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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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학교 역사문화컨텐츠학과 교수), 이찬수(전 보훈교육연구원장),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장발장은행장)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오항녕 / 인권연대운영위원   “윤석열 정부의 망국 외교를 비판하는 범국민대회를 열고 윤 대통령의 사과와 박진 외교부장관 등의 파면을 요구했다.” (오마이뉴스, 2023년 3월 18일) 사람들의 속을 뒤집어놓은 일본 방문 결과를 놓고 민심을 전하는 기사이다. 얼마 전에도 우리는 이태원 10.29 참사와 관련하여 장관 이상민이나 경찰청장 윤희근에게, 학교폭력과 관련된 정순신에게 사과를 요구하였다. 꽤 오래 전부터 나는 이런 사과 요구가 뭔가 초점이 어긋나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사과는 잘못했다는 인정이다. 반성을 기초로 한다. 반성이란 돌이켜 되짚어본다는 말이다. 이를 참회, 회개라는 말로도 쓸 수 있을 것인데, 모두 후회[悔], 뉘우침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오래 전에 이렇게 말한 바 있다. ① 참회는 번뇌를 태우고 천상에 태어나게 한다.(대승본생심지관경) ②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누가복음 15:10) 부처님은 참회가 번뇌를 태워 없애버린다고 했다. 사실 보통사람들에게 참회는 번뇌와 함께 찾아온다. 참회하려니 창피하고 부끄럽고 민망하다. 벼라별 핑계를 다 댄다. 그래서 공자님은 ‘소인배는 잘못을 저지르면 항상 변명을 한다’고 못박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변명을 찾아내려는 발버둥 자체가 곧 번뇌라고 부처님은 가르쳤다. 예수님도 부처님처럼 회개가 천상의 기쁨이라고 격려하셨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은 그만큼 참회와 회개가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람들은 잘 반성하지도, 뉘우치지도 않는다. 심리학자 레온 페스팅어(Leon Festinger)의 조사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믿음에 따라 행동을 바꾸기보다 행동에 따라 믿음을 조정한다.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라 합리화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수요집회 : 3.1절에 1588회째 열리고 있었다. 가해자의 사과는 시간이 흐를수록 어려워진다. 시간은 천사의 편이 아니다. 그럼에도 사과를 요구하는 건 우리가 이 세상에 같이 살고 있는 인간임을 보여달라고 손을 내미는 것이리라. 물론 그 뜻을 알지는 모르지만.] 일단 행동을 합리화하면 이어서 다음 행동도 합리화한다. 지난 주 이찬수 운영위원의 칼럼 〈대통령(실)의 문장력〉에서 인용한 바, 대통령의 3.1절 기념사 중 “우리가 변화하는 세계사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미래를 준비하지 못한다면 과거의 불행이 반복될 것이 자명합니다.”라는 말은 일본의 불법적 국권침탈을 불행의 근본 원인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나온 발언이다. 이러한 가해자 논리의 내면화, 또는 노예 근성에 대한 성찰은 하루이틀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오므라이스를 먹든, 게이오 대학에서 조선을 정벌하자고 주장했던 오카쿠라 텐신을 찬미하든, 술이 누가 제일 세냐고 묻든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누가 술이 센가’ : 나는 여기서 ‘가해자에 대한 투항’을 읽는다. 이런 노예 근성은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성찰할 수 있는 인격이 없을 때, 합리화는 계속되고 또 길어진다. 실제로 3.1절 기념사 5분, 그리고 저 투항을 합리화했던 국무회의 발언은 26분이나 걸렸다.] 이찬수 운영위원은 “여러 걸음 양보해, 외교적 편향성이나 자의적 자유 관념 같은 것은 정권의 속성에 가까우니 교정에 시간이 걸린다 쳐도, 문장만이라도 격조있고 간결하며 논리도 어느 정도 완결적이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안타까워했지만, 성찰이 결여된 문장이나 논리가 격조 있고 간결하며 완결적인 적은 없다. 내가 보기에 3.1절 기념사가 엉터리였던 것은 그것이 인지 부조화의 합리화, 즉 핑계와 억지의 기념사였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기운이 없을수록 반성하기 어렵다. 나이 먹어가며 ‘꼰대’가 되는 이유가 다른 데 있지 않다. 돌아볼 기운이 없기 때문이다. 잘 늙기가 어려운 이유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릇된 행동이나 말을 성찰하는 인간들이 있다. 이들은 그릇된 행동을 고친다. 페스팅어 조사에서 놓친 지점이 이것이다. 합리화도 정당화도 하지 않고 그 순간을 가만히 쳐다보는 인간들이 있다. 변명과 핑계의 번뇌를 떨치고 천상의 격려를 받는 인간들이 있다. 이들은 사과할 줄 안다. 그렇게 사과는 누가 요구해서 하는 게 아니라, 알아서 하는 것이다. 성찰에 동반된 성숙함이 보여주는 고상한 인격의 표현이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많은 분들에게 간곡히 제안한다. 사과를 요구하지 말자고. 사과할 사람 같았으면 진즉에 했을 거라고. 나아가 사과하라는 요구는 부질없으며, 우리가 판단하고 행동하면 된다고. 사과를 요구할 시간에 준엄하게 야단을 치고, 날카롭게 비판하자고. 그리고 정작 사과 받을 사람들이 자괴감에 빠지거나 냉소하지 않도록 함께 손잡고 기운 내고 당당하게, 아름답게 살자고. 오항녕 위원은 현재 전주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23-03-28 | hrights | 조회: 553 | 추천: 9
이찬수 / 인권연대 운영위원 윤석열 대통령이 낭독했던 2023년 제104주년 3.1절 기념사를 읽으면서 걱정부터 앞섰다. 대통령의 국경일 기념사치고는 내용적 빈약, 논리적 비약, 개념적 모호, 외교적 편향 등이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아래에 기념사 전문을 인용하면서 각 문단에 대한 필자의 소감과 평가를 고딕체로 표기해보았다. 출처 - 경향신문 (대통령 기념사)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750만 재외동포와 독립유공자 여러분, 오늘 백네 번째 3.1절을 맞이했습니다. 먼저,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신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들께 경의를 표합니다. 독립유공자와 유가족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104년 전 3.1 만세운동은 기미독립선언서와 임시정부 헌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국민이 주인인 나라, 자유로운 민주국가를 세우기 위한 독립운동이었습니다. 새로운 변화를 갈망했던 우리가 어떠한 세상을 염원하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인 날이었습니다.” → 첫 번째 문단은 비교적 자연스러운 인사말로 시작했다. 그런데 이어지는 문장에서부터 머리를 갸우뚱하게 된다. 작은 문제부터 이야기하면 이렇다.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합해 ‘독립유공자’라고 한다. 그런데 이들을 이어서 읽거나 듣는 국민은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외에 ‘독립유공자’가 별도의 존재인 것처럼 오해할 수도 있다. ‘순국선열’은 단수로 쓰고 ‘애국지사들’은 복수로 쓴 것도 의아하다. 무슨 의도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진지하게 검증하지 않았다는 뜻일 것이다. 그리고 “기미독립선언서”는 독립을 ‘요청’하는 문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지금 독립했다는, 결기에 찬 ‘선언’이다.(독립 ‘선언’은 1918년 1차대전 승전국인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알려지면서 그에 희망적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임시정부 헌장에서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제1조)며, 당시의 현재 시점에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기념사에서는 이 둘을 “자유로운 민주국가를 세우기 위한 독립운동”으로 규정하면서, ‘자유로운 민주국가’가 독립운동의 목적 혹은 미래적 염원인 것처럼만 말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당시의 정황상 온전한 자유와 독립은 분명히 미래적 희망이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의 선조가 조국의 독립을 ‘요청’하기 보다는 이미 독립했다며 당찬 ‘선언’을 하고 있다는 사실, 그 결기를 부각시키는 문장이었으면 좋았을 뻔했다. 기념사에서 본격적으로 염려되기 시작하는 것은 ‘자유’의 개념이다. 3.1운동 당시 ‘독립’과 ‘자유’는 사실상 같은 의미이기에 선언서에서도 ‘자유’라는 말을 강조했다. 이때의 자유는 외세, 즉 일본으로부터의 자유였다. 그런데 기념사에서는 ‘3.1만세운동’이 ‘자유로운 민주국가’를 세우기 위한 운동이었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3.1독립운동’이라는 특수성을 “자유로운 민주국가”라는 오늘의 언어와 쉽게 동일시하고 역사적 특수성을 추상화시킨다. 그러면서 대통령이 의도하는 자신만의 자유 개념으로 이어간다. 주지하다시피 대통령이 취임 이후 강조한 자유는 반사회주의적, 신자유주의적, 개인주의적 자유에 가까워 보인다. 이런 관점은 이번 기념사에서도 대동소이해 보인다. 이것은 다음 문단에서 ‘세계적 복합위기’, ‘북핵 위협을 비롯한 안보 위기’, ‘사회적 분절’, ‘양극화’, ‘변화하는 세계사의 흐름’, ‘경제’, ‘번영’ 등의 표현으로 이어가는 데서 추측할 수 있다. 104년 전 자유와 독립의 의미와 그 헌신적 정신을 좀 더 살리면서 진지하게 담아냈어야 했다. “그로부터 104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하고 고통받았던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봐야 합니다. 지금 세계적인 복합 위기, 북핵 위협을 비롯한 엄혹한 안보 상황, 그리고 우리 사회의 분절과 양극화의 위기를 어떻게 타개해 나갈 것인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가 변화하는 세계사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미래를 준비하지 못한다면 과거의 불행이 반복될 것이 자명합니다.” → 본격적으로 문제가 되기 시작하는 문단이다.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하고 고통받았다”는 말은 대한민국 밖에서 제3자의 눈으로 보면 일단 맞는 말이다. 하지만 전 국민이 자신의 주권을 자발적으로 반납하고 스스로 노예의 길로 간 것이 아닌 한, 국권을 빼앗아간 세력에 대한 비판 정신은 담아냈어야 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기념사에는 ‘누구에게 국권을 빼앗겼나/누가 국권을 빼앗았나’, ‘누구에게 고통을 받았나/누가 고통을 주었나’의 문제를 아예 빼버렸다. 전 국민이 다 아는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지는 않다. 대통령의 정치적이고 외교적인 의도가 다분히 반영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리고 “미래를 준비하지 못한다면 과거의 불행이 반복될 것이 자명하다”고는 말하지만, ‘과거의 어떤 불행이 어떻게 반복된다는 것인지’가 막연하다. 3.1절 기념사인 만큼, 과거의 불행이라는 말을 들으면 한국인 누구나 일본에 의한 피식민 경험을 떠올린다. 일본의 불법적 국권침탈이 불행의 근본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념사에서는 불행의 원인과 위기의 근원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한국 탓’인 것처럼 해설한다. ‘북핵 위협’ 탓에 불행이 올지 모른다며 안보의 문제를 북한 탓으로만 돌리는 경향도 보인다. ‘북핵 위협’을 두 번이나 강조하는 것으로 봐서는 북한의 대남 공격이 우려된다는 말로도 들린다. 실제로 그럴 수 있을 가능성과는 별개로, 현 정권의 정치적 관심을 더 많이 반영하다보니 ‘3.1 만세운동’의 역사적 의미와 다소 거리가 멀어진 것도 분명하다. (이상의 두 문제점은 일본, 미국과의 협력이 중요하다는 다음 문단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또 다른 문제는 “사회의 분절과 양극화의 위기를 어떻게 타개할 것인지 생각해봐야 한다”면서, 어떻게 타개하고 구체적으로 무엇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인지, 그 단순한 대안도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회적 분절과 양극화의 위기를 타개”해야 한다는 말을 꺼냈으면, 가령 대화와 타협으로 사회적 통합을 위한 공정한 복지정책이 중요하다든지 하는 말로 이어갔어야 한다. 기념사에 그런 낱말이나 표현이 전혀 없다 보니 ‘그래서 어쩌라는 것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인지’, 읽고 들으면서 구체성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공허하다. “아울러 우리는 그 누구도 자기 당대에 독립을 상상하기도 어려웠던 시절에, 그 칠흑같이 어두운 시절에,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던진 선열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조국이 어려울 때 조국을 위해 헌신한 선열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3.1운동 이후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일본은 과거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안보와 경제, 그리고 글로벌 어젠다에서 협력하는 파트너가 되었습니다. 특히, 복합 위기와 심각한 북핵 위협 등 안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한미일 3자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습니다.” →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던진 선열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는 말은 지당하다.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면 우리에게 미래가 없다”는 말도 옳다. 그런데 일본으로부터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삶을 기억하자면서, 이어지는 문장에서는 느닷없이 “지금 일본은 과거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파트너”라는 긍정적인 발언만 한다. 아무런 해설이나 연결점 없이 일본에 대한 최상의 평가로만 이어간다. 정말 오늘의 일본은 과연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가. 정말 그렇다면 일본과 한국의 관계가 편안하고 사이가 좋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왜 수천만 한국인이 왜 지금까지도 일본을 의심하고 여전히 갈등하는가. 일본 정치인은 왜 한국을 무시하는 발언을 시시때때로 하는가. 일본 국민, 특히 유력 정치인들도 한국을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협력 파트너”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그런 이들도 있지만, 아닌 이들이 더 많다. 더욱이 “보편적 가치”란 무엇을 말하는지 와닿지 않는다. “칠흙같이 어두운 시절에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진 선열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는 말과 “지금 일본은 보편 가치를 공유하는 협력 파트너”라는 말 사이에 무언가 연결고리가 될만한 단어나 문장을 좀 넣었어야 했다. 느닷없이 일본에 대한 칭송이라니... 3.1절 기념식에서 행한 대통령의 문장치고 너무 허술하며, 정치외교적 관점과 속내를 더 의심하게 만든다. 그리고 “세계적인 복합 위기”라면서 왜 일본, 미국과의 협력만을 중시하는지도 별 설득력이 없다. 6.25전쟁 기념일도 아닌, 3.1절 기념사에 왜 ‘북핵 위협’을 두 번이나 언급하는지도 잘 와닿지 않는다. 북핵 위협은 분명히 한반도 안보 위기의 주요 계기이다. 그런데 한반도 안보 위기는 단순히 한반도 내부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적인 “복합 위기”와 연결되어 있는 현상이다. 게다가 이 복합 위기의 배후에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가슴 아픈 피식민 경험, ‘동아시아대분단체체’(이삼성 교수의 표현) 하에서 발생한 6.25전쟁, ‘분단체체’ 하에서의 남북 간 이념적 대립, 중국의 굴기와 미국의 대아시아 전략의 충돌, 러시아의 부활 시도 등에서 비롯된, 세계적 신냉전의 기류와 같은 전 세계의 오랜 복합적 역사가 놓여있다. 세계 각국의 생존 전략, 강대국들의 영향력 확대 전략과 직결되어 있는 문제이다. 이런 세계적 차원의 위기 상황에서 왜 일본 및 미국과의 협력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고 하는지 잘 납득되지 않는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기념사인 만큼 그 힌트를 얻을만한 낱말이라도 제시하는 성의라도 보였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북핵 위협”을 해소하기 위해 일본, 미국과 협력해야 한다는 말이라면 상황에 따라 맞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더라도 굳이 3.1절 기념사에서 꺼낼 말 같지는 않다. 더욱이 정말 “북핵” 문제를 풀려면 북한과 밀착되어 있는 중국, 러시아와도 협력해야 하는 상황이다. ‘동아시아대분단체제’의 특정한 진영 가령 미·일 편에 서는 것만이 과연 “세계적인 복합위기”에 대응하는 방식이라는 말인가. 미국이 한국의 국권 상실에 책임 있는 국가라는 사실을 굳이 밝힐 필요는 없더라도(미국은 1905년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인정했다), 국권을 되찾으려 목숨까지 초개처럼 버린 선열들의 사진을 행사장에 걸어놓고는, 일본 및 미국과의 협력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을 사진 속 선열들은 어떻게 볼까. 착잡하다. 그리고 어디는 ‘선열’로 단수형으로 표기하고, 어디는 ‘선열들’로 복수형으로 표기하는 식의 일관성 없는 문장도 적지 않은 문제다. 물론 단수형으로 써도 독자들은 복수의 인물을 연상한다. 그런 점에서 의미전달에 별 문제는 없다. 그래도 단수로 쓰든 복수로 쓰든 통일했어야 한다. 적어도 대통령의 기념사라면 흠잡을 데 없는 문장이어야 한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동일 용어를 단수로 썼다가 복수로 썼다가 하면, 고민없고 성의없는 문장으로밖에 더 보이겠는가. “우리는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과 연대하고 협력해서 우리와 세계시민의 자유 확대와 공동 번영에 책임 있는 기여를 해야 합니다. 이것은 104년 전,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외친 우리 선열들의 그 정신과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 큰 틀에서 맞는 말이다. 그런데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은 어디를 말하는가. 우리가 “세계시민의 자유 확대와 공동 번영에 책임있는 기여를 해야 한다”는데, 이때의 “세계시민의 자유와 공동번영”은 말 그대로 “세계시민의 자유와 공동번영”인가, 아니면 특정 진영에 유리한 자유와 그들만의 번영인가. “세계시민”에 북한, 중국, 러시아 등의 나라도 포함되는가. ‘세계시민’이니 ‘공동번영’이니 하는 말을 썼다면 이어지는 내용도 정말 인류 보편의 가치와 관련된 문장으로 이어가야 한다. 그런데 이미 “한미일 3자협력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이미 콕 집어 말해버린 바람에, ‘세계시민’, ‘공동번영’과 같은 말은 한낱 입에 발린 수사나 공허한 구호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속내는 다른 곳에 두고 그럴듯해 보이는 공수표 몇 개로 논리적 일관성 없이 포장만 한 것 같은 느낌이다. 나만의 오해이고 오독일까. “국민 여러분, 우리가 이룩한 지금의 번영은 자유를 지키고 확대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과 보편적 가치에 대한 믿음의 결과였습니다. 그 노력을 한시도 멈춰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이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신 선열에게 제대로 보답하는 길입니다. 영광의 역사든, 부끄럽고 슬픈 역사든 역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미래를 지키고 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조국을 위해 헌신한 선열을 기억하고 우리 역사의 불행한 과거를 되새기는 한편, 미래 번영을 위해 할 일을 생각해야 하는 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우리 모두 기미독립선언의 정신을 계승해서 자유, 평화, 번영의 미래를 함께 만들어 갑시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 일단 첫 문장부터 손을 좀 보아야 한다. “우리가 이룩한 지금의 번영은 자유를 지키고 확대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과 보편적 가치에 대한 믿음의 결과였습니다.”는 “우리가 이룩한 지금의 번영은 보편적 가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자유를 지키고 확대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였습니다.”로 바꾸는 것이 더 좋다. 그래야 개념적으로 더 온전하고 말하려는 의도도 더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번영’은 믿음이라는 내적 태도의 직접 결과라기보다는, 믿음을 가지고 실제로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일국의 대통령(실)에서 나온 문장치고는 많이 어설프다. 이번 기념사에는 “보편적 가치”라는 말을 세 번이나 담고 있다. 앞에서도 잠시 말했지만, ‘보편적 가치’란 전 인류가 옳다고 동의하고 공감하기에 가능한 모든 이들이 추구하는 공통의 가치를 의미한다. 정말 이런 의미에서 썼다면, 이를 구체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한시도 멈춰서는 안된다”는 당부는 진지하게 와닿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문장에서도 자유를 지키고 확대하기 위한 노력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불분명하다. 어떤 자유를 의미하는지도 모호하다. 나의 자유가 타자에게 어떤 식으로든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점에서 모든 자유는 책임을 동반하는 제한적이고 상생적인 자유여야 한다. 독립운동도 우리의 자유를 제한한 외세, 특히 일본에 대한 저항이었고, 남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은 지당하다. 당연히 타자의 자유를 침해한 데 대한 책임을 충분히 묻는 것도 당연한 요구이고 권리이다. 그런데 이번 3.1절 기념사에서 말하는 자유는 우리의 아픈 역사적 경험에 기반하면서도 국민과 인류에게 두루 통할 자유를 말하는 것 같지 않다. “우리가 이룩한 번영이 자유를 지키고 확대하기 위한 노력과 믿음의 결과였다”며 “번영”을 주어로 내세운 것으로 봐서는 경제적 차원의 자유, 특히 신자유주의적 자유, 더 좁히면 반사회주의적 자유를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물론 번영을 이끈 자유라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자유는 “부끄럽고 슬픈 역사”를 기억할 때 느껴지는 감정이나 정서와 거리감이 있는, 너무나 현실적인 언어이다. 게다가 “부끄럽고 슬픈 역사”를 기억하는 행위와 우리의 역사를 그렇게 슬프게 만든 주요한 원인 중의 하나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번영을 위한 자유’라는 말은 너무나 많은 역사와 정서를 생략해버리고 만다. 오늘까지도 꼬여있는 한일 관계는 쌍방이 균형감 있게 풀어야 한다. 3.1절은 우리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계승하고 성찰해야 하는 날이기도 하지만, 일본이 역사적 책임을 잊지 않도록 요청해야 하는 날이고, 쌍방 간 해결방안을 더 고민해서 제시해야 하는 날이기도 하다. 그런 쌍방적 균형감 없이, 세계적 복합 위기 및 북핵 위기에 일본과 공동으로 대처하자는 일방적 제안은 한반도의 절반인 북한과의 갈등을 다시 촉발시키고, 해묵은 남남갈등을 풀지 못할뿐더러, 일본과의 미래도 불투명하게 만드는 발언들이다. 무엇보다 한·미·일 협력에 비례해 북·중·러와 척을 지는 방식은 한·미·일 협력의 효과를 전혀 내지 못한다. 이번 기념사는 3.1절이라는 슬프고도 자랑스러운 역사적 정신과는 거리감이 느껴진다. 일국의 대통령(실)에서 나왔다고 하기에는 개념적으로 불명료하고 의미상 비약이 크며 전체적으로 안일한 문장들이 많다. 여러 걸음 양보해, 외교적 편향성이나 자의적 자유 관념 같은 것은 정권의 속성에 가까우니 교정에 시간이 걸린다 쳐도, 문장만이라도 격조있고 간결하며 논리도 어느 정도 완결적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전 국민이 보고 들으며 국내외적 영향력도 큰 기념사 아닌가. 이찬수 위원은 현재 레페스포럼 대표로 재직 중입니다.
2023-03-22 | hrights | 조회: 777 | 추천: 11
임아연 / 인권연대 운영위원 여·야의 정치 공방이 ‘현수막 난타전’으로 이어지고 있다. 시내 주요 도로뿐만 아니라 작은 읍·면·동 길목마다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이 상대 정당을 비난하는 내용의 현수막을 경쟁적으로 게시하면서 시민들은 정치에 대한 피로감을 넘어 혐오감으로 느끼고 있다. 출처 - 세계일보 이른바 ‘50억 클럽’ 사건으로 기소된 곽상도 전 국회의원이 지난달 무죄를 선고받은 이후 더불어민주당 당진지역위원회에서는 “최저임금 노동자 200년치 월급 50억, 아버지 저도 퇴직금 50억 받고 싶습니다”라고 적힌 현수막을 지역 곳곳에 게첨했다. 이에 반격하듯 국민의힘에서는 “아들아, 부당이득 탐나거든 대장동을 기억해라!”, “민주당이 정쟁에 몰두할 때, 국민의힘은 민생에 집중합니다”라고 적힌 현수막을 지역 곳곳에 내걸었다. 출처 - 세계일보 지정게시대가 아닌 곳에 정치 현수막이 내걸리고 있는 것은 지난해 말 개정된 옥외광고물법 때문이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지자체장의 허가를 받아 지정게시대에만 현수막을 게첨할 수 있었으나, 지난해 12월 정당 현수막에 대해서는 규제를 없앤 옥외광고물법이 시행되면서 교차로 등 어느 곳에나 현수막을 달 수 있게 됐다. 기존 옥외광고물법에는 ‘광고물 등을 표시하거나 설치하려는 자는 허가를 받거나 신고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었으나, 통상적인 정당활동을 보장한다는 명목으로 정당 현수막은 예외로 한 것이다. 여기에 정치 공방이 더해지면서 전국적으로 거리 곳곳에 정당 현수막이 난립하고, 상대 당에 대한 비난과 막말이 난무하고 있다. 정당 현수막 난립으로 인해 시민들의 민원도 빗발쳤다. 당진시에서는 법에서 허용 가능한 정치 현수막일지라도 상대 정당에 대한 비난하는 내용이 담겨 있을 경우 현수막을 제거하겠다는 입장이다. 당진시는 “내부 검토를 통해 정책·현안 홍보가 아닌 비방하는 내용이 담긴 현수막에 대해서는 지난 20일부터 철거하고 있다”며 “각 정당과 현수막을 제작하는 옥외광고물협회 측에도 비방이 담긴 현수막은 게시하지 않도록 협조를 요청하겠다”고 밝혔다. 기사가 나간 뒤 현수막 대부분이 철거됐으나, 또다시 ‘현수막 정치’는 계속되고 있다. 이전보다 비방의 수위가 조금 낮아진 듯하나, 상황이 크게 나아진 것은 아니다. 비단 당진만의 일은 아니다. 전국 어디를 가도 곳곳에 정당 이름으로 내건 현수막이 게시돼 있고, 내용도 대동소이하다. 이쯤 되면 여·야 할 것 없이 중앙당 차원에서 문구를 정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상대 정당에 대한 비난 일색으로 각 정당은 ‘혐오정치’를 주도하고 있다. 정당의 정책과 입장을 홍보하기 위해 법을 개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현수막 난타전은 그리 효과적이지 않아 보인다. 혐오 표현으로 가득한 현수막을 보면서 시민들은 정치에 대해 관심을 갖거나, 특정 정당의 주장에 대해 호응하기보다, 외려 ‘정치혐오’에 빠질 지경이다. 각종 미디어를 통해 정치에 넌더리를 내는 시민들은 거리를 다닐 때마다 보이는 현수막에 더욱 지쳐갈 뿐이다. 무분별한 현수막으로 인한 환경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법 개정의 취지처럼 제대로 된 효과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모든 ‘혐오’가 그러하지만, 정치혐오 또한 사회 발전을 막는 아주 고약한 레토릭이다. 시민들이 정치에 정나미 떨어지게 함으로써 민주주의의 기본인 건전한 토론을 막고, 시민들의 참여와 관심을 멀어지게 하는 오래된 수법이다. 정치혐오가 만연한 사회에서 평화로운 일상을 지켜내기 위해선 아무런 표현도 하지 않고, 아무런 참여도 하지 않는 방관자로 남아 있어야만 한다. 역사적으로 지배층이 가장 통치하기 쉬운 민족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아무 말 하지 않는 관심 없는 사람들이었다. 출처 - 경향신문 지난 1월 설 명절 당시 아주 특이한 장면을 보았다. 과천시의회 박주리(더불어민주당)·황선희(국민의힘) 의원 게시한 현수막이었다. 지난해 지방선거에서 처음 정치에 입문한 두 시의원은 하나의 현수막에 두 사람의 사진과 이름, 소속 정당을 함께 넣고 “과천시민을 위해 한마음으로 뛰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를 전해 SNS를 통해 화제가 된 바 있다. 이 하나의 현수막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혐오정치 일색인 현실에서 약간의 위로 같은 것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비방 일색의 현수막보다 사회 현안을 두고 벌였던 치열한 정치토론이 그립다. 임아연 위원은 현재 당진시대 편집국 부국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발자국통신 #당진시대 #부국장 #임아연 #정치혐오 #혐오정치
2023-03-14 | hrights | 조회: 531 | 추천: 4
오인영 / 인권연대 운영위원 역사 세계에서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 이를테면, 천 년 넘게 천동설이 지배해 온 세상에서 지동설을 본 코페르니쿠스, 사과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에서 중력의 존재를 본 뉴턴(사실, 사과나무 이야기는 볼테르가 지어낸 허구지만 수사학적으로 쓰자면), 우연과 참화와 살육으로 가득 찬 역사에서 자유의 필연적 확대를 본 헤겔, 암흑 같은 일제 강점 하에서도 광복의 빛과 희망을 본 애국지사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그들은 교조적 신앙의 도그마, 오래되었지만 그릇된 통념, 이상을 압도하는 현실의 힘, 내 한 몸의 안위 따위에 갇혀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과학적 진리나 진실, 자유 정신의 힘, 역사의 미래를 본 사람들이다. 그래서 남다른 역사적 위인으로서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의 대상이나 모방의 전범(典範)으로 ‘추앙’을 받는다. 이런 경우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 남다름이란 비범함의 동의어이자 위대함의 유의어가 된다.   출처 - 경향신문   현실 세계에는 남들이 보는 것조차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 한사코 보지 않으려는 사람들일 수도 있다. 이를테면, 수천 년이나 된 인류문명의 발상지임을 보지 못하고(/않고) 그곳에 무차별폭격을 명하는 사람, “밥과 자유의 선택은 굶지 않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잔인한 퀴즈”(고(故) 정운영 선생의 표현)임을 보지 못하고(/않고) 파업노동자들에게 무조건 해고와 강제진압을 명하는 사람, 친일 잔재를 청산하고 분단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과거타령’이니 ‘친북좌파’니 하며 폄하하고 호도하는 극우들이 그렇다.   이들은 자국 이기주의, 이기적 탐욕과 왜곡된 인식, 착란적 사고방식에 빠져서 남의 나라에도 문명이 있고 사람이 살고 있음을, 생존이 자유롭지 않은 상태에서 계약의 자유란 강자의 자유에 불과한 것임을, 자주독립을 향한 강렬한 의지와 한반도의 평화와 민주주의를 향한 고투(苦鬪)의 역사를 보지 못한다. 이들은 몰역사적인 수구적 인물들로 경멸의 대상이나 반면교사로 취급된다. 이들의 남다름이란 비단 저열함의 동의어일 뿐만 아니라 위험함의 유의어가 된다.   출처 - 강원신문   남다르기로는 이번 정권도 빠지지 않는다. 불의한 정권의 눈치를 보며 권력의 주구 노릇을 하던 검찰이 권력 그 자체가 된 것도 남다르지만, 아무의 눈치도 보지 않는 “‘검폭’들의 전성시대”(한겨레신문, 정의길 기자의 표현)도 우리 역사에 일찍이 없었다. 어지간한 핵심 권좌는 죄다 검사가 꿰차고 앉았고, 검사 일가붙이는 죄가 있어도 벌을 받지 않는다고 해서 시중에는 “유검무죄, 무검유죄”라는 말이 떠돈다고 한다.   출처 - 경향신문   하긴, 검사의 아들은 젊은 나이에 퇴직금 50억 원을 받아도 무탈하고, 검사의 아내는 형사사건의 무마를 대가로 협찬을 받았다는 의혹에도 불구하고 소환조사 한번 없이 무혐의 처분을 받는다. 또 어떤 검사는 검찰 인권감독관이었던 시절에 자기 아들이 가해자였던 학교폭력에서 끝장 소송을 제기하여 피해자들 괴롭혀서 언론에 보도됐음에도 검사 출신 대통령에 의해 공직에 임명되기도 한다. 반면에 검찰에 찍힌 사람은 무고한 일가붙이까지 죄다 조리돌림을 당한다. 야당의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를 제거할 목적으로 수백 번의 압수수색과 망신주기용 소환, 쪼개기 영장 청구를 남발한다.   나라 밖의 일을 다루는 것도, 나라 안의 일 처리만큼이나 남다르다. “오늘 우리는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하고 고통받았던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놀랍게도 이게 대한민국 대통령이 삼일절 기념식에서 내뱉은 말이란다. “조선이 식민지가 된 것은 구한국이 힘이 없었기 때문이며 세계적 대세에 순응하기 위한 유일한 활로”라고 외친 남다른 매국노 이완용이 되살아난 걸까?   설상가상으로 6일에는 일제강점기 강제 동원 피해자 배상 재원을, 일본 기업은 쏙 뺀 채 국내 기업들의 자발적(?) 출연으로 조성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망발도 이런 망발이 없고, 굴욕도 이런 굴욕이 없다! 이건 “순전히 한국 기업의 돈으로 소송에서 진 일본 기업의 채무를 면책시켜주는 안”(강제동원 피해자 대리인인 임재성 변호사의 말)이고, “대한민국 행정부가 대한민국 사법부 판결을 무력화시킨 ‘사법주권의 포기’이자, 자국민에 대한 외교적 보호권을 포기한 ‘제2의 을사늑약’”(<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이다. 게다가 일본의 수출규제가 해제되기도 전에 WTO 분쟁해결절차를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기억을 2018년으로 돌려보자. 그해 19월 대법원에서 강제 동원 피해자에게 일본 피고 기업이 배상하라는 확정판결이 나왔다. 그러자 아베 정부는 2019년 7월, 불화수소를 비롯한 반도체 핵심 소재 3개의 한국 수출을 막았다. 그리고 그다음 달에는 수출 절차 간소화 혜택을 주는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했다. 이에 당시 문재인 정부는 9월 세계무역기구에 일본을 제소했고, 아직도 일본은 수출규제조치를 해소하겠다는 의사나 일정을 내비친 적도 없다. 아무런 상황 변화가 없는데 가해자에게 피해자가 먼저 용서를 비는 형국이다. 이달 중에 열린다고 하는 기시다-윤석열 회담에서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NMIA, 지소미아)도 정상화될 거라는 소리도 들린다.   호구도 이런 호구가 없고, 얼빠져도 이렇게 얼이 빠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분노가 치민다. 이 정권의 남다름은 비범함-위대함이 아니라 저열함-위험함에 가깝다. 가깝다니, 위험함 그 자체다. 일본의 식민 지배에 대한 평가에는 결코 중립적일 수 없는 근본적 선(the Good)의 문제가 담겨 있다. 노예제도는 악이므로 노예 문제는 이렇게 봐도 되고 저렇게 봐도 무방한 가치중립적 판단이 허용되지 않듯이, 한 나라의 백성 전체를 식민지 노예로 삼아서 부린 식민 지배에는 역사적 평가의 다양성이 있을 수 없다. 악을 선이라고 포장하는 정권은 위험하다. 역사 세계에서도, 현실 세계에서도 지금처럼 빈약한 역사의식을 지닌 ‘검폭’에게 너무 큰 권한이 위임된 상황은 없었다. 근본적인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았던, 남다른 매국노 이완용이 기를 쓰고 추종했던 대세의 끝은 망국이었다. 권력자의 편향된 생각과 뒤틀린 오만은 개인의 망발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 국민의 생존과 안녕, 국가의 존립과 위신에 심각한 위험요인이 된다. 참으로 남다른 정권을 개탄하는 이유다. (물론, 왕조 국가가 아닌 민주국가에서는 줏대 있는 주권자들에 의한 권력 위임 철회-정권 몰락의 촉발요인도 된다.) 오인영 위원은 현재 고려대 역사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23-03-07 | hrights | 조회: 583 | 추천: 4
강국진 / 인권연대 운영위원   역사에는 공짜가 없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현실은 모두 어제 우리가 했던 선택의 연장선이다. 국가나 사회가 어떤 선택을 하면 그것은 하나의 경로가 된다. 다른 경로로 전환하는 데 걸리는 비용은 시간이 갈수록 커진다. 사회과학에선 ‘경로의존성’이라고 하는데 속담으로 치면 세 살 버릇 여든 간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출처 - politic's web page 경로의존성을 얘기할 때 가장 자주 언급하는 사례로 꼽을 수 있는 게 '쿼티(QWERTY) 자판'이 아닐까 싶다. 쿼티 자판 방식은 컴퓨터나 스마트폰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쓰는 방식이지만 사실 쿼티 방식이 효율적이어서 그렇게 된 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19세기 타자기는 입력 속도가 너무 빠르면 오작동이 자주 났기 때문에 타자 속도를 적당히 늦추는 게 중요했다. 그래서 나온 게 쿼티 자판이다. 타자기 기술이 발달하면서 쿼티 방식보다 더 효과적인 방식이 많이 생겼지만 이미 늦었다. 미국이 꿋꿋하게 길이는 마일, 무게는 파운드, 온도는 화씨를 쓰는 것도 그렇고 영국이나 영국 영향을 받은 나라에서 자동차가 왼쪽으로 다니는 것 역시 경로의존성으로 설명이 가능하겠다.   물론 경로의존성이라는 게 한 번 어떤 길에 들어서면 유턴이 불가능한 일방통행이라는 결정론은 아니다. 세상엔 편한 경로를 벗어나 새로운 길을 개척한 역사가 차고도 넘친다. 사회민주당이 반세기 넘게 장기집권한 스웨덴은 1920년대만 해도 피임 홍보활동을 하러 온 사회운동가들을 노동자들이 경찰에 신고하고 교회 맨 앞자리는 귀족들 전용석이던 나라였다. 게다가 경로의존성이 꼭 나쁜 의미만 있는 것도 아니다. 수확체증의 법칙이라고 해서, 생산요소의 투입을 늘렸을 때 생산량이 생산요소의 증가율보다 큰 비율로 증가하는 것 역시 경로의존성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가 괜히 해마다 수십조원씩 반도체에 투자하는 게 아니다. 최근 산업정책에서 자주 거론되는 ‘초격차’와 맞닿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최근 인권연대에서 주최하는 기획강좌인 ‘이찬수 교수의 메이지의 그늘’을 들었다. 메이지 시대 일본에 대한 흥미로운 분석을 들을 수 있었다. 특히 메이지유신이 제도화한 ‘영혼의 정치’를 통해 현대 일본, 끊임없이 어긋나는 한일관계에 대한 유용한 단서를 얻을 수 있었다. 특히 메이지유신이 현대 일본에 끼친 경로의존성이 흥미로웠다. 출처 - yes24 유신(維新)은 말뜻을 풀어보면 유지하면서[維] 새롭게 한다[新]가 된다. 일본의 정신[和魂]을 지키면서 서양 문명[洋材]으로 일본을 새롭게 하는 게 핵심이다. 일본의 정신에 해당하는 것이 신토[神道]였다. 이로써 메이지[明治] 체제는 막부에서 천황제로 권력구조를 새롭게 하면서도 실상은 “전근대적 정교일치 국가를 구축”할 수 있었다.   메이지 정부는 정치와 종교의 일체화를 통해 천황 중심 국가체제를 만들어 갔다. 메이지 시대 헌법은 천황을 무한한 권리를 갖되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존재로 규정했다. 천황은 헌법의 원천이자 헌법을 초월한 존재로서 말 그대로 ‘신(神)’이 됐다. 이런 체제를 만든 건 천황이 아니라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세력들이었다. 그들은 천황을 교조로 하고 교육칙어와 군인칙유를 경전으로 하며 전국에 있는 신사를 교회로 삼는 사실상 ‘천황교’를 만들어낸 셈이다. 메이지 시대 일본인들은 모두 ‘천황교 신자’가 되어야 했다.   메이지 유신은 어쨌든 대성공이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나라들이 식민지나 반식민지가 되어 굴욕을 당하고 있을때 일본만은 세계 무대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1930년대에 자동차는 물론이고 전투기와 항공모함, 잠수함까지 만들어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역사에 공짜는 없었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정치제도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침략전쟁으로 이어졌다. 1945년 패전 이후 ‘인간 선언’을 하면서 인간이 됐다. 그리고는 모든 책임에서 멀찍이 도망가 버렸다.   이런 구조에서 나오는 치명적인 부산물이 있다. “때로는 전쟁 책임은 천황에 있다는 핑계를 대며 내심 전쟁에 동의했던 개인의 책임을 회피하기도 했다…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면, 일본 국민의 주체성은 희미하거나 불분명하거나 유동적이었다.” 결국 “(천황이) 하라고 해서 했으니 자신의 책임은 사라져 버린다.”   “일본인들은 모든 잘못된 결정의 책임을 ‘어쩔 수 없었어’ 하는 식으로 ‘공기’에 맡긴 뒤, 미국이 만들어 놓은 새로운 ‘공기’의 명령에 따르며 전후에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천황이 항복을 선언한 날 도쿄가 도리어 차분하기도 했다는 것이 이제는 공기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수용하는 데서 오는 행동이었다는 것이다.” 행위는 있는데 행위 주체가 없는 모호한 상황은 ‘무책임 정치’를 만든다. 일본에선 이를 아마에(甘え)와 ‘공기를 읽는다[空気を読む]로 표현한다. 공통점은 책임회피라고 할 수 있다.   역사에 공짜는 없다. 메이지 유신이라는 선택은 일본을 강대국으로 만들었지만 또한 ‘천황’ 중심체제는 침략전쟁과 패전, 그리고 무책임정치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 결과는 수십년간 정권교체도 못한 채 무기력해지고 늙어가는 “한때는 ‘미래’라는 말을 들었던 나라”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궁금해진다. 분단, 전쟁, 독재, 탄핵, 검사정권 그 모든 것들은 결국 따지고 보면 ‘우리’의 선택이었다. 그 뒤에 올 결과는 어떤 것일까. 일단 한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아직 1년도 안됐네”라며 한숨 쉬어봐야 소용없다. 작년 3월에 우리가 “공정과 상식”을 외치며 선택한 결과일 뿐이다. 그리고 지금 “50억 퇴직금 무죄”에 공정과 상식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10여년 전 검찰의 무리한 수사와 모욕주기로 전직 대통령이 목숨을 끊는 충격적인 일이 있었고 온 국민이 분노했는데 지금 검찰의 무리한 수사와 모욕주기가 국회 제1당 대표를 향하고 있다. 오늘 우리의 선택이 내일 어떤 나라를 만들게 될 지 두렵기만 하다.     강국진 위원은 현재 서울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발자국통신 #강국진 #경로의존성 #메이지의그늘
2023-02-21 | hrights | 조회: 641 | 추천: 14
최낙영 / 인권연대 운영위원   어려운 중에도 작은 생맥주집을 유지하고 있던 고교동창 K와 오랜만에 전화로 안부를 주고받았습니다. ‘이제 그만 장사를 접으려 한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 돌아가는 모양을 보니 앞으로 수년간 ‘주모(酒母)가 소환되는 일은 없을 것 같다’면서 애써 소리 내어 웃었습니다. 삼강주막 : 출처 - 환경운동연합 2005년, 경북 예천 삼강주막을 운영하던 유oo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며 주막도 주모도 역사 속으로 사라진 지 이미 오래인데 K의 ‘주모 소환’이라는 말에 순간 멍했다가, 금세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K가 말했던 그 주모는 무언가 뿌듯하게 기분 좋은 일이 있을 때 불러내던 그 ‘국뽕 주모’를 말하는 거였습니다. 가끔 드나드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걸핏하면 “주모, 여기 국뽕 한 사발!”이라는 댓글이 달린 글들을 보아왔기에 그 의미와 언제 어떻게 쓰이는지에 대해서는 대충 알고 있었습니만 문득 국뽕, 주모 드립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구글 선생님께 물어보았습니다.   2011년쯤, ‘국뽕’이라는 말은 인터넷 역사 커뮤니티에서 처음 쓰였던 말이라고 합니다. 국가와 히로뽕의 합성어로 우리나라를 무조건 찬양하는 행태를 비꼬는 부정적인 말이었던 국뽕은 시간이 지날수록 긍정적인 의미로도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2012년,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 전 세계를 휩쓸기 시작하자 그해 10월 3일, 미국 국무부 정례브리핑에서 질문의 기회를 얻은 우리나라 기자가 뜬금없이 “두 유 노우 싸이?”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주변의 실소에도 미국무부 대변인은 “나는 잘 모르지만 아마 우리 딸은 알지 않을까?”라고 대답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우리나라 언론에서 “美국무부 대변인도 `싸이 팬' 선언(종합)-브리핑서 <강남스타일>에 관심...’이라고 대서특필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주모가 처음 등장한 것은 2013년, 미국 메이저리그로 진출한 류현진 선수가 그해 3월 시범 경기에 4이닝 동안 12명의 타자를 단 한 명도 내보내지 않는 퍼펙트 피칭을 선보이자 자부심이 차올랐던 국내 야구팬들이 야구 관련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응원의 구호로 불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특히 류현진이 매 이닝 잘할 때마다 주모를 불러서 ‘이러다 주모, 과로사하겠네’ 같은 드립을, 초반에 위기를 맞다가 결국 승리했을 때는 '주모의 판매 전략, 극적이다' 등의 글이 등장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주모는 2015년, 영국 프로축구 토트넘으로 이적한 손흥민의 활약으로 해외 진출도 했습니다. 손흥민이 잘할 때마다 토트넘 공식 트위터에 "주모!"를 외치는 한국인들을 보고 현지 팬들이 "Jumo!"라며 함께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영국 출신 프로게이머까지 이 표현을 배워 그가 게임에서 승리할 때마다 "오~ 주모!"를 부르기도 했다고 전합니다.   이후에도 서구 무대에서 활약하는 스포츠 스타들 그리고 방탄소년단, 블랙핑크 같은 K팝 스타들의 활약이 이어지고, <기생충> <오징어 게임> 같은 우리 컨텐츠가 위세를 떨치는 일이 많아지자 가슴이 터질 정도로 국뽕이 차오르는 일이 많아지는 만큼 주모를 찾는 사람들도 점점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너도나도 주모를 불러댔으며 저처럼 무감한 사람까지도 국뽕과 주모라는 말을 이해하게까지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단순히 인터넷을 뒤져본 것에 불과하니 확실하게 사실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대략 저간의 내력을 볼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가게를 정리하겠다는 K의 말에 이렇게 구글 선생님께 문의까지 해본 것은 가슴 뿌듯한 느낌을 가진 적이 언제였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거의 매일 분노와 우울감을 주는 뉴스들에서 잠시 눈을 돌려보려는 헛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고교동창 K의 ”‘앞으로 수년간 주모가 소환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말은,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한꺼번에 몰려옵니다.   “주모, 여기 국뽕 한 사발!”   그 말은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이 당선 확정되었을 때 K가 저에게 일부러 전화를 걸어, 신이 나서 했던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린 주모를 소환할 일이 언제쯤 있을런지 생각할수록 아득하기만 합니다.     최낙영 위원은 도서출판 밭 주간에 재직 중입니다. #인권연대 #사람소리 #발자국통신 #최낙영 #어느날주모가사라졌다 #주모 #국뽕 #경제 #현실
2023-02-20 | hrights | 조회: 676 | 추천: 5
장경욱 / 인권연대 운영위원 헌법과 국제인권법이 보장하는 진술거부권 행사의 보장이 무너지는 종북공안몰이의 광풍이 몰아치는 처참한 우리사회의 현실을 목도하고 있는 현장에 서 있다. 검찰, 국정원 공안독재의 서슬퍼런 수구회귀의 몸부림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중이다. 출처 - 경향신문 국가보안법에 정면으로 맞서 한국사회의 민주적, 진보적 발전을 위해 노력해온 이 땅의 살아있는 양심들을 탄압하는 눈에 뻔히 보이는 공안광풍을 제어할 힘은 오로지 이에 저항하는 한국 민중의 힘 밖에 없다는 역사의 진리를 깨닫고 있다.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적 권리로서 진술거부권과 적법절차, 무죄추정의 원칙을 송두리째 파괴하기 위해 날뛰는 공안의 무리들을 견제할 국가기관은 전혀 보이지 않는 현실이다. 헌법이 보장하는 진술거부권을 행사한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양심수들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하였다. 이로 인하여 강제인치까지 당하며 진술거부권 포기의 심리적 압박과 신체적 고통을 겪는 일이 연일 벌어지고 있다 헌법이 보장하는 진술거부권 행사가 체포영장 발부의 사유가 되는 소위 민주인권국가에서 국가보안법 양심수들은 국가정보원 조사실로 끌고 가려는 무도한 공권력에 저항하여 피타게 싸우고 있다. 비밀고문시설인 국가정보원의 조사실에 끌려가서는 음지에서 일하는 국가정보원 조사관들에 온갖 술수의 괴롭힘을 당하는 고난을 겪으며 단식과 진술거부권으로 맞서며 불법 강제인치 조사를 중단할 것과 즉시 유치장으로 퇴거시켜 줄 것을 요구하며 완강히 저항하고 있다. 근대 이래 시민이 거대한 국가권력에 맞서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무기로 발전되어 온 형사사법절차에서의 권리를 무참히 짓밟아 버리는 무소불위의 비밀정보기관이 악독한 대공수사를 연일 불법적으로 자행하며 종북몰이 공안몰이 광풍으로 온 국민을 위축시키는 것이 한국 민중이 겪는 엄중한 현실이다. 일제 시대 치안유지법에 맞서 항일독립을 외친 독립투사들의 싸움과 외세에 맞서 남북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싸우다 체포되어 수난을 겪으며 온갖 종북몰이 조리돌림을 당하는 진보민중운동의 활동가들의 싸움은 단 한 점도 다른 것이 없다. 언제까지 외국군대가 주둔하는 분단냉전체제의 굴레를 쓰고 국가보안법이라는 절대무기를 휘두르는 수구보수세력의 공안탄압에 온 사회가 얼어붙고 이에 저항하지 못하고 눈치보며 종북몰이에 부화뇌동하며 살 수 없다. 한국 민중이 그동안 피땀을 흘려 쟁취한 고귀한 희생의 대가를 무로 돌리려는 종북공안몰이 광풍에 맞서 고난을 겪고 있는 이 땅의 양심들과 연대하여 민주적 사법절차의 발전을 위해 함께 싸워 종북몰이, 공안몰이를 타파해 나가야 한다. 우리의 할 일이다. 암흑시대로 돌아가 간첩조작과 고문허위자백의 현실을 수수방관하며 민주시민으로 눈감고 외면하며 살수는 없지 않는가. 어제는 불구속 수사와 재판을 하였던 국가보안법 사건이 오늘은 남북적대의 얼어붙은 현실을 악용한 종북공안몰이의 희생양이 되어 체포되고 구속되어 공안탄압의 피해자로 인권이 침해되도록 용인해 줄 수는 없지 않는가. 국가정보원과 검찰이 국가보안법 사건에서 최장 50일 확보한 구금기간을 악용해서 진술거부권을 행사하는 양심수들을 매일 아침부터 밤늦은 시각까지 조사실에 앉혀 놓고 피의자 신문을 핑계로 온갖 기만과 강압, 고문으로 괴롭히며 진술거부권을 포키케 하는 야만의 시대로 그대로 돌아가는 것을 넋 놓고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국가정보원과 공안검찰의 양아치 수준의 낡은 수사관행에 맞서 국가보안법 탄압의 희생양이 된 이 땅의 양심들과 이에 연대한 한국 민중들은 민주시민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헌신적으로 싸워 수많은 잘못된 수사관행을 바꾸며 민주적 사법절차의 보물들을 쟁취하고 지켜왔다. 국가정보원 조사실에 있는 침대를 치웠다. 심지어 유치장에 돌려보내지 않고 조사실 침대에서 재우며 밤새 괴롭히며 고문을 했다. 잠 한 숨 제대로 자지 못하며 공포 속에 뜬 눈으로 국가정보원 조사실 내 침대에서 밤을 보낸 수많은 피해자들의 고통과 희생을 도무지 가늠할 길이 없다. 이제 잠은 그래도 유치장, 구치소에서 맘 편하게 잘 수 있게 되었다. 변호인이 피의자의 옆 자리에 밀착해서 앉지 못하고 피의자의 뒤에 상당거리를 두고 앉아 뒤통수를 보며 무기력하게 앉도록 하는 위법한 수사규칙과 관행도 바꿨다. 변호인이 국가정보원 조사실이나 검찰 조사실에 입회만 하는 것도 얼만데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인권이 보장된다는 저질의 수사관행이 자행되던 시절이 지금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다. 변호인마저 마음대로 변호인 조력권 행사를 하지 못하고 조사관이 시키는 대로 앉아서는 변호인 조력권을 행사하며 변호인 참여권을 행사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피의자의 바로 옆에 앉아 진술거부권 행사를 조언하였다고 국가정보원 조사관들로부터 강제로 조사실에서 쫓겨난 경험이 있다. 그 과정에서 범죄행위를 저지르는 국가정보원 조사관들에 저항하며 쌍욕을 하고 멱살잡이를 하며 싸웠다. 한국 민중의 지탄을 받으며 욕 들어 싼 저질의 유치한 허깨비들이다. 더 이상 국가보안법위반 구속 사건에서 진술거부권을 행사하는 피의자를 하루도 빠짐 없이 불러 내어 하루 종일 조사실에서 괴롭히는 위법한 수사관행도 오랜 싸움 끝에 2015년경부터 바꿨다. 진술거부권을 행사하는 피의자의 의사를 확인하는 과정의 짧은 조사 이후 더 이상 소환하지 않고 수사를 진행하거나 아예 단 1회도 소환하지 않고 송치 또는 기소하는 등으로 사건처리를 하게 되었다. 이렇게 바뀐 수사관행은 우리사회의 민주시민 누구에게나, 심지어 대통령이든, 대법원장이든 , 법무부장관이든, 이번에 체포영장을 신청하고 청구하고 발부한 국가정보원 수사관과 검사, 판사에게도 보장되어야 하는 헌법상의 권리다. 그러나 종북공안몰이의 광풍은 역사를 되돌리며 사법절차를 유린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국정농단과 사법농단을 저질러 피의자로 전락한 전직 대통령조차, 전직 대법원장조차 보장되어야 할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고 밤샘 야간조사에 응하는 과정이 생중계된 현실을 핑계 삼고, 야당 대표조차 장시간 조사를 받으며 진술거부권을 당당히 행사하지 못하는 현실을 핑계 삼아 이 땅의 양심수들이 민주시민을 위한 헌법적 권리를 행사하는 것을 탄압하기 위해 강제력을 사용하며 헌법을 유린하며 한국사회를 암흑사회로 몰아가고 있다. 종북몰이 공안탄압에서 양심수들이 온갖 고난과 시련을 겪으며 헌신적 투쟁으로 정착시켜온 우리 헌법의 민주적 사법절차가 보장하는 무죄추정의 원칙, 적법절차의 원칙, 공개재판의 원칙, 진술거부권과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다. 한국 민중 누구나 누릴 당연한 민주적 사법권리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양심수들의 편에 서자. 그들을 더 이상 종북몰이 공안몰이의 광풍에서 외롭게 싸우지 말도록 함께 연대하고 응원하며 국가정보원과 검찰을 앞장세워 위기탈출 및 국면전환용 공안탄압을 자행하며 한국사회를 수구회귀로 몰아가는 무도한 극우보수정권에 철퇴를 가해야 한다. 저항이 항쟁으로 번지고 있다. 한국 민중은 반드시 스스로의 힘으로 아둔하고 미친 종자들의 종북몰이 공안몰이 광풍을 이겨내고 철퇴를 가하며 민주적 사법절차가 꽃피는 자주로운 민주적 평화통일의 세상을 안아올 것이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인권연대 #사람소리 #발자국통신 #장경욱 #종북공안몰이 #광풍에 #맞서
2023-02-08 | hrights | 조회: 924 | 추천: 4
오항녕 / 인권연대운영위원   1. 자료로 보나 행태로 보나 검찰은 욕을 먹어도 싸다, 확실히 뜯어고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선지 ‘검찰이 수사는 안 하고 정치를 한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허나 이 말은 부정확하다. 정치는 사회나 국가를 위한 권한, 이익, 가치의 조정을 말한다. 그래서 어떤 조직이나 사회든 정치가 있기 마련이다. 검찰도 정치를 할 줄 알아야 한다. 문제는 검찰이 정치를 못하는 그 무능함에 있다. 수사든 정치든, 이미 수준이 타락 단계라는 게 문제이다. 이재명 대표는 ‘검찰이 수사는 안 하고 정치를 한다’고 비판했다. (연합뉴스 사진)   1. 장면① 독일 튀빙엔 버스가 정류장에 멈췄다. 기사가 운전석에서 내린다. 무슨 일이지? 사고 났나? 고개를 빼고 살피는 건 나 하나뿐이다. 다들 데면데면하다. 기사는 출입구로 와서 깔판을 내린다. 곧 휠체어를 탄 승객이 깔판을 통해 버스에 오른다. 튀빙엔의 모든 버스는 저상 버스인 데다 차체가 승강장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어 있어 휠체어나 유모차를 이용하는 승객이 타고 내리는 데 어려움이 적다. 그들은 출입문 아래 부착된 깔판을 이용할 수 있고 보통 버스 안의 다른 승객이 이를 돕는다. 20년 전쯤 도쿄 지하철을 이용할 때 보았던 시스템과도 비슷했다. 아무튼 부러웠다. 튀빙엔 버스는 저 깔판을 펴면 휄체어 승객이 쉽게 승차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눈 온 뒤 찍은 사진이라 좀 더럽다.   장면② 뮌헨의 고미술관(Alte Pinakothek), 한 아이가 뒤뚱거리며 걸어온다. 기저귀를 떼지 않은 듯 보인다. 몇 걸음 걷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는다. 아예 바닥에 뒹군다. 아이 뒤에는 유모차를 미는 엄마가 따른다. 그림을 보다 말고 아이 모습에 눈길을 빼앗겼다. 이래서 미술관에 젊은 부부와 아이들이 그리 쉽게 눈에 띄었구나.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유모차, 휠체어를 제공하는 일이 떠올랐다. 그래서 흐뭇했다. 유아를 데리고 관람하는 엄마   1. 재작년쯤인가 ‘눈 떠보니 선진국’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이미 세계 10위권으로 성장한 경제와 군사력, 거기에 촛불만으로 부패-불법 정권을 몰아낸 시민의 힘은 자부심을 가질 만했다. ‘수천 년 침략을 당했던’으로 시작하는 약소국 콤플렉스를 사실로 보든 정서로 헤아리든 별로 동의하지 않던 나로서는 반가운 현상이었다. 자신의 사회에 자부심을 가진다는 건 건강한 징조라는 게 내 진단이었다. 동시에 아직은 아니다, 라고 판단하는 근거는 선진국-후진국이라는 말이 서구중심의 자본주의적 프레임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우리에게 나타나는 몇 가지 현상이 결코 인간사회가 이루어야 할 ‘살만한 곳’이란 뜻의 선진국과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1. 인권연대의 장발장 은행이 아직도 운영되고 있는 것이 우리 사회가 아직 멀었다는 증거의 하나이다. 벌금이 없어 징역을 살아야 하는 ‘현대판 장발장’들에게 대출을 시작한지 8년, 대출심사도 100차를 넘었다. 박근혜-문재인-윤석열 정권을 거치면서도 엄청난 예산을 가진 정부가 하지 못하고, 아직도 시민단체인 인권연대가 운영하고 있다. 내가 이 나라 정부는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장발장 은행은 또 다른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작년 대법관 후보로 오석준이 올랐다. 오석준은 ‘800원을 횡령한’ 운수노동자에게 해고 판결을 내렸던 자이다. 당시 버스기사는 17년간 그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오석준은 지금 대법관이다. 국회 인사청문회를 통과했다는 말이다. 내가 이 나라 국회는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800원 횡령을 이유로 버스기사에게 해고 판결을 내렸던 오석준의 청문회 선서 장면. 요즘 유행한다는 송혜교 씨 필로 한 마디 해주련다. ‘훌륭하다, 석준아!’ (연합뉴스 사진)   1. 며칠 전, 서울시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시위를 이유로 삼각지역을 무정차 통과한다는 문자를 발송했다고 한다. 전장연이 ‘대중교통이나 도로 등의 공공시설을 타격하거나 무단으로 점거하는 불법을 일삼는다는 이유였다. 전장연을 시민의 불편을 야기하는 집단으로 돌리는 서울시의 야비함이 행정과 법집행 속에 숨어있었다. 불법으로 무단점거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온통 계단 천지인 서울의 대중교통망, 휠체어나 유모차 하나 넣을 공간이 없거나 부족한 버스와 기차, 전철을 개선해달라는 요청이 그렇게 용서받지 못할 일일까? 서울시장 오세훈의 말처럼 이런 요청이 무관용의 대상인가? 이곳이 ‘우리의 서울’인 것이 과연 자랑스러운가? 나는 교통, 나아가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들이 언제나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약자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 사회의 안녕과 정의가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는 말을 하는 중이다. 더구나 이 시대에 누구나 언제든 약자의 지위에 놓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미 대다수 우리는 이미 약자이고 소수자이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시위에 대한 오세훈 서울시장의 잔인한 대처 이후 시민들의 전장연 후원금이 늘었다고 한다. (한겨레신문 사진)   1. 말씀①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구약성경 시편 146:9) 말씀② 늙었는데 처가 없거나 남편이 없거나 자식이 없는 사람, 어려서 부모가 없는 어린이 등 환과독고(鰥寡獨孤) 네 부류는 세상에서 곤궁하여 하소연할 데도 없는 사람이므로, 문왕이 복지 정책을 펼 때는 반드시 이 네 부류를 우선 대상으로 삼았다.(맹자 양혜왕 하편)   1. 《성경》과 《맹자》는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했고, 저 아래로 내려가는 걸 경계했다. 타락이 아니라 정치라고 부를 수 있는 하한선이다. 현대판 장발장을 외면하고, 800원에 횡령죄로 해고하고, 장애인의 호소를 형사처벌로 대응하는 권력을 가진 자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정치 또는 정책, 행정이라고 생각하는가 보다. 그러나 그런 행동을 두고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차마 못할 짓’이라고 불렀다. 이는 권력은 있으되 정치를 못하는 것, 즉 정치적 무능을 자백하는 일이다. 누군가에게 차마 못할 짓을 한다는 건 개인이든, 정당이든, 또 어떤 주체든 이미 타락했다는 뜻이다. 주의할지어다, 편들다간 같이 타락하리니. 그리하여 기억할지어다, 지옥에는 타락한 자들의 방 만이 아니라 방관한 자들의 자리도 넉넉히 준비되어 있나니.     오항녕 위원은 현재 전주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23-02-07 | hrights | 조회: 638 | 추천: 4
이찬수 / 인권연대 운영위원   일제강점기의 후유증은 세기가 바뀌어도 지속된다. 해방 이후 물러난 일본의 자리에 미국이 들어왔다. 한국인 상당수에게 미국은 일본을 몰아낸 해방자였다. 동시에 한반도의 남쪽에 군정을 시작한 또다른 점령자이기도 했다. 식민지 시대 엘리트 친일파들에게는 생존의 열쇠를 진 권력이었다. 일본을 대체한 미국이 친일파 청산에 나설까 두려워하며 이들은 친미적 자세를 취했다.   해방 후 친일파 청산은 대세였지만 실제 청산까지는 하지 못했다. 1947년 ‘남조선과도입법회의’에서 격론과 진통 끝에 ‘부일협력자·민족반역자·전범·간상배에 관한 특별법률조례’를 제정했다. 그러나 미군정장관이 조례의 인준을 거부하면서 미군정기에서 친일파 청산은 사실상 무산되고 말았다. 남조선과도입법회의 자체에도 친일파들이 상당수 포진해있었지만, 패전국 일본을 친미국가로 만들어 공산세력의 남하를 막고자 했던 미국의 입장에서는 한국의 친일파를 단죄하면서 일본의 친미화에 힘을 뺄 이유가 없었다.   그러자 식민지 엘리트들은 친미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기 시작했다. 미국이 지닌 힘과 관용의 그림자에 숨어 자신들의 흑역사를 은폐하고, 미국이 수호하는 가치, 즉 반공주의와 민주주의를 옹호하며, 일제강점기 때의 기득권을 유지했다.(홍승표, 『태극기와 한국교회』, 331-332)   미국식 반공주의는 식민지 엘리트들이 과거청산의 흐름으로부터 자신들을 보존하기 위한 생존수단이었다. 친일파는 친미주의자로 변신했고, 반공주의자가 되었다. 친미적 이승만 정부 시기를 지나면서 ‘반공-국가주의’가 정치의 주요 지향이 되었고, ‘반공’은 ‘국시’가 되었다. 반공주의에 동의하지 않는 이는 처벌하고 국민의 자격을 박탈할 수 있는 정도까지 강화되었다. 미군정 시기 반공주의가 식민지 엘리트들의 생존수단이었다면,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 정부를 지나면서 반공주의는 상당수 국민의 생존수단이 되었다.   한국전쟁 이후엔 냉전적 세계관이 내면화되었다. 많은 한국인이 미국 중심의 자유 진영과 자신을 운명공동체처럼 인식했다. 미국이라는 친구와 소련·중국·북한이라는 적을 이원론적으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를 선과 악의 도식으로 구분했다. 공산세력과의 투쟁을 성전(聖戰)처럼 여겼고, 여기에 민족주의가 개입하면서 반공주의는 더 내면화되었다. 내면화할 수밖에 없도록 정부는 강력하게 개입하고 내내 추동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 미국은 ‘북조선 괴뢰정권’의 적화야욕으로부터 한국을 지켜주는 구세주이자, 반공, 민주, 발전 등의 ‘교리’를 통해 한국을 움직이는 동력으로 작용했다.(강인철, 『경합하는 시민종교들』, 제2장)   반공주의는 미국 중심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자부심의 표현이기도 했다. ‘공산주의=억압’, ‘민주주의=자유’라는 도식이 일상화되면서 ‘자유대한민국’이라는 말이 마치 국호처럼 사용되었고, ‘자유민주주의’는 ‘반공’이나 ‘반사회주의’를 통해서만 실현되는 것처럼 인식되었다. 자유대한민국이라는 말에는 반공과 친미가 전제되어 있었다. 반공주의와 친미주의가 동전의 양면 관계가 되었고, 일제강점기의 엘리트 친일세력들은 동전의 양면 모두 안으로 녹아 들어갔다.   이런 흐름에 익숙한 이들이 보수의 주류를 형성한다. 한국의 보수는 특히 정치적 차원에서 일본과 미국의 현실적 힘과 타협하며 친미-친일-반공의 트라이앵글을 형성해왔다. 보수 정부일수록 ‘친일적 친미’를 기반으로 ‘반공’을 내세워왔다. 해방과 전쟁 이후 수십 년이 넘도록 농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런 구도는 계속되어왔다. 2023년의 대통령도 전형적인 반공-친미-친일 도식 안에 갇혀 있다. 북한, 중국, 러시아 순으로 멀리 하고, 미국, 일본 순으로 가까이 한다. ‘친일적 친미’ 혹은 ‘친미적 친일’의 자세로 반공/반사회주의적 태도를 견지한다.   ‘(북한과의) 9.19 군사합의 효력 정지 검토’, ‘(북한을) 100배, 1000배로 때리기’ 같은 말, ‘미국의 핵우산’, ‘자체 핵보유’ 같은 발언을 예사로 하는 것이 그 사례이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배상을 국내 기업이 대신 하게 한다든지, ‘일본의 군비증액은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는 식의 발언으로 일본 보수 정치의 치밀한 전략을 긍정하는 모양새도 그렇다. ‘UAE의 적/위협국가는 이란, 우리의 주적은 북한’이라는 UAE에서의 발언은 우리의 외교가 아닌 미국의 외교를 대신 해주러 간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치명적이다. 이들은 모두 친미, 친일, 반공이라는 보수 주류의 흐름이 거의 체화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출처 - 중앙뉴스 근본 문제는 이런 트라이앵글이 아주 낡았다는 점이다. 세계는 이런 구도 안에 있지 않다. ‘반공’ 같은 반대와 분열의 프레임에 갇혀서는 지구마을 시대를 감당하지 못한다. 생태위기에 내몰린 인류세 시대에는 도리어 자멸로 이끄는 위험한 태도다. 한·미·일 대 북·중·러 간 분열적 대립을 넘어서는 상위의 질서를 탐색하고 구체화해 나가야 한다. 한국의 국가영향력이 세계 6위란다. 지구 전체를 향하는 안목을 갖추고 인류가 박수를 보낼 만한 정책을 보여줘야 하지 않겠는가. 반대, 보복, 분열을 정당화하는 프레임 정치는 더 이상 안된다. 상대방의 마음과 다양한 입장을 이해할 줄 아는 인간적인 공부가 필요하다. 그것이 ‘크게[大] 거느리고[統] 다스린다[領]’는 대통령의 무한 책임과 중차대한 의무다. 제발 불가능한 주문이 아니길 빈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레페스포럼 대표로 재직 중입니다.  
2023-01-17 | hrights | 조회: 721 | 추천: 11
오인영 / 인권연대 운영위원   2023년 새해가 밝았다. 그러나 청명한 자연의 하늘과 달리, 우리 사회의 하늘은 어둡게만 보인다. 윤석열 정권에 의해 정치 분야만이 아니라 노동, 인권, 복지, 외교, 문화 등 거의 사회 모든 분야에서 역사적 퇴행이 일어나고 있다. 시대 상황은 위중하기만 한데 그것을 극복할 길을 잘 보이지 않는 듯하다. 역사의 퇴행이 빚어내는 생명 위험과 생활 위기를 돌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궁리하다가 지난 성탄절에 돌아가신 조세희 선생이 2009년 1월 21일 용산참사 현장에서 하신 발언이 떠올랐다. 13년 전의 말씀이지만 각성과 연대를 촉구하는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할 뿐만 아니라 ‘1029참사’를 떠올리면 더욱 절절히 와닿기에, (추모의 마음까지를 담아) 조세희 선생의 발언 요지를 여기에 소개한다. 출처 - 경향신문 저는 조세희라고 합니다. 저를 잘 모르실 분들이 많을 텐데 저는 본래 나약하기 짝이 없는, 연약한 작가입니다. 30년 전에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라는 철거민, 슬픔, 아픔, 고통에 대해서 썼던 사람입니다. (중략)   내가 [난․쏘․공]을 처음 쓸 때는, 우리가 살아야 되는 미래가 아름답기를, 그리고 슬프지 않기를, 모든 것이 평화롭고, 평등이라는 말까지, 거기에다 민주주의라는 말까지, 그래서 고통이 어느 한쪽으로만 집중이 되는 걸 막을 생각으로,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글을 썼던 것입니다. (중략)   2005년 11월 15일까지는 제가 현장에 늘 카메라를 갖고 나왔습니다. 그것은 제가 한 사람으로 시민으로서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을 기록하는 데 자료를 얻을 겸, 그리고 현장에서 싸우는 분들에게 머릿수 하나를 첨가하는 마음으로 참여했습니다. 그것이 2005년 11월 15일 전용철 농민이 돌아가시는 현장에서 저도 상처를 입고, 아프고 카메라 다 망가지고, 그 이후에 병이 들었습니다. 그 뒤에 현장에 나오지 못했습니다. 현장에서 투쟁하는 분들에게 늘 미안했습니다.   지금 또 나온 이유는, 나와서는 안 될, 못될 정도의 건강인데도 나왔습니다. 그것을 왜 그러냐 하면, 우리가 사는 세상, 지금 2001년 새 세기가 박정희 때부터 시작된 그 군부 치하에서 낙원으로 설정이 돼 있던 땅입니다. 제가 늙어서 도착한 곳이 낙원이어야 되는데, 제가 듣는 이야기는 이 세게, 천몇백 인종, 이백여 나라, 그 많은 국가 중에서 제일 미개하고 제일 흉하고 제일 폭력적인 그 힘에 의해서 이 세상에서 제일 귀중한 생명 여섯이 희생을 당했다는 그 앞에서, 어떻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잠 못 자고 아픈 몸으로 지금 나온 이유는 어떻게 하면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까 하는 고민 끝에 여러분을 뵙고 한 말씀만 드리려고 이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중략)   내가 [난․쏘․공]을 처음 쓸 때, 우리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한 아이가 밤에 잠을 자지 못하고 배고파 운다면, 그것을 놓아두고 잠자는 우리가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고, 그것이 곧 폭력이라고 썼습니다. 그 말을 지금에 적용해보면, 우리 개개인이 얼마나 얼마나 큰 폭력을 경찰들 못지않게 쓰고 있습니까. 경찰의 우두머리가 쓰는 폭력과 우리가 쓰는 폭력은 얼마나 다릅니까.   우리는 무지에서 깨어나는 순간, 우리 미래의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제가 말씀드릴게요. 지금 주위가 어렵다는 뜻으로 쓰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민족은 지금 캄캄한 밀림 속에 들어가 갇혀 있습니다. 앞이 안 보입니다. 우리 개개인이 나침반을 지녀야 됩니다. 우리 머리 속에 나침반을 넣어 둡시다. 그리고 우리는 지도를 가져야죠. 우리 민족은 지금 지도도 없고, 나침반도 없고, 앞길도 없는 길을 자연적인 상태에 맡겨 둔 채 그냥 갑니다. 어떻게 해결되겠지. 하늘이 무너져도 살아날 구멍이 있다, 이런 생각 하죠. 하늘이 무너지면 다 죽습니다. 선진국 제1세계에, 유럽 어느 나라의 속담에 하늘이 무너지면 살길이 없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 속담은 뭐냐 하면 '하늘이 무너지면 파랑새를 잡자' 그랬습니다.   우리는 여섯 분의 이 귀중한 생명을 가슴에 새기고 그들의 절망, 그들의 가족, 그리고 그들의 동지인 여러분 개개인들이 정신을 바짝 차려서 우리의 무지에서 벗어나서, 밀림에서 벗어나서, 밀림 다음에 나타나는 넓은 개활지를 발견하도록 합시다. (중략)   밝음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새겨야 될 것은 그거죠. 우리가 밝음을 가져야지요. 저는 작은 촛불 하나를 가지고 왔습니다. 중국의 위대한 노신이라는 작가가 말했죠. “큰 횃불 나오기 전에 우리는 작은 촛불이라도 들러 나왔다”. 조세희가 그렇습니다. 여러분께 제가 이야기합니다.   우리 연대라는 말을 그냥 쉽게 합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에게 다 연대의 힘, 우리 사랑의 힘, 평등의 힘, 자유의 힘, 이것을 우리가 소유하도록 합시다. 당신이, 여러분이 이성과 힘 두 가지를 다 가질 수 없다면 당신, 여러분은 이성을 갖고 적들에게는 힘을 주어버리자. 적들은 그 힘으로 전투에서 이길지는 몰라도, 전쟁에서는 이길 수가 없다. 적들은 힘으로 이성을 만들 수 없지만 우리는 이성으로 힘을 만들 수 있다. 이 말을 간단히 줄이면 우리가 전쟁에서는 이긴다는 것이죠. 이것을 적들에게 전달하도록 합시다."     끝으로 조세희 선생이 11년 전 인권연대 12주년 창립기념식에 참석해 야스퍼스를 인용하며 현실에 대해 모두가 공동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역설한 말씀과 천정환 교수의 경향신문 칼럼(「조세희 연말」 22년 12월 29일)에도 인용된 [난쏘공]의 한 대목을 옮겨 적으며 새해 새날, 새롭게(혹은 새삼) 밝음을 향한 의지를 추스른다.   출처 - 인권연대 회원   “인간과 인간들 사이에는 연대감이 존재하기 때문에 개개인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잘못과 불의, 저질러지는 범죄에 책임을 져야 한다. 악을 저지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으면 그에 대한 책임을 같이 나눠지게 된다.”   “이 시간부터 우리 가슴에 철 기둥 하나씩을 심어 넣자. 무슨 일이 있어도 쓰러지지 않을 철 기둥을 박아두고 어떤 어려움이 와도 버텨내면서 빛이 보이는 곳으로 달려가야 한다.”     오인영 위원은 현재 고려대 역사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23-01-03 | hrights | 조회: 721 | 추천: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