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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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강대중(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윤동호(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이동우(변호사),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장은주(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흔히 정치인이라고 하면 ‘여의도 정치권’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입법을 책임지고 담당하는 국회의원들을 지칭한다. 그런데 최근 이른바 ‘유승민 사태’를 보면서, 정치인의 인권은 과연 성립하는가, 성립한다면 어떤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띠게 되는가, 하는 다소 생뚱맞다고 생각될 수 있는 물음을 던지게 되었다. 최근 국회의 입법권과 대통령의 시행령 간의 ‘헌법적 지위’를 다툰다는 빌미로 터무니없게도 여당의 원내대표를 희생양으로 하는 여당과 청와대 간에 이전투구의 권력다툼이 한창이다. 상식으로는 당연히 국회에서 제정한 법률이 대통령의 시행령보다 상위의 권위를 지닌 것 같은데, 그게 아닌가? 그래서 헌법을 챙겨보게 되었다. 헌법 제75조에 “대통령은 법률에서 구체적으로 범위를 정하여 위임받은 사항과 법률을 집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사항에 관하여 대통령령을 발할 수 있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헌법 제76조의 제①항과 ②항에 전시를 비롯한 아주 긴급한 재난 등의 경우에 대통령이 “법률의 효력을 가지는 명령을 발할 수 있다.”고 해 놓고서는, 제③항에 “대통령은 제1항과 제2항의 처분 또는 명령을 한 때에는 지체 없이 국회에 보고하여 그 승인을 얻어야 한다.”라고 되어 있고, 제④항에는 “만약 제3항의 승인을 얻지 못한 때에는 그 처분 또는 명령은 그때부터 효력을 상실한다.”라고 되어 있다. 이러한 헌법의 내용을 보면, 적어도 입법권의 권한은 철저하게 그리고 최종적으로 국회에 속한 것이고, 따라서 입법권에 준하는 대통령령을 발하는 대통령의 권한마저 “법률에서 구체적으로 범위를 정하여 위임받은”이라는 단서에 따라 행해야 함이 마땅하다. 그런데도 이제까지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의 행정권을 발휘하기 위한 시행령을 국회에서 제정한 법률의 “구체적인 범위”를 넘어서서 발하여 시행한 것이 예사였던 모양이다. 이야말로 위헌이 아닌가, 그래서 그 위헌의 관행을 바로잡기 위해 시행령이 국회가 제정한 법률의 한계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새로운 법률을 여야가 합의하여 제정했다. 그런데 그 법률이 현직 대통령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전에 그가 국회의원 시절에 발의한 적이 있는데도, 심지어 대통령의 입장에서 긴급하게 요구된다고 하는 공무원연금법을 포기해도 좋으니 그 법률만은 안 된다는 취지의 내용을 여당 지도부에게 알렸던 모양이다. 그런데도 여야가 합의하여 이른바 ‘대통령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그래서 대통령이 국회에 재의를 요구할 수밖에 없는, 이른바 되지도 않는 법률’을 국회에서 통과시켰고, 그와 같은 여야 합의에 원내사령탑인 유승민 국회의원이 앞장섰으니 여당에 속한 대통령으로서 그런 ‘배신’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온 국민이 지켜보는 국무회의 석상에서 내놓고 한 것이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헌법재판소 판관들이 어떤 견해들을 가졌는지, 그리고 헌법학 교수들이 어떤 견해들을 가졌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수십 년간 철학에 종사해 온 본인으로서는 이번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통과된 법이 어째서 위헌인지 도무지 납득할 수 없거니와,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는 그 유명한 말은 이런 경우에 쓰라고 만들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적반하장의 반(反)헌법적인 대통령의 입장이 우선 문제거니와 그런 반(反)헌법적인 자신의 입장을 거슬렀다고 해서 엄연히 헌법기관인 국회의 권한에 따라 오히려 헌법을 제대로 준수하도록 하기 위한 법률을 제정하는 데 ‘앞장섰다’고 해서 자신의 권력을 추종하는 자들을 내세워 원내대표를 압박하여 ‘꼬리를 내리고’ 자진 사퇴를 하도록 강요하는 ‘몽니’를 부리고 있으니, 양식이 있는 국민이라면 누구나 이 어찌 일단 개탄할 일이 아닌가. 그래서 이건 정치인의 인권을 짓밟는 짓이라고 여겨졌던 것이고, ‘엉뚱하게도’ 과연 정치인의 인권의 정체가 무엇인지 묻게 된 것이다. 그래서 가장 권위가 있다고 여겨지는 <유엔인권선언>의 내용을 들춰 보게 된다. 살펴보니 정치인의 인권에 관련된다 싶은 다음과 같은 조항들이 눈에 띈다. 제5조, “어느 누구도 고문이나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혹은 수치심을 주는 처분 혹은 처벌을 겪게 해서는 안 된다.” 제21조 3항, “인민의 의지는 정부가 갖는 권위의 기초다. 이는 보편 평등한 투표에 의해 행해지는 그리고 비밀 투표 혹은 그에 준하는 자유로운 투표 절차에 의해 실시되는 주기적이고 성실한 선거로 표출되어야 할 것이다.” 제29조 1항,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인격을 자유롭고 충분하게 발달시키는 것이 가능한 공동체에 대해 의무를 갖는다.” 제5조에 따르면, 정치인이라고 해서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혹은 수치심을 주는 처분 혹은 처벌”을 그 어떤 권력인 또는 권력집단에 의해 강요받아서는 그 인권이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만약 이를 무시하는 정치집단이 있다면, 그 정치집단은 반(反)인권적인 집단으로서, 흔히 말하는 조폭 집단이나 파쇼 집단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제29조 1항에 따르면, 정치인이라고 해서 “자신의 인격을 자유롭고 충분하게 발달시키는 것이 가능한 공동체에 대해 의무”를 함부로 저버려서는 안 된다. 아니, 정치인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바로 이러한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최종 최선의 삶의 의미로 삼아야 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만약 자신의 자유롭고 충분한 인격의 발달을 전제로 하지 않는 공동체, 즉 그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자유롭고 충분한 인격의 발달을 포기해야 하는 그런 공동체라면 그 공동체는 특히 정치인의 입장에 선 경우 의무 처음부터 아예 의무 준수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들 조항에 따른 정치인의 인권에 대해 토대가 되는 것은 제21조 3항이다. 정부가 갖는 권위, 따라서 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이 갖는 권위는 오로지 인민의 의지에 입각할 경우에만 성립한다. 그런데 그 인민의 의지는 정부나 대통령의 권위뿐만 아니라 국회와 국회의원의 권위에 대해서도 기초가 된다. 국회의원으로서의 정치인은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인민의 의지가 대표적으로 표출된 결과이다. 정치인에 대한 부당한 억압과 탄압은 당연히 인민의 의지에 대한 부당한 억압이고 탄압이다. 자신을 통해 표출되는 인민의 의지를 부당하게 억압당하는 한에 있어서 정치인의 인권은 제대로 설립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인권을 모든 사람들이 적어도 인간인 한에서 기본적으로 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각종 권리라 생각한다. 그런 우리의 생각은 당연히 옳은 것이고 실천적으로 더욱 굳건하게 발휘되어야 한다. 하지만, 각자는 자신이 삶을 영위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과 다른 그 나름의 존재가치를 특수하게 구체적으로 형성하게 된다. 각자가 추구하여 형성해 온 존재가치가 다른 사람들이 추구하여 형성한 특수한 존재가치들을 훼손하거나 저해하지 않는 한, 각자의 특수한 존재가치는 보호받아야 할 뿐만 아니라 더욱 진작시켜 나갈 수 있도록 사회나 국가가 앞장서야 한다. 하물며 정치인이 지닌 특수한 존재가치는 원칙상 더욱 더 그러하다. 정치인은 자기 자신보다는 국가 공동체의 가치와 국가 공동체에 속한 국민들의 가치를 더욱 더 높이기 위해 헌신하는 인물이다. 정치인으로서의 존재가치는 근본적으로 국가 공동체의 존재가치를 향상시키고 발달시키는 데서 성립한다. 그러한 정치인의 특수한 존재가치를 그 해당 정치인이 개인의 영달을 위한 것도 아니고 더욱이 헌법 정신을 바로 세우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렇게 노력했다는 이유로 강압적으로 억압한다거나 자신의 공공을 위한 신념을 버리고 왜곡된 정치권력에 영합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함으로써 인격적인 수치심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인의 인권을 근본적으로 짓밟는 행위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정치인에게도 인권이 있다. 정치인으로서의 특수한 인권이 있다. 정치인으로서의 특수한 인권이야말로 국가 공동체를 위한 헌신에 의거한 인권이다. 따라서 정치인이라면 당연히 정치인으로서의 자신의 인권을 내세우기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아야 할 것이며 그 어떤 정치집단의 논리로써도 정치인의 인권을 억압해서는 안 될 것이다. 차제에 제발 ‘정치공학’ 운운하는, 반(反)인권적인 정치놀음을 당장 그만두어야 한다. 이 글은 2015년 7월 8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328 | 추천: 0
홍미정/ 단국대 중동학과 조교수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중동지역 분쟁에 대하여 '종교 혹은 종파투쟁이라는 신화 만들기'는 '열강들의 석유•가스 지배권과 무기판매시장 확보'를 위한 투쟁이라는 진실을 은폐하기 위한 장치다. 20세기 이후 영국을 비롯한 서구열강들은 중동지역 지배를 위한 전략적인 관문 지역으로 팔레스타인을 지목하였다. ○ 팔레스타인의 전략적인 중요성 1946년 영국왕립국제문제연구소가 펴낸 Great Britain and Palestine 1915-1945에 따르면, 20세기 초 팔레스타인은 이라크 키르쿠크로부터 시작되어 팔레스타인 하이파로 이어지는 원유 파이프라인의 출구로서 영국에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1930년대 이라크 키르쿠크-하이파 파이프라인이 건설되었을 때, 최종적인 목적지는 유럽이었으며, 원유 파이프라인은 최소한 선박운송료의 40%이하로 운송비용이 상대적으로 매우 저렴하였다. 이 원유 파이프라인은 이라크 북쪽에 위치한 키르쿠크 유전지대로부터 요르단을 경유하여 팔레스타인 하이파로 연결되었다. 원유가 이 파이프라인을 완전히 통과하는 데는 약 10일 걸렸고, 하이파에 도착한 원유는 하이파 정제소에서 정유되어 탱크에 저장해서 선박을 이용하여 유럽으로 운송되었다. 1934 키르쿠크-하이파·트리폴리 파이프라인 그림 출처 - 필자  이러한 팔레스타인의 전략적인 이점은 현재 21세기 미국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정책에도 유효하게 적용될 수 있다. 적절한 예로, 2003년 미국은 이라크 북부에 위치한 키르쿠크로부터 이스라엘 하이파로 가는 석유 파이프라인을 재건하려는 계획을 내놓았다. 2003년 8월 미 국방부의 요구에 따른 이스라엘 국가 기반시설부 조사결과 키르쿠크와 하이파 사이의 직경 42인치 파이프라인의 건설에 1㎞당 40만 달러의 비용이 드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 이스라엘 국가 기반시설부 장관 유세프 파리츠키는 하이파 항구를 이라크 석유의 매력적인 출구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 키르쿠크-하이파 원유파이프라인을 보호하라: 영국-유대 무장단체(하가나) 동맹  팔레스타인 거주 유대인들은 1918년에는 전체 인구의 8%인 56,000명에서 1945년에는 전체 인구의 31%인 553,600명으로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 기간 동안에 현격하게 증가하였다. 아래 팔레스타인 인구변화 표에서 보듯이, 1918년부터 1947년까지 실시된 영국의 팔레스타인 통치를 거치면서 팔레스타인 인구구조가 완전히 달라졌다. 팔레스타인 인구변화  특히 팔레스타인으로 유대이민은 1932년 이후 5년간 최고조에 달했다. 1932년은 영국위임통치지역 이라크에서 요르단을 거쳐 팔레스타인으로 연결되는 키르쿠크-하이파 원유파이프라인 건설이 시작된 해다. 이민자 유대인들은 키르쿠크-하이파 원유파이프라인을 아랍인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영국정부는 키르쿠크-하이파 파이프라인과 하이파 정제소를 전략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실제로 이 파이프라인은 2차 세계 대전 동안에 지중해를 통해서 영국군과 미군이 사용하는 연료의 대부분을 공급하였다.  팔레스타인으로의 대량 유대이민을 추진하는 영국정책에 저항하는 아랍대반란 동안(1936-39), 아랍인들의 중요한 공격 목표 중의 하나는 키르쿠크-하이파 파이프라인이었다. 이에 맞서 오르데 윈게이트 소장이 이끄는 영국-유대 합동특수야경단(1938년 창설)의 주요한 목표 중 하나는 아랍인들의 공격에 대항하여 이 파이프라인을 보호하고 아랍반란을 진압하는 것이었다.  결국 5만 명의 영국군대와 1만 5천 명의 유대무장단체 하가나로 구성된 영국-유대 합동 특수야경단이 아랍대반란을 진압하였다. 영국-유대 합동 특수야경단의 한 축을 구성한 유대 무장단체 하가나에 대하여 영국은 이미 공식적으로 불법단체라고 규정한 상태였다. 영국-유대 합동특수야경단의 아랍대반란 진압작전은 매우 무자비했다. 진압작전 과정에서 5천명 이상의 아랍인, 3백 명 이상의 유대인, 262명의 영국인이 사망하였다. 이 진압작전에 대한 포상으로 영국정부는 윈게이트 소장에게 무공훈장을, 그의 부하 장교들에게 십자훈장을 수여하였다.  아랍대반란 동안 영국위임통치정부는 외딴 지역의 유대정착촌에도 무기를 분배하였다. 게다가 영국위임통치정부는 하가나에게 박격포와 수류탄 등의 무기제조를 허락한 반면, 무기를 소지한 아랍인에게는 사형을 부과하였다. 1939년 아랍대반란 진압 이후, 하가나는 완전한 규모의 명실상부한 조직과 장비를 갖춘 군대로 발전하였고, 1948년 5월 이스라엘국가 창설과 함께 이스라엘 국가방위군의 주축이 되었다. 이 글은 2015년 7월 1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707 | 추천: 0
이광조/ CBS PD 얼마 전 가뭄으로 바짝 마른 논에 소방호스로 물을 뿌리는 대통령의 사진이 화제가 됐다. 소방차가 실어 나른 물이 가뭄을 해소할리야 만무하지만 그나마 타들어가는 농심을 달래기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여론은 뙤약볕 아래 무거운 소방호스를 들었던 대통령의 마음을 제대로 몰라주는 듯하다. SNS 상에서는 시위 진압용 물대포를 직사해서 모를 다 죽인다는 비아냥이 나오는가 하면 전형적인 전시성 이벤트라며 대통령의 진심을 폄훼하는 평가들이 넘쳐났다. 해당 지역 농민들 사이에서는 진즉에 와서 물을 줬어야지 너무 늦게 와서 모가 다 죽은 논에 물을 뿌렸다는 볼멘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대통령이 민생현장을 찾는 것이 비난 받을 일은 아닐 텐데, 뭔가 꼬여도 한참 꼬였다. 박 대통령의 입장에서 울화통이 터질 일이리라. 민생현장을 찾는 대통령의 행보가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도 박 대통령의 정성에 냉소와 조롱이 쏟아지는 건 메마른 논에 물을 뿌리고, 메르스 공포 속에 전통시장을 찾아 쇼핑을 하는 등의 위민 활동이 국민들이 대통령에게 기대하는 역할의 본령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슈퍼맨이나 원더우먼도 아닌데, 문제가 있는 모든 삶의 현장을 찾아서 해결사 노릇을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누가 대통령에게 마블 영웅들의 역할을 바라겠는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국민통합의 상징적인 역할을 하는 입헌군주국의 군주도 아니지 않은가. 메르스 사태와 극심한 가뭄에 대처하는 대통령의 행보에 응원과 격려보다는 냉소와 조롱이 더 많이 쏟아지는 건 박 대통령이 ‘대통령의 일’을 제대로 하지 않고 변죽만 울린다는 냉정한 평가가 깔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국민들은 정책을 통해 민생을 돌보고 현안을 푸는 정치인이자 국가 최고 지도자를 바라는 것이지 그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고 위안이 되는 스타를 바라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 청와대 전국적으로 가뭄이 심각한 양상을 보이면서 당장 가뭄과 홍수를 해결한다던 4대강 사업의 효과에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하지만 정부 관계자들조차 인정하듯이 4대강에 보를 막아 가득 담아둔 물은 가뭄을 해소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고 있다. 농지까지 물을 보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4대강의 용수를 농지로 보낼 수 있는 연결수로를 만든다 하더라도 과연 농업용수로 쓸 수 있을까 하는 데 의문이 든다는 점이다. 4대강 사업 이후 금강에서는 해마다 녹조가 대규모로 발생하며 물고기들이 집단 폐사하는 살풍경이 되풀이 되고 있다. 올해에는 낙동강의 상황도 심상치 않아 어민들이 배를 타고 시위를 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4대강 곳곳에 설치된 댐 규모의 대형 보로 인해 물이 썩고 있다는 얘기다. 어떤 일이건 예상하지 못했던 부작용은 발생할 수 있다. 문제는 4대강이 사업의 계획 단계에서부터 많은 전문가들이 이런 문제점들을 지적했었고 박근혜 대통령의 측근 인사들도 4대강 사업의 문제점을 알고 있었다는 데 있다. 박근혜 대통령 본인은 대운하에 대해선 반대 입장을 명확히 했었지만 4대강 사업에 대해서는 대운하와 다르다는 이유로 입장을 유보했었다. 하지만 감사원이 ‘4대강 사업이 대운하를 전제로 추진되었다’는 조사결과를 내놓은 지가 벌써 2년 전이다. 잘못된 정책으로 천문학적인 액수의 국고를 낭비하고 4대강의 수질오염과 자연생태계 파괴를 가져온 국책사업을 대통령이 나서지 않으면 누가 바로잡을 수 있단 말인가. ‘비정상의 정상화’를 그리 소리 높여 외치는 분이 왜 이 거대한 비정상에 대해선 그토록 침묵을 지키고 있는가. 박근혜 정부 출범에 앞장섰던 이상돈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은 “4대강 사업은 단군 이래 가장 부패한 사업일 가능성이 크다.”며 4대강 사업의 책임소재를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지 않을 경우 박근혜 정부는 ‘MB 2기’가 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타들어 가는 농민들과 어민들의 마음을 달래기에도 ‘MB 2기’라는 오명을 벗어버리기에도 박근혜 대통령에게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 아래는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4대강 사업과 관련된 대통령과 정부 관계자들의 발언을 시간 순으로 정리한 것이다. 스트레스 지수가 높아질 우려가 있지만 한 번 읽어보시길 권한다. 2007년 12월 19일. 제 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 당선 취임 이후 한반도 대운하 공약에 대한 반대 여론 확산. 2008년 5월 13일. 정두언 의원 “한반도 대운하를 한강 개발과 같은 재정비 사업으로 우선 추진하고, 연결(운하 개통) 부분은 계속 논의하자.”(총선 당선자들과 MB의 청와대 오찬 회동) 2008년 6월 19일. 이명박 대통령 “대운하 사업도 국민이 반대하면 추진하지 않겠다.” 2008년 11월 28일. 이명박 대통령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대운하도 관계없이 임해라. 4대강 정비사업이면 어떻고 운하면 어떠냐. 그런 것에 휘둘리지 마라.” 2008년 12월 4일. 박병원 청와대 경제수석 “4대강 사업이 운하가 되느냐 안 되느냐는, 소백산맥을 넘어가면 대운하다. 사업을 다 해놓고 대다수가 (운하를) 연결하자고 하면 말자고 할 수는 없다.” 2008년 12월 4일. 이만의 환경부 장관 “국민들이 잘 몰라서 대운하를 반대한다. 여러분이 노이로제처럼 생각하는 운하 문제도 어느 땐가는 거론될 것이다.” 2008년 12월. 국토부. 홍수예방과 수자원 확보, 수질개선, 친수공간 조성 등을 목적으로 한 ‘4대강 종합정비방안’을 발표 4대강 수심을 2.5미터 수준으로 유지하고 소규모 보 4개를 건설한다는 계획. 2008년 12월 2일. 이명박 대통령 "4대강 가장 깊은 곳의 수심이 5~6m가 되도록 굴착할 것" (균형발전위원장과 6개 부처 실국장이 참석한 자리에서) 2008년 12월 16일. 박근혜 의원 “정부가 대운하와 관계가 없다고 하니 믿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국민을 속이는 것인데,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2009년 6월. 국토부 ‘4대강 사업 마스터플랜’을 통해 수심을 4~6미터까지 깊게 파고 수중보도 16개 설치하겠다며 당초 계획을 전면 수정. 4대강 수질 조사를 위한 로봇 물고기 개발 착수. 2009년 6월 29일. 이명박 대통령 “대운하의 핵심은 한강과 낙동강을 연결하는 것” 2011년 1월. 감사원 “(4대강 사업과 관련해) 특별한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2011년 3월. 김황식 국무총리 “4대강의 보에 물이 채워지면 매년 반복되는 가뭄과 홍수에서 벗어날 것” 2012년 10월. 금강 백제보 인근 물고기 폐사. 환경부 집계 6만 마리. 충남도 집계 30만 마리. 2013년 1월. 이명박 대통령 “(대운하는) 내가 거의 다 해놨기 때문에 나중에 현명한 후임 대통령이 나와서 갑문만 달면 완성이 된다.” 2013년 1월. 감사원 “보(洑) 안정성 등 총체적 부실이 확인됐다.” 2013년 7월 10일. 감사원 "4대강 사업이 대운하를 고려해 추진되면서 건설사들의 입찰 담합과 관리 비용 증가, 수질관리 문제 등을 유발했다." 2013년 7월 10일.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 “감사 결과가 사실이라면 국가에 엄청난 손해를 입힌 큰일이다. 국민을 속인 것이다.” 2013년 7월 15일. 박근혜 대통령 “여러 논란이 있는데 감사원이 발표한 부분을 앞으로 소상히 밝혀 의혹이 해소되도록 해야 한다. 필요한 후속조치와 대책을 추진해주기 바란다.” “무리하게 추진돼서 국민 혈세가 들어간 부분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2013년 8월 7일. 이상돈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회 위원 “4대강 사업은 단군 이래 가장 부패한 사업일 가능성이 크다.” 2014년 7월. 낙동강 칠곡보 부근 물고기 집단 폐사 환경부 국립환경과학원, “칠곡보 직·하류 구간은 보 구조물로 인해 수변 식물대가 형성되지 못했다.” “강준치들이 높은 수온과 ph농도, 용존산소 과포화, 산란처의 부재, 산란 후 스트레스와 먹이 부족 등의 복합적 요인으로 폐사했다.” 2015년 1월. 이명박 전 대통령(MB 회고록에서) “4대강 살리기 사업은 한국이 세계 금융위기 극복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내가 대운하를 만들기 위해 4대강 살리기 사업을 벌였다는 것은 도저히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주장” “감사원의 비전문가들이 단기간에 판단해 결론을 내릴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2015년 6월 2일. 감사원. 로봇 물고기 개발 사업을 실패한 국책사업으로 결론. 2015년 6월. 낙동강 물고기 집단 폐사 발생. 2015년 6월 23일. 유일호 국토교통부 장관. “4대강 사업 보에는 상당한 (물이) 저수되고 있고, 보와 가까운 지역은 가뭄 대책이 돼가고 있는데 먼 데가 문제” “4대강 물을 잘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그게 참 잘 안 된다는 것이 안타깝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362 | 추천: 0
정재원/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체첸 내전의 여파로 2000년대 중반까지 러시아에서는 수도 모스크바를 비롯하여 전국 곳곳에서 수많은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테러가 발생하곤 했다. 또한 비행기 추락 사건이나 요양원 화재 등 대형 사건들도 자주 일어나는 등 총체적 혼란이 이어졌다. 체제전환 이후 체첸 내전 등 불안정한 상황이 지속되었을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는 낙후되어 있고, 정치적으로도 권위주의가 강화되면서 우리는 러시아의 모든 것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테러나 사건사고가 일어난 직후 취해지는 조치들 중에 주목할 만한 것이 있다. 실제 실효성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언제나 사건 직후에 정부가 취하는 조치들 중 하나는 바로 유족들에 대한 심리적 도움 조치이다. 여러 의료진 중 한 분야인 심리 상담 전문가들을 구조대와 함께 현지로 급파하고 이들의 도움을 받으려면 어디로 전화해서 어떻게 하라는 방송을 내보낸다. 한국은 어떤가? 최근의 세월호 사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대형 사건, 사고가 있었지만, 물질적 지원이 아닌, 유족들에 대한 전문적인 심리적 치유를 국가가 처음부터 나서서 체계적으로 제공하지는 않는 듯하다. 일찍이 의료 분야에서도 공공성보다는 상품 논리에 익숙해진 국민들 역시 심리적 트라우마에 대한 치유와 치료의 중요성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않는 분위기이다. 정치와 경제 지배 엘리트들, 그리고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국가 관료들과 언론들의 무자비한 공격 속에서 트라우마가 증폭되어 28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 쌍용자동차 해고 사태 이후에서야 비로소 심리적 치유에 대한 관심이 생겨났지만, 이 역시 시민사회 주도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전반적으로 보았을 때, 세월호 사고 유족들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유족들의 트라우마 치유는커녕 분노와 슬픔을 극대화시키는 것이었다. 용산 참사 관련자들이나 쌍용자동차 파업 노동자들은 아예 테러리스트 운운하며 적 혹은 범죄자로 만들어 버렸다. 심지어 지금까지 명백히 국가에게 책임이 있는 국가 범죄 희생자 유족들은 여러 독재 정권 하에서 오랜 시간 동안 이러한 트라우마를 드러내어 치유하기는커녕 가까운 이들에게조차 입 밖으로 꺼낼 수조차 없이 억울함과 한을 안으로 삭히며 살아왔다. 일본군 성노예나 강제징용자 희생 유족들과 같이 제국주의에 의해 희생을 강요받은 경우에조차 대한민국 정부는 매우 소극적인 대응으로 일관해 왔다. 그런 국가는 베트남에서의 민간인 학살 만행에 대해서는 궤변으로 일관하거나 침묵하고 있다. 또한 그런 국가는 적게는 6만에서 많게는 20만여 명에 달하는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 희생자 유가족, 정부 발표 3만 여 명에서 비공식적으로는 그의 두 배에 달하는 제주 4.3 항쟁 희생자 유가족, 과거 독재 정권 하에서 열거할 수 없을 만큼 자주 있었던 간첩단 조작 사건 희생자 유가족 등등... 누구보다 심한 고통을 겪은 이들에게 제대로 된 사과나 보상, 치유를 해 준 적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굵직굵직한 사건들 외에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다양한 트라우마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지하철에서의 승객 자살에 대한 공포감과 구조조정 등으로 인한 과도한 노동 등으로 인한 지하철 기관사들의 심리에 대해서 한 때 사회적 관심이 높아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노동 강도나 환경만이 아니라 다양한 각도에서의 이들 외 다른 직업군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아직 조사 연구가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일시적으로는 구제역 당시 대규모 살처분에 동원되었던 공무원들의 심리적 고통에 대해 보도가 된 바 있지만, 우리 사회는 이러한 부분에 관심이 크지 않다. 가령, 아무리 익숙해 있을 것이라 생각되더라도 의사, 간호사, 검시관, 장의사, 119 구조대 등 끔찍하게 다친 사람들을 대하거나 시신을 처리하는 사람들의 심리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러한 노동 환경으로부터 오는 심리적 압박감에 고통 받는 이들 외에도 심리적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은 우리 사회 곳곳에 있다. 질병 등 자연적인 요인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보내는 것도 큰 고통이지만, 인재로 인한 사건과 사고에 의해 인명 피해가 발생하는 것은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큰 고통이다. 그러나 범인을 잡지 못 하거나 원인이 무엇인지 밝혀지지 못 하거나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 경우, 그 고통은 견디기 어렵다. 가령, 사이코패스 등 범죄자들에 의해 살해당한 사람들의 유족 혹은 미제 사건 유족들, 실종 아동 부모를 포함한 장기 실종자 가족들, 의료 사고 사망자 유족들, 학교 폭력 당사자 및 희생자 유족들, 성폭행 피해 여성들, 탈성매매 여성들, 가습기 살균제 피해 유족들, 군 의문사 사고 유족들 등등... 가축 살처분 현장에 투입되고 있는 방역요원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구체적인 사건과 사고가 아니더라도 이제 우리 사회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극도로 취약한 복지제도 속에서 무제한적인 경쟁을 강요하는 정글 자본주의 하에서 배제되고 뒤처지고 불안정하게 되는 수많은 사람들의 심리 치료가 필요하다. 극단적인 경쟁 속에서 고통 받는 다수를 양산하고 방치하는 천박한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빈곤과 극심한 불평등 및 사회적 배제 현상, 비정규직과 자영업 등 불안정한 노동의 만연, 취약한 복지 혜택, 그리고 소수 기득권 지배 집단 중심의 경제 구조 등 불안정한 심리를 만들어 내는 다양한 요인들로 인해 거리에는 위험하고 불안정한 심리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넘쳐 난다. 극소수의 선택받은 이들 외에는 서로 간의 차별과 적대의식 속에서 사회의 거의 모든 단위와 연령대에서 각종 사기와 폭력이 넘쳐나고, 반칙과 부패가 만연해 있으며, 혐오와 불법이 극에 달해 있다. 범법과 자살이 만연하지 않는 것이 도리어 이상할 정도로 사회는 심각한 위험에 빠져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심리적 치료를 필요로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환경이나 기후, 질병 문제 등으로 인한 더 큰 위험들도 도사리고 있고, 복잡해진 사회 속에서 우발적인 사건과 사고도 늘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그러나 조금 더 직접적으로 우리는 때로는 국가나 자본에 의해서 때로는 사회 내 기득권 집단들이나 정반대로 주변화 된 범죄자들에 의해서, 그리고 보다 더 일상적으로는 척박한 자본주의적 삶 속에서 다양하고 극심한 심리적 고통을 받고 있다. 물론 국가의 직접적인 폭력은 과거에 비해 다소 약화되었지만, 여전히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등의 피해자들이 존재하며, 사건과 사고, 재난에 대해 국가에 의한 제도화된 심리적 치유는커녕, 모종의 이해관계가 있을 경우 책임을 회피하기에 바쁘다. 사회의 불안정한 심리들은 이제 국가를 향해 저항하지 않고, 자신보다 약하거나 자신과 구별되는 집단에게 증오의 감정으로 변질되어 인종주의적, 반여성주의적, 반소수자적, 지역 차별적 언행을 서슴지 않고 있다. 물론 이렇게 다양한 영역과 분야의 문제를 단순화해서 정리하고 대책을 마련할 수는 없겠지만, 어느 경우든 심리적 측면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동안 이러한 문제들은 각각 별도의 문제라고 생각해 온 경향이 있다. 현재 우리 사회는 개별적으로 하는 힐링을 넘어 진지한 심리 치유가 필요한 극심한 정신적 피로를 겪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심리 치유는 보편주의에 입각한 국가 복지 시스템 하에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그 전제 조건은 지금과 같은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무자비하게 벌어지는 극단적 경쟁 자본주의의 극복이다. 이러한 방향으로 가지 못 할 경우 이 수많은 문제들은 서로 시너지 효과를 내며 우리 사회를 한층 더 불안정하게 만들 것이다. 억울함과 분노, 증오가 최소화되는 세상을 위해 세심한 관심이 절실하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352 | 추천: 0
이문영/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 온 나라가 메르스로 술렁이고 있다. 5월 20일 첫 확진환자가 나온 이후 6월 10일 현재, 사망자 9명, 확진자 108명, 의심환자로 격리된 사람이 거의 3천명에 육박하고 있다. 중동發 코로나바이러스(MERS-CoV)에 의한 신종 호흡기증후군인 메르스는 특히 만성질환자, 면역저하자, 노약자에게 폐렴이나 급성신부전 등 중증 합병증을 일으켜 위험하다. 아직 백신과 치료제가 개발되지 않은데다, 사스나 신종플루와 달리 30-40%에 달하는 사망률로 인해 메르스에 대한 공포는 바이러스만큼이나 무서운 속도로 한국 사회에 퍼져나가고 있다. 바이러스와 공포의 확산은 양 방향에서 우리 일상의 기반을 잠식하며 파괴한다. 메르스 사태의 국내 진원지라 알려진 경기 평택시는 인구 45만의 터전인 도시 전체가 거의 마비된 상태고, 현재 전국 유치원과 초중고교, 대학교의 10.5%인 2,199개 기관이 휴교에 들어갔으며, 전북 최초로 메르스 양성 환자가 발생한 순창의 한 마을은 마을 전체가 통째로 격리 조치되었다. 불안한 시민들은 모임과 회식, 여행을 취소하고 각자의 집으로 숨어든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마스크가 차단하고, 멸균 손 세정제가 타인의 흔적을 남김없이 지워낸다. 만남과 접촉이 위험시되고, 단절과 고립이 장려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메르스가 초래한 일련의 사태를 바라보며 ‘소통’에 대해 생각해본다. 이는 한편으로는 지구화의 패러독스라 불리는 글로벌한 차원과, 다른 한편으로는 박근혜 정권의 ‘불통’으로 대표되는 국내적 차원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최근의 사스, 신종플루, 메르스 등 전염병의 세계적 확산은 지구화의 환경과 무관할 수 없다. 중동의 메르스가 그로부터 멀리 떨어진 한국에서 이렇게 맹위를 떨치는 것은 교통 등 소통 테크놀로지의 비약적 발전, 이를 통해 접촉이 국경을 넘어 전면화된 지구화의 조건과 직결된다. 하지만 지구화는 이러한 ‘소통의 극대화’가 ‘단절의 극단화’와 공존하는 야누스의 얼굴을 가지며, 흔히 거론되는 지구화의 패러독스란 이를 지칭한다. 가장 쉽게는 소통의 상징인 스마트폰의 역설을 떠올리면 된다. 각자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아무런 대화도 없이 밥을 먹는 가족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멀리 떨어진 사람, 낯선 사람을 언제 어디서나 나와 연결해주는 스마트폰은 정작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 가장 가까운 이와의 소통을 가로막는 최대의 적이기도 하다. 소통의 얼굴 뒤에 극단의 불통을 숨기고 있는 것, 나아가 불통을 소통하는 것, 이것이 바로 스마트폰의 역설이 상징하는 지구화의 패러독스다.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환자를 치료한 경기도의 한 병원에서 의료진이 마스크를 착용한 채 업무를 보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바이러스는 접촉을 통해 확산된다. 그리고 바로 이 접촉선을 따라 공포와 불안과 불신이 함께 흐른다. 공포와 불안, 불신의 무차별적 소통은 극단의 불통과 고립이 완성될 때만 진정될 수 있다. 그 완성은 ‘불가촉’의 전선(戰線)을 사방에 그어대는 것. 환자를 돌봐준 사람들의 잇따른 감염 소식은 이 불가촉의 전선이 누구보다 먼저 아내와 남편 사이, 부모와 자식, 형제 사이에 그어질 것을 요청한다. 메르스가 불러일으킨 이러한 일련의 사태들, 즉 접촉이 고립을 초래하고, 소통이 극대화될수록 단절이 극단화되며, 불통의 호소가 소통의 유일한 내용이 되는 현상 속에서 지구화와의 유비를 떠올리는 것은 그저 엉뚱한 생각일까. 한편 메르스의 급속한 전파와 그것만큼이나 불길한 공포의 확산은 박근혜 정권의 ‘불통’의 직접적인 결과이기도 하다. ‘불통’은 박근혜 정권의 출범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실정(失政)의 핵심을 함축하는 단어다. 연이은 인사 참패나 세월호로 인한 사회분열 등은 기본적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고집스런 불통의 산물들이다. 메르스에 대한 대처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확진환자 발생 거의 2주 후에나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대통령의 때늦은 대처에 메르스 사태가 골든타임을 놓친 제2의 세월호가 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또 현재 인터넷에 난무하는 흉흉한 소문과 근거 없는 처방들 역시 기본적으로 정부의 뒤늦은 대응과 정보통제에 기인한다. 메르스의 위험에 먼저 반응한 여론과 소통해 초반부터 기민하게 대응하고 정확한 정보와 행동수칙을 제공했더라면 바이러스의 전파도, 공포의 확산도 최소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세월호부터 메르스에 이르기까지 이번 정부는 유독 유언비어와 괴담에 민감하고 엄격하다. 바이러스를 잡기 전에 유언비어 유포자부터 잡으려 한다. 하지만 정상적이고 건강한 소통이 가능할 때 사람들은 유언비어와 루머에 집착하지 않는다. 유언비어와 괴담 자체가 정부의 불통과 무능의 결과이다. 메르스가 정상적이고 건강한 면역체계를 갖춘 사람에게는 그저 독한 감기 정도로 지나갈 수 있는 것처럼, 유언비어와 괴담은 정상적이고 건강한 소통시스템 속에서는 한갓 지나가는 이야기로 금새 사라진다. 이 정권이 소통의 얼굴 뒤에 숨긴 자신의 불통을 철저히 성찰하지 않는 한, 바이러스보다 먼저 공포와 불신이 우리를 감염시키고 무너뜨릴 것이다. 울리히 벡이 말했듯이, 각종 전염병이나 자연재해, 테러 같은 재난보다 무서운 것은 바로 그 ‘재난의 상상적 효과’, 즉 공포와 불신의 확산과 그로 인한 진정한 소통과 신뢰의 붕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343 | 추천: 0
최정학/ 방송대 법학과 교수 좀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여야가 합의하여 개정하기로 한 법률안에 대해서 대통령이 못마땅해 하며 거부권 행사까지 언급했는데, 여당 내부에서 다시 재의결 가능성이 거론되었다는 것이다. 이른바 ‘대통령 중심제’인 한국에서 보기 드문 일이다. 여당이 대통령에 맞서기로 결심이라도 했다는 것인가? 잘 알다시피, 사안은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에 관한 것이다. 이미 오래 전에 구성된 ‘진상조사위원회’는 아직도 그 활동을 개시조차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기구의 장관급인 위원장이 길거리에서 농성을 한 지도 한참이 지났는데 정부는 자신의 의지가 관철된 시행령을 그대로 제정하였고, 이러한 상황에 대한 타개를 시도한 야당이 이참에 아예 정부의 과도한 행정입법 관행을 제어할 수 있는 국회법 개정안을 마련하여 여당의 동의를 얻어낸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정치적 꼼수가 있기는 했다. 청와대와 여당으로서는 다급한 공무원 연금 개혁법안에 합의해 주는 대신 앞으로 법률의 취지에 맞지 않는 행정입법에 대해서는 국회가 수정요구를 할 수 있다는 반대급부를 얻어낸 셈인데, 그러나 사안의 본질이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니다. 사진 출처 - 뉴시스 법률에서는 ‘법정주의(法定主義)’라는 용어가 있다. 어떤 중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형식적 법률, 그러니까 국회가 제정한 법률을 통해서만 이를 규정해야 한다는 원칙을 말하는데, 이를 반대로 보면 행정부의 시행령이나 시행규칙과 같은 행정입법을 통해서는 이를 다룰 수 없다는 의미가 된다. ‘죄형법정주의’와 같은 것이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는데, 범죄와 형벌은 국민의 권리를 직접 침해하는 중요한 사안이므로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의 논의를 통해서만 만들어지거나 변경될 수 있다는 것이고, 여기에 집행부의 의사가 개입하는 것은 권력의 남용이 될 가능성이 높으므로 허용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따라서, 설령 법률에서 범죄규정의 구체적인 내용을 명령에 위임했다 하더라도 그 범위를 넘어서는 하위입법의 규정은 죄형법정주의 위반으로 위헌무효가 된다. 또 굳이 법정주의까지 이르지 않는 경우라도 일반적인 위임입법의 한계, 즉 상위법의 위임을 받은 하위법은 그 모법의 취지와 목적을 벗어날 수 없다는 원칙이 당연히 작동한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이번 국회법 개정안은 이미 당연한 내용을 다만 국회의 권한을 좀 더 분명히 하는 형태로 바꾼 것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다. 즉 현재의 국회법이 제98조의2 제3항에서 “상임위원회는 위원회 또는 상설소위원회를 정기적으로 개회하여 그 소관중앙행정기관이 제출한 대통령령·총리령 및 부령에 대하여 법률에의 위반여부 등을 검토하여 당해 대통령령 등이 법률의 취지 또는 내용에 합치되지 아니하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소관중앙행정기관의 장에게 그 내용을 통보할 수 있다. 이 경우 중앙행정기관의 장은 통보받은 내용에 대한 처리 계획과 그 결과를 지체 없이 소관 상임위원회에 보고하여야 한다”고 규정한 것을 대통령령 등이 위법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관련 상임위원회가 그 수정‧변경을 요구할 수 있다고 개정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삼척동자도 다 아는 것처럼, 입법권은 국회의 고유한 권한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행정부의 막대한 권력을 견제하라는 것이 우리 헌법이 요청하는 권력분립의 원칙이다. 아무리 현대사회에서 정부가 법률을 직접 제안하는 정부입법이 그 양과 질 면에서 점점 중요해지고 있고, 특히 거의 언제나 여소야대라는 일방적 정치지형의 지원을 받아 견제받지 않은 권력을 행사해온 우리 행정부라 하더라도, 국회가 나름대로 합의해 제정한 법률의 내용을 시행령의 명목으로 왜곡하려는 발상 또는 그러한 관행은 그야말로 초법적, 위헌적인 것이다. 국회가 대표하고 있는 국민 또는 인민은 다양한 정치세력과 다양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뒤섞여 있는 집단이다. 따라서 이들이 일정한 합의에 이르려면 서로를 설득하려는 부단한 노력과 이를 위한 얼마간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자신들이 갖고 있는 미래에 대한 비전이나 사회개혁 정책만이 옳고, 왜 국회는 이러한 합리적인 정책을 입법적 지원을 통해 효과적으로 뒷받침해주지 않느냐는 식의 대통령의 인식은 그래서 위험해 보인다. 일부의 국민이 대통령과 청와대의 개혁방향을 지지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 상당수의 국민은 이를 우려섞인 눈으로 혹은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이러한 논의를, 대통령은 귀찮아 할 것이 아니라, 겸허한 마음으로 새겨들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국회를 통한 국민의 주권행사이며, 제대로 된 ‘비정상의 정상화’이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378 | 추천: 1
정지영/ 전) 서울DPI 회장 지난 4월 20일 제35회 장애인의 날 기념식에서 보건복지부는 바른 표현 사용 캠페인 선포식을 함께하며 “장애우·장애자 대신 장애인이 올바른 표현입니다”라는 캠페인을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한 집단을 이르는 용어는 그 집단의 사회적·정치적 위치를 내포하고 있기에 억압받는 집단이 어떻게 정의되고 있는지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며 저항의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장애인은 예로부터 불구자, 장애자 등 비하의 뜻을 담고 있는 용어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였고, ‘심신장애자복지법’을 ‘장애인복지법’으로 바꾸어 내며 비로소 ‘장애인’이라는 이름을 획득하였습니다. 그러나 장애인을 뜻하는 말로 많은 사람들이 쓰고 있는 ‘장애우’라는 단어는 딱히 장애인을 비하하기 위하여 쓰인 말은 아닙니다. 장애인 스스로가 사용할 수 없어 장애인을 ‘비주체적’으로 만드는 것으로 쓰지 말 것을 이 사회에 주문하였지만, 여전히 장애인을 바라보는 따뜻한 마음이 담겨있다는 온정적이고 시혜적인 이유로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장애우전용주차장’, ‘엘리베이터는 장애우에게 양보합시다’ 등등. 그런데 이번에는 보건복지부까지 나서 장애우를 장애인으로 바꿔 쓰자고 하니, 어쩌면 장애인운동사에 기록될 만한 일입니다(그러나 여전히 단체명에 ‘장애우’라는 말을 쓰고 있는 보건복지부 소관 사단법인에 대해서, 보건복지부가 어떻게 할지는 두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제35회 장애인의 날' 기념식의 장애 인식 개선 캠페인 슬로건 사진 출처 - 뉴스1 그런데, 이렇게 장애인당사자들의 요구로 장애자에서 장애인으로, 장애우라는 말까지 퇴출된 것만으로 장애인의 권익이 보호될 수 있는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예전에 사람들이 조금 모자라거나 부족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병신’, ‘쪼다’, ‘바보’라고 부르던 욕을 이젠 ‘이 장애인아!’라고 대체해서 사용하는 것을 보면, 장애인에게는 용어의 혁명도 중요하지만 ‘장애인집단’의 사회적 위치를 끌어 올리는 노력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장애인이 돈이 많아지면 사람들이 이렇게 무시하지 않을까요? 제 주변의 부자 장애인도 여전히 가끔 지하철에서 용돈을 받는 것을 보면(아무 이유 없이 쯧쯧하며 열심히 살라고 천 원, 오천 원씩 준다네요...) 그것도 딱히 정답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장애인의 학력이 높아지거나 좋은 직장에 다니면 해결될 까요? 제 주변의 박사 장애인도 사람들 많은 곳에선 동정의 시각을 받는 것을 보면 사회적 위치를 끌어 올리는 것도 전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여전히 세상 사람들은 여성을 비하하고, 흑인보다 백인을 선호하고, 성소수자를 혐오하며 장애를 욕으로 사용합니다. 결국은 ‘모든’ 사람의 가치를 존중해주는 인권 의식이 절박한 시절이 아닌가 합니다. KBS에서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 ‘프로듀사’의 시청소감을 보니, 주인공 김수현이 말하는 것이 ‘언어장애자’가 아니면 일반인이 누가 저렇게 말을 더듬느냐며 현실감이 떨어진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제가 즐겨보는 웹툰에 게이커플의 일상다반사를 연재하는 ‘지지’ 님은 게이입니다. 가장 최근 연재분에 웹툰작가파티에 참석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작가파티에 등장하는 것 자체가 커밍아웃이기 때문에 망설였지만, 남들은 하지 않을 고민을 해야 하는 것이 부당하게 느껴져 참석했는데, 의외로 많은 분들이 편견 없이 대해주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워낙 극중 김수현처럼 말하는 사람과 대화를 많이 하다 보니 아무생각 없이 보게 되었고, 게이인지지 님의 일상을 미리 보았으니 게이라는 편견 없이 즐겨보는 웹툰의 작가라는 생각만 하게 되는 것 아닐까요. 여전히 많은 장애인들이 시설이나 집안에 꼭꼭 숨겨있습니다. 사회활동을 하는 장애인도 사람들의 편견과 환경의 제약으로 여행이나 사교활동을 많이 하지 않기도 합니다. 시장에서 장을 보는 것도 누군가에게 부탁하게 되고, 투표도 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부재자투표가 가능하기도 합니다. 정책의 변화, 차별의 철폐도 중요하지만, 장애인과 살아본 적 없어 본의 아니게 차별하게 되는 비장애인들에게 우리 지역에 장애인인 내가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도 엄청나게 큰 장애인운동의 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 장애인단체가 있던 건물에는 3cm 정도의 턱이 있었습니다. 피자가게 앞은 더 높이 경사로가 있었는데, 이번에 구청에서 보도블록 공사를 다시하면서 3cm의 턱은 사라지고 피자가게 앞의 경사로는 더 완만해졌습니다. 경사로를 손 본 것이 아니라 보도블록을 조금 높게 쌓은 결과입니다. 동네 편의점에 오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 동네 미장원에서 파마를 하는 시각장애인, 영화관, 술집, 식당, 공원, 도서관, 은행, 부동산, 시장, 극장, 콘서트홀, 야구장 등등을 하나하나 내 삶의 공간으로 장악해 나가는 것, 매일 매일 사람들이 이용하는 공간을 장애인도 함께 이용하며, 동네에서 마주치며 불편한 게 있다면 개선하고 살아가는 것이 말뿐인 장애복지가 아닌 사람 사는 세상을 함께 만드는 밑거름입니다. 더 많은 장애인들이 부지런히 일상의 공간에 등장하는 것, 그렇게 생활하는 것 자체가 장애인권운동입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365 | 추천: 0
-서울 노마드, 아파트 탈출을 꿈꾸다 정보배/ 출판 기획편집자 이사를 앞두고 문득 서울에 살면서 몇 번이나 이사를 했나 세 보았다. 서울에 산 지 25년. 그간 13번 이사를 했다. 평균으로 나누면 한 곳에서 산 기간이 채 2년이 되지 않는다. 2년 이상 산 집은 세 곳이고 나머지는 1년 6개월도 채 살지 못했다. 누군가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마산에서 산 기간보다 서울에서 산 기간이 더 길어졌으니, 이젠 서울이 더 익숙하지 않느냐고 한다. 익숙한 건 맞는데, 스스로를 서울사람이라고 말하면 뭔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어차피 21세기는 노마드의 시대라고들 하니, 나도 서울에 사는 동안은 이리저리 필요와 형편에 따라 움직이는 노마드처럼 산다 생각하자. 유목민으로 살아오지 않은 이상 공간이 주는 안정감을 갖지 못하는 노마드의 생활은 한 집에서 20년을 살았던 시기보다 내게 더 많은 에너지를 요구했다. 결혼하고 살게 된 아파트라는 평면적이고 공중에 떠 있는 폐쇄적인 공간은, 편리하지만 그 안에 사는 사람조차 평면적이고 폐쇄적으로 만드는 것 같다. 자연과 사람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그런 공간. 아이를 나고부터 아파트가 아닌, 손바닥만 한 마당이라도 내 집 마당이 있는 집을 더욱 욕망하게 되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아파트가 가진 편리한 장점도 많지만, 불편한 점도 많다. 아파트 마당에 한번 나가려면 옷을 갈아입어야 하고, 엘리베이터도 기다려야 하고, 심지어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낯선 사람에게 서로 쓰지 않아도 되는 신경도 써야 한다. 비가 와서 비를 잠시 맞으러 나가는 것도, 잠깐 바람 쐬는 것도, 눈을 맞으러 나가는 것도 이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현관문만 열면 집 마당이라 바로 바깥이긴 하지만, 공공장소는 아니라서 편안한 차림으로 잠깐 나갔다 들어올 수 있는 그런 환경에서 살아본 경험이 없다면, 태어나서 계속 아파트라는 환경에서만 살아왔다면, 그런 것들이 번거롭다거나 굳이 그러려고 1층까지 내려갈 이유가 있는지조차 이해하기 어려울지 모르겠다. 그런 데 생각이 미치자 나는 더욱 아파트가 아닌 ‘집’에서 아이와 살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다. 아이에게 ‘집’이라는 공간은 자연에 대한 상상력을 키우는 데 아주 중요하다는 걸 나는 이론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터득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서울 송파구 잠실 주공 5단지 아파트 단지 사진 출처 - 한겨레 부동산에서 자주 듣는 말이 있다. 집도 다 운때가 맞아야 얻는 거라고. 단독주택이 아니라면 빌라도 괜찮으니 아파트는 별로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나와는 달리, 남편은 단독은 물론이고 빌라는 주차문제로 시끄러운 상황이 많으니 별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게다가 서울에 단독주택이 많은 동네는 제대로 정비가 안 된 지역이 많아 아파트보다 지저분하다며 서울에서 단독주택에 살 꿈을 꾸는 내게 찬물을 끼얹곤 했다. 그러던 우리에게도 그 운과 때가 왔다. 아이가 올 3월부터 다니게 된 공동육아 어린이집은 새터산 아래 단독주택과 빌라들이 있는 조용한 언덕 동네에 있다. 지금 사는 아파트 단지에선 걸어갈 수가 없어 아침마다 차로 데려다 주고 저녁에 차로 데리고 와야 하는데, 맞벌이 부부에겐 시간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피곤한 동선이다. 올 연말이 전세 계약만료라 어차피 집을 알아보긴 해야 하니 어린이집 근처로 집을 옮겨야 하나 생각하던 어느 날, 우연히 <옹동스>라는 만화책을 읽게 되었다. 작가가 키우는 고양이 이야기인데, 병에 걸려 죽을 뻔 한 고양이의 행복을 위해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감행했다는 내용이 나왔다. 그것은 내게 무슨 암시처럼 여겨졌다. 책을 읽은 그날, 퇴근 후 바로 어린이집이 있는 동네에 집을 알아보러 갔다. 단독주택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고 간 것은 아니었다. 정말 우연히도 그날, 그 부동산에 간 덕에 단독주택에 대한 회의를 품은 남편마저 마음을 고쳐먹을 수 있게 한 집을 계약할 수 있었다. 지은 지 38년이나 된 집이지만 넓은 마당이 있는 집. 바로 옆은 야트막한 산이고 집 앞은 탁 트여 있어서 바람이 잘 통하는 집. 어린이집 아이들이 새터산으로 나들이 갈 때 대문 앞 계단에서 잠깐 쉬어간다는 집. 물론 이 집에 들어가서 살게 되기까지는 아직도 꽤 먼 여정이 남아 있다. 오래된 집이라 리모델링을 하는 동안 세 식구는 몇 달을 오피스텔에서 지내야 한다. 집을 고쳐본 적도, 지어본 적도 없는 내게 새로운 숙제가 생겼다. 리모델링에 앞서 집의 공간들을 어떤 식으로 사용할 건지에 대한 고민. 아파트와는 달리 1, 2층에 다락방, 지하실, 마당, 창고까지 다양한 공간이 생기는 것이다. 집의 공간을 어떻게 규정하고 나누고 구성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은, 결국 나와 가족들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이었다. - 2편으로 계속
2017-08-07 | hrights | 조회: 332 | 추천: 0
박현도/ 종교학자 논문 2편을 표절해서 징계를 받은 교수가 대학총장으로 선임되었습니다. 그런데 일반인도 아니고 스님입니다. 지난 5월 2일 동국대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거국적, 거족적인 경사입니다. ‘표절 총장’은 표절의 격을 한껏 올린 금세기 최고의 인사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욱이 그간 일반 교수들이 글쓰기로 고생하는 것을 보다 못해서 보살도를 발휘하시어 스님이 직접 사바의 재활용 세계로 친림하셨으니 황공하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실로 표절은 한국 대학의 자랑이요, 우리 민족의 쓰레기 재활용 정신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민족문화의 정수입니다. 속없는 사람들이 하릴없이 상아탑이라고 불러대는 대학에서 스님 총장까지 나서 쓰레기 더미를 뒤지시니 어린 잡것들은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불도를 깨우치시기 전 여러 사람들이 도 닦는 것을 보고 배우셨으니 표절은 불가의 오랜 전통일 수도 있는데, 우리 민족 불교가 정말 훌륭하게 계승하였습니다. 진실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입니다. 스님까지 나서주셔서 이젠 잡인 교수들도 마음 편하게 표절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니 표절을 넘어서 창조적인 논문 생산이 가능합니다. 대학의 논문 생산은 타 산업계의 상상을 초월하는 경지에 이른지 오랩니다. 대표적 신공 중 하나가 아는 사람 논문에 이름 얹기입니다. 요즘은 융합이 대세라 전공이 완전히 달라도 문제없습니다. 수학 논문에 문학전공 교수의 이름이 버젓이 들어가도 융합이라고 하면 가능한 일입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입니다. 현대화되면서 사라진 전통적인 미풍양속이 아직도 대학에서는 명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얹히고 얹어주고,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일입니다. 사진 출처 - 뉴스1 많은 이들의 마음에 새로운 희망이 솟습니다. 표절 총장이 나왔는데, 이젠 이름 얹는 신공으로 논문 무임승차 총장을 배출해야 하겠습니다. 생각해보면 표절보다 더 멋진 것이 논문 무임승차입니다. 표절은 마우스로 긁는 수고라도 하지만 이름 얹기는 정말 아무 것도 안 해도 됩니다. 진정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이번 표절의 미학은 불가에서 큰일을 하셨으니 앞으로 무임승차는 기독가나 유가에서 보여준다면 종교간 화합 정신까지 덤으로 고양될 것입니다. 물론 일반 잡인 교수들이 하면 더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표절을 해도, 남의 논문에 그냥 편히 이름 얹어도 승진의 조건을 다 채우기가 어렵다는 불평이 많은데, 표절 없이 논문 잘 쓰는 이상한 품종의 교수들을 많이 채용하여 싼값에 부리고 난 후 피자에 토핑을 얹듯 이들 잉여교수들이 쓴 논문에 이름만 얹게 한다면 우리 민족의 피자 제조식 논문 생산이 강력한 국제경쟁력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학문적 성취력을 고양한 잡인 교수를 총장으로 선출한다면 실로 금상첨화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현대는 융합의 시대이니 남의 논문에 이름을 얹을 때는 전공을 다르게 해야 합니다. 통섭과 융합이라는 시대정신을 빛나게 해야 하니까요. 자, 지금 표절하면 안 된다고 교정에서 시위하는 정신 나간 교수들은 빨리 전공 다른 교수를 찾아 이름을 얹어야 합니다. 지금 그렇게 한가하게 시위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표절보다 더 빨리 생산력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은 남의 논문에 이름 얹는 것밖에 없습니다. 저도 협조자를 찾아 나서야겠습니다. 이렇게 한가롭게 글 쓰고 있다가 망하기 십상입니다. 논문 제대로 쓰면 멍청한 겁니다. 패가망신의 지름길입니다. 급합니다. 남의 논문에 이름 얹으러 나갑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7-08-07 | hrights | 조회: 693 | 추천: 1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흔히 우리 인간은, 우리가 다른 동식물들과 다른 탁월한 생명적 가치를 지녔다고 여긴다. 탁월성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이 생각을 인정할 수도 있고,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생각이 다른 동식물들에 대한 배타적인 지배력을 탁월성의 기준으로 삼은 것이라면, 특히 생태주의자들은 이러한 생각은 그 전제부터 틀렸다고 할 것이다. 배타적인 지배력은 약육강식의 자연적 생명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개체로서의 나 자신 또는 종으로서의 집단의 유지와 강화를 위해서 다른 개체 또는 다른 종의 집단을 어떻게 파괴해서 활용하더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 자연적 생명의 세계다. 우리 인간들 역시 자연에 속한 존재로서, 이러한 자연적 생명의 원리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런데 인간의 자연적 생명은 다른 동식물들이 지닌 자연적 생명과 달리, 도구를 활용하지 않고서는 유지될 수 없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도구는 기본적으로 사회적으로 생산 · 활용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은 도구에 들어 있는 사회성을 바탕으로 해서 각자의 자연적 생명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성은 기본적으로 바로 도구의 필연성과 도구의 사회성에서 기인한다. 이에 인간의 자연적 생명은 사회 속에서의 자연적 생명으로 전환된다. 또한 도구는 기본적으로 자연을 대상으로 해서 생산 · 활용된다. 그래서 도구는 크게 인간 이외의 자연을 향한 도구와 자연인 인간을 향한 도구로 나뉜다. 각종 기계기술들은 주로 전자에 해당되지만, 법과 제도 및 그에 따른 각종 기구들은 후자에 해당된다. 중요한 것은 사회 현실 속에서 누가 더 많이 도구를 소유하고 활용하는가에 따라 자신 및 자기 가족의 자연적 생명을 더 잘 유지 강화할 수 있고, 그래서 이를 둘러싸고서 치열한 경쟁적 투쟁이 생겨난다는 점이다. 이 투쟁을 통해 인간의 자연적 생명은 사회적 생명의 형태를 띠게 된다. 사회적 생명이 자연적 생명과 다른 근본 특징은 대타적(對他的)인 가치의 우월성, 즉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상대적으로 더욱 우월한 가치를 지녔음을 인정받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심지어 자신의 자연적인 생명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사회적 생명은 자연적 생명과 확연히 구분된다. 이때 추구하는 가치가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가치임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사회적 생명 역시 자연적 생명과 마찬가지로 배타적이라는 사실이다. 사회적 생명은 자연적 생명에 비해 더욱 더 배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 가치의 총량은 사회적으로 결정되기에 그 양이 일정하다고 할 수 있고, 따라서 가치의 상대적 우월성은 정확하게 제로섬의 구도를 지니기 때문이다. 내가 가지고 누리는 만큼 다른 사람이 누릴 수 없고, 다른 사람이 가지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는 만큼 내가 가질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것이 사회적 생명인 것이다. 사회적 생명이 구체화되어 나타나는 것이 권력이다. 오늘날 예외가 없을 정도로 세계 전체를 포섭하는 전 보편화된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까닭도 알고 보면 사회적 생명을 둘러싼 치열한 투쟁이 인간 생명을 끝없이 질곡으로 몰아붙이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부를 위한 이윤을 둘러싸고서 모든 투쟁이 벌어지는 것 같지만, 실제 그 투쟁은 사회적 생명 즉 권력을 둘러싼 투쟁이다. 이윤을 통한 자본의 확충은 곧 나 자신의 사회적 생명의 확충, 즉 권력의 배타적이고 대타적인 확충을 위한 필수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의 배타적인 상대적인 가치의 우월성, 즉 자신의 사회적 생명에 입각한 권력에 집중하는 한, 그 사회는 갈수록 극단적인 위기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특히 오늘날처럼 온갖 공적인 매체가 최첨단으로 발달된 상황에서는 누구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노출될 수밖에 없고, 그래서 누구든지 어떤 계기를 통해서든 자신의 상대적인 가치의 열등함을 확인하게 되고, 그 반대급부로 어디에서건 어떤 방법으로건 자신보다 더욱 열등한 자들을 물색해서 자신의 상대적인 가치의 우월함을 확인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게 되고, 그러한 과정이 악한 긍정적 피드백의 과정을 거쳐 점점 더 강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서로 가치의 살과 피를 파먹고 흡입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조차 할 수 없는 처참한 삶이 의식/무의식의 통로들을 거쳐 각자의 존재를 근본에서부터 공격하는 이 대대적인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조금이라도 지성적인 촉수를 세워 인간 존재의 위기를 염려하는 자라면 이 문제를 이미 늘 머릿속에 무슨 무거운 쇳덩이처럼 이고 있을 것이다. 무엇을 사회적 가치의 척도로 삼는가? 개인들 간의 관계도 문제거니와 집단들 간의 관계가 더욱 문제다. 크고 작은 온갖 형태의 집단들, 그 집단들 자체가 마치 사회적인 가치인 양 위세를 떨면서 작동하게 되면 그 위험성은 크게 높아진다. 집단에의 소속 자체를 둘러싸고서 각종 배제의 논리가 작동하면서 예사로 폭력을 행사하게 되기 때문이다. 국가든 민족이든 인종이든 계급이든 당파든 간에 배타적인 강력한 감정적 이데올로기로 무장하고서 전선을 형성하면서 폭력적인 공격 수단들을 총동원하게 되기 때문이다. 문제 해결을 가장 어렵게 만드는 요인 중의 하나는 개개 집단들이 자기들만이, 자기들이야말로 인류 보편의 궁극적인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고 또 실천하고자 한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 속에 다양성과 특수성들을 충분히 담보해 내지 못한 상태에서 보편을 주장할 때 그 보편 자체가 이미 폭력적일 뿐만 아니라 폭력을 확대 · 재생산해 낸다는 사실이다. 특히 동물세계의 배타적인 자연적 생명의 형태를 모델로 삼아 약육강식이야말로 생명 보편의 원리임을 강조하는 저급한 보편성은 가장 위험한 폭력성을 수반한다. 무엇을 사회적 가치의 척도로 삼을 것인가? 이 물음이야말로 최고도의 지성을 가장 긴급하게 요구하는 현실의 근본 물음이다. 개인 간이든 집단 간이든 제로섬 게임의 구도를 띨 수밖에 없는 배타적인 소유와 향유를 통한 가치를 사회적 가치의 척도로 삼는 한, 결코 대대적인 위기를 벗어날 수 없다. 함께 향유함으로써, 함께 향유하는 자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더 가치가 높아지는 이른바 질적 가치를 사회적 가치의 척도로 삼아야만 한다. 말하자면 최고도의 공향유를 필수적인 조건으로 해서 성립하는 가치를 사회적 가치의 척도로 삼아야 한다. 베토벤이 독일 사람이라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시인 김혜경이 일제 강점기 조선 식민지의 사람이라는 것이 중요한 것은 배타적인 민족 감정을 불러일으켜 그 민족 감정을 가치로 삼아 향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에 의한 일방적인 가치 구도를 혁파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공향유의 사회적 가치를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혁명가들이 인류 공영의 평화를 외쳤는가. 그것은 인류 모두가 함께 향유할 수 있는 가치를 사회적 가치의 척도로 삼는 세상을 앞당기기 위한 것이었다. 최대한의 공향유를 필수 조건으로 하는 가치를 사회적 가치로 삼을 때, 배타적인 사회적 생명의 차원에서 문화적 생명의 차원으로 넘어가게 된다. 인간 생명이 왜 다른 동식물의 생명보다 탁월한가? 자연적 생명에서 비롯된 배타성을 극도로 추구하는 사회적 생명을 추구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배제를 최대한 거부하는 최고도의 공향유를 필수 조건으로 하는 가치를 사회적 가치로 삼아, 단 한 번 주어진 인생을 가장 격렬하게 불태우고자 하는 문화적 생명의 발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안타까운 마음으로 최근에 필자가 어느 잡지에 기고한 시 한 편을 덧붙이고자 한다. <그 손을 놓아라> 너희들 우리, 괴물이여 그 손을 놓아라 움켜쥘 줄밖에 모르는 그 손을 남의 목을 힘껏 죄는 그래서 나의 목을 조르고 있는 그 손을 놓아라 유령인 그 손 네가 쥐고 있는 것은 또 하나의 유령, 돈이 아니다 또 하나의 유령, 권력이 아니다 너는 단 한 번밖에 없는 생명을 쥐고 있다 살 속 깊이 심장에 박혀버린 그 손을 거두어가라 흥건한 피비린내 한여름 홍수로도 씻어낼 수 없는 부패한 오염 위태롭게 걸린 인간, 아예 파괴되어야만 그 손을 놓을 것인가 마침내 흠뻑 혁명의 양잿물을 마시고서야 그 손을 놓을 것인가 애초에 그 손은 춤추는 손이거늘 아름다움을 약속하는 손이거늘 애무하는 손이거늘
2017-08-07 | hrights | 조회: 396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