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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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강대중(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윤동호(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이동우(변호사),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장은주(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1. 인간 삶에서 기본이 되는 두 축은 에너지와 소통이다. 에너지는 인간 삶의 필요조건이고, 소통은 인간 삶의 충분조건이다. 2. 개인에게서 에너지는 생명력으로써 드러나고, 사회에서 에너지는 생산력으로써 드러난다. 각자는 사회적 존재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개인적 생명력은 사회적 생산력의 요소적인 원천으로 작동하고, 사회적 생산력은 개인적 생명력의 지평적인 지반으로써 작동한다. 하지만 각자가 사회적 생산력과 자신의 개인적 생명력이 정규적인 방식으로 비례한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사회 체제의 구조와 성격에 따라 그 비례 관계는 확 달라진다. 심지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이 오히려 자신의 생명력을 훼손시켜 약화시킨다고 여길 수도 있다. 사회적인 평등과 불평등의 지수는 사회적 생산력이 사회 구성원들의 생명력을 강화하는 데 얼마만큼 고르게 기여하는가에 달려 있다. 이는 당연히 분배와 관련된다. 사회적인 평등과 불평등은 개인적 생명력을 원천으로 해서 유지되는 사회적 생산력의 결과로써의 열매를 얼마만큼 고르게 분배하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다들 알다시피, 이를 정치경제학에서는 생산 관계라고 일컫는다. 사회적 생산력을 강화하는 데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개인들의 생명력이지만, 이러한 생명력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에너지 중심의 기계기술의 발명과 발달이 요구된다. 증기기관, 엔진, 모터 등으로 이어지는 에너지 중심의 기계기술의 발달은 그 이전의 사회적 생산력과 아예 비교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엄청난 속도로 사회적 생산력을 높였다. 그 과정에서 각자가 지닌 생명력은 사회적 생산력의 근본 원천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사회적인 기계기술을 활용하기 위한 보조적인 수단인 양 취급되었다. 그것은 자본주의라는 왜곡된 사회 체제의 구조와 성격에 의해 사회적 생산력이 배타적 이윤의 창출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쪽으로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이윤과 기술이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결합되어 과잉의 속도로 상호상승의 긍정적 피드백의 과정을 추진하는 과정을 거쳤던 것이다. 모터가 쾌속으로 돌아가는 그 모양으로, 사회 전체가 이윤 창출을 위해 최대한 높은 속도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과잉의 사회적인 속도에 휘말려버린 개인들 각자도 자신의 생명력을 오로지 배타적인 이익을 위한 방향으로 투입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이를 활용하여 사회 전체는 더욱 더 이윤을 중심으로 과속하게 되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각자는 자신의 생명력을 각자의 존재가 지닌 의미와 가치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활용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기회를 박탈당하고 그 방향이 비틀어진다. 그럼으로써 심지어 각자가 자신의 생명력을 강하게 발휘하여 활용하는 만큼 오히려 자신의 존재가 지닌 의미와 가치를 상실하는 쪽으로 치닫게 된다. 개인의 특수성에 따라 이러한 사회 전체의 방향을 역행하는 경우도 물론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심지어 그렇게 역행의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개인들의 활동마저도 이윤과 이익, 즉 부를 중심으로 한 사회 전체적인 흐름에 다시 흡수되기 일쑤인 것이다. 3. 사회적 생산력과 개인적 생명력은 개인과 사회가 선순환의 상호작용을 통해 그 나름의 존재 의미와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일 뿐, 그 자체 목적은 될 수 없다. 당연하다시피, 개인들이 모여 사회를 형성한다. 사회의 일차적인 역할은 개인들 간의 상호부조를 통해 각자의 생명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역할만으로는 제대로 된 사회로써 기능을 다한다고 할 수 없다. 사회의 진정한 역할은 개인들 간의 수평적인 상호표현과 상호이해를 통해 각자가 타인들과 수행하는 소통의 폭을 확대하고 깊이를 심화시키는 데서 성립한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사회는 소통의 기술들을 개발해 왔다. 말과 글, 전설과 신화, 축제와 종교, 시와 음악과 회화와 조각, 연극과 오페라, 필사와 인쇄, 사진과 영화, 우편과 전화, 신문과 잡지, 라디오와 텔레비전, 컴퓨터와 인터넷, 인공위성과 스마트폰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술들을 개발하여 발전시키고 활용해 왔다. 그 중에 뺄 수 없는 사회적 소통의 기술이 정치다. 법치와 민주주의를 개발하고, 보편적인 국민 교육을 개발하고, 관료제적인 행정을 개발했다. 이들 소통의 제반 기술들을 조금만 생각해 보면, 소통이 에너지와 얼마나 다른가를 쉽게 알 수 있다. 에너지 기술에서 파악할 수 있듯이 에너지는 수단이다. 이에 반해, 여기 소통의 기술들을 통해 얼마나 다양한 인간 삶의 내용들이 흘러넘치는가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듯이, 소통이야말로 그 자체로 인간 삶의 의미와 가치를 실현해 나가는 활동이며 목적이다. 그런 점에서 에너지가 인간 삶의 필요조건인 데 반해, 소통은 인간 삶의 충분조건인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내가 얼마나 어떻게 수평적인 동등성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다양하게 그리고 깊이 있게 소통하는가에 따라 내 존재의 의미와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다. 사진 출처 - 허핑턴포스트 4. 그러고 보면, 각자가 자신만의 배타적인 내면적 고유 영역을 형성하여 누리는 것만으로는 결코 인간다운 삶을 누린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일러주는 것이 소통이다. 왜곡된 사회 체제로 인해 사회 전체가 이윤과 이익 즉 부를 중심으로, 게다가 과잉의 속도로 진행되다보니, 각자가 자기 나름의 배타적이고 내면적 고유 영역을 형성하는 것이 마치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데 긴급한 요청인 것처럼 여겨지게 되고, 그런 탓에 배타적인 자신만의 내면적 고유 영역의 확보와 향유야말로 인간다운 삶의 의미와 가치를 꾸려나가는 외길인 양 오인되었을 뿐이다. 이는 배타적인 부를 중심으로 사회가 굴러가는 것과 더불어 사회적으로 참다운 소통의 길이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음을 일러주는 또 하나의 사회적인 증좌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각자가 사회적으로 배타적인 부를 추구하는 것과 자신만의 배타적인 내면적 고유 영역을 추구하는 것이 비록 서로 대립된다고 할지라도 일종의 동전의 양면처럼 작동하면서 서로에 대해 알리바이 역할을 할 소지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의 배타적이고 내면적인 고유 영역을 확보하고자 할 때, 그 배타성 역시 배타적인 부와 연결되면서 왜곡되어 나타나는 것이 권력이다. 철학자 하버마스가 적절히 제시한 것처럼 부와 권력은 철저히 왜곡된 소통의 방식이다. 부와 권력은 배타적인 상대적 격차를 전제로 해서 성립한다. 부와 권력이 사회적 소통의 핵심적인 수단으로 작동할 때, 진정한 소통을 중심으로 한 인간다운 인간의 삶을 사회적으로 구현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 5. 제대로 된 진정한 소통은 사람들 간에 수평적인 동등성을 바탕으로 다양한 폭과 심오한 깊이를 일구어 낼 수 있을 때 성립한다. 이러한 진정한 소통을 위해서는 부와 권력을 중심으로 한 왜곡된 소통을 몰아내야 한다. 이를 위해 우선 필요한 것은 사회적 생산력에 의거한 각종 에너지를 평등하게 분배하는 것이다. 에너지가 소통의 필요조건이기에 에너지의 평등한 분배가 없이는 그런 만큼 그렇게 불평등하게 배분된 에너지를 사회적 기반으로 삼아 배타적인 부와 권력이 소통의 핵심 수단으로 작동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서로 소통할 수 있는 폭과 깊이를 지닌 소통의 내용들을 최대한 다양하게 개발하여 서로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배타적인 부와 권력에 대한 욕망보다 상호 동등한 수평적인 소통을 통해 서로의 존재를 한껏 공유하여 발전시키고 그러한 발전을 향유하는 데 대한 욕망이 사회적으로 더욱 강화되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일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 바로 통치 행위다. 이러한 일을 도모하기 위해 모두가 민주주의 제도라는 사회정치적인 소통의 기술을 개발했고, 이를 통해 모두가 진정한 소통을 더 효율적으로 잘 하기 위한 새로운 민주적인 소통을 통한 통치 행위를 설정했고, 또 이를 위해 민주적인 선거 제도를 통해 임시로 통치 행위를 맡아 진정한 사회적 소통이 확산되고 더욱 강화될 수 있도록 책임과 의무를 다할 수 있는 자들을 선발하여 일을 맡긴 것이다. 그런데 만약 통치 행위를 부와 권력을 중심으로 한 철저히 왜곡된 소통의 방식을 더욱 강화하고 심화시키는 데 활용한다면, 그러한 통치 행위를 하는 자나 집단은 사회적인 이른바 공공의 적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그러한 행위를 하는 자나 집단은 사회적으로 철저하게 파문(excommunication, 소통 바탕으로 내몰아 버림)시켜야, 즉 소통 공동체에서 아예 제외시켜야 마땅하다. 말하자면 ‘민주주의적인 파문’을 단행해야 한다. 수단일 뿐인 에너지를 인간 삶의 근본으로 삼고, 게다가 불평등하게 편중된 배타적인 에너지의 결과물인 배타적인 부와 권력을 인간 삶의 근본으로 삼아, 진정한 인간다운 삶인 진정한 소통을 백안시하다 못해 아예 망각케 만드는 자들과 그러한 자들을 용인하는 사회는 근본적으로 반민주적이며 범죄적인 사회가 아닐 수 없다. 그러한 사회를 만들어 강화해 온 역사는 반민주적이고 범죄적인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민주주의적인 파문’을 통해 이러한 범죄의 사회와 역사를 단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426 | 추천: 0
신하영옥/ 여성운동연구활동가 요즘 들어 페미니즘이 세간의 화두가 되고 있다. 페미니즘 학교는 연일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고, 서점에서도 페미니즘 관련 서적이 갑자기 많이 팔리고 있는 듯하다. 여기엔 소위 ‘메갈’, 즉 ‘메르스갤러리’ 사안들이나 ‘강남역 살인사건’ 등이 도화선이 된 것으로 보인다. ‘미러링’이 도덕적이냐 비도덕적이냐의 논쟁에서부터 촉발된 ‘메갈’을 둘러싼, 그리고 강남역 사건을 둘러싼 다양한 반응들, 그리고 무엇보다 여성들 공통의 두려움과 무기력으로부터 출발된 분노와 행동의 욕구가 페미니즘 1세대인 여성운동‘권충’, 그리고 2세대인 영페미니스트들과 다른 좀 더 공세적이고, 은유적이며, 해학적인, 그리고 직접적이며, 솔직한 대응방법들을 통해 더욱더 확산일로에 있는 듯이 보인다. 나는 소위 ‘권충’-운동권-세대이다. 때문에 처음 메갈에 대한 이런저런 소문들, 평가들을 들었을 때, 익숙하지 않은 방식에 좀 놀라고, 좀 흥미롭고 그러나 대체로 무관심했었다. 그러나 ‘왕자는 필요 없다’는 티셔츠를 입은 성우에 대한 부당한 처우에 대한 정의당 사태가 나고부터 이런 새로운 페미니스트들의 등장과 행동양식은 나의 관심의 중심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관심 있게 지켜보았던 진보정당에 대한 실망과 더불어. 그러나 새로운 페미니스트들 스스로 ‘권충’을 만나기를 거부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에 만나고는 싶었지만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없었다. 그런데 어제 그들을 만났다. 물론 메갈 측 친구들은 아니었지만 20대 페미니스트들로 구성된 ‘페미당당’ 회원들이었다. 페미당당은 한국에 페미니스트 정당을 만들고자 하는 젊은 여성들로 구성된 정당준비모임이다. 이들이 여성운동이나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지만, 주로 학습으로, 그리고 사이버 상에서 ‘트펨’-트위터 페미니스트-으로 활동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고, 강남역 사건을 계기로 뭔가 움직여야 한다는 자각을 통해 ‘거울행동’-영정만한 크기의 거울을 들고 서로 비추기-을 시작으로 현재 10월 ‘임신중단’, 즉 ‘낙태’ 합법화 시위를 지난 일요일과 오는 일요일에 진행하기까지 되었다. 여성단체가 아니고 정당인 이유는 ‘대의민주제’에서 정당이 지닌 정치적 힘, 권력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성정당을 만들고자 하는 이유도 바로 정치적 힘, 권력을 여성들이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그러한 이유는 기존의 정당들이 어느 누구도 여성의 삶과 직결된 여성문제를 주요한 이슈로 제기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남성들에 비해 그 또래 여성들이 ‘탈조선’ 하는 것이 일종의 유행처럼 나타나는 것도, 이 땅에서 여성이 살아가기가 남성에 비해 너무나 힘들다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여성이슈, 낙태나 성폭력, 성매매, 일상의 여성혐오나 비하, 증오적 여성대상 범죄-사이버상의 욕설 포함-는 여성의 일상의 삶을 무력화시킨다. 일상이 매번 두려움이나 경계, 혹은 비하라는 수모의 연속이라면 그것은 폭력의 일상화를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들의 문제이자 여성이슈들은 여성들의 일상을 폭력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일상적인 일상으로 되찾아오는 문제가 된다. 삶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여성문제가 기성정당들에서는 그 친구들의 말을 빌려오면 ‘부록’처럼, 그리고 선심 쓰듯 던지는 것이 고작인 것이다. 이러한 현실이 이들에게 정당을 만들고 싶다는 욕망을, 행동을 가져오게 했던 배경이다. 지금 여성정당에 대한 논의는 여러 군데서 나오고 있는 듯하다. 경남지역에서도 기존 정당에서 여성의원-지방 및 국회-의 경험을 가진 일군의 집단들이, 여성의원들의 적극적인 활동에도 변하지 않는 남성 중심적, 권위적, 비민주적인 정당문화와 구조를 그 내부에서 깨는 것에 한계를 느끼고 여성만의 독자적인 정당을 만들어야 할 필요성에 대해 조심스럽게 논의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동안 여성정치세력화가 정치적인 민주화에 얼마나 기여했는가? 를 중심으로 고민을 해오던 나는 문제는 여성정치세력화의 전략이나 여성의원들의 남성적인 정치문화가 아니라, 정당문화와 구조 자체가 남성 중심적이라는 결론에 맞닥뜨리고, 여성정치가 기존의 정치판에 ‘끼어들기’를 통해 정치문화에 대한 ‘새판 짜기’는 요원할 뿐이라는 답답함을 안고 있었다. 새판을 짜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럼 무엇이어야 하는가? 여성의원들의 수가 임계점을 초과한다면 권위적이고 비민주적인 정당과 정치문화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아니면 자질을 갖춘 여성의원들이 늘어하는 것이 필요한가? 그렇게 된다면 변화는 가능할까? 아니다. 그런 자질을 갖춘 여성의원들이 정치의 장에 진입하는 것에서 나아가 그 정치적 생명을 연장 및 유지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가능한가? 라는 질문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사진 출처 - 국민일보 스웨덴을 떠올리면 양성평등이라는 말이 떠오르고 대체로 여성의 지위가 남성과 대등하다고 생각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스웨덴에, 어쩌면 스웨덴이기 때문에 여성정당 'FI(Feminist Initiative)' 가 만들어지고 유럽의회에 진출까지 했다. 물론 10년이라는 긴 시간을 인고로 보내야 했지만 말이다. 2005년에 준비와 창당에서 의회진출까지 10년이라는 내홍과 외부위협을 견뎌냈다. 이들의 창당기에 관한 영화에서 나타난 FI회원들에 대한 남성들의 직/간접적인 온갖 위협들을 보면서 ‘스웨덴도 저러는 구나’ 했다. 때문에 ‘페미당당’ 회원들이 ‘염산테러’라는 극단의 위협을 예견하는 것이 과장은 아니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러한 위협과 두려움 속에서도 그러나, 이들은 여전히 활달하고, 에너지가 넘치고, 가부장문화를 해학과 풍자로 비틀어 웃을 줄 안다. 이 여성들을 만나고 한편 미안함과, 한편 가능성에 대한 희망, 구체적으로는 이미 페미니스트 정당이 창당되고 선거에 뛰어드는 모습을 그려본다. 이를 위해 구세대이자 ‘권충’ 들인 우리의 모임과 20대 페미니스트인 그들의 모임의 연대방안을 모색하기로 했다. 우리는 우리의, 그들은 그들의 경험과 방법을 서로에게 나눔으로써 결국엔 더 큰 ‘우리’가 되는 그러한 과정을 가지기로. 벌써 가슴이 뛴다. 어느 총선에선가, 혹은 지방선거에서라도 ‘페미당당’이란 정당의 이름이 투표용지에 기입되고, 누군가 찍는다는 그런 상상만으로도 그렇다. 이슈는 당연 낙태를 포함한 모든 여성들의 신체적 권리가 구조적으로 법적으로 실현되도록 하는 것들이 될 것이다. ‘남자답다’라는 말이 적극성과 과감성을 대표하지 않고 ‘여성답다’라는 말이 수동성과 소극성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말들이 사라져버린 어느 날, 여성주의, 페미니즘도 사라져 버릴 그 날, 그 날이 더디더라도 만들어지고 있다. 과감성과 적극성이 ‘여성답게’로 표현되는 과정을 통해. 이 글은 2016년 10월 19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629 | 추천: 0
에너지 강국으로 부상하는 이스라엘 홍미정/ 단국대 중동학과 조교수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이 가자를 포위하고, 공격하는 진정한 이유를 가자 연안에 매장된 석유와 천연가스를 장악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2019년부터 요르단으로 수출하게 될 천연가스는 팔레스타인 가자 연안을 포함하는 지중해안의 레비아탄 유전에서 생산되는 것이다. 요르단에서 가장 강력한 야당으로, 무슬림형제단 분파인 이슬람 행동전선(IAF)은 이스라엘이 통제하는 지중해 수역에서 생산되는 천연가스 수입협정을 거부하면서 “이 천연가스는 팔레스타인 해역에서 훔친 것이고, 이 협정은 시온주의자 적들에게 의존하는 것이며, 시온주의자들의 팔레스타인 점령을 지지하는 것이다.”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레비아탄 유전지대 사진 출처 - offshore-technology.com 2016년 9월 30일 이스라엘 천연가스 수입협정체결을 반대하는 요르단인 시위대 약 2천 5백 명 정도가 암만 중심가에서 행진하였다. 이것은 최근 몇 년 사이에 조직된 시위들 중에서는 가장 규모가 컸다. 시위대는 “요르단 국민들은 가스협정 파기를 원한다. 요르단 시민들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자금을 시온주의자들에게 제공하지 말 것, 시온주의자 적들로부터 가스를 수입하지 말 것”이라고 쓴 깃발을 들었다. 10월 3일 이슬람행동전선과 노동조합 등 시위조직자들은 요르단 시민들에게 천연가스 수입 협정체결에 맞서 저녁 9시와 10시 사이에 각 가정의 소등을 요청하였다. 이번 대중시위는 암만 도심지뿐만 아니라, 북부의 이르비드와 남부의 케락 등 주요 도시들에서 조직되었다. 요르단 시민들 중 50% 이상이 팔레스타인 출신이며, 이들은 주로 대도시 지역에 거주한다. 이번 요르단 대중시위는 2016년 9월 26일 요르단 국영전기회사와(NEPCO)와 미국회사 노블에너지(Noble Energy)가 체결한 천연가스 거래 협정을 반대하기 위한 것이다. NEPCO는 요르단 전체 수요 전력의 85%를 생산하며, 노블에너지는 지중해안 최대유전 지대인 레비아탄 유전 지분 39.66%를 소유한, 이 유전개발과 운영을 책임진 회사다. 노블에너지는 “NEPCO와의 계약은 15년 동안 매일 3억 입방 피트(850만㎥)를 제공하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 양은 NEPCO가 필요로 하는 액화 천연가스의 40%를 충족시킬 것이다. 이 협정은 2019년부터 발효될 것이고, 100억 달러 정도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6년 10월 3일 대규모 시위의 대응으로, 요르단 정보장관 무함마드 모나미는 요르단 TV에서 “이 협정으로 요르단은 에너지 예산을 매년 6억 달러 정도 절약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스라엘에 의존하지 않을 것이다. 요르단의 이스라엘 천연가스 구입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영토점령을 지지하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다.”라고 항변하였다. 그러나 요르단 작가 히삼 부스타니는 “적의 가스는 점령을 의미하며, 이스라엘로부터 오는 ‘도둑질한’ 천연가스는 국제가격보다 더 비싸다”고 주장하였다. 이슬람행동전선, 세속주의자와 노동조합 등이 주도하는 이 협정거부 움직임이 쉽게 잦아지지는 않을 것 같다. 2010년 발견된 레비아탄 유전은 최근 10년 동안 발견된 세계 최대의 연안 가스전으로 알려졌다. 미국회사 노블에너지가 레비아탄 유전 지분 39.66%, 3개의 이스라엘 에너지 회사들, 델렉 시추가 22.67%, 아브네르 오일 탐사가 22.67%, 레티오 오일 탐사가 15%를 각각 소유하고 있으며, 이들이 노블에너지가 주도하는 레비아탄 컨소시엄을 구성한다. 올해 가스 협정 체결에 앞서, 2014년 9월 3일 NEPCO는 레비아탄 유전에서 천연가스를 매일 3억 입방 피트씩 15년간 수입하기로 노블에너지와 양해각서(MOU)를 체결하였다. 이 MOU에서 NEPCO는 15년 동안 총 150억 달러를 레비아탄 컨소시엄에게 지불하기로 되어있다. 총액 중 56%인 84억 달러는 로열티와 법인세 등의 명목으로 이스라엘 정부에게, 49억 달러는 미국회사 노블에너지와 델렉 시추 등 3개의 이스라엘 에너지 회사들에게, 17억 달러는 채굴과 운영비용 등으로 할당 되었다. 그러나 2014년 12월 요르단 하원은 이 MOU에 반대하는 결의안을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시켰다. 2016년 11월 7일 새로 출범하는 요르단 의회에서도 지난 9월 체결된 가스협정에 대한 상당한 논란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2016년 9월 26일, 이스라엘 에너지장관 유발 스테이니츠는 “이 가스협정은 극히 중요한 국가의 업적이며, 이스라엘과 요르단 사이의 유대와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강화하는 중요한 초석”이라고 밝혔다. 게다가 이스라엘 회사 델렉 시추의 최고 경영자 요시 아부는 “이 협정 체결은 역사적인 사건이며, 레비아탄 유전을 에너지 지도에서 중요한 행위자로 세운다. 레비아탄 컨소시엄은 이집트, 터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포함하는 추가적인 거래를 추진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은 미국회사 노블에너지가 주도한 컨소시엄을 통하여 역내에서 처음으로 요르단과 천연가스 거래 협정을 체결하였고, 현재 터키, 이집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EU 등과 가스 수출 협상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제 이스라엘은 에너지 자급자족을 넘어선 수출국으로 탈바꿈하게 됨으로써 역내 에너지 강국으로 전환될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이스라엘은 천연가스와 석유가 매장된 점령지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배권을 더욱 확장하고, 팔레스타인인 출입금지정책과 이스라엘 정착촌건설 등을 통해서 영해와 영토에 대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주권을 박탈하는 정책을 한층 강화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이 글은 2016년 10월 12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556 | 추천: 0
김재완/ 방송대 법학과 교수 우리나라의 고등교육은 약 87%에 이르는 사립대학이 담당하고 있다. 국가의 고등교육정책이 공적부담을 통한 공교육 중심보다는, 민간재원에 바탕을 둔 사학중심으로 행해진 것에 따른 결과이다. 사학의 양적 팽창과 사학의 높은 의존도는 국가로 하여금 학교법인의 관리·감독을 무디게 만드는 결과를 빚어냈다. 이러한 방임적 사학중심의 교육정책은 사립대학을 운영하는 학교법인으로 하여금 사적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고, 운영자는 학교를 공교육의 현장이 아닌 자신의 전유물이자 왕국으로 여김으로써 온갖 비리를 저질렀다. 그 중심에 상지대가 있고, 상지대 사태는 국가의 그릇된 고등교육정책과 그 운영이 공교육을 어떻게 무너뜨리고 있는지를 적확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1993년 당시 이사장인 김문기는 공금 횡령과 부정입학 관련 금품수수 등의 비리로 구속되어 상지대에서 물러났고, 상지대는 임시이사 체제로 운영되었다. 그러다가 2003년에 새로이 정식이사가 선출되면서 비리재단과의 연결고리를 끊어냈다. 그러나 김문기 측은 임시이사들이 정식이사를 선임하는 내용의 이사회결의가 무효임을 확인해달라는 청구의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전원합의체판결로 “임시이사들이 선임되기 전에 적법하게 선임되었다가 퇴임한 최후의 정식이사들(종전이사)에게 이사회결의의 하자를 다툴 소의 이익이 있으며, 임시이사는 임시적으로 그 운영을 담당하는 위기관리자로서, 일반적인 학교법인의 운영에 관한 행위에 한하여 정식이사와 동일한 권한을 가지는 것으로 제한적으로 해석해야 하므로 정식이사를 선임할 권한은 없다.”고 판결(대법원 2007.05.17. 선고 2006다19054 전원합의체 판결 참조)함으로써 비리재단이 복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게 된다. 이후 교육부 사학분쟁조정위원회는 상지대의 분규사태를 정상화하는 방안으로 정식이사 8명과 임시이사 1명을 선임했는데, 이사 9명 중 4명은 김문기가 추천한 인물로 구성되었다. 교육부가 상지대의 정상화방안이라는 미명하에 비리재단을 복귀시킴으로써 진정한 정상화를 갈망하는 학내 구성원들의 반발을 불러왔고, 오히려 상지대는 더욱 비정상화의 길을 걷게 된다. 이에 교수협의회와 총학생회 등 상지대 구성원들은 교육부를 상대로 이사선임처분을 취소하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에서 1심과 2심은 “학교법인을 운영하는 이사의 선임으로 교수와 학생 등 대학구성원들의 학교의 운영이나 학문의 자유 등에 관한 권리나 이익이 침해된다고 볼 수는 없으며, 설령 침해될 가능성이 있다 하더라도 이는 지극히 간접적일 수밖에 없고, 또한 학교의 구성원일 뿐 학교법인의 운영에 직접 관여할 수 있는 지위에 있지 않은 원고들로서는 이사선임과 관련하여 종전이사의 지위와 같은 지위에 있다고 할 수 없으므로 학교구성원인 원고들이 종전이사에 준하여 이사선임처분에 대하여 다툴 법률상 이익을 가진다고 볼 수는 없다.”고 판결(서울고등법원 2012.07.11. 선고 2011누40402 판결 참조)함으로써 비리재단의 복귀는 법적으로도 완결되는 듯 했다. 그러나 2015년의 대법원판결에서 서울고법판결을 파기환송함으로써 대반전이 이루어졌다. 이 판결의 핵심은 “임시이사제도의 취지, 교직원·학생 등의 학교운영에 참여할 기회를 부여하기 위한 개방이사 제도에 관한 법령의 규정 내용과 입법 취지 등을 종합하여 보면, 사립학교법과 그 시행령 및 법인 정관 규정은 헌법 제31조 제4항에 정한 교육의 자주성과 대학의 자율성에 근거한 대학교 교수협의회와 총학생회의 학교운영참여권을 구체화하여 이를 보호하고 있다고 해석되므로, 교수협의회와 총학생회는 이사선임처분을 다툴 법률상 이익을 가진다.”는 것이다(대법원 2015.07.23. 선고 2012두19496, 19502 판결 참조). 이로써 대학교 운영의 주체, 다시 말해 학교민주주의의 주체는 근본적으로 대학구성원인 교수와 학생들이라는 사실을 재차 확인해 주었다. 사학의 비리재단에 의해 촉발된 분규로 최대의 피해를 입는 당사자는 대학구성원인 교수와 학생들이다. 대학의 진정한 정상화와 민주화를 부르짖는 교수들과 직원들은 부당한 파면과 해고 등으로 내몰리며 교권을 유린당하고 비리재단의 입맛에 맞는 이사와 교수, 직원들로 그 자리가 메워짐으로써 학생들의 정상적인 수업권은 침해당한다. 더욱이 교육부의 인위적인 대학구조조정의 칼날은 상지대 구성원들의 교육인권을 갈가리 찢어내고 있다. 교육부의 대학구조조정은 학령인구감소로 인해 대학입학정원이 줄어들 것이므로, 그 불균형한 수급을 맞추기 위해 인위적으로 대학숫자를 줄이고자 하는 것에 있다. 그 수단으로 교육부가 설정한 기준에 의한 대학평가를 통해 부실대학을 지정하고 지정된 대학에 대한 정부재정지원 및 사업의 제한, 국가장학금 수혜와 학자금 대출의 제한으로 고등교육시장에서 전면 퇴출시키는 방법을 사용한다. 이러한 대학구조개혁평가라는 미명하에서 상지대는 D등급을 받아 부실한 대학으로 지정되고 말았다. 파행적이고 부실하게 된 대학운영의 책임이 비리재단인 학교법인의 그릇된 운영으로 인해 빚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실질적인 내용과 과정은 무시한 채 정부재정지원을 중단함으로써 대학주체인 교수와 학생들의 교육인권을 벼랑으로 내몰고 있다. 고등교육에 있어 사학의 양적 팽창과 이에 대한 높은 의존도는 분명 정부의 고등교육정책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에 필연적으로 사악한 비리사학이 양산되었고, 고등교육을 위한 시민의 지출비용은 가파르게 상승하기만 해왔으며 고등교육은 그 본질적인 의미를 잃어버린 채 전문기술 내지 직업학교로 전락하고 있는 등의 총체적인 고등교육 황폐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전적으로 그에 대한 책임은 교육의 공공성을 방기한 국가에게 있음에도, 그 피해와 책임은 고스란히 대학구성원과 시민에게 지워지고 있다. 인제대 고영남 교수의 지적처럼, 공적인 학교제도를 보장하고 일정한 범위에서 사립학교의 운영을 감독·통제할 권한과 책임을 지는 교육부가 대학구조개혁평가를 통해 자신의 부작위와 무능을 교육주체들에게 떠넘기고 있는 것이다. 이제라도 국가는 고등교육정책의 나침반을 교육의 공공성 강화라는 지점으로 되돌려 놓아야만 한다. 현재와 같은 인위적인 대학구조조정의 수단을 폐기하고, 대학의 자율성과 대학주체의 교육인권을 드높이기 위한 고등교육의 본질을 되찾는 방안을 모색하고 수립해야 할 것이다. 그 출발점으로 사학의 비리재단부터 철저하게 퇴출시켜야만 한다. 상지대가 보여주고 있는 비리재단과의 처절한 싸움과 그 결과는 고등교육의 정상화와 공공성 강화의 향방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바로미터이다. 상지대의 정상화 투쟁은 비단 상지대 자체의 문제만이 아니라 고등교육, 더 나아가 전반적인 교육정책에서 교육부와 학교법인의 독단적인 지배 권력으로부터 잃어버린 교육주체들의 교육인권을 되찾아 주는 상징적인 깃발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깃발이 모든 교육현장에서 나부껴야만 교육복지를 통한 시민복지국가로 성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2016년 9월 28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538 | 추천: 0
정재원/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인터넷 문화에 익숙한 층들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일이기는 하지만 최근 가장 뜨거운 이슈 중 하나가 바로 메갈리아/워마드와 관련되어 촉발된 소위 ‘여혐/남혐’ 논쟁이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현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동안 그 어떤 심각한 문제들에 대해서도 커다란 저항을 하지 않았던 남성들이 유독 이 상황에 있어서는 매우 강한 저항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 예로 메갈리아 등의 운동을 맥락적으로 이해하고 지지한다고 표명한 한 정당 내 모 위원회와 한 진보적 주간지, 그리고 일부 지식인들에 대해서도 무차별적인 공격이 이어지고 있는데, 각각 대규모 탈당과 절독자들이 급증하는 등 그 어떤 사안에서조차 쉽게 행동하는 것을 주저했던 남성들이 대거 행동으로 나선 것은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반발은 한 마디로 기득권을 지키려는 이들의 역겨운 모습이 드러난 것에 불과하며, 한국 사회 진보를 가로막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지점이 어디인지를 보여 주는 사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러한 여성 혐오 현상은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극단적으로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적인 한국 사회에서 극단적으로 억눌리고 희생되어 왔던 여성들이 조금씩 남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시작하자 그동안 기득권을 누려 왔던 많은 남성들이 강하게 반발해 온 역사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양성 간 불평등을 부추기는 법과 제도, 관습과 문화들이 많지만, 특히 군가산점제나 여성 징병제 등 남성들이 피해를 입고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군대와 관련된 사안에 있어서는 그 어떤 합리적 논의가 불가능할 정도로 반발이 거셌다. 사진 출처 - 미디어오늘 1990년대 중반 이후 온라인 문화가 발달하면서부터는 사실상 남성/여성을 근거로 비판할 사안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온라인 댓글 문화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남성들은 각종 여성비하적 여성혐오적 용어를 만들어 내며 여성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같은 사안에서도 남성에게는 별다른 비난이 가해지지 않고 혐오와 비하의 용어도 붙여지지 않는 반면, 여성에게는 엄청난 비난이 가해지고 신상이 털리거나 오랜 기간 동안 집요한 공격의 대상이 될 정도로 그 어떤 사회적 불만의 표현보다 훨씬 더 강한 어조로 반발을 보여 왔다. 심지어 일부 사안들의 경우 직접적 협박도 서슴지 않는 등 매우 폭력적인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러한 한국 고유의 극단적 경쟁 사회가 19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의 영향 하에서 한층 더 불안정해지면서 특히 하층 계급 남성들의 불만은 지배 권력, 자본 권력으로 향하지 않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게 향하게 되었는데, 남성기득권을 제약하는 가장 큰 집단인 여성을 향한 적대감은 한층 더 강하게 나타났다. 특히 전반적인 여권의 상승으로 인해 이러한 불만은 하층계급 남성만이 아니라 충분한 부와 권력을 누리고 있는 상층과 중간계급 남성들에게서도 나타났는데, 바로 이들이 이데올로그가 되어 이러한 불만을 조직화하고 여론화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굳이 강남역 살인 사건과 같은 극단적 사건이 아니더라도 이제 여성혐오 문제는 이주자들에 대한 적대와 혐오에서 보이는 파시즘적 양상과 유사한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고,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극우적인 자들을 제외하더라도 많은 이들의 이러한 격렬한 반발은 메갈리아 등으로 상징되는 일부 페미니스트 집단들의 글쓰기나 운동 방식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 자체까지 부정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부 논자들이 이야기하듯, 전체적인 맥락에 대한 치밀한 분석 없이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으로 이들을 ‘여자 일베’라고 칭하는 데에는 반대하지 않을 수 없다. 일베로 상징되는 남성우월주의적/여성혐오적 발언과 행동이 난무해도 아무런 제재도 반발도 없는 끔찍한 상황에서 처음으로 정면으로 저항하는 집단이 생겨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정당한 모습이다.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사회운동단체가 아니다 보니 회원들의 정제되고 절제되지 않은 표현들이 나오는 현상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다. 비유하자면 이렇다. 과거 독재정권의 폭압 정치 속에서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는 이데올로기들을 저항 이데올로기로 삼아 저항하던 조직들이 있었고, 심지어 이들이 한때 한국사회의 저항 운동의 주류를 이루기도 했었다. 그들 중 주류는 저항 민족주의라는 이름하에 우파 민족주의적 주장과 구별되지 않는 주장들을 하다못해 일부는 북한이라는 타국 지배 집단, 그것도 뒤틀어진 가짜 좌파 지배 집단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저항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화염병 시위로 상징되는 그 저항 수단 역시 지금의 눈으로 볼 때, 아무리 대항 폭력이라는 이름으로 정당성을 부여하더라도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외국의 경우에도 대안 부재 속에서 심지어 극단적 이슬람과 같은 종교가 저항 이데올로기가 되기도 하고, 체제전환 국가들에서는 자유주의나 민족주의가 저항 이데올로기로 기능하기도 한다. 분명 현재 메갈리아 등의 투쟁 방식에는 문제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내용적으로도 빈곤계층이나 하층계급 남성들에 대한 비하 역시 맥락상 이해가 전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는 위에서 비유한 것처럼 강한 억압적 지배와 폭력적 탄압에 맞서면서 과격해질 수밖에 없는 운동의 초기 모습이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하나하나의 과격하거나 다듬어지지 않은 언사들에 초점을 맞추어 과도한 비판을 가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최소한 진보적인 관점을 가진 이들이라면 이 사태에서 무엇이 핵심이고 본질인지에 대해 명확한 정치적 입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책무이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나 답답하다. 언제나 지역과 학벌과 학력 등등으로 가르고 배제하고 물어뜯던 이러저러한 남성 집단들이 똘똘 뭉쳐 반발하고 있는 현 상황 속에서 진보적 입장을 갖는다는 이들조차 일베와 같은 편에서 사태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심각한 남성 중심적 사회인지에 대해 다시금 깨닫게 해 주고 있다. 마치 인종주의자들이 이주민들이 범죄를 저질렀을 때 이를 범죄의 문제가 아니라 이주민의 문제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과 유사하게 여성에게는 전혀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여성 차별적이고 여성억압적 모습이 이제야 수면 위로 적나라하게 나타나게 된 것은 어쩌면 메갈리아와 같은 집단의 존재로 시작된 것이기에 우리는 이들의 긍정적 기능이 확대되도록 지지해야 한다. 그런데 현재 일부 남성들의 찌질한 대응들에는 가장 핵심적인 토대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한국의 남성들은 진보와 보수, 좌우를 막론하고 현실의 삶 속에서는 성산업과 성매매에 대해 관대할 뿐 아니라 심지어 다양한 수준의 성매매 업소 출입을 정당화하는 이들이 많다. 정치나 다른 분야에 있어서는 비판적이고 진보적인 관점을 보이는 이들 중 상당수가 오히려 성매매 산업을 옹호하고 이에 반대하는 운동에 대해 반발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이렇게 여성들 중 가장 심각한 인권 사각지대에 놓인 여성에 대해서조차 남성성욕중심적 사고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이 소위 ‘일반’ 여성들의 상황이나 권리, 주장들에 대해서 과연 제대로 된 이해가 가능할까? 따라서 최소한의 양심을 갖고 있는 진보와 평등을 지향하는 사람들이라면 현재 인터넷상에서 벌어지는 말 하나하나에 흥분하고 분노하는 등으로 엉뚱한 힘을 낭비하지 말고, 실 공간에서의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 불평등과 혐오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수많은 여성 문제들의 핵심에는 바로 성매매 산업을 둘러싼 추악한 권력과 자본과 폭력집단, 그리고 압도적 다수 남성들의 침묵을 포함하는 공동의 범죄 행위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여성에 대한 일상적인 차별과 억압 뿐 아니라, 여성을 쉽게 살 수 있는 사회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가 발생하는 것은 별도의 현상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현상이다. 폭행이나 살인 뿐 아니라 성산업으로의 유입 등 다양한 총체적 위협 속에 살아가야 하는 여성들의 작은 반란에 남성들도 동참해야 한다. 그리고 분노의 화살은 소수자나 약자가 아닌 여성들을 포함한 사회의 약자들을 착취하는 집단들에게로 향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은 2016년 8월 31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429 | 추천: 0
신하영옥/ 여성운동연구활동가 네트워크 ‘젠더고물상’ 열흘이 지나도록 기침이 멎질 않는다. 처음엔 가벼워 곧 끝나려니 했는데, 당사자인 나나, 옆의 가족까지 잠을 설치는 날들의 연속이다. 괴롭고 미안하다. 며칠 전 병원엘 갔더니 에어컨 바람이나 선풍기 바람이 원인일 수 있다고 한다. 약을 복용하고 있는 데도 나을 기미가 없어 오늘은 기어이 주사까지 맞고 왔다. 매일같이 오가는 학교와 집은 온도차가 엄청나다. 추우리만치 에어컨 바람을 쐬다 집에 가면 그냥 선풍기 바람만으로는 견디기 힘들다. 물에 적신 옷을 걸치고 선풍기를 틀어야 그나마 견딜 만하다. 그 상태로 깜빡 잠이 들면 한 밤중엔 추워지게 되는데, 그것이 감기의 화근일 수도 있지 싶다. 여튼, 살인적인 더위다. 살아가는 햇수에 비례해 온도계 수치도 올라만 가고 있다. 한 친구는 기온이 내려가는 밤이면 창문을 열면 그나마 잘 수 있는 아파트에 살고 있다. 그러나 올해는 그 라인 전체 가구들이 에어컨을 설치한 덕분에 위아래층의 에어컨 실외기의 더운 공기들이 들어와 잠을 잘 수가 없게 되었단다. 도저히 견딜 수 없던 친구도 결국 에어컨을 사러 갔지만 열흘 뒤에나 구입 가능하다는 답변만 듣고 왔다.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는 사정이다. 그리고 우리는 ‘악순환’을 말했다. 더위를 견디기 위한 현대적 처방들이 더위를 더욱 증가시키는 순환고리에 대해. 오늘 병원 가는 길, 누군가 ‘아줌마’ 하고 부른다. 설마? 하며 돌아보니 다부진 체격에 지쳐 보이는 한 할아버님이 나를 응시하신다. ‘네?’ 하고 응답하니 ‘선풍기 파는 곳이 어디요?’ 하고 물으신다. 그 근처엔 없는 걸로 알지만, 혹시나 중고가전제품 파는 곳이 근처인지라 알려 드리고 가던 길에 그 상가를 들여다보니 문이 잠겨있다. 그 옆 만물상에 들어가 선풍기가 있는지 물어보자 없단다. 뒤에서 걸어오시는 할아버님이 보인다. 그냥 갈 수가 없었다. 잘못된 정보를 제공한 것 같아 미안하고, 또 목소리에서 절박함이 묻어났기 때문이다. 마침 내가 가는 병원 옆에 대형마트가 있어 동행하게 되었다. 할아버지의 아내가 갑자기 쓰러지는 병이 있으신데 오늘 또 발병을 하셨고, 쓰러지시면서 갈비뼈와 선풍기가 동시에 부서졌다는 것. 병원 측에서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나 입원이 불가하다 하여 현재 응급처치 후 집으로 가야 할 상황이지만 선풍기도 없이 찜통더위에 염증이라도 생길까, 아픈 아내가 더위까지 어찌 견딜까 싶어, 아내를 병원에 둔 채 급하게 선풍기를 구하려고 하신 거다. 걱정과 절박성이 담긴 표정으로 선풍기를 구입해야 하는 상황을 설명하시는 할아버지를 보면서, 문득 에어컨을 생각하다 바로 그쳤다. 에어컨이 있다면 선풍기가 절박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대형마트 입구를 알려드리고 병원으로 향하는 맘이 저리다. 80이 넘으셨다는데, 넉넉하지 않을 듯 뵈는데다 아내의 지병과 당장의 치료까지. ‘힘드시겠다...’는 생각. 그러나 당신은 정작 자신의 힘듦보다는 할머니의 치유로 은유되는 선풍기에만 관심이 온통 집중되셨다. 에어컨이 옵션이 아니라 아파트의 한 부품이 되고, 생필품이 되고, 그 바람이 병을 만드는 시대에, 선풍기 한 대가 아내의 치유와 회복이 핵심 과제인 할아버지를 생각하면서 ‘뭔가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뭔가 아닌 것이 무엇이었을까? 사진 출처 - 전자신문 오늘 지인이 검찰의 출두명령을 받았다. 지난 총선에서 특정후보를 지지하는 말을 전화상으로 했다가 ‘들통 난’ 것이다. 문자로는 가능하나 말로는 안 되는, 이상한 선거법 덕분이다. 그는 이제 ‘전과자’가 될 것이다. 정치인을 비교, 선택, 유통 및 홍보하는 정치적 소비행위를 적극적으로 한 덕분이다. 표현이 소비되고, 소비가 곧 표현인 요즘에 말이다. ‘선거’는 대의제에서 ‘민주주의의 꽃’으로 불린다.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선거라는 과정을 통해 유권자들이 정치소비의 주체가 될 수 있어야 가능하다. 즉 그동안 정치적 대상으로 존재하던 유권자들이 이 과정에서만큼은 정치적 주체로서 정치의제와 정치인을 비교, 선택, 지지, 선전과 홍보를 통한 권장 등을 통해 정치를 소비하는 주체가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민주주의는 다양한 사람들이 그 다양한 만큼의 의사표명이 가능하고 그 표명된 의사들이 소통, 유통, 합의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결국 자본주의에서 상품에 대해 소비하는 형태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나의 삶을 정치적 의제화 하고 실행에 옮길 사람, ‘대표’라 불리지만 ‘대리’를 의미하는 사람을 선택하는 과정은 상품의 소비과정에서 ‘적극적 유통’으로서의 과정이 삭제되어 있다. 즉 ‘좋으니 선택해봐’라는 권장과 홍보의 과정이 그것이다. 그것에는 일대일, 일대다, 면대면의 대화, 전화, 메일, 문자 등 인간의 언어로 사용되는 모든 기호적 방법들이 동원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글로는 가능하되 말은 안 된다는 것은 인간의 직접소통을 단절시켜버림으로써 공동체를 해체하는 동시에 선택을 위한 정보획득의 기회를 막는 결과를 가져온다. 가장 열려있어야 할 민주적 과정이 어쩌면 가장 은밀하고, 은폐되고, 닫혀버린 공간이 되는 것이다. 이쯤이면 민주주의를 조롱하는 것이 아닐까? 민주주의조차 그 범위를 정해주고자 하는 오만이다. 거침없는 소통이 권장되는 영역들은 따로 있는 것 같다. 에어컨과 관련해 장황히 떠든 것은 그러한 맥락 속에 있다. 상품의 소비와 관련된 말들의 소통은 무한정 장려되면서 의식을 파고 들어와 필요 이상의 물건들을 소비하게 하고, 그로인해 우리 삶이 상품에 의해 역으로 소비되도록 만들어내는 말들, 그로인해 더위를 비롯해 ‘못 살겠는’ 상황이 강화되는 그런 환경이 되도록 만드는 말들의 소통이 그것이다. TV를 켜면 정규방송과 켜켜이 홈쇼핑 채널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외 방송채널들은 프로그램 진행 과정에서, 프로그램들 사이에서 홈쇼핑을 틀어댄다. 먹방, 쿡방을 위시해 ‘건강 염려증’을 유발하는 방송에서 어떤 음식이 좋다고 하면 그 옆의 홈쇼핑에선 어김없이 그 상품을 판매한다. 주부라는 정체성도 가진 나는 ‘가사노동을 간편하게 해주는’ 상품들에 눈을 뺏긴다. ‘사고 싶다’는 충동이 이는 순간이다. 대부분 찌든 때를 순식간에 없애주지만 안전성이 입증되지 않은 제품이거나, 한 번 쓰고 버리는 일회용 청소제품들이다. 어느 순간 그런 것들에 ‘혹’하고 눈을 뺏기는 자신이나 일회용품을 권장하는-실은 반복적 방송을 통해 세뇌시키는-그 현실에 화가 났다. 더위가 맹승을 떨칠 때, 그 주범의 하나인 에어컨을 ‘없으면 올 여름 거의 죽음’이라는 협박을 통해 소비할 것을 강요할 때도 화가 난다. 상품소비의 달콤한 강요는 딸 또래 아이들이 어떤 옷을 가졌는지 고려 없이 무의식적으로 옷을 사들이고 그로인해 넘쳐나는 옷을 정리할 줄 몰라 쌓아두는 습관을 갖게 하는 원인일 수도 있다. 모든 소비상품은 일회용품처럼 취급되면서 쓰레기는 넘쳐나지만, 그것들이 당장 눈에 보이지 않도록 즉각 치워버리는 고도의 ‘양심회피’ 전략으로 인해 우리는 또 다른 쓰레기들을 양산하는 삶을 반복한다. 결국 그 결과는 ‘살인적 더위’를 넘은 그 무엇으로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다. 레바논의 쓰레기 사태를 보면서, 저 많은 쓰레기들이 어디서 왔을까?란 경악과 동시에 쓰레기 재앙이 우리 모두의 현실이 될 날이 곧 올 것만 같은 불안에 포위되었었다. 상품의 소비는 이제 공급이 수요를 조종함으로써 수요는 공급의 노예가 된다. 상품의 선택은 따라서 자발적 선택의 모습을 띄고 있지만 ‘은폐된 강요와 협박’의 결과로 나타난다. 그 과정에 ‘말’과 ‘말의 유통’은 아주 적극적으로 권장된다. 그러나 정치의 소비에 있어서 그것은 반대의 과정을 강요받게 되고, 따라서 정치는 적극적으로 소비되지 못하고 수요가 줄어듦으로써, 수요자가 없는 공급현장은 공급자들끼리 수요자가 되는 현상을 만들어내고 있다. 정치는 정치인들끼리만 소통, 유통, 소비하는 것이 된다. 상품소비의 영역에선 결코 권장되어선 안 되는 말들의 자유를 넘은 과도한 소통은 인간과 지구를 병들게 하고, 정치소비의 영역에선 결단코 권장되어야 할 말의 유통/소통들은 은폐되거나 폐쇄됨으로써 정치적 인간으로서의 존재와 정치적 의제로서의 지구를 병들게 한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이다. 규제되거나 제거되어야 할 것은 일회용품을 비롯한 과도한 상품광고와 판매를 주도하는 쇼핑방송이다. 반면, 세뇌라도 좋으니 적극 권장되고 열려야 할 것은 정치를 소비하라는 주문과 말들이 유통되는 선거 과정이다. 그러나 우리는 반대의 세상에서, 나와 우리 스스로에 ‘반대하는’ 삶을 살도록 주문받고 있다. ‘너 자신을 상품으로만 소비하라’, ‘너는 정치적 존재가 되어선 안 된다’ 등등. 에어컨의 자리를 선풍기로 대체하고, 문자를 비롯한 모든 종류의 소통기호가 유통될 수 있을 때 우리는 어쩌면 자신을 ‘위한’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열 수도 있지 않을까? 상품소비를 규제하고 정치소비를 권장하는 삶의 양식으로의 전환이 절실하다. 이 글은 2016년 8월 24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651 | 추천: 0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 더 힘차게, 더 정교하게, 더 조화롭게, 더 정확하게, 결국에는 더 아름답게, 인간의 맨몸으로 수행할 수 있는 그리고 표현할 수 있는 최고도의 경지를 추구하면서 세계 각지의 젊은이들이 모여 경연을 펼친다. 적어도 지난 4년 동안 말 그대로 뼈를 깎는 노력을 경주하여 훈련함으로써 해당 종목에서 타고난 인간 몸의 잠재성을 누가 최고도로 실현했는가를 경쟁적으로 실연해 보인다. 지구 반대편에서 텔레비전을 통해 중계 장면을 보는 데도 과연 인간의 몸이 저렇듯 뛰어나고 탁월할 수 있는가를 실감하면서 감탄해마지 않는데, 경연이 펼쳐지는 현장에서 직접 관람하면 그 감흥의 밀도와 강도가 얼마나 더할 것인가 싶다. 올림픽의 모든 종목에서는 그 어떤 기계적인 장치도 동원되지 않는다. 동원되는 각종 도구들은 제 스스로는 그 어떤 작동도 하지 않고, 오로지 인간의 맨몸에 의해 직접 다루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순전히 수동적인 것들뿐이다. 이번 러시아의 도핑 문제나 박태환의 우여곡절의 사건에서 잘 알 수 있듯이, 올림픽의 근본 전제는 인간이 타고난 순수한 맨몸의 자연성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나로서는 올림픽이라는 온 인류의 스포츠의 제전(祭典)이 갖는 유독(惟獨)한 매력은 바로 이같이 일체의 인공적인 기계성, 특히 기계의 자동성을 완전히 벗어난 상태로 인간 몸이 지닌 순전한 위력들을 온갖 방식으로 표현해 낸다는 데 있다고 믿는다. 올림픽이 갖는 매력에 대한 이러한 필자의 믿음은 현실 세계가 이른바 고도과학기술로써 전혀 새롭게 규정됨으로써 ‘맨몸으로서의 인간’과 ‘맨몸에 입각한 인간성’이 거의 망실 내지는 삭제되다시피 되고 말았다는 위기의식과 짝하고 있다. 컴퓨터-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 한, 스마트폰, 네비게이션, 사물 인터넷, 증강현실, 빅 데이터 분석, 인조지능 및 인조감정 등과 결합되는 각종 로봇들이 전 세계를 뒤덮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야말로 몸이 증발해버린 시대가 된 것이다. “몸이 증발하고 있다.” 필자는 불행히도 이 명제를 제시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자동화된 기계의 세상, 자신의 몸을 자동화된 기계의 인공지능적인 체계에 맞추지 않으면 의미 있게 생존한다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은, 클라우스 슈밥이 제시한 이른바 “제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대한 몸 철학적인 명제다. 제리 카플란은 ‘인공지능 시대의 부와 노동의 미래’라는 부제를 단 책 제목을 ‘인간은 필요 없다’라고 달았다. 인간은 필요 없다는 카플란의 생각이 사회경제적인 차원에서의 것이 몸이 증발하고 있다는 필자의 생각은 존재론적인 차원에서의 것이라 점에서 다르긴 하지만, 지시되는 내용이 섬뜩하기는 둘 다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로서는 ‘필요 없는 인간’ 또는 ‘증발하는 몸’ 등, 현재 진행형의 전 인류적인 사태에 대한 진단에 대해 불행하다고 또는 비극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지척에서 들이닥치는 열차 앞에서 맨몸으로 팔을 벌리고 마주 서서 “나 돌아갈래!” 하고서 외치던 영화 <박하사탕>의 남자 주인공의 절규가 바로 우리 모두의 절규가 아니겠는가, 하는 상념이 함께 떠오른다. 그런데 “과연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하는 물음과 함께 “과연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물음이 떠오르면서, 설사 돌아갈 곳이 있다 할지라도 돌아갈 수 없을 터이고, 돌아갈 수 없기에 돌아갈 곳이 없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일종의 종말론적인 상념이 압박해 온다. 오늘이 8월 17일, 리우 올림픽이 아직 한창이다. 몸이 증발하고 인간이 필요 없는 종말론적인 상황을 맞이하여 올림픽이 어떤 묵시록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닐까, 올림픽이 혹시 인류 구원의 한 가닥 암시적인 실마리라도 던져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서 잠시 기대를 걸어보는가 싶은 순간, 절망에 가까운 현실 인식이 확 다가온다. 맨몸의 운동감각적인 순수한 세계를 따로 떼 내어 올림픽이라는 대대적인 괄호 속에 집어넣어 마치 골동품을 완상(玩賞)하듯이 임시로 잠시 온 인류가 휴식을 취할 뿐, 올림픽이 끝나면 곧바로 누가 더 먼저 더 빨리 더 정확하게 더 깊숙이 더욱 강력한 인공지능을 비롯한 고도과학기술의 세계 속에 들어가 부와 권력을 획득할 것인가를 치열하게 다투어야 할 것이다. 맨몸의 운동감각적인 세계는 인위적이기 이를 데 없는 환상의 세계가 되고, 인공지능적인 탈(脫)운동감각적인 가상의 세계가 오히려 자연스럽기 짝이 없는 실재 현실의 세계가 되어 온 인류를 지배하는, 정확하게 뒤집어진 의미의 체계가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고도로 자동화되어 정밀하기 이를 데 없고 그래서 오히려 최고도로 반(反)인간성을 한껏 드러내지 않고서는 발달할 수 없기에 결국에는 인간의 살아있는 맨몸들을 공략하여 볼모로 삼는 오늘날의 고도과학기술의 체계, 더군다나 그 체계가 본격 자본주의의 이윤증대 중심의 체계 및 사드 미사일을 정점으로 하는 군사기술의 체계와 정확하게 결합하여 복합통일의 거대체계를 이루고 있으니, 여기에 인간 또는 인간성이라 일컬을 수 있는 운동감각의 근원적인 영역은 아예 뿌리 뽑히고 있는 것이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이런 현실 인식의 생각을 하게 되면서 올림픽의 의미를 그야말로 고대 그리스 올림픽의 정신을 바탕으로 되살려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말하자면, 비극적으로 전개되는 온 인류의 역사적인 존재 때문에 자연의 존재 전체를 향해 제(祭)를 올리는 것이 바로 올림픽이라는 생각이다. 올림픽은 순수한 맨몸이 아니고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감각운동의 세계를 온 인류에게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맨몸의 감각운동의 세계 즉 순수 자연의 세계야말로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가장 탁월한 세계임을 웅변하는 인류 전체의 ‘제전’(祭典)인 것이다. 정치경제적인 배후의 국가적인 경쟁과 자본주의적인 음모의 구도를 짐짓 싹 제거하고서 보면, 올림픽은 종말론적인 반(反)인간의 시대를 맞이한 온 인류가 모여 잃어버린 자신들의 순수한 인간성을 되살리고자 순전하기 이를 데 없는 자연의 맨몸들로써 그야말로 애원하듯 빌면서 온갖 형태의 제(祭)를 올리는 것으로 다가온다. 말하자면, 올림픽에 참가하면서 올림픽을 관람하면서 온 인류는 암암리에 계시를 받는다. 도구 사용자는 도구를 닮게 된다는 말이 예부터 전해져 온다. 예컨대 자율주행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 자동기계로서의 인간으로 변해갈 것이라는 이야기다. 온갖 자동기계들이 생산과 소통의 작업 현장에서 다양하게 활용되면, 그 덕분에 노동자인 우리 인간들은 더 자유로워지고 더 시간적인 여유가 많아지고 그럼으로써 제 자신의 존재를 더 깊고 넓게 향유할 수 있어야 하는 게 원칙이다. 그런데 왠지 사태는 오히려 정반대의 과정을 밟고 있는 것 같으니 어떻게 된 것인가? 핵심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고도의 자동장치 및 구조적인 시스템이 너무도 강력하게 깊숙이 그리고 폭넓게 치고 들어와 사람들을 오히려 시스템 자체가 굴러가기 위한 보조적인 수단인 양 부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모든 고도과학기술들이 그런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테러나 폭동 그리고 각종 심각한 인사 사고들은 어쩌면 이처럼 막다른 단단한 벽을 향해 고속으로 치닫는 반(反) 내지는 탈(脫) 인간적이고 전반적인 상황에 대한 집단무의식적인 반발일지도 모른다. 그런 까닭에, 일체의 반(反)인간적인 매개 장치들을 제거한 상태로 맨몸과 맨몸이 부닥치면서, 운동감각적으로 생생하게 살아있는 서로의 자연적인 생명력을 한껏 느끼면서, 그럴수록 서로의 생명력을 극단적으로 발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올림픽의 각종 장면들이 어찌 감동적이지 않겠는가. 비록 종말론적인 비극의식이 가미된다고 할지라도. 한반도 남쪽 미군의 사드 배치의 결정에서 드러나는, 인간 생명의 근본적인 말살을 가능적으로 염두에 둔 탓에 인간 생명을 살린다는 핑계를 대지 않을 수 없는 종말론적인 비극의식이 가미된다고 할지라도. 이 글은 2016년 8월 24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408 | 추천: 0
미국/터키-카타르 동맹, 어디로 가나? 홍미정/ 단국대 중동학과 조교수 ■ 터키 군사쿠데타 시도를 강력 비난하는 카타르 카타르 전임 국왕 하마드 빈 칼리파 알 싸니(재위: 1995년 6월 27일–2013년 6월 25일)는 2016년 7월 15일 터키에서 발발한 군사쿠데타 시도를 강력하게 비난하였다. 그는 “카타르는 합법적인 터키정부와 연대한다. 미국과 서방국가가 이 쿠데타의 배후다. 이 국가들과 사우디 외무장관 아델 알 주바이르가 공모하고 협력했다.”고 강조하였다. 이 때 하마드는 3년 전 2013년 7월 3일 사우디가 후원한 이집트 군부쿠데타를 상기한 듯이 보였다. 이 쿠데타는 카타르 국왕 하마드가 후원했던 무슬림형제단 출신의 이집트 대통령 무함마드 무르시(재임: 2012년 6월 30일-2013년 7월 3일)를 축출시켰다. 한걸음 더 나아가 2013년 12월 이집트는 무슬림형제단을 테러리스트 단체로 규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2015년 5월 이집트 법원은 무함마드 무르시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이렇게 곧 닥쳐올 불운을 내다보듯, 하마드 국왕은 이집트 쿠데타 발발 일주일 전 2013년 6월 25일 돌연히 아들 타밈에게 양위하였다. 이때 하마드 국왕이 아들에게 양위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이집트 쿠데타의 여파로 아마도 심각한 정치적인 위기에 직면했을 것 같다. ■ 터키-카타르의 국제적인 네트워크: 무슬림 형제단 후원 2011년 이후 아랍의 봄 동안 카타르와 터키는 사우디와 아랍에미리트에 맞서 이집트, 시리아, 리비아, 튀니지 등에서 강력한 반정부 세력이었던 무슬림형제단 연계 세력들을 후원하면서 정치변동을 이끌었다. 무슬림형제단 연계 세력들은 사우디와 아랍에미리트 내에서도 강력한 정치개혁을 요구했다. 카타르는 사우디와 동맹이었던 이집트 대통령 호스니 무바라크를 대체한 무슬림형제단 출신 무함마드 무르시를 지원하였으며, 사우디는 무함마드 무르시를 축출시킨 압델 파타 알 시시가 이끄는 군부쿠데타를 후원했다. 사우디가 후원한 이집트 군부쿠데타 성공은 카타르와 무슬림형제단의 역내 영향력을 급격하게 약화시켰다. 2013년 12월 이집트, 2014년 3월 사우디와 아랍에미리트도 각각 무슬림형제단을 테러리스트 단체로 규정하고, 자국 내 무슬림형제단 연계 세력들을 탄압하였다. 이에 터키와 카타르는 자신들이 역내에서 소외되었다는 것을 발견하였고, 강력한 정치·경제·군사적인 협력관계를 발전시켰다. 부유하지만, 인구나 영토적인 측면에서 초미니 국가인 카타르와 인구나 영토적인 면에서 대국인 터키 동맹은 무슬림형제단의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활용함으로써 역내에서 사우디를 능가하는 강력한 영향력을 확보할 수도 있다. 사우디(알 사흐와), 아랍에미리트(알 이슬라흐), 쿠웨이트(이슬람 입헌운동), 바레인(알 이슬라흐), 요르단(이슬람 행동전선), 리비아(리비아 돈), 팔레스타인(하마스) 등 아랍 각국에서 무슬림형제단 연계 세력은 각각 강력한 정부 반대파를 구성하고 있다. 더욱이 현재 무슬림형제단 연계 세력은 미국에서도 가장 잘 조직된 이슬람 공동체이며, 수 백 개의 모스크와 벤처기업 등을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터키-카타르 경제 협력 강화 인구 7천 5백만 명의 지역 강국 터키는 자국민 30만 명이 채 안 되는 초미니 걸프 부국 카타르와 경제협력을 비롯한 전방위적인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카타르와 터키 사이의 무역 규모는 2000년 3천8백만 달러, 2014년에 8억 달러, 2015년에는 15억 달러로 급증했다. 2015년 8월 현재 터키에서 카타르 투자는 2백억 달러를 넘어섰고, 터키에 투자한 국가들 중 2위를 차지했다. 이러한 추세가 유지된다면, 몇 년 내에 터키에서 카타르 투자가 1위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게다가 200여 개의 크고 작은 터키 회사들이 카타르에서 주로 건설, 전자, 무역업 분야에서 활약하면서, 약 140억 달러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장기적으로 이러한 터키-카타르 협력관계는 2009년 카타르가 제안했으나 시리아 대통령 바샤르 아사드가 거부한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즉 카타르에서 출발하여 시리아와 터키를 거쳐 유럽으로 가는 파이프라인 건설로 발전할 수도 있다. 이것은 유럽시장을 겨냥한 이란과 러시아 천연가스 수출 정책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다. 러시아를 방문한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오른쪽)이 9일(현지시간) 상트페테르부르크 콘스탄틴 궁에서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만나 악수하고 있다. 군부의 쿠데타 시도 이후 첫 외국 방문지로 러시아를 선택한 에르도안은 이날 푸틴과 정상회담을 하고 지난해 터키 전투기의 러시아 전폭기 격추 사건으로 훼손됐던 양국 관계를 전면 복원하기로 합의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 터키-카타르 합동군사기지 창설과 미국 2016년 4월 28일, 터키는 카타르에 합동군사기지를 창설하기로 카타르와 공식 협정을 체결하였다. 터키 국방장관 이스멧 일마즈와 카타르 국방장관 칼리드 알 아티야가 이 협정에 서명하였다. 이 합동군사기지는 터키가 최초로 설립하는 해외군사기지다. 터키 총리 아흐메트 다부토글루(재임:2014년 8월 28일–2016년 5월 24일)는 이 협정 체결에 대하여 “카타르 안보와 안정은 터키의 안보, 안정과 같다. 우리는 안정되고 안전한 걸프를 원한다. 터키와 카타르는 하나의 운명체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 협정이 양국 사이에 대규모 방위산업 협력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합동군사기지는 여단 규모가 될 것이고, 3천 명 정도의 지상군을 터키여단장이 지휘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카타르 알 우데이드 공군기지에는 미중부군(US Central Command, CENTCOM) 전방사령부가 있으며, 1만 명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 미중부군 전방사령부 옆에 터키군 기지 설립 계획은 미국의 사전 동의 없이 이루어졌을 것 같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월 29일 터키 대통령 에르도안은 “미중부군 사령관이 쿠데타 음모자들을 편들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게다가 카타르의 전임 국왕 하마드는 미국을 터키 군부쿠데타의 배후라고 비난하였다. 이것은 터키-카타르의 역내 정책과 미국의 역내 정책이 마찰을 빚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친미국가 카타르 정치에서 미국 영향력의 깊이를 의심하게 만든다. 이를 뒷받침하듯 터키 대통령 에르도안은 2016년 8월 9일 러시아를 방문하여 푸틴 대통령을 만난다. 이번 에르도안의 러시아 방문은 7월 15일 쿠데타 이후 처음으로 하는 외국 여행이다. 터키 관리들과 미디어들은 미국이 터키쿠데타의 배후라고 강력히 주장하였으며, 실제로 미국은 이 쿠데타 발발 초기에 매우 모호한 태도를 취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러시아는 이 쿠데타 발발 초기부터 쿠데타 시도를 강력하게 비난함으로써 에르도안의 좋은 친구임을 보여 주었고, CIA가 이 쿠데타 시도의 배후라고 주장하였다. 이제 터키-카타르 군사동맹은 미국과는 복잡하고 미묘한 관계지만, 러시아와 강력한 협력관계를 구축한다면, 이란, 사우디, 아랍에미리트, 이집트 등 역내 강국들에 맞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로 인해서 역내 불안정성은 더욱 심화·격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 하늘이여 불쌍한 중생들을 도우소서! - 이 글은 2016년 8월 10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456 | 추천: 0
김재완/ 방송대 법학과 교수 정부는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활동을 2016년 6월 30일자로 사실상 종료시켰다. 세월호진상규명법 제7조 제1항은 “위원회는 그 구성을 마친 날부터 1년 이내에 활동을 완료하여야 한다. 다만, 이 기간 이내에 활동을 완료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위원회의 의결로 한 차례만 활동기간을 6개월 이내에서 연장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조항에 대해, 정부는 세월호진상규명법이 2015년 1월 1일에 시행되었으므로 그 기간의 연장이 가능한 시한이 6월 30일까지이고, 따라서 특조위의 조사활동 기간은 끝났다는 입장을 취한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부의 해석은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자의적이다. 실제 특조위의 상임위원 임명은 2015년 3월 5일이었고, 국무회의에서 특조위의 예산이 통과된 것은 같은 해 8월 4일이었다. 이때 어느 시점에서 “위원회는 그 구성을 마친 날부터”에 해당된다고 보아야 할까? 우선 특조위의 조사활동 등이 실제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예산 지원이 있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위원회의 구성을 마친 시점은 활동을 개시할 수 있는 준비를 완료한 날로 해석해야 한다. 이렇게 해석할 때, 특조위의 구성 완료 시점은 2015년 8월 5일이 된다. 따라서 정부의 주장처럼 특조위의 조사활동시한이 이미 끝난 것이 아니라, 현재 아직 1년도 되지 않은 것이다. 사진 출처 - 뉴스1 그러나 근본적으로 세월호진상규명법상의 특조위 조사활동 및 백서 발간 기간의 활동시한 1년 9개월은 사안의 중대성에 비해 너무나 짧은 것이다. 세월호참사에서 정부는 생명안전에 대한 감독책임을 다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행태가 기업과의 먹이사슬로 연결되어 있는 등 총체적이고 구조적으로 뿌리박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한 참사 이후 국가는 국민의 시선을 탈출한 선장, 청해진 유씨 일가와 구원파에게 향하도록 조장함으로써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연출을 시작했다. 유족에 대한 금전배상 프레임과 진상규명 활동에 적극적인 유족들을 폭도나 종북세력으로 몰아가기, 특조위를 예산을 낭비하는 세금도둑으로 매도하기, 정부의 특조위 구성과 업무 방해하기 등으로 책임회피와 은폐를 위한 연출은 정점을 찍었다. 이재승 건국대 법전원 교수는 세월호참사를 세 단계에 걸친 국가범죄로 규정한다. 첫째는 구조적 원인의 측면에서 생명안전에 대한 국가감독책임의 총체적 방기와 기업의 부패가 결합한 국가․기업범죄라는 것, 둘째는 참사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해경 및 구조본부의 조직적 부작위와 무책임은 전형적인 국가범죄라는 것, 셋째는 참사 이후의 상황에서 정부, 호위세력, 그 매체들의 ‘희생자 다시 때리기’와 책임 부인은 국가․사회범죄라는 것이다. 사안의 심각성과 중대성에 비추어 볼 때, 실제적으로 특조위에게 주어진 물리적인 시간은 매우 짧은 것일 수밖에 없다. 한편 특조위 및 소위원회의 업무는 참사의 원인 규명, 참사의 원인을 제공한 법령, 제도, 정책, 관행 등에 대한 개혁 및 대책 수립, 재해·재난의 예방과 대응방안 마련 등 안전한 사회 건설을 위한 종합대책 수립, 피해자 지원대책의 점검 등이다. 세월호진상규명법의 궁극적인 목적은 참사의 진실을 규명하여 안전사회를 구축함으로써 재발을 방지하자는 것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예산 지원 삭감 및 인력 감축, 업무방해 행위 등의 기만적․폭력적 행태로 인해 특별법의 목적과 취지에 부합하는 결과를 도출하지도 못한 채 특조위의 활동은 사실상 그 생명을 다하게 되고 말았다. 세월호참사를 하나의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거대한 국가․기업․사회범죄로 만든 것은 바로 국가 자신이다. 그리고 지난 총선에서 시민은 의회가 국가의 잘못을 바로 잡아 주도록 야권에 힘을 실어 줌으로써 희생자를 애도하는 정치의 모습도 보여 주었다. 의회는 충분하고 실질적 조사가 가능하도록 기간을 보장해주어야 한다. 여야의 정치적 합의에 의한 수개월의 연명에 그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진실규명과 재발방지를 통해 피해자의 인권을 충족하고, 시민의 생명안전이 온전해 질 수 있는 정치적․제도적․문화적 구축을 위해서 그에 걸맞은 활동조건과 시간이 충분히 보장되는 근본적인 개정이 필요하다. 다시 한 번 또 다른 세월호참사가 일어난다면, 그 안에 당신 또는 당신의 가족이 있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이 글은 2016년 7월 20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436 | 추천: 0
이문영/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 얼마 전 톨스토이와 관련한 작은 책을 냈다. 제목은 <톨스토이와 평화>. 이 자리를 책을 홍보하는 불순한 목적으로 이용할 생각은 없다. 다만 책을 쓰게 된 문제의식을 칼럼의 독자들과 나누고픈 생각이다. 다음 달이면 톨스토이 탄생 188주년을 맞게 되니 맞춤 맞기도 하다. 한국사람 중 톨스토이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파지는 그 두꺼운 책을 정작 끝까지 읽어낸 사람은 얼마 없더라도, 아마 이름 정도는 누구나 알 것이다. 걔 중에는 고전영화 <전쟁과 평화> 속 상큼하기 이를 데 없는 오드리 헵번의 모습을, <안나 카레니나> 속 소피 마르소의 처연하게 아름다운 모습을 떠올릴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마음대로 사랑하고 마음대로 떠나버린 첫사랑 도련님과 정든 밤을 못 잊어...” 운운하는 오래된 유행가 <카추샤의 노래>를 흥얼거릴 사람이 있을지도. 그런데 이런 작가 톨스토이의 모습에는 인생의 스승, 삶의 지혜를 전해주는 현자(賢者)의 이미지가 어김없이 덧씌여져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사진 속의 그는 한결같이 흰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소박한 러시아 농민복을 입은 모습이다. 그 할아버지 톨스토이에게서 우리는 성자나 구도자를 발견한다. 특히 2003년 MBC 교양프로그램 <느낌표>에서 『톨스토이 단편선』이 고전베스트로 뽑힌 이후로 “바보 이반 이야기”,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같은 교훈적 우화가 큰 인기를 끌면서 이런 인상이 더욱 강해졌다. 성자 톨스토이의 이미지는 무엇보다 평화주의자 톨스토이로부터 비롯한다. ‘악에 대항하지 말라’던 그의 비폭력주의, 바보 이반이 보여주는 바보 같은 사랑, 물질에 대한 집착과 탐욕을 들어내고 진정한 믿음으로 영혼의 곳간을 채우라는 그의 설교가 무한경쟁에 내몰려 그 어느 때보다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위안이 되는 모양이다. 그것도 나쁘지만은 않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그러한 비폭력이, 그러한 사랑이, 그러한 믿음이, 그리하여 마침내 진정한 평화가 어떻게 가능하다고 말했을까. 톨스토이는 이 모든 것이 ‘악에 대한 투쟁’ 속에 가능하다고 했다. 그가 직접 밝힌 바 있듯이, 흔히 알려진 그의 무저항주의는 악에 ‘폭력으로’ 대항하지 말라는 의미에서의 무저항인 것이지, 결코 악에 대한 투쟁을 포기하라는 수동적인 무저항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때의 악은 ‘혁명을 목전에 둔 차르 통치 하 제정 러시아’라는 구체적인 사회 조건 속에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사회악이었다. 톨스토이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폭력을 제도화하는 국가, 인간에 의한 인간의 노동 착취를 합법화하는 경제 질서, 그리고 그러한 폭력을 신의 법칙으로 정당화하는 기성 종교 등을 만악의 근원으로 여겼다. 이에 따라 그는 차르 정부, 군대, 경찰, 사법기관, 농노제나 자본주의 소유 구조, 그리고 러시아 정교회와 평생에 걸쳐 간단없이 가열차게 싸웠다. 악의 실행자들에 대한 톨스토이의 증오, 그들의 기만과 위선을 폭로하는 그의 언어는 너무나 강렬하고 신랄해서, 이 사람이 과연 ‘화내지 말라’, ‘원수를 내 몸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그 누구보다 충실히 따르고자 했던 그 톨스토이가 맞는지 헷갈릴 정도다. 또 그는 차르 전제정부를 넘어 모든 국가 권력을 부정했을 뿐 아니라, 애국심과 민족주의를 전쟁이라는 최고의 악을 초래하는 또 다른 악의 근원으로 매섭게 질타했다. 자연히 톨스토이는 보수 극우세력은 물론, 민족주의자나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 모두와 불화했을 뿐 아니라, 당대 국제 평화주의자들에게조차 제대로 이해받지 못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톨스토이, 즉 사랑과 용서, 무소유, 무저항을 설교하는 성자(聖者) 톨스토이의 후광 뒤에는 이렇게 탈국가, 탈민족을 외치던 근대의 이단아, 적그리스도라 불릴 정도로 파격적인 신앙을 설파하며 기성 권력과 맹렬히 싸운 전사(戰士) 톨스토이가 서 있다. 톨스토이의 유토피아는 국가로 대표되는 모든 제도화된 폭력의 거부 위에, 나아가 그러한 구조적 폭력은 물론, 정당방위로서의 개별적 폭력조차 허용하지 않는 견결한 비폭력주의에 기반한다. 이러한 절대적 평화주의는 어떤 의미에서는 그 무엇보다 전투적이고, 따라서 불온한 평화주의로, 안전한 이상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톨스토이 사상의 이 불온함, 과격함, 위험성은 그가 평생 추구했던 ‘평화’를 오히려 생동하게 만든다. 평화는 너무나 당연해 진부해진 단어다. 그러나 인류는 한 번도 평화를 제대로 실행한 적도, 따라서 제대로 누린 적도 없다. 일본의 메이지 사상가 나카에 조민(中江兆民)의 말을 빌리자면, “언사로는 극히 진부해도 실행으로는 신선한” 것, 그것이 평화다. 다시 조민의 말. “자, 그 실행으로는 신선한 것이 이론으로는 진부한 것은 과연 누구의 죄인가.” 평화 잘못도 있고, 우리 잘못도 있다. 톨스토이의 급진성, 그의 과격함, 그의 모순은 평화의 규범성, 상투성을 뒤흔들어 그것을 살아 숨쉬게 만든다. 그럼으로써 우리를 자꾸 생각하게, 돌아보게 만든다. 그런 톨스토이를 도덕 타령, 사랑 타령이나 하는 고리타분한 성인군자로만 알고 끝난다면, 그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이 글은 2016년 7월 13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548 | 추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