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목에가시

‘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이동화(아디 활동가),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법원의 상식과 개인의 상식(정한별)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4-02-07 12:35
조회
119

정한별 / 사회복지사


 잘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뭐가 이치에 맞는 것인지 감조차 잡기 어렵습니다. ‘뒤죽박죽인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일이 이리도 어려우니, 도대체 우리 아이들에겐 무얼 가르쳐야 한단 말입니까.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 법을 넘어 도덕과 윤리에 어긋나지 않는 하루를 살아야 한다’라고 설명을 하고 뒤를 돌아보니, 뉴스에선 추상같이 법을 집행해야 할 검사가 법을 어기고 고발을 사주해 처벌을 받게 됐다는 뉴스가 나옵니다. 아이는 묻습니다. “검사가 뭐 하는 사람이야? 고발을 사주해서 처벌을 받게 됐다는 건 무슨 말이야?”


 법원은 오늘(2월 5일), 경영권 승계를 위해 두 회사를 부당하게 합병시킨 혐의로 무려 3년 5개월이나 재판을 받던 재벌의 총수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게다가 함께 기소된 13명 모두 무죄를 선고를 받았지요. 국정농단 재판에서 재벌의 총수가 대통령에게 경영권 승계를 위해 건낸 돈은 대가성이 있어 뇌물에는 해당하지만, 경영권 승계를 위한 합병작업 자체에는 불법이 없다고 했다는데요. 제 짧은 지식으로는 솔직히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최근 법원의 판결 중 많은 생각을 하게 한 무죄 선고가 있었습니다. 이른바 ‘사찰 노예 사건’입니다. 지난 1월 4일 대법원은 서울의 ‘사찰 노예 사건’에 대해서도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사찰노예 사건’은 한 사찰의 승려가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지적장애인의 노동력을 착취한 것으로 세간에 잘 알려진 사건입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1심과 2심은 가해자가 장애인차별금지법을 위반했고, 사문서위조 및 위조사문서를 행사한 사실을 인정하며 징역형을 선고했다고 합니다. 특히 2심은 중노동을 한 지적장애인에게 급여를 전혀 지급하지 않은 것이 장애인차별금지법에서 정하고 있는 악의적 차별행위라고 판결하였다는데요. 여기서 악의적이라는 표현은, 장애인차별금지법 제49조(차별행위) 제2항이 정하고 있습니다. 법은 악의적이라는 것을 판단하기 위해 차별의 고의성, 지속성 및 반복성, 피해자에 대한 보복성, 피해의 내용 및 규모를 고려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대법원은 “지적장애인인 피해자 외에도 30여년 동안 함께 거주했던 스님 중 비장애인 여러 명에게도 급여를 지급하지 않았고, 이미 벌금형이 확정된 폭행도 장애 여부를 떠나 일상생활에서 발생할 수 있는 경미한 수준”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가해자는 피해자의 실질적인 보호자로 의식주 비용, 수술비, 입원비, 임플란트 비용, 보험료, 성지순례비 등을 부담했다”라고 합니다. 정리하면, 장애인을 차별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언론의 반응도 두 갈래로 갈리는데요. 다수의 주류 언론은 “지적장애인을 30년이나 돌봐줬던 사찰 노예 사건의 스님이 누명을 벗었다.”라는 취지의 보도를 하고 소수의 비주류 장애인언론은 “지적장애인을 차별한 최악의 판결이다”라는 식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견이 맞는 걸까요?


 일상생활에서 발생할 수 있는 경미한 폭행을 경험한 일이 없는 비장애 남성인 저로서는, 일을 한 뒤 급여를 제대로 주려 하지 않아 신고를 감행했던 저로서는, 솔직히 잘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의식주를 책임지고, 병원 치료비용을 부담하고 여행을 보내주면 장애인에게 급여를 주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요? 일을 시킨 뒤 장애인에게 급여를 주지 않은 대신 비장애인에게도 급여를 주지 않았으니, 장애인을 비장애인에 비해 차별하지 않은 것인가요? 이게 맞나요?


 많이 공부하고 많이 고민하는 우리 대법관님들의 깊은 생각이 저는 왜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걸까요. 법은 상식이라고 하는데, 제가 갖고 있는 ‘그 어떤 이유로도 폭행은 정당화 될 수 없으며, 일을 한 뒤에는 당연히 급여를 받는 것’이라는 상식이 사실은 비상식적인 생각이었나 봅니다.


 불현듯 지적장애인이 염전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했던 사건이 떠오릅니다. 지적장애인을 착취한 염주가 부모로부터 장애인을 인계받아, 30년이나 염전에서 무임금 노동을 시키면서 단순한 의식주를 넘어서 기호식품인 담배와 술까지 제공하고 병원 진료도 보게 하고, 여행도 시켜주고, 경미한 폭행을 행사하고, 같이 일하는 비장애인 노동자에게도 급여를 주지 않으면 염주는 장애인의 노동력을 착취하지 않은 거죠? 갑자기 환청이 들립니다. ‘야, 이 녀석아 절이랑 염전이랑 같냐!!’ 사실, 전 뭐가 얼마나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아! 이제 알겠습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뇌물은 줬지만, 경영권 승계와 관련된 합병에 불법은 없었다고 하셨죠? 일을 시키고 급여는 주지 않았지만 30년을 돌봐줬으니 차별을 한 것이 아닌 게 맞겠네요. 잠이 든 아이를 깨워야겠습니다.


“미안, 아빠가 잘못 알고 있었어. 정직하고 도덕적으로 살 필요 없어!”


참고자료
에이블뉴스, “32년 사찰노예 지적장애인 차별과 억울함 외면한 대법원” (2024. 1. 31.)
더인디고, “대법, 노동대가 없어도 의식주 책임지면 무죄?”… 장애계 ‘황당’ (2024. 2. 1.)
더 중앙, '사찰 노예 사건' 스님, 누명 벗었다…6년 만에 밝혀진 학림사 진실 (2024. 1.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