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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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학교 역사문화컨텐츠학과 교수), 이찬수(전 보훈교육연구원장),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장발장은행장)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황미선/ 인권연대 운영위원   서울에 소재한 각 학교에서는 교과부에서 하달한 공문에 의해 성과급 지급을 위한 절차를 진행하여 며칠 전에 그 결과를 교사 개인에게 틍보하였다. 교사들에게 성과급을 지급하는 이유는 근무성적, 업무실적 등이 우수한 사람에게 성과상여금을 지급함으로써 교사들의 사기를 고양하고, 교사간의 경쟁을 유도하여 교육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성과급 지급이 교과부가 도모하고자한 목적을 달성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 결과나 과정이 민주적이지도 않으며 공문의 절차대로 시행하되 않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또한 ‘과연 성과급이 교육의 질적 향상으로 이어지고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되는 제도로 이는 교육이라는 행위에 대하여 기본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가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한다. 송파구 소재 P초등학교의 사례를 빌어 학교 현장에서 이 제도가 어떤 식으로 시행이 되는 지 말하고자 한다. P초등학교는 공립학교이고 공립학교 소속 교사들은 5년마다 학교를 옮겨 근무하는데 P교는 이에 따라 내게 전근무교가 되었다. 그러나 성과급은 지난해 성과에 대한 것이 되므로 그 대상은 전년도에 근무한 교사들이고 성과급 지급을 위한 절차는 부득이하게 전에 근무한 학교에서 절차를 밟아 진행한다. 그 절차를 살펴보면 전체 교사회의를 개최하여 성과급 지급에 대한 연수를 실시하고 심사위원회를 그 자리에서 구성하도록 되어있다. 그러나 전체 교사회의는 개최되지도 않았고 공문에서 제시한 절차는 이행되지 않았다. 결국 2차 회의까지 진행되어 모든 원칙이 결정된 후 메일로만 그 결과가 고지되었다. 이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였고 요구에 의해 전체회의를 소집하였고 그 자리에서 사전에 어떠한 관련 연수도 진행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심사위원들도 다수의 부장들과 의견을 표명하기 어려운 1~2명의 교사들로 구성한 후 부장들에게 유리하도록 지급 원칙을 정해버렸다. 지급원칙 또한 가관이었다. 기존에 없던 교장이 줄 수 있는 점수를 10% 부여하였고 일반교사와 부장교사와의 점수 차를 두어서 부장교사에 대한 점수의 치우침을 심화시켰다. 다른 항목에서 주는 점수차가 작은데 부장교사들에게 이 두 가지 점수를 부여함으로써 부장들은 최고 등급을 받을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게다가 원칙결정 의견 수렴과정에서도 일반 교사들은 배제되어 성과급 지급절차는 객관적이지도 공정하지도 않게 진행되어 버렸다. 이 책임은 절차를 공정하게 진행해야하는 교장과 교감, 그리고 심사기준을 만든 심의위원들일 것이다. 그러나 절차를 어겨가며 진행한 것에 대하여 그 누구도 책임을 지려는 사람은 없이 그 잘못을 저지른 심사위원들을 그대로 심사위원으로 위촉하는 모습을 보고 사전에 관련 대책회의를 한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교사들 또한 어떤 의견도 제시하지 못하는 수동적인 자세로 일관되어 학교의 억압적이고 비민주적인 분위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지난 2월 10일 2011년 교육공무원 성과상여금 지급 방안을 확정해 발표하였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P초등학교의 성과급 지급사례와 같이 비민주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일련의 과정들이 학교사회를 얼마나 무기력하고 비민주적이며 억압적 학교문화를 만들어 내는지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교장은 부장에게 자신의 뜻을 받들도록 요구하고 부장들은 교장의 요구를 충실하게 수행하며 대신 성과급에서처럼 그 대가를 받는 구조! 교사들의 눈과 귀를 막고 자유로운 의견개진을 통제하는 문화가 지배적인 학교에서 근무하는 교사에게 창의적이고 민주적인 교육을 기대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특히 올해부터는 성과급을 ‘개인 성과급’과 ‘학교 성과급’으로 이원화하여 지급하도록 하고 있는데 이 또한 문제가 많다. 애초에 학교에 입학할 때 학구에 의해 자동 배정되도록 되어 있는데, 이에 대한 고려 없이 초등의 경우 그저 눈에 보이는 방과 후 참여율과 돌봄 교실 이용율 등을 반영하여 결정하도록 하고 있고 중고교의 경우 학업성취도 평가점수 등에 의하여 결정하도록 되어 있어 교육부가 학교 교육을 어떤 방향으로 몰아가는지 알 수 있다. 이런 의견에 대하여 단순히 배정을 하는데 어떤 기준을 따로 마련하자는 말이 나올까 염려되지만, 교육의 질은 단순하게 성과급 지급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교육의 질은 우수한 교사의 확보와 교육의 콘텐츠(내용), 그리고 교육활동을 지원하는 환경과 시스템이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수한 교사의 확보는 교육의 성과를 가늠할 수 없다는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니고 있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나마 원칙대로 진행되지도 않는 차등성과급의 지급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교사의 끊임없는 교육에 대한 고민을 통해 질 좋은 연수를 받아 그 내용이 학생들에게 피드백이 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옳은 일일 것이다. 이제라도 가치와 철학을 담은 교육의 특성을 알고 학교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여 정책을 이행하기를 바란다. 황미선 위원은 현재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449 | 추천: 0
이지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분명히 길은 외통수였다. 궁(漢)이 피 할 곳은 없었으며 사(士)는 오히려 궁의 길을 막아 멀찍이 장기판의 중앙부에 건재한 상(象)이 성큼 건너뛰어 장군을 치면 게임 끝나는 판이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랬다. 청계천 고가 밑에서 웅성거리던 구경꾼들은 죄다 “내가 돈만 있으면 한번 질러버리고 말지”하는 눈치였고 막수 장기판(판을 마무리 짓는 듯한 막판수를 놓고 손님을 유혹하는 야바위의 일종)을 벌려놓은 눈 째지고 이빨 빠진, 한눈에도 꽤나 성질 더러울 것 같은 장기꾼은 입에 가득한 침 튀기며 “자~자. 돈 놓고 돈 먹기. 돈 놓고 돈 먹기. 이기실분 돈 걸어. 딱 열 배 열 배 드립니다”를 외쳐댔다. 내 옆에서 누군가가 “워미~저거 저 뻔헌거~”라며 귓속말을 흘렸을 때 이미 나는 헌책방을 뒤져 찜해주었던 대입 참고서 살돈을 그야말로 지르고 있었다. 막판 한수에 실패하고 꼬깃한 재수생의 천금 만원이 그치의 돈 통에 들어가는 순간 “이런 야바위꾼~”을 외치려는 내 허리께로 금속성의 섬뜩한 무언가가 닿았고 잘 훈련된 병사 같은 구경꾼들은 순식간에 나를 일행으로부터 서너발 쯤의 거리로 내 몰았다. 그때 처음으로 든 생각은 “저 새끼가 내 돈을 빼앗았다”였다. 그 뒤로 한 몇 달 나는 빼앗기는 꿈을 자주 꾸었다. 실제로는 가진 게 별게 없었으나 꿈에서의 나는 꽤 그럴듯하게 포장이 되어있었는데 털리는 꿈을 꾸는 새벽엔 제법 헛소리까지 하곤 했던 모양이다. ‘책은 뺏지마. 책은 뺏지마...“ 몇 년 전 내가 사는 집 옆의 교회가 이사를 가고 그 터에 아파트가 들어서게 되었다. 지반 정리가 끝나고 교회 첨탑을 허무는 공사를 진행 하던 중 굴삭기가 넘어져 인부가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는데 당시 9시뉴스에도 보도가 되었으니 꽤 큰 사고였던 셈이다. 그날 밤 우리 동네 사람들은 밤새도록 악에 받쳐 울어대는 한 여인의 통곡소리를 들었다. 잠에 뒤척이며 귀도 막아봤지만 그 여인의 가슴을 치는 통곡이 나의 두근대는 심장에 송곳으로 전이(轉移) 되어 한번 씩 심장이 뛸 때 마다 쿡쿡 온몸이 쑤셔왔다. 천문학적인 액수를 챙기고 다른 곳에 터를 잡은 교회는 이전보다 몇 배의 성도를 자랑하는 대형교회가 되었고 안전하게 분양을 끝낸 건설사는 안전하게 이익금을 챙겨 떠났다. 아무것도 모르고 입주한 아파트 주민들은 결국 한 노동자의 죽음을 깔고 살게 되었는데 아무도 내색은 하지 않았다. 내게 세상은 살만한 곳이 아니다. 누군가 기를 쓰고 돈 모아서 겨우 아파트 한 채 장만했다고 하면 축하한다는 말보다 먼저 거기에 살았던 사람들이 등짐지고 떠난 가난의 기행을 생각하고 그럴듯한 고깃집 옆자리에서 아파트 몇 번 튀겼더니 몇 억쯤 생기더라는 모르는 아저씨의 주둥이를 엿들었을 때는 450만원 이주비 받고 철거반에 얻어터지며 쫒겨난 난곡 사람들을 생각해야 한다. 해병대 간 현빈이 좋다고 선전하는 3D입체 TV광고를 보고 있으면 저 물건 만들기 위해 목숨 바친 박지연이 생각나고 49제도 제대로 못치른 김주현이 떠올라 맘 아프다. 고 황유미씨의 4주기 기일인 지난 3월 6일 서울역 광장에서는 추모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이 날 추모문화제는 황씨 뿐 아니라,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 사망한 46명의 노동자들을 함께 추모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내게 세상은 살만한 곳이 아니다. 제로섬(zero-sum)게임. 승패의 합계가 항상 일정한 일정합 게임(constant sum game)의 저열한 경쟁사회에서 나는 늘 경쟁의 뒤편에 있다. 내가 아는 사람과 내가 관심을 두는 사람들은 거의 패자에 속한다. 이 사람들은 외통수의 삶을 살고 있다. 겨우 하루를 살기위해 폐지를 줍거나 헤픈 청춘을 팔거나 죽음의 기운이 깃든 공장에 웃으면서 출근한다. 그것 말고는 살아갈 방법이 없다. 이들의 가난은 누군가의 호주머니 속에 차곡차곡 쌓여 거대한 부를 만들어 낸다. 빼앗긴 게 맞다. 이 시대 패자라 불리는 이들은 야바위꾼의 현란한 거짓말솜씨도 없고 거칠고 극악스런 표정도 짓지 못한다. 구경꾼을 가장한 같은 패거리의 완력도 없고 남의 것 빼앗고도 눈 하나 꿈쩍 하지 않는 인두껍도 없다. 한때 민중과 함께. 민중을 위해 살겠다던 치들조차 대부분은 거나한 자리에서 거들먹거릴 만큼의 승리를 누리며 살지만 민중이 되어 살겠다던 이들은 여전히 빼앗기는 다수가 되어 산다. 이 제로섬 게임의 사회에서 “저 새끼가 내 돈을 뺏아간다”고 외치며 산다. 봄꽃이 피는 이유는 언 땅이 녹았기 때문이고 바다가 푸른 이유는 갯벌의 수고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가난한 이유는 누군가에게 부를 건넸기 때문이지만 내가 부자인 이유는 누군가의 부를 빼앗았기 때문이다. 조세희 선생의 일갈에 다시 모골이 송연해 지는 밤이다. “당신은 행복한가. 그렇다면 둘 중의 하나이다. 바보 아니면 도둑” 이지상 위원은 현재 가수겸 작곡가로 활동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433 | 추천: 0
김영미/ 인권연대 운영위원 3월이 시작되면 두려움과 설렘으로 학교에 간다. 최근에 보았던 프랑스 영화 “클래스”는 교실의 현실적인 모습을 그려내며 그 안에 존재하는 교사와 학생간의 갈등과 교감을 다룬다. 어쩌면 우리가 어느 학교를 가나 만날지도 모를 섬뜩하기까지 한 교실의 모습을 축소한 것으로 굉장히 현실적이고 섬세한 모습이다. 수업이 되지 않을 정도의 소란스러움은 기본이고, 수업에 집중하지 않고 딴 짓을 하며, 선생을 무시하고 폭언을 일삼는 학생들, 한국의 교사들과는 다르게 영화 속의 프랑스 교사들은 신경쇠약에 걸릴 정도로 학생과의 소통에 대해 끊임없는 고민을 하고, 교무회의시간에 토론된 학생들에 대한 평가도 다양하고 게다가 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벌이는 교사의 몸부림은 애처로울 정도이다. 게다가 그 아이들을 체벌로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학생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그의 모습은, 진정한 교육자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질문은 하되 답은 하지 않는다'라는 로랑 캉테 감독의 말처럼 <클래스>는 굳이 납득시키려 하기보다 담담히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곧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답을 낳게 한다. 1년 전 지금의 학교로 이동해서 3학년 학생들과 수업한 경험을 떠올리게 했다. 새로온 교사에 대한 학생들의 힘겨루기, 무시, 알 수 없는 분노표출, 폭언 등으로 힘들었다. 물론 교사와의 관계에서 더욱 힘들어했던 학생들도 있었을 것이다. 영화 '클래스'의 한 장면. 사진 출처 - 한겨레 철이(가명)는 수업시간에 행동이 거칠면서 심하게 분노를 표출하고, 학생들에게 상습적인 금품탈취와 폭행으로 2학년 때 전학을 갔다. 그리고 6개월후 다시 학교로 돌아와서 더 심해진 언행으로 수업을 담당하는 교사들을 힘들게 했고 또 다시 점심시간에 학생들에게 상습적인 금품탈취와 폭행으로 경찰의 조사를 받고 회의를 거쳐서 대안학교로 가게 되었다.(중학교는 주거지를 기준으로 학교가 배정됨. 여러 가지 문제들로 학교에서 전학을 통보 받았어도 위장주거지로 확인되면 다시 학교로 올 수 있다) 학교에서 선도위원회를 진행하는 동안에 철이가 어머니에게 보여준 태도와 행동은 교사들을 놀라게 했다. 회의 중 전학을 수용하는 어머니를 죽일듯이 노려보며 주먹으로 의자를 내려치며 뛰쳐 나가다 못해 복도에 있던 어머니에게 심한 욕설과 함께 달려들어 교사들이 철이의 행동을 말리기까지했다. 비교적 철이가 호의적으로 대했던 교사가 철이의 분노를 진정시킴으로 어머니와 함께 집으로 갈 수 있었다. 나중에 이 교사로부터 전해들은 철이의 분노의 원인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밤에 일을 하고, 술에 취한 채 잠이 들어 철이가 어릴때부터 아침을 먹었던 기억이 없었고, 배고픔의 시간들 속에 학교에서 먹는 점심이 하루의 식사였다고 한다. 분노로 세상을 배운 철이와 생활하는 교사는 엄청난 인내로 기다려야 하지만, 그보다 먼저 교사는 학교 안에서의 질서를 더 중요하게 고민해야 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교사들이 인내보다는 질서를 선택하게 된다. 또한 이전에 체벌이라는 관습으로 학생들을 지도하던 모습을 하루아침에 벗어던지고 아무런 고민 없이 허둥대는 교사들 속에서 아이들은 예전처럼 선생님을 신뢰 어린 눈빛으로 바라볼 수 없고, 교사들은 예전처럼 아이들을 마냥 사랑스럽게 바라볼 수 없을 것 같다. 달라진 교실풍경에 학생들과 함께 호흡하고 소통하며 긴 인내를 가진 따뜻한 가슴으로 1년을 보내기를 기도한다. 김영미 위원은 현재 신연중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447 | 추천: 0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지인 중에 대형 금속 주물을 생산하는 건실한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분이 있다. 이 분은 물건을 생산해내는 제조업이야말로 어느 분야보다 정직한 직종이라는 지론을 펴곤 한다. 물건을 생산하고 생산한 만큼 돈을 버는 제조업은 돈으로 돈을 버는 금융업에 비할 바 아니라는 것이다. 정당한 주장이라고 생각된다. 요사이 이른바 ‘이슬람 채권법(수쿠크)’ 도입을 둘러싸고 국회 내에, 그리고 정부와 보수 개신교계 사이에 묘한 긴장이 조성되고 있다. 금융 위기에 대응하고 원전 수주 등에 필요한 자금을 이슬람권에서 유치하기 위해, 이슬람 채권인 수쿠크를 발행하기 위한 법안을 국회에서 통과시키려다가 보수 개신교계의 반발에 부딪혀 일단 유보되었다고 한다. 이슬람 율법(샤리아)에서는 원칙적으로 물건 없이 이자만 오가는 행위를 금한다. 여느 국가에서는 채권을 발행해 자금을 빌리면 그 자금에 대해 이자를 주도록 되어 있지만,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이자를 금하는 율법을 지키기 위해 독특한 금융 상품들이 개발되었다. 가령 기업이 채권을 발행하고 은행으로부터 일정 기간 돈을 빌리면서 기업 소유의 부동산 소유권을 은행으로 이전하면, 특수목적회사에서 그 물건을 활용해 수익을 창출한 뒤 은행에 이익금을 돌려주고, 채권 만기 때 채무자 기업이 원금을 변제하면 기업의 부동산 소유권을 회복시켜주는 방식이다. 이 때 부동산 소유권이 오가는 사이에 생기는 양도세, 취·등록세 등의 세금을 면제해주어야, 채권에 대한 이자 지급 없이도 금융 차입과 변제 거래가 성사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수쿠크를 발행해 이슬람 자본을 확보하려면, 발생한 수익에 대해 취·등록세 등 각종 세금을 징수하게 되어 있는 현행 조세법을 일정 부분 개정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런 취지에 따라 국회에서 조세특례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려다가, ‘한기총’ 등 보수 개신교계의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고, 이번 회기 내에는 처리하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슬람 채권법’을 통과시키는 국회의원에 대해 낙선운동까지 벌이겠다는 개신교권의 강경한 목소리에 대해 4.27 재보선 ‘표’를 의식한 정치권이 한껏 움츠려든 셈이다. ‘이슬람 포비아’가 만연해있는 한국의 보수 개신교계에서는 이슬람채권법은 특정 종교에 대한 특혜인데다가, 관련 법안이 통과되면 그로 인해 발생한 이익이 이슬람 테러 단체에 흘러들어갈 가능성도 있어 반대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 이슬람 문화가 한국 내에 급속도로 유입되면 결과적으로 한국에 큰 피해가 올 것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다. 지난 22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한나라당 기독인회 조찬기도회에서 이태희 목사가 설교하고 있다. 조찬기도회에서는 이슬람채권(수쿠크)에 비과세 혜택을 주는 '이슬람채권법'이 도마 위에 올랐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이슬람권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적극 지원하거나 동의하면서, 이슬람 문화의 유입에 대해서는 결사반대하는 보수 개신교권의 모순된 입장은 자기중심적이고 불공평하다. 이슬람 채권법으로 발생한 수익의 일부가 테러 단체로 흘러들어갈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도 지나치게 단선적이다. 한국과 무역을 하면 그 수익이 한국 내 ‘조폭’에게 들어갈 가능성이 있으니 한국과 거래하면 안 된다고 누군가 주장하면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슬람 채권법에 대해 잘 안다거나 그 자체를 찬성한다는 뜻은 아니다. 경제 전문가가 전혀 아닌 탓에, 수쿠크를 경제와 자본의 논리로 정당하게 분석할 역량이 내겐 없다. UAE 원전 수주와 관련해 체결한 모종의 이면 계약을 해결하려는 숨은 의도로 이 법안을 마련하는 것이라면, 도리어 반대해야 할 것도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학도로서, 수쿠크의 기본 정신은 높이 사지 않을 수 없다. 물건이 오가지 않은 채 돈으로 돈을 낳는 이자 행위를 금하는 이슬람 율법에 담긴 정신은 참 인간적이고 종교적이다. 금융 위기가 항존 하거나 고조되고 있는 시대일수록 이자를 금하는 이슬람 정신은 더욱 돋보인다. 2008년 미국 월가 발 금융위기는 세계를 휘감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허상을 폭로하는 사건이었다. 물론 세계는 이미 자본과 시장의 힘에 강력하게 포획되어 있어서, 그런 사건을 겪고도, 그리고 여전히 진행 중인데도, 현 경제 질서나 구조는 거의 바뀌지 않는다. 그 구초의 기초에 거품과 같은 다양한 금융 상품들이 거미줄처럼 얽혀있으며, 그 거품이 현 경제 질서를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 금융 제도의 원리라는 게 무엇이던가. 이런 예를 들어보자. 농부甲이 생산한 쌀값 만원을 A은행에 맡기면 A은행은 자기자본율(10%라고 치면)을 지키고 9천원을 乙에게 대출해준다. 乙이 대출받은 9천원을 B은행에 예금하면 B은행은 丙에게 8천100원을 대출해주고, 丙이 C은행에 8천100원을 맡기면 C은행은 7290원을 丁에게 대출해줄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이 현 금융 제도이다. 이런 식으로 계속 대출을 이어가면 실질 생산액의 거의 아홉 배에 해당하는 가치가 창출된 것처럼 계산된다는 것이다. 부채를 늘리면서 추상적 자산 가치를 늘리고 그 자산으로 실물을 소비하는 구조이다. 그리고 이 추상적 자산이 유통되면서 경제의 기초를 형성해간다. 이런 계산법에 근거해 부채 창출을 통한 추상적 가치를 늘려가다가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강타했던 것이다. 농부甲이 만원을 일시에 찾아가면 전체가 무너지게 되어있는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자연 안에서 실제 생산된 것은 1만원뿐인데, 부채의 연결고리를 통해 9만원이라는 추상적 부를 창출해내는 계산법은 참으로 기이하다. 중요한 것은 이런 금융 시스템이 형성되게 된 기초 중 기초에 ‘이자’ 제도가 있다는 것이다. 예금과 대출을 추동하는 힘은 ‘이자’이다. 이자는 맡긴 금액보다, 그리고 대출해준 금액보다 더 돌려받을 수 있게 해주는 근거이다. 그런 점에서 금융업은 이자 제도에 기반해 모인 자본을 활용해 자본을 늘려가는 시스템이다. 문제는 그 ‘부’라는 것이 숫자상으로 존재하는 추상적 가치인데도 실질 가치 이상의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일종의 욕망의 산물인 금융 제도 속에 있는 한, 그리고 그 제도를 이용하는 한, 투자보다 더 많은 것을 얻으려는 욕망은 계속 확대 재생산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총 부채는 늘어나고 빌려온 가상의 가치를 실제 생산량 이상으로 소비하면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파산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지인의 신념마따나 제조업은 금융업에 비하면 분명히 정직한 사업이다. 농사 같은 일차산업이야말로 가장 정직하다는 평가는 더 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일차산업은 땀 흘린 만큼 되돌려주는 자연의 법칙에 가장 부합한다. 자연의 힘을 빌려 생산된 쌀 한 가마니가 숫자적 가치로 환산되고, 그 환산된 추상적 가치가 실질 가치 이상으로 작동하도록 추동하는 금융 시스템은 사실상 인간 욕망의 산물이다. 욕망에 기반해 생산된 것 이상을 보장해주는 이자 제도이기도 하다. 이것이 금융업의 기초를 다졌고, 현 금융 제도는 급기야 부채로 부채를 막으면서도 그 모순을 느끼지 못하도록 인간을 구조적으로 묶어두고 있다. 이런 상황을 곱씹어보면, 이자를 금하는 이슬람 율법은 인간의 욕망을 제한하면서도 인간성을 피폐하지 않게 잡아주는 최소한의 끈처럼 생각된다. 빌려준 돈은 돌려받으면 그만이지 이자가 웬말이냐는 이슬람식 율법은 상대적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유리한 정책이기도 하다. 빈자를 보호하면서 인간 평등을 추구하는 제도적 장치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이슬람’이라면 거부부터 하고 보는 보수 개신교권의 자기중심적 발상과 배타적 자세가 도리어 경계의 대상으로 느껴진다. 종교계 일각의 주장으로 국가의 경제 정책이 오락가락하는 일도 이례적이지만, 보수 개신교권의 후원을 받으며 탄생했고 유지되고 있는 현 정부와 그 개신교권 사이에 균열이 생기는 모습도 구경거리이다. 종교의 힘이 센지, 현실이라는 정치의 힘이 센지, 가늠하게 해주는 사례가 될 것 같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종교문화연구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437 | 추천: 0
허윤진/ 인권연대 운영위원 천주교 신부로 살다보면 혼자 사는 사람치고 결혼한 부부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아무래도 신부라는 신분이 편해서인지, 말이 새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치가 있어서인지, 신앙인이든 비신앙인이든 결혼생활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늘어놓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결혼생활의 기쁨보다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에 대한 하소연이 훨씬 더 많다는 것입니다. 갖가지 갈등과 이해상충, 경제문제에 따른 어려움과 자녀양육의 방법에 대한 이견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진담 반 농담 반으로 “신부님, 신부님은 혼자사시기 참 잘 하셨습니다. 결혼은요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하게 됩니다.”하고 말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과연 결혼생활이 그토록 불행한 것인가? 혼자 사는 신부의 염장을 지르려고 하는 얘기는 아닐 테니, 결혼생활에는 다양한 어려움이 있음에 대한 넋두리이겠지요. 그런 넋두리를 듣다보면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대부분 사랑받고 이해받고자 하는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다는 불만입니다. 옛 어른들께서는 “상투를 틀지 않으면 어른이 아니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결혼을 해야 진정한 어른이 된다는 얘기지요. 곧 자신뿐만 아니라 배우자를 위해 책임 있는 행동을 하고 가정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줄 아는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미성숙한 어린아이에 불과하겠지요. 어린이는 무엇이든지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사랑을 받고, 관심을 받고, 교육과 배려를 받고, 생명 유지를 위한 음식 따위도 가깝게는 부모와 다른 이들에게서 받으며 살아갑니다. 어린이는 이 사랑과 이해, 배려를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정신과 육체가 더욱 건강하게 자라납니다. 반면에 어른이란 자신의 욕구만을 채우려는 것에서 탈피하여 나 아닌 다른 이에게서 받은 그 모든 사랑과 관심, 이해와 배려를 나누어 줄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결혼한 부부는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상대에게서 채워 받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채워주려 노력하는 친밀한 관계입니다. 이해받지 못해 힘들고 배려 받지 못해 힘들고 받지 못해 힘들어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어려움에 함께 하여 배우자의 삶의 무게를 줄여주고, 행복을 만들어 가기 위해 지혜를 다하는 사이가 부부입니다. 주려하기보다 받으려고만 한다면 후회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배우자의 기쁨 속에 나의 기쁨을 키워가고, 배우자의 행복한 모습에 보람을 느끼는 성숙한 자세가 ‘돈버는 기계’요 ‘밥순이’로 자신을 비하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될 것입니다. 성서적 표현을 빌리자면 ‘부부는 둘이 한 몸이 되어 사는 관계’(창세기 2장 24절 참조)입니다. 사실 성장 배경과 성격과 배움과 등등 모든 면에서 다를 수밖에 없는 남녀가 사랑이라는 공통분모 속에 한 몸이 되어 산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은 신성하다고까지 표현되는 위대한 관계입니다. 우리 몸에서 보면, 왼손과 오른손이 있습니다. 명칭은 다르지만 한 몸에 붙어 있습니다. 어느 날 왼손이 무거운 물건을 잡아 끙끙 매고 있다고 해서 오른손이 왼손에게 “이런 바보 같은 왼손아! 어쩜 그리도 계획성이 없게 사냐? 너의 능력도 모르고 그렇게 무거운 것을 들어 다치기라고 하면 어쩌려고 그러냐?” 하며 화를 내거나 나무라지 않습니다. 어느새 왼손이 든 무거운 물건을 오른손이 받쳐 들고 함께 힘을 씁니다. 어느날 오른손이 뜨거운 물건을 잡다가 뎄습니다. 그러자 왼손이 “이런 바보 같은 오른손아! 너는 어쩜 그렇게 생각 없이 사냐? 넌 상식도 없냐? 그러다 상처가 곪아서 온몸이 아프게 되면 어쩌려고 뜨거운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대고 그렇게 조심성이 없느냐?”며 나무라지 않습니다. 어느새 조금이라도 열기와 고통을 줄이려 왼손이 오른손을 부여잡습니다. 그렇게 해도 안 되면 입으로 후후 불며 조금이라도 고통을 덜려 애씁니다. 이것이 남편이라 불리고 아내라고 불리지만 부부라는 한 몸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거기에는 서로 간에 어떠한 원망도 질책도 지적도 있을 수 없습니다. 한국사회에서 이혼은 이제 심각할 정도입니다. 물질적 풍요와 편리함, 여성의 사회활동의 증대 등 다양한 이유로 결혼을 하지 않는 이들도 점차 늘고 있습니다. 그 저변에는 남성과 여성의 조화로운 삶을 이루는 결혼생활에서 자신을 내어 놓을 줄 아는 성숙함의 부족이 더 큰 원인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더욱이 다문화가정의 증가하는 이혼율 역시 이해하기 보다는 이해받으려는 미성숙한 욕구의 충돌이 큰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 됩니다. 부부 상호간 존중과 이해, 갈등적인 요소들을 해결하려는 상호간의 노력이 더욱 요청되는 때입니다. 이 모든 바람이 혼자 사는 신부의 세상물정 모르는 소리로 치부되지 않고 세상 모든 부부들이 좀 더 자신을 내어 놓는 행복을 만끽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허윤진 위원은 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542 | 추천: 0
고병헌/ 인권연대 운영위원 2011년 2월 3일, 새해 첫 날이다. 차례지내고 세배하면서 덕담을 나눈다. 요식행위로 전락한지 이미 오래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자녀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덕담을 생각해내느라 잠깐이나마 고민하게 되는 아침이다. 그렇지 않아도 성장통(成長痛)을 유별나게 겪는 우리 두 아이들에게 올해는 좀 힘도 주고 폼도 나는 말을 해주고 싶은데…… 어떤 덕담이 우리 아이들에게 새해에 받는 최고의 선물이 될까? 예전에 읽은 책이 있는데, 일곱 살 때 처음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열일곱 살 때까지 각종 문예창작 상(賞)들을 휩쓸어서 그 자신이 소위 ‘엄마 친구 딸’이었고, 현재는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와 <뉴욕타임스매거진(The New York Times Magazine)> 등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앨리사 쿼트(Alissa Quart)는 영재교육에 관한 자신의 책 『영재 부모의 오답 백과(Hothouse Kids)』에서 오늘날 부모들은 자녀가 자신들보다 더 ‘특별한’ 존재가 되기를 매우 강렬하게 열망한다고 하면서, 이를 프로이드(Sigmund Freud)의 나르시시즘 개념으로 설명한다. 프로이드는 『나르시시즘에 관하여(On Narcissism)』에서 부모가 자녀를 통해서 실현하려는 나르시시즘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르시시즘에서 가장 골치 아픈 점은 에고(Ego)의 불멸성(不滅性)이다. 현실이 아무리 강하게 압박해도 에고, 즉 자아는 자녀 속에 숨어서 죽지 않는다. 아무리 감동적인 부모의 사랑도 본질적으로 유치하다. 그것은 바로 ‘아이 속에서 다시 태어난 부모의 자기 사랑’이기 때문이다. (앨리사 쿼트, 2009: 240) 프로이드의 나르시시즘 개념이 주는 시사점은 부모가 자기 자녀들이 자신들보다 더 ‘특별’하게 되기를 열망할 때는, 즉 자기 자녀를 ‘이상화(理想化)’할 때에는 부모의 사심(私心)이 개입될 여지가 많다는 사실이다. 앨리사 쿼트에 따르면,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나에게 없는 어떤 자질을 소유하고 있고, 또 그러한 자질을 숭배할 때 그 사람을 이상화하면서, 그렇게 이상화된 사람은 나와는 다른 차원에 사는 사람으로 느낀다고 한다. 문제는 어른 사이에서는 이러한 이상화 기간이 길지 않지만, 부모가 자녀를 이상화하는 경우에는 평생 그럴 위험성이 높다는 사실이다(앨리사 쿼트, 2009: 239). 실제로 우리 사회 부모들은 자녀교육에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열심(熱心)’을 보이고 있으며, 이 같은 ‘미친’ 열풍이 사그라지지 않고 오히려 갈수록 더 세력이 강해지는 것에는 분명 자기 자녀에 대한 ‘이상화된 기대’가 핵심 동력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 우리 부모들은 우리 아이들이 나와 다르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런데 어떤 점에서 다르기를 기대하고 있는가가 문제이다. 제 정신을 가진 부모라면 우리 아이들이 지금 내 나이가 되었을 때 지금 나보다 더 ‘행복’하기를 바랄 것이며, 이런 목적에서라면 어릴 때부터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힘을 길러줘야 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적지 않은 부모들이 자녀들의 행복보다는 자녀들이 갖게 될 경제적 수준에 초미의 관심을 보이는 것이 문제다. 즉 ‘나는 이런저런 대학을 나오지 못해서 이렇게 생활하고 있지만 너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초일류 대학을 나와서 어마어마한 연봉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식의, 참으로 비정상적이고 건강치 못한 ‘자녀의 이상화’가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보자. 지금 당신은 당신 자녀에게 요구하는 ‘1퍼센트 안에 드는 성적’을 얻을 자신이 있는가? 또 진정 당신은 1퍼센트 안에 들어야 행복하고 99퍼센트에 속한 사람들은 진정 불행할 수밖에 없다고 믿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1퍼센트 안에 드는 사람들의 삶의 질과 품격을 당신은 진정으로 존경하고 있는가? 분명한 사실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 중 99퍼센트의 자녀들은 ‘99퍼센트’에 속할 가능성이 ‘100퍼센트’라는 것이다. 유명 대학합격자 이름을 붙여놓은 대치동 한 학원의 입구. 사진 출처 - 한겨레21 상황이 이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도대체 어떤 근거에서 우리 아이들에게 이처럼 가혹한 폭력적 교육현실을 강요하고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단 하나라도 상식적이고 교육적인 이유를 댈 수 없다면, 그것은 결국 부모의 ‘사심(私心)’이 ‘괴물 같은 교육’이 자라나는 온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비정상적으로 이상화된 자녀를 ‘위해서’ 참으로 많은 부모들이 어떤 희생이라도 기꺼이 감수하고 있는데, 이러한 방식의 자녀사랑에 대해 건강한 교육적 이유를 대지 못한다면, 부모가 늙어갈수록 자녀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지금의 교육현실은 노년을 위해 일종의 ‘보험’을 들어두는 식의 ‘사심(私心)’으로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는 말이다. 부모가 원하든 원치 않든,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말이다. 자녀에 대한 이상적(異常的) 이상화(理想化)가 갖는 또 다른 문제는 자녀의 자율성을 심각하게 침해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앨리사 쿼트에 따르면, 자율성, 혹은 자립성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認定)받을 때 가능한 것이며, 일반적으로 아이들에게는 그 누구보다도 부모로부터의 인정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에서, 자녀의 입장에서는 자아의 자립 욕구가 부모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와 모순적으로 충돌하기 때문에 부모가 먼저 자녀의 행복을 위해서 자녀의 자율성, 자립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부여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앨리사 쿼트, 2009: 240). 그런데 ‘이상화된’ 자녀를 위해서 ‘올인’하는 부모들, 혹은 ‘헬리콥터’ 부모들은 자녀들이 부모에게 훨씬 더 ‘의존적’이 되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인간들을 만들게 된다. 그래서 자녀가 어떤 분야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는 것을 발견했을 때 부모가 앞서 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앨리사 쿼트는 조언한다. 그녀는 “아이들이 가진 재능의 범위를 넓게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함부로 아이들을 영재로 만들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하면 오히려 자녀가 스스로 자기의 능력을 발견하고 자신의 꿈을 키워가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부모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이러한 ‘자기 주도적인 꿈의 추구’와 ‘그냥 놀게 하는 것’”이라고 앨리사 쿼트는 단언한다(앨리사 쿼트, 2009: 338-339). 그녀는 부모가 자녀에게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이 ‘자신의 못다 이룬 꿈을 투사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책 『영재 교육의 오답 백과』를 다음과 같은 말로 결론짓고 있다. 조기교육을 한마디로 얘기한다면 그것은 ‘미래의 성취에 집중하여 아이의 현재를 희생하는 것’이다. 심하게 말해서, 아이의 미래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한 나머지 아이의 현재를 노예처럼 부려먹는 것이 오늘날 일부 아이들이 받고 있는 영재교육의 실체다. 지금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여러 가지 학습을 확 줄인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에게 ‘영재’라는 굴레를 씌우지 않는다면, 내 아이는 이런 불행을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이는 아이로 키워야 한다. 우리 어른들이 누린 행복하고 충만한 어린 시절을 왜 내 아이에게서 빼앗으려 하는가. 행복한 아이는 더 많은 꿈을 꾼다. 어른들이 무리한 욕심으로 아이를 지치게 하지 않는다면 아이들 안에서는 꿈이 자랄 것이고 그 꿈을 이루겠다는 마음도 생겨날 것이다.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아이가 행복할 거라는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앨리사 쿼트, 2009: 341-342) 앨리사 쿼트가 말하는 ‘조기교육’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진도 앞지르기’ 방식의 교육을 뜻하는 것 같다. 그러나 ‘조기교육’의 본래적 의미는 ‘빠를수록 적기(適期)가 되는 교육’을 말하며, 이런 맥락에서 새해 첫 날 한국의 부모들에게 가급적 ‘조기교육’을 하자고 제안하고 싶다. 지금 조건에서 다르게 살아갈 수 있는 의지와 힘을 길러주는 교육은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때일수록 적합한 시기일 뿐만 아니라 성장기의 자녀에게는 부모의 삶이 가장 중요한 교재(敎材)이기 때문이다. 삶을 위한 교육인 한, 부모의 삶 자체가 주(主) 교재이고, 자녀들이 읽는 책이나 습득하는 지식, 혹은 체험이나 경험 등은 역시 중요한 요소들이긴 하나 보조적인 것이다. 그러니 이제까지와는 다른 삶을, 지금 우리 사회의 조건에서 행복한 삶을 살겠다는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야말로 새해 우리 자녀들에게는 최고의 선물이 될 것이다. 부모가 바뀌면 오늘 이 순간에 우리 자녀는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는 것이니까! 그래, 오늘 세배 덕담은 우리 아이들에게가 아니라 우리 부부에게 다짐하는 말로 해보자. 건강하라든지, 복 많이 지어라든지 등과 같은 권고의 말들 대신 “오늘부터 우리 부부가 이전과는 달리 너희들의 미래에 대해서 불안해하지 않고, 우리부터 먼저 좀 더 의미 있고 행복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할테니 지켜보고 격려해달라!”라는 부모 스스로의 다짐, 약속으로 덕담하리라. 오늘 이 덕담이 우리 아이들에게 새해 최고의 선물이었으면 참 좋겠다. 고병헌 위원은 현재 성공회대 교수로 재직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631 | 추천: 1
김 녕/ 인권연대 운영위원   인간에게 있어서 종교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의미, 삶과 죽음, 그리고 구원과 같은 가장 본원적이고 궁극적인 질문과 관련된 것이기에, 어떤 답을 어떤 종교로부터 찾아 거기에 귀의하는가의 선택의 자유, 더 나아가, 그런 질문과 답 및 종교를 추구하지 않을 자유도 자유 중의 자유이자 인권 중의 인권이라 하겠다. 또한 종교는 목숨과도 기꺼이 바꾸고자할 만큼 강력한 신념 체계이다. 흔히들 “식사 중에는 되도록이면 정치나 종교에 대한 얘기는 꺼내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한다. 그런 주제는 자주 이데올로기가 깔리게 되어 불필요한 논쟁과 함께 격한 감정 대립으로까지 쉽게 이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정치와 종교, 국가와 교회는 공히 사람들로 하여금 순국이나 순교도 불사하게 만든다. 믿는 이들로서는 종교가 곧 목숨이며 결코 부인당하거나 강요당할 수 없는 전부인 것이다. 그렇기에 세계인권선언 제18조와 대한민국 헌법 제20조는 종교의 자유를 명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와 관련된 자유와 인권은 침해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개신교, 천주교 등의 그리스도교의 경우가 눈에 많이 띄기에 특히 교인들에게, 새삼스레 종교와 관련된 자유와 인권, 예의와 연대, 그리고 희망에 대하여 성찰해보자고 권하고 싶다. 첫째, 종교와 관련된 자유와 인권이다. 서로의 종교를 존중해 주지 않고 무시하거나 비판하는 일, 종교를 믿고 싶어 하지 않는 이에게까지 종교를 강요하는 일, 더 나아가, 다른 종교를 단죄하고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자기의 종교로 개종시키고자 하는 유혹은 쉽게 생겨나는데, 아마도 종교인들은, 특히 권력을 갖고 있을수록,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이 곧 하나님 혹은 하느님이 명하시는 거라고 믿어 자칫 잘못하면 그 상황을 선과 악의 싸움, 혹은 선교 사명을 수행하는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종교의 자유’에 대한 문맹과 그것에서 비롯되는 폭력은 쉽사리 발견된다. 예를 들어, 개신교 장로인 이명박 대통령은 시장 시절에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하나이다.”라고 공식석상에서 기도했다가 엄청난 반발을 샀다. 하나님께 봉헌되고 싶지 않는 이들도 무지 많음을 알아야 한다. 또 다른 예로, 교회가 이주노동자들을 초대하여 따뜻한 식사와 옷가지 등을 선물하는 것은 참 좋은 일이지만, 막상 이주노동자들은 교회에 계속 나와야한다는 무언의 혹은 공공연한 압력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들 중에는 이슬람교도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빵이냐 개종이냐”의 선택을 요구하는 의도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건 인권 유린이자 일종의 폭력이며, 참으로 옹졸한 선교전략 아닐까. 1997년 12월 길상사 개원법회를 방문한 김수환 추기경과 인사를 나누는 모습.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아울러, 종교 내의 언론을 제도 교회가 권위주의적으로 독점하거나 통제하지 말아야 한다. 교회 내에서 제도 언론에 대한 대항 언론 내지 대안 언론이 다양하게 언로를 트게끔 보장되는 것은 종교의 자유, 특히 종교 내의 언론의 자유의 핵심이 아닐 수 없다. 교회 지도부라고 해서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일 수는 없다. 둘째는, 종교에 대한 예의이다. 모 대학 교수가 학생들을 인솔하여 타 종교인 불교 탐방을 가서 불상 앞에서 절을 했다가 해직되었던 사례가 있다. 필자가 재직 중인 모 대학원에서는 교수 워크숍으로 최근에 중국 곡부를 갔다가 공자의 사당을 단체로 방문했었다. 거기에서 몇몇 교수들이 대표로 공자 영정 앞에서 절을 하고 예를 바쳤는데, 그 중에 가톨릭 신부인 부총장도 함께 절을 하는 것을 보면서 필자는 그게 당연하고 아름답다는 생각을 새삼스레 하게 되었다. 아마 이슬람 사원에 가더라도 혹은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섬기는 무속 신앙에 대해서도 예의를 갖추는 게 당연하다 싶다. 어느 종교이던,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사악한 종교가 아니라면, 한 인간이 종교 및 성인 앞에서 예를 표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 아닐까? 그런 기본조차 없을 경우, 더 나아가, 그렇게 예를 표하는 것조차 ‘우상숭배’ 운운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독선이며 스스로의 종교를 종교가 아닌 우상으로 만드는 일일 것이다. 통탄할 일이다. 셋째는, 종교들끼리 서로 대화하고 소통하고 친교를 이루며, 더 나아가 사회변화를 위해 연대할 필요가 있고, 그런 모습은 아름답게 보이며 희망을 준다는 사실이다. 종교들은, 그리고 종교인들은 서로가 함께 걸어가며 서로 배워야할 대상이자 서로가 스승이리라. 작고하신 김수환 추기경과 법정 스님이 길상사와 명동성당을 서로 오가며 진심으로 우애를 나누었던 모습이 벌써 많이 그립다. 법정 스님이 존경했던 예수, 김 추기경이 존경했던 부처, 예수는 존경하지만 예수쟁이들은 보기 싫다던 마하트마 간디... 종교 간에는 원래 서로 벽이 없었지만 종교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그 종교들 사이에 벽을 높게 쌓았던 것은 아닐까? 사람이 종교를 망치지 않게, 종교들끼리 힘을 합쳐 세상을 바꾸게, 그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 절망 앞에 희망을 주는 것이 종교이기에 우리는 다시금 종교의 역할을 기대한다. 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2008년의 촛불집회, 2009년의 용산참사, 2010년의 4대강 반대 운동이 이어지고 있는데, 한 가지 주목할 것이 있다. 그것은 시민운동 진영이 힘이 많이 빠진 가운데 천주교, 개신교, 불교, 원불교 4대 종단의 범(汎)종교연대가 형성되어 물꼬를 트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 70년대, 80년대의 종교의 사회참여가 주로 천주교와 개신교 위주였다면 이제 2010년 전후해서는 4대 종단의 연대가 주류가 되고 있다는 사실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예수, 부처 할 것 없이, 이 나라의 자유와 인권, 민주화와 환경 정의를 위해서라면 믿는 이들부터 먼저 연대함으로써 서로에 대한 존경을 나누고 예를 갖추는 일, 시민들과 시민운동 단체들의 귀감이 되는 일, 그럼으로써 척박한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 “진정한 믿음은 곧 행동,” “종교 간의 연대는 곧 희망”임을 보여줄 수 있다고 믿는다. 인권연대는 2010년 12월에 ‘종교자유인권상’을 제정하여 제1회 수상자(단체)로 인터넷 매체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를 선정했다. 한국 가톨릭 교단 내의 다양한 아픈 문제를 용감하게 지적하고 이웃종교에 대해서는 관용적이며 배려의 정신으로 일관해온 작은 언론단체이다. 이번 상이 이 단체에게 격려가 되고 우애의 표지가 되며, 더 나아가 이 시대, 우리 사회 안에 종교의 자유와 인권, 예의와 연대, 그리고 희망을 신장시키는 작은 촉매가 될 것이라 기대한다. “작은 사람들이 작은 곳에서 작은 일 하면 이 세상에 평화 온다.”는 말처럼, 작은 것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곧 ‘희망’이리라.   제1회 종교자유인권상을 수상한 인터넷 뉴스 매체 "가톨릭 뉴스 지금 여기"의 한상봉 편집국장
2017-07-14 | hrights | 조회: 464 | 추천: 0
장경욱/ 인권연대 운영위원 대통령의 새해 인사는 안보와 경제로 시작되었다. 튼튼한 안보를 기반으로 경제성장에 방점을 두면서 한편으로 친서민과 공정사회의 화려한 미사여구도 덧붙였다. G20세대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 청년층 일자리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대통령의 새해 인사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미래를 낙관할 수도 없고, 조금의 위로도 얻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고 신뢰할 수 없는 대통령의 지지율만이 미친 존재감을 과시하며 대통령 자신을 혼자만의 일터로 내몰아 가고 있다. 그 뒤에서 수천만의 눈은 의심과 걱정의 눈초리를 세우고 있다. 새해 소원으로 우리 안에 평화가 가득하기를 빈다. 반세기를 훌쩍 넘어서까지 계속되는 벼랑 끝 전쟁의 위기를 당한 우리에게 한반도를 둘러싼 평화로운 환경은 다른 모든 것에 앞서 유일무이한 간절한 바람으로 다가와 선다. 그 반면 오랜 세월 탈출구를 찾을 길 없는 전쟁의 위기 상황에 만연된 우리에게 전쟁을 불러오는 분단과 정전체제는 지극히 정상적인 평화로운 상태로 간주되는 것도 사실이다. 한반도에서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정착시키는 탈출구는 분명 존재한다. 남과 북이 자주적 주체가 되어 대화와 협상을 통하여 평화를 선언하고 이행하면 그 뿐이다. 탈출구가 있음에도 이를 봉쇄하는 온갖 장벽들이 독버섯처럼 자라나 우리를 속박하고 있는 것이 현실의 큰 문제이다. 6.15, 10.4선언은 우리에게 그 탈출구를 제시하였다. 거기에서 우리 안에 자라난 불신과 대결의 장막을 걷을 방법도 보았고 종전과 평화의 미래도 그려보았다. 그것이 대세로 굳혀져 더는 되돌릴 수 없지 않을까 낙관해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탈출구를 부정하는 정권이 들어선 이후 정세는 금방 역전하였다. 불신과 대결의 장막이 다시 드리워졌다. 그 탈출구를 부정한 자들이 이제는 동족상잔의 전쟁을 불사하는 군사적 억지력 강화만이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온다고 새해 벽두부터 떠벌이고 있다. 최악의 국면이다. 2011년 새해에도 또 다시 서해 바다에는 소위 연례적, 방어적이라는 한미합동군사훈련이 예정대로 진행될 모양이다. 이에 반발하는 북한과 중국의 대응은 신 냉전 구도를 더욱 굳힐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고 전면전쟁의 기운이 한반도를 뒤덮을지 모른다. 불안한 새해를 맞아서도 문제의 근원을 해결할 탈출구를 찾기보다는 전쟁의 위기를 목전에 두고도 이것이 더 이상 별 것이 아닌 일상으로 치부되는 우리들의 체념하는 모습이 너무나 두렵다. 전쟁을 강요하는 구조와 환경에 종속되어 이에 무디어지면 질수록 결국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을 보호할 수 없다.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전쟁을 불러오는 구조에 맞서 평화로운 세상을 향한 탈출구를 확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의 운명은 벼랑 끝에 선 것과 같다. 새해에는 더할 수 없는 수준의 나눔의 복지가 우리들의 화두가 되었으면 한다. 요즘 대선주자들 사이에서 복지가 유행이다. 대통령 선거에서는 경제성장이 늘 최고의 공약으로 다루어져왔던 것에 비해 격세지감이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벌써부터 분배정책, 복지정책에 대한 경쟁이 후끈 달아올랐다. 우리 사회에서 자살률, 이혼율, 가계부채율, 비정규직 비율, 청년실업률 등 화려한 경제성장의 이면에서 사회적 불평등의 대가로 파생된 부정적 모습이 커져만 가는 상황에서 경제성장을 기치로 하는 대선 공약은 수정이 불가피하다. 빈곤한 사회안전망과 사회적 복지서비스를 조금이라도 끌어올리는 시늉이라도 하지 않고는 서민들을 달랠 길이 없는 형국이다. 지난달 22일 청와대에서 열린 보건복지부 2011년 업무보고 모습 사진 출처 - 연합뉴스 G20 정상회의를 개최한다고 해서 서민의 삶이 나아질 것이 없다. G20으로 대기업의 매출과 영업실적이 늘면 늘수록 그에 반비례하여 비정규직 노동자, 사내 하청 노동자, 파견노동자들은 불안정한 고용과 저소득의 일상에서 허덕이고, 예측불허의 상황과 마주하며 고통 받고 있다. 대기업의 성장에 기반을 둔 한국경제의 성장은 서민의 삶과 동떨어져 있다. 피라미드 같은 대기업과 중소하청기업의 구조는 노동자 서민의 삶을 옥죄고 있다. 나 홀로 부자들의 풍요로운 삶에 대비되는 사회적 불평등은 차이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 함께 하는 사회, 나누어 가지는 사회가 부자 사회이다. 나 홀로 부자가 되는 경쟁사회는 더 이상은 지속되기 어렵다. 이제 양극화의 차이를 본때 있게 좁혀줄 복지정책이 나와야 한다. 무상급식 예산 편성에 대한 재정자립도 1위의 지자체장의 반발은 우리가 지지해야 할 복지사회의 수준에 다다르는 과정이 얼마나 험난한 길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복지정책도 천차만별이다. 시혜적, 차별적 복지에 반대하고 보편적 복지를 추구하고 더 나눌 수 있는 풍요로운 복지정책을 실현해 나가야 한다. 겉만 번드르르한 가짜 복지정책을 간파해 내기 위해서라도 우리들 자신의 복지사회에 대한 구체적 요구와 대안을 정립하고 이를 관철해 내야 한다. 우리가 요구하는 복지는 사회적 양극화의 원인이 되는 소득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수준이 되어야 한다. 그 정도 수준을 위한 재정계획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경제위기에서 국민의 혈세로 천문학적 공적자금을 조성하여 망해가는 대기업과 금융기관을 회생시켜 부도난 국가경제를 살려낸 경험은 사회적 양극화의 위기에 처해 이를 극복할 대안으로 등장한 풍요로운 복지사회의 실현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 새해에는 우리들 스스로 생존의 위기에 처해 절망치 말고, 말로만 복지를 약속하고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이들을 정치적으로 파멸시키고 우리 스스로의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었으면 한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454 | 추천: 0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요즘 내가 들여다보고 있는 증권업계는 말을 곧이곧대로 하지 못하는 동네다. 주가가 내려갈 것 같을 때는 조심스럽게 “단기 조정 압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하고, 주가가 오를 거 같을 때도 “증시의 하방 경직성을 높일 것으로 예상한다”고 꼬아서 말한다. 돈이 걸려 있는 문제라 까딱 잘못했다가는 책임을 져야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기 때문에 직접적인 표현을 삼가다보니 생긴 습성일 것이다. 영어나 한자어가 난무하는 것도 같은 이유일 텐데, 좀 있어 보이려고 일부러 현학적인 표현을 쓰는 경우도 종종 있다. 북한과의 군사적 충돌을 증권업계에서는 ‘지정학적 리스크’라고 부른다. 에둘러 표현하려고 한 건지, 현학적으로 보이려고 하는 건지 알 수 없으나, 천안함 사건이건 연평도 피격 사건이건 모두 지정학적 리스크라고 부른다. 여기서 리스크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바로 그 리스크다. 7천만 겨레의 운명이 걸린 중차대한 문제를, ‘리스크를 테이킹’하면 한몫 건질 수 있는 수많은 리스크 중의 하나로 부르는 걸 보면, 금융시장이란 한편 냉정해 보이기도 하고, 한편 무모해 보이기도 한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건물 지하의 카지노에서 카드 게임에 열중하는 갬블러의 모습이랄까. 그런데 왜 ‘북한 리스크’가 아니라 지정학적 리스크인지를 따져보면, 이 용어를 창안한 애널리스트가 왠지 글로벌(역시 이 동네에서 잘 쓰는 용어다)한 안목에 역사의식까지 지닌 사람일 것 같다는 상상을 하게 된다. 적어도 지금 청와대와 정부에 앉아있는 당국자들보다는 그럴 거 같다는 얘기다. 북한한테 얻어맞은 건 한국인데, 왜 미국이 항공모함을 서해안에 보내는지, 중국은 왜 미국의 항공모함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북한을 싸고도는지, 일본은 왜 북한 때리기를 계속하며, 러시아는 왜 안보리 의장 성명을 채택하려 애썼는지 등의 질문을 한방에 풀어줄 수 있는 열쇠가 바로 ‘지정학’이다. 기억의 저편에서 암기 교육 시절의 추억을 끌어오자면, 우리나라는 언제나 ‘지정학적 요충지’였고, ‘열강들의 각축장’이었다. 우리는 쉬이 잊어버리지만 한국은 여전히 그런 나라다. 문제는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에 지정학적 고민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흥적이고 편의주의적이며, 대중 영합적이고, 근시안적이다. 전략도 없고, 역사의식도 없다. 허둥지둥하며, 이랬다저랬다하고, 다음날이면 드러날 거짓말까지 한다. 허구헌 날 자존심 타령을 하면서 자존심조차 지키지 못한다. 자존심이라는 감정의 영역으로 외교를 끌고 들어가니 외교가 뜻대로 풀릴 리가 없다. 불법 조업하는 중국 어선을 애써 잡아놓고 처벌도 못하고 돌려보내 굴욕외교라는 비난을 받는 건 지당한 자업자득이다. 연평도 포 사격훈련이 지난 20일 오후 2시30분부터 1시간30분 동안 실시됐다. 사진 출처 - 사진공동취재단 이에 반해 북한은 전략적으로 기민하게 움직인다. 연평도에서 한국을 때려놓고, 빌 리처드슨 미국 뉴멕시코 주지사를 불러들여 핵에 관한 통 큰 제안을 하는 걸 보라. 북한이 큰 그림을 갖고 다섯수를 내다보는 박보장기의 고수라면, 남한은 한수 한수에 쩔쩔매는 아마추어 수준처럼 보인다. 귀는 얇아서 훈수 두는 사람이 야유를 보내면 쉽게 마음이 흔들린다. 북한을 두둔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북한정권이야말로 한반도 통일의 최대 걸림돌이 된 지 오래니까. 북한 정권은 철저하게 자기네들의 생존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 생존이 걸린 문제를 놓고 무얼 못하겠는가. 대북 문제는, 이를 테면 시한폭탄을 품에 안고 링에 오른 선수를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의 문제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상대가 누구인지도 잘 모르는 것 같다. 고 리영희 선생은 90년대 초반에 이미 “남북문제는 복안(複眼)적 시각으로 봐야 한다”고 갈파한 바 있다. “최소한의 균형 잡힌 관찰과 이해를 위해서도 두 눈의 원근법적 기능으로서의 각도와 거리의 파악이 필요”한데, “하물며 많은 나라의 이해관계가 얽힌, 다시 말해서 복합적 요소로 구성되고 변화하는 국제적 문제는 양안적 기능만으로도 부족하다”는 것이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그런데 이 정부에는 복안은커녕 양안적 시각마저 보이지 않는다. 나는 그 이유를, 이 정권이 북한 문제를 국내 정치의 하위 요소로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확전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가, 표(=지지율) 떨어질까봐 단호한 대응으로 얼른 말을 바꾸는 일이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천안함 같은 복잡다단한 사건을 지방선거에 이용하려고 서둘러 조사를 끝내느라 더 큰 의혹을 부르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꼬리가 몸통을 흔드니 나라의 품격이 제대로 설 수 없고, 백년지대계가 설 수 없다. 최근 중국이 북한의 나진항을 50년간 사용하기로 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청진항이나 단천항도 중국이 독점 개발하기로 했으며, 북한의 지하자원을 중국이 싹쓸이해 가고 있다는 소식은 진작부터 들려왔다. 동북공정프로젝트에서 이미 드러난 바지만, 중국은 북한을 실질적인 ‘동북4성’으로 만드는 오래된 꿈을 실현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 정부의 대책은?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바에 따르면, 곧 망할 거니까, 망할 때를 기다리고 있다는 거다. 평소에 아무 일도 하지 않아놓고 망하면 저절로 우리 게 된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무식하면 용감해진다더니 딱 그 꼴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전쟁을 두려워하면 전쟁을 막을 수 없다고 했다.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전쟁을 각오하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정녕 전쟁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어렸을 때 나는 아버지 세대로부터 들었다. 그런데 그 아버지 세대가 지금은 전쟁을 두려워하지 말자고 말한다. 뭐가 달라졌나. 우리가 그만큼 잘 살게 돼서, 경제력이 있으니까 쉽게 이길 것 같은가? 북한은 100만의 정규군을 가진 나라다. 화력의 대부분을 휴전선에 집결시키고 버튼만 누르면 남한 전역을 불바다로 만들 수 있는 나라다. 북한의 핵무기와 미국의 핵무기가 치킨 게임을 벌이고 있는 곳이 한반도다. 이명박 대통령은 독일의 빌리 브란트가 되지는 못할지언정, 적어도 수나라 양제가 되지는 말기 바란다.(운하를 파는 건 이미 수나라 양제를 따라하고 있지만) 역사에 관한한, 나는 헤겔의 ‘이성의 간지’가 존재한다고 믿는 편이다. 자잘한 파도쯤은 거대한 조류에 휩쓸려 내려간다. 문제는 지금 우리가 자잘한 파도에 휩쓸려 익사하기 직전이라는 점이다. 한반도 전역이 불바다가 된 뒤에, 이성의 간지가 무슨 소용인가. 트로츠키는 이렇게 말했다. “역사의 전 과정은 우연을 통해서 역사법칙이 굴절되는 그런 과정이다. 생물학 용어를 빌리면, 역사법칙은 우연의 자연도태를 통해서 실현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의 통일과 평화가 역사의 법칙이라고 믿는다면, 전쟁이라는 우연을 자연 도태시키기 위한 의지가 필요하다. 지혜가 필요하다.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437 | 추천: 0
김창남/ 인권연대 운영위원   올 한 해 가장 많은 관객을 모은 영화가 <아저씨>였다고 한다. 원빈이라는 매우 잘생긴 배우가 주연으로 나오는 이 영화는 사실 우리가 갖고 있는 ‘아저씨’의 이미지와는 그리 큰 상관이 없다. <아저씨>는 그가 원빈이기 때문에 인기를 얻은 것일 테고 실제 우리 사회에서 ‘아저씨’들은 별로 인기가 없다. 언제부터인가 TV에서건 어디서건 아저씨란 호칭을 듣기 어렵게 되었다. 아줌마란 호칭도 마찬가지다. 요즘은 웬만큼 나이 들어 보이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저씨, 아줌마 대신 아버지, 어머니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경우가 더 많다. 생판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아버지, 어머니라 부르는 걸 더 좋아하는 이유는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아저씨, 아줌마란 호칭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게다. 영국 런던 근교에 뉴몰든이라는 곳이 있다. 한국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이 동네에 오래 전부터 회자되는 이야기가 있다. 한 한국 아저씨가 공원을 산책하는데 17, 8세 쯤 되어 보이는 백인 소년이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빌려 달라고 했단다. 그러자 이 아저씨 대뜸 그 친구의 멱살을 쥐고는 이렇게 소리쳤다는 거다. “How old are you? What is your father's name?" 너 몇 살 먹었어? 너희 아버지 누구야?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다. 그 많이 듣던 소리가 영어로 직역될 때 생기는 생경함이 이 이야기가 주는 재미의 포인트다. 설마 그런 일이 진짜 있었을까도 싶지만 아무려나 이 에피소드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아저씨’들에 대한 이미지가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그저 나이를 따져 상대방을 누르려 하고, 다짜고짜 소리부터 지르며 권위를 내세우지만 실상 아무런 권위도, 내세울 것도 없이 초라하게 찌그러지고 있는 존재, 그게 아저씨다. 아저씨들의 동반자가 아줌마들인데 ‘아줌마’라는 기호 역시 부정적인 이미지로 채색되긴 마찬가지다. 뻔뻔스럽고 낯 두껍고 억척스럽고 목소리 크고 막무가내인, 그러면서 더 이상 여성으로서 성적 매력을 가지지 못한 존재, 그게 아줌마다. 잘생긴 배우가 주연으로 나오는 이 영화는 사실 우리가 갖고 있는 ‘아저씨’의 이미지와는 그리 큰 상관이 없다. 사진 출처 - 씨네21   나이를 먹고 중년이 되면 아저씨, 아줌마 호칭이 붙게 되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사람들이 대체로 그 호칭을 반가워하지 않는 데는 나이를 먹는다는 사실 자체가 즐겁지 않은 까닭도 있지만 그보다는 아저씨, 아줌마라는 기호가 품고 있는 그런 이미지들 때문이다. 모두가 거쳐 갈 수밖에 없는 인생의 한 단계에 대해 그런 부정적 이미지가 덧씌워 있는 건 불행한 일이지만 생각해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아저씨와 아줌마를 바라보는 시각이란 대개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에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아저씨와 아줌마는 사실 나의 부모와 같은 세대이고 그들을 보는 나의 시선은 기실 부모에 대한 나의 시선에서 나온 것이다. 그저 권위를 내세우며 큰 소리만 치는 아버지, 억척스럽게 살며 잔소리를 해대는 어머니는 우리에게 언제나 어쩔 수 없는 삶의 조건이다. 난 이 다음에 저런 아버지(혹은 어머니)는 되지 말아야지 다짐했던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닐 테다. 그러나 부모는 그런 측면 외에도 다른 관계(이를테면 가족애, 경제적 후원, 인자하고 따뜻한 또 다른 모습 등등) 역시 존재하고 무엇보다도 나를 낳아준 부모라는 점에서 쉽게 부정할 수 없다. 그러다 보니 부모의 부정적인 측면은 나 아닌 남의 부모들, 즉 아저씨와 아줌마들에게 전가되어 버리는 것이다. 말하자면 아저씨 아줌마의 부정적인 이미지는 사실 우리 부모의 부정적 측면이 대입되어 형성된 일종의 속죄양인 셈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토록 부모 세대를 닮고 싶어 하지 않은 자신들이 어느 틈엔가 나이를 먹어 가면서 조금씩 나도 모르게 그들을 닮아가고 있음을 깨달으면서 갖게 되는 자기 부정의 감정이다. 어, 어느 새 나도 우리 부모처럼 잔소리가 늘고 뻔뻔해 지고 꼰대처럼 되어가고 있네, 그럴 때 순간적으로 휩싸여 오는 자기 부정의 감정은 불쾌하기도 하고 한편 쓸쓸하기도 하다. 이럴 때 사람들은 애써 아저씨, 아줌마가 되어가는 자신을 그로부터 멀리 떼어놓고 싶어 한다. 우리가 아저씨, 아줌마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는 것은 자신은 ‘아직’ 저기까지 가지 않았다는 심리적 안전판을 가지고 싶은 욕망의 표현일 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남보다 일찍 아저씨 소리를 들은 편에 속한다. 대학 시절부터 흰 머리가 많아 실제보다 겉늙어 보였던 탓인데 당시에는 조금이라도 더 나이 들어 보이고 싶었던 시절이라 아저씨 소리에 그리 개의치 않았다. 사실 내게 조금 충격적이었던 건 ‘할아버지’ 소리였다. 둘째 아이가 유치원에 다니던 시절, 아빠와 함께 참여하는 프로그램이 있어 아이 손을 잡고 유치원에 간 적이 있다. 그 때 어느 꼬마가 우리 부자를 보더니 이러는 거였다. “어머, 내훈이는 아빠랑 안 오고 할아버지랑 왔네.” 유치원 아이의 판단 기준으로는 머리가 하얀 사람은 곧 할아버지였던 거다. 자칫하면 아저씨 단계를 건너뛰고 바로 할아버지 단계로 진입하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해야 할 판이었다. 다행히 그런 경우가 많지는 않았고 나는 지금 대체로 순탄하게 아저씨 단계로 연착륙한 셈이다. 물론 나는 지금의 나의 모습에 그런대로 만족한다. 적어도 누군가가 내게 20여 년 전의 청년 시대로 돌아가겠냐고 묻는다면 그리 큰 고민 없이 ‘싫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은 그러하다. 생각해 보면 나의 청년 시대는 대체로 불안했고 불만스러웠고 가난했다. 그게 청년 시대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70, 80년대의 청년에게 그 시절은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연옥이었다. 그 시대를 거쳐 지금 현재의 아저씨가 되어 버린 나 자신이 고맙고 대견스러울 정도다. 나는 불안보다는 안정을, 도전보다는 안주를 좋아하는 태생적 보수주의자가 틀림없다. 그러고 보면 아저씨, 아줌마에 대한 혐오는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에서 오는 것 아닌가 싶다. 지금의 나 자신을 정말 사랑한다면 아저씨, 아줌마가 되어 가는 것이 두려울 이유가 없지 않을까 싶다. 김창남 위원은 현재 성공회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재직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449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