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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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학교 역사문화컨텐츠학과 교수), 이찬수(전 보훈교육연구원장),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장발장은행장)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오항녕 / 인권연대 운영위원   1. 자살이 인간의 난제라서 섣불리 말할 수 없으나, 자살에 이르게 된 삶의 고통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너나없이 같을 것이다. 그런데도 학교 선생님들의 자살이 이어지는 사태를 달리 보는 건 죽음을 차별해서가 아니다. 사회가 다 망가지더라도 마지막 희망은 거기에 있을 거 같은 학교라는 현장에서 죽음이 잇달았기 때문이다. 등교하는 우리의 미래들. 헌데 생명력의 공간이어야 할 학교에 죽음이 드리우고 있다. 1. 한때는 학부모였고 지금도 교육노동자이기에 최근 사태는 내 일이기도 하다. 내 일이면서 모른 체하고 싶은 심리는 소시민적 나태함이나 이기주의이기도 하다. 또 난제를 만나면 고개를 돌리는 인간 마음 한켠의 나약함도 이유일 것이다. 어쨌거나 이는 우리 마음의 분발을 촉구한다. 고개를 돌린다고 사라지지 않은 테니 말이다. 관심과 대안은 우리의 몫이다. 작금의 사태는 인간의 책임으로 환원되지 않는 현 교육 시스템의 오작동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작동 중 하나가 초중등 교육현장이 감당하고 있는 무한책임과, 대학이 손 놓고 있는 무책임의 제도화가 심각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1. 학교 교사들의 죽음(=‘자살같은 사회적 타살’)을 두고 학생인권조례 탓을 하는 일각의 소견도 있었다. 7~8시 등굣길 저 파릇파릇한 젊은이들의 발걸음을 보라. 저들이 ‘꿈을 꿀 권리, 행복할 권리, 차별받지 않을 권리, 표현의 자유, 존중받을 권리, 뛰어놀 권리, 교육복지에 관한 권리, 양심과 종교를 선택할 권리, 부모와 함께 살 권리, 정부의 보호를 받을 권리’를 누리지 못할 이유가 과연 무엇인가? 나아가 저들이 누려야 할 최소한의 권리 또는 그 빈약한 실현이 학교에 드리운 죽음과 도대체 어떻게 연관된다는 말인가. 오히려 학생과 교사의 인권에 대한 경시와 멸시는 모두 교육현장의 타락을 반영한다. 지난 9월 16일 ‘공교육 회복을 위한 집회’ : ‘살기 위해’ 모여서 외칠 수밖에 없다. 선생님들이 행복해야 아이들이 행복하다는 말은 진실이다.   1. 나는 지금 학교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를 초중등 교사에게 부과된 무한책임이라고 진단한다. 무한책임이란 두 가지 방향에서 교차하면서 압박으로 작동한다. 안에서 밖에서, 또 학습이나 생활지도, 그리고 행정 잡무에서. 우선 잡무. 한국교육개발원은 최근 교사들의 행정업무 할애 시간이 지난 10년 새 주당 5.73시간에서 7.23시간으로 28% 늘었다고 발표했다. 이 조사에는 질적 차원은 빠져있다. 실제로 초등 담임교사는 하루평균 2.5시간 이상을 잡무에 쓴다. 또 잡무는 늘 느닷없이 떨어진다. 공문은 보내는 쪽 마음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익숙하게 될 때까지는 또 시간이 걸린다. 50년 전에도 잡무를 줄여야한다는 말이 나왔지만, 오히려 는 셈이다. 한국교총에서도 행정업무에 대해 ‘많다(매우 많다 포함)’라고 응답한 교사가 90.7%라고 답했다. 평교사의 학생교육은 잡무의 일상이라는 토대에서 이루어진다. 문제는 본연의 ‘학생교육’마저 매우 포괄적이고 모호한 정의라서 교사의 의무와 책임 영역이 고무줄 같다는 점이다. 학생과 학부모의 권리는 명확하지만 교사의 경우 포괄적이고 모호해서 법적 보호를 받기 힘들다. 초중등교육법 제14조 제1항에서 교원의 전문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지만, 교육자로서의 품성과 자질 향상을 위한 노력, 윤리의식 확립과 학생지도 및 적성 계발의 의무, 교육의 중립성 등 대부분 의무 사항만 열거돼 있을 뿐이다. 따라서 무한책임을 강요하는 관련법은 하나하나 개정해야 한다. 잡무, 그리고 의무 뿐인 전문성 존중의 허울을 틈타 학부모들의 이기적이고 교활한 폭력이 끼어든다. 특히 ‘법대로’라는 이데올로기가 교육현장에도 덫이 되었다. 설명과 이해가 교육의 기초건만, 이제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도 ‘법대로’하게 된 것이다. 다 알다시피 ‘법대로’ 사람을 괴롭히기가 얼마나 쉬운가. 특히 서이초, 군산초 사례에서 보듯이 학부모의 교사에 대한 폭력은 근무시간 밖까지 뛰어들어 교사에게 무한책임을 강요하는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   1. 똑같은 교육현장이면서 무한책임이 아니라 무책임의 공간이 있다. 대학이다. 그 핵심은 학생 선발에서의 무책임이다. 한국의 대학은 자신들의 교육철학에 입각하여 학생들을 뽑지 않는다. 일부 예외는 있지만 대체로 매년 11월에 치는 수학능력시험의 기준에 따라, 또는 고등학교 학적부의 기록에 따라 이루어지는 수시전형을 통해 학생들을 선발할 뿐이다. 4, 50년 전 본고사가 있던 시절, 대학들은 국어, 수학, 영어의 시험문제라도 출제하고, 채점해서 학생들을 뽑았다. 그게 뭐 대단하냐고 할지 모르지만, 각 대학의 교수진에 따라 나름의 특색이 있었다. 한계는 뚜렷했지만 그래도 ‘선발의 책임’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떤 대학 입학식 모습. 희망찬 출발은 축하할 일이다. 다만, 대학구성원들은 돌아보아야 한다. 저 청년들을 정말 자신들이 선발했는가?]   지금은 대학 주도의 선발 노력을 안 해본 줄 아느냐, 입학사정관제, 학생부종합전형은 대학 자율성을 주려는 정책이다, 라고 반론할 수도 있겠다. 맞다. 그런 점이 있다. 하지만 결과는? 여전히 학생부의 스펙(기계에 쓰던 말이 어느 틈에 사람에게 쓰게 된 용어!), 수능 점수, 토익/토플/텝스 성적 등 ‘대학 외부’에서 제시하는 학생의 능력 증명서에 의존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교육부의 수능, 고등학교 학적부, 학원 컨설팅, 외국어 시험기관 성적표, 무슨 협회 증서 등등 남이 주는 기준을 가지고 학생을 뽑고 있는 것이다. 학생 선발에서 보여주는 대학의 무책임은 자신들의 대학이 어떤 사람을 뽑아 장차 이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 사람을 키우겠다는 비전이 없다는 데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입학 후 대학은 어떤 교육을 했을까? 대개 학생들이 알아서 성장한 것이다. 그 학생들이 어느 대학엘 갔던들 그만한 성취를 이루지 못했을까? 나를 포함하여 대학구성원들은 저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돌아볼 일이다. 현재 상태라면 한국의 대학이 하나하나 무너질 것이라는 예감을 갖고 있다. 현상적으로는 학생수가 줄기 때문이라지만, 지역 소멸의 강도를 고려할 때 심각하긴 해도 대학의 관점에서 볼 때 그건 정말 겉으로 보이는 현상일 뿐이다. 그전에 학생을 스스로 뽑지 않으면서, 뽑지 못하면서 언제까지 교육의 주체인 척할 수 있을까? 정말 두려운 것은 대학구성원들의 무책임이 여기에 그치지 않는 것 같다는 점이다. 나와 같이 공부할 사람조차 내 맘대로 뽑지 못하는데 자부심과 책임감이 생길 리 만무할 것이며, 여타 사회 영역에 대한 대학과 지식인의 책무를 고민할 리 없다. 대안? 우리 대학(학부, 학과)은 앞으로 학생을 이러이러한 방식으로 뽑겠다는 ‘불안하겠지만 책임감 있는 선발 방법과 비전’을 만드는 것이다. 모든 위기는 담장 안에서 시작하고 담장 안에서 먼저 답을 찾아야 한다.   1. 조금 길게는 우리가 갇혀 있는 6, 3, 3, 4학년 제도 자체를 물어야 한다.(나라마다 조금씩 변형은 있지만, 기본 포맷은 다르지 않다.) 꽤 오래 전부터 6, 3, 3, 4학년의 기원과 성립에 대해 주변에 묻고 찾아보았지만 신통한 답변을 얻지 못했다. 나는 외람되게도 바로 이 제도의 타당성을 의심해야 할 때가 왔다고, 아니 지났다고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어차피 제도 역시 역사의 산물일 뿐이다. 수명이 다하면 사라지는 게 섭리이다. 행복할 수 있는 배움, 나를 뿌듯하게 여기는 교육의 길을 찾아보는 것, 우리의 권리일 것이다.   오항녕 위원은 현재 전주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23-09-26 | hrights | 조회: 442 | 추천: 5
이찬수 / 인권연대 운영위원 언어는 의사전달 수단이다. 한편에서는 의사를 전달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의사 밖의 세계를 은폐시킨다. 하나에 집중하면 다른 것들은 가려진다. 하나에 더 집중하려 과장을 하기도 한다. 긍정적으로 전달하려 ‘과대평가’를 하기도 하고, 부정적으로 전달하려 ‘과소평가’를 하기도 한다. 적절히 균형적으로 전달해야 옳겠지만, 그런 ‘적절함’은 그다지 신선하지 않고 파급력도 떨어진다고 여긴다. 그래서 과대 혹은 과소 포장을 하는 경우가 많다. 실상은 과장된 표현만큼은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채고서도, 상대방도 과대 포장된 언어를 이어받으며 과장법을 구사하곤 한다. 과장적 전달이 계속되고 중첩되면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개념과 관점이 형성된다. 그 개념과 관점이 기존의 대상을 재형성 혹은 재구성한다. 종교적 개조들이 신화화되는 것도 비슷한 구조를 한다. 그렇게 관점이 대상을 만드는 경향이 생긴다. 문제는 그 과정에 실상이 왜곡된다는 데 있다. 실상은 과장되기 이전과 ‘불연속적 연속’ 혹은 ‘연속적 불연속’의 관계에 놓인다. 어느 정도 전달된다는 점에서는 연속적이지만, 과장이 중첩되었다는 점에서는 불연속적이다. 연속성보다 불연속성이 커지면서 갈등도 커진다. 출처 – 서울경제 과장된 표현들 속에서 사실관계를 파악하고자 할 때 문제가 생긴다. 가령 남과 북의 사람이 한 자리에서 만나 정치적 이념 없이 개인적으로 그냥 사람 사는 얘기를 하면 잘 통한다. 옆 동네에 사는 사람들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북한에 대한 과도한 관점이 실상처럼 되어버린 상황에서는 개인 간 편안하고 솔직한 발언들이 뜻밖의 파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북쪽 사람들 괜찮더라~’, ‘모두 공평하게 사는 공산주의라면 좋지~’라는 식의 편안한 발언은 국가보안법과 같은 이현령비현령의 법을 자극하거나, 그것이 언론을 타고 확대되는 정도에 따라 대단한 위법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상대에 대한 지원이 이적행위나 자신의 이익을 위한 뇌물로 둔갑하기도 한다. 개인 간에는 ‘점선’(소통)이었던 경계가 집단과 국가로 가면 ‘실선’(대립)으로 바뀌면서 극단적 대립과 폭력적 언어가 현실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출처 – 중앙신문 국회의 경우도 비슷하다. ‘국민의힘’ 의원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개인적으로 만나면 서로 인사도 하고 대화나 교제도 한다. 그러나 한 걸음 물러나 당원의 신분으로 말할 때는 그런 원수들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막말을 해댄다. 특히 카메라가 앞에 있으면 유권자에게 더 돋보일만한 과장된 발언을 하곤 한다. 같은 당내 개별 의원들의 의견은 다양할 수 있지만, 당 전체의 입장에서 말할 때는 당의 경계 안에 있는 목소리들이 통일되어 있다는 듯이 말한다. 자신의 말이 기존의 진영의 상황을 대변하지 못하면, 당 대표나 유권자로부터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기존 진영과는 차별적인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자신의 목소리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기존 진영을 비하하기도 한다. 유권자의 표를 얻으려 가능하면 ‘쎈’ 소리를 한다. 이때 어느 한 진영에서 더 과장하며 더 쎈 ‘깃발’을 들면 다른 이들은 그 깃발의 표현을 옹호하는 목소리를 낸다. 그 ‘뾰족한’ 목소리를 중심으로 서로 뭉친다. 느닷없이 홍범도 장군의 소련 공산당 입당 이력을 비판하면서 육사 교정에는 안 어울리는 인물이라는 이벤트성 주장을 펼친다. 속내는 ‘공산’이라는 언어 지우기, 반공적 정체성을 이어온 집단의 행적을 정당화하기 위해서이고, 나아가 홍범도의 유해 봉환을 추진하는 등 이른바 사회주의 진영과도 일부 소통하려 했던 전 정부 지우기 등등에 있다. 여기에 여타 반공주의 인사들이 목소리를 보태면서 느닷없이 반공을 국시처럼 내세우며 편가르기를 일상화한다. 전 세계에 실질적 공산주의라는 것이 있는지 의심스러운데도 그 ‘뾰족한’ 목소리로 실상을 왜곡한다. 그럴수록 사회는 왜곡에 휘둘리며 더 양극화한다. 정치적 의도와 속내는 가려지고, 다양한 목소리는커녕, 폭력적 언어들이 부상하며 대립한다. 충성도 높은 개인은 집단의 목소리를 자기화하며, 더 공격적으로 갈고 닦는데 기여한다. 물론 상대방도 그에 대응해 더 뾰족하게 비판한다. 그렇게 양 진영은 더 대립하고, 더 적대시하며 진영논리도 더 강화된다. 무조건 보수정당 지지층과 무조건 진보정당 지지층으로 나뉘는 것도 개인의 정치적 표현을 그 뾰족한 담론 중심으로 선택하기 때문이다. 경쟁적 발언들이 고조되면서 다양성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구조 자체는 이른바 보수 진영에서나 진보 진영에서나 비슷하다. 문제는 그 뾰족함의 출처, 지향,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즉 자신의 이익에 있는지, 아니면 가능한 생명 전체를 살리는 데 있는지에 있다. 출처 - 노컷뉴스 한반도의 고질적인 대립 논리, 특히 반공주의를 둘러싼 뾰족한 목소리, 특히 파괴적인 언사의 출처를 찾아 올라가면 6.25전쟁을 만난다. 다시 외세에 의한 분단을 만나고, 분단의 책임자인 미국, 소련을 만난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식민지배자 일본과 만난다. 한국의 반공주의는 일본의 반공주의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러시아와 전쟁한 일본이 러시아에서 발원한 공산주의를 적대시하자, 일본의 식민지배를 당연시하던 일부 한국인들도 덩달아 공산주의 혹은 소련을 싫어했다. 일본의 지배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며 타협하거나 당연시하던 이들은 중국도 배척했다. 공산당이 장악했다는 이유에서다. 일제하에서도 특별한 불편을 경험하지 않았거나 도리어 일본이라는 현실을 인정하고 이익까지 챙겼던 이들과 그 후예는 소련의 공산주의에 영향받은 김일성을 일본보다 더 싫어한다. 일본의 폭력적 역사는 도외시하거나 슬쩍 감추려 한다. 대신 일본의 이른 근대화를 칭송하며 한국에 끼친 긍정성을 주로 부각시키려 한다. 일본이 더 큰 현실이었고 내심 그에 타협해온 역사를 정당화해야겠기 때문이다. 오늘날 공산주의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데도, 보수 한국인의 관념 속에서는 여전히 강력한 실상이다. 미군 덕에 공산당의 남침을 막을 수 있었다며 미국을 치켜세우면서도, 다른 참전국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전쟁에서 한국 편에 섰던 16개 참전국을 알지도 못하고 두루 좋아하지도 않는다. 의료 지원을 한 국가를 포함하면 25개국이나 되는 나라의 이름은 더욱이나 모른다. 그저 미국뿐이었던 듯 여긴다. 영국과 프랑스 정도는 알까? 필리핀,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남아공 등도 한국을 도와 전투병을 보냈다. 그런데 한국인이 필리핀이나 에티오피아에 고마워했던 적이 있던가. 한국보다 열악하다는 이유로 도리어 무시해오지 않았던가. 이른바 보수는 현실이라는 이유로 일본이나 미국이라는 권력을 긍정하기만 했던 것은 아닌가. 마찬가지로 북한을 거부하면서도 전쟁 중에 북한을 도와 참전한 나라를 전부 싫어하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당시 중국이 대규모로 참전했고, 소련도 북한에 물자를 지원했다.(비공식적으로는 전투병도 파병했다.) 독일(동독), 헝가리,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등이 북한에 의료 지원을 했고, 몽골, 인도 등이 물자 지원을 했다. 그런데 한국의 반공주의자는 오로지 북한과 중국 그리고 소련의 후예인 러시아만 적대시해왔다. 다른 국가들은 자유주의로 전향했다는 것은 온전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 현실을 관리하며 당면한 힘에만 관심을 두어왔기 때문이다. 몽골, 인도 등에 대한 정치적 관심을 두어본 적 자체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시쳇말로 ‘한 놈만 팬다’고 하듯이, 특정국을 적대시하며 정체성을 견지해온 수십 년의 습관이 계속 작동해왔기 때문이다. 이른바 ‘보수’는 현실을 유지하며 관리하는 데 공을 들인다. 주로 현재를 보며 표층을 관리한다. 역사를 거시적으로 보기보다는 당면한 현실을 관리해 자신의 이익으로 전환시키는 데 관심을 둔다. 그런데 보호하고 지킨다는, 이른바 ‘보(保)·수(守)’의 결과는 어땠나. 큰 힘에 편승하는 것이 우리를 지키는 것이라던 근시안적 판단들이 차곡차곡 쌓이며 결국 국권까지 내어주지 않았던가. 일본이 조선의 외교권을 1910년에 단박에 빼앗은 것이 아니다. 짧게만 거슬러 올라가도 ‘강화도 조약’(1876년) 이후부터 일본은 조선에 의도적으로 진출해왔고, 많은 조선인들이 이제는 일본의 힘이 우리의 현실이라며 끄덕이게 된 누적의 결과다. 출처 – 박종현 네이버블로그 미래를 보며 심층을 구현해야 한다. 이것이 이른바 ‘진보’의 길이라면, 보수와 진보는 분명히 같이 가야 할 가치들이다. 역사의 심층과 미래, 그리고 인류와 생명 전체를 두루 상상하지 않는 현재주의, 당면한 힘에의 의존은 지구상의 더 큰 힘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친일’과 ‘친미’라는 편향을 넘어, ‘한미일’ 대 ‘북중러’의 대립을 넘어, 남북, 한중, 한러 등으로 다변화해가야 한다. 누구나 그렇지만, 무릇 정치의 길에 나선 이라면 모두의 생명을 볼 수 있어야 한다. 한국 최초의 건국 이념은 ‘홍익인간’이다. 생명 전체를 ‘널리(弘)·이롭게(益)’ 하는 자세가 긴요하다. 그것이 진보라면, 우리는 홍익적 진보의 길에 나서야 한다. 언제까지 고작 반공만 내세우고 겨우 친일에 머물 것인가. 이찬수 위원은 현재 레페스포럼 대표로 재직 중입니다.
2023-09-19 | hrights | 조회: 665 | 추천: 9
임아연 / 인권연대 운영위원   #1. 베를린 몇 해 전 독일에 갔을 때 일이다. 공항이 있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베를린으로 가는 고속열차를 타고 가다 베를린 중앙역에 거의 다 왔을 때 창밖 어느 교회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꽤 큰 교회였는데, 높이 솟아 있어야 할 교회 첨탑이 다 부서진 채로 방치돼 있던 것이다. 출처 - 호텔스컴바인 나중에 알고 보니 1890년대에 지어진 이 교회의 이름은 카이저 빌헬름 기념교회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을 맞아 파괴됐다고 한다. 교회는 폭격 맞은 그 상태 그대로 80년 동안 보존돼왔으며, 교회 내부는 기념관으로 사용 중이다. (예배는 나중에 새로 지은 신관에서 이뤄짐) 교회는 독일 최대의 번화가이자 쇼핑거리인 쿠담거리 시작점에 위치해 있다. 베를린 시민 뿐만 아니라 베를린에 여행 온 사람들이 꼭 한 번쯤 들르는 곳이다. 명품을 비롯해 각종 브랜드숍과 식당, 호텔 등이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인 독일이 이런 곳에 부끄러운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남겨 놓은 게 무척 놀라웠다. 특히 이 교회를 복원할지, 철거할지, 아니면 이대로 보존할지 지역주민들이 오랜 시간 동안 토론하고 결정했다는 점도 의미 있게 다가왔다. 주민들은 자신들의 결정과 같이, 그토록 참혹한 전쟁이 다시는 있어선 안된다는 것을 도심 한복판에 놓인 이 교회를 보면서 매일 생각할 것이다. #.2 반제 베를린 근교에 반제라는 큰 호수가 있다. 바다가 거의 없는 독일에서 베를린 사람들이 해수욕을 하거나 요트 등 수상스포츠를 즐기기 위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출처 - 이투데이 이 호수 근처에 대리석으로 만든 저택이 있는데, 1942년 이곳에서 독일 나치 차관급 인사 15명이 모여 회담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 수장급 인사의 지시를 받는 제국보안국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주재한 이 회의의 주요 안건은 ‘유대인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였다. 이들이 합의한 최종 해결책은 독일 점령지의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 등 폴란드로 실어 와서 모조리 말살하는 것이었다. 홀로코스트를 정권 차원에서 공식화한 회의다. 회의록 작성자는 그 유명한 아돌프 아이히만이다. 그가 작성한 의사록에 따르면 “유대인들을 동쪽으로 ‘이송’할 것이며 건설 공사에 투입하여 죽을 때까지 강제노동을 시키거나 ‘적절히 처리’하여 새로운 유대인의 번식을 막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곳에서 이뤄진 회동은 훗날 미국 조사단이 독일 외무부에서 회의록 사본을 발견하면서 세상에 드러났다. 나치가 전쟁 중 저지른 집단학살범죄의 가장 분명한 증거로 남았다. 반제 호숫가 근처의 아름다운 이 별장은 현재 당시 회담에 참여했던 15명의 나치 수뇌부와, 이들의 잔악무도한 논의 내용을 전시하는 홀로코스트 추모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3 프라이부르크 이번에 다시 방문한 독일에서 ‘슈톨퍼스타인’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검은숲(흑림)과 친환경·에너지자립으로 유명한 프라이부르크 구도심 바닥에는 박석이 깔려 있다. 그 길에 이따금씩 1cm 정도 더 튀어나온 동판으로 만든 ‘걸림돌’이 있는데, 이게 바로 슈톨퍼스타인이다. 여기에는 나치에 의해 희생된 이들의 이름과 지역, 생년월일, 그리고 어느 수용소로 끌려가 언제 사망했는지 등의 정보가 새겨져 있다. 출처 - 브런치 길을 가던 사람들이 갑자기 튀어나온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거나 불편을 느끼면서 땅을 살피게 되고, 그럴 때 이 슈톨퍼스타인을 쳐다보게 되는 것이다. 독일인들이 일상에서 과거를 기억하는 방법이다. 조상들이 벌였던 치욕스러운 역사를 그렇게 매일 상기시키고,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다시는 그런 일을 벌이지 말아야 한다고 끊임없이 되새긴다. 보행에 있어서 불편은 물론 역사적 불편까지도, 일상에 불편이 스며 있고, 독일인들은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4 그리고 대한민국 이번에 독일에 있는 동안 접한 한국 뉴스 대부분이 홍범도 장군의 흉상 철거 문제였다. 독일인들이 어떻게 역사를 인식하고 있는지 독일 곳곳에서 느끼면서, 대한민국의 모습이 자꾸만 겹쳤다. 출처 - 이투데이 나는 독일이 가진 독일의 저력이 바로 이러한 역사 인식에 있다고 생각했다. 과거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일상적으로 계속 상기하면서 기억하지 않으면 똑같은 짓을 반복할 뿐이다. 일제강점기도, 6.25전쟁도, 쿠데타와 독재도, 그리고 세월호와 이태원참사까지…. 부끄러운 역사의 굴레를 반복하며 진일보하지 못한다면 지금 세계가 주목하는 ‘K콘텐츠’도 모래 위에 쌓은 성처럼, 신기루처럼 사라질 거다. 어떤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든든하게 설 수 있는 기반은 결국 ‘뿌리’에 있다. 보존할 것인가, 잊고 묻고 덮어버릴 것인가. 지금의 선택에 미래가 있다. 임아연 위원은 현재 당진시대 편집국 부국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2023-09-13 | hrights | 조회: 493 | 추천: 14
<주석의 소리 2023> -삼천리 금수강산 만세 여기는 환상(幻想)의 상해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가 보내는 주석(主席)의 소리입니다. 주석 각하의 담화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오인영 / 인권연대 운영위원 출처 - 서울신문 후진국에서 가장 큰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 정부입니다. 정부에 대해서는 우리는 헌법에 씌어져 있는 것에 좇아 권한을 행사하라고 말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헌법에, 라고, 말할 때, 한국 사람이며 모두 어떤 감회를 느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헌법에 대해서 그 힘을 번번이 의심할 수밖에 없는 괴롭고 환상적인 경험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밖으로 국제 사회에서 민족 국가의 독립을 유지하는 것이 최대의 의무입니다. 그 독립을 유지하고 보다 나은 국제적 지위를 얻기 위하여 국민을 조직하고 지도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반세기 전에 가장 악질의 정부에 의하여 민족 국가의 발전에 있어서 치명적으로 중요했던 시절을 적 치하에서 신음해야 하는 처지에 굴러떨어졌었습니다. 자기 국민을 적에게 파는 정부, 그것이 최악의 정부입니다. 그것은 최악의 전제 정치보다도 나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개화기에 있어서 정부가 취한 이 치매적(痴呆的)인 반민족 행위에 대하여 좀더 주의와 분석이 여러 사람에 의해서 가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지적하고 싶은 한 가지 문제점은 저 반역자들의 의심할 수 없는 도덕적 저열성과 악의는 논외로 치고, 그들이 언중유골 식으로 풍기고 있는 어떤 변명에 대해서입니다. 즉, 그들은 마치 주권의 희생하에서 개화를 하는 것이 불가피했던 것 같은 태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객관적으로 허무맹랑한 것이었습니다. 객관적이란, 일본제국주의는 우리를 개화시키기 위하여 그토록 안달을 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수탈하기 위하여 침략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또 주관적으로는 반역자들의 변명은 근거가 없습니다. 정권의 담당자로서 주관적 의도를 정당화하는 길은 국민의 뜻을 얼마나 반영했는가 하는 척도 말고는 아무 정당성도 없습니다. 우리 국민은 그들의 반역을 한 번도 지지한 적이 없습니다. 자명한 사실에 대해서 이 같은 말을 하는 것은 사회변혁이 급격하게 진행되는 시기에 있어서는 그 사회변혁의 진보성이라는 것과 민족 국가의 주권이라는 것이 마치 서로 양보할 수 있는 성질이거나 한 듯이 착각하고, 그 착각을 이기심의 위장으로 삼는 부류가 흔히 나타난다는 경험을 상기시키기 위해섭니다. (중략) 정부는 그 권력을 헌법에 규정한 대로 사용하여야 합니다.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옵니다. 근대 유럽 국민이 막강한 인습과 권력의 힘에 항거하여 정치 권력을 손에 쥔 역사적 경험은 아마 우리들의 정서적 상상력을 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도 인간인 이상, 그와 완전히 동일한 역사적 세부까지를 추체험하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도, 그와 동일한 형태의 생명의 경험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장 가까운 것으로만 보더라도 3·1운동과 4·19에서 나타난 국민의 주권 의사입니다. 정부는 자신이 행사하고 있는 권력이 국민의 주권 행사의 표현인 헌법에서 나온 것임을 매일같이 명심하여야 합니다. 권력의 행사에 있어서 국민의 주도권을 우리는 민주주의라고 부르고 있으며, 이것은 오늘의 세계에서 민족 국가가 대외적으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최대의 무기입니다. 스스로를 민주주의의 공인된 원리에 구속시키고 있는 정부가 가장 강한 정부이며, 그 구속을 벗어나 있는 정부가 가장 약한 정부입니다. 공산주의에 대해 가장 강한 정부는 민주적 정부이며, 가장 저항력이 약한 정부는 반민주적 정부입니다. 우리들의 상황은 어떤 정권의 민주성의 정도가 단지 내정에서의 민주주의의 기복을 나타낸다는 태평한 세월이 아닙니다. 그것은 밖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방위력의 궁극적인 기초입니다. 민주주의는 민족 국가의 국방력의 안받침입니다. 이 안받침을 흔드는 자는 국방력을 흔드는 자이며 국방력을 흔드는 자는 반역자입니다. 정부 권력의 민주적 행사 여부의 표준은 정부가 자기 권력을 그 수임자인 국민에게 항상 개방하는 것, 권력의 원천에 의한 계속적인 추인의 기회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도 우리는 쓰라린 경험과 앞으로도 계속될 난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정부는 국민에 의한 비판의 온갖 기회를 스스로 개방하여야 하며, 결과적으로 그것이 그 정권 자체의 득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권력 행사에 대한 국민 참여의 최대 기회가 선거입니다. 민주주의란 선거이다, 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자유로운 선거의 보장, 논리적으로는 정부의 모든 기능은 이 한마디에 그칩니다. 현재 정부가 수행하는 모든 행정 기능은 정부 외의 사회 집단에 이양할 수도 있지만, 선거의 관리만은 사영화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민주 국가의 가장 중대한 공적 행위입니다. 사회의 모든 성원이 자유로운 의사 표시를 할 수 있는 공정한 관리 기관이 정부이며, 우리는 아직도 이 점에서 찬양할 만한 도덕적 자제력을 가진 정부를 가진 적이 없기 때문에, 그리고 그 여부가 민족 국가의 독립과 직결돼 있기 때문에 이것이 우리의 버릴 수 없는 꿈이며 양보할 수 없는 요구라고 밝히고 싶습니다. 출처 - KBS뉴스 *덧붙이는 말: <주석의 소리 2023>은 최인훈 선생의 소설 <주석의 소리>의 일부분을 옮긴 것입니다. 최인훈 선생은 <주석의 소리>(1968년 발표)에서 한국의 역사에 실존했다가 사라져버린 상해임시정부의 주석이라는 역사적 타자를 불러들여 한국의 민주주의와 건강한 발전을 이룩하기 위한 방책을 설파합니다. 그리고 그 방책의 주체를 정부, 기업인, 지식인, 국민으로 구분하고, 저마다 수행해야 할 바람직한 행위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이 글은 그 중에서 정부에 대해 논한 부분을 옮긴 것으로(단 강조는 인용자가 한 것인데, 그게 <주석의 소리>의 논지를 훼손했다면 책임을 질 것이고),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이 친일 · 사대 · 매판으로 치닫는 윤석열 정부의 작태가 얼마나 역사 퇴행적이고, 시대착오적인지를 새삼 일깨워주는 비판적이면서도 상식적인 준거가 되리라는 기대에서 여기에 소개합니다.     오인영 위원은 현재 고려대 역사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23-09-05 | hrights | 조회: 473 | 추천: 6
강국진 / 인권연대 운영위원 검토는 안하지만 필요하면 검토할 것이고, 필요한지 안한지 검토할 건데 아직 결정된 게 없으니까 가정해서 묻지 말아달라. 출처 - 저자 28일 열렸던 국방부 브리핑을 한 마디로 요약해봤다. 이게 말이냐 떡이냐 싶겠지만 그래도 별 수 없다. 발단은 홍범도였다. 육군사관학교가 느닷없이 학교에 있는 홍범도 흉상을 치우겠다고 했다. 소련공산당 관련 활동을 했으니 자유민주주의 가치에 맞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 곧바로 문제제기가 나왔다. 국방부 앞에도 홍범도 흉상이 있는데 그것도 치울거냐. 국방부 브리핑에서 질문이 나왔다. 국방부 대변인은 “국방부가 현재 검토하고 있지만 결정된 바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부터 공산당 입당 또는 그와 관련된 활동이 지적되고 있어서 검토하는 것으로 이해해 달라”고 덧붙였다. 알기 쉽게 번역해보면 “아직 결정은 안됐지만 검토하고 있다. 그리고 답은 정해져 있다” 정도 되겠다. 출처 - 한겨레 국방부 행동이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는지는 곧바로 이어진 다음 질문에서 곧 드러난다. 현재 해군은 1800t급 잠수함 ‘홍범도함’을 운용하고 있다. 홍범도 활동이 문제가 돼 동상을 치워야 한다면 홍범도 이름을 딴 잠수함도 이름을 바꿔야 하는 것인가. 국방부 대변인은 “필요하면 검토할 수 있다”고 답했다. 곧바로 해군 공보팀장이 “해군에선 그 문제를 검토하고 있지 않다”며 선을 그으면서 국방부 대변인을 뻘쭘하게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함명을 변경하는 건 전세계에서 선례가 없기 때문이다. 브리핑이 끝나고 해군 관계자에게 따로 물어보니 “잠수함 이름은 공식절차를 거쳐 오랜 논의 끝에 정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홍범도 논란은 홍범도함을 거쳐 남조선노동당(남로당) 전력이 있는 전직 대통령으로 이어졌다. ‘남로당 핵심관계자였고, 그런 전력으로 사형 선고까지 받은 적이 있던 전직 대통령 박정희에 대한 입장’을 묻자 국방부 대변인은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답했다. 내친김에 해군이 보유한 3000t급 잠수함 ‘신채호함’은 어떻게 할거냐는 질문도 나왔다. 단재 신채호는 아나키스트 활동을 하다 옥사했다. 아나키스트라니, 자유주의에 맞지 않는 분 아닌가. 역시나 ‘검토하고 있지 않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국방부는 왜 이렇게 일관성이 없는 것일까. 홍범도는 현재 국립대전현충원에 묻혀 있다. 독립운동가이자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영웅이라는 걸 모르는 한국사람은 없을 것이다. 홍범도는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는데 현재까지 대통령장을 받은 사람은 20명 뿐이다. 그게 1962년이니 박정희 정부 당시다. 김대중 정부 당시인 1998년 10월에는 국가보훈처(현 국가보훈부)가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박근혜 정부 때인 2016년에는 신형 잠수함을 홍범도함으로 명명했다. 2021년 문재인 정부는 홍범도 유해를 국내로 봉환했고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했다. 그랬던 홍범도를 이제 와서 ‘전력에 논란이 있다’며 동상을 치워버리겠다고 하니 모두가 당황스러워한다. 출처 - 연합뉴스 사실 어느 정도는 예견했던 일이긴 하다. 대통령 윤석열이 목놓아 자유를 외치며 공산적폐주의인지 공산전체주의인지 사전에도 나오지 않고 개념조차 없는 신기한 말을 했을 때부터 뭔가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설마 그게 홍범도일 줄은 몰랐다. 본인 스스로 친일파라고 인정했던 백선엽은 동상을 세워주고 친일파 아니라고 대신 우기더니,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홍범도는 ‘색깔이 의심스럽다’며 딱지 붙이느라 여념이 없다. 경제는 절딴나고 외교는 살얼음인데 어찌 그리 한가할 수 있는지 두려울 정도다. 우리는 흔히 과거 인물들의 행적과 사고방식, 역사적 사건을 지금 잣대로 손쉽게 재단해버리곤 한다. 물론 무조건 나쁘게 볼 건 아니다. 그때는 그랬지 하는 식으로만 뭉개는 건 역사에서 배울 태도는 아닐 것 같다. 하지만 당대의 맥락을 무시한 채 지금 잣대만 들이대는 건 역사왜곡과 갈등에 빠지는 길이 아닐까 싶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당대의 맥락과 지금의 잣대 사이에서 긴장감을 놓지 않고 균형을 찾아가는 끊임없는 성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 자세라면 홍범도의 ‘논란있는 행적’이 갖는 의미를 좀 더 냉정하고 통찰력있게 살필 수 있지 않을까. 이는 보훈부 장관 박민식이 앞장서고 정부여당이 지원사격하느라 여념이 없는 정율성 역사공원 문제에서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출처 - 한겨레 용산 대통령실에서 일하는 어떤 공무원이 용산 대통령실을 ‘용궁’으로 지칭하는 걸 듣고 한참 웃었던 적이 있다. 요즘 용궁은 한참 색칠놀이에 재미를 붙인 것 같다. 하지만 잊지 말자. 색칠놀이는 두세살 아이들이 할 때나 귀엽고 예뻐 보이는 법이다. 하다못해 일본은 아베같은 사람조차도 이전 정부에서 공식발표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정과 사과를 담았던 ‘고노 담화’를 부정하지 않고 유지했다. 대한민국은 어쩌다 5년에 한번씩 ‘건국’을 하며 새 나라의 어린이로 새로 태어나는 나라가 돼 버렸다. 그런 정신으로 무장한 분들이 이끄는 용궁은 오늘도 색칠놀이에 한창이다. 물론 애초에 기대도 없었으니 실망할 것도 없긴 하지만 그래도 딱 한가지는 부탁하고 싶다. 색칠놀이를 하더라도 빨간색 하나만 하진 말아줬으면 좋겠다. 빨간색 범벅 색칠한 종이는 정신 사납다.   강국진 위원은 현재 서울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23-08-29 | hrights | 조회: 555 | 추천: 11
김희교 / 인권연대 운영위원 80만원. A씨가 장발장은행에서 빌려 간 돈이다. 장발장은행은 벌금을 내지 못해 실형을 살아야 하는 처지에 놓인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는 곳이다. 대개 어디에서도 돈을 빌릴 수 없는 처지의 분들이 손을 내민다. A씨는 1984년생이다. 아직 젊은 나이다. 최근 그가 명을 달리했다. 왜 그리 짧은 생을 마감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의 죽음이 장발장은행에서 돈을 빌려야 하는 그의 처지와 무관하지는 않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내가 A씨에 대해 알게 된 건 A씨의 여동생 때문이었다. A씨가 명을 달리하자 그의 여동생이 장발장은행에 연락을 했다. 오빠의 부채를 갚아야 한다며 계좌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인권연대 운영위원의 카톡에 올라 온 이 짧은 사연을 본 날 하루는 나에게 참 길었다. 종일 심사가 복잡했다. 슬프기도 했고, 기쁘기도 했다. 부끄럽기도 했고, 뿌듯하기도 했다. 출처 - KBS뉴스 부끄럽게도 인권연대 운영위원을 맡고도 나는 장발장은행에 돈을 빌리는 사람들의 얼굴을 한 번도 떠 올려본 적이 없다. 시민으로서 장발장은행에 대한 막연한 애정이야 홍세화선생이 은행을 언급하기 시작할 때부터 상당했다. 교수로서도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얼굴 없는 돈의 ‘악마의 맷돌’ 같은 속성 비판하며 장발장은행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럴 자격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인권연대 운영위원을 맡아달라는 오창익 사무국장의 전화에 망설임 없이 덜컥 수락한 이유 중에도 인권연대가 장발장은행을 운영하고 있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운영위원을 맡은 지 한 달이 훌쩍 넘었다. 운영위원회가 한 번 있었다. 운영위원으로서 장발장은행의 심사 결과를 보고 받았다. 그때도 나는 그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지 않았다. 그저 그들을 숫자로만 취급했다. 운영위원으로서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대출 받을 수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 심사를 통과해 대출을 받은 사람의 얼굴도, 그 돈조차 대출받지 못한, 그 보다 몇 배나 더 많은 사람의 얼굴도 떠 올려본 적이 없다. A씨 여동생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가장 먼저 든 느낌은 검은 비닐봉지 안에 있는 산 낙지를 잡은 듯한 충격이었다. 내가 숫자로 다루고 있었던 그들도 나와 조금도 다름없이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살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았다. 산 낙지를 만질 때처럼 그저 숫자로 나열되어 있던 대출자들의 얼굴과 그들 삶의 고뇌가 갑자기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모두 A씨 여동생의 오빠이자 누군가의 형으로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충격 다음에 온 감정은 부끄러움이었다. 내가 죽으면 내 가족은 저럴 수 있을까. 아니 내 가족이 죽으면 나는 저럴 수 있을까. 솔직히 나는 확신하지 못하겠다. 나는 틀림없이 심중팔구 현행법을 들먹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갚지 않아도 되는 돈이라고 스스럼없이 숫자로 정리했거나, 내가 더 좋은 데 쓰자고 자위했을 것이다. 심지어 국가가 해야 할 일이라고 거품만 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 A씨 여동생처럼 아름답지 못하다. 참 아름다웠다. A씨가 장발장은행에 빌려야 될 처지였다면 모르긴 해도 동생에게 이렇게 저렇게 많은 폐를 끼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 동생은 오빠의 죽음조차 욕되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자신이 갚지 않아도 될 돈까지 챙기고 있었다. 아니 이런 생각조차 아름답지 못한 내가 가진 편견일 수 있다. 동생이 이렇게 선하고 오빠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걸 보면 오빠도 동생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을지 모른다. 오빠가 장발장은행에 돈을 빌릴 정도라는 사실을 몰랐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한국사회의 구조를 볼 때 동생도 그리 넉넉한 살림살이를 꾸리고 있을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여전히 한국사회는 가난을 죄로 취급하지만 가난해도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들이 장발장은행에까지 손을 빌릴 정도에 이른 것은 결국 그들의 문제가 우리의 문제이다. 80만원은 그녀에게도 꽤 큰돈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돈 뒤에 숨어 있는 또 다른 얼굴을 보고 그 얼굴을 외면할 수 없어 전화를 한 것이다. 그녀는 나는 보지 못한 80만원이라는 돈 뒤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본 것이다. 돈에도 얼굴이 있다는 사실은 오래 전에도 경험한 적이 있다. 금강산관광이 가능했던 시절이다. 금강산관광이 개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이 일하던 계간지 편집위원들이 의기투합하여 금강산 관광을 나선 적이 있다. 도착하고 하루가 지난 저녁이었다. 내 침대보가 헝클어져 바로잡으려는데 침대사이에서 노란 봉투 하나가 떨어져 나왔다. 열어보니 100불짜리 달러 몇 장과 20불짜리 몇 장, 그리고 10불짜리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이산가족 상봉 후 헤어지는 모습> “헐 정신 빠진 사람들 봤나”라고 생각하고 프론트에 연락해 전날 묵었던 투숙객을 수소문했다. 프론트의 회답은 너무 뜻밖이었다. 그 곳에서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있었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마친 한 북한쪽 가족이 그 방에 묵고 우리가 오는 날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북한 가족들이 일 년은 먹고 살 수 있는 돈을 놓고 간 것이다. 편집위원 전원이 여행을 팽개치고 그 돈을 돌려줄 방법을 찾았지만 불가능했다. 그 돈을 서울로 가져와 통일부를 통해 그 가족에게 전하는 데는 몇 년이 걸렸다. 그 기간 동안 나는 수없이 10불짜리까지 챙겨주고 싶은 가난한 남쪽 가족들의 마음과 그 돈을 챙길 경황조차 없이 북한으로 돌아가 황망하고 죄스러워 할 북쪽 가족을 생각하며 가슴이 먹먹해지곤 했다. 돈에는 얼굴이 있었다. 장발장은행 심사 모습 인권연대 운영위원을 맡고 제일 먼저 한 일은 내가 내던 기부금을 조금 늘인 것이었다. 내가 가까이 서 본 오창익 사무국장과 인권연대 사무국 사람들의 얼굴 때문이었다. 존재 그 자체가 싫은 사람이 있다면 존재 그 자체가 좋은 사람도 있다. 그들이 그랬다. 연구를 한답시고 힘든 사회현장에서 거리를 두고 있던 나에게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사회문제의 현장을 챙기고 계시는 그 분들은 늘 그저 존경과 감사의 대상이다. 돈 안 되는 일을 저렇게 열심히 하는 분들을 나는 본 적이 별로 없다. 이제 A씨 여동생의 아름다운 얼굴을 만났으니 또 어디에선가 돈을 좀 더 짜내야 할 듯하다. 그런 얼굴을 더 만나고 싶기 때문이다. 기뻤다. 운영위원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부끄럽게도 아직 장발장은행에는 한 푼도 안내고 있다. 내가 딸아이에게 난생 처음 돈 부탁을 한 것도 그 인권연대 일꾼들 얼굴 때문이었다. “봄아 여기 기부 좀 할래?”라는 단 한마디 속에는 “네가 인권연대에 기부금을 내면 너는 아마 네 돈보다 몇 배는 소중한 사람들의 얼굴을 만나게 될거야”라는 메세지가 담겨있었다. 벌써 수년간 같이 점심을 먹어 온 교수님들에게도 “좋은 일 좀 하시죠” 라고 말씀 드렸더니 몇 분이 흔쾌히 들어주셨다. 그 분들도 A씨 여동생 이야기를 들으면 가슴 아파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시리라. 유일하게 내가 기부를 권유했는데 망설인 사람이 나의 제자인 B였다. B는 다양한 얼굴을 가진 친구이다. 대구 출신의 보수 집안 출신임에도 나 같은 반골선생의 제자가 되겠다고 자청하며 나의 모든 수업을 듣기도 한다. 해외여행 다니는 것이 전혀 어렵지 않은 집안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회활동에도 돈을 쓰지 않는 이상한 나의 제자이기도 했다. B가 인권연대 회원이 된 것은 진보당 당원인 또 다른 나의 학생 C 때문이었다. 둘은 나랑 같이 하는 다른 활동 때문에 여러 번 같이 만났다. 만날 때마다 C는 B에게 진보당 가입원서를 내밀었다. 계속 거절당하자 C는 B에게 “니가 입진보에서 벗어나려면 인권연대 회원이라도 되라”고 다그쳤다. 브라보 C여! 옆에서 나는 그저 한마디 했다.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네가 쓰는 돈을 보면 안다”. 결국 B는 지금 인권연대회원이다. 학생들에게 인권연대를 권유하지는 않는다. 강압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B도 마찬가지이다. 하기사 그는 강압한다고 들을 학생도 아니다. 그가 얼마나 나에게 덤비는지는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인권연대 회원인 그도 그가 내는 얼마간의 회비를 통해 수많은 아름다운 얼굴들을 만났으면 좋겠다. 선생인 나도 오늘도 인권연대를 통해 수많은 새로운 얼굴들을 만나 인간에 대한 예의를 배워가고 있다. 이 이야기는 B에게 가장 먼저 들려주고 싶다. 인간에 대한 예의는 선생인 내가 학생인 그에게 가장 주고 싶은 선물이기 때문이다. 김희교 위원은 현재 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23-08-22 | hrights | 조회: 635 | 추천: 14
정범구 / 인권연대 운영위원 한 때 현실정치에 몸 담았었다. 처음 국회의원이 된게 2000년이었으니 벌써 23년이 지났다. 당시 상황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정치판에 휩쓸리게 되었다. 보람보다는 회의와 좌절을 더 많이 경험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정치도 하나의 직업으로, 사회 분업상 누군가는 맡아야 한다는 생각, “공익근무” 한다는 생각으로 자신울 다독이며 하루하루를 이어갔다. “대접 받는” 재미에 살짝 익숙해져 가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나를 짓누르는 생각은 “이게 과연 가성비 있는 직업인가?” 하는 생각이었다. 지역구(경기도 일산) 관리와 상임위 활동, 또 당직을 맡아 당의 일 까지,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정신없이 움직이고는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드는 회의는 “과연 나의 노력으로 세상은 조금씩이라도 좋아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출처 - KBS뉴스 정치는 비용도 많이 드는 것이어서 나는 당시 하루에도 3개의 사무실(국회의원 회관, 지구당 사무실, 당사 사무실)을 전전하며 뭐라도 하는 것처럼 바삐 지냈다. 일상은 번잡하고, 세상은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주시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러나 큰 틀에서 세상은 여전히 쉽게 바뀌지 않았고, 기득권과 관습은 완고하였다. 직장이랍시고 출근해야 하는 국회는 그때나 지금이나 “상시 전쟁터”였다. 당시 내가 소속되어 있던 상임위는 문화관광위였는데 방송을 관할하는 위원회였기 때문에 방송 주도권 장악을 위한 여야간 싸움이 끊이질 않았다.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 의원들의 트집잡기도 지겨웠지만 여당 “친위대”의 날선 대응도 사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매일매일이 전쟁터인 곳을 직장삼아 출근하는 심정은 무거웠다. 출처 - 경향신문 정치인으로서 나의 회의가 극한에 다다랐던 것은 2003년 초 이라크 파병을 둘러싼 대립이었다. 명색이 진보정부라는 노무현 정부에서 추진되던 이라크 파병은 명분상으로도, 실리상으로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안이었다. 미군의 이라크 침공 후 곧바로 드러난 사실이지만 부시 행정부가 침공의 명분으로 삼았던 후세인 정부의 “대량살상무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사실 이 대량살상무기가 확인되지 않았다는 보고서는 이미 유엔 안보리 조사단 보고를 통해 나와 있었고, 이 문제를 나와, 당시 국회에 결성되어 있던 “반전평화의원모임”이 주장했지만 노무현 정부는 이라크 전투부대 파병을 밀어부쳤다. 미국이라는 “큰 형님”의 요청을 무시할 수 없다는 논조가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언론의 18번이었는데 기대를 걸었던 노무현 정부도 이 문제에서는 별 수가 없었다. 참고로 당시 슈뢰더 총리가 이끌던 독일 정부는 끝내 부시의 파병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NATO의 굳건한 동맹 당사자였고 독일에 아직도 수만 명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상태였지만 부시의 침공 놀음에 응하기에는 명분이 약했을 것이다. 반면 노동당 출신 총리로 “부시의 푸들” 소리를 들어가면서 까지 영국군을 파견했던 토니 블레어는 이 전쟁 책임으로 내내 시달렸다. 그는 2015년 10월, 미 CNN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지만 영국군은 179명의 전사자를 내고서야 이라크전의 수렁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뜻을 같이 하는 몇몇 의원들의 노력으로 헌정사상 처음으로 “국회전원위원회”까지 열며 이라크 파병을 막아보려 하였지만, 이미 정해진 각본 따라 진행되는 파병 계획을 막을 수는 없었다. 국회의원으로서 무력감이 밀려왔다. 이런저런 명분을 내세워 현실정치에 참여했던 나의 지난 행적이 모두 무화되는 것 같았다. “과연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국회의원이라는 ‘빳찌’를 달고서도 결국 아무 일도 못해 내는 것 아닌가?“, ”역사는 과연 진보하는 것인가?“ 이런 질문을 내내 내게 던졌던 것 같다. 무기력감과 회의에 빠져 보내는 하루하루가 무척 힘들었다. 매일매일 닥쳐오는 정치인으로서의 일상을 감내하면서 이런 무기력증과도 싸워야 하니 힘들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한줄기 생각이 광명처럼 스쳐갔다. “어제 오늘만 보지 말고 좀 긴 호흡으로 과거를 돌아보자.” “그래도 역사는 꾸준히 앞으로 진보해 왔지 않는가? 20년 전(1980) 광주의 학살에 절망하고, 전두환 군부의 폭압에 좌절하던 그때를 돌아보면 세상은 그래도 얼마나 앞으로 나아 왔는가?” “군부정권이라는 노태우 정부에서도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됐고, 중국, 러시아와도 국교를 개설하지 않았는가?” “불가능할 것 같은 수평적 정권교체(1998)도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등등의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어제 오늘의 현실만 보면 답답하지만 그래도 5년 전, 10년 전을 생각해 보면 역사는 꾸준히 앞으로 나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요새 이런 믿음이 다시 흔들리고 있다.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을 “공산당 언론”이라고 말하는 인사를 방송통신위원장에 앉히고, “극우 유튜버” 논란을 빚은 인물을 통일부 장관, 전직 대통령을 “간첩”이라고 공공연히 지칭한 인물을 경찰제도발전위원장이란 직책에 임명하는 윤석열 정부. 엄청난 사람들이 안전사고로 죽어가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거나 전 정권 책임으로 돌리는 이런 전대미문의 뻔뻔한 정부, 어렵게 쌓아온 한반도 평화외교의 기조를 하루 아침에 뒤집어 버리고 대북강경발언만 뻥뻥 쳐대면서 한반도를 일촉즉발의 긴장상태로 몰아가는 이 정부를 보면서 기가 막히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나훈아 말대로 정말 “세상이 왜 이래?”하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다. 그런데 이게 위안거리가 될지 모르겠으나 이런 “반동”이 우리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포퓰리즘에 호소하며, 집권 4년 동안 미국과 세계를 혼란 속에 몰아넣은, 그리고 미국 사상 초유의 의회난입사건을 부추긴 트럼프가 여전히 유력한 미국 차기대통령 후보로 거론되고, 나치의 악몽이 아직도 생생한 독일에서 최근 극우정당인 독일대안당(AfD)이 집권당인 사민당(SPD), 녹색당 등을 제치고 각종 여론조사에서 제 2당으로 부상하고 있는 현실 등은 과연 그동안 역사가 꾸준히 진보해 왔던 것인가 하는 질문을 다시 던지게 한다. 그러다가 다시 생각해 본다. “그래 역시 겪을 것은 다 겪고 가야 하나 보다” 하는 생각이다. 한 때 민주화와 산업화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모범국가, 촛불혁명이란 유례없는 비폭력혁명으로 정부를 바꾼 나라, 그 성공 스토리 이면에 자리잡은 허구들을 바로잡지 않고는 이런 “역진”, 이런 “반동”은 예고됐던 것이 아닌가? 산업화에는 성공했지만 재벌 중심, 투기세력 중심 양극화는 더 심해졌고, 정치적 민주화에는 성공했는지 모르지만 경제적, 사회적 민주화의 많은 과제들은 아직 의제 설정도 제대로 안되어 있는 현실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성장 일변도 사고에 익숙해져 있던 우리에게 전세계적 기후위기는 새로운 성찰을 요구한다. 출처 - 위키백과 절대왕정을 무너뜨린 프랑스 혁명은 1789년 7월 14일 끝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작이었다. 바스티유를 점령한 민중들에 의해 구체제(ancien regime)는 무너졌지만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기까지에는 오랜 세월 반동과 혁명의 반복이 있었다. 겪어야 할 것은 결국 다 겪어야 했던 것이다 다이내믹 코리아의 에너지를 믿으며 내일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해 본다. 정범구 위원은 전 독일대사입니다.
2023-08-16 | hrights | 조회: 1257 | 추천: 23
염운옥 / 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   지난 6월 말 열대박물관(Tropenmuseum)을 보기 위해 암스테르담에 다녀왔다. 열대박물관은 식민주의 탈피를 표방하며 변화를 거듭하고 있는 유럽 박물관들 가운데 한 곳이다. 비슷한 사례로는 파리의 인간박물관(Musée de l'Homme)과 케브랑리 미술관(Musée du quai Branly), 벨기에 테르뷰렌의 아프리카박물관(the Africa Museum)을 꼽을 수 있다. 식민주의라는 ‘원죄’를 의식하고 씻어내기 위해 기존 박물관 전시 구성을 대폭 개편하거나 새로 박물관을 건립하는 유럽 박물관들의 노력이 탈식민주의를 향해 조금이나마 나아가고 있는 건지, 아니면 식민주의의 재탕이나 회피의 교묘한 전략에 불과한 건지에 대해서는 평가가 갈린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식민주의에 기원을 둔 유럽 박물관들은 좋든 싫든 변화의 압박에 반응하고 있으며, 상설전시와 특별전시에 그리고 신설 박물관에 이런 변화가 반영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열대박물관은 암스테르담 도심에서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린네우스스트라트(Linnaeusstraat)에 위치하고 있다. 트램을 내려 오스터파크(Oosterpark)를 따라 조금 걷다 보면 밝은 벽돌색의 단정한 건물을 만나게 된다. 열대박물관 파사드는 암스테르담 시내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폭이 좁고 높다란 삼각형 지붕의 건물들과 닮았지만 육중한 부피감이 남다르다. 열대박물관과 이어진 건물에는 왕립열대연구소가 자리잡고 있다. 하를렘에서 시작한 이 박물관이 현재 위치로 옮겨온 것은 1926년이었다. 원래 오스터파크 자리에 있던 공동묘지가 시 외곽으로 이전하면서 비게 된 공간에 새 건물을 지어 식민지연구소와 그 부속 박물관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당시 암스테르담에서 가장 큰 건축물이었다고 하니 수도 암스테르담에서 야심차게 새출발한 박물관이었다.   열대박물관 @염운옥   열대박물관 건물 축소 모형 Image of the scale model of the Koninklijk Instituut voor de Tropen https://www.tropenmuseum.nl/en/zien-en-doen/tentoonstellingen/whats-the-story   열대박물관의 역사는 160년에 가깝다. 명칭도 원래 열대박물관이 아니었다. 원래 이름은 식민지박물관(the Colonial Museum)이었고, 1949년 열대박물관으로 개칭했다. 식민지박물관의 토대가 되는 유물 수집을 시작한 계기는 네덜란드 산업진흥협회의 해외영토에 대한 관심이었다. 1864년 아마추어 식물학자 프레데릭 반 에덴(Frederik van Eeden)는 고용주인 산업진흥협회를 설득해 본격적인 수집을 시작했다.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네덜란드 해외영토의 천연자원, 생산품, 공예 등의 수집이 식민지 이익을 위해 중요하다고 본 것이었다. 하를렘에 있는 그의 저택은 곧 수집품으로 가득 찼고, 1871년 하를렘에 식민지박물관을 열게 되었다. 1910년대에는 암스테르담으로의 이전 논의가 시작된 한편 암스테르담 아티스 동물원(Artis Zoo)의 인류학 유물을 양도받아 소장품이 크게 늘었다. 아티스 동물원은 동물 포획과 사육 이외에도 인도네시아, 아프리카, 뉴기니의 유물을 수집해왔는데 동물원을 이전하면서 인류학 유물은 식민지박물관로 보낸 것이다. 따라서 현재 열대박물관 컬렉션은 크게 하를렘 식민지박물관 기원(목록에서 H로 구분)과 아티스 동물원 인류학 컬렉션 기원(목록에서 A로 구분)으로 구분된다. 2014년 열대박물관은 레이덴의 민족문화박물관(Museum Volkenkunde), 베르그엔달의 아프리카박물관(Afrika Museum), 로테르담의 세계박물관(Wereldmuseum)과 함께 문화부 세계문화박물관(the National Museum of World Cultures) 산하의 한 기관으로 통합되었다. 세계문화박물관을 총괄하는 물질문화연구센터(the Research Center for Material Culture) 소장은 열대박물관의 임무는 “세계시민 양성에 공헌하는 도구로서 우리가 공유하는 세계에서 책임감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타인에 대한 공감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박물관 입구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 층 올라오면 전시실이 시작된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정면 방향으로 맨 먼저 시선이 닿는 벽에 영상 전시물이 걸려 있다. 세 개의 스크린을 가득 채운 글자들이 쉴새 없이 움직이며 이름을 만들고 이름과 이름을 연결하는 선을 긋는다. 생명을 얻은 이름들이 깊은 바닷속을 헤엄치는 풍경 같다. 글자들은 네덜란드에 의해 카리브해와 아시아에서 노예가 된 사람들의 이름이다. 인도네시아, 퀴라소, 수리남에서 노예등록과 노예해방 기록을 토대로 수집한 이름들로 앞에 놓인 터치스크린을 클릭하면 해당 이름과 관련된 더 많은 내용을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노예가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상히 밝히는 것은 어렵더라도 이름을 기억하고 그들이 맺은 인간관계를 기억하는 일은 노예를 인간의 자리로 되돌리는 첫걸음이다. 터치스크린 옆의 설명문에는 1863년 네덜란드에서 노예해방이 이뤄졌지만 실제로는 주인 밑에서 수년간 강제노동해야만 했다는 사실, 반면 노예주는 국가로부터 노예 노동력 상실에 대한 보상을 받았다는 사실도 쓰여있다. 노예제 역사에 대한 반성의 문제가 유럽 사회에 대두되면서 프랑스 보르도에 노예제 희생자 동상에 세워졌고, 영국 리버풀에는 국제노예제박물관이 개관했다. 네덜란드에도 2002년 오스터파크에 중간항로의 고난을 형상화한 수리남 예술가 에르윈 드 드브리스(Erwin de Vries)의 청동상 작품이 세워졌다. 열대박물관의 노예 이름 영상 전시는 이러한 성찰과 기억의 노력과 같은 흐름 속에 놓인 것으로 박물관 감상의 시작 지점부터 강렬한 인상을 전해주었다.   노예 이름 영상 전시 @염운옥   전시실은 노예 이름 영상 전시를 중심으로 좌우로 펼쳐진다. 중앙에 아트리움 그레이트홀(Great Hall)을 두고 양편으로 위아래 두 개 층에 전시실이 펼쳐져 있다. 전시는 ‘인종의 창조’, ‘흑인성이라는 산물’, ‘저항’, ‘자유’, ‘창조성과 저항’의 다섯 개 주제로 이뤄져 있다. 본격적인 전시 감상을 시작하면서 먼저 눈길을 끈 점은 이 박물관이 분명하게 반인종주의 반식민주의의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인종은 인종주의의 아들이지, 아버지가 아니다(Race is the child of racism, not the father)”라는 미국 작가 타네히시 폴 코츠(Ta-Nehisi Coates)의 말을 내걸고 ‘인종의 창조’ 전시를 시작한다. 인종은 생물학적 토대를 갖는 개념이 아니라 인종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구성된 개념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인종적 스테레오타입을 구성하는데 동원됐던 두개측정기, 두개고정기, 두개골 스탠드, 인체측정기, 피부색 판별 차트, 눈 색깔 판별 모형 같은 소위 ‘과학’의 도구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사용됐던 형질인류학 강의용 교재에 실린 세계인의 신체적 차이를 보여주는 도판은 인종이 존재하고 이는 피부색, 머리카락, 눈, 안면과 두개골의 신체적 차이에 나타난다는 관념을 뒷받침했던 예로 등장한다. 형질인류학이 만들어내는 인간 신체의 차이는 인종적 차이로 단순화되고 스테레오타입이 되어 포스터, 교재, 엽서, 광고, 영화 속에서 반복되면서 인종주의를 생성한다.   형질인류학 교재 도판 @염운옥   1883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국제 식민지 무역 박람회에서는 인간 전시가 있었다. 수리남과 인도네시아인이 보여지기 위해 앉아서 포즈를 취하거나 공연을 하면서 전시되었다. 열대박물관은 1883년 박람회 유물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 이 사실은 열대박물관과 식민주의의 관계를 또렷이 증명한다. 전시실에는 인간전시에 동원된 수리남인 네 사람 엘리자베스 모엔디(Elisabeth Moendi), 재클린 리켓(Jacqueline Ricket), 요하네스 코조(Johannes Kojo), 코조 아 슬렌 그리(Kojo-A-Slen-Gri)의 초상사진이 걸려 있고 이름과 약력이 적혀 있었다. 그들은 박람회에 온 28명의 수리남인 중에 속해 있었다. 설명문에 의하면, 코조 아 슬렌 그리의 이름은 원주민어로 ‘활기차게 걷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1838년생으로 네덜란드 탐험가를 도와 수리남에서 탐험로를 개척했다고 한다. 코조는 1883년 박람회에 데려올 수리남인을 모집하는 데 조력했고, 조카 요하네스 코조를 함께 데려왔다. 이러한 설명은 19세기 말 인간전시에 자발성과 강제성, 상업주의와 인종주의가 복잡하게 착종되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코조 아 슬렌 그리 @염운옥   박물관의 역사에 관한 전시에서는 “여기 있는 모든 것들은 훔친 것인가?”라는 도발적 질문을 제기하고, 박물관의 유물이 매매, 기부, 때로는 절도 같은 다양한 방법으로 수집되었다고 답하고 있다. 그리고 유물의 수집이 식민지에 대한 억압, 무역, 군사 행동, 과학 프로젝트, 선교 사업의 맥락에서 일어났으며, 소장품 대부분이 식민지 시대에서 유래한다고 고백하고, 원산국이 자발적으로 포기하지 않았거나 원산국에서 문화적 가치가 더 높은 유물을 배상과 반환의 대상으로 간주한다고 밝히고 있다. 물론 이런 문구는 예상되는 유물 반환 논쟁을 의식한 원론적이고 선제적인 대응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부끄러운 식민주의 과거를 박물관 역사의 일부로 명시적으로 밝힌다는 면에서는 평가해줄 면이 있다고 본다.   현재 열대박물관의 상설전시는 탈식민주의적 개입의 결과물이다. 1990년대부터 박물관의 식민주의 유산에 대한 비판이 있었지만, 본격적인 변화가 시작된 것은 2015년부터였다. 열대박물관은 박물관의 중립성을 다시 묻고, 신자유주의적 다양성 담론을 비판하는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박물관을 탈식민화하자(Decolonize the Museum)’라는 시민단체와 협력해 전시에 내재한 식민주의와 인종주의에 대해 검토하고 성찰했다. ‘박물관을 탈식민화하자’는 20~35세의 아프리카계 네덜란드인으로 구성된 단체로 인종뿐만 아니라 젠더와 장애의 관점에서 접근성을 결여한 박물관에 대해 비판하고 교차적 관점을 박물관에 요구했다. 이 단체와의 협력을 통해 전시 내용을 바꾸고 설명문을 다시 쓰는 작업이 이뤄졌다. 2017년 열대박물관이 주최한 노예제 역사에 관한 학술회의에는 미국 워싱턴의 아프로아메리칸역사문화박물관(National Museum of Afrian American History & Culture) 로니 번치(Lonnie Bunch) 관장을 초청하기도 했다. 큐레이터 마틴 버거(Martin Berger)와 리처드 코피(Richard Kofi)는 개편과정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준 박물관으로 이곳을 꼽았다. 약 2시간 넘게 박물관을 둘러보는 동안 아트리움에서는 수리남 문화공연이 열리고 있었다. 어린이들이 객석을 가득 메웠고 흥겨운 노래와 춤이 무대에서 펼쳐졌다. 관람하는 발걸음이 둥둥 울리는 북소리에 가벼워졌고, 어깨가 들썩이기도 했다. 유물에서 눈을 돌려 자꾸 아트리움 쪽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아이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함께 노래하며 즐기고 있었다. 아이들의 밝은 웃음소리가 박물관에 가득했다. 공간을 완성하는 건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날 열대박물관의 주인공은 단연코 수리남 예술가들과 아이들이었다.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네덜란드는 좀 더 열린 곳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수리남 음악과 춤 공연 @염운옥   1) Iris van Huis, “Contesting Cultural Heritage: Decolonizing the Tropenmuseum as an Intervention in the Dutch/European Memory Complex,” T. Lähdesmäki et al. eds., Dissonant Heritages and Memories in Contemporary Europe (Palgrave, 2019). pp. 226-237.
2023-08-10 | hrights | 조회: 938 | 추천: 7
정전 70년을 맞아   장경욱 / 인권연대 운영위원   올해도 어김없이 한국전쟁 정전일이 다가왔건만, 한반도의 현실은 핵 전쟁 발의 위기가 급속도로 고조되고 있다. 정전협정은 항구적 평화협정을 지향하고 있다. 평화협정은 한반도에 주둔하는 외국군대의 철수를 담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극우보수정권은 빈껍데기의 종전선언조차 반국가세력으로 호도하고 있다. 출처 - 기독교한국신문 정전협정은 외국군대의 철수와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정치군사회담의 개최를 명문화하고 있건만, 분쟁의 평화적 해결은 요원해지고 정전협정 당사자 사이의 ‘핵 대 핵’ 대치의 악순환이 세계대전으로 급격히 발전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외국군대의 주둔을 항구화하는 군사동맹은 군사적 긴장을 더욱 고조시킨다. 정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의 전환을 지향하는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 정신에도 반한다. 그러나, 극우보수정권은 핵 전쟁, 세계대전의 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외국군대와의 군사동맹을 날로 강화하며 외국군대의 항구적 주둔을 꾀한다. 동족을 주적으로 간주하며 동족에 대한 선제공격과 정권 종말을 거침없이 내뱉고 있다. 허구의 동족 악마화로 동족을 탓하며 동족대결에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가공할 한반도 핵 전쟁의 위기를 불러와 민족의 평화적 생존권을 무참히 짓밟을 뿐이다. 출처 - 경향신문 북핵 위협 증가에 대비하여 핵 확장 억제를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한미정상회담에서 채택된 ‘워싱턴 선언’에 따라 42년 만에 미국의 핵탄두 장착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을 탑재한 전략 핵잠수함이 부산항에 기항하였다. 이에 북의 국방상은 미 전략자산 전개의 가시성 증대가 국가핵무력정책 법령에 밝혀진 핵무기 사용 조건에 해당될 수 있다는 담화로 대응하였다. 2019년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후 군사적 ‘강 대 강’ 국면이 장기화되어 오는 가운데 그 대결 국면이 최고조로 달해가는 상황이다. 북미 사이의 ‘강 대 강’ 정치군사적 대결 추세에 편승한 극우보수정권의 외세 의존의 동족대결 정책은 한미일 군사동맹의 강화와 함께 국가보안법에 의한 공안탄압의 전면화로 그 막무가내의 도를 더해가고 있다. 한미일 군사동맹의 강화를 위해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까지 옹호하고, 국가정보원의 대공수사권 폐지를 막고 이를 되살리기 위해 국가정보원을 전면에 내세워 공안탄압을 강화하는 형국이다. 그러나, 선무당이 사람 잡는 격의 극우보수정권의 동족대결이 언제까지나 마구잡이로 지속될 수는 없다. 이판사판의 공안탄압도 마찬가지로 끝간데 없이 자행될 수 없다. 극우보수정권이 추종하는 북미 간 ‘강 대 강’ 국면의 지속은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전쟁 위기를 격화시키며 한반도 및 동북아시아 지역의 평화와 안전에 걷잡을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 갈수록 명백해지고 있다. 결국 북미 간 군사적 대결상태와 전쟁 위기를 끝내기 위한 평화협상에 의한 정치적, 외교적 , 군사적 해법이 모색될 수밖에 없다. 정전 70년을 맞아, 바야흐로 북미 간 ‘강 대 강’ 대결의 악순환을 지양하는 비등점이 다가오고 있다. 외세 추종의 동족대결 발상이 언제까지나 만능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이를 알 리 없는 극우보수정권은 자멸을 재촉하고 있다. 한계수명에 도달한 극우보수정권의 통치위기 수습용 공안탄압도 약발이 다해가고 있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2023-07-25 | hrights | 조회: 970 | 추천: 8
하지 않아야 하는 게 있다 - 술 좋아 하는 시민이 올리는 충언 - 오항녕 / 인권연대 운영위원 사람에게는 체력이든 시간이든 스스로 감당할 총량이 있으니, 애당초 ‘하면 된다’는 말은 맞지 않는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해도 안 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대개 ‘하면 된다’고 말하는 자들은 누구를 부려 먹으려는 자들이거나, 게을러서 전혀 뭔가를 해보지 않은 자들이라고 나는 감히 단언한다. 그래서 철이 좀 든 이후 남들이 ‘〇〇〇을 하자’고 다짐할 때,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찾았다. 그러면서 두 가지를 알았다. 첫째, 하지 않는 것도 하는 것만큼 힘들면서도 뿌듯하다는 사실이었다. 뭘 하지 않는데 왜 힘이 드는가? 화 안 내고 참는 게 쉬우면 누구도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물론 화가 날 때 슬기롭게 살펴 해소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둘째, 할 걸 먼저 하는 것보다 안 할 걸 먼저 안 하고 할 걸 하는 편이 훨씬 안정감과 집중력이 높인다는 사실이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테지만 나는 그렇다. 생각건대, 세상 일에는 나중에 도움 되는 게 있다. 도둑질도, 싸움도, 사기당하는 것도 뭔가 남는 게 있다. 그러나 흡연은 아니다. 백해무익(百害無益)이란 말이 담배처럼 정확하게 들어맞는 경우는 없다. 불행하게도 난 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부터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친구네 집 사랑방에서 시작된 흡연은 지독하게 나를 따라붙었다. 흡연자 대부분이 그렇듯이 나도 12시간, 하루, 사흘, 1주일, 2주일, 한 달, 두 달, 석 달, 심지어 1년도 끊어보았다. 그러다 다시 피고 말았다. 담배는 요물(妖物)처럼 마음에 틈만 생기면 ‘언제든지 끊을 수 있잖아! 다시 피워. 지금 힘들잖아?’라고 유혹하며 나의 여리고 허한 마음을 파고들었다. 물론 담배 끊기는 내 의지의 영역만이 아니다. 당초 담배를 파는 세상이 더 문제다. 마약보다 중독성이 강하다는 담배를 버젓이 편의점, 수퍼에서 팔고 있는 세상이라니! 그걸 방치하는 것도 모자라 흡연공간까지 마련해주는 사회라니! 더더구나 담배를 팔아 거두는 세금 때문에 담배 판매를 합법화하는 국가라니! 나는 국가가 늘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가장 강력한 증거 중 하나로 담배 판매의 합법화를 든다. [금연 표지 : 작은아이가 일곱 살 때 그려서 내 서재, 마루, 화초가 있는 마당. 대문에 붙여놓았던 그림이다. 그놈 등쌀에 나는 담배를 끊어야 했다.] 나는 담배를 끊는 데 무려 25년 이상 걸렸다. 2004년 12월, 해골바가지 금연 그림을 그려서 방과 거실은 물론, 마당까지 따라다니던 작은 아이의 사랑스러운 성화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 서툰 포스터를 들고 ‘아빠, 담배 피웠지!’하고 심문하던 녀석의 표정이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더하여 그때 시작한 마라톤은 흡연자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스포츠였다. 그렇게 담배로부터 멀어진 지 20년이 흘렀다. 그런데도 나는 가끔 담배 피는 꿈을 꾸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잠을 깬다. 휴~ 꿈이었구나…… 하면서. 군대 다시 가는 꿈은 안 꾼 지 이미 오래인데 말이다. 신혼 시절 안방에서 버젓이 담배를 피웠던 나의 행동에 대해 뒤늦게 진심으로 통렬히 참회한다. 내가 담배 피우던 입으로 아내와 키스를 했다는 사실이다. 이 무슨 야만이란 말인가! 나는 시험을 보면 피드백을 한다. 피드백을 하다 보면 담배 냄새를 풍기는 학생도 있는데, 나는 피드백 이전에 조근조근 왜 담배를 지금 젊을 때 끊지 않으면 안 되는지 설명한다. 그때 꼭 빼놓지 않고 말한다. “키스할 때 너무 더러운 냄새가 나거든! 너는 모르지만…….” 난 뭔가 열심히 하지 않는다. 열심히, 성실히 하는 건 잘하지 못하고 또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냥 이렇게 나는 안 해도 될 일을 먼저 쳐나가는 방식으로 내 생활을 꾸려나가고 있다. 뭔가 할 때는 슬렁슬렁한다. 다만 안 해도 되는 건 안 한다. 무슨 일을 열심히 하지 못하니까 예방책으로 안 할 일은 안 하는 전략을 취하는 게다. 내일 산에 가기로 되어 있거나 내일 강의 준비를 채 하지 못했으면, 오늘 저녁에 술을 마시지 않는 거다. 마셔도 컨디션 조절용으로 조금만 마시고. 특히 마라톤 대회가 있으면 적어도 넉 달 동안은 술을 마시면 안 된다. 실제로 마라톤 풀코스를 처음 뛸 때 그렇게 했다. 다른 말로 하면, 술을 마시고 칼럼, 논문을 쓰지 못하거나 토론을 포함하여 이야기를 하기 어렵다면 술은 마시지 말아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나는 절대 담배처럼 술을 끊을 자신도 없고, 생각도 없다. 그 좋은 술을 왜 끊겠는가.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나만큼 술을 좋아하는 분이 용산에도 계신 듯하다. 주량도 제법 되시는 듯하니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 그래도 나랏일을 하고 계시니까, 내가 하는 방법 한 번 써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사람이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해야 할 일을 할 수는 없다는 전제에서 드리는 말이다. 국무회의가 있거나 외국순방이 있거나 안전보장회의가 있거나 국민들의 삶에 영향을 미칠 사안이 있을 때는 전날 술을 안 하시는 거다. 그런 일이 없을 때가 있느냐고? 그건 내가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 자리인 줄도 모르고 맡으신 건 아니지 않은가. 어쨌든 나도 할 줄 아는 걸 당신이 못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그 외에도 안 할 일을 하다 보니 할 일을 못하시는 건 없는지 두루 살펴보셨으면 한다. 사실 이 전략은 내 발명품이 아니다. 2천 년 전에 이미 맹자(孟子)께서도 말씀하셨다. “사람이란 하지 않는 일이 있어야 뭔가 이룰 수 있다.[人有不爲也而後可以有爲]” 달리 말하면, 하지 않을 일이 무엇인지 분별하지 못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이겠다. 오항녕 위원은 현재 전주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23-07-25 | hrights | 조회: 493 | 추천: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