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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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강대중(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윤동호(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이동우(변호사),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장은주(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김재완/ 방송대 법학과 교수 정당(政黨)이란 정치에 대한 이념이나 정책이 일치하는 사람들이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조직하는 단체를 말한다. 이러한 정당에 대해서 우리나라는 정당법이라는 법률에 의해 그의 성립, 운영, 조직, 활동을 지나치게 규제하고 있다. 그러나 정당을 정치단체의 하나라고 보는 미국, 이탈리아, 프랑스, 일본 등은 특별히 정당법을 두고 있지 않다. 대신에 정치단체들 중에서 해당 단체가 국가의 지원을 필요로 할 경우에는 그 범위 내에서만 정치단체와 정당의 요건을 구분하고 있을 뿐이다. 정당법이 있는 독일의 경우에도 정당의 자유로운 활동을 지원할 뿐 당원의 수나 지구당 등에 대한 제한 요건을 두고 있지 않다. 우리나라 정당법은 그 존재목적으로 제1조에서, “정당이 국민의 정치적 의사형성에 참여하는데 필요한 조직을 확보하고 정당의 민주적인 조직과 활동을 보장함으로써 민주정치의 건전한 발전에 기여하는 것”으로 하고 있다. 즉, 국민의 정치적 의사형성이 정당이라는 결사체를 통해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그 정치적 이상이 제도와 법으로써 실현될 수 있도록 실질적인 민주정치를 추진해 나아갈 수 있게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간섭하지 않는 것에 정당법의 존재이유가 있는 것이라고 읽혀진다. 그러나 현행 정당법은 그러한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규제와 장애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당원자격과 등록요건은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첫째, 정당법은 대한민국 국민 중 국회의원선거권이 있는 자로 한정하며, 또한 공무원과 대학교수를 제외한 교원은 당원이 될 수가 없다고 규정하여 당원의 자격을 지나치게 제한한다. 공무원과 교원의 경우에는 그 업무에 한해서만 중립성과 부당성 금지의무로써 규제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임에도, 그들의 고유한 정치 및 정당 활동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기본권을 박탈하고 있다. 공무원이라는 신분상의 직무수행의 중립과 국민 내지 자연인으로서의 정치활동의 자유는 구별해야 하는 것이다. 국회의원선거권이 있는 자의 경우에는 선거연령과 연계되어 있으므로, 선거연령을 낮추는 것이 필요하다. 미래세대가 그 정치의식을 함양하고 발전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원동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어야만, 정당이 민주정치의 건전한 발전에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존재할 수 있고, 지속가능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둘째, 정당법은 정당등록요건을 지나치게 제한하고 있다. 5개 이상의 시·도당을 가져야 하고, 시·도당은 1천인 이상의 당원을 가져야 한다. 즉, 전국정당만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제한은 소수나 지역에 기반한 지역정당의 조직을 봉쇄한다. 다양한 정치적 의사형성을 애초에 막는 것이다. 국민의 정치적 자유와 활동의 기본권이 지나친 정당등록요건으로 인해 침해받고 있는 것이다. 실질적인 지방자치 및 분권과, 다양한 인권의 가치를 실현시키기 위한 새로운 정당들의 진입을 막는 것은 기성정당의 특권만을 보장해 주는 것으로 민주정치의 건전한 발전을 저해하는 것이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이러한 두 가지 이외에도 국회의원선거에서의 득표에 따른 정당등록취소제도, 공직선거법의 사전선거운동금지를 토대로 한 정당 활동에 대한 지나친 제한 등이 정당을 통한 민주정치의 건전한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요소가 되고 있다. 촛불을 들었던 국민이 바라는 정치체제는 그들의 의사가 제대로 반영되고, 그것이 정의와 상식에 합치하는 법과 제도로 실현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정치체제, 특히 이를 뒷받침하는 정당법을 기초로 한 정당제도 아래에서는 너무도 요원한 신기루의 허상에 불과한 것이다. 현행 제도 아래에서의 대의제는 그 이름만을 숱하게 변경하면서 유지해온, 그야말로 기성 기득권 정당들의 의원자리 확보를 위한 왕좌의 게임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통해 대다수 불평등을 감내하고 있는 국민의 현실은 외면한 채, 법과 제도도 그 게임의 틀에서 타협의 산물로써만 누더기가 되어 생산되고 있다. 현실에서 고유한 직접민주제의 실현은 어렵지만, 직접민주제의 이상을 제대로 반영할 수 있는 장치로써의 제도 마련은 가능하다. 정당과 노조(여기에서 언급하는 것이 뜬금이 없지만, 노동자의 이익을 정치적 목적으로 한다는 넓은 의미에서의 정치 결사체로 보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므로 언급함)는 결사의 자유로써 충분히 보장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국민의 자유와 인권, 정의와 상식 등 보편적 인류애가 흐르는 법제도(모든 법들에는 표현은 다르더라도, 결국 이러한 취지로 읽혀지는 목적조항을 가지고 있으나, 개별규정들이 이에 부합하지 않고 있다)를 그 목적에 부합하도록 생산하고 변주도 가능할 수 있게 만들어 주어야만 한다. 향후 헌법의 개정에는 인권과 기본권을 중심에 두고서, 이를 현실에서 제대로 생산해 낼 수 있는 정치체제를 마련하는 근본적인 개혁을 해야만 할 것이다. 더 이상 우리 국민은 엘리트 국가주의에서의 레밍(Lemming, 나그네쥐)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667 | 추천: 0
홍미정/ 단국대 중동학과 조교수 □ 이스라엘 전자검색대 설치에 맞선 무슬림-기독교인들 공동전선 구축  7월 14일(금) 오전 7시경, 예루살렘 소재 알 아크사 모스크 내부에서 발발한 총격전으로 이스라엘 시민권자인 팔레스타인 무슬림 3명과, 이스라엘 경찰 2명이 사망했다. 이스라엘은 즉각 알 아크사 모스크를 폐쇄하고, 모스크 내 금요 기도회를 취소하였다. 7월 16일(일) 이스라엘은 모스크를 다시 개방하였으나, 모스크 내부에 CCTV를 설치하고, 입구에 전자검색대를 설치하였다. 모스크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은 모두 이 전자검색대를 통과해야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이 전자검색대 설치에 항의하면서 모스크 입장을 거부하였다.  이 사건에 대하여 팔레스타인 국제문제 연구소장 마흐디 압둘 하디(Dr. Mahdi Abdul Hadi)는 “이슬람고등위원회 및 예루살렘 무프티를 비롯한 이슬람 지도부와 다양한 팔레스타인위원회 대표들이 회의를 갖고, 알 아크사 모스크에 들어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전자 검색대 설치에 대한 암만, 젯다, 뉴욕, 워싱턴에서의 중재협상이 실패하고, 우리 팔레스타인인들은 혼자 고립되었다. 알 아크사 모스크는 팔레스타인 민족의 상징이며, 팔레스타인들에게 주권이 있다. 그런데 네타냐후는 알 아크사 모스크를 이스라엘의 주권으로 변경시키려고 한다. 이것이 이번 사건의 핵심이다”고 밝혔다.  7월 18일(화) 전임 그랜드 무프티(재임:1994-2006)이며, 현재 이슬람고등위원회 위원장이자 알 아크사 모스크 이맘인 셰이크 아크리마 사브리(Sheikh Ekrima Sabri)가 모스크 문 밖에서 기도회를 마친 이후, 이스라엘 경찰이 쏜 고무 총탄에 다리를 맞아 부상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셰이크 아크리마 사브리 및 알 아크사 모스크 지도부와 동방정교회 대주교인 아탈라 한나(Archbishop Atallah Hanna) 및 기독교 지도부가 전자검색대 설치에 반대하는 시위에 앞장서는 모습이 세계 언론에 보도되었다.  7월 16일부터 약 9일 동안 계속된 팔레스타인인들의 항의 시위 이후, 7월 25일 결국 이스라엘은 전자검색대를 제거하고 감시카메라로 대체하였다. 어쨌든 평화시위를 통한 이스라엘과의 투쟁에서 예루살렘의 팔레스타인인들은 작지만, 소중한 승리를 한 것으로 보인다. 셰이크 아크리마 사브리와 대주교 아탈라 한나  이 승리를 이끌어낸 결정적인 동력은 예루살렘 알 아크사 모스크 지도자들의 노련한 대응력과 예루살렘 기독교인들과의 공동 전선 구축에 있다. □ 우리는 하나의 가족이며 하나의 민족, 팔레스타인인 :알 아크사 모스크, 성묘교회, 예수탄생 교회는 팔레스타인 성소들  7월 23일, 대주교 아탈라 한나는 알 아크사 모스크 밖에서 시위 도중 “예루살렘 교회들은 알 아크사 모스크와 연대한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점령과 인종차별에 맞서는 하나의 민족이다. 알 아크사 모스크를 표적으로 하는 것은 단지 무슬림들만 겨냥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들과 팔레스타인인들 전체를 겨냥한 것이다. 알 아크사 모스크를 겨냥한 것은 기독교 성소를 겨냥한 것이다. 기독교 성소 역시 빈번하게 불법적인 방법으로 점령당하고, 약탈당한다. 팔레스타인에는 팔레스타인인들이라고 불리는 오직 하나의 가족이 있다. 자유를 위해 싸우는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다.”  7월 24일, 수 십 명의 기독교인들과 무슬림 팔레스타인인들이 베들레헴 예수탄생 교회 앞에서 알 아크사 모스크 입구에 설치한 전자 검색대를 비롯한 모든 장애물 제거를 요구하는 깃발을 들고 시위를 하였다.  아랍 정교회 청년부 대변인 잘랄 바르함(Jalal Barham)은 “우리는 오늘 베들레헴 예수탄생교회 앞에 모였다.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예루살렘 알 아크사 모스크와 성묘교회(예수 무덤교회)는 차이가 없다. 우리 무슬림과 기독교인은 한 민족이고, 우리의 역사는 하나다. 우리는 이슬람과 기독교의 신성한 의무인 자유와 존엄성을 위해 싸울 것이다”고 주장했다.  기독교인들이 무슬림들과 통합되는 이러한 환경은 앞으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주도하는 하마스 고립 정책 등 팔레스타인 내부의 정치변화를 촉발시킬 것으로 보인다. □ 기독교 지도부의 성명: 예루살렘 성지 현상 유지 촉구  뿐만 아니라, 7월 19일(수) 예루살렘 소재 그리스 정교회 총주교, 대주교 등 13명의 교회 수장들이 알 아크사 모스크 현상 유지를 요구하는 다음 성명을 발표하였다. 예루살렘 교회들의 총주교들과 수장들의 성명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들인 우리는 하람 알 샤리프(알 아크사 모스크)에서의 최근 폭력적인 사태 전개에 관하여 심각한 우려를 표현한다. 우리는 알 아크사 모스크와 그 안 뜰, 모든 빌딩과 예루살렘 도시의 역사적인 현재 상황을 변화시키려는 모든 위협을 규탄한다. 역사적인 현재 상황의 연속성과 완전성에 대한 위협은 쉽게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그 결과는 현재의 예민한 정치적 환경에서 가장 달갑지 않은 것이다. 무슬림들은 알 아크사 모스크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과 예배권리를 가진다. 알 아크사 모스크, 예루살렘 성소들 그리고 성지에 대한 중요한 관리권이 요르단 하심 왕국에게 있다. 모든 성소들이 지속적으로 주의 깊게 보호받을 필요가 있다. 이 성소들에 대한 합당한 접근을 위해 세 아브라함 종교들(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 대한 전반적인 현상유지가 되어야한다. 우리는 이 성소들을 관리하는 기존의 합의된 현상 유지가 전체 공동체의 안전을 위해서 완전히 존중될 필요가 있다는 우리의 요구를 다시 확인한다. □ 이슬람 지도부의 호소문: 팔레스타인주민 통합, 국제사회의 보호 호소  7월 23일(일) 이슬람 와끄프장, 이슬람 업무부장, 이슬람 성지 위원회의장, 고등이슬람위원회 의장,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 무프티, 현직 수석 판사 등 예루살렘 이슬람 지도부는 기독교인들의 공조에 감사하면서 다음과 같은 호소문을 내놓았다. 팔레스타인 주민통합을 요청하는 호소문을 시작하면서 ‘분열을 반대하고, 형제애 강조’하는 코란 3장 알 이므란, 예수의 외할아버지(마리아의 아버지) 장을 인용하였다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슬람 당국자들의 호소문 전능하신 하나님이 말씀하시길: 여러분은 모두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분열되지 마시오. 여러분이 서로 적이었을 때, 여러분에게 베푼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로 묶었으며, 그의 은혜로 여러분은 형제가 되었습니다. (코란 3장: 103절, 알 이므란-마리아의 아버지-장). 1. 우리는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통합에 매우 감사하며, 알 아크사 모스크에 대한 주민들의 애정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알 아크사 모스크를 수호하는 동안에 승천한 우리의 순교자들의 영혼을 위하여 자비를 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자비를 내려주시고, 그들을 의로운 사람들로 받아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또한 우리의 부상당한 형제들의 신속한 쾌유와 구금된 형제들의 즉각적인 석방을 빕니다. 2. 우리의 성소와 주민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에 직면해서, 우리는 국제사회에게 책임을 지고 이 공격을 종식시켜주기를 요청합니다. 3. 우리는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입장 표명과, 아랍과 이슬람 대중들의 알 아크사 모스크에 대한 성원에 매우 감사드립니다. 4. 우리는 전자검색대와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성소들, 특히 알 아크사 모스크에서의 역사적•종교적인 실체를 변경시키려는 점령세력의 모든 조치를 명백하게 거부합니다. 5. 우리는 예루살렘 성소들, 특히 알 아크사 모스크에 대한 보호와 관리권을 가지고 있는 요르단 왕 압둘라 2세 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 대통령 마흐무드 압바스, 모든 아랍 무슬림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책임을 수행하고, 예루살렘 성소들과 주민들에게 적대적인 점령세력의 활동들에 맞서서 모든 정치적•법률적 압력을 행사하도록 호소합니다.    6. 우리는 이스라엘의 공격에 맞선 우리의 기구들, 특히 이슬람 와끄프부와 모든 와끄프 직원들, 그리고 이들의 확고한 입장에 대한 우리 주민들의 애정과 성원에 매우 감사드립니다. 2017년 7월 23일, 예루살렘 □ 대주교의 기독교인 시위 동참 촉구와 전자검색대 제거 그리고 감시 카메라 설치  7월 24일(월) 대주교 아탈라 한나는 “모든 교회들은 내일 문을 닫고, 기독교인들은 무슬림 형제자매들과의 통합과 연대를 위해서 알 아크사 모스크로 가서 시위에 동참하라”고 긴급히 촉구하였다. 예루살렘 문제를 구심점으로 한 팔레스타인 무슬림-기독교인 통합은 점령통치를 하는 이스라엘에게 가장 큰 위협이다. 무슬림들과 기독교인들이 전자검색대 제거를 요구하는 시위를 예루살렘 성지에서 공동으로 조직한 이번 사건은 종교를 활용하여 분할통치 전략을 실행하는 이스라엘 점령정책을 무력화시키는 강력한 요소로 작용할 수도 있다.  결국 7월 25일(화) 아침 전격적으로 이스라엘은 알 아크사 모스크 전자검색대 제거를 발표하고, 오후에 전자 검색대를 제거한 대신 감시 카메라를 설치하였다. 전문가들과 법률가들은 이 감시 카메라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훨씬 더 큰 위협이며, 국제법 위반이라고 주장한다. 팔레스타인인들은 감시 카메라 설치에 대한 항의시위를 계속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어, 이 사건의 파장이 어디까지 미칠지 가늠하기 힘들다. 이 글은 2017년 7월 26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1276 | 추천: 1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명색이 철학을 업으로 삼은 지가 굳이 셈하자면 삼십 여 년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 인권연대 수요산책에 글을 쓰면서 철학 전문의 글은 그다지 쓰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오랜 만에 제법 철학 냄새를 풍기는 글을 써 보고자 한다. 다름이 아니라, 약간 헷갈릴 수도 있는 진실과 진리를 억지로나마 구분해 보고자 한다. 간단히 말하면, 진실은 허구일 수도 있다. 아니, 허구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욕망을 더욱 그럴 듯하게 충족시킬 수 있을 것 같을 때 진실로서 작동한다. 그 반면, 진리는 인간의 욕망 충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속된 말로 하자면, 진리는 ‘빼도 박도 못하는’ 사실이다. 예컨대 “누구나 반드시 죽게 되어 있다”라는 것은 진리다. 그리고 “질량을 가진 두 물질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여 서로 끌어당긴다”라는 중력 법칙은 진리다. 뭔가가 분명하게 있다면, 그 뭔가가 있다는 것은 진리다. 진실은 욕망에 따른 바람과 관련이 있다. 뭔가가 있었으면 좋겠다 싶을 때, 그 뭔가가 있다고 믿고, 그 믿음을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게 되면 그 믿음에 의해 전혀 새로운 현실이 생겨나게 된다. 그리고 그 새로운 현실에 따른 권력이 생겨나게 된다. 믿음과 현실 그리고 권력이 한데 결합하게 되면 거기에서 진실이 생겨나게 된다. 권력이 무조건 나쁘다거나 좋다거나 미리 결정지을 필요는 없다. 우리 인간은 어느 누구도 자신이 태어나고자 의지를 발휘해서 태어나는 자는 아무도 없다. 부모님들의 계획에 의해 태어났을 수는 있지만 자신의 의지에 따른 계획은 있을 수 없다. 결국 우연히 태어난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죽게 되어 있다. 이게 진리다. 이러한 진리를 기본조건으로 해서 삶을 살아간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 인간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고 이유를 찾으려 하고 목적을 설정하려 하고 가치를 획득하려 한다. 이 모든 일들을 둘러싸고서 대단히 근본적인 욕망이 작동하면서 앞서 말한 바람이 생겨나고 그에 따른 진실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 진실을 오히려 삶의 충분조건처럼 여기면서 삶을 영위한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진리는 근본적으로 욕망에 따른 바람과 무관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냉소적이고 심지어 잔인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이른바 진리를 추구한다는 인간들은 흔히 말하는 인간성이 메말라 보이기 일쑤다. 감동한다거나 매혹된다거나 혐오한다거나 하는 이른바 감정적인 구석이 거의 없다. ‘무념무상’ 또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운운하거나, ‘중성(中性)’ 또는 ‘사물성’을 중시하거나, ‘거리두기’ 또는 ‘내버려두기’를 제시한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제법 쓸모가 있어 보이지만, 대체로 거의 쓸모가 없다. 욕망과 바람에 의거해서 삶의 충분조건을 찾아 헤매다 지친 사람들에게 “그 보라니까! 그냥 살다 가는 거야” 하고서 핀잔을 준다. 그 결과, 진리를 추구하는 인간들은 현실사회 속에서 쫓겨나기 일쑤고 자칫 목 매달리거나 독배를 마셔 사형당하기까지 한다. 그렇다고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이 전혀 쓸모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진리를 추구하는 일이야말로 긴요하다. 역사를 보면, 진실 속에는 예사로 허구가 끼어들어 있어 그 허구를 기반으로 진실이라는 명목 하에 삶의 이유와 의미와 가치와 목적을 향한 여러 다양한 길들을 완전히 차단하고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에너지를 착취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때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이 나타나 진리에 의거한 삶의 기본조건을 제시하면 그 기본조건을 바탕으로 해서 얼마든지 다른 방식의 삶을 기획할 수 있음이 폭로되면서 기존의 착취의 권력 체계를 무너뜨릴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진실에 의해 진리가 활용된다는 사실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기술이다. 오늘날 제4차 산업혁명 운운하면서 인공지능을 비롯한 첨단의 고도과학기술만이 아니다. 인간을 부리는 경영학이나 행정학 또는 사회공학 및 정신분석학 등의 기술이 어쩌면 더욱 문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욕망과 바람의 방향에 의거해서 진실 형성의 방향이 결정된다는 사실, 그러한 진실의 방향이 어떠한가에 따라 진리를 다르게 활용하게 된다는 사실, 그리고 진실의 복잡성이 강화되면 될수록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이 끼어들 여지가 점점 줄어들게 된다는 사실 등등. 이러한 사실들을 감안하게 될 때, 이른바 진리를 추구한다는 순수학문에 종사하는 자들은 무력감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이들은 사회로부터 심지어 무능력자로 치부되기도 한다. 토사구팽의 꼴이다. 저 밑바탕에서는 진실이 진리를 활용하면서도 구체적인 현실에서는 진실이 진리를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는 꼴이다. 글을 마무리하려니 두서없이 왔다 갔다 한 것 같다. 대략 알아서들 이 글에서 진리가 아니라 진실을 파악했으면 하고 바란다. 그러면서 민주주의는 진실의 문제인가 아니면 진리의 문제인가? 인권은 진실의 문제인가 진리의 문제인가? 그렇다면 정의는? 국가는? 자유는? 그리고 마지막으로 생명은? 이 글은 2017년 7월 26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867 | 추천: 0
신하영옥/ 여성운동연구자네트워크 ‘젠더고물상’ 여성운동연구자를 나의 정체성으로 한 지가 4년째 된다. 그 후로 내게 여성운동의 현장은 교육을 하러가서 만나게 되는 조직, 활동가들, 회원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듣는 활동과 삶이다. ‘마을 만들기’ 사업이 거버넌스 형식으로 활발히 추진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 주체들은 대체로 여성들로 보인다. 예전부터 마을에서의 활동을 담당하고 있는 이들은 여성들이었다. ‘봉사’니 ‘행사’니 할 때 보면 여성들이 노동은 물론 접대까지 주로 담당하여 왔지만, 이득은 정치지향의 지역유지인 남성들에게 돌아갔다. 전형적인 ‘성정치’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지역조직과 사업방식은 남성적인 것으로 여성은 동원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러나 마을만들기 사업을 통해 들여다 본 지역은 변화 중에 있다. 우선, 여성들이 동원대상이 아니라 주체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사업내용에 있어서도 ‘성정치’를 동원한 생색내기가 아니라 지역사회를 민주적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성들이 사업의 동원대상이 아니라 주체로 등장하면서, 마을 사업은 ’여성중심적‘인 모습을 띠어 가고 있다. ‘여성중심적’이라는 말은 ‘여성주의적’으로 되어가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자 여정이라는 의미로써 그렇다. 마을 교육에서 ‘젠더’와 ‘성평등’이라는 주제가 등장하고 있음에서 알 수 있다. 민주적 지역사회로의 변화의 지향은 다양한 사업들 – 세대 통합 사업, 대안 경제 창출 사업, 대안교육사업, 환경 및 생태사업, 장애통합사업, 공동체 활성화를 위한 마을방송국 및 동네카페 등 –에서 나타나고 있다. 마을은 삶, 생활이 펼쳐지는 곳이기에 모든 사회적 문제가 삶의 형태로 나타난다. 성, 연령, 직위, 장애, 인종, 계급 등 모든 권력관계들이 중첩되어 나타나고, 교육, 환경, 문화와 같은 사회 문제들도 복합적으로 얽혀있다. 이것이 ‘마을’ 혹은 ‘도시공동체’가 가지는 넘기 힘든 벽일 수도 있다. 각기 다른 위계질서 및 관심사를 가지지만 ‘공동체’로 묶여야 하는 문제, “다르면서 같아야” 하는 어려운 시험문제 같은 것 말이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민주주의적 가치는 함께 갈 수 있는가? 라는 좀 더 근본적인 질문에서 나온...... 이렇듯 마을은 모든 위계와 차이들, 사회문제들이 공존하는 ‘장’이다. 그리고 이것은 ‘공론장’을 형성할 때 더 많은 차이와 다름이 드러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다르기에 공론장이 필요할 수도 있다. 다름이 만날 필요가 없다면 공론장이 필요 없을 것이고, 그 전제가 되는 ‘마을 만들기’, ‘공동체 운동’ 역시 의미를 상실한다. 결국 ‘다름’, ‘차이’가 곧 정치의 출발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름 - ‘자유’ - 를 사회적 동등함 – ‘평등’ - 의 위치에 놓는 것은 쉽지는 않은 일이다. 여성과 남성들을 ‘젠더’훈련에 함께하게 한 후, 어떤 사건이나 상황에 대한 분석을 유도해보면 확연히 차이가 난다. 그 차이는 신영복 선생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손과 머리’ 만큼의 거리이다. 여성들은 경험적으로 이해하고 공감한다. 남성들은 분석적이고, 지식적으로 독해한다. 여성들에게 경험적 ‘부당함’이 남성들에겐 해석적인 ‘부정의’가 된다. 부정의에 도달하기까지 무수한 반복학습이 전제됨은 물론이다. 성차뿐만 아니라 복잡하게 얽혀있는 여러 가지 차이를 마을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수용하고 존중하고 공존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아마도 이후 마을사업의 과제로 등장하게 될 것이라 본다. 사진 출처 - 한국경제 이미 생활상의 수많은 문제들이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의제로 등장하고 있다. 개인적인 것들이 정치적인 것들로 부상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다양한 집단들의 차이는 누구의, 무엇을 사회/정치적 선결과제로 할지에 대한 고민을 던진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가 만드는 억압의 다양한 층위와 차이들의 해결과정에 가장 중요한 것은 ‘담론’, ‘해석’, ‘정해주기’의 방식이 아니다. 마을공동체 스스로 결정하고 그 결정을 존중하는 마을정치의 방식에서 배워야 할 것이다. 담론이 충돌하고, 주장이 충돌하는 방식이 아니라, 삶과 생활의 구체성이 충돌하여 기어이 어떤 답안을 내와야하는 방식, 행동을 해야 하는 방식, 구체적 사례들이 충돌하고 경쟁해서 너와 나를 포함한 모두가 현재적 상황과 맥락을 고려하여 실천적으로 현실적으로 결정하는 방식을 추구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권력을 가장 덜 가진 이의 입장을 우선 고려하는 방식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름을 인정받기 위한 주체의 노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이다. ‘인정해라!’ 가 아니다. 나 혹은 내가 속한 집단의 다름을 설명해내기, 다름이 어떻게 배제되어왔는지를 설득하기, 공존하기 위해 필요한 실천적 대안을 요구하기 등 섬세하고 치열한 전략적 투쟁이 필요하다. ‘다름’ 들이 얽혀있는 마을에서 공동체 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것에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다. 어떤 전략들이, 어떤 포기들이, 타협들이 역동하는지에 주목할 수 있을 때 당위나 정치적 올바름이 아닌, 현실 변혁적 공론의 장이 형성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이 글은 2017년 7월 12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508 | 추천: 0
정재원/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정권 교체 이후 실로 많은 것이 눈에 띄게 변하고 있다. 외교 분야의 경우에도 눈에 띄는 변화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대러시아 외교 정책의 변화이다. 물론 그 동안 그 어떤 정권 하에서도 주변 특정 강대국들에 대해 특별히 소홀하거나 극단적으로 적대적인 관계를 맺어 온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수사적으로는 매우 우호적인 관계임을 과시하였고, 실제로 다양한 교류가 증가해 온 것이 사실이다. 박근혜 정권에서도 초기에는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내세우며 러시아 및 중앙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 증진을 위해 노력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점차로 미국의 중국 및 러시아와의 관계 악화, 중국 견제를 위한 한일 화해 압박 등으로 인해 중국은 물론 러시아와도 관계가 소원해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정권 교체 이후 문재인 대통령은 직접 ‘남-북-러 가스관 사업’을 비롯한 대러시아 관계 개선을 공언했고, 러시아로 특사를 보내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에 대한 의지를 보여 주었다. 그런데 일각에서 소위 ‘남-북-러 가스관 사업’은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은 사업임을 주장하는 이들이 등장했다. 즉, 이미 극동 및 시베리아 가스는 중국 등으로 수출하는 것으로 계약이 되어 여분이 없는 상태이고,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이미 셰일가스 등을 수입하기로 한 상태라 더 이상 수입할 이유가 없으며, 특히 러시아로부터 오는 가스관에 의존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이 너무 많으며, 무엇보다 북한이라는 변수와 이를 근거로 제기될 미국의 간섭 등으로 인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따라서 남-북-러 가스관 사업은 폐기해야 하며, 그 대신 전기 수입을 추진해야 한다는 대안을 제시한다. 부족한 전기를 한국에서 생산하려 하지 말고 발전자원이 풍부해 전기 값이 싼 러시아에서 사와서 쓰면 경제적, 환경적, 외교안보적, 정치적, 미래적으로 모두 유리하다는 주장이다. 직류와 교류 전환 문제나 육로 송전탑 외 다양한 대안들이 있다며, 기술적인 어려움 역시 타국의 많은 예를 들며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무엇보다 가스를 수입해 우리나라의 환경을 파괴하지 말고 깨끗하게 전기를 수입하자는 게 핵심 포인트 중 하나이다. 특히 이러한 구상을 가능케 했던 계기 중 하나가 일본의 손정의 소프트 뱅크 회장이 추진하는 소위 ‘동북아 수퍼 그리드 사업’이다. 즉 몽골의 풍부한 풍력과 태양열 등 신재생 에너지를 이용해 생산한 전기를 일본으로 수입해 쓰는 것을 골자로 하는 이 프로젝트에 현재 중국과 러시아, 한국 등도 큰 관심을 갖고 참여하고 있다. 이와 유사하게 러시아에서도 전기를 생산해서 그것을 들여오자는 것이 핵심적인 내용인 것이다. 그러나 몽골의 경우와는 달리, 러시아의 경우에는 현재 풍력이나 태양열이 약해 수력 등 다른 에너지로 얻는 전기를 수입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러시아 전체적으로 여전히 화력발전소 비중이 68%로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원전과 수력은 각각 20%도 안 되는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극동의 경우 전체 수력발전소의 6% 정도만 위치해 있다. 물론 극동 자체의 인구가 적고 따라서 수요가 낮기 때문에 수력에 의한 전기가 풍부하다고 할 수 있지만, 화력의 비중이 상당히 크다. 게다가 현재 수력은 풍부하지만 현지 수요가 낮아 가동률이 매우 낮은 상태이다. 화력발전소 역시 70% 가까이가 시설이 노후화되어 개보수 등이 시급하다. 따라서 향후 한국 뿐 아니라 중국, 북한, 일본까지 러시아의 전기를 수입하게 되면, 자국 지역 발전보다는 해외 수요를 맞추기 위해 가스나 석탄 등 화력발전소도 더 많이 짓거나 무리해서 가동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수력 발전소도 더 지어야 할 수도 있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심각한 환경 문제를 유발할 수밖에 없다. 과거 라틴 아메리카 등지에서 공해 없는 대안 발전으로 각광받았던 수력 발전 댐들의 건설로 인해 환경과 주민생활터전 등이 대거 파괴되거나 하류 지방의 수질 오염 등 수많은 문제들이 발생한 바 있었다. 유사한 일들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났다. 결국 물이 풍부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 아님은 두 말 할 나위도 없다. 더욱이 해외 수요가 확대될 경우 원전 건설을 주저하지 않는 러시아 정부에 의해 아직 극동 지역에는 주력이 아닌 원자력 발전소도 건설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결국 지역 발전이나 주민 복리를 위하기보다 환경이 파괴되더라도 해외에 팔기 위한 에너지를 생산하는 전형적인 에너지 수출을 위한 개발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경우 새로운 수력발전소 건설이나 화력, 심지어 원자력 발전소까지 짓는 상황으로 발전하게 되면, 우리나라는 깨끗한 전기를 수입할 수 있을지 몰라도, 러시아 극동 지방에서는 끔직한 환경적 재앙을 낳을 수 있다. 문제가 이러한데도 놀랍게도 국가의 경계를 넘어 국익을 중심으로 하는 논의에서는 이러한 문제가 서로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들며 정부 단위에서의 논의 속에 중요한 문제들이 은폐되곤 한다. 풍력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몽골 전력 수입 프로젝트는 명백히 탈원전, 탈화력을 내세우는 매우 진보적이고 친환경적인 사업이다. 그러나 위에서 보듯 러시아로부터의 전력 수입은 성격이 전혀 다르다. 또한 대규모 전력망이 국경을 넘어가려면 고도의 정치적 협력관계가 갖춰져 있어야 한다. 동시에 수십 수백억 달러를 투자하는 사업인 만큼 향후에도 지속적으로 정치적 안정이 보장된다는 신뢰가 먼저 형성되어야만 한다. 투자시설에 대한 소유권, 권리, 의무 등이 뚜렷해야 함은 물론이다. 누가 무엇을 소유하는지, 누가 전력을 사용하는지 매출이 어디에서 발생해 어디로 가며 어떻게 배분하는지 분명해야 한다. 기 적인 문제뿐 아니라 재정적인 그리고 정치적인 위험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도 반드시 필요하다. 전력 수입을 주장하는 이들은 유럽과 아프리카 지역을 포괄하는 수퍼 그리드 사업이 최근 들어서 지지부진해진 상황과 원인에 대해 무지하다. 왜냐하면 이제 에너지는 분권화되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커져가기 때문이다. 즉, 대규모 전력 연결망이 과연 필요한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이제 신재생 에너지를 포함하여 전력 계통이 전통적인 중앙 집중방식에서 지역발전설비가 지역전력수요를 공급해 주는 지역 분산형 마이크로 그리드 형태로 진화해 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지역별 마이크로 그리드가 구축되면 전력생산이 과도해 지는 일이 없어지고 전력수요에 맞춰 신속하게 전력 생산량을 보강하는 정책 추진도 쉽다. 수요관리형 지역 분산형 전력 공급망은 이미 독일과 스웨덴 등 선진국에서 추구하는 방식으로 산업단지별로, 아파트 단지별로 또는 도시 별로 지역 특성에 맞는 전력공급체계를 구축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 이는 태양열이나 지열 혹은 폐기물 에너지 등 다양한 신재생 에너지가 활성화될 수 있는 전제 조건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지방분권, 지방자치 실현이라는 다른 차원에서도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상대국의 정부가 자국의 에너지 마피아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신재생 에너지 등과 같은 대안을 발전시키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그 상대국의 진보적 에너지 정책까지 고려해서 협상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만 이익이 되고 상대국에게는 피해를 주는 것을 서슴지 않는 대외 정책 제안은 지양해야 한다. 가스수입이든 전력수입이든 미국과 북한과 같은 국제정치적 문제와 국내 에너지 마피아 등과 같은 국내 기득권 세력의 문제가 현실화에 있어서 더 큰 장애물일 수 있다. 반대로 러시아로의 에너지 의존성 문제도 심각하게 고려해 봐야 한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러시아 국민의 생활터전과 자연환경을 파괴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임을 이젠 명심해야 한다. 이 글은 2017년 6월 28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497 | 추천: 0
이문영/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 6월 20일은 ‘세계 난민의 날’이다. 보통 ‘난민협약’이라 불리는 ‘난민 지위에 관한 제네바 협약’(1951)의 가치와 의미를 되살리고, 난민 보호의 국제적 의무를 되새기며, 이에 대한 관심과 행동을 촉구하는 날이다. 2000년 12월 4일 UN과 아프리카통일기구가 매년 6월 20일을 ‘난민의 날’로 제정하는 결의문을 채택해, 제네바 협약 50주년인 2001년 6월 20일부터 전 세계에 시행되었다. 오스트리아, 불가리아 등 유럽 국가들은 6월 16일을 국제 난민의 날로 기념하기도 한다. 트럼프의 반이민 정책, 유럽 내 반난민 정서의 광범위한 확산 등이 보여주듯이, 현재 난민은 국내, 국제정치를 막론하고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를 가르는 결정적 키워드가 되었다. 이미 2016년 ‘외국인 이주자 200만 시대’를 열어젖힌 우리에게 이주자만큼이나 난민 문제도 관심과 숙고의 대상이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외국인 이주자와 달리, 난민 문제는 아직 우리에게 급박한 현실로 다가오지 않는다. 물론 터키 해변으로 밀려온 시리아 난민 소년의 시체, 공습으로 무너진 건물 속에 피와 먼지로 뒤범벅이 된 채 멍하니 앉아있던 ‘알레포 소년’의 모습을 우리는 매스미디어를 통해 일상적으로 수도 없이 접하게 된다. 늘 가슴 아프고 안타깝지만, 그래도 아직은 다른 나라의 일로 여겨지는 것이 사실이다. 사진 출처 - 국민일보 우리에게 난민 문제가 아직 강 건너 불인 이유는 한국의 미흡한 난민지원 정책과도 관련된다.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 통계월보>에 따르면 2016년 한국 정부에 제출된 총 7,542건의 난민 신청 사례 중 철회나 보류를 제외한 총 5,394건에 최종결정이 내려졌다. 이 중 난민 인정이나 보호 결정을 받은 사례는 총 344건(난민 인정 98건, 인도적 체류허가 246건)으로 전체의 단 6%에 불과하다. 전체의 94%인 5,050건이 불인정 판정을 받았다. 합당한 관심과 보호를 받지 못하는 ‘우리 안의 난민’은 단지 한국에 피난처를 요청한 외국인들만이 아니다. 세계를 떠도는 탈북민 역시 또 다른 차원의 ‘우리 안의 난민’이다. 현재 세계난민학계에서 해외 거주 탈북자는 매우 독특하고 진기한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한 나라가 20여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잠재적 난민을 배출하고, 그 잠재적 난민이 중국과 동남아시아, 러시아 같은 인접국은 물론, 유럽, 미국, 호주 등 전 세계에 광범위하게 포진하며 일종의 다국적 디아스포라를 형성하는 현상은 분명 범상한 것이 아니다. 더구나 이 잠재적 난민은 대한민국에서는 자동적으로 국민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세계를 난민으로 떠도는 사람들. 그중에는 심지어 한국의 국민이었다가 이를 포기하거나 부인하면서까지 난민을 자청하는 사람들도 섞여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이들이 제3국에서 난민 지위를 얻는 것은 결코 만만치 않다. 탈북의 가장 중요한 루트인 중국의 경우, 탈북민은 불법체류자로 난민 지위 신청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들이 각종 인권유린, 강제추방의 공포에 항상 노출되어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유럽이나 미국, 캐나다 등 인권 선진국의 경우 탈북민에게도 국제적 인권표준에 따른 기회가 주어지지만, 난민 인정 건수는 시간이 갈수록 줄어들고 절차와 기준은 더 엄격해지는 실정이다. 특히 한국이 탈북민에게 부여하는 국적이나 각종 지원이 제3국의 탈북민이 난민 지위를 얻는데 큰 장애요소가 되고 있다. 한국에서 국민일 가능성이 타국에서 난민일 기회를 차단하는 셈이다. 그럼에도 이들이 국민을 버리고 난민을 자처하는 것은 한국에서 온전한 국민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여러 겹, 여러 차원에 얽힌 ‘우리 안의 난민.’ 세계 난민의 날을 맞아 이제 TV 속 먼 곳의 난민만이 아니라, ‘우리 안의 난민’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는 기회를 가지면 어떨까. 이 글은 2017년 6월 28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459 | 추천: 0
윤영전/ 평통서문예원장 세월이 유수와 같다는데 “6.29선언”이 있었던 그때가 벌써 한 세대가 흘러갔다. 조국분단 72년의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유월항쟁의 6.29선언이 어느 사이 30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이제 1987년 6월 그날의 기억들을 돌아본다. 그해 1월14일 서울대생 박종철 학생이 데모주동자로 몰려 수배를 당하던 중에, 경찰에 붙잡혀 남영동 분실에서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경찰은 “종철 군을 붙잡아 조사를 하던 중에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쓰러졌다”고 발표를 하였는데 믿을 수도 없고 소가 웃을 일이었다. 서울대를 비롯한 전국에서 대학생들이 항의 집회를 하며 “종철”이를 살려내라고 가열 차게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그 해 전 1986년 9월27,28일에는 건국대에서 전국의 2천 여 대학생이 집결하여 자주 평화통일을 위한 토론과 부정한 정권에 대해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경찰은 전원을 강제로 진압, 서울의 전 경찰서 유치장에 구금했는데 시설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다음 해는 88년 가을에 올림픽이 예정되고, 연초 2월에는 전두환 정권 단임 7년이 다가오고 있었다. 야당과 재야에서는 직선제 개헌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감옥에서 이부영 의원이 들은 박 군 죽음의 진실은 “박 군이 물고문과 전기고문으로 숨졌는데 경관 2명이 아닌 3명이 더 가담했다. 이를 은폐하고 고문한 경찰 가족에게 총리공관에서 1억씩 주며 은폐를 했다.”라는 사실이었고 이를 사제단 김승훈 신부에게 알려주었다. 이어 5.18 광주항쟁 7주년이 되는 날, 명동 대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이 광주의 영혼들을 추모하는 미사집전에 김승훈 신부가 이를 발표하였고 모두가 놀라고 있었다. 이어 성당 밖에서 신자들과 시민들이 분노하고 이어서 낮과 밤에도 계속 시위가 전국으로 번져가 박종철 학생을 살려내라는 항의가 날로 확산되었다. 이에 전두환 정권은 국무총리를 비롯한 안기부장, 내무, 국방, 문교 등 민심수습을 위한 개각을 즉각 단행했다. 5.25 당시 총리로 이한기 원장을, 본인의 고사에도 일방적으로 발표해 필자도 총리를 보필하는 보좌관을 맡게 되었다. 당일 종합청사에서 총리 이취임식을 하고 저녁 8시에는 언론사와 인터뷰를 하는데 “박 군의 고문치사에 대한 정부의 사과와 해당자 엄벌은 물론 앞으로 재발되지 않도록 다짐한다”는 회견을 하고 총리 업무에 들어갔다. 필자는 총리를 수행하고 의전실에서 당시 반기문 의전장과 총리를 보좌하였다. 전 국민은 고문치사에 항의하고 직선제 헌법 개정을 전국적으로 학생과 시민들이 요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박 군의 고문치사에 항의와 직선제 요구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은 4.13호헌조치를 발표하여 더욱더 국민의 반발을 사고 있었다. 더구나 6월9일에는 연세대 이한열 학생이 시위 중에 경찰의 직격탄을 맞아 위급하게 되었는데 중환자실에 입원을 하였다. 여기에 재야와 학생은 6월10일을 기해 항쟁을 선언하고 그날 전국의 차량들이 경적을 울려 항의를 하는 등 투쟁을 전개했다. 6.10 국민대회 1987년 6월 10일 명동 한일은행 본점앞에서 시민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그날 저녁9시에 청와대에서 총리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나 대통령입니다. 지금 명동성당에서 ‘해방구’를 설정하여 정부를 전복하려 맞선다는데 알고 있소. 당장 해결하시오. 명령이오” 하며 전화를 끊었다. 필자는 절대 강제로 성당에 경찰투입은 안된다고 건의했고 총리도 동의를 하면서 은근히 걱정이었다. 그런데 다음날 9시 긴급 청와대 안보회의에 참석하라는 연락이 왔다. 청와대에는 국방, 내무, 법무, 문교 등 장관들 치안본부장도 미리 와있었다. 총리가 도착하자 대통령은 “참 한심한 나라다. 해방구라 칭하고, 법을 무시한 오늘의 현실에 답답하다. 여러분 의견이 있어요. 먼저 총리께서 말씀해 보시오” “예, 성당에 공권력 투입을 한다면 전국의 각 성당에서 종을 치고 또한 로마교황청에서 언급을 한다면 세계 10억의 천주교 신자반발로 이는 역효과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이요. 의견 말해 보시오” “예, 대화로 풀어야지요” “그럼 총리말씀 외 다른 대안이 없나?” 다른 의견 제시가 없자, “그럼 총리 말씀대로 대화로 풀되 3일간 여유를 주겠소. 만약 안 되면 그때는 방법이 없소” 그날부터 총리는 관계 장관과 명동 김 추기경, 함세웅 신부 등과 활발한 접촉으로 3일후에 성당 내 1천여 명의 농성하던 재야인사를 설득해, 농성을 풀고 해산을 하여 대기한 버스에 올라타게 하였다. 더구나 외국 뉴스에 “한국의 서울에서 한철로 길에 마구 달리던 두 열차가 멈추었다”며 한국인도 대화로 아름다운 모습을 본다며 극찬해 이총리 또한 마음이 흡족했다. 이는 총리의 주장인 소위 ‘발상의 전환’이었다. 그러나 많은 시민과 학생들의 항의 시위는 계속되었는데 이에 정부는 강공으로 대처하고 있었다. 여의도에 군 2개 사단이 이미 출동했다는 정보에 필자는 여의도 현장에서 군에 직접 물었다. “어찌 군이 출동 했나요?” 헌데 “돌아오는 10월 국군의 날 행사에 미리 출동했다.”는 해명에 어이가 없었다. 나는 총리에게 보고했다. 군출동설에, 총리는 이기백 국방장관에게 문의하였고 계엄을 실시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요하기에 미리 출동을 했다는 답변에 총리는 큰 걱정이었다. “만약 군이 출동하면 나라가 망하고 올림픽도 실시하지 못한다.”고 건의했다. 계엄령선언에 총리부서를 요한다면 그때는 바로 병원으로 입원해 버리세요? 총리께서 몸도 좋지 않으시고요. 계엄령은 나라가 망하고 맙니다. 총리는 은근히 걱정이었다. 군인들의 무조건 순간 강권으로 밀어붙이면 다 되는 줄 아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정국은 결과적으로 지금의 호헌으로는 민심잡기 불가하니 과감히 호헌을 철폐하고 내각제 개헌도 철폐하고 오직 국민이 원하는 대통령을 내 손으로 뽑는 직선제 개헌만이 정국을 풀 수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파하느냐가 문제였다. 하루는 당시 여당의 후계자인 노태우 후보를 만나 설득해 보라는 건의를 하였다. 명동성당 농성을 풀어서 나온 그 좋은 결과를 직선제를 관철하라고 대통령에 건의하라 했다. 그러나 물태우 별명처럼, 다 따놓은 다음 대통령을 스스로 포기하라는 요구로 들렸는지 자신은 그 건의를 할 수 없다고 했다. 결국 총리의 의견이라며 건의해도 좋다고 설득하여 전두환이 수락해서 나온 것이 “6.29선언의 내용”이었다. 이날 노태우 선언으로 “오늘같이 좋은날, 차는 공짜” 란 단어에 모두가 공감하고 환영하는 분위기로 역사에 한 장면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여야는 모두 풀고 선거에 임했다. 결국 내각제가 아닌 직선제 헌법을 제정하고 노태우 36%, 김영삼 28%, 김대중 27%라는 결과가 나왔으며 궁극적으로 양김의 단일화 안 된 출마로 어부지리를 노 후보가 얻었다고 했다. 한편으로는 전국적인 부정이 난무한 국정원 박 보좌관 역할이 주요했다며 사제단은 대선 결과가 이미 알려진 비율대로 나왔다는 사실에 주목을 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김영삼 그리고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으로, 또한 이명박근혜 부정선거에 대한 대선 결과도 선거 소송에 계속 연류 된 사실이다. 그러나 1천7백만의 촛불혁명이 문재인 대통령을 만들어 국민들의 저력을 보여주었다. 자부심과 긍지였다. 모두가 6.29선언 ‘발상의 전환’ 당시 이한기 총리의 의지였다. 궁극적으로 72년 한반도 분단이 이제는 평화통일의 길만이 삼천리금수강산에 꽃피리라. 이 길이 8천만 동포의 염원이고 아름다운 꿈이 아닐까? 평화통일의 꿈을 꾼다. 이 글은 2017년 6월 14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535 | 추천: 0
마흐디 압둘 하디/ 팔레스타인 국제문제연구소장 (Mahdi Abdul Hadi, Head of PASSIA, http://www.passia.org) □ 1947년 유엔의 팔레스타인 분할계획이 유대민족고향을 건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서 국제사회의 역할을 재검토할 때,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 사이에 존재하는 오늘날 분쟁의 뿌리를 먼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이 분쟁은 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중동역내 전체 문제이기도 하다. 1914년부터 1945년까지, 유럽, 미국과 소련은 팔레스타인에 유대민족 고향 건설이라는 시온주의자 운동의 목표를 수용하였다. 1916년 사이크스-피코 협정은 오스만제국의 아랍지역을 다양한 영국과 프랑스 통치 지역들로 나누었다. 1917년 밸푸어 선언은 팔레스타인에서 유대민족 고향 건설을 지지하였고, 1920년 산레모회의는 팔레스타인, 트랜스 요르단, 메소포타미아(이라크)에 대한 위임 통치권을 영국에게 할당하였다. 오스만제국 붕괴 이후, 킹-크레인 위원회는 아랍인들의 희망 사항을 조사하면서, 1919년 팔레스타인으로의 무제한 유대이민과 시온주의자 계획이 끼치는 영향에 대하여 경고하였다. 그러나 킹-크레인 위원회 보고서의 권고사항은 실행되지 않았다. 반면, 이러한 많은 시도들은 아랍지도자들과 저명인사들로 하여금 시온주의자 운동의 목표를 용인하도록 만들면서, 팔레스타인인들을 우회하였다. 영국위임통치 시기에, 팔레스타인인들과 유대인들이 함께 평화롭게 살 수 없었고, 1930년대 필 위원회, 우드헤드 위원회 등 수 많은 위원회들이 팔레스타인을 두 국가로 분할하는 안을 제안하였다. 최종적으로 1947년 11월 29일 팔레스타인 분할 계획으로 유엔 총회 결의안 181호가 통과되었다. 이 결의안은 팔레스타인을 유대국가와 아랍국가로 분할하고,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을 특별히 국제 통치를 받는 독립적인 실체로 두면서, 사실상 시온주의자들이 열망해온 유대 민족 고향을 건설하였다. □ 수치스런 50년 점령이후, 이제 국제사회는 국제법을 준수해야 한다. 1948년 이스라엘 국가 건설이후, 1967년 6월 이스라엘이 서안과 가자를 점령할 때까지, 국제사회의 노력들은 아랍 국가들과 이스라엘 사이의 긴장을 완화시키는 것이었다. 팔레스타인의 대의는 주변부로 밀려났고, 난민문제, 보상과 재정착으로 해결될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인들은 점차 아랍 국가들로부터 ‘구원’이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특히 1964년에 팔레스타인인들의 공식 대표로 PLO를 창설한 이후). 국제사회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역내적 국제적 차원을 깨닫기 시작하였고, 1970년대 동안에 느리지만 점차 PLO를 승인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냉전의 현실은 많은 국제적인 외교를 허락하지 않았고, 아랍-이스라엘 분쟁은 당시의 양극 체제의 세계질서를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소련은 외교적, 군사적으로 아랍인들과 한 편이었고, 서구 국가들은 확고하게 이스라엘로 치우친 정책을 폈다. 공산주의와 소련권의 붕괴는 대체로 제1차 인티파다와 동시에 발생했고, 이 인티파다의 메시지는 “우리는 여기 있을 것이고, 우리는 공존을 원한다”였다. 이러한 상황은 유럽 국가들을 고무시켜서 두 국가 사이의 문제 해결을 추구하는 접촉과 대화를 촉진하는데 연루되도록 만들었다. 1994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 창설이후, 국제사회의 주요한 역할은 원조였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자금 지원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지만, 그 원조는 이스라엘이 부과한 무역 제한과 자원에 대한 접근 제한 조치를 감추는 무화과 잎이었다. 이스라엘의 이러한 접근 제한 조치는 수 년 간에 걸쳐 팔레스타인 경제의 생산 능력을 침식하였다. 국제적인 연구 성과들이 보여 주듯이, 이스라엘의 접근 제한 조치가 없었다면, 원조 필요성은 상당 부분 줄어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오늘날 팔레스타인에 대한 원조는 개발 지원을 거의 완전히 무시하고, 예산 지원으로 사용된다. 국제사회는 또한 안보분야 발전을 위하여 막대한 양을 투자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과 안보협력을 하도록 압박한다. 이스라엘과의 안보 협력은 팔레스타인인들 사이에서 매우 논쟁적인 문제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도시와 마을에 대한 이스라엘 보안대의 침략이 점점 증대하는 사실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팔레스타인 안보는 논의에 적절한 요소가 아니라고 간주된다. 특히, 오슬로 협상 이후, 국제 사회의 역할은 원조 산업의 형태를 취했다. 국제사회는 그들 눈앞에서 펼쳐지는 부정의를 이야기하거나, 또 하나의 보고서 이상의 더욱 결정적인 행위와 함께 법률적 도덕적인 책임을 이행하기보다는, 점령을 피해서 일하고 제3국가들의 활동부족을 경감시키기 위하여 자금과 개발을 활용하였다. 사실상 이것은 점령자에게 계속해서 일을 진행시키고, 모든 이 보고서들을 오만하게 기각하는 허가증을 주었다. 비극은 국제 공동체가 이 사실을 알지만, 더 넓은 지정학적인 환경과 그 자체의 내부적인 이익과 정치 때문에 조치를 취하는데 주저한다는 것이다. 2011년에, 유엔은 팔레스타인 기구들이 국가 지위 획득을 준비한다고 선언하였다. 거의 부전승에 이 방향으로 계속 큰 규모의 자금이 흘러 들어오면서, 국가건설 안은 난국에 봉착하고, 특히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기구들에게 완전히 기능하도록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위의 내용에 비추어, 실제적인 점령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나머지 세계라는 인식이 팔레스타인인들 사이에서 널리 퍼졌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나머지 세계의 도덕적 재정적 후원이 없었다면, 점령이 어떻게 이렇게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겠는가? □ 국제적인 개입이 없다면, 50년 동안의 점령을 종결시키려는 어떤 시도도 실패할 것이다. 50년이라는 점령 기간 동안, 해외 국가들과 국제기구들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으로 바빴고, 기껏해야 이 분쟁을 관리하고, 저지하려고 노력해왔다. 상기할 주요 사건들은 1973년 중동 평화를 위한 제네바 회담을 포함하여 다음과 같다. 1975년 유엔이 PLO에게 영구적인 옵저버 지위를 부여, 1978년 캠프데이비드 협정, 1980년 EC의 베니스 선언, 1981년 파흐드 왕자 계획, 1982년 아랍 연맹의 페즈 계획과 레이건 브레즈네프 계획, 1983년 제네바 국제 대회, 1988년 슐츠 평화안, 1991년 마드리드대회와 계속된 양자간, 다자간 회담들, 1993년 임시 자치정부에 관한 원칙 선언, 1994년 오슬로 협정 I, 1995년 오슬로 협정 II, 1998년 와이리버 규약, 1999년 샤름 알 셰이크 협정, 2000년 캠프데이비드 협정, 2001년 타바 협정, 2002년 아랍 평화안, 2003년 미국의 로드 맵, 2007년 아나폴리스 회담, 2010년 근거리 회담, 2013년 케리 특사 그리고 2016/17년 프랑스 기획. 아마도 세계적으로 팔레스타인 문제만큼 이렇게 많은 기획들, 제안서들, 회의 개최, UN결의, 국제법 채택과 통과 회의들 및 협정 체결이 이루어진 문제들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이 노력들 중 대부분은 미국의 정책과 관련되는 것이며, 이스라엘에 편향적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분쟁해결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거의 결과를 내놓지 못한 지구상의 다른 지역은 없다. 사람들은 당연히 국제사회에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과 50년간의 점령을 종식시키는데 실패한 이유를 물어볼 수 있다. 1967년 11월 유엔 안보리 결의 242호가 이미 이스라엘에게 점령지로부터의 철수, 상호 인정, 난민 문제 해결 등을 요구하였다. 1977년 10월 미국-소련 공동 성명은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합법적 권리를 인정하였다. 매우 간단히, 끝내야만 할 모든 일은 이 분쟁에 국제법과 판결을 적용시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이미 자신들의 역사적인 고향 땅 중 단지 22%에 대한 협상에 합의하고, ‘땅과 평화의 교환 방식’을 수용함으로써 역사적인 양보를 하였다. 오늘날 외관상 처리하기 힘든 문제는 모두 새로운 것이 아니며, 부끄럽게도 점령 초기부터 협상 테이블에 있었던 것이다. 국제사회가 ‘협상’에 매달려 있는 척하는 동안, 이스라엘은 ‘협상과정’을 사용해서 효과적으로 시간을 벌고, 팔레스타인 땅에 더 많은 현실들을 만들어 갔다. 두 가지 예들, 즉 정착촌과 예루살렘문제가 이것을 설명한다. 1978년 세계시온주의자기구(WZO)는 정착촌 개발에 관한 종합 기본계획을 출판하였다. 당시 소련 및 유럽과 나란히 하고 있던 미 국무장관 반스는 이스라엘에게 정착촌 건설 활동을 중단하도록 요구하였다. 오늘날 팔레스타인 영토에 거의 60만 명의 정착민들이 있다. 1) 역사적 팔레스타인 전체 인구의 약 52%를 구성하는 유대인들은 역사적 팔레스타인 전체 영토의 85% 이상 사용하고 있으며, 역사적 팔레스타인 전체 인구의 48%를 구성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은 역사적 팔레스타인 전체 영토의15%이하의 땅을 사용하고 있다. 2) 1980년 8월 20일, 유엔 안보리 결의안 478호가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이 결의안은 동예루살렘에 대한 이스라엘의 합병 시도를 비난하는 7개의 유엔 안보리 결의들 중 하나이며, “성지 예루살렘의 지위와 특성을 변경시키거나, 변경시키려는 점령세력 이스라엘이 취한 모든 법률적 행정적인 조치들과 행위들은 무효이며, 당장 폐기되어야한다”고 결정하였다. 수많은 유네스코 결의들도 예루살렘의 역사적 문화적 상태를 유대화시키려는 이스라엘의 시도들을 비난하였다. 오늘날, 동예루살렘은 사실상 합병되었고, 이스라엘은 충분히 입증되는 차별적인 조치들과 정책들을 방해받지 않고 유지한다. 이제 국제사회는 국제법 준수를 반드시 보장하고, 회유, 모호한 시도들과 공모문화를 의미 있는 압력으로 대체시키고, 면책 특권을 폐지시켜야한다. 정치적 담력과 강력한 개입으로 이스라엘에게 책임을 지우고,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도록 해야 할 때다. 분쟁뿐만 아니라 불법점령을 종식해야한다. 팔레스타인인들과 이스라엘인들이 똑같은 공범자들로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 점령당한 사람들이 점령자의 안보에 대한 책임을 질 수는 없다. 유럽 및 비동맹운동, 이슬람 협력기구(OIC), 아랍연맹 등과 같은 국제단체들을 포함하는 전 세계는 초강대국 미국을 따르고 있다. 오슬로 협상 과정이 실패 한 이후, 이제 두 국가 해결안은 국제사회의 책임이다. 1) CBS, Statistical Abstract of Israel 2016 2) PCBS, Press Release on the Occasion of Land Day, March 2017 이 글은 2017년 6월 9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551 | 추천: 0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드디어 미국에 대해 ‘NO!’라고 말할 수 있는 때가 도래하고 있는 것일까? 중국의 시진핑도 함부로 그렇지 못하는 것 같았는데 독일의 메르켈이 갑자기 ‘이제 때가 된 것 같다.’는 투로, 미국에 대해 “NO!”라고 일갈하고 나섰다. ‘탈미국의 유럽’에 대한 신호탄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한때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한반도가 통일이 되더라도 한반도에 미군이 주둔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정확한 의중을 알 길이 없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군사지정학적인 균형이 요구된다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서 대략 짐작할 뿐이다. 일본의 혐한 분위기가 광풍을 방불케 할 정도인 모양이다. 문재인 대통령을 종북반일 대통령이라는 전 주한일본대사의 발언이 공공연히 발표되는 가운데 아베 총리의 대미종속을 외관으로 한 동북하에서의 호전적 행보가 예사롭지 않다. 미국과의 충돌을 애써 피하려는 중국의 시진핑의 입장을 무시하는 듯 미사일 개발과 시험 발사를 계속함으로써 미국과 일본에게 군사적 행보의 강화를 위한 빌미를 제공함으로써 미일이 군사적으로 중국을 압박하도록 하는 기묘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아울러 북한이 2000킬로미터 상공으로 미사일을 쏘아 올려 얼마 전에 군사공격의 옵션을 고려하고 있다던 미국의 국무장관의 입에서 자기 주변에 북한에 투자를 원하는 친구들이 많다는 말이 나오도록 했다. 이 와중에 우리 한국에는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대 평화의 시민혁명으로 부패무능한 대통령을 탄핵 수감시킨 뒤 민주 대통령을 당선시켜 새 정권을 탄생시켰다. 한 나라의 새로운 역사의 건립은 대내적인 변화만으로는 결코 불가능하다. 세계사적인 흐름의 종속적인 위치에서 벗어나 주도적인 입장에 서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나름의 균형추를 확립해야 한다. 그동안 크게 요동쳤던 세계사적인 대변화들이 있었다. 1990년의 독일통일과 1991년의 소련해체가 대표적인 사건이다. 그 바탕 위에 중국의 대대적인 경제대국으로 부상이 있었고 유럽에서의 독일의 주도권 장악이 이루어지고 아울러 트럼프와 같은 해괴한 인물이 대통령이 선출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미국의 상대적인 쇠퇴와 혼란이 겹쳐지고 있다. 전반적으로 보면, 세계체제적인 격변이 심화되면서 그로 인한 전쟁 발발의 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할 것이다. 사진 출처 - 평화신문 우리 한국의 새 정권이 한창 구성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거는 기대가 대체로 내치에 집중되는 경향이 짙은 것 같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외치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후보 시절 “내 모든 것을 걸고서 전쟁을 막겠다.”라고 했던 그의 진지한 발언이 “내 모든 것을 걸고서 한민족의 평화로운 대약진의 역사를 전개하는 계기를 확립하겠다.”라는 내용이 함축된 것이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이 글은 2017년 5월 31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532 | 추천: 0
신하영옥/ 여성운동연구자네트워크 ‘젠더고물상’ 새 대통령의 ‘파격’행보에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산적한 수많은 질문들 -무엇을, 어떻게, 언제, 누가 할 것이고 어떤 가치와 관점, 즉 어떤 왜?를 가지고 진전해갈 지에 대한- 은 기대 속에서 묻히는 듯 보인다. 과거 두 번의 대선결과에 비해 암울함과 암담함이 걷힌 것은 사실이지만, 개운치는 않다. 여성들이 바라는 대통령을 검색해봤다. ‘성 평등’, ‘페미니스트’, ‘젠더의식, 감수성’을 가진 대통령이 되어, ‘소통’을 통해 ‘여성폭력’, ‘젠더폭력’, ‘차별’, ‘혐오문화’를 극복하고 ‘안전’을 보장하고, 나아가 ‘낙태죄 폐지’, ‘차별금지법’, ‘여성장애인 정책’, ‘일자리’, ‘정규직’, ‘공/보육’ ‘여성대표성확대’ 등의 구체적 정책을 통해 실현했으면 하는 기대들이 보인다. 대통령은 내각 30%에 여성을 등용하겠으며, 점차로 남녀동수내각을 공약화했다. ‘민주주의가 성평등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여성들의 주장을 적극 반영해 ‘성평등이 보장되는 민주주의’를 만들고자 하는 의지가 아닐까 싶다. 그동안 여성들은 ‘할당제’ 등을 통해 ‘성 평등’이 구현되는 ‘대의제 민주주의’를 요구 및 실천해왔다. 그 결과 지난 총선에서는 전례 없이 많은 여성들이 국회에 진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할당제 이후 국회의 정치문화나 국가의 성정책에서 긍정적인 변화가 있다는 연구결과들이 있다. 여성들의 정치참여가 정치문화와 구조를 조금씩 성평등하게 바꾸어내고 있고 ‘페미니스트 대통령’에의 의지는 그 연장선에 가능한 긍정적인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개운치가 않다. 정권이 바뀌고 새 대통령이 여성 친화적 인사와 정책을 펼 것이라 기대하는 것이 나쁘진 않지만 지난 대선토론 과정에서 심상정 후보를 보면서 ‘여성(주의)정치’와 ‘여성(주의)정치인’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주었다. 반여성적, 여성차별적인 인사나 언행에 대해 타협하지 않는 당당함, 거침없이 비판하는 솔직함, 필요하면 싸움에서 물러서지 않는 근성, 이미지에 연연하지 않은 원칙주의 등을 표출하는 심 후보를 보면서 적어도 저런 모습을 갖춰야 여성정치와 여성정치인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당의 대표이자 당선권 밖에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은 일면의 평가일 뿐이다. 다른 여성들도 그러한 처지에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러 연구들에서 여성들이 할당제 등의 제도변화를 통해 수적인 확대는 이뤄냈지만 ‘질적인 확대’는 아직 미흡하다는 여성정치연구 결과는 ‘여성정치’와 ‘여성정치인’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가게 한다. ‘민주주의가 저절로 성평등을 보장하지 못한다.’면 여성주의적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 즉 ‘어떤 민주주의?’라는 질문과 그것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무엇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 병행되어야 한다. 그러한 질문은 ‘성평등이 보장되는 민주주의를 실현해라!’ 가 아닌 ‘민주주의를 견인하는 여성정치’가 무엇인지를 밝혀내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정권의 변화에 좌지우지되는 여성정치참여는 바람 앞의 등불일수 밖에 없다. 여성들이 스스로 창출할 수 있을 때, 스스로 정치권력의 주인이 될 수 있을 때 (남성)정권의 변화에 휘둘리는 여성정치참여가 아닌 ‘민주주의를 한발 더 견인하는 여성주의정치’로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득권을 가진 남성(화된)정치인들 눈치 보기, 그들의 간택을 바라는 방식이 아닌, 여성주의라는 신념, 여성주의적 민주주의에 대한 가치와 비전, 그 실천과정에 대한 원칙, 원칙을 고수하려는 고집과 투쟁성이 어쩌면 정치에 참여하는 여성들의 자질과 참여경로가 되어야 한다. 신입 정치인, 특히 여성 등 소수자의 정치입문은 보통 ‘비례’건 아니건 당의 권력집단의 승인인 ‘경선’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과정이 ‘민주주의적’ 과정이 아니라는 건 다 알고 있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제도들이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 같은 어려운 관문을 뚫고 재/다선에 성공한 여성정치인들, 정치구조 안에서 여성주의정치를 펼치고자 하는 여성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성주의정치가 그러한 위계적, 비민주적인 남성정치문화를 개혁하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다면 왜 여성정치가 그러한 경로를 당연시 하면서 정치참여를 확대하고자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원칙, 여성주의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정치진입경로는 이후 여성정치를 그 정치구조에 종속되게 만든다. 여성들-여성정치인, 당원, 여성단체, 여성 집단 등-의 힘으로 여성들이 정치에 진입 및 참여하게 만드는 주체적인 방법이 뭐가 있을지 지금부터라도 고민이 필요하다. 정권의 변화가 여성들에게 개운한 결론이 안 되는 이유다. 사진 출처 -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내일이 벌써 강남역 사건 1주년이다. 여전히 고려대의 ‘난파’사건은 진행 중이고, 디지털 성폭력도 기승중이고, 이들에 대한 피해여성들은 정신적 심리적 충격에 갇혀있고, 대다수 여성들은 불안해한다. 일베들이 자신들의 게시글을 삭제해달라고 한다지만, 그들의 글이 삭제된다고 그들이 삭제되는 것은 아니다. 여성정치는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대통령만 소통할 것이 아니라, 여성정치도 수많은 여성현장들과 소통해야 한다. 그리고 연대하고 지원할 때 양 쪽 다 권력을 창출할 힘을 가질 수 있다. 여성정치참여를 ‘내’가 아닌 ‘여성들’이란 관점에서 볼 때 앞으로 30%든 50%든 여성주의정치를 펼쳐내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조현옥 인사수석의 위치는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 앞으로 5년, 문재인 정권의 가능성보다는 정권이 열어놓은 틈을 여성정치가 얼마나 더 활짝 열어내고 굳건하게 자리 잡을 수 있을지에 대한 가능성으로서 지켜봐야 할 것이다. 이 글은 2017년 5월 17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473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