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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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강대중(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윤동호(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이동우(변호사),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장은주(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운영위원 대한민국 사회가 전적으로 표류하고 있다. 아버지가 아들을 수시로 때려 그 아들이 폭력적 트라우마에 휩싸였다. 그 아들이 커서 결혼을 해서 아들을 낳았다. 그 어린 아들을 아무 이유 없이 수시로 때려 어느 날 숨지자 토막을 내어 냉동고에 넣었다가 곳곳에 흩어버렸다. 19-34세에 이르는 청년들 중 43%가 이른바 ‘알바’ 전선(戰線)을 힘겹게 전전하면서 하루살이의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전 국민의 하위 50%가 소유한 재산이 대한민국 전체 재산의 겨우 1.8%에 불과하다. 은행의 정상 연 이율이 3% 내외에 불과한데, 연 이율 40%에 육박하는 살인적인 고리대금에 시달리는 사람이 400만 명, 그 가족을 3인으로 계산하면 1,200만 명이 고리대금의 빚 독촉에 시달리고 있다.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 엄마와 아빠가 자정이 지나서야 집에 들어오니, 집에 들어가지 않고 밤늦도록 도심을 배회하는 초등학생들이 200만 명에 이른다. 대한민국이 사회적으로 가시적 또는 비가시적인 거대한 사회적인 폭력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이른바 노동의 유연성을 높여 기업의 대외 경쟁력을 높인다는 명목 하에 기간제법이니 파견법이니 해서 노동자들을 계속 불안정한 생계에 묶어 놓고자 하는 노동 악법을, 대통령이라는 자가 그런 악법을 국회가 통과시켜 주지 않는다고 수시로 기염을 토하면서 국회를 마치 전체 국민을 배신하는 양 몰아붙이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그런 노동악법을 마치 대다수 노동자들을 위한 것인 양 국민의 세금으로 텔레비전과 신문 등의 매체를 통해 호도하는 광고를 연일 내보내고 있다. 현실적으로 건 원칙적으로 건 나름의 근거를 제시하여 입법의 정당성을 제대로 설득하고자 하는 노력을 전혀 볼 수 없고, 이처럼 막무가내의 강압적인 이미지 정치로 일관하고 있다. 전적으로 폭력이다. 결국에는 섬뜩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두 가지 황당한 일이 동시에 벌어졌다. 둘 다 국회를 무시한 또는 국회를 그야말로 자신의 수족으로 만들기 위한 대통령의 독선에 의거한 사기극이다. 하나는 대한상공회의소 등 38개의 경제 단체들이 나서서 또는 그런 경제 단체들을 내세워 ‘경제활성화 입법촉구 1천만 서명운동’을 벌이자마자 대통령이 ‘맨 먼저’ 서명을 함으로써 정권과 자본가들의 결합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는 사실이다. 국회, 특히 야당에서 시민사회단체들이 주도하는 서명운동에 참여하듯이, 대통령 역시 그런 서명운동을 주도 내지는 적극적 참여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잖아도 사회적인 폭력성을 증가시키는 자본의 일방적인 독주가 문제인데, 이를 견제하고 바로 잡아야 할 대통령이란 자가 오히려 이에 편승하여 그 폭력성을 더욱 강화하는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보다 더욱 심각한 다른 하나는 국회선진화법에 발목이 잡혀 국회가 대통령이 지휘하는 여당의 뜻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해서 여당을 내세워 아예 이 법을 폐기 수준으로 개정하기 위해 ‘국회법 제87조’를 악용한 것이다. ‘국회법 제87조’는 “위원회에서 본회의에 부의할 필요가 없다고 결정된 의안은 본회의에 부의하지 아니한다. 그러나 위원회의 결정이 본회의에 보고된 날로부터 폐회 또는 휴회 중의 기간을 제외한 7일 이내에 의원 30인 이상의 요구가 있을 때에는 그 의안을 본회의에 부의하여야 한다.”이다. 여기에서 위원회는 국회운영위원회를 지칭하는데, 이 운영위는 과반수 찬성으로 의안을 결정하게 되어 있고, 총 28명의 위원 중 여당이 15명이다. 여기에서 여당은 야당이 불참한 가운데 국회선진화법 개정안을 짐짓 부결시킨다. 그런 뒤 다른 여당 위원들 30명을 동원해 해당 의안을 본회의에 부의하도록 요구한 것이다. 말하자면, 여당이 스스로 부결한 것을 곧바로 찬성 결의해야 한다고 뒤집는 꼴이다. 다수당의 독주를 막기 위한 법안을 다수당 내부에서 마치 이견이 크게 충돌한 것인 양 짐짓 양편으로 가르는 위장 사기극인 것이다. 법을 이용한 법치의 무용화를 획책하는 정치적 폭력이 아닐 수 없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8일 경기도 판교역 광장의 '경제활성화 입법 촉구를 위한 1천만인 서명 운동' 현장을 방문해 직접 서명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청와대 이 정도쯤 되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으로부터 양도받아 임시로 형성한 국가권력의 일방적인 실현을 방지하기 위한 3권 분립의 민주주의 정신을 정면으로, 그리고 노골적으로 위배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간단히 말하면, 이는 그 어떤 악법이라도 대통령 1인이 원하기만 하면 어떻게든 통과시켜야 한다는 파시즘적인 발상이다. 역사를 거쳐 간 파시스트들은 모두 다 자신의 의견을 따르기만 한다면 모든 국민들이 현재보다 훨씬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화려한 수식을 내세웠다. 대한민국 사회가 각종 폭력으로써 한없이 표류하고 있는데, 그 바탕은 오랜 역사의 정치권력의 폭력성이다. 40년에 걸친 외세의 폭력성, 12년에 걸친 이승만 독재의 폭력성, 그 이후 30년에 걸친 군사독재의 폭력성, 이러한 정치권력의 폭력성의 역사를 차단하고 새로운 평화로운 사회적 삶을 추구하고자 지난한 정치 및 사회 민주화 투쟁을 지속해 왔건만, 폭력성에 의거한 정치권력의 장악과 실행에는 변함이 없으니 어찌 통탄하지 않을 것인가. 이러한 정치권력의 폭력성에는 여러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고 있다. 분단 이데올로기와 지역 이데올로기가 중첩된 가운데 이를 이용한 신자유주의적인 자본 이데올로기가 극성을 부리고 있다. 이러한 각종 이데올로기는 정치권력의 폭력성을 뒷받침하는 정신적인 자양분이 되고 있다. 사회 곳곳에 이데올로기적인 폭력성을 강화시키고 이를 악용하여 정치적인 폭력성을 강화시키는 나라가 어찌 “민주공화국”일 수 있겠는가. 시민들, 국민들에게 유일하게 할당된 정치활동의 기회인 총선 투표가 다가오고 있다. 무엇보다 정치권력의 폭력성을 폭로하고, 그러한 정치적인 폭력성이 어떻게 사회적인 각종 폭력성을 알게 모르게 부추기는가를 드러내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와 같이 폭력성에 의거한 정치권력의 집단을 하루속히 대한민국의 정치권에서 내몰아 사회적인 차원에서 폭력 대신에 평화와 공존공영이 조금이라도 더 자리를 잡는 데 기여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은 2016년 1월 21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395 | 추천: 0
정보배/ 출판 기획편집자 가끔 예상치 못한 순간에 듣게 되는 말이 있다. 너는 할 말 다하고 살아서 좋겠다. 이 말을 들으면 순간 머리가 멍해진다. 할 말 다하고 산다니. 그러면 나는 그 사람에게, 내게 그런 말을 하는 당신이야말로 '하고 싶은 말을 다한'게 아닌가요 라고 되묻고 싶어진다. 얼마 전에 사노 요코라는 작가가 육십 대에 쓴 <사는 게 뭐라고>라는 책을 읽었다. "사는 게 뭐라고"라니. 제목을 소리 내 읽어 보니, 왠지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조금은 될 대로 되라 하며 긴장의 끈을 놓고 싶은 마음에 살짝 위안이 되기도 한다. "시크한 독거작가의 일기"로, 글에서 타인의 눈치를 보거나 자신을 과대포장하거나 과도한 자기연민을 느끼게 하는 부분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자기 연민과 자기 과시가 없는 글을 보면 감탄하는 것 같다. 대학 때 읽은 김성칠의 <역사 앞에서>를 읽었을 때는 굉장한 감동을 받았다. 그 뒤 십년 정도는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부모님이 아니라 김성칠이었다. 그런 글과 안목과 학식을 갖추고 싶었다. 물론 아직도 그것은 희망사항이다. 한 해 동안 나는 어떤 사람과 생각을 접하고 어떤 것을 고민하였나 돌이켜본다. 여러 가지 중에서 세 가지만 꼽는다면, 부모는 절대 자기자식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고 응원과 지지를 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 개인이든 조직이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데는 갈등과 물리적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인간의 노화에 대한 것이다. 마흔이 넘어 새로이 깨닫게 되는 것들이 매해 늘어난다. 아마 그것들을 여기에 죽 나열하면 십중팔구 사람들 반응은 이럴 것 같다. "그렇게 단순한 사실을...?" 앞서 말한 세 가지도 마찬가지다. 다만 개인적으로 특별한 계기를 통해서 얻게 된 경험이라는 것뿐이다. 스무 살부터 부모와 떨어져 지냈던 나는 가끔 궁금했다. 나의 생활을 거의 알지 못하는 부모가 과연 사람들 사이에서의 내 모습이 어떤지 아실까? 일찍 집을 떠난 막내딸이 밖에선 어떤 페르소나를 가진 인간인지 이해하실까? 지인의 아들이 우울증으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해묵은 그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어쩌면 내 질문이 틀린 것이 아닐까? 중요한 것은 부모가 자식에 대해 많이 알고 적게 알고도 아니고, 정확히 알고 틀리게 알고도 아닐지 모른다. 자식을 가장 잘 안다고 믿고 있는 부모 말고, 자식이 어떠한 종류의 억압 없이 자유롭게 감정과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어른이 주변에 있는지가 중요한 건 아닐까. 올해 나는 아이를 공동육아에 보내면서 조합의 새로운 일원이 되었다. 지금껏 스스로 오픈 마인드라고 생각해 왔으나 그 일을 겪으면서 객관적으로 나를 다시 보게 되었다. 공동육아 어린이집은 가을에 내년 입소를 희망하는 부모를 대상으로 설명회와 면접을 하는데, 현재 딸이 다니는 어린이집의 선생이 자신의 아이를 이 어린이집에 내년부터 다니게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다. 이 말을 들었을 때의 내 반응과 생각을 시간차를 두고 바라보니, 새삼 나라는 인간도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우선은 방어적으로 생각하거나 보수적인 입장을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지금껏 자신을 얼마나 과대평가했는지 그리고 과신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사진 출처 - SBS 내후년이면 아흔을 바라보는 시어머니. 결혼 10년 동안 그분의 팔십대를 같이 보낸 셈이다. 팔십대의 노인이 어떤 노화의 과정을 겪는지를 의도하진 않았으나 곁에서 지켜보면서 인간이 늙는다는 것, 흔히 말하는 노화라는 것이 어떤 순서로 찾아오고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보게 되었다. 50대 지인들을 만나 내가 눈으로 겪은 그 '노화'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들은 말로만 듣던 그 노화가 얼마나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인지에 몸서리치며 놀란다. 언젠가 "보청기와 틀니"라는 칼럼으로 쓴 적도 있다. 시각, 미각, 청각, 후각이 다 퇴화되고 관절이 나빠지면 운동량이 줄고 그래서 몸의 근육이 없어지고 그러면 움직이기가 더 힘들어지고... 이런 식으로 감각과 근육과 신경세포와 뇌세포들이 서서히 죽어가는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과연 어느 단계쯤에서 흔히 말하는 논리적인 사고와 판단이 불가능해지는 것일까? 만약 그 단계를 지나서 그것들이 불가능해지더라도, 몸의 통증과 고독은 죽기 직전까지 느끼게 되는 것일까? 병으로 죽는 것이 나은 걸까, 서서히 모든 기능이 정지해서 죽는 것이 나은 걸까? 누군가의 말마따나 '죽는 게 문제다'. 어떻게 살 것인가도 해결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죽을 것인가'도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이상하게 나이가 들수록 생각을 명료하게 정리하기 어렵고, 내 생각을 타인과 나누는 것이 어려워진다. 그래서 점점 더 칼럼을 쓰기가 힘들어지는지도 모르겠다. 소득과 나이만이 아니라 가치와 취향과 세계관이 다른 다양한 집합체가 공존하는 복잡하고 터프한 대한민국에서 한 해 열심히 보낸 모두에게 박수를 보낸다. 이 글은 2016년 1월 6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371 | 추천: 0
마흐디 압둘 하디/ 팔레스타인 국제문제 연구소장 (Mahdi Abdul Hadi, Head of PASSIA, http://www.passia.org) 2015년 10월 초, 팔레스타인, 특히 예루살렘에서 팔레스타인 청년들이 이끄는 역사적인 새로운 움직임이 목격되었다. 이스라엘 정착민들과 이스라엘 군부에 대항하는 이 “청년 봉기”는 개인적이고 무계획적이며 자발적인 방식이다. 이 봉기는 지난 40년간 이스라엘이 추진한 인간성 말살, 점령, 이스라엘화, 유대화 정책의 결과로 발생한 팔레스타인 사회의 분노와 좌절의 표현이다. 이 “청년 봉기”는 팔레스타인인들이 가지고 있는 확고한 의지와 저항의 개념에 다음과 같은 새로운 비전과 임무를 불어넣었다. ■ 팔레스타인인들을 그들의 영토, 가정, 모스크, 교회, 그리고 예배소와 일터에서 추방하려는 이스라엘의 시도와 팔레스타인 주택 파괴, 팔레스타인 마을 고립시키기, 그리고 팔레스타인 어린이 체포와 고문에 대항하는 저항과 생존 ■ 팔레스타인 민족서사와 역사문화 왜곡, 이슬람 성지 훼손 및 민족기구 폐쇄에 대항하는 저항과 생존 ■ 알 아크사 모스크(알 하람 알 샤리프, 예루살렘 이슬람 성지)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 및 정문 폐쇄조치, 그리고 대다수 주민들이 알 아크사 모스크에서 기도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치에 대항하는 저항과 생존 ■ 예루살렘 포위와 주민들의 예루살렘 성지 입장 금지에 대항하는 저항과 생존 ■ 팔레스타인의 민족적, 종교적 상징인 알 하람 알 샤리프로 구현되는 민족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저항과 생존 ■ 자신감과 용기를 가지고, 이스라엘인들에게 저항한 자신들의 행위의 결과를 웃으면서 수용하는 저항과 생존 ■ 어떠한 정당, 파벌, 정치적 주장에도 충성하지 않고, 제휴하지 않으며, 지도자나 대표가 되고자 하는 감투욕심도 없는 청년들의 저항과 생존 팔레스타인 청년 봉기의 사례 ■ 오슬로협정 이후에 태어난 12~20세 사이의 세대들이 이스라엘 군부와 무장한 정착민들에 대항하여 나섰다. 이 세대는 1948년 이스라엘국가 건설과 팔레스타인 나크바(대재앙), 1967년 6월 전쟁, 1987년 제 1차 인티파다(팔레스타인 봉기), 1993년 교착상태에 빠진 오슬로 협상 등 팔레스타인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모를 수도 있다. ■ 그러나 이 세대는 이브라힘 투칸의 민족 시(詩)를 기억하고 암송한다. “나의 조국, 나의 조국, 청년은 지치지 않는다. 그들의 목표는 독립이 아니면 죽음 뿐... 우리는 적의 노예가 되지 않을 것이며 끝없는 굴욕과 비참한 삶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위대한 평화를 되찾을 것이라네.” ■ 이 세대는 지난해부터 지금까지 매일 알 아크사 모스크와 그 안마당 출입을 금지 당해 예루살렘의 길바닥에서 기도를 올려야 했으며, 무장한 정착민들이 점령군의 보호 하에 알 하람 알 샤리프에 무단 침입하는 것을 목도하였다. ■ 이 세대는 유대근본주의자들이 행하는 섬뜩한 주장과 구약의 “전설들”을 들었으며, 알 아크사 모스크를 대체하는 유대교성전 건축계획안 이미지와 모델들을 목격했다. ■ 이 세대는 비록 오늘 자신의 공간을 잃어버렸을지라도, 내일을 또다시 빼앗기는 것을 거부한다. 20~35세 사이의 이 세대는 자신의 가족 문제, 이웃의 폐쇄와 고립 및 어린이 체포 문제에 관심을 쏟고 있다. ▲ 마흐디 압둘 하디(Mahdi Abdul Hadi) 팔레스타인 국제문제연구 소장 ■ 이 세대는 나에게 교육시킬 수 있는 힘을 준 '지드니'라는 사회 문화 운동을 시작하였다. 이 운동은 책을 가지고, 마흐무드 다르위시 시를 읽고 암송하면서 예루살렘 구도시를 에워싼 인간 띠에서 시작되었다. 마흐무드 다르위시의 시, “아, 덧없는 이야기들 사이에서 지나가는 인생들, 이제 당신들은 이곳을 떠나야 한다. 당신들이 원하는 곳에서 살아라, 그러나 우리들 사이에서 살지는 말아라.” ■ 팔레스타인 순교자인 바하 엘리얀은 살해당하기 전 자신의 페이스 북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나는 모든 파벌들에게 나의 순교를 활용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나는 조국을 위해 죽는 것이지, 그 어떤 파벌을 위해서 죽는 것이 아니다.” ... “그들이 우리 집을 부수려 한다면 마음대로 하게 둬라. 돌은 인간의 정신보다 가치가 없으니까.” ■ 이 세대는 돌을 던지고, 타이어를 태우고, 칼로 이스라엘인을 공격한 게 전부였으나 실탄과 고무총탄에 맞았다. ■ 이 세대는 팔레스타인 마을을 방어하기 위한 시민사회 위원회를 조직했다. ■ 이 세대는 ‘그리스인 조르바(자부심과 자신감)’ 멜로디에 맞춰 라말라 거리에서 춤을 췄으며, 행진을 하며 알제리(100만 순교자의 나라) 국기를 들어올렸다. ■ 이 세대는 사회 문화 클럽을 결성했고, 소셜 미디어에 자신들의 저항과 분노를 게시했다. ■ 이 세대는 지난 40년 이상 지속되어 온 팔레스타인인의 저항에 관한 그림을 그리고, 민족 시(詩)를 지었다. ■ 이 세대는 오늘은 계산되나(103명의 희생자), 내일이면 잊혀지는 숫자로 명명되길 거부한다. ■ 이 세대는 일상적인 현실에서 도전(직업도 없고, 여행도 못가고, 결혼도 못하며, 자기 소유의 집을 짓기 위한 “허가”도 받지 못하고 있는 등)을 받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미래를 건설하기 위한 독창적인 방안을 추구했다. ■ 이 세대는 2014년 말, 라말라와 나블루스 사이에 밥 알 샴스(태양의 문) 건설 계획을 생각해냈고, 이스라엘인들이 파괴한 요르단 계곡에도 이와 유사한 계획을 세웠다. ■ 이 세대는 튀니지 태생의 아부 알 까심 알 샤비의 시(詩)를 암송한다. “산에 오르기 두려워하는 자는 영원히 그 골짜기에 머물지니.” ■ 이 세대는 그 어떤 지도부나 지침, 대표자 등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의 길을 개척하며, 자신의 권리, 존엄 그리고 인간의 가치를 위해 투쟁한다. 환상의 붕괴: 가면이 벗겨지고, 진실이 드러나다 민족전선에 대한 환상의 붕괴: 1) 이스라엘과의 “신성한 안보” 협력 종결 2) 민족 화해와 통합의 성취 및 이스라엘에 대한 보이콧 3) 대통령, 입법부 및 의회 구성을 위한 총선 실시 4) PLO 헌장, 임무 및 정치기구 재가동 5) 전범 및 인권유린에 연관된 이스라엘 지도부의 고발 정치전선에 대한 환상의 붕괴: 1) 서안과 가자지구에 예루살렘을 수도로 한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 2) 예루살렘을 개방된 공동도시, 즉 국제도시로 공유하고, 팔레스타인 마을들에서 이스라엘의 철수 3) 포위 종결, 가자 지구 재건, 공항과 항구 건설하기 4) 이스라엘의 정착 활동, 토지 및 재산의 몰수 중단 5) 팔레스타인 포로 및 억류자의 석방 및 체결된 협정 이행 아랍전선에 대한 환상의 붕괴: 1)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경제적, 정치적 분야 조력자인 아랍연맹의 결정 실행 2) 이집트와의 우호관계 회복 및 라파 국경 재개방 3) 예루살렘에 관한 요르단-팔레스타인 관계 및 이슬람 와끄프 위원회 제도화 4) 아랍 국가들에서의 팔레스타인 난민에 대한 주거, 노동, 교육 및 이동에 대한 불공정한 규제 철폐 5) 아랍-이스라엘의 정치 및 안보 관계 정상화 중단 이스라엘전선에 대한 환상의 붕괴: 1) “역사적 현상유지 변화시키기” 즉 이스라엘과 알 아크사 모스크(알 하람 알 샤리프)를 공유한다는 환상 종결 2) 이스라엘이 아랍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할 것이라는 환상 종결 3) “현상 유지”를 필연적인 것으로 여기는 환상 종결 4) 분쟁 해결을 위한 미국-이스라엘 간의 경제적 해결책이라는 환상 종결 5) 아랍과 이스라엘의 관계 정상화라는 환상 종결 ■ 결론적으로, 100년 이상 지속된 끝없는 갈등 이후, 역사적인 팔레스타인 땅과 외국에 흩어져 있는 우리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중 국적”에 토대를 두고 팔레스타인에서 새로운 비전을 향해 노력하고, 우리의 조국에서 지속되는 시온주의 운동에 계속해서 도전해야 하는가? ■ 이러한 일련의 사건 이후에, 우리가 우리의 조국과 성지, 특히 알 아크사 모스크(알 하람 알 샤리프)에 대한 우리의 권리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해야만 하는가? ■ 새로운 비전을 성취하기 위하여, 팔레스타인 “청년 봉기” 및 우리 열망의 구현체인 PLO와 더불어 나와 함께 “종을 울릴” 사람, 있습니까? 이 글은 2015년 12월 24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466 | 추천: 0
정지영/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사무국장 다사다난했던 2015년 을미년을 보내고 2016년 병신년(丙申年)을 앞두고 사전적 의미로 ‘병신(病身)’인 당사자들은 언어적 유희를 가장한 대화와 문장을 얼마나 많이 접하게 될지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2016년 병신년에는 장애인의 권리가 더욱 신장되길 바랍니다. 내년은 1년 365일이 장애인의 해이기 때문입니다” 함께 자리한 사람들의 큰 박수와 웃음이 터집니다. 같이 웃어야할지 이런 상황에서 한마디를 해야 할지 망설이다 어색한 웃음과 치다 만 박수에 혼자만 머쓱해 집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병신이란 신체의 어느 부분이 온전하지 못한 기형이거나 그 기능을 잃어버린 상태. 또는 그런 사람이라고 합니다. 제 몸을 살펴보니 두 다리가 걷는 기능을 잃어버린 상태라 사전적으로 병신이 아니라고 주장하기 어려워집니다. 하지만 병신이라는 말에는 모자라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는 뜻도 함께 있어 주로 남을 욕할 때, 자신의 어리석음을 스스로 자책할 때 더 많이 쓰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용어의 수정은 언어로써도 존중받지 못하는 집단, 지칭하는 용어에 비하와 무시의 감정이 실려 태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막을 수 있으며 그들의 인권을 무시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병신이라는 용어는 차별적 언어로써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퇴출되었던 것이고 이 과정에서 당사자들의 많은 노력이 있었습니다. 제가 우려하는 부분은 문장의 맥락에서 병신년(丙申年)을 사용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놀리거나 무시하기 위하여 병신년(丙申年)을 섞어 쓰지만 충분히 그 의도를 파악할 수 있는 표현들이 많아질 것에 대한 우려입니다. 장애인을 지칭하는 용어가 불구자에서 장애인까지 오게 된 큰 이유는 장애의 문제를 개인의 결함이나, 부족함, 그로 인한 자격의 박탈이 당연시되는 것을 막고 개인이 가진 신체적 정신적 장애를 포용하지 못하여 결과적으로 사회활동의 어려움을 가져오는 문제, 즉 진짜 장애를 부각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외국의 장애인권운동가들은 장애를 가진 사람(people with disability)이라는 객관적인 표현보다 불가능하게 된 사람이라는 뜻의 disabled peoples를 더 선호합니다. 장애를 가리키는 말은 으레 상대를 낮추거나 비하하는 의도의 뜻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곰곰이 다시 한 번 생각해봅니다. 장애는 불편합니다. 누구도 희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실존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회피할 문제도 아니며 사람이 살다가 한 번 이상은 감기 같은 질병에 걸리는 것이 보편적이라는 것이라면 장애 또한 살다보면 혹은 태어나면서부터 그렇게 될 수 있는 보편적인 문제입니다. 한국장애인 인권운동의 선각자이셨던 故이익섭 회장님의 강연을 다시 떠올려 봅니다. “여성, 차별금지, 아동, 인종차별, 이주노동자에 대한 각종 다양한 기본권리를 해놓고서는 이제 좀 인간다워졌다고 인류가 폼을 잡으려하는데, 장애인 문제가 자꾸 괴롭힌다. 역사적인 의미에서 왜 맨 나중에 왔을까, 우리가 장애를 희망하지도 않고 장애인 단체를 부러워하지도 않는다. 얼마나 큰 시련이고 우리에게 큰 도전을 요구하는지 인류가 자성하지 못하면, 절대 인권이라고 하는 것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 이것은 보통문제가 아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삼척동자도, 짐승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을 발견하고 이런 존재를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굉장히 중요한 도전이다. 짐승은 할 수 없고 어린이도 할 수 없고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더더구나 할 수 없는 굉장한 도전이다. 그렇게 장애인 문제는 1/10이면서 누군가가 해주어야할 과제가 아니고 정말 진정으로 도전받아야 할 과제이기 때문에 21세기가 아니면 도전할 수 없었던 과제이다(2005년 제5기 장애인청년학교 강연 중).” 한 사람을 존중하고 그의 인권을 보장해야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존중받을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어떤 상태에 놓여있든 존중함으로써 인권의 가치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인권의 시작, 아름다워서 아름다운 것이 아닌 존재자체의 고귀함과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도전의 한 해가 되길 희망하며, 2016년, 대한민국 국민 모두 건승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 글은 2015년 12월 16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366 | 추천: 0
이문영/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 올해 IS가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3개 대륙을 넘나들며 자행한 테러로 8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얼핏 떠오르는 것만 헤아려 봐도, 2015년 10월 10일 터키 앙카라역에서 자살폭탄테러로 128명이 목숨을 잃었고, 같은 달 31일 이집트 시나이 반도 상공에서 러시아 여객기를 대상으로 한 폭탄 테러로 탑승객 224명이 전원 사망했다. 또 11월 12일 레바논 베이루트 폭탄 테러로 43명이, 그 다음 날 발생한 파리 연쇄 테러로 132명이 사망했다. 하나의 테러 조직이 이렇게 글로벌한 기동력으로 이렇게 많은 지역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은 경우가 있었던가. 특히 파리 테러의 경우, 그것이 전 세계에 던진 충격과 파급력으로 인해 ‘알카에다의 911’ 테러에 빗대 ‘IS의 911’, ‘유럽의 911’로 불린다. 그런데 두 911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뉴욕의 911이 세계무역센터와 펜타곤에 돌진해 미국으로 표상되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상징’을 가격했다면, 파리의 911은 극장과 축구장, 펍과 바를 종횡무진하며 유럽인으로 표상되는 세계시민의 ‘일상’을 가격했다는 점이다. 이 테러가 파괴한 것은 단지 일상만이 아니다. 아주 오랫동안 우리가 일상 속에 소중히, 공들여 만들고 가꾸어온 가치들, 나와 다른 사람, 다른 문화에 대한 존중, 그들과의 공존과 공생, 그렇게 함께 하는 삶의 의미 자체를 무너뜨렸다. 파리 테러 후 등장한 “똘레랑스가 유럽을 망쳤다”는 구호는 더 이상 일부 보수정치인만의 레토릭이 아니다. 이해, 관용, 용서, 사랑, 연대 같은 ‘보편적’ 가치를 ‘보편적’이게 만들기 위해 지불해야만 했던 역사 속 수많은 희생이 무위로 돌아갈 판이다. 파리의 911은 뉴욕의 911보다 훨씬 더 본질적인 것을 테러의 제물로 삼았고, 따라서 제대로 되새기지 않으면 더욱 참혹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더구나 유럽이 어떤 곳인가. 소수자 인권과 문화다원성, 똘레랑스, 민주적 참여, 지속가능한 발전 등 세계 어느 지역보다 진보적인 가치감각이 발달, 공유해왔다고 인정되는 곳이다. 물론 발리바르가 진즉에 경고했듯이, 유럽연합은 그 안에 수많은 내부경계들, 차별과 억압의 경계들을 품고 있는 만만치 않게 문제적인 공동체다. 그리스 재정위기나 난민정책을 둘러싼 유럽연합 내 갈등이 이를 잘 보여준다. 어쩌면 파리 테러는 이 내부경계를 제대로 건드린 것인지도 모른다. 파리 테러가 유럽이라는 하나의 표상 아래 강제 봉합되어온 이 유럽의 틈과 균열들이 만나 다시 한 번 폭발하는 것, 이것이 파리 테러의 후폭풍이자 파리 테러의 완성일 터다. 불행하게도 이미 유럽은 그런 불길한 조짐을 내비친다. 파리 테러 후 프랑스 국민전선의 마리 르펜은 “무슬림 단체를 모두 해체하고 불법이주민을 추방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파리 테러 용의자 중 일부가 난민 신분을 이용해 프랑스에 입국한 정황이 포착되면서 이러한 목소리는 더욱 거침이 없다. 포용적 난민 수용정책으로 올해 노벨평화상 후보로까지 거론됐던 메르켈 독일 총리는 리더십의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독일 기독사회연합의 마르쿠스 줴더 의원은 “통제불능과 불법이민의 시간은 끝났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 파리가 모든 것을 바꾸었다”고 외친다. 이러한 움직임은 이탈리아, 헝가리, 폴란드, 네덜란드 등에서도 뚜렷이 목격된다. 유럽이 이러할진대 미국은 어떨까. 파리 테러가 일어난 지 일주일 만에 미국 하원은 오바마 대통령의 시리아 난민 수용을 반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의 이름은 ‘외적에 대항하는 미국인 안전법’. 난민이 미국인의 안전을 위협하는 적이라는 말이다. ‘미국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과시 중인 트럼프가 파리 테러 후 무슬림과 외국인을 상대로 쏟아낸 막말들은 이미 아찔한 수준조차 넘어섰다. 그럼에도 트럼프의 보수층 공략은 여전히 먹히는 중이다. 파리 바타클랑 공연장 앞 추모 현장 사진 출처 - 연합뉴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파리 테러 후 시리아 난민 200명이 국내 체류 중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문제는 시리아 난민에 대해 “메르스보다 위험하다”거나, “헬조선만으로도 버겁다, 파리 꼴 나기 전에 돌려보내라”는 여론이 범람한다는 사실이다. ‘난민=테러리스트’라는 비이성적인 등식에 기대어 한 여당 정치인은 테러방지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불온한 테러리스트에 대한 경계는 불순한 국민들을 향한 날선 경고로 이어진다. 복면을 한 시위 참여자는 IS나 한가지라고 한다. 대통령이 직접 한 말이다. 테러는 공포의 확산기제를 통해 최소한의 폭력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얻고자 한다. 그렇다면 IS는 소기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했다. 연이은 테러로 세계는 공포를 넘어 공황 상태에 빠졌다. IS의 원칙을 전 세계에 퍼뜨리고자 하는 목적도 효과적으로 달성했다. 이슬람 극단주의가 설파하는 나와 타자의 극단적 분리, 오로지 나의 편에만 진리가, 존재의 권리가 존재한다는 독선이 파리 테러 후 난민에 대한 거부로, 무슬림 혐오주의로 변복(變服)해 유럽을, 세계를 거꾸러뜨린다. IS에 대한 공포가 자신 속의 IS를 깨워 일으킨 셈이니 역설적이라 할 만 하나, 테러는 본디 이러한 공포의 역설을 먹고 자란다. 파리 테러로 인한 전 세계의 우경화, 이러한 기류에 편승한 공안통치의 강화도 문제지만, 정치 이전에 사람들 각자의 삶과 삶이 부딪혀 일상이 전쟁이 되어버린다. 나와 다른 사람, 다른 생각, 다른 종교, 다른 문화를 허용하지 않고, 다름을 적으로 돌리는 것. 공포를 빌미로 가상의 적을 만들어내고, 나와 그 사이에 예리한 경계를 그어대는 것. 그 칼날은 결코 강한 타자를 향하는 법이 없다. 난민은 누구보다 약하고 가난하여 도움이 절실한 사람들이다. 그런 난민 속에서 적을 보는 사람에게나, 그 터무니없음을 보는 사람에게나 삶은 너무나 버거우면서 하찮고, 결국 허하다. IS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이러한 삶의 파괴, 인간의 파괴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파리 테러 직후 발리바르도 한 칼럼을 통해 같은 질문을 던진 바 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자답했다. 우리 함께 되돌아볼 것, 그리고 온갖 공포, 또 복수의 충동에 저항할 것. ‘자칭’ 애국자들에 의해 내부의 적으로 배제된 사람들을 향한 증오행위를 가장 철저하게 경계할 것. 그의 마지막 호소는 평화를 유럽의 의제로 다시 세우자는 것, 그리하여 ‘승리’가 아니라 ‘평화’를 외치자는 것이다. 뉴욕의 911이 파리의 911을 낳았듯이, 파리 테러가 더 큰 비극, 더 잔혹한 폭력의 시작이 되지 않도록 승리가 아닌 평화를 궁구하는 것이 결코 유럽만의 의제는 아닐 것이다. 이 글은 2015년 12월 9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411 | 추천: 0
김재완/ 방송대 법학과 교수 정치의 본성은 권력이며, 권력의 정수는 정치다. 권력자가 되기 위해서는 정치인이 되어야 한다. 권력을 획득한 정치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수히 많다. 때문에 거의 모든 정치인들은 권력을 향하게 된다. 막스 베버는 정치활동을 하는 사람은 이상적이거나 이기적인 다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또는 권력 자체를 위한 권력, 다시 말해 권력이 주는 우월감을 누리기 위해 권력을 추구한다고도 했다. 또 그는 권력을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신의 의지를 타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관철할 수 있는 모든 가망성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권력이 지배받는 타인의 자유의지를 일방적으로 제한하는 것은 폭력이 된다. 법치국가에서 정당한 지배와 폭력이 구분되는 수단은 법이다. 그래서 권력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법에 근거한 강제력, 구체적으로는 경찰력을 동원하여 반대의 목소리와 활동들을 제압한다. 이때 행사되는 강제성들은 폭력의 형태를 나타내지만, 법질서의 유지와 회복이라는 슬로건 아래에서 정당한 것으로 포장된다. 최근의 민중총궐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국민은 정치적 기본권으로서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 이 권리는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이다. 집회 및 시위는 일방적인 권력의 행사에 맞서 반대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합법적인 통로이다. 때문에 적법하게 신고가 된 집회는 집시법에 의해 최대한 보장된다. 한편 관할경찰서장은 집회 및 시위의 보호와 공공의 질서 유지를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하면 최소한의 범위를 정하여 질서유지선을 설정할 수 있다. 여기에서 경찰력을 동원한 질서유지선은 분명 그 필요성이 인정되어야 하고, 필요성이 인정된다고 해도 그것은 최소한의 범위에 국한되어야만 한다. 집회 및 시위는 권력이 주도하는 법정책 등에 대해 반대자들이 자신들의 견해를 표출하고, 다른 정치적 견해들을 어필할 수 있는 법제도로 인정되는 정치 공간인 광장을 형성하는 것이다. 평화적인 행진과 소통을 위해서는 최대한 개방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최근의 집회 및 시위에 대한 권력과 경찰력의 대응은 대단히 폐쇄적이다. 그 폐쇄성은 집회 및 시위자들의 광장에의 진입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거대한 차벽이라는 물리력으로 나타난다. 자연스럽게 흐르던 물이 벽을 만나게 되면 물과 벽은 충돌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집회 참가자들과 차벽이 부딪치는 공간에서는 충돌현상이 빚어지게 된다. 공공질서 유지라는 목적이 있더라도 명백히 차벽은 최소한의 질서유지선 설정을 넘어서는 물리력의 동원이다. 지난 11월 14일 오후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민중총궐기 대회에서 경찰이 참가자들에게 물대포를 쏘고 있다. '민중총궐기 대회'는 민주노총 등 53개 노동·농민·시민사회단체로 이뤄진 '민중총궐기 투쟁본부'가 세월호 참사, 역사교과서 국정화, 언론장악, 철도-의료-교육민영화, 노동개악 등 박근혜 정부를 규탄하며 개최한 대회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상대적 다수의 지지를 얻어 정당성을 획득한 정치권력은 힘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그 권력이 가진 힘의 목적이 타인의 의지를 물리적으로 억압하면서까지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려는 것이라면, 정치는 곧 권력 자체를 위한 폭력적 권력이 되고 만다. 상대적 다수에 의해 위임된 정치권력이 곧 힘이 되는 정치지형에서 그 힘은 언제든지 상대적 소수와 소외된 사람들을 제물로 삼을 수 있게 된다. 소통을 배제하고 거대한 차단의 벽을 세워 오직 자신의 의지만을 관철하고자 하는 권력은 소시오패스적 권력이다. 소시오패스적 권력은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한 정치적 과정에서는 보편적인 관념에 따라 악행과 선행을 구분할 수 있는 지각을 가진 것처럼 행동하지만, 권력을 얻고 난 후에는 공감 능력이나 죄책감이 없이 자신의 이익과 목적 달성을 위해서 타인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모습을 드러낸다. 또한 책임을 회피하고 대중을 자신의 이익에 맞게 조종하거나 거짓말을 일삼으며, 그러한 권력의 실체가 발각되면 동정심을 유발하여 위기를 모면하려고 한다. 헌법은 대한민국을 민주공화국이라고 천명하고, 주권은 국민에게 있으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소시오패스적 권력이 집권하거나 권력이 소시오패스가 되는 순간 군주정으로 바뀌고, 국민으로부터 나온 권력은 국민을 억압하는 폭력적 권력이 되어 지옥의 정치가 형성된다. 소시오패스적 권력의 등장이나 권력이 소시오패스가 되는 것을 막는 것은 오롯이 국민의 몫이다. 권력의 원천인 주권자 국민이 정의와 인권을 실현하는 권력을 만들어 내고, 반인권적인 권력에 저항하는 책무를 다할 때만이 진정한 민주공화국이 유지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정치에 대한 환멸과 경시를 버려야 한다. 현실에서 개인들의 삶과 죽음이 정치와 권력이 만들어내는 정책과 법제도에 달려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경제, 교육, 노동 등 모든 분야에서 개인의 삶의 조건들을 결정짓는 힘은 정치가 만들어내는 권력에 의존한다. 정치의 본성은 권력이며, 권력의 정수는 정치라는 것을 다시 상기하면 그 속에는 필연적으로 치열한 정쟁이 펼쳐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그것을 본질적인 것으로서 환멸과 경시의 대상으로 보지 않아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갈등과 다양성이 빚어내는 것들의 유효성을 인정하면서, 그것들을 치유하고 공공의 선이 실현되도록 하는 방법을 함께 고민하는 시민들의 광장으로서의 정치의 복원, 생활정치의 현실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기존의 정치세력만을 더욱 공고히 하는 정치제도, 선거제도를 변혁하는 정치시민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글은 2015년 12월 2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394 | 추천: 0
홍미정/ 단국대 중동학과 조교수 □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의 중심지로 부상한 시리아: 사우디 패권에 도전   21세기에 천연가스는 주요한 연료로써 등장했다. 시리아 인도주의 위기는 유럽시장을 겨냥한 천연가스의 생산-운송-소비 네트워크와 관련된다. 2011년 3월 이후 시리아에서 진행되고 있는 최악의 인도주의적인 위기의 중심에는 세계 최대의 가스 유전으로 알려진 이란의 남부 파르스 유전과 카타르 북부 돔 유전지대에서 생산되는 천연가스 판매망 확보 경쟁이 있다. 유럽시장을 목표로 한 판매망의 중심지에 시리아가 위치한다.  2010년 3월 당시 시리아에 최대 자본투자 국가는 사우디였다. 2009년부터 2010년까지 사우디의 압둘라 왕과 시리아의 바샤르 아사드 대통령은 상호 2009년 10월 7일 압둘라왕의 다마스쿠스 방문 방문하며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렇다면 2011년 중반에 시리아-사우디 관계가 갑자기 악화되고, 사우디가 시리아 반정부군을 지원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2011년 7월 25일 시리아, 이라크, 이란의 석유장관들이 이란에서 회의를 갖고, 100억 달러의 건설비용으로 [이란-이라크-시리아-레바논-지중해]를 통과하여 유럽으로 가는 자칭 ‘우정의 가스파이프라인 건설(서구에서는 ‘이슬람 가스파이프라인’이라 부름)’을 위한 기본협정을 체결하였다. 시리아 내전이 격화되지 않았다면, 2015년 현재 유럽에 천연가스 공급을 목표로 한 이 파이프라인 건설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리아 내전으로 이 사업은 무산되었다.  계획된 ‘우정의 가스파이프라인’은 2008년부터 이미 가동 중인 아리시-아쉬켈론(이집트-이스라엘) 가스파이프라인, 2009년부터 가동 중인 ‘아랍가스 파이프라인(이집트-요르단- 2010년 이란-시리아, 카타르-터키 파이프라인 계획 시리아-레바논)’ 과 연결되면서, 시리아에게  부를 약속하는 석유가스 파이프라인의 교차 로이자 중심지로 만들 것으로 예상되었다.  드디어 시리아가 ‘우정의 가스파이프라인, 이집트-이스라엘, 아랍가스 파이프라인’을 통합한 가스 파이프라인 망에서 사우디, 카타르, 터키를 소외시키고, 사우디의 역내 패권을 위협하는 막강한 정치 경제 행위자로 등장할 것 같았다. 이것이 사우디, 카타르, 터키가 시리아 반정부군을 후원하는 중요한 이유다.  사우디 압둘라왕은 아랍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2011년 8월 반정부 시위대에 대한 아사드 정부의 대응방법을 거세게 비난하였다. 결국 2012년 2월 사우디는 다마스쿠스 소재 사우디대사관을 폐쇄하고, 리야드주재 시리아대사를 추방함으로써 외교관계를 단절하였다. 2009년 이집트-이스라엘--요르단-시리아 가스 파이프라인 □ 이스라엘/터키 경쟁: 키르쿠크-하이파/키르 쿠크-세이한 파이프라인  2003년 미국의 제안으로 이라크 키르쿠크로부터 이스라엘 항구 하이파로 가는 석유 파이프라인(1934년 건설) 재건 계획이 나왔다. 2003년 8월 미 국방부의 요구로 이스라엘 국가 기반시설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키르쿠크와 하이파 사이의 직경 42인치 파이프라인 건설에 1㎞당 40만 달러의 비용이 든다. 2003년 8월 24일, 이스라엘 국가 기반시설부 장관은  하이파 항구가 이라크 석유의 매력적인 도착지라며,  이 문제를 9월 달에 미국과 의논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또한 이 계획은 요르단의 동의를 필요로 하고, 요르단은 파이프라인 통관세를 받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1934 키르쿠크-하이파·트리폴리 파이프라인  현재 이라크 키르쿠크의 석유는 터키의 작은 지중해 항구 세이한으로 이송되고 있다. 터키가 거두어들이는 키르쿠크-세이한 파이프라인(1975년 건설) 석유 통관세는 터키세입의 주요한 원천이다. 따라서 터키는 이스라엘의 키르쿠크-하이파 파이프라인 가능성에 대해, 새로운 파이프라인 건설 움직임은 터키-이스라엘 관계에 심각한 타격을 줄 것이라고 이스라엘에게 경고했다. 키르쿠크-하이파 파이프라인이 가동된다면, 그것은 터키 경제에 커다란 타격을 줄 것이다. 키르쿠크-세이한 파이프라인 (https://en.wikipedia.org) □ 누가 최후의 결정자일까?  시리아 아사드 정부가 구상한 유럽시장을 겨냥한 가스 라이프라인 건설은 러시아 국영 가즈프롬의 지배적인 지위에 도전한다. 러시아의 석유와 가스 세입은 2012년 정부 예산의 52%를 차지했으며, 전체 수출의 70%이상을 차지했다. 게다가 러시아 총 가스 수출량 중 60%는 유럽 시장이 차지한다. 이것은 러시아가 시리아 내전 초기에 적극 개입하지 않고, 반군 세력에게 아사드가 극적으로 밀리는 것을 방관한 이유다.  그런데 2013년 8월 사우디정보장관 반다르 왕자는 러시아를 방문하여 푸틴 대통령에게 ‘시리아 아사드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중단하라’고 요청하면서, “시리아에서 아사드 이후 어떤 정권이 출현하든지 간에, 새로운 정권은 완전히 사우디의 수중에 있을 것이다. 그 정권은 어떤 걸프국가에게도 시리아를 통과해서 유럽으로 가스를 운반하는 협정을 체결하거나, 러시아가스 수출과 경쟁하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푸틴대통령은 ‘유럽가스 수출에 대한 러시아 독점권을 보장하겠다는 반다르 왕자의 제안을 거절하면서, 시리아 아사드 정부에 대한 확고한 지지’를 표명하였다.  2009년과 2010년 미국회사인 노블에너지가 이스라엘 하이파 항구 서쪽 50마일 해상에서 타마르와 레비아탄 가스유전을 발견했다고 공표하였다. 이 두 유전은 최근 10년간 발견된 유전들 중 가장 대규모 가스유전으로 평가된다. 현재 이스라엘, 레바논, 시리아, 터키유역에 대규모 가스 매장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가스탐사가 계속되고 있다.  타마르와 레비아탄 유전개발은 이스라엘 역사상 최대의 기반시설 프로젝트로 알려졌다. 노블에너지는 이 두 유전의 최대 소유주로서 타마르 유전의 36%, 레비아탄 유전의 39.66%를 소유하고 있다. 2013년 6월 23일 이스라엘 정부는 이 유전들 보유량의 40% 이상을 액화천연가스(LNG) 형태로 수출하기로 결정하였다. 타마르 유전은 2013년에 이미 생산을 시작하였고, 레비아탄 유전은 2016-17년에 생산을 시작할 계획이다. 노블에너지 대표 찰스 데이비슨은 “현재 레반트유역 가스유전발견은 시작에 불과하다. 앞으로 더 큰 유전발견으로 우리는 역내 게임 체인저가 아니라 세계 게임 체인저가 될 것”이라고 소리를 높였다.  이제 이스라엘을 포함한 레반트 지역에서의 가스전 발견은 역내 에너지 확보와 판매망 구축에서 또 하나의 핵심 변수로 등장했다. 게다가 2014년 5월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통해서 가스를 수출하기로 이집트와 협정을 체결하였다. 현재 이스라엘 가스전 개발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노블에너지 대표인 찰스 데이비슨의 주장대로, 노블에너지와 이스라엘이 가스 파이프라인 구축과 역내 에너지 패권경쟁에서 결정자로서의 역할을 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 글은 2015년 12월 2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1126 | 추천: 1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운영위원 “우리 인간은 지금 · 여기를 벗어날 수 없다.” 이는 우리 인간의 삶에서 근본적인 사실인 동시에 우리의 삶을 어떻게 영위해야 할 것인가를 규정하는 근본적인 조건이다. ‘지금 · 여기’는 내 자신과 더불어 타인들뿐만 아니라 온갖 사물들과 사건들이 드러나는 근본 처소이다. ‘지금 · 여기’가 바뀌면 이 모든 것들의 배치와 분절 및 그에 따른 의미와 가치들이 함께 바뀐다. 그런데 ‘지금 · 여기’가 바뀔 수 있는 것은 몸의 이동의 역량 때문이다. ‘지금 · 여기’의 질적인 변화가능성 전체는 내 자신의 ‘존재’(存在, being)가 설립되는 가능성 전체이다. ‘지금 · 여기’에서 펼쳐지는 일체의 일들을 일컬어 ‘현존’(現存, existence)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내 현존의 변화가능성 전체가 곧 내 존재의 가능성 전체인 셈이다. 다만,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변화’뿐만 아니라 ‘축적’이 작동해야 한다. 그저 아까의 ‘지금 · 여기’에서 지금의 ‘지금 · 여기’로, 그리고 지금의 ‘지금 · 여기’에서 나중의 ‘지금 · 여기’로 변화하는 것만으로는 현존이 존재로 변양(變樣, modification)될 수 없다. ─ ‘존재’와 ‘현존’은 워낙 다른 방식으로 성립된다. 이를 일컬어 그 양식(樣式, mode)이 다르다고 한다. 현존은 ‘현행적’(現行的, actual)인데 반해, 존재는 ‘잠정적’(暫定的, virtual)이다. 지금 당장 이루어지면서 힘을 발휘하는 것을 ‘현행적’이라고 하고, 언제든지 드러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을 ‘잠정적’이라고 한다. 그래서 현존이 존재로 이전되는 것을 ‘변양’, 즉 양식을 바꾸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잠정적인 나의 존재는 현행적인 나의 현존을 통해 그 ‘부분적인 전체’(the partial whole)로서 드러나 힘을 발휘한다. ─ 아까 이루어진 내 현존의 활동 결과들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내 현존의 활동에 어떤 방식으로건 ‘연결’되어야 하고,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내 현존의 활동 결과들이 나중에 이루어질 내 현존의 활동에 어떤 방식으로건 ‘연결’되어야 한다. 그렇게 연결되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침으로써 하나로 통일되는 것을 ‘축적’이라 부른다. 그러니까 이전의 것이 지금에로, 그리고 지금의 것이 이후에로 연결되어 축적 때, 곧이곧대로 이전(移轉)되지는 않는 것이다. 서로가 영향을 주고받아 어떻게든 ‘차이’를 일구어내면서 연결되고 축적된다. 그런 가운데, 내 존재는 계속 새롭게 열리는 내 현존을 통해 부분적인 전체로서 ‘반복’된다. 하지만 그럴 때 내 존재의 반복은 곧이곧대로 똑같이 반복될 수 없다. 왜냐하면 내 존재는 매 순간 새롭게 주어지는 내 현존에 의해 영향을 받아 계속 새로운 부분적인 전체로서 작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계속 새롭게 주어지는 내 현존의 활동 결과들이 연결 · 축적됨으로써 내 존재가 바뀌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현행적인 내 현존이 잠정적인 내 존재를 계속 새롭게 형성한다. 그와 동시에 잠정적인 내 존재는 계속 새로운 부분적인 전체로서 연속해서 새롭게 주어지는 현행적인 내 현존 및 그 활동에 대해 작동하여 힘을 발휘한다. 결국, 내 존재는 내 현존을 통해 계속 차이를 드러내면서 반복되는 것이다. 내 존재는 반복되면서 새로운 차이를 드러내고, 그렇게 차이난 상태로 반복되면서 내 현존이 그렇게 드러나도록 한다. 또 그렇게 드러나 활동하는 지금의 내 현존의 결과는 계속 새롭게 활동하는 내 현존의 결과들과 수평적으로 연결되면서 수직적으로 내 존재에 축적된다. 여기 내 존재와 내 현존 간에는 복잡한 일종의 뫼비우스 띠의 관계들이 작동한다. 유념해야 할 것은 내 주체는 항상 현행적인 내 현존의 차원에서만 성립하는 것이지 잠정적인 내 존재의 차원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이때 내 존재는 다른 어느 누구의 존재와도 그리고 다른 어느 것의 존재와도 바꿀 수 없고 대체될 수 없고 심지어 근본적으로는 비교될 수조차 없다. 그래서 내 존재는 ‘단독적인 것’(the singular)으로서 드러난다. 그런데, 내 존재가 단독적이라고 하나 그 단독성은 근본적인 차원에서의 일일뿐이다. ‘지금 · 여기’의 상황에는 언제 어디서나 현행적으로건 잠정적으로건 타인들이 함께 그들 각자 나름의 현존과 존재를 발휘하고 있다. 나와 타인들이 함께 ‘지금 · 여기’에서 활동하는 것이다. 그 타인들 각각의 존재 역시 내 존재와 마찬가지로 근본적으로는 단독적이다. 각자의 존재가 단독적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보면(형식에 있어서) 동등하고(equivalent), 동등하기 때문에 평등하다(equal). 자유도 근본적으로는 바로 이 같은 우리 각자의 단독성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바로 이 점에서 정치가 성립한다. 정치는 근본적으로 각자의 단독적인 존재를 유지하는 데 필요 충분한 것들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서 성립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 여기’에서 내 현존의 활동이 이루어지고, 이를 통해 단독적인 내 존재가 바탕에서 작동하면서 내 현존에 힘을 발휘한다고 할지라도, 거기에는 이미 늘 타인들의 존재와 그들의 현존적인 활동이 함께 작동한다. 서로 함께 대화를 나누고, 서로 함께 협업 또는 분업을 하고, 서로 함께 사랑 또는 증오를 하고, 서로 함께 조화를 이루기고 하고 투쟁을 하기도 한다. 이에 우리는 분명 내 존재는 단독적이지만, 그 단독성(singularity)은 내 존재에 있어서 근본 형식(basic form)으로만 작동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내 존재의 실질에 있어서는(in the material of my being) 오히려 타인들과의 공동성(community)이 바탕이 되는 것이다. 형식에 있어서의 단독성과 실질에 있어서의 공동성은 ‘근본적으로 보아’(또 다른 의미의 ‘형식에 있어서’)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그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따지면, 실질에 있어서 공동성은 형식에 있어서의 단독성을 충분히 의미 있게 만드는 내용이다. 사실상 내 현존의 활동은 무조건 타인들과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런 가운데, 내 현존의 활동은 그 타인이 자신의 현존을 통해 드러내는 자신의 부분적인 전체로서의 그의 존재를 내 존재로 이전시키는 데서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결국 내 존재의 실질은 익명적인 타인들의 존재의 내용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순수하게 내 자신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내 존재의 실질은 아예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내 자신” 또는 “나의 자아” 운운하면서 그것을 붙들고서 어쩔 줄 몰라 하기조차 한다. 그러나 ‘순수한 나의 자아’라는 것은 내 존재의 단독성, 즉 내 존재의 근본 형식의 측면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실질에서 보자면 그야말로 ‘텅 빈 것’에 불과하다. 예컨대 선불교에서 “무아”(無我)를 추구한다고 할 때, 그것은 내 존재의 실질을 아예 내버리고 오로지 내 존재의 순수한 형식만을 추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내 존재의 실질을 ‘숭상’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되면, 내 존재 자체가 이미 늘 정치적이라 할 수 있다. 내 존재의 실질을 형성하고 있는바, 뭇 타인들과의 관계에서 획득된 내용들이 지닌 의미와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고 앞뒤 혹은 아래위로 배치해서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를 수시로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영희와의 만남을 통해 형성된 내 존재 내의 실질의 몫이 있을 것이고, 순자와의 만남을 통해 형성된 내 존재 내의 실질의 몫이 있을 것이다. 이것들을 어떻게 전진 혹은 후진 배치할 것인가에 따라 영희와 순자에 대한 태도가 달라짐은 물론이다. 내 존재 속에서의 정치가 알게 모르게 타인들과의 관계를 결정하면서 타인들과의 정치를 일구어내는 것이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과 ‘대통령 박근혜 씨’와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고 보면, 산다는 것 자체가 이미 늘 정치적이다. 다만, 그 근본 형식에서의 기점은 각자의 존재가 지닌 단독성이다. 이 각자의 존재가 지닌 단독성 때문에 제아무리 복잡 미묘한 정치적인 실질도 포섭과 종속 및 그에 따른 피지배를 정당한 것으로 여길 수 없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①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에서 “공화국”이 지시하는 이른바 ‘공화주의’는 ‘자유주의’가 기본적으로 ‘불간섭의 자유’를 주창하는 것과 달리, 기본적으로 ‘비지배의 자유’를 주장한다. 지배하더라도 간섭하지 않는다면 크게 문제가 없다고 여기는 것이 자유주의라면, 간섭할지라도 지배하지 않는다면 크게 문제가 없다고 여기는 것이 공화주의이다. 자유주의자는 국가가 지배하되 간섭하지만 않는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여기지만, 공화주의자는 국가가 간섭하되 지배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고 여긴다. 지배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자의적인(제멋대로의) 의지에 타인을 종속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크게 대비되는 것이 법치다. 각자의 존재가 지닌 근본 형식에서의 단독성은 누군가의 자의적인 의지에 의해 다른 사람의 현존 활동이 결정되는 것을 정당하다고 여길 수 없도록 하는 근본 원리다. 각자의 존재가 지닌 실질에서의 공동성은 각자의 존재를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데 필요한 간섭을 허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근본 원리다. 그러니까 남을 함부로 지배하고자 하는 자는 공동체의 일원이 될 자격이 없는 것이고 또한 간섭받기 싫어하는 자들 역시 공동체의 일원이 될 자격이 없다. 예컨대 메르스 사태가 일어났을 때 격리조치라는 간섭을 받기 싫어해서 거부하는 자라면 그는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없다. 그와 동시에 보건행정직원이 격리조치를 거부하는 자를 대하면서 ‘아니, 이 사람이 내가 누군 줄 알고 내 말을 함부로 거부해.’ 라는 심보로 그 거부하는 자를 강압한다면 그 보건행정직원 역시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없다. 그래서 공화국에서는 간섭하되 그 간섭이 자의적인 것이 아님을 입증할 수 있는 법적 장치와 법적 장치를 어떤 내용으로 만들고 수정할 것인가를, 평등성에 입각해서 공공적으로 논의하는 절차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철학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1929〜)가 일방적으로 배타적인 지배력을 발휘하는 돈과 권력에 의거한 왜곡된 소통 대신에 의사소통적 합리성에 의거한 공공성의 사회적인 확립과 확산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런데 내 존재의 형식에서의 단독성과 실질에서의 공동성이 근본적으로 내 몸에서부터 설립된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내 몸과 그에 따른 내 생명은 어느 누구의 다른 몸이나 다른 생명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그야말로 단독적인 것으로서 내 존재의 형식에서의 단독성을 뒷받침한다. 또한 내 몸은 항상 다른 사람들의 몸들과 이미 늘 관계를 맺으면서 내 존재를 새롭게 형성함으로써 내 존재를 그 실질에 있어서 이미 늘 다른 사람들과의 공동성으로 채우도록 한다. 그래서 각자의 존재가 지닌 단독성과 공동성은 근본적으로 하나로 통일될 수 있는 것이지, 결코 따로 성립하거나 대립적으로 성립하는 것이 아님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존재에서의 두 근본 원리를 염두에 두지 않는 한, 정치적인 행위가 끝없이 탈구되고 미끄러지고 왜곡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글은 2015년 11월 25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388 | 추천: 0
정재원/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늦은 결혼으로 인해 아이가 아직 어려 육아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보육이나 영유아 교육과 관련하여 많은 고민과 연구를 하게 되는 계기도 되고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아마도 연애를 제외하고는 이렇게 이론과 실천이 다른 영역도 많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특히 보편적인 이론이 아닌 당장 내 아이의 문제로 다가오는 이 영역에 대한 대응이 좀처럼 쉽지 않다. 심지어 이 분야 전문가, 교수들조차 자신의 아이에 대한 문제에 대한 대응은 자신의 지론이나 주장과 상당히 다른 경우도 꽤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이와 함께 놀이터나 ‘키즈 카페’ 등을 다니다가 종종 마주하는 현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유달리 폭력적인 행동이나 못된 행동을 거침없이 하거나 자신의 행동을 통제 못 하는 아이들을 꽤 자주 본다는 것이다. 아직은 유아들이라 과잉행동장애니 분노조절장애니 하는 말은 어울리지 않고 누구나 성장 과정에서 그런 과정을 겪는 것이라 생각해 왔지만, 초등학교 들어가기 1-2년 전의 아이들의 모습들 중에는 분명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 행동을 하는 경우가 꽤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궁금증이 생겨 알아 본 결과 이러한 아이들의 대부분이 영어유치원에 다니고 있거나 영어를 포함한 이러저러한 조기교육들을 하고 있었다. 물론 영어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이 다 이러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아니고, 정반대로 일반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이 다 착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또한 이러한 행동을 보이는 원인들 중에는 부모들의 양육 태도 등에도 원인이 있기에 섣부른 단정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설사 영어유치원이 아니더라도 일반 유치원에서도 영어를 포함한 조기인지교육이 경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 속에서 영어를 포함한 다양한 조기교육들이 아이들의 정서발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한국 사회의 보육과 양육과 교육에 다양한 문제가 있지만, 아마도 이러한 문제들 중 가장 큰 문제는 조기인지교육이라는 보도들을 접한 바 있다. 그리고 그러한 조기인지교육 중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영어인지교육이라는 사실도 크게 회자되어 왔다. 영어를 비롯한 이러저러한 조기인지교육의 효과성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끊이지 않고 있다. 언어 습득의 결정적 시기가 있다는 논리나 영유아의 뇌발달 이론을 이용한 정반대의 논리로 조기인지교육의 효과성을 이야기하는 사교육시장을 주도하는 집단들의 주장도 만만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여러 전문가들 중 소아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 대부분은 조기영어교육, 특히 영어유치원과 같은 영어전문학원 형태의 조기영어교육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보고 있다. 이들은 거의 공통적으로 학업 스트레스와 낮은 학습효과는 물론 다른 부분에서의 창의력이나 학습능력에서의 자율성 저하 등을 지적하고 있다. 영어 외에도 사교육의 종류가 많아질수록 아동들이 부모와의 애착이나 또래 상호작용 등을 하지 못 해 정서적으로 많은 부분이 형성되는 이 시기에 획득해야 할 것들을 획득하지 못 한다고 지적한다. 무엇보다도 정신건강에 부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데, 자신감과 집중력 저하, 부모 등 대인관계 형성의 어려움, 그리고 각종 정신적 장애를 겪는 등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여전히 많은 학부모들은 이러한 조기인지교육이 얼마나 심각한 정신건강을 파괴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학부모들조차 다양한 이유로 아이들을 영어를 비롯한 조기인지교육 시장으로 밀어 넣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어떠한 논란이 있든지 간에 이러한 인지교육이 아이들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있다는 점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인지교육이 어린 아이들을 고통 속에서 신음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많은 학부모들은 극심한 경쟁사회 속에서 자신의 아이가 뒤처지지 않도록 혹은 앞서서 나가도록 조기인지교육에 아이들을 보내고 있다. 그렇게 영유아 단계를 넘기고 나면 말 그대로 인지교육을 시켜도 되는 나이가 된 뒤로부터는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끔찍한 무한경쟁교육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이때는 이미 인지교육을 넘어 수 학년 뒤의 공부까지도 완결해야 하는 단계로 넘어간다. 영어, 국어(논술), 수학은 물론 거의 모든 과목에서 아이들은 슈퍼맨이 되어야 한다. 문제는 영유아 단계서부터 감정과 감성의 발달이 지체된 체, 억지로 구겨 넣어진 온갖 지식들과 테크닉들로 인해 아이들은 화려한 언변을 보이며 풍부한 지식을 갖춘 것처럼 보여지지만, 동시에 아이들의 마음속에는 무서울 정도로 이기적이고 폭력적이며 타인을 배려할 줄 모르는 괴물이 될 수 있는 요소들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이렇게 키워진 아이들은 공감능력이 떨어져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들을 천하게 보거나 얕잡아 보고 배제하는 데 익숙해지며 심지어는 폭력도 서슴지 않게 된다. 뿐만 아니라, 자주적이고 자율적인 학습 경험이 없어 비판적 사고를 할 줄 몰라 지배 이데올로기에 쉽게 세뇌되고 사회 문제를 가난하고 게으른 자의 문제로 보는 경향을 갖게 된다. 이러한 무한 경쟁 교육 속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되는 소수의 상층 학생들은 더 나은 출세를 향해 달려가면서 더더욱 사회적 연대나 책임, 그리고 민중에 대한 고민은커녕 정반대로 적극적으로 사회기득권이 되기 위한 궤변들을 만들어 내는 데 더 익숙해진다. 이제는 진리를 알아가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선대의 특권을 이어 받거나 새로이 만들고 지키기 위한 노력에 몰두한다. 이를 위해 정의나 공정, 민주주의와 인권, 평등과 복지 등을 쟁취하기 위한 희생이 아니라, 기성세대가 만든 보수 집단의 기득권과 특권 체제를 유지하고 확대하기 위한 편법과 아첨, 불공정과 부패, 배제와 차별과 같은 논리에 더욱 익숙해져 간다. 일베로 상징되는 한국사회의 병리적 현상의 사회적 토대 또한 바로 지금과 같은 끔찍한 ‘극단적 차별과 배제에 근거한 무한경쟁, 무한경쟁에 의한 국가 경제 발전’ 논리에 근거한 교육 시스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추락하는 이들에 대한 사회적 보장 제도는커녕 기본적인 인간적 애정도 없고, 추락은 하지 않았으나 경쟁 속에서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을 치유하는 제도 따위에는 관심도 없는 대한민국의 위정자들은 오히려 지금보다 더 많은 경쟁을 강요하고 그에 반하는 움직임에 반대하고 있다. 이러한 국가의 인위적 방치와 적극적 방조 속에서 기득권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의 탐욕을 위한 개혁 반대로 인해 이제는 이 끔찍한 현실을 마주하게 되는 나이가 심지어 2-3세까지 내려가 있는 대한민국 사회의 썩어 들어가는 상황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 이 글은 2015년 11월 18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442 | 추천: 0
이광조/ CBS PD  나이가 깡패라는 말이 있다. 장유유서로 대표되는 뿌리 깊은 유교문화에 위계를 강조하는 군사문화가 겹쳐져 어디를 가나 나이를 따진다.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한참 열을 내며 싸우다 나이를 따지는 모습은 우리의 흔한 일상이다. ‘너 몇 살이야!?’ 쌍욕을 하며 싸우던 마당에 ‘민증’을 깐들 뾰족한 수가 있을까만, 우리는 같은 해에 태어난 사람들끼리도 ‘빠른 몇 년 생’, ‘늦은 몇 년 생’을 따질 정도로 나이에 민감하다.  나이를 따져 서열이 정해지고 나면 자연스레 호칭이 정리된다. 형, 형님, 언니...  하루라도 세상을 더 산 사람의 경륜을 존중하는 건 나쁜 일이 아니다. 자기보다 어린 사람을 배려하고 보살피는 것도 좋은 일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너무나 잘 알고 있듯이 현실은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다. 말만 놓으면 좋으련만 나이를 따져 서열을 정하는 우리의 미풍양속은 너무도 쉽게 폭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1년 일찍 들어왔다고 신입생들을 이리 저리 굴리며 군인 흉내를 내는 대학생들을 보라. 전철이나 버스 안에서 젊은 사람이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고 쌍욕을 내뱉거나 심할 경우 손찌검까지 하는 노인들은 또 어떤가. 극소수의 사례라고 생각하지만 이런 경우 그 ‘싸가지 없는 젊은 것’이 임신부든 아니면 몸이 아파서 병원에 다녀오던 길이든 개인적인 사정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 상대방의 처지를 헤아리는 소통의 기본은 사라지고 일방적인 폭력만이 남을 뿐이다.  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나이에 따른 서열화에는 큰 장점도 있다. 학력, 재력,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사회가 나이에 따라 서열화 된다면 그만큼 평등한 질서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 어디 그런가. 모두에게 평등하게 주어지는 나이는 가장 미약한 권력 자원일 뿐이다. 거대한 권력 앞에서 나이 같은 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새파란 검사들이 ‘영감’으로 불리던 게 먼 옛날의 일이 아니다. 돈이든 지위든 사회적으로 희소한 무언가가 부가되어야 나이는 제대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이도 저도 없으면 하다못해 완력이라도 있어야 한다. 건장한 체격의 젊은 남성이 자리 양보를 안 한다는 이유로 쌍욕을 듣는 광경을 보기는 힘들다. 결국 핵심은 권력관계인 셈이다. 채널A ‘김승련의 뉴스10’가 지난 4일 보도한 영상. 사진 출처 - 미디어오늘  얼마 전 여당 대표가 “너는 뭐 쓸 데 없는 소리를 하고 앉아 있어”라고 말하며 기자를 타박했다는 기사를 접한 적이 있다. 기사를 꼼꼼히 읽기 전에는 두 사람이 사석에서 호형호제하는 친밀한 관계인 줄 알았다. 정치인이든 기자든 행세 꽤나 한다는 엘리트들이 지연, 학연으로 모두가 선후배로 연결되는 사회에서 친한 사이라면 그 정도 얘기도 못하겠는가. 한데 기사를 끝까지 읽고 보니 그런 게 아니었다. 기자는 여당 대표의 비공식 수행 비서를 지냈던 사람이 구속된 것에 관해 여당 대표의 입장을 물어본 것이었는데, 여당 대표가 기분이 팍 상해버린 것이었다.  그는 평소에도 기자들을 ‘야 이 놈들아’라고 격의 없이 부르며, “기사 잘 써야 돼. 기사 엉터리로 쓰면 나한테 두들겨 맞는다”는 발언도 스스럼없이 한다고 한다. 주변에서는 이런 ‘호탕한’ 언행을 부러워하는 분위기도 있는듯하다. 당사자는 젊은 기자들이 다 ‘아들 , 딸’ 같아서 그러는 거란다. 하지만 언론소비자의 한 사람으로 기자들이 정치인들에게 이런 대접을 받는 모습이 참 불편하다. 기자들에게 ‘니는 어디 소속이고?’라고 묻는 말이 ‘너그 아부지 머 하시노?'라는 말과 겹쳐진다. 학교 다닐 때 많이 듣던 말 아닌가. 이런 관계에서 권력과 언론의 긴장이나 언론의 파수꾼 역할 같은 얘기는 공허할 따름이다. 둘 중 하나다. 하대를 받아들이고 친숙해져서 ‘선배, 선배’ 부르며 권위에 복종하든가 돌아서서 욕하며 이를 갈든가. 어떤 선택을 하든 제대로 된 비판과 소통은 불가능하다. 마음에 안 든다고 기자들에게 ‘아군이냐 적군이냐’를 강요해서야 되겠는가. 우선 반말부터 그만뒀으면 좋겠다. 이 글은 2015년 11월 11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513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