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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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학교 역사문화컨텐츠학과 교수), 이찬수(전 보훈교육연구원장),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장발장은행장)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우울합니다. 평택 대추리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참담하다 못해 슬프기 짝이 없습니다. 순박한 농민들을 상대로 헬기가 뜨고 순식간에 군인들이 철조망을 두릅니다. 그 전의 경찰들과 맞닥뜨렸던 상황과는 또 다릅니다. 그 막강한 위세에 힘없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속절없습니다. 일부 지원나간 소수의 사람들에게도 역부족인 현실입니다. 그렇게 이 땅의 중심부엔 새로운, 드넓은 군사기지가 태동하려 안간힘을 씁니다. 그것이 오십여 년 이상 공포와 경원의 대상이었던 ‘북한’을 경계하기 위함이 아니라 ‘중국’을 겨냥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안보를 책임지겠다고 광분하는 그 숱한 매체들의 은근슬쩍 눈감음을 바탕으로 내부의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대로 국론분열이 심각한 상황인데도 그들은 원인 결과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합니다. 오직 ‘제국’ 미국의 이익에 잘 복무할 수 있으면 그만인 듯 합니다. 이 순간 일제시대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요? 윤봉길의사나 안중근의사가 별 사람인가요? 자주독립을 희망한 사람 아니던가요? 친일청산 작업이 한창인 이 때에 뜬금없는 이야기인지 모르겠으나 지금은 친일청산 작업보다 더 중요한 게 친미(사대 매국)현상을 발본색원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제대로 싸우는 일이 필요하겠습니다. 그런 일은 촛불 하나 밝히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됩니다.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가능성은 싹을 틔운다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온통 패배의식에 젖어있을 때 8.15는 우리에게 성큼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8.15는 우리에게 온전한 해방이 아니었습니다. 준비한 자에게 상급은 온다고 믿습니다. 온전한 해방, 온전한 평화, 온전한 자유를 위해 우리 모두가 기울여야 할 일은 아직 많습니다. 세상과의 연대를 비롯하여.. 이제 다시 시작입니다. 내일을 위하여! 만인의 행복을 꿈꿀 수 있는 세상을 위하여!   홍승권 위원은 현재 삼인출판사 부사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07 | hrights | 조회: 763 | 추천: 0
지난 주말 금강산에 다녀왔다. 백두산에는 가 본 적이 있지만 금강산은 처음이었다.(운이 좋아 백두산은 북한 쪽과 중국 쪽 모두를 가봤다) 봄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쬐는 금강산은 마치 무릉도원 같았다. 버스로 이동할 때 먼발치에서 보이는 북녘 주민들의 남루한 모습은 그저 하나의 풍경으로만 느껴졌다. 2년 전, 처음 평양에 갔을 때처럼 가슴을 누르는 고통은 없었다. 그때는 음식을 남길 때도 죄스러웠는데…. 일부러 모른 척 한 것인지, 세월이 흘러 심드렁해진 것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금강산에 간 것이 아니라, 조금 ‘불편한’ 설악산에 간 것처럼 느껴졌다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느낀 것은 비행기를 타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데, 비무장지대를 관통해-휴전선을 뚫고-북으로 넘어간 것인데, 이리 무덤덤할 수 있다니. 무심해진 것은 나만이 아닌 듯 했다. 마을이든 산이든 어딜 가나 눈을 찌르는 붉은 색 ‘선전문구’에 대해 남쪽 관광객들은 무척 관대했다. 현대아산 소속의 가이드는 잘 보이지 않는 선전문구까지 일부러 가리키며 내용(‘위대한 수령 김일성 주석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와 같은)까지 친절히 주워섬기는 것이었다. 남쪽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그것은 선전문구가 아니라 일종의 유물 혹은 관광 상품이 된 것 같았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김일성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바르르 떨던 우리나라 사람들이었는데. 이것저것 하지 말라는 것이 많은 것은 2년 전과 다름없었다. 먼저 버스로 이동 중 촬영금지. 북한 당국은 카메라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입국 심사 때 카메라는 별도로 꺼내 심사를 받아야 했고, 일정 규모 이상의 줌 기능이 있는 카메라는 갖고 들어갈 수 없다. 관광객이 이동하는 길가에는 군인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서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버스 안에서 사진을 찍는지를 감시하려는 것이었다. 예전엔 200m 간격으로 촘촘히 서있었는데 요즘엔 비교적 헐거워진 것이라고 했다.   바위에 새겨진 선전문구 사진 -  이재성(인권연대 운영위원)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벌금’이었다. 입국할 때 나눠주는 방문증(관광증)이 있는데, 이 카드를 구기거나 볼펜 자국을 내거나 하면 10달러의 벌금을 내야했다. 카드에 기재된 이름이 틀려서 고치려다 벌금을 문 사람도 있다고 했다. 찍은 지 6개월이 넘는 사진을 제출했다 걸려도 10달러, 줌 기능이 좋은 카메라를 갖고 들어가다 걸려도 10달러였다. 등산을 할 때도 가이드를 추월해서 앞으로 나가면 벌금감이라고 했다. 일행 중에는 합법적 ‘삥뜯기’라며 기분 나빠하는 이도 있었고, 이 정도면 ‘애교’라며 기부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주겠다는 이도 있었다. 마지막 날, 해금강에 들렀다 삼일포-어떤 왕이 하루만 놀고 가려고 들렀다가 경치가 너무 좋아 삼일을 머물렀다고 해서 삼일포라고 했다-에 갔을 때였다. 앞서가던 동아일보 기자가 내 신분을 말했는지, 북쪽 안내원이 아는 체를 했다. ‘기지’ 바지에 운동화, 점퍼를 입은 전형적인 북쪽 남자였다.    “한겨레신문사에 계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한겨레신문은 우리도 잘 알고 있습네다. 진보적인 신문이라고 들었습네다. 우리 수령님(인지 장군님인지 잘 안들렸다)을 칭송하는 신문이라고 들었습네다.”  잘 안 들린다고 했더니 같은 내용을 다시 한번 말해줬다.  “아, 네. 칭송은 아니구요, 북쪽을 바로 보자는 거죠. 그동안 너무 왜곡된 시각으로만 보아왔으니, 객관적으로 바라보자, 그런 시각을 갖고 있는 겁니다.”  대화가 한 번 삐끗했다. 북쪽 안내원이 다시 물었다.  “금강산에는 처음이십네까?”  “예 금강산은 처음이구요, 평양에 한 번 가본 일이 있어요. 백두산도 가봤구요.”  “그럼 금수산기념궁전은 가보셨습니까? 우리 수령님 계시는.”  “아니요, 거긴 못 가봤고, 만경대는 가봤습니다.”  “아 그렇습네까? 만경대 고향집에 가보신 소감이 어땠습니까?”  “뭐, 그냥 시골집이죠. 저희한테는 그렇죠.”  안내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뭔가 기분 좋은 말을 기대했을 그에게는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원래 속에 없는 말은 잘 못하는 성미인지라.  대화는 거기서 그쳤다. 일행들이 북쪽의 여자 안내원을 졸라 노래를 하게 한 것이다. 올망졸망 예쁘게 생겼는데, 두 볼이 발그레해지며 쑥스러워하면서도 노래를 잘도 했다. 버스에서 내리기 전에 가이드가 “정상에 올라가면 반드시 안내원에게 노래를 청해서 듣고 오라”고 했는데, 그게 바로 이 사람을 두고 한 말이었다. 정상에 올라가보니 바로 이 안내원이 올라와 있는 게 아닌가. 그는 거기서도 관광객들을 상대로 노래를 불러주었다.  노래를 듣고 내려가는데 뒤에서 이 안내원이 나를 불러 세웠다.  “한겨레 기자 선생, 저랑 같이 가지 왜 먼저 갑네까?”  “아 그럴까요? 지금 저한테 데이트 신청하는 겁니까?”   농담은 묵살되고 질문이 돌아왔다.  “금강산은 처음이십네까?”  “예 금강산은 처음이구요, 평양에 한 번 가본 일이 있어요. 백두산도 가봤구요.”  “평양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입네까?”  “넓은 들판이요. 넓어서 거칠 게 없으니 좋더라구요.”  “아니 뭐 가본 데가 있을 거 아닙니까?”  “만경대도 가보고 개선문도 가봤습니다.”  “만경대를 보신 소감이 어땠습네까?”  앞의 대화와 패턴이 비슷해서 살짝 짜증이 났다. 똑같이 대답했다.  “뭐, 그냥 시골집이죠. 저희한테는 뭐 그렇죠.”  “만경대에서 xx(잘 모르는 단어였다)를 보셨습니까?”  “아니요 기억이 안 나네요.”  역시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때 다른 누군가 끼어들어 대화는 잠시 중단됐다. 그 사람이 xx를 안다고 하자, 안내원이 나를 타박했다.  “아니 한겨레신문 기자가 만경대에서 아무 감흥이 없었습니까? 강정구 교수께서 만경대에 가서 ‘만경대 정신 이어받아 조국통일 이룩하자’고 썼다가 구속이 되셨는데, 기자 선생은 그럼 강 교수와 다르다는 겁니까? 진보적인 신문이라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겁니까?”  “그럼요 다르지요. 진보라고 해서 다 같은 게 아닙니다. 같다 다르다를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나는 강정구 교수의 구속에 반대한다. 그의 사상의 자유를 존중하지만 그와 생각이 같지는 않다. 대충 그런 요지의 얘기를 했던 것 같다. 대화는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에 대한 이야기로도 이어졌다. 그는 조선일보가 밉다고 했고, 중앙일보에 대해서는 신뢰감을 표시했다. 나는 중앙일보의 한계에 대해 말했다. 그러다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지점에 다다르자 그는 “아까 심한 말 해서 미안하다”며 “우리 힘 모아 조국 통일을 위해 힘쓰자”고 말했다. 나는 “다 이해한다”고 했다. 버스에 올라타자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그들이 나에게 ‘전도’를 하려고 했던 것일까? 아니면 같은 ‘종교’임을 확인하고 위로받고 싶어 했던 것일까? 과학적 사회주의는 어떻게 해서 (맹신이라는 의미의) 종교가 되었을까? 세계 사회주의 국가 중에서 사회주의를 이처럼 종교로 만든 사례가 있던가. 마오쩌둥의 중국이든 호치민의 베트남이든 카스트로의 쿠바든 내가 아는 그 어떤 사회주의 국가도 권력을 세습하거나 종교화하지는 않았다. 왜 북한에서는 귤이 탱자가 되었을까? 맹목성은 우리 민족의 특질인가? 남쪽에서도 마찬가지다. 재벌도 세습하고, 교회도 세습하는 나라. 역시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정도로 ‘광신적인’, 그리고 격렬한 반공투사로서의 한국의 기독교. 북한의 사회주의와 남한의 기독교는 동전의 양면이 아닐까? 서북청년단이 남한 기독교의 뿌리라지만, 어쩜 그렇게 극과 극으로 닮을 수 있는지. 몰아의 경지는 아름다울 수 있지만 이성을 잃는다는 점에서 신뢰할 수 없다. 절대주의는 힘이 있지만 배타적이라는 점에서 위험하다. 최근 조선일보는 탈북자 출신이 만든 <요덕스토리>라는 뮤지컬을 수 십 차례에 걸쳐 대서특필해 억지 흥행을 시킨 바 있다. 그 뮤지컬을 보면서 나는 착잡했다. 뮤지컬을 만든 탈북자들이나 그걸 꼭 봐야한다며 대서특필하는 조선일보의 유아적 비명이 안쓰러웠기 때문이다. 북쪽의 인권현실을 모르지 않지만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그리 간단치 않다. 폭로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아니, 폭로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북쪽의 현실을 생각하면 가슴 아프고 안쓰럽지만 남북관계나 동아시아의 세력관계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당장 쳐들어가서 북쪽 인민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일부 극우파들의 주장을 논외로 한다면, 대체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죽음의 고비를 넘어가며 탈출을 감행한 탈북자들의 절박감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좀 더 신중해져야 하는 것 아닌지. 금강산이든 개성공단이든, 더디고 어렵지만, 그것이 통일로 가는 유일한 접근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등산할 때 가이드 신경 쓰지 않고 내 속도에 맞춰 가고도 싶고, 북쪽 주민들과 어울려 사진도 마음껏 찍고 싶지만 첫 술에 배부를 수 있으랴.   뮤지컬 '요덕스토리'의 한 장면 사진 출처- 한겨레  사회주의가 한번 흥했다 망했고, 세계를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자본주의에 의해 각종 부작용이 생기고 있는 게 요즘 현실이다. 사이클로 치면 몇 바퀴는 돈 상황인데, 우리의 지적 수준은 60년 전이나 다를 바가 없다. 한국전쟁 같은 비극을 또다시 불러 죽고 죽이는 칼부림을 해야 직성이 풀리겠는가.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자에게는 미래가 없다.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중입니다.
2017-06-01 | hrights | 조회: 742 | 추천: 0
5월 말로 예정된 지방선거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선거에 나선 후보자들은 나름대로의 색깔을 드러내고, 시민들은 또다시 지역사회의 아름다운 미래를 꿈꾼다. 선거는 아름다운 제도이다. 정치인들은 구체적인 권리 주체로서의 시민을 찾아 거리를 헤맨다. 자신만의 청사(廳舍) 안에서 안주하던 정치인들은 선거가 가까워지면, 누가 자기에게 그 권한을 주었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때만큼은 정치인들도, 재산의 과소나 나이나 남녀 여부와는 무관하게, 1명의 시민에게 1명분의 선거권이 있다는 점을 절실하게 깨닫는다. 시민들 역시 과연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자가 이번 선거에서 이길 수 있을지 여부를 고민하고, 친지들에게 그 후보자의 장점을 자랑하기도 한다.   사진 출처 - 경기도 수원 도(道)선거관리위원회 사무실에 선관위 직원들이 5.31 지방선거 포스터를 점검하고 있다.  /신영근(수원=연합뉴스) 사실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 사회는 극심한 분열을 경험하고 있다. ILO 구제금융이 경제적 분열(양극화)을 가져왔다면, 참여정부의 집권은 일종의 이념적 분열을 초래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현재의 집권세력이 야당 세력과 별 반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하나, 제1야당이나 이를 옹호하는 사람들 스스로는 참여정부와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아마도 다음 번 대통령선거는 어느 때보다도 치열하게 다투어질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참여정부를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조차도 현 집권세력이 정부를 구성할 권한을 가지고 그들이 자신을 통치한다는 점을 부정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지난 번 대통령 선거에서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은 절치부심하며 미래의 대통령 선거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 임기 중 탄핵과 같은 합법적인 절차 없이는 현재의 대통령을 부정하거나 현재의 정부가 아닌 다른 정부로부터 통치를 받겠다는 주장을 하지는 못한다. 최소한 절반 이상의 시민들이 현 집권세력에 비우호적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로지 다음 대통령 선거만을 기다리면서 술집에서 누군가를 욕하는 정도의 행동만을 하고 있다. 내가 흥미로워 하는 점을 간단하게 얘기하면, 정부의 선택과 관련하여 어느 누구도 이를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주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사회를 상상해 보자. 이 사회에는 여러 개의 정부가 있다. 삼성 그룹이나 현대 그룹과 같은 대규모 기업집단이 정부를 만들어 운영하기도 하고, 혹은 몇몇의 시민들이 조합을 구성하고 정부를 만들어 운영하기도 한다. 시민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정부를 택하여 그 세무서에 세금을 납부한다. 정부들은 좀 더 많은 시민을 확보하기 위하여 새로 들어오는 사람에게 세금을 할인하고, 다른 정부보다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려고 노력한다. 시민들은 자신이 속한 정부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다른 정부로 옮길 따름이지 선거를 기다리며 마음을 졸이지는 않는다. 이 사회에서 시민들은 가장 저렴한 세금을 내며 가장 좋은 서비스를 받으며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비이성적이고 단순한 이미지에 의하여 그 결과가 좌우되는 선거가 아니라 이성적이고 경제적인 판단에 따라 자신의 정부를 선택한다. 따라서 정부 선택의 문제에서는 다른 사람들과의 갈등도 없다. 생각이 다른 사람은 그저 다른 정부를 선택하면 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러한 정부 시스템은 시민들에게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 가능하도록 하는 모델이다.   사진 출처 - 국민일보 그런데도 우리는 이와 같은 합리적인 정부 모델을 운용하지는 않는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미치광이로 취급될 것이다. 그 이유는 한 나라의 통치 시스템을 시장에 맡길 수 없기 때문이다. 선거가 정부 선택에 있어서 가장 이상적인 제도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가장 민주적인 제도라는 점에는 모두 동의하기 때문이다. 즉 정부의 정당성은 민주적 선거제도를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다. 이 점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우리 주위에는 시장을 통해서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 무수히 많다. 스크린 쿼터도 그 중 하나이다. 우리는 문화가 시장에서 거래되는 재화나 용역과 같이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한국의 말이나 글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한국에서의 공용어가 한글이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 한국의 언어를 시장에 맡겨 결정하자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문화와 언어가 시장에 의하여 좌우될 수 없다면, 사람에 관한 문제는 어떨까? 사람의 삶과 존엄성을 시장에만 맡겨서는 안 된다는 것 역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비정규직 문제는 사람과 관련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을 시장에만 맡겨서는 안 된다. 요즈음 비정규직 문제에 대하여 여러 해법이 나오고, 그와 관련하여 여러 입장이 전해지고 있다. 부족한 지식과 식견 탓에 나로서는 어떤 것이 좋은 해법인지를 판단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그 해법들을 살펴볼 때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그 사람들을 시장에 넘겨서는 안 된다는 점만은 분명히 알고 있다. 선거를 통하여 정부를 선택하는 것이 당연하다면, 이것 역시 당연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도재형 위원은 현재 강원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01 | hrights | 조회: 607 | 추천: 0
#1 최근 미국 소송변호사들을 위해 쓰여진 「소송 기법」(Trial Techniques, Thomas A. Mauer)이라는 책을 틈틈이 읽고 있다.  원래 관심 있던 분야였고, 우리나라도 내년 정도부터 배심제와 참심제가 혼합된 국민참여형 재판을 시작할 계획이라고 하여 읽어 둘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이 흥미로운 점은 서론이 끝나자마자 배심원을 어떻게 설득하는지의 문제(Psychology of Persuasion)와 배심원을 선정하는 방법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는 점이다.  예를 들어 일반인이 집중력을 가질 수 있는 시간은 15분에서 20분 정도에 불과하므로 그 시간을 넘겨서 장황한 주장을 하지 말라든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규 교육이 끝난 후에는 다시 학교교육을 경험하고 싶어하지 않으므로, 소송과정에서 변호사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듯한 분위기로 변론을 진행하면 거부감을 일으킨다는 것 같은 구체적인 지침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 밖에 법정에서 변호사의 위치, 시선처리, 옷차림, 제스처까지 조언한다. 이처럼 고난도의 테크닉이 필요하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법정에서 배심원들을 상대로 직접 변론을 하는 변호사는 다른 변호사들과는 ‘노는 물이 다른’ 변호사로 평가된다고 한다. 이런 노하우들 때문인지 DNA 검사결과 아내를 살해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0.1%에 불과하다던 O.J.심슨도 스타 변호사들을 앞세워 무죄를 받아낼 수 있었다.  O.J 심슨 사건을 예로 들며 배심제 도입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일부 있는 것 같다.  배심제가 “무전유죄, 유전무죄” 현상을 심화시킬 수도 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미국에서도 O.J 심슨 사건의 부정의한 결론은 배심원제도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미국의 고질적인 인종갈등에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다(배심원 12명 중 8명이 흑인이었고, 이들은 담당 형사가 인종차별주의자였다는 변호사들의 주장에 설득된 것으로 분석되었다).  우리사회에서 걱정해야 할 것 역시 배심제 도입 자체보다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사회양극화 현상 아닐까?   아내를 살인한 협의로 수차례 재판을 받았던 전 미식 축구스타인 O J 심슨 #2 법원에 갈 때 변호사 배지를 달고 가면 좋은 점이 많다.  금속탐지기를 통과할 때, 가방속을 보여달라는 말을 듣지 않아도 되고, 준비절차실 등을 출입하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탈 때 신분증을 제시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나 같은 경우는 양복을 바꿔 입을 때마다 배지를 바꿔 달기 귀찮아서 배지 없이 법원에 가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래도 특별한 문제는 없다.  서류 가방을 들고 당당히 통과하면 된다.  법원에 근무하는 분들은 대체로 변호사와 일반인을 쉽게 구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성변호사의 경우는 사정이 달라진다.  배지를 달지 않으면 신분증을 제시해 달라는 요구를 자주 받게 된다고 한다.  최근 여성 법조인 수가 증가하였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여성들은 법조계에서 마이너리티인 것이다.  미국에서는 어떨까.  관심이 있어 몇 가지 자료를 찾아본 적이 있었는데, 그 내용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무더운 여름 날 냉방장치가 제대로 가동되지 않은 형사법정은 매우 더웠다.  그 때 검사가 판사에게 재킷을 벗고 진행해도 되는지 물었다.  판사는 이를 허가했다.  바로 후 변호사(여성이었음)도 같은 질문을 하였다.  판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옷을 전부 벗으면 몰라도 윗옷만 벗는 것은 허용할 수 없다.” 그렇게 오래 전 일도 아니다 1980년대 미국에서 실제 있었던 일이다. 주목할 점은 여성들 외에 다른 인종의 변호사들(흑인과 히스패닉)에 대한 차별도 광범위하게 존재해 왔다는 점이다.  미국은 1990년대 초반부터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관련 연구를 진행하여 상당한 개선책을 제시하였다.  우리는 아직까지 이러한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지는 않았지만 가까운 시일 내로 진지한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한다.     #3 오늘의 마지막 이야기.  스텔라 상(Stella Awards)에 대해서 알고 계신지? 1992년 맥도널드에서 커피를 구입한 스텔라 할머니(당시 79세)는 실수로 커피를 무릎에 쏟아 화상을 입게 되었다.  우리나라 같았으면 소송을 할 생각을 못했을 텐데, 스텔라 할머니는 맥도널드가 커피를 비합리적으로 뜨겁게 만들어 화상을 입은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손해배상청구를 제기하였다.  결과는 스텔라 할머니의 승소, 그것도 우리 돈으로 30억원에 가까운 돈(290만달러)을 받게 되었다.  스텔라 상은 미국에서 제기된 소송 중 이처럼 무모한(또는 무모해 보이는) 소송을 선정하여 주는 상이다.  작년 3위에 선정된 사건을 보니 은행 거래시 부과된 수수료 때문에 수면부족과 정신적 스트레스에 시달렸다면서 소송을 제기한 것도 있다.  이러한 점들만 바라본다면 미국 사법시스템이 불합리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국민이 사법시스템의 운영에 직접 참여하고, 감시할 수 있는 방안이 제도적으로 마련되어 있다는 점은 수 많은 약점들이 있더라도 우리가 수용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 한다.  마침 이 글을 쓰고 있는 4월 12일은 「국민의 형사재판 참여에 관한 법률」에 따른 모의재판을 실시되는 날이다.  철저히 준비하고 시행되어 국민과 함께 하는 사법제도가 빨리 자리잡게 되기를 바란다.   정 원 위원은 법무법인 지평 소속의 변호사로 활동중입니다.
2017-06-01 | hrights | 조회: 654 | 추천: 0
학교에서는 사회가 발전하면서 나타나는 가족의 해체현상을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예전에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자녀의 양육과 교육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던 부모의 모습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최근 결손가정의 모습은 부모 모두가 아이를 돌보지 않는 관계로 조부모와 친척이 아이의 보호자가 되는 일이 종종 있다. 교사들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환경에 있는 아이들을 지도하기가 가장 어렵다. 3월 새 학기가 시작 되면서 2, 3학년의 여러 학급에는 학부모들이 가출로 인해 학교를 결석하는 아이들, 한 아이를 여러 아이들이 집단적으로 구타하는 일, 도벽으로 인해 인근의 경찰서에서 조사를 위해 학교를 방문하는 일이 종종 발생하고 있다. 또한 아이들이 집의 컴퓨터 기능이 낮아서 학교의 컴퓨터 부품을 가져가려고 늦은 오후에 학교 창문을 통해 몰래 들어와서 컴퓨터를 만지다가 교사들이 알게 되어 처벌 하는 일도 일어나고 있다. 매스컴에서는 연일 청소년의 가출과 학교폭력, 아이들의 범죄행위의 증가 등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이러한 일들이 발생되는 연령이 낮아지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도 내가 10여 년 전 고등학교에서 근무하면서 보았던 일들이 지금은 중학교와 초등학교 5, 6학년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다 아이들의 문제가 발생하게 되면 학교에서는 학부모에게 연락을 하고 아이의 문제를 부모와 함께 해결하도록 노력을 한다. 그런데 학부모가 아이의 문제에 대해 무심한 모습을 보이거나, 아이 때문에 너무 지쳤다며 학교에서 알아서 처리를 하라고 하면서 연락을 피하기도 한다. 보호자가 없는 경우에 교사들은 더욱더 난감하다. 이러한 아이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지원을 위한 후원회와 지역사회 협조, 학습을 도와줄 봉사단체와의 연계 등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2, 3년 전 일부학교에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시적으로 사회복지사를 학교에 상주시키면서 교사들과 함께 여러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는 아이들과 결손가정의 아이들에게 후원기업을 연계해 아이들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주기도 했다. 또 방과 후 방치되는 아이들에게 대학생 봉사 단체들을 연결해주고 공부방을 통해 방과 후 활동을 지원해 주기도 했다. 이러한 시도는 결손가정의 아이들에게 경제적으로나 교육적으로, 또 일탈행위를 방지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매우 긍정적인 평가가 있었다. 그런데 학교 운영의 모범이 되었던 이러한 사례가 예산이 없다는 이유로 곧 없어진다고 한다.     가출과 학생폭력, 학생범죄는 가정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이에 속하는 많은 아이들이 가정에서 부모의 맞벌이로 방치되거나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아 친척이나 조부모에 의해 양육되고 있는 사례가 많다. 아이가 우발적으로 가출이나 범죄를 행했을 때 이를 가르치고 이끌어 줄 수 있는 가정이 없다는 것이 재발을 반복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런 경우에 속해 있는 아이들에게 방과 후에는 공부방에서 밀린 학업을 할 수 있도록 하고, 가정의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에게는 위로해 줄 수 있는 위탁가정을 마련해 주는 것은 아이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주는 데 매우 큰 힘이 된다. 따라서 예산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꼭 필요한 제도와 정책이 사라진다는 것은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 사회 미래의 자산이 될 아이들을 위해 보다 많은 투자를 해도 아깝지 않을 상황에 예산을 아끼겠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로 보인다. 비단 사회의 미래까지 생각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미 지금의 아이들은 그 자체로 인권의 주체이고, 떳떳하게 아이로서 사회를 살아가는데 불편함이 없이 사회가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보호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인권을 위해 밝고 따뜻한 학교를 위해, 나아가 보다 밝은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해서도 이러한 아이들을 지원할 수 있는 예산을 마련하는데 가정과 학교, 사회 전체가 머리를 모아야 한다. 김영미 위원은 현재 불광중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01 | hrights | 조회: 647 | 추천: 0
지난 21일 둘째 아이가 다니고 있는 S초등학교의 제6기 학교운영위원회 학부모위원 선거가 있었다. 선거를 하는 이유는 5명의 위원을 선출하는데 7명이 출마했기 때문이다. 학부모위원 출마자가 많아 선거를 실시하는 것은 학교운영에 대하여 그 만큼의 열의가 있는 것이니 반가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 선거는 합법을 가장한 내용적인 불법이다. 제5기 위원들의 임기가 끝나는 3월 31일 열흘 전에 새로운 위원을 선출한 것은 합법이나 그 선거를 치르기 위한 현실적 진행과정은 다분히 비민주적이고 의도적이며 배제하고 싶은 출마자에 대한 조직적 공작이기 때문이다. 3월이면 모든 학교에서 학부모 총회를 실시한다. 그리고 학교운영위원선거가 있는 해에는 통상적으로 학부모총회와 학교운영위원 선거를 같은 날 치른다. 학부모라면 누구든 알겠지만 학교에 방문하는 일이 심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쉬운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S초등학교는 21일 학운위선거를 실시하고 22일 학부모 총회를 실시한다고 공지하였다. 즉 연 이틀 연거푸 학교를 방문하라는 것이다. 학교운영위원회의 중요성으로 볼 때 원칙적으로는 매일이라도 학교에 와서 학부모로서의 일정한 의무를 이행해야 옳을 것이다.   학교 운영위원회의 모습 사진출처 - 한겨레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틀 연이어 학교에 와야한다면 학부모 총회를 선택하여 방문하는 학부모가 대부분일 것이라는 것은 보지 않아도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런 염려속에서 오전 10시 30분에 유세 장소에 도착해보니 예상되는 우려가 정확했음을 알 수 있었다. 출마자 7명중 6명이 왔고 선관위원4명과 학교에서 교감, 교무부장, 서무부장이 자리하고 유세를 들어야할 학부모는 정작 7여명이 자리하고 있었다. 선거권자들이 앉을 의자도 두어줄 놓여져 있어 그야말로 썰렁함 그 자체였다. 유세순서를 정하고 다섯 번째로 준비한 유세문을 낭독할 수 있었지만 유세 순서 마지막 한사람을 남겨놓은 시간에도 18명이 자리할 뿐이었다. 이후 오후 2시까지 학부모가 편리한 시각에 방문하여 투표를 진행한다고 하였다. 투표를 하는 사람들은 무슨 기준으로 후보를 선택하여 투표에 임할까? 학교에서는 직접 투표를 위한 영상자료나 출마자의 의견을 담은 유인물 등 그 어떤 자료도 준비하지 않았고 오히려 주도적으로 출마자의 의견이 유권자에게 전달되는 것을 차단하였다. 오로지 출마자의 개인적 관계만으로 선택하도록 방조하고 오히려 유도하였으며 그것을 위해 학교 임의단체장들과 임원들을 출마토록한 것이다. 이해관계가 있는 소수자들은 얼마든지 조직할 수 있는 것이다. 출마자들의 유세를 듣는 권리를 박탈하여 유권자들의 판단을 흐려 투표가 진행된 것이다. 3시가 넘어 투표결과가 나왔다는 서무부장의 연락을 받았다. 900여명 학생수에 유권자 수는 297명이고 오후 2시까지 진행하여 150여명이 투표에 참가했다는 것과 단기명으로 써야하는데 연기명을 써서 무효표가 2표이고 떨어진 두 사람은 민족작가협회 소속 시인과 전교조 소속 교사인 본인이라고.. 그리고 8표, 7표를 득했노라고... 학교의 장은 학교운영위원회의 바른 구성을 위해 되도록 많은 학부모가 참여토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한다. 지난 5기 학교운영위원회 선거 때에도 학부모위원 등록에서부터 등록 시간 운운하며 등록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아 물의를 일으키더니 급기야는 이런 교묘한 방법을 사용하여 특정한 사람을 배제하다니 분노가 앞선다. 교육의 주체인 학부모와 교사, 지역 인사들이 모여 민주적인 학교운영에 대하여 논의하고 결정하라는 학교운영위원회의 원래 취지는 이런 관리자들에 의해 얼마든지 훼손할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공공연한 비밀로 인지하고 있는 것이 있다. 학교운영위원 무투표 당선의 대부분은 학교 입맛에 맞는 사람을 학교에서 인선하여 등록하도록 부탁하고 학부모는 또 부탁 받은 사람으로서의 자존심(?)을 세우며 수락한다는 것을... 그리고 학교의 권유가 없었던 사람이 등록 했을 시에는 이런 식의 보이코트가 조직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학교의 민주적 운영을 위해 만든 학교운영위원회지만 그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학교에 의해 얼마든지 조정할 수 있는 것도 현실이다. 학교운영위원회구성 및 운영의 바른 길로의 행보는 앞으로도 길고도 먼 듯싶다. 오늘의 사례가 그 길로 가는 걸음을 좀더 앞당기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지나친 기대일까?   황미선 위원은 현재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01 | hrights | 조회: 845 | 추천: 0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이 있습니다.  흔히 잘못된 행동이나 사람에 대해 비꼬는 말로 쓰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땀 흘려 수고한 만큼의 결과를 값지게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물질적인 결과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를 향한 작은 미소로도 서로가 행복한 마음을 갖게 하기 때문입니다. 매사에 선하고 너그러운 마음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고, 후하게 대접할 줄 아는 미덕은 감사함을 낳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막막한 순간에 누군가의 도움을 입은 사람이라면 그 순간의 기쁨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도 남에게 좋은 일을 하고 마음의 뿌듯함과 행복을 맞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은 예수님의 ‘평화를 빌어주라’(루카 10, 5-6)는 말씀과도 일맥상통한다고 생각됩니다. 상대가 잘되고 평안하도록 복을 빌어주는 마음만큼 그 선한 기운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고, 반대로 저주하고 미워하는 만큼 그 어두운 감정에 사로잡혀 나를 잘못된 길로 빠지게 합니다. 그 어두운 감정이 우리가 물리쳐야 할 큰 유혹입니다. 유혹은 우리 안의 선한 마음을 삐뚤어지도록 꾀는 악이기에 반드시 물리쳐야 합니다. 특히 유혹은 사람을 거짓되게 하고 인색하게 만드는 주범입니다. 우리 주변에 유혹에 빠진 고위 공직자들이 손가락질 받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사람들에게 봉사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있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거짓을 일삼습니다. 성희롱과 성폭력에 거론되며 충격을 주는 경찰, 국회의원 뿐만 아니라, 신중하지 못한 총리의 골프행각을 봐도 그들이 자신의 즐거움만을 추구하고 다른 이들의 행복과 어려움은 조금도 고려치 않는 인색함의 극치를 달리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슬픈 일입니다. 성서에는 어려서부터 하느님의 계명을 잘 지켜온 사람이 ‘자신의 것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슬퍼하며 돌아간 이야기가 나옵니다(마르 10, 17-27).   외국인 노동자 자녀를 돌보고 있는 모습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사람과 나누는 것에 울상이 되어 버린 것은 지나친 인색함 때문입니다. 다른 이의 어려움과 행복에 눈감아 버리고 자신의 영광과 즐거움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유혹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이들의 인색함을 책망하기 전에 우리 자신은 얼마나 가진 것을 잘 나누고 있는지, 다른 이의 행복을 위해 봉사의 활동을 하고 있는지 반성해 보면 사실 부끄러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순절(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시기) 동안 단식을 합니다. 단식이라는 극기의 삶을 통해 예수님의 고통에 동참하는 의미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단식을 통해 이웃의 배고픔과 어려움을 함께 하겠다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야 58, 6-7) 하시며, 우리가 행하는 단식조차도 어려운 이들에게 향하기를 바라십니다. 이 사랑의 마음이 모든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힘입니다. 그렇지만 말이나 생각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되지 않으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일예로, 추위에 떨고 있는 한 아이가 있습니다. 그 곁을 지나가던 사람이 너무 불쌍해 보여 아이에게 다가와서 말합니다. “이렇게 추위에 떨면 감기 걸린단다. 몸을 따뜻하게 하고, 음식도 잘 먹고, 건강하게 해야 해요!” 그는 뿌듯한 마음으로 돌아갑니다. 어느 때보다도 친절하게, 자식을 키우는 사람으로서 애정을 가지고 말했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에 흡족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흔히 범하는 어리석음입니다. 말만 번지르한 사람. 사회 안전망 구축에 대해 말만하는 사람. 그들은 자신의 것은 조금도 내어 놓지 않습니다.   파키스탄 지진피해지역에서 구호활동을 펼치기 위해 국제구호개발기구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이 인천공항에서 의약품 상자들과 함께 출국 수속을 하고 있는 모습 /진성철/사회/ 2005.10.13        사진출처 - 연합뉴스                                                                              노대통령의 아프리카 순방동안 아프리카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합니다. 그 약속이 말이 아닌 참된 실천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지난번 스나미 때나 필리핀의 산사태 등 가난한 나라들의 어려운 상황에서 구호활동에 동참한 우리나라를 보고 국제구호단체들이 감탄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도움을 받던 나라가 도움을 주는 나라로 바뀌었으니 자신들이 행하는 ‘가난한 나라의 구호활동’에 자부심이 느껴지고 보람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들은 마음속으로 깊이 ‘뿌린 대로 거두는’ 행복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 사회가 사회 안전망의 구축을 위해, 공동선을 위해, 좋은 제도와 법을 많이 뿌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개개인은 좋은 결실이 얻어지도록 남을 위한 배려와 축복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뿌린 대로 풍성한 결실을 거두는 사회’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허윤진 위원은 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01 | hrights | 조회: 761 | 추천: 0
가슴이 울렁거린다. 변호사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처럼 별로 없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을 못했었다. 평택 대추분교 정문 앞 미군기지 확장을 위한 법원의 강제집행의 현장에서 몸서리치도록 나는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전개되는 합법을 가장한 폭력! 빼앗는 자들의 거대한 음모와 횡포가 평택 주민들의 파란과 곡절 많은 삶의 한복판을 뒤덮고 있었다. 침략과 지배의 역사를 떠올린다. 눈길을 멀리 돌린다. 온통 들로 가득한 평화의 땅 평택. 그 평택의 수평선을 넘어 침략의 기지가 들이닥치고 있다. 조상들이 두고두고 피땀으로 싸워 일구어 놓은 생명의 땅 평택은 지금 홀로 반제 반침략의 역사와 대면하고 있다. 평택 팽성읍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이 미군기지의 확장을 저지하기 위해 죽기 살기로 온 몸을 던져 막아 나서는 거기에 외국군대가 주둔하는 분단 현실의 총체적 모순구조가 녹아나 있다. 한반도와 동북아 그리고 세계평화의 걸림돌이요, 세계 제1의 악의 축 국가의 음흉한 촉수가 평화의 땅, 생명의 땅, 투쟁의 땅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지난 6일 오전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 대추분교에서 국방부가 팽택지원 집달관과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미군기지 이전에 반대해 학교에서 살고 있는 주민들을 강제로 내보내려고 절단기로 학교 철망과 쇠사슬을 자르자 문정현 신부(왼쪽)와 인권단체 회원이 기둥을 부둥켜안고 막고 있다.  -사진출처 : 한겨레   필사즉생의 각오가 애달프다. 연약한 촌로들의 외침이 그대로 무겁게 전해진다. 태엽에 감겨 노는 장난감마냥 그저 얌전히들 제국의 역사가 달려온 그 방향대로 그 장대한 침묵의 시간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고 투항하면 그만인 것을 주름살 핀 일그러진 얼굴로 고난의 역사를 불러오고 극복되지 않을 비극의 역사를 찾아 세찬 바람 앞에 촛불을 들고 몸서리들 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비웃는 자들의 두려움이 그대로 전해진다. 평택에 드리운 제국의 마수를 깨뜨리는 촛불의 힘, 제국의 손과 발이 되어 합법을 가장한 폭력을 휘두르는 친미사대 사이비 개혁 정권의 본질을 꿰뚫어 버리는 촌로들의 기상이 평택이 갖는 진정한 참모습이었다. 주한미군 철거가가 울려 퍼지고 정권의 퇴진을 외치는 판을 가르는 싸움터로 치달아가고 있는 역사의 땅이 바로 평택이었다. 고난의 현장에서 역사는 웅대한 투쟁의 삶을 부여하고 있다. 항쟁의 땅에서 반제자주, 반전평화의 정신은 그 폭이 넓어지고 깊이를 더해가고 있었다. 미국의 군사 패권 전략을 실현하는 침략의 발진기지가 되어 한반도의 군사적 대결과 긴장을 고조시키고 동북아 신냉전을 초래하며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미군기지는 더 이상 존재할 이유도 명분도 없다는 피맺힌 진리를 되새기고 있다. 바로 그 곳에서 나는 당혹감이 느껴졌다. 합법의 외피를 쓴 법 집행자들은 내게 침묵과 굴종을 강요하고 있었다. 긴박한 호흡과 짧은 휴식으로 합법을 가장한 폭력에 맞서 싸우는 평택의 투쟁 현장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변호사로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외피 삼아 법 집행자들에 맞서 본들 그들이 강요하는 육중한 침묵과 굴종을 견디어 낼 수 없다. 그렇다. 바로 그 때 내게 솟구쳐 오르는, 역사의 복판을 흘러가는, 모든 외피를 스스로 털어버리고 역사의 땅에서 항쟁의 동지들과 함께 역사와 대면하는 흥분과 설레임이 있었다. 그 눈물겨운 투쟁에서 전달되는 정서를 느끼며 나는 아름다운 참모습을 발견하였고 평택은 또 하나의 비극이 아니라 승리의 역사가 될 것이라고 스스로 다짐했다.   지난 6일 오후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 대추분교 정문에서 평택지원 집달관과 경찰 병력이 대추분교의 강제퇴거를 위해 시민단체 회원들이 막고 있는 정문을 뚫으려 하고 있다./ 신영근    -사진출처: 연합뉴스   합법을 가장한 폭력이 판치는 역사의 땅 평택에서 나는 모든 외피를 털어버리고 역사와 마주서 그 항쟁의 고귀한 땅을 껴안고 승리하는 역사의 전설을 모든 평택 지킴이들과 펼쳐 내보이고 싶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6-01 | hrights | 조회: 745 | 추천: 0
‘최근 성폭력 문제가 사회적으로 커다란 이슈가 되고 있다. 특히 아동에 대한 성폭력과 살인 범죄가 발생한 것을 계기로, 성범죄자들에게 전자팔찌나 신상공개 등의 처벌을 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고 있다. 이런 와중에 한나라당 국회의원 한 분이 신문사 여기자의 가슴을 만진 사건이 폭로되었고, 그는 지금 국회의원직 사퇴를 요구하는 국민들과 정치권의 압력을 받고 있다. ‘해바라기 아동센터’에서 발표한 바에 따르면, 성폭력의 의미는 성기 삽입에 의한 강제적인 성관계만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성기나 유방, 엉덩이나 배 등 신체를 강제로 만지는 것도 성폭력이며, 행동으로 하지 않더라도 신체 부위나 성행위에 대한 말로 기분 나쁜 농담을 하거나 놀리는 것도 성폭력이라고 한다. 성폭력의 의미에 대한 이러한 주장은, 성기 삽입에 의한 강간만을 엄격한 의미의 성폭력으로 규정하고, 그 외의 신체 접촉은 성추행이라고 구분해서 보는 현재의 법률과 언론의 시각을 여성주의적인 관점에서 재고할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현재의 여론을 그대로 적용한다면 그 국회의원은 성폭력을 저지른 것이고, 같은 당 의원이 주장하고 있는 성범죄자에게 전자팔찌를 채우는 법안의 첫째 번 ‘수혜자’는 그 국회의원이 될 듯하다. 한나라당 최연희 의원 사진출처: 노컷뉴스  많은 국민들, 그 중에서도 특히 어린 딸을 가지고 있거나 여성, 또는 약자에 대한 연대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요즈음 신문을 장식하는 이런 일들에 크게 분개하고 있다. 그래서 성범죄자에 대한 대책으로 거론되는 전자팔찌 등의 부가적인 처벌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어느 때보다도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성범죄자 대책에 대해 인권적인 측면에서 반대의사를 밝힌 인권 단체나 국가인권위원회가 일부 국민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 요즈음의 새로운 모습이다. 일부 네티즌들은 범죄자의 인권만이 있고, 성범죄 피해자의 인권은 없느냐고 항변을 한다. 인권은 적극적인 의미의 인권과 소극적인 의미의 인권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전자에는 평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 돈이 없어도 병을 치료받을 수 있는 권리 등이 포함된다면, 후자에는 피의자 신분으로 경찰이나 검찰에서 조사를 받더라도 최소한의 인간적인 품위를 유지할 권리, 설혹 범죄자로 확정 판결을 받아서 수형 생활을 하더라도 개, 돼지 같이 취급받지 않을 권리 등이 속한다고 본다. 성범죄 피해자의 적극적인 인권을 옹호하기 위해서 성범죄자의 소극적인 인권을 어디까지 제한하는 것이 가능하냐는 것이 이번 논란의 요체인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인권이란 한 사람의 가치에 관한 판단이 아니라는 점이다. 소극적인 인권이, 주로 국가권력과 같은 권력에 의해 어느 개인의 생각, 신체가 구속되지 않을 자유를 말한다면, 성범죄자에 대한 지나친 인신구속은 다른 범죄자에 대한 지나친 인신구속으로 확대되고 나아가 불특정 다수 국민들에 대한 인신구속으로 번질 수 있다. 성범죄가 다른 범죄와 달리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게 영원히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지운다는 점에서 성범죄자에 대한 전자팔찌 착용을 옹호하는 분들도 있다. 그런 관점이라면, 학교에서 왕따를 시키는 범죄도 피해자들에게 지울 수 없는 고통을 준다는 점에서 유사하며, 살인에 의해 목숨을 잃은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고통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왕따를 시킨 학생들, 여러 유형의 살인범들에게도 전자팔찌는 유효한가.   사진출처: 노컷뉴스  위중한 범죄를 저질렀던 기결수들을 다시 인신구속하는 보호감호제도가 이중처벌의 위헌적 요소를 지녔던 것처럼, 전자팔찌 같은 제도는 이미 법률적인 처벌을 받은 사람에게 계속되는 인신구속을 부과하는 것이다. 더구나 신체에 개, 돼지 같은 속박을 가하는 전자팔찌를 한 채로 여름에 반팔 옷을 입거나, 공중목욕탕이나 수영장 같은 곳에 갈 수 없는 점을 생각한다면, 현재 지나치게 관대하게 적용되는 성범죄에 대한 처벌을 보다 엄격하게 가하는 것이 차라리 인간적이라고 보인다. 누구나 그의 과거를 알 수 있는 ‘주홍글씨’를 새겨넣으면서까지 그렇게 위험한 인물을 서둘러 사회에 돌려보내야할 이유가 무엇인가 묻고 싶다. 아울러, 성범죄 예방교육의 강화, 성폭력범죄의 비친고죄로의 전환, 성범죄 수사과정에서 피해자들이 성적수치심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대책 등을 우선 시행할 필요가 있다는 어느 네티즌의 의견을 숙고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인권단체와 국가인권위원회는 성범죄 피해자들에 대한 수사관행에 남성중심적인 잘못이 있는지 면밀하게 검토하여, 피해자들이 이중 삼중의 고통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는 일에도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리 의식의 근저에 "살인범보다 강간범이 더 나쁜 놈"이라는 생각이 있다면 그것이 "강간피해자에게 더 혹독한 사회"와는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에 대한 성찰이 함께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어느 네티즌의 발언을 인용한 것이다)   이창엽 위원은 현재 치과 의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01 | hrights | 조회: 629 | 추천: 0
바야흐로 축구의 황금시절이 다가오고 있다. 2002년 광화문 사거리를 가득 메운 붉은 티셔츠 물결이 2006년 여름 다시 돌아올지 모르겠다. 포백이 어떻고, 스리백이 어떻다는 것 정도는 이제 상식적인 얘기가 되고 있다. 한국 사람들은 참으로 머리가 좋다. 현재도 진행 중인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논란이 시작될 무렵 이미 다른 어느 나라 사람보다 생명공학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갖게 된 것처럼 한국 사람들은 이제 현대 축구 전략과 전술을 훤히 꿰뚫고 스스로 감독이 되어 자신만의 대표팀을 구성할 수 있을 정도다.   국가대표 축구경기가 있는 날이면 거리의 음식점, 술집 등에서 경기를 TV중계 한다고 광고문구를 써 붙이는 것은 이미 예삿일이다. 축구가 끝난 다음이면 신문과 방송은 일제히 경기결과를 알리고, 그 분석 기사를 내놓는다. 한국이 이기는 경우에는 희망이 보인다거나, 지칠 줄 모르는 압박이 승리를 견인했다고 하거나, 지는 경우에는 골 결정력이 약하다거나 수비 뒷공간이 자주 열렸다거나 하는 식이다. 한국이 이긴 경우는 다른 어떤 사건보다 축구경기에 대한 보도가 앞선다. 사람들도 경기 결과와 그 분석에 많은 관심을 갖는다.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사건에 언론이 초점을 맞추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언론도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신문은 판매부수에 신경을 써야 하고 방송은 시청률에 신경을 써야 한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나무랄 수만은 없는 일이다. 아니 오히려 그래야 사람들은 좋아한다. 그런데, 축구에 대한 기사가 뉴스의 첫머리를 장식하고, 다른 뉴스들을 사장시켜 버릴 만큼 그렇게 삶에 소중하고, 긴요한 일인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개인적으로 축구를 어느 누구보다도 훨씬 좋아하지만, 축구를 통한 국민 통합, 국위 선양 어쩌구 하는 얘기는 믿고 싶지 않다. 2002년 6월의 한 신문의 기사를 보면, 월드컵이 열리는 동안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 많은 일들은 그저 외면당하고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제대로 인식되지도 못한 채 지나가 버렸다. 대우자동차 판매노조의 임금체계 개악반대 시위, 시그네틱스 노동자들의 단식농성, 병원파업 노조간부의 기습연행, 미군부대 고압선에 감전된 전동록씨의 사망,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사고, 지문날인 거부자들에 대한 대체신분증 발급 거부로 인한 참정권의 사실상 박탈, 병원에서의 슈퍼박테리아 감염 뒤 해당 병원으로부터 퇴원 압력을 받은 환자들 문제, 노바티스에 대한 백혈병 항생제 글리벡 가격인하 요구, 영상물등급위원회에서의 위헌적인 등급분류 보류제도 적용 등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려울 정도의 많은 일들이 있었다. 서해안에서 북한과의 교전이 있었고, 국제형사재판소의 근거규정인 로마규정이 발효됐으며, 지방선거도 있었다. 무엇하나 가볍게 넘어갈 수 없는 사안들이었다. 이 모든 일들이 “대~한민국” 한방에 덮였다. 월드컵을 통해 확인되었다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역동성은 어찌 보면 과장된 것일 수 있다. 순간의 기쁨과 환희를 같은 장소에서 발산하고 싶은 젊은 세대의 열병일 수 있다. 1965년 4월 베트남전에 대한 반전 시위대는 그 규모가 40만명에 이르렀고, 그해 11월 워싱턴에서는 10만명의 반전시위대가 운집했다. 2004년 3월 20일 미국의 이라크 전쟁 1주년이 되는 날 이탈리아에서는 100만명, 런던에서는 20만명, 뉴욕에서는 10만명이 참여한 반전집회가 열렸다. 이들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의 수만 따진다면 2002년 월드컵 때의 붉은 악마보다 많으면 많았지 결코 적지 않다. 이들의 역동성이란, 그 참여의지란 정말 굉장하지 않은가. 대한민국 국민들의 역동성, 역량을 과소평가하려는 것은 아니다. 월드컵 이후의 각종 촛불집회, 탄핵집회 등을 통해 보여준 대한민국 국민들의 역량은 또다시 세계를 놀라게 했다. 하지만, 실제로 자신과 관련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그러나 양보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해 대한민국 국민들은 너무나도 차분한 것이 사실이다. 아니 무관심한 것일 수도 있다. 그 무관심은 조장되는 것이다. 비정규직에 관한 문제, 외국인노동자에 관한 문제, 사학법에 관한 문제, 개인정보보호에 관한 문제, 쌀 개방에 관한 문제, 국가보안법에 관한 문제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문제들이 어느 하나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채 표류되고 있는 상황에서 다시 2006년 월드컵이 다가오고 있다. 또 다시 한달, 그리고 그 여파가 미칠 여러 달 동안 많은 문제들이 무관심 속에 방치될 수 있다. 또 다시 무관심이 조장될 수 있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참으로 머리가 좋다.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면 문제의 본질까지 꿰뚫어 본다. 그 해결책도 생각해 낸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신문의 끄트머리에 놓일지 모르는 일들을 눈앞에 붙잡아 둘 각오를 다져야 한다. 문제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치는 순간 상황은 악화되고 해결의 실마리도 놓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이 우수한 성적을 얻었다고 하여 국가위상이 드높아 지는 것은 아니다. 한목소리로 “대~한민국”을 외쳤다고 하여 국민통합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형식적인 수치로 발견되는 국가위상보다 내실 있고 누구나 체감할 수 있는 국가위상은, 방치되고 악화되어 곪아터진 제반 문제들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대다수 국민들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해결책을 내놓는데서 발견되고, 고양되어야 한다. 고통받고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과 어깨를 함께 하고  “대~한민국”을 외칠 수 있을 때 비로소 국민통합은 그 기초가 마련된다. 대본 없는 연극의 짜릿한 감동, 기쁨, 환희, 그것은 순간의 고통을 잊게 하는 몰핀에 불과하다.   위대영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6-01 | hrights | 조회: 646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