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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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하이에나가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닌다고 노래하지만, 하이에나를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하이에나도 신선한 고기를 좋아한다. 다만 남이 사냥해 놓은 걸 빼앗을 뿐이다. 하이에나가 먹이를 빼앗는 대상은 초원에서의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는다. 육상동물 최고의 주력을 자랑하는 (그러나 빅캣-bigcat-중 서열이 가장 낮은) 치타는 물론이고, 먹이를 나무 위에 숨기는 영리한 표범도, 심지어 백수의 왕이라는 사자도 하이에나의 강도 범죄 피해자가 된다. 떼를 지어 몰려드는 하이에나들에게 암사자 서너 마리쯤은 적수가 되지 못한다. 하이에나는 달리기가 느린 대신, 뼈를 으스러뜨릴 만큼 강력한 이빨과 턱, 먼 곳의 피 냄새도 놓치지 않는 예리한 후각, 탁월한 조직력과 협동심, 절대 포기하지 않는 끈기로 아프리카 사바나의 무법자로 군림한다. 윤석열 검찰은 하이에나였다  촛불의 기억이 희미해지고 땅거미가 내려앉자 개인지 늑대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개와 늑대의 시간’을 우리는 지나왔다. 지금은 하이에나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하는 어둠의 시간이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윤석열 검찰은 하이에나였다. 뼈까지 으스러뜨리는 강력한 이빨(수사권)과 턱(기소권), 유죄 심증을 끝까지 밀어붙여 탈탈 터는 끈기, 일사불란한 조직력과 협동심을 자랑하는…, 하이에나였다. 특히 윤석열 개인의 행태는 하이에나와 더욱 흡사하다. 자기 새끼(한동훈)와 식구들에 대한 끔찍한 사랑(조직이기주의), 스스로 자기 먹거리를 구하는 생태계의 규칙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 무법자 행태(감찰 및 수사 방해), 대통령 후보 여론조사를 즐기며 검찰총장 자리를 지키고 있는 뻔뻔함, 나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가혹한 이중인격(내로남불) 등 생존을 위해 최적화한 하이에나를 보는 듯하다. 약육강식의 초원에선 미덕일지 모르겠으나 개명한 민주주의 국가의 검찰총장으로는 적절치 않은 악덕들이다. ‘살아있는 권력 수사론’의 기만성  그런데도 윤석열이 버티고 있는 것은 살아있는 권력을 수사한다는 명분 때문이다. 이 명분을 위해 검찰은 생명의 피 냄새가 나는 곳으로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사냥감을 찾아다녔다. 윤석열 검찰이 내세우는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수사’가 가소로운 이유는 기만적인 눈속임에 기초한 프레임이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권력 수사에 대한 열망은, 권위주의 정부 시절 검찰이 눈에 뻔히 보이는 정권의 비리조차 봐주기로 일관해서 생겨난 여론인데, 검찰개혁을 위해 권한을 내려놓는 리버럴 정권이 되면 없는 사건도 만들어내겠다는 투지로 과도한 수사를 벌인다. 이전 정부의 과오가 쌓여 높아진 요구를 리버럴 정부가 되면 거꾸로 조직 보위의 방패로 삼는다는 점에서 시차를 활용한 일종의 야바위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은 권력만을 물어뜯던 하이에나가 스스로 싸움을 포기한 사자에게 몰려들어 ‘우리도 살아있는 권력을 공격할 수 있다’고 으스대는 꼴이다. 비루한 외모의 하이에나가 초원의 무법자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강한 자에 약하고 약한 자에 강한 ‘강약약강’의 비굴한 처세에 있다.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수사가 필요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민주주의의 기본 토대로서 공직 사회의 부패 방지는 무척 중요한 과제이고, 선출 권력에 대한 견제가 필요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많은 국민이 분노하는 대상은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수사 자체가 아니라, 자기 조직의 생존을 위해 국민이 위임한 수사권을 남용하는 윤석열 검찰의 과도하고 편향적인 행태다. 사진 출처 - 한겨레 검찰개혁 속도조절론이라는 유령  대한민국 국민은 역시 현명해서 윤석열 검찰의 속임수를 꿰뚫어 보았고, 더욱 철저한 검찰개혁을 주문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더불어민주당이 검찰개혁특위를 띄우고 검찰의 수사권과 기소권을 분리하는 수사청 설립 작업에 착수한 배경이다. 그런데 해괴하게도 청와대와 정부여당 일각에서 먼저 속도조절론이 흘러나왔다. 최초 출처로 지칭되는 문재인 대통령의 워딩을 몇 번이고 읽어봐도 그게 왜 속도조절로 읽히는지, 속도조절이라면 몇 km까지 줄여야 한다는 건지 알기 어렵다. 그런데 대놓고 부인하지 않으니 대통령의 속뜻이 그러하다고 짐작할 뿐이다. 대통령의 화법과 소통방식과 현실인식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엄밀히 말하면, 이번 수사청 설립 국면에서 청와대와 정부의 지분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주지하다시피 문재인 정부는 공수처와 검경수사권조정 정도에서 검찰개혁을 멈추고 싶어했다. 검찰개혁 논의가 여기까지 이르게 된 공을 논한다면, 무리한 수사권 남용으로 근본적인 검찰개혁의 필요성을 역설적으로 입증한 윤석열과 수사-기소 분리를 주창한 시민들의 용기에 돌려야 한다. 여태 손 놓고 있던 청와대가 법안 발의를 눈앞에 둔 지금 와서 갑자기 속도를 늦추자는 주제넘은 주장을 하니 어처구니가 없다.  4·7 재보궐선거에 관계없이 정부여당이 수사청 설립 방안을 다시 꺼내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나는 예상한다. 한 달이 지난다고 시기상조론의 조건이 사라지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선거에서 이기면 오만하다는 소릴 듣지 않으려고, 선거에서 지면 동력이 없어서 못 할 것이다. 통과 시점을 못 박은 것은 섣부른 선택이었을 수 있지만, 법안 발의조차 못 하게 해서 논의 자체를 틀어막는 건 폭력적이다. 문재인 정부의 마지막 남은 개혁 카드가 이렇게 허공으로 사라질 운명에 놓였다. 수사청 설립 반대 금태섭의 자가당착  청와대와 법무부가 속도조절론이라는 공을 쏘아 올리자 친검언론은 물론이고 진보인 척하는 정치인과 지식인들이 각종 괴변과 아전인수로 드리블을 이어가고 있다. ‘헌법 정신 파괴’ 운운하는 윤석열의 무식함은 언급할 가치도 없다. 모든 주장을 반박할 여유는 없고, 대표 격으로 금태섭 전 의원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분석해 보려고 한다. 나는 그의 주장이 자가당착의 전형이라고 생각하지만, 뒤집어보면, 수사청 설립의 정당성을 확인하는 논리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의 주장의 핵심은 민주당의 검찰개혁 방안이 “공수처, 국수본, 중수청 등 수사기관을 오히려 늘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금태섭이 공수처 출범을 반대하며 펼쳤던 논리의 연장선에 있는 것으로, 문재인 정부 초기에는 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주장에는 중대한 전제가 깔려 있었다. ‘검찰의 수사권을 그대로 둔 상태에서 공수처를 설립할 경우’라는 전제 말이다. 그런데 지금 민주당의 수사청 설립 방안은 검찰의 수사권을 없애고 기소권만 남기겠다는 것 아닌가. 검찰의 수사 기능을 공수처와 수사청이 나눠 갖게 하고, 경찰의 수사 기능은 자기 완결적인 형태로 국수본이 갖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수사 총량은 0으로 수렴된다. 수사 총량이 늘어난다고 공수처를 반대했던 그의 주장대로라면, 검찰의 수사권을 지금 그대로 두는 것이야말로 수사 총량이 늘어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제대로 논의조차 해보지 못하고 폐기될 운명에 처한 수사청 설립 방안이 잘못 꿴 검찰개혁의 첫 단추를 다시 끼우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금태섭은 제 논리로 제 발등을 찍고 있다. 검찰병에 걸린 환자들  금태섭은 또 검찰의 경찰 수사 지휘권에 대해 “검찰이 직접 수사를 못 하게 하면 그 대신 경찰에 대한 통제는 강화해야 한다. 검찰의 권한 남용보다 경찰의 권한 남용이 평범한 시민에게는 훨씬 큰 문제다”라고 주장했다. 경찰의 권한 남용이 평범한 시민에게 훨씬 큰 문제라는 데는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통제의 주체가 꼭 검찰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자신이 실은 검찰주의자였음을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경찰이 자체 종결하는 사건들에 대해서는 검찰이 아니라 경찰수사심의위원회 같은 민간위원회를 명실상부하게 운영해 민주적으로 통제해야 한다. 더구나 금태섭은 검찰이 기소권을 통해서 경찰에 재수사를 요청(사실상 수사지휘)할 수 있다는 점을 (아마도 일부러) 빼놓고 말하고 있다는 점도 지적해야겠다. 나는 대한민국 검찰이 (박정희의 5·16 쿠데타 이후) 60년 묵은 한국 사회의 고질병이라고 생각한다. 윤석열 등은 말할 것도 없고 금태섭의 행태 역시 검찰병 환자의 그것이라고밖에 달리 말할 도리가 없다. 모든 판단 기준에 검찰을 중심에 놓거나, 검찰이 중심이었던 과거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이른바 공소유지불가론이나 거악척결론을 비롯해 검찰이 만들어낸 모든 논리 역시 마찬가지다. 자기들이 아니면 누가 하겠느냐는 유아독존적 발상이다. 사자의 용기와 여우의 지혜  드라마 <하이에나>의 주인공 정금자(김혜수)의 대사는 정곡을 찔렀다. “하이에나 똥이 왜 하얀지 알아? 썩은 거든 산 거든 뼈째 씹어 먹거든.” 대한민국이라는 초원에서 검찰은 보수든 진보든 뼈째 씹어 적색도 청색도 아닌 백색의 물질로 만들어 버린다.  밤이 깊어가고 어디선가 하이에나들의 음산한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하이에나를 제압하는 유일한 방법은 무리를 흩트려놓는 것이고, 검찰을 정상 국가조직으로 돌려놓는 유일한 방법은 권한을 분산하는 것이다. 초원에서 그 일을 감당할 자는 사자밖에 없고, 한국 사회에선 국민밖에 없다.  사자 무리를 영어로 프라이드(pride)라고 부른다. 오랜 세월 사자를 숭배해온 서양인들의 긍지가 배어있는 작명이다. 부디 한국 사회가 사자의 용기와 여우의 지혜를 지닌 프라이드가 되길.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깨달음을 되새기며 심호흡을 할 수밖에. “판타 레이(panta rhei), 모든 것은 흐른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 밤은 낮이 되고, 심장이 작아진 하이에나는 조용히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21-03-03 | hrights | 조회: 3143 | 추천: 35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한국 검찰의 역사는 개와 늑대의 시간으로 나뉜다. 목줄을 세게 쥐는 권위주의(또는 독재) 정부에서는 충직한 개였다가, 풀어 놓아주는 리버럴 정부에서는 야생의 늑대가 된다. 개의 시간에는 주인의 명령에 따라 물라면 물고 짖으라면 짖지만, 늑대가 되면 스스로 본능에 따라 살아간다. 생존 본능이라는 새로운 주인을 섬기는 것이다. 생명 유지와 번식을 위해 필사적으로 먹이를 사냥하고 목숨을 건 결투도 피하지 않는다. 친검이냐 반검이냐  윤석열이 이럴 줄 몰랐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윤석열을 잘못 본 것이다. 윤석열은 개의 시간에도 늑대 유전자를 숨기지 않던 인물이다. 당시 수뇌부가 개처럼 정권에 충성할 때 윤석열은 주인 없는 늑대처럼 행동했다. 그걸 현 정부 지지자들이 자기편이라고 착각했을 뿐이다. 윤석열은 누구의 편도 아니다. 윤석열은 검찰 편이다.  개의 시간에는 늑대가 드물지만, 늑대의 시간이 되면 죄다 늑대가 된다. 늑대의 시간에 늑대가 되는 건 쉬운 일이다. 가히 합법 쿠데타라 할 만한 작금의 검찰 행태를 윤석열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 시각은 그래서 근시안적이다.  늑대가 된 검찰의 판단 기준은 여당이냐 야당이냐, 진보냐 보수냐가 아니다. 친검이냐 반검이냐다. 검찰 개혁에 반대하는 자유한국당은 친검이고, 검찰 개혁 의지를 꺾지 않는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은 반검이다. 국회 패스트트랙 폭력 행사를 비롯해 자유한국당에 대한 수사를 검찰이 열심히 하지 않는 이유는 검찰이 보수여서가 아니라 자유한국당이 검찰 편이어서다. 자유한국당과 검찰의 적폐연대는 이미 작동중이다. 이기적이고 자의적인 수사  늑대가 된 검찰에게 가장 큰 천적은 이른바 ‘검찰개혁 세력’이다. 그대로 뒀다간 검찰이 사냥을 못하게 되거나 번식이 불가능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검찰에게 조국은 호랑이 새끼 같은 존재였다. 더 크기 전에 물어 죽여야 했다. 조국 하나를 잡기 위해 청와대와 총리실, 기획재정부, 경찰청 등 가리지 않고 들이닥쳤다. 전국의 검찰 조직을 총동원해 넉 달 동안 뒤진 끝에 고작 ‘감찰 무마’ 직권 남용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채용 비리 혐의를 받는 김성태 자유한국당 의원 등에게는 구속영장의 ㄱ자도 꺼내지 않은 검찰이다. 표적수사이자 문어발식 별건 수사일 뿐 아니라 친검 편파 수사로서 검찰 흑역사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김기현 전 울산시장 관련 사건의 경우 잘만 하면 ‘검찰개혁 사령부’에 해당하는 청와대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가할 수도 있다고 검찰은 기대하고 있는 것 같다. 또한 경찰이라는 잠재적 경쟁자를 노린 다목적 수사다. 경찰을 압수수색해 확보한 자료를 토대로 별건에 별건의 가지를 쳐가며 두고두고 관련자들을 괴롭힐 것이다. 각각의 유죄 여부는 검찰에게 중요하지 않다. 한국 검찰은 수사 착수만으로 유죄 심증을 갖게 하는 언론 환경을 갖고 있다. 의혹 제기만으로 목적의 절반을 이룬다. 물어뜯기도 전에 먹잇감은 만신창이가 된다.  이렇게 탈탈 털면 먼지 하나라도 나오지 않을 도리가 없다. 문제는 이 모든 검찰의 무리한 행위가 합법의 영역에 있기 때문에 제어할 수단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검찰의 의도는 불순하지만 입증하기 어렵고, 합법적 수사를 통해 불법행위를 밝힌다는 결과만 남는다. 검찰은 이렇게 국민을 ‘합법 딜레마’에 빠뜨려 놓고 제 밥그릇 챙기는 데 국민이 위임한 공권력을 남용하고 있다. 무엇보다 가장 나쁜 악덕은 검찰 수사가 자의적이라는 점이다. 이건 지금까지 우리가 숱하게 봐왔던 검찰의 제식구 봐주기나 내로남불과는 차원이 다른 최악의 상황이다. 검찰이 이렇게 대놓고 조직 이기적이고 자의적인 수사를 무리하게 할 수 있는 빈틈이 우리 민주주의에 존재하는 것이다. ‘상당성의 원칙’ 현저히 위배한 수사  나는 윤석열과 검찰을 이 시대의 난신(亂臣)으로 규정한다. 윤석열 검찰은 조선시대 예송논쟁에 비견할만한 디테일을 들이대며 나라를 어지럽히고 국정을 무력화하고 있다. 유재수 전 금융위 국장 감찰 중단이 청와대 업무상 정당한 판단인지 직권남용인지가 이렇게 떠들썩하게 나라를 뒤흔들어야 할 대단한 권력형 비리인가. 검찰도 감히 그렇게 주장하지 못할 것이다.  김기현 전 울산시장 하명 수사 의혹은 또 어떤가. 경찰은 지역 사회에 파다하던 비리 혐의를 수사한 것일 뿐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오히려 울산지검이 김기현 쪽 편을 들어준 것 아닌가라는 의심마저 나오는 상황이다. 제기된 의혹도 아닌 검찰발 인지수사를 남발하며, 형사소송법의 ‘상당성의 원칙’에 어긋난 무리한 수사를 통해 끊임없이 정치적 소음을 양산하고 있다. ‘수사의 수단은 추구하는 목적에 적합해야 한다’는 수사비례의 원칙에 비춰 최근 검찰의 행태는 과도하고 무리하다는 의미에서 상당성을 잃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예송논쟁이 조선의 국력을 낭비하게 하고 재난을 초래했듯이, 검찰의 무리한 수사 또한 그러하다. 승냥이 같은 주변 열강들과 떼쟁이 같은 북한, 역대 최강의 갈등 증폭기라 할 자유한국당 때문에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나라의 운명은 검찰의 관심 밖이다. 오로지 자신들의 밥그릇 지키기에만 혈안이 된 파렴치한 이기적 집단이 바로 윤석열 검찰이다. 조국 수사의 실무 책임을 진 자는 마치 조폭처럼 휘하 검사들을 떼로 몰고 법정에 나가 재판장을 겁박하는 작태를 벌이더니, 재판부를 상대로 고발장이 제출되자 정식 배당하고 수사를 검토하겠다고 한다. 정경심 기소장 변경을 불허했다고 보복 수사를 예고한 것이다. 갈 데까지 간 수사권 남용 실태가 여기 있다. 선출 권력인 대통령도 무시하는데 그깟 법원이 무서울까. 오만방자하고 안하무인의 검찰 행태가 극을 달리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파탄난 검찰 중립(독립) 주장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검찰 독립’ 주장이 유행했다. 주로 검찰(지상)주의자들 입에서 나온 주장이었다. 그런데 법무부의 일개 외청에 불과한 검찰이 독립한다면, 검찰을 누가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라는 반문이 생겼다. 결국 선출 권력의 통제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라는 반론이었다. 그러자 말을 바꿔 정치적 중립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유사 이래 최상급의 독립성을 누리고 있는 윤석열 검찰은 역설적으로 검찰의 정치적 중립이 얼마나 허구적인 개념인지 스스로 폭로하고 있다. 중립이란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것이다. 검찰은 중립을 보장하는 정부를 향해 칼끝을 겨누는 일이 중립성을 지키는 것인 양 으스대지만, 이건 중립이 아니다. 중립을 보장하는 정부에서만 가능한 ‘시한부’ 중립이다. 결과적으로 중립을 보장할 생각이 없는 자유한국당 세력에게만 편파적으로 유리한 ‘반쪽’ 중립이다.  윤석열 검찰이 최대치로 키우는 건 중립성이 아니라 편파성이다. 이제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구호는 시효가 끝나 버렸다. 중립의 실체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검찰은 스스로 중립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더구나 검찰이 검찰을 위해서 칼을 드는 친검 편파적 수사는 검찰 중립이라는 가치의 재구성을 강력히 요청하고 있다. 국민 통제라는 목줄  일명 ‘개통령’으로 불리는 강형욱씨가 출연하는 티브이 프로그램에 주인을 위협하고 물기까지 하는 삽살개가 문제견으로 등장한 적이 있다. 덩치가 워낙 크고 사나워서 개가 방문을 막고 있으면 엄마아빠도 드나들 수 없었고, 고등학생 자녀들은 으르렁거리며 몸 주위를 도는 개 앞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강형욱씨는 이 개가 주인들을 존중하지 않고 자신이 이 집을 지배한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강형욱씨가 제시한 해법은 목줄을 세게 쥐는 것이다. 주인보다 앞서서 달리려고 하거나 입마개를 벗으려고 할 때마다 강씨는 목줄을 세게 낚아채 개를 제지했다. 이 행동을 반복하니 개가 얌전해졌다. 주인의 통제가 먹히기 시작했다.  과거 정부들처럼 검찰 출신 청와대 민정수석을 내세워 검찰을 장악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만악의 근원에 해당하는 검찰의 권력 독점을 깨고 국민이 실질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자는 얘기다. 검찰의 수사권 박탈은 물론이고, 기소배심제(대배심) 등 여러 가능한 대안을 중층적으로 고안해야 한다.  강형욱씨에 따르면, 주인 행세하는 개를 통제하는 데 필요한 주인의 자세가 하나 더 있다. 개가 으르렁거려도 겁먹지 않는 것이다. 검찰은 기형적으로 발전해온 우리 민주주의의 빈틈이다. 국민의 힘으로 비뚤어지고 터진 곳들을 바로 잡고 메워왔듯이 검찰이라는 빈틈도 메울 수 있다. 으르렁거려도 겁먹지 말자. 늑대는 집안에서 키울 수 없다. 검찰의 새로운 주인은 검찰 자신이 아니고 국민이어야 한다.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19-12-26 | hrights | 조회: 32907 | 추천: 1147
오인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나이를 먹을수록 이 말의 다정함이 절대적으로 실감된다. 추위가 유난히도 길고 깊었던 겨울의 끝에서 맞이한 봄은 더욱 반갑다. 특히 올 봄은 자연만이 젊음을 되찾는 계절이 아니라 우리 사회도 활력을 되찾는 시절이 되리라는 기대까지 더해져서 희망차게 기쁘다. 자연이 부활하는 계절에 한껏 부풀어 오른 희망을 따라 두서도, 정처도 없이 생각의 길을 거닌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가능성을 기대하고 희망하며 그것을 지향하는 것이야말로 인간 의식의 기본형태”라는 어느 철학자의 말을 떠올리면서.  마침내 그가 수인번호 716이 되었다. 기쁘다! 구속 직전 “지난 10개월간 견디기 힘든 고통”을 겪었다고 토로했다는 데, 검찰이 진즉에 그의 고통을 줄여주지 않은 건 아쉽다. 만시지탄의 감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후련하다. 물론, 구속이 곧 처벌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구속이 정의의 구현인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는 거니까 부귀권세에 상관없이 죄를 지은 자는 벌을 받아야 한다. 사회가 존속되려면 이런 최소한의 정의가 있어야 한다.  기실, 부귀와 권세를 누리는 사람이 악을 행하면 더 크게 벌해야 한다.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살만한 처지에서 덕을 베풀진 못할망정 죄를 범하였으므로. 716은 수십 년에 걸쳐 그런 범죄행각을 벌여왔다. 상습적이다. 그래서 더 악질적이다. 그런데도 그는 마치 자신이 평생 정직하고 도덕적으로 살아왔는데 정치적 탄압에 의해 불의하게 구속된 것인 양 군다. 웃기는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우선, “정직”이라는 가훈. “정직”이 정녕 가훈으로 내걸었다면, 아마도 그것은 가족 모두가 ‘탐욕 앞에 정직하자’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형제들, 아내, 아들, 사위 할 거 없이 거의 가족 모두가 범죄 혐의자라는 사실이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다. 단군 이래 이만한 가족은 없었지 싶다. 아니, 어쩌면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이래 초유의 가족일지도 모르겠다. 만일 716이 국회의원, 서울시장, 대통령 직을 거치는 동안에 가족이라는 이유로 아무런 불법적 혜택을 받지 않았다면 몰라도, 특혜는 한껏 누렸으면서 이제와 가족이라는 관계를 내세워 슬쩍 면죄부를 받으려 든다면, 인정사정없이 오직 법대로 엄정하게 처리해야 할 줄로 안다.   그리고 “도덕적으로 가장 완벽한 정부”라는 자평. 이 표현은 “도둑적으로 가장 완벽한 정부”의 오기로 보인다. 증거가 없는 악은 악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가장 큰 증거는 자기다. 정신이 어긋난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설사 남은 모를 지라도 자기는 안다. 이건 380여 년 전에 데카르트 형님이 사고실험을 통해 논리적으로 뒷받침을 해 놓은 사실이다. “모든 것을 의심하는 사이에도 내가 이렇게 의심하고 있다는 것. 내가 이렇게 의심하면서 스스로 그것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 스스로 의식하는 나는 여기에 분명히 있다는 것. 바로 그것만은 더 이상 의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내가 가장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가장 단순한 것”이라고. 그래서 나는 716이 자기네가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이라고 하는 말을 어떤 식으로든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사진 출처 - SBS  게다가 아직까지는 716이 헌법을 유린한 반국가 사범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드러나지도 않았다. 구속영장에 나타난 그의 혐의는 특정범죄 가중처벌법상 뇌물수수 · 국고손실 · 조세포탈,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상 횡령, 수뢰 후 부정처사, 정치자금 부정수수,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대통령기록물관리법 위반 정도다. 이것만 보면 그는 정치사범이 아니라 경제 사범처럼 보인다.  716은 대통령으로 취임할 때 헌법 제69조에 따라 다음과 같은 선서를 했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그러나 716은 국가를 보위하기는커녕 보란 듯이 국고(國庫)를 탈탈 털어가려고 온갖 궤변과 꼼수를 다 동원했다. 조 단위로 나랏돈을 해먹은 언필칭 자원외교의 사기극과 멀쩡한 강을 살리겠다며 4대강과 그 주변 생명들을 해친 반(反)생태적 범죄에 대해서도 철저히 따져서 죗값을 물게 해야 한다. 지금 다시 돌이켜봐도 716이 대선에서 내걸었던 747공약은, 당시 풍자적으로 회자되었던바 그대로였다. (대통령이 되기만 해봐라, 내가) ‘칠(7) 수 있는 사(4)기는 다 칠(7)꺼다.’  더 나쁜 것은 그런 불의와 파괴에 국가적 사업이라는 이름을 들이대면서 합법적인 정책으로 만든 것이다. 사악하게 얻은 것을 지키기 위해 온갖 협잡(挾雜)과 비리를 저지르면서도 마치 그것에 옳은 일인 양 치장했다. 사익을 공익으로, 불의를 정의로, 악을 선으로 탈바꿈시켰을 뿐만 아니라 제도화시켰던 것이다. 같은 정파에 나온 그의 후임자가 503이 된 것은-비록 수인번호는 먼저 달았지만- 일견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렇게 해먹어도 탈나지 않는데 나도 이쯤이야 뭐, 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겠는가. 법률적으로는 716에게도 마땅히 무죄추정의 원칙이 적용돼야겠지만, 양의 탈을 쓰기만 하면 탐욕스런 늑대들이 우화의 세계가 아니라 공적 현실에서 활개 치게 만든 역사적 유죄를 벗어날 순 없을 것이다.  최소한 공적 영역에서만큼은 양의 탈을 쓴 늑대들을 몰아내자는 것, 그게 적폐청산의 한 축일 것이다. 비리나 부정, 불의와 탐욕 같은 악습을 깨끗하게 씻어내지 않고서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나라를 만들 수는 없는 노력이다. 불의한 현실세계를 비판하고, 그런 현실과 다른 현실을 만들기를 꿈꿨던 토머스 모어는 ⌈유토피아⌋에서 주인공 히슬로다에우스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했다. “정실과 탐욕이라는 이 두 가지 악이 인간의 마음에 뿌리 내리면 곧 모든 정의의 파괴자가 된다. 사회의 가장 강력한 접합제인 정의가 파괴되는 것이다.” ⌈신국론 De Civitate Dei⌋의 저자로 초기 그리스도교의 대표적인 교부(敎父)였던 성(聖) 아우구스티누스는 “정의를 없애버린다면 국가는 도둑집단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라고 설파한 바 있다. 과연 그렇다! 만백성의 십시일반으로 채운 나라 곳간을 터는 일을 본업으로 삼은 자들은 도둑놈들이라고 하지 않으면 뭐라 부를 것인가? 그런 자들을 ‘발본색원’하여 엄벌하여 아예 뿌리를 뽑자는 적폐청산을 정의구현이 아니라 한사코 정치보복이라고 읽는 자들도 있다. 십중팔구, 제 발이 저린 자들이거나 탈이 벗겨질 것을 두려워하는 이리 같은 무리들이다.  그들이 뭐라 하든, 만인이 만인에 대해 이리 같이 굴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세상이 오리라는 희망을 갖게 하는 봄이다. 비단 적폐청산의 움직임만이 아니라 남북관계의 해빙과 미투(Me too)운동의 전개도 긍정적 기대를 마음을 밝고 환하고 따뜻하게 해준다. 흔히 봄을 희망에, 여름은 실행에, 가을을 결실에, 겨울을 휴식과 준비에 비유해 왔다. 사계절의 변화를 농사짓는 일에 연결하는 게 자연스러웠던 때의 기본 감각이다. 물론 인생은 곡식이 자라듯이 그렇게 철따라 매듭이 있는 것은 아니어서 자연의 계절과 인생의 계절이 꼭 일치한달 수는 없다. 사람이 사회에서 살아가는데 있어 봄에만 좋은 일이 있고, 가을에 꼭 풍성한 결실을 거두리란 법도 없다. 그러나 지금은 봄은 봄에 즐겨야 한다는 마음을 거두고 싶지 않다. 오인영 위원은 현재 고려대 역사연구소에 재직 중입니다.
2018-04-04 | hrights | 조회: 1835 | 추천: 5
- 늑대의 시대 양으로 사는 길 보여주길 서상덕/ 인권연대 운영위원 하필 이 원고 마감일이 제19대 대통령선거 당일로 예정돼 있었다. 대세가 아니라 결과가 이미 결정 난 판이라지만, 주위에서 간헐적으로 나오는 ‘혹시나 하는’ 견제나 재수 없는 ‘꿈’ 얘기 때문에…. 마감 날짜까지 늦춰가며 원고를 잡아두고 있었던 것은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는 심리가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물론 원고는 미리 써놓기로 했다. 알려진 대로 문재인 대통령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다. 이 ‘독실하다’는 말을 께름칙하게 만든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나 서석구 변호사 같은 이들이 있어 평소 이 말은 잘 쓰지 않는 편이다. 어쨌거나 이런저런 기준에 따르면 문 대통령은 독실한 신자 축에 든다고 할 수 있다. 문 대통령이 유력한 후보시절 사전 취재를 위해 몇 차례 그의 근거지(?)를 찾았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신자나 사목자의 활동 근거지가 주로 당사자가 교적(敎籍)을 두고 있는 본당이 된다. 따라서 당시 문 후보의 근거지는 그가 교적을 둔 천주교부산교구 양산 덕계본당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취재에 돌입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덕계본당에서는 별로 건질 게 없다는 걸 알게 됐다. 예의 ‘색깔론’과 ‘지역감정’이 본당 신자들마저 갈라놓고 있었던 것이다. 여러 사람을 만나고 인터뷰했지만 쓸 만한 게 없었다. 마음먹고 찾았는데 ‘건질 게 없다니….’ 난감한 상황에 생각이 미친 게 문 후보의 어머니였다. 그의 어머니에 대해선 알려진 게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래서 오히려 메리트가 있다 싶었다. 급하게 방향을 틀어 그의 어머니를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문 후보의 어머니는 그야말로 꼭꼭 숨어있었다. 어렵사리 그가 다닌다는 성당을 찾았지만 연락처는 고사하고 주소조차 확인할 길이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본당 교우들한테 외부 사람에게는 절대로 어떤 얘기도 해주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해놓은 터였다. 할 수 없이 속칭 ‘뻗치기(취재 대상을 무작정 기다리는 전통적인 취재 기법)’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몇 번이고 그물망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몇 차례 허탕을 치고 허탈해 하고 있는 찰나에 우연히 성당에서 만나게 된 사람이 김 모 회장이었다. 김 회장은 당시 문 후보를 그냥 ‘재인이’라고 불렀다. 솔직히 처음엔 허세가 있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에겐 정말 문 후보가 그냥 ‘재인이’였다. 지금의 문 대통령과 같은 초등학교와 같은 성당을 다닌 오랜 ‘친구’라는 김 회장 입에서 나온 대통령에 대한 기억들은 의외였다. 문 대통령이 살던 집, 그의 부모님과 가족들, 학교생활 등에 관한 김 회장의 기억은 어떻게 그런 것까지 기억하고 있을까 싶을 정도로 거의 날짜 단위까지 사실에 근접해 있었다. 김 회장의 호의로 어렵사리 문 대통령의 어머니가 살고 있는 집을 찾아갔다. 결국 연로한 그의 어머니는 못 만나고 그를 모시고 사는 여동생을 근근이 만날 수 있었다. 첫 대면에 문 대통령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도 어머니의 당부라며 한사코 인터뷰를 사양했다. 다시 김 회장의 호의와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성당 마당에서 여러 친구들 속 문 대통령과 뛰놀던 일, 성당 수녀님들의 사랑을 받던 모습, 가난했던 집안 내력, 초등학교 5~6학년 시절 미사 때 함께 복사(服事:미사를 거행할 때 주례 사제를 도와 전례가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보조하는 봉사자를 이르는 복사는 보통 신앙이 독실한 아이들 중에서 뽑힌다.)를 서던 기억들…. 사진 출처 - 문재인 대통령 가족 제공 꼬박 하루를 함께 동행한 김 회장은 그 또래가 지닌 평균적인 모습을 뛰어넘는 모습으로 그간 내가 알고 있던 문 대통령에 대한 생각을 바꿔놓았다. “지금 생각해봐도…, 재인이한테는 뭐 특별하다고 할 만한 게 없었어요. 가(걔) 어머니 신앙과 정성이 그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지요.” 김 회장을 비롯한 성당 신자들에게 각인돼 있는 문 대통령 어머니 모습은 충실하고 겸손한 신앙인 그 자체였다. ‘얌전해서 도드라지는 게 없는 친구’라는 평 다른 쪽에는 ‘어머니를 닮은 신앙이 자리 잡고 있다’는 거였다. “재인이한테는 하느님, 하느님의 정의가 숨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니 이 시대가 부르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김 회장은 이 시대의 징표를 ‘정의’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갈 사람으로 오랜 친구 ‘재인이’를 꼽았다. “내가 알아 온 재인이가 우리 모두의 재인이가 되면 좋겠습니다.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을 해낼지는 모르겠지만, 지(자기) 잇속 차리는 일만 하지는 않을 거구만…. 그게 재인이 모습입니다.” 김 회장이 오랫동안 품어 온 ‘나의 문재인’이 확장되고 보편화될 때 세상에는 좀 더 희망이 들어차지 않을까.   서상덕 위원은 현재 가톨릭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7년 5월 10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585 | 추천: 11
서상덕/ 가톨릭신문 기자 #세관이 된 교회 평화로운 일상에 쩍하고 금이 가듯 갑자기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왜 이리 시끄러운 거야?” 세관장이 투덜거리며 나와 보니 몇몇 세리들이 한 청년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세관장님, 이 사람 아주 막무가내입니다. 여기가 자기 아버지 집이라면서, 막 들어가려고 합니다.” “뭐라고? 뭣해, 빨리 경찰 부르지 않고.” “이미 불렀습니다. 마침 저기 오는군요.” “왜 남의 집에서 소란을 피우는 겁니까? 신분증 내놔 봐요.” 경찰이 다그치자 청년의 얼굴에 기가 차다는 표정이 스친다. “여기 야훼라는 분이 살고 계시지 않나요?” “아니, 그런 사람 안 살아요.” “분명 여기가 맞는데….” “아니 이 사기꾼이 어딜…. 업무에 지장이 많으니 빨리 잡아가든지 하세요.” 경찰에 끌려 나오는 청년은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분명 여기가 맞아!” 이렇게 말하며 청년이 세리들과 경찰 앞에 내민 것은 자신의 손이었다. 그의 손바닥에는 못자국이 선명했 다. 안타까움이 뚝뚝 듣는 듯 한 청년의 얼굴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아니, 정녕 나를 아는 이가 한 사람도 없단 말인가!’ 청년이 떠난 건물 한 귀퉁이에는 낡은 명판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나뒹굴고 있었다. '○○○교회'라는 이름만이 그 곳이 청년이 애타게 찾던 아버지의 집이었음을 들려주고 있었다. #세리가 된 성직자 수도권 한 교구 신부의 사제관. 본당 주임을 맡고 있는 바오로 신부와 인사차 찾아온 후배 신부들과의 대화가 한창 무르익고 있었다. “루카 신부, 어떻게 요즘은 골프 좀 쳐?” “아닙니다. 아직…. 저희 본당은 이쪽하고 차이가 많이 나서요.” “허허, 신부가 사목 제대로 하려면 골프도 좀 치면서 외부 사람들하고도 어울릴 줄 알아야 해.” 다른 후배 신부가 끼어든다. “신부님, 골프 잘 치신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뭐 그냥, 따라다니다 보니 조금씩 늘게 된 게지.” “우와! 이건 그 유명한 ○○○○가 아닙니까.” “아, 그거…. 몇 년 전 내 생일 때 누가 선물해준 건데. 필요하면 가져.” “그래도 됩니까.” “난 그거 말고도 많으니까 부담 없이 가져가.” 아니나 다를까, 사제관 이곳저곳뿐 아니라 장 안에 들어있는 골프채 세트만 5개가 넘었다. 한켠에는 미니 골프연습장까지 갖춰져 있었다. “역시 이런 데서 사목을 해봐야 사제 생활하는 맛이 난다니까….” #허물어져 가는 아버지의 집 신약성경에서 아버지 하느님의 은총을 이야기할 때 세리는 중요한 등장인물 가운데 하나다.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로 부르신 마태오도 세리였다. 예리코를 지나가시던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받은 자캐오라는 사람도 돈 많은 세관장이었다. 하지만 세리는 단죄 받아야 할 인간 무리를 꼽는 데도 빠지지 않는 존재였다. '세리와 도둑', '세리와 강도', '세리와 죄인', '세리와 창녀', '세리와 이방인'처럼. 로마 총독의 위임을 받아 인두세, 토지세, 통행세, 시장세, 물품세 등 각종 세금을 징수하던 세리들은 세금 징수권을 독점하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세금을 걷는 과정에서 수탈을 자행했기에 동족인 유다인에게도 경멸과 미움의 대상이었다. 로마 제국의 하수인으로 유다인 사회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힌 세리들은 자신은 물론 가족들까지도 미움과 경멸의 대상이 됐다. 세리들은 유다인 사회에서 철저하게 배척당했으며 이방인이나 죄인들과 같은 부류로 취급됐다. 이 때문에 세리들에게는 공민권이 주어지지 않았고, 배심원이나 공증인이 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천대를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처럼 경멸과 저주의 대상인 세리 마태오를 제자로 부른 것은 자신의 복음화 여정에 치명타를 안겨줄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예수는 모험을 감행했고 그 모험은 보기 좋게 성공했다. 그런데 2000년이 흐른 지금, 예수의 선택에 금이 가는 일이 심심찮게 벌어지고 있다. 그것도 자신이 뽑아 세운 사람들 사이에서…. 목사를 비롯한 교직자들이 뭇사람들의 지탄의 대상이 된 지는 이미 오래 전이다. 가톨릭교회는 그 여파에서 멀리 비켜나 있는 듯했지만, 한동안 이웃종교에 머물던 손가락질은 어느 새 교회의 변두리를 넘어 중심을 향해 가고 있다. 아버지의 집 한켠이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의 한복판에 사제들이 서있다는 점에는 대체로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있는 분위기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공감대가 시간을 거듭할수록 증폭되고 있다는 점이다. 신자들 뇌리에는 ‘사제’하면 ‘목자’라는 의식보다는 ‘관리자’라는 인식이 먼저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게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이로 인해 교회는 하느님 나라로 가는 세관, 사제는 세리가 되고 만 형국이 펼쳐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한국교회만의 것이 아니라 전 세계 교회가 겪고 있는 공통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교회 쇄신을 부르짖고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도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우리는 자주 은총의 촉진자보다는 은총의 세리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세관이 아닙니다. 교회는 저마다 어려움을 안고 찾아오는 모든 이를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는 아버지의 집입니다.”(복음의 기쁨 제47항)   #어쩌다가 아버지의 집이 아직 한국교회에서는 눈에 띄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사목자가 세리로 추락하는 양상이 점차 확산되고 있다. 왜 이런 현상이 빚어지고 있는 걸까.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듯 현대를 살아가는 사제들 가운데 적잖은 수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신자유주의 경제논리에 젖어버렸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는다. 전 세계 교회를 통틀어 오늘날 가톨릭교회가 직면한 문제 가운데 빠지지 않는 것이 교회의 ‘중산층화’라고 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이들의 교회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이는 겉으로 드러난 현상을 반영하는 것일 뿐 문제의 본질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특별히 사목자들에게 뼈아프게 다가오는 문제의 본질은 사제를 필두로 많은 교회 사목자들이 동족을 못살게 굴던 ‘세리’의 위치로 전락해 그들의 모습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이다. 사제가 마치 하느님 나라로 가는 통행세를 걷는 세리처럼 여겨진다는 자조 섞인 목소리마저 나오고 있다.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세상이 무한경쟁과 적자생존의 사회로 막무가내로 진화할 때 교회가 그 흐름에 편승해 보조를 맞추면서 이제는 자본의 논리가 교회를 압도하는 형국이 펼쳐지고 있다. 세상의 도전에 교회가 적절한 응전에 나서지 못함으로써 실기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교회의 중산층화를 걱정하기보다는 당연하다고 여기는 풍조마저 확산되고 있다. 오히려 발전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만큼 신자들이 잘 살게 되고 영향력도 커진 게 아니냐는 것이다. 일면 맞는 말일 수 있다. 하지만 버젓이 부자의 문 밖에 가난한 라자로가 굶주리며 웅크리고 앉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일부 세례 받은 이들이 교회에 대한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이는 특정 구조와 일부 본당과 공동체들의 냉랭한 분위기, 또는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단순한 문제든 복잡한 문제든 이에 대응하는 관료적인 태도에 기인한다는 것을 우리는 인식해야 합니다. 많은 곳에서 행정적인 측면을 사목적 측면보다 우선시하고, 복음화의 다른 형태들은 뒷전으로 물리고 성사 집전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복음의 기쁨 제63항) 관료적·행정적 모습이 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교황의 질타가 폐부를 찌르듯 아프게 다가오는 것은 웬일일까. 교황은 아버지의 집을 갉아먹고 있는 문제의 본질을 영적 세속성에서 찾는다. “영적 세속성은 신앙심의 외양 뒤에, 심지어 교회에 대한 사랑의 겉모습 뒤에 숨어서 주님의 영광이 아니라 인간적인 영광과 개인의 안녕을 추구하는 것입니다.”(93항) 겉으로는 별 문제 없이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신앙의 가면’을 쓴 영적 세속성이 교회 안에 스며들면 단순히 도덕적인 다른 모든 세속성보다 더 엄청난 재앙이 되고 마는 현실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은 사제들이 관료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자상한 충고를 잊지 않는다. 그는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 종교가 자유롭게 되기를 바라셨다. 교회가 나중에 추가한 규범들이 ‘신자들의 삶에 짐이 되지 않도록’ 그리고 우리 종교를 종살이로 만들지 않도록 신중해야 한다”면서 끊임없는 식별을 통해 복음의 핵심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교회의 일부 관습들을 걸러내 교회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으라고 요청한다. 교황이 지적한 신자들의 삶에 짐이 되는 규범과 복음의 핵심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관습이 오늘날 교회가 겪고 있는 질곡을 낳는 것이라면 과감히 이를 벗어던질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늘 새로운 복음화의 여정을 걸어갈 수 있다. 효율과 실리만을 숭상하는 사회에서 누구나 늑대처럼 영악하게 살고자 하지만 교황은 골리앗과 다윗의 예를 들며 양으로 살라고 권고한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371 | 추천: 1
김대원/ 인권연대 운영위원   짧지 않은 시간을 투자했지만 아직 외국생활이 익숙하지 않다. 특히 한국어와 문법이 비슷하다 하여 쉬우리라 생각했는데 역시 일본어도 외국어였다. 그나마 발음은 괜찮게 들리는지 준비한 인사말 몇 마디에 모두들 감당하기 힘든 주제로 대화를 시도해 온다. 특히 일본인들에게는 천안함 사건이 여전히 큰 관심거리이다. 물론 대부분 일본 언론에서 보도하는 대로 북한의 도발임이 분명하고 전쟁이 곧 일어날듯 한데 일본에게도 심각한 일이라며 호들갑 떠는 내용이다. 그것을 한국인인 나에게도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인터넷을 통해 대략의 내용만 접한 것으로 아는 척 하기도 그렇거니와 내 일본어 수준으로 구체적인 설명을 하기도 어려워 별 일 아니라 하고 넘어가려 했다. 그러나 의도적인 도발임이 분명한 사건을 겪고서도 어찌 그리 태연할 수 있느냐고 되물어 오기에, 결국 몇 가지 의문을 이야기하며 좀 더 기다려 볼 일이라 설명하는 중 조금 흥분해서 오히려 오키나와 미군기지 문제로 골머리 앓고 있는 일본과 미국은 이 사건과 관련하여 다른 의도를 갖고 있는 것 아닌가 반문했다. 내 딴에 상식적이라 생각되는 수준에서 가진 의문이었는데 대부분 깜짝 놀란다. 어떻게 매스컴에서 보도하는 내용 이면의 것을 내다 볼 수 있느냐며 대단하다고 한다. 이들이 어찌 알까. 한 두 해가 아니라 수십 년간 당하면서 살아 온 끝에 갖게 된 지혜라는 것을 이들이 어찌 알겠는가. 그런데 지혜라 자부하기에는 뭔가 미묘한 생각이 들었다. 어느 쪽이 정상일까? 주변에서 전하는 이야기를 그대로 믿고 그것이 전부인 것으로 알고 사는 것과 어떤 소식이든 들으면서 사실일지부터 고민하며 살아온 우리의 삶. 정상 비정상의 문제는 아닐지 모르지만 안타까운 일임이 분명하다. 물론 진실을 모른 채 살고 있는 이들도 안쓰럽지만. 전국언론노동조합, 한국기자협회, 한국PD연합회로 구성된 '천안함 조사결과 검증위원회'의 우장균 한국기자협회장(가운데)이 지난 6월 4일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정부의 천안함 조사 결과 발표에 대한 검증 없이 보도한 언론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늑대소년, 아니 정확히 말하면 양치는 거짓말쟁이 소년 이야기가 있다. 몇 번 씩이나 마을 사람들을 속인 끝에 실제 늑대가 나타났지만 결국 아무도 사실이라 믿어주지 않았던 이야기. 물론 거짓말 한 소년 탓이라 여기면 그만일 테지만, 결과를 알고 난 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의 마음이 오죽 복잡했을까. 속이는 사람보다 속는 것은 아닐까 의심을 품거나 속은 사람의 마음이 더 혼란스럽고 아프다는 사실을 저들은 알까. 여하튼 그 뒤로 국내 소식에 조금 더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런데 천안함 사건과 관련하여 음모론 유포 혐의로 몇몇 사람이 입건까지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내용을 살펴보다 보니 ‘지나치게 사건 진행 간의 개연성에 집착하여 여러 가지 이유로 간과된 가정들을 지나치게 맹신하고 근거로 삼는’ 것을 음모론이라고 한단다. 어느 심리학자는 음모론이 ‘자기가설에 부합하는 사실만 채택하고 맞지 않는 것은 버리는 심리행태’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그리고 원인과 결과를 알고 싶어 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심리여서 사건의 해석이 쉽지 않은 경우 단순명쾌한 음모론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 주장대로라면 누가 음모론자인지 명확하지 않은가. 도대체 누가 간과했던 가정을 맹신하며 근거로 삼고 있는지, 누가 자기가설에 부합하는 사실(?)만을 고집하는지, 누가 보통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하여 서둘러 단순명쾌한 답을 내놓았는지 분명하지 않은가. 온갖 어이없는 음모론으로 나에게 꽤나 구박받았던 후배에게 오랜만에 연락해보아야겠다. 그 친구라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언제나 황당무계한 이야기만 늘어놓는 그 친구의 의견이 궁금해지다니 나도 정상이 아닌 것 같다. 누구 때문일까? 김대원 위원은 성공회 신부로 일본 릿교대학교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194 | 추천: 0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1. “깜냥이 드러난 거죠.”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 당했을 때 백낙청 선생은 싸늘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2004년 3월, 당시 사회부 기자였던 나는 대통령 탄핵 사태에 대한 사회 원로들의 반응을 취재 중이었다. 알듯 말듯 한 선문답을 피해가려 내쳐 물었다.   “누구의 깜냥 말씀입니까?”   “양쪽 다죠.” 양쪽이란 노무현 대통령 본인과 한나라당을 말한다. 이후에 전개된 탄핵 사태의 전말은 익히 아시는 바와 같다. 차마 신문에는 옮기지 못했지만, 역사는 백 선생의 이 쓴소리가 탁견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나는 요즘 노무현의 깜냥과 이명박의 깜냥에 대해 생각한다. 공무원도 운동은 해야 한다고 주장하시어 골프 치는 공무원들을 죄의식으로부터 해방시키셨으며, 퇴임 후에도 자기 부하들의 골프장 결혼식에서 주례를 더블로 뛰시며 골프 사랑이 여전함을 뽐내신 노무현 전 대통령의 깜냥과, 일찍이 히딩크와 사진 찍으면서 자기 아들과 사위를 불러 같이 사진을 찍게 하는 등 공사 구분을 못하시다가, 본인 소유의 건물에서 영업 중인 유흥업소가 성매매 의혹에 휩싸여 있는데도 모르쇠로 일관하는 강심장의 소유자이신 이명박 현 대통령의 깜냥을. 노무현이 서구의 앞선 제도와 관습을 부러워하며, 현실을 무시하고 국민정서를 깔보다가 큰 코를 다쳤듯이, 이명박은 70년대식 일사 분란함을 그리워하며 여론을 무시하고 국민정서를 깔보다가 큰 코를 다칠 공산이 크다.   #2.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과천정부청사에 출입할 때 일이다. 청사 내의 한 식당에서 경제부처의 차관과 식사를 하고 있는데, 이 양반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90°로 인사를 하는 게 아닌가. 대체 누구 길래 이 점잖은 양반이 오버를 하나 싶었더니, 다름 아닌 신승남 당시 법무부 검찰국장이었다.(호남 출신인 그는 이 요직을 거쳐 노무현 정부에서 검찰총장을 지냈다) 검찰의 서슬을 눈으로 확인한 셈이었지만, 한 부처의 차관이 다른 부처의 국장에게, 그것도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 조폭 인사를 하는 풍경이 무척 어색했던 기억이 난다. 이 낡은 에피소드를 굳이 꺼내는 건, 검찰이 얼마나 중요한 집단인지에 대해 우리가 너무 몰랐거나, 알았더라도 안이하게 생각했다는 자괴감이 들어서다. 김영삼 정부 시절, 검찰은 야당 인사만을 잡아 족쳤다. 검찰을 출입했던 우리 신문사의 한 선배는 “검찰은 개다. 짖으라면 짖고, 물라면 문다.”는 글을 신문에 싣기도 했었다. 그러던 검찰이 달라진 건 김대중 정부 시절이 아니라, 노무현 정부 시절부터였다. 야당 시절 검찰 독립을 목 놓아 외치던 김대중 정부는 정권을 잡은 뒤태도를 바꿨다. 그러나 노무현은 달랐다. 그는 정말로 검찰을 독립시킬 태세였다. 검사들은 물을 만난 듯 했다.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대통령을 상대로 맞장을 뜨기도 했고, 좌희정으로 불리는 사람을 구속하기도 했다. 그런데 모든 변화의 노력이 허사였음이 드러나고 있다. 검찰은 다시 ‘개와 늑대의 시간’으로 돌아간 지 오래다. 정권의 정치적 반대자만을 골라서 수사하고 있으며, 시민단체든 일반 시민이든 학생이든 가리지 않고 마수를 뻗치고 있다. 이제와 생각하니, 검찰 독립이니, (검찰로부터의) 경찰의 수사권 독립이니 하는 문제는 지엽적인 문제에 불과했다. 이들을 어떻게 국민의 통제 아래 둘 것인가를 고민하고 토론했어야 했다. 대통령이 바뀌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음을 알았어야 했다. 만시지탄이지만, 역사에서 배우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닐 것이다.     #3.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2일 청와대 만찬에서 원혜영 민주당 원내대표가 ‘유모차 엄마’ 수사 문제를 지적하자,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나와선 절대 안 된다. 아이를 시위에 데리고 나오는 건 아동보호법 위반으로, 처벌이 목적이 아니라 앞으로 아이를 못 데리고 나오게 하는 게 목적”이라고 말했다.(<한겨레>) 이명박 대통령이 2일 여야 원내대표단 및 정책위의장과 만찬을 하기에 앞서 청와대 상춘재에서 환담을 나누고 있다.    사진 출처 - 청와대 사진기자단   몇 일전 신문을 보다가 이런 기사가 눈에 띄었다. 야당은 부적절한 발언이라고 비판했다지만, 이건 부적절한 정도를 지나, 사실상 대통령이 수사를 지휘하고 있다는 걸 자인하는 것이다. 검찰의 네티즌 수사, KBS 수사, 시민단체 수사도 마찬가지 맥락 아닐까? 역사는 직선이 아니라 나선형으로 발전한다고 믿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작금의 퇴행은 심히 곤혹스럽다. 지금의 청와대는 이른바 뉴라이트(하나도 ‘뉴’하지 않지만!) 진영의 주장을 바이블로 모시는 종교집단처럼 보인다. 친일의 역사를 미화하는 역사 교과서를 만들려는 움직임이 그렇고, 부자들을 위한 티가 팍팍 나는 부동산 세제 개편이 그러하며, 경쟁을 격화시키는 방식의 교육 정책이 그러하다. 이 모두가 정권을 잡기 전에 뉴라이트 집단이 노무현 정부를 비판할 때 써먹었던 준거들이다. 부질없는 짓일지 모르겠으나, 나는 요즘 이런 상상을 해본다. 이명박 대통령이 부자들을 위한 일방적인 세제개편을 철회하고, 이적용공세력 만들기에 열을 올리지 않는 대신, 부동산 가격을 안정시켜 집 없는 서민들에게 내 집 마련의 희망을 갖게 하고,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해 사회적 대타협에 적극 나서며, 양극화 문제 해결(노무현 정부 시절 언론들이 떠들던 양극화 문제는 더 심해지면 심해졌지 결코 덜 하지 않다. 그런데 양극화에 대한 문제제기는 다 어디로 갔나. 양극화란 단어는 확실히 노 정권 비판을 위한 작명이었나 보다.)에 나선다면? 그렇다면 나는 이명박 대통령을 지지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정부는 그런 고민이 생길 여지를 전혀 주지 않고 있다. 저자거리에 나가서 들어보라. 장삼이사들이 독재를 운운하고 있는 형국이다. 정작 중요한 건 국민들의 깜냥 아닐까. 잘잘못을 명확히 가리고, 기억하고,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을 깜냥 말이다.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중입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253 | 추천: 0
아내와 나는 연애시절부터 이런 저런 영화보기를 좋아했다. 아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주로 조용하고, 내용이 풍부하고, 감미롭고, 때론 감정의 역류를 억제할 수 없는 것들이고,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주로 때리고, 부수고, 웃기는 것들이다. 하지만 같이 영화를 본다. 아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내가 좋아하는 경우는 있지만, 아직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아내가 좋아하는 경우는 드물다. 나의 감성이 허리우드 영화에 잠식된 결과겠다. 어제 밤 아내와 ‘브로크백마운틴’이라는 영화를 보게 됐다. 아내는 친절하게 내게 말한다. “이 영화가 각종 영화제를 휩쓸고 있데.” 아내의 설명은 여기까지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부류를 알고 있는 아내는 내가 영화를 보며 지루해하거나 중간에 영화보기를 그만둘까봐 사전포석을 한 셈이다. 끝까지 보라고. 아니나 다를까. 지루하다. 대자연의 풍부한 영상, 한 컷을 잡기도 어려울 아름다운 화면 이것만으로 나의 관심을 끌기에는 부족했다. 그리고 두 사내가 나온다. 두 사내가 같이 양치기 아르바이트를 한다. 양치기 청년들. “늑대가 나타났어요.”라고 거짓말을 하기에는 조금 나이가 든 두 사내. 도입부를 보며 나는 “저 많은 양들을 어떻게 다 관리한데. 늑대가 나타나 한 마리 물고 가도 모르겠구먼.”이라고 말한다. 영화가 조금 지났다. 한 사내가 식량을 가지고 오다 곰을 만나고, 놀란 말에서 떨어지고, 짐 싣고 오던 노새 2마리를 잃어버리고, 노새를 찾으러 뛰어가고, 밤이 되어서야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어 노새와 함께 캠프로 돌아온다. 나머지 한 사내가 피 흘리고 있는 사내에게 얼굴을 닦으라고 수건을 준다. 말없던 한 사내가 조금 말이 많아졌다. 술을 같이 마신다. 둘에게 양은 이미 관심 밖이고 술 마시고 놀다 그만 캠프에서 나동그라진다. 한 사내는 텐트 안에서, 한 사내는 불 옆에서 나동그라졌다. 그런데 영화가 이상하게 흐른다. 나는 잘 그려 놓은 서부극정도로만 상상하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는데 난데없는 이야기가 눈앞에 시작되고 있다. 거친 사내 둘이 텐트 안에서 서로의 욕구를 드러내고, 웃통을 벗고 풀밭에서 뒹군다. 그리고 양들의 방목이 끝나자 아르바이트로 시작했던 양치기도 끝나고 둘은 헤어진다. 더 거칠어 보이던 사내가 다른 사내를 보내고 나서 헛구역질을 하는 것 같았다. 아니 울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활을 떠난 화살처럼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엔딩...   답답했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부류의 영화를 보고나면 항상 남는 느낌이다. 무엇인지 정리되지 않는 느낌. ‘우리의 히어로가 지구를 구하는 걸로 끝내면 더 이상 잔상도 없고, 깔끔하고, 얼마나 좋아.’라는 푸념도 한다. 그러나 아내에게 들리지 않게... 인간의 사랑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통된 관심사다. 다만 단서가 붙는다. 남자와 여자의 사랑일 것. 어떤 방식으로 사랑을 그려도, 예컨대 그것이 그림이건, 소설이건, 영화이건 일단 비판과 비난을 받을지언정 금기시하지는 않는다. 남자와 여자의 사랑인 한. 최근 개봉되었던 한국 영화 중에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이란 영화가 있었다. 여기에는 7가지의 사랑 얘기가 있다. 그런데 유독 관객들이 웃음을 참지 못했던 사랑 얘기가 하나 있다. 극중 천호진이 분한 조 사장의 사랑 얘기가 그것이다. 왜? 이성이 아닌 동성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의 한 장면  동성애. 동성애의 역사는 어쩌면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계속되어 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성애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다는 얘기다. 인간을 제외한 동물 중 종족번식을 위한 목적 외의 목적으로 사랑행위를 하는 동물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의 사랑행위가 동물의 사랑행위와 그 목적에서부터 다른 마당에, 자신의 사랑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동물과 비교하며 자연의 섭리 운운하는 것은 비정상이고 몰상식이다. 이미 인간은 동물과 자신을 구별하기 위해 스스로 존엄한 존재임을 표방하고 있지 않은가. 그 존엄한 존재가 자신의 존재 형식을 스스로 규정하고자 한다. 그것도 자신이 가진 자연스런 감정에 따라. 무엇이 문제인가. 사랑하는 두 사내의 만남을 4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가로 막고 있던 장벽은 무엇일까. 가족에게 거짓말을 해야만 비로소 만남의 기쁨을 얻을 수 있게 한 장벽은 무엇일까. 14시간이나 되는 거리를 두고서만 사랑을 가능하도록 한 장벽은 무엇일까. 기껏해야 1년에 한번 아니면 2년에 한번 만날 수밖에 없도록 하는 장벽은 무엇일까. 가족과 헤어져야만 얻을 수 있는 사랑이도록 만드는 장벽은 무엇일까. 이렇게 만나지만 두 사내의 눈에 눈물이 고이도록 만드는 장벽은 무엇일까. 그리하여 죽음으로 서로를 갈라놓는 장벽은 무엇일까. 만년설 뒤덮인 와이오밍 주의 수려한 자연 경관 보다 아름다운 두 사내의 사랑. 이런 두 사내의 사랑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묻고 싶다. 과연 당신은 두 사내가 알고 있는 사랑을 해본 적은 있느냐고. 위대영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6-08 | hrights | 조회: 348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