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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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강대중(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윤동호(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이동우(변호사),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장은주(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정재원/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사상 초유의 심각한 범죄적 국정농단 사건으로 인해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고 구속됨으로써 곧바로 대선 정국이 시작되었다. 본격적인 대선 레이스가 시작되기 전 각 정당들에서 후보를 선출하는 과정으로 돌입하면서 바로 그 직전까지의 소위 촛불로 상징되는 시민들의 직접적인 거리 정치는 갑작스럽게 정당 정치에게 무대를 내 주게 되었다. 그리고 촛불 시민들의 정치가 무색하게도 너무나 갑작스럽게 정당, 그것도 인물 중심의 정치로 전환되는 상황을 보며 많은 이들이 혼란을 겪고 있다. 특히 한국 정치 역사상 처음으로 소위 보수 정당 후보의 약세 속에 주요 두 야당 후보의 양강 구도가 전개되면서 많은 이들이 너무나도 빠른 속도로 인물 중심의 정치에 과도하게 빠져들고 있는 상황이다. 제대로 된 검증이 필요한 사안조차 전반적으로 네거티브 전략이나 폭로전 정도로 취급되는 상황 속에서 인물 자체에 대해서조차 판단이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마치 정책 선거가 사라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무엇보다 불과 얼마 전까지 전 세계의 칭송을 받았던 숭고한 거리의 직접 민주주의의 가치와 의미가 사라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정당정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대의제를 완전히 대체하는 대안이 없는 이상 현재의 이러한 국면을 과도하게 폄하할 필요는 없다. 같은 맥락에서 반대로 거리의 직접 정치에 대해서도 과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도 없다. 사실 강고했던 영남 중심의 보수 정당에 대한 지지도가 크게 약화된 것 자체가 촛불 시민들의 의지의 발현이며 수개월 동안의 시위의 결과인 것이다. 물론 현재의 한국 대의제 정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직접민주주의적 요소들이 도입되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촛불 시민들의 의지는 거기까지 도달하지 않았다. 냉철하게 되돌아보자. 촛불 시위 이전에도 이후에도 시민들의 요구는 급진적이지 않았다. 대규모 촛불 시위는 박근혜-최순실 일파의 국정농단 자체에 대한 분노에서 비롯되었지 항간에서 주장하듯 팍팍한 삶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언제나 그러했듯, 시민들은 ‘직위도 없는 일개 여성’이 막대한 이득을 취한 것도 문제지만, 대통령을 쥐고 흔들었다는 것 자체에 더 큰 분노를 느꼈다. 따라서 자신들의 삶을 파괴하는 지배 집단의 공격에 대한 분노는 크지 않았다. 게다가 촛불 시위 자체도 야당이나 시민사회운동 진영이 아닌 보수층 내부의 분열로 인해 흘러나온 정보에 의해 촉발되었다는 한계가 있다. 이는 단순히 시작이 그러하니 근본적 한계가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1905년 가퐁 신부의 관제 시위가 1차 러시아혁명으로 이어졌던 것처럼 역사에서는 누가 주도를 했든지 간에 얼마든지 진보적인 결과를 낳기도 한다. 따라서 그러한 의미가 아니라, 시민의 의식과 행동을 통제해 온 보수언론들이 박근혜 일파로 인한 정권재창출 불가능에 대한 우려로 인해 적극적으로 반정권적 보도를 함으로써 보수적 성향의 시민들까지도 정권에 반대하게 만들었다는 점을 의미한다. 또한 촛불 시위가 대규모화될 수 있는 데에는 경찰이 집회를 허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상황이란 바로 최하 4% 정도로까지 추락했던 박근혜 정권에 대한 지지율이었다. 설사 충격적인 폭로가 있었더라도 정권에 대한 지지율이 급락하지 않고 적절한 수준을 유지했었더라면, 경찰은 여전히 강경하게 진압을 했을 것이고, 쉽게 대중적 항쟁으로 이어지지 못 했을 것이다. 당연히 이러한 지지율의 급락은 정권재창출을 염려하는 지배 집단 일부의 언론을 이용한 적극적 반대행위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결국 연인원 1600 만 명에 달하는 시민들의 직접적 거리 항쟁도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두 말 할 나위도 없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역할은 바로 정권에 대한 지지율에 있었다. 이 지지율의 변동에 따라 이후의 정치 사회에서의 변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결국 안타깝게도 선거 정치의 틀 속에서 모든 것이 정해질 수밖에 없다는 근본적인 한계를 가진 채 이 모든 것들이 진행되어 왔지만, 많은 이들이 촛불에 과도하게 흥분했던 것이 사실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권도 정당도 아닌 개인에 대한 지지의 문제로 축소되면서 박근혜 개인에 대한 지지율 및 그가 속했던 정당에 대한 지지는 어느 정도 줄었지만, 그와 별도로 정권교체를 이룰 수 있는 정당으로의 지지율로는 연결되지 않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쉽게 말하자면, 박근혜 개인이나 집권여당 관련 정당들에게는 일단 반대해도 결단코 그 대안으로 더민주 혹은 그보다 더 왼쪽에 위치한 정당들을 선택하지 않는 기존의 보수정당 지지자들의 지지 성향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상황을 두고 세대 간 대립의 구도나 지역 정당 구도가 파괴되는 것과 같은 착시현상이 일어나고 있지만, 사실 국정농단 폭로 이전과 비교해 볼 때, 현재 시민들의 정치적 성향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답답하고 한심한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국가에 의해 만들어져 온 것이나 다름없는 소위 ‘가짜 뉴스’들을 동원한 세뇌공작으로 인해 정권 교체가 저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실패한 정권은 심판을 받고 다른 정권으로 교체되어야 하는 것이 정당정치의 기본이다. 그러나 현재 여전히 적폐 세력을 포함한 스스로를 보수적이라 착각하는 시민들은 가짜 정보들에 기반하여 정권을 교체하는 것을 사실상 거부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기존의 보수정당들을 지지하지 않고 야당들 중에서 지지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따라서 우리는 난무하는 인물 중심의 정치쇼에서 벗어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먼저 보수정치정당을 자임하는 당은 존재하지만, 그것은 보수적인 철학을 갖는 보수적인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단지 기득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특권과 두집단들과 이들에게 세뇌되어 스스로 보수주의자인 양 착각하는 대중들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인물과 정당을 완전히 대체할 정치는 아직 없지만, 정당정치 이면에서 실제 권력을 행사하는 세력이 무엇인지에 대해 명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진정한 정권 교체는 물론 나아가 세력 교체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관점에서 대선을 바라 봐야 하며, 그럴 때만이 적폐가 청산될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정권 교체, 세력 교체를 위해서는 대통령 선거가 끝이 아니라 시작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정권 교체 일정과는 무관하게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특권과 두동맹세력들, 즉 재벌은 물론 국가관료기구와 언론, 그리고 종교와 사학, 전문가 집단, 이익단체 등등 사회 곳곳에 또아리를 틀고 개혁과 세력 교체를 방해하고 있는 사회기득권세력들은 차기 정권이 곧바로 경제적 성과를 내지 못 할 경우 혹은 북한의 위협 등이 고조될 경우 적폐 청산과 사회개혁 시도에 이데올로기 기관들을 총동원해 반격을 가해 올 것이다. 진정한 개혁은 이제 시작이다. 그 첫 단추는 현 시국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적폐 세력이 지지하는 프로그램을 저지하는 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이 글은 2017년 4월 19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468 | 추천: 0
윤영전/ 평통서문예원장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인간답게 살아간다면, 당연히 사회나 나라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살아갈 터이다. 여기에 정의와 진리를 추구하며 더불어 살아간다면 더욱 찬사를 받으며 보람된 인생이라 할 것이다. 그러면 인권이란 무엇일까? 일반적인 해석은, 인간으로서 당연히 갖는 기본적 권리라 정의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그 많은 세상 사람들이 사회로부터 존경을 받으며 행동하고 살고 있는 것일까? 대부분 그리 살아간다지만 상당수가 인권탄압을 당하고 있어 국내외서 인권선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인권을 탄압하고 유린해 말살에 이른다면 인권선언을 통하여 더욱 인간의 평등을 옹호하고 인권회복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이에 우리나라에서도 국가인권위원회가 설립되어 인권개선에 진력했다. 공공기관 인권단체와 더불어 사회단체인 “인권연대”가 일찍이 발족하였다. 오 국장님을 비롯한 많은 분들이 인권개선을 위한 노력으로 결실을 보고 있음에 감사한 마음이다. 필자도 회원이 되면서 주변의 인권문제에 더욱 관심이었다. 돌아보면 조국 분단 72년 전, 일제시대 1941년 12월, 내가 태어난 해에 미일 태평양 전쟁이었다. 그리고 1945년 8월12일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투하의 엄청난 사태로 일본은 미국에 항복을 선언하고 패전국이 되었다. 미. 소는 연합전선 3개월 만에 전쟁 승리자가 되었다. 그들은 한반도에 원한의 38도선을 그어, 남북을 미소가 점령했었다. 그리고 1948년 4.3 제주 항쟁이 일어나 3만5천 주민이 학살을 당했다. 전쟁도 아닌 그들만의 패권을 위해 민간인들의 인권을 말살한 대형사건이었다. 일제 36년 침략도 서러운데 인권이 무시되고 귀한 목숨을 앗아간 것이다. 5.10 선거에 7.17 제헌으로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섰다. 북은 조선인민정권이 9월에 세워졌다. 분단의 단초가 된 미소의 연합군 승리로 그들은 남북을 전리품처럼 38선을 경계로 나누어 통한의 분단선이었다. 대한조선이 일본의 36년간 압제에서 해방이 되었으면, 미소가 한반도 남북이 아닌 일본을 나누어 관리를 했어야지 왜? 무엇 때문에 남북을 분할 관리했는가? 참으로 통탄할 일이였고 지금까지도 이에 대한 진실을 외면하고 있는 사실에 통분한다. 더구나 38선에 북은 소련이 1년 안에 북을 떠났고, 남의 미국은 잠깐 어느 순간 에치슨라인 선으로 물러났었다. 그 후 6.25를 빌미로 다시 남측에 진주하여 결국 72년을 대한민국에 미군이 상주하고 있다는 사실이 형평성도 일반관례로도 맞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어진 1948년 8월15일 정부가 들어서고 10월 중순에, 제주 4.3 항쟁이 계속된다며 소탕을 군14연대에 명령 했다. 허나 박 소령 등 지하 남로당측 군인들이 여수순천에서 정부군에 항전했다. 여순 사태로 수천 명이 가담하고 박 소령도 함께하여 결국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 그들이 사형 등 중죄를 받았다는 사실을 한국전쟁전후학살규명에서 이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필자의 맏형이 광주군청 효지면사무소 근무 중 건국준비위에 활동하다 그만 재판도 없이 총살을 당하고 말았다. 내 나이 9살 때의 사실이다. 아버지는 22살 형의 시신을 수습하여 묻고 50년 만에야 고향으로 이장했었다. 그리고 65년 만에 진실규명을 신청하여 대법원에서 최종 판결로 명예를 회복하여 일부 보상도 받았다. 나의 형만이 아니라 전국 백만에 가까운 억울한 죽음이 있었다. 이처럼 고귀한 인간생명이 무시된 사실에 분노한다. 백만 희생자 중에서 겨우 1만5천명만이 진실규명이 되었고 아직도 억울한 죽음들이 규명되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이 분단이 몰고 온 사상논쟁과 전쟁이 몰고 온 민간인 학살이, 결국 우리가 주장하는 인권회복이 한없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세상에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게 있을까!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지구상에 72년이란 분단국 한반도에 남쪽 정부는 60여년을 보수가, 10여년을 진보가 집권을 했었다. 그간 반공 멸공 승공 흡수 통일을 주장했지만 현실은 평화통일의 길밖에 없다. 현재 미중이 한반도를 그들만의 패권구도라 하지만 남북이 자주적인 평화통일을 이룬다면 사정은 달라질 것이다. 한반도는 미중 러일 4강구도, 특히 미중의 고래싸움에서 새우 등 터지는 꼴이지만 고래싸움을 무시로 조정하는 현실구도를 만들어 내려면 남북이 통일을 이루는 것이다. 이 길이 인권이 존중되는 평화세상이 아닐까! 이 글은 2017년 4월 12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534 | 추천: 0
홍미정/ 단국대 중동학과 조교수 □ SCI급 논문이란?  현재 중동 및 소외지역을 연구하는 한국학자들은 평가점수가 높이 책정된 SCI급 학술지들에 논문 게재를 위하여, 고군분투하지만 너무 힘들다.  미국회사 톰슨로이터가 ‘인용지수’ 조사대상으로 선정한 학술지에 실린 논문을 SCI급(SCI, SCIE, SSCI, A&HCI)논문이라고 부른다. SCI는 톰슨로이터가 평가하여 만들어 낸 과학논문 인용색인을 수록한 데이터베이스다. 인용색인 사업은 1961년 과학분야(SCI)에서 처음 시작되었고, 과학논문 인용색인 확장판(SCIE), 사회과학논문 인용색인(SSCI), 예술&인문학논문 인용색인(A&HCI)으로 확대되었다.  현재 한국에서, 이 인용색인에 따른 인용지수는 특정 논문의 우수성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제공되며, 인용지수가 높은 학술지가 좋은 학술지로 평가 받는다. 톰슨로이터 회사가 인용색인 데이터베이스를 만든 가장 큰 목적은 각 분야 논문의 인용지수를 파악하고, 이를 활용하여 또 다른 영향력 있는 정보들을 생산하기 위한 것이다.  2017년 1월 현재, SCI 학술지 3,743종, SCIE 학술지 8,896종, SSCI 학술지 3,250종, A&HCI학술지 1,781종으로 공시되었다. □ 미국과 영국 및 서유럽에 편중된 SCI급 학술지  2017년 1월 현재 국가별 SCIE(SCI 학술지 대부분은 SCIE에 포함)학술지는 미국과 영국, 그리고 유럽에 다음과 같이 편중되어있다; SCIE 학술지 전체 8,896종 중, 미국 학술지 42.1%, 영국 학술지 19.8%, 영국과 미국 학술지를 합치면 61.9%이고, 네덜란드, 독일, 스위스 등 상위 5개국 학술지를 합치면 78.4%를 차지한다. 이 상위 5개국은 미국과 서유럽 4개 국가들이다.  다음 표와 같이 2017년 1월 현재 국가별 A&HCI 학술지도 미국과 영국, 그리고 유럽에 편중되어 있다; A&HCI 학술지 전체 1,781종 중, 미국 학술지 34.5%, 영국 학술지 24.6%, 미국과 영국 학술지를 합치면 59.1%이고,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캐나다의 학술지까지 합치면 86.2%다. 한국에는 A&HCI 학술지가 7종, 일본과 러시아에는 6종 있고, 중국에는 없다. 중동국가들 중에는 터키에 A&HCI 학술지가 6종 있고, 아랍 국가들과 이란에는 없다.  따라서 중동, 중앙아시아, 아프리카, 동남아 등을 연구하는 한국학자들은 이 SCI급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기 위해서, 현지 학자들과 협력연구를 통하여 현지 연구 자료에 직접 접근하기보다는, 미국이나 영국 및 유럽국가 학자들에게 의존해야만 하는 상황에 내몰리고 있다. 표. 국가별 A&HCI 학술지 수: 1,781종(2017년 1월 현재) 순위 국가 학술지 수 순위 국가 학술지 수 1 미국 614(34.5%)   터키 6 2 영국(잉글랜드-416+스코틀랜드-19+웨일즈-3, UK-1) 439(24.6%) 27 오스트리아 5 3 독일 133(7.5%) 인도 5 4 네덜란드 118(6.6%) 슬로바키아 5 5 프랑스 68(3.8%) 대만 5 6 이탈리아 64(3.6%) 31 홍콩 4 7 스페인 58(3.3%) 포르투갈 4 8 캐나다 41(2.3%) 33 콜롬비아 3 9 벨기에 30 핀란드 3 10 칠레 18 아일랜드 3 11 체코 공화국 14 노르웨이 3 12 브라질 13 라투아니아 3 스위스 13 뉴질랜드 3 14 크로아티아 12 39 아르헨티나 2 15 남아프리카 공화국 11 이스라엘 2 16 오스트레일리아 10 멕시코 2 17 대한민국 7 필리핀 2 폴란드 7 43 불가리아 1 슬로베니아 7 덴마크 1 에스토니아 7 아이슬란드 1 스웨덴 7 말레이시아 1 22 일본 6 말타 1 러시아 6 세르비아 1 헝가리 6 베네수엘라 1 루마니아 6 50     □ 엘스비어 회사의 스코푸스란?  네덜란드에 본사를 둔 엘스비어 회사가 제공하는 스코푸스(SCOPUS)는 세계 최대의 국제학술지 인용 색인 데이터베이스다. 2017년 1월 현재 전 세계 5천개 이상의 출판사에서 출판되는 2만 2천 종 이상의 학술지 및 과학, 기술, 의학, 사회과학 및 인문·예술 등 전 학문분야의 타이틀 초록, 참고문헌, 피인용 건수 등의 학술정보를 담고 있다. 2013년 현재, 국내에서 발간되는 국제학술지 171종이 스코푸스에 등재돼 있다. 스코푸스는 톰슨로이터사가 제공하는 SCI, SSCI, A&HCI와 더불어 전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인용색인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 출처 - 구글 □ 소외 분야와 소외 지역 연구에 장애  미국의 톰슨로이터사와 네덜란드의 엘스비어사는 SCI, SCIE, SSCI, A&HCI와 스코푸스를 통하여 인용지수를 따라 학술지 혹은 논문을 평가한다. 그러나 특정 논문의 인용지수가 높다는 뜻은 해당 분야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반면, 인용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 분야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인용지수를 논문 평가 기준으로 삼는 것은 소외 지역이나 소외 분야에 대한 연구를 가로 막는 장애가 될 수 있다.  이 데이터베이스 회사들의 사업목표는 정보를 수집하고, 새로운 정보를 생산하는 정보망을 구축하여, 지식산업 분야에서 세계적인 영향력을 확장함으로써 최대의 수익을 창출하는 것이다. 소외 지역 연구자들이나 인문학자들에게 A&HCI와 스코푸스 기준의 유명 외국 학술지 게재를 요구하는 평가기준은 한국의 소외 지역 연구와 인문학 발전에 커다란 장애로 작용한다. 왜냐하면, 이 학술지들에 논문을 게재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한국 연구자들은 이 외국 유명 학술지들이 요구하는 연구방향에 맞추어 편향적인 주제를 연구할 수밖에 없다. 이제 각 대학들은 이 데이터베이스 회사들이 내놓은 스코푸스나 SCI급 위주의 연구업적 평가방식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은 2017년 4월 5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650 | 추천: 0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밤하늘에 별이 부족한 양, 북한에서는 하늘을 향해 미사일들이 수직으로 날아오르고, 그 미사일을 폭죽처럼 공중에서 터뜨려 한반도의 밤하늘을 핵 분진으로써 밝게 빛나게 하겠다고 미국이 성주의 사드 배치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문재인 진영의 대선 총괄책임자인 송영길 국회의원이 얼마 전 YTN 라디오의 인터뷰에서 성주의 사드 배치가 이미 일본에 설치되어 있는 두 군데의 사드와 함께 삼각 편대를 형성하기 위한 것이고, 한국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일본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며, 그 삼각 편대의 사드를 미국의 안방에서 조종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 반가웠다. 내가 항간의 소문만으로 대략 짐작하고 있던 내용을 어느 국회의원으로부터 들어 확인하게 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그동안 ‘쉬쉬’ 하면서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못한 한국의 미국에 대한 군사외교적인 종속에 대한 분노를 일정하게 드러낸 것으로 여겨지면서, ‘아, 이제 정치권에서도 미국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이 가능한 때가 왔는가?’ 하는 기대를 갖도록 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미국에서 한국으로 급히 날아온 미 국무부 장관이 이를 암암리에 확인해 주었다. 그는 한국을 방문하여 북한에 대해 군사적 조처를 포함해 모든 조처를 검토하고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나에게는 한국의 유력 대선 주자에게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으니 말조심 몸조심 하는 게 좋을 것이라는 것으로 들렸다. 그러면서, 비록 미국의 전 대통령이었던 카터가 북한의 김일성과 만나 단판을 지움으로써 그 섬뜩하기 이를 데 없는 제2차 한반도 전쟁을 막아내긴 했지만, 1994년 김영삼 정권 때 미국이 북한을 치기 위해 한국의 미국인들에게 날짜를 정해놓고 소개령을 내렸다는 첩보를 접하고서 대통령 김영삼이 너무 놀란 나머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 떠올랐다. 또한 미 국무부 장관은 일본은 미국의 굳건한 동맹국이고 한국은 미국의 파트너라고 말했다. 이건 또 무슨 뜻인가 싶었다. 미국으로서는 한국이 마치 북 · 중 · 러의 위협으로부터 일본을 방어하기 위한,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카드라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성주의 사드 배치가 한국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본을 위한 것임을 은근히 실토한 것이 아닌가. 그 와중에 미국 대통령이 지난 수 년 동안 미국이 북한에 의해 놀아났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건 또 무슨 뜻인가? 더 이상 놀아나지 않겠다는 이야기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동안 놀아난 형국이란 이전 미 정권의 ‘전략적 인내’였는데 그것은 대책 없이 당하고만 있었던 것일 뿐 아무런 실효성이 없는 대북정책에 불과했다는 이야기고 보면, 앞으로 미국이 북한에 대해 ‘인내’ 운운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문제는 인내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하는 사실이다. 1994년 때처럼 북한을 무력으로 공격하고자 작심을 하고서 실행에 옮길 수도 있다는 것으로 해석이 가능하다면, 남북한 한민족의 운명은 마치 선무당이 작두를 타듯이 얼마나 아슬아슬한 일인가. 지난 18일 오후 경북 성주에서 열린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 반대 평화발걸음대회 사진 출처 - 경향신문 자본주의 역사에서 헤게모니 국가가 변경될 때마다 전쟁이 있었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다.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주도권이 네덜란드로 넘어갈 때 30년 전쟁이 있었다.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주도권이 넘어갈 때 워털루 전투의 패배로 끝을 맺은 나폴레옹에 의한 전쟁이 있었다. 영국에서 미국으로 주도권이 넘어갈 때 1차 세계대전과 특히 2차 세계대전이 있었다. 세계체제론자들이 역설하듯 제시하는 예감에 따르면, 이제 미국으로부터 중국으로 주도권이 넘어가려는 시기가 도래했다. 과연 아무런 전쟁도 없이 이러한 주도권 이관이 연착륙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 유력한 지대는 어디며 그 빌미는 무엇일까? 필자는 온 존재의 절대적인 우연성, 그리고 인간 존재의 복잡성과 그에 따른 역동적인 존재의 구조를 어떻게 전반적으로 그리고 가능하면 미세하게 분석하여 나름의 존재론을 펼칠 수 있을까에 골몰하는 이른바 책상물림의 소소한 철학자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국내외 정치 및 군사외교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장삼이사에 불과한 무지렁이다. 이런 필자의 평범한 판단으로도 이같이 한반도 거주민 전체에 대한 주변 강대국들에 의한 노골적인 위협과 그에 따라 즉발을 예고하는 것 같은 전반적인 대대적인 위기가 닥친 것 같으니 그저 터무니없는 판단이기를 바랄 뿐이다. 만약 이러한 대대적인 위기가 한반도를 내리누르고 있다면, 오히려 이 위기를 역이용하여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대한민국 헌법 제1조 ②항을 최고도로 곧추세워 대한민국의 주권이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국민에게 있음을 만천하에 공고히 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럴 수 있기 위해, 다시 한 번 촛불시민혁명의 위력을 더 높여 일단은 사드 배치의 ‘퇴진’을 외쳐야 할 것이다. 이 글은 2017년 3월 22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512 | 추천: 0
신하영옥/ 여성운동연구활동가 네트워크 ‘젠더고물상’ 소위 일류 사립대의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는 고대와 연대에서 최근 ‘성 평등’은 되고, ‘여성주의’는 안 되는, 그래서 ‘여성주의’를 지향하는 모임에 대한 부당한 처우와 탄압이 발생하고 있다. 이 두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고대 지리교육과의 여성주의 소모임 <난·파>는 ‘난교파티’의 준말이자 ‘어지러운 물결’이라는 중의적인 의미로서 ‘일대일 이성애 중심주의’와 ‘여성들의 섹슈얼리티 발현에 대한 억압’에 저항한다는 여성주의적 함의를 담은 이름이다. 지난해 11월 모임이 결성된 후 같은 과 대학원생의 소모임명 수정요청이 있었고, <난·파>측은 대자보로 거부하였으며, 대학원생은 자신의 페북에 <난·파>의 자보에 반박하는 글을 썼고 이에 비난과 조롱의 댓글들이 달리면서 그 댓글을 <난·파>가 주도한 것으로 추측, 단정됨으로서 <난·파>회원들은 과내에서 집단 괴롭힘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난·파>측은 오히려 댓글을 다는 이들에게 자제를 부탁했다. 집단 괴롭힘은 수시로 오는 카톡과 전화로 번호 바꾸기, 단톡방에서의 언어폭력, 수업시간에 대인기피증으로 울고 있는 <난·파>회원을 비웃기, 맥락 없이 수업 중에 <난·파>사건 언급하기 등이다. 4개월째 장기화되고 있는 학과 내 이러한 탄압으로 인해 소모임원들은 우울, 대인기피, 이명, 자살 충동으로 고통 받고 있다. 그러나 가장 극심한 탄압은 지난 3일, <난·파> 일부 회원들이 지리교육과 졸업 요건 중 하나인 <야외지리조사> 과목 수강이 불허된 것이었다. 그것도 고대 지리교육과 공개 페이스북 홈페이지를 통해 공지되었다는 점이다. <난·파> 회원들은 현재 양성평등센터에 제소되어 있고 조사위원회가 소집되지 않았고, 사건이 완전히 종결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가해자로 규정되어 징계를 받은 것이다(고대 여성위원회, 2017. 3. 6.). <모드>는 연대 정치외교학과 학생회 내에 ‘특별위원회’로서 ‘여성주의위원회’를 지향하는 모임이다. 이 이름 역시 중의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데 하나는 ‘여성참정권운동’을 영화화한, <서프러제트, 2016>의 주인공 이름으로 여성운동의 시작을 의미하고, 하나는 ‘특정한 작업을 할 수 있는 어떠한 상태’라는 의미로, 정치외교학과여성위원회(이하 정여위)(준)가 여성주의 모드로 활동을 시작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즉, 연대 정외과 내에서의 여성주의 담론의 확산과 성평등한 공동체를 지향하는 ‘여성주의 모드로 학과 내 여성운동을 시작’하고자 하는 단체인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곧바로 정외과 학생총회에서 인준을 거부당한다. 이유는 이들의 방향 및 정책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이름’ 때문이었다. “왜 ‘성평등위원회’가 아닌, ‘여성주의위원회’이어야만 합니까?” 이것이 인준거부의 원인으로 ‘여성주의’가 남성배제와 차별을 함의함으로써 ‘정치적 편향성’을 갖고 있으며, 특별위원회는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반대논리였다. 때문에 표결은 인준을 거부하기 위한 부당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출석인원에 비해 투표인원이 더 많았다는 점에서 여실히 드러난다(연대 정외과 여성주의위원회(준), 2017.3. 13.). 이 두 사건은 흡사 쌍둥이처럼 닮아있다. 단체의 ‘이름’, ‘명칭’이 문제가 된 점. 그리고 이 사건들을 처리하는 과정에 부당한 절차들의 개입을 통해서라도 이 여성주의를 지향하는 조직들을 배제하고 탄압하고자 하는 의도들이 드러나는 점이 그렇다. ‘성평등’ 이라는 말은 남성과 여성을 포함하여 다양한 성적지향을 가진 모든 성적주체로서의 인간의 평등이라는 이상향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말은 요즘에 와서 ‘폐기처분’될 처지에 있기도 하다. 평등이라는 것은 어떤 기준점이 존재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정치적 평등은 1인1표라는 형식적 기준점과 모든 국민들의 자기결정권이라는 실질적 기준점이 존재한다. 경제적 평등도 마찬가지다. 소위 사람답게 살기위해서는 어떤 한계, 즉 기준점이 존재하고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였을 때 ‘복지’라는 시스템을 통해 기준을 충족시키려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현실이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논리적 측면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성평등도 마찬가지다. 성이 평등하기 위해서는 어떤 ‘성’을 기준으로 할 것인가가 설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성?, 남성?,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무성애? 등등. ‘양성평등’의 담론에서는 더 많은 권력을 가진 ‘남성’이 기준점이 된다. ‘성평등’에서는 ‘남성’과 ‘이성애’가 권력을 갖고 있음으로 그 둘이 기준점이 될 것이다. 이러한 기준점을 중심으로 차별과 억압받는 다양한 성들이 이 둘이 누리는 것과 동등한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획득하자는 것이 ‘성평등’담론이다. 그렇다면 성평등은 어떻게 생산, 재생산 되고 있는가? 이는 ‘남성’과 ‘이성애’중심의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라는 구조가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모든 영역에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즉 시스템과 관습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그토록 주장하고 교육하고 있지만, 일상으로 돌아가면 다시 ‘성불평등’이 재생되게 된다. ‘여성주의’는 ‘여성만을 위한, 남성배제’적인 사상이 아니다. 억압당하는 대상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여성들이 스스로의 해방을 위해 실천하는 과정에서, 전 방위적으로 억압이 발현되는 ‘사회적 구조’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여성해방을 위해서는 문화와 시스템으로 굳어있는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 남성과 이성애 중심의 가치를 재생산하는 구조에 균열을 내어야 한다는 것, 그러자면 완전히 새로운 사상과 실천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기존의 모든 구조가 ‘남성주의적’이라는 것에 저항하는 의미로 ‘여성주의’라는 용어를 선택해왔던 것이다. 때문에 여성주의는 모든 억압받고 차별받고 배제당하는 존재들의 해방을 지향하고 있고, 특히 성별이분법으로 고통 받는 성적 소수자의 문제에도 민감히 반응하는 것이다. 사진 출처 - 국민일보 여성주의는 여성과 남성의 생물학적 차이를 역사적, 사회적 차이로 재생산하는 젠더질서체계를 문제시 하는 것이다. ‘사회역사적으로 구성된 여성과 남성’이라는 프레임은 여성과 남성이 다르게 기호화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여기엔 ‘의도성’이 개입되어 있으며, 때문에 그 ‘사회역사적 의도성’이 전복되어야 ‘성평등’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며, 나아가 ‘같아지는 평등’이 아니라 ‘차이를 인정하는 평등’ 이라는 전략을 취하는 것이다. 어떻게 한 날 한 시에 여성과 남성, 이성애와 다른 성애가 똑같아 질 수 있는가? 따라서 성평등이란 애초에 가부장적 질서를 부수지 않는 한에서는 소수의 성에 대한 ‘재량’이자 ‘아량’의 수준을 벗어날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난·파>와 <모드>라는 이름의 진정한 의미를 고민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외과 학생회나 지리학과 학생회는 고민은커녕, ‘성평등’한 관점조차 없이 ‘감히 남성들만의 발화영역’에 도전한 여성들에게 'Mansplain'하는 것으로, ‘재량과 아량의 범위를 초월’하고자 한 여성 집단에게 부당한 방법으로 서둘러 ‘징계’함으로써 이들의 활동을 ‘긴급히 꺼야 할 불’로 간주했던 것이다. 이들이 왜 그런 단체명을 사용하고자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설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감히, <난교파티>라니?”, “감히, 남성을 지배하려는 <여성주의>라니?” 정도로 보여 질 뿐이다. 'Mansplain'은 여성을 멸시하고 혐오하며 가르쳐야 할 대상으로 보는 man과 explain의 합성어다. 전문가는 남성이어야 한다는 것, 여성은 정치를 모른다는 것, 여기에는 성 및 그에 관한 담론은 남성이 주도하여야 한다는 것 역시 포함된다. 여성은 수동적으로 남성의 성을 수용하는 존재여야 하며, 성적 욕망을 드러내어서는 안 되는 존재라는 담론 역시 포함된다. <난·파>는 이러한 현상을 대표하는 사건이다. 또한 여성은 남성이 주도하고 구축한 영역에 그저 얹혀살면 될 뿐 새로운 무엇을 지향하거나 바꿔 보려 해서는 안 되는 존재라는 생각 역시 포함된다. <여성주의위원회>사건은 이 연장선에 있다. Homosocial(남성연대)는 남성이 아닌 존재를 대상화함으로써만 가능하다. 남성이 아닌 여성과 동성애자남성을 대상화함으로써만 가능하다. 대상화는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며, 주체에서 대상으로 추락하는 것에 대한 공포는 남성이 아닌 존재를 극렬히 거부하는 것으로서 남성임을 인정받으려는 심리와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고 이것이 ‘여성혐오’와 ‘호모포비아’인 것이다(우에노 치즈코, 2012). 위 두 사건은 ‘남성연대를 구축하기 위한 여성혐오’라는 구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왜 이 여성들의 의도와 단체명의 의미에 대해 함께 고민하지 않는가? 아니 하려하지 않는가? 왜 ‘이름’이 갖는 의미를 ‘실천’으로 왜곡하는가? 왜 서둘러 권력을 휘둘러 ‘보이지 않게’하려는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두려움’으로 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남성연대에 균열을 내려는, 가부장적 구조를 해체하려는 시도에 대한 두려움으로밖에 볼 수 없다. Homosocial은 Homosexual을 내장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기 때문에, (성애가 배제된)남성연대가 사실은 성애를 내장한 연대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 민낯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 두려움이다. 여성주의와 성 담론은 궁극에는 그 비밀에 도달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미래이기 때문에 서둘러 탄압하여 없는 존재, 비가시화된 존재로 만들어 내려고 했던 것, 이것이 이 두 사건의 본질이다. 그러나 이 두 여성단체는 지속적으로 싸워나갈 것을 천명하고 있다. 여성주의는 언제나 그래왔기 때문이고, 그렇게 밖에 자기 존재를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고, 사회를 재구성하는 실천은 언제나 투쟁의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고군분투에 연대하며, 지지를 보낸다. 이 글은 2017년 3월 15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613 | 추천: 0
김재완/ 방송대 법학과 교수 그동안 정부 고등교육정책(대학구조개혁 등 일련의 정부정책) 방향은 전반적인 재정 감축을 통해, 각 대학이 스스로 필요한 재원을 확충하도록 시장경쟁성을 강화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곧 대학의 기업화와 상업화를 촉진한다. 기업의 최고 목표는 이윤창출/추구이다. 이러한 경영목표 아래 기업 및 상업형 대학은 필연적으로 돈이 되는 교육서비스를 확충하고 강화하며, 반대로 적자를 내는 교육서비스부문은 통합 및 퇴출시키고 있다. 오늘날 대학구조개혁이라는 미명 하에 이루어지고 있는 실질적인 대학구조조정의 모습이다. 기업화된 대학은 input은 최소화하고 output을 최대화한다. 이러한 구조 아래에서는 교육과 교육행정서비스를 담당하는 교수와 교직원 등의 저비용, 불완전 고용은 심화될 수밖에 없고, 그에 따른 교육의 질도 떨어질 수밖에 없으며, 학생과 학부모 등 국민이 부담해야 하는 교육비용은 상승할 수밖에 없게 된다. 지금의 대학은 최소한의 비용으로 고급인력과 시설을 이용해 이윤만을 고스란히 앗아가는 기업들의 좋은 먹잇감으로만 전락하고 있다. 때문에 교육이라는 공적부문에 대한 재투자는 아주 소극적이며, 정부의 재정지원 마저도 불안정하다. 이와 같은 상업화 논리에 따른 교육지배구조의 심화는 그나마 고등교육의 공공성을 지탱해 온 국립대학마저도 점차 온존할 수 없는 엄혹한 교육자본시장으로 몰아냄으로써 교육기회의 평등마저도 박탈하고 있다. 사진 출처 - 뉴스1 이로써 국가의 사회적, 문화적, 산업적 발전의 기반이 될 수 있는 선순환적인 고등교육의 다양한 인재양성체계는 무너질 수밖에 없고, 극히 일부의 지엽적이고 기술전문적인 사람들만을 양산해 내는 획일적이고 자본중심형적인 양성시스템으로 구축될 것이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오히려 경쟁력 강화에 역행하는 것이다. 다양하고 미래지향적인 세계적, 국가적, 사회적, 문화적, 산업적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인재양성체계를 갖춘 대학이 될 수 없는 구조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산업과 경제의 급변화에 따른 제반 문제를 해결하고, 지속적인 발전과 성공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재정지원이 충분하게 뒷받침 되는 고등교육의 공공성 강화가 가장 최우선적인 과제이다. 또한 학령인구의 감소가 국가 재정지원의 대폭적인 감소를 축으로 한 고등교육의 공공성 폐기와 대학의 인위적인 구조조정의 명분이 될 수는 없다. 학령인구의 감소는 근본적으로 고비용구조의 고등교육시장구조에 기인한다. 이 시대 우리나라의 대학은 더 이상 자유로운 공기가 넘쳐나는 엘리트 지성의 전당이 아니라 우골탑이라고 불리는 고비용의 교육시설로 전락하고 말았다. 수도권 사립대학의 등록금은 1천만 원에 육박하고, 이것은 2015년 OECD 교육지표 조사 결과 세계 2위의 수준에 이를 만큼 높은 수준이다. 더 이상 고등교육을 고비용의 시장경제에만 맡겨두어서는 안 된다. 분명 고등교육은 공공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의 재정지원은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확충되고 투하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정부의 고등교육에 대한 공적 책임의 강화와 대학의 민주적인 의사결정구조의 구축을 통한 자치의 강화가 이루어질 때에만 고비용구조로 인한 교육 불평등과 왜곡된 교육노동의 현실을 해소할 수 있으며, 아울러 양질의 학령인구를 증가시킬 수 있게 될 것이다. 탄핵 이후 대선 주자들이 제시해야 할 교육정책의 방향은 공공성의 강화에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이 글은 2017년 3월 15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544 | 추천: 0
이문영/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트럼프가 취임 후 발표한 ‘반(反)이민 행정명령’으로 2017년 벽두부터 온 세계가 시끄럽다. 이 행정조치로 이란, 이라크, 시리아, 소말리아, 수단, 예멘, 리비아 7개국 국민의 미국 입국이 90일간 금지되고, 난민 입국 프로그램이 120일 동안 중단됐다. 그 결과, 망명, 신병치료 등을 위해 미국 입국을 허락받은 7개국 출신 난민이나 국민은 물론, 휴가나 외유 등으로 잠시 해외로 떠났던, 7개국 출신 미국 영주권자조차 공항에서 발이 묶였다. 이 조치는 ‘이민자의 나라’라는 미국의 정체성에 정면으로 배치될 뿐더러, 이동과 거주의 자유를 보장하는 보편적 인권의 심대한 침해라는 점에서 문제이다. 물론 미국 내에서도 이 행정명령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미국의 각 주 법원은 물론 연방법원조차 이 행정명령의 잠정중단과 효력정지를 선언했고, 트럼프 탄핵청원 웹사이트에는 현재 10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서명을 마친 상태이다. 그럼에도 트럼프는 지리한 법정 싸움 대신, 새로운 반이민 수정명령 발효로 자기 뜻을 관철하고자 한다. 이민자와 난민을 겨냥한 이 반인권적 조치를 트럼프라는 괴물의 돌출적 행동으로만 치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여론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 행정명령으로 대표되는 트럼프의 반이민정책을 지지하는 미국 내 여론이 약 40%에 달한다. 또 이 조치에 대해 영국, 독일 등 유럽 정부가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지만, 유럽에서조차 反이민자, 反난민 정서가 하나의 뚜렷한 정치적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프랑스에서 마린 르펜으로 대표되는 극우정당이 누리는 높은 대중적 인기가 이를 잘 보여주며, 이러한 현상이 단지 프랑스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 역시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민자나 난민이 겪고 있는 이 곤경 속에는 근대 국민국가 체제가 기반한 근본 모순이 숨겨져 있다. 일찍이 한나 아렌트가 ‘인권의 역설’이란 개념으로 통찰해낸 이 모순의 본질은 저 유명한 프랑스 인권선언(“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서부터 구조화된 ‘인권과 시민권의 분리’에 놓여 있다. 국민국가 체제에서 강력하게 작동해온 ‘국적=시민권=인권’ 사이의 동일화 기제는 인권이 시민권의 일부가 되게 함으로써, 시민권의 상실이 인권의 상실로 이어지도록 했다. 바로 여기서 ‘인권의 역설’이 발생하는 바, 국적과 시민권을 갖지 못함으로써 국민도, 시민도 아닌, 오로지 인간으로 남은 사람들에게 바로 그 인간을 위한 권리, 즉 인권이 송두리째 박탈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시민권과 인권의 동일시가 시민권과 인권의 원천적 분리로 결과 지어진다. 그녀 자신이 나치에 의해 국적을 박탈당한 무국적자이기도 했던 아렌트는 ‘문명의 한 가운데서 산출되는 이 야만’ 속에 ‘인권의 종말’을 예언했다. 사진 출처 - afpbbnews 트럼프의 반이민 행정명령이나, 유럽의 반난민, 반이민 정서 속에는 국적과 시민권의 동일시, 시민권과 인권의 동일시가 초래할 수 있는 ‘반인권’의 위기, ‘문명 속의 야만’이 도사리고 있다. 국적에 의해서만 보장되는 시민의 권리, 또 시민임으로써만 보장되는 인간의 권리는 소속되지 않은 자, 그럼으로써 시민일 수 없는 자를 인간의 경계 밖으로 내몬다. 첨단의 문명 속 사람, 노동, 자본의 이동이 일상화된 지구화 시대, 날로 증가하는 난민, 불법체류자, 무국적자의 존재와 그들의 열악한 현실은 이 문명 속의 야만을 생생하게 재현한다. 사실 지구화 시대 근대를 떠받쳐온 국민국가(nation-state)의 두 요소, 즉 nation과 state의 조화로운 일치가 깨어진지 오래다. 자연히 nation이 함축하는 ‘국민’으로서의 소속, state가 함축하는 그 정치적 권리, 즉 국적(nationality)과 시민권(citizenship)의 일치 역시 현재 빈번하게 위반되며 근본적인 재고를 요청받고 있다. 지구화 시대 일반화된 소속의 복수성(複數性)은 시민권의 탈국가화를 요구하며, 시민권으로 대표되는 권리의무가 국적이나 소속이 아닌 ‘거주’에 기반해야 함이 강력히 요청되기도 한다. 국적이나 소속이 함축하는 동질적 정체성의 허구성에 대한 탈신화화도 상당부분 진척되었다. 유럽 시민권, 글로벌 시민권, 트랜스/포스트내셔널 시민권 등으로 대표되는 최근 담론은 이와 밀접히 관련된다. 이에 비한다면 트럼프가 대변하는 국가주의의 소환, 그에 기반한 반이민, 반난민 정책은 얼마나 시대착오적인가. 얼마 전 신문지상에 러시아의 탈북노동자 최명복씨의 사연이 소개되었다. 러시아 극동 연해주 벌목공 출신의 최명복씨는 이미 20년 가까이 러시아에 거주하며 현지인과 결혼해 두 명의 자녀까지 둔 상태다. 그런 그가 현재 불법체류자로 러시아 경찰에 체포되어 북한으로 강제 송환될 위기에 처해있다. 북한으로의 귀환은 그에게 가족과의 생이별은 물론, 죽음을 뜻한다. 이에 러시아 인권단체 메모리알(Memorial)이 그를 도와 유럽인권재판소에 보호신청을 하는 등 구명활동에 나서고 있다. 이런 인도주의적 노력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다름 아닌 국가다. 즉, 러시아와 북한이 1년 전 맺은 ‘불법입국자 및 불법체류자 송환ㆍ수용에 관한 정부 간 협정’이 그것이다. 국민 외 모든 예외적 존재들을 가차 없이 내몰아버리는 국가는 인간을 인간의 경계 밖으로 내모는 역할을 앞장서 하고 있다. 트럼프의 반이민 행정명령을 작동시키는 강력한 국가주의, 그 지지자들을 하나로 모으는 국가 재건의 이데올로기가 가지는 위험성이 여기에 있다. 그 위험성은 표면의 배타성이나 반인간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문명의 발전에 따른 인식의 발전, 관점과 가치관의 발전적 재구성에 역행하기 때문이다. 김정남의 피살 이후 오로지 그 사건에로 향하는 국내 관심의 1/10 만이라도 최명복씨를 향하길 바라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글은 2017년 2월 22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531 | 추천: 0
마흐디 압둘 하디/ 팔레스타인 국제문제연구소장 (Mahdi Abdul Hadi, Head of PASSIA, http://www.passia.org) □ 팔레스타인인들의 노력 지난 60년 동안 우리 팔레스타인인들은 추방지와 망명지 그리고 조국에서조차, 아랍주의자 국제적주의자 혹은 사회주의자를 양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의 내부 담론은 에밀리 하비비의 소설 『낙관론자』였고, 우리의 외부 담론은 갓산 카나파니의 소설 『하이파로의 귀환』이었다. 우리의 정책은 살라 칼라프(아부 이야드)가 한때 ‘no-yes’(거절과 수락을 동시에)라고 설명한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피델 카스트로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상황판단이 빠른 ‘no-yes’의 달인이었다고 논평했다. 이스라엘의 점령 기간 동안, 우리는 종교적, 정치적, 민족적 노선 사이에서 이리저리 방황하며 우리의 조국과 애국심, 정체성을 되살리는 데 주력했다. 우리는, 이탈리아 철학자 가람치가 말했던 바와 같이, 정신적 비관론의 상황을 머뭇거리며 의지의 낙관론으로 극복했다. ▲ 마흐디 압둘 하디(Mahdi Abdul Hadi) 팔레스타인 국제문제연구소장 이스라엘 국가 건설 20년 후, 1967-1974년 외부담론은 유엔에서 야세르 아라파트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었다. “나의 손에서 올리브 가지를 떨어뜨리지 마라”, 반면 시민사회에서 주장하는 내부 담론은 “회복력 증진”이었다. 외부 내부 담론 양 측은 시인 마흐무드 다르위시의 말을 수용하면서, 팔레스타인이라는 관념이 얼마나 거대한지,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과 견고한 의지가 얼마나 어려운지, 그리고 팔레스타인 조국의 22%에 불과한 지역에 건설될 팔레스타인 국가가 얼마나 작은지를 표현했다. □ 인티파다: 팔레스타인인은 피할 수 없는 현실적 실체 이스라엘의 점령은 언제나 우리 민족의 계획을 방해했다. 우리와 충돌하고, 팔레스타인 조국 안팎에서 우리 지도자를 살해하고, 1982년 레바논을 침공해서 사브라와 샤틸라 대량학살을 저지르고, 레바논으로부터 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를 추방하였다. PLO는 미국의 조정, 아랍의 감시, 이스라엘의 묵인으로, 그리스해 항구를 통해 튀니지로 이주했다. 12년을 더 기다려서 1994년(오슬로 협정) 우리는 국제적인 합법성을 얻고, 유럽의 개입과 형제들과 동지들의 임시적이고 긴급한 조치를 통해서 팔레스타인 내부 유혈분쟁을 중단하고, 추방된 PLO지도부가 귀환하였다. 12년을 기다리는 동안, 조국에 있는 사람들의 고통은 점점 더 커져 갔고, 해외 지도자들의 소외감은 더욱 심해졌다. 1987년 12월 발발한 인티파다(팔레스타인 민중봉기)와 새로 결성된 인티파다 통합지도부가 내부와 외부 세력들을 결집하고, "우리는 피할 수 없는 현실적 실체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자신감을 회복했다. 인티파다의 철학은 ‘백색혁명’과 새로운 팔레스타인인들의 전략 초안이었다. 이 전략은 “나는 당신 이스라엘을 파괴할 수 없고, 당신은 우리 조국 팔레스타인을 우리에게서 빼앗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인정하고, 두 국가 창설에 기반을 둔 정치적 해결을 위한 협상 및 화해로 가는 제3의 길을 요구한다"라는 주장에 근거했다. 팔레스타인 민족회의(PNC)는 인티파다를 수용하고 알제리에서 독립 선언문을 발표했다. 모든 사람들이 점령지(가자와 서안)에서 발발한 팔레스타인 인티파다에 공감하였고, 심지어 이스라엘인들조차 떠났다. 미국이 PLO를 인정하였고, 1989년 5월 제임스 베이커 국무장관은 이스라엘에게 대이스라엘이라는 비현실적인 비전, 팔레스타인 땅의 합병, 점령지에서 이스라엘 점령촌 활동을 포기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을 정치적 권리를 누리는 이웃으로 대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1990년 10월 1일 알-아크사 사원의 안뜰에서 21명이 사망한 학살을 저지르는 등, 민중의 인티파다를 소멸시키고 인티파다 통합지도부의 메시지를 약화시키기 위해 그들의 점령지에 대한 억압적인 식민정책을 계속 유지하였다. □ 시류에 편승하는 신기루 협상들 역내에서의 사건들(1990년 걸프 전쟁과 이라크의 쿠웨이트 점령)은 모든 당사자에게 영향을 미쳤다. 미국의 우산은 역내 국가들을 보호하고 침공을 종식시키기 위해 움직였다. 팔레스타인 카드는 미군 주둔을 정당화하고, 이스라엘에게 압력을 행사해서 1990년 10월 30일 개최된 마드리드 회의에 팔레스타인-요르단 공동대표, 역내 당사자들과 국제 당사자들과의 협상에 참가하도록 하는데 활용되었다. 마드리드 회의 이후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시류에 편승하는 협상들’로 바빴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망명 중이거나 점령지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이 협상들에 참가했고, 당시 이 협상들은 사실상 워싱턴에서 이루어졌다. 두 번째 단계에서, 이 협상들의 주도권이 점령지의 팔레스타인 엘리트들로부터 망명중인 고립된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넘어가면서 협상 장소는 오슬로로 옮겨졌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튀니지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이 협상을 암만과 카이로가 공유하지 못하도록, 그리고 점령지라는 길고 깊은 터널 밖으로 밀어냈다. 네 번째 단계에서는, 망명 중이거나 점령지에 있는 팔레스타인인들 모두 시류에 편승하는 협상을 중단하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당국이라는 상자’에 합류했다. 그들은 이 자치정부 당국이 역내 국가들의 도움으로 자신들의 목표를 성취하기를 기도한다. 그들에게 협상은 ‘생명의 길’이었다! 우리가 위키리크스에 있는 협상 문서들을 검토했을 때, 우리가 투쟁해왔던 것들, 즉 점령 종식, 조국 해방, 점령촌 건설 중단, 토지몰수 중단 등을 찾지 못했다. 예루살렘 출입구들은 우리가 이슬람 모스크와 기독교 교회에 들어갈 수 있도록 열려있지 않았고, 우리의 국기는 오리엔트 하우스와 예루살렘 성벽에서 내려졌으며, 708km의 인종차별적인 분리장벽이 건설되었다. 우리의 5만 명의 수감자들과 억류자들은 석방되지 않았다. 이 수감자들은 창살 뒤에서 고통을 끝내고 그들의 존엄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을 요구하며 4, 5개월 동안 단식투쟁을 하였다. 가자지구에 대한 네 차례의 전쟁으로 인해 아픔과 고통이 증폭되었으나, 이 전쟁에 대하여 암만이나 카이로는 어떠한 개입도 하지 않았다. 가자지구 대파괴 이후, 몇몇 국가들이 샤름 알 셰이크에서 만나서, 가자지구 재건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당국 지원으로 허구적인 수십억 달러를 제안하였다. □ 협상도 저항도 없이, 무너지는 팔레스타인 사회 우리의 주된 걱정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당국이라는 케이크’인 18만 명의 고용인들이 제공하는 행정업무와 서비스를 두 부분으로 나누는 것이다. 한 부분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신성한 안보협력’이라는 의제와 ‘협상이 생명이다’라는 담론의 지배를 받는 서안이고, 다른 한 부분은 지하터널을 포함하여 ‘평화의 종착역’이라는 의제와 ‘수년간의 휴전’이라는 담론의 지배를 받는 가자지구다. 그러나 두 지역들, 서안과 가자에서 협상도 없고, 저항도 없다. 오히려 난민촌에 비참함과 절망만이 존재한다. 난민에 관한 이야기는 대학교, 특별한 행사와 종교 축제에서만 들린다. 이제 우리는 호텔, 은행 대출, 회사 주식의 확산과 새로운 엘리트의 탄생을 볼 수 있다. 하나는 정부와 무관한 상업 엘리트의 재왕절개에 의한 출산이었다. 두 번째는 여전히 권력의 자리에 있는 파벌 엘리트의 탄생이었다. 세 번째는 학생들의 가방에서 칼을 압수하는 것을 자랑하는 준군사안보 엘리트이다. 네 번째는 생계수단을 제공하는 프로젝트, 항만과 공항, 건설에 관한 투자 프로젝트를 찾는 일종의 시민사회 사업과 비정부기구들이다. 예루살렘은 성벽 뒤에 버려졌고, 예루살렘 주민들은 역사유적과 종교유산 강탈을 애통해하고, 예루살렘 청년들은 아랍인들과 범아랍주의를 비판한다. 예루살렘의 알-아크사 모스크와 성묘 교회는 예배의 자유를 위해 인간의 양심에 호소한다. 예루살렘 도시는 이슬람교도, 기독교인들과 이방인들을 조롱하는 반면, 망명 생활을 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은 정체성, 조국, 기억을 찾으며 자책한다. 팔레스타인 시민사회는 주거, 일자리, 건강, 교육, 표현의 자유에 대한 권리와 요구에 사로 잡혀있다. 벨푸어의 범죄와 불행한 선언이 100주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회의, 집회, 기념행사 등의 현상이 확산되어왔다. 유일한 예외는 교육, 예술, 회화, 발명 등의 분야에서의 개별적인 팔레스타인인의 성공과 탁월함이다. 이 시나리오의 중반부에서 텔아비브는 2009년 헤르츠리야의 보고서를 바탕으로 ‘경제적 평화’를 도입하려고 시도했다. 이것의 추정되는 목적은 팔레스타인 경제를 위해 수백만 달러를 약속하고, 40%의 임금 인상 약속으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직원들을 매수하려 시도함으로써 경제적 번영의 섬을 만드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국가라는 최종지위 결정 문제는 뒤로 미뤄질 것이고, 가자지구에 있는 200만 명은, 불확실한 미래에 남겨져서, 라파 국경을 찾거나 터키, 키프로스, 심지어 미국의 중재로부터 나오는 항구도시 프로젝트를 찾을 것이다. 서안에서의 인종차별 정책은 계속되고 있다. 인종, 종교, 정체성을 근거로 권리와 이익에 대한 차별을 받고 있다. 팔레스타인인 주거지는 팔레스타인의 12%로 제한되었고, 70만 명의 유대인 점령민들이 서안에서 날뛰며, 팔레스타인 땅을 강탈하고 식민촌을 건설하면서 확장해나가고 있다. 다른 한편, 1967년 휴전선 안(현재 이스라엘)으로부터, 이스라엘 인구의 20%를 차지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회의 목소리는 다음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즉 그들은 시민권의 권리라는 측면에서 평등권과 정의를 위해서 정치적으로 투쟁한다. 그들의 길은 1948년 나크바(재앙, 이스라엘 국가 건설)로부터 수십 년 후에도 여전히 길고 험난하다. 그들은 점령지 대중의 저항을 지지하지만, 이스라엘 시민으로서 이미 얻은 것을 잃지 않도록 점령지 대중저항에 개입하지는 않는다. 이스라엘 내부에 있는 팔레스타인 사회는 시온주의 우파정부를 전복하려는 이스라엘 여론에 영향을 주기 위해 모든 정당과 협력하는 것이 현재의 임무라고 말한다. □ 팔레스타인 대의를 국제화하자 더 큰 불행, 즉 조국, 민중과 우리의 권리로 남아있는 것을 제거하려는 ‘청산의 수순’을 피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의 전략은 팔레스타인 대의를 국제화하고, UN안전보장이사회부터 시작하여 최근 UN 안보리결의안에 비추어, 이스라엘 점령촌에 대한 국제적 비난을 계속해서 모으는 것이다. UN과 국제사회는 점령된 팔레스타인 국가를 인정해야 하며, 우리는 국제형사재판소와 기타 국제기구에 가입해야 한다. 우리 팔레스타인인들은 팔레스타인 대의의 국제화, 조국에서의 팔레스타인인들 통합, 점령에 관한 모든 형태의 협력 거부와 중단, 그리고 점령 세력에 대한 기소 등을 포함하는 새로운 전략을 원하고 필요로 한다. 거리에서 팔레스타인 청년운동은 "자유와 정의를 위해 존엄하게 살기 위해 저항하라"라는 기치 아래 계속되어야 한다. 청년은 저항의 도구를 명확히 해야 한다. 첫째, 팔레스타인 민족 서사, 유적, 유산에 대한 지식과 교육이어야 한다. 둘째, 이스라엘에 맞서는 불매운동, 투자 철회, 경제제재(BDS)와 이것을 해외로 확장시키는 것이다. 셋째, 두려움의 문화를 상대방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넷째, 팔레스타인 내부의 부패, 무질서 및 선동을 벗겨내는 것이다. 이전의 투쟁에 자부심을 갖고, 새로운 탄생과 새로운 정당성에 대한 희망으로 현재의 고통을 끝내고, 미래의 지평을 열어주자. 이 글은 2017년 2월 15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483 | 추천: 0
정재원/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최순실 일당의 국정농단 사태로 드러나게 된 소위 ‘박근혜 게이트’로 인해 국민들에게 충격과 분노를 야기했지만, 몇몇 인사들의 구속과 탄핵안 가결 이후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나기 전까지 박근혜 일당의 조직적이고도 치밀한 저항이 지속되고 있다. 특검 수사를 방해하기 위한 다양하고도 조직적인 저항은 많은 국민들의 분노를 자아내고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이러한 전술은 국민들에게 소위 ‘피로감’을 느끼게 하는데 일정 정도 성공하고 있는 듯 보인다. 이에 어쩔 수 없이 밀리기만 해 왔던 박근혜 일당은 서서히 반격을 조직화해 왔고, 일베를 비롯한 집단들과 노년층들을 중심으로 허위 거짓 정보를 확산시키는 전술을 통해 이들을 결집시켜 아래로부터의 선동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박근혜 게이트로 인해 정권 재창출이 어렵게 되었다고 판단해 박근혜 반대 분위기를 주도했던 한 당사자인 극우 종편들의 논조가 변하면서 상황도 변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바로 소위 촛불의 힘으로 인해 대선에서 야당 후보가 당선되는 것을 저지해야 한다는 것, 아니 최소한 야당이 정권을 잡더라도 자신들의 특권적 부패 구조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기득권 세력들의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바로 이러한 공간을 박근혜 일당이 철저하게 이용하고 있는 것이고, 그 효과는 이미 크게 나타나고 있다는 데에서 사태의 심각성이 있다. 바로 그 문제의 핵심에 대선이 있고, 대선 후보로 누가 나오며, 누가 대통령에 당선될 것인가에 대한 과도한 관심 조장이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물론 이미 예정되어 있던 대선이라는 정치적 일정이 있기 때문에 불가피한 측면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대선과는 무관한 박근혜 일당의 국정농단 사건에 대한 철저한 단죄, 나아가 이를 방조 혹은 적극적으로 이용해 온 다양한 부패한 기득권 지배세력들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이 세워져야 하는 것이 우선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국사회는 기득권 지배세력들이 만들어내는 대선 후보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 쇼’ 앞에서 크게 흔들리고 있다. 여러 차례 강조해 왔지만, 사전적 의미에서의 ‘보수주의’나 ‘보수파’, 특히 진보세력의 한 짝처럼 보이는 ‘보수 정치정당’이란 허구의 개념이다. 즉 현실에서는 전통적 가치를 옹호하거나 기존 사회 체제 유지를 통한 안정적 발전추구가 아닌, 탐욕과 특권의 독점적 확보와 확대를 추구하는 기득권 세력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들의 헤게모니 하에서 그들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집단과 오랜 기간 세뇌된 집단이 있을 뿐이다. 반동주의와 수구주의, 혹은 극우주의를 구별하는 것은 사실 커다란 의미가 없는 관념적인 학술적 분류이다. 단지 서구에서는 오랜 기간 아래로부터의 끈질긴 저항의 결과, 그리고 사회주의 국가들의 탄생으로 인해 위험을 느낀 지배 집단들이 어쩔 수 없이 일국 내에서는 타협을 하고 일정 부분 양보를 하면서 제도적으로 통제를 받게 된 것뿐이다. 따라서 일국의 경계를 넘을 경우 이들은 자신의 본질을 어김없이 드러내고 있음은 우리 모두 목격하고 있다. 이것이 현실인 것이다. 반대로 이러한 조절 장치가 없는 비중심부, 비서구 국가들에서는 외부의 힘과 때로는 대립하고 때로는 같이 하며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있는 것이 보수의 진짜 모습인 것이다. 박근혜 게이트로 인해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확인하고 있다. 형식적, 제도적인 일부를 제외하면 과연 우리가 정당정치가 제대로 작동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리고 정말 위험한 생각은 이러한 국정농단이 박근혜 시기에만 있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박근혜-최순실 일파가 이명박 정권에서나 전두환-노태우 정권 하에서처럼 조금 더 세련되게 좀 더 다양한 기득권 분파들에게 이익을 나누어 주었다면, 이 모든 것이 완벽하게 은폐되어 있었을 것이다. 기득권 세력의 한 축인 검찰과 언론은 철저하게 이 모든 것을 덮어 버렸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이것이 우리의 실제 정치이다. 문제는 마치 4년 내내 전혀 관심이 없던 비인기 스포츠 종목들에서 한국 대표 선수가 선전하는 중계에 몰두하며 갑자기 애국심에 불타 광분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이, 현재 우리는 급속하게 대통령 후보 문제나 그 지지율, 정당과 인물들의 합종연횡 등에 몰두하면서 정치 쇼에 빠져들고 있다.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전문가라는 집단들조차 다시 특정 정치 정당의 집권이 무엇인가를 바꿀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면서 정당에 대한 지지와 비판의 문제만으로 스스로 영역을 축소하고 있다. 사진 출처 - 프레시안 이러한 박근혜 게이트의 토대는 바로 추악한 지대추구적 세습자본주의체제에 있다. 김동춘 교수에 따르면, “이 체제의 핵심에는 자산의 불평등, 그리고 노력 없이 획득한 자산의 부당한 세습이 있다. 상위 10%가 부의 66%를 독점하고 있고, 그 부가 정당한 투자에 의한 이윤이나 임금소득이 아닌 지대추구의 방법으로 얻어진 것이고, 그것이 상속세, 증여세조차 제대로 내지 않고 세습되는 나라에서 희망이 있을 수 없다”고 한다. 최근 추정치이긴 하지만, 해외조세도피처에 한국인 재산만 무려 888조가 은닉되어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정치민주화가 후퇴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경제민주화는 필수적이라는 주장들이 있지만, 전적인 대안체제를 제시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 구체적 상에 대해서는 서로 대립되는 주장들이 접점을 찾지 못 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 정치 정당 중심의 그럴싸한 쇼 무대 뒤에서는 자본과 관료의 지배는 한층 더 강화되고 있다. 그 무시무시한 기득권 연합 지배세력은 굳건하게 국정교과서와 사드 배치, 위안부 합의 등등 수많은 문제를 낳고 있는 정책들을 폐기하지 못 하게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탄핵이 기각이 될 수도 있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또 다시 그럴싸한 정당의 얼굴로 나오는 기득권 대표가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 상황은 이렇게 무섭게 흘러가는데, 이러한 본질을 폭로해야 할 주요 세력들 내에서는 대선이 다가올수록 촛불의 성과를 누가 전유했는가에 대한 논쟁부터 진보 정당의 후보 전술이나 기존 야당 지지 문제 등까지 또 다시 홍역을 치를 것이 분명하다. 정치가 쇼이며, 보수 정당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본질은 변하지 않지만, 정치 과정을 무시하거나 정당 정치가 불필요하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특히 거리정치, 운동정치와 제도정치가 결합되어야 한다는 추상적인 논의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현재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에 불과한 정치에 대한 과잉, 특히 그것을 정당 집권 자체로 한정하는 구습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따라서 기득권 세력이 다시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저지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 야당 집권 이후에도 아무 것도 하지 못 하게 방해하는 구조 구축을 막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근본적으로 사회를 개조할 수 있는 정책 실행 집단을 모든 야당 내에 구축하도록 적극적으로 개입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어느 정당이 되던 순수한 논리가 아닌 실질적 사회변혁을 도모할 수 있는 근본적 토대 구축을 위해 더 큰 그림을 그려야 할 것이다. 이 글은 2017년 2월 8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551 | 추천: 0
마흐디 압둘 하디/ 팔레스타인 국제문제연구소장 (Mahdi Abdul Hadi, Head of PASSIA, http://www.passia.org) 극적인 국제적 개입과 아랍정권들이 쓰러지는 위기 속에서, 파괴가 난무하며 수백만 명의 주민들이 살해되고, 이주당하고, 난민이 되었다. 아랍역내에서 전투, 선제적인 국지전이 계속되며, 이스라엘이 1967년 점령한 아랍영토에서 철수하지 않은 채로 ‘안보 정상화’를 빌미로, 아랍평화안(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점령지 전역에서 이스라엘의 완전한 철군을 전제로, 이스라엘과 아랍국가들 사이의 관계정상화 요구)을 활용하려고 한다. 이스라엘의 군사점령 50년 동안, 이스라엘화, 유대화, 고립, 배제, 적대 정책을 실행하면서, 팔레스타인에 관한 성서적 신화, 특히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성지와 관련된 신화를 계속해서 악용해왔다. ▲ 마흐디 압둘 하디(Mahdi Abdul Hadi) 팔레스타인 국제문제연구소장 이스라엘의 군사점령을 종식시키기에는 아랍인들의 능력이 부족하고, 팔레스타인 내부 분열을 종식시킬 민족적 의지가 없으며, 여전히 덜 성숙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대한 신뢰가 줄어들고 있다. 현재 ‘협상, 저항 그리고 두 국가의 해결안이라는 환상’이 산산히 부서졌다. 이제 ‘팔레스타인 문제가 청산’되는 수순에 도달했는지 아닌지 묻는 것은 당연하다. □ 국제적 환경 러시아 연방의 카이사르(대통령)는 그의 왕관과 왕권을 복원하여, 우리(아랍인) 중 일부의 초대로 우리(아랍) 지역에 들어왔다. 그는 그의 군대를 우리 침실에 보내고, 사원, 교회, 도시를 파괴하고 우리 주민을 몰아내고 있다. 그는 골란 고원에서 시작하여 테헤란에서 끝나는 안보체제를 마련하기 위해 우리의 적과 만나고 있다. 그는 우리 영토에 머물 것이며,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를 배제하고, 터키와 이란과 함께 이 지역 지도를 그릴 것이라고 워싱턴과 브뤼셀에 통보하고 있다. 동시에 푸틴 카이사르(대통령)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당국자를 모스크바 회의에 초대하였다. 그러나 텔아비브로부터 네타냐후가 도착할 때까지 회의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미국은 대통령선거 이후 정치적 지각변동이 발생하여, 인종 차별 및 종교 차별의 문화로 회귀함을 시사하고, 배제와 적대감, 이슬람혐오를 주장하는 법안을 만들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모든 전선에서 기꺼이 충돌하거나, 철수하거나, 흥정할 준비가 되었다고 공표했다. 트럼프가 백악관에 입성하기 직전,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오바마 대통령과 함께, 유럽과 북대서양 조약기구의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어떤 불상사도 피하기 위한 협의를 요청했다. 중국은 트럼프의 주장에 반대한다. 일본과 한국은 그들의 전략을 재검토하고 있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미국과의 협상초안을 기다리는 중이다. 멕시코는 미국의 장벽 건설에 맞설 수가 없다. 한편, 캐나다 정부는 이민자들에게 문호를 열어 주었고, 그들을 신중하게 지지하고 받아들였다. □ 중동 역내 환경 이 지역의 주요 국가들,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터키와 이란은 미국의 지각변동과 러시아 카이사르(푸틴 대통령)의 복귀에 대한 결과를 서로 다르게 이해하고, 설명하고, 해석한다. 그들 사이에 논쟁과 분쟁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오바마 이후의 워싱턴과 알레포(2016년 12월 러시아가 시리아 정부군을 도와 알레포 대부분 탈환) 이후의 모스크바에 대한 개별전략과 우선순위는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들의 위상은 약하고, 거의 존재감이 없다. 왜냐하면, 이 두 나라는 안보위기, 정치적 불안정, 경제적・재정적 혼란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시리아와 이라크에서는 전투가 계속되고 있다. 이 전투는 ISIS가 패배한다고 끝나지 않을 것이다. 러시아와 미국 군대가 주둔하고, 유럽인의 손이 행동할 의지 없이 떨리고 있는 한, 이 전투는 계속될 것이다. 한때 황금 예멘이라고 불린 예멘은 모든 전선에 열려있는 교차로에 위치함으로써 불행이 계속될 것이다. 예멘은 사우디-이란 사이에서는 자국 영토를 방어하기 위하여 선제공격을 하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예멘 내 서로 다른 충성파들과 무기판매상과 관련된 부족 간 갈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쟁들이 뒤섞여있는 곳이다. 리비아의 문은 북아프리카의 인접한 아랍 국가들에게 개방되어, 변화와 모든 가능성의 바람을 몰고 올 것이다. 나토만이 리비아의 의제를 결정하고, 역할을 분배할 것이다. 아랍청년들은 계속해서 변함없이 ‘벌목공’이 될 것이고, 자신들의 운동을 억압하는 ‘정치 이슬람’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군사적 지배에 저항하며, 모든 도전에 대해 맞설 것이다. 그러나 해방의 광장에서 보였던 청년들은 현재 거의 존재하지 않고, 술집 뒤로 사라지거나 혹은 망명해 버렸다. 텔아비브는 예외로 남아있다. 텔아비브는 미국의 지각변동을 환영하며, 인종차별적인 정책을 강렬히 기다리고 있다. 텔아비브는 미국이 예루살렘의 이스라엘화, 성지의 신성모독, ‘유대와 사마리아(서안)’의 합병, 봉쇄된 가자지구에 대한 봉쇄의 파트너이자 동맹이 되기를 바란다. 동시에, 이스라엘은 중동 역내에서 러시아 카이사르 군대의 주둔에 반대하지도 않으며, 러시아의 안보협력이 골란고원(시리아)에서 시작하여 테헤란(이란)에서 끝나는 한 러시아의 행동과 정책에 반대하지도 않는다. 텔아비브는 유럽의 위선과 군사점령으로 인한 계속적인 재정지출에 의존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라말라를 5성급 호텔로 바꿔 놓았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보안요원들이 서안도시들과 마을들 전역에 퍼져있으나, 서안지역에 존재하는 70만 명 이스라엘 정착민들의 식민지 쓰나미를 막을 수 없으며, 장벽 뒤에 갇힌 팔레스타인 주민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출입금지 조치를 종식시키거나, 가자지구에 대한 끝없는 이스라엘의 파괴와 포위 공격을 끝낼 수 없다. 텔아비브 보안당국은 아랍정권의 잔존세력과 악수하며 관계를 정상화하고 있다. 텔아비브 경제 세력은 나세르, 네루, 루뭄바의 즐거운 나날을 상기시키는 호텔, 커피숍, 회의실에 앉아 아프리카 대륙 국가들과 정치 놀음을 하고 있다. 이 글은 2017년 2월 8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443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