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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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강대중(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윤동호(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이동우(변호사),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장은주(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윤영전/ 평통서문예원장  한국이 정부수립이후 최초로 해외에 군대를 파견했다. 당시 월남인 베트남에 파병한지 올해 2월9일로 53주년이다. 한국이 해외에 최초로 파병한 경우이기 때문에 특별하게 기념하고 있다. 53년 전, 필자는 해외 최초 파병의 대열에 일원으로 베트남에 참전하였다.  1965년 1월 초순, 요란한 전언통신문 벨이 울려, 나는 수화기를 들었다. “해외파병요원 지원자 모집”이었다. 처음에는 어느 나라일까? 알 수 없었다. 잠시 후에 파병지는 월남이고 지원자 신청마감은 1월10일까지였다.  나는 당시 원주 부대에 서무계로 제대 4개월을 앞둔 제대말년 육군병장이었다. 2년여 전에 입대하여 오직 제대할 날짜만을 달력에서 하루씩 지워가고 있던 때였다. 파견지역이 전쟁터라니 어쩜 죽을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에 멈칫거렸다.  제대하면 복학해 공부를 할 것이었다. 9살에 6.25 전쟁을 직접 바라보았다. 그 후 톨스토이의 ‘전쟁과 사랑’이란 영화를 보면서 호기심도 작용했다. 해방정국에서 내 맏형이 건준에 가입해 재판도 없이 죽임을 당하고, 형 때문에 둘째형과 아버지도 부역을 하였기에 신원조회에서 통과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해외파견은 철저한 신원조회가 요구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지원한 것은 신원조회를 뛰어넘자는 것이었다. 전쟁 참전에 죽고 사는 것은 다 하느님의 뜻이라며 결단하였다. 1차로 지원을 했는데 과연 신원조회에 통과할 지가 의문이었다. 일단 전언통신문을 정리하여 결재를 올리고 부대원에 공람을 돌렸다. 130여 명 중에 단 2명이 지원을 했다. 그런데 부대장과 군종신부는 나의 지원을 철회하란다. 이유는 지금 월남 사이공 수도가 구정공세로 함락될지도 모를 위험한 전쟁지역이고 살아온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허나 나는 가겠다고 주장했다.  일단 지원자를 중심으로 부대편성을 하면서 나는 서무사병계 직무를 맡았다. 파견부대는 양평의 광탄으로 이동하여 참전교육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부대에 1군사령부 인사참모가 찾아와 나의 지원을 취소하라고 했다. 내 신원조회로 부모님과 할머님이 나의 파병지원 사실에 놀라서 수소문해 철회를 종용한 것이었다.  집에서 22살 맏형이 죽고 둘째형이 군에서 부상당했기에 나까지 죽음에 보낼 수 없다고 했다. 나는 “한번 결심한 파병은 철회하지 않는다” 고 단호히 말해 인사참모도 “가면 죽은 다는데 어찌 꼭 가려하나? 고집을 어쩔 수 없네”하며 돌아갔다.  걱정하던 신원조회는 합격이었다. 이제는 현리에서 2천명이 결단식을 갖고 2월7일 서울운동장에서 박 대통령도 참가한 ‘한국군최초해외파견’ 평화의 사도 “비둘기부대” 국민환송식이 파병가족과 국민들이 참가한 가운데 성대하게 열렸다. 전선 없는 월남에 목숨 걸고 참전하는 지원자에게 성대한 환송식을 해준 것이다. 사진 출처 - 구글  나는 2월11일 부산 제3부두에서 해군 엘에스티 3대에 선발 600명이 공해를 항해하여 14일 만에 붕타우에 도착했다. 끝없는 2주간의 항해는 참으로 지루했다. 그러나 붕타우의 등대를 발견하고 이미 파견된 붕타우 이동외과병원 간호장교들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그리고 4시간 사이공 강변을 항해하여 항구에 도착했다.  당시 월남의 정부수반 판칵수, 국방장관 티우 중장과 키 공군사령관과 실세 권력자 칸 소장도 함께 우리 다이한 비둘기대원을 환영했다. 다음날 사이공에서 26킬로 떨어진 벵아 지안옛 베트콩기지를 2천명 비둘기대원들의 숙영지가 되었다. 비둘기부대원들은 첫날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한 달 후에 본대 1,400명이 US메이카 호에 본대와 합류해 2천명이 집합한 단 본부 앞에서 조문환 단장은 훈시를 했다. 경례하고 “경계철저” 그리고 “살아서 돌아가자”였다. 설명은 “이곳은 한국이 아닌 우방국이다. 내나라 지키다가 죽어간 것도 서러운데 이국에 와서 죽어갈 필요가 없다”는 진실의 훈시였다.  난 조문환 장군의 훈시에 감명이었다. 흔히들 전시에 죽어간다. 전선도 없는 전쟁월남전은 제네바협정 17도선에 북은 월맹, 남은 월남이었다. 당초 프랑스 80년 전쟁 베트콩이 17도 이하 월남에서 3분의 1을 점령하고 있는 현실이었다. 그러기에 비둘기부대는 월남에 자유와 평화를 위한 부대라고 대외적으로 명명했지만 결국 전투병 파견위한 사전부대였다. 64년 10월 붕타우 이동외과병원 의료진은 순수한 병원치료지원으로, 30여명의 태권도 교관요원이 함께 파견되었다. 월남의 수도 사이공이 공격을 당하는 전선 없는 전쟁터가 실상이었다.  월남에 파견된 후 첫 교전은 4월2일이었다. 단 본부를 향해 박격포탄 80여발을 선제공격하였다. 그날이 비둘기대원을 위문하는 “또순이” 한국의 영화 2편을 상영해 이국의 향수를 달래준 영화였었다. 밤 10시30분 취침, 나는 당직근무를 서고 있었다.  단 본부를 겨냥한 박격 포탄이 떨어져 나는 바로 비상벨을 눌렀다. 처음 겪는 실제상황 전쟁이었다. 미처 외곽진지를 구축하지 못했지만 허나 그들이 부대에 접근하면 총을 쏠 준비를 했다. 격전을 벌이면 죽어갈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1시간여 교전은 아군 8명 중경상 차량 파손 등이었고 그들은 베트콩 1명 사살, 수십 명 중상을 상부에 보고했다. 그날이 한국군 해외파견 최초 작전을 벌여 승리했다는 전사를 기록했다. 전투부대 파병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작전의 하나였다. 그해 8월 9월에 맹호와 청룡, 백마가 퀴논 나트랑 캄란에 파병되었다.  10월 전투에서는 슬픈 소식이 연이었다. 주로 월남군과 미군이 담당하던 베트콩 소탕작전을 전개하게 되었다. 소탕작전에서 아군이 수백 명씩 전사했다. 무리한 작전을 폈다. 나는 천주교신자로 군종신부와 교우 함께 탄산누트공항 영안실에서 전사한 맹호 청룡전우 유골함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그들 연혼이 저 세상에서 영면하기를 기도해 주었다. 조 장군의 훈시가 떠올랐다. 죽지 말고 살아서 돌아가자는 그 말이었는데 늘어난 전사자 영혼미사는 귀신 잡는다는 해병 청룡전우들이 많았다. 일부 죽음은 지휘관의 무모한 작전의 소탕전도 있었다.  당시 우리는 한국의 조 장군과 채 사령관이 미주월사령관 웨스트모렌드 장군보다 더 멋있었다는 것에서 자부심을 느꼈다. 분명 월남의 장병들보다 월등한 체격과 담력이었다. 그들은 태권도와 인삼에 관심을 가졌다. 헌데 다이한 장병들 특히 해병 청룡 백마까지 베트콩소탕작전에서 민간인을 첩자로 몰아 우리 사망자와 같은 숫자 6천여 명을 학살한 사실이었다. 수교 후에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 방문해 특별 사과한 사실도 있다.  이는 지난 한국전쟁에서 미군 등 외국 군인들의 우리 민간인 학살한 사실과 같다. 이는 전과에 전전 긍긍하여 마치 민간인을 베트콩으로 또는 첩자로 과잉 분류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한국군도 9년 동안 33만 명이 파병되고 6천 여 명이 전사하고 부상자가 2만 여 명이고 고엽제 유사환자 까지 2만 여명 등이 있어 안타까웠다.  나는 베트남에 파견되어 남루한 후회를 했다. 내나라 남북으로 분단되어 통일도 못하면서 월남의 민족통일을 방해하는 미국의 용병으로 파병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프랑스와 80년 전쟁을 이겨내고 민족통일로 가는 길에 17도선 남북으로 나뉘어 다시 외세 미국을 비롯한 한국 필리핀 등과 전쟁을 치렀다. 진정 월남인들은 말한다. 제발 우리는 “공산 사회주의도 싫고 자본 민주주의도 아닌 전쟁 없는 우리의 민족주의로 통일되어 평화롭게 살기를 원한다”고 했다.  그들의 주장은 옳았다. 1961년 5월16일 박정희 군사정변은 사월혁명 후 민주정부를 뒤엎은 군사정권이었다. 박 정권은 경제적으로 난관이었다. 서독 광부와 간호원 파견에 이어 한국전쟁에서 미군 5만4천여 명의 전사자에 낸데 보은이란다. 미군의 월남전 희생에 동참할 것을 제의하여 파병이 결정된 용병이었다.  미군은 한국군 10년간 파병 33만 명에 대한 전투수당 기타 파병에 따른 모든 경비를 지급하는 협정을 맺었다. 허나 고엽제에 관한 보상은 빠져 있었다. 그간 미국에 고엽제 보상을 법적 제기했으나 64년 한미 월남파견 각서에 들어있지 않다며 패소했다. 내 주변에도 참전한 전우들 중에 고엽제 환자들이 있다.  미국은 한국전에서 무승부였다면 월남 전쟁에서는 완전 패배였다. 한편 한국은 베트남전에 참전해 한때는 적국이었다. 허나 그들은 드디어 1973년 세계 막강 미국을 이겨내고 민족주의 정신으로 통일을 이루어낸 강국이 되었다.  다행이도 한국과도 수교를 하여 많은 교류와 협력이 이루어지고 상호 우호국이 되었다. 필자도 베트남 참전 전우들과 수교 후에 3차례나 하노이 호치민시 붕타우 지안 나트란 캄란을 관광하면서 전쟁 아닌 평화의 삶을 보면서 한없이 부러웠다.  자주 국립묘지 찾아, 함께 참전했다 숨진 전우들 묘소 앞에서 명복을 빌었다. 또한 조문환 장군묘 앞에서는 그때 “죽지 말고 살아서 돌아가자”는 그날의 훈시를 기억하면서 감사한 마음이었다. 몇 년 전, 운명한 채명신 주월사령관이 잠든 사병묘 앞에서 장군 묘를 사양하고 사병과 함께 한 정신에 대해 감사하며 명복을 빌었다.  베트남 찬전 53년을 되돌아보면서 베트남은 호치민 같은 민족지도자가 존재했기에 세계 강국인 미국을 이겨내는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 우리는 언제 한반도 주변 열강들에 패권이 아닌 진정한 평화에 다가가는 그날이 언제나 올까. 수치스러운 분단 73년, 우리의 8천만 소원인 남북평화통일이 오는 그날을 염원해 본다.   * 윤영전(尹永典) : 한국작가회의 소설가. 한국문인협회 수필가. (사)평화연대 이사장. 서예작가
2018-02-21 | hrights | 조회: 2543 | 추천: 4
정재원/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2000년대 초반 시베리아 횡단 여행 중 울란-우데라는 생소한 도시에서 잠시 머물 때였다. 당시 유일했던 한국 식당에서 여독을 풀고 있을 때, 그 식당에서 일하시는 고려인 할아버지가 매우 반갑게 우리를 맞아 주었다. 즐거운 대화를 하던 중 그 할아버지는 그 곳에 얼마 전에 촬영 왔던 한국 방송국 기자들 이야기를 하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그 식당에서 만취해 폭탄주를 만들면서 휴지를 천장으로 던져 나중에 청소하기 너무 어려웠다는 이야기부터 같은 남자라서(?) 이해는 한다만, 너무 노골적으로 성매매 업소를 찾더라는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한국 언론인들의 추악한 면모를 보여주는 이야기를 듣다 창피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이러한 추악한 면모들은 아주 일상화된 것이라는 걸 직접 깨닫게 된 건 그 후 오래지 않아서였다. 러시아에 나와 있던 각종 언론사 지사장들은 물론 러시아로 취재차 출장 나오는 각급 언론인들의 현지에서의 생활은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현지 법 상으로 불법은 물론이고, 부패한 권력과 범죄 집단과의 연계 속에서 영업하던 한인 성매매 업소들에서 공관 직원들, 파견 사원들, 교민 업자 등으로부터 거의 매일 접대를 받았고, 유흥은 심지어 낮에도 벌어졌다. 한국에서 정관계 인사들이 러시아를 방문할 때, 기자들이 함께 오는 경우에는 현지 한국인 성매매 업소들에는 비상이 걸린다. 언론사 지사장들이든 한국에서 오는 언론인들이든 마찬가지다. 손님들 중에 가장 질 낮은 사람들이 바로 언론인들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보수정당 인사들이 업소를 대거 방문했을 때, 정치인들과 수행원들, 기업인들, 그리고 언론인들은 불법업소 몇 곳을 통째로 빌렸다. 간판도 달지 못한 채, 은밀하게 영업하던 불법업소들이었다. 접대를 위해 현지 공관원들도 총동원되었다. 이런 질펀한 술판에 대해 한 진보 언론사 기자가 폭로를 했다. 하지만 너무 아쉬웠다. 기사의 초점은 공관원들의 접대 때문에, 영사 업무가 완전히 마비되었다는 것에 맞춰져 있을 뿐이었다. 언론인들이 접대 받는 문화와 불법 성매매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필자가 러시아에서 한인 성매매 업소들과 싸우고 있을 때, 그 진보 언론사 기자가 다른 건으로 취재차 왔다는 말을 듣고 만나려고 했지만, 그 기자를 담당하는 기업인의 말을 듣고는 만남 자체를 포기해야 했다. 그 기자가 먼저 ‘여자 나오는 술집’에 가자고 했다는 거다. 러시아 땅에서 벌어지는 한국인들의 성매매에 대해 러시아 사람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며 의아해한다. 러시아에도 언론이 있지만, 이런 문제는 한국 사람들 사이의 문제이니, 너희 나라 언론인들에게 말해주라는 거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언론인들은 적어도 성매매 문제에서는 공범이었고, 범죄에 대해 침묵했다. 심지어 이런 이야기가 한국에서 보도되지 못하도록 방해하기도 하였다.  이런 범죄와 일탈이 비단 언론인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특정 고위층이나 상류층만의 문제도 아니다. 어쩌면 대한민국 다수 남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정치인, 검사, 국가정보원 요원, 군인, 기업인 등 우리 사회를 이끌어간다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글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하다. 문제는 이런 폐습을 폭로하고 바로 잡아야 할 책무를 지닌 언론인들이 한 술 더 뜬다는 거다.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적폐의 참호를 구축하고 있다. 사진 출처 - 뉴시스  최근 언론 적폐를 청산하기 위한 여러 방송사들의 싸움이 눈물겹게 펼쳐지고 있다. 하지만, 수없이 외쳤던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에 기반을 둔 감시와 비판 기능의 회복만으로 언론개혁과 적폐청산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명박근혜 정권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처럼, 한국은 여전히 정권의 향배에 따라 언론의 역할이 크게 달라지는 언론환경 자체가 매우 추악한 나라이다.  그래서 적폐청산을 위해 싸우는 언론인들이 일상의 삶 속에서도 같은 정신으로 정의롭지 못한 일에 맞서고 있는지가 중요한 관건이 될 것이다. 러시아에 취재 왔을 때, 여자 나오는 술집을 찾아다니던 기자 중에는 지금 언론자유를 위해 싸우는 용감한 언론인도 있다. 이 기자와 함께 러시아를 찾은 다른 기자는 해외에서 경험(?)한 숱한 성매매 경험을 자랑스럽게 떠벌리기도 했다. 유감스럽게도 그 기자는 이라크 파병 당시, 반전, 평화를 위해 목숨을 걸고 이라크 전장까지 취재하러 왔던 매우 ‘의식 있는’ 기자였다.  이건 단순히 도덕성의 문제만은 아니다. 일상에서는 언론인 특유의 술 문화와 스트레스 따위를 핑계로, 성매매 업소를 출입하며, 성매매종사 여성을 착취하며, 술값마저 감시해야 할 권력에 기대는 적폐적 관행은 그대로 둔 채, 남들의 적폐만을 청산하자고 외치는 것은 전형적인 모순이다. 적폐 청산은 전방위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또 다른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뿐이다. 여성을 단지 수단으로만 여기고, 일상적으로 성매매라는 범죄행위와 단절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우리 언론계에 자리하고 있다면, 그건 새로운 적폐가 될 가능성이 높다.
2018-02-07 | hrights | 조회: 1224 | 추천: 9
김재완/ 방송대 법학과 교수  법원행정처는 사법부의 업무에 필요한 제반 행정을 담당하는 기관이다. 사법권의 독립 하에 둔 독자적인 행정기관으로서, 인사와 회계 등에 있어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는 목적을 가진다. 그런데, 사법부 내에서 법원행정처가 인사와 재정을 모두 가지고 있음으로써 오히려 막강한 내부 권력기관이 되기도 한다. 한편 사법부 내에는 국제적인 인권문제와 수평적인 사법부의 구조마련 등 대법원의 개혁을 추구하는 자체 학술단체로 국제인권법연구회가 존재한다.  지난 2017년 2월경 국제인권법연구회는 법관의 인사제도에 대한 개혁을 요구했다. 그 작업으로 판사들에게 설문조사를 시작해, 판사들의 인사제도 개혁에 대한 의지와 목소리를 하나로 묶어내고자 했다. 이러한 행동을 법원행정처는 위험한 것이라고 판단했고, 당시 처장은 국제인권법 소속의 한 판사를 법원행정처로 인사이동 시키는 한편, 학회의 활동을 중지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담긴 문건을 받은 해당 판사는 사직서를 제출하면서 반발했고, 법원행정처는 논란이 확대될 것을 염려해 해당 판사를 다시 일선 법원으로 인사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때부터 법원 내부에서는 판사들의 뒤를 조사하는 이른바 동향파악 파일이 존재한다는 것이 널리 퍼졌고, 드디어 올해 22일에 대법원 추가조사위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 판결 선고 관련 각계 동향’ 문건을 제시하며, 이른바 판사 블랙리스트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청와대 민정라인이 개입하여 대법원을 압박해 원세훈 전 국정원장 사건을 전원합의체에 회부시키게 했고 결국 파기환송을 이끌어 냈으며, 이를 위해 담당판사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보고하는 등 민감한 내용의 정보 및 의견이 교환된 것으로 해당 문건에서 드러났다. 또한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임 시에 법원행정처가 사법개혁의 목소리를 내온 진보적 성향의 판사모임 소속 법관들을 따로 분류해서 이들의 동향 및 성향을 세부적으로 파악한 내용을 담은 내부 문건들도 존재하였음이 밝혀졌다. 그리고 여기에는 2010년에 해체한 우리법연구회와 현재의 국제인권법연구회의 모임에 참석한 판사들과 그들의 발언 및 논의 내용 등은 물론이고, 해당 판사 각 개인의 가정사와 소셜네트워크 활동 등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까지도 담겨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권력의 검은 손길이 공정하고 엄정해야 할 사법부를 마리오네트(marionette)로 만든 것이다. 이러한 사법의 마리오네트는 수직적 사법행정체계에 기인한 바가 크다.  법원의 수직적 사법행정체계는 뿌리가 깊고 단단한 기수문화와 이에 따른 경직성, 그리고 우월적 지위를 가진 권력기관과 긴밀히 내응하는 출세욕을 가진 판사들 사이의 검은 커넥션을 가능하게 만들어 왔다. 구체적인 한 예로 사법행정위원회 위원 후보자들에 대해 별도의 추천기준을 만들어 리스트화 한 것에서도 그러한 점들은 잘 드러난다. 이것은 소위 왕당파라고 불리는 제어 가능한 판사들만을 위원으로 만들기에 용이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편향성과 불공정성 등의 시비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 주도면밀하게 진보 성향(인권, 노동, 젠더)의 판사들과 여성 및 장애를 가진 판사들도 분류하고 분석해 추천순위에 형식상 올려놓음으로써 문제가 없어 보이도록 하는 모습도 연출한다.  사법부는 행정부, 입법부와는 달리 국민으로부터 선출된 권력이 아니다. 그들은 오로지 법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자격을 가지고 임명되고, 양심에 따라 재판하는 사법 권력을 가지며 그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만큼 더욱더 공정하고 엄정한 사법권력의 집행과 행사가 요구된다. 그런데 그 권력의 행사가 국민의 편에 서지 않고 행정부의 부당한 권력과 지시에 따르는 것이라면, 사법부의 독립과 법관의 양심은 훼손되고 망가져서 결국 국민에게 해악을 끼치는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만다. 국민에게 신뢰를 잃은 사법부는 좀비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현재의 사법부의 모습이다. 사법부가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고 제자리를 찾는 길은 사법부 스스로가 개혁하는 길밖에는 없다. 그 출발은 법원의 수직적 사법행정체계를 타파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2018-02-07 | hrights | 조회: 973 | 추천: 6
신하영옥/ 여성운동연구활동가 네트워크 ‘젠더고물상’  13일에 ‘제천화재사건’이 ‘여성학살’이라는 여성들의 시위가 홍대 앞에서 있었다. 인터넷 카페 ‘여초연합’ 회원들은 남성 건물주와 소방당국, 여성 피해자들을 비하하는 게시글을 올린 누리꾼들에 대한 진상규명 및 처벌을, 여성목욕탕 화재 피해자들의 신고전화 녹취록 요구 및 여성안전권 확보를 위한 제도마련을 주장했다(헤럴드경제. 1. 15). 제천화재사건 이후 이 사태가 여성혐오로 인한 구조적 참사라는 글들이 SNS에 올라오자, “그렇게 꼬우면 대신 죽어주든가” 라는 댓글을 비롯해서, ‘김치국’ 등의 사망자들을 폄하하거나 비아냥거리는 댓글들이 올라왔다. 그 수준은 말하면 무엇 하랴. 그 때문에 사건에 직접 연루된 이들에 대한 처벌 뿐 아니라 비하성 댓글을 올린 누리꾼들에 대한 처벌 또한 요구하는 것이다.  제천화재가 여성학살이라는 위 집회가 있은 다음날인 14일, 인천의 부평역 근처 여자화장실에서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던 여성이 남성에게 망치로 머리를 폭행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여성은 수술을 받았고 겨우 의식을 되찾은 상태지만 재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태라고 한다. 당시 바로 옆 남자화장실에 있던 이는 여자화장실 문을 열고 핏자국을 보고, 가해남성도 봤지만 도망을 쳤다. 결국 이 여성은 상해를 입은 상태로 스스로 경찰에 신고를 해야 했다.  “2년 전 강남역 노래방 화장실에서 벌어진 20대 여성 살해 사건처럼 심야 시간대의 묻지마 폭행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습니다.”(SBS 1. 15 저녁 8시뉴스)  2년 전 강남역 살해사건은 ‘여성혐오 살해’라고 여성주의자들이 명명한 바 있으나 여전히 ‘묻지마 범죄’로 불리우고 있다. 그 ‘묻지마 범죄’는 왜 항상 여성을 향해 있는가? 왜?  제천화재의 경우, 총 29명의 피해자 중 23명이 여성이고, 2층 여탕에 있던 여성은 전원 사망했다. 여탕은 소방안전점검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비상구가 막혀있었으며, 안전요원이 배치되어있지 않았다. 여탕에 있던 피해자들의 긴급구조 요청에도 소방당국은 신속히 대처하지 않았다. 2층 유리창을 깨라는 거물 밖 시민들의 요구도 즉각 이루어지지 않았다. 긴박한 순간에 20여명이 대피할 수 있었던 비상구를 집중공략 했다면, 어차피 나중에 깨고 말 2층 유리창을 일찍 깼더라면, 안전요원이 있었더라면, 여탕 비상구가 막히지 않았더라면. 아니 소방당국이 비상구를 집중공략 했더라면. 이런 ‘그랬더라면......’은 결코 사실을 되돌릴 수 없는 하나마나한 아쉬움 혹은 미련이다. 그러나 여성들만 유독 대량 사망한 이번 사건에선 결코 하나마나한 미련이 아니라 짙은 의혹과 질문이 된다. 왜?, 왜 그랬을까?, 왜 그렇게 밖에 안 되었을까?, 여성들만 왜?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기혼 여성들은 종종 친정어머니와 목욕탕에 간다. 특히 깔끔한 노인엄마를 모시는 경우 더욱 그렇다. 딸이 따라가야 몸을 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제천이 친정인 나도 어쩌면 피해자가 될 수 있었을 일이다. ‘운이 좋았다!’ 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다. 현 거주지가 부평인 나로 인해 나와 함께 사는 내 딸에게도 역시나 그런 ‘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 두 사건을 ‘구조적인 여성혐오로 인한 살해’라고 명명하는 것에 대해 많은 이들이 불편함을 넘어 불쾌해 한다. “죽이고 싶던 것도 아니고 구조를 진행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생긴 문제”라면서 “여성혐오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 “이번 참사는 구조적인 차원의 문제인데, 모금운동이나 소방관에 대한 위로가 진행되는 게 맞지 않냐”. “여성이 많이 죽은 것은 안타깝지만 이런 식으로 접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라고 ‘비판’ 하거나 ‘일갈’했다고 ‘보도’ 한다. 너무 ‘여성혐오에 짜 맞추는 억지’라는 것이다. 어떤 사건이 어떤 계층에서만 지속적으로 발생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무엇으로 봐야 할까?  아주대의료원 권역외상센터의 이국종 교수는 오래전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응급실에 오는 환자들 대부분이 저소득층 이며 이는 이들이 몸 노동을 주로 하는, 사고발생 위험이 높은 직종에 근무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결과라고 했다. 사회적 저소득층인 노동계급이 소득을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노동, 즉 몸을 파는 업종이 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사무직이나 관리직에 있는 고소득층에 비해 위험에 노출되는 비율이 훨씬 높을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적인 결과라는 것이다. 때문에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응급의료기관이 더 많아져야 하지만, 한국사회에서는 비용에 비해 효용(수입)이 낮은 응급의료기관이 축소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었다. ‘재난에도 계급성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다. 저소득층이 왜 응급실에 많이 오는가를 사회구조적 측면, 특히 자본주의적 경제구조에서 잘 파악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여성들이 왜 ‘표적’ - 묻지마 가 아닌 - 범죄의 희생자가 되고 한 사태나 사건에서도 더 많이 죽어나가는가에 대해서 사회구조적인 측면에서 고찰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여성들이 주장하는 여성혐오 범죄라는 명명이 함의하는 바이다. ‘재난에도 성별이 존재’ 한다는 것이다. 그 당시 소방관 개개인들에게 책임을 묻자는 것도, 남성들을 대상으로 시비를 걸자는 것도 아니다. 다만 성별화된 범죄나 사회악이 지속적으로 재생산 된다면 그것에 대해 왜 그런지를 고민해보고, 연구해보고, 대안을 논의해보자는 것이다. 모든 인권사안은 그렇게 발전 혹은 발견되어 왔다. 권력을 쥔 자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그 보이지 않는 집단의 항의와 저항을 통해 드러나고, 속성이 까발려지고, 드디어 인정받게 되는 과정을 거쳐서 인권의 대열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위 두 사례는 분명히 가부장제 사회구조가 만들어 낸 그러나 비가시화 된 ‘외면’ 혹은 ‘무시’ 나아가 ‘멸시’가 만들어낸 집단적, 구조적, 체계적인 범죄이다. 그것을 까발리는 것은 이 사회구조를 유지하고 재생하고 있는 우리 모두의 몫이다. 성숙한 시민의식이자 시민성, 책임이다. 지금은 시민권을 주장하기에 앞서 시민성을 발현하는 것이 필요한 때다.
2018-01-24 | hrights | 조회: 1356 | 추천: 11
- 엄마는 페미니스트 두 번째 이야기 정보배/ 출판 기획편집자  2017년 12월 31일자로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다. 대학을 졸업하고 임금노동자로 일한 시간을 합해 보니 21년 6개월. 대학 졸업 후 어떤 식으로든 일을 하지 않고 쉬었던 시간은 1년 6개월 정도이니 22년 가까이를 어쨌든 밥벌이를 한 것이다. 직장생활 22년이면 뭔가 대단한 통찰을 얻을 것이라거나 높은 직위에 오를 것이라 기대한 것은 당연히 아니다. 어쩌다 보니 그 시간 동안 출판계에서 일했다. 여러 방향에서 그 경험을 정리해 볼 수 있겠지만, 노동자로서 나의 경험을 몇 가지 들추어본다.  직장생활을 하는 내내 두 가지 바람이 있었다. 노동조합이 있는 회사에서 일해보는 것과 내 방(사무실)을 갖는 것. 아쉽게도 둘 다 이루지 못했다. 운이 나빠 그런 건지, 능력이 안 돼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다녔던 열 군데의 회사 중에 내가 그만둔 뒤에 노동조합이 생긴 곳은 단 곳. 제대로 노사협의회가 운영된 곳은 두 곳이었다. 나머지 회사는 규모가 크건 작건 노사협의회가 (형식적으로 신고돼 있을지 몰라도)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익을 위해 또는 회사의 운영에 목소리를 낼 시스템이 없다는 말이다. 달리 말하면, 출판계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환경이 나아질 토대가 마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얼마 전 다니던 회사의 노사협의회 노측대표단이 마련한 ‘성평등 조직문화 만들기’ 강연이 있었는데, 강연에 앞서 조직에서 남녀불평등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한 사전 설문조사가 있었다. 이 설문조사의 답변들이 경영진에게 전달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꼭 전달되기를 바란다) 남녀임금격차, 승진에서의 차별, 불쾌감을 느끼게 하는 아래위로 훑어보는 행위, 남자 위주의 경영진 구성 등등이다. 솔직히 남자직원들의 답변은 어떤 것일지 궁금하다.  직장생활 8년차쯤부터 나는 후배가 아니라 선배의 위치에 있다는 자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 무렵 내가 다니던 회사는 지극히 남성중심적인 조직문화를 갖고 있었고, 여자 간부직원은 단 한 명이었다. 갓 서른을 넘긴 당시에 나는 여자 간부의 존재가 소중하다고 느꼈다. 조직 안에서 여자 간부의 존재는 실무적인 차원에서 다양성을 확보하는 것 외에도 그 자체로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여자도 승진할 수 있다는 롤모델이라는 점.  당시 남자 간부직원 몇몇이 부서의 회식비로 단란주점 영수증을 부서 총무를 맡고 있던 막내 편집자에게 처리하라며 넘긴 사실을 알게 됐다. (편집자 후배들은 이 사실을 알면 난리칠 거라고 생각해 내게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다른 루트로 이 사실을 며칠 지나 알게 됐다.) 그 편집자 후배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차였다. 나는 그 후배에게 부서회비는 부서의 모든 직원이 나눠서 사용하게 되어 있는 것인데 몇몇 남자 간부직원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여직원들에게 아무런 동의도 없이 술집에서 사용한 것을 묵인하면 안 된다고 얘기했다. 후배는 이 문제가 불거져서 부서의 선배인 남자 간부직원과 부딪혀야 하는 상황을 무척 어려워했다. “00아, 우리 사무실을 한번 봐봐. 여기부터 저기까지 몇 십 명의 직원 중에 남자가 몇 명이야? 몇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여자야. 지금껏 남자중심으로 만들어져서 통용되고 있는 이런 조직 문화와 분위기를 우리가 바꾸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 같아? 네 후배, 그 다음 후배 여직원이 들어와도 똑같을 거야. 지금 불편하고 닥칠 상황이 무섭다고 피하면 그렇게 돼. 누가 대신 바꿔주지 않아.”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명의 남자 간부직원이 그 비용을 회사에 올리지 않고 나눠서 개별 처리하기로 했다는 얘기를 전해들었다. 이 경험으로 바로 조직 문화가 바뀌거나 하진 않았을 것이다. 다만 여태까지 해왔던 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경험을 당사자와 다른 조직원들이 공통으로 갖게 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변화는 작은 경험이라도 조직원 전체가 공통으로 가지게 되었을 때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직원이 70명이 넘고 매해 한두 명은 육아휴직을 들어가는 회사에 근무하던 때. 매해 두 명 정도는 임산부 직원이 있는 그 회사에는 직원휴게실이 없었다. 생리통으로 몸이 불편해도, 임신 중이라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도, 출산 후 복직해서 모유수유 중이라 유축을 해야 하는 상황에도 사무실 의자 말고는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 없다는 말이다. 비단 여직원을 위한 휴게실이 아니더라도 직원휴게실이 있어야 하는 건 상식적인 노동조건이다. 휴게실이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나의 제안에 회사 대표는 회사 회의실도 부족한데 왜 그런 것이 필요하다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 제안을 한 지 3년이 지나 그 회사는 더 성장했고 상장을 준비하는 과정에 있다. 상장에 필요한 조건이든 다른 이유에서든 올해는 직원휴게실을 만든다고 한다. 긍정적인 변화다. 부디 회사가 직원들에게 시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을 뒤늦게 마련한 것에 대해 미안함을 갖길. 사진 출처 - 구글  1994년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일이 아니라 회식 문화다. 첫 직장에서는 단란주점에서 회식을 하는데 남자임원이랑 춤을 추라며 내 등을 떠미는 상급 간부직원이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내게 몇 번이나 채근했고 결국 나는 화를 냈고 춤을 추지 않았다. 나이 어린 여직원을 자신의 상급자에게 떠밀다니, 그는 여직원을 뭐라고 생각했을까. 그런 행위를 상급자에게 충성하는 사회생활의 기본자세라 여겼을까. 견디기 힘든 것 중에 하나는 술문화다. 나는 체질상 술이 맞지 않았고 대학 2학년 때부터 거의 술을 마시지 않게 됐다. 그 뒤로는 맥주 한 잔을 마시는 데도 서너 시간이 필요하다. 당연히 회식자리에서 원샷, 술잔 돌리기 같은 것은 내게 죽음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술을 못 마신다는 내 말은 거의 무시당했고, 술을 못 마신다는 이유만으로 야유와 비웃음과 협박에 가까운 언사를 들었다. 어떤 때는 그래, 마시면 어떻게 되는지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주지, 하는 마음으로 몇 잔 마시고 인사불성 되어서 회식자리 파토내고 집으로 실려 간 적도 있다. 이렇게 한바탕 눈으로 사실확인을 하고 나면 더 이상 회식자리에서 술을 강권하지는 않았다. 대신 여전히 당신은 술자리에 어울리지 않고 따라서 술자리에 필요도 없고 분위기 망치는 인간 취급을 당했다. 이 정도로 무식한 술자리 문화는 이제는 찾아보기 힘들어졌기를. 뭔 이런 옛날 얘기를 하나라며 웃을 수 있는 지금이기를.  지금이 예전보다 나아 보이는 것은, 나이와 성별에 따른 차별적인 태도나 언행을 타인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는 의식이 사회적으로 점차 확산되고 있고, 현실에서 차별에 항의하는 용감한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정말로 현실을 바꾸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한두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걸, 바뀌더라도 아주 조금 아주 천천히 바뀌기 때문에 인내가 필요하다는 걸 깨달은 22년 간의 시간이었다.
2018-01-10 | hrights | 조회: 2458 | 추천: 11
윤영전/ 평통서문예원장  지난날 많은 추억들 중에서도 초등학교 시절이 떠오른다. 8남매 중 맏형이 제1회 졸업생이고 3년 사이로 선후배 동문이 되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조카들의 모교가 되었다. 오래 근무하신 선생님은 남매와 조카들 담임을 맡기도 하였다.  60년이 지난 어느 날, 그리운 초등학교를 찾았다. 강산이 여섯 번이나 변한다는 세월이기에, 학교 주변은 몰라보게 변해있었다. 학교에 인접했던 도로가 2차선에서 6차선으로 넓어졌다. 하루에 6차례 지나가던 증기기관차가 한 세대 전부터 다니지 않게 되었다. 교사가 단층으로 6개 교실이었는데 4층의 50학급으로 늘어났다. 재학생도 10배나 증가해 빛고을에서 규모가 큰 초등학교가 되어있었다.  내 학창 시절 모교는 광주에서 변두리 시골학교였다. 그런데 학교주변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살기 좋은 마을로 소문이 나면서부터 학교위상이 달라졌다.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광주 빛고을에서 유명세를 타더니 어느새 우수한 학교가 되었다. 입학과 전학을 오려는 경쟁이 심해져 자연스레 인기학교가 되었다. 놀라운 변화였다.  내가 공부하던 때의 교사와 운동장은 옛날의 배가 되었고, 운동장 주변 작은 나무들은 어느덧 큰 나무가 되었다. 교목이었던 나무는 교사 한가운데 있었는데 당시에는 내 품안에 쏙 들어왔었지만, 이제는 튼실하게 자라서 모교에서 제일 큰 나무로 우뚝 서 있다. 교사 외에 대형 강당과 연구실험실도 2동이나 늘어나 있었다. 사진 출처 - 구글  모교는 남쪽으로는 태봉산, 서쪽으로 금당산을 낀 무등산 자락에 자리해있다. 산에 제일 높은 해발 6백 미터에 옥녀봉이 있었는데 자주 오르곤 했다. 그때는 너무 높아서 오르기가 쉽지 않았지만, 이제 보니 그리 높지도 않다. 왜 그렇게 높게만 보였을까? 아마 당시에는 어린 아이의 눈높이여서 그랬을 것이다.  한 세대 전, 총동문회에서 수여하는 모교를 빛낸 동문회상을 받았다. 앞으로 모범이 되는 동문으로 거듭나고 모교를 빛내라는 뜻도 있었다. 그러나 그 일이 쉽게 실행되지 않아 마음의 빚으로 남았었다. 그런데 10년 전에 내 저서와 어린이 도서를 기증하며 그 빚을 약간 덜 수 있었다. 그리고 9년 전에는 교장선생님을 찾아가 제16회 졸업생이라 인사하고 그간의 생각을 전했다. 비록 작은 성의지만 모교의 발전과 후배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기꺼이 하겠다는 의지를 전했다. 마침 총동문회에서 졸업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해왔는데 끊겼다며 반겼다. 효행학생과 우수학생에게 효행장학금을 수여하기로 하고 선발은 학교에 일임했다. 교장선생님은 언제 나의 6년간 생활기록표를 보았는지, 우등생으로 학내 독창을 하고 시․군 음악경연대회에서 독창과 합창으로 입상을 한 사실을 알았다며, 졸업식 날에 직접표창과 축하노래까지 부탁하였다. 피아노 반주는 음악선생이 맡아주겠다고 했다.  지난해 모교의 졸업식 날, 식장에는 졸업생과 재학생 5백여 명과 졸업생 학부형 5백 명 등 1천명이 참석하였다. 강당이 비좁아 밖에 서서 졸업식 광경을 지켜볼 정도였다. 내 순서에 앞서, 교장선생은 특별히 효행장학생에게 표창을 하고 축하말씀과 노래까지 불러주실 모교 16회 대선배 되신 졸업생이라고 소개를 했다.  큰 박수를 받고 등단해 간단한 인사를 했다. “내 사랑하고 그리운 효덕초교는 우리 8남매가 동문이고 내 생애에 많은 추억을 안긴 모교이기에 이렇게 달려왔다” 60년 전에 학예회 때마다 불렀던 독창을 오늘 빛나는 졸업식장에서 후배들에게 들려주려니 감회가 깊다고 했다. 박수를 받으면서 모교와의 잊을 수 없는 추억들을 마치 활동사진처럼 떠올릴 수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했던 입학식에서 교훈을 보았는데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한다”였다. 그 교훈은 내 평생 배움을 독려 해주었다. 그리고 1학년 2학기 겨울방학 전 어느 날 폭풍한설이 몰아쳐 그만 등교를 못 한 적이 있었다. 오후에 담임선생님이 학교로 나오라는 연락을 하셨고 교실에 갔다. ‘이런 정도의 날씨에 학교를 결석하다니, 책상 위에 올라가 손을 들라’는 벌을 내렸다. 무려 2시간을 손을 들고 있었는데 “배움을 게을리 하면 장래가 없다”며 호통을 치셨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자괴하면서 다짐했었다. 어떤 배움에서도 절대로 게을리 하지 않겠다던 기억이 생생하다.  나는 1학년 때 22살의 맏형을 잃고 방황을 하며 2학년을 맞이했다. 6.25전쟁으로 인해 아버지와 둘째형이 부역자가 되는 바람에 집안이 풍비박산이었다. 그때 맏형과 모교 1회 동문이었던 김종길 선생님이, 제자의 상처를 위로해 주셨다. 그때 전쟁과 평화에 대한 마음이 새겨졌던 것 같다. 한편으로는 지난 세월 나에게 슬픔과 기쁨도 있었다.  초등학교에서 줄곧 우등상과 개근상을 탔다. 학예회 독창과 합창경연에서 입상하기도 했다. 소풍을 가면 노래를 불러 상으로 공책과 연필을 받았고 내내 쓰고도 남았다. 입학 전에 서당에 다녀 습자부장이었고, 개교 기념 글짓기에서 상을 받아 전체 조회에서 낭송도 했다. 그리고 학생회장이 되어 전체 조회에서 쩌렁쩌렁한 구령을 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전쟁으로 인한 가족사의 비통함이 크기는 했지만, 고학을 하며 청운의 뜻을 품고 상경하여 향학열을 불태웠다. 군 제대를 앞두고 전쟁과 평화를 생각하며 최초 월남파병에 지원해 살아 돌아왔었다. 민주화로 진통이었던 때에도 학업을 계속하여 서울대와 정부기관에 근무하면서 평화통일을 향한 운동에 매진하고 있다.  모교 효행 장학생 표창은 벌써 10여 년째 이어가고 있다. 졸업반 1명씩 총10 여명에 효행 표창과 장학금을 수여해오고 있다. 효(孝)사상이 점점 잊혀가는 요즘, 효행 향학 장려는 분명 필요하다. 효학 정신은 사회와 가정에 귀감이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지난 그리운 추억을 회상하며 효행장학을 계속 이어 갈 것이다.   * 윤영전(尹永典) 아호: (九巖 孝崗) 당호: 전호당(傳孝堂) (二歡堂) 효행상 2회 수상   서초문학상. 오마이공모 우수상. 국회민족평화통일상. 서예초대작가. 한국작가회 회원   한국작가회 소설가. 한국문입협회 수필가. 한국서예, 전통서예 초대작가. 칼럼니스트.   저서:소설집 (못다 핀 꽃) 수필집(도라산의 봄) 에세이집(평화, 그 아름다운 말)   수필선 (강물은 흐른다) 고희문집(인연, 아름다운 만남) 애창가곡집 (CD)출간
2017-12-20 | hrights | 조회: 1266 | 추천: 2
홍미정/ 단국대학교 중동학과 조교수  100년 전 1917년 11월 영국외상 밸푸어는 ‘팔레스타인에 유대민족 고향 건설’을 허락하는 소위 밸푸어 선언을 하였다. 2017년 12월 6일, 미국 대통령 트럼프는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수도’라는 선언을 함으로써, 이스라엘 건국이념인 시온주의를 성취한 것처럼 보인다. 트럼프 선언에 대하여 12월 8일, 이스라엘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는 “트럼프 대통령의 이름은 우리의 수도, 예루살렘과 우리의 영광스런 민족의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트럼프 선언에 맞서 각 도시마다 시위를 하고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의 점령 하에서 힘든 생활을 하고 있지만,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그 입지를 정립해 가고 있었다. 이에 맞서 트럼프 선언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소위 ‘세기의 협상안’은 이러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자구노력을 완전히 무산시키는 것이다. 이스라엘 군 최루탄 피하는 팔레스타인 시위대 사진 출처 - 뉴스1  2011년 10월 31일, 팔레스타인은 UNESCO에 완전한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2012년 11월 29일, 유엔에서 팔레스타인의 지위는 비회원 옵서버 단체에서 비회원국 옵서버 국가로 승격되었다. 이로써 팔레스타인은 유엔의 장에서 국가의 지위를 얻었고, 유엔은 공식적으로 ‘팔레스타인 국가, The State of Palestine’ 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2015년 4월 팔레스타인은 공식적으로 국제형사 재판소(the International Criminal Court, ICC)의 회원이 되었다.  게다가 2017년 9월 20일에는 서안에 기반을 둔 4개의 인권단체 - 알 하끄, 알 마젠 인권센터, 팔레스타인 인권센터, 알 다미르 인권협회 - 가 ICC에 서안에서의 이스라엘 정착촌 건설과 가자에서의 범죄 행위를 포함하는 이스라엘 범죄를 조사할 것을 요구하는 700쪽으로 구성된 자료를 ICC에 제출했다. 알 하끄 대표에 따르면, 이 자료들은 4개 단체들이 수집한 사실에 입각한 정보에 토대를 둔 것으로, ICC의 로마규정에 따라 계획적 살인, 주민 추방, 이스라엘 점령촌 건설, 가자에 연안 천연가스 자원 채굴과 파괴 등 광범위한 재산 파괴와 전유 등 광범위한 이스라엘의 전쟁 범죄행위들에 대한 전면 조사를 요구하였다.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ICC 검사 사무실은 이 자료들을 받고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는 제출된 자료들을 적절하게, 완전히 독립적으로 공정하게 로마규정에 따라 분석할 것이다. 다음 단계에서 우리가 결정에 도달하게 되면, 우리는 발송인에게 알리고, 우리의 결정에 대한 근거를 제공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ICC에 가입하지 않았으나, 이스라엘인들은 팔레스타인 영토에서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 헤이그 소재 ICC법정에서 재판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11월 미국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이스라엘 ICC 제소에 맞서 워싱턴 소재 PLO 사무실을 폐쇄하겠다고 협박하면서, 팔레스타인인들에게 ICC에 이스라엘 기소를 중단하고, ‘무조건적인 평화회담’을 시작하라고 요구하였다. 현재까지 미국이 팔레스타인 국가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미국에 대사관이나 영사관을 설립하지 못했고, 1994년 오슬로 협상 과정에서 PLO가 팔레스타인인들을 대표하는 워싱턴 사무실을 개소하였을 뿐이다.  미국이 제안하는 ‘무조건적인 평화 회담’은 트럼프와 사우디가 주도하는 것으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분쟁을 종식시킬 최종 계획, 소위 ‘세기의 협상’으로 알려졌다. 공교롭게도 트럼프 선언 한 달 전인 11월 6일, 사우디 왕세자 무함마드 빈 살만은 팔레스타인 수반 압바스를 리야드로 초청하여, 이 계획 ‘세기의 협상’을 설명하면서, 압바스에게 “이 계획을 수용하던지, 수반 자리에서 내려오던지 하라”고 협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압바스와 리야드 방문에 동행한 팔레스타인 관리들에 따르면, 2018년 초에 모습을 확실히 드러낼 것으로 예상되는 이 계획은 예루살렘 없이, 1948년과 1967년 전쟁으로 추방당한 난민귀환 없이, 토막 난 서안의 고립된 영토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의 제한된 자치다. 이것은 국가로서의 최소한의 주권도 갖추지 않은 모습이다.  2017년 11월 18일, PLO 사무총장 사에브 에레카트는 만약 미국이 워싱턴 소재 PLO 사무실을 폐쇄한다면, PA는 미국 행정부와의 모든 접촉을 중단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같은 날 미 국무부가 그에게 보낸 편지에는 ‘2015년 4월 1일 팔레스타인의 ICC가입, 2017년 9월 팔레스타인이 ICC에게 점령촌 건설과 가자에서의 전쟁 범죄행위 등 이스라엘 전쟁범죄 조사 요구에 대한 대답으로 PLO 사무실이 폐쇄될 것이다’고 쓰여 있다. 11월 22일, 하마스는 워싱턴 소재 PLO 사무실 허가 갱신을 위하여 미국이 내놓은 새로운 조건은 이스라엘이 전쟁 범죄자가 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주장한다. 하마스는 또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게 이러한 조건들을 거부하라고 요구하였다. 하마스는 성명을 통해, 워싱턴 소재 PLO 사무실 허가 갱신을 팔레스타인의 ICC가입이나 시온주의자 전범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과 연계시키는 것은 미국이 완전히 편파적이라는 것을 입증한다고 주장했다.  2017년 11월 23일, 사우디와 이집트는 팔레스타인 수반 마흐무드 압바스에게 이스라엘 ICC기소를 취소하라고 압력을 가하였으며, 그는 이스라엘 관리들을 기소하는 단계를 밟지 않기로 약속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것은 왕세자 무함마드 빈 살만이 이끄는 사우디와 대통령 압델 파타 알 시시가 이끄는 이집트가 팔레스타인 대의를 배반하면서, 미국과 이스라엘에 협력하는 중요한 예다.  트럼프 선언에 맞서 가자를 통치하는 하마스는 새로운 인티파다(민중봉기)를 요구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가자 공격을 시작하면서, 12월 9일 2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가자는 다시 한 번의 커다란 위기를 맞이한 것으로 보인다.
2017-12-11 | hrights | 조회: 1282 | 추천: 9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1. 수업하러 이층에 올라갔더니 내 학급 앞 복도에 반 아이들이 서 있다. 반장과 부반장 그리고 그 녀석이다. 수업 시작 타종이 울린 지 몇 분이 지난 시각인데, 왜 저러고 있을까? 더군다나 그 녀석은 가방을 들고 있다. 다가갔다. “광제 너, 왜 가방을 싸들고 나왔어?” “무기정학 먹으라고 하면서 싸들고 나오라고 했습니다” “누가?” “학생부 선생님들이요” “그래? 학생부 선생님, 누구?” “xxx 교련 선생님하고, yyy 체육 선생님하고......” “그래?! 들어가서 공부해!” 화가 났다. 아니, 이 놈들이 담임인 나한테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저거들 마음대로.  1-1. 어제였다. 교무실이 발칵 뒤집혔다. 학교에서 가장 젊은 지학 담당 정 선생이 씩씩거리며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 뒤로 우리 반 학생인 광제 녀석이 입에 피를 묻힌 채 뒤따라 들어왔다. 나는 못 본 채 ‘왜 저러나?’ 하면서 예의 주시했다. 정 선생이 책상에 앉는다. “그래? 내 강의한 것이 뭐가 틀려? 말해 봐” “선생님 강의가 틀렸다고 말한 적 없습니다. 혹시 천정 정의가 잘못된 것 아니냐고 말했을 뿐입니다” “야이! 새끼야! 그게 그거잖아!” 고함을 지르면서 일어선다. 일어서면서 광제 녀석의 뺨을 친다. 맞고도 광제 녀석이 정 선생을 빤히 쳐다본다. 뺨을 맞고 나자 광제 녀석이 입에서 피가 흘러내린다. 주변에서 말한다. “야! 조광제. 나가서 얼굴 씻고 와! 빨리 나가!” 그때였다. 광제 녀석이 크게 소리쳤다. “저는 잘못한 것이 없기 때문에, 이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기 전까지 이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정 선생도 덩달아 소리쳤다. “너 이 놈의 새끼! 퇴학시키지 못하면 이 학교 관두겠어” 정면충돌이었다. 결국 광제 녀석은 얼굴을 씻고 학급으로 돌아갔다.  문제의 지학 수업이 그날 마지막 수업이었다. 학급 종례를 끝낸 뒤 교장선생님이 특별히 교무회의를 소집했다. “앞으로 학생들을 함부로 구타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정 선생님은 연 이틀 학생을 감정적으로 구타한 것으로 보고가 되고 있으니 자중해 주시고요. 이상입니다”  2. 고3 지학 시간이다. 선생님이 지구에서 하늘의 별들을 관측하는 일에 관해 열심히 설명을 하면서 판서를 해나갔다. 그러다가 뭔가 잘못된 양 강의를 멈추고서 판서 내용을 검토하는 듯 했다. 30초쯤 흘렀을까. 학생인 내가 왠지 불안했다. 그래서 말했다. “선생님!” “왜?” “혹시 저 맨 앞의 천정 정의가 잘못된 거 아닙니까?” 그 말을 듣자마자 선생님의 얼굴이 갑자기 붉게 물들면서 깐깐하게 뭉쳐진 소리를 내뱉었다. “뭐! 뭐가 틀려! 이리 나와 이 새끼!” 나는 엉거주춤 교단 앞으로 나갔다. “이 새끼! 내 선생질 3년 넘게 하면서 니 같은 새끼는 처음 봐. 이리 와!” 교단 위에서 주먹을 냅다 내 얼굴에 내질렀다. 맞으면 별이 번쩍인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다시 한 번 주먹이 날라 왔다. 이번에 다른 쪽 주먹이었다. 나는 그의 두 팔을 잡았다. 말했다. “선생님 교무실에 가서 말합시다” “그래? 이 새끼!” 하면서 이제 뺨을 연거푸 때렸다. 나는 그냥 뺨을 내주었다. 그는 제풀에 지쳤는지 말했다. “들어가 있어” 그의 말대로 들어와 앉았다. 분하기도 하거니와 급우들에게 창피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사실 나는 건강이 안 좋아 휴학한 뒤 복학한, 1년 전만 해도 급우들의 한 해 선배였던 것이다.  2-1.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교무실에 가서 끝장을 내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씩씩거리며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 자기 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의 책상 앞에 섰다. “그래, 교무실에서 말하자며. 말해봐!” “수업 처음에 천정을 말할 때 관측자의 머리 위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에게 그날 수업을 요약해서 쫙 말한 뒤, “이 대목에서 선생님께서 머뭇거리시기에 혹시 저 맨 앞에 천정 정의가 잘못된 것 아닙” 하고서 아직 말끝을 맺지도 못했는데, “뭐가 틀려!” 소리를 지르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또 내 뺨을 쳤다. 선생님들이 나가서 얼굴을 씻고 오라고 다그쳤다. 그때 나는 크게 말했다. “저는 잘못한 것이 없기 때문에, 이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 이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겠습니다” 다들 놀라는 눈치였다. 그 와중에 조금 멀리 아래 책상을 내려다보고 계시는 담임선생님이 보였다. 그때 그가 나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소리쳤다. “내, 니놈을 퇴학시키지 못하면, 이 학교 관두겠어”  2.2. 그 다음 날이었다. 두 번째 수업 타종이 울렸는데 반장이 학생부 xxx 선생님이 나보고 교련실로 오라고 한다고 일러주었다. 수업을 하지 않고 교련실로 갔다. 학생부 교사들 5인이 쿠션 의자에 마주 보고 둘러앉았다. 나를 가운데 나무의자에 앉혔다. “너, 어제 정호종 선생님이 강의하는 데 틀렸다고 했다면서” “틀렸다고 한 것이 아니라, 혹시 잘못된 게 아니냐고 했습니다” “야 이 놈아! 그게 그거지” 나는 그들의 윽박지르는 전반적인 분위기에 상당히 압도되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에게 완전히 주눅 든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누군가가 말했다. “저 놈, 저 눈 봐 눈” 예사로 선생에게 덤벼들 수 있는 놈이라는 거였다. “너 때문에 어제 정 선생님이 교장선생님한테 얼마나 창피당한 줄 알아?” “……?” “책임질 거야, 안 질 거야. 너 같은 놈은 무기정학 먹고서 집에서 푹 쉬어 봐야만 선생님 은혜가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있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끄러미 그들의 허리쯤 높이를 쳐다보면서 빠른 속도로 생각했다. 학교를 그만 두자, 검정고시를 쳐서 대학엘 가자, 등등...... “야 이 놈아. 왜 아무 말이 없어. 책임 질 거야 안 질 거야” “왜 물어보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책임지겠습니다” “그래 잘 생각했어. 지금 교실에 들어가서 책가방 싸서 나와!”  2.3. 교실로 돌아와 일단 수업을 마쳤다. 나로서는 마지막 수업이라 여겼다. 끝난 뒤 반장을 불렀다. “교련실에 갔더니 학생부 선생들이 나보고 무기정학 먹으라고 하네. 책 보따리 싸오라고 해서 지금 나가려고” 반 아이들이 웅성거렸다. 말이 안 된다는 거였다. 선생이 흥분해서 학생을 마음껏 치고 때린 건 데 무슨 무기정학이냐, 가만있으면 안 된다, 데모해야 한다 이거, 그 와중에 다음 수업시간 시작종이 울렸다. 일단 다른 친구들은 교실로 다 들어가고 반장과 부반장 그리고 나 세 사람만 복도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저기 복도 중앙에서 다른 반에 강의하러 가시던 담임선생님께서 우리를 보시고는 우리 쪽으로 오셨다. “광제 너, 왜 가방 들고 있어?” “교련실에 오라고 해서 갔더니 학생부 선생님들이 무기정학 먹으라고 하면서 가방 싸들고 나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뭐!? 어떤 새끼가 그래!” “xxx 선생님 하고 yyy 선생님 하고” “그래? 알았어. 일단 들어가서 공부해라.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3. 그 뒤로 나는 학교를 무사히 잘 다녔고, 졸업도 했다. 지학 담당 정호종 선생은 두 달 쯤 있다가 학교를 그만두고 어디론가 떠났다. 알고 보니 정식으로 발령이 난 교사가 아니었고 임시 강사였다. 나보고 무기정학 먹으라고 큰소리쳤던 체육선생 yyy와 교련선생 xxx는 나만 보면 못 본 척 피하는 것 같았다.  4. 노망이 들면 오래된 일만 생생하게 남고 최근의 일은 재빨리 지워지는 법인가. 그리고 자꾸 옛일이 생각나는 법인가. 아무튼 43년 전 쯤의 일인데도 그 장면 장면들이 어제 겪은 일처럼 생생하다. 무엇보다 교련실 학생부 교사들에게 잡혀갔을 때 들었던, “저 놈, 저 눈 봐 눈” 하는 말을 잊을 수 없다.  “혹시 저 맨 앞의 천정 정의가 잘못된 것 아닙니까?” 하고서 질문했을 때, “저는 잘못한 것이 없기 때문에, 이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 이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겠습니다”라고 선언했을 때, 그때 나의 눈빛은 과연 어떠했을까? 나로서는 쉽게 가늠할 수 없지만, 결코 그저 을의 위치에 있는 학생으로 비쳐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진 출처 - 한겨레    학생은 결코 을의 위치에 있는 자가 아니다. 사회적으로는 이해관계 때문에 갑을이 임시로 정해지겠지만, 인간관계의 근본에 있어서 무슨 갑을이 있겠는가. 그런데 그 근본은 바로 눈빛에서 드러난다. 눈빛은 결코 양도할 수 없는 인간됨의 타고난 권리를 표현하는 근원적인 위력이다. 바로 바라보는 눈빛에서 나의 존재가 건립된다. 따라서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는 출발은 그의 눈빛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눈 안 깔아!”라고 해서 상대의 눈빛을 지우고자 하는 데서 인권에 반하는 일들이 시작된다. 눈빛이 인권이다. 언제 어디서건 누구에 대해서건 모두의 눈빛이 부드러우면서 깊이 있게 살아있도록 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알짜라 할 것이다.
2017-11-22 | hrights | 조회: 941 | 추천: 4
신하영옥/ 여성운동연구활동가 네트워크 ‘젠더고물상’ - “내 아내 성폭행하실 분” 인터넷서 물색한 남편, 모텔에서 술에 취한 아내를 함께 성폭행... 경찰에 체포 - 대법, '여중생 성폭행·임신' 40대 기획사 대표 무죄 확정. "사랑해서 이뤄진 관계" 주장 받아 들여 - 한샘 신입여직원 강간 및 성폭행, 몰카, 성폭행 재시도 - 현대카드 여직원 성폭행 - '장기자랑 논란' 성심병원, 임산부까지 동원? "응원 강요…아스팔트 위에 장시간 방치" - 일선 간호사들에게 강요되고 있는 '임신 순번제' 오늘, 인터넷 검색 3순위가 페미니스트였다. 의아해서 검색해보니 가수지망생 모씨가 발언한 ‘트랜스젠더와 여성혐오’에 대한 sns의 글이 1순위로 오르면서 ‘페미니스트’도 덩달아 검색순위에 오르게 된 것이었다. 여기서 트랜스젠더가 여성이냐 아니냐를 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페미니스트가 검색 상위에 오를 정도로 이제 페미니즘, 여성주의는 어쩌면 일상 곁으로 다가온 건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을 주워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페미니즘이라는 말이 보편화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페미니즘의 확산의 뿌리는 긍정적이지 못하다. ‘꼴페미’, ‘김치녀’ 등의 용어와 더불어 사용되는 예가 많고, 페미니즘 논쟁이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여성혐오꾼’들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어쩌면 이들이 오히려 페미니즘을 일상의 용어로 확산하는 데 기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페미니즘은 사회적 여성이슈나 여성폭력 관련해서 논쟁이 발생하는 곳에서부터 퍼져나오고 있다. 위에 열거한 사건들은 최근에 발생한 여성들에 대한 폭력과 차별, 성희롱 사건들이다. ‘페미니스트’임을 자처한 이가 대통령이 되고, ‘진보’를 자처한 이들이 정권을 이루고, ‘야당’을 자처하는 이들이 집권정당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여성들에게는 ‘페미니스트’도, ‘진보’도, ‘야당’도 안 보이는 걸까? 남편은 아내를 윤간 대상으로 보고, 기업들은 여성사원들을 ‘성폭력’과 ‘선정’의 대상으로 보며. 기획사 대표는 연예인 시켜주겠다는 것을 빌미로 수차례 강간을 했는데, 법원은 그걸 ‘사랑’이라 부른다. 그리고 출산율 저하를 우려하는 국가와 사회는 간호사들이 ‘임신’을 위한 순번제를 한다는 것을 모르쇠하고 있다. 여성단체들은 며칠 전 한샘과 현대카드 성폭력 문제에 대한 성명을 통해 “여성에겐 모든 기업이 한샘!”이라고 못을 박았다. 드러나지 않았으나 만연한 직장 내 성희롱 및 성폭력 사건을 꼬집는 말이다. 여성들에게 모든 기업은 성희롱과 성폭력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하는 곳이다. 직장 내 성폭력과 성희롱은 결코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는다. 때문에 피해여성들은 그곳이 직장이 아니라,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어렵게 입사한 직장을 그만두고 평생을 우울증과 자폐에 시달리며 살아내는 여성들. 모든 범죄 중에서 유독 성폭력만 피해자가 손가락질 받는 사회문화 속에서 성폭력 피해여성들은 피해자임에도 가해자처럼 숨거나 숨기거나 하는 것이다. 나의 직장이 일터가 아니라 폭력의 현장이라고 느껴질 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내를 물건만도 못하게 취급하는 남편, 연예인 후보생을 성적 노리개로 취급하는 기획사 대표, 그 남편들이 만드는 기업문화, 기획사 대표가 만드는 우리사회 성문화, 몇몇 글만을 보고 성폭력을 사랑이라 인정하는 법제도가 만드는 법의식과 문화...... 가족, 기업, 미디어, 그리고 법과 제도까지, 가부장제는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가부장제도는 여성에겐 굴레이자 억압 그 자체다. 억압과 차별이 만연하고 폭력으로 일상이 두려움과 불안이라면 그것은 민주주의일까? 그리고 그것은 진보일까? 사진 출처 - 여성신문 며칠 전 강의를 하러 간 어떤 여성단체에서 한 여성이 진보주의자인 남편에 대해 분통을 터뜨리는 것을 보았다. 집안일은 전혀 하지 않고, 소통도 않으며, 경제생활도 하지 않고 오로지 ‘진보정당’ 일에만 매진을 한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경제생활과 임신/출산/양육에 가사노동까지 전담해야 했던 이 여성은 현재 우울증 치료약을 먹고 있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 남편의 주장이라고 한다. 무엇이 큰 것이고 무엇이 작은 것인가? 불통을 우린 ‘독재’라 한다. 스스로 자신을 돌볼 수 없는 사람을 우리는 뭐라 불러야 할까? 그 남편은 진보주의자이지만 실상에선 무능력하고 무위하며, 독재자일 뿐이다. 여성에게 그러한 진보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진정한 진보정권을 자처한다면, 여성문제가 민주주의의 척도라는 생각을 좀 더 진지하게 하길 바란다. 모든 인권은 피해자들의 존재로부터 출발한다. 피해자들에게는 존재를 드러내는 것 자체가 커다란 용기이고 투쟁이다. 인권은 투쟁으로부터 나온다. 성폭력 피해자 여성들이 드러내는 ‘성폭력의 존재함’은 여성인권의 바로미터이고 이로부터 여성인권의 방향이 나오는 것이다. 국가는 이러한 피해자들의 목소리, 폭력의 존재함에 대해 민감성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인권임을 직시하고 전 사회적인 변화를 위한 조처를 취해야 할 것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 만연한 사회는 결코 진보한 사회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진보한 국가도 정권도 아니다. 고통 받는 이들을 외면하는 정치란 존재할 수 없다. 정치란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 아니라 ‘소를 위한 대의 헌신’이 필요한 데서 발생한다. 진보란 작은 것, 일상, 생활의 평화를 보장하고자 하는 것, 그것은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란 점에서만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단지 주장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여성주의에게 현 정권은 결코 진보적이지 않다.
2017-11-17 | hrights | 조회: 1152 | 추천: 5
  : 에너지 강국으로 부상하는 이스라엘 홍미정/ 단국대 중동학과 조교수     □ 강화되는 가자지구 해안 봉쇄   올해는 ‘팔레스타인에 유대민족고향 창설을 목표’로 내세운 세계시온주의자기구 창설(1897) 120년, 영국이 ‘팔레스타인에 유대민족고향 창설’를 지지한 밸푸어 선언(1917) 100년, 유엔이 ‘팔레스타인을 유대국가, 아랍국가, 예루살렘 국제지구로 분할에 합의’한 유엔총회 181호 결의(1947) 70년, 이스라엘이 전쟁을 일으켜서 동예루살렘, 서안, 가자와 골란고원을 불법점령(1967)함으로써 팔레스타인을 완전히 점령한지 50년이 된다.   2017년 현재 팔레스타인의 독립은 요원하지만, 이스라엘은 그리스와 이탈리아를 거쳐 유럽으로 가는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건설을 추진함으로써, 천연가스 수출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다.   1998년 이후, 팔레스타인 가자를 포함하는 동지중해 연안에 천연가스가 대량 매장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이 천연가스 자원을 독점하기 위해서 가자 봉쇄의 고삐를 점차 조인다고 믿는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유전탐사 및 개발뿐만 아니라, 어업활동을 할 수 있는 한계를 다음과 같이 계속 줄여왔다.   1995년 오슬로Ⅱ 협정은 팔레스타인인들이 활동할 수 있는 가자 연안 경계를 20해리(37.04㎞)로 한정하였다. 2002년 베르티니 협정은 그 경계를 12해리(22.22㎞)로 대폭 줄였고, 2006년 10월, 이스라엘군이 허용한 어업한계는 6해리(11.1㎞), 2009년 1월, 이스라엘군이 허용한 어업한계는 그 절반인 3해리(5.5㎞)로 줄었다.   현재 이스라엘은 가자 지역에서 발견된 석유와 가스자원을 독점적으로 탐사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이 가스전에 접근하는 것을 금지하면서, 가자지구 해안을 봉쇄하고 있다. 따라서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이 가자를 포위하고 공격하는 진정한 이유를, 가자 연안에 매장된 석유와 천연가스를 강탈하기 위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동지중해 연안에서 계속되는 이스라엘의 천연가스 탐사와 개발 및 파이프라인 건설 사업은 이스라엘의 가자 해상 봉쇄정책이 더욱 강화될 것임을 예고한다.   가자 지구 해안 봉쇄     □ 가자 마린 가스전 개발차단 및 노아 가스전 개발   : 팔레스타인의 에너지 독립을 저지하는 이스라엘   1998년 동지중해에서는 처음으로, 가자지구 연안에 위치하는 가자 마린(Gaza Marine) 가스전이 발견되었다. 이 가스전은 가자 해안으로부터 19.43해리(36㎞) 해상에 위치하고, 0.32해리(610m) 깊이에 위치해서 비교적 개발이 용이한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이 가스전은 팔레스타인 전역에 공급할 충분한 에너지 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수출할 여력이 있고, 팔레스타인을 에너지 독립국가로 만들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999년 팔레스타인자치정부는 BG(British Gas Group)에게 가자 연안 전역에 대한 25년 동안의 탐사 허가권을 내주면서, 가스전들을 개발하고 필요한 기반시설을 건설할 권리를 부여하였다. 2000년 BG는 가자 마린에서 두 개의 유정을 굴착하여 매장량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2000년 9월 28일 제2차 팔레스타인 인티파다(알 아크사 인티파다) 발발을 빌미로, 이스라엘은 가자 마린 가스전에 대한 접근을 금지하고, 이 전으로부터 가스를 추출하려는 시도를 완전히 차단하였다.   가자와 이스라엘 연안 가스전      2016년 4월 8일 로얄-더치 쉘이 BG를 인수하면서, 가자 마린의 운영권을 가져갔다. 2017년 현재 로얄-더치 쉘이 가자마린 지분 55%, 통합 시공사(CCC)가 27.5%. 팔레스타인 투자 기금(PIF) 17.5%, 지분을 갖고 있다. 그러나 2017년 현재 가자 마린은 여전히 개발되지 않은 채로 방치되어 있다.   반면 1999년 이후, 미국과 이스라엘 회사들은 가자와 이스라엘 경계지역의 가스 자원을 탐사하고 채굴하고 있다. 2012년 이스라엘의 승인을 받아서, 미국회사 노블 에너지와 이스라엘 회사 델렉시추는 가자 인근에 위치한 노아 가스전을 급하게 개발함으로써, 주변지역의 전체 자원을 손상시킬 위험을 촉발시켰다. 가자와 이스라엘 경계지역에서 진행되는 이스라엘의 가스자원 탐사와 개발에 대하여, 팔레스타인 인권단체 알 하끄(Al-Haq) 사무총장 샤완 자바린은 “점령당한 팔레스타인에서 행해지는 이스라엘의 가스 자원 채굴과 파괴는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고, 강탈행위이며, 전쟁범죄다. 재산파괴는 제네바 협정의 심각한 위반이다. 이스라엘 가스전 개발을 모색하고 있는 국제기업들이 팔레스타인 해역을 통해 가스를 수출한다면, 의심할 여지없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적대 행위를 강화할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 마리B 가스전 개발과 아쉬켈론-엘 아리시 파이프라인 건설   : 팔레스타인인들 가자 연안 접근금지   2000년 이스라엘이 가자연안에서 발견한 마리B 가스전과 2005년 가자 연안 전역을 가로지르며 건설한 이스라엘과 이집트를 연결하는 아쉬켈론-엘 아리시 파이프라인은 가자연안 유전지대에 대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접근을 막기 위한 주요한 전략적인 수단이다. 이스라엘은 이 주변 지역들을 어업금지 구역으로 선언하였다.   마리B 유전은 가자 해안으로부터 11.29해리(20.92㎞) 해상에 위치해서 팔레스타인 소유인 가자 마린보다 가자 해안에 더 가까이에 위치한다. 따라서 팔레스타인인들은 마리B 가스전이 가자 연안에 있으므로, 팔레스타인인들 소유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가자로부터 11.29해리(20.92㎞) 해상에 건설된 아쉬켈론-엘 아리시 파이프라인은 가자 연안 전역을 가로지르며, 이스라엘의 아쉬켈론과 이집트의 엘 아리시를 연결한다.   2002년 베르티니 협정에서 팔레스타인인들 활동 한계는 12해리(22.22㎞)였으나, 2005년 아쉬켈론-엘 아리시 파이프라인이 건설되면서, 2006년 이스라엘군이 허용한 어업한계는 6해리(11.1㎞)로 줄었다.     가자 연안 가스전과 아쉬켈론-엘 아리시파이프라인 http://www.joabbess.com/2011/07/08/natural-gaza-4/      2009년 1월, 이스라엘군이 허용한 어업한계는 그 절반인 3해리(5.5㎞)로 줄었다. 이로써 팔레스타인인들이 가자 해상 가스전 등에 접근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 가자와 이스라엘 연안 가스전 현황   다음 표에서 보는 것처럼, 가자와 이스라엘 연안 전역이 가스전 위에 존재한다고 보아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현재 미국 회사 노블 에너지가 이스라엘 회사들과 공동으로 이 유전들 대부분을 개발하고, 운영한다.     □ 수출용 가스파이프라인 건설과 팔레스타인의 주권박탈   이 가자와 이스라엘 연안 유역의 천연가스는 결국 국제 시장에 나올 것이고, 그 주요한 시장은 팔레스타인, 요르단, 이집트, 터키 등 주변 국가들과 유럽이 될 것이다.   2014년 이스라엘은 레비아탄과 타마르유전에서 나오는 가스판매 계약을 팔레스타인과 요르단과 체결하면서, 2019년 초에 가동 예정인 팔레스타인 제닌 발전소에 20년 동안 4.75 Bcm를 수출하고, 사해의 요르단 공장에 15년간 1.8 Bcm를 수출하기로 결정하였다. 게다가 2017년 현재 이스라엘은 터키와 가스 파이프라인 건설을 협의 중이다.   이스라엘의 파이프라인 건설 계획 Graphic: Israel Ministry of Water & Energy     2017년 6월 15일, 이스라엘, 이탈리아, 그리스, 키프로스는 2025년 완공을 목표로, 동지중해 가스전들로부터 가스를 유럽으로 운송하는 파이프라인 개발계획을 가속화하기로 결정하였다.   유럽은 에너지 공급을 다변화시키려고 애쓰고 있으며, 그리스는 동지중해로부터 유럽으로 운송되는 가스의 통관 허브가 되기를 원한다. 그리스 총리 알렉시스 치프라스는 “우리는 동 지중해에서 경제 협력의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기 위한 대규모 프로젝트 건설에 대한 합의를 실천하기로 합의하였다”라고 밝혔다.   이러한 이스라엘, 이탈리아, 그리스, 키프로스 사이의 파이프라인건설 협정은 유럽이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해안봉쇄를 묵시적으로 승인하는 것이다. 이제 이스라엘은 천연가스 수출국으로 탈바꿈하게 됨으로써 역내 에너지 강국으로 전환될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이스라엘은 천연가스와 석유가 매장된 가자 연안에 대한 지배권을 더욱 확장하고, 팔레스타인인 출입금지정책과 영해와 영토에 대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주권박탈 정책을 한층 강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2017-11-09 | hrights | 조회: 2244 | 추천: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