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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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학교 역사문화컨텐츠학과 교수), 이찬수(전 보훈교육연구원장),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장발장은행장)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김영미/ 인권연대 운영위원 인권은 주로 권리에 대해서 말하지만, 헌법이 정한 의무 말고도, 시민들에게 주어진 몇 가지 의무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환기시키려고 하고 있다.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을 권리(침해금지의무), 다른 사람을 도울 의무(구조 의무)같은 것이다. - “사람답게 산다는 것” 중에서 - 율이(가명)는 일상생활이 가능한 지적장애를 가진 중학교 1학년 특수학급 여학생이다. 입학 얼마 후 같은 반 학생들이 교사를 찾아와서 “율이가 하굣길에 같은 특수학급의 철이(가명)에게 학교근처 놀이터로 끌려가 성추행을 당했다”고 이야기 했다. 이에 학교는 즉시 교육청과 경찰에 신고하고(2012년 성폭력방지 및 피해자 보호에 관한 법률 제정으로 성폭력 발생 시 학교는 즉시 신고의무가 있음) 이 사실에 근거하여 폭대위(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를 통해 처리하였다. 5년 전 중학교에 입학한 철이는 뇌병변장애인(다리재활치료로 2년을 휴학)으로 일반학생들과 잘 적응하고 생활한 특수학급학생이지만, 자신을 도와주는 도우미학생을 괴롭혀 우울증까지 생기게 했고 이에 견디다 못한 학생이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는 등 지속적으로 일반학급의 학생들과 마찰이 있었다. 율이와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 철이는 긴장하는 것 같이 보였지만 곧 예전의 거친 모습으로 돌아갔다. 학교에서는 자신이 율이에게 성추행을 했다고 했지만, 부모에게는 “율이의 가방만 만졌고, 교사들이 무섭게 해서 거짓말을 했다”는 태도를 보였다. 반면에 율이는 여러 날 동안 두통과 복통을 호소하면서 불안해했다. 율이와 같은 지적장애를 가지고 어렵게 생활하던 율이 아버지는 이 사실을 알고서 매우 흥분했지만, 다음날에는 철이네 부모와 합의를 했음을 알려왔다. 사람들과의 소통이 어려운 아버지는 피해자 부모로부터 “죄송하다, 철이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말을 믿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며칠 후 가해자인 철이 어머니가 학교 관리자를 상대로 “자신에게 폭언하고, 장애인차별”을 했다며 민원을 제기했고, 얼마 후 “철이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감금하고 협박했다”는 내용으로 학생부장, 담임을 교육청과 인권위원회에 진정했고, 다른 학부모를 통해서 “학교가 바로 경찰에 신고한 것에 대해서 용서할 수 없어서 민원을 계속 한다”고 말했다고 했다. 악의적인 마음으로 제기한 민원에 학교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소명하기 위한 자료준비로 오랜 시간을 소모했다. < SBS스페셜 > 3부작 '학교의 눈물'의 한 장면 사진 출처 - SBS 장애를 가진 율이의 아버지는 피해자인 율이를 보호하지 못하고, 가해자인 철이네 부모가 사실을 인정하기 보다는 피해자를 공격하고, 학교를 괴롭히는 모습을 보면서 교사로서 무력감을 절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사들에게는 가장 아픈 곳인 율이를 도울 의무가 있었고, 율이를 보호하기 위해서 아버지가 하기 어려운 가정의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지역의 보호센터를 연결하는 등의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다. 어렵지만 철이에게도 가해행위의 위험성을 끊임없이 이해시키고, 다른 학생들과 어울려서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율이가 학교에 잘 적응하고 행복한 학교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면 다른 모든 학생들도 행복해 질 수 있다고 믿고 싶다. 김영미 위원은 현재 중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370 | 추천: 0
- 내 정당의 집은 어디인가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들어가는 말 박근혜 정권이 집권 1년차에 이어 2년차에도 내각 구성을 못해서 끙끙 앓고 있다. 반공논리로 무장한 친일·독재세력이 박근혜라는 얼굴마담을 내세워 - 그리고 국정원과 경찰이라는 공권력을 동원해 - 그럭저럭 정권 재창출에는 성공했으나, 실은 나라를 통치할 능력은커녕 장관을 임명할 인재풀조차 갖추지 못한 무능 정권임을 스스로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시대착오적 무능’이라고 본다. 이들이 원래부터 무능했던 집단은 아니었다. 오히려 유능했기에 바뀐 시대에 재빨리 적응했고, 대한민국 역사의 대부분을 지배했다. 그러나 기득권이 공고해질수록 이들의 의식은 점차 화석화했고, 극에 달한 아전인수식 역사해석은 국민 일반의 인식과 최대치의 괴리를 노정하고 있다. 시대착오적 인식이 무능을 낳고 있는 것이다. 세월호 사건과 문창극 사태의 공통점은 박근혜 정권이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면 할수록 꼬여갔다는 데 있다. 모든 사안에 대해 정권의 안위(대통령의 체면)와 기득권 유지를 중심에 놓고 생각하다보니 빤히 보이는 얄팍한 공작 정치와 이미지 조작의 반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것도 늘 꼬리를 밟힌다. 박근혜 정권 출범 이후 한국호는 맹골수도의 사나운 물살에 갇혀 한 치도 전진하지 못하고 있다. 5년 내내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려는 집권세력과 그에 반발하는 국민의 싸움이 전개될 듯하다. 문제는 6·4 지방선거에서 확인했듯이, 이토록 후진 정치세력을 지지하는 국민이 절반이나 된다는 사실이다. 새누리당이 아무리 개판을 쳐도 기어코 지지한다는 30%의 골수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부동층조차 새누리당을 지지했다는 건, 거꾸로 말하면, 야당을 지지할 이유가 이토록 후진 새누리당만큼도 없다는 말이다. 더욱 심각한 건 진보정당의 실종이다. 정의당, 통합진보당, 노동당, 녹색당(이상 지지율 순) 등 4개 정당을 합친 지지율(이하 모든 정당 지지율은 서울시의회 비례대표 기준)이 8.14%에 불과하다. 이번 선거 결과에 대해 여당이 졌네, 야당이 졌네, 말들이 많았지만, 최후의 패배자는 진보정치가 아니었을까. 나의 경우에도 이번 선거처럼 지지해야할 정당이 명확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주변에도 나 같은 사람들이 꽤 많았다. 이 글의 주제는 한 정치문외한이 보는 한국정치의 결핍이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하지 않았던가. 누군가 나의 결핍에 대한 호소에서 정치를 발명해낼 능력을 발휘해 주길 바란다. 이것이 이 글을 쓰는 이유다.(노파심에서 말씀드리자면 이 글을 쓰는 나의 자격은 순전히 개인적인 정치 소비자다. 부디 다른 오해는 말아주시길.) #몸말 먼저 부끄러운 고백부터. 한 때 나는 정치(인) 혐오증을 갖고 있었다. 정치는 권력욕에 찌든 쓰레기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치에 관심이 있으면서도 정치를 (직접) 하거나, 정치권 주변을 기웃거리는 건 천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아주 오래 전, 대학 다닐 때 일이다. 내가 속한 세대는 학생운동권 출신의 정치인 욕을 하며 자랐다. ‘학생운동 하는 이유가 결국 나중에 정치하려는 것 아니냐’는 기성세대의 손가락질에 대처하려 긴급 발행한 ‘미래의 부재증명’ 또는 ‘알리바이 채권’ 같은 걸 호주머니에 갖고 있었던 셈이다. 내가 너무 미욱했기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으나 나의 경우 이 채권의 유효기간은 꽤 길었다. 신문사에 들어가서도 한참동안 정치부에 눈길 한번 돌린 적이 없다. 정치부 기자는 내 사전에 없었다. 그러다 10년차 정도가 됐을 무렵 비로소 철이 들기 시작했다. 정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은 것이다. 정치를 쓰레기들에게 맡겨놓으면 안된다고, 양질의 사람들이 정치에 많이 뛰어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기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기자 생활 10년 만에야 정치의 중요성을 깨닫다니, 이런 바보가 또 있을까. 요즘 후배들 앞에서 말을 꺼내기조차 낯 뜨거운 기억이다. 아무튼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연차로는 정치부에 가는 게 무리였다. 이미 정치부에서 잔뼈가 굵은 후배들이 여럿 있었고, 새삼 손을 들기가 어려운 상황이 돼버렸다. 결과적으로 정치부 기자는 내 사전에 영영 없어져버렸다. 어릴 적 치기어린 다짐이 달성(!)된 것이다. 정신을 차린 나는 비록 국외자이지만 정치에 좀 더 관심을 갖게 됐다. 괜찮은 후배들에게도 정치부를 꼭 가보라고 권했다. 지금은 국회의원이 된, 예전의 시민단체 활동가에게 “너희가 정치를 하면 좋겠다”고 말했던 것도 그 무렵으로 기억한다. 당시의 시민단체들도 ‘정치 알리바이 채권’을 호주머니에 지니고 있었다. 나는 그게 말도 안 되는 자기검열이라고 얘기했다. “내가 보기엔 너희가 시민단체를 하면서 한국사회를 들었다놨다 했다고 생각한다, 그런 식으로 정당을 하면 뭔가 좀 달라지지 않겠냐”, 뭐 그런 얘기였던 것 같다. 술 먹고 한 얘기라 그리 정밀한 얘기는 아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다만, 밖에서 보기에, 시민단체로서 그 단체의 활력이 이전보다 많이 약해진 상태였고, (엔지오에는 어울리지 않는 얘기지만) 인사적체 현상 같은 게 느껴지기도 하는 상황이었다. 그들도 그런 느낌을 가졌으리라. 이들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실제 정치인으로 변신하는 데까지는 그 후로도 몇 년이 더 걸렸다. 그런데 그 방식은 적잖이 실망스러웠다. 나는 그들이 좀 더 조직적으로, 당당하게 정치를 시작하길 바랐다. 그런데 현실은 개별적 투항(좋게 말해 투신)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들이 시민단체 활동을 하면서 모았던 기대와 참신함은 그들의 정치에 없었다. 적어도 내가 말한 정치활동은 아니었다. 내가 지지하고 싶은 정치세력 하나가 이렇게 형성돼 보지도 못하고 사라졌다. 다음은 정의당이다. 한 때 나는 노회찬, 심상정의 심정적 지지자였다. 한국사회에 대한 그들의 헌신을 존경했고, 그들의 이념적 변화에 동의했다. 그것이 상식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시민이나 이정희와의 연대는 진정한 의미의 대중정당을 만들려는 포석으로 이해했다. 그런데 이게 웬 날벼락인가. 한번 갈라섰던 세력과 다시 연합을 형성할 때는 그들의 기질과 깜냥을 상수로 놓고 정치력으로 풀 생각을 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첫 번째 결별보다 더욱 심한 내상을 남겼다. 진보정치 전체에 심각한 타격을 줬다. 정의당이라는 당명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부도덕한 이명박 정권의 안티테제에 불과한 것 아닌가. 아무리 <정의란 무엇인가>가 유행했기로서니, 진보를 표방하면서 이렇게 추상적이고 도덕주의적인 이름을 내걸다니, 나는 충격을 받았다. 내가 지지하고 싶은 또 하나의 정치세력은 이렇게 깃발을 잃고 헤매는 중이다. 노동당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픈데, 그들이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옳다는 걸 내가 어느 정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거기에 문제가 있다. 현재의 노동당은 이념적 견결성을 중시하는 일군의 현장노동자들과 아카데미즘의 집단인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이들의 정치는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노동당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활동을 하는지 대중인 나는 알 수가 없다. 단순히 돈이나 인력의 문제인 것 같지는 않다. 언론 탓도 하지 말기 바란다. 일단 외생 변수는 논외로 치자. 중요한 것은 당이 무엇을 하고 있느냐이다. 나는 노동당의 내부 사정을 잘 모르지만, 당 활동의 대부분이 기존 지지자에 맞춰져 있는 것 같다. 거칠게 말하면, 자기들끼리는 뭔가를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밖에서는 알 도리가 없다. 나름 관심을 갖고 있는 나 같은 사람이 이 정도라면 1000명 중 지지자가 6명에 불과한 현실은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6·4 지방선거 당시 서울 강북구 수유동 광산네거리에 지방의회 선거 후보들의 선거 현수막이 걸려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고백하자면, 나는 이번 비례대표 선거에서 녹색당을 찍었다. 깊이 생각한 결과는 아니었다. 한국에도 녹색당 같은 대안정당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녹색당 지지율은 0.55%였다. 나의 한 표는 소수점을 넘지 못하고 헐떡이고 있다. 근대의 과제조차 해결하지 못하고 매사에 치열한 전투를 벌여야 하는 대한민국 정치판에서 녹색의 꿈은 정녕 요원한 것인가, 나는 절망하고 있다. 통합진보당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다른 지면을 통해 여러 차례 얘기한 바 있기에 중복을 피하기 위해서다. 마지막으로 새정치민주연합. 현재의 김한길-안철수(줄여서 김철수라고 부르겠다) 공동대표 체제에 대한 민심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쟤들 뭥미?’ 정도인 것 같다. ‘여 8 야 9로 야당이 졌다’는 <한겨레21>의 지방선거 관련 표지 제목을 보고 무릎을 친 사람이 많을 것이다. 민한당 이후 최약체 야당, 혹은 새누리당 2중대라고 비난받아도 싸다고 생각할 정도다. 김철수의 행보를 보면, 어떻게 하면 조선일보(로 대표되는 극우세력)의 욕을 먹지 않을 수 있을까 늘 노심초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의 무능은 새누리의 시대착오적 무능과 달리 ‘기회주의적 무능’이라고 부를 만 하다. 김철수가 당권을 장악하게 된 것 자체가 조선일보와 새누리당의 프레임에 새정치민주연합이 말린 결과라고 나는 생각한다. 조선일보와 새누리당은 사실상 새정치민주연합의 최대 계파인 ‘친노’를 공공의 적으로 만들어 손발을 묶어버렸다. 김철수는 바로 그 조-새 프레임에 편승해 당권을 장악했고, 조-새 프레임의 유지보존을 위해 복무하고 있다. 김철수가 당권을 갖고 있는 한 조-새 프레임은 계속될 것이다. #나가는 말 짐작했겠지만, 나의 관심은 새누리당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지금까지 그러했듯이 그들도 변할 것이고 진화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변화는 진보정치가 변하는 정도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진보의 역동성이 보수의 변화를 추동했다는 건 굳이 부연하지 않아도 역사적으로 검증된 사실이다. 다만 새누리당은 지금까지 늘 외형만 변했을 뿐 본질은 바뀐 적이 없다. 새누리당이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진보정치가 촉발하는 변화의 압박이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보정치가 위협적이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대중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대중들이 그들에게 별 관심이 없다. 문제는 진보정치도 대중들에게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는 사실이다. 어려운 말을 좋아하고 잘난 체 하기 좋아한다. 자기가 정치하는 걸 헌신이라고 생각하고 알아봐주길 바란다. 그래서 목이 뻣뻣해지는 것이다. 또 하나, 진보정치의 치명적인 약점은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정치에 관심 없는 정치인이라니 대체 무슨 말인가. 결국 정치는 세 싸움인데, 세를 늘리는 데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는 말이다. 지금까지 진보정치는 세를 줄이는 마이너스 게임을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큰 집을 같이 짓고 같은 지붕 아래 각자의 방을 쓰면서 거실을 공유하는 식으로 세력을 넓혀야 한다. 그 과정에서 정치의 또 다른 영역, ‘생각이 다른 사람과 공존하기’를 배워야 한다. 이건 순전히 아마추어로서 하는 얘긴데, 이런 상상을 해본다. 정의당과 노동당과 녹색당이 당을 합치면 어떨까. 혹은 이들이 한꺼번에(아니면 일부라도) 새정치민주연합에 들어가 새정치민주연합의 왼쪽 블럭을 차지하면 어떨까. 나는 김부겸의 대구 출마를 지지하고 존경하지만(그 반대의 의미로 부산 출마를 거부했던 안철수를 경멸하지만) 지역주의는 당분간 여전히 힘이 셀 것이다. 지역주의의 존재를 인정하고 정당판을 새로 짜야하지 않을까. 새누리와 새정치민주연합의 양당 구조에 균열을 내는 방법이 반드시 제3당을 통해서인지 자문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를 기억하는 분이 많으시리라. 나는 지금 네마자데의 집을 찾아 좁은 골목길을 빙글빙글 돌아야 했던 아마드의 심정이다. 아, 정녕, 내 정당의 집은 어디인가.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중입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525 | 추천: 0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아감벤의 책 『호모 사케르』는 읽기 쉽지 않지만 요새 같은 시국에 느끼는 바도 적잖이 준다. ‘호모 사케르’란 무엇인가. 우리말로 정확히 번역하기는 힘들다. 라틴어 ‘사케르(sacer)’에는 ‘신에게 바친’, ‘신성한’, ‘축성한’, ‘엄숙한’ 등의 의미가 있는가 하면, ‘저주할’, ‘가증스러운’, ‘저주받은’, ‘흉악한’, ‘금지된’ 등의 상반되는 의미도 동시에 지닌다. 이 상반되는 의미를 적절히 엮으면 ‘가까이 할 수 없는’, ‘범접하기 힘든’ 등의 우리말 번역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사케르’는 어떻게 해서 모순되는 의미를 동시에 지니게 되었을까. 아감벤은 고대 로마법에 등장하는 ‘호모 사케르’의 논리와 의미를 따라가며, 근대 권력의 본질 내지 폭력의 구조를 읽어내려고 한다. 요지를 풀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2-3세기경의 라틴어 문법학자인 페스투스(Sextus Pompeius Festus)는 ‘호모 사케르’를 이렇게 규정한다: “호모 사케르란 사람들이 범죄자로 판정한 자를 말한다. 그를 희생물로 바치는 것은 허용되지 않지만 그를 죽이더라도 살인죄로 처벌받지 않는다. 사실 최초의 호민관법은 ‘만약 누군가 평민 의결을 통해 신성한 자로 공표된 사람을 죽여도 이는 살인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명기하고 있다. 이로부터 나쁘거나 불량한 자를 신성한 자라 부르는 풍습이 유래한다.” 호모 사케르는 제물로 바쳐질 수 없다는 점에서 종교 질서로부터 배제된 존재이면서,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해도 죽인 자가 죄를 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법질서로부터도 배제된 존재이다. 아감벤에 의하면, 어떤 사람을 ‘호모 사케르로 만들어가는 행위(사크라시오)’는 “살인죄에 대한 면책과 희생제의로부터의 배제라고 하는 두 가지 특성이 결합되”어 나타난다. 아감벤은 이것을 이중적인 예외 상태라고 부르면서, 근대 권력이라는 것이 예외의 정상화를 본질처럼 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즉, 호모 사케르는 권력이 인간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인간을 포획하는, 다시 말해 권력이 인간을 위해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인간을 배제하고 자신을 위해 있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는 것이다. 아감벤은 “무언가를 배제시킴으로써만 그것을 포함하는 이러한 극단적인 형태의 관계를 예외관계”라고 부른다. 단순화시켜 말하면, 예외여야 할 것을 정상이 되도록 하는 곳에 권력이 있다는 것이다. 호모 사케르는 법으로부터 배제되었기에 예외적 존재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법으로부터 배제된 존재로 인해 법의 정체성이 확인된다. 호모 사케르는 법으로부터 배제하는 방식으로 법을 유지하고, 제물로 바치지 못하게 하는 방식으로 신성을 유지하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는 것이다: “법은 주권적 예외 상태에서 더 이상 자신을 적용시키지 않고 그것으로부터 물러남으로써 예외 상태에 적용되듯이, 호모 사케르 역시 희생물로 바쳐질 수 없음의 형태로 신에게 바쳐지며 또한 죽여도 괜찮다는 형태로 공동체에 포함된다. 희생물로 바칠 수는 없지만 죽여도 되는 생명이 바로 신성한 생명이다.”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의 문제 발언이 지난 11일 저녁 (KBS) 9시 뉴스를 통해 보도되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국방송 화면 예외는 더 이상 예외가 아니다. 도리어 법의 한 복판으로 들어온다. 아감벤은 이 지점에서 폭력적인 근대 권력의 본질을 밝혀내고자 한다. 그에 의하면,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해도 죽인 자가 죄를 받지 않는, 그렇게 법적으로 배제된 존재야말로 법이 배제를 통해 자신을 유지해가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호모 사케르는 타자를 재타자화시켜 사실상 실종시키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우리 사회의 실상을 잘 드러내준다는 것이다. 호모 사케르는 그저 고대 로마법에만 등장하는 옛 사례가 아닌 것이 분명해진다. 오늘날은 다원화된 시대이다. 다원화한 개인의 방 속에 들어가면 더 이상 타자를 묻지 않을 정도로 다원화되어 있다. 타자를 재타자화시켜 결정적인 순간에는 실종시켜버리는 모습이 호모 사케르를 떠올리게 한다. 타자가 사실상 실종되었기에 누군가에 의해 살해를 당한다 해도 책임을 물을 근거도 찾지 못한다.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지 두 달이 넘었지만, 수습되기는커녕 수습할 주체가 없다는 사실만 폭로된다. 개인들의 아픔은 난무해도 전체를 수습하는 국가는 없다. 청와대의 인사 참사도 계속된다. 대통령은 한편에서는 일본의 역사적 과오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자학적 일제 식민사관을 가진 이를 총리로 임명하려 한다. 표를 의식해 이 종교 저 종단 찾아다니며 통합을 외치면서도, 개신교 근본주의 시각을 가진 이를 총리로 내세워 이념적 분열도 불사한다. 왜 이런 인사 참사가 지속되는 것일까. 권력이라는 것이 인간을 배제시키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권력 자체가 타자를 실종시키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사케르한’ 것이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는 분명히 예외적 사건이어야 한다. 계속되는 청와대 인사 참사 역시 예외적 사건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들이 더 이상 예외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실상이고 핵심이라는 것을 이제는 다 알게 되었다. 권력은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지 타자를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권력은 인간을 버림으로써 존재하는 폭력적인 것이라는 사실만이 분명해질 뿐이다. 세월호 참사든 정부 각료 인선 참사든, 참사를 수습시키는 것은 시간이고 망각이다. 타자를 인간으로 묶어주는 국가는 없다. 국가는 거대한 틈새, ‘공(空)-간(間)’이다. 그것이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재난일지 모른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에 재직 중입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473 | 추천: 0
권보드래/ 인권연대 운영위원 작년엔 이탈리아 추리소설을 여러 권 읽었다. 범죄와 추리 자체도 그렇지만, 이탈리아의 역사와 문화, 이탈리아인들의 자부심과 고민을 엿보는 게 꽤 흥미진진했다. 파테가 뭐지…? 음, 이런 음식을 먹는군. 에, 귀족제의 흔적이 아직도 이렇게 남아 있단 말야? 헛, 2차 대전 당시 복잡했던 거야 당연하지만, 한때의 이 납치극이라니. 마피아에 붉은 여단에, 폭력과 정치가 복잡하게 얽힌 까닭인지, 납치사건이 2만 건에 달한 해도 있었다고 한다. 동유럽 이주민들과의 갈등 등, 시선이 끌리는 사실이 그밖에도 여럿 있었지만, 오래도록 생각하게 된 것은 좀 엉뚱한 세부였다. 브루네띠며 첸니 같은 이름을 가진 추리소설의 형사들은 베니스며 아씨시 같은 유명한 도시에 산다. 헌데, 멀쩡히 출근한 이들이 걸핏하면 집에 가는 거다. 열두 시도 한참 남았는데 “나 다녀올게.” 손을 흔들곤 어슬렁어슬렁 집으로 향한다. 걸어가는 길에 제철 채소가 보이면 구경하고 꽃가게에서 꽃도 한 묶음 산다. “다녀왔어!” 아파트에 도착해 문을 열어젖히면 소스 끓이는 냄새가 풍겨온다. 아이구야, 어지간히 아내를 괴롭히는 남정네구나, 생각하는데 심지어 중‧고등학교 다니는 애들마저 들이닥친다. 맙소사. 그 사이 아내는 국수를 삶고 샐러드를 만든다. 여자의 노역이 딱하면서도 군침이 돈다. 부러워진다. 설마 이탈리아인들이라고 다 저렇게 집밥을 먹어대는 건 아니겠지. 나중에 보니 파스타를 만들던 아내는 대학 교수다. (남편이 설거지도 안하고 사라지는 걸 보니 소설대로라면 이탈리아는 여자가 살기 좋은 땅은 아닌 듯하다.) 형사가 경찰서로 돌아가는 건 두 시를 좀 넘겨서다. 저녁에 초과 근무를 하긴 하더라. 심문을 위해 시내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여덟 시쯤 집에 간다. 아슬아슬 배(버스가 아니다)를 잡아타고 도착해선 또 저녁. 휴일을 반납하고 종일 일할 때도 있지만, 대체로 이탈리아 형사들의 일상은 살 만하게 굴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이 대략 귀족의 후예거나 귀족집안 사위로 설정돼 있는 까닭도 있을 게다. 소설이 얼마나 현실과 가까운지, 계급적 지표가 어떻게 작용한 건지 다 점치긴 어려우나 추리소설대로라면 이탈리아인들은 ‘저녁에 있는 삶’은 물론이고 ‘점심이 있는 삶’마저 사는 거다. 한국처럼 가족주의가 뿌리 깊은 나라라니 일단은 가족과 함께, 그러나 자주 친구와 함께. 남부 유럽은 다 그렇게 사나… 점심시간에도 일요일에도 당최 문 연 상점을 찾아보기 어려웠던 스페인도 기억난다. 관광안내소도 문 닫았냐고 물었더니(일요일임에도!) 근무 중인 스페인 경찰은 두 손을 모아 하늘로 치켜올려 보이더니 다시 그 손을 귀 옆에 대곤 자는 시늉을 해 보였다. “일요일은 기도하고 쉬는 날”이라며. 사진 출처 - 경향신문 생각건대 일차적 문제는 규모다. 우리처럼 서울이 비대해진 상태로는 이탈리아나 스페인 같은 삶의 양식을 상상하기 어렵다. 인구의 절반 이상이 수도권에 모여 살고 출퇴근에 왕복 세 시간을 허비하는 사람이 허다한 상황에선 말이다. 버스에 전철에 다시 버스를 이용하면 내 경우 집에서 학교까지 걸리는 시간은 1시간 15분, 인천이 직장인 남편은, 급행 시간이 맞을 경우 2시간 40분쯤이 걸린단다. 차를 타면 시간이 각각 40분과 1시간 30분쯤으로 줄어드니 자주 차를 이용하게 되는데, 종종 이탈리아 형사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히곤 한다. 그런 작은 세계에 살면 좋으련만. 서울 태생이고 늘 대도시 주변에서 살아온 내가 과연 작은 세계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요즘은 다 합쳐 1천 가구가 좀 넘는,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아파트 마을에 사는데, 집 앞 분식점에서도 빵집에서도 아는 체하고 마트 계산원들이 내 멤버쉽 번호까지 외워버리는 그만큼의 규모가, 아늑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다. 작은 마을이라면 <익명의 섬>이나 <이끼> 같은 음험한 공모가 생각날 때도 있다. 현재로선 작은 세계에 거주할 가능성이 아득해 보이니 다 쓸데없는 걱정인지 모르겠다. 한국이 언제 ‘서울공화국’을 면하랴 싶고, 나 또한 서울에서 떨어지긴 두고두고 망설여진다. 그래도 용기 있는 이들이 없지 않다. 홀홀히 작은 세계를 향해 떠나는 모습을 가끔 본다. 박정희 시절 이래 지방의 몫은 줄어들기만 한 것 같은데, 그래도 힘써 지키는 이들이 있어 아직도 버티는가 보다. 저마다 기억할 만한 고향이 있고, 매력적이고 아담한 도시가 여럿 있고, 그리하여 대도시도 그 냄새를 품게 되는 그런 세상을 공상해 본다. 공상도 힘이려니 싶어 열심히 공상해 본다. 어쨌거나 친구, 이제 이탈리아 형사들처럼 집에서 점심 먹게 되는 거야? 그래도 밥은 같이 해야 해! 권보드래 위원은 현재 고려대학교 국문학과에 재직 중입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496 | 추천: 0
장경욱/ 인권연대 운영위원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과 관련하여 극우보수세력의 민낯을 보니 그 행태가 가관이다. 극우보수세력이 누구인가? 찾기도 쉬워졌다. 종북을 선동하는 무리들이다. 그들은 빨갱이 사냥으로 친일 경력을 세탁하였다. 자신들에게 불리한 국면에서 국면 전환용 색깔론, 종북론 카드를 꺼내는 것은 이들의 케케묵은 생존 수법이다. 외세에 작전지휘권을 맡기지 않고는 단 하루도 불안해서 살 수 없는, 자주와는 거리가 먼 허약 체질의 사대얼치기들이다. 이러한 자들이 해방 이후 우리 사회의 주류의 자리를 꿰차고 국민을 겁박하고 호령하고 있다. 이들이 하도 무섭고 유치하고 야비하고 더러워서 제대로 맞서지 못하고 눈치 보며 피하고 무시하는 사이, 대한민국호는 비정상 사회가 되고 말았다. 비정상의 우리 사회를 그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조차 그 실체를 분간하지 못하는 기형 사회로 만들었다. 우리는 분단야만공포지배체제에 맞서 싸우지 못하고 사회의 주인으로서 행세를 하지 못하고 있다. 그 사이 극우보수세력이 그 자리에서 온갖 기득권 놀음을 하며 방탕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고, 생존에 힘겨워 떡고물을 바라며 양심을 팔아버린 이들이 극우보수세력에 기생하며 그들이 채워준 완장을 차고 빨갱이 사냥, 종북 사냥의 대를 이어오고 있다. 최근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탈북자 단체들이 그들의 행동대가 되고 있다. 그들은 소위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이 증거날조 등에 의한 간첩 조작 사건임이 외국의 공문 회신에 의하여 명명백백히 밝혀졌음에도 이를 인정하지 않고 민변과 중국 대사관의 커넥션을 내돌리고 간첩 조작의 진상 규명보다도 국가조작원의 휴멘트 상실을 더 걱정하며 국면을 전환시키려 혈안이 되었다. 간첩 조작 사건이 기정사실로 밝혀져 우리가 보기에 더 이상은 퇴로가 없어 보이는데도 도대체 사과와 항복을 모르고 막무가내로 자멸의 판인지도 모르고 판을 키우고 있다. 지금까지 간첩 조작을 무시로 해왔던 것을 더 잘 알면서 간첩조작을 사실로 인정하게 되면 마치 얼마 있지 않아 한국사회가 밑동부터 흔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필사적이다. 그 필사적 안간힘에는 스스로 지켜보고자 하는 허위와 조작의 가공 세상이 너무나 덧없이 신기루처럼 무너져버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 더욱 초조하고 조바심이 생기는 것일 게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 유우성과 그의 인권옹호를 위해 변호하는 필자를 비롯한 변호인단에 대하여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견강부회식의 꼬투리를 잡아가며 여론을 호도하는 극우보수세력의 행태는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다. 하룻밤 편안히 쉬어볼 수 없을 정도로 국정원발 단독 보도로 여론을 비틀어 왜곡시켜 보려 밤마다 장난을 쳤다. 간첩 조작의 피해자인 유우성과 그 가족들을 상대로 염치도 없이 신분위조범, 사기꾼, 부자, 거짓말쟁이 등 온갖 부정적 인상과 혐오감, 증오감을 부추기고자 생난리를 쳤다. 약자에 대하여 그토록 무차별 공격을 선동하면서도 극우공안세력의 범죄를 은폐하고 물타기 하는데 앞장섰다. 상상을 초월하는 국가폭력의 생모습이 다 드러났는데도 국가폭력에 대하여 일언반구 준엄한 심판의 목소리는 좀체 하지 않는다. 국가폭력의 피해자에 대하여 공격하는 그 정신머리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인권을 논할 자격이 있는지조차 스스로 모르는 청맹과니들이다. 이런 극우보수세력이 친일과 반공, 반북을 생명으로 이어온 굴절의 역사를 가진, 그 과거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정의를 바로 세우고 양심을 회복하기는 난망하다. 정의와 양심을 바로 되찾기 위해서는 하루 빨리 이들을 추방해야 마땅하다. 유치하기 그지없고, 저질스럽고 야비하기 일쑤인 그들의 머리에서는 증거날조를 인정해도 간첩 조작은 아니란다. 법무부장관의 입에서, 검찰총장의 입에서, 집권여당의 지도부의 말에서 너무나 뻔뻔스럽게 당당히 소리쳐 나온다. '탈북자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피고인 유우성씨가 지난 4월 25일 오전 서초동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간첩 혐의 무죄를 선고받은 뒤 소감을 밝히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가히 전대미문의 일이란 이런 상황을 일컫는 것일 게다. 지구상에서 유일무이하게 그들이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나 공포에 겁먹은 국민을 상대로 대증요법으로 계속하여 통하는 정신분열병적 비이성과 비상식의 논리 아닌가. 하루 빨리 이 전도된 세상을 바로 세워야 한다. 극우보수세력을 우리사회의 기강을 위해서 한시라도 빨리 쫓아내야 한다. 피해자 입장에서 당하다 보면, 때론 악마와도 같고 때론 허깨비와도 같은 악성 스토커다. 이런 수준의 스토커의 존재는 이 지구상에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보고된다. 왜 생겨났나를 보면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분단의 비극 때문이다. 이 유치하고 교활하기 그지없는 극우보수세력은 그 존립기반을 오로지 남북분단이라는 적대적 상황을 숙주로 하여 성장해 왔다. 너무나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진 이 스토커는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이라는 카운터 한방을 맞고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려운 그로기 상태에 빠졌다. 국가보안법을 무기로 사용하는 극우공안세력과 이들의 뒷배가 되어 이 나라를 야만적 사회로 통치하고 있는 극우보수정치력들, 이들의 부정부패와 불의가 가득찬 기득권을 지켜주기 위하여 거짓과 공포로 국민들을 수십 년간 겁박하며 국민들을 기만하여 선동해 왔던 극우보수언론들의 최후의 날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지금 그들은 사건조작보다 사건은폐가 더 어렵고 눈을 부릅뜨고 그들의 만행을 지켜보는 국민들의 결집에 놀라 기절초풍하고 있다. 더 이상은 감히 이 야만적 극우보수세력의 독점지배체제에 길들여져 저항하지 못할 국민들이 아니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은 우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기생해 오며 기득권을 유지하며 서민을 괴롭혀 왔던 극우보수세력들에게 아킬레스건이 되고 있다. 유우성은 간첩이 아니라 간첩 조작의 피해자다. 극우보수세력과 이에 부화뇌동하며 국민들에게 공포를 조장하는데 일가견이 있는 극우공안수사기관의 종사자들은 유우성은 간첩이 틀림없다고 강변하며 자신들의 죄행을 은폐하기에 급급하고 뒤로는 온갖 날조된 허위의 기사를 국정원 명의를 생략하여 극우보수언론에 전파하고 있다. 극우보수언론들이 내놓은 허위 날조의 기사는 다시 극우보수단체가 인용하여 무차별적 고발을 하고 있다. 이런 일고의 가치도 없는 언론 기사를 인용한 고발 사건에 대하여 각하를 하지 아니하고 수사권을 남용하여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 유우성을 괴롭히는데 수사기관마저 나서고 있다. 이 악순환이 이제 종식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최후를 예견하며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다. 친일세력이 반일로 둔갑한 8.15 광복 당시와 같이 자기 존재를 부정하거나 위장하기 없기다. 지금 간첩 조작의 피해자 유우성과 그 변호인들에 대하여 계속 갖은 공격을 하는 극우보수세력의 민낯 그대로 그 역할을 계속하기다. 머지않아 온 국민이 유우성과 그 변호인들의 편에 서서 마음을 모아주는 그 날, 정의가 바로 서고 양심이 회복되고 인간성이 고양되는 한국사회의 찬연한 빛을 모두가 느끼는 그 때, 그대들은 퇴로가 없고 봉쇄된 암흑천지의 터널에서 절망과 회한을 곱씹고 죗값을 받아야 할 것이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544 | 추천: 0
김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난 1993년의 10월 10일 발생한 서해훼리호 참사 사건의 수사 검사였다. 군산공설운동장에 모인 수많은 유가족과 시민들의 오열과 절규를 보았다. 292구의 싸늘하게 변해버린 주검을 수도 없이 보았다. 과적․과승, 복원력 문제, 운항 과실 등의 수사 결과도 발표되었고, 이래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수 없이 나왔었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를 목도하면서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었고, 오히려 모든 것이 악화되고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경험으로부터 전혀 배운 바도, 실천한 바도 없었다. 21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통곡은 나의 기억 속 깊은 곳에서 잠들어 있다가, 세월호가 침몰하면서 그 고통과 기억까지 되살아났다. TV 앞에서 훌쩍거리는 마누라에게 보지 말라고 소리쳐 놓고는 내가 먼저 채널을 바꾸어 다시 쳐다보며 훌쩍거린다. 서울시청 앞 분향소에 참배하고 나와서 마누라는 벌건 대낮에 내게 소주를 사달라고 한다. 처음에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참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맘 놓고 울지도 못하고 남의 눈치를 보고 있는 내 꼬락서니에 너무도 화가 났다. 그래서 눈물이 나오면 그냥 울어 버렸다. 내가 살면서 경험한 몇 개의 잔인한 날짜에 죽을 때 까지 잊지 못할 또 하나의 날자가 추가되었다. 10·26, 12·12, 5·18, 6·10 그리고 4월 16일. 사람이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두려움에 살이 떨린다. 돈에 눈이 멀어 인간을 짐짝 취급하는 피도 눈물도 없는 천민자본주의와 맹신자들. 부패하고 더러운 자본가로부터 떨어지는 떡고물에 눈이 멀어버린 감독기관들. 보신에 눈이 멀어 그렇게 처절히 수장되어 가는 생명을 구경만 한 무책임하고 무능력한 조국. 사고 전에도 사고 후에도 빈 깡통임을 백일하에 드러낸 대한민국. 우리는 그렇게 인간 파괴의 현장을 ‘어어’ 하면서 멍하니 쳐다보기만 하였다. 그것은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하였다. 우리가 조국이라 불렀던 대한민국의 민낯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17일 저녁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추모 5·17 범국민 촛불행동’ 집회에참여한 시민들이 희생자를 추모하고 정부의 무능한 대처를 규탄하며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지하철을 탔다. 어린 학생들이 중간고사가 끝났다고 온통 재잘되는 소리가 너무 시끄러웠다. 그런데 갑자기 그 소란스러운 잡음이 종달새의 노래처럼 들렸다. 지하철을 내릴 때까지 조용히 눈을 감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좋아서 교사를 한다는 어느 선생님 말씀이 비로소 이해가 갔다. 지인 변호사는 아이들이 시험을 망쳤는데 애썼다고 등을 두드려 주었다고 한다. 그랬더니 아이들의 눈빛이 달라지더란다. 애들이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너무도 고마워서 그랬다고 한다. 자살을 미화하는 생각에는 전혀 동의하지 않고, 동의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 안산 단원고 교감 선생님의 타계 소식을 접하면서 “아, 이렇게 죽음이 아름다울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의 고귀한 넋이 어린 학생들을 돌봐주실 것이라는 덧없는 위안이 들기도 했다. 이렇게 세상이 달라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세월호를 통해 다시 한 번 깨닫고 있다. 통상 인간들은 사건을 경험할 때 억울함 → 분노 → 포기 → 망각의 단계로 이어진다는데 이번에도 그럴까. 그렇게 끝나 버리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숱한 대형 참사들을 보면서도 그렇게 망각해 버리지 않았던가. 서해훼리호,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씨랜드 참사 등을 겪으면서 우리는 무엇을 하였는가. 오히려 지금까지 더 큰 대형 참사가 없었던 것이 신기하지 않는가. 잊고 싶다.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기억할 의무를 지고 있다. 우리는 기억할 권리도 갖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을 포기한 자본과 권력이 얼마나 무고한 인간의 생명과 삶을 파괴하는지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 이제 각 주요 항구에 세월호 참사를 기억할 수 있는 기억비를 세워 고귀한 넋을 기리고, 경각심을 갖도록 해야 한다. 세월호를 인양해 전시하고, 재난 기억 박물관을 만들어 참사의 교훈과 교육 공간으로 사용해야한다. 그리고 조국이 앞장서서 희생자 유가족 등에게 정당한 배상도 깔끔하게 해주어야 한다. 이게 부끄럽게 살아있는 조국이라 불리는 대한민국과 기성세대가 우리 후손과 가족들에게 해줘야 할 최소한의 도리 아닌가. 더러워서 침 뱉을 곳도 없는 조국이라면, 조국을 버리는 것이 낫다. 김희수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490 | 추천: 0
김창남/ 인권연대 운영위원 1974년, 당시 14세였던 전동희씨는 울릉도에서 조그만 고기잡이배를 가진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세 동생과 가난하지만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다. 아버지가 며칠째 집으로 돌아오지 않아 걱정스러워 하던 어느 날 밤 집으로 닥친 낯선 남자들에게 끌려가는 어머니를 따라 경찰서에 가야했다. 거기엔 한 동네 사는 집안 어른들도 여럿 끌려와 있었다. 한쪽 구석에 우두커니 서서 밤을 지새고 아침이 밝았을 때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너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더 조사할 것이 있어 갈 수가 없다. 너희들은 가도 되니, 이제 집으로 가거라.” 그날 경찰서로 끌려가던 어머니의 모습을 본 후 다시 어머니를 만나기까지 10년이 흘러야 했다. 그 사이 아버지는 간첩의 누명을 쓰고 사형을 당했다. 14살의 나이에 졸지에 가장이 되어 동생들을 돌보아야 했던 전동희씨의 삶은 신산했다. 학교에서 간첩의 딸이라며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던 그녀는 17세 때 학교를 자퇴하고 울릉도를 떠나 미싱 일을 하며 어린 동생들을 키웠다.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갖게 된 충격과 절망, 고단한 삶으로 인해 그녀의 몸은 일찍부터 망가졌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만성신부전증 진단을 받은 전동희씨는 지금껏 인공투석기에 의존해 생명을 이어오고 있다. 전동희씨는 이른바 울릉도 간첩단 사건의 피해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 사건에 연루된 그의 아버지는 사형을 당했고 어머니는 10년간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일가친척들 상당수가 징역을 살아야 했고 고향을 떠나야 했다. 1974년 3월15일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이 사건에 47명이 연루되었는데 이 가운데 세 명에게 사형이 집행되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오랫동안 감옥살이와 보안 관찰로 고통을 받았다. 울릉도 간첩단 사건은 조작이었다. 울릉도 주민과 1960년대 중반 일본 연수를 다녀온 전라북도의 몇몇 인사들을 억지로 엮고 고문을 통해 간첩단 사건을 만들어낸 것이다. 박정희 군사정권이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잠재우기 위해 만들어낸 많은 조작 사건 가운데 하나다. 얼마 전 이 사건의 피해자들은 40년만의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지난1974년 7월 울릉도간첩단 사건 선고공판 모습(자료사진) 사진 출처 - 연합뉴스 부끄럽게도 나는 이 사건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사건에 대해서는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었지만 이 사건에 대해서는 그저 이름만 얼핏 들어 알고 있는 정도였다. 이 사건에는 유명 인사가 끼어있지 않았고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로 구성된 터라 그만큼 미디어의 주목을 덜 받았던 탓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역사에 대한 나의 무지 때문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 전말을 제대로 알게 된 것은 연극 <상처꽃-울릉도1974>를 통해서다. 울릉도 사건 피해자들의 심리 치유 과정을 담은 연극이다. 피해자들이 당한 고문 과정이 재연될 때 지켜보는 나도 고통스러웠다. 그들의 아픔이 내 아픔 같아서였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간첩으로 조작되고 징역을 산 후 세상을 등진 채 외롭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했던 그들이 상담과 치유과정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깊게 연민하는 모습을 볼 때는 나 역시 눈물이 울컥 솟았다. 인간이란 이렇게 서로를 공감하며 함께 아파하고 함께 눈물을 흘리는 존재란 사실이 새삼 깊게 다가왔다. 이 연극을 보며 세월호 참사를 떠올렸다. 전혀 다른 시대의 전혀 다른 사건이지만 죄 없는 사람들이 어처구니없이 고통 받고 목숨을 잃었다는 점에서 두 사건은 닮아 있다. 무엇보다도 새삼 국가의 존재 의미를 묻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렇다. 40년 전의 사건이 국가에 의한 사법살인이자 폭력이었다면 40년 후의 사건은 국가의 무능과 부패, 무책임이 낳은 또 하나의 사실상 살인이다. 사건의 진행 과정에서 언론이 제 역할을 못하고 도리어 피해자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자행했다는 점에서도 마찬가지다. 40년 전 당시 대통령의 딸이 지금 대통령이란 사실은 우리에게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지난 40년, 우리는 무엇을 이루었는가. 세상은 얼마나 달라졌는가. 40년 전 정부는 모든 국민들을 향해 찍소리도 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윽박질렀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기에 우리는 그나마 사회적 변화를 이룰 수 있었다. 적어도 40년 전의 무고한 피해자들이 늦게나마 무죄 판결을 받을 정도의 변화 말이다. 그런데 이 ‘가만히 있으라’는 소리는 40년 후에도 반복 재생된다. ‘가만히 있으라’는 선내 방송을 말없이 따랐던 수백 명의 아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다시 ‘사회불안’ 때문에, ‘경제 위축’ 때문에 가만히 있으라는 소리가 곳곳에서 나오고 언론에 의해 반복 재생된다. 또 다시 그 말을 듣고 정말 가만히 있는다면 또 다른 누군가가, 또 다른 아이들이 죽어나갈 것이다. 우리는 모두 세월호의 탑승자들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 김창남 위원은 현재 성공회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477 | 추천: 0
이재승/ 인권연대 운영위원 * 이 글은 2014년 2월 10일 상해사범대학에서 열린 위안부문제에 대한 한중일 연구자들의 공동세미나에서 발표한 것이다. 내용의 일부는 다른 글(국가범죄와 야스퍼스의 책임론, 사회와 역사 101호, 2014/3)에 게재되었지만 위안부문제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공식적으로 표시하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전에 한일정부간에 위안부문제에 대한 짧은 대화가 개최되었으며, 이 상황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고, 2014년 4월 29일에는 세종대 박유하 교수와 와다 하루키 선생이 주축이 되어 국민기금을 위안부 문제의 해법으로 다시 들고 나왔다. 이에 국민기금에 대해 간단한 반박문을 쓰기 보다는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위해 상해에서 발표한 생각을 (약간 가필하여) 그대로 싣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필자는 국민기금이 모든 현실적 제약을 극복하는 ‘신의 한 수’는 아니라고 본다. 국민기금을 주도하는 분들이 책임을 더욱 정치적이고 공식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국민기금은 기본적으로 정부의 공식적 책임과 시민의 사사로운 책임을 혼동하고 있으므로 시민이 조성한 부분을 중심으로 기금의 생명력을 회복시켜서 다시 생각해보자고 제안한다. 어떤 경우에도 국민기금을 일본정부의 공식적 책임을 갈음하는 수단으로 남용해서는 안 된다. 동시에 위안부 피해자 개인들이 원하는 경우에 이 기금을 그들을 위해 지원금으로 활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중대한 인권침해행위에 대하여 일본시민의 진정한 책임은 일본국의 책임을 촉구하고 형성시키는 데 있으므로 기금이 일본의 주요도시에 전쟁과 식민강점기 동안에 자행된 온갖 인권침해를 기억하는 기념관을 설립하는 데에 활용되었으면 한다. 일본정부가 공식적인 책임을 부인하는 현 단계에서는 가장 바람직한 국내적 정치라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 양국의 시민들의 공동모금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한 인권침해가 재발하지 않도록 세계를 바꿀 때까지, 정부가 책임을 인정할 때까지 시민은 정치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1. 열망의 도덕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일관계에서 과거사 정리나 외교관계의 정상화는 미국의 정치군사적 구도와 맞물려 조율되었다. 최근에 미국은 일본 정치인들에게 아시아에서 과거사라는 암초를 적당히 우회하며 신중하게 처신할 것을 훈수하였다.1) 이러한 미국의 시각에서는 아베 수상의 야스쿠니 신사참배가 무모한 행태로 비쳤을 것이다. 그러나 신사참배가 순전히 개인적 돌출행동일까! 우리는 더 깊은 곳에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 이와 관련해서 도고 시게노리(東郷茂徳)의 손자인 도고 가즈히코 교수는 <아사히신문>을 통해 전쟁의 책임에 대해 일본인 자신이 총괄적인 입장을 갖지 못한 점이 큰 문제라 지적하였다.2) 1946년에 야스퍼스도 <죄의 문제>에서 비슷한 어조로 말했다. 외부세계에서 부과하는 법적인 죄나 정치적인 죄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깨우침(Erwachen)과 전향(Verwandlung)만이 독일인의 영혼에 직결된 본질적 사항이라고 갈파했다.3) 지금도 일본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침략의 범죄’를 내면에서부터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 만일 역사적 대과를 근본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일본사회가 새로운 삶과 새로운 협력의 시대를 여는데 필요한 동력과 자산을 과연 확보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기 때문이다.  필자는 2000년 일본군 성노예전범 여성국제법정의 결론에 따라 위안소제도는 인도에 반한 범죄이고, 이 범죄의 주범은 천황과 일본군대라고 규정한다. 위안부동원과 성적 노예화가 국제인도법 및 국제인권법상의 중대한 범죄이므로 일본정부는 진실을 규명하고 인정하고, 주요범죄자들을 처벌하고, 피해자들에게 공식적으로 사죄하고, 배상책임을 이행하고, 다양한 수준의 만족과 재발방지의 보증도 제공해야 한다. 반보벤과 바시오우니 원칙(van Boven - Bassiouni principles)4) 은 중대한 인권침해행위에 대한 국가의 책임사항들을 상세하게 열거하였다. 이에 비추어보면 위안부 문제에서 일본정부의 책임은 간단히 돈만 건네주고 털어버리는 ‘엷은 의무’가 아니라 진정성에 기초하여 다층적인 처방을 요구하는 ‘두터운 의무’라고 생각한다. 법철학자 풀러의 개념을 차용하면 일본의 책무는 의무의 도덕(morality of duty)이 아니라 열망의 도덕(morality of aspiration)에 속한다.5)   좋은 법학은 검투사로서 상대를 법리적으로 제압하려는 것이 아니라 고통 받은 인간에게 귀의하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다. 또한 문제를 땜질하여 미봉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 정의로운 세계를 향해 문제를 활짝 열어놓는 것이다. 좋은 법학은 개개의 피해자를 구제하는 것을 넘어서 피해를 야기하는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려는 열망의 정치다. 필자는 위안부동원의 범죄성 및 법적 책임과 관련해서 일본당국의 부인주의적인 입장과 시민사회의 비판적인 입장6) 모두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법적 책임 유무를 이 자리에서 논의하기 보다는 좋은 규범질서로 가는 길을 찾아보겠다. 필자는 야스퍼스의 ‘정치적 책임’과 ‘도덕적 책임’개념을 활용하여 일본사회에서 널리 퍼진 도의적 책임론의 근거를 비판하고 일본시민은 위안부문제에 대하여 어떤 책임을 지는지를 밝혀보겠다. 2. 도의적 책임론의 불가능성  일본정부는 일찍부터‘강제성이 없다’, ‘매춘은 당시에 범죄가 아니다’, ‘불법행위라도 당시 국가는 무책임이다’, ‘한일협정에서 위안부 문제도 일괄 타결되었다’, ‘청구권이 시효로 소멸하였다 ’등 다양한 이유로 법적 책임을 부정하였다. 일본은 위안부 피해자들의 청구권을 철저하게 외면하는 가운데 이른바 <국민기금>을 조성하였다. 역사왜곡과 부인주의가 팽배한 일본의 정치풍토를 감안할 때 기금은 일종의 묘수와 같았지만 기금의 전제인 도의적(도덕적) 책임론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필자의 결론은 논리적 서열상 법적 책임이 없다면 도덕적 책임은 논의할 필요도 없으며, 일본정부나 일본시민이 국민기금을 조성하여 아름다운 도덕적 책임까지 이행할 까닭이 없다는 것이다. 한편 법적 책임이 있다면 일본정부는 공식적인 책임이행방식을 강구해야 하며, 더구나 열망의 도덕에 맞게 책임을 완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 땅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이 모두 사라진 후에도 남는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오누마 교수는 국민기금 조성을 독려하면서 <아사히신문>에 다음과 같은 취지로 썼다. “...필자는 보상은 정부가 해야 하며, 국민으로부터 모금을 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바꿔치기 한 것이라는 비판이 있지만, 전쟁과 식민 지배는 정부만이 한 일은 아니며, 매스 미디어나 지식인을 포함한 국민도 관련이 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그 책임은 일개 내각에 맡겨서는 안 되며,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과거의 잘못을 자각하면서 보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7) 그러나 이와 같은 국민기금 발상은 국가(정부)책임과 시민의 책임(도덕적 책임)을 혼동하고 한마디로 책임의 미적분(微積分)을 그르쳤다. 국민기금은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금전을 쥐어주는 것이 기본취지였으므로 누가, 어떤 형식으로, 무슨 근거로 금전을 제공하는지는 오누마 교수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법적 책임의 이행이 아니라 고령의 빈곤여성에 대한 인도적 지원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즉 국민기금은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선의의 시혜를 베풀려는 것이다. 그러나 선의와 권리는 차원이 다르다. 위안소제도는 전쟁과 식민지배하에서 발생한 뜻하지 않는 불상사가 아니라 일본국과 일본군대가 자행한 심각한 인권침해행위이다. 도덕적 책임은 여기에 주된 논점이 아니므로 부차적인 수준에서 언급할 수 있을 뿐이다. 도덕적 책임은 직접적직접적인 가해자 범주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 피해자에 대해 간접적인 방식으로 감당하는 책임이다. 도덕적 과오가 간접적이었듯이 도덕적 책임을 이행하는 방식도 간접적이어야 한다. 도덕적 책임은 소극적 협력, 부작위, 묵인, 지지 등의 행태에서 발생하는 것이며, 직접적인 범죄자들의 형사책임을 논리적으로 전제한다. 형법이론상 방조범이 정범을 전제하듯이 도덕적 책임도 법적 책임을 전제한다.  일본은 국민기금을 발족시키는 데에 독일이 주변국가와 관계에서 시행했던 화해방안을 참조하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같은 독일식 해법은 2000년의 <기억책임미래재단>으로 이어졌다. 독일 재단은 기본적으로 강제노동과 관련하여 기업의 책임을 묻는 과정에서 파생되었으며, 독일정부가 유대인 청구권문제에 대하여 지금까지 해결해온 방식의 연장선에 있다. 일본이 독일의 전례에 따라 기금방안을 구상하였다고 전해지지만 문제해결방식을 제대로 터득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우선, 50년대부터 독일정부가 국내외적으로 제한적이지만 꾸준히 책임인정 정책과 경제적 보상정책을 가동하던 까닭에 다른 국가와 피해자들이 독일에 대해 신뢰를 가질 수 있었다. 이에 비하면 일본은 과거사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기를 거부하였고,8) 필요에 따라 수시로 책임을 수반하지 않는 수사적 얼버무림으로 일관하였다. 다음으로, 독일은 피해자와 협상을 통해서 피해자를 포함하여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런데 일본의 국민기금은 이러한 협상과정이나 책임대화 없이 일방적으로 진행되었다.9) 일본당국이 지속적으로 법적 책임을 부인하던 마당에 뜬금없이 피해자들에게 기금을 수령하라며 은밀히 접근하는 것에 피해자들 다수는 모욕감을 피할 수 없었다. 피해자의 의사, 이 정도로 됐다는 의사, 용서하고 화해하겠다는 피해자의 의사가 중요하다. 피해자는 다양한 각도에서 갈등 자체에 대해 자신의 목소리를 낼 권리(conflicts as property)10)를 갖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갈등의 해결과정에 주체로서 참여함으로써 관계회복과 권한강화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게 된다.11) 절대자인 신이라도 피해자와 상의 없이 가해자를 용서한다면 그것은 부당한 용서에 지나지 않는다.12) 화해와 책임에도 문법이 있는데 국민기금은 묘수가 아니라 문법의 파괴였다. 국민기금은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일본인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찜찜함을 덜기 위한 자기사면(self-amnesty) 프로그램에 가깝다. 피해자의 권리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한국정부의 행태도 문제이다. 정부는 피해자의 권리를 중시해야 하는데도, 관계가 나쁠 때는 이 문제를 외교적 공세수단으로 사용하고, 좋을 때는 무마와 침묵 속에서 이른바 외교적 보호(diplomatic protection)를 행사하지 않았다. 외교적 보호의 행사여부는 중대한 국제인도법 침해나 심각한 국제인권법 위반행위에 대해서는 국가의 의무사항으로 보아야 한다. 피해자 권리장전도 피해자가 속한 국가의 정부는 피해자의 권리실현을 위하여 국제적 관계에서 필요한 법적, 외교적, 영사적 수단을 완전하게 가동해야 할 의무를 정하고 있다.13) 피해자의 구제받을 권리는 국가가 처분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3. 야스퍼스에게 길을 묻다  야스퍼스는 1946년에 <죄의 문제>를 통해 전쟁과 잔혹행위에 대한 독일인의 죄(Schuld)와 정치적 책임(politische Haftung)을 검토하였다. 그는 책임을 법적인 책임(죄), 정치적 책임(죄), 도덕적 책임(죄), 형이상학적 책임(죄)으로 나누었으며, 다양한 책임개념(책임요소)을 통해 전후 독일인의 생활에서 정신적 혁신을 추구하였다.    법적 책임은 법―국내법이든 국제법이든―을 위반하여 범죄를 자행한 개인의 형사책임을 의미한다. 야스퍼스는 여기서 법적 책임의 근거를 실정법에서만 구하지 않고 자연법과 인권에서도 찾는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14) (그가 민사책임을 제외하고 형사책임만을 법적 책임으로 거론한 것은 용어상으로 정확하지 않다.) 정치적 책임은 전쟁을 자행했던 정치적 지도부와 대표자를 선출하거나 용인한 데에 대한 국민 전체의 집단적인 책임을 의미한다. 도덕적 책임은 전쟁과 인권침해를 자행하는 체제에 저항하지 않고 체제에 협력하고 이데올로기를 수용하고 지배의 이익을 공유한 개인들의 책임을 의미한다. 국민의 정치적 책임과 시민 개인의 도덕적 책임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한 사회의 대다수 시민들은 도덕적 과오를 범한다. 사악한 체제를 타도하기 위해 저항운동가로서 장렬한 삶을 살았다면 그는 도덕적 책임을 면한다. 그러나 독일인으로서 그러한 체제를 무너뜨리지 못한 점에 대해서는 그도 집단적 정치적 책임을 함께 진다. 마지막으로 형이상학적 책임은 누군가 희생당하였는데 나는 살아남았다는 근원적 죄책감이나 원죄를 의미한다. 연대의 파괴에 대한 인류의 공분과 죄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책임 중에서 정치적 책임만이 집단적 책임이고, 형사책임, 도덕적 책임, 형이상학적 책임은 개인적 책임이다. 법적 책임과 정치적 책임은 공적인 차원에서 연합군당국이나 법정이 외적으로 추궁하고, 도덕적 책임과 형이상학적 책임은 내면적으로 양심이 법정의 역할을 담당한다. 공적인 정화와 사적인 정화가 동시에 추구된다. 야스퍼스는 책임론의 전면에 법적 책임을 두고, 그 다음에 국민(민족)전체의 정치적 책임을 인정하고, 이러한 책임구조를 도덕적 책임과 형이상학적 책임이 떠받치게 하고 있다. 야스퍼스의 구도에서 보자면 ‘법적 책임은 존재하지 않지만 도덕적 책임이 존재한다’나 ‘법적 책임을 이행할 수 없으니 도덕적 책임을 이행하겠다’와 같은 언술은 가능하지 않을 것 같다.15)  심각한 인권침해와 관련하여 어떤 특정한 개인(예컨대, 집단살해를 자행하는 권력을 비판조차 하지 않는 대학교수)에게 ‘법적 책임은 존재하지 않지만 도덕적 책임이 존재한다’는 진술은 논리적으로 성립한다. 그러나 집단살해와 관련하여 특정한 사회(해당국가, 해당국민)에 대해 ‘법적 책임은 존재하지 않지만 도덕적 책임은 존재한다’는 진술은 논리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개인에게나 가능한 표현을 집단 전체에게 무분별하게 사용한 사례이다. 한 사회 안에서 어느 누구도 법적인 책임을 지지 않는 사태에 대해서라면 어느 누구의 도덕적 책임도 존재하지 않는다. 책임의 순서상 법적 책임은 다른 어떤 책임보다 논리적 우선성을 갖는다.16) 따라서 사회전체가 법적 책임을 지지 않지만 도덕적 책임을 진다는 진술이 적중할만한 대상은 천재지변뿐이다. 결국 국가폭력에 대한 국가책임이나 국가범죄를 부정하면서 동일한 사태에 대해 도덕적 책임이나 형이상학적 책임을 운위하는 것은 자기기만이자 허위의 성실성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법적 책임을 피하기 위하여 도덕적 책임이나 정치적 책임을 거론할 수 없으며, 오로지 법적 책임, 공식적 책임을 조성하기 위하여 정치적 도덕적 형이상학적 책임을 논의하는 것이다. 4. 일본시민은 어떤 책임을 지는가?  위안부에 대해 누가 어떤 잘못을 범했는가? 일본통치자, 군대지휘부, 위안소 설치자 등은 인도에 반한 범죄의 주범이다. 위안소 모집업자나 위안소관리자, 수송관여자, 위안소 이용군인 등은 그 하급범죄자로 분류할 수 있다. 이들도 모두 형사처벌의 대상이지만, 처벌범위를 주범들의 수준에 제한하는 것은 합목적성의 문제이다. 성노예제는 동시에 군국주의 일본제국의 범죄이기 때문에 범죄 피해자에 대한 일본정부의 법적 책임은 불가피하다. 또한 일본정부가 이러한 책임을 현재까지 이행하지 않고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책임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제 일본 시민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전쟁 당시에 성년시민은 어떤 책임을 지는가? 위안소의 설치와 일본군의 존재가 일본제국의 이익이자 일본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도덕적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 또 위안소 제도가 운영되던 시점에 일본 군국주의에 동조하거나 소극적으로 묵인했던 사람들도 도덕적 책임을 진다. 만일 위안소 제도를 비판하고 전쟁을 반대하다가 처벌받았거나 일본군국주의를 붕괴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시민이라면 이러한 도덕적 비난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도덕적 비난은 전쟁과 범죄를 막기 위하여 개인이 최선을 다했는지에 달려있다. 그러나 도덕적으로 때가 묻은 사람뿐만 아니라 과오를 범하지 않는 사람도 정치적 책임은 면할 수 없다. 자신이 지배받는 방식에 대해서도 국민은 책임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군주국이든 공화국이든 차이가 없다. 국민은 자신들 속에서 그러한 지도자(천황)와 군부와 체제가 출현한 데에 책임을 져야 한다. 정치적 책임은 객관적인 결과책임이며 정치공동체의 운명에 대한 사회적-실존적 책임이기도 하다. 범죄의 체제를 자력으로 타파하지 못한 국민은 승전국이 부과하는 속죄조치, 배상요구, 숙정, 주권제한, 공민권제한을 수용해야 한다. 국민전체의 정치적 책임은 실제로 국가책임에 대응한다. 야스퍼스가 책임을 논하던 당시에 책임의 주체인 독일국이 연합국에 의해 해체되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독일민족이 책임주체로 등장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일본이라는 국가가 엄연히 존재하는데 국민기금의 형태로 시민 개인들이 책임주체로서 나서는 것은 이상하다.  만일 위안소라는 중대한 범죄가 자행되던 시점에 아동이었거나 전후에 태어난 일본인에게는 이에 관한 도덕적 책임을 거론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정치적 책임이 존재한다.17)  전후세대에게 정치적 책임이란 일본국민이라는 사실의 반사적인 효과라고 할 수 있지만, 한편 자신이 일본사회가 제공하는 다양한 편익을 향유하고 있으므로 일본의 사회제도가 과거에 야기했던 과오를 시정하고 사회제도를 더욱 완전하게 만들 책무라는 의미에서 새로운 역동성을 가지고 있다. 일본시민의 정치적 책임이란 역사적 부정의를 시정하지 않고 불법사실조차 부인하는 일본정부로 하여금 법적이고 공식적인 책임을 인정하고 응분의 과업을 이행하도록 촉구하고 관철시키는 데에 있다.18) 야스퍼스의 정치적 책임은 앞서 언급한 대로 불법행위에 대한 속죄와 배상을 포함하고 있다. 야스퍼스는 <독일인의 책임>에서 배상책임을 이른바 법적 책임에 포함시키지 않지만, 배상책임이 법적 책임이라는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어쨌든 일본 시민사회에서 새롭게 사용하는 정치적 책임이라는 용어가 어떤 맥락을 담고 있는지 궁금하다. 시민의 도덕적 책임과 정치적 책임을 논의하는 이유는 한 마디로 더욱 공식적인 형태의 책임을 만들자는 데에 있다. 그것은 공식적인 법과 제도로 말해져야 하는 부분이다. 다양하고 모호한 책임개념들의 숲 속에서 근본적으로 책임을 회피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책임 개념을 불살라 버릴 필요가 있다. 와다 하루키 선생도 지식인으로서 책임에 대하여 공적인 이성을 사용하는지, 사사롭게 정치적인 외교가의 역할을 자임하는지 궁금하다.  일본 시민이 위안부 피해자를 위하여 국민기금에 기부한 행위는 아동구호기금에 기부한 것과 의미상 같다. 만일 기부자들이 다른 특별한 느낌을 가졌다면 위안부제도가 일본정부의 과오라는 무의식이 작동한 결과다. 어쨌든 전후세대의 일본인은 위안부 피해자에 대해 법적인 죄나 도덕적인 죄로 인하여 죄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들의 법적-도덕적 책임사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책임을 이행하도록 국가를 매조지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그들에게도 정치적 책임이 존재한다. 결론적으로 국민기금은 일본의 국가책임이나 법적 책임을 대신할 수도 없으며, 정부와 시민이 결합한 멋진 하이브리드 처방이 아니라 도덕적 무분별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시민의 성금은 일본정부의 공식적 법적 책임이 이행된 이후에 또는 그것과 병행해서 투입되는 경우에만 진정한 가치를 가진다. 시민의 성금부분만이 별도 운영되어 평화를 촉진하는 기금으로 활용되었으면 그나마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일본시민은 3.1운동희생자나 관동대지진에서 학살당한 조선인에 대해서는 어떠한 해법이나 개념을 가지고 사유하는지도 궁금하다.19) 금전적 배상이 아니라도 최소한 진실규명, 기념일지정과 공식적 사죄는 기념일마다 (지금까지 못했던 세월만큼은) 표명해야 하지 않을까? 남경대학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위안부 문제도 시간이 지나면 위안부피해자들이 모두 사망하고 몇 세대가 흐른다면 역사적 부정의(historical injustices)의 사례로 남는다. 일본의 시민은 전쟁과 식민치하에서 광범위하게 자행된 인권범죄에 대하여 일본정부의 포괄적인 책임을 관철시키는 정치를 개시해야 한다. 일본정부의 과거 국가범죄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현재 국가책임을 부인하는 일본정부의 부인범죄 행태에 대해서도 책임을 공유한다. 부인행위는 과거 성노예 범죄를 현재화하고 지속시키는 새로운 실종범죄이기 때문이다. 이제 일본의 시민이 져야 할 기본적인 정치적 책무는 일본정부로 하여금 국가범죄를 시인하고 그 책임을 공식적으로 이행하게 하는 책임의 정치를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일본시민이 응답할 의무이고, 일본사회의 변혁적 정의의 문제이다. 5. 책임대화  위안부제도의 문제는 가해자(직접적인 가해자들이 사망했다고 하더라도 국가는 존속하므로)와 직접적인 피해자의 관계가 존속하는 동안만 유효한 주제는 아니다. 즉 전략적 인내로써 극복할 수 있는 유형의 문제가 아니다. 오로지 금전적 배상의 시각에서만 사태를 본다면 주제의 유효성이 직접적 관계에 한정된다고 착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직접적인 관계 너머에 있는 관계들과 정치적 대의가 존재한다. 이러한 인권침해가 재발하지 않아야 한다는 대의를 주목할 때 인권피해자 권리장전이 사회구조의 변혁과 세계관의 혁신을 강조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피해자 권리장전은 돈을 제공하는 것으로 만사를 털어버리려는 편의주의적 발상을 거부한다. 인권침해의 피해자는 직접적으로 피해를 당한 위안부여성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들을 통해 침해당하고 있는 모든 인간이 피해자이기도 하다. 진실을 알고, 법적인 구제를 받고, 인권침해적인 관행을 근절시키는 것에 대한 권리는 사회구성원 전체, 나아가 인류의 권리이기도 하다. 사회의 구성원 전체는 역사의 진실을 알 권리를 가지며, 진실을 기억할 의무를 가지며, 법적 책임이 제대로 이행되고 있는지를 감시할 책무를 진다.20) 그러한 책무는 지상에서 전시폭력과 성폭력, 전쟁을 제거하려는 인류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한일간의 관계에서 각국은 논의와 협상을 각자의 입장에서 시작하겠지만 보편적 시민성의 관념 아래서 자아와 공동체를 성찰하고 그 진정성을 드러내고 구현해야 한다. 협상은 결국 자신의 국가를 각기 만들어가는 과정이며, 그 협상이 각 사회의 인권과 도덕수준에 긍정적으로 피드백 하도록 해야 한다. 책임대화란 칸트식으로 표현하면 모든 대화의 참여자들이 자신의 국적과 공직에 사사로이 매이지 않고 피해자의 인권보호와 평화질서의 구축을 위하여 자신의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하여 과오와 책무를 확립하는 소통이자 깨달음의 과정이다. 이러한 책임대화가 정부간 원탁에서만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회고해보면, 위안부문제를 본격적으로 탐구하고 이를 한일관계의 현안으로 부각시킨 것도 일본의 학자들과 시민사회였으므로 이들이 이러한 책임대화의 발원지라고 할 수 있다.  얼마 전에 <산케이신문>은 고노담화가 발표되기 전에 한국정부와 사전조정을 거쳤다는 점을 폭로하며 담화의 의미를 깎아 내렸다.21) 그러나 한일간의 의견교환은 담화의 진정성에 대한 의혹사유라기보다는 책임대화의 일종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물론 이 일을 통해 당국자의 비밀스러운 대화를 넘어 시민사회에 참여기회를 부여함으로써 진정한 책임대화를 발전시킬 필요성을 느낀다. 위안부 문제의 해법을 논의하는 데에 한국사회가 도달한 과거청산수준도 중요한 고려사항이다. 국가폭력에 대한 규범적 의식이 비약적으로 제고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2011년에 울산 국민보도연맹원 집단살해사건과 문경 주민 학살사건에 대한 손해배상판결에서 보듯이 대법원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에 군경에 의해 자행된 집단살해에 대해 소멸시효를 배제하였다.22) 한국의 과거청산운동은 한일과거사에도 피해자의 인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하였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그리하여 2011년에 헌법재판소는 위안부 피해자의 청구권행사에 협력하지 않겠다는 한국정부의 외교적 방침을 위헌적이라고 규정함으로써 새로운 책임대화를 재촉하였다.23) 이러한 판결은 일본의 최고법원이 했어야 마땅한 일이다. 국제법적으로 말하면 중대한 인권범죄에 대하여 소멸시효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국제법의 원칙이다.24) 물론 일본정부는 위안부들의 소송에 대해 국내법적인 시효소멸론을 깨알같이 주장하였다. 그러나 국내법적인 시효소멸론도 고작해야 금전적 배상의 문제에 부분적으로만 연결될 뿐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위안부문제에서 발생하는 책무는 금전적 배상으로 종결되는 의무의 도덕이 아니라 화해와 만족을 지향하는 열망의 도덕에 해당한다.  최근 동아시아 국가들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면 19세기 말 청일전쟁의 시대로 되돌아가지 않았는가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 진정한 의미에서 이해와 우호에 입각한 평화상태도 아니며, 국제적인 법의 지배도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쟁과 식민지배의 아픈 역사를 시민의 관점에서 어떻게 청산하고 평화질서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위안부 문제를 비롯하여 과거사문제들에 관하여 시민주도적인 포괄적인 대안을 마련하고 정부 간의 책임대화를 유도하고 평화의 관점을 확산시키는 것이 동아시아에서 희망을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정부와 권력간의 해법보다는 급진적인 방안을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1) 특히 Armitage & Nye, The U.S.-Japan Alliance, Anchoring Stability in Asia, 2012 http://csis.org/files/publication/120810_Armitage_USJapanAlliance_Web.pdf 2) 한겨레신문, 국제사회의 수그러지지 않는 아베 비판,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japan/ 617540.html 3) Jaspers, Karl, Die Schuldfrage- Zur politischen Haftung Deutschlands, Piper, München, 2012(1946) 4) 인권피해자 권리장전(Basic Principles and Guidelines on the Right to a Remedy and Reparation for Victims of Gross Violations of International Human Rights Law and Serious Violations of International Humanitarian Law. Adopted and proclaimed by General Assembly resolution 60/147 of 16 December 2005) 제20조 국제인권법의 중대한 위반행위와 국제인도법의 심각한 위반행위로부터 야기되는 경제적으로 환산가능한 다음과 같은 손해들에 대해서는 위반행위의 중대성과 각 사건의 상황을 감안하여 적합하고 비례적인 범위 안에서 금전적인 피해배상(compensation)이 제공되어야 한다. (a)신체적 또는 정신적 장애 (b)고용, 교육 및 사회적 편익 등 기회의 상실 (c)물질적인 손해와 잠재적 소득의 상실을 포함하여 소득의 상실 (d)정신적 고통 (e)법적 원조 또는 전문가 원조, 약과 의료 서비스, 심리적 사회적 서비스에 소요된 비용 제21조 재활조치(rehabilitation)는 의료적 심리학적 보살핌뿐만 아니라 법률적 사회적 서비스를 포함해야 한다. 제22조 만족(satisfaction)은 필요한 경우 이하의 전부 또는 각 부분을 포함한다. (a)지속적인 침해의 중단을 겨냥한 효과적인 조치 (b)진실의 공개가 추가적인 피해를 야기하지 않거나 피해자, 피해자의 친척, 증인 그리고 피해자를 돕기 위하여 또는 위반행위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하여 개입한 사람들의 안전과 이익을 위태롭게 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사실의 검증과 진실의 완전한 공개 (c)실종자의 소재, 납치된 아동들의 신원, 피살자의 시신의 수색, 시신의 발견, 신원확인, 피해자의 명시적 또는 묵시적 희망, 가족들의 문화적 관례에 따른 시신의 매장에서 지원 (d)피해자 및 그와 밀접하게 연결된 사람들의 존엄, 명예, 권리를 회복시키는 공식적인 선언 또는 사법적 결정 (e)사실의 인정과 책임의 수용을 포함한 공식적 사과 (f)위반행위에 책임 있는 개인들에 대한 사법적 행정적 제재 (g)피해자에 대한 기념과 헌사 (h)국제인권법과 국제인도법 연수와 모든 수준의 교육자료에 위반행위의 정확한 설명을 포함할 것 5) 의무의 도덕은 채무의 상환처럼 채무관계를 간단히 종식시킬 수 있는 사항이지만, 열망의 도덕은 그 의무를 얼마나 충실하게 이행하였는지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열망의 도덕은 고전적인 덕으로서 훌륭함(arete)이나 완전함을 지향한다. Fuller, Lon L., The Morality of Law rev. ed., Yale University Press, 1963, 3쪽 이하. 6) 조시현, 일본군위안부 문제에서 역사와 법적 책임, <민주법학> 제45호, 2011/3, 81-112쪽; 요시미 요시아키, <일본군 위안부 그 역사의 진실>, 역사공간, 2013. 7) 오누마 야스아키/정현숙(역), 일본은 사죄하고 싶다, 전략과 문화, 2007, 58쪽. 8) 2012년 11월 4일에 뉴저지주 <스타 레저 Star Ledger>에 현재의 아베 총리를 비롯하여 주요 정치인들이 위안부 강제동원을 부정하는 광고를 게재하였다. 9) 이러한 문제점은 지적은 야노 히샤시, “독일의 과거극복”, 나카노/김부자(편), <역사와 책임>, 선인, 2008, 259-60쪽. 10) Christie, Nils, “Conflicts as Property”, British Journal of Criminology, Vol. 17(1977), 1-15쪽. 11) Laplante, Lisa J., "Negotiating Reparation Rights: The Participatory and Symbolic Quotients”, Buffalo Human Rights Law Review Vol. 9(2012), 217쪽 이하. 12) 소설가 이청준의 <벌레이야기>에서 살인자가 스스로 신의 용서를 받았다고 말하자 정신적으로 완전한 붕괴를 겪은 피해자 어머니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이재승, 화해의 문법― 시민정치의 관점에서 ―, <민주법학>  46호, 2011/7, 134쪽 이하. 13) 피해자권리장전 12조(d) 피해자가 국제인도법의 중대한 위반 또는 국제인권법의 심각한 위반에 대한 구제에 대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법적, 외교적, 영사적 수단을 이용할 수 있게 할 것 14) 위안부제도의 범죄성 여부와 관련하여 일본의 실정법과 국내관행을 탐색하는 시도는 면책근거를 제공할 우려가 있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에 전쟁범죄와 인도에 반한 범죄를 탄핵하기 위한 법규범은 범죄적 체제의 국내법에서만 발원하지 않았다. 전쟁법(국제인도법), 국제관습법 그리고 인권법과 자연법이 전후청산의 법적 틀로 작동하였다. 독일의 법철학자 라드브루흐(Radbruch)는 이 시대의 규범적 요구를 <법률적 불법과 초법률적 법>에서 논증하였다. 이재승, <국가범죄>, 앨피, 2010, 457쪽 이하. 15) 필자의 판단으로는 도덕적 책임을 논하는 사람들에게 도덕적 책임(과오)의 내용이 동일한 의미를 갖는 것 같지는 않다. 일본의 책임과 관련해서 일부는 도의적 책임을 직접적인 귀책사유(과오)에서 찾지 않고 이른바 식민지 관리부실책임에서 찾는 것 같다. 이들은 한결같이 도의적 책임이나 구조적 책임을 거론하면서 직접적이고 법적인 책임을 부인한다. 특히 박유하, <제국의 위안부>, 뿌리와 이파리, 2013; 박유하에 대한 비판은 이재승, 감정의 혼란과 착종, http://www.aporia.co.kr/bbs/board.php?bo_table=rpb_co mmunity&wr_id=39 16) 오누마 교수는 도덕적 책임이 법적 책임보다 중요하다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일본인은 법보다 도덕을 중요시하는 전통이 있다는 식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이는 현대 자유주의 사회에서 책임의 문법에 반한다. 더 중요한 도덕적 책임을 이행할 수 있으나 사소한 법적 책임을 이행할 수 없다는 뜻인가? 오누마, 앞의 책, 58쪽. 17) 칸트의 사형수 처단론은 죄의 정치적 오염이나 책임의 상속에 관한 이야기로서 정곡을 찌른다. “시민사회가 구성원 전원의 동의에 의해 해체되는 경우, 가령 섬에 살고 있는 국민이 서로 헤어져서 전 세계로 흩어지기로 결정한 경우에도 감옥에 남아 있는 최후의 살인자까지 그전에 처형되어야 한다. 이는 누구든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응분의 값을 치르게 하기 위해서이며, 또한 처벌을 관철시키지 않았던 국민에게 살인죄(Blutschuld)의 책임이 전가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그를 처벌하지 않는다면 국민은 정의의 공적인 위반에 대한 가담자로 간주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Kant, Immanuel, Metaphysik der Sitten, Frankfurt: Suhrkamp, 1991, 455쪽. 18) 영은 역사적 부정의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사회구조의 변혁에서 찾는다. Young, Iris Marion, Responsibility for Justice, Oxford University Press, 2011, 171쪽 이하. 19) 반인도적 범죄(crimes against humanity)의 개념으로 식민지배책임을 논의하는 독보적인 시도로는 이타가키 류타, “탈냉전과 식민지배책임의 추급”, 나카노/김부자, <역사와 책임>, 317쪽 이하. 그러나 일국의 정치적 주권을 강압적으로 박탈하는 식민강점의 범죄(crime of colonization)와 식민체제 아래서 자행된 심각한 인권침해로서 식민지배범죄(crimes of colonial regime)을 구별하는 것이 항상 가능한지도 의문이다. 왜냐하면 식민강점(colonization)이 법적으로 허용된 행위(lex permissiva)라고 전제한다면 식민체제에 저항하는 행위를 말살하고 식민체제를 유지하는 데에 투입한 권력남용도 허용된 행위로 규정할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예컨대 관동대지진에서의 조선인학살은 어느 모로 보나 인도에 반한 범죄로서 식민지배책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지만, 3.1운동 학살사건에서는 정치적 독립이라는 대의명분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운동과 학살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3.1운동을 독립운동이라고 이해하면 학살을 인도에 반한 범죄로 규정할 수 있는 반면, 식민체제를 정상적인 것으로 인정한다면 3.1운동은 폭동이며,  학살은 인도에 반한 범죄가 아니라 정당한 진압행위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따라서 식민강점의 범죄가 논리적으로 우선성을 가진다. 물론 이에 대한 책임추궁방식과 식민체제하의 범죄에 대한 책임추궁방식은 다르게 전개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20) Bámaca-Velásquez v. Guatemala 사건에서 미주인권위원회는 진실에 대한 권리를 가족구성원 뿐만 아니라 사회전체가 보유한 권리라고 기술하였다. 위원회는 진실에 대한 권리의 집단적 본성을 민주체제의 발전에 필수적인 정보에 대한 사회의 접근권이라고 정의하였다. 미주인권법원은 Los Dos Erres 학살사건에서 권리의 집단적 차원을 강조하고 민주적인 사회에서 중대한 인권침해사건에 대한 진실은 반드시 알려져야 한다는 점을 고려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Groome, Dermot, “The Right to Truth in the Fight against Impunity”, Berkeley Journal of International Law Vol. 29(2011), 175쪽 이하. 21) 연합뉴스, "고노담화 내용 한국과 사전 조정…기만적" <산케이http://news.naver.com/main/read.nhn? 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6678502(2014-1-1) 22) 대법원 2011.6.30. 선고 2009다72599 판결; 대법원 2011.9.8. 선고 2009다66969 판결. 23) 헌재 2011. 8. 30. 2006헌마788.; 조시현,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한ㆍ일 청구권협정에서의 중재절차, <민주법학> 제48호, 2012/3, 197-238쪽. 24) Hessbruegge, Jan Arno, “Justice Delayed, Not Denied: Statutory Limitations and Human Rights Crimes”, Georgetown Journal of International Law, Vol. 43, 2012, 336~385쪽. 이재승 위원은 현재 건국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795 | 추천: -1
위대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일요일부터 내리던 비는 다음날에도 하루 종일 내리고 있습니다. 봄 가뭄을 해갈할 수 있을 정도가 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때로는 너무 많이 내려서 때로는 너무 적게 내려서 힘들게 하기도 하지만 오늘처럼 비 오는 날이면 마음도 차분해집니다. 일 때문에 밖에 나갔더랍니다. 비가 갑자기 많이 내려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우산을 그냥 들고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마침 들어가는 건물 중앙 현관에는 비에 젖은 우산을 비닐 봉투에 넣을 수 있는 도구가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아주머니(아마도 그 건물에서 일하시는 미화원 아주머니인 것 같습니다)께서 우산을 들고 들어가는 사람에게 일일이 비닐 봉투를 열어 우산을 씌워 주고 계셨습니다. 보통은 세워진 우산비닐 도구(?)에 우산이 들어갈 만큼 비닐 봉투를 직접 벌리고 자기 우산을 접어 직접 우산을 집어넣지만, 보아하니 버려진 비닐 봉투가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아주머니는 옆에 놓여 있는 통 속에 버려진 비닐 봉투를 다시 꺼내어 건물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우산을 쉽게 넣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은 묵묵히 자기 우산을 들고, 아주머니가 열어준 비닐 봉투에 우산을 집어넣은 후 건물 안으로 들어갑니다. 아주머니는 들어오는 사람의 우산을 접는 것도 도와주십니다. 계속해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빗물 떨어지는 우산을 접어주고, 우산 넣을 비닐 봉투를 꺼내어 비닐 봉투를 열어 주고, 다시 버려진 비닐 봉투를 꺼내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참 조용한 모습입니다. 사실 아주머니가 그렇게 비닐 봉투를 꺼내 열어주시면, 버려진 비닐 봉투를 재활용할 수 있어 좋은 일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엔 비닐 봉투에 잘 넣을 수 있도록 비에 젖은 우산 접는 일까지 도와주시니 손쉽게 우산을 비닐 봉투에 넣을 수 있어 기분도 좋아집니다. 비에 젖은 우산을 비닐 봉투에 넣을 수 있는 도구가 건물에 비치된 것도 상당히 오래전 일이지만 이상하게도 우산을 집어넣을 때면 항상 비닐이 잘 열리지 않거나 두, 세장이 한꺼번에 딸려 나오거나 우산을 집어넣던 비닐 봉투가 찢어져서 우산 집어넣는 일도 만만치 않을 때가 있습니다. 비에 젖은 우산을 접으려 할 때 손에 빗물이 묻는 것도 그다지 기분 좋은 일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모든 이들이 당연하다는 듯 비에 젖은 우산을 비닐 봉투에 넣은 후 건물로 총총히 들어갑니다. 참 조용합니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 들리지 않는 조용한 건물 현관입니다. 고맙다는 말, 감사하다는 인사는 아마도 내가 했으면 힘들거나 귀찮거나 어려웠을 일을 누군가 도와주거나 대신 해주었을 때, 아니면 좋은 대접 또는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았다고 느낄 때, 배려 받았다고 느낄 때 하는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도 사람을 가려가면서 하는 것이 요즘 모습입니다. 조금이라도 자기보다 약자라고 보이는 사람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경우라면 더 합니다. 서울시내 한 건물 입구에 설치된 우산 비닐 포장기로 한 시민이 우산에 비닐을 씌우고 있다. 사진 출처 - 서울신문 어려서부터 남이 해주는 것을 받아보기만 했기 때문인지, 지나치게 돈을 많이 벌어 최저임금 수준의 돈을 위해 일하는 사람을 보면 우스워 보여서인지, 너무나 명예롭고 훌륭한 일을 하고 있어서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은 하찮아 보여서인지, 아니면 인간이 원래 그렇게 태어나서인지 알 수는 없지만, 충분히 고마운 일이고 감사한 일인데도 그냥 그 자리를 지나칩니다. 아~ 너무 바빠서였을까요?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는다는 것, 그러나 그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참 메말랐다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은 자신이 그러한 도움을 받고 배려 받은 기억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 사람의 도움이나 배려는 나에게 익숙하고 당연한 것이 되어 고마움이나 감사의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돈과 명예와 지위로 재편해 버린 우리 사회에선 다른 사람에게서 받는 도움과 배려가 늘 익숙하고 당연해서 이젠 고마움을 느낄 겨를이 없어져 버린 듯합니다. 아니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이 사라진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위대영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520 | 추천: 1
윤다정/ 인권연대 운영위원 중국의 황제는 ‘천자’라고 불렸다. 황제는 하늘의 아들이자 신의 뜻을 대행하는 자였다. 나라는 황제의 것이었으며, 그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황제가 주관한다고 여겨졌다. 이 말을 뒤집으면 황제는 모든 일에 책임을 져야만 한다는 뜻도 된다. 천재지변이 대표적이다. 혜성이 나타나고, 일식이 일어나고, 가뭄이 들고, 물난리가 나는 것은 모두 나라님의 잘못이었다. 나라님이 하늘의 뜻을 제대로 받들지 못했으니 징벌 받아야 마땅했다. 해서 고대 사회에서는 큰 기근이 들거나 하는 자연재해가 벌어지면 족장의 목을 치곤 했다. 과학이 발전했다. 미신은 힘을 잃었다. 기상 현상의 원인이 한 사람의 도덕적 흠결 내지는 비행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모든 사람이 잘 알고 있다. 사회도 같이 발전했다. 절대 권력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왔다. 인본주의 속에서 싹이 튼 자유·평등·박애의 정신 속에 주권은 차츰 국민에게로 돌아갔고, 민주주의는 ‘글로벌 스탠다드’가 됐다. “모든 인민이 공동체를 지탱하게 되리라.” 민주사회의 제1원칙이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권력은 분산되어야 한다.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하기도 하거니와, 그렇게 함으로써 권한을 나누어 가진 정부 기관이 서로를 견제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껍데기는 민주적이되 알맹이는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민주제, 대통령제보다 전제 왕권제에 더 익숙했다. 책임을 나누어 가진다는 것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건국 초기부터 반복된 일인 독재가 그러한 인상을 부추겼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례식에 참가하기 위해 안동에서부터 올라온 유생들은 서울 시내 한복판에 머리를 풀고 주저앉아 통곡했다. 마치 황제의 죽음을 애도하듯이. 당시의 독재 정치는 현대 정치의 탈을 뒤집어썼을 뿐 전제 정치와 다를 바 없었으니, 대통령이 죽어서 나라가 망할까 겁을 먹는 이들이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한국은 민주주의를 자생적으로 발달시킬 기회가 없었다. 조선 왕실이 무너지고 30여 년 간 일제의 지배를 받다 별안간 민주 정체를 이식받았다. 다른 나라에서는 노동자와 여성이 피땀 흘려 얻어낸 선거권조차 한국에서는 처음부터 공평하게 주어졌다. 그러나 우리는 21세기를 살고 있다. 민중 스스로 절차적 민주제를 쟁취한 경험이 생겼다. 민중은 필요에 따라 대통령을 선출할 수 있으며, 대통령이 잘못을 저지르면 투표로 심판할 수 있다. 원칙적으로는 그러하다. 2014년, 이 땅의 대통령은 모든 사안을 한 마디씩 거들고 직접 심판하려 한다. 입법, 사법, 행정권을 한 손에 틀어쥔 듯 구는 대통령의 행태에, 각자 맡은 바 소임을 다해야 할 관료와 국회의원, 법관들은 대통령의 비위를 맞추려 우왕좌왕하기 일쑤다. 주권자인 국민 역시 다르지 않아서, 정쟁이 벌어질 때마다 대통령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책임을 묻는 풍경이 일상적이다. 우리의 껍데기는 21세기를 살고 있으되, 알맹이는 여전히 왕정 시대에 머물고 있다. 우리는 시민의 나라가 아닌 황제의 나라에 살고 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427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