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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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학교 역사문화컨텐츠학과 교수), 이찬수(전 보훈교육연구원장),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장발장은행장)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몸에서 나간 길들이 돌아오지 않는다 언제 나갔는데 벌써 내 주소 잊었는가 잃었는가 그 길 따라 함께 떠난 더운 사랑들 그러니까 내 몸은 그대 안에 들지 못했더랬구나 내 마음 그러니까 그대 몸 껴안지 못했더랬었구나 그대에게 가는 길에 철철 석유 뿌려놓고 내가 붙여냈던 불길들 그 불의 길들 - 이문재 <내 마음의 지도>   #섬진강 지난해 가을 섬진강변을 따라 사흘을 걸었다. 광양제철소 근처, 섬진강이 바다로 몸을 푸는 지점에서 출발한 나는 시속 4㎞의 속도로 서서히 북상했다. 망둥이가 뛰어오르는 섬진강 하류는 아름다웠지만, 이내 한 무더기의 공사현장과 맞닥뜨렸다. 남해고속도로와 19번 국도를 잇는 지름길을 새로 놓으려는 공사 같았다. 모든 공사현장이 그러하듯, 벌겋게 파헤쳐진 국토는 슬퍼 보였다. 강 하구 쪽에 보가 설치되는 바람에 재첩이 잘 잡히지 않는다는 소식이 들려오던 무렵이었다. 국산 재첩이라고 써놓은 것들은 죄다 거짓말이며, 이제 재첩도 거의 중국산이라는 육성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걸으면서 나는 강가에는 길이 없다는 걸 처음 알았다. 강을 따라가려는 여행자는 국도 위의 아스팔트를 걸어야 했다. 어느 운 좋은 마을이나, 이따금 만나는 공원에서는 강을 발치에 둘 수 있었지만 그건 잠시뿐이었다. 물결은 멀고 차량은 가까웠다. 발은 쉬이 피로해졌다. 그러다 정신이 퍼뜩 들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강변을 걸어봤던 것일까? 그래서 나 같은 사람이 강변에 접근하기 쉽도록 자전거 도로를 만들겠다는 것일까? 강바닥의 모래를 퍼내어 수심을 깊게 하고 유람선을 띄우겠다는 것일까? 국도가 아닌 강변을 걷고 싶다는 나의 욕망이 4대강 사업을 자초한 것은 아닐까? 지리산의 구례 쪽 정상에서 바라본 섬진강의 모습. 사진 출처 - 한겨레 #청계천 복개한 도로 밑의 청계천에 가스가 차서 언젠가 청계천 일대가 폭발할 것이라는 괴소문마저 돌았던 청계천 복개도로와 그 위에 위태롭게 걸쳐져있던 고가도로를 뜯어내고 청계천을 복원하자는 제안을 처음 한 것은 지금은 고인이 된 박경리 선생이었다. 한겨레신문은 2002년 1월 1일 신년기획 특집으로 박경리 선생 인터뷰를 싣고, 청계천 복원 시리즈를 통해 이 동화 같은 상상에 시민권을 부여했다. 당시 대부분의 언론은 교통 혼잡과 천문학적인 비용 등을 들어 반대했다.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 후보는 청계천 복원론을 선거 공약으로 받았고, 김민석 민주당 후보는 미적거리다 반대했다. 결국 이명박이 당선됐고, 청계천은 불구의 몸으로 복원됐다. 산에서 내려온 물이 흐르는 살아있는 하천이 아니라 수돗물을 역류시켜 거꾸로 흐르게 하는 죽은 하천이었다. 하천 바닥을 시멘트로 쳐바른 청계천 복원 사업은 토건족 이명박의 절묘한 변용이었다. 개발 시대를 반성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은 개발의 진화였다. #한강 여의도 63빌딩 아래 샛강과 만나는 수문 근처에는 자그마한 모래톱이 있었다. 둔치 공사 이후, 한강 하류에는 모래가 쌓일 공간이 없었지만, 이곳에만 유일하게 남아있던 모래톱이었다. 김소월의 <강변살자>는 노래가 절로 나오는 정다운 곳이었는데, 오세훈 서울시장의 ‘한강 르네상스’ 공사로 싹없어지고 말았다. 모래를 치우고 시멘트를 발라버렸다. 오 시장은 참 대단한 따라쟁이다. 환경연합 회원이었다는 분이 어찌 그렇게 환경감수성이 무딘지 새삼 놀랄 따름이다. 친구와 그곳을 거닐며, 세월이 조금만 더 흐르면 둔치의 시멘트를 모두 걷어내고 자연하천을 살리자는 운동이 시작될 거라는 얘기를 하며 꿈에 부풀었던 내가 한심스러웠다. 한강의 다른 구역은 어떤가. 공터라고는 거의 남기지 않고 꼼꼼히 시멘트를 발라놓은 성실성이 놀라울 정도다. 지금의 한강 둔치는 숨 막히는 잿빛 그 자체다. 서울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염형철 서울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이 한강르네상스 사업으로 조성된 돌 축대를 가리키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경부고속도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한강의 그 잿빛 구조물 위에서 즐겁게 논다. 사진도 찍고 자전거도 탄다. 인공어항이라고 비판받는 청계천을 수많은 사람들이 찾고 즐기는 것처럼. 여름이면 발까지 담그며 즐거워한다. 없는 것보다 낫지 않냐고.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4대강 사업이 완공되면 시민들은 자전거를 타고 지금은 갈 수 없는 한강의 북쪽과 낙동강, 금강, 영산강을 달릴 것이다. 유람선을 타고 경치를 즐길 것이다. 없는 것보다 낫지 않냐고. 이명박 대통령은 완공 이후의 편익이 과정의 모든 논란을 덮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경부고속도로가 그랬듯이. #기우뚱한 균형 분명히 말하건대, 섬진강의 모래밭은 멀리서 더 아름다웠다. 누군가는 흉물스럽게 바닥을 드러냈다고, 모래를 퍼내어 물이 가득 흘러야 비로소 강다울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그런 쪽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강을 해치지 않으면서 강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고 싶었다. 모래톱을 해치지 않으면서 가벼운 산책길을 만들 수는 있지 않을까. 개발과 환경이라는 두 가지 가치 사이에서 철학자 김진석처럼 ‘기우뚱한 균형’을 잡아보고 싶었다. #광기 그러나 이 정권의 4대강 사업은 그 자체가 너무 폭력적이어서 기우뚱한 균형을 말할 공간이 없다. 일체의 여론 수렴과정과 형식 절차를 생략한 채 밀어붙이는 이 독재적 만행 앞에 모든 이견과 상상은 설 자리를 잃는다. 가장 두려운 건 지금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광기다. 대통령 한 사람이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국민의 절반 이상이 반대해도 강행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의 민주주의는 불구가 되었다. #두려움 버스전용차선을 포함한 교통체계 개편 작업을 진행하면서 이명박 서울시장은 자신의 취임식 날인 7월 1일에 맞춰 모든 작업이 끝나도록 독려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버스카드 단말기는 고장 나기 일쑤였고, 버스전용차선에 깔아놓은 빨간 아스팔트는 빗줄기에 파헤쳐졌다. 시민들은 한동안 어리둥절했다. 충분히 준비하고 좀 천천히 하면 안 되나.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 안에 4대강 사업을 완료하기 위한 속도전이 다시 한 번 진행되고 있다. 서울의 교통체계야 약간의 시행착오 뒤 금세 진정되었지만, 4대강 사업이 가져올 후폭풍은 재앙에 가까우리라. 나는 다가올 여름이 두렵다.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중입니다.
2017-07-13 | hrights | 조회: 349 | 추천: 0
위대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어린 나이에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라는 책을 읽으면서 우주에 대해 상상하곤 했다. 우주는 무한한 것이라고 하는데 나이 어린 나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주가 무한하다고 하면서 빅뱅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빅뱅이 한 점(Spot)이 폭발하여 현재의 우주가 되었다는 것인데, 도대체 얼마나 큰 점이길래 무한하다고 하는 건지, 그 한 점(Spot)이 무한하다면 그 한 점(Spot)의 밖에는 무엇이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 한 점의 밖은 무(無)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무(無)라는 개념 역시 이해되지 않는 건 마찬가지다. 분자가 세상을 구성하는 물질의 가장 작은 단위라고 생각했던 것이 불과 몇 세기 전인데, 이제 인간은 분자보다 작은 원자, 원자에서 더 나아가 전자, 핵, 양성자, 중성자는 기본이고, 300여종의 소립자가 더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인간의 인식의 한계는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계속 확장되고 있다. 물론 과학의 수준이 현재 상태에서 파악할 수 있는 한도까지만 인간은 인식한다. 그러나 인식 범위의 확장 가능성은 열려있다. 이 모든 것이 의심에서 출발하고, 궁금증에서 유발된 것이다. 그런데 사회 인식 범위의 확장가능성은 열려있는가? 천안함이 침몰한지 벌써 20여일이 훨씬 더 지났다. 연일 TV, 신문, 인터넷 등을 통해 천안함과 관련된 속보가 보도되고 있다. 그런데 천안함과 관련된 그 어떠한 의혹도 시원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어뢰 공격이 있었다면 왜 화상을 입은 승조원이 없을까, 군이 보유하고 있는 Tod 영상은 왜 중간이 뭉텅이로 없을까, 군 통신망을 놔두고 왜 국제상선망으로 통신을 했을까, 해경과 해군 사이에는 왜 진술이 일치하지 않을까 등등 천안함 침몰에 관한 국방부의 발표와 관련하여 의문과 궁금증은 갈수록 증폭되어가고 있을 뿐이다. 당시 천안함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과학의 발전은 과학적 발견과 그 발견을 위한 노력을 통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루어진다. 그러나 사회의 발전은 과학의 발전과는 다른 양상을 띠고, 경우에 따라서는 후퇴라는 양상을 나타내기도 한다. 사회 발전의 밑바탕은 정확한 사실의 발견 내지 이를 위한 노력이고, 밑바탕이 마련된 후(내지 밑바탕을 마련하려는 노력과 동시에) 더 나은 사회를 구상하고 실천하는 단계를 거쳐야만 한다. 백령도 해상에서 침몰한 1200t급 초계함 천안함의 선수 부분이 수면위로 보이고 있는 가운데 해경 함선이 주변을 지나고 있다. 사진 출처 - 옹진군청 그런데 천안함을 둘러싼 여러 정황은 전반적으로 매우 부정적이다. 정보를 소지하고 있는 기관이 스스로 침묵하거나 정보를 알고 있는 자에게 침묵하도록 강요하거나 거짓 정보를 마치 사실인 것처럼 발표하는 등의 행위를 하고 있다. 각개 분야의 전문가들이 여러 의견과 의문을 쏟아내는 형국임에도 정작 천안함의 침몰 과정에 대해 모든 자료를 보유하고 있어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침몰했던 천안함의 선체를 직접 확인하고 있는 군 당국의 신뢰할 수 없는 발표로 인하여 정확한 사실 관계조차 파악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제는 군 당국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기 어려운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로써 천안함 사건을 통해 한 단계 발전할 수 있는 여러 계기들이 사장되고 있다. 게다가 천안함 사건에 대해 누구 하나 책임지려는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것이 궁극적 해결책은 아니겠지만, 이처럼 온 국민을 슬픔으로 눈물짓게 하고, 전군의 사기를 땅바닥까지 떨어뜨린 중대한 사안에 대해 누구 하나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이 없는 현재와 같은 상황은 이전 정권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천안함이 왜 침몰했는가를 파악하는 문제는 우주가 끝이 없는 것인지, 전자, 양성자, 중성자, 핵보다 더 작은 물질이 있는지 파악하는 문제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후자는 인식의 범위를 넓히기 위한 우연한 발견과 그러한 발견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으로 충분할 수도 있지만, 전자는 이미 인식 가능한 사실이 존재하고 있고, 그 사실은 있는 그대로 드러나야 그 사실을 바탕으로 발생가능한 동종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고 개선점도 찾을 수 있다. 그래야 적어도 장래에 비슷한 사고를 예방할 수 있을 것이고, 구조적인 문제점을 해결하여 더 나은 해군을 만들 수 있으며, 무엇보다 징병제가 유지되는 한 줄도 없고, 빽도 없고, 힘도 없어 군에 자녀를 빼앗길 부모들이 조금이라도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다. 천안함 희생자 분들의 삼가 명복을 빕니다. 위대영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7-13 | hrights | 조회: 342 | 추천: 0
황미선/ 인권연대 운영위원 아이들은..... 얼마 전 근무하고 있는 학교에서 강서교육청 소재의 학교 교장선생님을 모시고 교사들을 대상으로 학업성취도 평가에 대한 연수를 실시하였다. 업무가 많아 바쁜 학기 초에 평가에 대한 연수를 받아야하는 교사들의 입장에서는 평가에 대한 명쾌한 내용을 기대하였으나 평가와 상관없는 교장선생님께서 근무하고 있는 학교에 대한 홍보성 얘기를 길게 들어야 해서 교사들 사이에서 불만이 있었다. 하지만 강사가 평가에 대한 명쾌한 내용을 이야기하기 힘든 이유는 현재 시행되고 있는 평가로는 교육적인 논리를 찾기 힘들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교육과정상의 평가는 다양성과 자율성, 창의성을 중요하게 여겨 가르친 교사가 수행평가 방식으로 평가하도록 권유하고 있으나 현재 시행되는 평가는 그 수행평가에다가 획일적인 일제고사식 평가를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부어 실시토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횟수도 학기당 1회(연2회)에서 2회(연4회)로 늘어나는 추세여서 당연히 시험에 대한 압박감은 아이들이나 교사, 학부모에게 모두 클 수밖에 없다. 현재 중학생들이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형태로 치루고 있는 이 시험은 사실 학원연합회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는 공정택 전 교육감이 학교에 강압적으로 실시하게 한 시험이다. 아이들에게 부담만 안겨주고 성적에 들어가지도 않는 일제고사 형태의 시험은 교육청에 시험의 실시여부와 참여도를 보고해야하는 교감과 시험에 대하여 문제제기를 한 교사들 간의 충돌을 야기했고 문제제기를 한 많은 교사들은 시험이 이루어지지 않는 저학년을 담당하는 웃지 못 할 일이 일어나고 있다. 인사의 자율권이나 민주적 인사는 허울만 있을 뿐 강제적으로 시행되는 정책 앞에서 제도 자체가 무력해 질 수 밖에 없다. 공 전 교육감은 리틀 이명박으로 일컬어지는 사람으로 이명박의 교육정책을 가장 잘 따른 사람이다. 그가 교육계 비리의 몸통으로 불려지며 교육 관료들의 승진이나 인사에 깊숙이 개입하여 권한을 남용한 것은 모두 알고 있는 일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재임기간동안 펼친 정책들을 아무 비판 없이 그대로 수용하여 이행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 일제고사 형태의 학력평가를 강제적으로 치르게 한 이후 시험지 회사의 주가가 치솟았고 사교육기관들은 어려운 사회분위기 속에서도 크게 성행하였다. 공 교육감이 새롭게 도입하여 시행한 고교선택제나 국제중 설립 또한 사교육을 활성화하는데 일조했다. 그러나 제도적으로 문제가 있어 고교선택제도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있고 국제중 또한 마찬가지이다. 6조원이 넘는 막대한 예산을 사용하여 교육대통령이라 여겨지던 서울시 교육감이 가져야하는 교육에 대한 관점과 공공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끼면서 우리는 아이들을 위해 어떤 인식과 선택을 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이다. 사진 출처 - 노컷뉴스 교사들은..... 교사들은 평가를 하는 주체라는 막연한 생각에서 이제는 평가를 받아야하는 존재가 되었다. 모두 평가를 받고 그에 따른 인센티브를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유독 교사만 평가를 거부하는 모양이 억지처럼 보이지만 지금 학교에서 이루어지려 하는 교원평가는 결코 교육의 질을 높일 수 없는 제도이다. 아니 오히려 교육의 질을 담보할 수 없으면서 교사가 가지고 있는 교육적 소신이나 신념마저 저버리게 만드는 심히 우려되는 제도라고 생각한다. 일 년에 4번 하는 공개수업이 동료평가의 유일한 잣대이며 학부모나 학생평가는 인기투표로 전락할 공산이 매우 크다. 이런 상태에서 어떤 교사가 교육적 소신을 가지고 바른 가르침을 펼칠 수 있단 말인가? 교사가 가진 소신은 어떤 한사람의 인생에 영향을 줄 수도 있고 가르침이라는 것은 지난한 기다림과 인내를 요구하는 행위이다. 이것을 단지 1년이라는 기간에 평가받아야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질 높은 교육을 위해서는 교육환경에 대하여 투자하고 여건을 조성하여 좋은 교사가 되도록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야한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교원평가는 『서울학생 7560+운동』처럼 정말 사회적 정서에 편승하는 허울뿐인 제도이다. 얼마 전 서울지역 학생들이 체격은 크지만 체력은 허약한 것으로 나왔다는 뉴스를 접하고 개인적으로 누군가 투자안하고 시행되는 정책 하나 만들겠구나 생각했는데 결국은 내 예상이 정확하게 맞았다. 1주일 중 5일을 60분씩 운동하자는 이 운동은 정부에서 하는 것은 하나 없이 관련 유인물을 만들어 학생들이나 학부모가 매일 확인하고 체크하여 학교에 제출하라는 것이다. 현재 시행되려는 교원평가제도 또한 마찬가지다. 20여 년 전 일 년에 몇 차례 시행되는 공개수업만 잘하면 되었던 그 시절... 매일 진행되는 수업은 신경 쓰지 않고 남들이 보는 수업만 신경 쓰며 수차례 연습까지 해가며 공개하던 그 수업.... 그 전철을 다시 되밟자고 하는 이 시점에서 교원평가는 다시 재고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자기반 수업은 네 차례씩이나 빼먹고 아이들은 방치하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아이들이나 교사한테 이런 평가가 성행하는 학교라는 곳은 어때야 옳은 것일까? 교사가 가르치면 아이들이 알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다. 그러나 그 방식은 다양해야하고 획일적이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평가가 단순히 시험문제 풀이식으로만 진행되어서는 곤란하다. 강가에 있는 각양각색의 돌처럼 각기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는 아이들을 시험이라는 한 가지 잣대로 서열화시키는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개성과 다양성을 말살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학교라는 곳은 각기 다른 능력과 개성을 지닌 아이들이 각자가 원하는 다양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이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전폭적이고 막대한 지원과 투자가 필요하다. 수영장 없이 수영교육을 필수로 받으라고 하는 현재의 교육과정은 학교의 현 실체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교사들은 어떠한가? 교사로서의 자질과 수준이 높은 교사가 되도록 여건을 조성하고 제도적으로 뒷받침을 하는 게 필요하다고 본다. 학급당 학생 수를 줄여서 교사가 아이들 하나하나를 관찰하고 가르치는 것이 가능하도록 여건을 만들고 가르치는 일 외에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잡무를 없애 오로지 아이들과 교육내용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교사 스스로 자기 발전을 하도록 지원해야하고 교사의 발전이 상시적으로 학생들에게 피드백 될 수 있도록 보장해야한다. 창의적 사고를 지닌 민주적이고 자율적 인간 육성은 단순한 평가 방식으로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다. 이제 교육의 다양성과 공공성에 기반을 둔 학교교육에 대한 폭넓은 인식과 기대를 새롭게 가져야한다고 생각한다. 황미선 위원은 현재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13 | hrights | 조회: 342 | 추천: 0
김창남/ 인권연대 운영위원 어느 날 이지상이 찾아와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이지상, 사람을 노래하다.” 기타를 옆에 세워 둔 채 의자에 앉아 있는 이지상의 사진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건물의 모양새로 보아 성공회대학교 교정 어디쯤에서 찍은 것으로 보이는 표지 사진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결코 밝지 않은, 다소 눅눅해 보이는 그늘진 자리, 담쟁이는 겨우내 메말라 있던 자취를 채 떨어내지 못한 채 이제 막 조금씩 파란 이파리를 내놓으면서 위로 뻗을 채비를 하고 있다. 의자에 앉은 이지상은 웃는 듯 마는 듯 겸손하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지만 그 엷은 미소가 강인한 입매와 눈빛을 숨기지는 못한다. 이 사진에서 가장 밝은 부분은 그의 분신인 기타다. 벽에 비스듬히 기댄 채 정면을 향해 있는 기타의 둥근 몸이 뿜어내는 강한 빛의 여운이 그 사선 위에 자리한 이지상의 눈빛과 연결되며 강한 악센트를 만들어낸다. 내가 사진을 잘 모르긴 하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이지상이라는 인간의 아우라를 이처럼 절묘하게 드러낸 사진은 또 없지 않을까 싶다. 이지상은 지난 20년 동안 노래를 만들고 불러온 싱어송라이터다. 그는 통기타 하나만을 들고 세상의 낮은 곳을 찾아다니며 그늘 속 삶과 사람들을 노래해 왔다. 그의 모든 노래의 주제어는 사람이다. 크고 위대하고 강한 사람이 아니라 작고 낮고 여린 사람들, 모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할퀴고 찢기고 유린당하면서도 결코 패배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그가 만드는 노래의 주인공들이다. 화려하고 강한 것들만 조명되고 기억되는 천박한 세상에서 그의 노래가 이른바 비주류의 울타리를 넘은 적은 한 번도 없지만 그는 마치 세상의 모든 상처받은 사람들을 다 껴안으려는 듯 쉼 없이 노래를 쓰고 불러왔다. 이 책 “이지상, 사람을 노래하다”는 그가 노래를 쓰고 부르면서 만났던 사람들과 그들의 삶, 그들을 둘러싼 세상에 대한 잔잔한 기록이다. 이지상은 그가 맡고 있는 성공회대학교 강의 <노래로 보는 한국사회> 수업에서 ‘노래 듣고 울어보기’라는 과제를 준다. 노래를 ‘듣기’ 보다는 몸으로 느끼고 춤을 추는 데 더 익숙 사람을 노래하다 책 표지 사진 출처 - 삼인출판사 한 세대에게 이 과제는 아마도 조금은 생뚱맞고 어색한 느낌을 주지 않을까 싶다. 오히려 그렇기에 ‘노래 듣고 울어보기’는 새로운 세대가 노래라는 예술을 진정으로 새롭게 인식하는 뜻 깊은 경험이 아닐 수 없을 테다. 노래를 들으며 울 수 있다는 것은 그 노래 속의 삶과 현실에 깊이 공감하며 이를 통해 세상을 새롭게 느낀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그 노래가 담고 있는 세계를 낯설게 들여다보면서 그 속에 있는 우리들 자신의 모습을 새롭게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 책에 담긴 많은 노래와 그 노래 속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는 바로 그렇게 노래를 듣고, 노래 속의 세상을 읽고, 그 세상 속 삶의 모습을 들여다보며, 새삼 낯설게 우리들 자신을 확인한다. 우리의 눈물은 그런 의미에서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각성의 눈물이며 그 각성에서 비롯하는 희망의 눈물이다. 이지상이 운영하는 누리집 ‘사람이 사는 마을’은 www.poemsong.pe.kr이란 주소를 갖고 있다. poemsong이란 단어가 말해주듯 그는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은 시의 모습으로 그에게 포착되어 한 편의 노래로 완성된다. 그의 노래를 듣는 일은 언제나 노래와 함께 한편의 시를 읽는 감동을 선사한다. 이 책 “이지상, 사람을 노래하다”를 읽는 일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이 책에서 낮은 목소리로 세상과 역사의 모진 틈바구니에서 결코 스러지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 이야기 속에 담긴 시를 읽게 된다. 이지상의 글도 그의 노래를 닮았다. 잔잔한 경어체로 나지막이 속삭이듯 이야기하지만 그 속에 역사의 핵심을 꿰뚫고 삶의 진정성을 들여다보는 깊은 통찰이 담겨 있다. 그의 책은 그래서 삶의 낮은 자리에서 몸으로 겪어온 가난한 사람들의 역사이고 현대사의 고비 고비를 수놓은 사건과 사람을 시인과 가객의 눈으로 길어 올린 시집이며 잔잔한 목소리로 삶의 결 하나하나를 어루만지는 격조 높은 에세이집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함께 읽고 함께 눈물 흘리며 새로운 각성과 희망의 언어를 확인하게 되기를 바란다. 김창남 위원은 현재 성공회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재직 중입니다.
2017-07-13 | hrights | 조회: 543 | 추천: 0
도재형/ 인권연대 운영위원 맹자(孟子)는 사이비(似而非)가 위험한 이유를, 비난을 하려 해도 비난할 것이 없고 공격을 하려 해도 공격할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사이비라 하더라도 그 태도는 충실하고 신의가 있는 것 같으며 행동은 청렴하고 결백한 것 같고, 모든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고 그 자신도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지만, 사이비와는 함께 참다운 성현의 길로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였다. 맹자의 말처럼 사이비가 위험한 것은 그것이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을 구분할 수 없게 하고, 옳은 사람을 옳지 않은 사람으로 오해받도록 하기 때문이다. 사이비가 존재할 때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영역은, 종교를 제외한다면, 학문의 세계일 것이다. 어떤 학자가 올바른 자세를 견지하고 있는지를 일반인들이 쉽게 알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사이비 학자나 연구자가 득세할 때, 학자에 대한 사회적 존중은 사라지고, 단지 특정 학자의 견해가 어느 쪽에 유리한지 여부로 편을 분류할 따름이다. 이는 최근 우리나라에서 자주 목격되는 현상이다. 학자들이 정책에 대해 고민한 바를 얘기해도 정치적 집단이나 언론은 자신의 정치적 이익이나 선호에 따라 비난하거나 받아들일 따름이다. 이렇듯 좋은 학자와 연구자들이 비난 속에 움츠린 사이, 공론의 장은 사이비 학자와 연구자로 채워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한 국책연구기관에서 벌어지는 일 역시 사이비 학자로 인한 폐해를 잘 드러내는 예이다. 국가 정책에 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연구자들은 정치적 성향을 띤 자로 간주되고, 그렇지 않은 자들이 오히려 학자적 양심을 운운하고 있기 때문이다. 맹자가 얘기했듯이 사이비 학자는 거리낌 없이 자신의 양심을 들먹이며 자기 얘기가 옳다고 떠든다. 그들은 자신이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러한 행동으로 인하여 그들은 혜택을 얻고 자리를 보장받는다. 사이비란 원래 그런 자라고 여기며 개인적으로 조심하면 그만이긴 하지만, 사이비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회에 어떤 미래가 닥칠지를 생각하면 이런 현실이 답답하기만 하다. 정부도 마찬가지이다. 형식상 선거를 통해 구성되었다 하여 민주정부라고 부를 수 없다. 참다운 민주정부는 헌법이 목적하는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사회적 연대, 복지국가 등을 실현하는 기능을 해야 한다. 그리고 시민들의 참여를 통해 형성된 공론에 따라 정책을 수립하며, 시민들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 국가가 시민들에게 진실해야 한다는 것은 공론을 형성하기 위한 필수 요소이다. 헌법의 이념과 국민의 참여를 도외시하는 정부는 사이비 민주정부일 따름이다. 정부가 헌법과 법률을 따르지 않고 거짓을 말하면, 시민들은 정부를 신뢰하지 않고 공론 형성에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된다. 시민의 관심이 사라질 때 민주주의는 위험하게 된다. 결국 사이비 민주정부는 단지 특정 기간 동안 시민을 속이는 것뿐만 아니라 한 나라의 민주 체제를 위협하는 단초가 된다. 청년유니온은 지난 24일 오전 11시 과천 노동부청사 앞에서 노동조합설립신고 반려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노동부를 비판했다. 사진 출처 - 문화저널 21 노동부가 공무원 노조나 청년 유니온의 설립 신고서를 반려한 것이나 검찰이 법률에 따라 공무원의 징계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교육감을 기소한 것을 볼 때, 맹자의 사이비에 관한 얘기가 생각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부가 법률을 지키려 애쓰는 사람들을 돕지 않고 오히려 이들의 행동을 범죄로 취급하는 것은 그 사회의 다른 사람들에게 법률을 지킬 필요가 없고 특정 정치 세력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심게 된다. 그런 사회가 어떤 모습을 띠게 되는지를 우리는 이미 경험한 바 있다. (그렇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혹시 정부가 일단 자기 뜻대로 국민의 기본권 행사를 거부하고 수사하고 기소하고선, 몇 년 후 재판 결과가 나오면 다시 생각해 보겠다는 마음으로 요즈음과 같이 일을 하는 것이라면, 정말 위험한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다. 누가 마음에 들지 않다거나 어떤 세력을 빨리 몰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후에도 우리나라가 민주적 체제 하에서 법에 의해 운용되어야 한다는 점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도재형 위원은 현재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13 | hrights | 조회: 505 | 추천: 0
이지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나는 축구를 좋아한다. 보는 것도 좋아하고 뛰는 것도 좋아한다. 어릴 적 동네마당에서 깡통 차는 것으로 시작했으니 나의 축구인생도 꽤 오래 지속되는 셈이다. 축구를 하다보면 다치는 사람이 있다. 자신의 몸 상태를 생각하지 않고 과욕을 부려 다치는 경우가 종종 있으나 대개는 공을 잘 못 차는 사람이 다친다. 다치게 하는 사람도 있다. 승부에 집착하여 상대의 몸쯤은 거실에 널어놓은 빨래처럼 툭툭 걷어차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대개 공을 잘 찬다. 이쯤 되니 대충은 알겠다. “힘을 가진다는 건 사람을 상하게 한다.”는 것을. 내가 아는 한 이 땅에 사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힘을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노력한다. 손이 천개 달린 부처님은 그 많은 손을 사바세계에 뻗쳐 중생의 고통을 덜어낸다. 천수관음의 손엔 눈이 달렸기 때문. 그러나 극심한 경쟁의 전리품으로 힘을 챙긴 대다수의 사람들은 부처님의 눈을 가지지 못했다. 그러니 힘을 가진 자기들끼리도 밤새는 줄 모르고 싸우기만 한다. 프랑스의 교육철학자 샤를 페펭은 프랑스 공교육의 목표로 세 가지를 들었다. 첫째 자유로운 개인. 둘째 양식 있는 시민 그리고 셋째로 자격 있는 일꾼. 여기에 우리가 안고 있는 공교육의 현실을 대입하면 쪼끔 불행해 진다. 아마 이쯤 되지 않을까. 첫째 집단에 속한 개인 둘째 복종하는 시민 그리고 나서 자격 있는 일꾼. 프랑스 교육이 스스로 주인 되는 삶을 지도하는 반면 우리의 교육은 철저히 노비의 삶을 지향하니 그렇게 쌓아온 이성 없는 권력은 누구의 가슴에 큰 상처를 입힐 것인가. 사람들이 착하게 사는지 별들이 많이 떴다 개울물 맑게 흐르는 곳에 마을을 이루고 물바가지에 떠 담던 접동새소리 별 그림자 그 물로 쌀을 씻어 밥 짓는 냄새 나면 굴뚝 가까이 내려오던 밥티처럼 따스한 별들이 뜬 마을을 지난다 사람들이 순하게 사는지 별들이 참 많이 떴다 - 어떤 마을 (도 종환 시/ 한 보리 작곡) 이런 동네를 찾고 있다. 물이 너무 맑아 새소리와 별 그림자까지 둥둥 떠다니는 그 물에 밥을 짓고 너나없이 둘러앉아 조근조근 삶을 나누는 풍성한 저녁식탁. 그 사람들 위에 한없이 따스한 별 무리가 봄볕처럼 스며드는 그런 마을. 힘없는 사람을 제일로 치고 힘 있는 사람은 조심해서 있는 듯 마는 듯 그 힘을 쓰고 힘 많은 사람은 그 힘을 부끄럽게 여겨 이집 저집 나눠주기에 골몰하는 마을을 살고 싶다. 누구에게나 굽신대지 않고 당당하며 주인 된 권리를 누리되 이웃의 지친 발걸음을 위해 자신의 어깨를 내어 주는 착하고 순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은 마을을 만들고 싶다. 그러나 참 어렵다 도종환의 어떤 마을에 나오는 풍경도 사람도. 소리 없이 여린 소녀의 머릿결을 보듬고 가는 바람도 내가 사는 마을엔 없다. 사진 출처 - 필자 참 좋은 강변을 거닐면 몇 달 후 4대강 공사로 난장판이 될 흙탕물이 떠오르고 참 좋은 사람을 만나면 금방 들통 날 거짓말을 봉은사 대웅전의 부처님 얼굴처럼 자비롭게 해대는 정당 원내대표의 불편한 미소를 얘기하며 참 좋은 바람을 만날 땐 교육계 3대 비리 척결을 외치는 권력자의 용트림을 기상청도 속여 가며 찾아든 황사 막 듯 입막음해야 한다. 부처님 손바닥의 눈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공동체적 이성도 갖추지 못한 힘 많은 놈들의 뉴스를 훑으며 꼭 한마디씩 읊조리는 “이런 뻥쟁이눔의 시끼들” 같은 자조 섞인 욕설도 이젠 지겨울 때가 되었는데도 그칠 수 없다. 요즘엔 씨앤 블루라는 자칭 인디밴드가 불렀다는 외톨이야의 후렴구만 귀에 쏙 들어온다. “외톨이야 외톨이야 다리다리다랏 두우” . 최근에 나는 그 부분을 “뻥쟁이야 뻥쟁이야 다리다리다랏 두우~~”로 듣는다. 진짜 인디밴드의 노래를 표절했다는 사실을 법정에서 가린다는 뉴스를 듣고 난 다음부터다. 그냥저냥 나부터 변해야 한다 같은 짜증나게 당연한 어구를 주문처럼 외워도 도대체 나를 변화시킬 구석도 찾기 어렵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니체 선생의 말씀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속이 꼬여 있으니 스스로의 정화 위해 다시 어떤 마을을 읽으며 내가 찾는 마을을 꿈꾼다. 그리고 기도한다 사랑을 사랑이라 이름하면 사랑이 아니라 했으니 뻥을 뻥이라 이름 하면 뻥으로 들리지 않는 이순(耳順)의 공력을 내게 허락 하소서... - 이글은 아침독서신문에 송고한 “노래로 듣는 시”에서 일부 인용하였습니다. 이지상 위원은 현재 가수겸 작곡가로 활동 중입니다.
2017-07-13 | hrights | 조회: 384 | 추천: 0
서상덕/ 인권연대 운영위원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어릴 적 누구나가 받았음직한 질문 리스트 가운데 이런 유의 물음이 꼭 한두 개쯤은 들어있을 것이다. 문득 치기어린 이런 생각이 떠오른 건 얼마 전 입적한 법정 스님으로 인해서다. 지난해 2월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에 이어 법정 스님까지 다른 세상으로 떠나보내면서 많은 이들이 서운함과 아울러 공허함을 느꼈을 것이다. 1년 남짓한 새 우리 곁을 떠난 위대한 지도자들의 삶을 되돌아보며 예의 질문과 비슷한‘누가 더 위대한가’라는, 조금은 장난기 서린 물음을 갖게 된 건 기자정신의 발로라기보다 오로지 그들의 위대함 때문이다. 역사 속에서도 이런 비교가 이뤄지는 경우는 인물들의 위대성이 전제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깝게는 역대 최고의 물리학자로 일컬어지는 ‘아인슈타인과 뉴턴’이 그렇고,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르네상스의 두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가 그러하다. 그래도 이 두 경우는 인기투표나 설문조사 등 어떤 식으로든 우열을 가늠할 수가 있다. 아인슈타인 대 뉴턴의 대결에서는 대체로 아인슈타인의 손이 올라가는 경우가 많은 편인 것 같다. 아마 조금이라도 현 세대와 가까운, 그래서 좀 더 친근하게 다가오는 아인슈타인이 과학자들은 물론 일반인에게도 인기가 있는 건 당연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의 경우는 대결 양상이 조금씩 다르게 전개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 두 사람 다 동시대를 살았다고는 하지만 500년도 더 된 오래전 인물인데다 개인적인 기호나 분야에 따라 선호도가 조금씩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두 사람의 가상대결은 오늘날에도 수많은 분야에서 심심찮게 얘깃거리로 등장하고 있다. 르네상스의 선두주자로 꼽히는 두 사람은 ‘천재’라는 점을 제외하곤 모든 면에서 사뭇 달랐다. 개인적으로는 미술뿐 아니라 다방면에 재능을 갖고 있어 만능을 추구하는 ‘현대 슈퍼맨의 전형’으로 볼 수 있는 다빈치가 위대한 예술가로 꼽히는 미켈란젤로를 앞서 있다고 본다. 대학은 고사하고 정규 교육이라고는 전혀 받지 못했지만 근대적 모든 인문학을 선도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는 다빈치의 천재성은 시대를 훨씬 앞지르는 것이었다. 그러한 자신을 두고 ‘경험의 제자’라고 부른 다빈치는 인체와 자연, 그리고 세상에 관한 예리한 관찰을 통해 자신의 위대성을 증폭시켰던 것이다. 다른 한편 현상을 관찰하고 현실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데 남다른 천재성을 보인 다빈치에 비해 끊임없이 ‘인간 존재’에 집중한 미켈란젤로가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아무튼 타고난 천재인 다빈치와 노력형 천재라 할 수 있는 미켈란젤로 둘 다 시공을 넘어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는 점에서 인류에게는 복된 존재였다. 이런 가상 대결의 장으로 우리 시대의 성자(聖者)로 꼽혀온 법정 스님과 김수환 추기경을 초대해보면 어떨까. 물론 판정의 요체는 누가 우리 시대에 더 많은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는가 하는 점이다. 불교계의 원로 법정스님이 지난 11일 입적했다. 사진은 1997년 12월 길상사 개원법회를 방문한 김수환 추기경과 인사를 나누는 모습.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알려진 대로 법정 스님은 법정이라는 법명보다 ‘무소유’가 아호로 불릴 정도로,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가난’ 그 자체의 삶을 살았다. 가난한 옹기장수의 아들로 태어나 아호마저 옹기(甕器)로 삼은 김수환 추기경은 ‘가난’을 향해 열린 삶으로 많은 이들에게 참다운 평화와 기쁨을 선사했다. 열 살 터울인 김 추기경과 법정 스님은 그들 앞에 가로놓인 숱한 장애에도 불구하고 영혼의 도반(道伴)으로 우리에게 참사랑의 길을 열어 보여준 존재들이었다. 죽음을 앞둔 두 사람이 공히 나눔과 사랑을 강조한 것은 우리 시대의 결핍이 무엇인지 들려주는 것만 같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서로의 경쟁 상대가 아니었다. 그들은 약자의 편에서 수시로 만났고 종교지도자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지도자로 우리 시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던 존재였다. 두 사람 모두 나눔을 통해 자신들이 지닌 재능뿐 아니라 주위의 역량까지 극대화시켜낼 줄 아는 능력의 소유자였던 셈이다. 결국 내 물음도 예의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식이 되고 말았다. 비교의 미로는 끝이 없다. 하지만 인류가 비교를 통해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왔던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두 위대한 존재의 삶을 돌아봄으로써 그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세상을 조금이라도 깊이 엿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것이 우리 시대가 새롭게 내디뎌야 할 첫걸음인지도 모르겠다. 그러지 않고서는 한 걸음 떼기도 쉽지 않을 것이기에…. 서상덕 위원은 현재 가톨릭 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17-07-13 | hrights | 조회: 384 | 추천: 1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저출산 상황이 지속되자 정부나 공공기관에서 출산을 장려하는 정책에 골몰하고 있다. 정부에서는 ‘저출산종합대책’을 내놓고, 국회에서도 여당 중심의 ‘저출산대책위원회’가 발족되어 가동 중이며, 저출산 관련 사회적 논의가 봇물을 이룬다. 한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검색해보니, 저출산 관련 리포트가 1401건, 논문이 260건, 전문자료 25건이 올라와있다. 이들은 대체로 저출산이 지속되면 고령화 사회가 급격히 진행되고, 생산 가담 인구, 즉 노동력이 줄어들면서 점점 더 노인 인구 부양 부담이 가중될 뿐더러, 결국 경제 구조가 악화되어 삶이 피폐해질 것이라는 논지를 편다. 그래서 육아에 대한 개개인의 경제적 구조적 부담도 줄일 수 있도록 보육시설도 확충하고 교육체계도 바꾸어야 한다며 여러 정책들을 내어놓는다. 이것은 비단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프랑스, 미국 등도 같은 고민을 했다 하고 그 결과 출산율이 다소 높아졌다고도 한다. 일본 등 다른 나라에서도 국가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을 우려해 출산장려책을 펼치는 중이라고 한다. 물론 그 이유는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정책에 힘입어 제법 효과도 거둔다고 한다. 출산율이 조금씩이나마 늘어나고 있다니 말이다. 물론 이런 정책 자체는 얼마든지 긍정적일 수 있다. 좀 더 인간다운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만일 그렇다면 일단 좋은 일이다. 그러나, 좀 더 거시적이고 근본적으로 사태를 단순화시켜보면 누구든지 느낄 수 있는 일이겠으나, 출산을 장려하는 목적에 담긴 ‘비인간적’ 발상은 우려스럽다. 출산에 담긴 인간학적, 철학적 의미는 잘 묻지 않거나, 묻더라도 관료적 정책 중심의 사회에서는 곧 묻혀버리는 경향이 크다. 하지만 출산은 생명을 탄생시키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사건이다. 그 자체로 가장 인간적인 행위이기도 하다. 그 인간학적 의미를 놓치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비인간적 길로 들어서게 될 가능성이 크다. 생명이란 무엇인지, 생명을 낳는다는 것은 무엇인지 그 ‘성스러운’ 가치를 끝없이 물어야 한다. 생명 현상을 다른 숨겨진 의도를 위한 수단으로 삼는 일이 벌어진다면, 그것이 곧 파국의 길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생명을 생명의 원리에 맞게 키워가는 일은 그 생명을 낳은 이들, 그리고 그와 관계된 모든 이들의 책임이기도 하다. 생명의 원리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과 자세가 ‘종교’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육아를 공동으로 한다는 사회적 책임감도 확산되어야 하고 인간을 인간답게 키우도록 제도적 뒷받침도 확대되어야 한다. 그 과정에 생명 출산의 주체인 여성주의적 시각이 충분히 반영되어야 하되, 생명의 탄생을 기업 논리나 경제 논리로 몰고 가서는 절대로 곤란하다. 그리고 ‘정치적’ 의도가 담긴 관료주의적 시각도 늘 경계해야 한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에 의해 인간다운 대접을 받으며 사는 일만큼 인간다운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인간이 비인간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만큼 자명한 일도 또 없다. 서울의 한 산부인과병원 신생아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그런데 우리 사회에 비인간적인 일은 다반사로 벌어진다. 그런 일이 많을뿐더러, 구조 자체가 비인간적이다. 인간 세상이 왜 비인간적 구조 속에 놓이게 되었는가? 더 말할 나위 없이 인간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지구는 인간으로 넘쳐나고 있다. 그로 인한 생태계 파괴, 각종 갈등과 전쟁, 생존 경쟁에 내몰리면서 발생하는 인간 소외 등 각종 문제들은 사안별로 거론하기 불가능한 지경이다. 지구라는 큰 생명을 기준으로 보면 인간은 지구라는 몸에 생겨난 ‘암세포’에 비유되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아이를 많이 낳으라니.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충분히 대접받을 수 있는 구조가 아닌데도 아이를 많이 낳으라니. 물론 출산 장려가 생명에 대한 존중감의 표현이라면 그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그와 반대로 생명 문제마저 경제적 척도로 평가되고 장려하는 모양새라 심히 걱정스러운 것이다. 비인간적 현상의 원인은 기본적으로 인간이 너무 많은 데서 온다. 모두 지구상에 인구가 줄어야 해결될 문제들이다. 그것은 그저 ‘기술적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도리어 ‘유엔’ 등과 같은 기관을 중심으로 인구 줄이기 운동을 펼치자 제안할 필요마저 있다. 인구가 적어서 걱정인 나라가 있다면 인구가 많아서 걱정인 나라의 걱정도 덜 겸, 제대로 된 다문화사회도 이룰 겸, 그들 나라로부터 사람을 받아들이면 된다. 그렇게 지구상에도 지역 간에도 평등의 문화를 가능한대로 진작시켜아가야 한다. 인구가 줄어들고 다양한 문화를 접할 기회가 많아지면 괜한 오해에서 오는 갈등과 분쟁도 줄어들 것이고, 인간 평등, 지역 평등에도 기여할 것이다. 자민족 중심주의가 기초에 놓인 민족이나 지역 간 갈등도 줄어들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적극적인 다문화 정책을 펼치면 된다. 그렇게 해서 지구가 가난해진다면 그것은 도리어 인간화의 증거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추구해야 할 일이자 자세이기도 하다. 다 같이 좀 못살 필요가 있다. 물론 혼자만 못 살도록 방관해서는 안 되지만... 그런 식으로 자본이나 시장만능주의에 인간을 내몰고, 자본을 더 생산하는 인간만을 인간 대접 해주는 분위기는 좀 없애자. 너무 ‘나이브한’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다함께 좀 더 가난해졌으면 좋겠다. 다함께 가난해지면서도 더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은 많다. 그만큼 인간다운 세상이 어디 있겠는가. 이찬수 위원은 현재 종교문화연구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2017-07-13 | hrights | 조회: 354 | 추천: 0
허윤진/ 인권연대 운영위원 국제결혼을 통해 한국으로 이주해 오는 결혼이민자들이 매년 증가하여 2009년에는 167,090명의 결혼이민자가 국내에 체류하게 되었다. 이들이 이룬 다문화가족의 자녀의 수도 가파르게 늘고 있는데 행정안정부의 2008년과 2009년도의 자료를 보면 1년 사이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취학 연령에 속한 다문화가족의 자녀는 교육과학기술부가 개별학교를 통해 수집한 자료를 보면 결혼이민자 자녀의 증가 속도가 가파르다는 것과 또한 중·고등학교로 진학하고 있는 자녀들의 숫자가 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문화가족 자녀의 연령별 현황 (’08. 5, 행안부) 구분 계 만6세미만 만7세 ~ 12세 만13 ~ 15세 만16 ~ 18세 학생수 58,007명 33,140명 18,691명 3,672명 2,504명 비율 100% 51.7% 32.2% 6.3% 4.3% (’09. 5, 행안부) 구분 계 만6세미만 만7세 ~ 12세 만13 ~ 15세 만16 ~ 18세 학생수 103,484명 61,700명 27,586명 7,785명 6,431명 비율 100% 59.6% 26.7% 7.5% 6.2%   다문화가족 자녀 학교 급별 현황 : 18,778명 (’07년 대비 39.6% 증가) 구분 초 중 고 계 인원 증감(%) 인원 증감(%) 인원 증감(%) 인원 증감(%) 2005년 5,332 583 206 6,121 2006년 6,795 27.4 924 58.5 279 35.4 7,998 30.6 2007년 11,444 68.4 1,588 71.9 413 48.0 13,445 68.1 2008년 15,805 38.1 2,213 38.9 760 84.0 18,778 39.6   그런데, 보건복지가족부가 2008년에 다문화가정 아동의 발달 상태를 측정한 연구를 보면 다문화가족 아동들이 동작지능은 부모가 모두 한국인인 학생들과 별 차이가 없으나 언어지능은 현저히 낮게 나타나고 있다. 물론 전체 다문화가족 자녀들이 ‘학습지체’의 문제를 갖고 있다는 식으로 오도되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다문화가족 자녀가 한국어 능력발달에 어려움을 겪는 요인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아동 양육의 주된 담당자인 결혼이민자여성이 제한된 모국어를 사용하기는 하지만 주로 어눌한 한국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고,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른 사교육이나 부모의 학습지도처럼 다문화적 상황과는 관련 없는 곳에 그 장애의 요인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다문화가족의 자녀들의 학업성취도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조사와 대책을 마련할 필요는 있다. 다문화가족 자녀의 한국어 능력발달 장애를 방치할 경우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어려움으로 이어지고, 따돌림을 당하거나 차별 혹은 놀림을 받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더 나아가 사회의 새로운 소외계층을 낳는 사회문제가 될 수도 있다. 이는 다문화가족 부모들이 가장 우려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러한 우려는 일부 학교에서 실제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보도도 되고 있다. 그러면 다문화가족 자녀들의 한국어 능력을 향상시키고 학교 사회 적응력을 기르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보건복지가족부는 다문화가족 자녀의 언어발달과 학업능력 향상을 위해 먼저 영유아 언어발달 지원 사업을 펼치고 있다. 참으로 올바른 정책이라 생각된다. 특히 방문교육사업인 아동양육지원서비스는 부모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교육하고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결혼이민자여성의 자녀양육에 긍정적인 지지가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결혼이민자의 모국어를 통한 적극적 언어자극을 권장하는 것이 자녀의 언어발달에 도움을 줄 수도 있다. 성북구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2009년 한 해 동안 95가정에 아동양육 방문교육을 실시하여 결혼이민여성과 그 자녀의 언어사용 형태를 조사한 결과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결과를 보면, 일반가정 자녀와 다문화가족 자녀의 신체적인 성장발달은 같으나 언어발달에 있어서는 70%이상의 다문화가정 자녀가 일반가정 자녀에 비해 언어발달이 많이 늦었다. 일반가정 자녀의 경우 엄마가 들려주는 말을 통해 언어발달을 하는 반면 결혼이민여성은 한국어를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단지 몇 마디 단어로 자녀와 관계를 갖게 되어 자녀가 습득하는 언어가 언어로 인식되지 못하고, TV나 비디오에서 나오는 말도 자녀의 언어발달에 영향을 주지 않아 언어발달이 현저히 떨어졌다. 또한 엄마가 모국어로 자녀를 양육해야 하는데 시부모나 남편이 한국말로 자녀를 양육하도록 강요하고, 엄마의 자존감이 낮아 모국어로 자녀를 양육하는 것을 부끄럽거나 창피하게 생각하고 한국어로도 모국어로도 자녀와 소통하지 않고 눈짓이나 행동으로 자녀와 관계를 갖는 경우가 많았다. 학력이 높은 결혼이민여성의 자녀의 경우 출생하면서 엄마나라 말로 양육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엄마나라 말로 된 동화책을 구입해서 자녀가 엄마나라 말을 자연스럽게 습득하고 아빠도 아빠나라 말로 자녀와 소통하면서 자녀가 이중 언어를 가정 안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이중 언어 발달을 도움으로써 자녀의 학습능력도 일반가정 아이보다 더 높게 나타나는 경우도 있었다. 이와 같이 다문화가족 자녀의 경우 일반적으로 모든 다문화가족 자녀가 언어발달이 늦는다고 단정 짓는 것 보다는 부모의 학력이나 사회적 위치, 경제적 수준, 자아존중감의 정도에 따라서 언어발달이나 학습능력에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에 따라 성북구다문화가족지원센터는 2009년 7월부터 12월까지 52명의 다문화가족 자녀의 언어발달을 진단을 진단하여 그 중 30명의 자녀에게 어휘 구문발달 촉진, 대화·의사소통 및 사회성 증진과 부모상담, 부모-자녀관계 향상 프로그램을 언어발달 지도사를 통해서 실시하였다. 유아기는 언어와 사회성 발달의 결정적 시기이고, 다문화가족 자녀의 경우 일반가정에 비해 언어발달이 늦어 학습부진의 문제로 이어가는 경우가 많아 일상생활에서 다문화가족 자녀의 언어발달을 촉진하고 학습 및 사회생활 적응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취학 전 아동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것이다. 그 중 3~4명은 언어가 월등하게 향상되었고 20명은 서서히 발달하고 있고 나머지 5~6명 정도는 별로 변화가 없었다. 더 주목할 만 한 점은 다문화가족 여성인 엄마가 사회생활을 하거나 자아 존중감이 높을 경우 자녀의 언어발달도 좋았고 집중력도 높은 반면, 엄마가 위축되어 있거나 소극적인 자녀는 산만하고 금방 싫증을 내어 학업성취도가 낮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육환경 중에 부모의 자존감이 아이들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허윤진 위원은 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13 | hrights | 조회: 430 | 추천: 0
김영미/ 인권연대 운영위원 인터넷에 ‘알몸 졸업식 뒤풀이’라는 제목으로 사진이 올라오면서 세상을 떠들석하게 했던 사건이 있었다. 이것은 지난 11일 경기도 고양시의 한 중학교 졸업식이 끝난 뒤 선배인 고교생 20명이 남녀 졸업생 15명을 알몸으로 만들고 이들을 촬영한 것이다.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 속에는 남녀 중학생들이 밀가루와 계란을 뒤집어쓴 채 알몸으로 인간 피라미드를 쌓는 장면, 속옷을 벗는 장면 등 수치스러운 장면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결국 졸업식 알몸 뒤풀이 사건을 수사한 경찰은 가해학생 전원을 기소하기로 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놀라는 것은 이들이 어린 중학생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이 ‘무서운 중딩’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매우 평범하 편이다. 우리가 살아왔던 모습의 학생들과 다를바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어떻게 말를 걸어야 할지, 대화를 풀어나가야 할지 도무지 막막한 아이들도 있고 교사들에게 대거리를 하거나 욕설을 퍼붓고, 아주 가끔 폭력을 쓰는 아이들도 있고, 수업이 안 돼서 너무나 고통스럽다는 교사들도 있다. 경기도 고양지역의 한 중학교 졸업식에서 남.녀 학생들이 전라의 모습으로 뒤풀이를 하는 사진 10여장이 13일 인터넷 사이트에 유포되면서 파문이 일고 있다. 사진은 인터넷에 유포된 일부 사진.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오늘날 우리 아이들의 가정 모습을 살펴보면, 부모들 대부분 맞벌이를 하고 있거나 부모들의 이혼과 별거로 인해 홀로 아이를 키우거나, 조부모님 댁에 맡겨서 키워지곤 한다. 그런 아이들은 유소년기의 대부분을 학원과 인터넷, 게임, 텔레비전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며 그속에서 경쟁과 파괴의 경험을 가지게 된다. 이런 환경 속에서 자라난 아이들에게 우리는 진심으로 이들을 바라보았는지.... 우리의 학교모습 역시 고백하건데 졸업식날 졸업반 담임을 제외하고 참석을 가급적 피하고, 교실이 난장판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교실출입을 못하게 했다. 지난해 가을 인터넷에 떠돌던 학교폭력의 변종인 ‘빵셔틀’이 문제가 됐을 때도 이 언어조차 생소해 학생들에게 물어보던 중 내가 평소에 지켜보던 학생임을 알고서 괴로워했다. 결국 대통령의 관심으로 인해 가해학생을 형사처벌하는 사회는 학생들에게 무엇을 해주었을까? 미성숙한 학생시절의 잘못을 사회적 주홍글씨로 완성하는 것보다는 이들에게 가정, 학교, 사회가 공동책임을 지고 이들의 인성을 더욱 돌볼 수 있는 구체적인 대안을 마련해서 이들의 변화를 지켜보았으면 한다. 교사부터 학생들에게 경쟁을 중시하고 가슴으로 사는 아름다운 마음 교육에는 소홀히 하지 않았나 하는 반성을 해야 한다. 아이들의 소리에 더더욱 귀 귀울이며 그들의 문제에 가슴깊이 같이 고민할 수 있는 통로들이 필요할 것이다. 다른 사람의 슬픔에 공감하고 위로를 보내기보다는 흠을 잡고 몰아붙이는 무서운 세상 속에 이 아이들이 살아가지 않기를 바라며 서로를 배려하며 친구끼리 서로 아끼는 것부터 예쁘게 사는 모습이라고 가르쳐야 할 것이다. 김영미 위원은 현재 신연중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13 | hrights | 조회: 362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