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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3호] 워디안 케이스와 이동하는 식물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2-06-22 10:53
조회
225

염운옥/ 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


 코로나 팬데믹 동안 식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반려식물, 식물집사라는 말도 이제 낯설지 않다. 한국인 4명 중의 1명이 반려동물을 기른다는 통계도 나와 있지만, 자그만 식물 화분 하나라도 집에 두고 있는 경우를 센다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한 외로움을 달래줄 비인간 존재로 동물보다는 식물이 선택하기 쉬운 탓도 있을 것이다. 식물은 돌아다니며 집안을 어질러 놓지도 않고, 놀아달라고 보채지도 않는다. 귀찮게 하지 않으면서 조용히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우기에 내가 필요할 때만 위로를 구할 수 있다는 게 식물 반려의 장점이라고들 말한다. 식물 반려도 반려이기에 물과 거름주기, 햇빛 보이기, 벌레 잡아주기, 통풍과 환기 등 집사로서의 노동이 따르는 건 물론이지만.


 우리 집 베란다에서 해마다 3월이면 선명한 오렌지색 꽃을 피우는 군자란은 원산지가 남아프리카다. 군자란은 8월의 시드니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우리 곁에 있는 많은 식물이 외래종이다. 외래식물이라도 이미 적응을 거쳤기에 원산지가 어딘지 따지는 건 이제 무의미한지도 모르겠다. 발이 달리지 않은 식물이 먼 거리를 이동하고 새로운 생태를 만드는 일은 자연스럽게 생겨나지 않는다. 이동성이 없는 식물에 이동성을 부여하는 건 우리 인간이다. 특정 식물의 분포와 식생에는 인간이 자연에 개입한 흔적이 짙게 남아 있다. 현재 우리가 보는 자연은 순수한 자연이 아니라 인공 자연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식물의 이동에는 다양한 욕망과 정치가 개입해 있다. 근대 초 유럽인들의 이국식물에 대한 호기심과 열망이 식물수집과 식물사냥을 부추겼다. 이국식물 열풍은 튤립에서 양치류에 이르기까지 여러 식물을 거쳐 불었다. 몇몇 식물은 씨앗이나 꺽꽂이로 들여오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식물표본으로 수집됐다.


 식물의 이동성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발명이 바로 워디안 케이스(Wardian Case)다. 워디안 케이스는 영국인 나다니엘 백쇼 워드(Nathaniel Bagshaw Ward, 1791~1868)​가 만든 일종의 휴대용 테라리움 장치를 말한다. 이 덕분에 전 세계 식물 종을 수집해 ‘살아있는 채로’ 유럽으로 운반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워디안 케이스는 한편으로는 ‘집안의 수정궁’이라 불리며 중산층 가정의 거실을 장식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차와 고무 같은 상업작물의 지리적 독점을 돌파하는 역할을 했다. 스코틀랜드의 식물학자이자 식물사냥꾼인 로버트 포춘(Robert Fortune)은 1849년 중국 상하이에서 차를 워디안 케이스에 넣어 영국령 인도로 운송해 아삼지방에 차 플랜테이션의 길을 열었다. 브라질에서 수입된 고무나무 씨앗은 큐가든(Kew Gardens)이라 불리는 런던 왕립식물원(Royal Botanical Gardens)에서 발아한 다음 워디안 케이스에 담겨 말라야와 실론으로 운송되어 고무 농장에서 대량 재배되었다. 더비셔에서 개발된 캐번디시 바나나를 소모사로 옮겨 심을 때도 워디안 케이스가 쓰였다.



그림1. Portrait of Nathaniel Bagshaw Ward, 1859.
Lithograph by R. J. Lane after the portrait by J. P. Knight. Courtesy Wellcome Collection, CC BY.

출처: Luke Keogh, The Wardian Case: How a Simple Box Moved Plants and Changed the World,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20, p. 16.



그림2. Traveling-style Wardian case, as described by Nathaniel Ward. From N. B. Ward,
On the Growth of Plants in Closely Glazed Cases (London: John Van Voorst, 1852).

출처: Luke Keogh, The Wardian Case: How a Simple Box Moved Plants and Changed the World,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20, p. 22.


 워드는 어떻게 이 대단한 상자를 만들 수 있었을까? 워드는 이스트엔드라고 불리는 런던 동쪽의 화이트채플의 내과 개업의였다. 이스트엔드는 19세기 산업화 시대 불결한 도시의 대명사였던 지역이다. 아버지로부터 가업을 계승한 의사 워드는 아마추어 식물학자이자 원예가였다. 어릴 때부터 식물을 좋아해 열세 살 때 자메이카로 식물 탐험을 다녀오기도 했다. 워드는 당시 대기오염이 인간과 원예에 끼치는 악영향을 개탄했다. 템즈 강변의 공장에서 나오는 시커먼 재가 식물의 성장을 저해하고 말라 죽게 하는 일이 반복되자 워드는 얼마 전의 우연한 발견을 떠올리고, 뚜껑 달린 유리병에 고사리를 심었다. 1829년 어느 날, 워드는 스핑크스 나방 번데기를 흙에 묻어 밀폐된 유리 용기에 넣었다. 원래 목적은 스핑크스 나방 번데기의 변태를 관찰하는 것이었는데 예상 밖의 발견을 하게 됐다. 흙 속에서 양치류 식물의 싹이 올라오더니 잎사귀가 조금씩 나기 시작했고 물을 주지 않았는데도 계속 자라났던 것이다. 사실 비슷한 생각을 했던 동시대인은 워드 말고도 여럿 있었지만, 워드의 혁신에서 핵심은 밀폐 시스템이었다. 식물이 호흡할 때 내는 증기가 일정 기간 식물에 필요한 수분을 충분히 공급하기 때문에 워드가 실험한 식물은 밀폐된 공간에서 생존할 뿐만 아니라 풀은 꽃을 피웠고, 고사리는 잎을 피웠다. 워디안 케이스는 밀봉된 미니어처 정원인 셈이었다. 1) 의사로서 워드는 식물 가꾸기 취미를 노동계급에까지 널리 전파하고 싶어했으나 값이 싸졌다고는 하지만 유리는 사치품이었고, 가난한 노동자들은 워디안 케이스를 사기보다는 집세를 내야 했다. 워드의 이상은 모두에게 공유되지 못하고, 중간계급 거실 장식품으로 안착했다.2)


 또 한편으로 워디안 케이스는 영국과 외부 세계 사이의 식물 교류의 매개체 역할을 톡톡히 했다. 워드는 1833년 밀폐 유리 상자에 고사리, 이끼, 풀을 넣어 배에 실어 런던에서 시드니로 보냈다. 몇 달 후인 1833년 11월 23일에 워드는 선장 찰스 말라드(Charles Mallard)로부터 실험이 성공했다는 편지를 받았다. 20개의 상자 중에서 19개 상자의 식물이 살아남았던 것이다. 말라드 선장의 배는 1834년 2월 오스트레일리아의 식물을 싣고 런던으로 돌아왔다. 항해는 시드니에서 케이프혼, 리우데자네이로를 거치는 항로였는데, 식물들은 영상 30~40도까지 오르고, 영하 7도까지 내려가는 극심한 온도 차를 무사히 견뎌냈다. 그 결과 워드와 친구들은 영국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오스트레일리아산 풀고사리(coral fern. 학명 Gleichenia microphylla)를 관찰할 수 있었다. 1851년 런던에서 열린 세계 최초의 만국박람회(The Great Exhibition)에도 장식용 양치류 식물을 키우는 워디안 케이스와 18년 동안 물을 주지 않은 밀폐 유리병이 출품되었다. 3)


 휴대용으로 개량을 거듭한 워디안 케이스는 영국,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의 식물원들이 식민지와 식물을 주고받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도구로 활용되었다. 영국에서는 큐가든이 중심이었고, 독일에서는 베를린식물원(Berlin Botanical Gardens), 프랑스에서는 열대농경식물원(Jardin d'agronomie tropicale), 네덜란드는 암스테르담식물원(Amsterdam Botanical Gardens)과 라이덴식물원(Leiden Gardens)이 워디안 케이스로 식물을 운반했다. 제국주의 중심국가들의 식물원과 식민지 식물원을 연결하는 네트워크에서 워디안 케이스는 핵심적 매듭으로서 식물의 이식과 정착에 관여했다. 전지구적 식물 이동을 가져온 제국주의 팽창과 식민지 정복, 노예제와 플랜테이션을 성립시킨 이음새로서 현재의 생태계를 만드는 역할을 다했던 것이다.


그림3. Specially crafted Wardian cases made by local Indonesian workers were used to send plants
from the Buitenzorg Botanic Gardens, Java, in 1904.

출처: Luke Keogh, “The Wardian Case: How a Simple Box Moved the Plant Kingdom,” Arnoldia 74/4(May 2017), p. 12



그림4. Wardian cases preparing to leave the Royal Botanic Gardens, Kew, ca. 1940.
© The Board of Trustees of the Royal Botanic Gardens, Kew.

출처: Luke Keogh, The Wardian Case: How a Simple Box Moved Plants and Changed the World,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20, p. 9.


1) Margaret Flanders Darby, “Unnatural History: Ward’s Glass Cases,” Victorian Literature and Culture, 35(2007), pp. 635-636.
2) Ibid., p. 639.
3) Luke Keogh, “The Wardian Case: How a Simple Box Moved the Plant Kingdom,” Arnoldia 74/4(May 2017), pp.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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