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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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강대중(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윤동호(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이동우(변호사),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장은주(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정재원/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국민투표 결과 영국이 마침내 유럽연합 탈퇴를 선언했다. 이른바 브렉시트. 국민투표 전은 물론 유럽연합 탈퇴로 끝난 투표 결과 이후 수많은 논란과 다양한 전망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특히 브렉시트 발 세계 경제 위기에 대한 우려가 많은 이들에게 커다란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는데, 이는 ‘경제 악화 시 내부의 분열을 추동하는 자들로 인해 국가가 패망한 사례들이 있다’며 국민을 협박하는 대통령 담화문을 필두로, 연일 기업인들과 그들의 입인 언론들을 통해 임금 동결 등의 근거로 활용되고 있는 상황이다. 어찌 되었든 많은 이들이 브렉시트가 한국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 걱정을 하고 있는데, 일부 전문가들과 지식인들은 향후 영국 경제 자체에 대한 관심이 큰 반면, 또 다른 지식인들과 활동가들은 브렉시트가 진보적인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반동적인 사안인지에 대해 혼란스러운 논쟁을 전개하고 있다. 물론 이런 논쟁은 한국에서만의 논쟁은 아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몇 가지 잘못된 관념적 근거로 인해 논쟁은 엉뚱하게 전개되기도 한다. 단순히 향후 예측이나 논쟁 자체가 문제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가장 올바른 입장을 취하고 있어야 할 진보적인 집단들이 잘못된 정세 판단을 하고 있고, 그것을 근거로 한국에서의 상황에 잘못 적용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잘못된 정세 인식에 근거한 브렉시트 분석은 피해야 한다. 사실 유럽연합 탈퇴 혹은 잔류 중 무엇이 좌파적인 대안인지를 논하는 것이나 아직 닥치지도 않은 경제 예측에 근거한 논쟁 같은 것은 큰 의미를 갖지 못 한다. 물론 브렉시트로 인한 영국 자체의 경제적 전망이 아닌, 그것이 세계 경제와 한국 경제에 미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와 분석, 그리고 대처 방안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외적 변수들을 악용하여 경제 위기를 과장함으로써 민중을 협박하고 이를 통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강화하려는 위정자들의 논리에 맞서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브렉시트를 둘러싼 논란들에서 올바른 입장을 취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즉 한국적 맥락에서 브렉시트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사진 출처 - 뉴스1 일단 영국 특유의 정치적, 역사문화적 요인들을 제외하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국인들이 유럽연합 탈퇴에 더 많은 투표를 한 근본적인 원인은 신자유주의로 인한 고통을 겪어 온 다수 노동대중의 불만에서 기인한 것이긴 하지만, 이는 신자유주의 혹은 세계화에 대한 좌파적 반대와는 전혀 거리가 멀다. 따라서 브렉시트가 민중의 기득권 계급에 대한 반란,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에 대한 반대라는 주장은 절반만 사실이다. 설사 고통받는 노동 대중의 반란이라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라 할지라도, 이들의 그 반란의 방향이 엉뚱한 데로 향해 있고, 그 불만의 해소를 위해 극우적 선택을 한 것이라면 그런 주장은 쉽게 해서는 안 된다. 여타의 공동체와는 달리 진보적인 측면도 갖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유럽연합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산물이다. 그리고 유럽연합 내 중심부 주도 국가 지배 계급의, 유럽 주변부 국가들과 노동대중들에 대한 횡포와 착취는 가히 절정에 달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노동 대중의 불만과 저항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노동 대중, 특히 하층 계급들의 불만과 저항은 언제나 진보적이고, 그들의 대안은 언제나 비진보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는 받아들여야 한다.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것이 극우적 대안으로 유럽 곳곳에서 나타나는 상황에서, 우리는 너무 한 쪽만을 보고 지지와 비판의 양극적 선택이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비유하자면, 자의든 타의든 그 어느 때보다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하게 추진함으로써 신자유주의 국가화에 정점을 찍은 김대중-노무현 정권 하에서 고통 받았던 대중들이 이명박 후보를 대안으로 삼은 결과를 낳았는데도 신자유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노동대중의 반란이라는 것 자체에만 집중하여 찬양하고 있는 것과 유사하다. 또한 전문가들조차 갑작스럽게 고립주의라는 용어와 개념을 마구 쓰고 있지만, 고립주의라는 이름의 극우민족주의나 국가주의를 주장하는 이들이 승리하여 설사 그들의 의도대로 정치가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영국은 신자유주의의 주요 주도자의 역할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시리아 난민 문제 등 최근 이민의 문제가 부각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 그 이전부터 유럽 제 국가들 내부에서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확대로 인한 민영화, 노동 유연화와 구조적 실업 증가, 그리고 복지 축소 등으로 인해 사회불평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유럽연합의 중심부 국가들에서도 상황이 이러할진대, 남유럽이나 동유럽 주변부 국가들의 경우, 그 상황은 한층 더 심각했다. 바로 이러한 토대 위에 이민자 문제가 불을 붙인 것이다. 따라서 이민자 문제만으로 대중의 불만이 극우화된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노동대중은 사회 불평등으로 인한 불만을 이미 다양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게 품어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제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와 유사한 현상은 유럽 곳곳의 극우파 약진은 물론 미국의 트럼프 현상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영국의 브렉시트 국민투표가 기존의 신자유주의 글로벌 체제에 되돌릴 수 없는 균열을 가져왔다는 식의 좌파적 주장 역시 희망사항일 뿐이다. 2008년도 미국발 금융위기 당시 다수의 진보좌파 진영에서는 신자유주의가 종언을 고했다는 주장을 너무나 쉽게 하곤 했다. 이는 자본주의 위기론이나 미국 패권 붕괴론만큼이나 참으로 자주 등장하는 단골 메뉴인데, 이는 신자유주의를 이론으로만 배웠거나 단선적이고 피상적으로만 인식하는 데에서 오는 오류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신자유주의 글로벌 체제는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끊임없이 그 모습을 바꿔가며 유지될 것이고, 유럽연합 전체가 해체되지 않는 한 영국과 일부 유럽 국가가 탈퇴한다고 하더라도 현재 국제경제체제는 큰 변화 없이 유지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브렉시트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는 물론 나아가 미국과 유럽이 주도하는 세계자본주의체제에는 커다란 변화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분명 신자유주의에 반하는 것처럼 보이는 각종 극우주의와 국가주의적 정치가 전 세계에 강력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러나 그 극우주의 정치는 변신을 거듭하는 자본가 중심의 신자유주의 정책과 절묘하게 결합될 것이다. 신자유주의에 반하는 것이라고 과도한 찬사를 보내는 그 틈으로 극우주의 정치를 키워주는 오류는 이제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어디까지가 신자유주의이고 어디까지가 자본주의 시장 경제체제인지조차 구분하지 못 하는 상황에서 신자유주의가 만악의 근원이라며 다른 반동을 보지 못 해서는 안 된다. 바로 그것이 또 다른 자본의 독재를 허용하는 지름길이다. 이 글은 2016년 7월 6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438 | 추천: 0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 ‘수요산책’이란 말에 전혀 걸맞지 않은 철학의 근본 문제를 불쑥 끄집어 올려 죄송합니다. 하지만 인권연대의 식구들 모두 한 번쯤 들어봄직하다 싶어 제시합니다. 1.철학적 사유에서도 정확한 방법이 있었으면 좋으련만, 하고서 평소에 안타까워하는 심정이었다. 물리학과는 달리 철학은, 수학이라고 하는 장구한 역사를 통해 비교적 연속적으로 발전되어 온 바 객관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할 수 있는 공인된 도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여러모로 정교한 방향으로 발달해 온 실험 장치들이 있어 직관을 넘어선 뚜렷한 관찰을 반복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곤 했던 것이다. 철학적 사유를 해 나갈 때 뚜렷한 방법이 있다면, 달리 말해 어떻게든 역사적인 검증 과정을 거친 나머지 상호주관적인 권위를 갖고 있는 그런 방법이 있다면, 그래서 내가 그 방법을 젊을 때부터 숙지해 온 데다 많은 적용을 거쳐 그 성과를 확인한 경험이 누적되어 있다면, 이제 새로운 주제 영역을 선정해서 그 영역을 대상으로 철학적인 방법을 적용하여 기술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이 강력한 권위를 가진 철학적 방법은 더군다나 오늘날 이른바 ‘포스트 시대’에 이르러서는 무망해 보인다. 상호주관적인 권위를 가진 철학적 방법이 없다는 것은 철학적 사유를 외롭고 고독하게 만든다. 결국에는 자기 나름의 방법을 안출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들뢰즈(Gille Deleuze, 1925~1995)와 가타리(Pierre-Félix Guattari, 1930~1992)는 한통속의 공저인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통해 철학의 작업을 개념을 창조하는 것이라는 취지의 말을 했지만, 오히려 철학이란 사유의 방법을 창안하는 것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개념미술을 주창하는 일파에서 예술작품 하나가 제작되는 것과 예술론 하나가 창안되는 것이 동시적인 일이라고 한 것처럼, 한 사람의 철학자가 탄생한다는 것은 하나의 특정한 철학적 사유의 방법이 탄생하는 것과 동시적인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철학이 이성적인 분석을 빼놓을 수는 없고,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개념들을 활용하지 않을 수 없다. 기존의 많은 철학자들이 창안하여 활용한 바 있는 개념들이란 그들 각자가 그 당시 놓인 철학사상적인 맥락에서 주어진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조성한 것임에 틀림없다. 물론 그 개념들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성했는데도, 오히려 그 개념들 때문에 새로운 문제들이 생겨나기도 했을 것이다. 예컨대, 대다수 사람들이 태양을 신으로 확신하는 신화의 시대에 제시한 이성 즉 로고스가 오늘날 첨단 과학의 시대에 제시될 법한 이성과 동일한 의미를 지닐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수 천만 명이 죽어나가는 대대적인 전쟁을 겪으면서 제시한 인간 개념이, 수 십억 명의 노동자들의 활동을 이윤으로 바꾸어내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자본주의적인 복잡 미묘한 수탈의 네트워크를 염두에 두면서 제시한 인간 개념과 동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신병적인 고착에 의거한 편집증적인 경향을 지님으로써 다른 사람들과 거의 차단된 삶을 영위하는 인간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욕망과 감정 그리고 판단과 의지 및 행동에 관련된 개념이, 다른 사람들과 대체로 무난하고 원활한 관계를 맺고서 살아가면서 평상심을 유지하는 경향을 지닌 인간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욕망과 감정 그리고 판단과 의지 및 행동에 관련된 개념과 같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철학적 사유를 전개할 때 제 스스로 붙들고 씨름하는 문제의 성격과 한계를 염두에 두고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왕의 전해오는 개념들을 각자 나름으로 비틀어 또다시 갱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작업은 결국 자기 나름의 철학적 사유의 방법에 의거해서 수행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철학적 사유의 고독이 비롯되고, 그 철학적 사유의 고독이 각종 철학적인 표현의 수행조차 외롭고 고독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고 철학적 대화와 토론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 반대로,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철학적 대화와 토론이 불가피하다. 다만, 비록 쉽지는 않겠지만, 거기에서 각자 설정하고 있는 문제의 성격과 한계를 대화자에게 정확하게 드러낼 수 있는 기본 역량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2. 철학적 사유를 해 나가는 데 있어서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특정한 부분과 보편적인 전체와의 관계다. 특정한 부분에 집착하여 거기에서 발원하는 뭇 중요한 철학적 개념들이 마치 보편적인 전체에 관해서도 크게 분석적인 위력을 발휘한다고 믿는 것도 문제이거니와, 보편적인 전체를 한꺼번에 포괄하여 그 추상적이고 근본적인 얼개를 제시하기만 하면 그것이 특정한 부분들에 곧바로 크게 분석적인 위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라 믿는 것도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는 추상으로의 상승의 길과 구체로의 하강의 길을 동시에 오르내리면서 항상 주위를 주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요컨대, 특정한 부분의 영역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과 그에 따른 기술을 할 경우, 거기에 이미 늘 보편적인 전체에 관련된 잠정적인 요인들이 지평적인 바탕으로서 작동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하고, 그와 동시에 보편적인 전체에 대한 추상적인 분석과 그에 따른 기술을 할 경우에는 거기에 이미 늘 특정한 부분의 영역에서 치고 올라오는 구체성의 위력이 어떻게 추상적인 개념들과 그 구조를 채우거나 그것들에서 벗어나는가를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다. 보편적인 전체를 그 추상적인 얼개를 드러내어 들여다보고자 할 경우, 아무래도 체계적인 비판을 수행하는 이성이 크게 요구될 것이고, 특정한 부분을 그 구체적인 내용을 드러내어 들여다보고자 할 경우, 아무래도 집중적인 관찰을 수행하는 직관이 크게 요구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성적인 비판과 직관적인 분석의 재빠른 상호 교환적인 수행이야말로 철학적 사유를 하는 데 기초가 된다고 할 것이다. 따지자면, 이는 일종의 철학적 사유의 방법이다. 설사 이러한 추상과 구체의 오르내림, 부분과 전체의 상호 적용과 검토, 그리고 이성적인 비판과 직관적인 분석의 재빠른 상호 교환 등이 제법 철학적 사유의 일반적인 방법으로 제시된다고 할지라도, 앞서 제시한 바 철학사상적인 맥락에 따라 그 의미를 달리하는 제반 철학적 개념들을 이제 제 나름의 문제 틀에 따라 독창적으로 갱신하여 활용하는 데 따른 어려움은 여전한 것이다. 더욱이 전통적으로 전래되어 오는 개념들을 본인이 어떻게 다르게 비틀어 갱신할 수밖에 없는가를 드러내기 위해, 그렇게 갱신할 때 그 이전의 개념들이 어떤 의미로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일일이 밝히면서 비교해야 하는 거친 수고를 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 어려움은 예사로 배가되는 것이다. 에드워드 후설 사진 출처 - 구글 3. 그런데 현상학의 비조(鼻祖)인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은 ‘엄밀한 학으로서의 철학’을 건립하고자 하면서 다음과 같은 기묘한 말을 한다. “미리 주어진 어떠한 것도 받아들이지 않고 전해져 내려오는 어떠한 것도 그 출발점으로 삼지 않으며 아무리 위대한 대가라도 그 명성에 현혹되지 않고.” 이는 나중에 저 유명한, 심지어 ‘있음과 없음’ 그리고 ‘…임과 …아님’에 관련된 일체의 판단을 괄호로 묶어 무력하게 만드는 ‘판단중지’(Epoche)라는 기묘한 철학적 방법을 형성하는 바탕이 된다. 후설의 이 ‘판단중지’는 마치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가 ‘방법적 회의’라는 철학적 방법을 내세워 사유하는 자아를 제외하고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일체의 것들을 철학적 사유를 전개해 나가는 바탕에서 제거해버린 것과 같다. 오히려 그보다 더 심하다. 왜냐하면, 데카르트는 사유하는 자신의 정신을 실체로 여긴데 반해, 후설은 사유하는 자신의 순수한 자아마저 제거해버리는 모험을 감행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철학적 사유를 하는 자신의 존재마저 방법적으로 짐짓 제거해 버린 뒤 후설이 발견한 것은 ‘찰나’였다. 말을 하자니 ‘찰나’라고 하지만, 이 지경에서는 그 어떤 개념은 말할 것도 없고 그 개념을 담아내는 기표에 해당하는 그 어떤 언어적인 기호조차 불가능하다. 종이를 불태우면 검게 타 바스라지면서 무한극소의 연기와 재만 남듯이, 일체의 존재를 불태운 뒤 남는 극미한 흔적뿐이다. 이를 일컬어 후설은 ‘의식의 내실적 영역’(reelle Sphäre des Bewußtseins)이라는 어려운 말을 하고, 또 ‘현상학적인 잔여’(das phänomenelogische Residuum)라고 달리 일컫기도 했다. 굳이 표현하자면, 이는 극단적으로 극미한 순간에 그런데도 무한소의 두께를 지니고서 무한한 너비로 펼쳐져 있는 일종의 ‘환(幻)의 풍경’이라 할 것이다. 후설은 워낙 근본적인 이러한 철학적 방법을 안출하여 동원함으로써 존재가 근본적인 것이 아님을 그 나름 밝혀냈다. 그러니 어찌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암송하는 불교철학자들의 관심을 끌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싶다. 그러나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극미한 찰나의 얇디얇은 ‘환의 풍경’ 대신에 굳건하기 이를 데 없는 삼라만상의 이 지독한 안정된 지속성, 비유컨대 원자의 구조를 밝혀내어 양자역학의 선구자로 군림하게 된 닐스 보어(Niels Bohr, 1885~1962)가 자신의 출발점으로 삼은 ‘물질의 안정성’ 내지는 ‘원자의 안정성’을 연상케 하는바, 사물의 옹골찬 지속성이 오히려 무한 두께를 지니고서 광대무변하게 도사리고 있다. 그럼으로써 생각하는 자아가 돌아오고, 생각하는 자아가 터로 삼고 있는 하나의 몸이 돌아오고, 하나의 몸과 뭇 사물들이 펼치는 관계의 대향연이 돌아온다. 이 ‘사물 관계의 대향연’을 바라보는 태도(관점)를 후설은 ‘자연적 태도’라고 했고, 이 ‘사물 관계의 대향연’이 벌어지는 세계가 굳건하게 유지된다고 믿는 것을 ‘자연적 태도의 일반정립’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그러한 자연적 태도의 일반정립을 에포케 함으로써 앞서 말한 현상학적인 절대 잔여인 극미한 환의 풍경이라고 했던 것이다. 양극이다. 한쪽 극(極)에는 ‘극미한 환의 찰나적인 풍경’이 도사리고 있고, 다른 한쪽의 극(極)에는 ‘옹골찬 사물들 간에 벌어지는 관계의 대향연’이 도사리고 있다. 두 극 중 어느 한 극이 다른 극에 비해 워낙 근본적이어서 덜 근본적인 극을 더 근본적인 극으로 환원하는 일이 가능할 것인가? 아니면, 두 극 중 어느 극이 더 근본적이라고 할 수 없고 그와 동시에 두 극 모두 근본적이라고 하기에는 워낙 서로 모순적이어서, 알고 보면 아직은 알 수 없는 제3의 어떤 극이 기묘하게 대립된 방향으로 분기되어 나온 탓에 두 극이 성립하게 된다고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릴 것인가? 혹은 아니면, 아직은 알 수 없는 제3의 그 어떤 극이 이 두 극이 극적(劇的)으로 충돌하여 이른바 변증법적인 종합을 이룸으로써 생겨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릴 것인가? 이 같은 물음들이 철학적 사유에 있어서 근원적인 문제를 함축하고 있음을 확신하면서 이에 접근할 수 있는 새로운 출발점이라 여겨지는 ‘제3의 극’을 찾기 위한 분석에 돌입하게 된다. 첫째, 가장 넓은 의미에서 본 그러한 의식을 벗어난 자가 원리상 존립할 수는 없다. 따라서 위 양극의 근본 사태는 어떻게든 의식과의 관련을 벗어날 수 없다. 둘째, 전자의 극인 ‘극미한 환의 찰나적인 풍경’이 의식되는 방식은 최대한으로 의식에 의거한 방식이고, 후자의 극인 ‘옹골찬 사물들 간에 벌어지는 관계의 대향연’이 의식되는 방식은 최대한 의식으로부터 분리된 방식이다. 말하자면, 전자의 경우에는 의식이 한껏 앞으로 나가 있고, 후자의 경우에는 의식이 한껏 뒤로 물러나 있다. 셋째, 두 경우 모두 워낙 극단적이기에 분명 추상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둘이 순전히 정신적이라거나 또는 물질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정신이나 물질이란 개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지경에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세 가지 정도의 분석에 입각해서 ‘제3의 새로운 극’을 모색하고자 한다. 그 일책은 의식이 너무 한껏 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너무 한껏 뒤로 물러나 있지 않은 지경을 오히려 두 극에 비해 더욱 근본적인 사태로 확인하는 것이다. 그 근본적인 사태는 다름 아니라 ‘지금·여기’이다. 이때 ‘지금’은 열려 있으면서도 일정하게 지속하기에 결코 찰나의 순간도 아니고 무한정한 연속도 아니다. 또한 이때 ‘여기’는 두툼한 질적 부피가 상하좌우로 펼쳐지면서 열려 있으면서도 일정하게 제한되고 있기에 무한정한 텅 빈 공간이 아니다. ‘지금’과 ‘여기’는 혼연(渾然)한 일체를 이루고 있어, 방금처럼 사유를 통해 억지로 구분할 수는 있으나 그 존립에 있어서 따로 분리될 수는 없다. 이러한 ‘지금·여기’를 일컬어 ‘현존’(現存, existence)이라고 한다. ‘현존’은 ‘본질’(本質, essence)과 크게 구분되는 것으로 여겨져 왔지만, 오히려 ‘존재’(存在, being)와의 관련에서 보아야 한다. 4. [존재] 플라톤(Platon, 기원전 427~347)은 존재를 본디 형상(形相, eidos)인 ‘이데아’에 귀속된 것으로 보고,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322)는 존재를 감각적으로 드러나는 속성(屬性, symbebecota)들의 바탕으로 작동하는 제1실체로서의 ‘기체(基體, hypokeimenon)’에 귀속시켰다. 그리고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라 존재를 일반적으로 실체에 귀속시키면서 궁극적으로는 근원적이며 단순한 실체인 ‘신’에 귀속시켰다. 근대로 들어서면서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는 존재를 ‘사유 자체’에 귀속시켰고, 이를 넘겨받은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존재를 구성된 현상계로서의 자연에 귀속시켰다. 그러면서 이러한 존재를 근원적으로 가능케 하는 근본 역량인 ‘초월론적인 통각’(transzendentale Apperzeption)이라는 근원적인 주체와 ‘사물 자체’(Ding an sich)를 존재 너머의 세계, 이른바 ‘초월론적인 예지계’를 논리적인 요청에 의해 설정하게 되었다. 칸트가 남겨놓은 이러한 분리된 이중의 세계라는 난제를 헤겔(G.W.F. Hegel, 1770~1831)이 등장해 해결하면서 존재를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자신을 전개하면서 결국에는 절대지에로 포섭되어 완결되는바 ‘구체적 보편자인 절대 정신’에 귀속되는 것으로 여겼다. 이후,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은 ‘존재 전체’(Seinsganz)를 넘어서면서도 포괄하는 ‘절대적인 의식의 흐름’(absoluter Bewußtseinsstrom)을 제시하게 된다. 그러면서 의식을 전혀 실체가 아닌 것으로 여겼다. 아울러 이 의식에서부터 시간이 근원적으로 형성되어 나온다는 것을 입증해 보였다. 이러한 후설의 시간의식 이론 내지는 의식시간 이론은 근원적인 심층 자체에서 볼 때 ‘의식이 곧 시간이고 시간이 곧 의식임’을 밝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시간을 근본 형식으로 하지 않는 존재는 성립할 수 없는 것임을 주장한 것이기에, 이미 그의 제자인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의 존재론을 마련해 놓은 것이라 할 것이다. 하이데거는 자신 이전의 모든 철학자들이 논구해 온 존재는 실은 존재(das Sein)가 아니라 존재자(das Seiendes)임을 역설했다. 그리고 존재에 대해서는 오로지 존재의 의미를 탐구할 수 있을 뿐임을 강조하면서 그 존재의 의미를 시간으로 보았다. 이는 “존재(Sein)를 시간(Zeit)으로부터 파악해야만 하고, 존재가 [여러모로] 양식화되고 파생될 때 그 다양한 양식들과 파생들이 실로 시간에 견주어 이해되어야 한다면, 그와 더불어 존재 자체(das Sein selbst) - 다만 ‘시간 속에서’ 존재하는 것인 존재자(Seiendes)가 결코 아닌 - 는 그 ‘시간적인’(zeitlichen) 성격에서 명백하게 될 것이다.”라는 1) 하이데거의 말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그렇다면 이렇게 발전되어 온 존재에 대한 철학사적인 논변들을 바탕으로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얻는가? 하이데거의 관점에서 후설을 재해석하게 되면, 후설이 말한 ‘존재전체’를 ‘존재자 전체’로 읽게 되고, 후설이 말했다고 할 수 있는 ‘존재 너머의 의식’과 ‘의식≒시간’을 ‘존재자 너머의 존재≒시간’으로 읽게 된다. 이를 우리 나름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존재의 규정을 얻기 위해 후설의 시간론과 하이데거의 역사성에 관한 논변들을 실마리로 삼아 다음 몇 가지 사안들을 추출해 내는 동시에 일종의 귀결을 얻고자 한다. (1) 후설이 극미한 간극으로 일어나는 의식의 ‘파지’와 ‘예지’의 작용에서 시간을 ‘근원적으로 종합’해내는 의식은 근본적으로 축적 작용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2) 후설이 ‘절대적인 의식의 흐름’에서 ‘초월론적인 역사성’(transzendentale Geschichte)을 그 근본 성격으로 해서 발생적인 구체적 자아를 건립할 수 있었던 것은 의식의 축적 작용에 의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3) 하이데거가 현존재 자체(das Dasein als solches)가 생기(生起, Geschehen)할 때 현존재 자체의 존재구도(Seinsverfassung)로서 ‘역사성’(Geschichtlichkeit)을 제시하고 이를 근거로 해서 ‘세계역사’(Weltgeschichte)가 가능하다고 한 것 2)은 후설이 말한바 의식의 축적작용에 의거한 시간의 구성적인 발생에서 시간이란 그저 맹목적으로 그리고 평면적으로 흘러가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 축적에 의거한 것임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4) 지금·여기의 현존은 극단적으로 미분화해서 보면 한 순간의 극미한 ‘길이’의 흐름이지만, 그 미분적인 흐름조차 근본적으로 축적에 의거해서 밀려 응축됨으로써 이미 늘 밀도와 강도를 자아내는 방식으로 존립한다. 하물며 현존의 활동을 통해 이루어지는 주체의 활동과 그 성과는 어떻게든 축적되어 밀려 응축됨으로써 이미 늘 밀도와 강도를 자아내는 방식으로 존립하는 것이다. (5) 이를 바탕으로, 우리 나름으로 ‘존재란 현존의 축적에 의거한 시간적인 밀도이다.’라고 말하게 된다. 또한 동시에 ‘존재를 지평적인 바탕으로 해서 지금·여기에서의 현존이 발휘된다.’라고 말하게 된다. 따라서 현존에 입각해서 볼 때, 존재는 ‘축적에 의거한 시간적인 밀도’를 계기로 해서 현존에서의 과거로 작동하고, 또한 ‘지금·여기에서의 현존에 활동에 대한 지평적인 바탕’으로서 현존에서의 미래로 작동한다고 말하게 된다. 1) Sein und Zeit, 18쪽. 2) 같은 책, 20쪽. 이 글은 2016년 6월 30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816 | 추천: 0
: 아랍에미리트가 동부지역 하프타르 장군 지원 홍미정/ 단국대 중동학과 조교수 아랍에미리트(UAE)는 리비아 내전에서 동부지역 파벌을 이끄는 칼리파 하프타르 장군을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후원한다. 2016년 5월 14일자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동부지역을 통제하는 칼리파 하프타르 장군은 ‘리비아에서 가장 강력한 리비아 국군(the Libyan National Army) 사령관’이고, 리비아 분쟁에서 거의 모든 주요한 파벌과 협력하거나 전투함으로써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사진 출처 - Economist.com □ UAE가 전방위적으로 하프타르 장군 지원 2016년 4월 3일 리비아 옵저버에 따르면, UAE는 리비아 미디어 매체의 약 70%를 지배한다. UAE 71은 “UAE 보안부가 7개의 리비아 미디어 매체와 4개의 소셜 미디어 페이지에 자금을 대고 후원한다. 아부다비는 이들 미디어 매체에 약 7천 4백만 달러를 지출했다. 이러한 미디어 매체는 칼리파 하프타르에게 우호적이다.”고 폭로하였다. 뿐만 아니라 UAE는 칼리파 하프타르 장군이 동부지역을 완벽하게 장악하도록 장갑차, 트럭, 탄약과 무기 등을 공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6년 4월 26일 리비아 프로스펙트에 따르면, UAE에 기반을 둔 유조선이 동부지역 마르사 엘 하리가 항구에서 석유를 적재하였다. 이러한 UAE-동부지역 석유 비밀거래는 칼리파 하프타르를 경제적으로 돕기 위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UN주재 리비아 대사, 이브라힘 다바시는 “국민합의 정부(the Government of National Accord)는 리비아 석유를 불법적으로 수출하려는 모든 시도를 거부한다. 우리는 전통적인 경로를 벗어나는 리비아 석유구매에 관하여 매우 우려한다.”고 밝혔다. UN안보리는 국민합의 정부의 관리를 받는 트리폴리 소재 리비아 석유회사(the Libyan Oil Corporation)를 통해서만 리비아 석유판매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선언했다. □ 동부의 하프타르 세력/ 서부의 국민합의 정부 현재 리비아의 주요한 분열은 칼리파 하프타르 장군의 리비아 국군이 지배적인 동부와, 무슬림형제단이 이끄는 리비아 돈과 미스라탄 부대 등이 활동하는 서부 사이에 존재한다. 2015년 12월 UN의 중재로 동부와 서부지역 일부세력들이 합의함으로써 국민합의 정부를 창설하였다. 그런데 동부지역 의회는 반대자들이 많아 이 합의를 승인하지 못했다. 게다가 하프타르 지지자들은 “국민합의 정부가 하프타르 장군의 미래를 보장하지 않는다면, 이 정부에 리비아 국군 지휘권을 넘겨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국민합의 정부는 국방장관직을 동부지역 군 사령관 중 한 명인 마흐디 이브라힘 알 바르가티에게 할당함으로써 하프타르를 완전히 소외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2016년 3월 30일 국민합의 정부 총리 세라즈는 튀니지로부터 해로를 통해서 트리폴리로 들어왔으며, 해군기지에 머물고 있다. 그가 임명된 지 3개월이 지난 이후에야 비로소 해로를 선택해서 트리폴리에 들어온 까닭은 트리폴리에 기반을 둔 정부가 그의 트리폴리 입성을 반대하면서 공항을 폐쇄했기 때문이었다. 세라즈는 최근 동부지역과 서부지역의 권력 투쟁에서 영향력 있는 특정파벌과 특별한 제휴관계를 갖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다시 말하면, 세라즈는 내세울만한 이력이 없고, 리비아내에 정치․군사적인 지지기반이 거의 없었으며, 외국 세력들에 의해서 총리로 세워진 인물이다. 그런데 2016년 5월 세라즈는 국민합의 정부 역할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시르테에 본거지를 둔 IS를 겨냥하여 반-IS 센터를 트리폴리에 창설하였다. 그는 이 센터를 하프타르 군대에 대항하는 주요 세력인 미스라탄 부대 출신들로 채웠다. 이로써 국민합의 정부는 서부에 그 중심을 두고, 현재 진행되는 내전에서 동부의 하프타르 세력과 통합을 포기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프타르를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5월 중순에 미스라탄 부대와 하프타르 군대는 시르테 남부 질라 근처에서 전투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UAE의 후원을 받는 하프타르 장군도 시르테에 본거지를 둔 IS에 대항하는 전투에서 필수불가결한 서방의 동맹임을 입증하면서, 앞으로 진행될 리비아 국가 수립을 위한 협상에서 영향력을 증대시키려고 한다. □ 하프타르 장군의 부활 그리고 혼돈의 늪 정치 초년생인 세라즈와는 달리, 하프타르 장군은 1969년 쿠데타부터 현재 내전 시기까지 40년 이상 변화무쌍한 리비아 정치 한가운데에 있다. 그는 1969년 이드리스 왕을 축출하고 권력을 장악한 무아마르 카다피 대령이 주도한 쿠데타에 참가한 이후, 카다피와 함께 리비아 정치․군사의 중심에 있었다. 카다피 대통령의 명령을 받은 하프타르 장군은 1980년대 중반 리비아-차드 전투에 참가하였다. 그런데 프랑스의 후원을 받은 차드 군대가 하프타르 장군이 이끄는 리비아 군대를 굴복시켰다. 결국 1987년 하프타르 장군과 그의 병사들이 차드군대에게 포로로 잡혔다. 그런데 이때 카다피 대통령은 하프타르 장군과 연락을 끊고, 차드에서 포로가 된 리비아 군대 존재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하프타르 장군을 배신하였다. 1990년 미국 CIA는 협상을 통하여 하프타르와 그의 병사 300명을 난민 프로그램을 통해서 수단에서 미국으로 데려왔다. 그는 지난 20년 동안 미국에 거주하면서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였으며, 미국 정보부와 협력하여 카다피 암살을 시도하였다. 2011년 카다피에 반대하는 반란이 시작된 이후, 하프타르는 리비아로 귀환하였고, 동부지역 반란군 사령관이 되었다. 2014년 2월 TV에서 하프타르 장군은 서부지역에 중심을 둔 일반 국민회의(the General National Congress)에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키도록 요구하였다. 일반 국민회의는 카다피 축출 이후 2012년 7월 실시된 국민투표(유권자 중 61.58%, 1,764,840명 투표)를 통하여 출범하였다. 카타르와 터키의 후원을 받는 이슬람주의자들이 일반 국민회의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슬람주의자들에 맞서 UAE와 이집트의 후원을 받는 하프타르 장군은 2014년 5월 벵가지와 동부지역 내 이슬람주의자 민병대를 척결하기 위한 군사작전(Operation Dignity)을 시작했다. 2014년 6월 25일 국민투표(유권자 중 18%, 약 63만 명 투표)로 동부지역에 중심을 둔 대표자들의 정부(the House of Representatives, 2014년 8월 4일 창립)가 일반 국민회의 역할을 대체하면서, 하프타르를 리비아 국군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2016년 2월 리비아 국군은 이슬람주의자 민병대 대부분을 벵가지 밖으로 축출하였고, 2016년 4월 중순에는 이슬람주의자들을 벵가지 동쪽 250Km 떨어진 데르나로 축출하였다. 현재 하프타르 장군이 이끄는 리비아 국군은 무슬림형제단이 이끄는 리비아 돈, 미스라탄 부대, 벵가지 혁명 세력인 슈라위원회, 시르테에 중심을 둔 IS 등과 싸우고 있다. UAE뿐만 아니라 이집트, 카타르, 터키, UN,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주요한 외국세력들이 리비아 내 서로 다른 파벌들을 지원하면서, 리비아는 완전한 혼돈의 늪, 전쟁터로 변했다. 이 글은 2016년 6월 22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1003 | 추천: 0
- ‘풀뿌리여성포럼’을 보면서... 신하영옥/ 여성활동가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성의원들의 비율은 더 늘어났다. 특히 괄목할 만한 것은 한 명이긴 하지만, 선출직 의원의 수가 비례직 의원의 수를 넘어섰다는 점이다. 전체 300석 중 51명(17%)이 여성의원으로, 이 중 26명은 선출직, 나머지 25명이 비례직이다. 이러한 여성의원들의 증가로 인해 ‘성평등 국회’로 가야한다는 말들이 오간다. 정세균 국회의장조차 “아직 절반에 미치지 못한다”며 성불평등이 가장 심한 분야가 정치권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정도로-그것이 립서비스라 하더라도-, 여성들의 정치참여는 이제 누구나 대놓고 불평하거나 반대할 수 없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상임위원장의 자리배정을 놓고 보면 이번 국회가 성평등 국회를 지향한다는 것의 진위가 의심스럽다. 18개의 상임위원장 자리 중 단 2개만이 여성의원에게 돌아갔다. 예산결산위원회의 김현미 의원, 여성가족위원회의 남인순 의원이 그들이다. 여성가족위원회는 당연히 여성의원의 몫이라고 암묵적으로 정해진 것이기 때문에 결국 1명의 여성국회의원만이 위원장의 자리에 앉았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것은 양성평등기본법에 명시한 특정성별이 60%는 넘지 않아야 한다는 조항에 위배되는 것이다. 국회는 국민을 대표하는 곳으로, 사회 각 집단들에 대한 대표성이 발현되어야 하는 곳이다. 그러나 사회구성원의 과반수를 대표하는 여성들에 대한 대표성이 30%도 아니고 17%에 불과하며, 위원장의 비율은 11%에 머물고 있을 때 과연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진 출처 - 경향신문 흔히 이제 여성문제는 없거나, 대부분 해결되었거나, 해결될 것이라고 말하며, 정치에서의 할당제를 비롯하여 여성운동이나 여성의제에 대한 역풍이 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여성혐오’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항상 있어왔던 문제이긴 하지만, 이러한 역풍의 바람을 타고 상승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공적영역에서의, 그것도 평등한 대표성을 가져야 할 국회라는 거시적 구조에서의 불평등과 차별이 여전하다고 할 때, 미시적이고 일상적인 혹은 공과 사가 얽혀있는 지역차원에서의 여성에 대한 시선은 어떠할지를 추론해볼 수 있다. 오늘 “왜 옆집언니는 선거에 나가게 됐나?”라는 풀뿌리여성포럼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선거는 끝났지만 정치는 끝난 것이 아니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정치가 거대담론을 다루는 특별한 누군가의 직업이 아니라 일상과 삶의 모든 문제들을 의제로 다루며, 따라서 삶을 정치적으로 사고하고 정치를 삶으로 살아내는 누군가도 정치인이 되어야 한다는 그런 의미에서 ‘삶의 정치’를 어떻게 지속하고 확장해내면서 이것이 제도정치와 연결되어야 하는가? 라는 문제의식에서 마련한 자리였다. 사례발표자로 나온 이는 원내에 뿌리가 없는 소수정당에, 나이어린(?) 여성이었다. 그는 나름 풀뿌리시민운동이 발달한 작은 지역에서 출마하였고, 지역 풀뿌리 조직들의 지원도 받고 있는 후보였다. 그러나 그동안 그 지역이 보여온 지역활동과 지역정치에서의 선도적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잘 알려지지도 않은 정당에서 나이도 어린 것이, 거기다 여자가 무슨 정치를 하겠느냐는 비판과 더불어 폭력적 상황까지 겪었다고 한다. 이것이 현재 ‘양성평등’의 모습이고 ‘여성상위’의 모습이다. 여성들에게는 ‘유리천장’이 아니라 여전히 콘크리트 천장이 떡 버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 속에는 두 가지의 문제가 존재한다. 하나는 여전히 기득권 정당 중심의 이기적인 정치제도로 인한 소수정당 및 소수자들의 정치진출에 대한 제도적 한계와 이의 결과로서 현실 제도정치권을 중심으로 정치를 사고하는 시민들의 편협한 의식, 다음으로 그동안 ‘여성정치세력화운동’이 제도정치를 중심으로 흘러온 것에 대한 한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성주의 정치란 남성중심의 정치문화와 구조를 바꾸어내는 것과 더불어 공과사로 이분화되어 있고 이로부터 성별역할분리에 따라 공적인 영역은 남성, 사적인 영역은 여성이라는 구도를 해체함으로써 정치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적인 것의 공공화, 혹은 공론화는 단순히 여성만이 아니라, 공적인 정치영역에서 배제된 수많은 소수자들과 그들의 의제를 포함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아래로부터의’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 주변인들의 세력화와 더불어갈 때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풀뿌리 조직에서 활동하고 있는 구성원들이 대다수 여성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활동을 대표하거나, 대표해서 발표하거나, 대표해서 포상을 받는 이들은 남성들이다. 오늘 사례발표를 한 조직역시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여성들의 풀뿌리 활동이 여성주의적 풀뿌리 활동과 풀뿌리 정치로 이어지고 있는가는 면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여성정치가 생활정치, 삶의 정치를 표방한다고 할 때 이는 제도정치권의 소수자 배제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개선하고자하는 초당적인 범 여성의원 연대활동과 더불어 풀뿌리 정치, 지역정치를 펼치고 있는 다양한 조직들과의 연대활동 역시 전개해나가면서, 제도권 안팎으로 여성들의 정치세력화를 위한 연대가 광범위하게 전개되어야 한다. 세력화는 조직화 없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연대는 조직화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여성정치학은 다른 말로 ‘인권의 정치학’이기도 하였다. 여성의 권리를 인권이란 이름으로 명명하고 여성의 문제를 ‘국가의 책임’으로 만들어 낸 역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권의 정치학은 시장이 시민권을 잠식하는 자본주의에서 민주주의를 지켜내어 온 담론이자 실천이기도 하다. 때문에 여성정치는 인권정치, 즉 소수자와 주변적 존재들의 사회적 주체화를 위한 정치여야 한다. 이는 여성운동이 단순히 남성권력을 나눠달라거나 빼앗아오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와 결탁한 가부장제라는 사회적 원리를 뛰어넘어 평등과 자유라는 민주주의 이념에 맞는 새로운 사회적 질서와 원리를 창출하고자 하는 대안의 담론이자 실천이기 때문이다. ‘여성혐오’ 담론의 갑론을박을 보면서 여성의제와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담론이 이제 여성운동계 내부에서 나오지 않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여성운동은 ‘여성의 권리는 인권’에서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라는 담론을 통해 ‘개인여성의 권리를 인권으로 개념화하고 정치적 의제화’하는 활동을 전개하여 왔다. 그러나 현재도 그러한 실천이 지속되고 있는가? 하는 점은 고민해봐야 할 때가 된 듯하다. 여성들의 인권의 정치학은 지금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는 곧 여성운동에 대한 시험이기도 하다. 여성운동이 대안의 사회운동으로 가기위해 현재 무엇이 필요하고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 그리고 운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정치(운동)에서 여성운동은 무엇을 잊거나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풀뿌리로부터 제도권까지 도착하는 것이 힘들거나 불가능하다면 여성정치는 지금 어디선가 길을 잃은 것이다. 다시 한 번 범여성 세력들의 진지하고 치열한 고민과 논의와 실천이 필요하다. 그 실천에는 유명하지 않은 ‘옆집 언니들’의 정치도전이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폭력과 냉대, 외면 속에 좌절하지 않도록 하는 실천도 마찬가지다. 이 글은 2016년 6월 22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447 | 추천: 0
정지영/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사무국장 2000년 초 한국 장애계는 이동권 운동과 자립생활 운동으로 집과 시설에만 살아야 했던 재가장애인이 대거 탈재가·탈시설에 성공하였다. 불과 10여년 전에는 지금 지역사회에서 만날 수 있는 장애인들보다 경증인 상태에도 전동휠체어나 지하철 편의시설 같은 시스템이 부재했기에 집과 시설에서만 머물러야 했다. 이동수단의 보급과 함께 2008년 시작된 장애인활동보조서비스는 신체적 활동지원을 가능하게 하여 중증의 장애인도 좀 더 사회활동이 어느 정도 가능하게 되었으나, 현재 장애인시설 거주인의 80% 이상이 최중증의 장애인과 지적·발달 장애인으로, 아직 지역사회에 통합되지 못하고 있다. 장애이슈는 경증장애인에서 중증장애인으로, 이제 정신적·지적장애 유형과 최중증장애인으로 옮겨 가고 있는 것이다. 이동보조수단과 활동보조인만으로는 정신적 장애인과 최중증장애인의 탈시설을 유도할 수 없었고 결국 시설에는 더욱더 어려운 장애인만 남았다. 2009년 시설에서 전동휠체어를 타고 나와 지역사회에 안착한 한 장애인의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나는 자립생활해서 좋은데, 시설에서 같이 나오고 싶은 언니가 있어요. 그런데 그 언니는 너무 중증이라 아무도 자립생활 하자는 얘기를 건네지도 않아요. 저야 전동휠체어도 있고 집도 얻었고 활동보조 시간도 많이 필요 없으니까 저한테는 얘기하는 것 같아요. 그 언니한테 같이 나가자고 얘기해봐야 그 언니가 타고 다닐 만한 전동휠체어는 엄청나게 비싸고, 활동보조도 하루 종일 누가 옆에 있어야 하는데 누구하나 책임질 수 없으니까 아예 말을 꺼내지 않는 것 같아요. 그 언니는 아마 평생 시설에서 나오지 못할 거예요” 장애인 자립생활 운동의 당위성으로 지지받았던 탈시설정책은 고도의 중복, 지적·발달장애인만 남은 상황에서 그들을 위한 새로운 공공서비스가 만들어지는 논리로 확대되지 않았다. 오히려 다시금 그래서 시설이 필요하다는 시설의 역할에 강한 지지를 받으며 시설의 탈바꿈이라는 탈시설 정책으로 귀결되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대단한 미래를 예측하는 것도 아닌, 지금의 정책의 효과가 어디까지인지 그 이후에는 무엇이 필요한지 정도의 간단한 미래도 예측하지 못하는 것이 현재 장애인정책의 현실이다. 좋은 말로는 단계적 발전이라고 하겠지만, 결국은 권리에도 순번이 있다는 말에 다르지 않다. 그러나 지금은 단계적 발전이라도 제대로 지켜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경찰에 의한 강제입원, 정신장애인이 범죄자냐?"라고 쓰여진 피켓을 들고 정신보건법 상 경찰의 행정입원 신청권 조항 신설에 반대하고 있는 모습.장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 출처- 비마이너 19대 국회가 닫히기 직전 정신보건법 전부개정안이 통과되었다. 정식명칭은 ‘정신건강증진 및 정신질환자 복지서비스 지원에 관한 법률“이다. 이 법은 현재 논란 중이다. 한 측에서는 입원적합성심사위원회가 설립되는 등 보호의무자 입원 요건이 강화되었다고 한다. 한 측에서는 경찰에 의한 정신장애인 입원 요건 규정 등이 포함되어 있어 강제입원에 대한 불안감이 더 커졌다고 한다. 물론 불안감을 호소하는 쪽은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이다. ‘길에서 혼잣말 하지 마, 멍 때려서도 안돼, 한 군데를 응시해서도 안 된다고. 왜? 이제 경찰이 다시 잡아 갈거야. 난 안 미쳤다고 해야지. 그러면 더 잡아가. 음 대응 매뉴얼이 있어야겠다.’ 이 알 수 없는 대화들은 조울과 망상을 가지고 계신 분과 나눈 최근 대화이다. 이 분과의 대화를 통해 비자의적 입원 요건의 강화라는 주장에 의문을 품게 된다. 당사자가 불안해하는 법개정, 당사자가 왜 불안해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최근 강남역 살인사건에 대한 경찰의 입장발표로 당사자들의 불안이 우려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 강남역 살인사건은 관리되지 않은 정신질환자에 의한 살인사건으로 매듭지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도 정신질환자에 대한 관리를 더 철저히 하라며 힘을 실어주고 있다. 국가와 사회의 문제를 개인에게 돌려 국가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을 우리는 지겹게도 보아왔지만, 그 결과로 인해 2~30년 전처럼 사회와 국민의 안전을 위해할 우려가 있는 자들을 모조리 잡아가지 않을까하는 염려가 현실감 있게 다가오고 있다. 이 문제는 정신장애인뿐 아니라 지적·자폐성 장애인들 또한 그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걸 보여준다. 오늘도 살아남은 여성과 아직 잡혀가지 않은 정신적 장애인들의 안전을 지켜줄 국가가 보고 싶다. 이 글은 2016년 6월 1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485 | 추천: -1
김재완/ 방송대 법학과 교수 최근 국회 본회의 심의를 통과해 정부로 이송된 국회법 개정안을 놓고 각 당과 행정부가 서로 맞서고 있다. 개정된 국회법은 제65조 제1항에서 국정감사 및 국정조사에 필요하다는 위원회의 의결이 있은 때, 법률안의 심사를 위하여 필요하다는 위원회의 의결이나 재적위원 3분의 1 이상의 요구가 있은 때, 법률안 이외의 중요한 안건의 심사나 소관 현안의 조사를 위하여 필요하다는 위원회의 의결이 있은 때의 각 경우에 청문회를 열 수 있도록 함으로써 그 적용 범위를 확대해 국회 상임위 차원의 상시적 청문회가 가능하도록 했다. 이를 두고 새누리당과 정부는 국회법 개정안이 행정권과 행정기능을 과도하게 침해하는 것이며, 의회독재를 초래할 위험성이 큰 것으로 위헌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의 국정운영 상황을 돌이켜 보면 오히려 행정권과 그 기능의 비대화가 초래한 행정권력의 오남용과 폐해를 숱하게 경험해 왔다. 이에 반해 그릇된 행정권의 행사를 적절하고 유효하게 제어할 수 있는 실효성 있는 국회의 견제기능은 미약했다. 이것은 우리 헌정사에서 비롯하는 역사적, 경험적 사실이다. 국회법 개정법률안의 제안이유에서도 그러한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청문회의 개념을 보완하여 중요한 안건의 심사나 소관 현안의 조사를 위하여 필요하다는 위원회의 의결이 있은 때 청문회를 개회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국회의 국정통제권한이 보다 실효적으로 행사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라는 것을 제안 이유에서 밝히고 있다. 새누리당의 헌법전문가인 정종섭 당선자는 조사청문회의 도입이 국정의 대상과 범위, 방법에 있어 무제한성을 가지고 있고, 위원회의 과반만 찬성하면 언제나 할 수 있어 시기상으로도 무제한이므로 행정 업무를 정상적으로 수행할 수 없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또한, 첨예한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정책이나 업무, 기업, 조합, 각종 이익단체의 직·간접 영향 하에 이러한 조사가 실시되면 국가의 기능 자체가 와해되어 행정부와 사법부의 기능을 와해할 우려가 커 헌법이 정한 다른 헌법기관의 권한 기능을 과도하게 침해하므로 위헌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헌법상 권력분립은 각 헌법기관이 완전한 독립적 권력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것에 있다. 특히 국회는 행정권과 사법권에 비교할 때 국민의 민주적 정당성을 더욱 강하게 부여받은 헌법기관이다. 때문에 행정권과 사법권의 권한행사에 대해 그 내용을 조사할 필요가 있다면, 언제든지 위원회의 의결로써 국민으로부터 부여받은 국회의 견제기능을 행사할 수가 있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국가정책과 행정업무에 대한 국민의 알권리를 더욱 충족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현행의 법 제도만으로는 주권자인 국민이 헌법기관을 구성할 때에만 주권을 행사할 수 있고, 그 이후에는 대의제에 따라 각 헌법기관이 국민을 대신해 국정의 운영과 권한을 행사하게 된다. 이와 같은 시스템 아래에서는 국가정책 수립과 행정권의 행사가 올바른 것인지를 국민이 가늠할 수 있는 유일한 잣대와 창구는 실효성이 담보된 국회의 청문회 제도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국회의 행정권에 대한 견제기능의 강화야말로, 진정성 있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우리 헌법 제51조는 국회에 제출된 법률안 기타의 의안은 회기 중에 의결되지 못한 이유로 폐기되지 않지만, 국회의원의 임기가 만료된 때에는 폐기되는 것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국회법 개정안은 국회 본회의에서 의결되어 정부에 이송된 것으로 회기 중에 의결되지 못한 법률안이 아니기 때문에 19대 국회의 만료로 폐기돼야 할 법률안이 아니다. 따라서 만약 박근혜 대통령이 19대 국회의 임기 중에 거부권을 행사하고 19대 국회에서 재의결을 못 해도 자동으로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20대 국회로 넘어가서 재의결을 거쳐야만 하는 것이다. 대통령의 법률안 거부권 행사의 본래 취지는 법률안에 이의를 분명히 하여 국회에 재의결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국회법 개정안에서 신설한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에 대한 위원회의 심사에 관한 규정(제58조의2)에 대해서도 그 위헌성에 대한 약간의 논란이 있다. 이 조항은 헌법재판소의 종국 결정이 법률의 제정 또는 개정과 관련이 있으면 헌법재판소가 그 결정서 등본을 국회로 송부하고, 국회의장은 그 결정서 등본을 해당 법률의 소관위원회와 관련 위원회에 회부하며, 위원회는 회부된 종국 결정을 검토하여 소관 법률의 제정 또는 개정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경우 소위원회에 회부해서 심사하도록 하는 것을 규정한다. 해당 조항은 헌법재판소가 내린 종국결정의 정당성 여부를 심사하는 것이 아니다. 헌법재판소가 내린 종국 결정의 취지에 따라 해당 법률의 제정 또는 개정이 필요한 것인지 여부를 심사하는 것으로 헌법재판소의 본래 기능과 의미를 더욱 강화하고 보완하는 입법인 것이다. 헌법기관의 상호 견제와 균형에 충실한 입법이라고 할 수 있다. 국회법 개정안은 정부와 새누리당이 주장하는 것처럼 위헌적인 법률이 아니다. 지금까지 행정부의 입맛대로 정책을 입안하고 행정권력을 행사해 왔던 잘못된 관행들이 드러나고 그것에 제동이 걸릴 수밖에 없는 제도가 입안되는 것에 대해 반감을 나타내는 아우성 일뿐이다. 의회독재가 아니라 오히려 폐습으로 이어져 왔던 행정독재를 종식하는 것이다. 국민의 인권과 기본권을 수호하고 그 기능을 활성화하기 위한, 진일보한 민주적 마당을 국회를 통해 실현시키는 것이다. 국회법 개정안은 국회가 가지는 본래의 모습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이 글은 2016년 5월 25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420 | 추천: 0
이문영/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 지난 4월 26일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기술참사로 일컬어지는 우크라이나(당시는 소련)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폭발사고가 일어난 지 꼭 30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 날을 즈음해 당시 사고의 최대 피해국이었던 우크라이나, 벨로루스, 러시아에서는 사고 희생자를 추모하고 다시는 이와 같이 끔찍한 참사가 재발하지 않기를 기원하는 각종 행사가 열렸다. 체르노빌 참사가 핵의 군사적 사용뿐 아니라 그 ‘평화적 이용’도 거부하는, 다시 말해 반핵을 넘어서 탈핵의 필연성을 입증하는 가장 강력한 논거가 된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피해규모 때문이었다. ‘반감기 2만 4000년’ 같은 표현이 환기하듯이 인류는 이 새로운 유형의 재난 앞에서 도대체 그 끝이 언제일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아득한 무력감을 느꼈다. 실제로 체르노빌 폭발로 방출된 방사성 물질의 양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시 방출된 것을 합친 양의 200배에 달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 보고에 따르면 이 사고로 유럽의 약 20만 ㎢의 땅이 방사능에 오염되었고, 강과 바다, 지하수, 그곳에 서식하는 동식물이 오염되었다. 우크라이나, 벨로루스, 러시아 세 나라에서만 사고 후 거주 불능의 고(高)오염 구역에서 소개된 사람이 11만 6천 명, 집중통제구역 거주자가 27만 명, 기타 오염지역 거주자가 5백만 명에 달하고, 사고로 인한 직간접적 방사성 장애로 영구 불구가 된 사람의 수만 14만 8천 명이었다. 체르노빌 참사가 갖는 의미는 이 사고가 지구화 시대에 특징적인 복합재난의 실질적 기원이 되었다는 점도 있다. 보통 재난은 자연재해(태풍, 홍수, 해일, 지진 등), 인적 재난(대형 화재, 폭발, 붕괴, 침몰, 오염 사고 등), 사회적 재난(테러나 전쟁 등)으로 분류된다. 반면 지구화 시대 재난의 특성은 자연재해, 인적 재난, 사회적 재난 사이의 상호 의존성이 고도로 강화되어, ‘두 가지 이상의 재난이 동시적 또는 연속적으로 동반되는 복합 재난’이 상례화된다는 데 있다. 이때 복합 재난을 추동하는 ‘재난의 상호 의존성’은 지구화 시대에 극대화된 ‘세계의 상호 연관성’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울리히 벡의 주장처럼 ‘글로벌 리스크는 새로운 형태의 글로벌 의존성의 표현’에 다름 아닌 것이다. 체르노빌 참사 최대피해국 중 하나인 벨로루스 민스크에서 2016년 4월 28일 열린 <체르노빌 참사 30주년 기념 컨퍼런스> 사진 출처 - Казинформ https://news.rambler.ru/33490993/?track=search 체르노빌 사고를 복합 재난의 기원으로 간주할 수 있는 근거는 여러 가지다. 가장 단순하게는 복합 재난의 정의에 비추어, 그것이 원자로 폭발과 대형 화재, 방사능 오염 등 여러 종류의 재난이 동시다발적으로 착종된 형태라는 점이다. 두 번째는 체르노빌 사고가 ‘정치적 체르노빌’이라 할 소련의 붕괴를 촉발한 중요한 팩터가 됨으로써 복합 재난이 전면화 되는 조건, 즉 전지구화라는 거대한 패러다임 변화를 야기했다는 점이다. 이는 ‘체르노빌은 소련 체제의 상징이고, 체르노빌에서 일어난 기술 재앙은 정치적 재앙의 전조가 되었다’는 러시아에 널리 퍼진 견해가 잘 보여 준다. 실제 사고의 근본 원인 중 하나였던 안전문화 부재는 소련식 관료주의로부터 배양된 것이며, 소련식 비밀주의는 사고 피해를 키우고 복구를 심각하게 방해했다. 무지막지한 방사능 누출에도 불구하고 인근 지역 주민 소개가 이루어진 것은 사고 발생 후 하루가 지난 4월 27일로, 이미 다수의 주민들이 다량의 고농도 방사성 물질에 장시간 노출된 후였다. 또 사고 직후 방사능 수치의 비정상적인 증가에 놀란 유럽 국가의 추궁에도 불구하고, 소련 당국의 공식 발표가 이루어진 것은 무려 3주가 흐른 뒤였다. 이후에도 소련 정부는 사고 규모 및 오염 정도를 축소, 은폐함으로써 신속하고 효율적인 국제 공조를 지연시켰다. 이렇게 체르노빌 사고로 여실히 드러난 소련의 관료주의와 비밀주의의 병폐는 소련의 개혁⋅개방 정책을 가속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 ‘가습기 살균제’ 책임 규명과 피해 보상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체르노빌 참사와 이를 비견하는 건 자칫 엉뚱해보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모든 사고나 재난 뒤에는 늘 무책임한 정부나 기업, 은폐와 조작을 가리지 않는 관료주의와 비밀주의가 숨어 있다는 점에서 두 사고는 같다. 사건 발생 후 5년이나 지났지만 책임자나 관련자 처벌은 반드시 따져 물어야 할 것이다. 이와 더불어 우리 스스로의 근본적인 각성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지구화 시대 대형재난의 대부분은 과학과 문명의 결핍이 아닌, ‘과잉’의 결과로 발생한다. 체르노빌도 그랬고, 가습기 살균제도 그렇다. 우리는 이미 온갖 세균, 곰팡이와 더불어 살아간다. 세균과 곰팡이를 박멸과 살균의 대상으로만 볼 일이 아니라, 그들을 죽일 수 있는 것은 사람도 죽일 수 있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더럽게 살자는 건 아니다. 강박적인 위생관념으로부터 벗어나 공생, 공존하는 법도 배울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우선 필자부터 결벽증적 습관을 심각하게 반성하고, 의심스런 화학물질 범벅임에 분명할뿐더러 환경오염의 주범인 각종 세정제, 물티슈, 살균제 등으로부터 벗어나는 연습을 해보아야겠다. 이 글은 2016년 5월 18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417 | 추천: 0
정재원/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사회가 각박해지면서 하루가 멀다 하고 끔찍한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아동학대 문제로 한참을 사회가 들끓었고, 바로 그 전까지는 각종 잔혹한 살인 사건이나 군과 학원 폭력의 희생자 문제, 그리고 염전 등 곳곳에서의 장애인 학대 사건 등이 지면을 장식해 왔었다. 이렇게 각종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최근에 안산의 한 호수 주변에서 사체의 하반신이 발견되는 일이 일어났는데, 며칠 뒤 나머지 상반신이 발견되었고, 곧바로 그 끔찍한 토막살인 범죄의 용의자가 검거되면서 우리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너무나도 평범한 한 젊은이가 그러한 끔찍한 살인 사건을 저질렀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적이며, 살해 동기나 공범의 여부, 그리고 살해 후 SNS 활동 등의 행적들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많지만, 어찌 되었든 그가 살인을 저지른 것은 맞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유사한 범죄들 중에서도 이 범죄가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아직 수사가 진행 중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은 물론 이름 등이 공개되면서부터이다. 소위 인권선진국들에서도 강력범죄자들의 인적사항들에 대해서는 공개를 당연시 여긴다는 사실을 근거로 많은 국민들이 이러한 강력범죄자들의 얼굴을 공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몇 가지 기준을 근거로 몇 년 전부터 일부 강력범들의 얼굴이 공개되어 오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다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유사한 범죄 등으로부터 위협을 크게 느끼며 불안감이 커진 한국 사회의 여론은 신원 공개론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직 본격적인 수사는 물론, 최종적으로 법적인 판결이 나지 않은 상황에서, 무죄추정의 원칙을 깨고 얼굴을 비롯한 용의자의 신원을 공개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입지가 약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용의자의 신원이 공개되자마자 그의 가족과 친지, 지인들, 심지어 전 여자 친구의 신상까지 그대로 노출되는 일이 일어났고, 인터넷에는 이들에 대한 욕설과 비방이 넘쳐나기에 이르렀다. 결국 이에 대해 경찰과 검찰은 단호하게 대응할 것을 밝히지 않을 수 없었지만, 이는 수사당국이 자초한 일이기도 하다. 사실 최근 몇 년 동안 얼굴 등 신상 공개 여부에 있어서 중요한 한 원칙은 바로 가족 등 범인 주변인들에 대한 보호가 필요한 경우에는 공개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중요한 원칙은 제대로 홍보가 된 적이 없었다. 문제는 이러한 원칙이 이번에는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치 무엇인가를 덮거나 관심을 흩어 놔야 하는 목적이 있는 양 너무나 과도하게 모든 것이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최소한 현재의 한국의 인권감수성과 민주주의 수준에서는 용의자 혹은 심지어 형이 확정된 범죄자의 얼굴 등 신상을 공개해서는 안 된다. 물론 상습적 성범죄자들의 경우 신상 및 거주지 공개에 대해서는 이러한 주장을 하기에는 더 많은 연구와 논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범죄자의 인권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바로 용의자 혹은 범죄자의 가족과 친척, 그리고 지인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이러한 공개는 반대해야 한다. 얼굴을 공개해서 설사 그 용의자 혹은 범죄자의 가족이 누군지를 알게 되더라도 별다른 피해를 받지 않는 외국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감옥에 들어가 있을 범죄자는 얼굴이 드러나도 큰 피해를 보지 않는 반면, 연좌제 비슷한 것이 전 사회적으로 남아 있는 한국 사회에서 그의 가족과 친척들은 엄청난 피해를 볼 수 있다. 소위 수감자 가족들의 고통에 대해서 우리는 잘 알지 못 한다. 더군다나 그러한 범죄를 저지르는 DNA가 그 아들, 딸에게도 유전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꽤 확고하게 사람들의 인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수감자 가족들은 한층 더 고통을 받는다. 평생을 주변의 시선을 피해 살아가야 하는 이들은 연애와 결혼, 취업과 거주 등에 있어서 심각한 제약을 받으며 극심한 고통 속에서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 뿐인가. 가족의 범죄가 마치 자신의 범죄인 양 스스로를 옥죄며 살아가야 하는 고통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어느 사회든 내 피붙이가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범인이라는 사실은 남아있는 가족들에게 끔찍한 기억과 경험이겠지만, 한국처럼 가족에게 연대책임을 묻는 전사회적인 연좌제가 기승을 부리고 있고, 같은 죄인으로 취급받는 사회에서는 범인은 물론 용의자 혹은 피의자에 대한 신상 공개는 대중의 관음증 해소 외에는 오히려 많은 이들에게 더 큰 고통을 준다는 점에서 반대해야 한다. 사진 출처 - 뉴스1 이러한 고민 없는 공개/비공개 논의는 우리 사회의 인권의식과 민주주의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얼마 전 몇몇 여성 연예인들이 소위 성매매를 했다고 해서 한바탕 여론이 뜨거웠었다. 그런데 엄연히 성을 산 당사자인 남성의 신원은 제대로 드러나지도 않은 채, 온통 사회의 관심은 여성 연예인들에게만 쏠렸다. 좌익효수를 비롯한 국정원의 선거 개입, 세월호와 국정원과의 관계, 전경련과 국정원과 어버이연합 등의 관계 등등 훨씬 더 집요하게 궁금증을 해소해야 할 사건들이 넘쳐나지만, 때로는 언론과 정권의 의도에 놀아나서, 때로는 우리 스스로 더 많은 고민을 해야 하는 부분에 대해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경향이 크다. 이 외에도 이 사건과 관련하여 우리 사회는 또 다른 문제를 드러냈다. 처음에 시신의 발 크기가 과도하게 작다는 보도에 대해 네티즌들은 안산 일대의 외국인 노동자일 가능성을 강조하면서 중국 동포(조선족)들의 범죄나 동남아 이주자들의 과거 범죄 사례들을 들며 한국사회가 이들로 인해 위험해진 것으로 단정하고 심지어 피의자가 아닌 피해자가 외국인일 것이라는 추정에도 불구하고 외국인 혐오증과 인종주의적 발언들이 넘쳐났다. 출입국관리소의 단속을 피해 도망가다 추락해 사망하는 사건에 대해서조차 인종주의적인 댓글들이 넘치는 상황은 한층 더 악화되고 있다. OECD 국가들 중 최고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자살률과 마찬가지로 최고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각종 산업재해들까지 합할 경우 우리 사회는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 각종 범죄들의 증가는 한층 더 우리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문제는 극단적인 사이코패스는 제외하더라도 대부분의 범죄들, 심지어 소위 ‘묻지마 살인’조차 개인의 정신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물론 강력범죄들의 발생을 사회구조적인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그러나 기득권 세력들의 부정의와 불공정한 행태, 부패와 탐욕으로 인한 범죄들은 제대로 처벌되지 않는데 반해, 저임금과 무복지, 빈곤과 불평등, 위계적 질서와 극심한 양극화, 각종 갑질들과 다양한 폭력에 노출, 방치되어 있는 대다수의 국민들에게는 매우 잔혹한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이 박탈감을 느끼며 범죄의 길로 빠지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상황은 심각하다. 위정자들이 민주주의와 인권을 후퇴시킨다면 민중들이 깨어서 그것들을 막아야 한다. 추상적인 거리정치나 낡은 목적을 가진 저항논리나 운동정치론만으로는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비록 주체적 의지로 역사와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지는 못 하지만, 설사 근본적인 변혁과는 거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당면한 정세, 아니 아주 작은 사건 수준이라도 시민사회는 제대로 신속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 발생하는 상황들을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담론과 방법들을 적극적으로 선도적으로 제시할 필요가 있다. 끔찍한 범죄가 일어나는 사회적 요인들을 근본적으로 문제제기해야 하는데, 여타의 다른 사회운동들의 필요성에 대한 논리와 결합시킬 수 있다면 기꺼이 해야 한다. 이것은 범죄학의 영역이고, 이것은 여성학의 영역이며, 이것은 사회복지의 영역이니 나와는 상관없다는 식의 논리를 빨리 벗어나야 한다. 모든 것이 종합적으로 사고될 때만이 안전도 보장되는 이상적 사회가 도래할 것이다. 이 글은 2016년 5월 12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451 | 추천: 0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1. 내면에서부터 사회주의로 가자 여러모로 마음이 뒤숭숭하다 못해 예사로 불안하다. 환갑을 넘기도록 나이를 먹게 되면 도를 닦은 듯 품새를 취하면서 내면에서부터 여유가 있어야 하지 않나 싶지만, 세상사 위험천만한 급격한 변화의 힘으로 무의식을 꿰뚫고서 등 뒤에서부터 치고 들어온다는 것을 실감하고 나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진다. 젊은 때에는 내면의 성찰을 하면서 개인주의자가 될지언정, 늙을수록 사회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함께 살아가는 뭇 사람들의 삶에 안타깝다 못해 괜스레 눈시울을 적시게 되면, 결코 오만해서가 아니라 그 반대로 겸손해졌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늙을수록 죽음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서는 것이니, 그래서 자연적인 개별적 생명에 더욱 집착하기 마련이니, 집착이건 해탈이건 바탕에서부터 개인주의자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 싶지만 그게 아닌 것이다. 늙을수록 요구되는 그 해탈의 방향은 사회주의적인 방향이어야 한다.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도 마찬가지다. 일제 강점기 시절 시인 백석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시를 통해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데 지는 것이 아니다 /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라고 읊었는데, 그때 그 ‘세상’을 개인주의적으로 해석하면 그저 기생과의 사랑을 허용치 않는 편견의 세상으로 읽히지만, 사회주의적으로 해석하면 제국주의적인 강압의 자본주의로 점철된 나머지 근본적인 인간성을 파괴하는 세상으로 읽히는 것이다. 요즘 텔레비전에까지 소개되면서 유행하고 있는, 기본적인 효용만을 남기고 모두 버리자는 이른바 미니멀리즘적인 생활방식도 마찬가지다. 그 효용의 척도가 그저 개인적인 안심입명에 있다면, 그 생활방식은 탈속적인 개인주의에 불과하니 그것도 일정하게 조심해야 할 일이다. 그 효용의 척도를 모두가 단 한 번 주어진 인생을 함께 평등하게 소통하고 즐기는 것으로 설정한 것이라면, 거기에서 사회주의적인 함의를 찾아 읽어낼 수 있다면 미니멀리즘적인 생활방식을 권장해야 할 일이다. 2. 사회주의로 갈 수밖에 없다 다들 알다시피 얼마 전에 세계적인 바둑기사 이세돌이 <알파고>라는 인공지능과의 바둑에서 거의 완패하고 말았다. 세계인들 모두가 경악했다. 빠르고 정밀한 계산을 요구하는 영역을 기계에게 빼앗긴 지 오래되었지만, 원리상 결코 넘겨줄 수 없을 것이라 여겼던 자율적인 상상과 직관 및 반성의 영역마저 기계에게 넘겨주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동안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는 신뿐이었다. 그러나 신은 단 한 번도 객관적으로 실증된 적이 없는 말 그대로 마음이 만들어낸 유령에 불과했다. 그래서 더 섬뜩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알파고>라는 기계가 인간보다 우월하다는 것이 객관적으로 실증된 것이다.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인간의 지위가 순식간에 내려앉은 세계사적인 사건이 벌어진 탓에, 세계인 모두가 공포에 질린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본주의는 미래가 있는가』(이매뉴엘 월러스틴 외 지음, 성백용 옮김, 창비, 원전 2013 / 국역본 2014)라는 책에 실린 랜들 콜린스의 글 「중간계급 노동의 종말: 더 이상 탈출구는 없다」는 자본주의 400여 년의 역사는 기술에 의해 노동이 대체되어 온 역사였고 그것이 자본주의에 가하는 악순환의 위협을 방어하기 위한 역사였지만 결국 더 이상 방어책이 없고, 따라서 약 2040년 쯤 되면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붕괴될 것임을 역설하고 있다. 그러면서 “postcapitalism”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잠정적으로 쓰고 있다. 그것은 자본주의 이후의, 그 정체를 가늠하기 힘든 새로운 체제를 지칭하기 위한 것이다. 생산을 위한 기계 기술이 발전하게 되면 그만큼 인간은 덜 노동하게 되고 더 많은 여유 시간을 확보하면서 함께 향유를 누릴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나게 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이 원칙이 전혀 통용되지 않는다. 이 원칙을 현실로 바꾸고자 하는 데서 새로운 사회주의, 그 이념이 설립된다.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한, 기계 기술의 비용이 점점 커지면서 그에 따라 그 기계 기술 소유자의 수가 줄어들게 되고 따라서 생산수단의 독점의 폭이 커지면서 생산물에 대한 독점적 소유의 폭 또한 당연히 늘어나게 된다. 생산력이 발전함으로써 사회 전체의 부는 계속 늘어나지만, 그 부의 소유에서 제외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나면서 직장을 잃거나 할 일을 잃어 대다수의 구매력이 줄어들고 생산에서 경색이 일어나면서 더욱 더 많은 실업자들이 생겨나는 악순환이 거듭된다. 자본주의적인 재분배 시스템으로는 이 악순환을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복지국가 정책이었으나 복지국가가 사회전반적인 체제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자본주의 체제의 부작용을 메우기 위한 부수적인 일환으로 작동하는 한 경우에 따라 언제든지 약화되거나 심지어 폐기될 수도 있다. 20세기 말부터 21세기에 접어들어 이를 확연히 목도하게 된다. 사회 구성에 있어서 근본 문제는 재분배 시스템이다. 생산을 위한 고도의 기계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재분배 시스템을 둘러싼 사회적인 갈등과 대립의 폭과 깊이는 더욱 커지게 된다. <알파고>가 세계인들에게 준 충격의 숨겨진 본질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 생산을 위한 효율성은 기계의 몫이 될 것이다. 심지어 생산의 효율성을 위한 관리 조정마저도 인공지능이라는 기계의 몫이 될 것이다. ‘대책 없는’ 낙관주의를 내세워 말하자면, 이제 인간들은 그저 놀고먹기만 하면 된다. 어떻게 놀고먹을 것인가가 문제다. 모두가 평등하게 평화롭게 즐겁게 다양하게 새롭게 놀고먹을 수 있을 길을 마련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전면적이고 심오한 감각을 갖춘 인간들”(마르크스)이 예사로 평범한 인간으로서 서로 함께 즐길 수 있는 길을 마련해야 한다. 이렇게 생산의 대부분은 기계에게 맡기고 전면적이고 심오한 감각을 누리면서 놀고먹을 수 있는 길을 일컬어 새로운 사회주의라고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적인 재분배 시스템으로는 이렇게 놀고먹을 수 있는 길은 아예 불가능하다. 일체의 생산물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그것들을 생산하는 사람들에게 청구권이라는 이름으로 명령권을 행사하는 화폐, 이 화폐를 더 크게 하기 위한 자본, 모든 인간적인 다양성을 궁극적으로 바로 이 명령권 증식의 자본이라는 단일성을 위한 수단으로만 조직 관리하는 사회 및 국가의 구성, 이로써는 객관적으로 실증되고 있는 탈인간적인 기계기술의 발전과 그에 따른 자본 파괴의 악순환의 길을 막아낼 수도 역용(逆用)할 수도 없다. 그래서 세계적인 학자들이 “자본주의는 미래가 있는가?” 라고 물음을 던진 뒤, “미래가 없다. 불과 2,30년 안에 붕괴되고 말 것이다.”라는 분석적인 진단을 내리는 것이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3. 그런데 지금 우리는? 4·13 총선 결과가 야권분열에 의한 섬뜩한 예상과는 반대로 나타남으로써 그나마 안도의 호흡으로 몸을 추스르나 했더니, ‘구조조정’ 이야기가 나오면서 사회경제적인 삶이 이미 체험하고 있는 극도의 불안정성을 기정사실화 하면서 더욱 강화하는 쪽으로 치닫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노동의 유연화’를 내세운 미국 헤게모니 하의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 및 사회경제적인 확산이 2008년 대 금융위기의 철퇴를 맞은 이후 잠시 고개를 숙이면서 몸을 감추는가 보다 했더니 그게 아니다. ‘혁신’, ‘창조’, ‘유연화’, 심지어 ‘인공지능에의 대대적인 투자’ 등의 낱말들이 범람하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를 끝끝내 유지하고자 여러모로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이 낱말들이 암암리에 또는 명시적으로 지시하는 파편적이고 단기적인 실제의 구현이야말로 마치 오늘날의 불안정의 기조를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역량이고 최고의 가치를 지닌 양 예사로 통용된다. 하지만 그런 추세에 스며들어 있는 시간의 단편화를 넘어선 시간의 파편화에 대한 성찰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시간이 파편화된다는 것은 각자뿐만 아니라 사회 및 국가마저도 존재를 형성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간이 파편화된다는 것은 다소 구체적으로 말하면 결코 벗어날 수 없는 현존의 활동들이 파편화된다는 것을 뜻한다. 누구든 무엇이든 지금 여기에서의 현존이 축적되어 그 나름의 존재를 형성한다. 존재가 역사성을 띨 수밖에 없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그런데 현존이 번갈아 이어지긴 하되 파편적으로 이어지면 그 어떤 역사적이거나 서사적인 내용도 형성하지 못한다. 공시적으로도 그렇고 통시적으로 그럴 것인데, 모든 대상들과 모든 사건들이 뿔뿔이 흩어져 연기가 공중에 날리다가 곧 사라지고 마는 것처럼 되고 만다. 그 속에서 인간들 역시 마찬가지다. ‘종신 고용’은 이미 옛말이 되고 말았다. 해당 기업의 주식 값을 올리기 위해서는 그 기업이 혁신이니 구조조정이니 하면서 단기간의 이익을 올리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흉내라도 내야 한다. 모든 기업의 가치를 주식 값의 등락으로 환산하고자 하는 주주자본주의적인 논리 앞에서, 정부 책임자건 기업의 경영 책임자건 기업의 노동자건 속수무책의 무책임으로 일관하게 되고 그저 주어진 단편적인 현존에 매몰되어 우선 위기만을 모면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면 과연 어떻게 되는가? 이는 ‘전면적이고 심오한 감각을 갖추고서 모두가 함께 삶을 즐길 수 있는 세상’과는 정반대의 길임에 틀림없다. 2008년 대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그런 위기를 가져온 지역화 및 세계화와 전반적인 자유무역의 분위기가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그 여파로 여전히 세계 전체의 경제가 불황의 늪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고 한국경제 역시 마찬가지로 장기 불황의 조짐을 씻어낼 수 없다는 염려가 공인되다시피 하는데도, 이를 근본적으로 되돌릴 수 있는 길을 어느 누구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 그런데도 또다시 그 위기의 원인들을 단편적인 방식으로 반복할 수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양 하면서 장기적인 근본 대책을 전혀 강구하지 못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묵시록적인 의미를 던지는 것인가? 분명 사회적 생산력은 계속 신장되고 있는데도 그 과실에 대한 재분배의 관계가 날로 정체조차 불분명한 소수 독점적인 방향으로 악화되면서 이른바 생산력과 생산관계 간의 적대적인 모순이 더욱 격화되는 과정이 더욱 날카롭게 전개된다는 것은 오래지 않은 미래에 대 체제적인 격변이 일어나리라는 묵시록적인 계시를 함축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 격변의 과정이 얼마나 폭력적일지 어느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상황에서, 왜 하필이면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군사적 대립과 갈등은 이토록 섬뜩하게 전개되는 것인가? 난세를 태평세로 바꾸고자 한 ‘춘추공양학’으로 본 공자의 뜻이라도 다시 살려내어 깊이 새겨야 한다. 존재와 그에 따른 역사는 골동품처럼 취미 내지는 통치수단이 되어 거리에 나돌고, 문화는 거대한 풍선처럼 상품 내지는 순간적인 마취제가 되어 하늘을 난다. 시간의 파편화를 요구하는 사회경제적인 삶의 방식이 낳은 결과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참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조차 없는 존재의 섬뜩함’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게다가 허약하기 짝이 없는 통치 그룹이라니. 이 무슨 해괴한 사회국가적 불행이란 말인가. 도대체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통치 그룹인가. 이 글은 2016년 5월 4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427 | 추천: 0
정보배/ 출판 기획편집자 “아니, 어떻게, 이렇게 말도 안 되게 힘든 걸 다들 묵묵히 해왔단 거야?” 백일 갓 지난 갓난애를 둔 후배는 정말 다들 이런 식으로 아이를 키워왔단 거냐며, 왜 다들 아무 말도 안 한 거냐며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누군가 나에게 마흔 넘어 아이를 낳고, 피붙이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이 아이를 키우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적나라하게 말해줬더라면 나는 아이를 낳지 않았을 것이라며. 올해 초 한 방송사에서 방영한 <엄마의 전쟁>이라는 다큐가 SNS상에서 꽤 논란이 되었다. 양육에 대한 책임을 엄마에게 전적으로 지우고 ‘엄마 노릇’을 빼고는 엄마의 다른 정체성이나 자아를 완전히 무시하는 남편들과 그 점을 교묘히 부각시키는 제작진의 의도가 많은 여성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엄마가 된 여자는 다른 욕망이나 자아실현에 대해 말을 꺼내서도 안 되며, 엄마 노릇을 하느라 정신적, 육체적으로 혹사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 노릇을 훌륭히 해내야만 제대로 된 엄마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통념이 지배적이다. 여자는 엄마가 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엄마가 된 여자도 ‘엄마 노릇’으로 존재 가치가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다. 『엄마라는 직업』을 쓴 헴마 카노바스 사우의 말처럼, 여성의 정체성이 엄마가 된다는 사실만으로 규정되거나 사라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아직도 엄마가 아닌 여성에 대해서 불완전한 존재 혹은 뭔가 부족해서 불쌍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이 현실이다. 여전히 “나는 엄마가 되고 싶지 않다”거나 “엄마가 된 것을 후회한다”는 말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사회인 것이다. 왜 엄마는 ‘엄마 노릇’ 말고 개인의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하면 안 되는가? 왜 아이 양육과 관련한 여러 문제와 해결책에 아빠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는가? 얼마 전 『엄마라는 직업』을 출간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이런 문제에 대해 속 시원하게 엄마의 입장에서 대놓고 문제 제기하는 책이 별로 없는 데다, 이 책은 현실적으로 엄마 자신과 그 주변 인물, 기업, 정부가 어떤 현실적인 대책을 모색할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제안한다는 장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 예스24 사회에서는 여자들의 마음속에서 고동치는 주체인 ‘여자’를 배려하지 않은 채 그저 기존 구도 속에서 엄마 노릇을 하도록 하기 위한 교육법과 가치관을 퍼뜨리고 있다. 이 시대 엄마들은 한편으로는 자녀에게 절대적으로 헌신해야 한다는 전통적 사고방식을 물려받았고, 한편으로는 여자에게 적극적인 역할을 부여하는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샌드위치 세대’이다. 만약 누군가 이 사회에서 엄마가 되기로 결심했다면, 자녀를 돌봄과 동시에 자신과 일에 집중하면서 완벽한 가정을 일구어야 하는 ‘100점짜리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모순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사회적 통념에서 오는 불쾌감, 임신 때문에 직장에서 겪는 불이익과 불편, 가정과 직장 사이를 오가며 수많은 일을 처리해야 하는 어려움 등을 모두 감수해야 한다. 직업이 따로 있는 엄마는 (모성의 자연스러운 발현을 원하는) 자기 자신을 벗어던져야 하는 전통적 남성 위주로 짜여 있는 직업 세계의 구조와 맞닥뜨리면서, 가정과 일 모두를 잘해내고 있지 못하다는 죄책감과 불안감에 휩싸이게 된다. 사회에서 ‘모성’은 엄마들에게 ‘엄마 노릇’을 강제하고 싶을 때 가져다 쓰는 도구일 뿐이다. 육아휴직을 둘러싼 논의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직장 생활에서 아이의 양육과 관련한 이슈가 생겼을 때 엄마들은 능력 없고 민폐 끼치는 동료가 되지 않기 위해 다른 핑계를 대야 하는 형편이다. 아이 양육을 온전히 개인이나 가족 누군가의 희생에 의존해서 키워야만 하는 사회 시스템 속에서 저출산이라는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엄마라는 ‘직업’을 묵묵히 수행하는 여성들이 처한 개인적, 사회적 현실에 대해 제대로 말해야 할 때가 이미 지나도 한참 지났다. 더 이상 엄마들에게 모든 것을 떠안으라고 할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대답을 내놓아야 한다. * 덧붙인다면, 『엄마라는 직업』에서 저자가 말한 여러 대안들을 눈여겨봤으면 좋겠다. 특히 일과 가정을 배려한 정책 - 자녀를 출산하거나 입양했을 경우 남자도 유급휴가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거나, 특정한 기간이나 상황에서 자녀와 가정을 돌볼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유연한 노동시간을 기업이 운용하도록 하거나, 양육비의 적극적 지원, 어린이집이 고품질의 기준을 적용할 수 있도록 하는 관찰과 감시가 정책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는 등의 현실적인 제안들은 지금 한국 사회에 꼭 필요한 것들이라고 본다. 이 글은 2016년 4월 28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380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