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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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학교 역사문화컨텐츠학과 교수), 이찬수(전 보훈교육연구원장),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장발장은행장)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육영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연초에 교사인권연수 행사로 남영동 소재 ‘경찰청 인권센터’를 찾았다. 원래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로 불렸던 이곳은 고 김근태 ‘선배’가 악마의 고문을 견디고, 대학생 박종철이 ‘탁하고 책상을 치니 억하고’ 숨졌다는 슬프고도 치열했던 현대사의 현장이다. 강연 후 인권연대 오창익 사무국장의 안내로 군사독재정권 당시 불법 연행되었던 사람들의 동선을 복기해 보았다. 정문을 통과해서 건물 뒤쪽으로 접근해 육중한 문을 따고 좁은 공간에 들어서면, 위쪽으로 좁고도 가파른 골뱅이 모양 철제계단이 위압한다. 아마도 그(녀)는 눈이 감긴 채 수갑에 뒤로 묶여 계단을 위태롭게 올라가서 한 조사실(고문실?)에 배당되었을 것이다. 2012년에 다시 찾은 5층 동쪽 끝 방에는 1985년에 감금되었던 김근태 선생의 명복을 비는 하얀 국화가 침울하게 복도를 지키고 있다. 맞은편 서쪽방향에 위치한 박종철 열사의 방은 욕실과 침대 등이 그대로 현장 보존되어 완강한 방음벽에 갇혀있다. 남향으로 난 좁은 창틀 사이로 탈주한 1월의 차갑고도 순결한 햇빛은 1987년 이맘때에 젊은 청년이 외롭게 죽음으로 삼켜야만 했던 ‘짐승 같은 시간들’을 기억하고 있을까. 어느 신문사가 신년특집으로 〈역사학자가 뽑은 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을 선정·발표했다. 지난 한 세기를 ‘일제강점기’, ‘해방 후부터 1960년대’,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세 단계로 분류해 각 시대를 상징하는 장소와 공간을 뽑아 그 역사적 의미를 성찰해보려는 의도였다. (동업자 입장에서) 다소 냉소적으로 꼬집어보자면, 이화장과 경무대·청와대와 같은 권력(자)의 공간은 ‘근현대 한국을 만든 곳’으로 기록되었지만, 그 권력이 휘두른 폭력에 스러진 ―영웅이나 투사가 아닌― ‘보통 희생자’의 자취는 희미하거나 망각된다. 제주도(4.3사건)와 ‘광주 금남로’ 및 ‘전남시청’ 등지에서 숨졌던 사람들은 집단적으로 추모되지만, 공권력이 임의적으로 협박하고 짓밟았던 개별적인 인권에 대한 ‘살인의 추억’은 공소시효 바깥에서 아직도 까불고 있다. 옛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이 “시대의 흐름을 바꾼 역사의 현장”에서 아쉽게도(?) 탈락한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일까. 또한, 일제식민시절부터 현재까지 민중을 계몽하여 혹은 그들과 더불어 민족(독립)정신과 민주(노동)의식을 일깨웠던 수많은 ‘횃불야학’들은 선정되지 못하고, “식민시기와 탈 식민시기의 학문과 그 역할”이라는 추상적인 추천이유로 서울대가 명단에 이름을 올린 것도 흥미롭다. 역사는 여전히 ‘정치를 중심축으로 해서 위로부터 아래로’ 흐른다고 확신하는 많은 역사가들의 신념이 반영된 결과이리라.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이 일어난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경찰청 인권센터) 509호 조사실. 현장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사진 출처 - 머니투데이 역사서술이 객관적이며 절대적인 진실 찾기가 아니라 끝없는 논쟁이라면, 공간과 장소에 각인된 과거기억도 예외가 아니다. 특정한 사건이 발생한 장소와 공간을 특정한 이름으로 호명함으로써 과거-현재-미래를 특정한 색깔과 무늬로 직조 혹은 재정렬 하려는 ‘기억의 정치학’에 우리들이 심각한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이다. 예를 들면, 1951년에 발생했던 ‘거창양민학살사건’은 도대체 왜 반세기가 지난 2004년에야 ‘거창사건추모공원’의 모습으로 되살아나서 기념되었을까? 지리산 빨치산 토벌작전 수행이라는 명분으로 무고한 700여명의 거창군민들 학살했던 이 사건으로 유족들은 ‘빨갱이 자식’이라는 주홍글자를 달고 살아야만 했다. 그런데 군부통치의 종결에 따른 민주화 덕분에 국가후원으로 기념공간이 완성되었을 때 그 공식명칭은 ‘거창사건추모공원’이었다. 국가에 의한 ‘학살’이라는 폭력의 주체와 그 성격이 은폐되었을 뿐만 아니라, 피해대상이 공산당이나 전투원이 아니라 평범하고도 선량한 일반인(‘양민’)이었다는 또 다른 진실이 추모공원의 건립과 동시에 땅 속에 묻혀버린 것이다. 지연되었던 가족의 명예를 복권시킴으로써 한국전쟁의 트라우마(상흔)에서 벗어나려는 유족들의 갈망과 분단체제하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 올바르게’ 통치해야만 하는 국가권력 사이의 어려운 타협의 산물이었을까. 특정사건과 공간을 둘러싼 민간기억과 국가기억의 갈등과 충돌의 또 다른 사례를 프랑스혁명기의 방데전쟁(1793~1796)이 제공한다. 방데 도(道)를 무대로 혁명정부와 이 지역 농민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종의 내란으로 16만~60만 명이 생명을 잃었다. 오랫동안 역사가들은 방데(농민)전쟁의 성격을 왕당파·망명귀족·가톨릭 사제 등과 같은 혁명의 적들의 사주에 의해 무지한 농민들이 혁명정부에 맞선 ‘반혁명전쟁’으로 규정했다. 앙시앵레짐(구체제)을 수호하려는 반동분자(후손)들이 거주하는 곳이라는 부끄러운 역사유산을 물려받았던 지역주민들은 1932년에 ‘방데의 기억’이라는 시민단체를 결성했다. 이 단체는 방데지역의 전통문화와 전승된 구술자료 등을 채집하여 새로운 지방사 쓰기와 이미지 만들기에 노력했다. 시민단체의 이런 능동적인 행동은 방데전쟁의 역사적 성격에 대한 재해석을 자극하고 요청했다. 그 결과, 수정주의 역사가들은 방데전쟁이 파리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부르주아혁명의 확산을 저지하려는 지방농민들의 자발적이며 저항적인 ‘대항혁명’이라고 최근에 재평가했다. 이에 힘입어 1978년에 지방의회는 혁명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던 퓌뒤푸 성(城)을 매입하여 방데전쟁을 소재와 콘텐츠로 한 야외공연과 마을축제를 개최했다. 국가나 기업의 지원 없이 방데주민들의 무료자원봉사로만 진행되는 퓌뒤푸 지방축제는 그 수익금을 세계인권보호와 홍보에 사용하고 있다. [위 두 사례에 대한 좀 더 상세한 내용은 『기억과 전쟁』(휴머니스트, 2009) 참조.]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공간과 장소 위에 쓰는 역사서술은 현재진행형이다. ‘인권’이라는 키워드를 대입하여 (재)발견, 선별, 보존, 순례해야할 장소를 선정하는 작업은 역사가나 공적 기관에만 맡기기에는 너무나도 중요한 문제이다. 근대화를 위로부터 지휘했던 포항제철과 박태준을 암기할 것인가, 아니면 그 그늘아래에서 여위고 시들어 숨졌던 청계천 평화시장과 전태일(버들) 다리에 묵념할 것인가? 자유와 평등과 평화와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다가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김소월의 초혼).” 값싼 보상금이나 개인적인 명예회복과는 결코 맞교환할 수 없는 역사현장을 지켜내고, 그 장소에 ‘역사적으로 올바른’ 기념비를 세운 후, ‘인권적으로 정당한’ 명칭을 부여하는 것은 너와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며 과제이다. 공간과 장소를 점령하기 위한 우리의 역사기억투쟁 혹은 고지(진지)전은 계속되는 것이다. 육영수 위원은 현재 중앙대학교 역사학과에 재직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376 | 추천: 0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만일 우리가 관세를 철폐하고 자유무역을 장려하게 되면 모든 경제부문의 우리 노동자들도 유럽에서처럼 노예와 같은 수준으로 떨어질 것입니다”(에이브러햄 링컨) # 1. 이명박 정부 초기, 중앙부처 산하기관들이 매달 한 번씩 모이는 공공기관협의회에 참석했던 한 기관장은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노조 얘기였어요. 겉으로 내세운 명목은 공공기관 경영 혁신이었는데, 실제로는 각자 자기 기관의 노조 현황을 보고하고 이걸 어떻게 때려잡을지가 그 회의의 핵심이었어요. 장관은 그걸 챙기고 독려하는 역할을 했죠.” 이 회의가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이명박 정부 출범 1년여가 지나고부터였다. 각 산하기관 별로 단체협상이 개악됐다. 일부 노조(예를 들어 노동연구원)의 저항은 곧 진압됐다. 노조에 끌려 다니는 ‘유약한’ 기관장은 기관 평가에서 낮은 점수를 받거나, 쫓겨났다. (주석 : ‘기업하기 좋은 나라(비즈니스 프랜들리)를 모토로 내건 이명박 정부의 반(反)노조 정책은 당연한 귀결인 셈이다. 이 정부는 태생부터 반노동자적이었다. 그리고 저돌적이었다.) # 2. 쌍용자동차 구조조정 과정에서 다수의 노동자들이 폭력적인 희생을 당한 지 2년여가 흐른 뒤, 쌍용차의 주채권은행이었던 산업은행 관계자는 필자에게 이렇게 털어놨다. “산업은행이 3천억 원만 지원했다면 쌍용차 노동자들이 그런 식으로 해고당하지 않아도 됐을 겁니다.” 알다시피 산업은행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강력한 구조조정을 요구했다. 무려 2646명이 정리해고되었다. 그리고 이후의 비극적인 사태들. 노동자들은 해고에 저항하며 공장을 점거했고, 경찰은 무자비한 폭력 진압을 감행했다. 절망에 빠진 노동자 혹은 가족들의 죽음의 행렬이 이어졌다. 애초 정부와 채권단이 쌍용차를 상하이자동차에 매각할 때, 노조와 시민사회는 상하이차가 투자는 하지 않고 기술만 빼갈 것이라는 먹튀론을 제기했지만, 정부와 채권단은 듣는 체도 하지 않았다. 이후 상하이자동차의 먹튀는 현실이 됐지만,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피해는 고스란히 노동자들이 짊어졌다. (주석 : 산업은행은 사실상 정부와 동격이다. 산업은행이 쌍용차 구조조정을 주도했다기보다는, 청와대·기획재정부 등 정부 사령탑의 결정이 먼저 있었을 것이라고 봐야한다. 쌍용차 폭력 진압 사태 당시 현장 책임자였던 조현오 당시 경기지방경찰청장 못지않게, 뒤에 숨어서 정리해고를 강행한 이들이 쌍용차 19명의 죽음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 # 3. 지난 6월, 충남 아산에 있는 자동차부품업체 유성기업에서 엽기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밤샘노동의 비인간성을 고발하며 “밤에는 잠 좀 자자”고 외치는 노동자 대열을 향해 자동차 한대가 질주했다. 순식간에 13명이 치였고, 목뼈가 부러지는 등 11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89년 현대중공업 식칼테러에 버금가는 엽기적인 사건이었다. 사고를 저지른 자는 회사가 고용한 20대 용역이었다. 무면허라는 사실이 확인됐는데, 경찰은 그를 불구속 입건 처리하는데 그쳤다. ‘도덕적인 정권’ 치하의 ‘공정사회’는 이렇게 공정하다. 여러차례의 물리적 충돌 끝에 노조는 공장에 복귀했지만, 어용노조와의 지리한 신경전으로 피를 말리고 있다. (주석 : 시제이컨설팅(창조컨설팅)이라는 용역업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이름은 유성기업만이 아니라 재능교육, 한진중공업, 발레오전장코리아 등 분쟁이 있는 사업장마다 마각을 드러낸다. 민주노조를 파괴하고 어용노조를 세우는 일련의 과정이 일종의 매뉴얼처럼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유성기업에서 근무한 지 18년째 되는 박○○(36)씨는 지난 6월 회사가 고용한 용역이 운전한 카니발 차량에 부딪쳐 귀와 옆머리가 찢어지고 무릎·어깨에 타박상을 입고 입원 치료를 받았다. 사진출처 - 금속노조 충남아산지부 # 4. 이명박 정부를 탄생시킨 일등공신인 조중동이 한목소리를 내는 주제가 몇 가지 있다. 북한, 노동, 그리고 종편처럼 자사 이익이 걸린 문제다. 북한과 노동문제에서 그들은 철저히 레드콤플렉스에 기반한 이념적인 접근법을 고수하는데, 그들에 따르면 우리나라 경제는 노조 때문에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보수언론의 이념적 주문을 교조적으로 착실히 이행했고, 그 결과가 노조 조직률의 추락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강하다는 한국의 노조는 이제 조직률이 10%도 채 안 된다. 1977년 관련 통계 이후 최저치인 9.8%를 기록했다고 노동부가 지난 11월 발표했다. OECD 최하위권이다. 문제는 노조가 분배정책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노조를 망가뜨리면 임금이 오르지 않게 되고, 가처분 소득이 줄어든 노동자들은 소비를 줄인다. 당연히 내수는 침체되고 경제는 어려워진다. 당연하게도 부익부빈익빈, 양극화는 심화한다. 소득불평등 수준을 측정하는 지니계수는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 (주석 : 자신들의 외눈박이 경제관을 반성할 생각은 않고 ‘자본주의 4.0’ 같은 애매한 구호로 대충 뭉개려드는 <조선일보>의 뻔뻔함은 새삼스럽지도 않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의 실체가 백일하에 드러났는데도 자기 생각이 틀렸음을 고백하는 우파 이론가는 한명도 보지 못했다. 부자감세가 경제를 살리고 고용을 살릴 것이라는 거짓말, 공공부문을 민영화하면 효율성이 높아지고 가격이 낮아져 소비자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는 거짓말, 강성노조 때문에 투자가 이뤄지지 않는 거라는 거짓말 등등.) # 5. 한스 피터 마르틴, 하랄드 슈만. 지금 들어도 낯선 이름의 <슈피겔> 기자 2명이 쓴 <세계화의 덫>이라는 책이 유행할 무렵, 한국은 아직 외환위기의 수렁 속을 헤매일 때였다. 그 책이 제시한 ‘20 대 80 사회’는 신자유주의 공세 속에서 강화된 부익부빈익빈 현상을 나타내기에 꽤 유용한 분류법이었다. 그러나 올해 미국에서 벌어진 ‘어큐파이 월스트리트’ 운동은 1%에 대한 99%의 싸움을 말했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중산층이 무너지면서 이 극단적인 구호는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이명박 정부의 부자 위주 정책으로 1:99라는 분류법이 비교적 무리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우스푸어, 렌트푸어, 워킹푸어... 서민들은 집이 있어도 가난하고, 없어도 가난하고, 일자리가 있어도 가난하고, 일자리가 없으면 더 가난하다. 좀 더 잘 살고 싶은 개인들의 이기적 욕망이 공동체를 망가뜨릴 뿐 아니라, 자신의 삶조차 파괴할 수 있다는 사실을 한국인들은 이명박 정권을 통해 확인했다. # 6. 지금 한국 사회는 1980년대 이후 평등에 대한 욕구가 가장 크게 터져 나오는 시기를 통과하고 있다. 확실히 자본만의 자유라는 실체가 폭로된 신자유주의는 위기를 맞고 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신자유주의를 주장해온 우파가 아니라 좌파가 되레 위기를 맞고 있다. 선명성을 강조하는 진보신당은 현실 정치무대에서 흔적을 찾기 어렵다. 자유주의 우파와 살림을 합친 통합진보당의 지지율도 5%에 불과하다. 이는 대한민국 ‘원조보수’ 박근혜 한나라당 비대위원장마저 복지를 논하고 있는 현실과 관련이 있다. ‘복지’만을 말해서는 자유주의 우파는 물론이요, 반공주의 우파들과도 차별화하기 어려운 상황이 된 것이다. 물론, 박근혜는 복지를 말하되, 부자증세를 통한 재원마련에 관심이 없다는 점에서 기만적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한국의 보수가 여전히 민주노조를 자신들의 적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민주노조의 자유로운 활동에 대한 보장 없이 분배나 복지는 언감생심일 뿐이다. 김진숙의 예외적인 승리에도 불구하고 장기투쟁사업장들은 우리 주변에 널려있다. 한진중공업과 똑같은 (흑자 기업에서의 정리해고, 공장 해외 이전) 케이스인 콜트콜텍이라는 기타 제조 회사의 경우, 사태 발생 만 5년이 다 되어가도록 해결의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노동자로서 인정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 재능교육 학습지 교사들의 싸움도 5년째를 맞았다. 새해에는 제2, 제3의 희망버스가 제2의 김진숙, 제3의 한진중으로 향하게 되길 기대한다.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365 | 추천: 0
김영미/ 인권연대 운영위원 학교, 학생, 교사는 변화 되고 있다. 학교나 교사에 비해 학생의 변화가 빠르고 역동적이다. 이러한 변화에 대한 인식과 이해의 차이가 학교에서 세대 간 갈등을 일으키고 교육 위기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교사와 교사 사이에도 세대 간의 차이는 존재하고 교사와 학생간의 세대 차이는 더욱더 크게 나타나고 있다. 책임감과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교사들, 학교 조직 속에서 존경과 지시에 익숙하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교사들, 현실적이며 직장인 같은 교사들, 그리고 자기의 할 일은 잘하지 못하면서도 권리를 내세우는 학생들과 교사라는 직업이 부정적으로 변해가는 사회 속에서 학교교육은 어려워지고 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40대 남자교사와 담임으로 있는 학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교사의 얼굴이 상기되면서 “선생님 학급학생들에게 배신감이 느껴져요, 저는 학급 학생들과 소통이 잘되고 있고 그들도 나를 신뢰한다고 느꼈어요. 그리고 1년동안 최선을 다했어요. 그런데 아이들이 저에게 이럴수가 있어요?” 내용은 이랬다. 교사가 담임으로 있는 학급의 여학생과 다른 반의 남학생이 1년동안 사귀고 있었고, 그 두학생은 학교 탈의실 안에서, 복도, 또 학급의 학생들이 있는 교실뒤쪽에서 지나친 스킨쉽을 했었다고 한다. 학급의 학생들은 모두 알고 있었지만 담임교사는 학생들의 이런 행동을 오랫동안 모르고 지내고 있었는데 복도를 지나치다가 상황을 보게 된 다른 교사가 이야기해줘서 알게 되었다. 더욱더 선생님을 당황하게 했던 것은 이 일로 학급의 임원학생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상황을 늦게 알게 되어서 담임으로서 정말 미안하다, 그렇지만 너희들도 나에게 알려줄 수는 없었니?”라고 했더니 아이들 모두 황당한 얼굴로 “그건 걔네들의 사생활이잖아요? 왜 이야기해야 되요?”라고 했다고 한다. 평소에 학생(중학생)들은 담임교사에게 찾아와 많은 이야기를 했었고, 알고 싶지 않던 아주 사소한 이야기도 전해주던 학생들에 익숙했던 교사는 당황스럽다 못해 배신감이라는 극한 감정까지 느꼈던 것이다. 최근에 인접한 지역에서 중학교 1학년 학생들의 성과 관련한 사건이 발생되면서 긴장을 하고 있었던 담임교사는 학교에서 이성교제를 하는 학생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늘 가까이서 학생들과 대화를 하고 시간이 나면 학급으로 가서 학생들을 보고 관찰했던 교사지만 학생들의 이성교제에 대해서는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는 수줍은 고백 같은 모습만 상상했다. 그런데 학생들은 교사가 보지 않는 곳에서 대담한 애정표현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리고 이런 모습이 학급의 다른 학생에게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닌지 걱정을 했다. 이처럼 요즘 학생들은 자기표현이 분명하고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한데 비해 교사들은 구성원간의 관계와 협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습에서 사고의 차이를 분명하게 했다. 이러한 갈등을 줄여나가기 위해서는 교사들이 빠르게 변화되는 학생들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이해하려는 많은 노력과 사회변화에 따른 인성교육과 생활교육에 대한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한다. 이러한 노력들에 의해 진정성을 간직한 인간관계가 만들어져서 의사소통이 가능할 수 있다. 물론 의사소통의 관계복원은 학교와 교사의 노력만으로는 어렵다. 사회와 가정에서도 학교와 교사가 걸 맞는 노력을 해야 한다. 김영미 위원은 현재 중학교 교사로 재직중에 있습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427 | 추천: 0
서상덕/ 인권연대 운영위원 세밑 성탄절을 앞둔 시즌이 다가오면 특별히 종교를 갖지 않은 이들도 뭐가 궁금해선지 마음이 동해 성당이나 교회를 기웃거려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 맘 때쯤 천주교나 성공회 성당을 들러본 이들이라면, 성당 한 켠에서 길게 줄을 지어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 한 신자들의 모습에 궁금증이 일었을 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뇌를 자극한 줄은 바로 세간에 ‘고백성사’로 알려진 ‘고해성사’를 보기 위한 것이다. 천주교에서는 고해성사를, 세례성사를 받은 이들이 세례 받은 이후에 지은 죄를 고백해 하느님께 용서 받고, 하느님과 이웃, 교회 공동체와 화해하는 성사라고 가르친다. 인간은 불완전하기에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났을지라도 세속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죄를 지음으로써 하느님 은총을 상실하고 하느님과 친교 관계를 단절하게 된다. 인간이 죄로 인해 잃어버린 하느님 은총의 지위와 하느님과의 친교 관계를 회복시켜 줄 매개체를 필요로 하는데 이것이 바로 고해성사다. 죄를 범한 인간은 고해성사를 통해 하느님을 떠나 살았던 삶에서 다시 하느님께로 되돌아가는 '회개'의 삶, 하느님과의 친교 관계를 회복하는 '화해'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 고해성사에서 방점은 ‘화해’에 놓여 있다. 세속의 온갖 죄에 노출돼 있는 인간에게 하느님과 이웃,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길을 열어주는 게 바로 고해성사라는 것이다. 따라서 가톨릭교회는 고해성사가 인간을 구속하기 위함이 아니라 인간에게 진정으로 죄에서 해방되는 기쁨을 맛보게 하는 성사이고, 다시금 새롭게 살아가는 힘과 용기를 얻게 하는 성사라고 가르친다. 이런 까닭에 비신자들이 봤을 때는 의아해할 구석도 없진 않지만 많은 신자들이 죄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원의를 갖고 고해성사를 보게 된다. 하지만 모든 죄에 대해 고해성사를 봐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십계명을 거슬러 하느님을 배반한 큰 죄를 범한 경우에만 고해성사를 보도록 한다. 하느님 은총을 잃지 않을 정도의 소죄, 즉 용서받을 수 있는 가벼운 죄는 고해성사가 아니더라도 참회나 영성체로도 용서받을 수 있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인간이 저지른 죄가 고백 때문에, 보속 때문에 사해지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하느님은 회개하는 사람의 마음을 보고 용서하신다. 고백은 뉘우치는 마음의 한 가지 표현일 뿐이다. 이러한 논리적 귀결은 참으로 회개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것은 거짓이고, 그렇게 이뤄진 고해성사 또한 대죄가 될 뿐이라는 것이다. 사실 죄가 용서된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죄 때문에 아파본 사람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죄가 용서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지은 업보는 반드시 갚아야 한다. 다음 생에도 갚지 못하면 다시 또 태어나 그 다음 생에서라도 갚아야 한다. 따라서 가톨릭적 입장에서 보자면, 죄를 범한 인간이 하느님의 자비, 사랑과 은총을 가장 잘 체험할 수 있는 성사가 바로 고해성사인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러한 의미를 지닌 고해성사를 ‘통과의례’ 정도쯤으로만 여기는 흐름도 적지 않은 것 같다. 이런 현상이 횡행하는 대표적인 곳이 정치판이다. 국민의 혈세를 도둑질하고도 대국민 고백성사를 했다며 면죄부를 얻은 양 의기양양해하는 정치인 정도는 이제 식상하기까지 하다. 국민이 맡긴 곳간을 고스란히 다른 나라에 내주고도 자신은 하느님 앞에 떳떳하다고 밝히는 이들 앞에서는 할 말을 잃게 된다. 교언영색으로 국민을 기만하고 나라 곳곳을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고도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들먹이는 이들은 또 어떤가. 세속에서 더 이상 고해성사를 할 일이 없어질 때야말로 신이 보시기에 좋은 세상이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고 할 때는 정직한, 참된 고해성사만이 세상을 살리고 궁극에는 자신을 살리는 길이다. 지금까지 하느님과 이웃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한 부분에 대한 죄만을 고해했다면, 이제는 자연을 파괴하고 창조질서를 어지럽힌 죄에 대해서도 고해성사를 해야 하지 않을까. 가톨릭교회는 창조 질서와 관련해 이렇게 가르친다. "더 이상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자연 사랑을 분리해서 볼 수가 없다. … 나의 탐욕과 부주의로 자연을 함부로 파괴하는 것도 창조주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는 죄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실제로 오늘날 생태계의 파괴는 과거에는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죄'이다." 한 해를 보내며, 또 새로운 한 해를 맞으며 각자의 자리에서 얼마만큼의 고해거리를 안고 살아왔는지 돌아볼 일이다. 그것이 이웃과, 세상과, 전 우주와 화해하는 시발점이다. **팁 : 회개는 하느님의 선물이다. 이 선물은 하느님 은총을 받을 준비가 돼 있는, 그분 은총에 마음이 열려 있는 이들에게만 주어진다. 참된 회개를 하지 못하는 이는 참 생명도 누릴 수 없다. 서상덕 위원은 현재 가톨릭 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351 | 추천: 0
고병헌/ 인권연대 운영위원 …… 우리에게 생각, 즉 성찰은 성장의 지표이다. 따라서 생각 없이 살아간다는 말은 곧 이들이 성장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비난으로 옮겨간다. 인간이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자기 생각이다. 자기 생각이 있어야 줏대 있게 움직이고 능동적으로 살아가며 자기 삶과 공동체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생각 없이 산다는 것은 주인으로 살아가기를 포기하였다는 것과 동의어다. 엄기호,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푸른숲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 엄기호는 이 책에서 ‘생각’을 개념의 운동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누구든 자기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고, 이 ‘생각’은 개념으로 하는 것이니, 이는 “인간은 말과 개념으로 세상을 짓는다.”는 말과 맞닿아 있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에게 지금 이 현실에서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길러줘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그들에게 아름답고 건강한 ‘개념들’을 손에 쥐어줘야 한다. 그 ‘개념’이라는 벽돌로 그들의 아름다운 세상을 짓도록 말이다. 세상을 확정하는 틀로서의 ‘생각’과 그 생각을 만드는 ‘개념’, 이 둘의 관계를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 신영복은 이렇게 설명한다. …… 우리가 소위 전두엽에서 진행되는 멀티태스킹, 여러 가지 기억소자를 종합하는 것, 이것을 생각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집 떠난 아들을 어머니가 생각하는 것, 이런 경우의 생각도 생각입니다. 어느 것이 ‘생각’이라고 할 수 있나요? 생각이란 기존의 어떤 것을 불러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생각이란 세계를 확정하는 아주 중요한 틀이라는 것이지요. 강도한테 칼 맞아 쓰러진 행인을 제사장도 레위인도 그냥 지나가는데 사마리아인이 구출합니다. 그 차이가 뭔가 하면 사마리아인은 쓰러진 행인을 자기 세계로 받아들인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세계를 조직하는 것, 그게 생각이라는 거죠. 가슴 아픈 것과 머리 아픈 것의 차이가 그것을 잘 설명해줍니다. 가슴 아픈 것은 그것을 자기의 세계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가슴 아픈 것이지요. 반대로 골치 아픈 것은 자기 세계에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데 들어오는 경우에 골치 아픈 것이지요. 생각이 세계를 조직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가슴이 하는 것이 맞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니체는 ‘진리는 용기’라고 했습니다. 가슴보다 머리에 더 가까운 것으로 여겨지는 진리마저도 세계에 대한 참여, 세계에 대한 조직이라고 보는 것이고, 그것이 진리의 본질이라는 것이지요. 저는 논리와 이성은 근대 사회의 기본적 단위라는 것, 벽돌처럼 근대사회를 구축하는 기본적 요소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개념적 사고, 다시 말해서 아도르노가 이야기하는 도구적 이성을 뛰어넘는 세계의 조직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세계의 해석보다 세계의 조직에 대한 사유도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신영복, [여럿이 함께 숲으로 가는 길], 서울대 출판문화원 그러면 “세계의 해석보다 세계의 조직에 대한 사유”를 어떻게 할 것인가? 미국 템플대학교에서 공공커뮤니케이션을 가르치고 있는 제이슨 델 간디오(Jason Del Gandio)는 “수사학이 바뀌면 세계가 바뀐다”고 주장한다. 언어란 기호와 상징이 모두 서로에게 연결되어 꽉 짜인 조직화된 체계이며, 이런 이유에서 모든 언어는 그 나름의 고유한 세계관과 전망을 구성하기 때문에, 언어가 다르면 세계관이 다를 수 있고, 언어의 체계를 바꾸면 전망을 바꿀 수 있으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면 자기가 사는 지금 이 세계를 지금까지와는 달리 지각하고 혹은 구상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지금까지와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면 현실도 달라진다는 것이 그의 주장의 핵심 내용이다. 그러면 언어가, 수사학이,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 어떻게 세상을 바꾸고 재조직할 수 있단 말인가? …… 결국 생각한다는 것은 언어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맞다면, 언어를 바꾸는 것은 생각을 바꾸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행동주의로서는 중요한 통찰이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서는 그들이 쓰는 언어를 바꾸는 것이 좋다는 얘기다. 이렇게 하면 인간의 사유 수준에서 사회변혁을 일으킬 수 있다. 사람들이 세상을 생각하는 방식을 바꿔 세상을 변혁하자는 것이다. 다음 네 단계는 이 점을 분석한다. • 사람들의 언어를 바꿔라, 그러면 사람들의 생각하는 방식이 바뀐다. •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라, 그러면 사람들이 세계를 대하는 방식이 바뀐다. • 사람들의 방식을 바꿔라, 그러면 사람들의 믿음, 가치, 태도, 행동이 바뀐다. • 이 모든 것을 바꿔라, 그러면 사회의 방향이 바뀐다. …… 언어를 사회변혁의 도구로 활용할 것, 자기가 찾는 세계를 존재하게 하는 언어를 활용할 것, 자신이 바라는 현실을 불러내는 언어를 활용할 것, 이 세 가지가 요점이다. 제이슨 델 간디오, 김상우 역,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 동녘 정치 영역에서 선거 때 ‘프레임(frame) 전쟁’이라는 말을 쓴다. 상대편이 나를 반대하고 비난하더라도 나의 ‘언어’로 비판하게 만들면 그것은 오히려 나에게 이로울 수 있다는 것인데, 한국 사회에서는 ‘4대강 살리기 사업’을 둘러싼 프레임 전쟁이 한 사례가 될 수 있다. 정부의 ‘4대강 사업’이 막 시작한 초창기에, 시민사회단체들이 정부가 만든 ‘4대강 살리기 사업’이라는 언어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운동을 한동안 진행했다. 그러니까 구호가 예를 들면 “4대강 살리기 사업 절대 반대” 같은 식이었다. 먹고사는 일이 바빠서 ‘4대강 사업’의 본질을 헤아릴 수 있는 여유나 능력이 없는 수많은 시민들이 “4대강 살리기 사업 절대 반대”와 같은 구호를 듣고선 정부와 시민단체 중 어느 쪽을 못마땅하게 생각할까? “저들은 강을 한번 살려보자는 데 늘 저렇게 반대만 하냐”라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바로 이것이 프레임 전쟁의 본질인데, 이는 제이슨 델 간디오가 주장하는 “언어를 통제하는 사람이 정신을 통제할 수 있다”는 말과 맞닿아 있다. 지난 10월 22일 오후 경기도 여주군 이포보에서 열린 '4대강 새물결 맞이 행사'에서 '4대강 범대위' 회원들이 행사에서 볼 수 있도록 '4대강 심판!' 구호가 적힌 대형 에드벌룬을 띄웠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그러면 이는 “언어를 창조하면 새로운 현실을 창조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되기도 하지 않은가? 바로 그렇다. 꿀벌들은 밀랍으로 자기 세계를 창조하지만, 인간은 말(언어)과 개념으로 자기 세계를 창조하기에, 우리는 개념의 ‘집’인 언어를 새롭게 창조하여 사용함으로써 사람들이 자기의 지금 현실과 맺는 관계 방식을 바꿔 새로운 현실을 창조할 수 있도록 지원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사회운동단체 활동가들이나 사회변혁 운동가들 중에서 간혹 언어의 사용방식, 즉 화법(話法)이 매우 경직되어 있거나 지루한 감이 없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런 사람의 수가 많고 적음이 아니다. 비록 그 수가 많지 않다고 하더라도, 극히 적은 수의 사람들이 자기가 속한 집단이나 조직의 이미지를 색칠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사회운동단체 활동가나 사회변혁 운동가들이 진정 사회의 변혁을 원한다면 무엇보다도 ‘사회변혁적 언어’를 사용하는 화법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는 부모와 자녀 사이에도, 그리고 교사와 학생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당신은 자녀와, 당신의 학생들과 소통이 잘 되는가?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받는 상처 중에서 가장 아프고 오래 남는 것이 전혀 말이 통하지 않을 때 느꼈던 ‘밑바닥 외로움’일 것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은 부모가 어떤 성품의 사람인가에 따라 그리 큰 아픔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말이 전혀 통하지 않을 때는 부모나 교사의 생각이나 경험 모두는 그 하나하나가 채찍이 되고 아픔이 되며, 이런 상태가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을 때, 그 때는 부모나 교사의 존재 자체가 자녀나 학생들에게는 ‘지옥같은 세상’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행복이라곤 전혀 맛본 적이 없을 것 같은, 심각하고 찌그러진 얼굴로 “이것이 다 네 행복을 위한 거야!”라고 소리 질러댈 때, 이미 오염될 대로 된 개념이 담긴 ‘성공’이라는 말을 매일 아침 밥상머리에서 해댈 때, 전혀 그럴 마음도, 또 그러지 않았으면서 말끝마다 “너를 믿었어!”라고 쏴붙일 때, 행복이나 성공, 믿음 등과 같은 용어들은 이미 소통을 위한 매개체로서의 언어적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그래서 자녀와, 또 학생들과 진정 소통하기 위해서는 ‘살아있는 언어’를 써야 한다. 언어가 ‘살아 있다’는 것은 그 말에 담겨 있는 개념이 서로 자연스럽게 공유할 수 있는 상태를 뜻하는 것인데, 따라서 살아 있는 말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 속의 개념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만들어야 한다. 실로 개념이 풍요롭고 아름다워지면 말과 언어가 힘이 생기고, 언어에 생기(生氣)가 돌면 그 언어와 말로 짓는 삶과 세상이 ‘희망’차진다. 인간은 말(언어)과 개념으로 세상을 지으니까. 고병헌 위원은 현재 성공회대 교수로 재직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370 | 추천: 0
황미선/ 인권연대 운영위원 후배가 근무하는 송파구 잠실소재 모 초등학교에서 며칠 전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이야기이다. 학교에서는 교사들을 대상으로 의무적으로 연간 정해진 횟수의 연수를 실시하게 되어있는데 그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연수물을 만들어 배부하기도 하고 예산을 들여 강사를 초빙하기도 한다. 그날 후배 학교에서는 강사를 초빙하여 강의를 들었던 모양이다.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다. 강사는 교장과의 친분(?)을 밑거름으로 본인이 저자인 책을 사줄 것을 부탁하였고 학교장은 어떠한 논의과정도 없이 학교예산을 사용하여 교사 연수를 위한 명목으로 몇 십 권의 책을 구입해 주었다. 강사가 가고 난 후 책을 교사들에게 배부하였고 그 책을 접한 교사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책의 겉표지는 아이들의 웃는 모습이 나오는 밝고 경쾌한 느낌이었고, 제목은 ‘선생님이 웃어야 아이들이 웃지요’로 창의력을 키우는 유머 모음집이라는 부제를 붙여 그 내용을 짐짓 짐작할 수 있는 책이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기대한 것과는 달리 곳곳에 문제가 많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특히 그중에 눈에 띄는 것은 성을 도구화하여 쓴 음담패설이 유머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성차별과 여성 비하, 성희롱이나 성추행을 일상 생활인양 다루고 있다는 것이었다. ⊙ 부인 생일 선물을 사러 가서……………………(기타) 조 선생님은 능글맞은 데가 있다. 부인 생일이 다가오자 부인에게 장갑을 사 주려고 가게에 들어갔다. 그러나 막상 장갑을 사려니 사이즈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머뭇거리자 예쁜 아가씨 점원이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손을 한 번 만져보실래요.” 남자는 아가씨의 손을 만져보고는 장갑을 하나 골랐다. 물건을 사가지고 나가던 조 선생님은 다시 가게로 돌아와 말했다. “이왕 사는 김에 브래지어와 팬티도 하나씩 살까 하는데요.” ⊙ 호박잎……………………(유연성) 노처녀인 변 선생님이 길을 가다가 바람에 스카프가 날아갔다. 마침 옆에 지나가던 남자가 스카프를 주워 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기 호박잎이 떨어졌네요.” ⊙ 밤 12시 집안 풍경 4제……………………(재구성력) ㆍ되는 집안 - “공부 그만 좀 하고 자거라.” ㆍ안 되는 집안 - “이 녀석이 몇 신데 아직 안 들어와.” ㆍ막 가는 집안 - “아버지 또 안 들어와.” ㆍ콩가루 집안 - “이놈의 마누라가 아직도 안 들어와.” 이런 종류의 글들이 서점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책을 쓴 저자는 가장 많은 회원을 보유하고 교육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한국교총 전 회장이다. 그의 경력(2007~ 열린 좋은교육바른정책포럼 공동대표/ 2006 ~ 제4대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위원/ 2004 ~ 제32대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회장/ 1981 ~ 1982 중앙교육연수원 조교수 겸 교육정책과정 실장 / 1981 ~ 1981 한국교육개발원 책임연구원/ 1973 ~ 1978 한국행동과학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일반인이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화려하다. 그런 빵빵한(?) 경력으로 후배가 근무하는 학교처럼 교사 대상의 강의도 다니고 죽천(竹天)이라는 필명을 빌어 쓴 책을 구입하도록 권유하기도 하고 있는 것이다. 성관련 음담패설에 선생님을 주어로 하여 글을 쓴 것도 그렇고 이 책을 통해 유창성, 유연성, 재구성력, 정교성, 독창성 등의 훈련이 필요하다며 창의력 개발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한 그의 인식론을 이해하기 어렵다. 아니 그의 뇌구조가 의심스럽다. 실명확인을 위해 이 책을 출판한 원미사에 확인을 하여보니 현재 후배학교 교사들에게 배부하였던 그 책을 다시 회수하기로 했다고 한다. 담당자는 출판한지 오래된 것도 아닌 올해 7월에 출판된 책이라며 저렴하게 서점가로 주문하였고 학교로 들어가는 것이니 서류도 다 갖추었는데 반납한다며 불만을 토로하였다. 구입의 의사가 있는 것처럼 이야기한 나에게 친절하게도 이런 일도 있으니 구입하려면 내용을 살피고 결정하라는 조언까지 해 주었다. 저자의 약력이 무엇이든 정당한 과정을 밟아 누구든지 출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육단체의 수장을 지낸 사람이 이런 책을 썼다는 것과 이런 내용이 창의력을 키운다고 생각하는 저자의 인식에 그저 놀라울 뿐이다. 2010년 발생한 13세 미만 아동 대상 성폭력 사건이 1,012건에 달한다고 한다. 하루 평균 2,8건의 아동성폭력사건이 발생한 셈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조두순 사건이나 김길태 사건, 그리고 최근 도가니 영화를 통해 알려지게 된 장애아동 대상 성폭력사건 등을 보면 우리나라의 경우 관련법들이 사건에 따라 만들어지는 경향이 강하다. 사진 출처 - 필자 사람들의 기억이나 관심, 즉 여론에 따라 일관성이 없이 진행된다고 볼 수 있다.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어온 여러 성희롱과 성폭력 사건, 그리고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가부장적 사회 구조와 성으로 인한 불평등... 이런 것들은 앞으로 타파되어야할 사회의 암적 요소들임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번 사건을 사회적으로 주목받은 사건들과 연관시키는 것이 과도하다 여겨질 수 있으나 사회 구성원들이 가진 사람들의 인식은 사건 발생과 연관이 깊은 것이고 사회적으로 명망 높은 사람들의 인식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다음 세대를 가르치는 교사들이 가지는 인식은 매우 중요한 교육적 요소이다. 올바른 교사의 인식은 아이들의 올바른 인식을 기대하게 한다. 최대 교육단체의 수장이었던 강사가 가진 인식에 대한 문제의식뿐만 아니라 그가 교사들을 연수한다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인지, 또한 그런 사람을 강사로 초청한 학교 책임자, 또한 학교의 예산을 개인 돈처럼 어떠한 논의과정 없이 사용하는 학교장의 태도, 책의 내용 확인도 없이 교사들에게 배부한 학교 당국의 처사 등이 참으로 개탄스럽다. 황미선 위원은 현재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359 | 추천: 0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이 자유 없이 일방적으로 통과되었다. 불균형적인 산업구조를 개선하지 못한 채 ‘자유롭게 무역하자’는 협정 자체가 모순이었는데, 자유를 저당 잡아놓고는 자유 협정을 체결하는 모순이라니, 반복되는 역사의 아이러니 앞에 자괴감만 커진다. 자유가 무엇이던가. 자유는 “스스로(自) 말미암음(由)”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기 행위의 원리와 원인을 자신 안에 두는 상태를 자유로 규정했다. 자유는 타자에 의한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다. 자신 안에 있는 원리에 따라 자기 행위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 즉 타자의 의존성으로부터 벗어난 “~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자유이다. 물론 다른 차원의 자유도 있다. 하나는 속박으로부터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타자와의 관계 안에 스스로를 구속시킬 줄 아는 자유, 즉 “~으로의 자유”(freedom to)이다. 전자가 소극적, 개인 중심의 자유라면, 후자는 적극적, 타자 지향의 자유이다. “~으로의 자유”란 타자를 억압하는 자유가 아니라, 자신의 자유에 기초하면서 타자의 자유를 신장하기 위한 자유이다. 대단히 성숙한 자유이다. 사실 이 두 자유는 별개의 것이 아니다. 적극적 자유의 차원에서 보면 이 둘은 단계적 혹은 연속적이다. 인간이 어떤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한, 도리어 그 어떤 것과 관계를 맺고 그 관계 안에 자신을 구속시킬 수 있는 능력도 동시에 지니기 때문이다. “~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면 “~으로의 자유”도 불가능하다. 당연히 오늘날 성숙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것은 소극적 자유를 소화하고 넘어 적극적 자유를 구현하는 것이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한다: 한나라당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을 단독처리한 22일 오후 본회의장 전광판에 재석 170인, 찬성 151인, 기권 12인이라고 적힌 표결 결과가 표시돼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적극적 자유는 ‘무엇으로부터의 떠남’이 아니라 ‘무엇으로의 향함’이다. 적극적 자유는 무엇을 위해 자유로움, 무엇을 위해 열려있음, 따라서 무엇을 위해 자기를 열어놓음, 무엇을 통해 자기 자신이 규정되도록 함, 스스로 무엇에 헌신함이다. 소극적 자유를 발판으로 하되, 타자를 위해 스스로의 자유를 제한할 줄 아는 적극적 자유의 능력을 배양하는 것은 오늘날 시민사회의 기본이자 목표이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상황은 반대로 가는 것 같다. 얼핏 보면 자유가 확대되어가고 있는 것 같지만, 그 때의 자유라는 것이 주로 개인적, 자기집단 중심적 자유이다 보니, 그것은 늘 그리고 결국은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희생을 전제로 한다. 희생은 숨기고 자유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자기중심적 욕망을 확대 재생산시킨다. 그것이 여전한 현실이다. 이런 분위기가 확장되고 있는 것은 어쩌면 근대 사회적 시스템의 필연성이기도 하다. 중세 계급사회가 타파되고 근대 시민사회로 진입하게 된 것은 시민 계급(부르조아)이 탄생하고, 그 자유가 확대되어간 과정이자 결과이다. 하지만 그 자유를 추동하는 힘이 대량생산을 통한 자본 축적의 결과였다는 점에서, 그런 자유의 확대가 환영해야만 할 일은 아니다. 근대 문명의 기초는 자본의 확대가 다지고 만들어놓았다. 이런 기초 위에서 자유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추동하는 그 엄청난 힘은 자본이다. 그리고 자본을 소비하려는 욕망이다. 자본을 좌우하는 권력이 개인적 혹은 자기 집단 중심적 욕망으로서의 자유를 추동하는 힘이 되었다. 자유라는 이름의 억압이 거의 모든 곳에서 횡행하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을 반기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이른바 ‘자유무역’을 환영하는 이들도 제법 있을 것이다. 그런 이들일수록 “~으로의 자유”를 곱씹을 수 있는 기회가 잦았으면 좋겠지만, 그것은 공연한 희망일 것이다. 애당초 들리지 않는 구조 속에 안주해 있겠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희망을 포기할 수도 없는 일일 것이다. 자유라는 감옥의 빗장을 여는 일이 이 시대 진정한 자유인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이찬수 위원은 강남대 교수로 재직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341 | 추천: 0
김대원/ 인권연대 운영위원 동일본대지진이라는 초유의 사태에 묻혀 조용히 지나가고 말았지만, 올해에도 일본 공립학교 졸업식에서 기미가요 기립제창에 반발한 50여명의 교사들이 징계를 받았다. 1999년, 기미가요와 히노마루를 일본의 국가와 국기로 법적 공식지정. 2003년, 도쿄도 교육위원회가 국기게양 및 국가제창, 그리고 제창시 기립 등을 의무화. 그 뒤 적지 않은 교원들이 이를 거부하는 끝 모를 싸움을 계속해 왔고, 애매한 처벌규정에 대한 법정투쟁이 계속되어 왔지만, 올 5월 일본최고재판소가 교육위원회의 징계에 대해 합헌판결을 내림에 따라 교육계의 국가주의 교육 강화 움직임은 가속화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졸업식장의 풍경이 유치할 정도이다. 기미가요 제창시 교사들의 성량을 체크하기도 하고, 기립하지 않은 교사와 학생을 체크해 실적이나 성적에 반영하기도 하며, 식장에 의자를 설치하지 않고 시작부터 모두 세워 둔 채로 졸업식을 진행한 학교도 있다. 그런데, 우리들 대부분 이와 같은 일본의 보수화 즉 군국주의의 부활 움직임에 격분하기는 하지만, 실제 기미가요의 어느 부분이 어느 정도 문제가 되는지 구체적으로 알고 있을까? 아마도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확인해 본 적은 없을 것이다. 의외로 일본의 학생들조차도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가사가 옛말로 되어 있기도 하지만, 그다지 대단한 내용이 담겨 있는 것도 아니긴 하다. 기미가요의 가사를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당신의 세상이 천대까지 팔천대까지, 조약돌이 바위가 되어 이끼가 낄 때까지.’ 이게 전부다. 아마 세계에서 가장 짧은 국가가 아닐까. 노래로 해도 40-50초 정도이다. 이 한 줄만으로는 제국주의와 일왕에의 충성 맹세를 알아채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이 노래는 원래 10세기 초에 편집된 ‘고금단가집’에 수록되어 있는 일본 고대가요이다.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노래로 경축연 등에서 불리다가, 명치(明治)정부에 의해 새로운 곡조가 붙여져 애국가 노릇을 하게 되었다. 그 후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할 때까지 기미가요의 첫머리는 그 뜻이 분명했다. ‘당신의 세상’은 곧 일왕이 다스리는 세상’이라는 뜻이었다. 그 외의 해석은 있을 수가 없었다. 식민지 조선인들은 각종 집회나 음악회, 각 학교의 조회시간 등을 통해 이 노래를 하루에 한 번 이상 부르거나 듣도록 강요당했다. 이른바 황민화 정책. 또한 중국인들에게 이 노래는 점령국 군대의 군가일 뿐이다. 일본 군대가 중국의 도시들을 점령해가면서 즐겨 부르던 군가였던 것이다. 중국인들은 물론이거니와 우리 독립투사들을 죽이고 간도 대학살을 저지른 뒤에도 기뻐 불렀을 노래이다. 지금도 일본의 극우단체 회원들은 자주 군복을 차려입고 야스쿠니 신사를 찾아 전범들에게 참배하며 이 노래를 부른다. 그 노래를 일본인들은 지금 국가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사진 출처 - SBS 어느 곳이나 불의에 대한 저항은 있는 법. 이에 저항하다 2000년 이후 매년 평균 100여명의 교직원이 징계 받았으며, 2010년에는 200여명이 대거 징계받은 바 있다. 올해에는 50여명으로 줄었지만, 학교측에 의해 졸업당일 옥외의 안내업무 담당으로 명령받은 경우가 많았고, 중복징계가 두려워 스스로 휴가를 신청하고 졸업식에 참석하지 않은 교원도 많았다. 소극적인 저항은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올해는 교직원 뿐 아니라 학생들의 움직임도 있었다. 동경 시내 한 고등학교에서 교장으로부터 졸업장을 받은 몇 명의 학생이 갑자기 단상의 마이크를 쥐고 다음과 같이 외쳤다. “더 이상 선생님들이 괴롭힘을 당해서는 안된다. 특히 기립하지 않은 학생 수로 교사를 처분하는 것은, 교사를 인질로 학생의 사상을 통제하는 것이다. 생각 있는 학생으로 성장하자. 문제라고 느끼면 행동하자.”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그날 학생들은 기미가요 제창시 기립하지 않으면 교사에게 피해가 가므로, 교장 훈화시 기립하지 않는 것으로 불복했다. 몇몇 학교에서는 졸업식 당일 교문 앞에서 성명서를 배포하다 체포된 학부모도 있었다. 처분되는 교원의 수가 줄어들어도, 교육위원회의 명령에 불복하는 교원의 수는 줄어도, 문제는 더욱 심각해지고 있는 것 같다. 이상 일본의 국가제창 강요와 기립 의무화, 불복교사들에 대한 탄압 등의 배경에는 우경화 즉 국가주의 강화와 함께 표현의 자유나 기본적 인권에 대한 몰이해가 있다. 그럼, 우리는 이로부터 자유로운가? 국기게양과 국가제창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우경화를 우려하고 비난하고, 이에 저항한 이들의 피해를 안타까워 하지만, 우리는 그 국가주의로부터 자유로운가? 독립운동과 해방의 상징이었던 태극기가 독재정권에 의해 국가에 충성을 요구하는 전체주의의 상징으로 이용되는 것을, 우리는 뼈저리게 경험했다. 그런 국가주의가 기득권과 지배계층을 유지하기 위해 활용되는 데에 저항하지 않았던가. 조례를 하면서, 하교길에, 영화 관람 전에 그저 무의식적으로 일어서거나 멈추어 서서 예를 표하고는 했다. 때로는 이유 모를 감정으로 가슴이 벅차 오르기도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 국가대항 운동경기가 시작되기 전, 아니면 금메달을 딴 뒤 경기장에 울려퍼지는 애국가를 들으며 울먹거려보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그러나 누구도 설명해 주지 않았다. 국가의 존재와 의미와 가치, 막연한 애국심, 그리고 국기 혹은 애국가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우리 애국가 자체에는 아무런 유감이 없다. 과거 자국의 군국주의 역사를 경험한 적이 없으면서도, 그리고 피해국가의 국민이 아님에도 기미가요 제창을 반대하며 징계를 무릅쓴 일본 젊은 교사들의 용감한 저항에 박수를 보내면서, 어릴 적 박정희와 전두환의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 바칠 각오를 했던 자신이 너무 억울하고 창피할 뿐이다. 아무 반성 없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 역시. 김대원 위원은 성공회 신부로 일본 릿교대학교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382 | 추천: 0
김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어린 5세 나이의 훈(오세훈)은 어린 아이들 점심 식사 한 끼를 갖고 쪼잔하게 굴다가 결국 서울 시장직을 사퇴하였다. 하여 서울시장 선거 참여 여부를 놓고 촉발된 속칭 ‘안철수 현상'을 놓고 여러 전문가들이 본질은 ‘분노’에 있으며, 변화에 대한 갈증의 표현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동의한다. 모든 사물의 현상에는 원인이 존재하는 것처럼 분노에도 원인이 존재한다. 일시적인 분노는 감정의 여과를 한 단계 거치면 조절이 가능하다. 하지만 지속적인 분노는 다른 문제다. 지속적 분노는 구조적인 문제에 원인을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현재의 분노는 지속적인 분노로 판단된다. 지속적인 분노가 계속되면 증오가 쌓이고, 그 쌓인 증오는 어디로 어떻게 폭발할지 아무도 모른다. 분노의 지혜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다. 군부 독재가 물러나고 시민들은 이제 최소한 독재·독선 정권은 없을 것이며, 최소한의 민주주의 가치는 존중되고 흔들림이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오히려 좀 더 행복한 삶을 누리고, 삶의 질이 개선되는 성숙한 민주주의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MB 정권으로 상징되는 권력은 시민의 희망과 달리 시계추를 거꾸로 돌려놓는 역주행에 가속페달을 밟았다. 반대로 시민의식은 더욱 성숙해졌다. MB 정권 초기 촛불시위도 분노의 표현이었다. 그것은 거대한 분노의 메아리였다. 개인과 소규모 집단의 분노가 시대의 울림으로 뭉쳐져 나타났던 것이다. MB 정권은 공정사회라는 단어로 시민을 현혹하고 속이려 하였다. 그러나 시민은 오히려 공정사회를 이루지 못하는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지 알게 되었고, 분노의 함성은 소리 없이 확산되고 있다. 표피적으로 나타나는 민주주의 후퇴와 역주행에만 주목한 것이 아니다. 보다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문제에 대하여 이제 눈을 뜨고 직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서울 은평구의 한 선거구에서 주민들이 서울시장 보궐선거 투표를 위해 줄을 서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대학 등록금도 낼 수 없는 아픔의 세대, 대학을 졸업해도 취직도 안 되는 신세, 그래서 휴학을 반복하면서 대학도 6∼7년 씩 늦추어 다니는 세대, 그나마 취직을 해도 비정규직으로 살면서 2등 국민으로 취급받는 사회, 가진 자는 더욱 살찌게 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쪽박마저 깨어버리는 양극화 사회, 노후를 어떻게 살 것인지 막막함과 서러움에 찌들어 사는 장년층과 노인층 문제, 힘없는 자에게는 법치주의 운운하며 감옥으로 보내고 힘 있는 자에게는 아부하는 권력의 파렴치 ---, 이러한 분노의 근본적 원인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헌법의 자유·평등 이념이 실종되어버린 천박한 자본주의 그 한 가운데에 분노의 시선이 꽂혀 있다. 역설적이게도 ‘안철수 현상’으로 상징되는 절망의 끝자락에서 희망의 합창을 듣고 있는 것이다. 한 때 대학 강단에 있으면서 대학생들이 취직 문제로 고민하고 아파하는 모습을 수없이 목격하면서 기성세대의 한계를 통감하였다. 모두 기성세대의 책임이다. 미래세대에 절망을 안겨준 준엄한 책임을 져야 한다. 분노는 파괴적인 힘을 동반하고 있다. 분노의 메아리가 창조적인 파괴로 이어질 때는 좀 더 행복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분노가 소모적 파괴와 자괴감으로 남아서도 안 되고, 침묵해서도 안된다. 이제 99%의 심장은 1%의 지배를 거부해야 한다. 앞장서서 창조적 파괴를 실행할 시점이다. 박원순 서울 시장 당선에서 우리는 그 일면을 보았다. 어떻게 확 바꾸고, 인간답게 사는 조건을 만들 것인지. 김희수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339 | 추천: 0
이지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4”자로 상징되는 세 가지가 있다고 했던가. 400Km가 넘지 않으면 거리도 아니다.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떨려고 해도 400km쯤은 가줘야 하는 곳. 그 보단 반경 400km쯤은 동네 마실 다니듯 휘젓고 다닌다는 통 큰 곳. -40도c가 아니면 추위도 아니다. -10도c쯤의 날씨엔 웃통 벗고 다니고-20도c정도 되어야 부채질하며 대략 -40도c 쯤은 되어야 뻬치이카에 불 때기 시작한다는 뜨거운 피를 가진 동네. 40도는 되어야 술이다. 적게는 40도에서 75도그 독한 보드카를 생명의 물이라 부르며 병 채로 들이키는 단단한 내장을 가진 아직도 잠자는 땅 시베리아. 우랄산맥 동편으로 캄차카 반도까지 러시아 땅의 2/3를 차지하고 화석연료와 목재, 차고 넘치는 광물의 대부분을 품에 안고도 조용히 잠자는 그 땅위에 나의 첫 발자국을 찍은 건 작년 이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출발하는 총 9288km의 시베리아 횡단열차(TSR)를 타고 눈뜨면 지평선, 보드카 한잔에 눈감으면 백야(白夜)의 잔영과 함께 3박4일을 달려 바이칼에 갔었다. 밤새도록 쉬지 않고 달리는 열차를 따라 어김없이 자작나무는 가녀린 흰 바탕의 군락이 되어 다시 나타났고 군데군데 마을을 감싸고 흐르는 강줄기는 시베리아의 태양을 반사시켜 그 빛으로 나는 아침 세수를 대신했었다. 그때 나는 시베리아의 강물을 보며 사람의 길, 마을과 마을의 소통이었던 강줄기를 꼭꼭 틀어막아 댐을 쌓고 주위를 온통 콘크리트로 도배질 한 후 개발의 완성을 자축하는 우리의 게걸스러움을 보았고 이익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간이라도 내어줄듯 “사랑합니다 고객님”을 외쳐대는 내 누이의 비굴함과 거기에 얹혀사는 이들을 비참하게 무릎 꿇리는 자본의 비정함을 두려워했었다. 그때 이미 나는 아마존과 더불어 세계 양대 허파라고 부르는 대 자연이 있고 인류의 산업을 적어도 수백 년 동안 지탱 시킬 수 있는 막대한 자원을 땅속에 품고 있으면서도 자본의 위대함을 앞세워 요기(妖氣)어린 손짓을 보내는 탐욕스런 떨거지들에게 조용히 훈계하는 시베리아의 목소리를 들었었다. “시베리아는 자연을 사는 모든 이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는 있으나 탐욕스런 너희들의 욕망을 채워줄 수는 없다”는. 올해에는 어떤 훈계를 들을 수 있을까 자못 기대하며 모스크바행 비행기에 오른 게 지난 7월. 작년에 완수하지 못한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나머지 구간 바이칼에서 모스크바 까지를 거꾸로 타고 내려오기 위해서였다. 갓 30여명쯤 되는 일행의 체크인에 두 시간 반이나 걸리는 모스크바 호텔 측의 느긋함에 부아가 오르고 기껏 배정받은 방의 열쇠를 각 층마다 배치된 여직원(이분은 우리 시각엔 없어도 운영에 문제 없는)이 쥐고 일일이 여닫아 줄때의 황당함이 있었지만 “오늘의 할 일은 내일로 미루고 내일 할 일은 하지 않아-구전가요 백수가-”도 별일 없이 사는 듯 한 그들이 부럽기도 했다. 정리해고에 앞서 월급을 반으로 줄이면서까지 일자리를 나누겠다고 선언한 노동자들을 헬기를 동원한 경찰력으로 무력화 시키고 결국 살인으로 몰아넣는 자동차 회사가 있는 나라에서 온 우리들은 굳이 한사람이면 충분한 일거리를 서넛이 나누어 갖는 그들의 고용 나눔을 술안주로 씹으며 러시아의 첫 날 밤을 보냈다. 모스크바를 떠나 바이칼로 향하는 기차는 어느새 우랄산맥을 넘어 예카테린부르크와 노보시비리스크를 지난다. 기차를 타고 만 하루가 훨씬 지났으니 당연히 일용할 양식인 햇반과 라면 그리고 보드카에 은근히 취해 지평선 넘어 지평선 끊임없는 지평선의 끝자락에 펼쳐진 자작나무 군락을 보며 군가를 흥얼댄다 “라스츠비탈리 야블리니 끌루쉬 빠쁘일리 뚜마니에 나드리 꼬이. 오 노래야 처녀의 노래야 날아라 저 빛나는 태양을 머나먼 국경의 병사에게 카츄사의 사랑을 전해다오” 2차 세계 대전 당시 소련군이 가장 많이 불렀다는 러시아 군가 카츄사는 우리나라로 따지면 아리랑과 같다. “너와 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랴” 나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따위의 노래를 군가로 알았던 나에게 카츄사의 가사는 충격이다. “머나먼 국경의 병사에게 카츄사의 사랑을 전해다오”이 구절이 어떻게 군가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세태비판은 고사하고 허무조차 금지곡의 명분이 되었던 시절에 그 노래들을 부르며 자랐던 가수에게 러시아 군가 카츄사는 이해하기 참 난감한 노래였다. 전쟁을 기억하는 방식의 차이. 작년에 갔었던 하바로프스크의 전쟁 박물관에는 총 맞아 쓰러진 통신병의 미니어처가 전시되어있고 우크라이나역 광장에는 전장에 나가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 상이 있다. 바이칼의 도시 이르쿠츠크 시청광장에는 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한번도 꺼지지 않았다는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바이칼 호수안의 최대의 섬 알혼에도 전장에 나가는 아들을 안타까이 바라보는 가족이 조각 되어있다. 용산 전쟁기념관이나 일본 야스쿠니 옆의 류슈칸(일본 전쟁 기념관)엔 고대적 부터 사용된 무기가 전시되어 있다. 그것도 아주 살벌하게. 전쟁기념관은 무기전시장이 되어선 안된다. 굳이 전쟁을 기념하려면 “사람을 어떻게 죽였는가 보다 사람이 어떻게 죽었는가”가 기록되어야 한다. 횡단열차 안에서 보드카 병이 바닥을 드러낼 즈음엔 기타를 꺼내어 고 문익환 목사의 시 "비무장 지대“를 다 같이 불렀다. “너희는 백두산 까지 우리는 한라산 까지 철조망 돌돌돌 밀어라 온 누리 비무장 지대로” 기차 안 3박4일중 만취한 어느 날은 이 노래를 다시 부르다가 울컥 눈물이 나온 적도 있다. 평화로 가는 긴 여정에서 부득이 전사가 되어야 했던 사람들. 아무르 강변에 누워있는 김 알렉산드리아. 하바롭스크의 작은 집필실에서 낙동강을 썼던 조명희. 타슈켄트의 고려극장 문지기 홍범도. 노보데비치 수도원(러시아 국립묘지)132번 벽면묘지에 잠든 백추 김규면. 그리고 37년 강제이주와 함께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몸을 의탁했던 17만2천명의조선인들. 내가 타고 있는 이 열차를 통해 목숨이 오고간 씨날줄로 엮여진 거대한 역사 앞에 떨군 한 방울 눈물이 그 무슨 헌사가 되었을까 마는. 다시 시끄러운 나의 세상으로 왔다. 통일부는 여전히 반 통일적 이고 정리해고의 칼날은 언제나 번뜩인다. 제주 강정의 구럼비 바위는 곧 콘크리트로 덮을 셈이다. 시꺼먼 돈을 받은 놈들은 여전히 거리를 활보하는데 사람의 정리를 생각해서 돈을 준 교육감은 보석 신청도 거부당한다. 을사늑약 보다 더한 한미 FTA의 매국 행위는 언론에 의해 애국이 되고 현직 대통령이 저지른 내곡동 땅 투기는 이름처럼 깊숙한 골짜기가 되어 묻어져 있다. 참 희한한 일이다. 시베리아는 별것인 것을 별것 아닌 것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 별것 많은 세상 좌고우면 하지 말고 조용히 나의 길을 가라고 훈계 한다. 그러니 세상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아 지지고 볶아라. 나는 아직 가보지 못한 시베리아 횡단열차 마지막 구간 부산서 원산 거쳐 연해주 가는 꿈꾸면서 잠이나 한잠 잘란다. 이지상 위원은 현재 가수겸 작곡가로 활동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395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