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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국가에서의 크리스마스 밤 - 이동화/ 민변 국제연대위원회 간사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1 15:27
조회
384

이동화/ 민변 국제연대위원회 간사



대선, 삼성 특검, 태안 기름유출, BBK 동영상......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건 소식들로 머릿속이 복잡하다 못해 피곤하기까지 하다. 피곤한 내 뇌를 위해서 눈과 귀를 닫고 휴식을 취하고 싶지만 연말이라 각종 송년회와 모임이 있고, 또 조금만 있으면 크리스마스도 다가오니 당분간 휴식을 취하기는 힘들 듯 하다.

2005년 12월 25일, 당시 요르단 대학에서 아랍어를 공부하고 있던 나는 이슬람 국가이기에 크리스마스 날에도 수업을 하는 줄 알고 학교에 갔다가 학교 정문이 닫혀있는 것에 당황했고, 학교 수위 아저씨에게서 크리스마스 날은 공휴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야 크리스마스 몇 주 전부터 한 동네마다 몇 개씩 있는 교회나 성당의 트리장식을 통해서 크리스마스가 언제인지, 교인도 아닌 나에게 한국에서 크리스마스가 얼마나 의미 있는 날인지 부지불식간에 알게 되지만 이슬람을 국교로 하는 요르단에서는 달력을 유심히 보지 않으면 일 년 중 어느 한 날로 지나칠 수도 있었다. 한국처럼 거리마다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지지는 않지만 이슬람 국가에서도 크리스마스 날은 공휴일이며, 많은 무슬림들은 예수탄생의 날을 축하하고 서로에게 선물도 주고받는다. 의아해 할 수도 있지만 이슬람교에서는 예수를 믿고, 예수의 지위를 신(하느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예언자로 간주한다. 잘은 모르지만 교리 상으로 보면 유태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하나의 뿌리를 가지고 있고 공통적으로 하느님(야훼, God, 알라)을 섬기는 유일신교라고 하니 이는 내가 그때가지 얼마나 이슬람을 모르지 지냈는지를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다시 돌아가서 2005년 12월 25일, 학교를 공친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서 밀린 빨래와 집안 청소를 한 다음 저녁에 무엇을 할지 고민했었다. 당시 같이 공부하던 외국인 친구들이 크리스마스파티를 계획 중이었고 나는 초대를 받은 상태였지만, 내가 살고 있던 집의 아래층에는 이라크 난민가족이 이사를 와 있었고, 딱히 교인이 아니기에 크리스마스를 축하해야 한다는 의무감은 없었지만 아랫집 난민가족의 아이들이 눈에 많이 밟혔다. 그래서 술과 익숙함이 있는 파티에 갈건 지, 그냥 음식들을 사서 아랫집으로 내려갈지 상당히 고민하다가 그냥 아랫집으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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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그 집 식구들과 술 없는 과자파티를 함께 하면서 찍은 가족사진. 근데 막내 후세인이 없다
사진 출처 - 필자


그 집에 아이들이 총 5명이었는데, 그 녀석들은 나의 갑작스런 방문에 많이 놀라면서도 너무도 반갑게 반겨주었다. 이라크에서 피난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경제적으로 빈곤한 상태였기에 매일 일하러 나가는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집밖에 잘 나가지 못하고 아이들에게는 친구들이 없었다. 그런 면에서 그 녀석들에게 나는 최초의 친구가 된 셈이었다. 덩달아 나도 흥에 겨워 그들의 부모님의 허락 하에 다시 슈퍼로 가서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과자들과 음료수를 잔뜩 사가지고 나름대로의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였다. 개인적으로 성인이 되고 난후 처음으로 술이 없는 크리스마스 파티였고 의사소통도 제대로 되지 않는 자리였지만 정말로 너무도 따스하고 흥겨운 파티였다. 특히 아이들과 놀 때는 그다지 언어가 필요치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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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 후세인은 먼저 골아 떨어졌다
사진 출처 - 필자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뭐하고 그렇게 재밌게 놀았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진도 찍었던 것 같고, 그 집 아빠가 아이들의 얼굴에 그림을 그렸는데, 웃기려고 했던 것 같은데 정확히 왜 한지도 모르겠고......정확히 기억나는 것은 그날 밤 계속 웃고 떠들었다가 시간이 너무 늦어 억지로 아이들을 재우고 그 집 아빠와 엄마와 함께 차이(아랍차)를 마시고 내 집에 올라와 잤다는 것이다. 그 이후 나는 그 네들과 급속도로 가까워져서 요르단을 떠나온 작년 9월까지 참으로 많은 날들을 그들과 함께 했다.

많은 모임과 일정들로 몸도 마음도 지쳐가는 요즈음이지만 2년 전 이맘때를 생각하면 배시시 웃음이 새어나온다. 그들이 하루빨리 자신들의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그 날이 오길 또 한 번 기도해본다. 그리고 그들을 만나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