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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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학교 역사문화컨텐츠학과 교수), 이찬수(전 보훈교육연구원장),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장발장은행장)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재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이명박 대통령은 유럽순방 중에 <유로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10년간 막대한 돈을 지원했지만 그 돈이 핵무장에 이용됐다는 의혹이 일고 있다’고 말했다. 왜 해외언론에 이런 얘길 한 건지, 누구보고 들으라고 한 건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북한 핵실험이 몰고 온 파장이 크지만 그게 누구의 돈으로 한 건지가 핵심인가? 이란이 핵 개발을 하려한다고 해서 우리는 그게 누구 돈으로 했는지가 궁금한가? 아무리 밖에 나가서 한 말이라지만, 나가도 너무 나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핵무장에 이용됐다고 의혹이 일고 있는 그 막대한 돈은 대체 얼마나 될까? 국내 언론보도엔 막대한 돈이라고 전했지만 <유로뉴스> 홈페이지(www.euronews.net)에 실린 인터뷰 전문을 보면, ‘지난 10년간 이전 정부가 43억 유로를 지원했다’고 나와 있다. (현재 환율로 계산하면 7조8천억 원, 60억 달러정도다) 그러나 ‘핵개발에 이용됐다는 의혹이 일고 있다’는 언급은 빠져있다. 단지 ‘북한을 개방하려는 발상이었지만 실패했다. 지금 북한은 핵무기를 갖고 있고 최소한 핵무기를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나와 있을 뿐이다. (Previous South Korean administrations provided about 4.3 billion Euros of assistance to North Korea over the last ten years. The idea was to open up North Korea, but that did not work. Now they have nuclear arms – or, at least they are trying to make them.) 논란이 된 부분이 유로뉴스 측에서 뉴스가치가 없다고 판단해서 뺀 것인지, 아니면 청와대측의 요청으로 빠진 것인지는 확인이 필요하다. 하지만 국내언론 보도에 대해 청와대가 해명을 할 뿐 부정은 하지 않고 있으니 국내 언론이 보도한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은 사실인 것 같다. 그렇다면 정부가 지원했다는 43억 유로의 실체는 무엇일까. 대통령이 언급한 43억 유로는 일부 언론이 정부 자료를 인용해 보도한 적이 있다. 대북 지원금이 최소 29억 달러이고 쌀 비료 등 현물까지 합치면 최대 69억 달러라고 하는데 이 금액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비용이 핵무장에 이용됐다는 의혹은 타당한 것인가. 69억 달러 가운데 쌀이나 비료를 가지고 핵을 개발할 수는 없는 것이니 빼고, 남는 현금은 29억 달러이다. 이 가운데 정상적인 남북교역 금액은 18억 4천만 달러이다. 무역거래를 한 것 가지고 핵무기 개발을 지원했다곤 할 수 없는 노릇이고 그러면 남는 건 11억 3천만 달러이다. 하지만 이 돈 가운데 9억 3천만 달러는 현대그룹이 대북사업을 독점한 대가로 지불한 금액이고 나머지 2억 달러도 개성공단 임금과 금강산 관광요금 등 민간 상거래 금액이다. 이것저것 다 빼고 ‘정부가 북한에 준 현금’은 3년 전 이산가족 화상상봉 때 컴퓨터 설치를 위해 지원한 40만 달러가 전부이다. 그렇다면 북한이 40만 달러라는 막대한 돈을 가지고 핵무장을 했다는 건가? 40만 달러는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후하게 쳐도 5억 원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기부한 3백여 억 원에 비하면 60분의 1도 아닌 금액이다. 이런 주장이 사실이라면 북한은 참으로 실용적인, 저비용 고효율의 핵개발을 한 셈이다. 세계 어느 나라가 40만 달러를 가지고 핵무장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계산하면 이명박 대통령은 북한 핵개발 비용의 60배에 달하는 정말 어마어마한 돈을 사회에 환원한 셈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기부가 다시 한 번 빛을 발하는 지점이다. 하지만 4대강 사업에 들어가는 22조의 돈에 비하면 여전히 ‘새 발의 피’이지만 말이다.       하여튼 대통령의 이 같은 발언은 그동안 저자거리에서나 돌던 이야기를 공식화 했다는데서 큰 파장을 가져왔다. 햇볕정책의 당사자들은 이 대통령의 발언이 사실관계부터 잘못된 것이고 북한의 경제구조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발언이라고 강하게 질타했다. 결국 대통령 자신의 대북정책의 실패를 이전의 정부 탓으로 돌리려는 의도라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 같은 논란에 대해 ‘얼마든지 의혹을 가질 수 있는 문제’라며 여전히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또 ‘지금 우리가 이렇게 강하게 나오는 것은 결국 북한으로 하여금 핵을 포기하고 회담에 나오게 하는 목적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제재나 견제 자체가 목적은 아니’라는 얘기도 덧붙였다. ‘기다리는 것도 전략’이라던 전략에서 이제 북한을 적극적으로 대화의 장으로 끌어내기 위한 전략으로 선회했다는 얘긴가? 대통령의 진정성을 십분 이해한다고 해도, 과연 이렇게 강경발언을 쏟아낸다 해서 북한이 대화의 장으로 나올지는 잘 모르겠다. 설사 대화의 장에 나온다 한든 어떤 얘길 할 건가. 왜 대북지원금으로 핵무장을 했는지 따질 건가? 아님 ‘가장 폐쇄된 사회의 지도자’를 어떻게 하면 잘 이해할 수 있는지를 놓고 대화할 것인가? 나로선 답이 나오지 않는다. 이명박 대통령이 친분을 과시했던 조지 부시 전 대통령도 북한과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강경발언을 쏟아냈지만 그 강경발언으로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끌어내진 못했다. 오히려 위기만 증폭시켰을 뿐이다. 부시를 비롯한 네오콘들의 대북강경정책이 이미 실패했고 결과적으로 북한으로 하여금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로까지 이르게 했다는 사실에 대해선 왜 외면하려는 걸까. 이전 정부의 햇볕정책이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건 자유지만, 지난 10년의 햇볕정책이 환상이었고 실패했다고 주장하고 싶으면 그 근거를 명확히 하고 국민들을 설득하길 바란다. 의혹을 제기할 수는 있지만 최소한의 사실관계는 확인하고 제기해야 할 것 아닌가. 또 대북강경정책이 어떻게 북한 핵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현재의 남북관계를 타파할 수 있는 전략인지 설득력 있는 논거를 내놓고 또 국민을 설득하길 간절히 바란다. 그게 소통의 기본 아닌가. 남북관계는 정확한 사실관계에 입각해서 판단하고 접근해야지 선입견은 철저히 배제해야 한다.   이재상 위원은 현재 CBS방송국 PD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462 | 추천: 0
김창남/ 인권연대 운영위원    정부가 ‘대한늬우스’를 새로 제작해 극장에서 상영한다고 해 화제다. 우리가 어린 시절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볼 때면 꼭 거쳐야 하는 몇 가지 절차가 있었다. 우선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 모두 일어나 국기에 대한 예의를 표해야 했고 그 시간이 끝나면 이어서 바로 그 ‘대한늬우스’가 상영되었다. 월남 파병 군인들을 환송하는 환송식, 반공 궐기대회 장면, 국제기능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선수들에게 표창을 주는 대통령의 모습, 전국적인 쥐잡기 행사 같은 것들이 극장을 찾는 국민이 다 함께 보아야 하는 ‘늬우스’들이었다. 그 시절 곧 시작될 영화 속 환상의 세계를 가슴 터질 듯 기다리던 아이들에게 ‘대한늬우스’는 그저 빨리 지나갔으면 싶은 시간이었을 뿐이다. 영화보기를 좋아해 어지간히 자주 극장을 찾았던 나이지만 그 숱한 ‘대한늬우스’를 관심 있게 보았던 기억은 단 한 번도 없다.     이명박 정부가 새로 기획한 '대한늬우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내가 ‘대한늬우스’를 재미있게 보게 된 것은 오히려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최근의 일이다. 요즘도 KTV같은 채널에서 과거의 ‘대한늬우스’ 필름을 더러 볼 수 있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우연찮게 과거에 제작된 ‘대한늬우스’ 필름을 보게 되면서 나는 이 낡은 흑백 필름이 뜻밖에도 꽤 재미있는 볼거리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재미란 물론 어린 시절에 대한 아련한 추억이나 향수와 무관하지 않다. 그래, 그 시절엔 저렇게들 살았었지, 뭐 그런 거 말이다. 하지만 그런 아련한 향수보다 더 큰 것은 그 시절의 ‘늬우스’들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코미디였는지를 새삼 반추하는데서 오는 재미다. 생각해 보라. 쥐 잡는 날을 정해 전국적으로 쥐약을 배포하고 집집이 쥐덫을 놓아 쥐를 잡는 광경이나 ‘덮어 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따위 표어와 함께 가족계획 캠페인을 벌이는 장면, 반공 궐기 대회에 모인 군중 앞에서 목이 터져라 구호를 외치며 혈서를 쓰는 아저씨들, 그리고 그 대열의 맨 앞에 서서 어깨띠를 두른 채 무표정하게 서 있는 명 연예인들의 모습이란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코미디인가. 그건 마치 요즘 가끔 TV에서 보여주는 60, 70년대의 한국 영화를 볼 때, 기둥을 붙잡고 우는 배우의 신파 연기를 보면서 낄낄 웃음이 터지는 것과도 비슷하다. 시대의 맥락이 바뀌면서 심각하고 진지한 비극이 배꼽 잡는 희극으로 뒤바뀌는 순간이다. 웃을 일 별로 없는 요즘 웃음이 필요한 분이라면 왕년의 ‘대한늬우스’를 한번 찾아보시라. 강추다. 정부가 새로 기획한 ‘대한늬우스’는 개그콘서트를 패러디한 코미디 형식이라고 한다. 그래도 과거와 같은 ‘진지한’ 뉴스 형식으론 안 먹히리라는 생각은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 대명한 21세기에 극장에서 정부 정책 홍보 영상을 틀겠다는 발상 자체가 기막힌 코미디라는 건 왜 생각을 못했을까. 코미디는 의외의 반전에서 최고의 웃음이 터지는 법이다. 대 놓고 코미디하겠다는 걸 보고 웃어줄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럴 바엔 차라리 수십 년 전의 진짜 ‘대한늬우스’처럼 해 볼 것을 권하고 싶다. 진지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쥐잡기 캠페인 같은 거 한번 다시 해 보면 어떨까. 아마 사람들이 엄청 재미있어 할 게다.   김창남 위원은 현재 성공회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재직 중입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490 | 추천: 0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주지하다시피 한국 내 주류 기독교는 보수적이다. 무언가를 ‘보전하고 지키는(保守)’ 성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행위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가 있다면 ‘무엇을 보전하고 지키느냐’에, 그 ‘보전하고 지키는’ 행위가 어떤 결과를 낳느냐에 있을 것이다. 이른바 ‘보수적’ 한국 기독교가 ‘보전하고 지키려는’ 것, 거기서 문제는 비롯되는 것이다. 일제 때만 하더라도 가톨릭과 개신교를 포함하여 기독교는 소수 종교였다. 어느 사회든 소수 집단이 사회 전체에 도전적이거나 그런 의미의 사회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무언가 힘이 생겼을 때, 하나의 권력이 되었을 때, 문제가 되어도 되기 마련인 것이다. 가령 일본의 기독교회도 상당히 보수적이지만, 워낙 소수이기에 사회적으로까지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일본 기독교인 자신도 사회에 대한 특별한 목소리를 잘 내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 기독교(특히 개신교)의 경우는 특히 해방 후 미국 군정을 거치면서 힘을 얻어가기 시작했다. 미군정과 이승만의 자유당 시절 기독교적 목소리는 정치권 안에 직·간접적으로 반영되기 시작했다. 이승만 정권 당시 내각의 거의 절반가량은 기독교인이었으며, 1948년 5월 제헌의회 때는 이윤영 목사의 기도로 개회를 알렸고, 8월 15일 정부수립 선포식 때는 “하나님과 동포 앞에” 대통령 직무 수행을 선언하는 문서를 낭독하기도 했다. 기독교인이 전 국민의 5%에 못 미치던 1945년 미군정 당시 이미 크리스마스가 국가적 공휴일로 지정되었고, 1951년에는 군종제도도 생겼다. 물론 군종의 대다수는 목사 등 기독교인이었다. 남북 분단 후 ‘반공’으로 무장한 자유당 정권 시절 기독교는 정부의 반공 이념을 종교의 이름으로 뒷받침해주었다. 기독교 신앙과 반공은 거의 동일시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기독교는 반공을 국시로 하는 정부 이념 내지 권력에 가까운 종교가 되어가고 있었다. 게다가 미국은 6.25 전쟁 후 가난에 시달리던 한국인에게 주로 교회를 통해 물자를 지원함으로써, 교회에 나가면 생활에 도움이 된다는 이미지도 각인시켜 놓았다. 이런 저런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에서 기독교는 권력과 앞선 문명의 ‘기호’처럼 받아들여져온 것이다. 그러다가 1970년대 급속한 경제 성장기에는 상대적으로 근대적이고 문명적인 이미지를 지닌 기독교회로 많은 이들이 몰려들었다. 농어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든, 마음 둘 곳 없던 70년대 도시 노동자들에게 교회는 불가피한 안식처가 되기도 했다. 전 세계에서 단일교회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순복음교회’ 등 대형 기독교회가 주로 이 시기에 대형화의 기초를 닦았다. 한국 경제의 고도 성장기에 적어도 양적 차원에서는 기독교가 한국 종교계의 주류 세력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1992년에는, 기독교인 김영삼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청와대에서 예배를 보는 일도 생겼다. 청와대라는 공적 장소에서 개인적 종교 행위가 이루어지는 데 대한 문제의식을 갖는 이들도 많았지만, 그렇다고 정말 사회문제가 될 정도의 분위기는 아니었다. 본격적인 문제는 1990년대 후반 이후 기독교의 세력이 하향곡선을 그리면서 다시 생겨났다. 기독교의 성장세가 한풀 꺾이고 사회적으로 반기독교적인 흐름마저 조성되자, 보수 기독교 지도층은 교리적으로, 심리적으로 경직되는 현상을 보여주었다. 사회에 대한 좀 더 공격적인 선교를 통해 기독교의 양적 확장을 도모하려는 분위기가 커졌다. 기독교 장로였던 이명박 서울시장 재임 시절 보수 기독교 지도자들은 서울시장을 이용해 기독교의 세력을 확장하고자 했다.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한다’는 서울시장이나 ‘포항 성시화’를 도모한 정장식 전 포항시장의 발언 등이 불교계를 자극하고 사회적 비판의 대상이 되었지만, 도리어 보수 기독교 지도자들은 힘을 모았고, 급기야 2007년 대선을 앞두고는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섰다. 그리고 이들의 도움으로 출범하게 된 현 정부는 태생적으로 보수 기독교 세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고, 동시에 보수 기독교 지도자들은 현 정부의 출범을 기독교의 확대를 위한 호기로 간주하기도 했다. 대선을 전후해서 기독교인 공직자들에 의한 기독교 중심적, 종교 편향적 발언들이 유례없이 쏟아져 나오게 된 것도, 그동안 기독교가 세속 권력과 누려왔던 밀월 관계가 사회화하면서 드러난 힘을 배경으로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종교의 이름으로 ‘정치적’ 선택을 하기는 다른 종단들도 마찬가지이다. 사례는 많지만, 가톨릭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정국 와중에 가톨릭교회의 한 유력한 신부가 ‘그는 가톨릭 신앙을 실천한 이가 아니다, 냉담자였다, 더군다나 자살을 했다, 그런 이를 교회가 조문할 수는 없다’는 내용의 발언을 했다 한다. 가톨릭 신문은 한 때 가톨릭에서 ‘영세’를 하기도 했던 노무현 관련 기사를 거의 보도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1979년 가톨릭교회와 아무런 관계가 없던 박정희의 죽음은 크게 ‘애도’하면서 교회 차원에서 대대적인 추모 미사를 드렸던 전례에 비추어보면 이것도 모순이 아닐 수 없다. (당시 가톨릭신문 1979년 11월 4일자는 이 시국미사를 1면 톱기사로 보도했다) 결국 가톨릭교회도 시국 사건과 관련해서는 신앙적 판단보다는 정치적 판단에 따른 선택을 한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종교적 선택도 결국 권력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거나 정치적 이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다. 힘없어서 고통당하고 아파하는 자, “우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울어주는”(로마서 12,15) 공감의 정신이 종교적 정서의 핵심이라는 사실은 잊어버리고 정치적으로 선별된 냉엄한 문자적 교리에 인간 내면의 양심을 내어 맡기기도 한다. 종교적 언행 속에 숨어있는 정치적 의도가 이럴 때는 상당히 불손하게 느껴진다. 기독교 장로였던 이명박 서울시장 재임 시절인 지난 2004년 5월 31일 새벽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청년·학생 연합기도회'에 참석, '서울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봉헌서를 낭독하고 있다. 사진 출처 - 2004 기독교TV(www.cts.tv) 화면    이러한 현상에는 기본적으로 한국 기독교가 (넓은 의미에서는 가톨릭도 포함하여) 처한 사회적 차원의 위기 상황이 놓여있다. 주지하다시피 세속화한 근대 사회에서 종교는 개인적 자유와 양심의 영역 안에 있는 것이고, 정치 내지 세속 권력과 분리되는 것이었다. 물론 정치와 종교의 분리가 단지 근대적이기만 한 현상이거나 제도적인 문제만은 아니다. 종교의 탈권력화는 종교 본연의 문제이기도 하다. 붓다나 예수가 결코 세속 권력을 추구한 적이 없다는 사실은 새삼 거론할 필요도 없겠거니와, 공적인 권력을 이용해 사적인 신앙의 확대를 도모하거나, 직접이든 간접이든 다른 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치는 행위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갈등과 충돌로 이어지며, 더 나아가 종교전쟁의 씨앗을 발아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수직적 전제 군주 시절이라면 모를까, 수평적 개인 사회에서 종교가 권력의 힘을 빌어 세를 확장하려는 것은, 그 종교의 내실이 빈곤해져가고 있음을 도리어 드러내는 일일뿐더러,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근대적 상황에서 보자면 자칫 대단히 위험한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는 행위인 것이다. 무엇보다 종교의 이름으로 타자를 억압하는 행위야말로 가장 반종교적인 행위라는 점에서 종교의 권력화는 늘 경계해야 한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 내부적 차원의 문제에 가까운 것이다. 이른바 권력 내지 공적 영역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종교 편향 현상은 기존의 개인적 선교 방법으로는 더 이상 양적 확장이 어렵다는 것을 기독교도 자신이 느끼고 있다는 뜻이다. 선교가 한국 사회에서 한계에 부딪혔으니, 권력을 이용해서라도 양적 성장을 도모해보려는 의도의 반영인 셈이다. 하지만 기독교가 권력과 야합하는 현상은 이미 본대로 한국의 기독교가 내리막길로 들어섰다는 증거이자, 그것을 기독교 지도자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인정한다는 뜻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그런 자세를 바꾸지 않는다면, 비슷한 상황을 지속해나간다면, 한국 기독교의 미래를 읽어내는 것도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어떻게 해야 한국에서 기독교의 미래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인지 다시 돌아보게 해주는 사례들이 아닐 수 없다. 기독교로 인해 발생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종교 편향 문제야말로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서 급격히 쇠퇴하느냐 한국적 종교로 거듭나는 마지막 기회를 잡을 수 있느냐 하는 기로에 서 있음을 알려주는 시금석이 된다. 기독교가 기독교의 세 확장을 위해 권력을 이용하다 보면 마술사가 마술로 만든 호랑이에게 잡아먹히게 되는 결과를 낳을 공산이 크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반종교적인 행위로 종교를 살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현 정부의 탄생에 일조한 기독교가 현 정부를 잡아먹는 호랑이가 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는 것이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종교문화연구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501 | 추천: 0
허윤진/ 인권연대 운영위원    태국의 ‘단또’라는 가난한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9남매 중 다섯째 딸인 폰피몰은(오빠 3명, 언니 4명, 남동생 1명) 어머니(74세)와 함께 농사일을 도우며 생활했습니다. 가난한 가정 형편 때문에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했지만, 외지로 떠난 형제자매들과는 달리 늙으신 어머니를 수발하며 성실히 사는 평범한 시골 아가씨였습니다. 그러다가 결혼중개업소를 통해 한국인 남편을 만났습니다. 잘사는 나라로 알려진 한국으로 시집갈 기회가 생긴 것이기에 가족들도 기뻐해 주었습니다. 결국 2004년 결혼이민자 여성으로서 한국에 왔습니다. 가난한 나라에서 결혼 중개업소를 통해 시집온 많은 외국인 여성들이 겪는 어려움은 많이 있습니다. 언어, 문화, 생활방식, 시댁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온전치 못한 남편과의 생활 등 그 어려움은 다양합니다. 다행히도 폰피몰은 남편과의 사이가 좋았고, 시어머니도 잘 대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폰피몰의 한국생활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가난을 벗어나고자 온 한국에서도 가난한 생활이 지속되었습니다. 남편이 일하는 양말 공장에서 함께 일하며 매달 겨우 50만 원 정도의 생활비를 받아 반지하방에서 살았습니다. 양말 공장 사장님은 남편의 둘째 형입니다. 제대로 된 월급을 요구할 수 없는 것도 정신연령이 낮은 남편의 능력으로는 단순한 작업을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보 같은 동생을 거두어 준 것 만으로도 고마운 형님이었습니다. 어려서 큰 병을 앓았던 남편은 초등학교 저학년의 정신연령밖에 되지 않아 의사소통과 부부관계 조차도 쉽지 않았습니다. 매일 남편의 일을 돕느라 한국말을 배울 기회조차 없었으니, 눈치껏 생활해야 하는 폰피몰의 한국생활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생활고, 언어장벽, 남편의 장애 등의 어려움 속에서 결국 폰피몰 혼자서 한국생활을 적응해나가야 했습니다. 그래도 폰피몰은 의지가 강한 여인이었습니다. 한국으로 올 때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이겨내며 살겠다고 어머니에게 다짐도 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한국에 뼈를 묻을 각오로 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착한 남편이 그녀에게 유일한 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부에게 큰 불행이 닥쳤습니다. 2007년 폰피몰이 위암판정을 받고 위의 75%를 잘라내는 대수술을 받았습니다. 사실 2006년부터 배가 많이 아팠지만, 남편의 무지와 의사소통의 어려움이 있었고, 시댁식구들도 음식이 맞지 않아 단순히 체한 것으로 여겨 적절한 치료를 제때에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병을 키워왔던 것입니다. 결국 저희 기관에 도움을 청해 왔을 때는 이미 완치가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당장의 위급함에 위절제술을 받았지만 뼈까지 전이된 암 때문에 결국 더 이상의 치료가 불가능하니 마음을 편하게 해주라는 의사의 진단이 내려졌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폰피몰의 상태가 얼마나 위중한 것인지 남편이 잘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시댁식구들도 암이라는 진단에 집안에 우환거리가 들어왔다며 냉대할 뿐이었습니다. 병상에 누워있는 폰피물 사진 출처 - 필자    결국 폰피몰은 2009년 2월 태국의 어머니 집으로 갔습니다.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을 때 고향의 가족들을 만나보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에서였습니다. 어쩌면 가족과의 마지막 만남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향에 가서 상태가 더 악화되는 바람에 돌아 올 수 없었습니다. 비행기를 탈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고 이제 걸을 수조차 없게 된 것입니다. 태국의 의사들 역시 이제 가망이 없고 편안히 죽음을 준비하도록 가족들이 배려하는 일만 남았다고 하였습니다. 폰피몰은 가슴 아래까지 마비가 된 상태로 병상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폰피몰이 남편을 보고 싶어 한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하지만 시댁식구들은 남편의 태국방문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인지능력이 떨어져 안전상의 이유로 보낼 수 없다고 했지만, 실상은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기관이 모든 재정지원을 하고, 저희 직원과 수녀님이 동행하겠다고 설득했습니다. 부부가 이제 마지막일지 모르는데 그래도 마지막으로 만남의 시간을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인간적인 설득을 계속하였습니다. 마침내 2009년 4월 24일에 태국선교사 1명과 다문화가정지원센터의 수녀 1명이 남편과 동행하여 4박 5일 동안 태국을 방문하여 폰피몰과 그의 가족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남편은 이번에 가서 꼭 아내를 데려오겠다고 말합니다. 아내인 폰피몰이 얼마나 위독한지 잘 모르고 그저 다리가 아파 누워있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빨리 다리가 나아서 한국으로 오라고 합니다. 폰피몰이 그러겠다고 말했지만, 이것이 이 부부의 마지막 만남이 되었습니다. 서로가 많이 부족하고 가난했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잘 해주었던 남편이 고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꼭 나아서 한국에서 남편하고 계속 살고 싶답니다. 그렇게 해서 한국에서 죽고 싶다고 눈물짓는 모습이 생생합니다. 그래도 어려움과 아픔보다는 착한 남편과의 좋은 추억만을 이야기해 주는 폰피몰이 고맙게 여겨졌습니다.     남편의 위로를 받는 폰피물 사진 출처 - 필자    그로부터 일주일 후 폰피몰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남편이 함께 하지 못했지만 먼 길을 찾아와준 고마운 남편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고 안식을 누리길 기원했습니다. 병고만 아니었어도 폰피몰의 의지와 착한 남편의 마음으로 행복하게 사는 다문화가정이 되었을 텐데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10여만 명이 넘어가는 결혼이민자 여성이 우리의 이웃으로 살아가며 한국인 엄마가 되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웃으로 함께 하며 살아가는 그들이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허윤진 위원은 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593 | 추천: 0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기고 간 숙제를 푸느라 사회 각계에서 말들이 많다. 이 많은 말들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기를 빌며 숟가락 하나 얹어야겠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해 가장 책임이 큰 집단으로 검찰과 언론이 거론되고 있다. 두 집단의 공통적인 특성이라 할 수 있는 하이에나 근성이 만들어낸 합작품이라고 할까. 스스로 몸담고 있는 업역에 대해 심하게 말하는 측면이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차제에 검찰과 언론이 정명(正名)을 찾을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 주지하다시피 검찰과 언론은 공생 관계다. 검찰은 언론을 이용해 여론을 유리하게 조성하고 언론은 뉴스 소스를 얻는다. 사실 검찰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정부 기관 또는 기업들이 언론을 이용한다. 그렇다면 왜 검찰과의 관계가 유독 문제인가. 통제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언론이 스스로의 가치와 원칙에 따라 통제할 수 없게 된다. 특종 혹은 단독 보도에 대한 욕심, 속보경쟁 때문이다. 누구누구를 무슨 혐의로 소환할 계획이라는 기사는 전체 브리핑 형태보다는 특정 언론의 단독보도로 세상에 알려지는 경우가 많다. 공식 브리핑을 하기에 부담스러운 사안일 경우 검찰은 이런 식으로 특정 언론사에 정보를 흘린다. 낙종한 언론사들은 사실 확인에 바쁘고, 반까이(‘만회’를 뜻하는 언론계 은어)를 하려고 열을 올린다.    언론들이 마차를 끄는 말이라면 검찰은 뒤에 앉아 고삐를 쥐고 있는 마부다. 진행 방향과 속도는 전적으로 검찰이 좌우한다. 검찰이 프레임을 짜는 것이다. 아젠다 세팅을 언론이 아니라 검찰이 하게 된다. 프레임 자체를 거부하지 않는 한 검찰의 브리핑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 및 가족에 대한 수사가 대표적이다. 검찰의 수사망이 노무현 본인을 향해 점점 죄어오고, 언론사들의 경쟁이 이미 시작된 상황에서, 이 수사는 정치적인 수사니까 나는 물먹어도 돼, 라고 생각하는 기자는 이 세상에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데스크도 없을 것이다. 지난 주 한겨레신문은 이례적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과 관련된 자사의 검찰 발 기사를 비판하는 기사를 실었다. 이런 자기비판은 사실 한겨레신문이니까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언론사 차원에서 원칙과 기준을 세우고 대응해야 하는 문제다. 일개 기자들이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한겨레의 검찰 출입 기자들은 억울할 것이다. 만약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똑같이 취재하고 기사를 썼을 것이다. 지난 5월 30일 오후 3시 홍만표 대검수사기획관이 대검청사별관에 마련된 임시기자실에서 노무현 전대통령수사와 관련 브리핑을 하고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한겨레는 자기비판과 함께 검찰 위주에서 법원 위주로 보도의 중심을 옮기거나 적어도 검찰의 기소 전 보도를 자제해야 한다는 내용의 대안 기사를 썼다. 그러면서 한 언론사라도 앞장섰으면 한다고 썼다. 그렇다면 그 언론사는 당연히 한겨레신문이 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언론계에서 촌지 문화를 뿌리 뽑는데 선봉이 되었던 한겨레가, 모든 언론사가 권력에 굴종하던 시절 과감히 성역을 깨는 보도를 했던 한겨레가 앞장서야 한다. 검찰 발 기사를 두고 언론끼리 벌이는 특종 경쟁은 업계 용어로 이른바 ‘시간차 특종’이다. 몇 시간이나 늦어도 하루가 지나면 모두가 알게 되는 내용이다. 검찰의 입에서 나온 정보이기 때문에 검찰 말고는 검증할 방법도 없다. 이 불안한 특종을 향한 경쟁이 역으로 검찰의 권력을 이렇게 비대하게 만든 일등공신이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몇 가지 실무적인 문제들이 남는다. 검찰은 고급 정보가 모이는 곳이다. 기자들은 기사를 매개로 검사와 접촉하고 정보를 얻는다. 때로는 기자가 정보 생산의 주체가 되기도 한다. 기사를 포기한다는 것은 정보를 포기하는 것이다. 이런 류의 정보를 고급 정보로 보고 계속 좇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세심한 논의가 필요하다. 난감한 문제가 있기는 하다. 언론의 취재 활동을 감시 활동의 일환으로 보는 시각이다. 이런 측면이 분명히 있다. 만약 검찰이 여당이나 청와대의 비리 혐의에 대해 단서를 잡고도 적극적으로 수사를 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일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개연성 또한 높다. 수사를 하지 않다가도 언론 보도에 따라 마지못해 수사를 하는 경우도 있다. 쉽게 결론 낼 성질의 주제는 아니지만, 좀 과격하게 말하면, 그런 정보들은 대개 해당 기관 밖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내가 검찰 출입을 한 적이 없어서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경험상으로 보면, 검찰도 비슷할 것이다. 검찰 발 기사를 포기하는데 장애물이 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얘기다.    또 하나, 그럼 검찰 출입 기자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기자들이 정보를 얻기 위해 검사 방에 드나들기보다는 재판정에 갔으면 한다. 순진한 이야기라고 비웃을지 모르겠지만, 서민들이 법 앞에서 얼마나 무기력하고 주눅이 드는지 기자들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거기서 많은 기사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누구누구를 (자리에서) 날리거나 하는 특종을 하지 못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사람을 살리고, 잘못된 사회 시스템을 바로 잡는 특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편집국장을 비롯한 책임자들이 나쁜 특종에의 유혹을 떨쳐 버리고, 낙종의 민망함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차별화된 언론을 향한 첫걸음이 될 수도 있다. 모든 특종 경쟁이 나쁘다는 주장이 아니다. 빨리 쓰고 먼저 쓰는 건 언론사의 1차적 존재 이유다. 그러나 검찰 발 기사에 관한 한 과도기적 결단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는 인권 보호 차원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이자 우리 사회 권력구조를 정상화하는 첫 단추에 해당하는 과제다. 어떤 국회의원이 몇 천만 원을 받은 혐의로 검찰에 소환된다는 기사가 더 이상 특종이 아니게 될 때(아무도 기사를 베껴 쓰지 않으면 특종이 아니게 된다) 비로소 검찰 중심의 법조 보도는 다른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을 것이다. 검찰에 쏠린 과도한 권력도 제자리를 찾으리라고 본다.    이런 주장은 내가 신문사 안에서 몇 년 전부터 해오던 것이다. 공식적으로 글을 발표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꽤 많은 동료들에게 이런 문제의식을 전한 바 있다. 그러나 결정할 수 있는 자리에 계신 분들에겐 미처 말씀드리지 못한 얘기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나에게도 용기를 줬나 보다.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중입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498 | 추천: 1
장경욱/ 인권연대 운영위원 경찰이 연일 몸개그와 말개그를 쏟아내고 있다. 개그콘서트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추모 민심이 집중되고 있는 대한문 앞 분향소와 서울광장에서다. 제2의 촛불시위를 제일 두려워했을 것이다. 시민들에 의해 차려진 대한문 앞 분향소를 찾는 기나긴 추모 인파 속에서 불법폭력집회시위를 획책하는 시위꾼들을 발본색원하고자 했을 것이 틀림없다. MB식 법치 이후 지난해 촛불시위 강경진압, 지난 1월 용산 철거민 참사, 대전 화물연대 집회시위로 인한 국가브랜드 손상 발언, 집회 원천봉쇄, 도심 집회금지와 같은 사건들은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집회시위의 자유를 탄압했다. 제2의 촛불시위를 치르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서울광장 원천봉쇄와 대한문 앞 분향소 차벽설치라고 믿었다. 경찰버스를 동원해 서울광장을 봉쇄하고, 시민분향소가 차려진 대한문 앞 도로에 차벽을 설치하여 시위꾼들의 진입을 막으면, 국민 여론이 MB 경찰의 몸개그를 지지하고 나올 것을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지나친 ‘과잉충성’ 몸개그를 선보였나보다. 반응이 썰렁하다 못해 MB식 법치에 도움은커녕 오히려 역효과만 낳았다. 국민들의 크나큰 분노만 샀다. 이때 작렬한 말개그다. “경찰버스가 분향소를 막아주니까 오히려 아늑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부끄러운 체면을 가리는 썰렁 개그다. 2009년 5월 30일 새벽 ‘서울광장 재봉쇄’와 ‘대한문 앞 분향소 강제철거’ 작전에서 보여준 것처럼 전경들의 너무나 지나친 살신성인의 몸개그로 분향소를 부수고 짓밟아버리고 추모객을 잔인하게 강제해산하는 바람에 더욱 수습하기 어려운 후폭풍을 가져다주었다. “작전지역 반경을 조금 벗어난 일부 의경들이 그런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대한문 앞 분향소 강제철거에 대한 서울지방경찰청장의 해명 멘트다. 백주 대낮에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거짓말이다. 경찰을 풍자하는 노래 가사 내용에도 정신을 놓아버린 듯 너무나 민감하게 반응해서 체면을 완전히 구겨버렸다. “인도에 서 있다고 연행하는 나라, 경찰이 집창촌을 운영하는 나라, 경찰이 민간인을 폭행하는 나라, 인터넷에 글 썼다고 구속하는 나라, 경찰이 강도질에 살인하는 나라”, "돌아와요 민중의 지팡이로, 국민의 안전과 생명보호, 멋있는 민중의 지팡이 기대해요" 등의 노래 가사 내용이 경찰의 명예를 훼손하고 국가 공권력을 무력화할 우려가 있다고 그 음반 제작 및 유통금지 가처분을 신청하였다가 보기 좋게 법원에 의해 기각 당하였다. 민사 가처분 신청과 함께 노래 가사 내용이 허위사실이라며 허위사실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경찰이 피해자로 고소를 하고 경찰에서 이를 신속하게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하니 이쯤 되면 공권력의 횡포가 도가 지나쳐 그로 인한 인권침해가 가혹하기 이를 데 없다. 지난 5월 30일 새벽 5시20분경 경찰이 서울 덕수궁 앞에 마련된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시민분향소를 침탈해 노 전 대통령 영정을 모셨던 천막 등이 짓밟혀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과잉충성’에 경찰의 꼴이 말이 아니다. 명예와 위신을 아예 내던져 버린 듯하다. 권력의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는 탓일 게다. 궤변을 늘어놓기 십상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모 민심에 화들짝 놀라 버린 경찰의 모습에서 좀체 공권력의 품위를 찾아볼 수가 없다. “이쯤 되면 막하자는 거지요?”, 민심을 알지 못하는, 체면 없는 경찰에 딱 들어맞는 말이다. 경찰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서울광장을 재봉쇄했고 분향소 강제철거를 자행하였다. 몰락해가고 있는 식물 정권의 붕괴를 막기 위해서 공권력을 틀어쥐고 매달려서 국민들을 위협해 보려고 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든지 파탄의 구렁덩이에서 살아남으려는 절망적 몸부림이며, 두려움에 떨고 있는 최후의 발악에 지나지 않는다. 체면을 헌신짝처럼 내던져 버린 공권력의 국민에 대한 불법적, 강압적 공포조성과 인권침해로 우리의 민주주의 앞길에는 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부당한 공권력의 횡포에 맞서는 게 쉽지는 않다. 설사 핍박을 받더라도 우리 조상들과 우리들이 피땀 흘려 지키고 가꾸어 온 민주주의는 우리들의 단합된 힘으로 더욱 발전되고 완성될 것이다. 민심은 서민을 배반하고 특권층을 대변하는 정권에 대한 불복종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다. 민심의 거듭되는 경고를 외면하고 일방 독주한다면 민심은 촛불이 되어 정권을 철저히 심판할 것이다. 국민주권의 민주국가에서 국민은, 마치 투우사가 미친 듯이 날뛰다 힘이 빠져가는 투우의 숨통을 끊어 놓는 것과 마찬가지로, 날로 체면을 있는 대로 구기다가 겁에 질려 최후의 발악을 시도하는 부당한 공권력을 단숨에 쓰러뜨릴 어마어마한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경찰은 민심에 역행하여 일방 독주하는 정권의 공안탄압과 인권탄압의 하수인으로 전락할 것인가, 민심을 거스르지 않고 국민의 편에 서서 멋있는 민중의 지팡이가 되어 MB식 법치의 미명 아래 추락하고 손상된 공권력의 체면과 위신을 바로 세울 것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역사는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저항권이야말로 국민을 숨죽이게 만들었던 그 어떤 독재 권력의 칼보다도 더 무섭고 강하다는 것을 똑똑히 증명하여 왔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456 | 추천: 0
김영미/ 인권연대 운영위원    오월이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성년의 날이 있어서 가정과 가족의 관계를 생각해보게 하는 날이 있고 교사로서 많은 고민을 하게 하는 스승의 날이 있다. 이는 ‘사람이 사람답게’ 자라나기까지 올바른 사고와 과정이 중요하고 그 가운데 교사가 역할을 한다라는 것이 전제 될 때 스승의 날을 이야기 할 수 있다. "선생님에 대한 공포 때문에 아이가 8개월째 학교에 가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인천의 모 초등학교 2학년에 다니던 예슬양(가명)은 담임교사였던 안 모 씨(29·여)에게 맞은 정신적 충격 때문에 아직까지도 등교를 거부하고 있다. 1학년 때부터 예슬이의 담임을 맡았던 안 씨는 예슬이가 숙제를 안 해오고 물어보는 말에 대답도 안했다며 나무 막대기로 엉덩이 27대를 때렸다. 예슬이는 3주의 상해 치료를 받았다. 체벌이 사회 문제화 된 이후 안 씨는 교단을 떠났지만 예슬이는 선생님에 대한 배신감과 체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학교 얘기만 꺼내도 질겁을 하고 있다. 지금 예슬이는 정신과 병원 두 군데에 다니고 있다. 한 곳에서는 전문의의 정신 상담을 받고 다른 곳에서는 놀이치료를 받고 있지만 상태는 호전되지 않고 있다. 특히 예슬이가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자해까지 시도했다는 경향신문(2009.5.11)의 기사는 교사인 나를 부끄럽고 초라하게 했다. 최근에 교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자본주의적 속성에 부응하는 교육정책들로 인해 구조조정이니 노동의 유연성이니 하면서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는 정부의 정책과 ‘교사를 지식을 파는 장사꾼’으로 만들어가는 사회 일각의 풍토와 일부 교사의 잘못을 전체교사인 냥 확대하여 부풀리는 언론과, 교육을 “매개”로 돈벌이 하는 사교육 시장의 이해관계에 놀아나는 사회분위기 속에서 더욱 초라해지고 있다. 또한 교사에게 배우는 학생 자신들이 그런 고마움을 지니지 않는 데다 학부모들마저 ‘월급 받고 당연히 하는 일’로 치부하고 있다. 학생들이나 학부모들이 그런 생각을 지니게 된 데는 인간으로서 성장하는 올바른 정신을 일깨우지 못하는 교사, 교사답지 못한, 교사로 대우할 수 없는 교사 등으로 교사 당사자들의 책임이 매우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 안타까운 일은 일반 직업인과 다름없이 살아가는 교사가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진 출처 - 한겨레    교사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능력, 성실, 사랑일 것이다. 이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지 않을까. 부끄럽게도 나는 사랑이 부족하다 그러기에, 잘못의 지적보다는 칭찬을, 건강한 아이보다는 마음이 아픈 아이를 좀 더 어루만져 주려고 하며, 미리부터 좋은 아이, 나쁜 아이로 구분해서 대하는 편견을 없애려고 노력한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더 즐겁게 여기는 마음, 아이들을 볼 때마다 눈에 어리는 자상함, 아이들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기는 따뜻한 교사이고 싶다. 그래서 졸업생들에게서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 “열심히 가르치는 선생님이셨지...” 보다는 “선생님은 우릴 진짜 아껴 주셨지” “언제든 찾아가 상담하고픈 선생님이셨어”라는 말을 듣는 교사이고 싶다. “교단에 서 있는 그 시간 동안 나는 늘 죄를 지으며 살았다”는 존경하는 선배교사의 말처럼 나는 날마다 죄를 지으면서도 그 부끄러움을 잊고 지냈었다. 해마다 돌아오는 스승의 날은 나를 가장 부끄럽게 만드는 날이다.   김영미 위원은 현재 불광중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497 | 추천: 0
김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잔인한 계절이라 불리는 4월이 지나고, 화려한 외출의 5월, 5·18이 다가왔다. 5·18 민주화운동! 어언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시민은 국가폭력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워졌으며, 얼마나 더 많은 자유를 누리고 있는지 묻고 싶다.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면서 쟁취한 소중한 우리의 자유와 권리, 그 피고름 속에서 얻은 영혼의 갈망이 지금 존중받고, 기억되고 있는지 묻고 싶다. 법의 이름아래 처벌받아야만했던 수많은 국가폭력의 야만이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 할 수 있을지 묻고 싶다. 엄혹한 시절에 ‘법은 법이다’, ‘명령은 명령이다’라고 부르짖으며 자의적이고 무분별하게 시민의 자유와 존엄성을 침해하였던 그 기억들로부터 이제는 자유로워졌는지 묻고 싶다. 아카시아 향기가 넘치는 계절의 광장에서 그렇게 파도쳤던 촛불이 법의 이름으로 1,500∼1,600여명이 처벌되어도, “악” 소리도 못 지르고 순종해야 하는 것이 시민의 미덕인지 묻고 싶다. 이 시대가 독재시절의 오도되고 오염된 법치주의 허울로부터 어느 정도는 벗어났다고 말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5·18 민주화운동을 폭도라 부르며 법의 이름으로 자행된 그 시대의 재판도 그렇게 합리화 되었었다.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묻고 싶다. 뿔난 민초들의 자발적 외침이었던 ‘촛불’ 재판에 관여하신 지체 높은 대법관 나으리께서 머리 숙여 반성하지만, 법에 따라 자신의 권한은 계속 행사하겠다는 장엄한 메시지를 보내셨다. 이것이 법대로 이고 원칙대로 인지 묻고 싶다. ‘사법행정’ 이라는 그럴싸한 포장지로 뚤뚤 말아 사법부와 국민을 능멸하고도 그렇게 책임지지 않아도 좋은지 묻고 싶다. 이 나라 법원에 남아있는 양심을 짓밟고도 법과 양심에 따른 재판 운운하는 것이 무슨 심보인지 묻고 싶다. 이것이 문명국가 최고위직 판사의 양심인지 묻고 싶다. 5명의 시민이 사망한 끔찍한 죽음에 대해서 국가로부터 아무런 답변도 없는 ‘용산참사’ 사건 재판이 검사들의 수사기록 열람·등사 거부로 인하여 파행으로 치닫고 있다. 그렇게 검사가 위풍당당하게 수사기록 조차 변호인에게 제출하지 않아도 법의 이름으로 법대로 하였으니 괜찮은지 묻고 싶다. 철저한 수사, 한 점 의혹 없는 수사 결과라면 왜 수사기록을 변호인에게 제출할 수 없다는 것인지 묻고 싶다. 그러한 검사가 법률에서 말하는 ‘공익의 대표자’로, ‘인권옹호기관’으로 불릴 자격이 있는지 묻고 싶다. 이것이 법치국가 검사의 양심인지 묻고 싶다. 이러한 행위가 검찰이 휘두르는 정의의 칼인지 묻고 싶다. 이명박정권 용산철거민 살인진압 범국민대책위원회 유가족과 회원들이 지난 5월 14일 오후 서울 서초동 중앙지방법원 앞에서 '진실은폐, 편파·왜곡 수사 검찰 규탄 대회'를 갖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 출처 - 노컷뉴스    한 시대 양심의 꽃들이 시들어가며 5·18 죽음의 장송곡이 울려 퍼질 때 우리는 애써 외면하고 거들떠보지 않았다. 우리는 지금 용산참사 사건을 바라보면서 몇 명이나 이 죽음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지, 이제는 옛날과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그리고 재판을 우리는 얼마나 기억하는지 묻고 싶다. 역사의 질곡으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 묻고 싶다. 현재 우리는 기억과의 투쟁에서 실패하고 있다. 기억과의 투쟁에서 패배는 불행한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기억과의 투쟁에서 패배는 우리의 자유와 존엄성을 팔아넘기는 행동이다. 시대의 불감증과 건망증은 이 시대의 정의를 감옥에 보내는 행위이며, 악마와 교접하는 행위이다. 이 기억과의 투쟁을 위해 아르헨티나의 ‘5월광장어머니회’는 오늘도 거리에서 시위를 계속하는 것일 거다. 악마들의 끊임없는 휘파람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오늘 5·18의 골목길에서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그리고 재판’을 생각한다.   김희수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둥중입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464 | 추천: 0
김 녕/ 인권연대 운영위원 “37살에 대기업 부장이 된 친구는 1억 원 연봉계약을 마친 날 자랑스레 저녁을 샀다. 서울 강남의 집은 나날이 가격이 오르고 있었고, 맏딸은 전국 단위 영어경시대회에서 메달을 땄다고 했다. 입가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단둘이 앉은 3차의 호프집에서, 그는 축축한 눈으로 이렇게 물었다. ‘근데, 산다는 게 뭐냐? 내가 왜 사는지를 모르겠다. 돈을 위해서? 딸을 위해서?’ 말을 마친 그는 급하게 취해갔다.” 이 글은 “CEO가 인문학에 빠진 날”이라는 제목의 어느 잡지(2009년 4월 20일자)의 첫 부분이다. ‘돈’만 추구하다가 ‘혼’을 잃는 건 아닌가 싶은 두려움과 ‘잘 나가는 삶’의 척박함, 그런 깨달음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싶다. 이 기사를 보며 대학시절에 필자의 친구들이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당시에 참으로 잘 나가던 신문방송학과 학생인 친구가 철학과 학생인 다른 친구에게 “넌 왜 철학과를 택했니?”라고 묻자 들려온 답인즉슨, “넌 왜 사니?”였다. 이삼십 년이 지난 지금의 대학에서도 문학, 사학, 철학(문·사·철)로 대표되는 인문학 과목들은 학생 수가 아주 적거나 폐강이 속출하는 반면, 경영학 과목들은 200명 가까운 대형 강의가 늘고 있다. 우리 사회는 기업이 지배하는, 기업 중심 사회로 들어선 지 이미 오래이며, 기업 중심의 경제 정책과 기업 문화는 대중들의 민생고와 의식 구조 뿐 아니라 대학 교육까지 흔들고 있다. 대학 교육이 지녀야 할 ‘혼’과 대학 교육의 뒤를 받치는 ‘돈’이 혼돈되고 있는 형국이다. 대학 고유의 교육이념과 교육 철학에 대한 이해가 턱없이 부족한 재계 인물이 대학총장으로 영입되어 기업식으로 효율을 강조하고, 기업이 요구하는 맞춤형 인재 양성을 목표로 해야 대학이 경쟁력이 있다는 식의 척박한 혹은 천박한 철학을 내세우고 있다. 헤르만 헤세, 쌩 떽쥐페리 등의 작품이 젊은 가슴들에게 희망과 삶의 의미를 잔잔히 전해주던 시절에는 적어도 ‘돈’이 전부는 아니었다. ‘혼’이 있었고, 배움과 깨우침이 있었고, 스승이 있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타는 목마름’도 있었다. 허나, 지금은? ‘혼’에 대한 목마름이라도 있는가? 사실상 보수와 극우만을 대표하는 정치적 대표체제 속에서 서민과 노동계급의 이익 및 요구는 대표되지 못하고 좌절될 뿐이며, 노동을 천대하는 사회분위기가 만들어져, 부동산 투기나 재테크, 펀드 관리와 같은, 생산적 노동을 동반하지 않는 그야말로 돈벌이 그 자체에 우리 사회가 열병처럼 휘말리게 된다.     지난 4월15일 서울대 신양학술정보관에서 기업인 등 미래지도자 인문학 과정에 참여한 수강생들 모습. 사진 출처 - 한겨레21    이런 가운데 무엇이 ‘정의’이며 무엇에 저항할 것인가 하는, 1980년대 민주화운동이 제기한 문제의식과 ‘사회정의’ 관련 문제의식은 찾아보기 힘들어지며, ‘효율성’이라는 ‘무규범적 기술합리성의 논리’가 사회 지도층 및 정치인의 언어를 지배한다. 아울러, 이른바 ‘명품’에 대한 맹목적 선호, 외모지상주의가 처절한 생존경쟁, 출세경쟁과 함께 두드러지며, “부자 되세요”라는 터무니없는 인사가 유행한다. 이러한 사회에서 인간 내면은 돌본 지 이미 오래되어 극도로 황폐하다. 아울러, 대학사회는 더 이상 비판적 지성의 터전이 아니라 사회입시 학원같이 변했고, 지식인들, 학자들 중에서 안락한 보수주의에 빠져 있지 않은 참여적 지성인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어느 진보적인 원로 정치학자가 이렇게 한탄하는 우리 사회에도 희망이 있을까? 다시, 이 글의 첫 부분에서 언급한 인문학 강좌로 되돌아가보자. 중견기업의 대표이사, 대기업·중견기업의 임원·간부, 현직 판사, 병원장 등이 서울대 인문대학의 미래지도자 인문학 과정에 모여 스스로에게 ‘왜 살까?’ 질문하며 이제라도 ‘잘 먹고 잘 살자’가 아닌 ‘제대로 살자’고 스스로에게 외치는 자리가 이번 달에 시작되어 성황리에 열리고 있다는 그 기사에 따르면, “술과 골프, 부동산 이야기를 바꾸고 싶었다,” “정신적 삶이 없으니 가난하다”며 인간이 빵만으로는 살 수가 없음을 새삼 느끼기에 지금껏 돈 안 되는 공부라서 쓸 데 없다고만 여겨진 인문학이 바야흐로 성황을 이루는 거란다. 커다란 조직이나 기업일수록, 그리고 최고위 의사결정권자일수록 최종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엔 외롭고 두렵기조차 하며, 그러한 결정을 좌우하는 것, 혹은 좌우해야 하는 것은 경영학적인 지식이 아니라 그 사람의 가치관, 세계관, 인생관, 인간관, 혹은 이념, 신념, 신앙이라 한다. 그래서 세계적 기업의 성공한 CEO들 중에는 경영학 전공자보다 인문학 내지 사회과학 전공자가 더 많다고 한다. 위의 기사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인문학 강의’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클레멘트 코스’의 유래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미국의 언론인 얼 쇼리스가 지난 1995년 뉴욕의 한 교도소에서 20대 초반의 한 여죄수를 인터뷰했을 때의 일이다. 살인 혐의로 8년째 복역 중이던 여죄수는 ‘사람들이 왜 가난하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시내 중심가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정신적 삶이 없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정신적 삶이 뭐냐’고 되묻는 질문에 그녀는 ‘극장과 연주회, 박물관, 강연 같은 거죠. 그냥 인문학이오’라고 답했다. 그 말에 깨달음을 얻은 얼 쇼리스는 곧바로 뉴욕의 노숙자와 알코올 중독자들을 위한 인문학 강의를 시작했다.” “클레멘트 코스의 첫 수료자 17명 중 2명이 의사, 1명은 간호사가 됐다. 그들은 그렇게 삶을 되찾았다”고 한다. 인권실천시민연대도 이러한 소신을 갖고 재소자 대상의 인문학 강좌를 열어오고 있으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이렇듯, 인문학은 사람을 되살린다. ‘고기를 잡아주는 것’이 아니라 ‘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교육이라지만, 더 나은 교육은 학생들로 하여금 ‘바다를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라 한다. 각자가 자기의 인생을 사랑하고 ‘삶’이라는 큰 바다를 아직 항해할 수 있음을 고마워하게 된다면, 그리고, 정신적 세계에서 맛보는 기쁨과 재미가 얼마나 쏠쏠한지 깨달아 퇴근 후에 종종 서점을 들르는 게 일과가 된다면, 자기의 ‘혼’과 자주 만나 친해지리라. 극도로 황폐해진 마음에 물을 대기 시작하리라. ‘정신’이 황폐해진 자는 ‘인권’을 알 수도 존중할 수도 없다. 현 시기에 더욱 척박해진 인권 현실은 이 시대 지도층 인사들의 ‘정신적 황폐’에 연유하는 바 크다. 이 글 맨 앞처럼, 그들이 축축한 눈으로 “근데, 정치인이라는 게, 사업가라는 게, 가방 끈 길다는 게 다 뭐냐? 내가 왜 사는지를 모르겠다”며 급하게 술에라도 취해갔으면 좋겠다. 그러한 인문학적 목마름과 방황을 거쳐 풍요로워진 정신 속에서 ‘인간’이 왜 그리 귀한 것인지, 왜 ‘인간’이 곧 ‘하늘’인지 새로이 터득하길 기대한다. 자, 건배!   김 녕 위원은 현재 서강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464 | 추천: 0
서상덕/ 인권연대 운영위원    지난 2월 16일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한 후 가히 ‘김수환 추기경 신드롬’이라고 부를 만한 열풍이 우리 사회 곳곳에 불어 닥쳤다. 이 신드롬의 기미는 이미 김 추기경 선종 직후 고인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명동성당으로 이어진 40만 명이 넘는 추도 대열에서 감지할 수 있었다. 김 추기경이 마지막 가는 길에 각막을 기증한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전 사회적인 신드롬의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매스컴은 물론이고 수많은 이들의 입을 통해 알려진 대로 김 추기경 사후 장기기증 신청이 급증하면서 장례 기간을 포함해 일주일 동안 천주교 서울대교구 한마음한몸운동본부를 통해 장기기증을 희망한 이만 1500명을 넘어설 정도였다. 천주교뿐 아니라 다른 종교와 사회 각 분야도 김 추기경으로 인한 영향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국내 언론은 물론이고 해외 언론들까지도 김 추기경으로 빚어진 기이한(?) 현상을 앞 다투어 보도하며 ‘기적’이라는 말을 덧붙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가까이 일본은 물론이고 멀리 미국이나 스페인 등지에서도 김 추기경으로 인해 한국 사회에 불어 닥친 현상을 특집으로 다루며 그의 이름 앞에 ‘성자(聖者)’라는 표현을 붙이기까지 하는 현실을 보면서 필자는 많은 생각을 품게 됐다. 김 추기경의 삶과 그의 죽음에 어떤 개인적인 의미를 부여해서가 아니라 고인의 살아생전 잠시나마 이어졌던 인연의 끈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기자로서의 삶에 발을 들여놓고 얼마 되지 않아 선배 기자로부터 물려받은 취재처 가운데 하나가 당시 서울대교구장으로 재직 중이던 김수환 추기경 집무실이었다. 알려진 대로 김 추기경의 하루 일정은 거의 분 단위로 짜여 있어서 어떤 때는 거의 하루 종일 추기경 옆에 붙어있다시피 할 때도 적지 않았다. 그리스도교의 큰 명절이라 할 크리스마스 때나 부활절 무렵이면 하루에도 몇 번씩 장소를 옮겨 다니며 수행해야 할 정도였다. 더구나 김 추기경의 모친과 필자가 같은 종씨여서 종종 추기경의 살가운 대우를 받기도 했다. 그런 고인과의 만남 가운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추기경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한 시간들이었다. 어느 해 성탄절 무렵인가에는 오전 오후에 걸쳐 몇 군데의 철거민촌과 사회복지시설들을 쫓아다니기도 했다. 그 때마다 추기경이 보여주었던 모습은 ‘따뜻한 아버지’나 ‘인자한 할아버지’ 상 그것이었다. 철거민촌을 찾은 김수환 추기경의 생전 모습 사진 출처 - MBC 스페셜    그런 김 추기경의 상에 흠집이 나기 시작한 것은 1998년 5월 고인이 서울대교구장에서 물러나고 몇 년이 지나면서부터였다. 서울대교구장을 맡은 지 30년 만에 물러날 당시 이미 77세로 연로한데다 지병까지 있었던 김 추기경이었지만 은퇴 후에도 우리 사회에서 누구 못지않은 권위를 누렸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상대적으로 추기경을 가까이서 지켜볼 기회가 많았던 필자의 눈에 추기경의 적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가 바로 이 때다. 물론 이전에도 추기경 주위에는 그를 흠집 내려는 이들이 적지 않았지만 이때만큼 힘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추기경이 지병 등으로 집무실을 벗어나 가난한 이들 가운데로 나아가는 발걸음이 줄어들자 고인의 주위는 이른바 ‘방귀깨나 뀌는’ 이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그의 육체만큼이나 정신도 어려움에 놓이게 됐던 것 같다. 한 마디로 고인이 사랑하며 늘 관심을 기울이던 ‘가난’과 그 가난을 살아가는 이들에게서 멀어지면서 ‘성자’로서의 그의 삶에 흠집이 하나둘 늘어갔던 셈이다. 이미 김 추기경이 갔음에도 그의 적들은 지금도 활개를 치며 다른 대상을 찾아다니고 있다. 김 추기경의 삶은 역설적이게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향한 ‘관심’이 사그라질 때 내면으로부터 자신의 적이 생겨나고 결국에는 그 적들에게 서서히 질식당하고 마는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김수환 추기경이라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존재가 삶으로 보여준 진리라 더욱 시리게 다가온다.   서상덕 위원은 현재 가톨릭 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17-06-29 | hrights | 조회: 480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