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우리시대

‘우리시대’는 언론계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멘토가 되어, 작성한 칼럼에 대한 글쓰기 지도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어떤 ‘연애’ (이다솜)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8 11:56
조회
374

이다솜/ 청년 칼럼니스트



어떤 연애. 최근, 아주 아름다운 남녀관계의 한 사례를 보았다. 다이애나 사퀘브와 말렉 사피라는 두 아프가니스탄 영화인의 이야기다. 우연찮은 계기로 모 영화제에서 일하면서 작품을 수급하는 동안 여러 가지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했다. 그리고 어느 두 감독의 친절은, 내게 그 기억을 글로 풀어내고 싶다는 욕망까지 느끼게 만들었다.

우리 셋은 이메일을 통해 처음 만났다. 두 감독의 공동 프로젝트의 결과인 <모타라마>를 수급해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접촉 초기, 두 분은 어쩐 일인지 연락이 잘 되지 않았다. 영화제는 다가오고, 다급한 마음에 아프가니스탄으로 국제 전화를 걸었다. 내 전화를 받은 다이애나 사퀘브 감독님은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라며 환대를 베풀어주셨다. 나는 두 분의 정체(?)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열심히, 두 감독의 행적을 좇기 시작했다.

말렉 사피는 아프가니스탄과 해외 각지에서 13년 동안 다큐멘터리스트로 활동하며 30여 편의 작품을 만들어왔다. 그는 이란과 네덜란드에서 영화를 공부했으며, 20년 간의 망명 생활 이후 아프가니스탄 카불에 정착했다. 말렉 사피는 현재 아프가니스탄 영화인들의 모임인 ‘바자 필름’의 대표로 있으며, 인권영화제를 조직하기도 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또, 그의 작업 동반자 다이애나 사퀘브는 페미니스트 영화 제작자로, 여성운동에도 깊이 가담하고 있다. 이 두 감독의 공동 프로젝트, <모타라마>는 2009년, 아프가니스탄 의회가 새로운 가족법을 통과시키는 것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여성의 자유를 심각하게 제한하는 이 법은 여성이 남편의 동의 없이 집 밖에 나가거나 남편의 성적 요구를 거절하는 것을 금지한다. 이 법에 반대하는 여성들은 아프가니스탄에서 가장 큰 이슬람 학교 앞에서 시위를 벌이며 적극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이슬람 학교의 학생들은 시위 여성들을 모욕하기도 하며 침을 뱉고 심지어는 때리기까지 한다. 이런 갈등 속에서 시위는 점차 격렬해진다. 영화에서 말렉 사피의 카메라는 여성의 권리를 찾기 위해 주력하는 다이애나 사퀘브의 행적을 충실히 따라간다.


movie_image.jpg?type=m427_320_2
영화 <모타라마>
사진 출처 - 네이버



이 작품을 보고 있노라니 두 분이 과연 어떤 사이일지가 궁금해진다. 그간 이메일도 여러 번 주고받았고 전화통화도 몇 번 했지만 어떤 사이냐고 여쭤보지는 않았다. 이런 노골적인 질문은 실례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솟아오르는 호기심을 그저 홀로 삼켰을 뿐, 여전한 궁금증이 일어오는 것은 사실이다.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펴던 중, 문득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이 어느 순간 어리석어 보이며 퍼뜩 한 가지 깨달음이 왔다. 왜 나는 굳이 그들의 관계를 ‘규정’하려 하는가? 친구일 수도 있고 연인일 수도 있고 부부일 수도 있고 창작의 동반자일 수도 있는 것을. 혹은 그 넷 다일 수도 있지 않은가? 아니, 오히려 애초에 이성애에 기반한 관계가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두 분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내가 알 수 없고 또 내가 알아야 할 바도 아니지만, 두 분은 사랑하는 사이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라고. 영화를 보면, 자신의 지적 소통과 창작, 또 운동의 동반자인 다이애나 사퀘브와 그녀의 동료들의 자취를 기록하는 감독 말렉 사피의 시선에서 다이애나를 향한 ‘존경’과 ‘신뢰’가 느껴진다. 어쩌면 이 작품은 감독인 말렉 사피가 그의 동반자인 페미니스트 운동가, 다이애나에게 바치는 일종의 헌정이 아닐까? 헌정이 아니라면 애정표현? 꼭 ‘연인’이어야만 애정표현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그 애정표현의 방식이 꼭 포옹이나 입맞춤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우리는 평소 “사랑한다”는 말을 너무 아끼는 것 같다. 사랑의 대상은 꼭 연인이 아닐 수도 있다. 세상에는 나 자신을 포함하여 내 주위 친구, 가족, 사회적 약자, 내가 하는 일 등 사랑해야 할 대상이 매우 많다. 어쩌면 이성은 그 중 하나로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팍팍한 사회는 우리에게 언제나 ‘쓸모 있는 인간’이 될 것을 요구한다. 사랑받을 만큼 매력 있는 사람이 될 것을 요구하는 것도 그 중 하나다. 그러나 우리가 가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타인의 인정이나 승인을 받을 필요는 없다. 오히려,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반드시 나를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나를 사랑하고 내가 생산해내는 것을 사랑할 수 있어야, 보다 더 깊이 상대방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사랑은 반드시 ‘선한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한다고도 느낀다. 이 점에서 사랑은 집착과 구별되는 것이 아닐까?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과의 ‘연결’을 원한다. 그것 자체가 나쁜 건 아니다. 인간이라는 단독 개체로 존재하는 외로움, 그리고 마음 하나 제대로 기댈 곳 없이 굴러가는 세상이 우리를 연애 강박으로 밀어 넣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에게 연애 권하는 사회. “연애는 하느냐”가 “잘 지내고 있느냐” 같은 안부 인사로 변해버린 사회. 우리는 한 번쯤 과감히 이 사유 방식을 뒤집어볼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 나는 “연애하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말하고 싶다. ‘연애’라는 단어를 다른 의미로 사용해보고 싶다. 나를 사랑하고 내 친구들을 사랑하고 내 지적 소통의 상대를 사랑하고 예술적 동료들을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하고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하고 있다고. 또, 내게 늘 휴식과 영감을 제공하는 이 우주 자연을 사랑하고 있다고. 겉으로는 고요해보여도 속으로는 세상을 향한 강렬한 연애의 감정으로 불타고 있다고. 그리고 이런 ‘연대’가 가끔은 그 어떤 ‘연애’보다도 짜릿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고. 이렇게 솔직하게 소리 내고 싶다.

이다솜씨는 여성과 이주민 문제에 관심이 있는 청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