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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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강대중(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윤동호(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이동우(변호사),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장은주(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1.  다들 알다시피, 습관으로 정착된 행동의 내용과 방향 그리고 그 방식은 고치기 힘들다. 왜 그럴까? 이 물음에 답하기 전에, 우리는 습관을 왜 어떻게 형성하게 되는가? 하는 물음에 먼저 답했으면 한다. 2.  습관은 생명 활동을 원활하게 하는 데 필요한 기초다. 모든 생물체들은 환경에 잘 적응해야만 살아남는다. 환경은 시시때때로 매번 다르게 주어진다. 그런데 개별 생명체는 늘 다르게 주어지는 환경의 내용에 일일이 특별하게 대응할 수도 없고 대응할 필요도 없다. 생명체는 지금 당장 주어진 환경에 ‘전형적으로’ 대응함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유지한다.  이때 ‘전형’(典型)은 흔히 ‘패턴’이라 부르는 것인데, 생물체와 환경 간의 오래된 접촉에 의해 형성된다. 생물체의 행동을 결정하는 데 작동하는 전형은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장구한 진화의 과정을 통해 유전되는 종적(種的)인 전형이고, 다른 하나는 개체로서의 생물체가 자신의 삶을 살면서 변이를 이루어 형성하는 개별적인 전형이다. 후자는 전자의 바탕 위에서 형성될 뿐만 아니라, 달리 보면 전자를 활용해서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종의 생물체들 간에 각기 나름의 다른 행동 방식이 전형적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이러한 행동 방식의 전형은 각 생물체의 행동을 통해 표현된다. 그런데 행동을 통한 표현의 바탕에는 각 생물체의 일반화된 유기적인 구조 ― 행동의 표현이 그때마다 특수한데 비해 일반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 가 있어 그 힘을 발휘한다. 말하자면, 각 생물체의 유기적인 구조가 어떤가에 따라 그 생물체의 행동을 통한 표현이 달라지는데, 양쪽을 매개하는 것이 전형인 것이다.  생명체는 구조-전형-표현이 마치 삼발의 솥처럼 작동하면서 전체적으로 하나의 체계를 이룬다. 이에 생명체를 ‘전형에 따른 구조의 체계’라 부를 수도 있고, ‘전형에 따른 표현의 체계’라 부를 수도 있다. 이러한 이중적 형태의 체계인 생명체는 자신이 한 순간도 빠뜨리지 않고 그 속에 살면서 접속하는 환경을 그 나름으로 구성하는 힘을 발휘한다. 말하자면, 관찰자인 우리 인간이 보기에는 각 생물체들에게 주어지는 환경이 동일한 것 같지만, 각 생물체 자신에게 주어지는 환경은 자신의 체계에 따라 이미 달리 구성된 환경인 것이다. 각 생물체에게 있어서 체계-환경의 쌍은 이원적으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 연동되어 구성함과 구성됨을 주고받는 또 다른 상위의 체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각 생물체에게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다른 생물체들이 자신의 환경을 구성하는 요인이 된다는 사실이다. 각 생물체들은 다른 생물체들을 자신의 환경으로 구성하되, 기존에 자신이 형성한 환경에 원만하게 편입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호 환경 구성이 생물체들 간에 원만하게 이루어지면 공존이 잘 이루어지고, 그렇지 못하면 생물체들 간의 적대적 관계로 인해 체계가 심하게 위협을 받거나 심지어 붕괴되기도 한다.  3.  인간 역시 각자가 나름의 생명적인 체계를 이루고 있어 구조-전형-표현의 활동을 계속해서 해 나간다. 인간 생명은 자신의 환경 구성적 체계적인 위력을 그 어떤 다른 종들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발휘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그 결과, 급기야 기묘한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그것은 제 자신마저 특이한 방식으로 환경으로 삼게 되었다는 점이다. 자신의 생명 활동을 제 스스로 뒤돌아보아 자신의 생명 활동 자체를 또 다시 새로운 생명 활동을 해 나가는 데 필요한 환경으로 구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소 어렵게 말하면, 인간 생명은 ‘재귀적인 환경 구성적 활동’을 발휘하는 데서 그 특유성을 갖는다.  이러한 재귀적인 환경 구성적 활동 덕분에 자신이 지닌 생명의 힘을 발휘해서 환경에 대한 행동으로 표현할 때, 인간은 그 표현에 자신의 생명활동과 그 결과에 대한 앎을 담아낼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생명의 힘을 발휘해서 행동으로 표현할 때, 그 표현에 자신의 생명에 대한 앎을 담아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앎은 인간 특유의 앎으로써 여느 다른 일반적인 생물체들이 갖는 앎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일반 생물체들의 앎은 자신의 생명 체계 속에 닫혀버린 앎이고 그래서 사실 연계에 포섭된 앎이지만, 인간 고유의 앎은 자신의 생명 체계로부터 열려 있는 앎 ― 물론 이 열림의 정도는 인간 생명 체계 내에서 볼 때 실제로는 상대적으로 더 많이 또는 더 적게 실현될 것이다. ― 이고 사실 연계를 넘어선 의미 상황에서의 앎이다.       자신의 생명 체계로부터 열려 있는 이 같은 앎을 통해 인간만의 활동인 의미 생산이 발생한다. 따라서 인간이 생산하는 의미는 또 다른 차원에서 그 나름의 구조적인 체계를 형성하되, 자신의 체계 속에 닫혀있지 않고 계속해서 새롭게 열려나가는 구조적인 힘을 발휘한다. 그리고 그렇게 생산된 의미들을 인간 생명의 체계는 또 다시 자신의 환경으로 재구성하여 편입시킨다.    의미 생산의 과정과 그 결과들의 응축 및 환경 구성에의 재활용 등의 전반적인 과정을 일컬어 역사라 할 것이다. 그래서 인간만이 역사를 지닌 것이다. 재귀적 생명 활동을 통해 제 스스로를 새롭게 재구성해 나가는 힘을 발휘하되, 그 자기 재구성의 과정을 통해 생산되는 의미를 자신 바깥으로 표현해 냄으로써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들이 그 의미를 각자의 환경으로 재구성해 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역사적 인간’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인간 역사에서 무슨 필연적인 법칙이 존립한다거나 그 법칙을 찾아낸다거나 그 법칙을 모두에게 적용하려 한다거나 하는 일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역사적 인간이란 처음부터 역동적으로 열려있는 존재이고, 그 역사적 인간의 삶을 통해 형성될 뿐만 아니라 그런 역사적 삶의 환경으로 주어지는 역사 역시 역동적으로 열려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역사적 인간을 가장 적실하게 드러내는 것이 바로 언어다. 인간의 언어활동은 반드시 의미의 열린 구조적 체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언어는 언어가 아니다.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그 언어가 지시하는 의미로서의 환경을 서로 주고받음으로써 삶을 유지한다는 것을 뜻한다. 사진 출처 - pixabay 4.   이제 습관으로 되돌아오자. 생물체 일반에 있어서 습관은 행동의 습관이다. 행동은 환경 속에서 환경을 향해 이루어지는 구조적으로 작동하는 전형에 의거한 표현이다. 거꾸로 보면, 행동의 표현을 일정한 전형에 따라 해 나가는 것이 습관이다. 그래서 습관은 생명 활동을 원활하게 해 나가는 데 필수적이다.   이처럼 애초 생명체들이 자신의 생명 활동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형성 ‧ 발휘하는 습관은 이제 인간의 단계에 이르러 그 내용이 바뀐다. 인간은 생명체로서 기본적으로 형성 ‧ 발휘하는 습관뿐만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역사성에 의거해서 의미를 형성 ‧ 발휘하는 습관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습관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 습관을 통해 자신의 생명활동이 원활하게 유지되면서 발휘되고 또 강화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간 고유의 역사성에 의거한 의미 영역에서 구조적으로 형성되는 습관 역시 마찬가지다. 개개 인간들은 이 의미 영역에서의 습관을 통해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존재가 더 원활하게 유지되면서 발휘되고 또 강화될 수도 있다고 여긴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여느 생물체들과 달리 의미를 생산해 내어 그것을 자신의 환경으로 삼는 인간 생명의 구조적 체계는 닫혀 있는 것이 아니라 열려 있다. 이러한 인간 생명의 특이한 열림은 그 생명의 환경 역시 열려 있어 여느 생물체들의 환경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그 융통성과 가변성이 크다는 것을 일러준다. 아울러 가변성이 큰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으려면 기존의 생명 활동의 습관을 필요에 따라 바꾸어 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일러준다.     5.  길게는 70년, 짧게는 30년 묵은 적대관계를 청산하려는 모처럼 이루어진 비핵화와 평화를 향한 역사적 기운을 일구어낸 북미 관계가 최근 들어 답보 상태를 보이는 모습이다. 서로를 믿을 수 없다는 식으로, 미국에서는 ‘비핵화의 목록과 프로그램’을 먼저 내놓으라고 하고, 북한에서는 ‘종전선언을 통한 체제안정의 기초’를 먼저 보장하라는 주장으로 맞서는 형국이다.  이러한 상호 불신의 바탕에는 그동안 형성되어 온 역사적인 습관들과 그에 따른 투쟁이 작동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환경이 변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데도, 그동안의 환경에서 형성되어 오랫동안 생존에 유리하다고 여겨온 습관이 새로운 환경에 반기를 들고 있는 것이다. 함부로 습관을 바꾸면 생명활동에 지장을 가져올 수 있음은 물론이다. 그렇지만, 환경이 크게 바뀌어 기존의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습관을 형성해야 한다고 판단되면, 기존의 습관에서 이탈하여 새로운 습관의 길을 과감하게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모든 생명체들과 인간생명 공동체들은 파멸할 수밖에 없었다.   인류 문명을 일구어온 북반구 온대에서 폭염이 지속되면서 지구 온난화의 거센 파고가 지구적 삶 전체를 위협하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공존의 환경 형성을 향한 인간 생명체의 체계적인 구조의 혁신이 요구된다. 겨우 이백 여년에 걸친 생산력 중심의 기술 산업주의의 삶과 그를 둘러싼 제국주의적 지배 중심의 경쟁이 이처럼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을 초래한 것이다. 제국주의적인 헤게모니를 통해 역사적 의미의 삶을 구축하고 영위하고자 하는 세력의 그 무서운 습관은 언제쯤 역사의 무대에서 영구히 사라질 것인가? 대대적인 습관의 개변이 요구되는 데도 기존의 삶을 유지해 온 습관의 역습은 강고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 역습을 철저히 경계하면서 용기 있게 극복할 수 있는 정치 외교적 실천의 지혜를 짜내야 한다.
2018-08-16 | hrights | 조회: 1085 | 추천: 4
윤영전/ (사)평화연대 이사장  한반도(북은 조선반도)는 73년이란 최장기 분단국이다. 해외에서 흔히 “코리아”하면 북이냐, 남이냐를 따져 물을 때에는 언제나 고역스럽다. 세계 210여 개국에서 나의 조국이 가장 오랜 세월동안 분단국이라는 사실에 마음이 아프기만 하다.  한반도 분단의 근원은 오랜 일제의 조선침략 100년 전, 을사늑약으로부터 그들의 패권주의가 아세아 침략에 이르렀을 때다. 우리 3.1혁명 6.10만세 학생의거 등 숱한 저항도 있었지만 결국은 그들에게 35년이란 압제 하에서 수난을 당해야만 했었다.  나라 잃은 설움에 뜻있는 많은 애국 독립지사들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내 던져 조국광복과 해방을 위해 순국하셨다. 32세의 안중근 의사와 24세의 윤봉길 의사는 사랑하는 처자식을 두고, 이등박문과 백천을 대낮 행사장에서 척살하기도 하였다.  돌아보면 필자는 일제 침략으로 이어진 남북분단에 살아와야만 했다. 반백년 전, 65년대 초반에는 제네바협정에 의해 그들은 월남과 월맹으로 17도선 나뉘었다. 당시 통킹만 사건을 일으켜 미국이 동남아 패권을 위한 월남에 파견되었다. 이때 박정희 정권은 한국전쟁에서 5만여 미군이 전사로, 월남전에 지원 파견을 결정하였다. 필자는 제대말년 65년 초에, “가면 다 죽는다.”는 월남전에 미국의 용병으로 7개국이 함께 참전을 했었다.  65년부터 10년간 연인원 총 33만 여명이 참전해 6천여 명의 전사자가 속출했다. 부상자도 1만 5천명, 당시 17도전선 월맹과 월남으로 나뉜 남베트남 전쟁은 한국전과는 다른 양상이었다. 사시사철 우기와 건기로 나뉜, 베트남은 정글전을 펼치고 있었는데 많은 고엽제 전우까지 양산되었다. 소위 월맹 정규군이 아닌 월남 내 베트콩세력에 연전연패를 거듭해, 미국과 참전국이 패전해, 통일되어 평화를 찾았다. 아주 오래전에는 남북 예멘과 동서독도 어려운 여건 하에서도 하나의 나라로 통일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그간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었다 하지만, 바로 외세에 의해 남북이 분단되었다. 동포들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이라 노래하지만 아직도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필자는 50년대 4월 혁명에도 참여하고 반민주화 투쟁도 했었지만, 군사반란으로 자주통일을 이루지 못했다.   우리의 꿈인 평화통일을 왜 이루지 못하고 있을까? 국민들은 통일에 얼마나 다가가고 있는가. 남북 8천만 동포가 진정 평화와 통일을 원하고 있는가? 집권한 정부마다 지역과 각 계층에 따라 다른 점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간절한 염원이고 소원인 평화통일은 우리의 절대적인 최대의 과제이고 꿈이기도 했다.  헌법에도 명시한 평화통일은 정부와 국민 모두 부단히 진력해 이뤄내야 한다고 되어있다. 그런데 그동안 보수집권이 반백년이고 진보집권은 겨우 10년이었다. 이제는 지난해 천칠백 만이 뜻을 모은 적폐청산, 드디어 평화통일을 이뤄낸다는 명제였다. 우리에게 주어진 평화통일은 우리의 절체절명의 기회이고 실천해야 한다.   우리는 지난 조상이 물려준 하나 된 조국인데, 일제 35년에서 우리 힘으로 해방을 맞이하지 못했기에 외세가 이 땅에 들어와 전리품처럼 되었다. 남북위정자들의 갈등으로 통일정부를 세우지 못한 게 통한이었다. 오래전에 남북은 각각 유엔의 회원국으로 가입되었으나 여전히 변방이었다.  그간 6.15와 10.4선언으로 평화통일을 선언하기도 했었다. 반세기만에 남북협력이 이뤄지고 올림픽도 함께해냈다. 금강산에 2백만 관광이 이뤄지고 개성공단에 2만5천명이 함께 일하기도 했다. 이산가족상봉이 이뤄지고 남북이 평화통일에 다가가는 모습이 그간 10여 동안 이뤄져, 이대로 가면 통일은 가까운 듯 했었다.  그러나 수구 반통일 세력이 다시 집권해 10년이나 교류가 중단되었다. 이번에 추석을 기해 우여곡절 끝에 재개될 이산가족상봉은 지난 상봉과 같이 눈물드라마를 연출할 것이다. 생전에 단 한번이라도 만나겠다는 이산가족상봉은 인도주의적으로 계속되어야 한다. 한 동포와 혈육이 만나지 못할 이유는 궁색하기만 할 것이다. 사진 출처 - 평화연대  고질적인 남북갈등은 물론, 남남갈등에 동서갈등까지의 작태는 분단조국의 아픔을 더해오고 조국의 현실과 미래를 단순히 정권안보에 편승해 간다면 이는 준엄한 역사의 심판을 받을 터이다. 그리고 그에 따른 평화의 기운이 올 것이다. 지구촌에서 최장기 분단국의 너울을 쓰고 있는 한반도, 분단아픔에서 얼마나 더 살아가야 하나! 진정 우리의 소원이고 꿈인 평화통일을 이루어 내야만 한다.   그래도 우리의 조국 남북 한(조선)반도에 드디어 평화통일의 장이 열리고 있다. 전쟁으로 힘겨루기에 열중하던 주변 강대국들이 늦었지만 한반도 평화통일에 많은 합의와 약속을 이뤄내고 있다. 분단 70년 만에 찾아온 한반도에 진정한 봄기운이다.  올 초에 아주 어렵게 이루어진 동계올림픽 성사는 세계평화의 기운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이어진 오랜 원한의 갈등 탓에 짐작하기도 어려웠던 정상들의 만남은 세계 평화의 물결로 넘실될 것이다. 소위 세계 패권 대국의 강대국들이 분단국 정상들과 회담은 세계평화에 기여할게 분명할 터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이번 찾아온 한반도 평화통일 기운을, 여야 정치권은 물론, 분단조국에 평화와 통일을 염원한 지도자와 국민들이 다 같이 이뤄내야 한다. 만약에 이에 대한 부조리한 비판의 지도자와 국민들이 있다면 준엄한 심판을 받을 터이다.   기회는 그리 쉽게, 자주 오지 않는다. 분단조국 73년, 내 나이 팔순에 접어든 이때에야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럽지 않기를 간절하게 기원한다.
2018-08-16 | hrights | 조회: 927 | 추천: 4
홍미정/ 단국대 중동학과 조교수  예루살렘 이슬람교 재단에 따르면, 지난 7월 한 달간 이스라엘 정착민 3천 900여명이 예루살렘 소재 이슬람 성지 알 아크사 모스크 복합단지에 쳐들어왔다. 이 정착민들은 알 아크사 모스크 복합단지 마당에서 예배드리는 무슬림들 사이에 끼어들어, 이곳이 3천 년 전 건설된 솔로몬성전 터였다는 신화를 떠벌리고, 탈무드를 큰소리로 읽기도 하는 등 무슬림들을 자극했다. 이들은 솔로몬성전을 재건한다는 명분으로 알 아크사 모스크 복합단지를 대체하는 유대교 성전 건설을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이스라엘은 알 아크사 모스크 복합 단지 주변에 터널을 파는 등 이 단지를 붕괴 위험에 빠뜨리는 공세적인 정책을 강화하고 있다. 알 아크사 모스크 복합단지 사진 출처 - PASSIA제공, http://www.passia.org/  7월 19일(목), 이스라엘 의회는 ‘민족 국가 법’을 통과시킴으로써, 예루살렘을 포함한 역사적인 팔레스타인 땅 전역에 대한 유대화 정책에 정점을 찍었다. 이 법은 다음 세 가지 원칙을 천명하였다. 이스라엘의 ‘민족 국가 법’ 1. 이스라엘 땅(역사적 팔레스타인)은 유대인들의 역사적 고향이다. 이곳에 이스라엘 국가가 건설되었다. 2. 이스라엘 국가는 유대인들의 고향이다. 여기서 유대인들은 천부적, 종교적, 역사적 자결권을 성취한다. 3. 이스라엘 국가에서 민족 자결권을 행사할 권리는 유대인들에게만 있다. 게다가 통합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 이스라엘의 공식 언어는 히브리어, 이스라엘은 유대인 이민과 귀환을 위해 개방될 것이며 유대 정착촌 개발을 민족의 가치로 간주하며, 유대 정착촌 건설과 강화를 고무시키고 촉진시키는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명시하였다.  이 법은 예루살렘을 포함한 역사적인 팔레스타인 땅의 전면적인 유대화를 강화하면서, 아랍-이슬람 문화를 일소하는 중요한 토대로 작용할 것이다. 유대화 정책의 핵심 대상에는 8세기 초에 건설된 예루살렘 알 아크사 모스크 복합단지가 있다.  예루살렘은 예언자 무함마드와 초기 무슬림들의 기도 방향이었으며, 알 아크사 복합단지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메카로부터 예루살렘으로 알 부라끄라는 날개 달린 인면 말을 타고 밤의 여행을 하였고, 하늘로 승천했다고 전해지는 장소(바위돔 모스크 터)’이기도 하다. 알 부라끄 모스크 입구 사진 출처 - 필자 제공  이번 여름 예루살렘 현지조사에서, 필자는 알 아크사 모스크 복합단지 내 규모가 작지만, 매우 특별한 알 부라끄 모스크를 방문하였다. 이 모스크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밤의 여행’을 기념해서 14세기에 건설되었다. 이 모스크는 알 아크사 모스크 복합단지의 서쪽 벽, 일명 알 부라끄 벽(통곡의 벽) 안쪽에 붙어있다. 이러한 알 부라끄 모스크의 존재는 서쪽 벽이 무슬림들에게 매우 소중한 문화유산이라는 징표다. 알 부라끄 말 고리 사진 출처 - 필자 제공  7월 27일(금), 알 아크사 모스크 금요일 예배에서, 알 아크사 모스크 이맘이며, 이슬람 최고 위원회 의장인 셰이크 아크리마 사브리(Dr. Sheikh Ekrima Sabri)는 지속적으로 공격당하는 알 아크사 모스크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설교하였다. 셰이크 아크리마 사브리의 금요 설교  알 아크사 모스크는 이스라엘 공격의 표적이 되고 있으며, 며칠 전에 이스라엘이 땅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알 아크사 모스크 서쪽 벽 돌 몇 개가 떨어져 나갔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땅을 파헤치는 이유는 3천 년 전 건설된 솔로몬 성전 터라는 허황된 주장을 입증하는 단 하나의 돌이라도 찾기 위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진짜 이유는 알 아크사 모스크를 제거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알 아크사 모스크를 보호하신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무슬림들은 알 아크사 모스크를 방어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알 아크사 모스크는 거래 대상이 아니다. 아무도 알 아크사 모스크에 대해서 협상할 권리가 없고, 알 아크사 모스크 땅을 단 한 뼘도 양도하지 못한다. 알 아크사는 우리의 교의의 일부이며, 여러 세대에 걸쳐 오늘날까지 내려온 유산이다. 우리 팔레스타인인들은 여전히 높은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 점령세력은 ‘민족 국가 법’을 제정함으로써 예루살렘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억압적인 조치들을 부과하고 있다. 예루살렘 팔레스타인인들은 결코 자신들의 합법적인 권리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알 아크사 땅을 단 한 뼘도 넘겨주지 않을 것이다. 셰이크 아크리마 사브리 사진 출처 - 루바바 사브리 제공  이날 12시 30분부터 진행된 셰이크 아크리마 사브리의 금요 예배 설교가 끝난 직후, 이스라엘 군대는 최루 가스총을 쏘는 등, 알 아크사 모스크 공격을 시작하면서 모스크로부터 무슬림들을 쫓아내었고, 일부 무슬림들을 모스크 내부에 가두고 문을 폐쇄했다. 쫓겨난 무슬림들은 모스크 입구에서 계속 기도회를 개최하였다,
2018-08-07 | hrights | 조회: 2149 | 추천: 9
이문영/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  지난 6월 14일부터 19일까지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의 <러시아 극동 연구팀>의 일원으로 현지답사를 다녀왔다. 연구팀은 러시아극동역사연구소와 “Small East Asia in Russian Far East"란 주제 아래 인문사회분야로는 최초로 한·러 공동연구를 진행 중이다.  소련이 붕괴되고 러시아의 문이 활짝 열린 후, 극동은 가능성과 기회의 땅으로 주목받았다. 세계 육지 면적의 1/20, 러시아 면적의 1/3, 한반도 면적의 28배에 해당하는 이 거대한 땅은 중국과는 4300km, 북한과는 19km에 걸쳐 국경을 접하고, 일본과는 사할린과 쿠릴열도를 사이에 두고 인접해 동아시아 국가 간 교차로에 해당한다. 극동 러시아 지역 사진 출처 - 뉴시스  러시아 극동은 1980년대 말 한국 정부의 북방정책이 본격적으로 개시된 이래, 한반도-아시아-유럽 루트의 핵심매개로, 통일한반도와 동북아 평화의 미래거점으로 지속적인 관심의 대상이었다. 푸틴이 ‘신동방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면서는 석유, 가스, 석탄 등 막대한 에너지 자원의 동아시아 보급기지, 농업개발협력을 통한 동아시아 식량 보급지, 시베리아횡단철도를 확대한 철도망, 전력망, 송유관, 가스관이 교차하는 새로운 교통물류의 전진기지로 주목받았다. 남·북·러 삼각경협, 중국 동북3성-극동 연계개발, 러·일 에너지 브릿지 프로젝트 들이 잘 보여주듯이, 러시아 극동이 가진 가능성의 핵심은 이곳이 남·북·중·일·러 간 양자/다자적 접촉을 필연화, 전면화한다는데 있다.  이런 의미는 현재에 국한되지 않는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조·중·일·러가 마주한 러시아 극동은 인접국들이 전면적으로 조우하며 그 속에서 국경, 민족, 국민국가와 같은 근대적 개념이 실험된 역동적 공간이었다. 러시아 극동을 구성하는 문명의 핵심은 하나의 국가성 속에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국가들이 충돌하는 ‘초국가적’ 접촉과 충돌 속에 형성되었다. 연해주, 하바롭스크, 사할린의 주권 교체, 사라진 극동공화국의 운명, 북방 원주민의 식민화 과정 등에서 잘 알 수 있듯이, 이곳은 국경, 민족, 국민국가와 같은 근대적 패러다임의 유효성이 실험된 공간이면서, 동시에 근대성의 폭력과 한계가 목도된 공간이기도 하다.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러·일, 한·중, 북·러 역사영토논쟁이 역설적으로 대변하듯이, 러시아 극동은 조선이면서, 러시아면서, 중국이면서, 일본이었고, 따라서 그 어느 것도 아니었으며, 동시에 그 이상이었다. 그 공간은 근대적 팽창의 무한공간이자, 그 위반의 주목할 만한 사례로, 공간적으로 서양과 동양 사이, 시간적으로 근대와 비(非)근대, 가치적으로 문명과 야만 사이에 존재했다. 따라서 러시아 극동은 동아시아의 초국가적 공존 구상에 생생한 사례가 되어줄 수 있다. 그러한 역사를 몸으로 재현하는 존재가 바로 러시아 극동 내 남·북·중·일 이주자들이다.  현재 러시아 극동에는 고려인과 사할린 한인, 중국 노동자와 조선족, 북한 노동자가 함께 공존한다. 극동 거주 고려인(한인)의 총수는 연해주 3만 명, 사할린 3만명, 하바롭스크 1.5만명, 캄차트카 2천명을 포함해 약 8만 명이다. 중국 노동자의 경우, 불법이주가 많아 정확한 수치 파악이 힘들지만, 수십만을 상회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략 3만 5천 명으로 추산되는 러시아 전체 북한 노동자 중 약 1/3, 즉 1만 명가량이 극동의 건설, 어업, 농업 현장에서 일하고 있다. 주요 탈북 루트 중 하나인 극동의 특성으로 인해, 물론 정확한 수치 파악은 불가능하지만, 탈북 난민의 존재도 여기 더해질 수 있다.  이처럼 이곳 에스닉 코리안 공동체의 경우 다원화와 내부 분화가 활발하다. 즉, 고려인, 사할린 한인, 조선족, 북한노동자, 탈북난민, 한국인처럼, 민족으로는 동일하나, 다른 국적의, 따라서 다른 역사, 다른 문화를 가진 다양한 갈래의 한민족이 하나의 공동체를 구성한다. (고려인은 1937년 스탈린 강제이주 시 중앙아시아로 떠났다가 소련 시기 귀환한 고려인과 소련 붕괴 후 귀환한 고려인으로 또 나뉜다.) 이 공동체 속에서 같은 민족정체성과 남·북·중·일·러가 교차된 다국적, 다문화 정체성 사이의 경합을 보다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또 국적국의 위상에 따라 현재 이 공동체 내부에 어떤 위계와 서열, 그로 인한 갈등과 반목이 가시화될 조짐이 포착되기도 한다. 한민족 공동체의 이 다양한 일원들은 중국인이나, 다양한 CIS 출신 이민자들과 목하 경쟁 중이다. 한민족 공동체, 나아가 러시아 극동의 이 ‘작은 동아시아’의 현재를 따져보고 미래를 가늠하는 일이 동아시아 공동체에 대한 각종 구상의 현실성을 따져볼 시금석이 되어줄 수 있을까. 관심을 갖고 지켜볼 일이다.
2018-08-01 | hrights | 조회: 1600 | 추천: 4
정보배/ 출판 기획편집자  벌써 여름이다. 제주에 내려올 때만 해도 아직 외투를 벗지 못했고 어승생 근처에서 눈썰매를 탔다. 서울에서 산 28년 동안 가장 추운 겨울이었고 제주 역시 그랬다고 한다. 5개월은 그리 길지 않은 기간인데 여러 일을 겪다 보니 벌써 제주에 몇 년은 산 것 같은 기분이다.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제주에 이주해 적응 중이니 ‘(외지인이) 제주에서 (적응하며) 사는 이야기‘를 하는 수밖에. 회사에 입사하면 처음 몇 달간 가장 질문이 많이 생긴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곳에 이사 와서 적응하려고 신경 써서 눈귀를 밝히고 있는 이주 초창기에 가장 많은 것을 듣고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가족이 집을 얻은 마을은 애월읍 상가리이다. 마을에 변변한 슈퍼마켓도 없고 관광객이 들를 만한 곳이라고는 카페 하나, 음식점 하나 정도. 그러니 외지 사람들은 거의 다니지 않는 조용한 시골마을이다. 마을에서 매해 포제를 지내는 포제단과 400년 된 보호수가 집 건너편 언덕에 있고, 집 근처 리사무소로 걸어가다 보면 한라산이 훤히 바라보인다. 집에서 시우 학교를 가려면 리사무소 마당을 가로질러야 한다. 최근 폭염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매일 아침 학교에 걸어갔는데 거의 그 시간에 할머니들은 경로당으로 걸어오시고 할아버지들은 나무 밑 의자와 정자에 앉아 계신다. 열심히 인사를 하면서 다니긴 하는데 우리 얼굴을 기억하시는지 어떤지 잘 모르겠다. 학기 초에는 한 할아버지가 시우에게 인사 잘한다고 용돈을 주시기도 했다.  시우가 입학한 학교는 외지인들에게 사진 찍기 좋은 학교로 유명한 더럭초등학교이다. 작년까지 분교였으나 올해부터 초등학교로 승격됐다. 벌써 몇 해 전 전교생이 60명을 넘었으나 전교생이 100명을 넘은 올해 초등학교가 됐다. 제주행이 정해지고 난 뒤에는 어느 지역으로 갈지, 어떤 집으로 갈지를 결정해야 했다. 친구가 사는 애월을 선택한 후에는 아이가 학교에 걸어갈 수 있는 거리의 집을 구하느라 애를 먹었다. 그 과정에서 가장 피하고 싶은 학교가 더럭초등학교였다. 가장 큰 이유는 학교가 한쪽 면을 제외한 3면이 도로로 둘러싸여 있고 그 도로들로 대형 덤프트럭이 수시로 지나다닌다는 것과 덤프트럭들보다 더 많은 수의 관광객이 학교를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든다는 점이다. 나의 기준으로는 학교 주변환경이 위험하고 번잡한데다 학교 부지도 상당히 작아서 늘어나는 학생수를 수용할 확장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그랬지만 결국 구한 집은 그 학교를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상가리 집이다. 학교에 대한 걱정스럽고 못마땅한 부분들은 전혀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지만, 집에서 학교까지 아이 걸음으로 10분이면 충분히 걸어갈 수 있는 길은 넓고 예쁘다. 이른 봄부터 동백 꽃길이었다가 동백이 질 무렵 벚꽃이 피고 버찌가 익어 떨어지면 수국이 피기 시작한다. 더럭초등학교 사진 출처 - 경향신문  평소 마을공동체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집과 직장이 멀리 떨어져 있는 도시 노동자에게 과연 그것이 가능한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공동육아를 할 때도 조합원들이 어린이집이 있는 그 동네에 살지 않고서 마을과 어울려 공동육아를 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도시 노동자들이 각자 사는 곳에서 마을공동체 생활이 가능하려면 말 그대로 시간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 직장인들의 평균 퇴근 후 가질 수 있는 여가시간을 고려하면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 않나 싶다. 읍내도 아니고 면사무소가 있는 곳도 아니고 리사무소가 있는 곳. 오래전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있던 곳. 과연 제주 시골의 마을공동체란 어떤 것인지 궁금했다.  이사하고 일주일 내에 옆집 뒷집에 인사는 했는데 경로당에 인사를 하러 가야 하는 건지, 이장님한테 이사 왔다고 인사를 해야 하는 건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2주가 흘렀다. 마을공동체는커녕 동네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나날이 흐르다 딸의 입학식 날이 되었다. 더럭초등학교 승격 축하식도 입학식날 열렸다. 입학식 전후로 여러 방송국에서 시골 분교가 초등학교가 된 더럭의 사례를 취재해 갔다. 아이들 수가 급격히 줄어든 요즘 학생수가 꾸준히 늘어나 분교에서 초등학교로 승격된 시골 학교는 정말 특이한 경우이다. 입학식을 마치고 리사무소 옆 마을도서관에 들렀다. 이사 와서 갈 곳 없어 마을 이곳저곳 산책할 때 들렀던 곳인데 작지만 아이들이 책 읽기에 편안하게 잘 정리된 공간이었다. 그날은 사서가 있어서 마을도서관(정식 명칭은 상가리 새마을 작은도서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올해 리모델링을 했고, 사서들이 하루씩 자원봉사로 활동하고 있는데 최근 한 명이 그만두어 본인이 이틀을 도서관에 나와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이사 온 뒤 집 근처인 이 도서관 옆을 오가며 시우가 이곳을 마음에 들어 해서 나도 모르게 “그럼, 제가 하루를 맡아도 될까요?”라고 겁 없이 사서를 자청하게 되었다. 이 작은도서관이 올해 어떤 일을 꾸미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2018-07-25 | hrights | 조회: 1023 | 추천: 5
김재완/ 방송대 법학과 교수  양심적 병역거부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사법농단이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 양심(良心)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 선과 악을 구별하는 도덕적 의식이나 마음씨를 말한다. 이 양심이란 말이 우리나라 헌법에 세 차례 나온다. 첫 번째는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는 것(제19조), 두 번째는 국회의원은 국가이익을 우선하여 양심에 따라 직무를 행한다는 것(제46조 제2항), 세 번째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는 것(제103조)이다. 이처럼 헌법은 양심의 자유와 직무의 양심성을 명문으로 규정하고 있다. 서울 서초동 대법원 법원 전시관 안에 법관의 양심과 독립 등을 명시한 헌법 제103조가 적혀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어원적으로 양심은 그리스어 ‘suneidesis’로부터 유래하는데, 이는 ‘함께 안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때 함께 안다는 것은 인간이 하느님과 함께 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가톨릭교회는 양심을 ‘하느님의 목소리’로 이해하고 있다. 인간은 양심 속 깊은 데서 법을 발견하고, 이 법은 인간이 자신에게 준 법이 아니라 인간이 거기에 복종해야 할 법이며, 이 법의 소리는 언제나 선을 사랑하며 행하고 악은 피하도록 사람을 타이르고 필요하면 ‘이것은 행하고 저것은 피하라’고 마음의 귀에 들려주는 것이라고 한다(사목헌장 16항).  우리 헌법에서 말하는 양심은 어떤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함에 있어서 그렇게 행동하지 않고는 자신의 인격적 존재가치가 파멸되고 말 것이라는 강력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로써 절박하고 구체적인 양심이라고 한다. 그리고 양심의 자유에는 이러한 양심 형성의 자유와 양심상 결정의 자유를 포함하는 내심적 자유뿐만 아니라 소극적인 부작위에 의하여 양심상 결정을 외부로 표현하고 실현할 수 있는 자유, 즉 양심상 결정에 반하는 행위를 강제 받지 아니할 자유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므로 양심의 자유는 기본적으로 국가에 대하여, 개인의 양심의 형성 및 실현 과정에 대하여 부당한 법적 강제를 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소극적인 방어권으로써의 성격을 가지는 것이라고 법적 의미의 양심을 설명하고 있다. 양심의 의미에 대해서 윤리적, 종교적, 법적 표현이 서로 조금씩은 다르지만 옳고 그름의 분별이라는 지향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상통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개인의 종교적 신념과 양심에 따라 직접 총을 드는 등의 병역을 거부하고 대체복무를 하는 것과, 실정법에 따른 병역의무를 이행하는 것 모두가 개인의 옳고 그름의 분별에 따른 양심의 결과이다. 그중 어떤 것을 선택하든 국가와 사회는 개인의 양심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한편 법관에게 요구되는 양심은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내면적 기준과 외적 기준을 더욱 강하게 요청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우리 헌법은 판결을 함에 있어 법관에게 헌법과 법률에 의한 양심을 요구한다. 다시 말해 법관의 양심은 아주 엄격한 법의 잣대로 가늠되는 것이다. 법관의 판결이 누가 보더라도 자의적이거나 불편부당하고, 권력에 야합한 결과라면 이를 두고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심판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더욱이 현대의 법치국가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과 생명이 그들의 양심에 따른 판단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은가? 실제 수많은 조작사건과 노동자에 대한 판결들에서 그러한 결과들이 빚어지지 않았던가. 따라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사법농단은 헌법과 법률에 따른 법관의 양심을 위배한 너무도 중대한 헌법위반이며 범죄인 것이다.  일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매사를 양심에 따라 옳고 그름을 분별하며 산다는 것이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양심에 따라 사는 것은 종국적으로는 인류공동체의 평화로 연결된다. 양심의 목소리는 그러한 지향을 가리키는 나침반인 것이다.
2018-07-19 | hrights | 조회: 1293 | 추천: 4
정재원/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사회주의 체제의 종언과 시장경제체제로의 전환은 필연적으로 생산력의 급격한 하락 등으로 인한 구조적 실업, 이에 따른 전반적인 빈곤화, 대규모 해외 이주 등의 사회 현상, 그리고 사망률이나 평균 수명 등 거의 모든 사회 지표의 악화, 사회양극화와 지역 간 발전의 불균형 등의 문제들을 야기하였다. 특히 체제전환으로 인한 다양한 사적 행위자들의 등장은 매우 흥미로운 주제였다. 그런데 심각한 혼란기에 사적 행위자들의 압도적 다수는 비공식적이고 반범죄적인 영역에서 이윤을 창출했고, 그러한 왜곡된 공간의 형성을 구조화했다. 아직 시장경제체제의 규칙이 제대로 만들어지지도 않았고, 작동하지도 않는 상황 속에서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거나 미미했던 인간을 대상으로 한 끔찍한 이윤 창출 구조도 만들어졌다.   그러한 구조의 가장 심각한 착취 구조는 바로 러시아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성매매 산업이었다. 사회주의 시절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성산업은 불안정한 시기에 최고의 이윤을 남기는 산업으로 여겨졌고, 사회주의 시절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자본에 기반한 조직화된 폭력 집단들이 우후죽순 대규모로 만들어지면서, 지배 엘리트의 비호 하에 러시아 내에서는 물론 외국 조직폭력집단과 연계하여 해외 성매매 산업 시장에까지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법적으로는 불법인 데다가 여타의 자본주의 국가들에서와는 달리, 소위 집결지 형태의 성매매 지역이 만들어지지는 않았지만, 독립한 공화국들이나 러시아 지방으로부터 여성들이 공급되는 등 성산업은 확대일로에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엄청난 수의 러시아 여성들이 러시아 내에서는 물론 외국에서도 심각한 인권 유린을 당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런데 너무나 창피하게도 한국인들은 그 어떤 국가 국민들보다 추악한 방법을 통해 아픈 러시아 사회를 파고들었다. 이미 동남아 제국가들에서와 중국 각 지역에서 악명을 떨쳐 온 한국인들은 특히 가난하고 불안정한 국가들에서는 예외 없이 막대한 뇌물을 들여가며 현지 범죄 조직들과 부패 관료, 부패 경찰들의 비호 하에 성매매 업소를 운영하고 있다. 이들의 주요 수입원은 놀랍게도 섹스 관광객보다는 이들 국가에 진출한 한국 기업 지상사들이다. 한국 기업이 있는 곳에 한국 룸살롱이 있다는 말은 위험천만한 국가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의 성접대 문화는 빈곤한 국가들에서는 성매매가 저렴하다는 이유로 한층 더 노골적으로 그리고 공공연하게 이루어진다. 사진 출처 - 게티이미지뱅크  가난한 국가 내에서도 가장 열악한 상황에 놓여 있는 가난한 여성들의 처지를 극단적으로 악용하여 성적으로 착취하는 작태는, 먼저 고려인으로 인해 한국과 한국인이라는 것에 호감을 갖고 있는 중앙아시아 국가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등으로 진출한 한국 기업들을 따라 한국식 성매매 업소들이 등장하였는데, 이러한 형태는 이들 지역에서는 매우 낯선 것이었다. 상대적으로 더 위험했던 러시아에서는 이러한 구조가 다소 늦게 만들어졌는데, 처음에는 러시아 여성들을 주로 데려 왔으나, 이들이 남성의 총체적인 성적 노리개로 만들어지는 동양식 기생의 역할을 하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보이며 모집이 잘 되지 않았다. 그러자 한국 성산업가들은 중앙아시아의 한인 성매매 업소로부터 여성들을 불법적으로 송출 받아 영업을 하는 등, 말 그대로 국제적인 범죄 집단화되었다.  이러한 성매매 업소들은 기본적인 간판도 달지 못 한 채 지하 창고 등을 개조하여 영업을 했지만, 교민 숫자에 비해 과도할 정도로 여성들이 많이 공급되어 있었다. 이는 어마어마한 한국인 남성들이 성매매를 하는 공간이 되었음을 의미했다. 기업인이나 교민 사업가, 출장객이나 관광객들은 물론 공관 및 공관으로 찾아오는 관료들 역시도 이들 불법 성매매 업소의 주요 고객이었다. 특히 성매매는 한인 여행사-한인 호텔-한인 가라오케가 하나의 카르텔로 조직화 되어왔다는 특징이 있다. 현재 김영란법 등으로 인해 일부는 출입에 제한이 생기는 등 변화의 조짐도 있지만, 특히 한인 가라오케에서의 1차와 한인 호텔에서의 2차와 같은 구조는 여전히 작동 중이다.    그런데 너무나 창피하게도 이러한 추악한 여성 착취와 부패 고리를 폭로하고 시정해 나가야 할 언론인들은 말 할 것도 없지만, 러시아를 사랑하고 러시아와의 관계를 소중히 여긴다는 지식인들과 전문가들이 오히려 그러한 구조에 대해 방조를 넘어 적극적으로 향유하고 있음은 심히 유감이다. 특히 교수 등 교육자와 연구자라는 집단 중에서도 많은 이들이 심지어 숭고한 주제를 다루는 학술회의 및 국가 간 친선 교류 목적의 방문 시에도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 없이 불법 업소에서 서로의 인맥 만들기와 출세를 위한 수단, 성적 쾌락의 수단으로 여성을 대상화한 역사는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남북과 북미 간 관계 개선으로 인한 한반도 평화와 공영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동북아 평화협력 공동체의 중요한 축인 남북러 삼각 협력의 구상들이 점점 더 현실화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기존의 한국 기업-한인 성매매 산업 카르텔이라는 오래된 적폐가 청산이 되지 않는다면, 한국 기업들의 시장 진출은 곧 재앙이 될 것이다. 이제 정부는 적극적으로 해외에서의 한인 성매매 카르텔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역사적 노력을 해야 하는 시간이 왔다. 그러한 길에 지역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먼저 과거를 반성하고 전면으로 나서야 할 시간이 왔다.      
2018-06-27 | hrights | 조회: 1156 | 추천: 4
윤영전/ (사)평화연대 이사장  우리들의 가슴을 졸이게 했던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세기의 담판’이 드디어 오늘 아침 싱가포르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두 차례나 방북한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을 통해 트럼프 대통령이 새 대안을 제시하고, 김정은 위원장이 만족할 만한한 합의를 했다고 밝혀 빅딜 가능성을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두 사람 모두 이른바 통 큰 빅딜 합의를 좋아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 한반도 명운(命運)을 가를 역사적인 이정표를 세울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제시한 새 대안은 김정은 위원장이 핵무기 프로그램을 완전하고도 검증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게 폐기할 경우, 미국이 해 줄 체제안전보장과 협력방안 등을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했을 것으로 관측된다고 합니다.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이번에 “미국과 북한이 오랫동안 적국이었으나 이제는 파트너가 될 수 있다”고 언급해 북한이 진정으로 핵 폐기에 나선다면 미국도 적대정책을 중단함으로써 북한의 정권교체를 추구하지 않고 공격도, 침공도 하지 않는다는 체제안전보장 의지를 분명히 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습니다. 이에 김정은 위원장도 과거와는 달리 미국이 적대정책을 중단한다면 핵 프로그램을 이른 시일 안에 완전 폐기할 수 있다는 비핵화 의지를 분명히 하고 주한미군철수와 같은 민감한 요구는 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풀이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기의 담판’을 숨죽이고 바라보는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이 땅에 전쟁의 어두운 그림자를 없애고 풍요와 행복을 가져다 줄 평화통일의 그날을 바라 볼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일 것입니다. 그 성공여부는 곧 결판이 날 것입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합니다. 이 세기의 담판도 한갓 서로의 자존심 때문에 무너지지 않을까 너무나 조심스럽고 숨이 막힐 지경이기도 합니다만, 긍정적입니다.  트럼프와 김정은 두 사람의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올지 조바심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오늘 만나는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 이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지금의 우리 삶을 바꿔놓을 것은 물론, 대대로 운명을 결정지을 아주 중대한 분수령에 가깝습니다.  아무리 약소국가의 수장이라도 어쩌면 자존심 상하는 말 한 마디에 회담을 결렬 시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제발 두 사람이 양국을 대표하는 국가의 수반이라는 금도(襟度)를 지켜 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의 진정성입니다. 트럼프는 며칠 전, 김정은을 만나 보면 1분 내로 그의 진정성을 알아 볼 수 있다고 호언(豪言)을 했었습니다.  누구든지 진심을 다해 호소하면 상대방을 감동시키고, 감동받은 상대방은 진심을 다하는 사람의 솔직함과 진정성 때문에 최대한 도와주려고 애를 씁니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세기의 담판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솔직함과 진정성이라는 최대의 무기입니다. 두 지도자가 이 진정성을 지키기 위해 다음 몇 가지를 지키면 좋겠습니다.  먼저 진실한 행동입니다. 회담 대상에게 진정성을 알리기 위해서는 우선 행동이 필요합니다. 움직여야 변화하듯 진심을 알리기 위한 실천이 첫 번째입니다. 아무리 진실 된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표현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법이지요. 비핵화와 체제보장을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다음은 공감입니다. 행동하고 표현할 때 있어 공감적 교감은 필수입니다. 모두가 이해하고 감동받을 수 있는 가치일 때 진정성은 받아들여지는 것이지요. 사람들의 마음에 와 닿지 않는 행위, 공감가지 않는 행동으로는 진정성을 나타내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럴듯한 이야기가 아닌 공감과 소통할 수 있는 진심입니다. 과연 실행이 가능한 약속인지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실현 가능성 있는 약속입니다. 공감 가는 행동으로 호감을 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반쪽의 진심은 허위보다 무섭다는 말이 있습니다. 진정한 마음에는 신뢰와 믿음이 따릅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 가는 나무 없다’ 는 말 이 있습니다. 진심을 전달하는데 있어 시간만큼 중요한 것도 없습니다.  진심은 말 그대로 진짜입니다. 가짜가 아니기에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자신감을 가지고 진실 된 회담을 하면 이 모든 걱정과 근심은 없을 것입니다. 즉 그간의 위기 국면에서 아무리 그럴 듯한 언약을 해도 실현 불가능한 공허한 얘기는 오히려 의문만을 갖게 합니다. 이제는 한반도 평화, 조선반도의 평화를 이루어내면 세계 평화의 그날도 오겠지요.  아시아, 아니 세계가 주시하는 가운데 싱가포르에서 북미 정상이 원칙적인 기본 약속을 한 것은 참으로 다행입니다. 화끈하고 시원한 합의가 이루어졌다면 더할 나위 없이 최상이었겠지만 앞으로 기약을 한 일들이 있기에 아쉬움에서도 다행이지요. 세계 최강의 패권국이요, 인구가 수억에 가까운 대국과 겨우 인구 2천2백만의 북한과의 대등한 회담도 생각해 보면 북한의 최대 승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사진 출처 - 구글  트럼프는 아마도 곧 있을 중간선거와 그리고 2년 후의 대선의 재선을 염두에 두고 이 회담에 전략적으로 임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약속한 모든 것을 당장이라도 시원스럽게 받아내면 좋았겠지만 그들은 나름대로 앞으로의 계획들이 있을 터입니다. 그러나 대국으로서 해내야할 일들을 공허한 약속보다는 화끈한 딜 즉, 한반도의 평화는 물론 세계평화를 위해 기꺼이 약속을 앞당겨 실천한다는 아량도 필요합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분단 73년 동안 한반도를 둘러싼 수차례의 전쟁과 얼마나 많은 위협들이 존재했습니까? 그러기에 한반도 8천만 동포들은 공포에 떨기도 했습니다. 과연 한반도에 평화와 통일은 요원한 것인가?하는 의문들이 항상 존재하였지요. 그래도 이만한 안정의 정세로 변화하고 있는 사실에 안도하기도 합니다. 한편 북의 가공할 핵무기 존재에 신경을 썼지요.   이제 우리는 4.27 남북정상회담과 6.12 북미정상회담이 분단이후 최대의 성과 보다는 주도면밀하게 실현시킬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국민과 함께해야 합니다. 꿈같은 올해의 중대 회담의 결과가 쉽게 이루어 질 수 없는 대사였지만 우리는 해냈습니다. 이제 남북 8천만 동포와 위정자들의 가일층 노력으로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다가갔으면 합니다. 함께 노력해요. 
2018-06-14 | hrights | 조회: 1130 | 추천: 5
- 성폭력의 폭로/미투에 대응하는 한국남자들의 자세- 신하영옥/ 여성운동연구 활동가 네트워크 ‘젠더고물상’  지난 3월 7일, 네이버 검색 순위 1위는 ‘펜스룰’ 이었다. 여전히 ‘미투(#MeeToo)’ 운동이 상승하던 시기에 돌연 무고한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나온 ‘자기 방어의 수단’, 즉 ‘미투’의 대응책으로 등장한 것이 ‘펜스룰’이다. 처음에는 ‘울타리’라는 의미의 Fence인 줄 알았다. 여성과 남성사이에 분리를 명확히 하고자 하는 것이란 뜻으로 말이다. 그러나 2017년 미국 부통령이 된 마이크 펜스(Mike Pence)의 이름을 따온 것이란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 2002년 <The Hills>와의 인터뷰에서 “아내가 없는 자리에서 다른 여성들과 함께 술자리를 갖지 않는다”는 발언을 한 것이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948년 미국의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이라는 목사가 남성들이 다른 여성과 단 둘이 있을 때 성적인 유혹에 취약해질 수 있으므로 아내가 아닌 여자와 단둘이 있지 말라는, 청교도적 성엄숙주의를 지키자는 의도로 신도들에게 설파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그러니까 원래의 의미는 ‘성적 자기 절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그런데 왜 여성을 피해야만 그 절제가 완성될까? 남성들에게 여성은 그냥 사람이 아니라 ‘성적’ 흥분을 일으키는 존재인가보다. 그러므로 자기와 여성을 지키려면 멀리하는 수밖에 없는 ‘성욕에 지배되는 존재’라는 자기고백이 아닌가. 왜 여자를 두고는 자기 절제가 안/못 되는지 놀랍다. 그게 그렇게 어렵다고 하니 남자들을 ‘잠재적 가해자’로 볼 수밖에 없지 않나?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펜스룰은 원래의 의미보다는 차라리 Fence에 가까워 보인다. 사진 출처 - JTBC  “이모(여·29)씨는 다음 달로 예정돼 있던 사장 동행 중국 출장 일정이 갑작스럽게 취소됐다. 이 씨 대신 남자 선배가 사장과 출장을 가게 됐다고 한다. 이씨는 “오랫동안 현지 바이어를 설득해가며 출장 준비를 했던 게 헛수고가 됐다”며 “‘미투 운동’ 후 사장이 여직원 동행을 꺼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여성들은 상대적으로 업무 업적을 쌓을 기회가 줄어든다.” - 조선일보(2018. 3. 7.)  “최근 한 중견기업 신입사원 면접시험에 응한 이모(25·여)씨는 “면접 내내 여성 지원자를 경계하는 분위기가 연출됐다”면서 “면접관들이 업무역량이나 장점을 묻기보다 유리천장 등 여성차별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만 집요하게 물어봤다”고 털어놨다. 이 회사는 지난해 신입사원 여남 비율이 거의 같았지만 올해는 남성을 여성보다 2배 정도 더 뽑은 것으로 파악됐다.” - 이데일리(2018. 3. 7.)  “내 주변 60cm 안으로 들어오지 마” - 공기업에서 일하는 여성(28)이 남성상사에게 들은 말  “성폭력 당하면 어떻게 할 거예요?” - 공공기관 입사 면접에서 나온 말  이건 결코 ‘성적 자기 억제, 혹은 절제’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여성을 피해야 절제가 가능하다는 논리는 우습지만, 여성들도 남성과의 일대일 대면 – 위험할 상황 - 이 줄어들면 그만큼 활동영역이 넓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다. 그러나 변형된 한국의 펜스룰은 여성들을 대상으로 울타리를 치고, 남성 자신들이 아닌 여성들을 가두는, 여성들을 울타리 안으로 밀어 넣어 활동영역을 좁히는 방식이 되고 있다. 펜스룰로 인해 여성들은 일대일 대면에서의 제한보다는 집단으로서의 경계대상이 되면서 공적영역에서의 활동공간이 제한되고 있다. 한국 남성들은 자기성찰조차도, 실수할까 두려워 조심하는 행동조차도 왜 ‘남성연대’의 강화로 될까? ‘모로 가도 서울’이라더니,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행동을 해도 여성배제, 차별로 귀결된다. 놀랍지 않은가? 한국의 남성연대!  남성들이 두려워하는 ‘무고’에 대해 살펴보자. 올해 3월 13일자 연합뉴스 “여성이 두렵다는 ‘펜스 룰’... 근거 없다.”는 기사를 보면 “‘여성들이 허위신고를 남발한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하면서 최근 3년간의 범죄분석 자료와 ‘2016년 대법원 사법연감’을 예로 들어 보이고 있다. 이에 따르면 성범죄 중 ‘혐의 없음’ 비율은 20%이고 여기에는 ‘허위신고’ 즉 ‘무고’뿐 아니라 ‘증거부족’도 포함되며, 무고죄 피의자 수는 평균 5천 700명인데 이 중 성범죄 관련 무고는 몇 건인지 통계가 없어 모르고, 2016년 강간 및 추행 사건은 5천618건이고 이 중 1심 무죄판결은 192건으로 약 3.4% 정도로 낮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성이 허위신고를 남발해서 두렵다는 남성들의 주장이야말로 ‘허위’라는 것이다.  결국 펜스룰을 지지하고 실천하는 남성들은 <남성 = ‘성욕’을 제어할 수 없는 ‘동물 집단’>, <여성 = 무고한 남성들을 성범죄자로 몰아가는 ‘허위 신고 집단’>이라는 시각이 깔려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순되게도 이 시선 안에는 남성의 정체성이 ‘성욕 덩어리’와 ‘선량하고 무고한 시민’이라는 이질적이고 자기분열적인 이중의 정체성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남성이 성적존재라는 자기비하적 고백이 만들어 낸 것으로, 이러한 비하를 여성을 더 비하 – 거짓말쟁이 - 함으로써 만회하려는 전략이 만들어 낸 참사이다. 결국 펜스룰은 여성혐오를 토대로 하는 전략이고, 남성들 심리 내면에 자신들이 ‘성적존재’라는 기저, 그러므로 잠재적 성범죄자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대일 대면을 줄이겠다는 선언은 여성들로서는 잠재범죄로부터 피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 된다. 1)  그러나 공적영역에서의 펜스룰은 ‘남성연대’, 즉 가부장제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여성들이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성폭력이 가부장제라는 남녀의 위계, 즉 권력관계에서 발생하는 범죄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가부장제를 강화하는 방식은 여성에 대한 차별과 성폭력범죄를 행사하는 남성권력을 강화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남성연대’가 강화될수록 ‘남성’이 될 수 없는 집단에 대한 혐오는 강화되기 때문이고 그것의 일차대상은 여성이 되기 때문이다. 여성에 대한 혐오를 그대로 둔 상태에서 펜스룰은 의미가 없다. 여성들이 미투를 하는 것은 이 사회전반이 성폭력이라는 권력형범죄에 물들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고, 이는 범죄가 가능한 남성 중심적, 가부장적 사회를 바꾸자는 것인데, 펜스룰은 오히려 이를 더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어쩌라고~~~오~~?”라며 화살을 여성들에게 돌리고 있다.  이참에 남성들에게 제안을 하고 싶다. 어차피 당신들이 성본능을 제어하기 힘든 집단이라는 것을 고백했다면 거기서부터 출발하자고.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부터 확인하는 과정을 밟아보되 그 과정을 남성들끼리가 아니라 여성들과 같이 해 보자고. 대화라는 방법으로, Fence없이, 모든 지식을 총동원해서 시원하게 까발려보자고. 그리고 그것이 남성연대가 만들어 낸 자기비하의 허위라는 사실에 직면해보자고. 성욕을 제어하지 못해 여성만 보면 성범죄를 저지를까 두려워서 하는 자기절제와 억압으로서의 펜스룰이 아니라, 자기개방을 통해 범죄가 아닌 성이 무엇이고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해 ‘솔까말’ 해 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갈등은 상대를 외면하거나 피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문제도 마찬가지로 직면해야 해결점이 떠오른다. 그리고 어떤 길이든 길 위에서 벽을 만나면 되돌아가기보다 벽을 타고 돌아가야 계속 나아갈 수 있다. 직면하는 용기와 돌아가는 유연함이 펜스룰에는 없다. 두려움과 억압, 관성만이 존재할 뿐이다. 관성을 끊기 위해서는 외부의 자극, 강제가 필요할 수도 있다. 그것은 미투와 페이미투(#PayMeeToo) 2) 에 응답하기 위한 권력으로서의 국가의 법과 제도들이다. 이미 여성국회의원들이 집단 왕따로서의 펜스룰을 경계하기 위한 여성차별방지 제도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준비 중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5월 1일 방영된 ‘피디수첩’에서는 조계종의 유명한 두 스님들이 성폭력과 성매매를 일삼았다는 보도를 했다. 성폭력으로 인해 생긴 딸 사건, 2004년부터 약 4년간 유흥주점과 1급 호텔에서 8200만원의 카드결재 및 성폭력 사건이다. 조계종 측은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 기각 후 “개인의 인권과 명예보다 방송의 자율권을 우선시한 결정”이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인권’이라니... 여기서도 펜스룰이 적용된다. ‘허위’이고 ‘무고’라는 의식 말이다. 5월 2일에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국회의원과 보좌관들 전수를 대상으로 한 '국회 내 성폭력 실태조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이 조사를 통해 "국회 내 성폭력의 원인은 불평등한 권력관계다. 위계질서 위력에 의한 성폭력이 가장 큰 근본적 원인"(유승희 윤리특위 위원장/미디어스 5. 2)임이 드러나고 처방으로는 조직문화개선이 제안되었다. 여전히 미투는 진행 중이고 타 영역으로 확장중이다. 그러나 성범죄자의 인권을 주장하는 관행, 위계와 위력이 판치는 국민대의기관의 조직문화, 이런 것들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다면 대안은 없다. 성찰이 필요하다. 관행과 관습을 정지하고 문화를 바꾸기 위해 무엇이 문제인지 직면하고, 우회하더라도 숨지 말고 나가봐야 한다. 그러나 펜스룰은... 도망가는 것, 숨는 것이다. 1) 한국일보에서 3월 29, 30일 조사한 펜스룰 지지율에서 남성(44.8%)보다 여성(46.3%)이 높게 나옴 2) 노동과정에서 성차별적인 채용과정, 임금, 승진 등 전반적인 고용불평등을 제기하는 운동
2018-06-07 | hrights | 조회: 1462 | 추천: 7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1.  철학자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tz, 1646〜1716)가 제시한 “충족이유율”이란 것이 있다. 그 어떤 개별적인 사건에 대해서도 원인을 물을 수 있고 대답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확대해서 보면, 당연히 원인도 하나의 사건일 터이고, 원인의 원인은 꼬리를 물고서 확산되면서 결국에는 마치 불교의 “연기”(緣起)처럼 만물 생성의 무한 인과의 네트워크를 제시한 셈이 된다. 2.   2018년 1월 1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신년사를 통해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진지하게 토의를 하자고 제안하고 평창동계올림픽 대표단을 파견하겠다고 통보 한 것을 시발점으로 그 이전 북미간의 핵전쟁 운운하면서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 순식간에 급물살을 타고서 평화 쪽으로 일변했다.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한 남북문화교류에 의한 화해의 분위기에 이어 무엇보다 4월 27일 김정은 위원장의 판문점 남쪽 지역 <평화의 집> 방문에 따른 남북정상회담과 그 결과인 ‘완전한 비핵화와 평화 번영’을 중심으로 한 <판문점 선언>은 한반도 거주민들, 특히 남쪽 우리들에게 마치 금방이라도 전반적으로 자유왕래가 가능해지기라도 할 것처럼 온 마음 온 몸을 한껏 설레게 만들었다. 그런 가운데, 전 세계인들이 문재인 대통령을 현 세계정세에 가장 영향력이 높은 인물로 평가한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북미정상회담을 해서 북한의 비핵화와 체제보장을 통한 개혁 개방과 평화 번영에의 물꼬를 트기 위한 실질적인 만남들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런가 하면, 이러한 한반도의 평화 대행진의 새로운 역사의 전개에 기회를 놓칠세라 중국도 일본도 러시아도 그들의 수뇌들 및 대변인들의 입을 통해 발 빠르게 호응하고 환영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마침내 5월 10일에,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북미정상회담을 한다는 미국대통령 트럼프의 발표가 있었다. 그 직전 5월 7-8일에 김정은 위원장이 3월 25-28일의 1차 방중 북중정상회담에 이어, 2차 방중 북중정상회담을 가졌다. 그러나 그 이후, 북미 간에 비핵화 방식을 둘러싸고 강경한 발언들이 오가면서 결국 5월 23일 미국에서 한미정상회담이 있은 직후인 5월 24일 미국대통령 트럼프가 한국 대통령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전격적으로 북미정상회담 취소를 선언해버렸다. 전 세계인들을 당황하게 만든 행위이거니와 누구보다도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한반도 평화를 절실히 원하는 우리 모두를 하루아침에 배신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자 북한에서 북미정상회담을 원한다는 전언들을 즉시 내놓았고, 이에 취소한 하루 만에 트럼프는 ‘취소한 것을 취소할 수 있다’는 취지의 모호한 발언을 내놓았다. 북한의 전유물이라 여겨왔던 이른바 ‘벼랑끝 전술’을 트럼프 미국 쪽에서 구사한 것 아니냐, 하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와중에 5월 26일 오후 김정은 위원장의 요청으로 문재인 대통령이 판문점 북쪽 지역의 <통일각>으로 올라가 극비리에 두 시간에 걸쳐 2차 남북정상회담을 했다. 두 정상이 뜨겁게 포옹하는 장면이 방영되었다. 그 이후, 이 글을 쓰는 이 시간, 텔레비전에서는 북미정상회담을 둘러싼 뉴스들이 연신 급하게 전달되고 있다.   사진 출처 - 노컷뉴스 3.  다들 아는 이야기다. 하지만 역시 인권연대의 <수요산책>을 통해 이 정도로나마 정돈해서 기록해 두고 싶은 마음이다. 중요한 귀결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 한반도 남북의 진정한 평화를 바탕으로 한 공존공영의 탄탄한 길을 여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작금에 이루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들을 통해 이러한 길을 열 수 있는 역사적인 의식을 간추리는 일이다.  위 최근의 일들을 보면서, 직접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1946년 1월 16일 예비회담을 기점으로 같은 해 3월 20일부터 1947년 10월 21일까지 한국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미국과 소련 사이에 열렸던 이른바 <미소공동위원회>를 생각하게 된다. 이 위원회는 1945년 12월 16일에 전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열렸던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의한 <한국 문제에 관한 4개항의 결의서>에 들어있었던 ‘임시정부 수립을 돕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에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그 결의문에 ‘미국과 소련, 영국, 중국은 임시정부 수립을 돕기 위해 최대 5년간의 신탁통치를 실시한다.’가 함께 들어 있었다. 그러니까 ‘미소공위’의 핵심 의제는 38도선을 경계로 양쪽에 분할 주둔한 미국과 소련의 일시적인 군정 상태를 종식시키고 남북의 통일정권 수립을 어떻게 진전시켜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신탁통치였다. 한국의 지도자들은 누구도 신탁통치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 둘러싸고서 또는 이를 이용해서 한국 지도자들 간의 정치적 우위를 둘러싼 각종 쟁투와 갈등 및 암살 등이 있었고, 또 이를 역용한 미국과 소련의 냉전적인 대결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미소공위는 결렬되어 해산되고 말았고, 한국문제가 유엔에 상정되어 1947년 11월 14일 유엔 감시 하에 남북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가결하였지만, 소련이 북쪽의 인구가 적다는 점을 염두에 둔 탓에 이를 거부하고, 1948년 5월 10일 많은 반대 속에 남한 단독으로 총선거를 실시하여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고, 북조선에서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하여 남북 분단이 고착되었고, 결국에는 한국전쟁이라는 최고도의 비극을 낳게 된 것이다.  이제 그동안 7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소련은 해체되었고, 그 대신 중국이 미국과 더불어 2극 체제를 형성하는 한 축으로 부상했다. 애초 철저히 외세에 의해 분단된 한반도는 분단과 전쟁 그리고 휴전으로 이어지면서 ‘분단-휴전 체제’를 악용하는 내외의 이데올로기적인 냉전 내지는 호전 세력들에 의해 여러모로 그야말로 체제적으로 상처받고 불이익을 당하고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는 등의 처절한 역사를 거듭해 왔다.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힘은 한반도 거주민 당사자들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고, 그렇지 않고서는 설혹 해결이 된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언제든지 다시 수렁에 빠질 수밖에 없다.   내가 아닌 자들을 철저히 배척하자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른바 대타성(對他性), 즉 내가 아닌 것들과 관계를 맺고 상호작용함으로써 존재를 유지한다는 것은 만물의 근본 이치다. 하지만, 자성(自性), 즉 늘 제 자신이고자 하는 위력을 지니지 못하는 한 존재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 또한 만물의 근본 이치다. 자성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추구하는 대타성은 의존에 이어 굴욕과 수치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대타성을 무시하고서 자성만을 추구하는 존재는 독단에 이어 고립과 자폐로 이어지고, 권력을 지닐 경우 그 권력은 배타적인 폭력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미국 대통령 트럼프가 김정은 위원장이 중국 시진핑 주석과 두 번 만나더니 태도가 변했다는 말을 하면서 ― 물론 그 외 다른 말들도 했다. ― 북미정상회담을 취소한다고 선언했다. 애초에 1차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북미정상회담 이야기가 나왔을 때 ‘재팬 패싱’에 이어 ‘중국 패싱’ 이야기가 나왔다. 곧바로 최초의 북중정상회담이 이뤄졌다. 시진핑 중국주석이 김정은 위원장을 그처럼 성대하게 맞이할 줄 몰랐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또 다시 외세다. 미국과 중국이다. 만약 트럼프의 북미정상회담 취소가 한편으로 중국의 배후 개입을 차단하기 위한 전술이라면, 한반도 문제는 또 다시 ‘그들만의 리그’를 위한 보조 장치에 불과한 셈이다. 그런데 만약 갑자기 극비리에 이루어진 2차 남북정상회담을 하면서 ―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이는데 ― 문재인 대통령이 전혀 미국대통령 트럼프와 사전에 아무런 조율 없이 이루어진 것이라면, 이는 우리 나름의 자성적인 위력을 바탕으로 외세에 의거한 힘들을 조절해 나가는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이다. 더욱이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북미정상회담이 남북미 정상회담으로 이어질 것으로 점쳐지기도 한다. 이는 요컨대 남측이 북측을 끌어안음으로써 북측에게 중국에 대한 자성을 강화시키는 대타적인 계기로 작동하고, 북측이 남측을 끌어안음으로써 남측에게 미국에 대한 자성을 강화시키는 대타적인 계기로 작동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함축한다고 할 수 있다. 한반도 양쪽이 서로의 자성과 대타성의 위력을 공히 호혜적인 방식으로 강화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남들이 자른 것을 우리가 잇는 것이다.” 4.  한 가지 덧붙일 것이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촛불시민혁명이 낳은 대통령이다. 촛불시민혁명은 세계 역사상 유례가 드문, 평화로써 성공한 혁명이고, 아직 실현 과정 중에 있는 혁명이다. 이는 한국의 정치적인 자성이 얼마나 강한가를 전 세계에 드러내 보인 엄청난 사건이다. 그 평화에 입각한 집단적 자성의 힘이 바탕이 되어 작금의 세계사적인 대전환의 물꼬를 트는 위업을 수행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아직 촛불은 우리의 삶과 존재 속에 이미 늘 충분히 켜져 있고, 앞으로도 필요하면 얼마든지 또 다시 촛불은 광장에 집결될 것이다. 결국, 우리의 촛불시민혁명은 앞으로 있을 세계사적인 평화의 역사 전개에 충족이유의 핵심으로 작동할 것이다.
2018-05-30 | hrights | 조회: 1357 | 추천: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