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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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학교 역사문화컨텐츠학과 교수), 이찬수(전 보훈교육연구원장),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장발장은행장)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한국의 ‘카이사르’와 ‘키케로’들에게 -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키케로다 ‘카이사르’들이 퇴장하고 있다. 민중의 환호 속에 등장했던 카이사르는 전제정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그의 독재는 공화정을 신봉하는 측근에 의해 종지부를 찍었다. 우리는 지금 사회 곳곳에서 그런 카이사르들을 보고 있다. 카이사르들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우선, 일정 시점까지는 ‘개혁’을 표상한다. 기성 집단의 무능 부패 반민주성에 대항하는 개혁이다. 이 때문에 기성 지배층에 염증을 느낀 대중의 지지를 획득한다. 그러나, 일정한 시간이 지난 다음에는 독주한다. 이 때문에 민주주의를 문제 삼는 지지세력 일부 또는 다수가 이탈하기 시작한다. 카이사르의 비극은 그 다음부터다. 이후 카이사르들은 독재를 내장한 고립주의 노선을 걷는다. 이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깊은 연관이 있다. 마지막으로, 독선에 빠진 카이사르들은 지지기반의 붕괴를 감지하지 못하고, 끝내 조기 퇴장당하거나 실패한 리더십으로 귀결된다. 특히 과거의 지지자들이 반대자로 돌아선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를 지지했던 똑같은 이유로 그를 멀리하려는 ‘민주파’에게 위협받고 있다. 어느 시점부터 그는 소통의 능력을 잃어 버렸다. 이필상 고려대 교수도 비슷한 형국에서 대학 총장직에서 물러났다. 애초 이 교수는 신자유주의적 대학재편에 저항하는 교내 세력의 지지를 받았었다. 임기 1년을 앞두고 얼마 전 사임한 정태기 한겨레신문사 대표이사도 이 경우들과 비교해 볼 수 있다. <기자협회보>는 사설에서 “최고경영자의 독단적인 행태와 돌출적인 행동이 조직을 얼마나 큰 위기로 내모는지 생생히 보여” 준 사례라고 평가했다.   한국의 ‘카이사르’들 각각의 그 복잡한 내부 사정을 시시콜콜 밝히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그들 모두가 ‘카이사르’의 전철을 밟았다는 것으로 대체적인 설명을 대신하려 한다. 내가 오히려 관심을 두는 것은 다른 데 있다. 카이사르와 항상 대립했던 공화주의자 ‘키케로’의 삶이다. 키케로는 흔히 카이사르의 개혁에 맞선 ‘보수파 정치인’으로 평가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 결을 유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키케로는 일찍부터 카이사르의 독재성향을 간파하고 이에 시종일관 반대했다. 카이사르는 원로원을 민중 위에 군림하는 특권집단으로 평가했지만, 키케로가 보기에는 카이사르야말로 토론과 합의 위에 군림하려는 독재자였다. 키케로가 지키려 했던 ‘공화주의’적 가치가 근대 유럽의 시민혁명에 지대한 영향을 준 것은 우연이 아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깊은 신뢰가 그 바탕에 깔려 있다. 그러나 키케로는 카이사르 못지않게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카이사르의 암살을 지지했지만, 그 뒤에 닥쳐온 혼란의 와중에 그 스스로도 암살당했다. 카이사르를 제거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전제군주정의 뿌리를 뽑지는 못했다. 키케로의 죽음 이후 로마는 아우구스투스의 전제정 아래에 놓이게 됐다.     민중의 환호 속에 등장했던 카이사르는 전제정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그의 독재는 공화정을 신봉하는 측근에 의해 종지부를 찍었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카이사르를 제거하려 했던 공화파가 오히려 내전을 자초했고, 극심한 혼란에 지친 민중들이 오히려 강력한 전제정의 출현을 수용했다고 평가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어찌됐건 키케로는 무덤 속에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키케로’의 비극 무엇보다 역사는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를 기억할 뿐, 키케로를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 ‘독재자’인 카이사르가 지녔던 창조의 힘이 ‘민주주의자’였던 키케로가 품었던 비판의 힘보다 더 위대하다고 평가한다. 후세는 키케로가 아니라 카이사르로부터 로마를 이야기한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생각보다 더 자주 반복된다. 카이사르를 반대한 키케로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더 강력한 카이사르가 등장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자유, 평등, 민주주의를 기초로 하는 공화주의의 이상은 곧잘 포퓰리즘과 독재에 의해 대체된다. 때로 그 독재는 과거의 것보다 더 강력한 것이다. 그 아이러니를 알고 있는 ‘키케로들’은 고민에 빠진다. 카이사르를 향한 나의 비판이 결국 다음의 전제군주에게 역이용되는 것이 아닐까. 혹시 카이사르의 창조를 위해 키케로의 비판을 유보해야 되는 건 아닐까. 역사가 기억하는 것이 결국 카이사르라면 아예 카이사르를 돕는 게 더 나은 일이 아닐까. 어찌 보면 키케로의 공화주의적 이상은 실현 불가능한 것이다. 공화주의는 합리적 이성을 지닌 다수의 주체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소통하는 가운데서 온전히 구현되는 것이다. 현실은 카이사르와 카이사르의 아들들이 판치는 곳이며, 이들을 손쉽게 우러를 준비가 돼 있는 필부들이 신음하는 곳이다. 그럼에도 공화주의는 포기할 수 없는 가치다. 독재의 반대말로서 공화주의는 공동체에 대한 책임과 참여, 권리와 의무를 모두 아우르고 있다. 제한된 자원과 한정된 시간 아래서, 반드시 달성해야 할 목표를 지니고 있는 집단일수록 독재가 아닌 공화주의의 길을 택해야 한다. 탁월한 메시아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다함께 지혜를 짜내 힘을 모으는 제도와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토론은 공화정의 연료이므로, 다소간의 혼란과 논쟁은 기꺼이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좁은 땅덩어리에 태어난 이상 그 길을 피할 수 없다. 돌이켜보면 조선조 이래 한반도의 정치는 대부분 이 ‘공화’의 이상과 연관된 것이기도 했다. 목숨을 건 논쟁은 한반도 정치의 숙명이었다. 그 와중에 간혹 “내가 고민을 대신해줄테니 넌 신경 쓰지 말아”라고 속삭이는 독재자들이 등장해 혹세무민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반도에 사는 이들이 택할 것은 공화주의다.     키케로는 흔히 카이사르의 개혁에 맞선 ‘보수파 정치인’으로 평가된다 사진 출처 - 네이버  미국처럼 땅덩어리가 넓고 산물이 풍부하여 제 마음대로 살아도 별 상관없는 곳이라면, ‘엘리트’끼리 모여 정치하는 일이 민중 개개인에게 큰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지만, 한국은 아니다. 결코 그럴 수 없다. 정치적 결정은 모두 나의 일상과 직결된다. 그러니 나는 토론과 참여의 기회를 전혀 양도할 뜻이 없다.   결국 ‘키케로’의 승리다 다시 정치의 계절이다. 한국은 대통령을 새로 뽑아야 하고, 고려대학교는 총장을 새로 뽑아야 하고, 한겨레신문사는 대표이사를 새로 뽑아야 한다. 키케로는 이럴 때 카이사르를 찾아 헤매지 않는다. 다시 한 번 공화주의의 원칙을 되새길 뿐이다. 다만 그 자신에게는 서글픈 운명이 닥칠 것을 비감하면서…. 권력의 요지경을 지켜보는 2007년, 한국 시민들의 마음이 매양 그러할 것이다. 이 시대의 키케로들에게 바칠 위안거리가 한 가지 있다. 키케로는 고대 로마가 전제정의 길로 빠져드는 것을 막지 못했지만, 2천 여 년 뒤에 인류가 공화정의 길로 나아가는 초석을 세웠다. 지금 필요한 것은 ‘노사모’가 아니라 ‘키케로’다.   안수찬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572 | 추천: 0
다른 것은 아름답다. * 어느 책에선가 읽고 가슴에 남은 구절이다. 「천하장사 마돈나」. 고등학교 1학년 오동구는 여자가 되고 싶은 남학생이다. 일본어를 가르치는 남자 선생님을 연모하면서, 당당한 한 사람의 여자로서 선생님 앞에 서서 사랑을 고백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씨름대회에서 우승을 하면 상금 오백만원을 받을 수 있다는 소식에, 진짜 여자가 되는 수술을 받을 돈을 마련하기 위해 죽도록 연습을 한다. 그는 말한다. “나는 뭐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살고 싶은 거야...” 별다른 무엇이 억지로 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느끼는 대로 살아가고 싶을 따름이다. 우리는 나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 먼저 나와 다른 성(gender)을 가진 사람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중에 황홀한 눈빛을 이끈 사람과는 결혼이라는 매우 거추장스러운 통과의례를 거쳐서라도 평생을 함께 살아가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나와 성이 같은 사람과는 이런 관계를 맺는 일이 거의 없다. 성이 다르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나와 종교가 다른 사람은? 불교나 원불교, 천주교 신자들은 대개 그렇지 않은데, 유독 개신교 신자들은 종교가 없거나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악에 빠져 있어서 구해 주어야 하는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가진 분들이 많다. 하지만 요즘에는 한국 사회 곳곳에서 종교의 다름이 전혀 나쁜 일이 아니고, 오히려 서로 다른 영성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여기는 개신교인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아니, 그보다는 그동안 그런 생각을 억눌러 오다가 이제 조금씩 밖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 정확하겠다. 종교가 다르다는 것은 아름답다.   사진 출처 -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  한국 사회는 아직도 지역감정에 휘둘리고 있다. 올해는 대선이 있는데, 지역감정이 또 어떤 영향을 정치에 미칠지 염려가 된다.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어울리면 사투리가 달라도 재미있는데, 왜 다른 지역 사람들을 적대시할까. 이런 상태로 점차 증가하는 북한주민들과의 교류를 한국사회가 어떻게 소화해낼지 걱정이 앞선다. 한국은 단일 민족 국가라고 입이 닳도록 홍보한 시절도 있었는데, 이제는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들어와서 한국 경제의 요소요소에서 일을 하고 있다. 더구나 그들이 맡은 일들은, 국내 노동자들이 극히 꺼려하는 힘들고 보수가 적은 일들이다. 이제는 그들과 결혼한 한국인들도, 또 그 사이에서 태어난 2세들도 점차 늘어가고 있다. 한국사회는 그들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아야 한다. 백인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한국보다 뒤떨어진 나라의 외국인들이 들어와 살아도 한국이 살만한 곳이어야 한국 사람들도 행복하지 않을까. 그러면 아름다울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달리, 다른 성에 끌리지 않고 같은 성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은 아름답지 않은가. 또는 태어날 때 가진 성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고 다른 성으로 바꿀 수만 있다면 바꾸고 싶은, 아니 그보다는 오동구처럼 “나는 뭐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살고 싶은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비정상적이고 추접스러운가. “다른 것은 아름답다”는 말은 어쩌면 원래 그렇기도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마음먹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위의 몇 가지 예에서 보듯이, 다른 것이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것도 있지만, 좀 어색하고 비정상적인 것처럼 보이는 다른 것들도 있다. 눈을 자연스럽게 뜨고 보면, 그런 것들이 참 많다는 사실을 잘 알게 된다. 더구나, 대부분의 ‘정상적인’ 사람들에게는 역겹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일들이, 그 당사자들에게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들이라고 한다.   “나는 뭐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살고 싶은 거야...”   영화에서 주인공 오동구는 “나는 뭐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살고 싶은 거야...”라고 말한다. 사진 출처 -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  남자들만, 여자들만 모여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성정체성이 다른 사람들은 함께 살 수가 없을까. 종교가 다른 사람들도, 지역이 다른 사람들도, 국적이나 인종이 다른 사람들도, 장애인들도, 이념적인 지향이 다른 사람들도 이미 함께 살고 있다. 우리(어떤 항목에서든 주류인 사람들)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다른 것이 아름답다”고 여기며 함께 어우러져 살아갈지, 아니면 “다른 것은 추하고 번거롭다”며 다수가 소수를 억누르면서 살아갈지, 둘 중의 하나가 아닐까. 억눌린 소수는 억압받는 자들의 예민한 감수성으로 보다 사려깊은 태도를 가질 수 있지만, 자신이 선택하지 않는 채 주류에 속한 다수는, 의도하지 않은 억압으로 같은 값의 인간을 가장 비인간적으로 대하게 되기도 한다. 오동구가 닮고 싶어 안달인 가수 마돈나를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오동구의 취향이지, 내 취향이 아니다. 그런 오동구와 내가 가까워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를 비정상적인 인간이라고 배척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의 당당한 표현에 응원을 보낸다. 이창엽 위원은 현재 치과 의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538 | 추천: 0
4,373,499. 이것은 무슨 숫자일까? 참여정부 들어 대통령님의 은혜로운 사면으로 죄를 용서 받은 사람 숫자다. 참 많기도 하다. 이 숫자만 놓고 보면, 대한민국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사는가를 만천하에 공표하는 가장 효율적인 수치로써 참으로 부끄럽다. 그러나 이 숫자에는 자동차운전 관련 사범 등 사소한 행정법규위반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따라서 우리 국민들은 그렇게 흉악한 범죄자 집단은 아니다. 대다수 선량한 시민들의 사소한 과오를 대통령님께서 용서해 주신다는 데 누가 이의를 달 수 있겠는가. 설득되지 않는 대통령의 사면 내용 그런데 이 숫자에는 누구나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힘 있고, 돈 많은 사람들이 자행한 파렴치한 범죄들이 포함되어 있다. 대통령님께서는 권력자와 재벌 등을 용서한 이유에 대해 ‘국민화합’ 또는 ‘경제 살리기’라고 자상(?)하게 설명해 주신다. 왜 그런데 나 같은 시골 대학의 촌뜨기 교수는 오히려, 힘 있는 자들을 사면해주기 위해 그동안 사면대상에 선량한 국민을 곁다리로 끼워 놓은 것이라는 느낌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일까. 진정한 국민화합을 위해서라면, 두산의 박용성, 쌍용의 김석원, 대상의 임창욱 같은 재계 거물들과 박지원, 권노갑, 김현철, 김홍일 같은 퇴물 정치인들은 사면에 포함시키면서 왜 힘없고, ‘빽’없는 사람들은 포함이 안 되어 있는지 궁금하다. 몇 억 원, 몇 십억 원의 뇌물을 두꺼비처럼 넙죽 넙죽 받아먹은 거물급 권력자와 몇 백억 원씩의 회사 돈을 어린아이 사탕 먹듯 횡령하는 등의 부도덕하고 어마어마한 범죄를 저지른 재벌들을 사면시켜주면 국민화합과 경제 살리기에 도움이 되고, 힘없는 노동자와 양심범인 양심적 병역거부자 등을 사면하면 국민화합과 경제 살리기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보는 논리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사면이 군주국가 시대에 군주의 특권적 자비로 베풀어지면서 악용되는 폐해가 발생하자 근대 입헌국가에서는 삼권분립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사면제도가 한때 폐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가적 경사나 정치적 상황 변화 등에 따르는 필요성과 합리성을 이유로 대다수의 국가들은 현재 국가 원수의 사면권을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연원을 고려할 때 개인적으로는 사면제도를 폐지하는 것이 낫다고까지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사면권의 행사가 자의(恣意)적으로 반복되고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고 편파적으로 운용된다면 사면제도를 둘 이유는 분명 없어 질 것이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이번에도 참여정부는 툭하면 나오는 ‘진정성’을 믿어 달라고 할 것인가. ‘진정성’을 믿어달라고 아무리 하소연해도 그 진정성을 담보하는 행동이 뒤따르지 못하면 어느 누구도 그 진정성을 믿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더구나 참여정부 들어 양극화는 더욱 심해지고, 김대중, 김영삼 정권보다도 더 많은 양심수가 발생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주관적 진정성과 정당성만으로 마지막까지 국민을 호도하려고 하는가. 참여정부의 순결한 정신은 사회적 약자, 소수자 등을 더욱 보호 대상으로 삼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평등권을 보장하여 주는 이념이 아니었던가. 재벌과 권력자 같은 집단은 사면권의 보호 대상이요, 노동자들은 이러한 집단과 달리 차별적으로 취급하는 머리 아픈 현실에서 어떻게 객관적 정당성을 믿으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인가. 만인(萬人)이 아니라 만명(萬名)에게만 평등? 우리 헌법 제11조 제1항은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그런데 이번에 단행된 사면의 내용을 놓고 볼 때 우리 현실은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만인에게 평등한 법의 정신은 혹시 만 명(萬名)에게만 평등한 법조항으로 바뀐 것은 아닌가. 18세기 위대한 프랑스 혁명의 이념인 자유·평등·박애는 근대 입헌국가의 지도원리가 되었고, 현대 국가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이념이지만 우리에게는 박제된 구호에 불과한 것일까. 두산 그룹의 박용성 회장이 286억 원을 횡령한 범죄에 대해 검찰은 불구속 기소를 하고, 법원은 경제에 기여한바가 크다고 집행유예를 선고하고, 대통령님께서는 경제 살리기를 위한다며 사면해주는 현실에서 어느 국민이 법 앞에 평등하다고 생각하겠는가. 물론 절대적으로 평등한 세상, 절대적으로 정의로운 국가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믿는 것처럼 바보스러운 것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최소한 국민이 납득할만한 수준의 법 앞의 평등이 실현되지 못한다면, 세계인권선언에 나와 있듯이 ‘폭정과 억압에 대항하는 마지막 수단으로서 반란에 호소’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 할 수 있겠는가. 사면 대상으로 풀려난 권노갑씨가 교도소를 나오면서 한 말은 더욱 가관이다. ‘정의는 승리한다.’   김희수 위원은 현재 전북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476 | 추천: 0
“UCC는 한마디로 ‘돈’이다”- UCC 열풍 뒤에 숨은 거대 자본의 욕심 뉴 미디어와 관련해서는 웬 신조어가 그리 많은지 일일이 따라잡기가 여간 버겁지 않다. IPTV, DMB, 유비쿼터스니 하는 말들이 귀에 익을 만하니 이번엔 UCC란 말이 대유행이다. 소비자가 직접 만든 콘텐츠(User Created Contents)를 의미하는 이 용어는 한국에서만 쓰이는 말이란다. 영어권에서는 UGC(User Generated Contents)라고 한다든가. 아무튼 독자적인 용어까지 사용되고 있는 걸 보면 우리나라가 이 부문에서 나름 앞서가기는 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사용자가 만든 콘텐츠라면 사실 새로운 게 아니다. 예컨대 공중파 방송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시청자 비디오 같은 것도 그렇고 <오마이뉴스> 같은 데 뉴스를 작성해 보내는 수많은 보통 사람들의 목소리들도 전문 제작자가 아닌 보통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란 점에서 UCC의 일부였던 셈이다. 수많은 개인 블로그들은 물론 하다못해 인터넷에 달리는 수많은 댓글들도 일종의 UCC인 셈이다.     UCC 동영상 서비스 선두업체인 판도라TV 사진 출처 - 판도라TV UCC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사실 이른바 정보화 시대니 디지털 시대니 인터넷 시대니 하는 말들이 나오면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의 하나로 거론되어 온 것이 ‘쌍방향성’이었다. 일방적으로 주어진 정보를 수용하기만 하던 대중이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이용해 스스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메시지를 생산하게 됨으로써 커뮤니케이션의 상호작용이 가능해졌다는 이야기이고, 이것이야말로 미디어 권력의 일방적인 구조를 엎고 담론 세계의 진정한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할 정보화 시대의 특성이라는 주장이 줄을 이었다. 최근 십여 년의 과정을 돌아보면 그런 주장이 그런대로 맞아 들어간 면이 없지 않아 보인다. 적어도 일부 신문이나 공중파 방송 등 전통적인 미디어 권력이 누리던 절대적 권위는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자발적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의 발전 속에서 어느 정도 상대화되었음에 틀림없다. 물론 인터넷에서 활발히 벌어지는 대중의 자발적 소통이 반드시 민주적이거나 진보적인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최근 인터넷에서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른바 네티즌 문화의 뿌리 없음과 경박함, 그리고 무책임함이다. 예컨대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이른바 악성 댓글(악플)들을 보면 누구나 쉽게 메시지를 생산할 수 있게 된 기술적 진보라는 것이 그대로 담론 구조의 진보와 민주화를 보장하는 것이 아님을 실감하게 된다. 기술에 앞서 중요한 것은 여전히 논리적이고 민주적인 사고의 능력, 인간에 대한 예의 같은 인문학적 가치들이란 말이다.     UCC는 한마디로 ‘돈’이다 아무려나 별반 새로울 것도 없는 사용자 생산 콘텐츠가 새삼 UCC니 뭐니 관심을 모으는 것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다. 우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기술 발전과 함께 인터넷에서 생산 유통되는 주요 정보가 문자 텍스트 중심에서 사진과 동영상 정보 중심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이미지와 동영상의 생산과 조작이 손쉬워지면서 온갖 다양한 영상 정보들이 인터넷에 넘쳐나기 시작했고 손수 제작한 동영상 등으로 갑자기 스타가 되어버린 경우들이 생겨났다. UCC란 말이 회자되기 시작한 것이 그 즈음이다. 방송통신 융합 추세 속에서 엄청나게 많은 채널들이 생겨나고 있지만 이를 채울 콘텐츠는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사용자들이 개발한 동영상 콘텐츠들이 그 공백을 메워줄 새로운 구세주로 등장한 것이다. 최근 들어 공중파 방송까지 UCC 공모에 나서는가 하면 대형 포털 업체들이 UCC를 이용한 사업 모델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고, 인터넷 동영상 서비스 업체인 유튜브(youtube.com)가 구글에 16억 5천만 달러에 팔린 것은 이 난데없는 UCC 열풍의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 짐작하게 해 준다. 한 마디로 그것은 ‘돈’이다. 요컨대 사용자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 낸 영상 콘텐츠를 이용해 돈을 벌고자 하는 거대 자본의 욕심이 이 새삼스러운 UCC 열풍 뒤에 숨어 있는 것이다.     인터넷 예절을 다룬 한국방송광고공사의 공익광고 장면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돈’이 결합하면 자발성은 퇴색한다 대중의 자유롭고 자생적인 문화적 에너지가 거대 자본 권력의 자장 속으로 흡수되어버리는 사례는 문화사에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최근의 UCC 열풍은 인터넷이라는 쌍방향 문화 공간 속에서 새롭게 싹트기 시작한 대중의 자생적 창조물들을 자본의 논리 속으로 끌어들여 손쉬운 돈벌이 수단으로 삼고자 하는 문화산업 자본의 그칠 줄 모르는 탐욕을 보여준다. 인터넷 공간을 흘러 다니는 수많은 정보와 콘텐츠들은 아직 충분히 민주적이지도 진보적이지도 않다. 따지고 보면 양질의 정보 콘텐츠보다 그렇지 않은 것들이 더 많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그들이 의미 있는 것은 그것이 대중의 자발성과 능동성에 기초해 있다는 사실이며 이를 통해 미디어의 공공 영역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바로 그 때문에 그것은 진정 민주적인 정보 소통 구조를 위해 의미 있고 필요한 존재들인 것이다. 거대 자본이 여기에 적극 개입하는 순간 인터넷의 공공성은 훼손되고 UCC의 자발성은 퇴색된다. 최근의 UCC 열풍이 곱게 보이지 않는 까닭이다.     김창남 위원은 현재 성공회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재직 중입니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507 | 추천: 0
필자가 대학에서 인권과목을 강의하며 시청각자료로서 활용하는 <여섯 개의 시선>이라는 인권단편영화 모음 중에 여균동 감독의 <대륙횡단>이라는 14분짜리 작품이 있다. 그것은 한 뇌성마비 1급 장애인의 일상적인 삶과 감정의 기록을 짧은 장면들로 구성한 영화인데, 특히 세종로 네거리를 홀로 무단 횡단하는 마지막 장면은 보는 이의 심금을 울린다. 장애인들이 “우리도 버스를 타고 싶다!”며 버스에 자신들의 휠체어를 쇠사슬로 묶고 절규하는 나라가 얼마나 있을까? 미국의 경우는 그와 정반대임을 우리는 본다. 휠체어 표시가 붙은 버스가 짧은 간격으로 다니며 장애인이 탈 경우엔 버스가 멈추고 기사가 나와 휠체어를 밀어 버스에서 자동으로 내려오는 발판 위로 휠체어를 탑재한 후 안전띠로 동이고 버스가 출발한다. 승객들은 어느 누구도 시간이 걸린다 하여 투덜대기는커녕 기사가 제대로 장애인 승객을 대하는지를 지켜본다. 이 장면을 목격하던 필자는 장애인들이 행복한 나라여야 진정으로 문화선진국이자 선진 민주국가라고 생각하곤 했다.     영화 '여섯 개의 시선' 중 뇌성마비 1급 장애인의 일상적인 삶과 감정의 기록을 짧은 장면들로 구성한 '대륙횡단'의 한 장면. 사진 출처 - 영화 '여섯개의 시선'  이에 덧붙여, 필자는 인권연대 주최의 2006년 여름 교사인권강좌 자료집에서 접한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활동가 박숙경씨의 글 “장애를 가진 사람에 대한 이해와 인권”에서 귀중한 깨우침을 얻는다. 장애는 사고나 환경에 의해 후천적으로 발생하는 경우가 90% 이상이라 한다. 한창 잘 나가는 사회지도층 인사들이나 사업가들이 어느 날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지거나 교통사고로 장애인이 되어 고통을 받는 것을 자주 보며 필자는 장애가 참으로 가까이 있는 것임을 절감하곤 한다. 사실, 장애인은 대한민국 인구의 약 10%인 450만명에 근접한다고 추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장애인들을 여전히 나와는 ‘다른’ 존재, 더 나아가 나와는 ‘틀린’ 존재로 인식하며, 장애인이 이름을 가진 ‘사람’ 누구누구이며 단지 ‘장애’를 더 가졌을 뿐임을 잊고 그저 ‘장애인’으로만 분류하지는 않나? 말 한마디, 냉랭한 태도, 차갑거나 동정어린 시선 등에 의해 ‘특별한 존재’로 취급당하는 것이 가장 견디기 힘든 상처이자 인권침해라고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토로한다. 1999년에 발간된 <한국장애인인권백서>를 보면, 우리는 장애인들에게 그들의 처지를 공연히 부각시키거나 그들을 비하하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부지불식간에 상처를 주는 언어폭력을 가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장애만 없어도 큰일을 할 수 있었을 텐데..”라는 말이 주는 상처, 신문 지상에서 곧잘 접하는 “벙어리 냉가슴 앓기,” “절름발이식 국토개발,” “장님 코끼리 만지기” 등의 상투적 표현, 텔레비전에서 접하는 “바보” 등 장애를 빗대어 웃음을 만드는 코미디 프로그램 등이 커다란 상처를 준다고 한다. 장애인은 ‘장애인’이라는 말도 듣고 싶지 않을 것이다. 장애인, (장)애자, 불구자, 병신, 기형아, 장님, 봉사, 애꾸, 벙어리, 귀머거리 등등의 용어 자체가 곧 인권침해라는 생각을 해 본 일이 있는가. 더 나아가, 밥 맛 떨어진다고 못 들어오게 하는 식당, 자필서명을 할 수 없다고 하여 카드 발급을 거절하는 은행, 수화통역사를 대동하고 오라고 면박을 주는 관공서나 경찰서, 방 한 칸을 얻으려 해도 재수 없다고 거절하는 집주인들, 장애인이라고 면접에도 못 오게 항상 서류전형에서부터 낙방시키는 기업들, 가족 중에 장애인이 있다고 하여 혼사가 파혼되는 사례 등, 사례는 참으로 다양하고 광범위하다. 반면에, 최근 영어로는 장애인을 “people with different abilities" 혹은 “differently abled”라고 한다. 장애를 “disabled"(능력이 없는)라고 표현하지 않고, (보통 사람은 못하는) “다른 능력을 가진”으로 보는 것이다. 또는 “physically challenged"(“신체적으로 어려운 도전을 받고 있는,” 그럼에도 잘 극복하고 있는)이라고도 한다. 팔이 없어도 입에 붓을 물어 그림을 그리는 훌륭한 화가들, 휠체어를 타면서도 팔다리 멀쩡한 선수들보다 슛이 정확한 농구선수들을 우리는 본다. 과연 누가 ‘정상’이고 누가 ‘비정상’인가. 성한 이들의 편견이 곧 ‘장애’ 아닐까? 그런 성한 이들이 ‘비정상’ 아닐까? 이제 우리는 장애인들에게 부지불식간에 가하는 언어폭력부터 줄여야 하겠다. 예를 들면, 장애인을 명사형으로 고착화하지 않고 그 사람에 대해 설명하는 방식이 훨씬 나을 것이다. 예를 들어, “휠체어장애인 OOO씨”라는 말보다 “휠체어를 이용하는 OOO씨”, ‘장애인’보다는 ‘장애를 가진 사람’이 낫다. 그리고, ESCAP(아시아·태평양경제사회이사회)가 제시한 바 있는 장애인에 대한 정확한 용어 사용 및 인터뷰 지침인 “장애가 이야기에 있어 중요하지 않다면 부각시키지 말라”는 기본 원칙을 지켜야 할 것이다.     2001년 1월 오이도역 리프트 추락 사건이후 결성된 장애인이동권연대는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며 시청역 선로점거 투쟁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사진 출처- 장애인이동권연대   그 외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배려는 쉽고도 많다. 지체장애인들과 만날 약속을 할 때엔 그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있는지 미리 알아볼 것, 시각장애인을 만났을 때엔 먼저 상대방의 손을 이끌어 잡는 방식으로 악수를 할 것, 청각장애인들과 구화로 대화할 때는 일정하고 약간 느린 속도로 바르고 큰 입 모양으로 간략하게 이야기하고 약속시간, 약품명 등은 꼭 글로 써서 대화할 것, 뇌 병변 장애이어서 손이 불편해 필담을 못하면 휴대폰의 문자로 간단히 소통할 것, 정신지체장애를 가졌다고 무조건 반말을 하거나 어린애 다루듯 하지 말고  “위험하다” 혹은 “귀신들렸다”는 식으로 여기지 않을 것, 등등은 실천하기 어렵지 않다. 이렇듯, 장애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고유성과 다양성을 인정하는 일은 모두가 함께 사는 일, 곧 ‘분리’가 아닌 ‘통합’으로써 인권과 연대를 실천하는 일이다. 서두에서 언급된 <대륙횡단>이라는 영화에서 장애인 친구는 주인공과 소주를 마시면서, “아무것도 하려 하지 않는 게 우리의 문제”라고 한다. 그리고는 장애인이동권 쟁취 집회에 나가 구속된다. 그 장면을 우연히 텔레비전 뉴스에서 보고 주인공은 죽을 위험도 마다않고 세종로를 가로지르는 ‘대륙횡단’을 감행한다. 2001년 1월 오이도역 리프트 추락 사건이후 결성된 장애인이동권연대의 활동사례에서 보듯이, 그 이후 장애인 권리의 주체가 장애인 운동의 주체로 나섰고 장애계가 총체적으로 연대하여 장애인차별금지법의 제정을 추진하고 있으며, 최근 UN에서는 국제장애인권리협약의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이에 우리 모두가 함께 연대해야 하지 않을까? 하여, 한국 사회의 인권수준이, 아직은 휠체어에 의존하는 정도이지만, 여느 나라의 경우처럼 버스 정도는 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김 녕 위원은 현재 서강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748 | 추천: -1
요즘 나는 시사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다. 매일 저녁에 두 시간씩 우리사회의 다양한 현안들을 다룬다. 시사프로그램을 제작하는데 있어서 핵심은, 어떤 사안을 다룰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누구와 인터뷰를 해서 이 사안을 전달할 것인가이다. 그러다 보니 아이템을 선정하는 시간보다는 섭외에 매달리는 시간이 훨씬 더 많다. 그리고 일단 섭외만 되면 그날 방송준비는 거의 다 한 셈이다. 어떻게 요리할 것인가의 문제는 진행자의 역량이 많이 좌우하는 ‘부차적인 문제’다.  시사프로그램을 오래하다 보니 자연스레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런데 내게 있어 그 기준은 그 사람이 보수냐 진보냐, 꼴통이냐 아니냐, 인간적으로 매력을 느끼느냐 마느냐 하는 그런 고상한 것은 아니다. 아주 단순하다. ‘인터뷰 해주는 사람=좋은 놈, 인터뷰 안 해주는 사람=나쁜 놈’ 이런 식이다.   이 세상엔 두 가지의 사람만 있다 예를 들어, 거침없는 달변에다가 화끈하게 ‘뉴스거리’까지 만들어 주는 사람은 아주 좋아한다. 반대로 별별 아부 다해가며 어렵게 섭외했는데 막상 방송에선 선문답을 하거나 미꾸라지처럼 요리 빼고 조리 빼는 사람은 그야말로 ‘짜증 지대로’다. 그런데 진짜 싫어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 죽어도 인터뷰 안한다는 사람들이다. 섭외를 하다보면 글이나 논문을 통해서 얘기하지 방송인터뷰는 안한다는 분들이 꽤 있다. ‘말재주가 없다면 글로 쓴 거 그냥 읽기라도 하지, 그게 뭐 어렵다고 빼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건 내 사정이고 그 분의 소신이 그렇다니 이해는 하지만 용서가 안 되는 경우다. 왜? 방송에 도움이 안 되니까!(이런 내 기준이 너무 편협하다고 욕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이게 다 직업병이려니 하고 너그러이 이해해주기 바란다.) 최근에도 내 직업병을 도지게 하는 사건이 생겼다. 바로 작년 6월부터 파행을 겪어온  <시사저널> 사태다. 발단은 삼성관련 기사를 인쇄단계에서 발행인인 금창태 사장이 삭제를 지시한 것이다. 편집국장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사가 삭제되자 항의차원에서 사표를 냈고 회사는 신속하게 수리했다고 한다. 항의하는 기자들에게는 무더기 징계가 내려졌다. 편집권을 둘러싼 양측의 갈등이 대화로 풀리지 않자 노조는 지난 12일부터 전면 파업에 돌입했고 사측은 22일 직장폐쇄 결정을 내렸다. 시사저널 사태를 비판한 서명숙 전 편집국장, 고재열 기자 등에 대해 사측은 명예훼손으로 형사고소 한다는 입장도 밝혔다. 내가 몸담고 있는 CBS도 지난 2000년 사장퇴진 문제로 9개월간 파업을 한 적이 있기 때문에 동병상련의 마음이 없었다곤 말 못하지만 나의 개인사정과 별개로 <시사저널> 사태는 언론계의 중요한 이슈이기에 당연히 인터뷰를 해야 할 사안이었다.     <시사저널> 노조원 20여명은 지난 1월 22일 오후 1시 정동 사옥 앞에서 사측의 직장폐쇄 조치를 규탄하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스스로도 놀라는 ‘투철한 직업정신’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건데, 인터뷰를 추진함에 있어서 ‘사건의 발단이 된 삼성관련 기사삭제가 발행인의 당연한 권한 행사였는지, 기사내용이 사실 확인이나 증거확보 없이 일부의 주장만 담아 기사 가치가 없어 삭제할 수밖에 없었는지, 사장의 지시에 항의하는 기자들을 징계하는 것이 기강확립을 위해 불가피한 조치였는지, 회사를 비방하는 노조에 대해 직장폐쇄조치를 내린 것이 사용자의 정당한 권한 행사였는지, <시사저널>의 정간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중앙일보 출신들을 편집위원으로 새로 채용한 건지 아니면 대체인력으로 투입한 것인지, 노조의 편집권 독립요구가 과연 정당한 건지’ 등의 문제는 괜히 복잡하기만 할뿐 내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자들 없이 발행된 시사저널이 ‘짝퉁 시사저널’인지 ‘사장저널’인지 구별하는 것도 내 소관은 아니었다. 더구나 이번 사태가 언론에 대한 통제가 권력으로부터 자본으로 이동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그리하여 한국 언론사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사건인가의 문제는 내게는 너무 거창한, 그리하여 ‘부차적인 문제’였다. 중요한 건 이 문제에 대해서 ‘누가 인터뷰를 해줬는지, 누가 안 해줬는지’의 여부다.(이런 나를 속 좁다고 욕하지 마라. 나도 가끔씩 나의 투철한 직업정신에 화들짝 놀라기도 하니까 말이다.) 하여튼 이번 사안에 있어서는 당사자의 의견과 입장이 무엇보다 중요한 상황이니 만큼 우리 제작팀에선 노조와 사측에 인터뷰를 요청했다. 노조는 응했다. 그런데 사측엔 두 차례의 인터뷰 요청에도 안한다는 입장만 되풀이했다. 회사를 통해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도 안한다는 입장을 밝혔고, 어렵게 입수한 금창태 사장 개인휴대폰으로 통화를 시도했을 때도 “사장님……인터뷰 안 한답니다”라는 답변만 들었다. 앞서서도 말했지만, 나의 투철한 직업 정신에 비춰볼 때 일단 ‘인터뷰 안 한답니다’라는 말에서부터 감정이 꼬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더 참을 수 없는 건 ‘왜 안한다’는 건지 설명이 안 될 때이다. ‘할 말이 없어서 안 합니다’도 아니고 ‘시간이 없어서 안 합니다’도 아니고, 이도 저도 아니어서 ‘하기 싫어서 안 할래요’도 아니고 그냥 ‘안 한다’라는 답변만 되돌아 올 때 그 막막함이란…. 거듭 말하지만 나의 기준은 단순 명쾌하다.     이재상 위원은 현재 CBS방송국 PD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552 | 추천: 0
오늘날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는 매우 어렵다. 정부는 노동시장에 개입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비정규직에 대한 정부 대책은 비정규직의 직업능력의 향상과 정규직과의 비합리적인 차별을 방지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기업 역시 비정규직의 사용이 노무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측면에만 주목하고 있다. 노동계는 비정규직 철폐를 위해 노력하나, 그 역시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얽혀 진지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들은 참여 정부가 내세운 신자유주의적 시스템을 불신하고, 다음 대통령 선거를 계기 삼아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하려고 한다. 언론에서는 이러한 여론을 ‘산업화세력에 대한 지지’라고 단순하게 부르나, 실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렇다면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없는가? 그렇지는 않다. 그런데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먼저 비정규직이 확산되는 원인들을 고민해야 한다. 거칠게 얘기하자면, 비정규직이 늘어나는 이유는 그것을 통하여 노무비용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떤 기업이 정규직을 이용하여 천원의 상품을 만들고 있었다면, 이 기업이 기존의 정규직 근로자들을 비정규직을 대체할 경우 절반의 노무비용만을 사용하여 같은 상품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렇듯 손쉽게 비용을 절감하고 자신의 이윤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어떤 바보 같은 기업이 비정규직을 사용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대책 역시 이러한 원인을 없애는데 착안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쉽지 않은 과제이다.      대규모 할인매장이 파트 타이머나 계약직 등에게 낮은 급여를 지급하고 있다면, 단지 그곳에서 판매하는 상품이 저렴하다는 이유만으로 그 할인매장의 상품을 구매하는 것은 다시 생각해 볼필요가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합리적인 소비자는 적은 비용을 들여 많은 효용을 얻으려고 하는데, 그 소비자가 상품의 명목상 가액만을 기준 삼아 상품을 선택한다면, 비정규직이 감소할 가능성은 높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규직을 이용하여 상품을 생산하는 기업은 도태될 가능성이 높게 된다. 즉 합리적인 소비자의 행동으로 인하여 비정규직 근로자의 수가 증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언뜻 보기에는 합리적인 소비처럼 보이는 이 행동들이 사회 전체적으로 볼 때는 비합리적인 행동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비정규직이 증가하면 사회양극화는 더 심화되고, 이는 결국 우리나라의 사회보장제도에 추가적인 부담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 합리적인 소비자는 슈퍼마켓에서는 싼 가격의 상품을 구매함으로써 자신의 생활비를 절약할 수 있었지만, 세금과 같은 다른 영역에서는 종전보다 더 비싼 비용을 치러야 하는 처지에 빠지게 된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 중 시민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영역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물건을 구매할 때, 그 물건을 생산하는 기업이 어떤 근로자를 고용하는지를 알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이윤 중 일부를 지역 사회에 환원하는 기업을 칭찬하고, 그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잘 수행하고 있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만약 그 기업이 저임금의 비정규직 근로자들을 사용하여 그 이윤을 만들어 내고선 그 중 일부를 기부한 것이라면, 이 기업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자신의 회사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에게 평균 이하의 생활을 요구하는 기업에 대하여, 단지 이윤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했다는 점만으로 이들을 좋게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기업의 사회 공헌도는 그 기업에 속한 근로자들에 대한 처우 수준에 좌우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마찬가지로 대규모 할인매장이 파트 타이머나 계약직 등에게 낮은 급여를 지급하고 있다면, 단지 그곳에서 판매하는 상품이 저렴하다는 이유만으로 그 할인매장의 상품을 구매하는 것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만약 가격에 큰 차이가 없다면, 차라리 동네의 슈퍼마켓에 가서 소량의 물품을 사서 적게 소비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합리적인 소비 활동이라고 평가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정부 역시 사회적으로 합리적인 소비 활동을 하여야 한다. 정부 물품에 대한 입찰과 관련하여, 입찰 기업의 비정규직 사용 비율이나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근로조건의 차별 정도를 조사하고 이를 점수화하여 그 구매 결정에 반영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것이 구매 결정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필요는 없지만, 제한된 범위 내에서라도, 정규직 근로자를 사용하는 기업의 불이익을 감소시키는 역할은 할 필요가 있다. 이 제도는 간접적으로 정부가 부담하는 사회보장비용을 감소하는 효과도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계나 사회단체 역시, 비정규직의 확산을 막고 그 차별을 감소하는 일을 지속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소비자나 정부가 올바르게 행동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각 업종별로 비정규직 근로자의 사용 비율이 높은 기업과 낮은 기업, 비정규직과 정규직 근로자간의 근로조건 차별 정도가 심한 기업의 명단을 공개하여 시민들이 이런 정보에 터 잡아 합리적인 소비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를 통하여 사회적으로 올바른 기업을 보호하고 이러한 기업들이 확산되도록 격려할 수 있다. 시민들이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고비용을 감수하면서도 정규직을 사용하는 기업은 앞으로도 기업들 사이에서 바보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은행에 이어 국민은행 노사도 올 2분기에 비정규직 직원   8천명 전원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기로 원칙적인 합의를 했다.  사진은 시중은행 전체직원과 비정규직 현황.     사진 출처 - 한겨레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은 찾기 어렵다. 그러나 어떤 방법도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최선의 정책이 없다고 포기하기보다는 가능한 방안을 찾아 계속하여야 한다. 비정규직 문제는 포기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도재형 위원은 현재 강원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830 | 추천: 0
며칠 전 한 중견기업의 시이오(CEO)를 만났다. 잘 나가던 회사가 갑자기 자금난에 빠져 어려움을 겪고 있는 터였다. 원래 몸집이 크던 사람인데 좀 작아진 듯 했고, 얼굴도 해쓱해졌다. 하지만 통 큰 목소리만은 여전히 우렁찼다. 욕설이 추임새처럼 감칠맛 나게 섞이는 말을 듣노라니 기분이 좀 풀리는 듯했다. 추임새를 빼고 옮겨보면 이런 것이다. “우린 꿈을 잃어버린 사회에 살고 있어. 대학 나와서 꾸는 꿈이라는 게 고작 대기업에 취직하는 거잖아. 아스팔트를 뚫고 이제 겨우 싹을 틔우고 꽃 한 번 피우려는데…. ‘누구 아들’이 아니라고 이렇게 고생해야 하다니….” 실제로 그의 회사는 대기업들의 틈바구니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자금난을 촉발한 소문의 근원지가 특정 기업과 관련이 있다는 풍문도 돌았다. 그는 30대에 회사를 박차고 나와 구멍가게 같은 회사를 차린 뒤 불과 몇 년 만에 상당한 규모의 기업을 일궜다. 요즘 보기 드문 창업주인 셈이다. 그는 스스로를 ‘천민의 아들’이라고 부른다. ‘누구 아들’이 아니라는 걸 강조하는 표현일 것이다. 마침 연말연시 신문 경제면에는 재벌 2, 3세들의 초고속 승진 소식이 무슨 연예계 기사처럼 실리기도 했다. 그가 말하는 ‘꿈을 잃어버린 사회’는 이미 ‘세팅’이 끝난 사회라는 뜻일 것이다. 꿈에도 여러 종류가 있듯이, ‘세팅’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서울대 입학생 중 강남 출신의 비율이 높아진다는 뉴스가 전해진 게 엊그제 같은데, 올해 새로 임관하는 판사 중 강남 8학군과 외고 출신의 비율이 3분의 1이나 된다고 한다. 개천에서 용 나던 시대는 오래 전에 끝났다.     연말연시 신문 경제면에는 재벌 2, 3세들의 초고속 승진 소식이 무슨 연예계 기사처럼 실리기도 했다. 왼쪽부터 박세창 금호아시아나 이사 / 정지이 현대유앤아이 전무 / 조원태 대한항공 상무   사진 출처 - 한겨레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 2만 달러 시대 진입 등 화려한 구호가 넘쳐나는데 민초들의 삶은 팍팍하기만 하다. 경제가 성장할수록 부는 소수에게 집중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고용 없는 성장, 재벌 위주의 성장 탓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체결되면 이런 편중된 성장은 더 가속화할 것이다. 여기서 FTA가 가져올 후폭풍에 대해 근거를 대며 길게 늘어놓을 여유는 없다. 다만, 정부의 설명대로 시장이 커지고 기회가 늘어나는 것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그건 부자들에게나 해당하는 말이라는 사실은 짚고 싶다. 평생을 일해도 아파트 한 칸 마련하기 힘든 서민들에게는 가혹한 시련이 닥칠 것이다. 우리 사회의 최대 과제는 편중 현상을 해결하는 것이다. 해결의 열쇠는 ‘공공성’의 회복이다. 교육 문제도, 부동산 문제도 마찬가지다. 대학 입시를 완전히 내신으로 대체하는 건 어떤가. 공교육이 살아나고, 사교육은 죽을 것이다. 학교 안에서의 부정행위나 촌지 수수 등은 별도의 감시 장치로 해결하면 될 것이다. 사교육이 죽으면 강남 부동산 값도 크게 떨어질 것이다. 정부나 지자체가 개발하는 모든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임대방식으로만 분양하는 건 어떤가. 정부가 돈이 없어 민간에 맡겼던 과거의 개발 방식을 지금도 계속할 이유가 없다. 부작용이 없는 정책은 있을 수 없다. 빈부격차와 불평등을 해결할 의지만 있다면 부작용을 해결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지구상에는 병원비가 공짜이고 주택은 나라에서 해결해주는 나라가 많다. 우리라고 그런 꿈을 꿀 권리가 없을까.   서울 개포동에 위치한 국내 최대의 판자촌인 구룡마을에서 바라다 본 도곡동 타워팰리스의 모습. 강남의 부를 상징하는 타워팰리스와 구룡마을은 직선으로 1.3㎞ 거리에 불과하다.  이런 주장을 하면 몽상가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종부세를 내야하는 사람이 전 국민의 2%에 불과한데도, ‘세금폭탄’이라는 부자들의 구호가 득세하는 게 우리 현실이다. 홍세화가 말하는 ‘존재의 배반’ 현상이다. 먹고 살기 힘들다고 정부를 비난하면서도 종부세를 반대하는 <조선일보>를 읽고, 한나라당을 지지한다. 부의 편중이 문제이니 부자들한테 세금을 제대로 걷어 사회복지에 쓰자고 하면 빨갱이라고 욕을 한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현대자동차 시무식 사태를 보자. 경영진은 수억원의 스톡옵션을 챙기면서도 몇 푼 안 되는 성과급으로 노조와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게 사태의 원인이다. 지난해 비자금 문제가 터졌을 때 1조원을 사회에 헌납하겠다던 정몽구 회장의 약속은 온데간데없다. 그런데도 모든 비난은 노조에게 쏟아진다. 올해는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다. 자칫하다가는 더욱 가혹한 방식의 ‘세팅’이 이뤄질지도 모른다. 불법대선자금이 들통난 대가로 삼성이 만들었다는 삼성고른기회장학재단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고른 기회를 줄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고른 기회는 우리 서민들 스스로 만들어가야 하는 게 아닐까. 자신의 존재에게 거짓말하지 않는 투표행위가 이뤄지길 빈다.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중입니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513 | 추천: 0
2년 전, 셋째인 막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위의 두 아이들 때와는 달리(5년 전부터 맞벌이 가정이 된 고로) 아내보다 내가 좀더 아이에 대해 신경을 쓰게 되었다. 해서 아이가 1학년 때는 1주일에 한 번씩 청소봉사와 학교도서관 봉사를 했다. 그러다가 올해 2학년이 되자 학교운영위원 선출이 있다고 가정통신문이 왔다. 마침 주위에서 학교운영위원회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 들은 바도 있고 해서 신청했고 학부모운영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운영위원의 권한과 한계를 잘 몰랐는데 막상 겪어보니 상식선에서 할 수 있는 발언이나 지적을 하는 정도였다. 운영위원이 되고서 처음으로 맞닥뜨린 중요한 일이 지난 4월에 했던 전년도(2005년) 결산에 대한 심의였다고 기억한다. 수십 쪽에 걸쳐 잔글씨로 빼곡히 적힌 항목과 숫자들은 많이 생소해 보였다. 짧은 시간(운영위원회는 통상 한 달에 한 번, 두 시간여 동안 열렸다)에 꼼꼼히 살피기도 어려웠고 일일이 영수증이나 거래명세서를 요구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내가 전년도 예산안 심의에 참여하지 않은 탓도 있겠다. 교장선생님의 발언 중에 ‘아이들은 아주 많은데 예산이 모자라서 힘들다’라고 여러 번 강조하셨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교장선생님은 급식비를 안 내는 아이들 때문에 연간 400만 원 이상 적자가 발생한다며 급식비를 안내는 아이들에 대한 대처 방법을 공개리에 묻기도 했다. 그런 중에 이해가 가지 않는 지출 항목 및 금액이 몇 가지 눈에 띄었다. 학교 선생님들에게 지급할 목적으로 구입한 피복비(단체 트레이닝복) 지출과 교장실의 회의용 테이블 구입 및 골프연습장 조성비 등이었다. 우선 5억 정도인 예산에서 무려 1100만원이나 들여서, 안정된 급여생활을 하고 있을 학교선생님들의 단체복을 산 이유가 무엇인지 따져 물었다. 학교장의 ‘선생님들 숫자가 많아요’라는 납득 못할 답변을 듣는 중에 한 교사운영위원이 자기가 입고 있는 옷을 가리키며 ‘이 옷이 올해 예산에서 구입한 옷’이라며 별일 아니라는 투로 이야기한다. 그때 내가 알기로 그 선생님은 전교조 조합원이었다. 다른 운영위원은 별로 발언도 하지 않는 분위기에서 혼자 계속 추궁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다른 이야기를 꺼낼 의욕도 생기지 않았다. 결국 내년도 예산 심의를 벼르며 지날 수밖에 없었다.   학교 운영위원회의 모습 사진출처 - 한겨레 그러다가 지난 11월 운영위원회에서 다른 학부모운영위원이 한 가지 문제를 제기했다. 학교의 도서관 도서구입비로 700만 원이 책정되어 있는데 그중 도서구입비로는 2십만 원 남짓만 쓰이고 대부분의 돈이 3, 4, 5, 6학년의 한자교재 구입에 지출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학교장은 한자교재도 ‘책’이라며 예산 운용상 별문제가 없다는 투로 일관했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평소에 독서교육의 중요성을 운운하던 학교장의 입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다니... 말은 예산 부족 때문이라며 둘러대지만 연초에 이처럼 집행한 것은 애당초 도서관에 대한 마인드가 전혀 없기 때문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수많은 아이들에게 직접적으로 혜택이 갈 수 있는 일이 학습준비물센터와 도서관 운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부분을 위한 예산을 우선순위에 두지 않는 교육현장이 과연 제대로 된 교육현장인지 심히 의심스러웠다. 관계 교육청에 질의해 보아도 도덕적으로는 문제가 되나 법적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며 모호한 답변만 나올 뿐이었다. 아무리 예산을 잘 짜고 그 예산안에 대해 눈을 부릅뜨고 심의를 한다 해도 이처럼 교장 임의로 예산 전용이 가능하다면 도대체 학교운영위원회는 무엇 하러 두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교육현장에 몸담고 있는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관행과 타성에 젖어 문제의식이 둔해질 수밖에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생각하지 아니하는 한, 전교조라는 울타리도 전혀 학부모의 지지를 받지 못하게 되리라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한 해였다. ‘학운위’는 심의만 할 뿐 매사의 결정권은 교장에게 있다며 수시로 학교운영위원회에서 권위와 권력을 으스대는 교장의 모습과 실제로 새퉁빠지게 무보수 봉사만 할 뿐 학교 운영에 있어서는 뒷전으로 밀려나는 학부모들의 모습을 보며, 수십 년 전 학창시절 때 느꼈던 학교장의 무소불위의 권력을 새삼 느끼게 된 한 해였다. 이처럼 막강한 학교장의 권력 때문에 어떠한 학교장이 오느냐에 따라 교육환경이 천양지차가 되는 학교의 현실을 보며 그저 하늘(교육청의 인사)만 바라보아야 하는 학부모와 학생들이 불쌍하기가 그지없다. 이런 교장의 권력행사를 보며 또한 전교조의 방침에 심한 회의가 들었다. 지난번 이른바 ‘교원평가’와 관련한 전교조의 ‘무조건적인 반대’ 투쟁이 과연 온당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알기로 현재의 교원평가(승진과 관련한 고과 평가)는 교장과 교감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다. 자연히 학교의 모든 권력이 교장과 교감에게 가 있을 수밖에 없는 구조 아니겠는가. 이런 구조를 깨지 않고 소위 교육민주화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 이런 승진제도를 개혁하지 않고 ‘참교육의 실현’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교원평가’와 이른바 ‘교장선출보직제’ 같은 것을 맞바꿀 순 없었을까? ‘교원평가’를 받아들이는 대신 획기적인 평가시스템을 내놓을 순 없었을까? 상당히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는 어떤 교사가 있었다. 그는 전교조에 소속되진 않았었지만 그가 쓴 [어린 종달새의 죽음]을 보면 그 어떤 전교조 선생님보다도 불의를 참지 못하고 교장이든 교감이든 저항했던 훌륭한 교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더 이상 교단에 머무는 것은 계속 자신과 아이들을 기만하며 죄만 저지르는 일이라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더니 어느 날 홀연히 사표를 던졌다. 그가 얼마 전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 ‘우리 교단에는 100년이 흐르도록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따라서 당연히 깨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일제 시대 이래 내려오는 군국주의 시대의 교장 권력이다. 그것은 전교조 선생님들도 마찬가지라고 이야기 한다. 그들도 결국 교감, 교장이 될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권력을 향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란다. 제발 이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교장은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을 어떻게 하면 교육환경의 개선에 일조할 수 있을까 하는 데만 골몰한다면 이 땅의 교육환경은 획기적으로 좋아지지 않을까? 학교장 단체도 있다고 들었는데 이들은 모여서 도대체 무슨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는 걸까? 교장, 교감을 목표로 삼지 않고 오로지 ‘참교육의 실천’만을 위해 묵묵히 교단에서 아이들을 사랑으로 가르치며 평생을 보내신 선생님이 교장, 교감을 역임하지 못했어도 그 어떤 선생님보다 존경받으며 퇴임하는 아름답고 훌륭한 풍토가 조성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무너진 교권이 진정으로 되살아나고 학교가 살아나는 꿈을 꾼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소망일까?   홍승권 위원은 현재 삼인출판사 부사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534 | 추천: 0
사람들은 마지막이라고 하면 거의 모든 것에 대하여 관대하다. 극단적인 예로 죽음을 앞둔 사형수에게도 살아서의 모든 죄에 대해 사하여 주는 미덕(?)까지도 베풀고 말이다. 그래서 다시는 오지 않을 시간을 아쉬워하며 연말에는 여러 가지 이름의 성금들이 이런 사람들의 마음을 알고 모아지고 있다. 본인이 속한 학교에서도 어김없이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 따뜻한 사람으로 키우기 위한 성금 모으기 행사가 있었다. 전교어린이회에서 결정된 3일 동안의 불우이웃돕기성금 행사가 담임교사들의 교육적 지도와 어우러져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돈을 어떻게 쓸 것인지에 대한 과정상에 발생하였다. 문제가 진행된 경위는 이렇다. 성금을 모으고 교장, 교감, 교무부장, 담당부장, 담당계원으로 구성된 선정위원회가 모여 수혜자 선정을 하였는데, 교장선생님께서 기사(교육이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학교를 관리하는 행정실 소속의 공무원) 두 분이 어려우니 수혜자에 포함시켰으면 좋겠다. 그러나 일부만 포함시키는 것이 좀 그러하니 네 분 모두와 교무보조(교무실에 비치된 행정보조역으로 보통 아르바이트생들이 많으며 교사들의 업무지원이 목적이나 현실적으로는 교감의 비서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음), 우유배달 아주머니(우유를 각 반에 가져다주는 분으로 비정규직) 등을 포함시키자고 제안하였다. 담당부장이 기사 분들을 모두 포함시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전교어린이회에서 결정하거나 교직원 회의 시 의견을 모아 정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이의를 제기하였다. 이에 교장선생님은 그럴 필요가 없다며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그냥 관례대로 하자고 하며 담당부장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1학년을 담임하고 있는 담당부장은 코흘리개 아이들의 돈을 모아 정규직에 연금까지 있는 분들에게 주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본인과 의논을 하기위해 찾아왔었다.   강원도 속초시내 유치원 어린이들이 13일 시청 광장에서 열린 불우이웃돕기 공동모금회 모금행사에 참가해 모금함에 성금봉투를 넣고 있다.    사진 출처- 연합뉴스  일단 성금수혜자선정 원칙이나 기준여부에 대하여 확인하고 동학년 및 다른 학년 교사들의 의견을 조사하였다. 결과는 특별한 기준이나 원칙이 없다는 것과 수혜자선정과정에 문제가 있다고 공감하는 교사들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이다. 바로 교감, 교장선생님께 수혜자원칙을 만들자는 것과 각 학년의 교사들로 구성된 선정위원회를 구성하여 다시 선정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모든 일에 대하여 교사들의 동의를 구할 수 없다는 것과 교육을 위해 애쓰는 교사들보다 형편이 못한 사람들에게 지급된 것이므로 하등의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교장선생님은 계원의 일에 월권을 행사하는 사람,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기사 분들을 고려하지 않는 인정머리 없는 사람으로 매도하며 원천적으로 문제제기할 수 없도록 분위기를 만들어나가는 등 수장으로서의 처신으로도 적절하지 않은 행동까지 하였다. 그러면서 담임교사들이 추천한 어린이들을 포함한 수혜자들에게 지난 18일 성금이 지급이 되고 말았다. 이에 해당교육청에 학교장에게 적절한 지도가 이루어지도록 요청하는 민원을 제기하였으나 돌아오는 답변 또한 가관이었다.             ‘불우이웃돕기 수혜자 선정과 관련하여            적정한 의견 수렴 과정을 거쳐            수혜자 선정 원칙 및 기준을 정하여 수혜자를 선정하고            투명하게 집행하도록 귀교에 지도하였습니다.’   ‘어떻게 지도하였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답변이 없는 것이 무성의하게 느껴졌다. 역시 이후 학교의 어떤 변화에 대하여 들은 바도 아는 바도 없었고 의견수렴과정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실 이 문제는 본교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이전에 근무한 학교에서도 이런 문제에 대하여 이의제기를 하였고 그 결과 원칙대로 해당 어린이들에게 지급되도록 개선시킬 수 있었다. 교장선생님이 얘기하고 있는 관례라고 하는 것도 역시 그전부터 아무 문제제기 없이 해오던 방식이다. 정확한 내용은 조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서울시내 학교에서 이와 비슷한 사례가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모을 때는 교육적... 운운하며 막상 성금을 전해 줄 때는 마치 개인 돈인 양 인심 쓰듯 하는 행태들! 또한 이런 일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저질러버리는 관행에 젖은 관료들과 가재는 게편이라고 그들과 한통속인 상부의 행정기관들 모두 한심하다는 것! 그리고 이들이 앞으로도 얼마동안은 학교 행정을 맡아 진행할 것이라는 현실이 한숨 나오게 하는 일인 것이다. 그리고 작다면 작은 이런 일들이 원칙 없이 행해지고, 당연한 원칙들이 초라한 권력 앞에 기도 펴지 못하고 사그라지는 현실은 원칙을 지키고자 하는 많은 교사들을 좌절시키고 입을 다물게 한다는 것이다. 가장 훌륭한 교육은 교사가 말로 하는 가르침이 아닌 행해지는 실천 그 자체라고 했다. 교사개인의 행동은 개인의 행동만이 아닌 교육으로 승화될 좋은 바탕이 되는 것인데 이런 환경은 가지고 있던 원칙마저 현실과 타협하게 만들어 버린다. 말하기도 부끄러운 이런 일들이 이런 지면을 통해 고쳐지기를 희망하는 것은 지나친 꿈인가! 아니면 이렇게라도 몇 마디 끄적여서 위안을 삼을 것인가!!   황미선 위원은 현재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682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