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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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강대중(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윤동호(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이동우(변호사),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장은주(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블랙’, 악마의 상징인 색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비단 구속되어 있는 김기춘 씨와 조윤선 씨 그리고 그 배후로 지목되고 있는 박근혜 씨만이 아니라 사회역사적으로 스스로가 참다운 지배세력이라고 믿고 있는 악마적인 그들의 입장에서는, 경제적인 부를 넘어서서 그리고 정치적인 권력을 넘어서서 예술 문화를 통해 우리 모두의 삶을 최고의 경지로 끌어올리고자 온몸을 불태우는 사람들이 오히려 악마로 보였던 것이다. 악마의 눈에는 악마들만 보이는 법이던가. 게다가 자그마치 만 명에 이르는 악마들이라니! 헌법에 명기되어 있는 표현의 자유를 통해, 심지어 그 표현의 자유를 의무와 책임으로 여겨 만민이 자신의 존재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을 견인함으로써 그야말로 헌법 정신을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악마들이라니! 과연 악마적인 그들은 누구이며, 어떤 인간관을 가지고 있으며, 그와 같은 악마적인 폭력성을 왜 어떻게 구비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해답이 한편으로는 불을 보듯 분명한 것 같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나 궁금하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고 했던가. 결코 그런 뜻에서는 아니지만, 우리도 그들의 이름들을 거론하면서 블랙리스트, 진짜 악마라고 여겨지는 그들의 이름들과 그 악마적인 죄상을 병기하여 열거한 블랙리스트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악마적인 그들이 만든 블랙리스트는 본래 악마적이기에 시커먼 음지에서 음모적이고 사적으로 작성되어 그와 동일한 방식으로 범죄적인 폭력을 자행했다. 그러나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순수한 블랙리스트는 양지에서 공적으로 당당하게 작성되어야 하고, 또 그렇게 그들에 대한 사회역사적인 처벌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우리들의 순수한 블랙리스트에 올릴 이름들을 어떤 기준으로 선택해야 할까? 그 기준을 너무 폭넓게 선정하여, 예컨대 어떤 방식으로건 인권을 유린했을 경우라고 하면, 또는 어떤 방식으로건 정의에 어긋나는 행위를 했을 경우라고 하면, 그 기준들이 원칙으로 대단히 중요하긴 하지만 현실적으로 실효성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방식으로건’이라는 단서를 적절하게 한정해서 변경할 필요가 있다 할 것이다. 예컨대 ‘주도적으로’, ‘비인간적인 이념으로 무장하고서’, ‘대다수의 인민들의 생명을 아랑곳하지 않고서’, ‘자신의 지배적인 권력의 유지 · 강화를 목적으로’ 등으로 한정해서 변경해야 할 것이다. 공공의 사회역사적인 심판을 위한 순수한 블랙리스트, 우리에게는 이미 우리들의 그 순수한 블랙리스트를 대대적으로 작성한 적이 있다. ‘친일인명사전’이 그러하고 ‘진실화해위원회’에서 반민주적 · 반인권적 공권력 행사 등으로 은폐돼 온 진실을 밝혀내고자 노력함으로써 그와 관련된 인물들의 이름들을 찾아내어 백일하에 밝히고자 한 노력이 그러하다. 하지만, 그때 우리는, 이번에 악마적인 그들에 의해 음험하게 작성되어 실제로 상당한 불이익을 준 것과는 달리, 우리의 순수한 블랙리스트에 오른 사람들과 그들에 의해 여전히 이익을 보고 있는 자들을 드러내 놓고 실제로 불이익을 주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명예에 관련한 피해를 주었을 뿐, 뒤늦게나마 정식 재판을 열어 우리의 공동체로부터 일정하게 배제시키거나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것을 분열책동이라는 등 해서 정치사회적인 반발이 거셌다. 그럼으로써 우리 사회가 아직도 정의와 인권, 이를 뒷받침하는 자유와 평등에 대한 사회역사적인 공동체 의식이 제대로 쉽게 현실화될 수 없음을 확인했다. 이번 악마적인 블랙리스트 사건을 계기로, 우리들 대다수 국민들이 떨쳐 일어난, 그 강렬하게 타올랐던 ‘수백만의 촛불’의 위력을 총동원하여 정의와 인권을 위한 우리의 순수한 블랙리스트의 작성과 실효성 있는 사회역사적인 심판을 위한 법 제정에 돌입해야 하지 않겠는가. 차제에 대한민국 공동체를 정치적으로 책임지고자 하는 대선 주자들이 이 사안에 대해 가슴 깊숙이 명심해 주었으면 한다. 이 글은 2017년 1월 25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440 | 추천: 0
신하영옥/ 여성운동연구활동가 네트워크 ‘젠더고물상’ “여성인권이 낮은 곳에서 최초의 무언가가 된다는 것은 때로 목숨을 담보로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멈출 수 없는 것은, 그것을 일상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위 글은 <워싱턴 100만 명의 여성과 세계 30개국이 함께하는 여성권리행진>의 주최 측인 <워싱턴 행진>의 대자보 내용의 일부이다. 이 최초의 전 세계적인 여성행진은 反다양성을 주장한 트럼프의 집권에 대항하여 시작되었다. 트럼프 취임일인 1월 20일 다음날인 21일 워싱턴에서 20만 명이 넘는 여성들이 참여의사를 밝히며 캐나다, 호주, 유럽 등 여러 국가들이 동시다발적인 참여를 약속했고, 한국 서울에서도 함께 행진하기로 한 것이다. 서울여성행진은 21일(토) 오후 2시에 강남역에서 행진과 후속행사로 진행된다. 현재 400여명 정도가 참여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모집광고가 있고 길지 않은 시간이었던 것으로 안다. 많은 여성들이 트럼프를 위시한 세계적 반민주주의 세력에 대해 반대하고 저항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여성으로서 ‘나’의 존재가 위험함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의 여성들이 이 뜻에 공감하고 함께 참여한다는 것은 선/후진국을 불문하고 전 세계적으로 여성에 대한 위험의 존재, 즉 안타깝지만 민주주의가 여성들에게 ‘안전’과 ‘인권’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우리 여성은 ooo에 의하여 위협받고 있다.” “우리는 자유로운 ooo권리를 원한다.” 이러한 구호는 여성이 불안하고 불행하며, 여전히 제1세대적 권리인 자유권조차도 보장받지 못하는 존재임을 드러낸다. 특히 여성의 몸과 관련한 자유권 -낙태, 출산, 성범죄- 등은 여성의 통제가 아니라 법률, 즉 (남성)국가의 통제의 대상이 된다. 여성은 과연 ‘신체의 자유’를 보장받고 있는가? <워싱턴 100만 명의 여성과 세계 30개국이 함께하는 여성권리행진> 사진 출처 - 구글 87년 체제로 호칭되는, 87년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대안에 대해 다양한 연구들이 있다. 한국이 민주화를 통해 형식/절차적 민주주의는 이루었으나 다양한 사회세력들이 존재하는 다원화된 사회의 현실이 정치차원에 반영되고 있지 않다는 것에 많은 이들이 동의한다. 이는 실질적 민주주의, 혹은 민주화에 대한 문제이다. 그리고 형식적 민주주의-절차적 평등권- 아래, 무엇보다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됨으로써 정치적 평등이 경제적 평등을 보장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정치가 경제에 종속되는 현상에 대한 문제는 실질적 민주주의를 경제적 민주주의와 등치시키며, 사회민주주의 즉, 복지국가를 대안으로 삼기도 한다. 실질적 민주화는 과연 경제민주화와 동의어일까? 작금의 국정농단 사태는 국가가 한정된 사회적 부와 자원을 배분하는 과정의 개입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고 정치를 경제의 종속 하에 두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경제적 부를 획득하기 위해 정치를 이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정치의 원래 기능을 회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이 상황에서 경제민주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이는 다양한 사회집단들의 정치경쟁이 이루어질 때 가능하다. 사회내의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이 정치적 장에서도 펼쳐지고, 사회내의 다양한 집단들만큼 다양한 정치집단들이 존재하며 상호경쟁, 감시, 때로는 연대가 작동할 때 가능하다. 이것이 실질적인 민주주의이다. 경제적 민주주의는 실질적 민주주의의 한 부분이고, 실질적 민주주의의 토대가 아니라 그 결과로만 가능하다. 여성들은 사회 내 다양한 집단들 중의 하나로서, 실질적 민주주의를 위한 여정에 있다. 민주주의가 ‘자기결정’을 핵심원리로 한다고 할 때, 여성들은 남성, 남성적 국가로부터 폭력, 억압, 차별의 과정 속에서 ‘자기결정’을 진압, 거부, 무시당해왔다. 그것을 자각한 여성들이 “여성도 인간”이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제 권리들을 “인권”의 이름으로 보장하라고 주장해왔다. 보편선거권, 헌법이 명시한 문장으로서의 성평등이 아니라 일상에서 여성들이 ‘자기결정’을 할 수 있는 실질적 평등을 만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형식적 민주화였다. 법과 제도만 만들어졌고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과 차별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일상인 온라인을 통해 은밀하게, 악랄하게 확장되고 있다. 이제 일상적으로, 수시로 여성폭력현장과 문화를 접함으로써 강간이 상품이 되고, ‘성폭력’(장면)을 통해 ‘성’을 ‘배우는’ 결과가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 사회의 절반이 또 다른 절반에 대해 공포심을 갖고 살아가고 다른 절반은 또 다른 절반을 강간의 대상으로 삼는 이러한 현실이 가능한 사회와 정치가 과연 민주주의인가? 이러한 상황에서 재벌 몇 명, 부패정치인 몇 명 구속하고 대통령이 바뀐다고 사회 구성원들이 ‘자기결정’의 주인, 즉 정치의 주체가 되는 그러한 민주주의가 보장될 수 있는가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정치철학과 시스템을 바꾸는 기획, 현재 민주주의의 정의와 작동방식에 대한 철저한 성찰과 반성, 다음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철학과 정의의 확립, 다음으로 작동방식에 관여하는 시스템에 대한 다양한 입장의 총화라는 과정이 놓여져야 한다. 주부인 나는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처리해야 할 때가 있다. 놓친 드라마를 보면서 세탁기를 돌리고, 그 동안에 음식을 만들거나 청소를 한다. 그럴 땐 드라마를 ‘본다’가 아니라 ‘듣는다’이다. 그 와중에 가족 중 누군가 아무런 말도 없이 티비를 ‘확’ 꺼버리면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다. 티비 앞에 앉아있지 않을 뿐, 여전히 들음으로써 드라마를 보는 중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무시당했다는 것과 상대의 비민주적 행위에 화가 난다. 이런 것이 민주주의를 둘러싼 차이이다. 드라마를 보는 이가 많지만, 듣는 이도 있을 수 있다는 고려를 하는 것과 못하는 것. 이러한 일상의 민주주의에 대한 차이는 정치민주주의에 대한 온도차이로 연결되는 것이다. 사소할까? 일상에서 ‘자기결정’에 대한 배려를 익히지 않고 어느 날 갑자기 정치적 배려라는 것이 생겨날 수 있을까? 여성행진은 이렇게 일상에서 무의식적으로 존재하는 여성 배제적, 혐오적, 무시적 행위들과 그 행위를 성찰할 필요가 없게 만드는 정치적/사회적 시스템,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결합된, 그래서 생활과 존재 모두를 위협하는 모든 구조와 그 구조를 지탱하는 남성 집단에 대해, 특히 반다양성을 정책으로 떠들어대는 반민주적 세력들에게 여성들은 결코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것을 보고만 있지 않겠다는 실천이다. 동시에 민주주의 자체가 사회적 투쟁의 과정에 있다는, 즉 민주화로서의 민주주의만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걸음 더 나아가 한국의 민주주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의 정책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하는 투쟁으로서 미국의 문제를 국내문제와 연결시켜 낸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도 의미를 가지는 투쟁이다. 단선적인 ‘반미’와 ‘양키 고홈’이 아닌 방식, 세계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미국의 반민주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구체적인 목표를 가진 투쟁이라는 점에서 앞으로 한국에서 미국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에 대한 선도적 의미를 가지는 저항인 것이다. 모든 소수자 운동이 그렇지만, 특히 여성운동의 목표는 실질적 민주화로서 다양한 사회세력의 정치지형화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민주화에 대한 대안은 현실정치권에 있지 않고, 남성들에 있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며 새로운 대안을 만들고 실천하는 여성들, 그리고 이들과 연대할 수 있는 세력들에 있다고 본다. “우리는 이 나라가 여성들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다.” “우리가 화가 나면 변화가 일어나고, 일이 일어난다.” 이번 행진의 공동 창립자인 ‘Tamika Mallory'의 말이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변화는 이미 일어나고 있다. 이 글은 2017년 1월 18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417 | 추천: 0
김재완/ 방송대 법학과 교수 인간은 필요하고 더 나은 무엇인가를 향해 우리의 세계와 실존을 만들어 간다. 그러한 세계 형성과 구축의 역사는 ‘인간 노동의 역사’라고도 감히 말할 수 있겠다. 노동의 역사를 통해 형성된 우리의 세계는 항상적으로 변화하며 그 방향은 좋은 쪽으로도, 나쁜 쪽으로도 이어진다. 인간의 노동은 수고를 요구하며 이를 통해 결과물들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한편 그에 조력하기도 한다. 어원적으로도 고대 그리스어에서 'ponos'는 수고의 측면을, 업적 또는 성과물을 'ergon'으로 지칭했다. 로마에서는 노예들이 짐을 지고 힘겹게 가는 모양을 ‘laborare’라고 불렀는데, 영어의 ‘labour’의 어원이 되었다. 또한 로마에서는 노예와 제대로 노동을 하지 않는 자들을 벌하고 옥죌 때 사용했던 일종의 멍에를 ‘tripalium’이라고 표현했으며, 이는 프랑스어 ‘travail(노동)’과 스페인어 ‘trabajo(노동)’의 어원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업적 또는 성과물을 로마에서는 ‘opera’라고 하였고, 이것은 프랑스어 ‘oeuvre(제작물, 창작물)’가 되었다. 한편 이것이 점차 의미 분화를 하면서 ‘창의적/자발적 노동자’를 지칭하는 ‘ouvriers’와 ‘수동적/단순 노동자’를 지칭하는 ‘laboureurs’로 구분되기도 했다. 아직도 영국에서는 ‘labour’를 ‘수동적/고통적 노동’으로, ‘work’를 ‘자발적/창의적 노동’으로 그 의미에 차이를 두고 인식하고 있다. 라틴어에서는 어떤 것을 산출해내는 것을 ‘facere’, ‘faber’라는 말로도 나타냈는데 이로부터 'faktum(사실)', 'gemachte(만들어진 것)'이라는 말들이 생성되었다. 이들은 공장을 지칭하는 ‘fabrik(영어로는 Factory)’, 제작이나 제조를 지칭하는 'fabrikation(영어로는 fabrication)'을 만들어냈다. 오늘날 우리의 노동/노동자문제는 인간 노동의 역사성에서 어떤 것을 산출해내는 수고와 그 프로세스로서의 노동성을 희석시킨 채, 노동자를 옥죄는 멍에로서의 자본 우위적 지배체계를 형성하고 구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 기인한다고 감히 주장하고 싶다. 인간의 노동은 우리 세계를 유지하고 존속하는 것에 필요한 소비재로부터 다음 세대가 노동하는 데에 있어 토대가 되는 제반 생산물들까지도 만들어내는 속성을 가진다. 노동은 인간 생활의 재생산을 위한 전제조건을 만들어내며, 이와 함께 노동자의 노동에 대한 내외적 인식론의 자각을 항상적으로 불러일으키고 노동자가 인식했든 하지 못했든지 간에, 노동은 그 자체의 활동으로서 새로운 사회적 환경들을 만들어내고 기존의 사회적 환경들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현재의 세계를 변혁하게 만드는 목적 지향성을 가진다. 그리고 그 변혁의 방향은 폭력적이고 전체 획일적인 자본 우위적 지배체계의 제도적 멍에의 사슬들을 제거하여, 인간 존엄성에 바탕을 둔 사회적 공동체로서의 인간/인간성을 회복하고 존속하는 상호 ‘인정(認定)’으로 향해야 한다. 사진 출처 - depositphotos.com 일반적으로 정책과 법은 사업/사업자, 정치/정치가, 공무/공무원, 교육/교육자 등과 대항적으로 노동/노동자를 구분 짓는다. 때문에 일반인들의 인식구조도 그 틀에 갇혀서 사고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그러나 그러한 구분은 각 영역과 주체, 대상들에 대한 지배와 규율의 편의성을 위한 것일 뿐이다. 실질적인 내용은 사업(노동)/사업자이면서 사업노동자성, 정치(노동)/정치가이면서 정치노동자성, 공무(노동)/공무원이면서 공무노동자성, 교육(노동)/교육자이면서 교육노동자성을 가진다. 인간 노동과 그 역사성은 수고를 통해 제작물/제도들을 산출해내고, 이것을 통해 현재와 미래의 우리 실존과 세계를 변화해 나아가는 것을 구성본질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 세계의 모든 사회적 환경들은 자발적이든 수동적이든지 간에 모든 노동자의 노동 프로세스에 토대를 둔 목표물이자 결과물이라는 점을 인식한다면, 형식적인 지위나 계급의 외관적인 틀만을 강조하여 노동/노동자성을 애써 부인하고 거리를 두어 구분 짓는 것은 온당치 못한 것이다. 이러한 형식적 구별인식이 노동/노동자문제를 더욱 심화시키고 확대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시대의 정의의 저울은 노동/노동자를 심하게 들어 올려놓고 있다. 그 평형을 맞추는 첫 출발점은 저울의 반대편에 있다고 인식하는 모든 영역과 사람들의 노동/노동자(성)을 본질적으로 다시 자각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작금에 적폐 되어 있는 법적 사회적 구조들을 청산하고, 정의로운 방향으로 변혁시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글은 2017년 1월 18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539 | 추천: 0
정재원/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음에도 청문회에 개입을 하는 등 조금씩 박근혜 일파의 반격도 시작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공은 일단 헌재와 특검으로 넘어가 있는 상황에서 이제 우리는 시위에 대한 환호와 격찬을 넘어 박근혜 이후에 대해 고민을 하고 구체적인 논의와 행동을 주도해야 함에도 아직 본격화되고 있지 못 한 것이 사실이다. 이명박근혜 정권을 거치며 민주주의의 퇴행이 확연히 일어나고 있기는 하지만, 과거의 군사독재 시대와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제도적,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최소주의적 민주주의마저 붕괴된 것은 아니라는 것인데, 특히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정치세력들, 심지어 새누리당 내에서조차 계파의 분열을 초래할 정도로 정권과 정당에 대한 지지율이 현 정국을 좌지우지하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으로 나타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문제는 그것이 탄핵까지 이끌고 온 동력이면서도 동시에 그 이상으로 나아가는 데 결정적인 제약 요인이라는 점이다. 또 다른 한 가지 기억할 것이 있다. 설사 지금보다 더욱 격렬한 저항이 일어나도, 그리고 더 많은 시민들이 거리에 나와도 기득권 지배집단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만일 대통령과 새누리당에 대한 지지율이 여전히 일정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더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나오더라도 저들은 곧바로 경찰로 하여금 폭력적 진압을 명령했을 것이다. 시민들의 대규모 집회 참가와 다양한 행사가 가능한 이유가 이러한 지배 집단에 대한 극도로 낮은 지지율로 인해 경찰이 어쩔 수 없이 진압을 하지 못 하는 데에도 한 원인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현재 상황에 대해 광장에서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우리는 차분히 정리를 할 필요가 있다. 현재 대규모 시위대가 경찰의 제지를 받지 않고 서울시 중심가를 점령하고 행진할 수 있었던 데에는 상식을 뛰어 넘는 국정농단과 그를 방조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국민 대다수의 분노에 그 원인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전 국민적 분노를 야기한 충격적인 비밀들은 검찰의 수사나 야당과 시민사회의 압박에 의해 폭로된 것이 아님은 두 말 할 나위도 없다. 즉 정권 재창출에 대한 불안감이 극대화되면서 조선일보 등 기득권세력 중 일부가 반발하기 시작했고, 이들의 청와대와의 힘겨루기가 박근혜 정권에 대한 저항 운동에 있어서 결정적인 도화선이 되었고 지금도 그러하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비박으로 상징되는 기득권 세력 일부와 이들과 결합하려는 일부 야당 내 특정 세력과 명망가들에 의한 기득권 세력 재편 전략은 곧 본 궤도에 오르게 될 것이다. 특히 저들은 심지어 정권이 재창출되지 않을 경우까지 대비해서 개헌을 적극적으로 밀고 나갈 가능성도 있다. 개헌 자체에 대해서는 야당이나 시민사회에서도 엇갈리는 입장을 갖고 있다. 그 어떤 긍정적 측면이 존재하더라도 이렇게 현 국면의 상당 부분들이 저들에 의해 주도되었고 여전히 저들의 영향력이 강하게 작용하는 현실 속에서 상황적 맥락에 대한 파악 없이 그 자체의 긍정성만으로 동조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현 국면이 야당이나 시민사회가 주도하는 것으로 착각되기 쉽지만 정세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사진 출처 - 프레시안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안타깝게도 대선에서 어떤 정당의 어떤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느냐의 문제로 협소화시켜 격렬한 논쟁이 대두될 것이 자명하다. 또한 소위 촛불 시민의 저항의 성과를 보수야당의 집권으로 헌납해 버려서는 안 된다며 격렬한 상호비방도 난무할 것이다. 진보정당이 대안이 되지 못 하는 현재 어떻게 보면 이러한 혼란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진보적 지식인들과 활동가들은 이제 이러한 정치 정당 중심의 논의에서 벗어나 급격하게 정치화되고 있는 시민들의 다양한 직접적인 권력 감시와 견제, 나아가 통제 수단이 마련될 수 있도록 담론을 형성해 나가야 한다. 무엇보다도 직접적인 방조자들 뿐 아니라, 검찰 등 관료 조직들, 새누리당, 재벌들은 물론이고 아직까지 드러나지 않거나 처벌을 피하고 있는 집단들에 대한 재산몰수를 포함한 엄정한 법 집행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다가 아니다. 다양한 기득권집단들이 이들을 앞세워 이익을 관철시킨 결과물들, 즉 노동개악, 국정교과서, 위안부합의, 한일군사협정, 사드배치 등등 반민주적이고 반평등적이며 반평화적 정책들을 모조리 무효화해야 한다. 무엇보다 단순히 박근혜 일당과 그 부역자 집단을 넘어 차후 그 어떤 세력들도 자신의 이익을 관철시키지 못 하도록 근본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만들어지도록 강제해야 할 것이다 그 중에서도 검찰 등 사정기관에 대한 시민적 통제 장치 마련은 가장 시급하다. 현재 돌연 엄정한 수사를 하다가 청와대와 충돌하고 있는 것처럼 또 다른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검찰은 가장 시급한 개혁의 대상이다. 이 순간까지도 우병우 전 청와대 정무수석에 대해서는 구속은커녕 증거인멸을 방조해 오고 있다. 현재 지방검사장들을 주민선거로 선출하도록 하고 선출된 검사장에 대해서는 대통령이 임명하는 규정이 적용되지 않도록 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검찰청법 개정안이 발의되어 있는데, 이를 넘어 검찰의 수사권독점을 분산시키는 등 한층 더 강화된 검찰에 대한 시민 통제권을 반드시 마련해야 한다. 아울러 검찰 외에도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을 불법적인 방식까지 동원해 이어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실패로 돌아갔지만 간첩단 조작 등을 통해 야권 인사들을 엮으려 하는 등 공작 정치를 주도해 온 국정원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수술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 외에도 수많은 국가권력 기관들의 문제가 대두되고 있는데, 헌법재판소의 정치적 독립성과 삼권분립의 원칙 침해 등에 대해 반드시 밝혀내야 하며, 마찬가지로 근본적인 해결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국가권력 기구들의 문제만큼이나 심각한 것이 바로 언론이다. 이명박 정권 하에서 집요하게 진행되어 온 언론 독립성 파괴 공작과 종편 지원 등으로 인해 불과 얼마 전까지 언론은 철저하게 정권의 나팔수로 전락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 언론들은 심지어 시위 진행 지도를 보여주며 시위 진행 상황을 안내하거나 앞 다투어 현 정권의 온갖 비리와 국정농단, 심지어 수십 년 전의 박근혜와 최태민 간의 관계까지도 보도 경쟁을 하고 있다. 이는 결단코 청와대의 통제력이 약화되어서도 언론인으로서의 자세를 되찾아서도 아니다. 따라서 언론에 대해서도 매우 단호한 단죄와 더불어 권력의 언론 장악 장치들을 파괴할 수 있도록 여론을 형성하고 마찬가지로 시민적 통제가 가능하도록 근본적인 구조 개혁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재벌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박근혜 게이트에서 저들이 소극적 참가자거나 피해자가 절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명확하게 인지해야 한다. 박근혜와 재벌 총수들이 직접 만나 돈을 낸 대가로 실제로 이들의 민원을 들어주었는지 아닌지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쇼를 하면서 직접 만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언제든지 정권은 재벌을 비롯한 부유층과 기득권세력의 이익에 복무하고 노동자, 서민들을 억압해 온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현 사태를 계기로 다시 한 번 재벌개혁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이영복 엘시티 특혜분양에서 보듯이, 감시권 바깥에서 국가를 좀먹고 있는 재벌 외 자본가들과 부유층에 대한 사회적 통제수단, 중앙과 지방을 막론하고 권력과 자본의 영합을 제어할 수 있는 시민이 주도하는 논의들이 활발해져야 한다. 진보 지식인들과 활동가들은 정치사회에서의 문제만으로 스스로 사안을 좁혀 어느 집단에 줄을 서거나 지지를 보내는 일에 과도하게 몰두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특히 현재의 정치적 사안들이 불거지기 불과 얼마 전까지도 한국사회는 심각한 사회적 문제들로 홍역을 앓고 있었다. 이주자와 소수자는 물론 여성 일반, 심지어는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해서조차 혐오와 배제의 정서가 우리 사회를 뒤덮어 왔다. 박근혜가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없는 것이 문제’라든가 최순실 모녀까지 포함해 ‘암탉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는 등 이미 박근혜 정권에 비판적인 국민 내에서조차 심각한 여성혐오에 근거한 비판을 해 온 이들이 많다. ‘병신년에 병신년이 병신 짓 한다’는 등 장애인을 비하하는 말도 서슴지 않는 이들이 심지어 상당한 용기를 요하는 시위대 안에도 넘친다. 따라서 이제 저항이라는 공통점 외에 다른 부분들, 특히 그것이 인권과 (성)평등, 실질적 민주주의 등을 저해하는 것일 경우 과감하게 드러내야 하는 시점이 왔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해야 한다고 해서 반동적이고 퇴행적인 요소까지 다 용인하고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 시민 대부분은 설사 정권이 바뀌더라도 큰 변화 없이 현재의 헬조선을 살아갈 것이다. 결국 커다란 사회경제적 변화가 없으면, 더욱 무서운 기득권세력의 반격이 있을 것이 자명하다. 따라서 이제 지식인들과 활동가들은 저항이나 탄핵 그 자체에만 착목할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그것은 100 년도 더 넘은 과거에 썼던 용어와 개념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현실 속에서 가능한 것부터 조금씩, 그러나 아주 과감하게 밀고 나아가야 할 것이다. 어렵게 열린 시민들의 고양된 정치의식을 정치사회만으로 좁혀서 집중하게 해서는 안 된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들이 이렇게 끔찍한 사회를 방치한 결과가 정치를 퇴행하게 만든 것이기도 하다. 어렵게 살아가는 이들이 정치세력들에게 향해야 하는 요구와 불만을 옆과 아래에 있는 약자들과 소수자들에게 향하게 만든 것이다. 100년 전과 똑같은 내용을 반복해서는 안 되지만, 누가 대선후보가 될 것이고, 어떤 당이 지지율이 높은지가 아니라 시민들이 정치와 경제를, 관료와 재벌을 조금 더 통제할 수 있을지에 대한 21세기적 시민혁명이 필요하다. 이 글은 2016년 12월 21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470 | 추천: 0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1. 국민의 권력 전번 10월 25일에 「민주주의적 파문이 요구된다」라는 글을 써서 올렸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 독직 사건’(흔히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이라고 하지만 이는 잘못된 명칭이다.)을 계기로 국민들의 대의기관인 국회의원들이 국회를 통해 최고의 통치 권력 기관인 대통령의 탄핵을 가결하여 헌법재판소의 판결만을 남겨두고 있다. 이러한 국회에서의 대통령 탄핵은 국회의원들의 자발적인 판단과 운동에 의거한 것이 아니었다. 수백 만 명의 국민들이 곳곳의 광장에 총집결하다시피 해서 현직 대통령에 대해 ‘하야’, ‘퇴진’, ‘탄핵’, ‘체포’ 등을 외치면서, 각자 국민으로서 헌법에 의해 명기 · 보장된 자신의 권력을 행사한 결과였다. 이러한 국민들의 직접적인 권력 행사는 헌법에 명기 · 보장된 집회 및 결사의 자유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동안 국민들은 투표를 통해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을 선출하여 간접적으로 자신들의 권력을 행사하고자 했다. 그런데 국민들은 그 간접적인 권력 행사가 무용한 정도가 아니라 악용되어, 오히려 자신들의 권력을 짓밟고 우롱하여 폐기 처분하다시피 한 사실을 확연하게 인식했다.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 생각을 직접 실천에 옮기고자 광장에서 직접적으로 권력을 행사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국회에서의 대통령 탄핵을 이끌어낸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이를 통해 국민들의 간접적 권력 행사의 결과로 이들 기관이 갖게 된 대의적인 권력은, 헌법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명기 · 보장된 국민들이 갖는 근본 권력에 의거한 것임을 현실적으로 실증해 보였다는 것이다. 이에 우리는 국민의 권력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하게 된다. 첫째는 헌법에 명기된바 모든 종류의 국가권력의 원천인 국민의 근본 권력이다. 둘째는 국민투표를 통해 형성되는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을 기관으로 삼아 간접적으로 발휘되는 국민의 대의 권력이다. 셋째는 이번 촛불 집회에서 현실적으로 행사된 국민의 직접적인 권력이다. 2.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권력의 개별성과 보편성 이 중에서 특별히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마지막 ‘현실적으로 행사되는 국민의 직접적인 권력’이다. 국민의 대의권력의 행사가 지극히 사적인 권력으로 심각하게 변질됨으로써 국민의 근본 권력이 완전히 무력(無力)하게 되다시피 하자 대대적으로 발휘된 것이 바로 국민의 직접적인 권력 행사다. 12월 13일 자 《한겨레신문》 3쪽에 실린 ‘스마트 시민, 새로운 정치(상)’은 이번 촛불 집회를 효율적으로 활성화하기 위해 <온라인 시민회의>를 만들려다 거센 반발에 부딪힌 사건에 대해, 누군가는 “당신이 왜 함부로 나를 대표하려는가?”라는 말을 했다고 전하고 있다. 합법적인 대의권력 기관인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대의적인 시민단체조차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일체의 대의적인 권력 행사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민들 각자의 자결(自決)에 의거한 직접적인 권력의 행사야말로 진정한 권력행사라는 것인데, 주시해야 할 사실은 그러한 각자의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권력의 행사가 수 백 만의 통일된 집단적 권력으로 현실화되어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통일된 보편적인 권력으로 현실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국민의 근본 권력이 지닌 개별성과 보편성이 하나로 결합되어 현실화되었다는 것이다. 좀 더 이론적인 설명을 하자면, 추상적인 보편성이 개별성에 의해 현실화됨으로써 구체성을 현실적으로 확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철학자 헤겔(G. W. F. Hegel, 1770∼1831)은 국가를 일컬어 ‘구체적 보편성’이 현실화된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국가권력 역시 ‘구체적인 보편성’을 띤 것이라고 해야 한다. 이때 ‘구체적’이라는 것은 국가권력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지닌 권력을 하나하나 반영할 뿐만 아니라,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적용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편적’이라는 것은 국가권력이 통일적인 정체성을 가질 뿐만 아니라, 국민들에게 평등하게 통일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이다. 이를 염두에 두고 보면, 이번 대대적인 촛불 집회를 이른바 ‘촛불 시민혁명’이라 일컬을 수 있는 핵심 근거는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 온 ‘대의제 민주주의’로 인하여, 간적접인 권력 행사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던 국민들이 직접적으로 개개인의 국민권력을 행사함과 동시에 통일된 국민권력으로 승화시켜 냈다는 점이라 할 것이다. 말하자면, 구체적 보편성을 띤 국가의 진정한 면모를 현실적으로 실현해 보인 점이라 할 것이다. 국가는 비가시적이다. 그래서 자칫 국가의 보편성은 추상적인 수준에 머물기 쉽다. 옛 군주제에서의 국가의 보편성은 전혀 구체적으로 실현되지 않고 오로지 강압에 의거한 추상적인 것에 불과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져 온 독재정권들은 국가를 국민으로부터 찬탈하여 사적인 소유로 전락시킴으로써 국가의 보편성을 지극히 추상적인 수준에 머물게 했다. 그러면서 강압적인 대의정치를 참다운 국가정치인 양 호도했다. 그 이후, 특히 민자당, 한나라당, 새누리당 등으로 이름을 바꾸어가며 이들 독재정권들의 혜택을 톡톡히 받고 있는 정치 세력들은 국민투표에 의한 국민들의 대의적인 권력 행사가 마치 헌법이 명시하여 보장되어야 한다는 국민들의 근본 권력의 최종적이고 유일한 형태인 양 여겨왔다. 그러면서 국가 권력의 기관을 일정하게 탈법적으로 동원하면서까지 각종 정치적인 홍보 전략을 구사하여 국가권력의 보편성을 실질적으로 대표하는 것처럼 행세했다. 그 결과 국가권력의 보편성을 추상적인 수준에 묶어두는 방식의 정치를 해 온 것이다. 사진 출처 - 한겨레 3. 마무리 그러나 이번 ‘촛불 시민혁명’을 통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지닌 개별적인 근본 권력이 현실적으로 발휘됨과 동시에 그러한 국민의 근본 권력이 통일된 보편성으로 실현됨으로써, 그동안 당연시되면서 자행되어 온 추상적인 국가 및 국가권력의 보편성이 구체적인 보편성을 갖춘 국가 및 국가권력으로 탈바꿈되는 대 전환의 계기를 맞게 된 것이다. 만약 앞으로 대의 정치에 의거해서 대통령직을 맡아 수행하려 하거나 국회의원직을 맡아 수행하려는 자들이 이 같은 구체적인 보편성을 띤 국가의 정체 및 구체적인 보편성을 띤 국가권력을 금과옥조인 양 온몸에 새겨 정치활동에 임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이번 ‘촛불’이 그야말로 ‘대전환의 시민혁명’으로 현실화되어 역사적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만 하고 또 그렇게 되리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 글은 2016년 12월 14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452 | 추천: 0
신하영옥/ 여성운동연구활동가 지난 주 수업시간 “여성운동, 여성의 해방은 인권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봐요. 정치적 차원에서 주장할 것이 아니라... 여성운동은 그동안 어떤 방식으로 해 왔나요?” 의견과 질문이 동시에 섞인 한 학생의 발언에 잠시 멈칫거리게 되었다. <인권>과 <정치>가 별개였는지? <정치적>이라함에 대하여 사람들은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 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대답은 뒤에서 언급하도록 하겠다. 그리고 그 시간을 전후로, 지난 30여 년 간 해왔던 여/성/운동에 대해 뒤돌아볼 수밖에 없게 만든 현장에 있었다. 하나는 강남역여성살해사건 이후 198일간의 기록을 통해 그간의 활동을 정리해보는 자리였고 다른 하나는 사이버여성폭력에 대해 대응하던 일군의 여성들이 오프라인에서 단체를 결성하는 아주작고 소박한 자리였다. 이 두 현장에서 어쩌면 민주화와 더불어 30년간 여성운동을 해 왔다고 인식하고 있던 나는, 새로운 여성폭력현장과 현상의 출현에 대해, 그 잔혹함에 대해, 그리고 이에 저항하는 여성들에 대한 질기고 악랄한 위협과 테러에 준하는 남성들의 대응양태를 현장에서 겪은 그들을 통해 들으면서 절망, 슬픔, 안쓰러움, 분노, 공포 등 여러 복잡한 감정에 휩싸여야 했다. 강남역 사건이후 전국에서 자발적으로 추모제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발화하였다 하더라도, 책임질, 즉 ‘총대를 메야’할 누군가는 필요하기에 자발적인 ‘총대’들이 나타났고 이들은 며칠 밤낮을 새우며 추모현장을 지켜야 했다. 그러나 이미 여러 매체를 통해 알듯이 ‘일베’를 비롯하여 수많은 남성과 남성 집단들이 ‘웬 여혐살인?’ 이라며 이들을 비꼬고, 비웃고, 욕하고, 위협하고, 나아가 타이르기 까지 했었다. 토론회에서 총대들이 겪은 사건들, ‘커터칼을 드르륵거리며 추모현장을 배회하던 남성’, ‘일베구성원들의 집단적인 추모현장 훼손’, ‘저지에도 불구하고 카메라로 촬영’, ‘동영상 및 영상 올리기’ 등 순간순간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게 하고 후속작업으로 이어지는 온라인상에서의 촬영공개와 신상 털기는 이들이 현재까지도 그 공포와 두려움 안에 갇혀있게 하고 있다. 이들은 말한다. ‘처음부터 페미니스트는 아니었다.’ 고. 오히려 그러한 남성들의 위협과 공포로 인해, 페미니스트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우리는 ‘소라넷’을 위시하여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차별이 혐오와 뒤섞여있는 여러 사이트들을 알고 있다. 온라인 일상에서 발생하는 이러한 행위에 대한 여성들의 공격은 소위 ‘메갈리아’를 통해 발화하였고 이들의 행위는 ‘미러링’이라는 양식으로 수많은-소위 진보남성을 포함-남성들의 비판과 우려, 타이름의 대상이 되었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는 더 치열한 보복과 위협들이 이 여성들에게 가해졌음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드물다. 이들에 대한 신상 털기는 결국 이들이 직장을 그만두게 될 지경으로 만들고, 고소로 인해 수많은 이들의 온라인 활동을 중단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고소와 그 판결에 따른 경제적 문제까지 떠안고 있으며, ‘남혐’ 신고로 이들의 활동사이트가 폐쇄조치 되거나 남성들의 공격으로 인해 자체 폐쇄하거나 아니면 폐쇄적으로 운영 중에 있다. 그러나 ‘여혐’사이트에 대한 신고는 ‘표현의 자유’라는 보호 하에 운영되고 있는 것, 이것이 온라인에서 발생하고 있는 현상들이다. 많은 여성들이 온라인에서의 성폭력저항활동이 위축되거나 포기하고 있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라인을 넘어 좀 더 공식적인 활동으로 만들기 위해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연결시키려는 시도가 있었고, 그것이 앞서 말한 단체의 개소식이었다. 그들 역시 여전히 그간 당해온 남성들의 위협과 ‘신상 털기’ 등으로 인해 공포와 두려움, 상처를 안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서울시여성가족재단 성평등 도서관 '여기'에 마련된 '기억 존'에 전시된 추모 메시지 사진 출처 - 여성신문 이 두 현장의 두 일군의 여성들을 보면서 어떤 이는 여성운동의 맥이 끊이지 않았다 반가워하고, 어떤 이는 온라인상의 여성폭력과 저항을 담론화해야 한다고도 한다. 나는.... 그냥 이들이 잘 생존했으면 했다. 두려움과 공포로 인한 상처, 신상 털기로부터 비롯된 직장 및 집, 가족들과의 결별로 인한 가난과 법적 다툼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과 심리적 위축으로부터 이들이 살아남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딸 또래의 이들의 저항이 너무나 처절하고 힘겨워서, 여성운동을 했다는 것이 정말 미안할 지경이었다. 처음부터 이들의 활동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간접적인 평가와 소문에 의존했던 것에 대한 환멸. 여성폭력관련법들이 제정됨으로써, 형식적 시스템이 구비됨으로써 어쩌면 여성폭력은 공식적 시스템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은밀하게 숨어버렸던 듯하다. 마치 성매매 집결지를 없애자 다른 곳에서 진행되는 것처럼. 여성의 권리는 ‘인권’이다. 그러므로 여성해방운동은 인권운동의 차원에서 진행되어왔다. 여성도 인간이라는 자명한 듯 보이는 이 도식을 이해시키기 위해 30년을 넘게 싸워왔다. 그리고 그 해결을 ‘정치적’ 으로 접근하여 법과 제도로 이식해왔던 것이다. 페미니즘이 뭐냐고 묻는다면 여성들의 수만큼 많은 페미니즘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페미니즘은 삶의 현장이라는 맥락 속에 있는 주체들을 중요하게 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성도 인간’이라는 것을 주장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실천들이 페미니즘이라고 정의한다면, ‘공적’인 영역에서 ‘시스템’과 ‘조직’으로 여성에 대한 비인간적 처우를 개선하려고 한 것이 그간의 여성운동이라면, 현재 벌어지고 있는 여성운동은 ‘공공의 성격을 띠나 매우 개인화된’ 온라인이라는 공간에서 ‘담론과 언어’를 통해 ‘개인’들이 여성차별과 폭력에 저항하는 방식이다. 이는 ‘일상의 민주화’라는 측면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일상 속에서 부딪히는 것은 시스템으로써, 구조로써의 가부장제가 아닌 ‘남성의 얼굴을 한’ 가부장제이다. 그러므로 남성 대 여성, 혹은 남성 집단 대 여성집단 이라는 구도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이 부분을 인정해야 한다. ‘왜 자꾸 남성과 여성의 대결로 몰아가느냐?’ 고 ‘나까지 싸잡아 몰지각한 남성으로 몰지 말라’ 고, 또는 ‘너무 예민하다.’ 고 할 것이 아니다. ‘일상의 민주화’는 뒤집으면 ‘일상의 비민주성’을 의미한다. 일상이 비민주적일 때 그 속에는 억압과 폭력의 주체와 대상이 존재한다. 가부장제 한국사회에서 과연 어떤 성이 주체이고 대상일 것인가는 자명하다. ‘미스 박’으로 모든 못마땅한 여성을 대상화하는 언어와 태도가 존재하는 한, 그리고 집회에서 성평등을 주장하는 여성들에게 여지없이 욕설이 날아들고 성추행이 발생하는 한, 나는 어떤 정권 혹은 정부형태라 해도 온전히 민주적이라고 느낄 수 없다. 민주주의는 누구나 주인/주체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권력에서의 의미만이 아니다. 아니 국가권력의 존재이유가 권력을 위임한 국민들 즉, 국가의 주인/주체들의 삶을 잘 조직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일상적인 삶을 누군가의 방해나 억압 없이 스스로 조직할 수 있을 때 제대로 된 민주적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국가의 존재 자체가 국민구성원 모두의 자치적인 일상의 정치를 보장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민 개개인이 곧 국가이며, 국가의 성격은 따라서 국민들의 성격을 닮을 수밖에 없다. 민주화에 대한 함성과 열망이 뜨거운 요즘, 그 어느 때보다도 나의 삶의 조직방식, 일상의 정치방식에 대해 성찰해야 한다. 어떤 방식으로 나는 타인/타자, 특히 소수자와 연결되고 영향을 미치는가? 국가와 사회의 민주화가 내 삶과 어떤 연결을 가지며,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며, 어떤 방식으로 구성되는지, 무엇이 민주화인지? 나는 민주적인지...... 이 글은 2016년 12월 7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395 | 추천: 0
김재완/ 방송대 법학과 교수 박근혜-최태민-최순실, 수 십 여년에 걸쳐 형성된 사악한 권력욕의 덩어리가 만천하에 그 민낯을 드러낸 순간 이 나라 주권자들의 자괴감은 절정에 치달았다. 박근혜를 정점으로 그를 호위하고 방어해온 비선을 중심으로, 정당과 정부에서 한 자리 더 차지하고자 범친박임을 내세우는 정치인들, 출세욕에 눈 먼 검사들, 이 정부에서도 더욱더 노동자들을 탄압하고 이윤을 착취하는 것에 골몰해온 일부 기업들, 오직 정권의 나팔수 역할을 해온 언론 등등 공적 임무와 역할은 망각한 채 오직 박 정권과의 커넥션을 통해 사리사욕만을 추구하는 이른바 ‘박근혜 사적권력복합체’가 드러난 것이다. 국정 전반에 걸쳐 정당한 법적 정치적 절차들은 무시하고 그 입맛대로 국정을 농단함으로써 철저하게 권력을 사유화하고, 이를 통해 막대한 사익을 축적해 온 것이다. 때문에 이러한 현실을 목도한 주권자들의 자괴감은 형언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 자괴감은 박근혜 퇴진의 백만 촛불과 절대 다수 국민들의 지지로 승화되어 주권자의 자존감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그런데 주권자의 대리인들은 정치 공학적 계산에 몰두하느라 주권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사태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다시 한 번 주권자들에게 정신적 쇼크를 안겨주었다. 다행이 추미애 대표가 영수회담을 철회하고, 문재인 전 대표가 국민과 함께 전국적인 퇴진운동을 선언함으로써 주권자의 정신적 쇼크는 일단 회복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전개에서 읽혀지는 것은 정치 일선의 엘리트들은 ‘민(people)’의 직접적인 뜻과는 관계없이, 이중적인 정치 플레이를 보다 더 선호한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정치적 계산이 적절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박근혜-최순실 사건’은 그러한 정치적 계산이 적용될 수 없는 것임이 명백하다. ‘박근혜-최순실 사건’은 ‘박근혜 사적권력복합체’의 도덕적·정치적·(헌)법적 죄책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사태에 대해 올바른 의식을 가진 정치인이라면 어느 정당 소속인지, 보수인지 진보인지를 불문하고 박근혜 대통령의 헌정문란으로 야기된 국민의 목소리에 절대적으로 귀 기울여야만 한다. 이중적인 계산을 하면서 ‘책임총리’이니, ‘권한대행 총리 체제’이니 하는 논의 등은 문제의 본질을 더욱 흐려지게 만들고 있다. 또한 ‘탄핵’을 끼워 넣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대다수 국민들은 탄핵에 관한 헌법 내용을 정확히 모르는 것이 사실이다.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는 국회재적의원 과반수의 발의와 국회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헌법 제65조 제2항 단서). 그러나 이것으로 탄핵이 바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절차는 탄핵‘소추’일뿐이다. 최종적인 탄핵결정은 헌법재판소가 재판관 6인 이상이 찬성을 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러한 헌법 프로세스를 거쳐야만 비로소 대통령을 물러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탄핵이라는 카드가 힘과 실효성을 가지려면 결의요건인 3분의 2를 훨씬 넘어서는 압도적 다수로 충족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헌법이 법이기는 하지만, 정치와 사회의 역동성을 담지 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만일 힘겹게 그 요건을 충족했다면 헌법재판소가 흔쾌히 탄핵결정을 하는 데에 주저하고 그들의 숨겨진 정치적 이해에 따라 불탄핵의 법리를 내놓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탄핵소추 후 헌재의 절차에서 검사역할을 맡는 것은 국회의 법제사법위원장이다. 그런데 법제사법위원장이 누구인가? 박근혜 최순실 사건의 특검도 반대하는 박근혜 결사옹호대가 아닌가?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예상할 때, 탄핵이라는 카드도 그렇게 녹녹하지 않은 것임을 알 수가 있다. 현 시국에 대해서 이러저러한 해법들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절대 다수의 국민들이 ‘박근혜 사적권력복합체’가 저지른 헌정유린 범죄를 단죄할 것과 수괴인 박근혜의 퇴진을 한 목소리로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땅히 그렇게 될 것을 명령하고 있다. 이러한 주권자 국민의 명령으로 박근혜 대통령은 이미 그 민주적 정당성을 잃었다. 따라서 자연인 박근혜만이 남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주권자의 모든 대리기관들은 오직 주권자의 명령을 이행하는 것에 충실해야만 한다. 정치적 합의로 대통령 퇴진을 우선적으로 관철하는 것이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이다. 그 다음으로 헌법상 실행방안을 자연스럽게 도출해내는 것이 순리이다. 사진 출처 - 노컷뉴스 검찰 및 특검의 수사는 ‘박근혜 사적권력복합체’의 헌정유린 범죄의 실체가 그 뿌리까지 낱낱이 드러날 때 까지, 즉 국민에게 한 점의 의혹조차 용납하지 않을 경우까지 되어야만 하고 그렇게 되도록 정치적 법적 뒷받침을 해주어야만 한다. 그러나 현재 국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특검법안 처리의 모습은 정치권이 주권자 국민의 뜻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또 한 번 드러내는 행태를 보여주고 있다. 이미 박근혜는 주권자 국민의 퇴진명령에 의해 대통령의 자격을 상실했다. 이 점을 정치권은 망각하고 있다. 철저한 수사대상으로서의 자연인 박근혜만이 남아 있다는 것을 각인하고, 이에 따라 주권자의 대리권한을 수행해야만 한다.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정치세력은 단연코 정치생명을 잃고 말 것이다. 또한 박근혜는 더 이상 청와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청와대는 주권자인 국민의 소유이다. 국민의 위임에 따라 5년간 헌법수호의무를 다할 때 까지만, 그 존속을 보장받았을 뿐이다. 이제 헌법질서를 파괴한 범죄의 수괴인 박근혜는 그러한 존속보장을 누릴 수가 없으므로 당연히 퇴거해야만 한다. 그리고 모든 정부기관과 공무원들은 국민의 퇴진명령과 퇴거명령을 받은 박근혜의 명령을 거부할 정당한 권한을 가진다. 이제 모든 정부기구의 작동은 주권자 국민의 명령에만 기속해야 한다. 우리 주권자는 주권자로서의 저항책무를 지속적으로 다함으로써, ‘박근혜 사적권력복합체’를 뒷받침해온 모든 기득권체제의 부정의와 탐욕을 이제는 종식시켜야만 한다. 주권자인 우리와 우리 아이들의 미래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2016년 11월 23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428 | 추천: 0
-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카타르, 터키 홍미정/ 단국대 중동학과 조교수 □ 오마바 정부의 무기판매: 걸프 아랍왕국들과 터키 무기거래는 핵심적인 전쟁동력이다. 2011-2015년 시리아, 리비아, 예멘에서 내전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 무기 수출은 전 세계 무기거래 총량의 33%를 차지했다. 이 내전에 깊이 개입한 걸프 아랍왕국들, 사우디, 아랍에미리트, 카타르와 터키는 주로 미국으로부터 무기를 구매했다.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SIPRI)에 따르면, 2011-2015년 세계 최대 무기 수출국가인 미국의 무기판매에서 걸프 아랍왕국들은 가장 중요한 시장이었다. 현재 진행 중인 시리아와 리비아 내전이 시작된 2011년을 분기점으로, 2006-2010년과 2011-2015년 무기거래를 비교해볼 때, 중동국가들의 무기수입은 61% 증가한 반면, 같은 기간 동안 유럽 국가들의 무기수입은 41%감소하였다. 이 기간 동안 중동국가들의 급격한 무기수입 증가를 견인한 국가는 사우디와 카타르다. 이 시기에 사우디의 무기수입은 275%, 카타르의 무기수입은 279%만큼 증가했으며, 아랍에미리트 무기수입은 35% 증가했다. 사우디는 시리아와 예멘 내전에 직접 개입하고 있으며, 카타르는 시리아와 리비아 내전에 직접 개입하고 있다. 아랍에미리트는 리비아 내전에는 깊숙이 직접 개입하고 있지만, 시리아와 예멘 내전에는 거의 연루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터키는 시리아와 리비아 내전에 깊이 개입하고 있다. 시리아 내전(2011년 3월–현재)에서 사우디, 카타르, 터키가 협력과 경쟁을 하면서 서로 다른 반군들을 지원한다. 시리아 정책연구센터(SCPR)에 따르면, 2011년 3월부터 2016년 2월까지 계속된 시리아 내전에서 47만 명이 사망하고, 전체 주민들 1천 8백 만 명 중 47%가 거주지에서 축출되었다. 유엔난민기구(UNHCR)에 따르면, 2016년 11월 7일 현재 해외 시리아난민 481만 명 이상이 터키, 요르단, 레바논 등지에 있다. 2011년 이후, 두 차례의 리비아 내전(1차: 2011년 3월-2011년 10월, 2차: 2014년 5월–현재)이 발발하였다. 1차 내전은 미국, 프랑스 등 다국적군이 개입함으로써, 1969년 9월 이후 리비아를 통치해온 카다피를 축출시켰다. 2차 내전에서는 아랍에미리트와 이집트가 동부 세속주의자 정부를 지원하고, 카타르와 터키가 서부 이슬람주의자 정부를 지원한다. 2014년 5월부터 2016년 6월까지 계속된 2차 내전에서, 전체 리비아 주민 약 640만 명 중에서 4,700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2015년 3월 이후 사우디는 예멘 후티반군과 전쟁 중이다. 유엔 보고서에 따르면, 사우디가 폭격을 시작한 2015년 3월부터 2016년 9월까지 예멘에서 약 4,000명의 민간인을 포함하여 11,000명 정도가 사망하였다. 2009-2016년 집권한 오바마 정부는 사우디에게 1,150억 달러의 무기판매를 승인하였다. 이것은 오바마 정부 통치기간동안 총 무기판매량 2,788억 달러의 41%를 초과하는 액수다. 이 기간 동안 미국산 무기구매 총액 중 1위는 사우디, 2위는 아랍에미리트, 3위는 터키였다. 부시는 이라크 통치자 후세인을 직접 공격하는 방식을 취했지만, 오바마는 동맹국들을 통하여 무기 공급선을 활용하면서 대리전쟁을 수행하고 있다. 결국 오바마 대통령은 협상과 중재를 통한 중동 전쟁 해결대신, 무기판매라는 대리전쟁을 선택함으로써, 내전들을 격화시키고, 장기화시켰다. □ 어느 정부가 더 공세적이었나?: 부시 정부와 오바마 정부 지난 20년 동안 미국은 대체로 세계 무기시장의 30%-50%를 점유했다. 그런데 2012년 시리아 내전이 격화되면서, 미국은 연간 세계 무기 거래량의 70%를 차지함으로써 연간 최고 판매치를 경신하였다. 2009-2016년 오바마 정부의 무기 판매 사진 출처 - defenseone.com 2001-2008년 집권한 부시정부는 1,286억 달러의 무기판매를 승인하였다. 2009-2016년 집권한 오마바 정부는 2,788억 달러의 무기판매를 승인하였다. 오바마 정부의 무기판매액은 부시 정부의 2배 이상이다. 구체적으로 오바마 정부는 2009년-321억 달러, 2010년-220억 달러, 2011년-270억 달러, 2012년-678억 달러, 2013년-242억 달러, 2014년-319억 달러, 2015년-402억 달러의 무기판매를 승인하였다. 최종적으로 2016년 11월 8일 오바마 정부는 2016년-336억 달러의 무기판매를 승인하였으며, 이것은 70억 달러를 넘을 것으로 예상되는 쿠웨이트, 카타르, 바레인에 대한 전투기 판매를 포함하지 않은 것이다. 2009년 오바마가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 미국 특수부대(USSOCOM)는 약 60억 달러의 예산과 56,000명의 요원으로 구성되었다. 2016년 오바마 대통령은 차기 정부에 미국 특수 부대 예산을 거의 두 배인 110억 달러로, 특수부대 요원을 70,000명으로 증가시켰다. 미국 특수부대는 현재 시리아 내전 등 중동 전쟁에서 활동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것이 2009년 12월 노벨 평화상을 받은 미국 대통령 오바마의 진면목이다. 이 글은 2016년 11월 23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486 | 추천: 2
이문영/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 통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마음이 간 곳이 없다. 산란한 마음에 자꾸 뉴스만 클릭하게 된다. 그 사이 또 어떤 엄청난 일이... 무섭기도 하다. 내 잘못도 아닌 일에 이렇게 ‘쪽팔리게’ 될 줄 몰랐다. 집중이 되지 않으니 차라리 청계광장으로, 광화문으로 나가볼까. 그런데 뒷덜미를 잡아끄는 글 빚들, 당장 처리해야 할 업무들... 하지만 마침내, 지금 ‘뭣이 중한디?!’ 한동안 인구에 회자되던 영화 속 대사를 이렇게 읊조리게 될 줄이야. 요즘과 꼭 같은 마음상태였던 때가 한 번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소식을 들었을 때다. 그땐 그게 그렇게 쉽더니... 이런 시국에 무슨 다른 주제의 칼럼을 쓸 수 있을까...싶었지만, 흘러넘치는 이 어처구니없는, 그러나 엄연히 사실인 이야기들, 아무리 들어도 새삼스레 진저리쳐지는 소식들, 당연한 분노와 흥분과 규탄에 또 다른 목소리를 얹고 싶지는 않다. 아니, 그럴 능력이 안 된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겠다. 잘못돼도 너무 잘못돼,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어디서 끝내야할지도 모르겠으니. 그런 차에 필자가 속한 기관에서 진행 중인 <평화아카데미> 수강생들과 함께 ‘철원 평화예술기행’을 할 기회가 주어졌다. 60여년 넘게 계속된 정전 상태에 멈추어있는 곳. 이 아수라장을 잠시라도 떠나 차라리 그 멈춤 속에 서고 싶었다. ‘폐허 위에서 평화를 상상하다’라는 컨셉 아래 분단의 비극, 그러나 통일의 희망을 함께 상징하는 철원으로 떠났다. 안보관광이 아닌 ‘평화기행’의 일종으로. 철원은 현재 남한의 북쪽 한계선에 자리하지만, 사실 딱 한반도 허리에 해당하는 지리적 중심이다. 궁예가 통일신라와 후백제에 맞서 후고구려의 도읍으로 철원을 정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곳 평화전망대에 설치된 DMZ 조감도에는 옛 궁예궁터가 함께 표시되어 있다. 한국전쟁 이전 철원은 춘천과 더불어 강원도 내 대읍부향의 하나였다. 경원선의 주요기착지이자 금강산 전철의 시발점이었고, 중부에서는 드문 비옥하고 너른 평야로 농축산물의 거래가 활발했다. 각종 관공서, 금융기관, 교육기관은 물론, 당시로서는 드물게 백화점까지 갖춘 풍요롭고 넉넉한 도시가 철원의 옛 모습이다. 노동당사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하지만 한때 번화했던 도시는 이제 폐허로 남았다. 우리가 돌아본 옛 철원 경찰서, 노동당사, 농산물 검사소, 제2금융조합, 얼음 창고, 수도국지, 철원감리교회 등은 간신히 그 흔적을 헤아릴 수 있는 ‘터’로만 남아 있다. 포탄이 관통한 흔적이 그대로 남은 기둥, 원래의 형체를 가늠하기 힘든 부서진 잔해, 구멍 숭숭 뚫린 벽들 사이로 유독 차가운 바람이 휑하니 분다. 그와 대조적으로 DMZ 남방한계선의 철책, 그 너머의 군사분계선, 남북한 초소, 그리고 곳곳에 잠복한 지뢰와 각종 화기들로 ‘비무장지대’란 이름을 무색하게 하는 ‘중무장지대’의 살벌함은 너무 생생한 현실이다. 만일 우리를 반겨주시고, 가이드를 자청해 우리를 안내해주시고, 차진 철원 오대쌀로 갓 지은 점심과 저녁을 마련해주신 양지리 두루미 마을 어르신들이 안 계셨다면, 그 폐허 속에서 평화를 상상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전쟁으로 숨죽인 땅을 분주히 일깨워 삶의 터전으로 만든 어르신들은 오랜만에 찾아온 젊은이들에 한껏 기뻐하셨다. 그곳을 먼저 찾은 또 다른 젊음들에 그러하셨듯이. 철원 양지리 마을엔 세계 각국에서 온 예술가들이 머물고 있다. 전쟁의 상흔과 평화의 희구가 절박하게 교차하고,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반세기가 훌쩍 넘도록 지속된 긴장이 DMZ 풍경 속에 최대치로 가시화되고, 숨죽이며 총을 겨눈 그 진공상태 속에 오로지 자연만이 무심히 번성하는 이 기묘한 곳에 ‘두루미처럼’ 찾아든 예술가들이다. 예를 들어 아트선재센터의 ‘리얼 DMZ 프로젝트’에 참여한 예술가들은 일정기간 지역주민과 함께 살며 그 특이한 ‘장소성’을 행위예술로, 이미지로, 영화로 풀어내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우리 기행의 가장 중요한 순서도 우리 젊은 학생들과 이 젊은 예술가들의 만남이었다. 이날 ‘철원 평화예술기행’에 참여한 학생들은 각자의 감상과 느낌을 시, 사진, 랩, 퍼포먼스 등 장르 불문, 자신만의 방식으로 예술화한 과제를 제출하기로 되어 있다. 이 학생들이 어떤 결과물을 제출할지 몹시 기대된다. 학점도 인정 안 되고, 별다른 스펙도 될 리 없는, 게다가 하루 일과를 마무리할 저녁 7시에야 시작되는 이 아카데미에 제 발로 찾아온 (혹은 ‘두루미처럼’ 날아든) 이 기특하고 대견한 학생들은 이날 폐허를 종횡무진하며 자못 진지해졌다가 이내 깔깔거렸고, <노동당사 매점>이라는 기묘한 이름의 가게에서 내가 사준 ‘고소미’를 깨물고, 어르신들이 차려준 밥상을 ‘맛있다!’를 연발하며 싹싹 비워냈다. 그날 나는 이미 폐허 위에서 평화를 보았다. 돌아오는 길, 불 꺼진 버스 안, 뒷자리에 앉은 여학생 두 명이 낮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린다. “광장에 사람들 무지 많이 모였대”, “내 친구들 다 거기 있다는데”, “사진 찍은 거 계속 올라와”... 폐허 위에서 내가 본 평화가 헛것은 아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고, 흐뭇해졌고, 기운이 났다. 다시 시작이다! 이 글은 2016년 11월 9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549 | 추천: 0
정재원/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군사 독재가 종식되고 정권의 교체도 경험하게 되면서 최소한 정치적 민주주의, 제도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는 안정화에 접어들었다고 말하던 시기에 유학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제 아주 심각한 정치적 문제는 점차로 사라져 가고 그 동안 상대적으로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던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에 집중해야 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생각하던 시절이다 보니 비록 학위를 위해 정신없는 나날들이었지만 조금은 다른 여유를 갖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특히 유학 자체도 힘든 과정이었지만, 점차로 국가의 권위주의적 성격이 강화되고, 시민사회는 탄압받아 질식 상태였으며, 스킨헤드 등 외국인 혐오증이 사회에 만연하는 등의 문제를 겪으면서 더더욱, 최소한 그 정도는 아닌 소위 민주화를 달성한 한국으로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던 시절이었다. 유학 말기에 한국에서는 다시 보수 정권으로의 정권 교체가 있었으나, 많은 이들의 바람처럼 이제 ‘민주 대 반민주’의 시대는 지나고 합리적인 ‘보수 대 진보’의 정책 경쟁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희망 속에서 설사 이렇게 다시 보수 정권으로 정권이 교체되어도 커다란 후퇴는 없을 것이라 기대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에 박살이 나고 말았다. 필자는 현실 사회에서 보수 세력이라는 것은 사전적 정의인 전통적 가치를 옹호하거나 기존 사회 체제 유지를 통한 안정적 발전추구가 아닌 탐욕과 특권의 독점적 확보와 확대를 추구하는 기득권 세력에 불과하다고 주장해 왔다. 즉 정치 사회의 보수 정당 세력은 이 사회의 지배 집단의 이익을 반영하는 세력들 중 일부분일 뿐이며, 부를 독점하고 착취하고 지배하고 있는 실제 세력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대응하는 것을 방해하는 역할을 해 오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헤게모니 하에서 그들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집단과 오랜 기간 세뇌된 집단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강조해 왔다. 바로 이런 생각을 지지하듯 보수 정치 세력이 정권을 잡자마자 이들을 앞세운 사회의 기득권세력에 의한 노골적이고 급격한 총체적 퇴보가 시작되었다. 한 네티즌이 공중파 뉴스에만 나온 자료를 가지고 한국이 헬조선인 이유에 대해 트위터에 올린 내용이 화제가 된 바 있었다. 그에 따르면, OECD 국가들 중(때로는 조사 대상 국가들 중) 아동 복지비 지출 등 전체 복지비 지출비율, 의료비 공공부담, 언론의 자 , 여성의 사회 참여, 아동 삶의 질, 노인 소득, 삶의 만족도, 고용 안정성, 노동 의욕, 직장인 유급 휴가, 수도권 주거 행복, 성평등도, 사회자본지수, 교사만족도, 수면시간, 아동 성범죄 처벌 정도, 유리천장지수, 행복지수, 출산율, 은퇴 후 생활 자신감, 가족과 같이 보내는 시간 등은 최하위를 기록하였다. 반면, 가계 부채 증가율, 국가 부채 증가율, 물가상승률, 산업 재해 사망, 교통사고 사망, 의료비 지출, 사기사건 발생률, 실업률 증가, 노동시간, 최저임금 이하 비율, 사교육비 지출, 노인 빈곤율, 정규직 해고 용이성, 남녀 임금 격차, 일자리 포기 청년 비율, 여성 · 노인 · 청소년 자살률, 고령층 부채자 비율, 등록금 부담, 아동 학업 스트레스, 대기 질 등은 최고를 기록했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이 현재 한국 사회의 문제들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며, 더 큰 문제는 이번 정권이 들어서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지표들은 모두 수위를 다투거나 꼴찌를 다툰다는 점에서 단순히 어느 나라에서나 나타나는 사회문제라고 치부할 수 없다는 데에 그 심각성이 있다. 게다가 최고/최하만 아닐 뿐 심각한 여러 사회문제들이 한층 더 확대되고 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이렇게 거의 모든 지표들이 보여주듯 모든 측면에서 사회가 파탄 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은커녕 엄청난 실정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세월호 사건과 메르스 사태와 같이 의도적으로 일으킨 사건이 아닌 경우에도 그 대처와 수습과정에 있어서의 대혼란, 진상규명 방해, 원인 은폐 등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한 것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외에도 아주 많이 추려서 굵직굵직한 몇몇 주요 사건들로만 한정해도 문제가 심각하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 잇따른 인사 참사, 윤창중 성추행 사건, 기초노령연금 공약 파기, KTX민영화, 의료 · 가스 · 철도 민영화 추진, 교학사 교과서 논란, 국정원 간첩 조작 사건, 카톡 검열, 전시작전권 전환 공약 파기, 정윤회 비선 실세 의혹, 경남도 무상급식 포기 및 공공의료 기관 폐쇄, 통진당 강제 해산, 각종 비위 장관 억지 임명, 교과서 국정화 강행, 건국절 논란 유도, 성완종 리스트, 미군 탄저균 배달 사고, 각종 검찰 비위 사건 및 정치검찰의 불공정한 편파적 기소, 테러방지법 입법 강행, 위안부 졸속 합의, 개성공단 폐쇄, 노동법 개악 시도, 전교조 법외 노조화, 박정희 우상화 작업에 예산 낭비, ODA의 새마을 운동화, 4대강 수질 악화 방치 및 확대 기도, 세월호 특조위 조사 방해 및 임기 종료, 가습기 살균제 조사 방해, 고 백남기 농민 사건, 사드 배치 강행, 일베 등 방조, 롯데 · 어버이연합 · 권력 실세 등에 대한 비호 및 엉터리 수사, 문화계 블랙리스트, 청와대 주도 미르, K-스포츠와 전경련 등의 연루, 그리고 최근 우병우, 최순실 등 비선과 초법적 특권 세력들의 권력 남용 및 비위 사건 방조 등등 나열하는 것 자체도 버거울 정도로 사태는 심각하다. 문제는 이러한 사건이 말 그대로 우연히 일어날 수도 있는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는 점이다. 위에서 언급한 사건들에는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비리나 부정, 불공정 행위들은 빠져 있다. 위에 나열한 사건들로 한정하더라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러한 실정과 사건들 속에서도 기득권의 이익과 이해를 위한 조치가 취해지고 있었다는 것이고, 설사 그 와중에 명확히 법적인 위반이 드러났다 하더라도 제대로 조사되거나 처벌된 적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기득권들의 국가 사유화 과정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는 상황에서 헬조선을 살아가는 대다수의 국민들은 병들고 다치고 죽어가고 있다. 자살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범죄로 빠지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상황은 심각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서로를 증오하고 혐오하는 풍토가 생겨나지 않는 것이 이상하지 않는가? 기득권들이 자신들의 특권을 지키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상황에서 안타깝게도 힘들게 사는 대다수의 국민들은 조금이라도 다른 집단들, 약한 집단들에 대해 노골적으로 혐오의 감정을 드러내며 불만의 화살을 돌려 댄다. 당연히 이러한 과정에도 저들은 개입한다. 가짜 시민사회단체들을 만들어서 서로에게 화살을 겨누게 하는 것은 물론 자신들의 지지기반이 되고 있는 일베와 같은 젊은 극우 범법자들을 적극적으로 방조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다시 근본적인 물음을 물어야 한다. 저들은 왜 저렇게 뻔 한 거짓 선동을 하고 있는 것일까? 왜 뻔한 은폐와 왜곡을 반복하는 것일까? 당연히 이 모든 짓들은 죄상이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 그 첫 목표이지만, 더욱 근본적인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 우리는 최순실 사태를 겪으며 확실하게 배우고 있다. 이 와중에도 현재 조선일보를 필두로 기득권 세력들은 박근혜 카드를 일정정도 버리면서 소위 비박 혹은 개혁파들을 내세우며 세력을 재편하고 있다. 부화뇌동하는 일부 야권 세력들까지 끌어들일 경우 그 파장은 꽤 클 것이다. 그러나 현재 최순실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씌우는 기득권 연합, 즉 새누리당, 국정원과 검찰 등 각종 관료 집단, 재벌, 그리고 사회 곳곳에 똬리를 틀고 있는 기득권 집단 등등이 연출하는 쇼에 속아서는 안 된다. 자격이 안 되는 대통령을 앞세워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해 온 이들 집단에 대한 시민사회로부터의 통제와 감시, 견제 장치가 확보될 수 있도록 총력을 기울여야 할 때다. 이 글은 2016년 11월 2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473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