필자가 만난 블라디보스톡의 한국기업 지상사 관련자들에게 유라시아 이니셔티브가 ‘독려’하는 장밋빛 미래는 그 자체로 또 하나의 멍에였다. 수교 25주년을 맞은 한·러 관계가 짧다면 짧지만 길다면 길 4반세기에 걸맞은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러시아라는 실재와 가상의 틈, 그 간극이 최소화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실재와 가상, 사실과 이미지의 완전한 일치는 불가능하다. 사실 어떤 것이 실재이고 어떤 것이 이미지인지 명확히 선을 긋는 것조차 힘들다. 또 가상이, 이미지가 실재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한·러 미디어 아트 전시회는 실재와 가상 사이의 그런 유희적 관계, 그것이 만들어내는 예술적 효과를 타깃으로 한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예술이 아니다. 현실에 필요한 건 불가능하더라도 최대한 실재에 다가가 보려는 노력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직까지도 러시아는 그 어떤 나라보다 그런 노력이 많이 요구되는 대상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다소 생뚱맞을지 모르지만 영화 <매트릭스> 속 모피어스의, 또는 지젝의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란 말이 떠오른다. 사막일지라도 러시아의 실재에 가닿아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 글은 2015년 10월 7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610 | 추천: 1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프랑스의 사회인류학자이자 민족지학자인 알랭 테스타(Alain Testart, 1945∼2013)가 쓴 『불평등의 기원』(이상목 옮김, 학연문화사, 2006)이라는 책을 읽고서, 원시 사회에서 사회적 불평등이 생겨나는 경제적인 바탕은 비축과 정주(定住)지만, 그 사회관계에서의 바탕은 권력욕에 입각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 책에 의하면, 처음에 유동의 수렵채집에 의한 경제생활이 이루어지다가 정주의 수렵채집의 경제생활로 변화하면서 불평등이 현저하게 발달하게 된다. 정주의 대표적인 경제방식인 농업목축이 발달된 사회에서 불평등이 현저한 것은 물론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인 테스타는 한 사회 시스템에서 비축의 유무를 사회 분석의 기초로 삼는다. 비축 시스템이 정착되면서 불평등이 발달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맨 먼저 비축이 발달한다는 것은 비축을 잘 할 수 있는 기술 도구의 발달을 의미한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보다 비축을 위한 도구를 더 잘 많이 갖추고 있다는 것은 미래를 상대적으로 더 많이 장악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다른 사람에 비해 곡물창고를 완비한 사람은 생산된 곡물을 상대적으로 더 오래도록 저장하여 비축할 수 있다. 유동하는 수렵채집민의 경우, 남은 잉여의 곡물을 버리고 떠나거나 다른 집단이 곡물 외의 다른 재화를 갖고 있을 경우 교환하여 처리한다. 유동하는 수렵채집민의 경우, 썩기 쉽고 쥐와 같은 다른 동물들에 의해 침식되기 쉬워 오래 가지 못하는 식료보다는 금속이나 보석으로 만든 장식품들이 사회적으로 더 많은 가치를 갖는 것으로 취급되면서 이를 통한 위신을 중시하는 쪽으로 사회의식(社會意識)이 발달하게 된다. 그러면서 흥미로운 분배 방식이 생겨난다. 사냥꾼이 캠프로 운반해 온 잡은 짐승인 식량의 전부 또는 일부를 타인들에게 분배해 자신의 위신을 과시하는 것이다. 유동하는 수렵채집민의 경우, 잡은 동물이 남는다고 해서 이를 비축하는 기술이나 장치가 없기 때문에 어떻게든 처리해야 하는데,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분배함으로써 자신의 위신을 과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유동 수렵채집민의 식량 분배를 통해 사회적인 위신을 확보하는 것과는 달리, 정주의 수렵채집 내지는 농업목축의 사회에서 식량 초과분을 내구재로 전환해 개인적으로 영유(領有)한다. 둘은 성질이 전혀 다르다. 전자의 경우, 경제적 불평등이 생겨날 수 없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 경제적 불평등이 생겨난다. 비축 시스템의 발달은 분배의 관심을 감소시키면서 제어하는 메커니즘으로 작동한다. 언제 닥칠지도 모르는 결핍에 대비한 비축민의 목표는 집단 내부의 다른 구성원과의 연대보다는 저장물의 증대에 초점이 맞춰진다. 대규모 비축이 시작되면서 과거의 공동체적인 식량 분배 규칙은 점차 사라지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도덕에 관련된 규범과 그에 따른 의식이 달라진다는 것을 유념하지 않을 수 없다. 부시맨 같은 유동민에게 축재나 비축 같은 독점 행위는 항상 비도덕적인 것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비축 시스템이 작동하게 되면 사회경제적인 의식과 함께 도덕적인 의식이 완전히 달라진다. 친인척 관계나 우정에 기초한 타인과의 공동성보다는 개인적인 생존에 집착하게 된다. 자연에 대한 신뢰 대신에 불신이 생겨나고, 아울러 타인들을 불신하게 된다. 언제든지 할 수 있는 현행적인 노동보다 비축된 저장물에 함께 저장되어 있는 잠정적인 죽은 노동을 중시하게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주와 비축에 의해 토지 개발에 대한 배타적인 특권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비축 시스템은 사회 전반적으로 인구를 증가시키고, 이러한 인구압(人口壓)은 집단 간의 빈부의 격차를 더욱 심화시킨다. 집단 간의 분쟁과 투쟁이 일어나면서 이를 해결하는 인물이 지도자로서 부상하면서 정치적인 계급사회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착취가 생겨나는데, 그 논리적인 과정은 다음과 같다. 생산물이 직접 소비되지 않고 비축될 경우, 특히 비축 기술의 발달에 의해 비축물의 보존기간이 길면 길수록 더욱 더 생산과 소비 사이에 시간적인 간격이 생겨나고,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시간적이면서 사회적인 간격이 생겨난다. 생산물이 비축 장치를 영유하고 있는 비축자에게로 어떤 방식으로건 옮겨가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생산자와 생산물의 소유자가 분리되면서 계급사회 특유의 형태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비축은 대규모의 부를 언제나 자유로이 점유해서 처분할 수 있도록 하며, 하루의 노동이 아니라 비축한 전 기간의 노동을 일거에 착취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비축 기술에 의거해서 잉여가 부를 형성하게 되고, 이를 통해 생산자들의 소비욕구와 생산기술의 요구를 넘어선 착취를 통해 오히려 비생산자 계급이 생산 시스템을 지배하면서 정치적인 강제가 생겨나는 것이다. 유동 수렵채집민은 사회조직의 유연성과 집단분열의 용이함 그리고 유동성으로 인해 관용의 한계를 넘어선 착취를 허용하지 않는다. 피착취자가 다른 곳으로 가버리면 집단은 해체된다. 그리고 집단의 결정은 만장일치로 이루어진다. 그와 달리, 정주생활의 조건인 고정적인 구조물과 비축이란 요인은 사람들의 자유로운 이동을 방해한다.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떠날 수 없게 되면 착취는 더욱 심화된다. 착취를 더욱 강화시킨다는 의미에서 정주는 정치적 강제가 발달하는 첫 걸음인 것이다. 이상이 테스타가 책을 통해 제시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그가 본 사회적 불평등의 기원에는 “비축”이 핵심 요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오늘날 발달된 자본주의, 더욱이 최고도로 발달된 금융자본주의 사회에서 비축 시스템과 이를 가능케 하는 비축의 핵심 장치는 무엇인가? 비축의 핵심 장치는 화폐이고, 그 비축 시스템은 은행 제도다. 하다못해 이전의 동전이나 지폐는 녹이 슬거나 찢어지거나 또는 화재나 홍수 등에 의해 크게 훼손될 수도 있지만, 오늘날의 화폐는 컴퓨터 시스템에 의거한 비가시적인 수 내지는 전자(電子)의 흐름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결코 그러한 일을 당하지 않는다. 금융 자본의 발달에서 바탕은 누군가가 앞으로 돈을 벌어 비축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의거한 신용이고, 이처럼 미래 시간을 바탕으로 한 신용을 화폐로 바꾸는 데서 금융 자본의 시스템이 생겨났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신용을 가늠하는 척도가 문제고, 그 척도를 거머쥐고 있는 계급이 문제다. 그 계급이 사회의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필자가 평소 정말 궁금하게 여기는 사안이 있다. 한국사회에서 가계 부채가 1200조 원에 이른다고 말하고, 국가의 공공부채도 900조 원에 이른다고 한다. 모두 합치면 2000조 원이 넘는다. 여기에다 사기업들이 지고 있는 부채까지 합치면 어마어마한 액수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렇게 많은 채무에 대한 채권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채권자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그가 그 많은 돈을 비축할 수 있도록 한 사회 시스템은 과연 무엇이며, 그로 인해 생겨나는 사회정치적인 불평등에 의거한 권력 관계가 낳는 부작용이 얼마나 어떻게 대다수의 사람들을 불행에 빠뜨리는가 하는 것이다. 어느 경제학자에게 물어보았더니, 그 채권자는 결국 국가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을 나는 믿지 않는다. 혹자는 부채 덕분에 자본주의 시스템이 무사히 굴러간다고 말하기도 한다. 모르긴 해도, 전 세계의 거대 금융 자본가들이 채권자의 일원으로 작동할 것이고, 수없이 많은 주식 투자자들과 예금자들이 채권자의 일원으로 작동할 것이다. 사진 출처 - EBS 하지만, 이보다 더 무서운 채권자가 있으리라 여기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은행을 중심으로 한 금융 시스템이리라 짐작된다. 그 거대 규모의 부채는 특별히 자산가를 채권자로 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일체의 부채와 채권이 은행을 통해 들락거리면서 관리되고 처리된다. ‘지급 준비율’이라는 기묘한 장치가 그 주범이지 싶다. EBS MEDIA 기획 팀에서 출간한 『자본주의』(EBS <자본주의>제작팀 ‧ 정지은 ‧ 고희정 지음, 가나출판사, 2013)에 따르면, 중앙은행의 지급준비율이 3.5%일 때, 예금된 5천억 원은 6조 60억 원까지 대출을 가능케 한다(46쪽 참조). 이에 따르면, 우리 모두의 그 거대한 부채의 채권자는 일종의 ‘유령’이다. 그러니까, 5천억의 자산가는 자기도 모르게 6조 60억 원에 이르는 유령의 금융자본을 위한 매개 수단이 되고 있다. 그러니 은행에서 이런 자산가를 얼마나 귀하게 모시고자 하겠는가. 결국, 금융 자본주의적인 시스템이라는 ‘유령’에 의해 사회가 지배되고 있고, 그에 따라 사회경제적인 불평등이 생겨나 확산 양산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경제적인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 기묘한 유령과 싸워야 한다. 그러니 그 싸움이 얼마나 힘겨울 것인가? 그래서 비록 조심스럽게나마 ‘유령 사회’라는 말을 제시해 본다. 유령 사회는 죽은 것이 산 자를 지배하는 사회다. 유령 사회를 인간 사회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즉 죽은 노동의 중심이 아니라 산 노동이 중심인 사회로 바꾸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산 자들의 생명과 현존 및 존재가 지닌 의미와 가치가 끊임없이 이미 늘 무덤 속에서 썩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2015년 9월 16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540 | 추천: 0
정재원/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살아가면서 우리는 무엇이 진보적인 관점에서 최선, 혹은 최선은 아닐지라도 무엇이 차선인지에 대해 단호하게 판단을 내리기 어려울 정도의 혼란스러운 상황에 종종 처하곤 한다. 제한되거나 왜곡되어 제공되는 정보들로 인해 이러한 곤혹스러운 상황은 자주 발생하곤 하는데, 특히 국제적인 성격을 갖는 경우, 명확한 판단을 내리는 것에 대해 어려움을 더욱 가중시킨다. 가령, 인류 전체를 위협할 수도 있는 핵무기 개발 위협이나 테러나 내전으로 인한 대규모 학살 등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강대국들의 물리적 개입은 격렬한 논쟁을 야기하곤 하며, 우리에게 진보적 관점에서의 지지와 비판, 그리고 반대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을 던져 주고 있다. 이러한 논란 속에서 현장에서 많은 역할을 하는 국제NGO들의 판단이나 주장, 행동에 대해서도 논쟁은 끊이지 않는다. 특히 최근에는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으며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국제개발협력 NGO들에 대한 논란이 거세지고 있다. 이렇듯 언제나 ‘선’으로 정의되었던 NGO들에 대해서도 비판적 논의가 생겨나고 있는 데에는 다양하고 많은 이유가 있다. 사회의 근본적 변혁은커녕 시장자본주의체제를 교정만 할 뿐이라는 거시적 차원에서의 고전적인 좌파적 비판은 그만두더라도, 거대해진 국제NGO들의 관료주의화나 지역전문성의 약화, 지원 금융의 문제나 프로젝트를 기반으로 움직이는 경향, 그리고 사변적 관념주의와 뿌리 깊은 서구 중심적 경향에 대해 비판과 자성의 목소리가 높다. 이러한 우려를 보여주는 예가 바로 국제엠네스티의 성매매 비범죄화 결의이다. 그들은 성매매 여성들이 전 세계에서 가장 소외된 집단 중 하나이며, 차별과 폭력과 학대의 위험에 늘 노출돼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인권을 보호하고 이들이 겪고 있는 학대와 폭력을 줄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성매매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비범죄화(decriminalizing)하는 것이라는 엉뚱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결의안에서 줄곧 ‘성노동(sex work)’, ‘성노동자(sex worker)’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데에서 보이듯 이번 국제엠네스티의 결의의 논리는 격렬한 논쟁의 한 축인 소위 ‘성노동자’론자들의 논리이다. 즉 이들은 성매매가 몸이나 인격을 사고파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일종의 ‘서비스’를 사고파는 일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에는 ‘노동’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환원시키는 극단적인 관념과 여타의 서비스와 차이가 없거나 심지어 더 심한 서비스 노동이 더 많다는 극단적인 궤변, 그리고 성인 간의 자유로운 합의를 통해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은 직업선택의 자유에 속한다는 극단적인 자유시장주의가 깔려 있다. 물론 엠네스티는 성을 판매하는 사람들에게 사회적 낙인을 찍어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지만, 비범죄화가 된다고 이러한 사회적 낙인과 차별이 없어질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순진하다. 더욱이 그러한 사회적 낙인과 차별로 인한 고통은 고려하는 이들이 자신이 원하지도 않는 상대와 돈 때문에 성행위를 해야 하는 고통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성매매 비범죄화’ 불 지핀 국제앰네스티 사진 출처 - 주간경향 그러나 이들이 성매매의 현실과 현장에 대해 무지하거나 알기를 기피한다는 데에 더욱 심각한 문제가 있다. 성매매가 성판매자와 성구매자 간의 거래인 양 착각하는 이들은, 성매매 여성들을 고용해서 막대한 이득을 얻는 중간 알선업이라는 착취 고리를 애써 간과하고 있다. 서구에서조차 성매매업은 자영업적 형태가 아니라 중간 알선 착취자들의 막대한 이윤 창출의 영역이며, 성매매를 합법화한 국가들에서조차 여전히 이러한 불법 영역이 끊임없이 확대되고 있는 현실을 애써 무시하고 있다. 국제앰네스티는 착취를 목적으로 하는 인신매매를 포함한 모든 형태의 인신매매에는 반대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러한 경계는 매우 희미하다는 현실을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는 그냥 표어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전 지구적으로 성매매 여성들이 처한 현실이 너무 다르며, 전반적인 여성인권에 대한 상황이 너무 다르다. 극소수의 서구 국가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국가들에서는 일반적 여성 인권 수준도 심각한 상황이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외면한 채 자발성을 운운하는 것, 대부분의 성매매가 아동을 포함한 10대에 시작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서구 중심적, 자유시장주의적, 남성성욕중심주의적 사고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는 국제엠네스티의 결의에 실망감을 감출 수 없다. 성매매 산업 내의 식민주의와 봉건적 가부장주의, 그리고 신자유주의가 작동하는 권력의 본질을 간과하고 가난한 국가 여성들, 일국 내 빈곤층 여성들로부터 ‘성적 자기결정권’을 박탈하는 것을 직업 선택권 정도로 생각하는 반인권적, 반여성적 논리에 저항하지 않을 수 없다. 성적 자유와 성매매를 구별하지 않은 채, 자유로운 성행위 자체에 대해서만 집중하여 ‘할 만한 노동이나 서비스’로 판단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비범죄화로 인한 성매매 산업의 증가나 성매매 종사 여성의 증가 등은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다. 그리고 성을 성스럽게 여기는 보수적 입장에서 보다 보니 성매매 여성들의 성은 또 더럽게 여기는 것뿐이라며 성매매에 반대하는 사회과학적 논리를 전혀 이해하려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시 강조하지만, 그런 허황된 입장에서가 아니라, 대다수의 성매매는 남성이 여성을 일방적으로 선택하며, 여성의 선택권은 없이 돈으로 원하지도 않는 상대와 성행위를 해야 하는 성적 자기 결정권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행위이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매매는 성구매자와 성판매자 간의 거래 행위가 아니라 가장 막대한 이윤이 남는 중간 성산업 착취자들의 탐욕적 이윤과 지대의 원천이며, 이러한 산업은 없어질수록 좋은 비공식 경제의 가장 추악한 부분이기도 하다. 노르딕 모델과 같은 대안 모델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내린 국제엠네스티의 포주와 성구매자 등 성산업 범죄자들의 인권만을 생각한 반인권적, 반여성적 결정에 우리는 적극적으로 저항해야 한다. 이 글은 2015년 9월 3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456 | 추천: 0
최정학/ 방송대 법학과 교수 광복 70주년이다. 대형건물마다 태극기가 나부끼고 동네 아파트에서도 한 달여 가까이 국기를 게양하라고 성화이다. 연예인과 스포츠 스타, 심지어 국회의원까지 참여하는 국민 합창단이 공연을 하는가 하면, 급기야 정부는 광복절 하루 전인 14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하고 전국 고속도로 통행료를 면제해 주겠다고 까지 한다. 메르스 사태로 인한 경기위축을 회복하기 위한 한 방편이기도 하겠지만, 70년을 맞은 광복절을 통해 이미 희미해져버린 민족주의, 애국심 혹은 국가의식을 되살리려 애쓰는 정부의 노력이 가상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올바른 민족의식과 무엇보다 국민의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투철한 국가 관념을 가져야 할 사람들은 과연 누구인가? 필자는 민족주의나 특히 국가주의가 그렇게 바람직한 이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냉혹한 국제현실에서 이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는 데에는 일부라도 수긍하지 않기 어렵다. 서울시 광복7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과거 서울시청으로 사용했던 서울도서관 건물 외관을 한옥으로 단장했다. 서울도서관 건물은 일제강점기 때 경성부 청사로 쓰였었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최근의 국제정세를 보면서 100여 년 전의 위태로운 구한말, 제국주의 열강의 시대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19세기말 세계는 이미 자국의 이해를 위해서는 다른 나라에 대한 침략과 수탈을 서슴지 않는 제국의 시대로 바뀌었고, 중국이라는 거대한 이웃이 그러한 열강들에 의해 갈갈이 찟기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부적으로 여전히 친청과 친일, 친러가 대립하여 국가와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지 못했다. 일본이 이 땅에서 청나라와 전쟁을 벌이고, 러시아와의 일전도 불사할 조짐을 보이자 고종은 대외적으로 중립(?)을 선포하고 이를 유럽의 여러 제국과 미국에게 승인받으려 하였다. 말하자면, 일본의 부당한 침략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달라는 간절한 요청이었을 터인데, 황제의 순진한 기대와는 달리 이를 정면으로 묵살한 사람은 당시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었다. 그리고, 대신 돌아온 것은 유명한 ‘가쓰라-태프트 조약’이다. 일본이 청에 이어 러시아마저 패퇴시키자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실력지배를 이제 어찌할 수 없다고 여긴 미국이 이를 은밀하게 승인하는 대가로 필리핀에 대한 지배권을 얻는다는 이 밀약으로 말미암아, 그 이후 우리의 외교권을 강탈당한 을사늑약, 그리고 마침내 한일합병으로까지 이어졌음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일본의 총리 아베가 일본의 군대가 해외에서 군사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안보관련 법률을 개정하고, 우리가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는 미국의 대통령 오바마가 미일 방위협력지침 개정으로 이를 승인하는 21세기 초, 현재의 상황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일본이 말하는 군사 활동이 필요한 해외는 어디인가? 미국인가, 유럽인가, 중국인가. 역사적으로 일본은 늘 대륙진출의 야욕을 품어왔고 그 교두보가 되어왔던 곳은 항상 이 땅, 한반도였다. 미국은 어떠한가. 이러한 일본의 욕심을 모를리 없는 미국이 일본의 자위대법 개정을 용인하는 것은 일본과의 경제교류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보장받는 것은 물론 일본을 앞세워 중국의 동진정책, 이른바 동북공정을 제지하겠다는 것 아닌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이런 사정을 애써 무시한 채, 우리 정부의 고위관료들은 지금도 여전히 미국과의 혈맹관계만을 강조한다. 대통령부터 앞장서 미국에 달려가고, 집권당의 대표는 미국 땅에서 참전용사의 무덤에 큰 절을 올린다고 한다. 마치 조선의 대중국정책을 보는 듯 한 이런 일방적인 외교는 그래서 불안하고 편협하고 위태로워 보인다. 수년 전, 요즘 젊은 학생들 가운데는 광복절이 무슨 날인지를 정확히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노교수의 한탄을 들은 기억이 있다. 딴은 그렇기도 할 것이다. 대개 사람들이 자신이 직접 경험한 사실만을 생생히 기억하는 성향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자신이 태어나기 50여 년 전의 일을 민족과 국가에 대한 애정만으로 가슴에 각인하라는 것은 좀 지나친 요구인 듯도 하다. 이에 대한 교수님의 답은 이것이었다. 역사적으로,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은 강제로라도, 주입해서라도, 반복적으로 교육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마음이 아니면 머리로라도 외우도록,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러다보면 언젠가 그 의미를 깨닫기도 할 것이고, 필요할 때 이를 새롭게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이 그 의미이고, 무엇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인가. 광복절을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할, 그리고 자라나는 세대에게 가르쳐야 할 진실은 대체 무엇인가. 태극기가 휘날리는 광화문 광장에는 아직도 세월호 가족의 농성천막이 1년이 넘게 자리를 잡고 있다. 불과 1년 수개월 전에 온 국민이 슬픔과 분노에 빠지고 대통령부터 앞장서서 참사의 원인을 낱낱이 밝히고, 이러한 사건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 개선을 다짐하던 장면이 눈에 선하다. 하지만 지금, 사고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한 특별조사위원회가 몇 개월을 표류하다가, 조사1과장을 비롯한 핵심보직을 정부의 주장대로 파견 공무원으로 충당하기로 하였음에도 앞으로의 예산을 위원회 요구의 반 토막으로 줄이기로 했다는 지금, 그 아픔과 공포, 분노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바쁜 세상, 무엇을 알기도 기억하기도 쉽지 않은 세상이다. 그것이 남의 일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있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잊어도 되는 것과 잊지 말아야 할 것을 구별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런지도 모르겠다. 지혜가, 온 국민에게 지혜가 필요한 광복 70주년이다. 이 글은 2015년 8월 12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388 | 추천: 1
정지영/ 전) 서울DPI 회장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서 인권교육 요청이 왔습니다. 작년에는 5학년 학생들이 강의를 들었는데 우리를 불러주신 선생님은 올해에는 4학년 수업을 부탁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인권의 소중함을 좀 더 일찍 알려주는 일이기에 더 반가웠습니다. 사실 학교에서 부탁한 수업의 주제는 장애의 이해입니다. 통합교육으로 장애학생이 한 반에서 같이 수업을 듣기 때문에 학생들이 장애학생을 따돌리거나 놀리지 않고 같은 반 학생으로 잘 지내길 바라는 선생님의 바람을 알 수 있습니다. 가끔 학교의 높으신 분들과 인사를 하기도 하는데 항상 하시는 말씀은 학생들이 모쪼록 이번 교육을 통해 장애인과 같은 어려운 사람을 잘 도와주는 학생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입니다만 저는 항상 ‘인권’을 중심으로 아이들과 이야기를 합니다. 인권을 배운다는 것은 사람의 권리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결국은 사람과 사람간의 예의, 국가가 국민을 대하는 태도를 배우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경험한 일을 하나 들려드린다면, 초등학교를 들어가지 않은 아이들은 휠체어를 타는 저를 보고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바퀴달린 의자를 타고 달린다고 생각하니 왠지 신날 것 같다나요. 그러나 조금 큰 아이들은 저를 좀 다르게 보기 시작합니다. 우연히 마주친 초등학생들이 저를 보고 자기들끼리 대화합니다. 앗 장애인이다. 야 그러면 안 돼. 얼마나 힘드신 분들인데 우리가 잘 도와드려야돼. 아이들이 교육을 받기 시작하면 어쩐일인지 어른들이 가진 편견까지도 그대로 배웁니다. 아이들은 어른의 거울이니까요. 4학년 교실에 들어가서 먼저 학생들에게 ‘인권’이 무엇인지 알고 있냐고 물었습니다. 학생들이 한 목소리로 ‘사람이 가진 권리’라고 답을 합니다. 학교에서 배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외웠냐고 물으니 배시시 웃습니다. 어차피 외울 거면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권리’라고 외우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을 ‘모든 사람’과 ‘행복하게 산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제일 먼저 시작하는 것은 다른 것과 같은 것 찾기 입니다. 저는 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인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좀 더 쉽게 찾아냅니다. 눈으로 보이는 다름 뿐 만아니라 좋아하는 운동도, 연예인도, 재미있어하는 과목도 다르다는 것을 서로 확인하면 서로 같은 점을 이야기 해봅니다. 아이들은 이쯤에서 벌써 서로 다른 모습과 성격, 취향이지만 모두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금방 이해합니다. 휠체어를 타도, 공부를 잘 하거나 못하거나, 부자이거나 가난하거나, 키가 크던 작던 사람은 모두 가족과 친구들 사이에서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행복한 삶을 바라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권은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권리이기 때문에 거꾸로 말하면 그 어떤 사람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권리에서 제외될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여우와 두루미가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각자에게 맞는 그릇이 필요하듯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살기 위해선 각자에게 맞는 그릇이 필요한 것인데 여우네 집에는 아직 두루미가 사용할 수 있는 그릇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만으로도 아이들은 장애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인권에 대한 이해가 먼저 생긴다면은요. 제35회 장애인의 날을 맞이해 예산중앙초등학교에서는 지난 4월 20~24일을 장애이해 주간으로 정해 '장애! 모습은 다르지만 따뜻한 동행, 함께하는 우리'라는 주제로 신문제작 등의 교내 장애인권 교육을 실시했다. 사진 출처 - 중도일보 제가 처음에 장애인권교육을 시작했을 때 저도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중심으로 이야기했었습니다. 차별을 중심으로 얘기하다 보니 장애인에 대한 차별은 어른들이 하고 있는데 아이들이 장애인과 어울리기도 전에 미리 혼내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방학해도 학원 때문에 행복하지 않아요라고 이야기하는 아이들의 눈빛 속에서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약자로서의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를 구분하고, 경쟁에서 살아남아야하고, 다른 사람의 권리를 짓밟고 서야 무시당하지 않는, 어른들의 세상을 벌써 알아버린 듯 한 그 눈빛은 마치 장애인의 인권도 소중하다고 열변을 토하던 제게 ‘그러면 저희에게도 권리가 있나요?’라고 묻는 것 같았습니다. 인권이라는 말이 예전보다 더 많이 쓰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긍정적인 느낌보다 알면 알수록 피곤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아이들에게 만큼은 인권을 알고 지키면 서로가 행복하고 좋은 것이라는 것을 먼저 알게 하고 싶습니다. 이 글은 2015년 8월 5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446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