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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근황(최낙영)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3-12-19 17:43
조회
193

최낙영 / 인권연대 운영위원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


일하라 일하라 일하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나의 가슴을 울리고 있지만


나는 그 노래도 그 전의 노래도 함께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김수영, <그 방을 생각하며>에서


이런저런 일들 때문에 뉴스를 보지 않게 되면서 글을 읽는 일이 점점 힘들어집니다. 억지로 책을 펼쳐 보지만 활자가 눈을 찌르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그러다 보니 점점 유튜브를 보는 시간이 늘어납니다.


그런데 그것도 이제 슬슬 한계가 온 것 같습니다. 무얼 본다는 것이 이렇게 귀찮은 일이었을까요? 처음엔 스포츠 관련 콘텐츠를 주로 찾아보다가 대중가요의 뮤직비디오를 찾게 되더니 요즘은 주로 긴 길이의 연주 음악을 찾아 듣게 됩니다. 이제는 거의 귀로만 유튜브를 듣는 셈이 되어버렸습니다.


생각해 보니 최근 3개월 동안 경조사에 몇 번 참석한 것 외에는 별로 다른 일 없이 지낸 것 같습니다. 그전과 달라진 것이라고는 장례식보다는 결혼식에 더 많이 갔었다는 것뿐입니다. 문득 내가 그만큼 나이가 들었구나 하는 생각도 해보지만 그뿐입니다. 오랫동안 벌이 삼아 해왔던 일도 별 볼 일이 없어진 지도 오래되었고 특별한 취미도 없으니, 정말 무위도식에 무념무상의 경지는 깊어지기만 합니다.


지인의 아들 결혼식에서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수십 년 월급쟁이를 하다가 얼마 전 직장을 그만둔 친구 하나가 저의 근황을 듣더니 “너도 지금 불백 상태구나” 하고 웃었습니다. 불백이라는 말은 ‘불러주면 나가는 백수’의 준말이라고 했습니다. 제법 사업이 자리 잡은 친구는 그 말에 박장대소하면서 “나는 불백인 너희들이 부럽다”라고 했습니다.


자영업을 하고 있는 친구가 “경기가 너무 좋지 않다, 윤석열이는 맨날 외국에나 돌아다니고...”라고 하자, 그 옆의 친구가 “윤석열의 최대 단점이 뭔지 알아?‘” 하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귀국이 너무 잦은 것”이라고 답을 하며 껄껄 웃었습니다. 출국이 아닌 귀국이 잦다는 그의 말에 모두 웃었지만 그뿐이었습니다.


이후 맛집, 골프, 건강... 뭐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오갔습니다. 이제는 이쪽 편이든 저쪽 편이든 정치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해 넘어가기 전에 한번 보자는 말에 모두 동의하며 자리를 파했습니다.


집으로 가는 전철을 타러 역으로 가던 중에 한 친구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시를 쓰다가 생계 때문에 글을 접고 개인 사업을 시작한 친구입니다. 한때는 하는 일마다 잘되어 관계된 모든 모임의 비용을 거의 혼자 감당해주던 친구였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 사태 이후 모임에 얼굴을 보이지 않게 된 그 친구는 몇 번을 전화해도 받지 않았습니다.


연말은 연말인가 봅니다. 송년회 참석 확인 문자도 오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지인들이 전화로 저의 근황을 묻기도 합니다. 물론 통화의 끝은 가까운 시일 내에 식사라도 한번 하자는 말로 마무리됩니다.


한 해가 저물어 간다는 생각 때문일까요. 아니면 그날의 결혼식 모임 이후 어떤 다른 생각이 든 걸까요. 요즘 갑자기 ‘그동안 어떻게 지내고 있었느냐’는 다소 의례적인 인사말에 흠칫 놀라 무념무상의 경계가 조금씩 흔들립니다. 머릿속에 점점 생각이 많아집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선 책상머리에 고이 모셔두기만 한 책(*)부터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의 근황을 묻는 이에게 무념무상의 경계에 들었다고 헛소리로 어떻게든 대충 뭉개보려는 뻔뻔하고 얄팍한 정신머리가 달라질 것도 같습니다.


(*) 저자의 서명이 담긴 두 권의 귀한 책을 받았습니다. 해 넘어가기 전까지 읽겠습니다.
양상우 지음, <감춰진 언론의 진실>
빈곤의 연구팀 지음/조문영 엮음, <동자동, 당신이 살 권리>


최낙영 위원은 도서출판 밭 주간에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