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발자국통신

‘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무책임과 무한책임의 제도화-교육 현장의 두 얼굴-(오항녕)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3-09-26 09:40
조회
224

오항녕 / 인권연대 운영위원


 

1.


자살이 인간의 난제라서 섣불리 말할 수 없으나, 자살에 이르게 된 삶의 고통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너나없이 같을 것이다. 그런데도 학교 선생님들의 자살이 이어지는 사태를 달리 보는 건 죽음을 차별해서가 아니다. 사회가 다 망가지더라도 마지막 희망은 거기에 있을 거 같은 학교라는 현장에서 죽음이 잇달았기 때문이다.


등교하는 우리의 미래들. 헌데 생명력의 공간이어야 할 학교에 죽음이 드리우고 있다.


1.


한때는 학부모였고 지금도 교육노동자이기에 최근 사태는 내 일이기도 하다. 내 일이면서 모른 체하고 싶은 심리는 소시민적 나태함이나 이기주의이기도 하다. 또 난제를 만나면 고개를 돌리는 인간 마음 한켠의 나약함도 이유일 것이다. 어쨌거나 이는 우리 마음의 분발을 촉구한다. 고개를 돌린다고 사라지지 않은 테니 말이다. 관심과 대안은 우리의 몫이다.


작금의 사태는 인간의 책임으로 환원되지 않는 현 교육 시스템의 오작동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작동 중 하나가 초중등 교육현장이 감당하고 있는 무한책임과, 대학이 손 놓고 있는 무책임의 제도화가 심각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1.


학교 교사들의 죽음(=‘자살같은 사회적 타살’)을 두고 학생인권조례 탓을 하는 일각의 소견도 있었다. 7~8시 등굣길 저 파릇파릇한 젊은이들의 발걸음을 보라. 저들이 ‘꿈을 꿀 권리, 행복할 권리, 차별받지 않을 권리, 표현의 자유, 존중받을 권리, 뛰어놀 권리, 교육복지에 관한 권리, 양심과 종교를 선택할 권리, 부모와 함께 살 권리, 정부의 보호를 받을 권리’를 누리지 못할 이유가 과연 무엇인가? 나아가 저들이 누려야 할 최소한의 권리 또는 그 빈약한 실현이 학교에 드리운 죽음과 도대체 어떻게 연관된다는 말인가. 오히려 학생과 교사의 인권에 대한 경시와 멸시는 모두 교육현장의 타락을 반영한다.



지난 9월 16일 ‘공교육 회복을 위한 집회’ : ‘살기 위해’ 모여서 외칠 수밖에 없다. 선생님들이 행복해야 아이들이 행복하다는 말은 진실이다.


 

1.


나는 지금 학교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를 초중등 교사에게 부과된 무한책임이라고 진단한다. 무한책임이란 두 가지 방향에서 교차하면서 압박으로 작동한다. 안에서 밖에서, 또 학습이나 생활지도, 그리고 행정 잡무에서.


우선 잡무. 한국교육개발원은 최근 교사들의 행정업무 할애 시간이 지난 10년 새 주당 5.73시간에서 7.23시간으로 28% 늘었다고 발표했다. 이 조사에는 질적 차원은 빠져있다. 실제로 초등 담임교사는 하루평균 2.5시간 이상을 잡무에 쓴다. 또 잡무는 늘 느닷없이 떨어진다. 공문은 보내는 쪽 마음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익숙하게 될 때까지는 또 시간이 걸린다. 50년 전에도 잡무를 줄여야한다는 말이 나왔지만, 오히려 는 셈이다. 한국교총에서도 행정업무에 대해 ‘많다(매우 많다 포함)’라고 응답한 교사가 90.7%라고 답했다.


평교사의 학생교육은 잡무의 일상이라는 토대에서 이루어진다. 문제는 본연의 ‘학생교육’마저 매우 포괄적이고 모호한 정의라서 교사의 의무와 책임 영역이 고무줄 같다는 점이다. 학생과 학부모의 권리는 명확하지만 교사의 경우 포괄적이고 모호해서 법적 보호를 받기 힘들다. 초중등교육법 제14조 제1항에서 교원의 전문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지만, 교육자로서의 품성과 자질 향상을 위한 노력, 윤리의식 확립과 학생지도 및 적성 계발의 의무, 교육의 중립성 등 대부분 의무 사항만 열거돼 있을 뿐이다. 따라서 무한책임을 강요하는 관련법은 하나하나 개정해야 한다.


잡무, 그리고 의무 뿐인 전문성 존중의 허울을 틈타 학부모들의 이기적이고 교활한 폭력이 끼어든다. 특히 ‘법대로’라는 이데올로기가 교육현장에도 덫이 되었다. 설명과 이해가 교육의 기초건만, 이제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도 ‘법대로’하게 된 것이다. 다 알다시피 ‘법대로’ 사람을 괴롭히기가 얼마나 쉬운가. 특히 서이초, 군산초 사례에서 보듯이 학부모의 교사에 대한 폭력은 근무시간 밖까지 뛰어들어 교사에게 무한책임을 강요하는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


 

1.


똑같은 교육현장이면서 무한책임이 아니라 무책임의 공간이 있다. 대학이다. 그 핵심은 학생 선발에서의 무책임이다. 한국의 대학은 자신들의 교육철학에 입각하여 학생들을 뽑지 않는다. 일부 예외는 있지만 대체로 매년 11월에 치는 수학능력시험의 기준에 따라, 또는 고등학교 학적부의 기록에 따라 이루어지는 수시전형을 통해 학생들을 선발할 뿐이다.


4, 50년 전 본고사가 있던 시절, 대학들은 국어, 수학, 영어의 시험문제라도 출제하고, 채점해서 학생들을 뽑았다. 그게 뭐 대단하냐고 할지 모르지만, 각 대학의 교수진에 따라 나름의 특색이 있었다. 한계는 뚜렷했지만 그래도 ‘선발의 책임’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떤 대학 입학식 모습. 희망찬 출발은 축하할 일이다. 다만, 대학구성원들은 돌아보아야 한다. 저 청년들을 정말 자신들이 선발했는가?]


 

지금은 대학 주도의 선발 노력을 안 해본 줄 아느냐, 입학사정관제, 학생부종합전형은 대학 자율성을 주려는 정책이다, 라고 반론할 수도 있겠다. 맞다. 그런 점이 있다. 하지만 결과는? 여전히 학생부의 스펙(기계에 쓰던 말이 어느 틈에 사람에게 쓰게 된 용어!), 수능 점수, 토익/토플/텝스 성적 등 ‘대학 외부’에서 제시하는 학생의 능력 증명서에 의존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교육부의 수능, 고등학교 학적부, 학원 컨설팅, 외국어 시험기관 성적표, 무슨 협회 증서 등등 남이 주는 기준을 가지고 학생을 뽑고 있는 것이다.


학생 선발에서 보여주는 대학의 무책임은 자신들의 대학이 어떤 사람을 뽑아 장차 이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 사람을 키우겠다는 비전이 없다는 데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입학 후 대학은 어떤 교육을 했을까? 대개 학생들이 알아서 성장한 것이다. 그 학생들이 어느 대학엘 갔던들 그만한 성취를 이루지 못했을까? 나를 포함하여 대학구성원들은 저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돌아볼 일이다.


현재 상태라면 한국의 대학이 하나하나 무너질 것이라는 예감을 갖고 있다. 현상적으로는 학생수가 줄기 때문이라지만, 지역 소멸의 강도를 고려할 때 심각하긴 해도 대학의 관점에서 볼 때 그건 정말 겉으로 보이는 현상일 뿐이다. 그전에 학생을 스스로 뽑지 않으면서, 뽑지 못하면서 언제까지 교육의 주체인 척할 수 있을까? 정말 두려운 것은 대학구성원들의 무책임이 여기에 그치지 않는 것 같다는 점이다.


나와 같이 공부할 사람조차 내 맘대로 뽑지 못하는데 자부심과 책임감이 생길 리 만무할 것이며, 여타 사회 영역에 대한 대학과 지식인의 책무를 고민할 리 없다. 대안? 우리 대학(학부, 학과)은 앞으로 학생을 이러이러한 방식으로 뽑겠다는 ‘불안하겠지만 책임감 있는 선발 방법과 비전’을 만드는 것이다. 모든 위기는 담장 안에서 시작하고 담장 안에서 먼저 답을 찾아야 한다.


 

1.


조금 길게는 우리가 갇혀 있는 6, 3, 3, 4학년 제도 자체를 물어야 한다.(나라마다 조금씩 변형은 있지만, 기본 포맷은 다르지 않다.) 꽤 오래 전부터 6, 3, 3, 4학년의 기원과 성립에 대해 주변에 묻고 찾아보았지만 신통한 답변을 얻지 못했다. 나는 외람되게도 바로 이 제도의 타당성을 의심해야 할 때가 왔다고, 아니 지났다고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어차피 제도 역시 역사의 산물일 뿐이다. 수명이 다하면 사라지는 게 섭리이다. 행복할 수 있는 배움, 나를 뿌듯하게 여기는 교육의 길을 찾아보는 것, 우리의 권리일 것이다.


 

오항녕 위원은 현재 전주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