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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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강대중(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윤동호(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이동우(변호사),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장은주(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 성폭력의 폭로/미투에 대응하는 한국남자들의 자세- 신하영옥/ 여성운동연구 활동가 네트워크 ‘젠더고물상’  지난 3월 7일, 네이버 검색 순위 1위는 ‘펜스룰’ 이었다. 여전히 ‘미투(#MeeToo)’ 운동이 상승하던 시기에 돌연 무고한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나온 ‘자기 방어의 수단’, 즉 ‘미투’의 대응책으로 등장한 것이 ‘펜스룰’이다. 처음에는 ‘울타리’라는 의미의 Fence인 줄 알았다. 여성과 남성사이에 분리를 명확히 하고자 하는 것이란 뜻으로 말이다. 그러나 2017년 미국 부통령이 된 마이크 펜스(Mike Pence)의 이름을 따온 것이란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 2002년 <The Hills>와의 인터뷰에서 “아내가 없는 자리에서 다른 여성들과 함께 술자리를 갖지 않는다”는 발언을 한 것이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948년 미국의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이라는 목사가 남성들이 다른 여성과 단 둘이 있을 때 성적인 유혹에 취약해질 수 있으므로 아내가 아닌 여자와 단둘이 있지 말라는, 청교도적 성엄숙주의를 지키자는 의도로 신도들에게 설파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그러니까 원래의 의미는 ‘성적 자기 절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그런데 왜 여성을 피해야만 그 절제가 완성될까? 남성들에게 여성은 그냥 사람이 아니라 ‘성적’ 흥분을 일으키는 존재인가보다. 그러므로 자기와 여성을 지키려면 멀리하는 수밖에 없는 ‘성욕에 지배되는 존재’라는 자기고백이 아닌가. 왜 여자를 두고는 자기 절제가 안/못 되는지 놀랍다. 그게 그렇게 어렵다고 하니 남자들을 ‘잠재적 가해자’로 볼 수밖에 없지 않나?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펜스룰은 원래의 의미보다는 차라리 Fence에 가까워 보인다. 사진 출처 - JTBC  “이모(여·29)씨는 다음 달로 예정돼 있던 사장 동행 중국 출장 일정이 갑작스럽게 취소됐다. 이 씨 대신 남자 선배가 사장과 출장을 가게 됐다고 한다. 이씨는 “오랫동안 현지 바이어를 설득해가며 출장 준비를 했던 게 헛수고가 됐다”며 “‘미투 운동’ 후 사장이 여직원 동행을 꺼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여성들은 상대적으로 업무 업적을 쌓을 기회가 줄어든다.” - 조선일보(2018. 3. 7.)  “최근 한 중견기업 신입사원 면접시험에 응한 이모(25·여)씨는 “면접 내내 여성 지원자를 경계하는 분위기가 연출됐다”면서 “면접관들이 업무역량이나 장점을 묻기보다 유리천장 등 여성차별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만 집요하게 물어봤다”고 털어놨다. 이 회사는 지난해 신입사원 여남 비율이 거의 같았지만 올해는 남성을 여성보다 2배 정도 더 뽑은 것으로 파악됐다.” - 이데일리(2018. 3. 7.)  “내 주변 60cm 안으로 들어오지 마” - 공기업에서 일하는 여성(28)이 남성상사에게 들은 말  “성폭력 당하면 어떻게 할 거예요?” - 공공기관 입사 면접에서 나온 말  이건 결코 ‘성적 자기 억제, 혹은 절제’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여성을 피해야 절제가 가능하다는 논리는 우습지만, 여성들도 남성과의 일대일 대면 – 위험할 상황 - 이 줄어들면 그만큼 활동영역이 넓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다. 그러나 변형된 한국의 펜스룰은 여성들을 대상으로 울타리를 치고, 남성 자신들이 아닌 여성들을 가두는, 여성들을 울타리 안으로 밀어 넣어 활동영역을 좁히는 방식이 되고 있다. 펜스룰로 인해 여성들은 일대일 대면에서의 제한보다는 집단으로서의 경계대상이 되면서 공적영역에서의 활동공간이 제한되고 있다. 한국 남성들은 자기성찰조차도, 실수할까 두려워 조심하는 행동조차도 왜 ‘남성연대’의 강화로 될까? ‘모로 가도 서울’이라더니,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행동을 해도 여성배제, 차별로 귀결된다. 놀랍지 않은가? 한국의 남성연대!  남성들이 두려워하는 ‘무고’에 대해 살펴보자. 올해 3월 13일자 연합뉴스 “여성이 두렵다는 ‘펜스 룰’... 근거 없다.”는 기사를 보면 “‘여성들이 허위신고를 남발한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하면서 최근 3년간의 범죄분석 자료와 ‘2016년 대법원 사법연감’을 예로 들어 보이고 있다. 이에 따르면 성범죄 중 ‘혐의 없음’ 비율은 20%이고 여기에는 ‘허위신고’ 즉 ‘무고’뿐 아니라 ‘증거부족’도 포함되며, 무고죄 피의자 수는 평균 5천 700명인데 이 중 성범죄 관련 무고는 몇 건인지 통계가 없어 모르고, 2016년 강간 및 추행 사건은 5천618건이고 이 중 1심 무죄판결은 192건으로 약 3.4% 정도로 낮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성이 허위신고를 남발해서 두렵다는 남성들의 주장이야말로 ‘허위’라는 것이다.  결국 펜스룰을 지지하고 실천하는 남성들은 <남성 = ‘성욕’을 제어할 수 없는 ‘동물 집단’>, <여성 = 무고한 남성들을 성범죄자로 몰아가는 ‘허위 신고 집단’>이라는 시각이 깔려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순되게도 이 시선 안에는 남성의 정체성이 ‘성욕 덩어리’와 ‘선량하고 무고한 시민’이라는 이질적이고 자기분열적인 이중의 정체성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남성이 성적존재라는 자기비하적 고백이 만들어 낸 것으로, 이러한 비하를 여성을 더 비하 – 거짓말쟁이 - 함으로써 만회하려는 전략이 만들어 낸 참사이다. 결국 펜스룰은 여성혐오를 토대로 하는 전략이고, 남성들 심리 내면에 자신들이 ‘성적존재’라는 기저, 그러므로 잠재적 성범죄자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대일 대면을 줄이겠다는 선언은 여성들로서는 잠재범죄로부터 피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 된다. 1)  그러나 공적영역에서의 펜스룰은 ‘남성연대’, 즉 가부장제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여성들이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성폭력이 가부장제라는 남녀의 위계, 즉 권력관계에서 발생하는 범죄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가부장제를 강화하는 방식은 여성에 대한 차별과 성폭력범죄를 행사하는 남성권력을 강화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남성연대’가 강화될수록 ‘남성’이 될 수 없는 집단에 대한 혐오는 강화되기 때문이고 그것의 일차대상은 여성이 되기 때문이다. 여성에 대한 혐오를 그대로 둔 상태에서 펜스룰은 의미가 없다. 여성들이 미투를 하는 것은 이 사회전반이 성폭력이라는 권력형범죄에 물들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고, 이는 범죄가 가능한 남성 중심적, 가부장적 사회를 바꾸자는 것인데, 펜스룰은 오히려 이를 더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어쩌라고~~~오~~?”라며 화살을 여성들에게 돌리고 있다.  이참에 남성들에게 제안을 하고 싶다. 어차피 당신들이 성본능을 제어하기 힘든 집단이라는 것을 고백했다면 거기서부터 출발하자고.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부터 확인하는 과정을 밟아보되 그 과정을 남성들끼리가 아니라 여성들과 같이 해 보자고. 대화라는 방법으로, Fence없이, 모든 지식을 총동원해서 시원하게 까발려보자고. 그리고 그것이 남성연대가 만들어 낸 자기비하의 허위라는 사실에 직면해보자고. 성욕을 제어하지 못해 여성만 보면 성범죄를 저지를까 두려워서 하는 자기절제와 억압으로서의 펜스룰이 아니라, 자기개방을 통해 범죄가 아닌 성이 무엇이고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해 ‘솔까말’ 해 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갈등은 상대를 외면하거나 피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문제도 마찬가지로 직면해야 해결점이 떠오른다. 그리고 어떤 길이든 길 위에서 벽을 만나면 되돌아가기보다 벽을 타고 돌아가야 계속 나아갈 수 있다. 직면하는 용기와 돌아가는 유연함이 펜스룰에는 없다. 두려움과 억압, 관성만이 존재할 뿐이다. 관성을 끊기 위해서는 외부의 자극, 강제가 필요할 수도 있다. 그것은 미투와 페이미투(#PayMeeToo) 2) 에 응답하기 위한 권력으로서의 국가의 법과 제도들이다. 이미 여성국회의원들이 집단 왕따로서의 펜스룰을 경계하기 위한 여성차별방지 제도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준비 중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5월 1일 방영된 ‘피디수첩’에서는 조계종의 유명한 두 스님들이 성폭력과 성매매를 일삼았다는 보도를 했다. 성폭력으로 인해 생긴 딸 사건, 2004년부터 약 4년간 유흥주점과 1급 호텔에서 8200만원의 카드결재 및 성폭력 사건이다. 조계종 측은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 기각 후 “개인의 인권과 명예보다 방송의 자율권을 우선시한 결정”이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인권’이라니... 여기서도 펜스룰이 적용된다. ‘허위’이고 ‘무고’라는 의식 말이다. 5월 2일에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국회의원과 보좌관들 전수를 대상으로 한 '국회 내 성폭력 실태조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이 조사를 통해 "국회 내 성폭력의 원인은 불평등한 권력관계다. 위계질서 위력에 의한 성폭력이 가장 큰 근본적 원인"(유승희 윤리특위 위원장/미디어스 5. 2)임이 드러나고 처방으로는 조직문화개선이 제안되었다. 여전히 미투는 진행 중이고 타 영역으로 확장중이다. 그러나 성범죄자의 인권을 주장하는 관행, 위계와 위력이 판치는 국민대의기관의 조직문화, 이런 것들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다면 대안은 없다. 성찰이 필요하다. 관행과 관습을 정지하고 문화를 바꾸기 위해 무엇이 문제인지 직면하고, 우회하더라도 숨지 말고 나가봐야 한다. 그러나 펜스룰은... 도망가는 것, 숨는 것이다. 1) 한국일보에서 3월 29, 30일 조사한 펜스룰 지지율에서 남성(44.8%)보다 여성(46.3%)이 높게 나옴 2) 노동과정에서 성차별적인 채용과정, 임금, 승진 등 전반적인 고용불평등을 제기하는 운동
2018-06-07 | hrights | 조회: 1407 | 추천: 7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1.  철학자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tz, 1646〜1716)가 제시한 “충족이유율”이란 것이 있다. 그 어떤 개별적인 사건에 대해서도 원인을 물을 수 있고 대답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확대해서 보면, 당연히 원인도 하나의 사건일 터이고, 원인의 원인은 꼬리를 물고서 확산되면서 결국에는 마치 불교의 “연기”(緣起)처럼 만물 생성의 무한 인과의 네트워크를 제시한 셈이 된다. 2.   2018년 1월 1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신년사를 통해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진지하게 토의를 하자고 제안하고 평창동계올림픽 대표단을 파견하겠다고 통보 한 것을 시발점으로 그 이전 북미간의 핵전쟁 운운하면서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 순식간에 급물살을 타고서 평화 쪽으로 일변했다.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한 남북문화교류에 의한 화해의 분위기에 이어 무엇보다 4월 27일 김정은 위원장의 판문점 남쪽 지역 <평화의 집> 방문에 따른 남북정상회담과 그 결과인 ‘완전한 비핵화와 평화 번영’을 중심으로 한 <판문점 선언>은 한반도 거주민들, 특히 남쪽 우리들에게 마치 금방이라도 전반적으로 자유왕래가 가능해지기라도 할 것처럼 온 마음 온 몸을 한껏 설레게 만들었다. 그런 가운데, 전 세계인들이 문재인 대통령을 현 세계정세에 가장 영향력이 높은 인물로 평가한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북미정상회담을 해서 북한의 비핵화와 체제보장을 통한 개혁 개방과 평화 번영에의 물꼬를 트기 위한 실질적인 만남들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런가 하면, 이러한 한반도의 평화 대행진의 새로운 역사의 전개에 기회를 놓칠세라 중국도 일본도 러시아도 그들의 수뇌들 및 대변인들의 입을 통해 발 빠르게 호응하고 환영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마침내 5월 10일에,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북미정상회담을 한다는 미국대통령 트럼프의 발표가 있었다. 그 직전 5월 7-8일에 김정은 위원장이 3월 25-28일의 1차 방중 북중정상회담에 이어, 2차 방중 북중정상회담을 가졌다. 그러나 그 이후, 북미 간에 비핵화 방식을 둘러싸고 강경한 발언들이 오가면서 결국 5월 23일 미국에서 한미정상회담이 있은 직후인 5월 24일 미국대통령 트럼프가 한국 대통령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전격적으로 북미정상회담 취소를 선언해버렸다. 전 세계인들을 당황하게 만든 행위이거니와 누구보다도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한반도 평화를 절실히 원하는 우리 모두를 하루아침에 배신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자 북한에서 북미정상회담을 원한다는 전언들을 즉시 내놓았고, 이에 취소한 하루 만에 트럼프는 ‘취소한 것을 취소할 수 있다’는 취지의 모호한 발언을 내놓았다. 북한의 전유물이라 여겨왔던 이른바 ‘벼랑끝 전술’을 트럼프 미국 쪽에서 구사한 것 아니냐, 하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와중에 5월 26일 오후 김정은 위원장의 요청으로 문재인 대통령이 판문점 북쪽 지역의 <통일각>으로 올라가 극비리에 두 시간에 걸쳐 2차 남북정상회담을 했다. 두 정상이 뜨겁게 포옹하는 장면이 방영되었다. 그 이후, 이 글을 쓰는 이 시간, 텔레비전에서는 북미정상회담을 둘러싼 뉴스들이 연신 급하게 전달되고 있다.   사진 출처 - 노컷뉴스 3.  다들 아는 이야기다. 하지만 역시 인권연대의 <수요산책>을 통해 이 정도로나마 정돈해서 기록해 두고 싶은 마음이다. 중요한 귀결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 한반도 남북의 진정한 평화를 바탕으로 한 공존공영의 탄탄한 길을 여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작금에 이루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들을 통해 이러한 길을 열 수 있는 역사적인 의식을 간추리는 일이다.  위 최근의 일들을 보면서, 직접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1946년 1월 16일 예비회담을 기점으로 같은 해 3월 20일부터 1947년 10월 21일까지 한국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미국과 소련 사이에 열렸던 이른바 <미소공동위원회>를 생각하게 된다. 이 위원회는 1945년 12월 16일에 전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열렸던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의한 <한국 문제에 관한 4개항의 결의서>에 들어있었던 ‘임시정부 수립을 돕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에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그 결의문에 ‘미국과 소련, 영국, 중국은 임시정부 수립을 돕기 위해 최대 5년간의 신탁통치를 실시한다.’가 함께 들어 있었다. 그러니까 ‘미소공위’의 핵심 의제는 38도선을 경계로 양쪽에 분할 주둔한 미국과 소련의 일시적인 군정 상태를 종식시키고 남북의 통일정권 수립을 어떻게 진전시켜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신탁통치였다. 한국의 지도자들은 누구도 신탁통치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 둘러싸고서 또는 이를 이용해서 한국 지도자들 간의 정치적 우위를 둘러싼 각종 쟁투와 갈등 및 암살 등이 있었고, 또 이를 역용한 미국과 소련의 냉전적인 대결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미소공위는 결렬되어 해산되고 말았고, 한국문제가 유엔에 상정되어 1947년 11월 14일 유엔 감시 하에 남북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가결하였지만, 소련이 북쪽의 인구가 적다는 점을 염두에 둔 탓에 이를 거부하고, 1948년 5월 10일 많은 반대 속에 남한 단독으로 총선거를 실시하여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고, 북조선에서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하여 남북 분단이 고착되었고, 결국에는 한국전쟁이라는 최고도의 비극을 낳게 된 것이다.  이제 그동안 7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소련은 해체되었고, 그 대신 중국이 미국과 더불어 2극 체제를 형성하는 한 축으로 부상했다. 애초 철저히 외세에 의해 분단된 한반도는 분단과 전쟁 그리고 휴전으로 이어지면서 ‘분단-휴전 체제’를 악용하는 내외의 이데올로기적인 냉전 내지는 호전 세력들에 의해 여러모로 그야말로 체제적으로 상처받고 불이익을 당하고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는 등의 처절한 역사를 거듭해 왔다.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힘은 한반도 거주민 당사자들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고, 그렇지 않고서는 설혹 해결이 된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언제든지 다시 수렁에 빠질 수밖에 없다.   내가 아닌 자들을 철저히 배척하자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른바 대타성(對他性), 즉 내가 아닌 것들과 관계를 맺고 상호작용함으로써 존재를 유지한다는 것은 만물의 근본 이치다. 하지만, 자성(自性), 즉 늘 제 자신이고자 하는 위력을 지니지 못하는 한 존재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 또한 만물의 근본 이치다. 자성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추구하는 대타성은 의존에 이어 굴욕과 수치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대타성을 무시하고서 자성만을 추구하는 존재는 독단에 이어 고립과 자폐로 이어지고, 권력을 지닐 경우 그 권력은 배타적인 폭력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미국 대통령 트럼프가 김정은 위원장이 중국 시진핑 주석과 두 번 만나더니 태도가 변했다는 말을 하면서 ― 물론 그 외 다른 말들도 했다. ― 북미정상회담을 취소한다고 선언했다. 애초에 1차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북미정상회담 이야기가 나왔을 때 ‘재팬 패싱’에 이어 ‘중국 패싱’ 이야기가 나왔다. 곧바로 최초의 북중정상회담이 이뤄졌다. 시진핑 중국주석이 김정은 위원장을 그처럼 성대하게 맞이할 줄 몰랐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또 다시 외세다. 미국과 중국이다. 만약 트럼프의 북미정상회담 취소가 한편으로 중국의 배후 개입을 차단하기 위한 전술이라면, 한반도 문제는 또 다시 ‘그들만의 리그’를 위한 보조 장치에 불과한 셈이다. 그런데 만약 갑자기 극비리에 이루어진 2차 남북정상회담을 하면서 ―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이는데 ― 문재인 대통령이 전혀 미국대통령 트럼프와 사전에 아무런 조율 없이 이루어진 것이라면, 이는 우리 나름의 자성적인 위력을 바탕으로 외세에 의거한 힘들을 조절해 나가는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이다. 더욱이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북미정상회담이 남북미 정상회담으로 이어질 것으로 점쳐지기도 한다. 이는 요컨대 남측이 북측을 끌어안음으로써 북측에게 중국에 대한 자성을 강화시키는 대타적인 계기로 작동하고, 북측이 남측을 끌어안음으로써 남측에게 미국에 대한 자성을 강화시키는 대타적인 계기로 작동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함축한다고 할 수 있다. 한반도 양쪽이 서로의 자성과 대타성의 위력을 공히 호혜적인 방식으로 강화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남들이 자른 것을 우리가 잇는 것이다.” 4.  한 가지 덧붙일 것이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촛불시민혁명이 낳은 대통령이다. 촛불시민혁명은 세계 역사상 유례가 드문, 평화로써 성공한 혁명이고, 아직 실현 과정 중에 있는 혁명이다. 이는 한국의 정치적인 자성이 얼마나 강한가를 전 세계에 드러내 보인 엄청난 사건이다. 그 평화에 입각한 집단적 자성의 힘이 바탕이 되어 작금의 세계사적인 대전환의 물꼬를 트는 위업을 수행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아직 촛불은 우리의 삶과 존재 속에 이미 늘 충분히 켜져 있고, 앞으로도 필요하면 얼마든지 또 다시 촛불은 광장에 집결될 것이다. 결국, 우리의 촛불시민혁명은 앞으로 있을 세계사적인 평화의 역사 전개에 충족이유의 핵심으로 작동할 것이다.
2018-05-30 | hrights | 조회: 1337 | 추천: 3
홍미정/ 단국대 중동학과 조교수 □ 팔레스타인 대의와 이슬람협력기구 정상회의  지난 5월 14일은 이스라엘 건국 70주년 기념일이었고, 미국이 대사관을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전한 날이었다. 같은 날 팔레스타인 가자인들은 가자와 이스라엘 사이에 놓인 1949년 휴전선으로부터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항의시위를 하였다. 이날 시위대에 대한 이스라엘의 실탄과 최루가스 공격으로 62명의 가자인들이 사망하였고, 2,700명이 부상당했다.  이스라엘의 가자 시위대 학살과 미국 대사관 예루살렘 이전에 항의하기 위하여, 5월 18일 이슬람협력기구(OIC) 의장국 터키는 긴급 OIC 정상회의를 이스탄불에서 소집하였다. 이 회의는 이스라엘의 행위와 미국 대사관 이전을 비난했을 뿐, 구체적인 대응 행동 지침을 제시하지 않은 말잔치에 불과했다.  이 회의에 터키 대통령, 카타르 왕, 이란 대통령은 참석하였으나, 사우디, UAE, 이집트 정상들은 참석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 수반 마흐무드 압바스 조차도 귀 수술을 이유로 참석하지 않고, 총리 라미 함달라가 대신 참석하였다. 그런데 요르단 왕과 쿠웨이트 왕은 이 회의에 참석하였다. 요르단 왕은 예루살렘 성지의 관리자로서의 특별한 지위 때문에 불가피하게 참석한 것으로 보이며, 쿠웨이트는 최근 역내 분쟁에서 비교적 중간자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사실, 이 회의는 다음 달 6월 24일에 실시될 터키 대선과 총선을 위한 에르도안과 정의개발당(무슬림형제단)의 인기몰이를 위한 행사처럼 보였다. 최근 에르도안과 정의개발당은 터키에서 가자학살 규탄 시위를 주도하였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과 터키의 긴밀한 우호관계를 생각해본다면, 최근 에르도안 행보는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을 위한 행위라기보다는 자신의 국내 반대파에 맞서고, 국내 지지자들을 결집하기 위하여 팔레스타인 문제를 활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5월 16일 에르도안은 가자 시위대 학살 행위 항의하여, 이스라엘과 미국 주재 터키 대사들을 소환하면서, ‘이스라엘을 테러 국가’라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5월 18일 이스라엘 외무장관은 ‘에르도안을 피로 얼룩진 손을 가진 폭군’으로 지칭하면서도 “이스라엘 총리 네타냐후를 비롯한 몇 사람들과 의견을 조율한 결과 터키와의 관계를 단절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스라엘은 터키와의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얻을 것이 훨씬 더 많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팔레스타인 문제를 활용하는 에르도안의 셈법을 익히 알고 있다. □ 이스라엘 패권을 위한 아랍/이슬람권의 내부 투쟁  [2018년 중동분쟁 현황표]에서 보듯이 중동 역내 주요 국가와 세력들 사이에 분명한 경쟁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표는 중동 역내 분쟁들이 3가지 차원에서 연동되어 진행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부 반대파들의 정치개혁 요구, 지역 강국들의 패권 경쟁관계, 열강들의 개입이 그것이다. 최상위 세력은 미국이고, 이스라엘은 종교, 종파와 종족을 넘어서 중동 국가들과 협력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이스라엘과 협력하는 대표적인 아랍 국가들인 사우디와 카타르는 양 국가 모두 수니 이슬람 와하비 분파다. 2017년 6월 5일 사우디는 카타르를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하고, 외교관계를 단절하였다. 사우디가 카타르를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한 근본적인 이유는 카타르가 사우디 정부 반대파인 알 사흐와(무슬림형제단)를 지원하기 때문이다.  경쟁 구도의 한 축에는 사우디 정부, UAE 정부(아부다비), 바레인 정부, 이집트 정부, 요르단 정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서안), 리비아 동부(칼리파 하프타르)가 존재한다. 다른 축에는 터키 정부와 카타르 정부가 후원하는 역내 무슬림형제단 분파들이 존재한다. 사우디의 알 사흐와, UAE의 알 이슬라흐, 바레인의 알 이슬라흐, 요르단의 이슬람 행동전선, 이집트의 자유정의당, 쿠웨이트의 이슬람 입헌운동, 팔레스타인의 하마스(가자), 리비아의 정의건설당 등 아랍 각국 무슬림형제단은 각각 강력한 정부 반대파를 구성하고 있다. 현재 카타르와 터키는 매우 긴밀한 동맹이다.  2013년 12월 이집트가, 2014년 3월 사우디와 UAE가 무슬림형제단을 테러리스트 단체로 규정하였다. 현재 이집트, 사우디, UAE, 시리아뿐만 아니라, 카타르조차도 자국 내 무슬림형제단 활동을 금지하고 있다. 1999년 카타르 내 무슬림형제단은 자발적으로 해체를 결정하였으나, 카타르 정부는 해외 무슬림형제단을 지원하고 있다. 이는 국제 무슬림형제단과 카타르 정부 사이에 일종의 강력한 전략적인 동맹관계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에서 무슬림형제단은 가장 잘 조직된 이슬람 공동체이며, 수 백 개의 모스크와 벤처기업 등을 운영하고 있다. 무슬림형제단과 미국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볼 때, 1952년 이집트 자유 장교단 혁명 이후, 미국은 중동에서 사회주의자들에 맞서는 대항마로서 무슬림형제단과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하고, 유지해왔다. 게다가 자국민 30만 명이 채 안 되는 카타르가 자국민이 2천 만 명에 이르는 사우디의 경쟁상대로 보이는 이유는 카타르가 보유한 풍부한 천연가스 자원뿐만 아니라, 국제 무슬림형제단 네트워크와 1만 명에 이르는 미군주둔 때문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결국 카타르와 무슬림형제단의 역내 영향력을 강화시키는 데 미국도 한 몫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중동국가들의 역내 경쟁구도는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이 주변 중동국가들을 무시하고 팔레스타인에 대한 점령정책을 강화시킬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이 경쟁 구도가 중동국가들의 정부 반대파들을 활성화시킴으로써 정권의 불안정 상태를 심화시킨다. 각국 정부는 정부 반대파에 맞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스라엘과 미국에 대한 의존을 심화시킨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중동 역내 패권을 손쉽게 확보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은 외부 후원자를 잃는다.
2018-05-23 | hrights | 조회: 1653 | 추천: 7
정재원/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북한의 핵 보유 선언, 그리고 그에 이은 미국의 북한 핵시설 폭격 위협과 그로 인한 한반도에서의 전쟁 위기 고조라는 위기 국면이 지속되었던 지난날들을 뒤로 하고 바로 며칠 전 역사적인 남북정상 회담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과거의 유사한 합의들과는 달리, 한 번의 쇼로 끝나지 않고 회담에서 합의한 대로 하나하나 약속이 이행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으며, 실제로 몇몇 일들은 벌써 시행이 되었다. 아직 원칙론적 수준이거나 예전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평가도 있으나, 전체적인 분위기로 보아 분명 한반도 평화와 번영, 나아가 통일로의 길이 될 수도 있는 희망찬 첫 발걸음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미국과 북한을 전향적으로 움직이게 한 원동력인지는 명확하지 않기에, 이 모든 것이 매우 신중하게 접근해야 하는 것은 두 말 할 나위도 없다. 더욱이, 미국과 한국, 중국과 일본, 러시아 등 주변 국가들, 그리고 심지어 북한 내부에서도 이러한 분위기가 자신의 이익과는 맞지 않는 집단들이 존재하기에 과도한 낭만은 분명 금물이다. 아마도 남북 간 협력 사업들이 구체화되기 시작하면 안보 등의 문제를 내세운 국내외 여론들의 반격도 만만치 않을 것이며, 오랜 기간 안보 문제에 특히 민감한 감각을 갖게 된 많은 국민들도 이러한 여론에 휘둘릴 가능성도 높다.  이번 회담에서 제안된 우선적 현안들 가운데 놀라운 것 중 하나는 바로 남북한 철도 및 도로 연결에 대한 부분이다. 그 동안 러시아 등 북방경제와의 연결에 있어서 가장 중요했으나 북한 영토를 지나가야 하기 때문에 사실상 실현 가능성 측면에서 가장 후순위로 밀려 있었던 남북한 종단 철도와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연결 사업이 갑자기 현안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철도 협력이 현실화되려면 비용과 시간이 만만치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어떤 제안보다도 남북 뿐 아니라 러시아로 나아갈 수 있는 실질적 경제협력의 인프라를 구축한다는 측면에서 이는 매우 고무적인 합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 출처 - freepik  남북철도 연결 뿐 아니라, 이를 시작으로 다양한 북한 지역 개발 협력, 기업 진출 등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그 동안 북방경제협력이라는 이름 하에서 정부 차원에서뿐 아니라 기업 단위에서도 이미 수많은 공/사기업들이 러시아를 비롯한 옛 유라시아 지역들로의 진출 전략을 수립해 왔다. 이제 남북 간 경제 교류 협력이 현실화될 경우 지금까지의 이러한 전략들은 한층 더 확대되어 현실화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 동안 다소 소극적이었던 러시아 역시 급작스러운 남북 간 화해협력의 분위기 속에서 남북러 삼각협력을 적극적으로 강조하기 시작했다는 것도 우리에게 분명 긍정적 전망을 낳게 하는 신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러 상황으로 인해 반격을 크게 맞을 수도 있는 과도한 낙관론들이 지배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으나, 그 보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다른 데에 있다. 그것은 바로 한국 사회, 특히 기업들의 변화 없는 북한 및 북방 지역으로의 진출이 바로 그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동남아 등지에 지상사를 파견하고 있는 한국 기업들은 장시간 노동 시간과 가혹한 노동 과정 통제, 노동자 조직 파괴 등으로 악명이 높다. 뿐만 아니라, 기업인들을 포함한 한국 교민들은 현지인들과 현지 문화에 대한 비하와 멸시로 늘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업인들과 관광객, 그리고 교민들 모두 다양한 형태로 현지 여성들의 성을 착취하는 것 등 국제적인 문제를 야기하고 있기도 하다.  수년 전의 자료이긴 하지만, 기업인권네트워크의 보고서 등에 따르면, 미얀마에서는 이랜드와 한세실업의 미얀마 자회사인 코스텍 인터내셔널과 같은 한국기업이 임금 체불, 저임금, 강제적인 초과근무(보수 미지급), 사회보장급여 미지급, 열악한 노동환경, 유급휴가를 지불하지 않는 크고 작은 노동권 침해와 부당해고가 만연해 있었다. 캄보디아에서는 ‘가원’의 사례에서처럼 임금체불과 노조 가입 노동자들에 대한 강제 해고 등이 자행되어 왔다. 베트남에서도 일반적으로 한국 기업에서의 노동 강도와 시간은 높은 데에 비해서 임금은 현저히 낮고, 고용 계약을 준수하지 않고 사회보장금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필리핀의 자유무역지대에는 3,000여 개의 한국 기업이 진출해 있는데, 이곳에서도 부당해고와 같은 노동권 침해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었다.  인도네시아에서도 포스코와 삼성, 대우 그리고 그 자회사들과  한국 소유 인도네시아 대기업인 코린도 그룹은 팜 오일 농장을 만들기 위해 주요 삼림지를 베어 왔으며, 현지인들의 권리와 생계수단을 침해하고, 때로는 열대 우림을 없애기 위해 벌목한 나무를 태우는 인도네시아 법에 위배되는 행위를 하기도 했었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조폐공사와 대우인터내셔널이 우즈베키스탄 정부가 아동에 대한 강제노동으로 생산되는 목화를 사용하고 있었다. 인도에서도 포스코는 오딧샤 지역에 제철소를 짓고 철광석을 채취하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주민들이 강제로 이주되면서 삶의 터전을 잃게 되는 등 인권 침해를 방조하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 스웨덴에 본부를 둔 국제환경보건단체 IPEN과 베트남 시민단체 CGFED가 조사한 한 보고서에 따르면, 삼성에 근무하고 있는 여성노동자들은 모두 과도한 초과근무로 인한 극도의 피로를 호소했고, 작업 중에 기절하거나 어지러움을 느낀 적이 있으며 근시, 다리 부종을 겪는 경우도 있다고 밝혔다, 특히, 임신한 경우에도 적절한 휴식을 취하지 못하여 유산하는 경우가 매우 흔하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보고하였다. 또한, 이들은 제품 제조과정에서 사용하는 유해물질에 대한 정보 및 대처방법에 대한 교육을 받은 바가 없으며, 이들이 유해물질에 노출되었을 수 있다는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이렇듯, 한국 기업들의 적폐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임에도 적극적인 은폐로 인해 잘 알려지지 않은 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한국 기업들 수만큼이나 어마어마한 규모로 존재하는 사실상 한국인들이 운영하는 한국 성매매 업소의 문제이다. 위에서 언급한 동남아 국가들과 중국 등지에는 한국인들이 운영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한국식 성매매 업소가 현지의 부패한 관료, 경찰, 그리고 범죄조직들과 한 패를 이루어 국제범죄의 한 축이 되고 있다. 이들 업소의 주요 고객들은 현지 교민, 관광객 등도 있지만, 핵심적 집단은 바로 기업 지상사 직원들과 출장자들이다. 이들 업소는 이들 국가의 가난한 여성들을 유인하여 한국 남성들의 성적 착취 대상으로 삼는 등 국제적 인권 문제의 주범으로 대두한지 오래다. 그러나 한국 기업들은 접대라는 명분으로 공공연하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기업 활동의 한 부분이라고 떠벌이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러시아 등지에서도 그대로 이식되었다. 소련 붕괴 직후부터 이미 동남아 등지에서와 유사한 방식으로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즈 공화국과 같은 중앙아시아 국가들에도 부패한 권력과 범죄 집단에 뇌물을 바쳐가며 가난한 이들 국가의 여성들을 끌어들여 불법 성매매업소를 대대적으로 확산시켰다. 이후 유사한 구조는 러시아 등지로도 확산되었는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업소의 소위 고객은 바로 한국 기업 지상사와 공관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김영란법 등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공관원 등의 출입은 어려워졌지만, 여전히 기업인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접대라는 이름으로 현지 여성들에 대한 성착취를 정당화하고 있다.  이렇듯 현재의 한국 기업들, 나아가 한국 사회의 끔찍한 노동 인권, 여성 인권, 환경 의식 그리고 사회복지의 현실을 그대로 둔 채 추진되는 남북 경제협력은 재앙으로 이어질 수 있다. 현재와 같은 상황이라면, 한국 기업이 가는 곳이면 반드시 북한 여성들의 성매매 여성화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이미 한 편으로는 끔찍한 차별과 혐오의 감정이 만연해 있으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적극적으로 조선족 동포 여성들과 탈북 여성들을 성매매 산업으로 유인하고 있는 이 끔찍한 상황은 경제적 교류가 활발해지면 대규모로 이루어질 것이 분명하다.  페미니즘 논쟁에 이어 미투와 위드유 운동이 한국 사회를 강타하고 있지만, 놀랍게도 충격적인 수준의 성폭력과 성희롱, 성착취의 현장인 성산업에서의 문제는 철저하게 은폐되고 있다. 북방경제협력의 확대 논의 속에서 새로운 시장으로의 진출 외에는 진보적인 것을 찾아 볼 수 없는 기존의 논의 구조는 이제 타파되어야 한다. 남북 간 경제 협력이 구체화되기 전 이러한 한국 기업들의 추악한 현실들에 대해 적나라한 폭로와 반성이 실현되어야 한다. 동북아의 평화가 찾아오는 것은 사회현실의 변화가 수반되어야만 지속가능하다. 문재인 정부의 사람 중심 철학이 말로만 하는 구호가 아니길 진심으로 빈다.
2018-05-03 | hrights | 조회: 1108 | 추천: 2
김재완/ 방송대 법학과 교수  하버드 로스쿨 교수인 웅거(Roberto Mangabeira Unger)는 그의 저서 『Democracy Realized』에서, “정치의 속도를 올리고 기본 개혁의 반복적이고 빈번한 실천을 촉진하기 위해 고안된 헌법적 양식은, 사회의 정치적 대표성을 확보할 다양한 통로들과 강력한 신임투표제적인 요소를 결합해야 한다. 예컨대, 강력한 의회는 실질적인 정치적 주도권을 가진 직접 선출된 대통령과 공존하게 된다”고 말한다(1). 웅거의 이 말은 제왕적 대통령제인 우리나라의 현실정치와 최근의 개헌논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만든다.  선출권력인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행정 권력을 확실하게 견제할 수 있는 권력은, 또 다른 선출권력인 국회이다. 그래서 국회는 행정 권력을 확실하게 견제할 수 있는 강력한 힘과 수단을 가져야만 한다. 그러나 같은 대통령제 국가인 미국 의회와 비교해 볼 때, 우리의 국회는 행정 권력을 확실하게 견제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 이유에 대해서 곽노현 징검다리교육공동체 이사장은 최근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촛불개헌’ 관점에서 본 정부개헌안 시리즈)에서 다음과 같은 점들을 지적하고 있다. 첫째 정부의 법안제출권과 시행령 위임관행으로 말미암아 입법권 자체가 약하다는 점, 둘째 대통령의 고위직 임명에 대한 통제권이 거의 없다는 점, 셋째 정부의 예산안에 대한 통제권이 약하다는 점, 넷째 법집행감독에 필요한 회계감사원을 산하에 두고 있지 않을 뿐더러 청문회실시권한 행사요건이 까다롭다는 점, 다섯째 입법권 행사에 필요한 연구조사기능이 약하다는 점 등이다. 또한 우리나라의 집권당 국회의원은 대통령의 눈치를 볼 일이 많게 되는데, 그 이유는 대통령이 사실상 전략공천권과 비례대표공천권을 장악할 뿐 아니라 장관자리도 겸직시켜줄 수 있기 때문이라는 점도 지적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우리나라 국회가 행정 권력을 충분히 견제하지도 못하고 입법기능도 부실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국회의원들은 제왕적 권력을 누린다. 국회의원들은 4년마다 반복되는 선거에 따른 정치적 책임 이외에는 임기 동안 어떤 다른 견제도 받지 않으며, 선수의 제한도 받지 않는다. 일인의 승자만이 독식하는 소선거구제가 오랫동안 고착되면서 정책적 대안 생산을 통한 국회 입성보다는, 지역감정과 토호세력을 등에 업은 기성 거대정당에의 공천만으로 국회입성이 가능한 구조도 형성되어 왔다. 때문에 거대정당의 갑옷 안에서 국민과는 괴리된 당리당략에 충실하기만 하더라도, 개별적 권력을 반영구적으로 누릴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현재 우리의 헌법과 법제도의 양식으로는 정치의 속도를 올리거나, 기본 개혁의 반복적이고 빈번한 실천을 촉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오랫동안 고착화․토착화되어 온 거대양당의 적대적 공생의 정치구조 안에서, 그들이 주도하고 만들어내는 권력구조 재편의 개헌과 법개정 내용은 결국 그들만의 리그를 재생산하는 것일 뿐이게 된다. 자신들의 정치적․권력적 이해관계에 첨예하게 얽혀 있는 사항들을 자신들의 손으로 만들어내는 자가당착과 자기대리, 쌍방대리가 행하여지는 것이다. 때문에 개헌은 철저하게 국민주도로 수미일관하게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리고 그 핵심내용으로는 실질적인 입법기능을 촉진하기 위한 인력(개별 의원에게 따르는 보좌관 등을 폐지)과 예산의 적정하고 적절한 재배치와 국회의원 정수를 대폭 늘리는 방안, 국민 각 계층이 갖는 사회경제적 이해관계를 제대로 대변할 수 있는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도입, 장차관 겸직의 금지, 4년 임기를 2년으로 하는 임기단축과 선수제한이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개헌과 입법이 국민의 손으로 이루어져야만, 권력구조에서부터 일상에 이르기까지 바람직하고 올바른 개혁이 반복적이고 빈번하게 실천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비로소 제왕적 대통령과 국회의원에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권력구조로 재탄생할 수 있을 것이다. (1) 웅거의 저서는 최근 이재승 교수(건국대 법전원)에 의해 [민주주의를 넘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다.
2018-04-24 | hrights | 조회: 883 | 추천: 1
윤영전/ (사)평화연대 이사장  효골의 문중 춘제(春祭)에서 선대의 효열비(孝烈碑)앞에 섰다. 내 고조 선대 조부모의 효와 열행에 대한 공적비다. 일찍이 광주지(光州誌)와 향교지에 효열기록과 함안대종회 족보와 호남편람에도 올라있다. 선대의 충효가전이 가훈이고 수백 년도 넘은 문중에서 직계조모 이하 삼대(三代)가 효행가문(孝行家門) 일원으로 살아오고 있다.  내가 태어난 곳은 조선조 성종 때의 행정구역으로는 광주군 효우(孝友)동이다. 무등산 자락으로 이어진 지명이 효천(孝泉)으로, 또한 효지(孝池)와 효덕(孝德)동이다. 1950년도부터는 초등학교 명칭도 효지(孝池)학교에서 효덕(孝悳)학교로 오늘에까지 이어 오고 있는 효골의 고장이다.  이렇게 지명이 효(孝) 자(字)로 있어, 고을 이름을 효(孝)골이라 했다. 심지어 성(性)까지도 효골 윤 씨라 부르기도 했다. 효우동이나 효골이기에 효자 효녀 효부 효손의 기록이 광주고을의 자료집에 게재되어 있다. 효골에 나의 7대 조부 함안윤씨(咸安尹氏) 광훈(光訓)이 효자(孝子)로, 조모인 나주임씨(羅州林)가 열부(烈婦)로 기록되고 있다. 함안(咸安)윤씨는 파평(坡平)윤씨의 장자(長子)계 가문이기도 하다.  효열 실행이 자료에만 있는 게 아니다. 60년 전, 어린 시절에 백부 추강(秋崗)과 부친 동강(東崗)이 선대의 효열비를 건립하려고 석물을 준비하고 비문을 짓고 쓰는 모습을 눈여겨보았다. 당시에는 석공을 정하여 몇 달이나 사랑채에서 숙식하면서 2천자가 넘는 비문을 손수 돌에 새기었다. 참으로 힘든 효열비 건립이었다. 요즘 같으면 기계로 7일이면 가능한 비문 작업이었다.  거의 6개월 만에 효열비를 완성하여 대로에 세웠다. 많은 효골사람들이 비문을 보고, 지극한 효열의 사연에 감탄하기도 했다. 이에 우리 가문의 효열행이 널리 알려졌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후에도 3대 효열가문이 계속 이어졌다. 나의 양조모는 효열비 선대의 고손이 되는 며느리이다. 양반가에 시집와서 3개월 만에 부군의 급병으로 17살에 청상과부가 되어 67년을 사셨다가 운명하셨다. 사진 출처 - 경남도민일보  재가(再嫁)하지 않고 양자를 입적해 8남매 손자녀를 양육하여 열녀로 표창되었다. 여기에 양자인 부모님도 생부모와 양부모에 효도하여 효자 효부가 되고 손자인 필자도 20년 전에 효자로 표창되어 지난해 파평윤씨 대종회에서 표창을 받았다. 또한 두 손자며느리가 효부와 열부로 표창 받아 직계로 3대가 7인의 효 가문을 이루었다.  이렇듯 효골에 효 열행 후손들이 이어져갔다. 예전에 효부가 드물게나마 있었지만 현대에까지 이어져 온 것은 아무래도 지명인 효에 대한 연관성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바로 내 집안의 효행이기에 효행 표창을 받은 우리 가문은 그저 조신하며 살아가야 했다. 양조모의 오랜 수절과 후손들 양육은 아무래도 고조 시부모들의 행적에 영향을 크게 받았을 터이다.  내 부친과 나의 효자표창은 물론, 손자며느리까지 효행을 이어간다는 것은 드문 일이다, 시대의 변화에 차츰 효행이 외면당하고 있는 편이다. 그러나 충효가전의 유훈은 지켜가야 한다. 그러기에 효에 대한 실천을 은근히 독려한 면도 없지 않다. 필자도 백부와 부친이 선대의 효열비를 건립하는데 열심히 바라보았었다.  한 세대 전에 효부열녀인 양조모님을 효골 도선산 광유재(光裕齋)옆에 이장하고 정성스럽게 열녀비를 세워드렸다. 5년 전에는 나주 봉황 선산에 부친의 효자비도 세웠다. 이처럼 효가 이어져 자랑스러운 가문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중압감이기도 하다. 가문은 조선조 성종 계비인 제헌왕후(齊獻王后) 윤비의 15대 후손이다. 양반가 시대도 아니기에 운신의 폭이 좁다. 허나 효는 필요덕목이 아닐까?  효열의 후손들은 절제하고 겸손하며 행실에 있어서도 제약이 뒤따른다. 효는 친 조부모님에 대한 효도뿐만이 아니다. 형제간이나 집안 일가 간에는 물론, 이웃 간에도 효도는 마땅한 행실이다. “효자 집안에 효자 난다”고 하지만 “효자 집안에서 그런 불효 행실을 할 수 있느냐?”는 주변의 시선도 따갑다. 효행의 실천은 도덕과 윤리에 충실한 모범이기에 효행가문의 삶은 고난의 연속일 터이다.  이제는 선대의 효열에 대한 기준과 현실의 차이가 크기만 하다. 가령 후손들 중에 예전 같은 청상과부로 남는 일이 쉽지 않다. 현대의 흔한 이혼들이 후손들에게 다가오고 있는 현실이다. 당사자들이 좀 더 신중하면 극단적인 결정을 쉽게 내지지도 않을 터이다. 사별이라면 어찌 할 수도 없다. 효행은 가화만사성의 근간이다.  이제는 효열가의 기준을 달리하는 방법밖에 없다. 청상과부에게 절개나 정절을 지키라고 하기보다 효에 대한 정성을 다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간 양반에 대한 비난과 원성이 높았다. “양반이 밥 먹여주느냐? 돈이 없으면 양반도 없다. 돈이 제일이다” 라는 소리가 높더니 배금주의가 고개를 들었다. 너무나도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고 돈과 권력 앞에 무력한 사회이기는 하지만, 돈과 권력만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 않은가?  나는 그동안 생각했다. 효열가문 후손의 삶은, 무엇보다도 윤리도덕을 바탕으로 실천하는 길이리라. 아무리 돈과 권력이 세상을 좌우 한다지만, 양심과 인간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특히 정의와 진실 앞에 정정당당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부정과 불의에 침묵하지 않고, 공동선을 향한 길로 가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그래서 정의사회를 이루고 효의 실천에 다가가는 평화로운 사회가 오지 않을까.  현대에 와서 효열에 대한 인식이 점점 쇠퇴하고 효를 행하려는 자에게도 부담을 안겨주기도 한다. 그러나 효야 말로 오늘날의 우리사회의 가장 큰 덕목이요 버팀목이다. 효를 근본으로 알고 바른 행실로 가는 사회와 가정은 곧 평화와 화목을 이룬다. 도덕과 효보다 돈과 권력에 함몰되어 있는 사회와 가정은 공동선을 이루는데 큰 걸림돌이 된다.  성년이 되어서 윤문대종회를 출입하면서 종훈이 “충효가전”이었다. 여기에 장자계 대종회장을 맡으면서 실훈을 “충효덕학”으로 정하고 효자 효부 열녀를 널리 표창했다. 갈수록 귀한 효와 열행에 대한 표창자 찾기다. 아울러 개인적으로 모교 초등학교에 효행장학생을 뽑아 매년 졸업식에 표창을 하면서 효행을 실천하고 있다.  부족한 효자로 살고 있는 필자가 오늘의 효열에 대한 생각을 해보았다. 사라져 가는 효열정신이 구시대적 발상이 아닌, 살아가는 귀감이 근본이라고 믿는다. 삼대효열가문으로 살아가기가 순탄하지 않았고 앞으로 더욱 어려울 터이다. 그러나 그 길이 충효가문의 전통을 이어가야 하기에 어떠한 난관에도 효행을 실천해 나갈 것이다. 이 길이 효정신이 사라져가는 현실에 효 정신을 살리는 길이 아닐까.   * 윤영전(尹永典) 아호: (九巖 孝崗) 당호: 전호당(傳孝堂)     작가(수필 소설 서예) 칼럼니스트. 한국작가회의 회원     저서: 수필집(도라산의 봄)소설집( 못다핀 꽃) 에세이집(평화, 아름다운 말)             고희문집(인연,아름다운 만남) 수필선(강물은 흐른다) 구암가곡선집(CD)     편저: (평화통일 삶을 살다) (한반도 평화통일디자인) (통준사 평화통일)
2018-04-18 | hrights | 조회: 1442 | 추천: 4
신하영옥/ 여성운동연구활동가 네트워크 ‘젠더고물상’  “하나, 국가는 고용, 복지, 재정 등 모든 생활영역에서 성별에 따른 차별과 폭력을 제거한다.”  “하나, 국가는 실질적 평등을 실현하기 위하여 적극적인 조치를 실시한다.”  “하나, 선출직과 임명직 등의 공직 진출에서 여성과 남성의 동등한 참여를 보장한다.”  지난 3월 19일 여성계는 26일 발표를 앞둔 개헌안에서 ‘성 평등’ 조항이 빠진 것에 대해 ‘명백한 퇴행’이라며 대통령 개헌안을 규탄하는 위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전문에 성차별과 폭력제거의 내용을 추가하여 헌법이 추구하는 가치가 성 평등에 있음을 명시하였고, 실질적 평등실현을 위한 적극적 조치와 남녀동수의 조항을 추가 신설하도록 요구했다. 이번 개헌이 국민의 절반인 여성의 시민권이 실질적으로 발현되는 방향으로 추진되어야 함을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여성들의 이러한 요구와 주장은 결국 대통령의 개헌안에 반영되지 못했다. 청와대의 입장은 이러하다.  “(전략) 여성계의 강력한 요구 중 하나는, 공직 진출 시 여성/남성의 동등한 참여 보장을 개헌안에 넣어달라는 것이다 (중략) 현 개헌안처럼 ‘국가는 성별•장애 등으로 인한 차별상태를 시정하고 실질적 평등을 실현하려 노력한다.’라는 조항이 이를 포괄 (중략) 헌법은 간결해야 한다는 원칙 때문이다.”(진성준 청와대 정무비서관. 3. 23)  라고 밝히면서 “여성계가 이 문제를 꼭 좀 이해해주실 것을 당부”하였다. 여성들은 2016년 중반부터 여성의 관점에서 헌법을 공부하는 모임을 시작으로 2017년 1월 ‘헌법개정여성연대’를 구성하여 성평등 조항 조문작업을 진행하여 <헌법과 젠더>를 발행하였다. 또한 국회, 정당, 시민,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토론회 및 집담회 개최와 언론기고활동, SNS활동 등을 2018년 2월까지 활발히 펼쳐왔다. 무엇보다 ‘페미니스트 대통령’이라는 문 대통령의 주장을 믿으려했다. 그러나 3월4일 여성대회가 있는 그 날, 성평등 조항 삽입이 어려울 것이라는 ‘비보’를 전달받은 여성들은 정해구 개헌특위 위원장을 비롯하여 정세균 국회의장을 만나 입장을 전달하고, 세 번의 입법청원과 기자회견을 여는 등 바쁜 3월을 보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표된 개헌안은 포괄적 차별금지 조항에 성별 포함, 그리고 난데없는 여성노동보호조항이 추가된 것이 전부였다.  왜 이런 결과가 초래되었을까? 개헌안을 보면서 소위 ‘진보남성들의 연대의 허위’를 본다. 정해구 위원장을 비롯하여, 내로라하는 진보를 자처하는 남성들, 평소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우려하고, 고민하고, 실현을 위한 방안을 주장하셨던 남성들이 포진해있는 개헌특위의 민낯을 보게 된다. 민주주의는 항상 주장하듯이 간단하다. 1인 1표를 행사하게 하면 된다. 핵심은 ‘실질적’인 행사가 실현되도록 하는 것이다. 인구의 절반인 여성들의 시민권이 실질적으로 유리천장, 미투운동에 대한 ‘펜스 룰’ 같은 여성 억압적이고 차별적인 관행과 문화, 제도에 의해 실현되고 있지 못할 때 우리는 그 구조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없다. 빈민, 농민, 노동자만이 민중이 아니다. 권력과정, 즉 정치결정과정에서 밀려난 집단은 민중이다. 여성은 정파가 아니다. 여성은 민중이라는 ‘계급’이다. 국민의 절반이지만 소수자이고, 국민의 절반이지만 권력과정에 접근권이 결여되고, 자주 살해되고, 일상적으로 성/폭력에 시달리는, 여전히 탄압받는 민중이다. 남성보다 더 많이 일하지만 평가는 60%밖에 못 받는 빈민이다. 국가가 전쟁에 필요한 군인과 경제에 필요한 노동자를 생산하지만, 그 생산은 평가절하 되어버리므로 자신의 노동에서 소외되는 노동계급이다. 여성들의 ‘그 생산’은 다만 군인과 노동자의 수의 감소, 즉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만 ‘장려’받는 국가존속의 도구이자 수단으로 대접받는, 특별한 착취를 받는 계급으로서 민중이다. 여성이 정파라고, 여성주의가 여성우월주의라고 말하는 이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면, 여성으로서 일주일만 살아보라고 말하고 싶다. 여성은 민중도, 착취 받고 소외받는 계급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면, 여성으로 한 달만 살아보라 말해주고 싶다. '성차별 해소를 위한 개헌여성행동'의 범여성계 단체 회원들이 지난 3월 19일 오전 서울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 사진 출처 - 경향신문  개헌이 ‘국민주권’을 실현하려는 뜻을 담고 있었다면 무엇보다 국민의 절반인 여성을 염두에 두었어야 한다. ‘국민’이라는 말도 마땅치 않다. 국민은 국가의 구성원이라는 의미, 즉 국가가 호명하는 존재로서 수동적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인민주권’ 혹은 ‘시민권력’이 더 적확하다. 이러한 점에서도 현 정부를 비롯하여 개헌특위에 포함된 ‘진보남성들’의 불완전한 민주의식 혹은 의지를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여성운동계는 왜 개헌 관련한 전선을 광범위하고 강고하게 구축하지 못했을까?’하는 의구심이다. 약 2년 여간 연구와 발간, 토론회, 언론홍보 등을 활발히 전개해 왔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그 기간 동안 여성들은 강남역, 여성혐오대응운동, 미투운동 등 다양하지만 일관된 ‘여성도 사람’이라는 ‘여성운동’을 강력히 펼쳐왔다. 그러나 여성들이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음에도, 여성운동이 존재했음에도, 개헌이라는 과제를 향한 ‘블럭’으로 세력화되지는 못하였다. 무엇이 문제였는가? 왜 사회와 국가에 대한 여성들의 분노가 조직되지 못하였는가? 왜 국가와 한판 피터지게 싸워야 할 시점에 이 모든 여성들의 운동이 분절되고, 분화되고, 심지어 적대하면서 분노의 조직화를 이루지 못하였을까? 무엇이 여성운동의 전진을 가로막고 있는가? 외부인가, 내부인가? 이 문제는 앞으로 여성운동이 치열하게 파고들어 해결점을 찾아야만 한다. 어쩌면 원인은 여성운동 내부에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는 변하고 있는데 오히려 사회변화를 추동해야 할 운동이 정체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야 할 때이다.  이제 공은 국회로 넘어갔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기댈 곳은 ‘여성 국회의원들’ 뿐이다. 국회개헌특위에서 역할을 제대로 못했다면, 이제라도 그 역할, 여성들을 대표하는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국회 내에서 강고한 ‘전선’을 형성하고, 그 힘으로 다시 여성들을 결집해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기대하고 또 기대해본다. 더 이상 여성계의‘이해’와 ‘양해’를 바라지 말라. 그리고 더 이상 그러한 이해와 양해의 자세로 타협하지 말라. 우리는 역사 이래 지금까지 이해하고 양해했다. 그 결과가 더 많은 이해와 양해의 요구라면 더는 그 짓을 하고 싶지 않다. 이해와 양해의 덫을 이번 여성 국회의원들이 끊어주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달려갈 준비는 되어있다.
2018-04-04 | hrights | 조회: 1176 | 추천: 6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성(性)은 성(聖)스러운 것이다. 어리석은 성은 천박한 성으로 귀결되고, 성 외의 것으로 거래되는 성은 추잡한 성으로 노출된다. 천박하고 추잡한 성은 성의 세계를 위협하고 왜곡하여 성스러운 성의 불가능성을 유포시키는 독소다.  성은 근본적으로 폭력적이다. 성스러운 것치고 폭력적이지 않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성스러움은 인격을 충분히 파괴시킬 때, 그런 뒤 인격을 새롭게 재탄생시킬 때, 그때 각자에게서 성립하기 때문이다.  인격은 근본적으로 사회적이다. 성스러움은 사회성을 초월함으로써 사회의 맹목성을 치유한다. 사회와 인격을 아예 떠나있는 곳에서는 성스러움이 없다. 성스러움은 항상 사회와 인격을 ‘먹이’로 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와 인격은 성스러움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성스러움 자체는 맹목적이다. 사회 역시 맹목적이다. 사회의 맹목성은 성스러움의 맹목성으로써 치유된다. 성스러움의 맹목성에는 희열과 그에 따른 환희가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격이 성립되는 조건은 사회다. 하지만 인격과 그에 따른 인권의 절대적 가치가 사회 자체로부터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권의 절대적 가치는 사회가 바탕으로 삼고 있는 성스러움에서 주어진다. 인격의 절대적인 권리 즉 인권은 성스러움과 결합되어 있는 희열과 그에 따른 환희의 필연적인 가능성에 있다.  사회의 바탕으로서 작동하는 성스러움은 이미 늘 사회 속에 스며들어 있다. 그럼으로써 성스러움은 사회의 맹목성을 알게 모르게 눈치 챈 자들이 발악적으로 사회관계를 악용한 끝에 생겨나는 그 천박하고 추잡한 부패와 그에 따른 악취를 몰아내는 역할을 한다. 부, 권력, 명예 등을 둘러싼 사회관계가 얼마나 발악적이던가.  사회는 성스러움이 자신을 파괴하고자 하는 측면을 주로 주목하고 자신을 치유하는 측면을 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사회는 알게 모르게 성스러움과 투쟁을 벌인다. 그 결과, 한 사회가 현실적으로 성스러움을 상실했다고 해서, 그 사회에서 성스러움이 근본적으로 제거된 것은 아니다.  현실적으로 사회가 성스러움과의 투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을 때, 그때 사회는 성스러움을 마치 납골당에 시신을 보관하듯이 따로 분리해 내어 종교를 비롯한 각종 이름을 붙여 법적으로 따로 관리한다. 일부일처제나 성매매도 그 하나의 이름이다. 그런 만큼 성스러움은 부패한 형태를 띠게 된다.  성스러움 자체를 둘러싼 근원에서의 투쟁은 크게 성(性)과 신(神) 사이에서 생겨난다. 국가가 주권을 내세워 이 투쟁에 개입하는 것은 그 상층에서의 일이다.  성스러운 성의 역사는 인류의 기원과 동일한 기원을 지녔다. 완전한 직립은 진짜 인간의 탄생을 알린다. 직립은 손을 만들었고, 손은 도구의 사용에 의해 하나의 욕망에서 새로운 다른 욕망을 만들어내도록 했다. 그런가 하면, 직립은 자궁 및 여성기 입구의 축소를 가져와 여성을 긴 기간 육아에 매달리지 않으면 안 되게끔 했고, 아울러 남성의 목숨을 건 노동의 대가를 함께 분배받지 않으면 안 되도록 했다. 이를 매개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성을 통한 희열과 그에 따른 환희라고 하는 전혀 새로운 욕망을 만들어냈다. 생명을 중심으로 한 생존과 생식의 욕망이라는 하나의 욕망에서 관능의 욕망이라는 새로운 다른 욕망을 만들어낸 것이다. 생명에의 욕망에서 생명을 넘어서는, 때때로 생명을 아랑곳하지 않고 심지어 생명을 파괴하기까지 하는 관능의 욕망을 만들어낸 것이다.  성스러움은 근본적으로 생명과 직결된 것이다. 생명을 가능케 하면서 동시에 생명을 불가능하게 할 때, 그 무엇은 성스럽다. 하지만, 우선 성스러움은 성스러움을 온몸으로 느끼고 표현하는 자들이 없이는 그 자체로 성립할 수 없다. 성스러움이 그 자체의 절대성을 갖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다. 인간 없이는 성스러움은 없다. 성스러움 없이는 인간도 없다.  생명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이중성에 의한 자연의 성스러움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 자연이 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자연의 성스러움은 외적인 성스러움이었고, 관능의 욕망을 통한 성의 성스러움은 내적인 성스러움이었다. 이 둘이 한데 결합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신들은 예사로 육욕적이고 관능적이고 폭력적인 것이 이를 잘 나타낸다. 사진 출처 - 구글  성스러움은 함부로 쉽게 대상화될 수 없다. 이름은 대상화하는 기본 수단이다. 성스러움이 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면 성스러움은 대상화되어 급기야 마치 인간과 사회를 완전히 벗어나 있어 그 자체로 절대적으로 성스러운 것인 양 천상에 봉인된다. 성의 성스러움은 제대로 된 이름을 가진 적이 없다. 아니, 가질 수가 없다.  성의 성스러움은 인간의 몸속 깊이 곳곳에, 인간들이 모이는 사회의 몸속 깊이 곳곳에, 인격이 성립하는 영역 깊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고 은폐되어 있다.  성이 워낙 성스럽기 때문에 그 성스러움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일부일처제라는 관행적 제도 속에 성을 묶어 놓은 것이 아니다. 일부일처제는 생명의 장치이지 성의 장치가 아니다. 기원에서 보자면, 일부일처제는 생명의 보존을 위한 것으로서 그 자체 성을 관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성을 북돋우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일부일처제는 성을 관리함으로써 동시에 생명마저 관리하는 강력한 장치가 되었다.  일부일처제는, 마치 신을 성당이나 교회당에 감금해서 한정시킨 것처럼, 성의 성스러움을 가정 감금해서 한정시킨다. 성이 생명의 자물쇠에 의해 잠긴 것이다. 하지만 성은 생명을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고, 그래서 가정의 틈새로 흘러 바깥으로 나온다. 하지만, 그렇게 흘러나온 성은 이미 생명의 맹목성에 한껏 오염되어 부와 권력과 명예와 뒤섞여 어리석게 거래된다. 천박하고 추잡한 성이 이른바 ‘성폭력’이 되어 골방과 길거리에 넘쳐나고 심지어 가정으로 되돌아가 생명마저 더럽힌다.  성교는 성의 목적도 도달점도 아니다. 성교는 성스러운 성의 필수적인 수단도 아니다. 성스러운 성의 정체를 아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곳을 향해 가는 길이 전혀 없는지 아니면 너무나 많은지 아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알몸을 성스러움의 현신으로 확인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성교를 일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확실한 것은 인간이 성스러운 성을 포기하고서는 또는 성스러운 성을 함부로 재단해서 어딘가에 안치하고서는 천박하고 추잡한 인간일 수는 있으나 성스러운 인간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아무도 성스러운 인간이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 자신의 사회적 인격이 갖는 그 절대적 권리가 성스러움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누구나 성스러운 인간이기를 포기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살을 에는 듯 겨울의 폭풍이 매섭다. 지난 가을에 거둔 곡식들과 간간히 잡아 절여 말려놓은 고기들이 위안이 된다. 차가운 밤바람을 마다 않고 가운데 거대한 화톳불을 지피고자 다들 모인다. 어느덧 둘러앉은 악사들이 텅 빈 다양한 나무통들을 멋진 리듬으로 두들기자 다들 일어나 겹겹의 원을 그리면서 춤을 춘다. 그 중 몇몇은 속을 파내어 잘 말려 박제로 만든 짐승의 대가리를 뒤집어쓰고 있다. 다들 신비의 약초를 씹으면서 남녀노소 모두 모여 춤을 춘다. 몸속에서 알 수 없는 강렬한 기운이 올라온다. 두둥둥 타다닥 타닥타다닥, 점점 음악의 리듬이 절로 빨라진다. 하늘에서는 수없이 많은 별들이 춤추면서 내려앉고 거세지는 불길에서 터져 나오는 불티들이 지상의 별인 양 바람에 날리면서 모두의 몸들을 감싼다. 다소 멀리 떨어진 주변의 우거진 나무들과 풀들이 한껏 다가와 함께 도취된다. 다들 괴성을 질러대다 어느새 알 수 없는 신음에 이어 비명을 울린다. 멀리서 짐승들이 울부짖는 소리로 화답한다. 서서히 다들 제 스스로를 벗어나면서 모두가 모두를 향해 알몸의 신들이 된다. 수십 수백 만 년 전부터 우리 인간들이 성스러운 성을 향해 초월해 가고자 했던 것이다.  성을 둘러싼 모든 투쟁의 밑바탕에는 성의 성스러움을 향한 바람이 작동하고 있다. 여성해방 투쟁이건, 동성애자 권리 투쟁이건, 성 매매자 권리 투쟁이건, #미투 및 #위드유 투쟁이건, 그것들은 모두 다 저 밑바탕에서 성의 성스러움의 위력이 분출된 것이다. 현실적으로 그런 측면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인데, 만약 그것이 사회의 틀 내에서 생존을 중심으로 한 생명에의 욕망으로 회귀하려는 속성을 띠고 있다면, 그런 만큼 기존의 거래 관계 속으로 편입되고 마는 것이다. 성의 성스러움은 근본적으로 생명을 넘어서면서까지 제 자신을 분출하기 때문이다. 인간 생명이 신성한다면, 그 바탕에 성의 성스러움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2018-03-14 | hrights | 조회: 1339 | 추천: 6
홍미정/ 단국대 중동학과 조교수  2018년은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 국가가 건설되면서 발발한 전쟁으로, 대규모 난민이 발생하는 등 팔레스타인 대참사가 시작된 지 70년이 되는 해다. 2018년 2월 23일, 미 국무부는 이스라엘 국가 건설 70주년을 기념하여 올해 5월에 텔아비브 소재 미국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이전하겠다고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우리는 미국 대사관 예루살렘 이전이라는 역사적인 조치를 취하게 되어 매우 기쁘다. 이스라엘 국가 건설 70주년이 되는 5월, 예루살렘에 새로운 대사관을 열 것이다.” 트럼프가 미국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기기로 결정한 것은, 이스라엘에게 예루살렘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하도록 승인해준 것이다.  2018년 2월 28일 라말라 소재 미국대표부 건물 앞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은 트럼프의 예루살렘에 대한 정책에 맞서, 미국은 점령세력의 일부이며, 예루살렘 문제에서 손을 떼야한다고 주장하고, 팔레스타인으로부터 모든 미국 정부 직원들 추방과 미국 대표부 폐쇄를 요구하는 시위를 하였다.  2017년 12월 24일 이스라엘 주택 장관 요아브 갈란트는 ‘이스라엘 수도 통합된 예루살렘의 땅 위에 주택 건설’이라는 이름으로 동예루살렘에 30만호의 새로운 점령촌 주택건설 계획을 발표하였다. 현재 동예루살렘에 약 22만 명의 이스라엘 점령민들이 거주한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스라엘의 동예루살렘에 30만호의 주택건설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대재앙이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공세적인 점령정책들은 2017년 12월 6일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수도’라는 트럼프선언의 후속조치이며, 곧 트럼프가 내놓을 ‘세기의 협정’으로 가는 길을 준비하는 것으로 보인다.  2월 25일, 성묘교회 앞 기독교 최고 지도자들의 공동 성명 발표 사진 출처 - Custodia Terræ Sanctæ  이와 함께,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계속해서,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의 현실을 변화시켜서 이슬람과 기독교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작년 7월 16일 이스라엘은 알 아크사 모스크 내부에서의 총격 사건을 빌미로, 알 아크사 모스크 입구에 전자검색대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이에 맞서는 9일 동안 계속된 팔레스타인인들의 비폭력 시위 결과 7월 25일 이스라엘은 전자검색대를 제거한 바 있다. 올해 2월 25일 기독교회 재산에 대한 이스라엘의 막대한 세금 부과와 부동산 정책에 맞서 예루살렘 기독교인들이 비폭력 저항운동을 전개하였다. 결국 이스라엘은 2월 28일 기독교회 재산에 대한 막대한 세금 부과 시도를 철회하였다. 올해 2월 25일 성묘교회는 이스라엘의 기독교 재산에 대한 새로운 세금 부과 정책과 기독교회가 개인들에게 매각한 토지를 이스라엘 정부가 수용하는 입법 추진에 맞서 무기한 문을 닫았다. 예루살렘 시장 니르 바라카트는 징벌적이고, 소급법적인 세금을 부과하려고 시도하였다.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시당국은 기독교회에게 예배 장소가 아닌 부동산에 대하여 5천 3백만 달러 이상의 미납 세금을 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맞서 예루살렘의 프란체스코 가톨릭지도자, 그리스 정교회 지도자, 아르메니아 교회 최고 지도자들은 공동성명에서 이스라엘을 비난하면서 예루살렘 성지의 기독교인들에 대항하는 제도적이고, 전례 없는 공격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현재까지 교회와 국가 사이의 문제는 1757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오스만 3세가 내린 칙령인 현상 유지 협정에 따라왔다. 동예루살렘은 오스만제국 통치, 영국 통치(1917년 12월 30일-1948년 5월 14일), 요르단의 통치(1948년 5월 28일-1967년 6월 5일), 1967년 이후 현재까지 이스라엘의 점령 통치 기간 동안에도 1757년 술탄 오스만 3세의 현상유지 협정에 따라, 동예루살렘 소재 기독교 교회들은 세금을 낸 적이 없다. 현재  이스라엘은 교회 지도자들과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예루살렘 소재 기독교회 재산에 엄청난 금액의 세금을 새로 부과하고, 은행 계좌를 동결하며, 매각한 기독교회 부동산을 이스라엘 국가가 수용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정책은 예루살렘의 역사적이고 종교적인 현실과 특징들을 변경시키는 조치다. 2월 27일 이러한 정책에 맞서, 수 백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성묘교회 밖에서 세금 징수 결정을 반대하는 시위를 조직하였다. 같은 날, 이스라엘 총리 네타냐후가 이런 정책들을 철회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문을 폐쇄한지 3일 만인 28일부터 성묘교회는 문을 다시 열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국가를 건설한 시온주의 운동의 핵심지역이다. 시온주의 목표는 예루살렘(시온)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유대 국가를 건설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국가 선언과 동시에 발발한 1948~1949년 전쟁 이후, 예루살렘은 서예루살렘(이스라엘 통치)과 동예루살렘(요르단 통치)으로 분할되었다. 1950년 1월 23일, 이스라엘의회는 예루살렘(서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라고 선언했다.  그런데 시온주의의 핵심 지역인 시온산과 기독교 성지들, 이슬람 성지들, 유대인들이 기도하는 통곡의 벽은 모두 동예루살렘에 위치한 구도시에 있다. 이스라엘은 1967년 6월 전쟁에서 요르단 통치하의 동예루살렘을 장악하였다. 1967년 6월 27일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경계를 재조정하고, 동예루살렘과 서예루살렘을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통합시키면서, 요르단 법률을 폐기하고 수정 법률을 제정함으로써, 이스라엘 법을 동예루살렘영역으로 확장하여 적용시켰다. 1967년 6월 28일, 이스라엘 의회는 통합된 예루살렘 영역을 이스라엘의 수도라고 선언하였다 예루살렘 구도시 성지들 사진 출처 - PASSIA(http://www.passia.org/)  그러나 현재 국제법상으로 동예루살렘은 불법적인 이스라엘 점령지고, 1967년 11월 유엔 안보리 결의 242호 등은 동예루살렘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완전한 철수를 요구한다. 동예루살렘 구도시에는 성묘교회(예수 무덤교회)를 비롯한 다수의 기독교 성지들과 알 아크사 모스크를 비롯한 다수의 이슬람 성지들이 있으나,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유대교 성지는 가시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 7월 30일 제정한 ‘이스라엘 수도, 예루살렘 기본법’에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라고 명시함으로써, 1967년 전쟁으로 점령한 영토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하는 1967년 11월 22일 공포된 유엔 안보리 결의 242호와 1980년 6월 30일 공포된 유엔안보리 결의 476호 거부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1980년 8월 20일 공포된 안보리 결의 478호는 ‘점령종결’, ‘예루살렘 지위 변경 무효’, ‘이스라엘 수도, 예루살렘 기본법 무효’를 명시하였다.  1980년 9월 초 유네스코는 요르단이 제안한 예루살렘 구도시와 그 벽을 세계 문화유산 목록에 등록했다. 이후 유네스코는 예루살렘 구도시 소재 세계 문화유산을 훼손하는 이스라엘의 행위를 비난했다. 이렇게 유엔은 이스라엘의 동예루살렘 합병을 인정하지 않고, 예루살렘 성지의 특성과 지위를 변경시켜 온 모든 조치와 행위들이 무효라는 입장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1984년 이스라엘은 알 아크사 모스크 서쪽 벽(일명 알 부라끄 벽/통곡의 벽)을 유대교 유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일방적으로 이스라엘 국가 재산으로 등록하였다. 이후, 2018년 현재까지 이스라엘은 동 예루살렘에서 이슬람과 기독교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는 동시에, 동예루살렘을 유대화시키는 정책을 꾸준히 추진해 오고 있다. 게다가 미국 정부의 예루살렘 정책은 이스라엘의 점령 정책을 추인할 뿐만 아니라, 유인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2018-03-07 | hrights | 조회: 2121 | 추천: 6
이문영/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  다가올 3월 18일 러시아 대선이 열린다. 2월 8일 확정된 대선후보 명단에는 최종적으로 8명이 이름을 올렸다. 무소속으로 출마한 현 대통령 푸틴을 비롯, 러시아 공산당과 좌파전선이 지지하는 후보 파벨 그루디닌, 대표 야당 중 하나인 통합민주당 <야블로코>의 그리고리 야블린스키, 돌발 발언으로 유명한 우파 자유민주당 당수 블라디미르 지리놉스키, 러시아의 ‘패리스 힐튼’이라 불리는 방송인 크세니야 소브착 등이 그 중 주목받는 후보다.  하지만 현재 러시아 대선의 관전 포인트는 ‘과연 누가 러시아의 새로운 리더가 될 것인가’가 아니다. 푸틴의 대선 승리는 ‘천재지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이라는 단서가 달릴 만큼 이미 현지에선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러시아 3대 여론조사기관인 폼, 브치옴, 레바다센터의 최근 지지율 조사가 이를 잘 보여준다. 현재 탑 3에 해당하는 후보는 푸틴, 그루디닌, 지리놉스키. 폼의 조사에 따르면 3인의 지지율은 각각 66.5%-6.3%-6%, 브치옴에 따르면 69.5%-7.5%-5.3%다. 비판적 성향이 강한 레바다센터는 최근 대선후보 지지율 발표가 아예 금지됐는데(!), 그럼에도 이런 레바다센터가 조사한 푸틴 지지율조차 64%에 달한다. 나머지 후보들은 다 지지율 1% 미만이니, 사실상 모든 후보가 요즘 유행하는 말로, ‘잔잔바리’인 셈이다. 푸틴에 대적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러시아판 <짝>이랄까, 아무튼 커플매칭 오락프로 <돔-2>를 진행한 소브착의 대권 도전은 안 그래도 선거에 흥미를 잃은 이들에게 대선을 더욱 희화화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선거 흥행을 노린 푸틴의 권유로 대선에 나왔다는 루머와 달리, 생각보다 그녀가 매우 진지하긴 하지만 말이다.)  그나마 푸틴의 가장 강력한 적수로 꼽혔던 반정부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는 작년 12월 25일 러시아 선관위로부터 ‘대선후보 등록거부’라는 엄청난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았다. 횡령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은 그에게 대통령 피선거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횡령이 사실이었는지, 정치적 보복은 아니었는지, 사실이었다 해도 실형이 아닌 집행유예에도 이 규정이 적용되는지, 등등에 대한 논란이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후 그는 전국의 지지자들과 함께 대대적인 대선 보이콧 운동을 선포하고, 현재 격렬한 거리시위로 체포와 석방을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 이런 나발니조차 전국적인 지지율 면에서 전혀 푸틴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나발니도 탐탁지 않지만, 푸틴이 더 싫어서, 또 별다른 대안도 없어서 그를 지지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따라서 3월 18일이 지나면, ‘천재지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아마 우리는 ‘러시아 대선, 푸틴 승리’라는 외신을 접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푸틴은 2012년부터 6년 중임제로 바뀐 대통령제에 따라 2024년까지 집권이 가능해진다. 2000년 러시아 3대 대통령으로 정치적 커리어를 시작해 이후 8년 통치(4년 연임), 2012년부터 2024년까지 12년 집권(6년 연임)하면, 그는 총 20년간 러시아를 다스린 셈이 된다. 사실 2008년부터 2012년에도 아바타 대통령 메드베데프를 내세워 실세 총리를 지냈으니, 이번 대선에서 이길 경우 사실상 그의 집권기간은 총 24년이 되는 셈이다. 스탈린이 1922-1953년까지 31년, 브레즈네프가 1964-1982년까지 18년 장기 집권했다(둘 다 죽을 때까지 했다). 푸틴이 스탈린에 이어 역대 2위 최장기 국가원수가 되는 셈이다(그도 죽을 때까지 하지 말란 보장도 없다). 사진 출처 - http://rusnsn.info  2017년 레바다센터는 ‘러시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러시아 시민들에 던졌다. 전국단위의 이 설문조사에서 스탈린과 푸틴이 나란히 1, 2위를 차지했다. 현재 러시아에는 ‘스탈린 신화’와 ‘푸틴 현상’이라는 이름 아래, 스탈린과 푸틴이 서로가 서로를 대신하며, 서로가 서로를 더해가며, 어떤 미디어스타보다 더 큰 인기를 누리는 진기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푸틴 통치가 해를 더할수록, 예전 스탈린의 정치적 악행에 대한 강력한 터부가 살금살금 무너지고, 급기야는 스탈린에 대한 호감이 소련 붕괴 후 정점을 찍었다. 스탈린의 귀환과 푸틴의 재선... 2018년, 러시아는 정말 어디로 가고 있는가.
2018-03-06 | hrights | 조회: 1365 | 추천: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