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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호] 순자, 순자 그리고 속헹들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1-05-21 11:42
조회
796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1. 순자와 순자


 태평양을 건너 한국에서 미국으로 온 할머니. 그는 딸네 부부의 육아와 가사 노동을 돕기 위해 말도 통하지 않는 먼 곳에 왔다. 딸 부부는 당시 한국인들이 많이 하던 병아리 감별사로 일하지만 그 일에 큰 희망이 없다. 딸의 가족은 바퀴 달린 이동식 주택에 거주하며 어떻게든 미국에 정착하려 애쓴다. 할머니는 어린 손자와 한 방에서 생활하며 손자의 침대 밑에서 요를 깔고 잔다. 어느날 아침 손자는 할머니가 누워 있는 이불이 축축하게 젖어있음을 발견한다. 할머니를 깨웠지만 할머니는 말도 제대로 못하고 일어나지도 못한다. 딸을 돕기 위해 미국까지 와서 돌봄 노동을 하던 할머니는 갑작스러운 뇌졸증으로 오히려 딸에게 부담을 안기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조금이라도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 애쓰던 할머니는 불편한 몸으로 뭐라도 해보려 하지만 역부족이다. 바로 영화 <미나리>의 순자 이야기다. 이 순자를 연기한 배우 윤여정은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며 아시아 여성으로는 두번째로 오스카 수상자가 되었다. 한국 배우로서는 최초의 수상자다.


 또 다른 순자가 있다. 69세의 김순자는 미국에 이민 간 후에 여러 직종의 일을 전전하며 자식과 손자들을 먹여 살렸다. “우리 할머니는 파이터였다.”고 손녀가 말할 정도로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왔다. 그는 지난 3월 16일 애틀랜타 총격 사건으로 희생되었다. <미나리>에서 순자를 연기한 배우 윤여정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라 관심받고 있던 시기에 실재하는 이민자 순자는 총격 사건으로 억울하게 숨졌다. 전자의 순자는 미국과 한국에서 모두 환대받지만 후자의 순자는 너무도 확실하게 인종차별과 성차별의 희생양이 되었다. 아무 상관 없는 순자들의 운명이 시기적으로 겹쳤을 뿐이다. 그러나 현실 속의 순자는 픽션 속의 순자만큼 관심받지 못한다는 점이 내내 마음에 남았다. 이민자들이 받는 관심의 격차도 빈익빈 부익부가 심하다. 소위 성공한 이민자가 ‘세계의 시민’이 된다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동하는 이민자는 자신이 떠나온 나라와 도착한 나라 양쪽 사이에서 모두 잊혀진 채 부유한다.


 애틀랜타 총기 사건은 백인 남성이 애틀랜타의 아시아인 밀집지역 마사지 가게 세 군데를 습격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정황상 아시아/여성을 향한 명확한 증오범죄에 해당한다. 모두 8명이 사망했고 그 중에 여성이 7명이다. 이 7명 중에서 6명이 아시아인이며 이중에서 4명이 한국계이다. 다시 말해 애틀랜타 총격 사건 희생자의 50%는 한국계 여성이다. 만약 희생자들이 나이 많은 여성이 아니라 젊은 남성이었다면, 마사지 가게에서 일하는 저임금 노동자가 아니라 하버드 대학을 다니는 젊은 학생이었다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의 입에 화제로 오르내리며 관심 받았을 것이라 짐작한다면 억측일까.


 애틀랜타 총격 사건으로 희생된 4명의 한국계 여성 중 김순자씨 외에 다른 3명에 대해서도 간단히 언급하고 싶다. 51세 그랜트 현정 박씨는 홀로 두 아들을 키웠다. 자동차가 없었던 그는 제 집이 아니라 직장인 마사지 가게에서 숙식하곤 했다. 미국에서 자동차 없이 돈을 벌려면 많은 제약이 따른다. 74세 박순정 씨는 습격받은 마사지 가게에서 직원들의 식사를 담당하는 노동자였다. 마지막으로 63세 영 A 유씨는 코로나19의 여파로 2020년 직장에서 해고되었고 그 후 마사지 가게에서 일해왔다. 미국에서 마사지 가게와 네일 가게는 주로 아시아 여성들이 저임금으로 일하는 장소이다.


 코로나19 이후로 미국에서 아시아인 증오 범죄는 눈에 띄게 증가했다.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 시절 퍼뜨렸던 ‘차이나 바이러스’ 발언은 어쩌면 실제 바이러스보다 더 위험할지도 모른다. 아시아인은 표적이 되기 쉬워졌다. 아시아인 대상 범죄는 코로나 이전보다 2.5배 가량 증가했다. 이중에서 68%가 여성 대상 범죄이다. 아시아인 대상 범죄는 아시아 여성 대상 범죄나 마찬가지다. 여성일수록, 나이가 많을수록 범죄의 대상이 된다. 증오는 약자에게 향한다.



사진 출처 - getty image


2. 보이지 않는 속헹들

 아시아인 차별은 인종차별 속에서도 잘 보이지 않는 차별이다. 한국인에게도 ‘스탑 아시안 헤이트 Stop Asian Hate’라는 구호보다 ‘블랙 라이브즈 매터’가 어쩐지 더 익숙하다. 한국인을 비롯하여 아시아인에게는 대체로 백인 사회의 관점에서 ‘모범적인 소수자’의 이미지가 있다. 얌전하고 상대적으로 공부를 잘하고 전문직으로 진출하는 경우도 많아 보이기 때문이다. 모범적인 아시아인과 폭력적인 흑인의 구도를 통해 가장 이득을 보는 건 백인 사회다. 모범적인 소수자가 된다고 한들 인종차별에서 과연 자유로울까. 영국에서 활동하는 손흥민 선수도 인종차별에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팀에서 가장 눈이 작은 선수”, “개나 먹어라”라는 폭언을 들었다.


 미국 사회에서 아시아인 차별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 되었다. 미국 내 아시아인 인구는 약 6.5% 정도이다. 19세기 말부터 미국에서 중국인 이민자가 본격적으로 급증했다. 중국인 이민자가 늘어나자 미국에서는 1882년 중국인 배척법이 생겼다. 1924년 다시 이민법이 개정되는데 중국인만이 아니라 사실상 아시아인 이민 금지법으로 활용되었다. 2차 대전 중이던 1943년 이 법은 폐지되었으나 여전히 아시아인 이민자에 대한 제한이 있었다. 아시아인의 자유로운 미국 이주는 1965년 새로운 이민법이 만들어진 이후부터 가능해졌다. 차이나타운은 이러한 배척의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장소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인종차별의 피해자만은 아니다. 흔히, 외국인 비율이 5%를 넘으면 다문화 사회라 한다. 한국에도 이주민이 250만이 넘어 전체인구의 6.6%를 넘어섰다. 한국 국적을 획득한 이주민까지 더하면 훨씬 많아진다. 이미 다문화 사회가 된 지 오래다. 이주 노동자의 손길을 빼고 농업, 어업, 축산업, 건설업 등은 굴러갈 수 없을 정도이다. 이주노동자 중에 다수가 중국이나 동남아에서 온 아시아인이다. 한국 바깥의 노동 계층 한인의 삶에 무심하듯, 한국 안에서 살고 있는 다른 아시아인 노동자의 삶도 외면 받는다. 서구 사회로의 진출과 그들의 인정을 갈망하면 할수록 우리 안의 ‘아시안 혐오’가 무척 깊숙이 자리했다.


 어떻게든 살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을 ‘순자들’이 어처구니없이 죽었듯이, 어떻게든 살기 위해 한국에 온 캄보디아 출신 노동자 속헹씨는 한겨울에 비닐하우스에서 자다가 숨졌다. 채소 농장에서 일하던 그의 죽음을 통해 이주노동자들의 열악한 숙소 문제가 알려졌다. 속헹씨가 머물던 비닐하우스의 경우 난방도 잘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창문이 없어 햇빛도 들지 않았다. 이주노동자들의 숙소는 주로 농장 곁에 있고 비좁은 공간에서 여러 명이 함께 사용한다. 간이 화장실은 사생활 보호가 어려운 열악한 환경이지만 노동자들은 월세까지 지불한다. 파프리카, 토마토, 미나리, 상추 등 우리가 일상적으로 먹는 싱그러운 채소들 뒤에는 이주노동자의 저임금과 학대에 가까운 생활이 있다.


 다른 나라에 성공적으로 진출하는 이민자에 대한 환호만이 아닌, 우리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이민자의 목소리가 들려야 한다. 속헹의 수많은 동료들은 오늘도 어디에서 잠이 들었을까. 그들은 무엇을 먹고 있을까. 그들은 자유롭게 병원에 갈 수 있을까. 한국 안에서 피부색을 두고 벌어지는 차별에 무심한 채 인종차별을 말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우리 자신부터 스탑 아시안 헤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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