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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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강대중(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도재형(이화여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윤동호(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이동우(변호사),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장은주(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홍미정/ 단국대 아시아중동학부 교수 □ 이슬람혁명 이후의 비가시적인 동맹 관계 : 아야톨라 호메이니의 이란 이슬람공화국과 이스라엘  1979년 이슬람혁명 이전에 아야톨라 호메이니는 이스라엘을 샤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 정권의 지지자로 간주하고, 팔레비 정권과 이스라엘의 긴밀한 유대관계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이었다. 1979년 2월 11일 시가전에서 반란군들이 샤에 충성하는 군대를 제압하고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공식적으로 권력을 장악하였다. 2월 18일 이슬람혁명 임시 정부는 이란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런데 반란군들이 시가전에서 미국 무기로 무장한 군대를 어떻게 제압했을까? 이 의문은 새롭게 기밀 해제된 미국 정부 문서들을 인용한 2016년 6월 3일 BBC 보도에서 일정 부분 해소되었다. 이 BBC 보도에 따르면, 1979년 1월 27일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지미 카터 정부에 거래를 제안하는 다음과 같은 비밀 메시지를 보냈다. “이란 군부 지도자들은 당신의 말을 듣지만, 이란 국민들은 내 명령을 따른다. 카터 대통령이 군부에 영향력을 행사해서 정권인수의 길을 열어준다면, 내가 국민을 진정시킬 수 있고, 안정이 회복될 수 있으며, 이란에서 미국의 이익과 미국 시민들은 보호받을 것이다.” 이 비밀 메시지는 프랑스에서 호메이니의 참모인 이란계 미국인 의사 에브라힘 야즈디와 프랑스 주재 미국 대표 웨런 지머만 등이 수차례 직접 대화한 최종적인 결과이며, 호메이니의 이란 귀환과 권력 장악을 이끌어 내었다. 텍사스 휴스턴에 거주하는 야즈디는 이미 CIA요원 리차드 코탐을 통해 워싱턴 미국 관리들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사실 카터 행정부는 1978년 이란 반정부 시위 때부터 이란 정권 교체 논의를 해온 것으로 알려졌고, 호메이니가 이에 응답한 것이다. 그러나 이란혁명에 관하여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이야기에 의하면, 호메이니는 용감하게 미국에 저항했고, 샤의 권력을 유지시키려고 노력하는 ‘그레이트 사탄’ 미국을 물리쳤다.  미국의 중동 정책에 비판적인 이란 태생의 바흐람 알레비가 1988년에 쓴 「호메이니의 이란 : 이스라엘 동맹」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샤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 통치 기간에 이란 사박 요원을 영입하여 이스라엘의 외부 정보기관인 모사드와 협력하게 하였다. 이스라엘이 고용한 사박 요원 중에는 마누체르 고르바니파르가 있었다. 1979년 이슬람혁명으로 샤가 몰락한 후에, 고르바니파르를 비롯한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 통치하의 사박 요원들은 계속해서 호메이니 통치하의 사바마 요원으로 일하면서 이스라엘과의 계약을 유지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매우 유용했다. 고르바니파르는 양 측, 이스라엘 모사드와 호메이니의 사바마를 위해 일했다. 이란-이스라엘 관계에서 그들의 중심적인 역할은 이란의 샤와 미국 중앙정보국과 이스라엘 모사드가 협력하여 창설한 비밀경찰을 유지하기로 한 호메이니의 결정으로 가능해졌다. 호메이니 정권은 1979년 2월-9월 사이에 사박의 전직 수장 세 명을 처형하고, 사박 조직의 이름을 사바마로 바꾼 것 외에, 그 기능을 거의 바꾸지 않았다. 호메이니 정권은 많은 사박 요원들을 사바마 요원들로 다시 고용하였고, 사바마 요원들은 사박 요원들이 샤를 위해 수행했던 것과 같은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 사바마 요원들이 이스라엘과 이란 이슬람공화국 사이에서 무기거래 등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샤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 시대와 이란 이슬람공화국 시대는 정권과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이념은 바뀌었으나, 실제 정책에 있어서 이스라엘과의 관계는 연속성이 있으며, 내부적으로도 권위주의적이며 억압적인 정권 유지 방식은 차이가 거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1979년 8월 7일, 호메이니는 ‘예루살렘의 해방을 전 세계 무슬림들의 종교적 의무’라고 선언하면서, 라마단의 마지막 금요일을 전 세계 무슬림들이 연대하여 시온주의와 이스라엘에 반대하고 억압받는 팔레스타인인들을 지지하는 ‘예루살렘의 날’로 선포하였다. 이로써 이란 이슬람 혁명정부는 이스라엘 지배로부터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을 주도하는 PLO 편에 서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샤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 통치 동안, PLO는 이란 반체제 인사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많은 이란 반체제 인사들은 1970년대에 레바논의 PLO 캠프에서 훈련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PLO 또한 1979년 혁명을 지지하였고, 1979년 2월 17일 야세르 아라파트는 31명의 대표단을 이끌고 테헤란을 방문하였으며, 2월 18일 호메이니를 만났다. 야세르 아라파트는 “오늘 이란 혁명이 중동의 세력 균형을 뒤집어 놓았다. 오늘은 이란, 내일은 팔레스타인”이라고 선언했다. 테헤란 라디오 방송은 “아라파트는 이란이 전력을 강화한 후에, 이스라엘에 대한 승리문제로 눈을 돌릴 것이라는 서약을 호메이니로부터 받았다.”고 보도했다.  2월 18일 야세르 아라파트 환영행사에서 총리 메흐디 바자르간이 이스라엘 외교에서 중심 역할을 했던 테헤란 소재 이스라엘 공관이며 이스라엘 외교의 중심지였던 팔레스타인 사무소 열쇠를 아라파트에게 넘겨줌으로써, 팔레스타인 사무소는 PLO에게 넘어갔다. 동시에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이끄는 시아파 운동이 이란을 정치·군사적으로 장악한 이후 샤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가 통치하던 이란과 이스라엘의 긴밀한 정치·군사적 관계가 종식되고, 이란의 정책이 아랍 국가들과 PLO에 우호적으로 바뀔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실제로 2월 18일 이란 혁명 임시정부는 이란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할 것이라고 발표했고, 이란 국영 테헤란 라디오 방송은 ‘모든 이스라엘인은 이란을 떠나고, 이스라엘 주재 이란 대표들은 귀국하라고 명령을 받았다’라고 보도했다. 따라서 표면적으로 이스라엘과 이란 혁명 정부와의 사이가 완전히 단절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하면서,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1980년 9월 22일 이라크가 이란을 공격함으로써, 8년 가까이 지속되다가 1988년 8월 20일에 종결된 이라크-이란 전쟁이 시작되었다. 100만-200만 명 정도의 엄청난 인명 살상을 초래한 장기 지속적인 이 전쟁의 결과, 이라크는 이란의 영토를 장악하거나 이라크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이란 석유생산의 중심지 쿠제스탄 주(이란 내륙 유전 매장량의 80%, 이란 전체 유전 매장량의 57% 보유)에서 아랍분리주의를 강화하는데 실패했고, 이란은 이라크 군사력을 무력화시키거나 사담 후세인 정권을 붕괴시키는 데 실패했다. 사실 무기 판매상들만 이익을 본 전쟁으로 보인다.  이란 이슬람공화국과 PLO 사이의 관계는 아라파트가 이란-이라크 전쟁 동안 이라크를 지원하는 아랍세계에 합류하면서 악화되었다. 게다가 호메이니 정권은 팔레스타인의 민족운동을 장악하기 위하여 PLO 내에 이슬람근본주의 파벌을 만든 다음 PLO 내 세속적인 지도부를 친이란 이슬람 근본주의 지도부로 대체하려고 시도하였다. PLO 지도부가 이란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 침투에 점점 저항하자, 호메이니 정권은 관영언론에서 PLO를 ‘팔레스타인의 대의가 이슬람 운동의 불가분 구성 요소임을 인정하지 않는 세력’이라고 공격함으로써 PLO와 이란 이슬람 공화국과의 관계가 최종적으로 결렬되었다(현재도 이란 이슬람공화국은 가자를 통치하는 하마스와 이슬람 지하드를 후원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이란 이슬람공화국의 정책은 팔레스타인 민족주의 조직들의 통합을 막고, 팔레스타인 조직들을 분할통치 하는 이스라엘 전략에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이란-이라크 전쟁은 이스라엘과 이란 이슬람공화국이 무기거래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이스라엘과 이란 이슬람공화국 사이의 동맹이 은밀하게 구축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라크-이란 전쟁이 시작되자 이란 이슬람공화국 대표단은 파리에서 이스라엘 국방부 차관을 만나 ‘무기와 유대인 교환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으로 이란은 유대인들의 이민을 허용했고, 이스라엘은 치프틴 탱크와 미국제 F-4 팬텀 항공기를 위한 탄약과 예비 부품을 이란에 팔았다.  이후, 이란 이슬람공화국은 이란 유대인들의 이주를 허용하였으며, 이슬람혁명 이후 10년 동안 이란 유대인의 대다수인 약 6만 명 정도가 이란을 떠나 미국, 이스라엘, 유럽 등지로 이주하였다. 사실 8년 가까이 계속된 장기 지속적인 전쟁에서 유대인들이 전쟁터를 떠나 이주하는 것은 이란 이슬람공화국 정부가 유대인들에게 부여한 혜택이자 특권으로 보인다.  텔아비브 대학의 자페 전략 연구소에 따르면 1981년부터 1983년까지 이스라엘이 이란에 판매한 무기는 총 5억 달러에 달했다. 대부분은 이스라엘에 전달된 이란산 석유로 지불되었다. 호메이니 정부를 위해 일한 이란의 무기상 아흐마드 하이다리에 따르면, 전쟁 시작 직후부터 호메이니 통치 기간 동안 테헤란이 구입한 무기 중 약 80%가 이스라엘에서 왔다. 무기 구입은 정권 유지와 강화에 필수적인 요소이고, 무기거래는 국가 간 동맹의 핵심적인 동력이며 상징이다.  1991년 12월 8일 The New York Times 보도에 따르면, 지난 3개월 동안의 100명 이상의 전·현직 정부 관리, 무기거래상, 정보 요원들과의 인터뷰를 포함한 The New York Times 자체 조사는 “1981년에 미 국무장관 알렉산더 헤이그와 이스라엘의 총리 메나헴 베긴은 이스라엘에게 이란이 요청한 미국산 예비 부품과 기타 장비 문제를 사안별로 검토하고 승인하기로 하는 합의를 도출했다”는 것을 밝혀냈다. 1981년 이스라엘 국방부 고위관리로 후에 외무부 국장을 지낸 아브라함 타미르 소장은 전화 인터뷰에서 무기거래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매달 우리는 이란에 팔고 싶은 미국제 무기 목록과 예비 부품 목록을 미국에게 주었다. ‘구두 합의’는 적어도 18개월 동안 유효했고, 우리는 그 당시 이스라엘 주재 미국 대사였던 사무엘 W. 루이스에게 요청 사항들을 기록한 목록을 주었다. 헤이그 장관과의 합의에 따라, 1981년과 1982년 미국산 무기를 이란에게 판매하였다. 그 후 세계 각국의 무기 무역상들, 이스라엘인, 미국인들, 영국인들이 이란에 계속 무기를 판매했다. 이란에 판매한 미국제 무기는 수십억 달러에 이른다.”고 밝혔다.  이렇게 이란 이슬람공화국에게 무기를 제공한 이스라엘의 동기에 대해, 1981년 메나헴 베긴 총리는 “1980년 9월 시작된 전쟁에서 이라크가 승리하는 것을 보지 않으려는 이스라엘의 강한 열망 때문에 이란에 예비 부품을 기꺼이 제공하려고 했다.”라고 밝혔다. 이스라엘은 중동 역내에서 이라크를 가장 큰 적으로 보고, 1981년 6월 7일 이라크 원자로를 파괴하였다.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던 아리엘 샤론은 “이스라엘이 이란보다 이라크를 더 큰 적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이란 이슬람공화국에 무기를 판매했고, 무기판매는 미국 관리들과 철저히 논의되었다”라고 미국에서 연설 중에 밝혔다. 1982년 10월, 당시 주미 이스라엘 대사였던 모세 아렌스는 “이스라엘이 이란에 무기를 수송하는 것은 미국 정부의 최고위층과 조율하여 이뤄지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도 이라크가 이란을 지배하게 되면 역내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강화될 것을 우려하면서, 이스라엘의 대이란 정책에 공감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란 이슬람공화국 무기고는 샤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 통치 기간 획득한 미국제 무기와 영국제 무기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특히 미국제 및 영국제 군사 장비를 필요로 했다. 1980년 10월 24일, 스콜피온 탱크 부품과 F-4 제트기용 타이어 250개가 이스라엘에서 이란으로 운송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이스라엘 소유의 다른 군수품들이 유럽의 저장소에서 이란의 차바하르, 반다르 압바스, 부셰르 항구로 비밀리에 수송되고 있었다. 군수품에는 미국이 제작한 F-4 제트기, 헬리콥터, 미사일 시스템을 위한 예비 부품이 포함되어 있었다.  1981년 1월 20일 대통령 취임 직후, 레이건 행정부는 이스라엘에게 이란 정부에 수십억 달러 상당의 미국제 무기, 예비 부품, 탄약을 팔도록 허락하였다. 1979년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납치된 미국인 인질들이 레이건 대통령 취임에 석방되고 난 이후, 불과 몇 달 만에 무기가 이란으로 이송되었다. 1981년 7월 터키-소비에트 국경에서 이 무기들을 운반하던 3대의 항공기 중 1대가 추락하면서 이스라엘에서 이란으로의 비밀 무기 수송이 폭로되었다. 이스라엘 관리들에 따르면, 이 3대의 수송기는 레이건 대통령의 취임식 날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의 인질들이 풀려난 직후 레이건 행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은 것이었다.  1981년 9월 16일 유엔 주재 이라크대표부 대표 사이브 바피가 유엔 총회에 보낸 공식 서한은 이란 이슬람공화국 정부와 이스라엘 사이의 무기 협력에 관하여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서한은 이스라엘, 미국, 이란 이슬람 공화국 사이의 무기거래 협상 내용, 장소, 시기, 무기 종류 및 무기 운반 경로 등을 다음 기사들을 인용하여 구체적으로 폭로하고 있다. 1980년 11월 2일 런던 주간 Observer, 1980년 11월 3일 서독의 Die Welt, 1980년 11월 5일 파리에서 발행된 정기 간행물 Al Watan Al Arabi, 1980년 11월 11일 프랑스의 V. C. D와 1980년 11월 14일 Jeune Afrique, 1981년 3월 31일 쿠웨이트 일간지 Al Siyassa, 1981년 7월 15일 미국 텔레비전 네트워크 ABC, I98I 7월 21일 이스라엘 일간지 Maariv, 1981년 7월 24일 아르헨티나 두 개 일간지 Cronica와 La Prensa, 1981년 7월 25일 런던 Sunday Times, 1981년 7월 27일 프랑스 신문 Le Figaro, 1981년 7월 27일 서독의 Der Spiegel, 1981년 7월 29일 스위스 Tribune of Lausanne 등이다.  세계 각국 신문들이 보도한 기사들로 볼 때 이란-이라크 전쟁 초기부터 이스라엘, 미국, 이란 이슬람공화국 사이의 무기거래는 이미 전 세계적으로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호메이니가 통치하는 이란 이슬람공화국이 표방한 反시온주의・반미 정책이 대외적으로 이스라엘이나 미국을 겨냥한 것이라기보다는, 사실은 대내적으로 팔레비 왕정을 전복시킨 이슬람혁명을 합리화시키고 내부 결속을 다지기 위한 명분으로 활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스라엘에게 있어 1978년-1979년 이집트-이스라엘 평화 협정으로 이집트 아랍공화국이라는 강력한 적이 사라진 상태에서, 외견상 새로운 적의 필요성으로 이란 이슬람공화국이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2021년 현재까지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및 역내 분할통치 전략, 대체로 세속주의를 추구하는 권위주의적인 정권과 이슬람 세력의 대결 구도라는 측면에서 활용도가 높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정책은 아랍국가들이 후원하는 서안을 통치하는 자치 정부와 가자를 통치하는 하마스 대결 구도에서 매우 유용하게 활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호메이니 정권은 이스라엘로부터의 무기구입에 반대하고 이라크와 평화를 추구하는 초대 이란 이슬람공화국 대통령 아불 하산 바니 사드르(재임: 1980.02.04.–1981.06.22)를 축출하였다. 유엔 주재 이라크대표부 대표 사이브 바피가 유엔으로 보낸 서한은 1981년 8월 20일 미국 텔레비전 ABC가 방영한 바니 사드르의 인터뷰 내용을 포함한다. 이 인터뷰에서 바니 사드르는 “이상한 것은 이란 이슬람공화국이 이스라엘로부터 무기를 구입한 것이다. 이스라엘로부터의 무기구입은 이슬람 성직자들이 권력에 대한 욕망이 매우 강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내가 대통령이었을 때, 나는 이스라엘로부터의 무기 구입을 반대했다. 나는 ‘만약 우리가 이스라엘로부터 무기를 구입해야 한다면, 왜 이라크인들과 화해를 하지 않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나는 이라크인들과 화해하는 것이 이스라엘로부터 무기를 구입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바니 사드르는 이스라엘과의 무기거래를 반대했으며, 각료회의에서 이란인들이 이라크와 화해하고 이스라엘과 무기거래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바니 사드르는 ‘이란 이슬람공화국이 세속주의자들이 통치하는 이라크와 평화를 성취한다면, 이란 집권 종교세력은 이란 군대가 종교지도자들에게 등을 돌려서 전복당할 수 있다고 두려워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이라크와 평화를 성취해보려는 사드르 자신의 노력이 좌절되었다’고 역설했다.  사실, 바니 사드르는 샤 정권에 반대하는 운동과정에서 1963년 프랑스로 도피하여 호메이니가 이끌던 반정부 조직에 참가하였다. 1979년 2월 호메이니와 함께 귀국한 바니 사드르는 1980년 1월 25일 국민투표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75.6%의 압도적인 득표(총 투표율67.42%)로 4년 임기 대통령에 당선되어 2월 4일에 취임하였다. 그는 세속적이고 자유주의적이었으며, 성직자들이 직접 통치권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이슬람공화국 헌법 하에서 호메이니는 대통령을 해임할 헌법상의 권한을 가진 이란 최고지도자로서 실권을 장악했으며, 세속주의와 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새로 구성되는 의회를 장악하면서, 바니 사드르 대통령 축출에 나섰다.  사실, 이란 혁명 기간 동안 세속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국민전선당은 이슬람공화국이 군주제를 대체하는 것을 지지하였고, 혁명정부 초기에는 민족주의의 주요 상징이었다. 그러나 1981년 6월 호메이니가 주도하는 의회는 대통령의 입법 저지권을 제한하는 법안과 보복법을 승인한 이후, 호메이니의 신정정치 세력과 국민전선당・바니 사드르 대통령 사이에 극심한 대립이 발생하였다. 1981년 6월 11일, 호메이니는 자신이 바니 사드르 대통령에게 1980년 2월 19일 수여한 이란 군사령관 직위를 박탈하면서 바니 사드르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을 무력화시켰다.  1981년 6월 15일, 바니 사드르 대통령과 국민전선당은 테헤란 시민들에게 호메이니의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였으며, 처음으로 호메이니에게 억압과 공포 정치에 책임이 있다고 호메이니를 직접 공격하였다. 이에 맞서 호메이니는 이 시위를 반란으로 규정하고 시민들에게 국민전선당에서 탈퇴할 것을 요구하였다. 세속적인 바니 사드르 대통령에 대한 호메이니의 공격도 이 과정에서 나왔고, 호메이니는 바니 사드르 대통령이 TV와 라디오에서 국민전선당이 주도하는 시위를 지지한 것에 대하여 공개 사과해야한다고 선언하였다. 호메이니는 국민전선당을 규탄하고, 보복법 반대자들을 배교자라고 위협하였다.  결국, 1981년 6월 21일, 이슬람 성직자가 다수를 차지한 이란의회는 바니 사드르 대통령에 대한 탄핵동의안을 채택하였고, 22일 호메이니는 이 탄핵동의안을 승인했다. 1981년 7월 28일 바니 사드르는 다시 프랑스로 망명하여, 호메이니 정권 전복을 호소하였다. 1981년 7월 국민전선당은 금지되었고, 공식적으로 불법 단체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이란 내부에서 여전히 활동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같이 이란 이슬람혁명 이후 상황은 1952년 이집트 혁명 이후의 상황과는 전혀 다르다. 1952년 이집트 혁명에서는 세속적인 자유장교단과 무슬림형제단이 연합하여 무함마드 알리 왕조를 축출하는 혁명을 성공 시킨 후, 세속적이며 사회주의적인 자유장교단 출신의 나세르가 정권을 장악하고 무슬림형제단 세력을 축출하면서 이스라엘과 적대적인 관계를 구축하였다.  그러나 1979년 이란에서는 성직자들이 최종적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자유주의적이고 세속적인 혁명 동지들을 축출하면서 상징적으로 여성들에게 베일을 씌우는 정책을 채택하였다. 정권을 장악한 이란 이슬람 성직자들은 세속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반대파 국민전선당을 제거하고 이슬람 성직자들이 주도하는 권위주의적인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슬람을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란 이슬람공화국은 1979년 혁명 동지였으며, 이스라엘과 무기거래를 반대하고 이라크와의 화해를 추구하던 바니 사드르 대통령을 제거하였다. 반면 이란 이슬람공화국은 표면적으로 적대적인 관계를 설정한 이스라엘과 실제로는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는 이중적인 정책을 취함으로써 정권을 유지・강화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19년 2월, 이란 이슬람공화국 초대 대통령 바니 사드르는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호메이니는 1979년 이란혁명의 원칙을 배반했고, 그와 함께 테헤란으로 돌아온 사람들에게 매우 쓴 맛을 남겼다.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경제제재를 통해 이란을 굴복시키려는 노력은 기존 체제를 강화하면서 일반 이란인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역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을 내버려 둔다면, 이란 체제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취약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바니 사드르의 주장을 뒷받침하듯, 2016년 이후 이란에서는 정권에 반대하는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특히 2019년 11월 15일 정부가 가스 가격 200% 인상 발표 이후, 마슈하드, 케르만, 쿠제스탄 등에서 반정부 시위가 발발한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 시위대는 “성직자들은 왕과 같이 살고, 국민들은 더 가난해지고 있다”는 구호와 함께 성직자들의 퇴진을 요구하면서, 테헤란을 비롯한 100개 이상의 도시로 퍼져나갔다. 이 시위에 맞서 2019년 11월 17일, 이란 최고 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대통령 재임;1981.10.09.-1989.08.16., 최고지도자 재임: 1989.06.04-현재)는 정부 관리들과의 회의에서 “이란 이슬람 공화국이 위험에 처해 있다. 시위를 중단시키기 위해서 무엇이든지 해라. 이것은 내 명령이다. 만약 시위를 즉시 중단시키지 못하면, 책임을 묻겠다.”고 명령을 내렸다. 로이터 보도에 따르면, 하메네이는 시위대가 거리에서 자신의 포스터를 불태우고, 호메이니 동상을 파괴한 것에 격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권단체 메흐르 센터(Middle East Human Rights Center, Mehr Center)가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2019년 11월 15-17일에 3천명 이상의 시위대가 이슬람공화국 보안대에 의해서 살해되었고, 2만 여명이 체포되었다. 이는 1979년 이슬람공화국 수립 이후 가장 광범위하고, 격렬한 시위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상황을 볼 때, 바니 사드르의 주장처럼 이란이 경제제재를 받지 않고, 개방되고 발전된 체제로 나아간다면, 성직자가 주도하는 보수적인 이슬람 정권은 유지되기 힘들어 보인다. 이란 이슬람공화국 정권에게 개방과 경제 발전은 양날의 칼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과 미국에는 세속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체제를 가진 이란보다, 권위주의적이며 취약한 체제를 가진, 적대적인 이란 이슬람공화국이 중동의 한 축을 운영하는 형태로, 중동을 세속주의 세력과 이슬람 세력으로 분할 지배하는 것이 유리해 보인다. □ 관계 정상화 가능성? : 이란 핵 문제와 이란-이스라엘 관계 전망  1981년 6월 7일, 이스라엘이 이라크 원자로를 파괴한 직접 공격을 이란에 대해서도 되풀이할 수 있는가? 2021년 10월 18일, 이스라엘은 이란 핵 프로그램에 맞서는 군사 공격 가능성에 대비해서 15억 달러의 예산을 승인했다. 이스라엘이 1960년대 중반부터 중동 역내에서 군사적 우위 및 핵 독점을 누려왔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표면적으로 이란은 이스라엘의 역내 군사적 우위 및 핵 독점에 도전하며, 이스라엘의 역내 패권을 위협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무기 보유 시도에 맞서 군사 공격을 감행할 것이라고 위협하며, 이란에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도록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다.  반면 이란은 미국의 모든 불법적인 제재를 제거하기 위해 핵 협상을 재개할 것이라고 여러 차례 발표했다. 이란은 미국과 유럽연합이 이란에 대한 모든 경제제재를 해제하기를 원한다. 사실, 2018년 5월 미국이 핵 협정에서 탈퇴한 이후. 이란 국민들은 지난 3년 동안 미국의 경제제재 강화와 Covid-19 대유행에 대한 정부의 대처 부족, 높은 청년 실업률 속에서 고통을 받아왔다. 게다가 기후 변화 및 무리한 댐 건설로 인하여 이란의 강 하류 지역은 심각한 물 부족에 직면하고 있다. 이란 기상청에 따르면, 2021년 현재 이란의 97% 지역이 가뭄을 겪고 있다. 2021년 7월에는 섭씨 50도에 달하는 쿠제스탄 주의 아랍계 농민들이 물 부족에 대하여 야간 시위를 벌였으며, 11월에도 이스파한 등지에서 식수 부족으로 인한 시위가 증가하고 있으며 다른 도시로 확산되고 있다. 이란 보안군은 실탄발사, 최류탄과 곤봉 등으로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일부 시위대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쿠제스탄 주 시위대 동영상에는 “시위는 평화적이다. 왜 총을 쏘느냐? 독재자에게 죽음을, 하메네이에게 죽음을” 등의 구호를 외치는 장면이 담겨있어, 이 시위대가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하메네이를 겨냥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2020년 9월 이후, 이스라엘은 UAE, 바레인, 모로코, 수단 등과 국교 정상화 등으로 역내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다. 아랍국가들과 이스라엘과의 관계 정상화는 2002년 3월 당시 사우디 왕세자 압둘라가 베이루트에서 개최된 아랍연맹 정상회의에서 아랍평화안(Arab Peace initiative)을 제안했을 때 이미 예고된 바 있다. 아랍평화안은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 및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종식에 대한 응답으로 아랍국가들과 이스라엘이 관계 정상화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아랍평화안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종식과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을 전제 조건으로 강조하였으나, 당시에도 다수의 전문가들은 이 아랍평화안의 실제 목표는 이스라엘-아랍국가 간의 관계 정상화라고 판단하였다. 결국, 2020년 아랍국가들은 이스라엘과 아브라함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종식 및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이라는 표면적인 아랍대의 명분을 버리고, 실제 목표를 성취하였다.  그런데 2003년 4월 말-5월 초에 이란도 2002년 아랍평화안을 수용하면서, 미국 국무부에 포괄적인 이란-미국 평화안을 제안했다. 로마 소재 Inter Press Service 보도에 따르면, 이란-미국 평화안은 존스 홉킨스 대학의 이란외교정책 전문가 트리타 파르시가 입수하여 공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이란-미국 평화안은 “이란이 2002년 아랍평화안을 수용하고, 1967년 국경 내에서 민간인들에 대한 폭력 행위를 중단하기 위하여 하마스와 이슬람 지하드 등에 압력을 가하고, 하마스와 이슬람 지하드 등에 대한 물질적 지원을 중단하고, 헤즈볼라가 레바논 내에서 단순한 정치 조직이 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며, 평화적 핵 기술에 대한 완전한 접근을 조건으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훨씬 더 엄격한 통제를 받아들이겠다.”고 제안했다. 트리타 파르시를 비롯한 이란 안보정책 분석가들에 따르면, 이란 국가안보 고위관리들은 이스라엘의 존재를 수용하고 양보하는 대가로, 페르시아만 지역에서 이란의 안보와 지정학적・정치적 이익을 증진시키는 내용으로 구성된 미국과의 협상 문제를 오랫동안 논의해 왔다. 그러나 미국은 2003년 이란이 제시한 이란-미국 평화안에 대한 답변을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 볼 때, 이란도 역시 국익을 추구하고 국제 사회에서 활발하게 기능하기 위해서 이스라엘과 관계 정상화를 이미 준비해온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5년 10월 26일 이란 대통령 마흐무드 아흐마디 네자드는 ‘이스라엘을 지도에서 지워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국제적으로 논란이 되었다. 이에 대하여 이란 최고지도자이며 이란 외교정책의 궁극적인 책임자인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는 “이슬람공화국은 결코 어떤 나라도 위협한 적이 없으며, 위협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히면서 아마디 네자드의 발언이 국제 사회에서 야기한 논란을 잠재우려고 시도하였다. 역사적으로 이란 이슬람공화국 초기부터 이스라엘에 대한 이란의 입장은 이란 내부 반대파들을 누르고 역내에서 편을 가르는 공격적이며 선동적인 발언과 이와 모순되는 국익을 추구하는 전략적이고 실용적인 정책이 뒤섞여 있다. 따라서 이란의 외교정책을 이야기할 때, 공격적이고 선동적인 수사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실제 정책이 은폐될 가능성이 있다. 사진 출처 - KBS  2021년 1월 미국 조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2018년 트럼프 행정부가 중단시킨 2015년 7월 14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합의한 159쪽으로 된 이란 핵 문제에 관한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oint Comprehensive Plan of Action, JCPOA)의 복구 및 재협상 여부가 다시 부상하고 있다. 2015년 7월 20일, JCPOA은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2231호에 의해 승인되었다. JCPOA는 2014년 2월부터 2015년 2월까지 13차례에 걸쳐 미국과 이란 간의 협상을 통해서 마련된 이란 비핵화 방안을 유엔안전보장 이사회 상임 이사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러시아와 독일(P5+1)이 수용한 결과다. 이란이 핵 개발 프로그램을 포기하는 대가로, 미국과 유럽연합(EU)이 이란에 대한 경제제재를 해제한다는 내용이 주요 골자다.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이란이 JCPOA의 핵 관련 조항을 준수하는지 여부를 협정에 명시된 특정 요건에 따라 검증한다. 또한 JCPOA는 2015년 10월 18일부터 2025년 10월 18일까지 10년 동안 실행되며, 동시에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2231호는 종료된다.  그런데 이란의 명백한 합의 준수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2018년 5월 8일 일방적으로 JCPOA에서 탈퇴했고, 그 후 이 협정에 의해 해제된 이란에 대한 모든 제재를 다시 가했다. 2018년 5월 21일 트럼프 행정부의 국무장관 마이크 폼페이오는 이란에게 재협상 조건으로 “영구적이고 검증 가능한 방식으로 핵 프로그램을 포기해야하고, 플루토늄 농축을 중단하고 재처리를 절대하지 말아야하며, IAEA에게 이란 전역에 대한 완전한 사찰을 허용하고, 탄도 미사일 규제, 레바논의 헤즈볼라, 팔레스타인의 하마스와 이슬람 지하드, 예멘의 후티 민병대 등에 대한 지원 중단, 시리아 전역에서 이란의 통제하에 있는 모든 병력 철수,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등 테러리스트에 대한 지원 중단, 이스라엘 파괴 위협 및 사우디아라비아와 UAE로의 미사일 발사 등 위협 중단” 등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미국의 재협상 조건은 이란이 JCPOA를 위반했다는 내용을 포함하지 않았고, 핵문제와는 직접 관련이 없고, 이란의 역내 패권과 관련 있는 문제들을 포함한다.  이란과 나머지 국가들은 미국의 탈퇴에 반대했다. 2019년 5월 8일,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은 미국이 JCPOA 탈퇴를 발표한 지 1년이 된 날, 국영방송에 출연해 이란도 우라늄 농축과 중수 생산 제한 등 JCPOA 일부 조항의 이행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2021년 10월 14일, 이스라엘 신문 Haaretz에 따르면, 이스라엘 총리 베네트는 JCPOA 합의를 2015년 네타냐후가 주장한 것처럼 ‘역사적 실수’로 보지 않으며, 네타냐후 총리의 촉구로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2018년 5월 8일 JCPOA에서 일방적으로 탈퇴한 것을 더 이상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베네트 총리는 2018년 미국이 JCPOA 탈퇴 이후 3년 동안 이란의 핵 능력이 대약진한 것으로 평가하면서 핵협정이 이란이 핵보유국으로 가는 길을 막는 최선의 방책으로 보고 있다. 사실, 미국이 JCPOA를 탈퇴할 때까지 이란은 JCPOA를 준수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2021년 9월 27일, 유엔 총회연설에서 베네트는 “이제 이란의 핵 프로그램은 분수령을 맞이했고 우리의 관용도 마찬가지다. 이란의 핵 프로그램은 임계점에 왔다. 우리는 이란의 핵무기 획득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이란은 핵우산 하에서 이 지역을 지배하려고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이란 핵 문제는 중동 역내 패권 문제와 관련이 있음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관점은 트럼프 행정부가 2018년 JCPOA를 탈퇴한 후에 내놓은 재협상 조건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 따라서 이란 핵 문제는 타결이 쉽지 않아 보인다.  2021년 11월 5일, 이란 국영 Press TV에 따르면, 이란 원자력기구 대변인 베흐루즈 카말반디는 이란이 20% 농축 우라늄 210kg 이상을 생산했고, 순도 60%로 농축된 우라늄 비축량이 25kg에 달했다고 밝혔다. 이란 에브라힘 라에시(대통령 재임: 2021.08.03-) 정부는 미국의 모든 불법적인 제재를 제거하기 위해 핵 협상을 재개할 것이라고 여러 차례 발표했다. 이란은 핵 협상이 원활하게 타결되기를 원하지만, 열쇠는 미국과 이스라엘이 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란 이슬람공화국 초대 대통령 바니 사드르가 주장한 것처럼, 미국과 이스라엘 및 국제 사회의 이란에 대한 제재가 일반 주민들에게는 경제적인 고통을 주지만, 이란의 이슬람 정권에게 직접 위협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2020년 5월 18일 이란의회가 통과시킨 ‘이스라엘의 행위에 맞서기’ 법 제정 등은 반정부 시위 등에 맞서 주민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강화하고, 일반 주민들의 정권에 대한 반대를 잠재우고, 주민들을 결집시키는 역할을 하는데 유효하게 활용될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의 행위에 맞서기’ 법은 공식적, 비공식적 이스라엘 단체들과의 상업적·학술적·문화적 활동, 정치적 합의·협상·정보 교환 등을 금지하고 있다. 이 법은 이란의 모든 행정 기관은 평화와 안보를 해치는 시온주의 정권의 적대 행위 및 억압받는 팔레스타인인들, 이슬람 국가들, 이란 이슬람공화국에 대항하는 범죄 등 시온주의자 정권의 적대 행위에 맞서기 위하여 지역적, 국제적 역량을 사용할 것을 규정한다.  이렇게 이란과 이스라엘이 표면적으로 보여주는 갈등은 유대인이냐 혹은 무슬림이냐 등의 종교적, 이데올로기적 차이에서 촉발된 것이 아니며, 종교적・이데올로기적 열정으로 강화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 국가는 종교적・이데올로기적 수사를 정치적 타협을 가로막고, 적대관계를 연출하는 수단으로 활용한다. 결국, 이란 이슬람공화국과 이스라엘은 각각 종교적・이데올로기적인 정치적 수사를 통해서 반대파를 제압하고, 동맹 세력들을 결집하고 지원함으로써 역내 정치에서 분할 지배를 위한 비가시적인 사실상의 동맹 관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이란은 팔레스타인의 이슬람 세력들, 즉 하마스와 이슬람 지하드를 지원함으로써, PLO로의 팔레스타인 민족통합을 저지하고, 결국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인 분할통치 지배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란 이슬람공화국의 反시온주의 수사를 활용하여 유대인들이 탄압받아왔으며, 강제로 추방되었다는 수사를 개발하고 활용함으로써, 유대인을 위한 이스라엘국가 존재와 이스라엘국가 방위를 위한 무장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 유대인, 이스라엘과 이란의 전략적 관계 1
2021-12-29 | hrights | 조회: 1382 | 추천: 2
홍미정/ 단국대 아시아중동학부 교수 □ 유대인들은 강제 추방당한 난민인가, 자발적 이주민인가?  2020년 9월 이후, 이스라엘은 UAE・바레인・모로코・수단 등과 국교 정상화(아브라함 협정 체결) 등으로 역내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다. 게다가 2021년 현재 이란과 사우디・UAE는 2016년 이후 단절되었던 관계 회복을 시도하고 있다. 2021년 4월 이후 11월까지 4차례에 걸쳐 이란과 사우디는 바그다드에서 고위급 회담을 개최했으며, 2021년 12월 6일에는 UAE 국가안보보좌관 셰이크 타흐눈 빈 자이드가 이란을 방문해 고위급 회담을 개최하였다. 최근 이스라엘과 사우디・UAE의 긴밀한 협력 관계를 염두에 둔다면, 이란과 사우디・UAE 관계 회복 시도는 이란과 이스라엘 관계 개선에도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사실 지난 몇 년간 이스라엘은 중동국가들과의 관계 정상화 이후를 조용히 대비해 온 것으로 보인다. 이 중 하나가 중동국가들로부터 이스라엘로 이주한 유대인들에 대한 배상금 요구 계획이다. 이스라엘 국가가 건설되면서, 중동 각국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대거 이주했다. 그런데 이 유대인들의 이스라엘 이주에 관하여 서로 다른 의견들이 존재한다. 한편에는 이스라엘국가 건설과 시온주의 강화에 대한 대응으로 중동국가들 내에서 발생한 격렬한 反시온주의 물결로 인한 유대인 탄압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반면에 이스라엘의 인구적인 필요성에 따라, 이스라엘 비밀 정보기관 모사드 활동 혹은 시온주의자들과 중동국가 통치자들의 합의에 따른 자발적 이주라는 견해도 있다.  이스라엘은 중동국가들의 反시온주의 정책으로 유대인들이 강제 추방되었다고 주장한다. 2014년 6월 23일 크네세트(이스라엘 의회)는 ‘1948년 5월 이스라엘 국가 건설 이후 이란과 아랍국가들로부터 이스라엘로 이주한 85만 명의 유대인들을 강제 추방된 난민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기념하여 11월 30일을 국경일로 지정하는 법’을 채택했다. 2019년 1월 5일 The Times of Israel 보도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이란 등 중동국가들로부터 강제 추방당한 유대인에 대해 배상금을 청구할 것이다. 같은 날 이스라엘 Hadashot TV 보도에 따르면, 18개월간 국제 회계 법인을 활용한 조사 결과, 이스라엘 정부는 이스라엘 건설 이후 강제 축출당한 유대인들이 남긴 재산에 대해, 이란 및 기타 중동 국가들에 총 2,500억 달러 이상의 배상금을 요구할 계획이다.  따라서 시온주의 강화와 이스라엘 국가 수립에 맞서는 중동국가들의 反시온주의 및 反이스라엘 정책으로 중동국가 거주 유대인들이 고향에서 강제로 추방된 난민이었는지, 그렇지 않으면 이스라엘의 인구적인 필요성과 중동 국가들보다 좀 더 발전된 사회, 경제적인 여건을 선호해서 중동국가 통치자와의 합의하에 자발적으로 이스라엘로 이주한 것인지에 대한 균형 잡힌 설명이 필요하다.  이란은 이러한 설명을 위한 좋은 사례다. 1979년 이란 이슬람혁명을 계기로 샤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재위: 1941.09.16-1979.02.11.)가 통치하던 시대의 親이스라엘 정책이 급격하게 反이스라엘 정책으로 변경되었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란의 정책 변화로 이란 유대인들이 강제 추방당했는가? 이슬람혁명 이전과 이후의 이란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비교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이란 유대인들은 자발적으로 이주한 것인가 혹은 강제 추방당한 것인가?  2021년 현재 이스라엘 내 이란 출신 유대인 공동체는 20만-25만 명(기타 자료에는 3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 출처 - 구글 □ 이슬람혁명 이전의 비공식적 동맹 관계 : 샤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의 이란 제국과 이스라엘  2차 세계 대전 초기에 레자 샤 팔레비(재위: 1925.12.15-1941.09.16.)가 통치하는 이란제국에서 나치독일의 영향력은 절정에 달했고, 나치독일은 이란으로부터 중동 전역으로 영향력을 확장하려고 시도하였다. 더구나 레자 샤 팔레비가 나치독일을 편들고 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1941년 6월 나치독일이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1939년 8월 23일 체결)을 파기하고 이란 북쪽에 인접한 소련을 침공함으로써, 레자 샤 팔레비의 나치에 대한 우호적 태도는 연합국들을 매우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 때 나치독일은 소련에 대항하는 기지로 이란을 활용하려고 시도하였다.  소련은 재빨리 연합국과 동맹을 맺었고, 1941년 7월과 8월에 영국은 이란 제국에게 모든 독일인들을 이란에서 추방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레자 샤 팔레비는 독일인 축출을 거부했다. 결국 1941년 8월 25일 영국과 소련은 이란을 기습 공격했고 레자 샤 팔레비 정부는 즉각 항복했다. 이 침공의 전략적 목적은 소련으로 가는 보급선 및 유전과 아바단 정유소(앵글로-이란 석유회사 소유)를 확보하고, 터키와 이란을 거쳐 바쿠의 유전과 영국이 통치하는 인도로 진격을 시도하는 나치독일의 이란 내 영향력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결국, 1941년 9월 16일 영국은 레자 샤 팔레비를 강제 퇴위시키고 추방하였다. 샤의 직위는 그의 21살 난 아들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로 교체되었다. 이 때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레자 샤 팔레비의 배려로 1941년 9월 18일까지 터키 국경을 통해 탈출했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이란은 영국과 미국이 소련에게 원조를 전달하는 주요 통로가 되었다.  이란에서 나치독일이 축출되고, 영국의 영향력이 강화된 이후 1942년 시온주의자들이 운영하는 유대기구는 테헤란에 ‘팔레스타인 사무소’를 개소하였다. 팔레스타인 사무소 개소 목적은 폴란드 유대 난민들을 도와 팔레스타인으로 이민을 주선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사무소는 이스라엘 공관으로 1979년 혁명 때까지 유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7년 11월 29일 팔레스타인 분할 찬반 투표에서 이란은 다른 이슬람, 아랍 국가들과 함께 반대투표를 했다. 1947년 2월 영국이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를 종식시키겠다고 발표한 이후, 유엔총회는 유엔 팔레스타인특별위원회를 설치하였고, 유엔 팔레스타인특별위원회는 팔레스타인 분할하여 예루살렘지역을 국제 통치하에 두고, 유대국가와 아랍국가를 수립하도록 권고하였다. 이 팔레스타인 분할안은 유엔 56개 회원국 중 기권국과 불참국을 제외한 유효투표의 2/3의 찬성이 필요했다. 당시 시온주의자들이 이 결의안을 지지하지 않는 국가들에게 지지하도록 압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결과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는 이 유엔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56개의 회원국 중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찬성 33개 국가,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반대 13개 국가, 중국과 영국을 비롯한 기권 10개 국가로 통과시켰다. 반대한 13개 국가는 이란을 비롯하여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레바논, 시리아, 파키스탄, 예멘, 터키, 이집트, 인도, 시암(태국), 쿠바 등 주로 이슬람 국가와 아랍 국가들이었다. 이러한 이슬람 국가들과 아랍 국가들이 압도적으로 유대국가 수립을 요구하는 유엔 분할안에 반대하는 국제적인 분위기는 이스라엘 국가 건설 이후에 이스라엘과 이란 사이의 관계가 왜 비공식적인 관계로 유지되었는지를 설명해 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란의 사회경제적 개혁의 필요성은 서방, 특히 미국 및 이스라엘과 더욱 긴밀한 관계를 수립하도록 이끌었다. 결국, 1949년 샤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의 미국 방문 이후, 이란은 1950년 3월 6일 이란 의회가 신년 휴회하는 중에, 이란 정부는 의회승인 없이 이스라엘을 사실상 국가로 비공식적으로 인정하기로 했다. 다음날 3월 7일 유엔 총회 의장이며 초대 유엔 주재 이란대사인 나스르 알라 엔테잠이 유엔 이스라엘 대표부 대표이며 주미 이스라엘 대사인 압바 에반에게 이스라엘 국가 인정 사실을 통보했다. 3월 26일 이란 정부는 장관 직위를 가진 이란 외교관 레자 사피니아를 특사로서 이스라엘로 파견하였다. 같은 해 6월 13일 뉴욕 소재 Jewish Telegraphic Agency는 “6월 12일, 이스라엘에서 테헤란을 대표하는 이란 전권대사 레자 사피니아가 예루살렘에서 공식 축하 연회를 개최하였는데, 이 사건은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수도로 선포한 이후(1949년 12월 13일 이스라엘 의회는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라고 투표로 결정) 예루살렘에서 외국 외교관이 갖는 첫 번째 행사였다. 이 행사에는 데이비드 벤구리온 총리와 몇몇 장관들, 두 명의 수석 랍비들이 참석했다.”라고 보도했다. 이것은 이란과 이스라엘 관계가 얼마나 우호적인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한편 1951년 3월 15일, 이란의회 의원이며 국민전선당 당수인 무함마드 모사데크가 주도하는 이란의회는 이란 석유산업의 국유화법을 통과시켰다. 곧이어 4월 28일 의회는 모사데크를 총리로 선출하였고, 샤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가 그를 총리로 임명하였다. 모사데크가 총리로서 집권한 직후, 5월 1일 모사데크는 영국계 앵글로-이란 석유회사를 국유화하여 그 자산을 국영 이란 석유회사에 넘기고, 1993년에 만료예정이었던 이 석유회사의 석유채굴권을 취소하였다. 모사데크는 앵글로-이란 석유회사가 이란 석유의 대부분을 통제하고 있다고 보았다. 석유산업 국유화 조치 이후, 영국 및 서방측 석유회사들의 숙련 기술 인력들이 빠져나가고, 유럽에서 석유 수출 시장을 찾지 못한 모사데크 정부는 경제적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1951년 7월 7일, 모사데크 정부는 재정난으로 인해서 예루살렘 영사관을 폐쇄하였으나 이스라엘 국가 승인을 취소하지는 않았으며, 양국 간 경제 협력은 계속되었다. 모사데크는 이스라엘 유니온 은행 대표에게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이란출신 유대인들에게 자금을 이체해 줄 수 있는지 물었다. 이 은행 대표는 우호적인 해결책으로 양국 사이의 상업적인 네트워크를 세우자고 제시하였다. 결국 양 국가의 국립은행 사이에서 50억 달러의 정산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렇게 모사데크 시대에도 이스라엘은 이란과 관계 정상화를 강력하게 추구하였다. 이때 이스라엘 관리들은 이스라엘을 법률적으로 승인하라고 이란에게 압력을 가하였다. 그러나 의회 내의 민족주의자들과 강력한 종교인들 때문에, 모사데크 정부는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법률적으로 승인할 수가 없었다. 이란은 이스라엘의 공산품, 의료 장비 수입 및 기술 지원의 대가로 농산물을 제공하였다. 1953년 6월 11일, 이스라엘과 이란 국립은행들 사이에 신용대출 개설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때 이란-이스라엘 무역회사 IRIS도 설립되었다.  그런데 1952년 10월 영국대사관과 관리들이 이란에서 축출되었다. 이때 영국은 미국에게 모사데크 정권이 불안정하고, 공산주의자들의 지배하에 들어갈 수 있으며. 이란이 공산주의자들의 지배하에 들어간다면, 이란의 엄청난 석유 자산이 공산주의자들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미국이 이란 정치에 직접 개입하는 동기가 되었다.  이후 샤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가 영국 및 미국 CIA와 공모하여 모사데크를 권좌에서 강제로 축출하라는 칙령을 발표했고, 1953년 8월 19일 파즈롤라 자헤디 장군이 탱크부대를 동원하여 모사데크를 축출하였다. 이 사건은 미국이 냉전 기간 동안 외국 정부의 전복에 처음으로 참여한 영미 비밀 합동작전이었다. 이 쿠데타 이후 이스라엘과 이란 관계는 더욱 강화되었다. 1956-1963년 7년 동안 이스라엘 외교관 즈비 두리엘이 테헤란에 사절로 파견되었다.  1953년 8월 19일 모사데크를 축출한 쿠데타 성공 이후, 샤는 점점 더 권위주의적이고 독재적으로 되었고, 이란은 미국 및 이스라엘과 수십 년 동안 긴밀한 관계에 접어들었다. 특히 1956년 수에즈 위기 이후 이집트에 맞서 이스라엘과 이란은 더욱 긴밀한 협력 관계를 강화하였다. 결국, 1957년 샤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는 미국 중앙정보국과 이스라엘 모사드의 도움으로 비밀경찰이며, 국내 보안 및 정보기관으로 사박을 창설하였다. 사박은 샤의 통치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창설한 비밀경찰로 반대파들을 자의적으로 체포하고 고문을 하면서 반대파를 진압하는 데 사용되었고, 최고 정점에서 6만 명의 조직원(15,000명 이상의 상근 인력과 수많은 시간제 정보원)들이 활동하였다. 사박은 총리실에 소속되었고, 사박 국장은 국가안보 업무를 담당하는 부총리 직함을 맡았다. 사박의 많은 간부들은 동시에 군대에서 복무했다.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아야톨라 호메이니 정부 하에서 1979년 2월-9월 사이에 처형된 248명의 군인 중 61명이 사박 간부들이었다. 호메이니 정부는 사박을 정보보안부, 즉 사바마로 대체하였다.  비록 이스라엘과 이란 외교 공관이 테헤란과 텔아비브에서 각각 운영되고 있었지만, 양국 관계는 ‘애매하게 비공식적’으로 남아서, 1979년 혁명 때까지 계속 작동했다. 양국 간의 실질적인 관계는 이란이 이스라엘 석유 수요의 60%를 공급하고, 무역, 수출입, 이스라엘 비행기 엘 알 정기 항공편 운행, 학생 교류 등 다양한 분야에서 존재했다. 이스라엘과 이란은 농업, 의학, 군사 등 세 가지 주요 분야에서 특히 강력한 관계를 발전시켰다. 이스라엘 전문가들은 카즈빈 프로젝트와 같은 다양한 개발 프로젝트에서 이란과 협력하였다. 1962년 9월 이란의 카즈빈 지역에서 발생한 지진 이후, 카즈빈 프로젝트를 통해서 이스라엘은 이란의 구호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계획 전문가들을 보냈다. 이스라엘이 시작한 작은 프로젝트인 한 마을을 재건하는 것은 유엔에 의해 시작된 더 큰 프로젝트로 이어졌고, 이스라엘에서 온 전문가들로 구성된 팀이 지진에 의해 황폐화된 지역을 조사하고 계획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이로 인해 여러 마을에 대한 종합적인 지역 계획과 세부 계획이 수립되었다. 이스라엘의 이란 지원은 또한 양국 간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카즈빈 지진은 건축을 포함한 다양한 분야에서 이스라엘의 전문지식을 입증하고 개발 주체로서의 이스라엘의 국제적 이미지를 공고히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1973년부터 1977년까지 테헤란 소재 이스라엘 공관 2인자였던 아리에 레빈은 The Times of Israel에 “1956년 수에즈 작전 이후 아랍과 서방세계로부터 석유 구매를 거부당한 이스라엘은 이란산 석유 구매에 성공했다. 그 대가로 이스라엘은 이란의 농업, 도시계획, 그리고 다른 분야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1962년 카즈빈 지역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지진 이후, 이란인들은 이스라엘인들이 헌신적이고, 열심히 일하며, 도와주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스라엘인들은 카즈빈 지역에서 그들의 농업, 마을 건설, 공동체 조직을 계획하고 다시 만들었으며, 우수한 농업인인 이란인들을 도와 현대적 생산과 농사를 지도하는 재능 있고 경험 많은 전문가들이었다.”라고 밝혔다. 이때 이스라엘과 이란 사이에 무역 관계가 번창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관료들은 이란 정부와 샤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와도 매우 가까웠다.  1970년대 중반 이란의 무기개발 및 군사력 강화 정책은 이스라엘과 협력으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1977년 4월 이란의 샤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와 이스라엘 국방장관 시몬 페레스가 이스라엘-이란 프로젝트(암호명 Flower)를 ‘무기와 석유 교환협정’으로 체결하였다. 이 프로젝트는 이스라엘이 이란에 판매하기 위해 수십억 달러 규모의 첨단 지대지 미사일, 즉 무게 750㎏ 사거리 300마일의 탄두를 탑재한 미사일을 생산하는 사업이었으며, 이 미사일들은 핵탄두를 장착할 수 있었다. 이란의 첨단 지대지 미사일 보유는 이란을 중동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 강국으로 만들려는 샤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 계획의 일부였다. 1978년 이란은 첨단 지대지 미사일 개발 계약금으로 2억 6천만 달러 상당의 석유를 카르크 섬에서 선적하여 이스라엘로 보냈다. 이 협정은 이스라엘에게 첨단 무기 개발을 위한 자금뿐만 아니라 석유공급도 보장해 주었다. 1979년 2월 이슬람혁명이 발발했을 때, 이스라엘은 이란에게 제공할 첨단 지대지 미사일을 거의 완성했다. 그러나 이슬람혁명 발발로 이스라엘과 이란의 군사 협력 사업은 중단되었다.  그런데 2013년 11월 1일 The Times of Israel에 따르면, 이란은 1957년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연구」에서 미국과의 협력 계획을 발표하면서 공식적으로 평화적 핵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이란은 1967년 테헤란에 미국이 제공한 연구용 원자로를 갖춘 핵연구센터를 열었다. 1968년 이란은 핵확산금지조약에 서명하고, 1970년 비준했다. 그러나 1979년 이슬람혁명으로 이 분야에 대한 이란과 미국의 공식적인 협력도 끝났다.  1979년 이슬람혁명이 발발하지 않았으면, 샤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의 이란 제국은 이스라엘과 미국의 도움으로 핵 강국이 되었을까? - 유대인, 이스라엘과 이란의 전략적 관계 2
2021-12-29 | hrights | 조회: 1406 | 추천: 2
윤요왕/ 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현재 내가 일하고 있는 곳은 ‘중간지원조직’이다. 춘천시에서 조례를 통해 출자출연기관의 형태로 설립한 재단법인 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이하 춘천마자센터)이다. 작년 7월 1일 문을 열였고 나는 6월 15일 홀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49년을 야생이라 할 수 있는 시민단체와 농촌에서 농부로 마을활동가로 살아온 내게 춘천마자센터는 약간의 설레임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새로운 도전이었고 흔쾌히 동의되지 않는 머뭇거려지는 기관이었다.  이제 1년 6개월밖에 안 되는 미천한 경험과 소회를 가지고 전국의 수많은 중간지원조직에 대해 논한다는 것이 오만일 수도 있겠다. 다만, 요즘 서울시를 보면서 또 이번 시의회에 출석해 한 시의원님으로부터 들은 한마디가 이야기하게 된 자극이 되었다. “마을자치지원센터가 정치색을 띠는 것처럼 비춰지면 안되잖아요. 그래야 혹시 정권(지방자치단체)이 바뀌어도 계속 유지될 수 있죠” 비아냥은 아니었길. 우려였고 걱정이었고 휘둘리지 말고 제 역할을 하라는 조언이었을 거라고 애써 맘먹기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저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며 올라오는 불편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전국의 수많은 분야 – 마을만들기, 공동체, 주민자치, 사회적경제, 도시재생, 상권활성화, 문화, 기후위기, 생태, 환경, 사회혁신 등등 – 에서 일하고 있는 중간지원조직 활동가들이 정치색에 의해 좌우되는 또는 개인의 입신양명만을 위해 현장을 떠나 자칫 양쪽(행정과 현장)에서 욕 들어 먹기 딱 좋은 곳을 선택한 것은 아닐 것이다. 대부분의 중간지원조직 활동가들은 현장에서 오랫동안 온몸으로 겪어내면서 채득한 경험과 가치를 도모하기 위해 뛰어들었을 거라 생각하고 믿고 싶다. 실제로 전국 곳곳에서 행정만이었다면 어려웠을 유의미한 결과물들을 내고 있음을 심심찮게 접하게 된다. 현장에 대한 풍부한 이해와 경험, 혁신적인 상상력과 실천력 등 민간전문가가 아니면 알 수 없고 할 수 없는 새싹들이 풀뿌리처럼 골목마다 마을마다 전국에서 서서히 움트고 돋아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다만, 아직도 가야 할 길은 먼 것 같다. 행정의 민간, 시민들에 대한 편견과 몰이해도 극복해야 하고 현장의 이해 부족으로 인한 우격다짐에도 평화롭게 응대해야 한다. 법과 제도, 규정에 가로막혀 불합리하고 비효율적인 모순을 보며 답답함도 좌절감도 경험하게 된다. 전국 방방곡곡을 자유롭게 다니며 사람을 만나고 현장을 배우던 활동가들은 새장 속에 갇힌 파랑새처럼 자유를 속박당하기도 한다. 서글퍼지는 활동가들의 모습도 보이는데, 안락함과 매너리즘에 잡아먹히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된다. 야생성과 신념은 마음속에 굳건히 품고 현실에서는 유연함과 여유로움으로 활동해야 하는데 이게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다. 자칫하면 현장성은 잃고 행정에 익숙해지면서 중간꼰대 혹은 중간갑질의 오류를 범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진 출처 - pngtree  대부분 중간지원조직은 민간위탁형태로 운영되는 곳이 많다. 그렇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구조적 문제를 맞닥뜨리게 되는데 행정으로부터 요구받는 성과, 실적에 허탈해지고 용역회사 취급하는 갑질에 울분을 삭이기도 해야 한다. 무엇보다 언제든지 위탁취소가 되거나 예산이 깎여 더 이상 이 일을 할 수 없는 불안정성이 늘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야기하다 보니 하소연이고 푸념만 늘어놓은 것 같기도 하지만 나름 애를 쓰고 맘을 쓰며 운동성을 잃지 않으며 살고있는 활동가들에게 위로와 위안이 되었으면 한다. 어렸을 때 즐겨 불렀던 노래가 떠오른다.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길 원한다 우리들은 청년이다” 중간지원조직 활동가들이여 힘내시라 그리고 언제든 자유로울 용기를 잃지 않기를 간절한 맘으로 응원한다.
2021-12-29 | hrights | 조회: 940 | 추천: 3
신하영옥/ 여성활동가  지난 11월 24일 인천지법은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60대 남편을 살해한 아내에게 징역 12년을 선고했다. 이 재판은 국민 배심원들이 참여하는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되었다. 현재 이 피고인에 대한 상세한 정보나 사건의 구체적인 정황을 파악하려 여러 경로를 통해 노력 중이지만, 이 피고인 – 가정폭력의 피해자 – 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기사(2021년 11월 24일 자 문화일보)를 보면 남편은 의처증이 있었고, 이로 인해 상당 기간 – 아마도 결혼 기간 내내일 것으로 추정되지만 – 가정폭력을 행사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사건 당일에도 아내의 외도를 의심하면서 남편은 집을 나가라고 했고, 이에 아내가 “이혼하자.”라고 하자 목을 조르는 등의 폭행을 저질렀다. 그 과정에서 친정 가족들을 죽이겠다고 협박을 했고 이에 분노한 아내가 함께 몸싸움을 벌이던 중에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남편을 살해한 경우 국민참여재판은 예전에도 있었다. 2015년 경기도에서는 가정폭력으로 피해를 당해 왔던 아내가 사건 당일에도 술에 취해 흉기를 들고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을 둔기로 내려쳐서 사망하게 한 사건이 있었는데, 국민참여재판을 통해 징역 2년에 처해 진 사건이다. 이 재판에서 국민배심원들 9명 중 5명은 집행유예를 선고해야 한다고 하였다. 인천의 위 사건의 경우에는 배심원들 전원이 10~13년의 구형을 선고하라는 의견을 냈다고 한다. 6년이라는 시간의 경과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퇴행적인 판결이 선고된 것일까?  가정폭력으로 인한 ‘부부살해’는 전체 살인 사건의 10%에 이른다. 2019년 SBS가 ‘부부살해’를 조사한 자룔르 보면 2018년 부부간 살인 사건은 31건이고, 살인 사건은 322건이었다. 이 중 남편에 의한 아내 살인 사건이 2배에 이르고, 부부살해 중 가정폭력이 언급된 사건은 10건 중 8건에 육박한다. 이러한 정황들은 가정폭력이 ‘부부 다툼’이 아니라 중대한 범죄이자 가족 구성원들의 인권에 대한 심각한 침해이고, 생사여탈의 문제가 달린 사건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범죄/폭력 행위가 일회성이 아닌 결혼 기간 내내 지속된다는 점에서 피해자는 엄청난 심리/정서적 억압과 두려움을 내장하고 있어야 하고, 신체적인 후유증에 시달려야 한다는 점이다. 생각건대, 언제고 자신을 폭행하거나 죽음으로 내몰 수도 있는 사람을 곁에 두고 살아야 한다는 건 끔찍함을 넘은 공포의 상황일 수밖에 없다. 가해자와 같은 공간, 같은 시간을 함께해야 하는 범죄는 어디서도 찾기 힘들다. 이러한 경험이 없는 이들은 가해자와 함께하는 일상을 상상조차 하기 힘들 것이다. 사진 출처 -마부작침  이번 판결의 핵심은 무경험의 오류이다. 피해자의 관점에서 사건을 다루기보다는, 법의 해석에, 그리고 아마도 피해자가 본인의 피해 경험을 정확하고 생생하게 전달하지 안/못했거나, 아니면 ‘피해자답지 못’해서였을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배심원들이 생각하는 피해자의 유형과 피해의 유형을 피해자로부터 증거로 제시받지 못했다고 판단하였을 것이라 짐작해본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타인과 나를 동일시하고,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향상된다. 동일한 경험은 “아!” 하면 “어!”라고 할 수 있는 반응, 즉 수용과 공감의 폭을 넓힐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아마도 가정폭력과 비슷한 상황을 겪어보지 않은 배심원들이었다면, 본인들이 경험하지 않고 오로지 상상으로 그려보는 피해와 피해자의 전형이란 것이 있었을 것이고, 장기간 폭력에 노출되어 둔감해진 피해자의 폭력 상황에 대한 설명, 또 우발적 이마나 남편을 살해했다는 사실에서 오는 무기력과 자기소외는 충분히 본인의 폭력피해 경험에 대해 자세하고 구체적이고 동의를 얻을 수 있는 수준으로 설명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누군가로부터 지속적이고 정기적으로 폭력과 지배를 당해 온다면, 대다수 사람은 무엇을 택할 것인가? 법적 조치를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그것이 내 가족이고, 이 사회가 가족 내의 문제는 사생활영역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해결하는 것이 맞다고 강요하고, 자녀들이 부모들이 “그냥 너 하나 참으면 조용해진다.”라고 억압할 때 우리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신체적 폭력과 지배는 심리 정서적 지배상황에 놓이게 만든다. 노예로 길들여 진다는 것과 그 상황을 벗어나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일지 우리는 모른다. 경험 밖에 있기 때문이다. 그저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간접경험을 통해 직접 경험자들의 고통을 인지할 수도 있다.  가정폭력에 대한 인식과 처벌의 수위는 관련법이 제정될 당시와 비교해 달라진 것이 없다. 이번 판결은 되레 퇴행한 것으로 비춰진다. 가정폭력 피해자들의 지속적이고 정기적인 폭력피해의 경험에 대한 공유가 필요하다. 직접경험이 아니라 간접경험을 통해. 이는 일찌감치 가정폭력의 부정성에 대해, 이를 실천하지 않을 방안에 대해, 가정폭력 목격자로서 행해야 할 태도에 대해 교육을 통한 간접경험의 기회를 높이는 것이다. 나아가 가정폭력 피해의 지속적, 정기적 특성의 잔혹함을 인정하여, 가해자 남편의 살인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를 정당방위로 인정하여야 한다. 누구도 노예로 살기를 원하지 않고 공식적인 노예는 없지만, 가정폭력의 피해자들은 여전히 노예의 상황에 놓여 있다. 이를 직시하여야 한다. 이에 대해 ‘가정의 평화’ 운운함으로써 피해자를 가해자에게 돌려보내는 법적 판단은 ‘노예제’를 존속시키는 봉건적 행위임을 인식하여야 한다. 여성 인권의 발전 정도가 제발 시간에 역 비례하지 않는 그런 사회를 살고 싶다.
2021-12-08 | hrights | 조회: 1106 | 추천: 4
이윤/ 경찰관  얼마 전 ‘강철부대’라는 프로그램이 인기였다. 특수부대 전역자끼리 어느 부대가 더 강한지 겨루는 설정인데... 훗... 나에게 최강부대는 의경부대다. 수십 년간 세계 최강이라는 미군 기지를 24시간 철통같이 지켜준 것이 의경부대다. 이 사실 하나로 더 이상 설명은 시간 낭비다. 그래도 납득하지 못하는 분을 위해 사족을 붙이자면 대한민국 부대들 중 실전 경험은 의경이 가장 많다. 하늘을 덮듯 날아오는 화염병과 돌을 피하고 막으면서도 농담하는 여유. 쇠파이프와 물병, 몸싸움, 침 뱉기, 부모 욕 등 무수한 물리적·심리적 공격에도 물러서지 않는 강한 정신력과 인내심. 서울 시내 길바닥에 앉아서 시민들 눈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배식과 취식, 심지어 취침을 하는 몰아의 경지. 나는 이런 부대에서 소대장 2년, 중대장 1년을 근무했다.  의경부대에서 소모품처럼 근무할 때마다 ‘왜 이렇게 인력을 비효율적으로 사용하고 낭비할까’라는 의문을 가졌다. 내 맘대로 내린 결론은 돈이 안 들기 때문이다. 의경은 군복무 중이니 아무리 많은 인력을 동원해도 비용이 더 들지 않는다. 90년대에는 출동수당이나 초과근무수당이 없었으니 의경부대 근무 경찰관들에게도 추가 비용이 없었다. 그러니 아낌없이 사람을 쏟아붓는다. 심지어 경비 인력이 시위 인원수보다 더 많을 때도 있었다. 97년 수사부서에 근무할 때에도 젊다는 이유로 비상설부대 소대장으로 차출되어 6개월간 주중에는 수사업무를 하고, 주말에는 07시부터 23시까지 지하철역 테러대비 경비업무를 했다.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그 당시부터였다. 내가 영·미식 자치경찰제의 열렬한 옹호론자가 된 것은. 자치경찰제가 되면 인력과 예산, 조직을 오롯이 지역 주민의 생명·신체·재산 보호와 범죄 예방 및 수사에 집중하게 될 것이다. 주민 세금으로 운영되니 낭비 요소를 최소화하기 위해 효율적 치안정책을 개발하고, 효과성을 높이기 위해 커뮤니티 폴리싱 같은 주민 참여도 활성화될 것이다. 경찰관은 승진을 위해 높은 자리 계신 분에게 줄을 대려 하기 보다는 현재 직무에서 성과 창출로 인정받고자 할 것이다. ‘춤추는 대수사선’이나 ‘다이 하드’ 같은 경찰관련 외국영화를 볼 때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서로 자기가 처리하려고 싸우는 모습이었다. 외국경찰이 실제로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관할 떠넘기기(속칭 핑퐁)’가 오래된 문제였던 한국경찰과는 너무도 달랐다. 덩치 큰 국가경찰인 한국경찰은 자치경찰에 비해 경찰관 개인의 직무에 대한 성과를 인정받기가 너무 어려워서 그런 것은 아닌지 추측해본다.  다양성 문제도 있다. 국가경찰은 전국에 동일한 치안정책을 동시에 적용한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90년대까지만 해도 전국 일제 검문검색이라는 것을 했다. 전국에서 같은 날 같은 시간대에 도시든 시골이든 관계없이 경찰관들이 밤거리에 쏟아져 나와 검문검색을 했다. 통일된 지휘계통체계에 의한 일사불란한 치안활동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은 국가경찰 체제를 뒷받침한다. 나는 진화론에 기반하여 그것과는 좀 다르게 생각한다. 한 국가 내에서 지역마다 다양한 체계와 정책이 공존하는 것이 오히려 환경 적응력을 높이는 데 유리하다. 눈으로 쫓아가지 못할 만큼 빠르게 환경이 변화하는 요즘, 동일 형질만 존재하는 종은 외부 충격이 있을 때 멸종할 가능성이 있다. 동종 내 많은 변이가 존재해야 그 중 적응하는 형질이 있어 전체 종의 생존에 유리하다. 한국은 영토는 좁지만, 지역마다 치안 환경이 매우 다르다. 따라서 다양성을 인정하고 촉진해야 발전적 적응도 가능하다. 사진 출처 - 행정안전부  좁은 영토는 국가/자치 경찰제의 고려요인이 아니다. 영토가 한국의 절반 정도인 스위스, 비슷한 오스트리아가 자치경찰제를 운영하고, 43개 자치경찰로 구성된 영국의 잉글랜드와 웨일즈 지역 면적도 한국과 비슷하다. 문제는 영토의 넓고 좁음이 아니라 권한의 집중과 분산이다. 각 지역이 스스로의 권한으로 치안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함으로써 주민들에게 책임을 지도록 해야 경찰 본연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다. 아무리 독립성과 중립성을 선언하더라도 중앙집권적 정부조직은 정권의 눈과 입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 인사와 예산, 조직구성이 행안부와 기재부 등 중앙부처와 국회에 의해 결정되고, 전국 경찰의 승진과 보직 운영 권한이 경찰청 지휘부에 집중되어 있는 국가경찰 체제에서는 경찰 구성원의 시선이 위를 향할 수밖에 없다.  남북 분단 상황 역시 고려요인이 아니다. 군사적 침략으로부터 국민을 지키는 것은 군인의 역할이다. 한국전쟁 당시 국립경찰이 국군과 함께 전투 참여 및 빨치산 토벌을 하고, 휴전 후에는 무장공비를 토벌하고, 전경대가 김신조 루트를 경계했던 기억은 군사력이 약했던 과거의 역사다. 현재 세계 10위 수준인 국방력을 경찰이 보충해야 한다면 한국군에 대한 심각한 과소평가다.  자치단체의 열악한 재정을 우려하는 분도 계시는데, 이 문제는 중앙정부의 보조금으로 해결하면 된다. 영국 자치경찰은 독립된 재원인 경찰기금(police funding)으로 운영되는데, 이 중 중앙정부 보조금이 자치경찰 전체 예산의 75%까지 차지했었으나, 예산 종속에 의해 국가경찰화 되는 것을 우려하여 오히려 중앙정부 보조금 비율을 70% 이하로 줄이려고 노력한다.  자치단체장 및 지역 유지와의 결탁도 제도에 의해 예방할 수 있다. 영국 자치경찰은 지역치안평의회(10~20명), 지역치안위원장, 내무부장관, 지방경찰청장의 4원 체계로 운영된다. 주민 선거에 의해 선출되는 지역치안위원장이 지역치안 총괄책임자이고, 그에 의해 임명된 지방경찰청장이 지방경찰을 운용한다. 지역치안평의회는 독립위원으로 구성되고 예산감사, 지방경찰청장 임명 거부권 등 위원장 감시·감독 기능을 수행한다. 예전에 인터넷으로 영국 어느 지역의 지방경찰청장 모집 공고를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예를 들어 “연봉 1억 원에 우리 지역 경찰청장님을 모십니다. 아래 자격요건에 해당하는 유능한 분들은 지원해 주시기 바랍니다.”와 같은 것이다. 만일 경찰이 자치단체장이나 지역 유지와 결탁을 하거나 부정한 청탁을 받고 일한다면, 독립된 수사기관 즉 국가수사본부나 검찰, 공수처 등의 수사를 받게 되므로 견제가 가능하다. 그리고 자치경찰위원회에 영국이나 미국처럼 다수 인원의 사무국을 별도로 두어 인사, 예산, 조직, 감사 등 업무를 실질적으로 맡기면 자치경찰을 지휘, 감독, 통제할 수 있다.  2021년 7월부터 시행된 자치경찰제는 일원화모델이라고 하는데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완전한 자치경찰제를 하면 혁명적 변화가 예상되므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치안이 더 나빠질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G7에 버금가는 선진국이 된 지금, 국민이 중심인 민주적 경찰체제를 갖추려면 자치경찰제에 대한 전면적 재검토가 필요하다.
2021-11-30 | hrights | 조회: 1240 | 추천: 10
이재환/ 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정치의 계절이 돌아왔다. 그것도 3개월여 사이에 대선과 지방선거가 치러지는 큰 장이다.  여당과 제1야당 대선 후보가 선출되었고, 후보 모두 ‘기본소득’을 공약에 염두한 듯 보인다. 특히 여당 후보는 일찌감치 기본소득을 앞세우고 있다. 구체적으로 기본소득을 지역화폐(지역사랑상품권)로 주는 ‘지역화폐형 기본소득’을 제시한 바 있다.  2년쯤 전에 이 지면에서 ‘기본소득과 지역화폐’ 란 제목으로 기본소득의 지급 형태를 특정 지역의 특정 업종에서만 쓸 수 있는 지역화폐로 할 경우의 단상을 살짝 끄적인 적이 있다. 한번 다시 펼쳐보자.(결코 지면을 메우기 위한 목적이 아님을 밝히며..)  “… 물론 보편적 기본소득 적용이 현실화된다면 그 모두를 지역화폐로 전달하는 것은 무리가 따를 것이다. 지역화폐는 말 그대로 지역 내 소비의 순환을 목적으로 하므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다양한 소비에 모두 대응할 수 없다. 기본소득 전체 비중에서 일부를 지역화폐로 지급하는 등의 보완책이 필요할 것이다.  코로나19는 꿈틀거리던 기본소득을 수면 위로 떠 오르게 했다. 미래 사회는 근로소득자와 기본소득자로 나뉠 것이라는 유토피아일지 디스토피아일지 모를 전망도 나온다. 기본소득 그리고 지역화폐와 결합한 기본소득 논의가 향후 어떤 경로를 거쳐 무슨 결과물이 나올지 주목된다.”  그때도 그렇지만 지금도 기본소득을 지역화폐로 지급하는 것은 딱 그림이 안 보인다.  이유는 위에 언급한 것처럼, 무릇 기본소득이라 함은 말 그대로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기본 생활비라는 것을 전제로 할 때 사용처가 한정되어야 ‘만’ 하는 지역화폐와는 미스매치이기 때문이다. 물론 전통적인 기본소득의 조건 하에서의 가정이다.  예를 들어 기본소득으로 세금도 내고, 여행도 가고, 온라인쇼핑몰에서 당일배송 식품도 주문하고 싶다면 현재의 지역화폐로는 불가능하다. 세금은 물론 해당 지역 외 교통편은 지역화폐 사용처가 되기 힘들다. 온라인쇼핑몰은 말도 못 붙인다. 온라인쇼핑몰을 통해 역외로 유출되는 지역의 소비를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만든 게 지역화폐이기 때문이다. 장보기 딱 좋은 대형마트도 물론 안된다.  그렇다면 ‘지역 소비의 역외유출을 막고, 유입된 역내소비가 고루 순환되는’ 지역화폐와 ‘그냥 퍼주기가 아니라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도움이 되는’ 기본소득이 조화롭게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사진 출처 - freepik  얼마 전 국민상생지원금(재난지원금)이 지급됐을 때의 일이다. 사용처가 지역사랑상품권 가맹점으로 국한되자 시작 전부터 논란이 일었다. 대다수 국민(경기도는 모두)에게 지급되는 재난지원금인데 지역화폐 사용처 제한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대형마트나 사행성, 유흥업체는 그렇다 치더라도 가뜩이나 지급지역 밖을 벗어나면 쓸 수도 없는데 경기도의 경우 매출 10억이 넘는 병원 등에서는 지역화폐 가맹점이 아니기 때문에 쓸 수 없는 상황을 맞아야 했다.  결국 ‘간주가맹점’이란 이름으로 지역화폐 가맹점이 아닌 곳 상당수를 재난지원금 사용기한인 연말까지만 가맹점으로 허용했다. 이 기간 동안 지역화폐는 대형마트와 온라인쇼핑몰 등 일부를 제외하고 웬만하면 다 쓸 수 있는 소비쿠폰, 소비 바우처가 됐다.  시흥시는 현재 대기업 프랜차이즈점(주로 다매체 광고에서 집중적으로 볼 수 있는 상호출자제한기업 40여 곳의 프랜차이즈 및 대리점)은 지역화폐 가맹점이 아니다. 뉴스에서 자주 듣던 ‘골목상권을 침투하여 초토화한 대기업 프랜차이즈’를 말한다.  그래서 이곳 가맹점주들로부터 ‘우리도 소상공인’ 이라며 항의를 많이 받았다. 특히 코로나19 민생위기 극복을 위해 정부가 집중적으로 재정을 투입해 마련한 지역화폐 구매 혜택(10% 할인) 때문에 지역화폐 발행액이 크게 높아지자 더욱 커졌다.  그럴 때마다 지역화폐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 양지와 혜량을 구했지만 결국 욕만 배부르게 먹었다. 그런데 재난지원금 사용처가 임시로 확대되자, 집중적인 항의 전화는 거짓말처럼 끊겼다.  만일 지역화폐형 기본소득이 도입된다면 지역화폐는 그 목적을 유지할 수 있을까? 사용처의 범위는 넓어지고, 제한 업종은 온라인쇼핑몰, 대형마트 등만 남을지도 모른다.  물론 온라인쇼핑몰, 대형마트만 지역화폐 가맹점 제한을 둬도 지역 소비의 역외유출이 매우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대기업 프랜차이즈, 대기업 상권은 점점 더 골목 곳곳에, 업종 깊숙이 범위를 넓혀 지금도 들어오고 있다.  정책연계성과 사용자 편의성을 앞세워 이들이 속속 지역화폐 사용처가 된다면 골목상권 영세 자영업자들을 정책 우선 대상에 두고 있는 지역화폐는 그저 이름만 남게 될 공산이 크다.  기본소득과 지역화폐, 융합이 가능할까? 상호보완? 아니면 양립? 과문한 탓에 이 딜레마를 풀 방법은 모르겠다. 이도 저도 아닌 채 모두 사라질 수도 있겠다. 묘수가 있다면 알려주시길.
2021-11-24 | hrights | 조회: 887 | 추천: 0
박상경/ 인권연대 회원 1.  오래전 일이다. 골목 끝, 막다른 집 대문 앞에 교복을 입은 예닐곱 명의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한여름 오후라 인적이 드문 시간인데, 학교에 있어야 할 아이들이 남의 집 대문 앞에 왜 모여 있는 거지 하면서 다가가니,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가는 게 둘러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숨어서 몰래 피는 것도 아니고 서로 둘러앉아 있기는 했지만 대놓고 피는 모양이 섣불리 다가설 수 없게 했다. 그래도 집으로 들어가려면 아이들을 피할 수는 없으니, 아는 척은 해야 했다.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의 일탈 행위에 대해 그냥 모르쇠로만 할 수는 없는 게 아닌가? 아이들의 잘못된 행동에 어른들 누구도 관심이 없다면 아이들이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  “얘들아, 내가 이 집에 사는데, 어른을 보면 담배를 숨기는 척이라도 해야지? 내가 너희들이 담배 피우는 걸 보고도 아무 말 않고 그냥 들어가 버리면 너희들 기분은 어떨 것 같애?” 하고 나름 우회적으로 말을 하니, 남학생 하나가 못마땅한 듯 침을 뱉으며 불쑥 일어서는데, 여학생들이 남자아이를 잡아끌면서 “아, 네네~ 조심할게요!” 하면서 “거봐, 야, 우리 다른 데로 가자니까~” 하면서 자리를 떴다.  가끔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하면 이구동성으로 그런다. “그러지 마, 아이들이 얼마나 무서운데~” 아이들이 무서운 걸까, 무서워진 세상에서 아이들이 살아가는 걸까? 그때 아이들은 핀잔이라고 생각했을까, 관심이라고 생각했을까? 2.  한겨울 늦은 시간, 철시한 공구 상가 거리는 깜깜했다. 모임을 마치고 운동 삼아 집까지 걸어가는데 가로등도 희미한 차도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순간 머리가 쭈뼛 서는 게 후회가 밀려왔다. “다른 길로 갈 걸, 조금 빨리 가려다~~” 무서운 생각에 걸음을 재촉해 지나치려니, 식별도 되지 않는 깜깜한 차도에 사람이 그야말로 큰대자로 누워있었다. 새 도로가 나면서 구도로가 된 이 도로에는 오가는 차량도 사람도 없었다. 문득 “자동차라도 지나가면 어떻게 되는 거지? 저렇게 누워있는 사람을 운전자가 볼 수는 있는 건가? 술 취한 사람인가? 이 추운데 뭐 하는 짓이야?” 하는 생각에 뒤돌아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하면서 “아저씨, 아저씨!” 하고 불러봤지만 대꾸가 없어, 좀 더 다가가 “아저씨,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안 돼요! 차라도 지나가면 그대로 친단 말이에요!” 그러거나 말거나 그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혹시 죽은 건 아닐까 싶어 어떡하지 하는데, 아저씨가 벌떡 일어나 앉더니 “지금 당신이 나 때문에 그러는 거요?” 한다. 헉, 순간 놀라기는 했지만 “그럼, 여기 누가 있어요, 아저씨 말고!” 참 이상하게 말을 한다 싶은데, “그럼 됐어, 가쇼!” 하는 게 아닌가! 무슨 말인가 싶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냥 서 있는데, “당신이 나 때문에, 나한테 그런 거잖소! 그럼 됐소! 그만 가쇼!” 하는 게 아닌가! “아, 됐단 말이오! 나도 일어나 갈 거니 댁 가던 길이나 가쇼!” 하는 말에 뭔지 모르지만 일단 맘이 놓여 나도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날 아저씨는 내가 한 행동에서 자신이 원하던 관심을 받은 거라고 생각했을까?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봐 주기를 바라는, 이 세상 어디선가 자신이 살아가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는, 나, 여기 있다는 인간 실존에 대한 관심이라고 말이다. 사진 출처 - Adobe stock 3.  바쁜 아침 출근길,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전철역이다. 한 할아버지가 턱이 있는 데서 아래로 조심스럽게 자전거를 내리고 있었다. 잠깐 들어드리면 쉽게 옮길 것 같아, 뒷부분을 잡고 아래로 당겼다. 그런데 그게 자전거를 확 잡아당기는 꼴이 되어 손잡이를 잡고 있던 할아버지가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할아버지는 “그냥 두면 되는 걸, 뭘 한다고 남의 물건을 함부로 만지고 그래~~” 하며 크게 화를 내셨다. 지나가던 아주머니도 “그거 잘못하면 노인네 다치겠구만~” 하는 것이다. 아차, 할아버지의 처지는 보지도 않고 제멋대로 간섭하면서 오지랖 폭도 넓게 굴었구나 싶었다. 4.  저녁 무렵, 좌회전 신호를 받으려는 버스는 정류장 못 미쳐서 섰다. 버스에서 내리는데 풀숲에 노란색 물건이 쓰러져 있는 게 눈에 띄었다. 밟으면 안 될 것 같아 허공에서 헛돌던 발을 헛디디면서 넘어질 뻔하였다. “이게 뭐에 쓰는 물건인고~” 들여다보니 요즘 유행하는 전동킥보드였다. 누군가 사용하고 이리 쓰러뜨려 놓은 모양이다. 나같이 발을 헛디디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 한쪽에 세워놓으려는데 이게 또 꿈쩍을 하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도난방지 경고음까지 울어대니 도적질하는 것 같아 민망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때 지나가시던 아주머니 한 분이 “내도 아까 그거 옮겨놓으려고 했는데 소리만 무지하게 나고 꿈쩍도 하지 않던데~ 에 이 사람들도 저기 세워진 데 놓으면 오죽 좋아~~” 하신다. 그때 든 생각, 버스는 정류장에 정차, 전동킥보드는 설치대에! 그러면 오지랖 넓은 이런 짓은 안 할 텐데~ 5.  아침 출근길에 지하철 역사에서 만난 동료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는데, 우리 사이로 틈이 조금 벌어지면서 자전거가 씽 하니 스쳐 지나갔다. “햐, 묘기다! 나라면 그 좁은 틈 사이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 옆을 속도를 줄이지 않고 지나갈 수 있는 저 묘기(?)를 부리는 거는 자전거만이 아니다. 전동킥보드며 오토바이도 그 대열에 합세한 지 오래니 말이다. 걸어가는 사람한테는 위협적인데 정작 타는 이들은 자신만만하다.  “그런데 왜 버려진 전동킥보드는 그리도 많은지 모르겠다. 홀로 길 한복판에 떡하니 서 있거나, 역 입구에 버려져 계단에서 올라오는 사람과 박치기할 준비를 하고 있거나, 바닥에 쓰러져 오가는 사람들 발에 채이거나….”  그때 같이 가던 그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언니, 나는 그런 일에 관심이 없긴 한데, 그래도 그런 오지랖 넓은 사람이 필요하다구는 생각해!”  관심과 오지랖, 그건 경계가 있는 게 아닌 것을, 그냥 서로 다른 표현인 것을….
2021-11-18 | hrights | 조회: 1067 | 추천: 7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대표 1. 마, 정치 이야기는 하지 맙시다.  차기 대통령 선출을 향한 레이스가 한창이다. 필자는 이재명 후보를 지지한다. 그는 “이재명은 합니다”를 출사표의 통괄적인 일성으로 내걸었다. 이 문장은 불완전 문장이다. ‘합니다’의 목적어가 빠져 있다. 이 구호를 접하는 국민은 과연 그가 무엇을 한다는 것인가를 궁금해할 것이다. 문장의 목적어인 그 무엇은 대통령 출마자로서 내놓는 그의 공약에 담길 것이다.  국민을 향한 공공의 약속 즉 ‘公約’은 헛된 약속 즉 ‘空約’이라는, 정치에 대한 흔한 비아냥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다들 잘 알다시피, 국가가 집행하는 모든 권력의 원천이자 주체는 국민이다. 정치에 대한 이 비아냥은 정치의 주체인 국민이 정치에 짐짓 무감하도록 한다. 그처럼 거짓말을 밥 먹듯 하니, 대통령을 하겠다는 ‘놈들’치고 그렇고 그렇지 않은 ‘놈들’이 누가 있냐는 식이다.  며칠 전, 오랜만에 필자의 고향인 경남 마산을 찾았다. 한국기원 창원지원에 몇몇 친구들이 모였다. 저녁 내기 바둑을 둔다. 대체로 1급 고수들이다. 필자는 고작 5급 정도에다 평소 거의 바둑을 두지 않다시피 하니, 넉 점 접바둑에도 1승 2패다. 오랜만에 ‘위드 코로나’를 틈타 저녁 겸 술자리에 열 명 남짓 선후배들이 모였다. 보이지 않는 녀석들의 안부와 동정을 묻고 즐겁게 반세기 가깝게 지난 고교 시절 옛이야기를 나눈다. 술이 몇 순배 돌고, 3.15 의거와 부마 항쟁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 마산 사람들이 독재자 두 명을 날려 버렸다 아이가! 그기 우리 마산 사람들의 뚜렷한 자부심 아이것나!’ 필자가 거들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선 정국으로 말머리가 돌아간다. ‘어이, 조박사, 니 철학박사 아이가, 우찌되는 긴지 한 마디 해봐라.’ 그러자 치과 원장 일을 하는 후배 한 녀석이 ‘정치 이야기는 하지 마입시더.’ 하고서 힘주어 말한다. 다들 정치적인 입장들이 다르니, 괜히 기분 좋은 술판을 깨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 녀석의 취지임은 물론이다. 딴은 맞는 말이다. 더욱이 필자를 포함해 다들 오랜만의 반가움에 술기운이 많이 오른 상태라 위험한 건 사실이었다. 게다가 ‘아이고, 나는 마 대선이니 뭐니 아무 관심도 없다.’ 또 한 녀석이 맞장구를 친다. 내심 기회다 싶어 이재명 후보의 정치적인 위력과 내공을 ‘선전’하려 하던 필자는 머쓱해지고 말았다. 그렇게 놓친 기회를 여기 ‘수요 산책’의 공론장을 빌려 살려보려는 마음이다. 2. 새로운 정치적 언명에 기대를 건다.  대통령 출마자의 공약은 말이다. 본래의 공약은 그냥 말이 아니다. 통치권을 어떤 방향으로 어떤 현명한 책략으로 활용할 것인가, 그리하여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고귀한 삶을 어떻게 더욱 바람직하게 높여 갈 것인가, 대통령 출마자의 공약은 그 중차대한 일의 청사진을 제시하는바 엄중하기 이를 데 없는 말이다. 이재명 후보는 말한다. “어떤 지도자가 일을 맡느냐에 따라 시민의 그리고 국민의 삶이 얼마나 크게 바뀔 수 있는가를 보여드리겠습니다.” 너무나 절실하고 적실한 말이다. 그리고 덧붙인다. “말을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행동이 중요합니다.”  필자는 「현상학적 신체론」이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 논문의 핵심 주장 하나가 인간 주체의 근본은 생각하는 정신이 아니라 행동하는 몸이라는 것이다. 생각과 말의 관계에서, 생각은 말로 하는 것이고 말이 곧 생각이라는 것은 철학자 대부분이 인정한다. 하지만, 진정한 삶을 꾸려가는 데 행동이 시작과 끝이고, 따라서 생각이 행동을 위한 수단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인정하는 철학자는 드물다. 그런데, 이재명 후보는 이를 정확하게, 게다가 그의 삶 전체를 통해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행동은 크게 세 갈래로 나뉜다. 일과 싸움과 놀이다. 한자 말로, 일은 노동으로, 싸움은 투쟁으로, 놀이는 유희로 표현된다. 행동의 이 세 갈래는 구분되긴 하나, 완전히 따로 작동하지는 않는다. 노동에서는 자연적인 물질의 저항과 싸워야 하고 관련한 사람들의 무능력과 잔인함과 싸워야 한다. 그런 가운데, 새로운 물건들을 창의적으로 만들어내는 기쁨을 통해 노동이 놀이의 성격을 갖는다. 투쟁의 본령은 정치다. 정치는 뭇 사회적 노동이 추구하는 가치의 방향과 성격을 규정하고 그 분배의 척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를 둘러싼 투쟁이다. 정치적인 투쟁이 일임은 물론이고, 그 성취에서 기쁨이 수반되기에 한편으로 놀이이기도 하다. 바둑 두기나 여느 스포츠 경기 그리고 예술 경연에서 보듯이 유희에서도 경쟁 즉 투쟁이 필수적인 요소고 그 성취를 위한 노력은 노동일 수밖에 없다. 이재명 후보가 말이 아니라 행동이 중요하다고 했을 때, 그가 행동의 이 세 갈래의 갈등과 조화를 충분히 체화했으리라 짐작된다.  이재명 후보는 ‘억강부약’을 자신의 통치 이념으로 내세운다. 모르긴 해도, 한국의 정치사에서 처음으로 듣는 말이지 싶다. 강한 지배력을 갖는 자들은 소수이기 마련이고, 약한 처지에서 지배당하기 일쑤인 자들은 대체로 다수이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는 강한 자들을 억누르고 약한 자들을 돕는 것이 정치의 근본이념임을 정확하게 인식하여 국민에게 제시한다. 강한 소수를 적으로 삼아 철저하게 싸우겠다는 것이고, 약한 다수를 돕는 것을 그 투쟁의 목적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억강부약’을 그저 말로만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행동으로 관철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기득권 세력의 강력한 저항을 예상한다는 말을 반복하고, 하지만 결코 굴하지 아니하고 끝내 싸워서 이기겠다는 말을 반복한다.  일견 불안하지 않을 수 없다. 묘한 일반인들의 심리 때문이다. 누구나 투쟁 관계를 벗어날 수 없고, 거기에서 상대적인 우월감과 열등감을 느낀다. 그런데 누구나 투쟁 관계에서 자신이 우월하다는 인정을 받고자 하는 본능적인 경향을 지닌다. 그래서, 현실 전반으로 보면 분명히 자신이 열등한 위치에 있는데도, 가까운 주변의 관계에서 자신이 상대적으로 우월한 지점들에 눈길을 먼저 돌린다. 그리하여 은근히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강자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비록 현재의 자신의 삶을 유지 강화하기 위해 싸우는 일이 힘겹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자신의 현재 삶을 부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세계 8위의 경제력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의 전반적인 사정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리라 예상된다. 만약 필자의 이런 생각이 옳다면, 자신이 강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다수고 자신이 약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소수인 셈이 되고 만다. 굳이 철학적인 개념을 끌어와 풀이하면, 보편과 특수의 불일치다. 보편적인 현실로 보면, 분명 강자가 소수고 약자가 다수다. 그 반대로, 특수한 심리로 보면, 강자가 다수고 약자가 소수인 것이다.  흔히 정치는 심리라고 말한다. 그래서 불안하다. 이재명 후보는 보편적인 현실을 염두에 두고 ‘억강부약’을 외치는데, 유권자인 국민 중 심리적으로 자신이 어느 정도는 강자라고 여기는 사람이 많고, 그래서 그 ‘억강부약’이란 말을 자신을 억압하겠다는 위협으로 듣는 유권자가 많을 수도 있을 것 같기에 불안하다. 말하자면, 객관적인 현실에서의 진실이 주관적인 심리에서의 진실이라는 벽에 부딪혀 왜곡될 수 있기에 불안한 것이다.  그런 점을 염두에 둔 것일까? 이재명 후보는 “저는 우리 국민의 집단 지성을 믿습니다.”라는 말을 한다. 필자가 알기로는, ‘국민의 집단 지성’, 이 말도 대한민국의 정치사에서 처음으로 듣는 말이다. ‘집단 지성’은 프랑스의 사회철학자인 피에르 레비가 만든 개념이다.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사이버 공간이 보편화하면서 하나의 사안에 관해 특정한 한 사람이 아니라 주도해서 정보 문건을 작성하고 그에 따라 그것에 대해 배타적인 저작권을 주장하는 것에서 벗어나 불특정한 여러 사람이 자발적으로 수정과 개작을 통해 정보 문건을 계속 새롭게 발전시켜 나가는 데 누구나 참여하여 그 지식 정보를 공유하는 현상을 보고서 거기에서 작동하는 공동의 지성 활동을 일컫는 말이 ‘집단 지성’이다. 사진 출처 - Adobe stock  그런데 이 ‘집단 지성’이란 개념을 이재명 후보가 국민에게 적용한 것이다. “저는 우리 국민의 집단 지성을 믿습니다.” 이를 옛날식으로 들으면, ‘저는 우리 국민이 바보가 아님을 믿습니다.’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보편적인 국민 권리에 따른 복지 정책에 대해 상대편에서 매표행위라고 비판하자, “이제 막걸리 한 사발, 고무신 한 켤레로 표를 사는 때와는 다릅니다.”라고 응수한다. 한때 국민이 너무나 열악한 상황에서 바보가 될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 누구나 쉽게 대학교육을 받을 정도가 되었고 그에 따라 우리 국민이 얼마든지 공통의 지성적 결집체로서 집단 지성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재명 후보는 ‘국민의 집단 지성’이란 말을 함으로써 한편으로는 국민의 지성에 대한 신뢰를 나타내고, 다른 한편으로 국민이 정치적인 판단을 하는 데 있어 개인의 주관적인 심리에 이끌리는 데서 벗어나 보편의 지성적인 판단을 해 달라고 요구한다. 거기에는 우리 국민이 얼마든지 그런 정치적 지성을 발휘할 수 있는 위력을 갖추었다는 그의 믿음이 깔려있다.  지성의 근본 힘은 반성이다. 지성은 감정적으로 불쑥 떠올라 왜곡되기 일쑤인 자신의 심리적인 판단을 곰곰이 반성해서 검토함으로써 그 부당함을 제치고 진정 올바른 판단을 하도록 생각을 이끄는 힘이다. 이때 지성은 판사인 양 객관적인 진실을 척도로 삼아 저 자신의 심리를 피고로 삼아 판정한다.  그런데 심리적이건 지성적이건 그 판단의 기준은 이익이다. 감정에 따른 심리적인 판단은 어떤 일이 무조건 나에게 이익이 되면 그 일을 옳다고 여김으로써 내려진다. 지성적인 판단은 어떤 일이 나에게 이익이 되려면 그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어야만 그 일을 옳다고 여김으로써 내려진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돕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나를 공격할 수도 있음을 정확하게 잘 파악하는 것이 본래 지성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지성은 제대로 된 자신의 이익 즉 우선은 자신의 이익이 적게 느껴지더라도 결국에는 자신의 이익을 더 크게 가져가는 쪽으로 판단해서 행동하도록 하는 능력이다. 그 반대로, 감정은 잘못된 자신의 이익 즉 우선은 자신의 이익이 크게 느껴지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이익을 더 적게 가져가는 쪽으로 행동을 몰아가는 힘이다. 지성을 통해 감정을 억제하고 조절해야 이유는 모두가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모두가 제대로 된 이기심을 더 잘 충족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재명 후보가 ‘국민의 집단 지성’을 믿는다고 할 때,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이 이익을 더 많이 얻으려면 반드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이익을 얻도록 판단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아실 것이라 믿는다는 것이다. 과연 국민에 대한 이러한 이재명 후보의 믿음이 현실을 바탕으로 한 것일까, 아니면 이념적인 당위를 바탕으로 한 것일까, 아니면 양쪽을 왔다 갔다 하면서 ‘막연한 승부수’를 던지는 것일까?  필자는 그의 그 믿음이 현실을 바탕으로 한 것임을, 즉 우리 국민의 집단 지성이 실제로 힘을 발휘하고 있음을 믿고 싶다. 하지만, 이런 필자의 믿음을 확증할 길이 없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적이 불안하다. 다만, 이재명 후보가 ‘국민의 집단 지성’을 향한 이념적인 당위의 부분을 최대한 현실로 바꾸어낼 수 있는 정치적인 행보를 보일 수 있으리라 기대해 마지않는다.  어떤 사안이건 거짓을 진실로 믿고 행동하면, 그 행동은 반드시 자신에게 불이익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우리는 진실 자체를 숭상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알고 그에 행동하는 것이 우리에게 이익을 가져오는 길이기 때문에 진실을 추구한다. 이재명 후보가 자신이 현실주의자임을 주장하고 실용주의자임을 주장할 때, 필자로서는 그가 이념을 포기해서가 아니라, 이념 자체가 목표가 아니고 이념이 현실적 이익의 수단임을 정확하게 파악한 바탕에서 제기되는 것이라 여긴다.  이재명 후보가 뭔가 복합적이고 그래서 이중적인 측면을 지닌 것처럼 비칠 수도 있다. 철저히 민주적인 것 같은데, 왠지 독자적으로 고집을 부리며 밀고 나가는 독재의 통치를 할 것처럼 비칠 수도 있다. 그 순진한 유아적인 미소에서도 잘 나타나듯이 인격적으로는 한없이 부드러운데, 정작 현안에 대한 논변이 시작되면 즉각 진지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으로 돌변하는 데서 나타나듯이 정치적으로는 한치 물러남이 없는 고집을 부릴 것처럼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필자로서는 그를 보면서 고대 그리스에서 민주주의를 주장했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시민의 자격으로 제시한 것, 즉 “올바른 시민이 되려면, 지배할 줄도 알고 지배받을 줄도 알아야 한다.”는 말을 떠올린다. 간단히 말하면, 필자가 보기에 이재명 후보의 부드러운 인격의 면모는 그가 제대로 지배받을 줄 안다는 것을 일러주고, 그의 단호한 정치적 표정은 그가 제대로 지배할 줄 안다는 것을 일러준다. 그리고 이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뫼비우스 띠처럼 결합해 있다.  이재명 후보는 자신이 권력 자체를 위해 권력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권한이 필요하기에 권력을 원한다고 했다. 권한은 국민이 국가의 권력으로써 제정한 법의 한계 내에서 즉 국민에 의해 지배받는 가운데 권력을 행사할 것을 요구한다. 이재명 후보가 강조한 ‘권한을 위한 권력’은 ‘지배받기 위한 지배’로 번역될 수 있다.  오로지 지배할 줄밖에 모르는 자, 자신이 행사하는 권력이 마치 자신의 배타적인 능력에서 생겨난 것인 양 정확하게 착각하여 가능한 한 기회가 닿는 대로 줄곧 자의적으로 권력을 행사해 온 자는 진정 지배할 줄 모른다. 그런 자가 나라의 통치권을 장악할 경우, 국민이 권력을 상실하고 따라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  필자의 필설이 길어졌지만,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덧붙였으면 한다. 그동안 우리네 정치사에서 쉽게 들을 수 없었던 이재명 후보의 적어도 네 가지 언사, 즉 “말이 아니라 행동”, “억강부약”, “국민의 집단 지성”, “권한을 위한 권력”에 국민 모두 특별히 귀 기울였으면 한다. 그리고 이를 관류하는 이익 우선의 실용주의와 이익을 위한 참다운 이념의 설정과 조절에 아울러 귀 기울였으면 한다. 그리하여, 대내외적으로 명실상부하게 창조적인 평등과 평화의 위력을 갖춘 새로운 나라를 향해 진력하는 대통령을 선출할 수 있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란다.
2021-11-18 | hrights | 조회: 1263 | 추천: 7
석미화/ 한베평화재단 사무처장  종종 뵙는 월남 참전군인이 한 분 있다. 3년 전 처음 만나고 조금씩 활동을 같이하며 지금은 평화활동의 동료가 되었다. 최근에는 더 자주 만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서울시 NPO지원센터에서 지원하는 ’활동가 역량 향상을 위한 연구지원사업‘(약칭 ‘활력향연’) 때문이었다. 활력향연은 공익활동가들이 스스로 연구주제를 탐색·개발하여 활동 분야의 전문성을 키울 수 있도록 지원하고, 이를 통해 활동의 지속가능한 성장 기반을 만들도록 돕고자 매년 10개 팀·개인을 선발해 연구비를 지원하고 있다. 나는 ‘참전군인의 평화활동에 대한 연구’로 2021활력향연에 참여하고 있다.  이 연구를 위해 평화활동에 함께하는 주변의 참전군인을 만나 그들로부터 평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45년 전후에 태어나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두 번의 전쟁을 겪었던 그들은 피카소의 작품 <한국에서의 학살>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어린아이 시절엔 총부리 앞에 섰고 청년이 되어서는 총을 들고 전장에 가야 했다. 나는 전쟁경험이 어떻게 평화로 이어지고 있는지(혹은 이어져야 하는지), 꼰대와 태극기 할배를 넘어 다양한 그들을 만나고자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첫 번째로 주변에서 함께하는 참전군인의 생각을 듣고자 했다. 종종 뵙던 분을 자주 만나게 된 것도 그런 이유다.  사실 잦은 만남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고맙게도 참전군인으로부터 연구 활동에 여러 가지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꺼이 주변 참전군인을 소개하거나 설문조사 응답받는 일을 함께 해주었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코로나 상황에서 평소 연락도 없이 지내던 이들에게 한 장 한 장 설문을 받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말없이 연구를 위해 애써주었다. 그것은 소리 없는 응원이었다. 나는 이 연구를 통해 좋은 동료를 만나는 행운까지 얻었다. 11월 말 연구 결과가 나오려면 아직 더 정성을 들여야 하지만 이미 과정 속에 많은 배움이 있었다.  이러한 지원프로그램은 나와 같은 활동가에게 전문성과 재충전의 기회를 제공해준다. 나는 서울시 NPO지원센터가 시민운동 중간지원조직으로서 더욱 확대되길 바란다. 활력향연을 비롯해 비영리 스타트업 지원, 활동가 장학지원, 시민운동 역량강화와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더 확장되어 시민운동이 발전하는데 토대가 되었으면 좋겠다. 좋은 생각과 열정이 있다면, 누구에게나 뜻을 펼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익활동가들의 선의와 열정이 시민운동을 만들어가고, 지방정부와 국가는 그것에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지난 9월 13일 서울시청에서 시민사회 분야 민간 보조와 민간 위탁 사업 관련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얼마 전, 두 번이나 기자회견을 자처하며 ‘서울시 곳간이 시민단체 ATM기로 전락했다’라는 오세훈 시장의 발언이 있었다. 그 말은 마치 쌈짓돈으로 엉뚱하게 공짜 인심을 쓴 것 같은 인상을 주기까지 한다. 국가와 지방정부의 공적 영역을 함께 담당하고 있는 시민사회에 대한 그의 막말에 기가 막힌다. ‘서울시 곳간’, ‘시민단체 ATM기’라니? 그런 경박한 상상과 단어의 조합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궁금하다. 대장동 일색이었던 (심지어 서울시 국감에서조차) 이번 국정감사에서 그 발언의 배경이 나올까 싶었지만, 오세훈 시장은 아직 감사 중인 사실이라 똑 부러지게 답변하지 못한 채 모든 시민단체를 지칭하는 건 아니라는 궁색한 말만 내놓았다. 실제로 민관협치의 내용과 결과에 일부 문제가 발견된다면 그것은 행정적으로 처리하고 관련 제도를 정비할 일이지 기자회견을 자처해 공적 가치를 전면 부정하고, 모든 시민단체를 ATM에서 돈 빼먹는 날강도로 만들어버릴 일은 아니다. 민관협치의 취지를 존중하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행정적 불의, 부조리를 잡아내는 것은 그렇게 기자회견으로 결심을 전달하는 방식이 아니라 서울시 최고 의사결정권자로서 얼마든지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일 것이다.  오세훈 시장의 발언으로 세간에는 내년도 관련 예산 삭감, 시민단체 출신 공무원에 대한 대량 정리해고, 시민운동 중간지원 조직에 대한 과다 인건비 지출 등을 문제 삼는 기사들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이러한 발언의 배경이 박원순 전 시장의 흔적을 지우기 위한 정치공세라는 분석도 나온다. 확인되지 않은 의혹에 불을 지피고 내년 지방선거 때문이든, 정치공세 때문이든 애먼 시민단체를 잡는 일은 이제 없었으면 한다. 올 초 정의연을 둘러싼 후원금 문제가 불거졌을 때 시민단체 전체가 부도덕한 집단으로 매도되었다. 언론의 무분별한 시민단체 때리기로 시민들의 후원 해지가 잇따랐다. 심지어 조선일보 같은 매체는 ‘시민단체를 못 믿어 나눔도 직거래로 한다’는 따위의 기사를 여전히 생산하고 있지 않은가.  시민운동을 하며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서울시나 어떤 기관의 재정지원을 받아 사업을 한다는 것은 보통 품이 드는 일이 아니다. 사업이 채택되는 것부터가 치열한 경쟁을 뚫는 일이고, 사업을 수행하는 과정과 증빙을 구하는 일까지 행정적인 업무가 어마어마하다. 단돈 천 원도 증빙 없이는 지출할 수 없으며 심지어 야근을 하며 무엇을 먹었는지까지 사진으로 증빙해야 하는 것이 서울시 사업보고의 현실이다. 인건비 사용도 제한이 있어 대부분 사업비에만 지출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원을 받고자 함은 사업을 통해 조금이나마 우리가 실현하고자 하는 가치들을 이루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장의 어려움은 외면한 채 손쉽게 국고를 편취하는 집단으로 시민단체를 매도해선 안 된다. 행정기관의 장으로서 언행은 신중하게, 표현도 숙고했으면 한다. 시민단체는 당신들의 동네북이 아니다.
2021-10-27 | hrights | 조회: 1223 | 추천: 7
윤요왕/ 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민지야(가명) 요즘 많이 힘들지? 학생부종합전형으로 대학원서를 다 써놓고 최저점 공부만 하니 오히려 맘이 좀 편해진 건가 싶기도 하네. 솔직히 얘기하면 다양하고 복잡한 대학가는 방법도, 네가 원서를 쓴 여러 곳의 대학과 학과를 아빠는 아직 다 모른단다. 아빠와 딸인 우리의 대화가 적었던 것은 아닌데 등하굣길 오가며 참 많은 이야기를 지난 1년간 했던 것 같은데 정작 고3 딸의 대학입시를 이렇듯 외면하고 있는 아빠가 너무 무심했었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구나.  귀농한 아빠 때문에 어려서부터 시골의 아이로 살아온 19년이 네게 어떻게 기억될지 궁금하단다. 산과 들의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져 있고 풀벌레 소리에 잠이 들고 산새 소리에 아침을 맞을 수 있는 농촌 마을이 네에게도 너무 좋은 환경이지 않았을까 가슴 벅찬 설레임도 있었단다.  그러나, 자연과 아빠와만 놀고 지낼 수 있는 건 한계가 있다는 걸 우리는 금방 알아버렸지. 유치원에 가도 동갑내기 친구 한 명 없는 시골 학교 유치원 생활에 외로웠을 거고, 방과 후 40~50도를 오르내리는 그 뜨거운 비닐하우스에서 토마토 따는 아빠와 함께 있어야만 했던 어린 시절 민지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니 미안해지더구나.  뭘 배우고 싶어도 학원차 하나 들어오지 않는 시골 마을의 교육환경은 어쩌면 네게 다양한 배움의 기회를 빼앗은 건 아닌가 박탈감도 들었단다. 그나마 별빛공부방을 만들고 별빛선생님들과 마을 아저씨, 아줌마,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너의 든든한 마을 선생님으로 함께했을 때 아빠의 마음이 비로소 흐뭇해지고 자랑스럽기까지 했었지. 농촌유학을 한다고 7년여를 매년 도시유학생들과 함께 살았던 기억도 네게는 미안함으로 남아있단다. 우리 가족 네 식구가 아닌 다른 아이들과 한방에서 자고 먹고 또 놀아야 하는 추억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겠지? 매년 유학생을 집으로 받을 것인지 너의 의견을 묻기는 했지만, 아빠가 하는 일이 그렇다 보니 큰 반대 없이 유학생들을 받는데 찬성했던 너의 마음이 아빠와 별빛유학센터를 배려한 건 아닌가 감사한 마음도 들더구나. 울기도 많이 울고 다툼도 많았던 너의 초등시절 유학생들과의 생활이 나중에 더 큰 어른이 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좋은 거름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중학교, 고등학교는 시내로 나올 수밖에 없었으니 등하굣길이 얼마나 고되고 힘들었을지 아빠 마음이 많이 아팠단다. 하교 후 학원에 다니는 것도 친구들과 수다 떨고 놀다 오고 싶은 것도 시골의 이른 막차 버스 시간에 맞추는 게 쉽지만은 않았으리라 생각해. 그래도 밤길을 혼자 걷기도 하고 뜨거운 여름, 추운 겨울 시내로 가는 버스 타는걸 짜증 한번 내지 않고 씩씩하게 다니던 민지를 보면서 자랑스럽기까지 했단다.  우리 부녀지간은 그래도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인 게 아빠는 늘 뿌듯하단다. 너는 친구 얘기, 학교 얘기, 공부 얘기를 스스럼없이 아빠에게 털어놓고 아빠는 일 얘기, 철학 얘기(^^), 정치 얘기 등 편하게 네게 이야기할 수 있어서 무척 기뻤는데 이제 그럴 시간이 많지 않겠다고 생각하니 아쉬움도 크단다. 수험생이 된 지난 1년 아빠는 네가 대학을 가겠다고 한 거에 반대를 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수험생에 도움이 되는 조력자는 못 되었던 거 같구나. 아빠는 대학만능주의 대한민국의 프레임 속에 네가 빨려 들어가 세상의 아름다움과 너의 행복을 잃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컸기 때문이라고 변명하고 싶구나. 언제나 밝고 당당하고 쿨한 우리 민지가 저 세상에 나가 사회의 잣대와 기준의 폭력 앞에 너 자신을 잃을까봐 걱정도 된단다. 사진  출처 - adobe stock  아빠는 민지를 19년 함께 옆에서 지켜보면서 늘 자랑스럽다는 생각을 했단다. 딸자식 자랑하는 게 아니라지만 민지는 어디에 내놔도 자랑스러운 아빠의 딸이고 그 자체로 빛이 나고 멋진 아이이기 때문이야. 가끔은 시골을 선택한 아빠 때문에 할 수 없었던 공부를 좀 더 시켰더라면, 생활기록부를 좀 더 신경 써서 봐줬더라면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하단다. 다만 민지야, 아빠의 삶의 관점과 철학으로 인해 너의 청소년기를 소홀히 생각한 건 아니었음을 생각해 주었으면 해. 성적이 좀 부족해도 꼭 좋은(?) 대학을 가지 않더라도 너의 인생은 너의 노력과 너의 삶의 가치로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음을 아빠는 너를 통해 보고 싶단다. 좀 더 큰 어른이 되었을 때 지난 19년간의 시골에서의 생활이 불편했지만 아름다운 추억으로 오래 남을 거라 믿어.  수능이 11월인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잘 마무리하고 시험도 즐겁게 편안하게 노력한 만큼 잘 볼 수 있기를 기도할게. 늘 너를 믿고 기다리고 응원할 수 있는 아빠로 또 세상에 부끄럽지 않은 어른으로 살도록 아빠도 노력하겠다고 약속하마. 그동안 고생했고 사랑한다 민지야.
2021-10-25 | hrights | 조회: 1750 | 추천: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