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익의 인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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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눌수록 커지는 민주화운동의 영예(경향잡지2002년 8월호)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10-20 18:04
조회
327

나눌수록 커지는 민주화 운동의 영예


    지난 4월 ‘민주화운동 보상심의위원회’에서 ‘동의대 사태’ 관련자들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한 이후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서울의 한 경찰기동대 대장이 자신이 지휘하는 전경 버스에 “5·3 동의대 방화 치사사건으로 희생된 선배들의 명복을 빕니다.”란 현수막을 달면서, 동의대 사건으로 희생된 당사자인 경찰의 반발이 시작되었고, 주로 경찰이 내붙인 것이긴 하지만 거리마다 “방화범이 민주화운동이면, 우리는 뭐냐?”는 힐난이 담긴 현수막이 지금껏 내걸려 있다.
논쟁은 끝이 없다. 우리 교회와도 각별한 인연이 있던 ‘부산 미 문화원 방화사건’의 주역 문부식 씨(문씨는 출소 이후에 시인이 되었고, 지금은 「당대비평」이라는 계간지를 펴내고 있다.)는 최근 출간한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 광기의 시대를 생각함」이란 저서에서 “동의대 사건 민주화 인정은 납득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논란은 다시 증폭되고 있다.
기회라고 여긴 조선일보는 평소 최소한의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던 문부식 씨를 전면에 부각시켜 지면을 가득 채우는 인터뷰와 “한 지식인의 치열한 자기 성찰”이라는 제목의 사설까지 게재하였다. 조선일보는 “반미운동의 선구적 영웅이었던 문부식 씨”가 “폭력의 정당화에 반대”하고 있다고 연일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
조선일보의 대서특필 이후, 인터넷 신문 ‘오마이뉴스’에서 문학평론가 김명인 씨(김씨는 80년대 초반 무림사건으로 이근안에게 고문을 당하고 수감되었던 사람이다.)가 “조선일보가 문씨의 때늦은 대오각성을 어떻게 대서특필할지 그리하여 온 무게를 걸고 잘못된 상황에 맞섰던, 그리하여 때로는 목숨까지 잃은 사람들을 모욕하고 매도하는 데 이용할지 생각해 보지 않았나요?”라고 힐난하면서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동의대 사태는 노태우 정권이 학생운동에 대해 무리한 진압을 가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돌발사태로 이 과정에서 7명의 아까운 인명이 희생되었고, 이 사건으로 수십 명의 학생들이 무기형부터 몇 년씩 되는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양측의 희생이 큰 만큼 논란도 있을 수 있고, 어느 한쪽에 가담하여 상대방을 단죄하는 것도 쉬워 보이지만, 우리가 정작 되새겨야 할 중요한 문제를 놓치고 있는 것 같다.
‘민주화운동’에 복무하였다는 것은 정말이지 보통 일이 아니다. 언제 누구에 의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본인은 고사하고 가족이 받을 고통을 생각하면서, 오로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위태로운 현장에 뛰어드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민주화운동에 ‘딴지’를 거는 조선일보 등의 수구언론이 그 동안 부와 영향력을 차근차근 쌓아가던 때, 민주화운동가들은 풍찬노숙을 마다하지 않으며, 나보다는 이웃을 위해 헌신하였다. 교회 공동체의 많은 분들이 민주화운동에 함께한 이유도 “나보다는 이웃”이라는 주님의 가르침에 충실할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자랑스러운 민주화운동이 영예는커녕, 매도되거나 무관심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의 부역행위를 가리려고 끊임없이 민주화운동을 왜곡하는 조선일보 등의 수구언론에 상당한 책임이 있지만, 민주화운동가들은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까? 문씨의 말처럼 민주화운동 진영이 자기 성찰에 게으른 탓은 아닐까?
민주화운동은 일반적인 정치운동과 달리 상당한 도덕성을 요구한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기에 앞서, 자신부터 돌아보아야 한다. 그렇다고 도덕적으로 완성도가 높아야 민주화운동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권력이나 자본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힘은 대의명분, 도덕성으로만 채워질 수 없기 때문이다.
민주화운동가 중에서 많은 분들이 정치권 등 제도권으로 진출하였다. 그런데 정작 배움이 짧아서 돈이 없어서 여전히 그저 ‘민중’이어야 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들의 활발한 진출에 그리 고운 시선을 보내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도대체 ‘그들’의 진출이 무엇을 어떻게 바꾸었느냐는 힐난도 자주 들린다.
민주화운동이 개인이나 어떤 집단의 영예가 되려면, 원래 지녔던 초심, “나보다는 이웃”, “이웃과 더불어 나눔”을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수구언론의 음해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토록 연대하려고 했고, 하나 되려 했던 ‘민중’들에게 외면당하지 않으려면 그래야 한다.
김대중 씨와 김영삼 씨가 민주화에 기여한 공은 오랫동안 기억되어야 할 만큼 값진 것이긴 하지만, 민주화에 기여하였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존경하는 사람은 별로 없어 보인다. 나눔도 성찰도 없는 상황에서 과거의 행적은 오히려 비난만을 가중시킬 뿐이다.
우리 교회도 명동성당이나 정의구현사제단 등을 통해 활발한 민주화운동을 벌였다. 자랑할 만한 과거이지만, 중요한 것은 얼마나 초심을 지니고 있는지, 우리가 지금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나누고 있느냐이다.


오창익 루가 씨는 인권실천시민연대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