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목에가시

‘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젊은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젊은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사무국장), 박용석(민주노총 전국건설노동조합 수도권북부지역본부 사무국장), 신종환(공무원), 이동화(아디 활동가), 이회림(경찰관), 정한별(사회복지사), 주윤아(교사), 최유라(지구의 방랑자), 홍세화(대학생)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사람은 못 되더라도, 우리 괴물은 되지 맙시다(정한별)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2-05-11 11:18
조회
137
사람은 못 되더라도, 우리 괴물은 되지 맙시다 1)

정한별/ 사회복지사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적 인식으로 구설에 올랐던 이씨가 비문명을 운운하는 요즘 시대. “뉴스 보셨어요? 저는 이씨가 합리적인 이야길 하는 것 같아요. 아무리 장애가 있어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요.”라고 이씨를 두둔하는 문명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글을 쓰려고 생각을 가다듬는데 전화기 진동이 울렸다.


“집 계약 써야 해요”


 매일 같이 실없는 이야길 문자메시지로 보내는 남자가 있다. 하루에도 수십 개의 메시지를 보내는 통에 “아침 일찍 이랑 저녁 늦게, 그리고 휴일에는 문자메시지 보내지 마요. 어차피 문자메시지 보지도 않고, 답문도 안해요” 라고 경고 아닌 경고를 한다. 말해 놓고 나니, 걱정이 돼서, 그래도 중요한 일은 꼭 연락을 달라고 다시 당부를 한다.


 혼자 살고 있는 그에게 연락이 왔다. 자신이 살고 있는 공공주택의 재계약을 해야 한단다. 계약 갱신을 위한 서류를 같이 준비하고, 서울에서 계약서를 쓰고 경기도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그를 처음 만난 날을 생각했다.


 엄마는 할머니랑 같이 시골에 살고 있다고 했다. 스물이 넘어 나온 도시는 그다지 할 일이 많지 않았다. 삼촌의 주먹을 피해 도망가다 잡히면 정신병원으로 가길 반복하는 것보단 할 일 없고, 친구도 없는 도시가 나았다. 사실 맞는 일은 이골이 나 있었다. 학교 기숙사에서 살며 말을 잘 안 듣는다고 맞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냐고 맞고, 말을 알아들으면서 모르는 척한다고 맞다 보면 맞는 건 그래도 견딜만했는데, 그 자그마한 방에 갇혀 마음대로 걷지 못하게 하는 일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걷는 일을 좋아했다.


 도시에는 식당을 하는 친척이 살았다. 친척 집에 얹혀살면서 식당 일을 도왔다. 친척은 그의 이름으로 원룸을 구해 줬다. 싱크대 밑 축축한 곳이 그의 방이었다. 친척은 방안 침대에서 잠을 잤고, 그는 싱크대 밑에서 잠을 잤다.


 친척은 그에게 천사였다. 그가 심심할까 봐 내내 일을 하게 해줬다. 식당 문을 열기 전에는 장사 준비를, 영업이 시작되면 서빙을 했다. 휴일 없이 내내 일을 하다가 추석과 설이면 하루씩이나 쉴 수 있게 해줬다. 그를 때리지도 않았다. 그가 말을 잘 안 들을 때마다 병원에 입원시키겠다고 따뜻하게 말해 줬을 뿐이었다.


 그는 한 달에 한 번 동주민센터에서 돈을 받았다. 돈을 본 일은 없지만, 친척은 돈을 저축하고 있다고 했다. 소처럼 일만 했던 그는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뭘 할지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식당 일을 해서 버는 돈과 동주민센터에서 나오는 돈을 친척이 잘 저축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친척은 일자리도 주고, 밥도 주고, 옷도 주고, 잠을 잘 수 있는 곳도 마련해 준 세상에 둘도 없는 착한 사람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그를 비웃고 이용해도, 친척만은 그를 이용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결국, 세상에 둘도 없는 착한 친척은 「장애인복지법」 위반, 「장애인 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수년 전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싱크대 밑이 아닌 싱크대가 딸린 집을 구해 침대에서 잘 수 있게 되었다.



사진 출처 - freepik


 계약 갱신을 위한 서류를 모두 준비하고, 그를 데리러 가기 전에 전화를 걸었다.


“내가 점심 먹고 은성씨(가명) 집으로 갈게요. 은성씨도 밥 먹고 준비하고 기다리세요”
“음...바빠요?”


 가족도 친구도, 마땅히 만날 사람도 없는 그를 만날 때면 항상 식사 시간 전에 만나서 밥을 같이 먹었다. 그의 바쁘냐는 질문이, 단순히 밥을 같이 먹자는 의미가 아닌 것을 알기에 아주 잠깐 고민했다.


“안 바빠요, 12시까지 갈게요. 밥 같이 먹어요”


 그와 같이 서울로 올라가서 계약서를 쓰고 그의 집으로 돌아왔다. 생각보다 시간이 늦어, 서둘러 작별인사를 했다. 그러자 그는 내게 물었다.


“바빠요? 라면 같이 먹어요”
“아니요, 안 바빠요. 라면 끓여 주세요”


 외롭다는 말, 궁금한 게 있다는 말 대신 하루에 수십 개가 넘는 ‘실없는 문자메시지’를 시도 때도 없이 보내는 남자가 있다. 조금 더 이야기 하고 싶다는 말을 “바빠요?”라고 표현하는 남자가 있다. 자신의 집에서 밥을 같이 먹었으니, 이제는 ‘형’이라고 부르겠다는 남자가 있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아 냈는지 알지 못한다면, 그의 말과 행동의 행간을 알아챌 길이 없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나라는 존재로 실존할 뿐이다. 아무리 타인을 생각한들 내가 타인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조금 더 이해하려고 노력할 따름이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어떤 과거를 거쳐 오늘을 마주하고 있고, 어떤 내일을 꿈꾸고자 하는지를 생각해 보는 일이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기에 그 누구도 쉽게 그 사람의 현재를 재단해선 안 된다.


 복잡한 일을 쉽게 생각하라고 간단한 문제라고 원칙은 오히려 명료하다고 치부해버려선 안 된다. “그러니까 시민들에게 피해를 줬어요, 안 줬어요?”라고 맥락을 거세한 채 답변을 강요해선 안 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쭙잖은 참견은 안 된다.


 문명의 시대를 살아보지도 못한 사람에게 비문명을 운운해선 안 된다. 내내 양보만 해왔던 사람이 자신을 빼고 모든 사람이 당연히 누리는 권리를 요구한다는 이유로 비난받아서는 안 된다. 세상에 분명 존재하고 있는 그의 존재를 부정해선 안 된다.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할 줄 모르는 무능은, 말의 무능을 낳고,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 (한나 아렌트)”


1) 영화 “생활의 발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