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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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학교 역사문화컨텐츠학과 교수), 이찬수(전 보훈교육연구원장),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장발장은행장)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김대원/ 인권연대 운영위원 난 요즘 너무 혼란스럽다. 꿈자리마저 꽤나 뒤숭숭하다.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자꾸 뇌리에서 지워져 가고 있어 안타까운데다 그것이 내 의지가 아니라 누군가의 음모에서 비롯되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는 데서 오는 분노까지 겹쳐 마음의 평정을 잃은 때문인 것 같다. 정말이지 요즘 쉼 없이 터지는 굵직한 사건들이 서로 무관하지 않고 그것들을 바라보는 시각과 기억하려는 몸부림이 뒤섞여 나를 압박하는 느낌이다. 용산 철거민들의 참사에 분개하여 동분서주하다 갑자기 일제고사로 인해 해직당한 선생님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을 때만 해도 이런 기분은 아니었다. 뒤늦게나마 성직자들을 모아 기자회견을 가진 뒤 선생님들과 함께 할 구체적인 방법을 모색하던 중 당한 일이라 그 미안한 마음이 더했다. 그러나 결국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한 채 분위기에 휩쓸렸고, 가끔 교육청 앞을 지날 때마다 언론과 시민들의 외면 속에 외로이 농성장을 지키고 있는 그들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일상에 의심을 품기 시작한 것은 경기 부녀자 연쇄살인사건 용의자 강호순에 대한 언론의 보도 때문이었다. 미해결 살인사건들이 갑자기 일거에 해결되는 것도 의아했는데 살해 동기와 방법, 현장검증 내용 등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구체적으로 보도하더니 용의자의 신상공개에 대한 논란이 이어졌고 강호순이 책을 쓰고 싶어 한다는 내용까지 소재삼아 뉴스를 만들어 내는 모양이 참으로 개운치 않았다. 혹시나 싶었는데 역시 음모가 있었다. 청와대의 한 행정관이 '이메일 보도지침'을 통해 연쇄살인 사건을 적극 활용해 용산참사를 뭉개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그 전에도 경찰이 직원들에게 용산사건 관련 인터넷 여론조사에 적극 참여하도록 하여 여론을 조작하려 했었고, 경찰청 홈페이지 게시물에 소방차 사전 배치 주장 등으로 왜곡을 시도하려 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우리는 그들의 음모대로 용산을 잊어갔다.   용산참사-진입을 시도하는 경찰 특공대원    사진출처-위키피디아    그리고 김수환 추기경이 돌아가셨다. 추기경의 선종과 관련한 언론보도는 정말이지 대단한 호들갑이었다. 추기경에 얽힌 일화와 덕담, 각계각층의 추모사에 더해 유리관과 목관에 대한 지나칠 정도로 세밀한 분석, 스포츠 중계를 방불한 정도였던 끝없는 추도행렬에 대한 중계까지 언론은 추기경 릴레이를 이어갔다. 나는 그 보도를 접할 때마다 불편했다. 혹시 ‘또 다른 홍보지침’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예의가 아닌 줄 안다. 그러나 그 결례가 어찌 내 잘못만이라 탓할 수 있을까. 결국 청와대 홍보지침 같은 것은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용산참사가 발생한지 한 달 되는 날을 앞둔 2월 19일, 철거민 희생자 5명은 장례는커녕 입관조차 못하고 무관심속에 방치돼 있는 현실과 국내외의 깊은 관심 속에서 진행된 김수환 추기경의 입관식은 의미 있는 대조를 이루었다. 용산참사 추모대회는 경찰의 원천봉쇄로 단 한 차례도 제대로 열리지 못했고, 추기경 추모행렬과 달리 용산 분향소를 찾는 시민들의 발길은 줄었고, 용역업체의 철거작업은 슬그머니 재개되었다. 의심이 꼬리를 문다. 국회 문방위 고흥길 위원장의 미디어법 날치기 상정 장면을 보면서, 지뢰밭인 줄 알면서도 뛰어들어 무리한 수순을 밟는 이유가 궁금했다. 언론의 해석처럼 정치 역학이나 정부와 여당의 이해관계 정도로 보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 그 행태가 과연 그렇게 상식적이었단 말인가. 분명 그 이면에 다른 음모가 있을 것이었다. 온갖 음모론에 해박한 친구가 있다. 심하게 말하면 과대망상이 질환 수준이라 할 정도이다. 얼마 전엔 뉴질랜드의 원주민 마오리족에 마오주의자들이 많다고 어이없는 주장을 하다 나에게 구박 꽤나 받고 쫓겨난 적도 있다. 앞으로 그 친구 이야기에 귀 좀 기울여야 할 것 같다. 나도 정상이 아닌 것 같다. 누구 때문일까?   김대원 위원은 성공회 서울교구 사회사목담당 신부입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387 | 추천: 0
김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강○○의 연쇄 살인 사건을 계기로 예전에 볼 수 없었던 논쟁이 거의 동시 다발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즉 연쇄살인범 등 흉악범죄자의 얼굴 공개, 흉악범에 대한 사형 집행, CCTV 전국적인 확대 설치 주장 등이 마치 미리 준비한 시나리오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다. 청와대가 ‘용산 철거민 참사의 여론을 무마하기 위하여 강○○의 연쇄살인 사건을 적극 활용하라고 경찰에 지시했다.’는 의혹이 사실로 확인 된 점에 비추어보면 이러한 논쟁 유발이 준비된 시나리오라는 생각도 지워 버릴 수 없는 심정이다. 다만 여기서는 위와 같은 논쟁 중에서 흉악범죄자의 얼굴 공개 문제에 국한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무죄추정의 원칙과 얼굴 공개 헌법 제27조 제4항에 “형사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는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흉악범의 얼굴 공개는 위법 또는 부당하다는 주장이 존재한다. 무죄추정의 원칙은 1789년 프랑스 혁명 후 그 이전의 형사절차에서 피고인의 유죄 입증이 불분명한 경우에도 혐의만을 가지고 처벌을 함으로써 억울한 피고인을 양산하였고, 이에 따른 심각한 인권침해에 대한 반성적 성찰로부터 형사절차에 실천원리로 구현되게 되었다. 그러므로 피고인의 얼굴 공개가 무죄추정의 원칙에 반한다는 주장은 타당한 근거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아직 유죄 판결이 확정되지 않은 피고인의 얼굴을 공개한다는 것은 무죄추정의 원칙에 반하여 피고인의 인권을 침해하고, 아울러 피고인에 대한 여론재판의 위험성까지 상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흉악범 얼굴 공개의 문제는 무죄추정의 원칙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존재한다. 그것은 “유죄판결이 확정될 때까지”의 원칙에 불과하기 때문에 법원에서 범인에 대한 유죄 판결이 확정되면 범인의 얼굴을 공개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느냐는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유죄판결이 확정된 경우에도 범죄자와 범죄자 가족 등의 인권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인간이 행하는 재판에서 오판 가능성은 항상 염두 해 두어야 한다. 만일 오판이 발생하는 경우 그것은 되돌릴 수 없는 엄청난 피해와 인권침해를 야기한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얼굴 공개 문제 역시 더욱 신중한 태도로 접근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무죄추정의 원칙은 여전히 중요성과 타당성을 갖는다고 할 것이다. 미국에서 1973년 이래 99명이 유죄확정 후 무죄로 밝혀져 석방되었던 사실을 상기해보면 아무리 흉악범죄자라고 할지라도 그 얼굴 공개 등에 대해서 우리 사회와 국가가 얼마나 신중하게 접근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단순하게 흉악범이라는 이유만으로 만천하에 얼굴을 공개하는 것과 같은 감정적 대응 방식은 예기치 못한 후유증과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남길 수 있다는 위험성을 자각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할 사안을 놓고 일부 언론에서 국민적 합의도 없이 일단 터트리고 보자는 식의 보도 태도가 과연 옳은 것인지 대단히 의심스럽다.        얼굴공개의 실효성이 거의 없다. 그러면 흉악범 얼굴 공개를 주장하는 측의 논거는 무엇인가. 대표적으로 범죄 예방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에도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한다. 얼굴을 공개당한 흉악범의 경우 이미 체포 또는 구속 상태가 십중팔구이기 때문에 얼굴을 공개한다고 해서 실질적으로 범죄를 예방하는 효과는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학계에서도 형벌의 일반 예방적 효과가 과연 실효성이 있는지 여부는 아직도 입증되지 않은 과제로 남아있다. 아울러 연쇄살인범과 같은 흉악범들은 대다수가 사이코패스라고 부르는 인격 장애자들이 대다수인 현실에 비추어보면, 앞으로 나타날지도 모르는 미래의 연쇄살인범이 자신의 얼굴이 알려진다는 두려움 때문에 범죄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다시 말해 냉정하게 살펴보면 흉악범의 얼굴 공개에서 범죄예방효과도 기대하기 곤란하다는 것이다.     얼굴 가린 연쇄 살인범 사진 출처 - 뉴시스    흉악범의 경우에 한정해서 얼굴을 공개한다고 하는데 흉악범의 기준을 어디에 놓을 것인지도 여전히 논란꺼리가 될 수밖에 없다. 일반적인 기준을 제시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1명을 살해하는 행위는 흉악범이 아니고 강○○처럼 7-8명을 살인해야 흉악범이 될 수 있는가. 성폭력을 1회 자행한 자는 흉악범이 아니고 몇 번 정도 더 범행을 저질러야 흉악범인가에 대해서 그 어느 누구도 정확한 기준을 제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법률이라는 것은 명확성이 그 생명이다. 그런데 이러한 불명확성 때문에 흉악범의 개념을 언론의 독단적인 판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이것은 곤란하다. 따라서 수사기관에서 법률을 제정한다고 보도되고 있는데 위와 같은 불확정적인 개념으로 인하여 법률제정도 대단히 곤란하다. 이러한 논란은 흉악범으로 지목하여 수사기관에서 범인의 얼굴과 범죄혐의를 공개적으로 전국에 지명수배 하는 수사의 수단과는 차이가 존재한다. 공범이 이미 확정판결을 받았으나 여타 공범이 붙잡히지 않은 것과 같이 범인이 확실시되고 증거도 명백하게 존재하는 경우 등에는 얼굴 공개를 포함한 지명수배를 통해서 범인에게 심리적 또는 행동적인 위축을 주어서 범죄를 예방하는 수단으로 작용할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공개된 사진 등을 통해서 일반인과 수사기관이 범인을 좀 더 용이하게 검거하는데 기여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라면 범죄예방 효과, 범인 검거의 필요성과 같은 공익적 필요성이 지극히 높아서 피고인의 초상권 등과 같은 피고인의 인권 보호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약화된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얼굴 공개가 크게 문제되지 않을 것이다. 결국 흉악범 얼굴 공개의 문제는 얼굴 공개의 필요성 및 공익적 요구와 범죄자의 인권과 그 지인들에 대한 인권 보호 필요성, 공개한다고 할지라도 인권 침해를 어떻게 최소화 할 것인가에 대한 법익의 충돌에 대한 조화점을 찾는 문제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강○○ 연쇄살인 사건의 경우는 위와 같은 경우와는 다른 상황이다. 강○○의 얼굴을 공개한다고 해도 아무런 공익적 필요성을 충족시켜주는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얼굴 공개는 현대판 연좌제 도입과 다름이 없다. 오랜 세월 동안 세계의 역사 속에 존재해왔고, 지금의 문명국가에서는 거의 사라진 공개처형제도를 살펴보자. 대중이 모이는 공개된 장소에서 사형을 집행하거나 사형집행 장면을 공개하면 동일·유사한 범행을 일반인들이 자행하지 않을 것이라는 논리에 근거하여 공개처형이 실시되어 왔었다. 북한 인권문제와 관련하여 북한의 사형집행 장면이 공개되면서 북한 주민들의 인권문제가 심각하다는 주장의 논거가 되기도 하였던 사실을 상기해보자. 북한의 사행집행 공개는 잔인한 형벌, 비인도적인 형벌 집행, 잔혹한 인권침해, 인권의 보편성, 비문명국가로서의 수치 등의 방정식으로 활용되지 않았는가. 그러면 아직 유죄판결도 확정되지 않은 범인의 얼굴을 공개하는 것이 위와 같은 공개처형과 과연 무엇이 얼마나 다른 것일까. 형벌이라는 이름으로 공개적으로 채찍을 휘두르고, 죄인을 만천하에 공시하고, 신체에 낙인을 찍고, 공개적으로 효수형을 집행하였던 야만적인 과거가 존재하였다. 이러한 비인도적인 형벌은 인간이 이성을 회복하면서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는 인권유린의 역사적 사실을 우리는 다시 상기해 보아야 한다. 먼 과거에 범죄자 얼굴에 천형처럼 낙인 도장을 찍어 “나는 범죄자다.”라고 공시하였던 것과 거대한 영향력을 가진 언론매체를 통해서 범죄자의 얼굴을 공개함으로서 사회적으로 매장하는 것과 과연 무엇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실질적으로 대동소이한 ‘주홍 글씨’ 아닌가. 강○○의 얼굴을 공개함으로써 어떠한 이득을 얻게 되고, 어떤 손실을 입게 되는가. 화려한(?) 처벌을 통해서 얻을 것은 야만적인 형벌 수단을 구사하는 비문명국가라는 조롱일 뿐이고, 준엄한(?) 공개를 통해서 획득할 수 있는 것은 강○○와 관련을 맺고 있는 부모형제, 자식, 친구 등의 충격과 아픔일 뿐이라고 하면 너무 과장된 표현인가. 강○○와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공개된 흉악범의 얼굴을 보면서 고통을 느끼고, 고통스러워야 하고, 이들이 얼굴을 들고 돌아다닐 수 없도록 수치심과 자괴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얼굴 공개의 목적인가. 강○○는 자신의 얼굴이 공개된 사실을 알고 “내 아들은 어떻게 살라고”라는 말을 하였다 한다. 그리고 실제로 범죄자의 아들 미니홈피가 온갖 비난으로 넘쳐나서 홈피를 폐쇄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한다. 그럼에도 각종 언론에서는 타인은 생각하지도 않고 자신의 자식새끼만 걱정한다는 식으로 범죄자의 악성을 부각시키면서 매몰차게 몰아붙였다. 이러한 질타가 과연 옳은 태도이며 이성적인 언론의 태도라고 할 수 있는가. 거꾸로 역지사지 해보자. 정상적인 사고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강○○의 잔혹한 범행을 옹호할 생각이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강○○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아무리 강○○가 미워도 강○○와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불가피한 사람들의 인권은 보호되어야 한다. 아무리 죄인의 자식이라고 할지라도 그 자식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들에게 고통을 부과해야 할 이유는 없다. 범인의 자식도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기본권을 향유하고 당당하게 살아갈 권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들에게 고통을 가할 권리를 사회와 국가는 갖고 있지 않다. 그러한 권리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현대판 ‘연좌제’ 혹은 현대판 ‘마녀사냥’을 주장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이 모든 문제는 강○○의 얼굴을 공개함으로써 발생하는 문제다. 따라서 아무리 흉악범이 미워도 그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고유한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공개해서는 안 된다. 범죄자의 얼굴 공개로 범죄자의 인권이 침해되는 결과는 곧바로 범죄자의 가족을 비롯한 지인들의 인권침해로 귀결되기 때문에 얼굴을 공개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범죄자의 인권과 범죄자 가족 등 지인의 인권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한 국가와 사회가 강○○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관용의 한계점이며, 지켜져야 할 관용의 마지노선인 것이다. 동시에 강○○와 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국가에 대하여 요구할 수 있는 권리이기도 하다. 국가가 범죄자를 정당한 법절차에 따라 처벌하는 것 이상으로 범죄자의 지인들을 사회적으로 매장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무모한 시도는 포기하는 것이 이성적인 태도다.          우리가 증오하는 사람들의 인권도 지켜 주어야 한다. 그러면 얼굴 공개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피해자의 인권에는 무관심하고, 가해자의 인권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인가. 그렇지 않다. 형사법에서 피해자의 인권과 범죄자의 인권은 두 마리 토끼와 같은 존재다. 수사기관이 상대적으로 피해자 입장에 경도되어 있는 사실은 수긍할 만한 점이 분명히 존재한다. 수사기관에게는 국민의 생명, 신체, 재산을 앞장서서 보호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고, 사안의 진상을 밝혀서 범죄자를 처벌해야 할 임무가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해자 인권의 중요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범죄자가 가져야 할 최소한의 인권을 짓밟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두 마리 토끼라는 숙명적인 함수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랜 형벌권 남용에 대한 역사의 교훈이기도 하다. 언론매체를 포함한 사회도 역시 마찬가지 의무를 지고 있다. 어느 하나에 경도되어서는 곤란하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라는 인권에 대한 중요성은 아무리 그 중요성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이다. “인권에 대한 무시와 경멸은 인류의 양심을 짓밟는 야만적 행위를 결과하였다”는 세계인권선언문을 다시 상기해보자. 범인의 얼굴공개를 주장하는 의견이 과도한 사회라면 우리는 우리의 민주주의를 자랑할 자격을 잃는 것이고, 인권선진국이라고 할 수 없다. “범죄는 미워해도 범죄자는 미워하지 말라”는 법언이 있다. 이런 태도가 성숙한 시민사회의 태도이며,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할 지점임은 분명하다. 미국의 저명한 대법관 홈즈는 “사상의 자유는 우리가 동의하는 사상의 자유가 아니라 우리가 증오하는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권도 마찬가지다. 인권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인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증오하는 사람들에 대한 인권도 지켜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나는 의심치 아니한다.   김희수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둥중입니다. (이 글은 수사연구사에서 발행하는 수사전문 잡지「수사연구」월간지에 기고한 내용을 일부 수정한 글입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475 | 추천: 1
김영미/ 인권연대 운영위원    교육과학기술부가 16일 학업성취도 평가 결과를 발표했다. 한 보수단체인 “바른사회시민회의” 운영위원인 이성호 중앙대 교육학과 교수는 “교육자에게 가장 기본적인 상식은 ‘평가를 안 하면 아이들이 공부를 안 한다’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이렇게 평가를 하면 교사들이 눈치가 보여서라도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쳐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교사들이 평가 때문에 학생들에게 책임감을 느끼고 열심히 가르친다는 지적은 학교의 현장을 몰라서 하는 얘기이다. 이번에 발표된 학업성취도의 결과를 보더라도 주요 과목 학력 격차의 주요인은 빈곤, 부유층 밀집도 등 사교육에 의한 격차로 나타났다. 나는 비교적 저소득층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는 강북에 있는 학교에 근무를 하고 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하는 학생들은 10개 이상의 교과목을 배운다. 중간, 말 등 시험성적이 다른 학급에 비해 학급평균이 10점 이상 높은 학급을 지도하는 담임교사가 있었는데, 영어가 아닌 언어를 가르치는 교과목 또한 학급간의 점수가 10점을 넘어 20점 이상이 차이 나도록 교육시키고 있었다. 1년 동안 그 학급의 학생들은 많은 교사들로부터 칭찬을 받았지만 내가 바라본 학생들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다른 학급의 학생들보다 일찍 등교해서 자율학습을 했고 방과 후에도 교실에서 자율학습을 하면서 교사가 실시하는 평가 시험에 통과해야만 귀가할 수 있었다. 이것은 교사의 과목을 학습하는 학생들에게도 똑같이 적용이 되었다. 그 교과목 시간을 위해서 다른 교과목 시간에 몰래 공부를 하고, 심지어 그 교과목 시간이 지난 후에 등교를 하거나, 교과목이 들어있는 날에 결석하는 학생도 있었다. 많은 학생들은 그 교사로부터 해방되는 날을 꿈꾸고 있었다. 그리고 학년을 마치고 올라간 학생들은 새 담임교사와의 적응문제로 더 많은 방황을 하기도 했다.     안병만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왼쪽 두번째)이 지난 16일 오전 정부중앙청사에서 지난해 10월 치른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왼쪽부터 안순일 광주교육감, 안 장관, 공정택 서울교육감, 신상철 대구교육감.       사진 출처 - 한겨레    관리자(교장)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유능한 교사로서 교원평가에 당연히 최우수교사에 속했다. 많은 학부모들이 중간·기말 성적표 한 장으로 자녀의 가치를 가늠 질하고 교사를 평가한다면 그 담임교사는 더 말할 나위 없이 훌륭한 교사일 것이다. 동료교사들도 그 교사의 교육적인 열정에 대해서는 인정하는 편이다. 하지만 선행학습과 평가에 의해서만 학생들을 교육하는 교사들은 교육현장에서 학생들과의 소통에 있어서는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또한 현실이다. 전인교육이 중요한 학교에서 성적에 의해서 평가되는 학생들 보다, 학생과 학생을 둘러싼 환경(부모, 친구 등)을 알고 이해해야 한다. 교사로서 학생이 무엇에 관심 있고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며, 남과 소통하는 방법을 익혀 행복하고 창조적인 인생을 준비하는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한국진보연대 장대현 대변인은 “우리나라 안에서 서열화하는 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세계 속의 경쟁력을 따지는 것이 중요하며, 성적이라는 하나의 기준으로 획일화해 평가하기보다는 다양한 방면에서 발현되는 창조적인 능력을 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스웨덴에서는 8학년까지 전국 단위 시험을 치르지 않는다고 한다. 공부를 빨리 익히는 학생, 공부가 늦되는 학생이 있기 때문이란다. 교사들이 평가해야 할 학생은 성적으로 평가된 학생의 모습 보다는 어떤 꿈이 있는지와 어떤 모습을 가졌는지를 생각해야 하진 않을까 좀 늦되는 학생도 기다리는 여유도 가지면서 말이다.   김영미 위원은 현재 불광중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408 | 추천: 0
김 녕/ 인권연대 운영위원 필자가 교육대학원에서 강의하는 ‘인권과 교육’ 과목에서 꼭 등장하는 단골 주제 중의 하나인 ‘체벌'은 인권과 늘 부딪히면서도 뾰족한 해결이 아직 제시되지 않는 문제이다. 요즈음의 용산 참사를 보며 필자는 ‘교육’을 위해서 ‘체벌’은 불가피하다는 논리와 ‘법치’를 위해서는 ‘강제진압’이 불가피하다는 논리가 묘하게 상통한다 싶어, 서글픈 생각이 먼저 들고, ‘교육’을 담당하는 이들과 ‘공권력’을 투입하는 이들의 그런 논리가 참으로 미워진다. ‘논리’가 밉지 ‘사람’이 미운 게 아니라면 말이다. 우선, 정부는 최근 용산 참사를 자초한 ‘강제진압’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사과도 없이, 국민의 정당한 요구와 생명마저 빼앗으며 이를 법·질서·공권력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면서, 이에 항의하는 연대를 외부세력, 테러집단, 좌파로 규정하고 추모집회까지 끝까지 추적하여 주동세력을 뿌리 뽑겠다고 전열을 다지고 있다. 이러한 적반하장의 발상이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현재 검찰, 경찰, 그리고 청와대에서 지휘권을 행사하는 40대에서 60대에 이르는 이들이 청소년 시절, 곧 군부독재시기에 받은 교육, 즉, 국가안보·반공·경제발전 이데올로기로써 온 국민을 세뇌하고 통제했던 그런 교육 탓 아닐까? 그리고, 시위세력 진압에 꽤나 자주 동원되면서 막강한 위용을 과시하던 군대의 논리, 즉, 아군 아니면 적군이라는 이분법, “시위 세력의 배후엔 분명히 불순세력이 도사리고 있다”라는 근거 없는 확신, “안 되면 되게 하라!”라는 식의 막무가내 명령, “초전박살!”을 구호로 외치며 속도전을 강조하던 작전, 그리고 제대하고도 대부분의 한국 남성들의 뇌리와 감수성과 의식구조 깊숙이 남아있는 그런 군사문화 탓 아닐까? 용산 철거민 살인진압 범국민대책위원회'와 유가족들은 9일 오후 서울중앙지검앞에서 '오늘 검찰은 죽었습니다'는 검은 현수막과 고인들의 영정사진을 들고, 용산철거민 참사에 대한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법치주의의 근본은 국민의 기본권 보장이며 그것을 위해 통치자는 자의적으로 권력을 행사해선 안 되고 법이 정하는 바에 의해 견제와 제한을 받아야 한다는 것일진대, 그것에 대해 무지하거나 잘못 배웠기에 이번 강제진압으로 가난하고 불쌍한 철거민들의 목숨을 빼앗고도 정부와 검찰, 경찰은 전혀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있다. 오히려, 승승장구하며 국민들에게 “할 테면 해보라! 한번 끝까지 가보자!”라고 하고 있는 것 같다. 한편, 학생들이 등교하는 학교 정문에는 여전히 복장위반 혹은 지각에 대한‘응분의 대가’로 기합과 체벌이 행해지고 있다. “선생님에게서 맞는 것은 부모님에게서 맞는 것처럼 구타가 아니라 사랑의 매이다.”라는 훈육 이데올로기가 계속 주입되며, 일류대 입학을 위해서는 행복추구권, 신체의 자유, 휴식의 권리 등의 기본적 인권을 유보할 수밖에 없다며, 학생들을 인권의 주체가 아니라 훈육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있다. ‘입시독재’라고 해야 하나? 필자의 수업을 듣는 교사들은 체벌문제에 대해 공통적으로 고민들을 하고 있다. “꽃으로도 아이들을 때리지 마라”고 하지만 한국 교육현장에선 체벌이 불가피하다고 하면서도, 모두들 체벌이 아닌 대안을 찾고자 노력한다. 이젠 학생이 맞는 게 아니라 교사가, 때로는 학부모에게, 심지어는 학생에 의해 구타당하고 있으며, 체벌을 안 하려고 교사가 노력하면 오히려 학생들이“재는 좀 맞아야 하지 않아요?”라고 반문하고, 잘못을 저질러서 꾸중 듣는 학생들은 “알았으니까 빨리 때리세요.” 아니면, “벌점 먹느니 차라리 맞을게요.”라고 오히려 체벌을 재촉하기도 한다고 전한다. 그러면, 체벌의 대안은 없는가? 교사들은 교실 청소, 화장실 청소, 혹은 영어 시 구절 외워오기 내지는 한국 시 몇 편 외우기 등을 대안으로 시도한 경험을 말한다. 그런 것들도 좋겠지만, 필자가 생각하기에 그래도 가장 좋은 대안은 학부 인권수업 도중에 어느 학생에게서 들은 것이었다. 그 학생의 경험담인즉슨, 고교 시절에 잘못했다 하여 교무실에 불려가게 되면 담임교사는 그 학생에게 아무 꾸중도 않고 그냥 차 한 잔 같이 마시기만 했고, 또 불려가게 되면, 그 주말엔 그 학생과 함께 등산을 가서 역시 꾸중과는 무관하게 인간적이고 정겨운 얘기들만을 나누었다 한다. 그 후 그 학생은 다시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게 되었다는 얘기였다. 학생에 대한 ‘믿음’과 교사와 학생 사이의‘소통’이 그 학생을 바꾸었고 믿음을 주면 학생은 최선을 다해 좋은 결과로써 보답한다는 것, 그리고 학생과 소통하고자 할 때 그 학생은 비로소 스스로가 인권의 주체로 대우 받음을 느끼며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하게 된다는 것, 더 나아가 교사에 대해 마음 깊이 감사와 존경을 갖게 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한다. 어린 시절에 보았던 영화 ‘벤허’의 그 유명한 전차 경주 장면이 떠오른다. 네 필의 백마가 끄는 전차를 채찍 없이 달리게 하는 벤허가 네 필의 흑마가 끄는 전차를 고성능 채찍으로 사정없이 내리쳐서 질주하게 하는 적장과의 결전을 앞둔 전날 밤, 그는 마구간으로 찾아가 말들을 가만히 쓰다듬는다. 아마도 “너희를 믿는다, 너희를 사랑한다”라고 속삭이었을 것이다. 그 다음날, 벤허와 네 필의 백마는 가혹하게 채찍을 맞으며 분을 못 이겨 악에 바쳐 질주하는 흑마들과 벤허의 전차를 부수려 반칙을 도모하는 적장을 결국 이긴다. ‘믿음’과 ‘소통’이 ‘체벌’보다 훨씬 낫고 위대함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는 생각이 지금 새삼스레 든다. 아울러, 필자는 오래전 ‘모래시계’라는 TV 드라마에서의 장면과 대사도 잊혀지지 않는다. 사법고시를 치르겠다고 내려 온 아들(박상원 분)에게“넌 잘 할 거야. 내가 알아.”라고 격려하던 그 아버지의 그 말씀은 아들을 훌륭한 검사로 키워준 명언이었다. 교육 현장에 만연한 “맞아도 싸. 맞아야 싸.”라는 식의 체벌 문화, “학생이 무슨 인권? 인권타령은 명문대 들어가서나 해!”라는 식의 입시 풍토, 성적 떨어져서 유서 쓰고 자살하는 초등학생이 생겨나는 교육, 철거민들이 불에 타 죽어나가도 끄떡없이 몰아 부치는 공권력 투입과 재개발 정책, 이런 교육은 이미 교육이 아니며, 이런 공권력은 이미 공권력이 아니다. ‘체벌’이 아직 행해지는 것을 국민 앞에, 학생 앞에 부끄러워하는 그런‘교육’과, ‘강제진압’이 아직 벌어지는 것을 국민 앞에, 철거민 앞에 부끄러워하는 그런 ‘법치’를 제발, 제발 보고 싶다. 그리고 ‘교육’과 ‘법치’를 바로 잡고자 투신하는 이들과 함께 외치고 싶다. “할 테면 해보라! 한번 끝까지 가보자!”라고.   김 녕 위원은 현재 서강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420 | 추천: 0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김석기 경찰청장 내정자와는 아주 간략한 인연이 있다. 내가 경찰청에 출입할 때 그는 경무기획국장이었다. 경무기획국장이라는 자리가 주로 내부 살림을 챙기는 자리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는 유독 온화하고 합리적인 성품의 소유자로 보였다. 경찰보다는 경제부처 공무원에 더 어울릴 것 같은 이미지라고 할까. 일본 파견 생활을 오래 했다는 그의 자기소개가 합리적인 이미지를 더욱 강화시켰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고, 서울경찰청장으로 승진한 그는 갑자기 기존의 자기 이미지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승진 후, 유례없이 강경한 발언들을 쏟아내던 그의 경찰청장 내정 소식이 들려올 무렵, 용산 참사가 터졌다. 용산 참사 직후, 청와대가 김석기 경찰청장 내정을 철회할 것이라는 신문 기사를 보고 나는 눈을 의심했다. 그대로 밀어붙일 것이라는 예상이 빗나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조중동을 중심으로 철거민의 폭력성을 부각하는 기사가 쏟아지더니, 수사를 시작한 검찰은 화재원인을 철거민이 제공했다는 식으로 여론을 몰아갔다.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은 텔레비전 토론프로그램에 출연해 경찰청장 내정을 철회할 뜻이 없다고 밝혔다. “수사가 끝날 때까지”라는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불법 폭력 행위를 일삼다 스스로 죽은 걸 왜 경찰이 책임지나’라는 선언으로 들렸다. 결과적으로 예상이 들어맞아 도리어 참담했다. 며칠 전, 알고 지내는 한 대기업의 홍보담당 과장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용산 희생자 추모 미사에 참석하려는데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부잣집 도련님 스타일의 외모를 가진 그의 평소 성향을 생각하면 뜻밖이었다. 문화·예술에 관한 주제에서는 얘기가 잘 통하다가도 사회적인 주제, 예를 들어 조중동을 거론하면 무척 부담스러워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정권이 가난한 사람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 같아요. 저도 이제 못 참겠네요. 임계치에 다다른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30일 밤 서울 양천구 목동 스튜디오에서 생방송으로 진행된 대통령과의 원탁대화에서 참석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오른쪽부터 탤런트 박상원씨, 조국 서울대 교수, 김형민 에스비에스 부국장, 이 대통령, 정갑영 연세대 교수, 김민전 경희대 교수. 청와대 사진기자단         사진 출처 - 한겨레    내가 걱정하는 것은 이 정부가 국민을 싸움의 대상 혹은 제압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번 무너지면 계속 밀린다.’는 식인데, 이건 정치이념이라기보다는 전투 개념에 가깝다. 조선일보 칼럼조차 사마천의 표현을 빌려 “각박한 법치”라고 우려할 정도다. 국민을 적으로 돌리고 싸우려 드는 정부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다. 백낙청 선생은 “내년 봄에 대규모 군중시위가 벌어지는 일은 그 누구도 막기는 어려울 듯하며, 정권이 하기에 따라 겨울이 채 가기 전에 그런 사태가 도래할 수도 있다”고 예견했는데, 이 정부는 그 시기를 앞당기기 위해 무던히 애쓰고 있는 듯하다. 사실 집권 2년차에 대규모 군중시위란 이른 감이 없지 않다. 그런데도 이런 예상이 설득력 있게 들리는 것은 이 정부의 일관되고 비타협적이며 투쟁적인 노선 때문이다. 작용·반작용의 법칙을 새삼 들이댈 필요도 없다. 부자들에게는 세금을 깎아주고, 서민들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이 정부의 세금정책은 조선 후기의 삼정문란을 연상케 한다. 부패한 집권세력과 아전들의 학정을 견디다 못한 민중들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민란을 일으켰고, 결국 나라가 망하는 주요 원인이 됐다. 부자와 일부 집권세력만을 위해 일반 국민과 가난한 서민들을 짓밟는 철권통치는 반드시 거대한 저항을 부르게 돼 있다. 용산 참사는 그 신호탄이다. 여기에 권력형 부패 스캔들마저 터진다면 전 국민적 공분이 들불처럼 번질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 정부야말로 체제 위협 세력이 아닌가.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고 했다.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희극으로. 가리타니 고진은 역사가 60년을 주기로 반복된다고 했지만, 대한민국의 정치역사는 30년을 주기로 반복되고 있다. 박정희가 비극이었다면 이명박은 희극일까. 아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건 나만의 감상(感傷)일까.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중입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399 | 추천: 0
서상덕/ 인권연대 운영위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분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요즘 들어 많이 받는 질문 가운데 하나다. 이런 물음을 대할 때마다 대번에 머릿속에서는 이른바 ‘통박’부터 굴러가기 시작한다. ‘왜, 무슨 의도로 묻는 것일까?’ 아마도 사람들이 이렇게 묻는 데는 필자가 종교 신문에 있다는 이유가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유대교나 이슬람교와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다고는 하나 필자의 시각이 그리 객관적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텐데 왜 이렇게들 묻는 지 그 의도가 궁금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물음에 대한 대답은 의외로 단순해서 어쩌면 묻는 이가 실망스러워 할지도 모른다. “이스라엘이 자신을 잘 모르는 거지요.” 필자의 솔직한 심정이 그렇다.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초강대국 미국마저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아니 눈치 보게끔 만드는 유대인들이 세운 나라 이스라엘. 그래서 한때 그 위세가 부럽기까지 했던 이스라엘에 대한 필자의 생각은 ‘분수를 모른다’는 것이다. (이러다가 무슨 일 당할 지도 모르겠다.) 중학교 정도만 나온 이들이라면 유대민족이 창조주께서 택하신 선민이고 그 때문에 그들의 선민의식이 대단하다는 것쯤은 알 것이다. 필자도 중학교 도덕시간에 중동전쟁이 터지자 아랍인 유학생들은 징집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귀국을 안 하고, 이스라엘 유학생들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 서둘러 귀국했다는 전설 같은(?) 중동전쟁 당시의 이야기를 애국의 표상인 양 귀가 닳도록 들은 기억이 있는지라, 더구나 우방인 미국과 절친한 대단한 나라라, 찬양까지는 아닐지라도 그 비슷한 수준으로까지 우러러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과대 포장된 유대인과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며 그 ‘선민의식’이 안타까울 때가 적지 않다. 특히나 내면과 실재에서 드러나는 괴리를 대할 때면 인간적으로 우려스럽기까지 하다. 현재 주한 이스라엘 대사로 활동하고 있는 이갈 카스피(Yigal Caspi) 대사의 경우가 한 예가 될 만하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공격으로 사상자가 1000명을 훌쩍 넘어선 데다 유엔 시설까지 폭격으로 파괴돼 국제사회의 비난이 거센 가운데서도 카스피 대사는 국내 언론들과의 인터뷰에서 이번 전쟁이 팔레스타인 무장정치조직인 하마스 탓이라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카스피 대사를 거론하는 것은 3년 전 쯤 그가 이스라엘 외교부 동북아시아국장으로 재직하던 당시 이스라엘 현지에서 만났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기 때문이다. 그 때 그는 만면에서 사그라지지 않는 웃음으로 먼 이국에서 온 이들을 환대하던 평화주의자였고 자신은 이스라엘 땅에서 5%도 되지 않으면서도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근본주의자들과는 다름을 몇 번이고 강조했었다. 만찬 중 자신은 근본주의자들과는 달리 유대인이 먹지 않는다고 하는 돼지고기나 새우 같은 것도 먹고 필요에 따라서는 누구와도 대화를 할 수 있다고 자랑스럽게까지 얘기했다. 필자가 놀랐던 것은 비록 공개되지는 않을지언정 공식적인 자리에서 이스라엘 국민 대다수가 근본주의적인 삶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음을 선선히 인정하는 모습이었다. 필자의 기억이 맞다면 그는 “나는 유대인이지만 여러분이 알고 있는 유대인이 아니다”고까지 했다.       이갈 카스피 대사 사진 출처 - 한겨레    그런 그의 태도에 당시 한창 진행 중이던 분리장벽 설치문제가 테러에 대한 이스라엘 국민들의 과민반응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연민의 정마저 느낄 정도였다. 그랬던 그가 “이번 사태는 전쟁도 아니고 하마스를 제거하는 군사작전일 뿐”이라고 하니 몇 년 새 영판 딴 사람이 된 것인지 어수룩한 우리가 속았던 건지 헛갈린다. 이도 아니라면 그가 그토록 아니라고 했던 5%도 안 되는 ‘근본주의자’들에 끌려 다니는 신세로 전락해 자신의 신념이나 의지와는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런 기억과 현실의 혼재 탓일까, 현재 벌어지고 있는 중동 분쟁에 대한 질문은 결국 “당신은 둘 가운데 누구 편인가” 하는 조금은 과격한 물음으로 들린다. 그렇다면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민족이 유대민족이니 이스라엘 편이요”라고 하는 게 그리스도교 신앙인의 모습일까. 하지만 유대인이나 아랍인 모두 한 할아버지로부터 비롯된 민족이란 성서상의 진실이 바뀌지 않는 한, ‘이스라엘이 자신을 잘 모르는 것’이라는 내 의심은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더불어 ‘나는 누구 편을 들어야 하나’ 고민하시는 하느님의 혼란도 좀 생각해줄 때가 되지 않았는지 이스라엘에 묻고 싶어진다.   서상덕 위원은 현재 가톨릭 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405 | 추천: 0
이지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총 맞은 것처럼”이란 노래가 있더군요. 방송에 하도 많이 나오니 아무래도 제목이 수상해서 가사를 유심히 살폈습니다. 헤어짐의 아픔이 총 맞은 상처처럼 가슴을 뚫어 추억이 흘러넘친다는 내용이지요. 그 노래를 무심히 흥얼거리는 아이에게 슬쩍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실제로 총 맞으면 넌 어떨 것 같니?” 전쟁 기념관에 갔더니 갖가지 무기가 전시가 되어 있었는데, 그중에서 구한말 의병들이 썼다는 날카로운 죽창을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친구가 사진으로 담고 있었습니다. 또 슬쩍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실제로 저 죽창에 찔리면 넌 어떨 것 같니?” 각종 언론을 통해서 쏟아지는 전쟁보도를 보면 마치 전쟁 기념관에 들어가 잘 만들어진 전쟁 찬양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을 때가 많습니다. 이 전쟁의 정치적 배경이 무엇인지, 어떤 무기를 동원해서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을 죽였는지, 서로간의 군사력을 비교 분석하고 누가 어떻게 승리할 것인지에 대한 예상 답안까지 내놓지요. 덕분에 우리는 패트리어트 미사일이 어느 마을을 포격했는지, 아파치 헬기가 얼마큼의 포탄을 떨어뜨렸는지를 알고 몇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는지도 압니다. 그러나 폭격을 당한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죽어 갔는지의 과정을 설명해주는 언론을 만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물론 TV에서 포연에 휩싸인 폐허의 도시와 한방에 웅크리고 기도하는 겁에 질린 가족을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금방 숨이 넘어간 듯한 아이의 머리를 무릎에 받치고 뺨을 비비는 어머니의 비명소리엔 눈물이 나기도 하구요. 그러나 그뿐입니까? 유감스럽게도 전장에서의 주검은 그 형체가 온전한 것만으로도 축복일 만큼 비참합니다. 팔, 다리가 떨어져 나가 제멋대로 펄떡이는가 하면, 쏟아진 내장을 뱃속에 주워 담으며 위생병을 부르짖는 병사가 있고, 단 한방의 총성에 죽음의 고통조차 느낄 사이도 없이 풀썩 쓰러지는 여인네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의 피 흘리는 젖가슴을 울면서 파고드는 어린 아기도 있습니다. 인종청소라는 섬뜩한 목표점으로 향하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은 도를 더해 가고 있습니다. 가자지구 남쪽 라파 난민촌까지 공습하는가 하면 가자 씨티에 있는 유엔건물도 폭격했고 급기야 시가전까지 감행했습니다. 사망자가 1000명을 넘어선 지 이미 오래입니다.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죽어갔는지를 생각하면 가만히 앉아 뉴스를 보거나 신문만 뒤적이는 것이 사람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것 같아 마음 졸일 때가 많습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전쟁기념관에 갔습니다. 구석기 시대에 쓰던 돌도끼나 외날찍개 등은 이름의 살벌함에 비해 외려 앙증맞습니다. 잘 벼려진 삼인검, 사인참사검은 내 심장을 세 번쯤 포개 놓고 뚫어도 뚫릴 만큼 날카롭고 길쭉합니다. 한국전쟁 때 썼던 총포류부터 현대화된 각종 최신장비까지 5천년 역사 속의 무기들을 총 망라한 듯 보였습니다. 죽임의 역사를 한데 모아 놓은 것입니다. 저 무기들로 인해 나의 사지가 찢기는 듯한 상상을 하며 몸서리치는 순간 어린아이하나가 전시된 천자총통 위에 엎드려 포 쏘는 시늉을 하고 엄마는 그 모습을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합니다. “어떻게 사람을 죽였나”를 전쟁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아이의 자연스런 행동과 부모의 모습에서 미래의 또 다른 전쟁을 예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몇 해 전 미군의 개(犬)가되어 음부를 드러낸 채 그들의 군화를 핥는 아브그레이브 수용소의 이라크 포로를 우리는 기억 합니다. 그러나 윤간 뒤 생매장 당한 여고생과 젖가슴이 도려진채 나무에 묶여 표창 연습의 대상이 되었던 젊은 빨치산의 아내와 딸이 우리의 역사 속에 있었음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몽키 스패너에 혓바닥이 뽑히고 손톱과 발톱 밑에 대못을 박았으며 팔은 팔대로 몸통은 몸통대로 사지를 찢어 전봇대에 전시했던 일이 (이산하의 시 한라산에서) 우리의 역사에 여전히 한으로 남아있음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빨치산 사내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 그 어미에게 물리는 참혹한 역사가 우리에게 있었음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전쟁을 기념해야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꼭 해야 한다면 전쟁은 “어떻게 사람을 죽였나”가 아니고 “어떻게 사람이 죽었나”로 기억되어야 합니다. 폭격으로 죽은 아들을 묻고 돌아온 새벽. 또 다른 폭격으로 이미 숨져있는 딸아이를 부둥켜안고 오열하는 아비의 심정으로 피눈물의 역사를 선명히 기록해야 합니다. 그것이 민중의 역사입니다. 전쟁은 “지배 계급”에 의해서 준비, 결정, 조직되고. 전쟁에 나가서 싸우고, 전쟁을 치르며, 고통 받는 것은 바로 일반 민중이기 때문입니다. (베너 빈터스타이너) 천수천안(千手千眼) 관음보살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어진 미소를 중심으로 양쪽에 각 20개의 손이 25개의 다른 세계를 계도하니 합이 천수(千手)요, 그 손에 눈이 하나씩 달려있으니 천안(千眼)이 됩니다. 그 많은 눈으로 뭇 중생들의 고단함을 살피고 그 많은 손으로 구원의 손길을 뻗어 지옥불에나 떨어질 가난한 영혼들까지도 살핍니다. 그러나 총탄에는 눈이 달려있지 않습니다. 아이와 군인을 구별하지 못하고. 병원과 군수공장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유엔 인권 이사회의 이스라엘 규탄 결의안에 기권을 하고 내놓은 정책과 추진하는 입법마다 민생을 옭아매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정부도 눈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입법을 꿈꾸면 어떨까 상상 합니다. 꽃이 준비 되지 않으면 그 어떤 싸움도 할 수 없습니다. 꽃으로도 사람을 때리지 말라고 했으나 정 그럴 수 없다면 꽃으로만 사람을 때릴 수 있습니다. 만약 법을 어길 시에는 사안의 경중에 따라 자연생태교육 몇 년. 평화교육 몇 년 등의 형량을 수행해야 합니다.        “저 총탄이 우유공장과 탱크를 구별한단 얘기를 난 듣지 못했네       총탄이 날아온 그 숫자만큼 나무를 심어요 평화의 나무를       포탄이 날아온 그곳을 향해서 노래를 불러요 평화의 노래를“                                                -졸작 나무를 심는 사람들 중에서   물론 천수관음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일이겠지요. 더구나 미디어 관련 7대 법안이나 사회개혁으로 포장된 반인권 법안에 골몰하고 있는 국회에서 언감생심 이런 꿈이나 꾸겠습니까?   이지상 위원은 현재 가수겸 작곡가로 활동 중입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467 | 추천: 0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1. 정치인과 종교인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정치인이 국민의 뜻을 받든다 하고, 종교인이 하늘의 뜻에 따른다고 하는 ‘형식’이 유사하다는 것이다. 자신보다는 국민과 하늘을 앞세우는 듯 한 모습에서 이들은 참 닮았다. 그러면 그 받들고 따르는 ‘내용’은 어떨까? 국민과 하늘이란 서로 다른 개념일 듯싶지만, 실상 그렇지만은 않다. 전 국민이 정치 평론가인 마당에 나라고 정치 현실 판단에 한 몫 끼지 못할 이유도 없겠거니와, 나름 종교 전문가이기도 한 내 눈으로 보건대, 국민과 하늘의 그 실질적 내용이 정말 다른지는 크게 의심스럽다. 국민의 뜻과 하늘의 뜻 운운하는 언어는 외견상 다르지만, 정말로 받들고 따르는 것은 사실상 자기의 ‘욕망’일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받든다’는 미명하에 사실상 그 이름을 ‘팔아’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자 할 때가 많다면 그것은 억측일까. 행여 ‘욕망’이라는 원초적인 표현이 거슬린다면, 그저 자신의 뜻이라고 해도 좋다. 국민/하늘의 뜻이라지만, 그 내용으로 들어가면, 사실상 자신의 뜻일 때가 태반이다. 흔히 자신의 뜻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기 뜻의 보편성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 아닌 것을 가져오는데, 그것이 자신을 자신되게 해준 존재론적인 근거, 정치와 종교의 용어로 하면, 국민과 하늘인 것이다. 물론 이것이 모든 이에게 해당되는 사실은 아닐 것이고, 모든 이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만도 아닐 터이다. 그러나 비록 의도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자신의 뜻과 하늘의 뜻을 혼동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받들어져야 할 국민이 이렇게 바닥까지 무시될 수가 있겠고, 다 같이 하늘의 뜻을 따른다면서 종교인들의 아집과 종교간 갈등이 어찌 이리 끝없을 수 있겠는가.    한나라당의 언론관계법 개정 강행처리 시도에 반발해 파업을 계속하고 있는 전국언론노조 조합원들과 시민단체 회원들이 지난 6일 저녁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앞에서 열린 '언론장악저지 민주주의 수호' 촛불문화제에서 언론관계법 개정 철회를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2. 자기의 뜻과 국민/하늘의 뜻은 구별될 수 있을까. 있다. 국민의 뜻을 ‘받드는’ 것인지, 하늘의 이름을 ‘파는’ 것인지, 구별할 수 있는 기준과 증거가 있다. 정말 국민의 뜻을 받들려면, 정말 하늘의 뜻을 받들려면, 그렇게 받드는 주체의 뜻은 스스로 발아래 내려놓고, 욕망은 깨끗이 비워져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내려놓고 비워진다면, 실제로 손해가 올 가능성이 커질 뿐만 아니라, 설령 손해가 발생하더라도 기꺼이 자연스런 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데 국민/하늘의 뜻을 받든다면서, 그 실제 목적과 결과가 자기 이익의 확대 쪽으로 나타난다면 그것은 분명 욕망의 증거이다. 물론 의도하지 않았던 권력이 주어질 수도 있고, 뜻밖에 재물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런 의외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국민의 뜻을 받든다면서 결국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 하고, 하늘의 뜻에 따른다면서도 무언가 금력도 유지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단연코 국민/하늘의 뜻을 받드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단순한 듯 분명한 사실이자 원리이다. 물론 정치인이 국민의 뜻을 실제로 받들 수 있다. 하지만 그 때의 국민은 극히 일부이거나, 자신의 뜻/욕망을 정당화하도록 자의적으로 해석된 국민이다. 당연히 국민 전체가 아니다. 종교인이 하늘의 뜻을 따를 수 있지만, 그 때의 하늘 역시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해주도록 투사된 하늘일 때가 많다. 하늘 자체가 아닌, 자신의 뜻에 맞게 해석된 하늘인 것이다. 자신의 욕망에 맞음직한 일부 국민의 뜻을 전체 국민의 뜻이 되도록 조작하기 위해 정치인이 손대고 싶어 하는 분야가 언론이다. 정치인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기본적으로 언론을 통제하고 싶어 한다. 자신의 욕망을 하늘의 뜻이라며 정당화하기 위해 종교인은 자신의 욕망에 어울리는 경전의 구절을 본래 맥락과 관계없이 뽑아 내세운다. 경전에 그렇게 써있다고 주장함으로써 하늘의 뜻을 자신 안에 가두고, 결국은 자신을 정당화한다. 그런 식으로 국민의 이름을 팔아 자신의 자리를 정당화하고, 하늘의 이름으로 전쟁까지 벌인다. 이러한 엄청난 착각도 오래 습관이 되다보니, 양심의 가책도 받지 못한다. 가책을 받을 양심조차 실종되었달까, 아니면 두터운 무지로 인해 전혀 볼 수 없게 된 것이랄까. 물론 모든 정치인과 종교인이 다 그러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사람과 하늘을 받드는 이들도 도처에 많겠기 때문이다. 세계적 추세 운운하며 이른바 코드가 맞는 거대 미디어 재벌을 탄생시켜서 결국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 및 확대하려 혈안이 되어 있는 정치인들의 추태, 하늘의 이름으로 이웃을 정죄하고 저주하면서 스스로 하늘에 자리에 오르려는 종교인들의 교만을 곳곳에서 보면서 떠오른 생각을 적어보았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종교문화연구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354 | 추천: 0
황미선/ 인권연대 운영위원 서울시 교육청 앞 농성장에서 열리는 촛불 집회에 다녀왔습니다. 유난히도 추운 한겨울의 추위 속에서 7명의 부당 해고자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 모인 선생님들이 냉랭한 바람과 창백해 보이는 가로등 아래에서 집회하는 모습이 다소 애처로워 보였습니다. 그 동안 온기를 제공했던 가스난로에서 정겨운 나무 난로로 바뀌었다고 너스레를 떠는 해고자가 떨고 있는 동지를 난로 가까이에 밀어 넣으면서 촛불을 드느라 언 손을 녹이라고 권합니다. 앞에서 발언하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아득해 지면서 내 머릿속에는 10년도 더 된 지난 과거의 일이 떠오릅니다. 나의 아득했던 해직 시절이. 그 때도 지금의 해고된 선생님들처럼 추운 겨울에 아이들과 헤어졌습니다. 6학년이 아닌 1학년 아이들과. 행여 학년 마무리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순진한 생각에 이사장집근처를 서성거리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현실을 깨닫고 절망하던 순간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 때 울부짖던 총각선생님의 눈물과 절규! 해마다 내게 주어졌던 아이들을 이제는 영영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청천벽력 같던 느낌! 세상이 우리가 알고 있던 상식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충격! 횡령을 한 사람보다 그것을 폭로한 사람에게 더한 징벌을 가하는 이 사회의 비상식적 잣대가 10년이 더 지난 지금에 와서도 여전히 적용된다는 것에 대하여 절망감이 듭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한 젊은 해직 선생님의 반 아이들이 촛불집회에 각자의 엄마와 함께 왔더군요. 그 또랑또랑한 눈망울에는 한 치의 망설임이나 의심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릴 때 부릴 수 있는 철없음이나 치기도 없었습니다. 그저 잘못된 일이고 그래서 부르짖었음을 당연히 여기는 당당한 눈빛이었습니다.       해직된 정상용 교사의 서울 구산초등학교 6학년 8반 학생들이 지난 22일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정상용 교사 (윗줄 중앙)와 역시 해직된 최혜원 교사(아랫줄 오른쪽)와 함께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토사구팽! 현 서울시 교육감이 두려워할만한 사자성어입니다. 지속적으로 필요한 사람임을 증명하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모습이 분노를 자아내게도 하지만 안쓰럽기까지 합니다. 세 살짜리 아이도 판단이 가능한 일들을 너무나도 대담하게 비상식적으로 처리하는 것을 보면 화가 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저도 모르는 썩소(썩은 미소를 줄인 말로 비웃는 듯 한 미소를 뜻함)가 흘러나옵니다. 그리고 앞으로 그들에게 다가올 그들의 운명이 보입니다. 선거를 치른 후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으로는 승리감에 젖은 오만한 태도일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부족하고 삶의 과정 속에 있으므로 그냥 보아 넘길 수 있는 여유를 가진다하더라도 늘 지나치면 문제가 되더군요. '시간'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언제나 깨달음을 주지만 지금의 정부는 일장춘몽과 같은 이 '권력'이 영원할 것이라 여기는 것 같습니다.    사필귀정! 이 정부에 이 말을 꼭 전하고 싶습니다. 사회는 변화해야하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고, 그 속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흘러가야 하는 지향점을 향해 도도하면서도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요. 생뚱맞을지 몰라도 '진보'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자면 '정도나 수준이 나아지거나 높아짐' 또는 '역사 발전의 합법칙성에 따라 사회의 변화나 발전을 추구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 속에서도 이 사회는 진보되어야하고 진보될 수밖에 없음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습니다. 법무부 홈피에 올라온 임수빈 검사를 응원하는 댓글들이나 엄마와 함께 촛불집회에 참석하는 아이들의 결연한 눈빛에서 그들은 알아야합니다. 와야 할 미래는 어떻게 해서든 반드시 온다는 것을요! 아무리 급속 후진을 하고 장기 집권을 위한 포석을 여기저기 깔아놓아도 그 방향성을 되돌릴 수 없음을 그들은 깨달아야합니다. 당신들은 과거를 살고 있지만, 아이들은 미래를 살고 있고 우리 모두는 미래를 향해 살고 있다는 것을요. 2008년의 마지막 날에 타종으로써 새해를 맞이하는 보신각에서 또 다른 의미를 전달하려는 사람들이 모인다고 합니다. 그들이 무서워하는 촛불을 저마다의 손에 들고서. 그래서 누구나 한 살 더 먹어야하는 12월의 마지막 밤 북악의 누군가는 어느 때보다 두려운 새해를 맞이하게 되겠지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음을 지금의 이 정부만 제외하고 모두 다 알 것입니다. 자신의 몸을 태워 세상을 밝게 하는 촛불을 무서워하는 코미디 같은 현실이 마음 아프지만 한 번 더 힘주어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칠흑같이 어두워 눈앞을 볼 수 없어도 수사자처럼 무서워 날카로운 발톱을 고추 세워도 그 밤이 지나면 새벽은 오고, 새날이 밝아 오는 것임을요!   황미선 위원은 현재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439 | 추천: 0
정원/ 인권연대 운영위원 단지 전체가 종부세 부과대상인 아파트에서 일어난 일이다. 한 채가 평균 10억 원 이상은 되니 아파트 1동은 1,000억 원, 단지 전체로 보면 1조가 훌쩍 넘는 곳이다. 그런데 이 아파트는 관리비 경감을 위해 경비 인원을 절반으로 줄이고 그 대신 현관에 카드 인식키를 설치하기로 했다. 카드 인식키 설치 공사를 지켜보는 경비 아저씨들의 모습은 처량했다. 공사가 끝난 후 경비아저씨들 절반이 사라졌다. 주로 평소에 불친절하다고 찍힌 분들이었다. 기존 경비원 감축으로 이 아파트 주민들은 얼마나 이득을 보았을까. 이 아파트는 원래 아파트 두 라인 당 한 명의 경비원이 배치되어 있었다. 두 라인이면 총 60세대니까 세대당 한 달에 만 몇 천원 남짓 경비원 급여를 분담해 왔을 것이다. 그 부담을 절반으로 줄인 것이니 한 달에 6~7천 원 정도 비용이 줄어든 것이다. 결과적으로 시가 1조가 넘는 단지 주민들이 매월 6~7천 원 정도를 아끼기 위해 여러 가장들의 생업을 빼앗은 것이다. 그런데 정말 주민들은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것일까. 개별경제주체가 합리적인 행동을 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사회 전체적으로 합리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경비원 감축은 개인적 비용을 사회적 비용으로 전가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매달 받아보는 관리비 영수증에는 줄어든 액수만 기재되어 있겠지만 그 이면에는 실업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고스란히 적혀 있을 것이다. 실업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 증가만이 문제가 아니다. 실업은 소비감소를 가져오고 소비감소는 경기침체를 경기침체는 자산가격하락을 수반한다. 조금 과장일 수 있겠지만 아파트에서 경비원을 줄인 행동이 연쇄과정을 거쳐 그 아파트의 가격하락을 가져온 원인이 될 수도 있다. 마치 나비효과처럼 말이다. 경비원 감축은 개인적 비용을 사회적 비용으로 전가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사진 출처 - 한겨레21    정말 걱정되는 것은 정부 차원에서 아파트 주민들이 한 경비원감축 같은 일을 계속 벌이는 것이다. 정부와 한나라당은 최근 60세 이상에 대하여는 최저임금을 낮추고 최저임금 이하를 지급할 수 있는 수습기간을 기존 3개월에서 6개월로 늘리는 방안으로 최저임금법을 개정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최저임금 이하로도 일하겠다고 하는 노령인구가 최저임금법 때문에 제대로 고용될 수 없기 때문에 고용확대를 위한 조치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경비원감축 문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최저임금수준을 낮추더라도 노인층 고용이 확대되기를 기대하기 어렵다. 오히려 현재 고용되어 있는 60세 이상 노동자의 임금을 낮추는 역할을 할 공산이 크다. 루즈벨트 대통령 따라 하기를 유난히 좋아하는 이명박 대통령은 한국판 뉴딜정책을 펼쳐 경제위기를 극복하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그런데 뉴딜정책의 근간을 이룬 전국산업부흥법(National Industrial Recovery Act)의 핵심조항 중 하나가 노동3권과 최저임금을 보장하는 것이었음을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뉴딜을 대규모 토목공사로만 이해하는 수준으로는 경제위기의 폭과 깊이를 더 넓고 깊게 만들고 말 것이다.   정원 위원은 변호사로 활동중입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428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