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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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학교 역사문화컨텐츠학과 교수), 이찬수(전 보훈교육연구원장),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장발장은행장)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김창남/ 인권연대 운영위원 이른바 갑질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갑과 을은 보통 계약서 따위를 쓸 때 양 당사자를 편의상 구분하는 용어로 쓰인다. 대체로 갑은 권력을 갖고 계약의 주도권을 행사하는 쪽이고 을은 갑에 종속되어 지시를 받고 갑이 원하는 바를 해 주어야 하는 쪽을 의미한다. 아주 단순화해서 말하면 갑은 돈을 주는 쪽이고 을은 돈을 받는 쪽이다. 스스로 갑이라 믿는 사람들은 을이라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권세를 부리고 함부로 대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한다. 땅콩 서비스가 자기 맘에 들지 않는다고 비행기를 회항시키고, 직원을 강제로 내리게 한 재벌 3세처럼 말이다. 몇 백만 원 어치 물건을 샀으니 주차관리요원 무릎을 꿇리는 것쯤 우습다고 생각하는 백화점 모녀도 있었다. 한편 스스로 을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갑의 횡포에 저항하지 못한 채 자존심을 버리고 수모를 감수한다. 그러지 않으면 당장 자리에서 쫓겨나고 훨씬 더 험한 꼴을 당하게 되리라는 불안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관계는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갑에게 당할 만큼 당한 을은 또 다른 공간에서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갑의 권세를 과시한다. 회사 상사에게 수모를 당한 회사원은 술집 종업원에게 화풀이를 하고 술집 종업원은 편의점 알바에게 진상을 부린다. 그렇게 이어지는 갑을관계의 연쇄 속에서 상호존중의 인간관계는 사라지고, 사회는 삭막한 야만의 정글로 변해간다. 그러니까 이건 단지 갑과 을이라는 당사자 개인들의 차원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결부되어 있는 이 사회의 구조적 상황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사진 출처 - 아시아투데이 ‘시민사회가 형성되고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봉건적 신분제가 사라지고 합리적 계약에 기초한 근대사회가 도래했다’고 역사책은 가르친다. 하지만 봉건적 신분제가 자본주의적 신분제로 바뀌었을 뿐 신분으로부터의 온전한 해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서구사회는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과 복지가 됫받침되면서 평등주의적 인간관계의 경험이 비교적 오래 동안 유지되어 온 셈이지만 급속한 근대화로 인한 사회적 불균형을 특징으로 하는 한국 사회에서 문제는 더욱 심각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수직적이고 경직된 봉건적 신분 질서와 전근대적 계층의식이 채 사라지기 전에 황금만능의 시장 논리가 들어오고, 여기에 부정부패가 결합하고 경쟁주의가 강화되어왔다. 이른바 불완전한 근대, 지체된 근대성의 토대 위에 경제 성장이 이루어지면서 사람들은 전근대적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오직 자본주의적 욕망만을 키워왔다. 거기에 사회적 안전망이 존재하지 않으니 당연히 삶은 갈수록 피폐해지고 불안해진다. 이 불안한 사회에서 모든 욕망은 오직 신분 질서의 상위에 올라 ‘갑’이 되는 것에 모아진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최상위 갑이 되어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최상위의 갑이 되는 것이 불가능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갑의 권세를 누릴 수 있는 상황을 놓치지 않는다. 각종 서비스 노동자에게 행패를 부리고 감정노동자의 인격을 쉽게 짓밟아버리는 갑질은 따지고 보면 이 신분제 사회의 승자가 되고 싶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욕망의 무의식적 발현인 셈이다. 결국 이 사회에 만연한 갑질의 문제는 당사자 개인의 횡포를 비난하고 세상 갑들의 회심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사실 갑질이니 갑을관계니 하는 말들은 이 사회 전반에 내재한 구조의 문제를 몇몇 개인의 인성과 부도덕의 문제로 치환하기 쉽다. 진부한 얘기지만 기본적으로 갑을 관계로 표상되는 사회 구조, 즉 자본주의적 신분체제에 대한 근원적인 변화의 모색이 요구된다. 나아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보편적 욕망에 대한 근원적 성찰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우선 필요한 건 우리 모두가 ‘을’이라는 자각일 터이다. 갑들은 결코 스스로 변화하지 않는다. 세상의 을들이 갑으로부터 당한 설움을 또 다른 병과 정에게 갑질하는 식으로 풀어버리는 한, 갑들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고 우리 삶의 불안 역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연대’와 ‘공감’이 세상 을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일 수밖에 없음을 또 한 번 확인하게 된다. 김창남 위원은 현재 성공회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516 | 추천: 0
최낙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말 그대로 세월은 무심하기만 합니다. 지난 연말, 돌아보니 피로와 무기력으로 보낸 1년이었습니다. 쉽게 꿰어지지 않는 생각들로 마음은 자꾸 무거워졌습니다. 외할머니가 들려준 옛날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이름 석 자 겨우 쓰실 줄 알았던 분이었으니, 책에서 읽으신 게 아니라 할머니의 할머니에게서 들었던 이야기였겠지요.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제가 초등학교 3학년쯤에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옛날에… 호랭이 담배 피던 시절은 아니구… 그냥 옛날….” “응!” “한 나그네가 길을 가고 있었어… 그런데 그 전날 비가 왔거든… 작은 개울을 건너야 하는데 징검다리가 물에 잠겨 있었지 뭐야. 개울을 건너려면 신을 벗어야 하고, 바지를 걷어 올려 붙들어야 하고…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닌 거야.” “그래서?” “그래서 나그네가 어찌할까 궁리하다 보니 옆에 장생이 서 있는 게 아니겠어?” “장생?” “장생 몰라? 천하대장군 무슨 여장군 하는 그거….” “아… 장승!” “그래, 장생… 아무튼 나그네는 그 장생 두 개를 뽑아서는 개울에 척 걸쳐놓고는, ‘아이구, 마침 잘됐다’ 하고 장생을 다리 삼아서 개울을 건너갔어.” “하하하!” “그러구 나서, 얼마 있다가 그 동네 사는 나무꾼이 개울을 지나가게 됐어. 나무꾼이 깜짝 놀랐지.” “왜?” “아… 글쎄, 어떤 미친놈이 부정 탈라구 작정을 했는지 멀쩡한 장생을 뽑아다가 개울에 다리를 놓아버렸거든?” “참, 그렇지….” “화들짝 놀란 나무꾼이 허겁지겁 물에 들어가서… 그거를 수습해서… 그러니까, 그 장생을 원래 있던 자리에 다시 세워 놓았어. 그렇게 하구선 한 손엔 신발을 들고 다른 한 손은 걷어 올린 바지를 잡고 개울을 건너간 거지. 그런데….” “그런데?” “그랬는데… 일이 난 거야. 장생이 화가 난 거지. 자기를 밟아 지나가게 쑥 뽑아서 다리를 만들라고 했으니 화가 날 수밖에….” “그래서?” “머리끝까지 화가 난 장생이 너무 분해서 해꼬지를 했지….” “어떻게?” “동티를 내렸지.” “동티가 뭐야?” “그런 거 있어… 아주 나쁜 거…. 아무튼 그래서 그 나무꾼이 죽을 병 나서 죽어버렸대.” “나무꾼이? 나그네가 죽었겠지.” “아냐… 뒤에 갔던 나무꾼이 죽었다고… 동티나서….” “왜? 나그네가 나쁜 놈이고, 나무꾼은 착한 사람인데?” “몰라, 이놈아…. 나무꾼이 죽었대!” “왜? 왜? 나무꾼은 착한 사람인데… 왜?” “아유… 나두 모른다니까…. 내가 들은 얘기가 원래부터 그래!” “그래두….” “아이구… 얘기가 그렇다니까…. 그만 가서 자!” 이야기는 그렇게 끝이 났습니다. 하지만 어린 나는 쉽게 잠들지 못했습니다. 왜 나그네가 아니라 나무꾼이 죽어야 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외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를 내가 갈무리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이십 년 가까이 지난 때였습니다. ‘어떤 것에 마음이 매이는 사람은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지만, 마음에 걸리지 않는 사람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라는. 그러니까 쓸데없는 것에 마음이 걸려서는 안 된다는, 나름 괜찮은 교훈을 찾아냈다고 생각했습니다. 점점 우울해지기만 하는 연말이었습니다. 벽에다 대고 욕이라도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도 못했습니다. 이런저런 쓸데없고, 느닷없고, 한심한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혹시 필요하면 제 맘대로 장승을 밟고 나그네는 권력이나 돈 같은 것은 아닐까. 나무꾼과 장승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이들은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일을 저지른 나그네 같은 놈은 뻔뻔할 수 있지만, 오히려 비슷한 처지인 없는 사람들끼리 서로 치고받는…. 외할머니의 옛날이야기는 어쩌면 아주 끔찍한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사진 출처 - 한겨레 처참해지기까지 하는 연말이었습니다. 해가 저물어 주변이 어둑신해질 때쯤, 핸드폰 문자음이 울렸습니다. 한순간 생각이 멈췄습니다. ‘드디어 인권연대 회원이 오늘부로 2천 명이 넘었습니다 … 새해 복 많이 ….’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답문자를 보냈습니다. ‘정말 멋진 연말입니다….’ 그대로 서서 버티고 있을 것만 같았던 청승맞고 주책맞은 저의 연말은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너무 사적인 이야기이지요? 부디 용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최낙영 위원은 현재 도서출판 '밭' 주간으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596 | 추천: 0
김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국민과 함께하는 정의의 파수꾼’ 이는 헌법재판소 홈페이지 슬로건이다. 법치주의 이념과 상징은 정의다. 헌법재판소는 법을 통해 정의를 실현한다는 기관이다. 그러면 ‘정의’라는 것이 하늘에서 내려주는 절대적인 진리를 의미하는가. 아니다. 천부인권(天賦人權)처럼 허망한 논리가 정의다. 하늘에서 내려주는 인권은 역사적으로 없었다는 사실처럼 정의도 하늘에서 내려주는 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다시 기억해야 한다. ‘정의’의 이름으로 정의를 희롱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법치주의 현실이다. 그래서 법을 ‘악마의 성전’이라고 저주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지만 오늘날 법의 지배를 부인하는 사람은 없고, 법치주의를 배제한 사회란 상정하기 어렵다. 우리 헌법에는 명문상 법치주의라는 단어도 존재하지 않지만, 헌법의 최고 가치질서 중의 하나로서 법치주의를 부정하는 사람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법치주의에서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할 때는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에서 제정한 법률에 근거해야 하는데, 이를 ‘형식적 법치주의’라고 부른다. 이러한 형식적 법치주의는 독일의 나치 지배 등을 통해 보듯이 불법국가와 폭력 지배도 합법화시켜 결국 전 인류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형식적 법치주의에 대한 성찰과 반성으로부터 법이 국민의 기본권 및 사회복지를 보장하는 실질적인 내용을 갖추어야 한다는 ‘실질적 법치주의’가 확립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면 우리의 법치주의는 어디쯤일까. 형식적 법치주의라도 제대로 확립되고 시행되었을까. 8·15 해방 이후 우리 의지와는 관계없이 미군정에서 제정한 법률이나, 일제 식민지 강점시절 만들어진 아무런 정통성 없는 법률이 시행되다가, 그것이 우리를 지배하는 법률로 자리 잡았다.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등 군부 세력은 ‘국가재건최고회의’를 만들어 마음대로 법을 제정하였으며, 12·12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노태우 등의 신군부 또한 ‘국가보위입법회의’라는 어용기관을 만들어 자신들 입맛에 맞는 법률을 대량 생산하였다. 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법, 정치활동규제법, 언론기본법, 사회안전법, 국가보안법 개정안, 노동법 개정안,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개정안 등 하나 같이 악법(惡法)이거나 각종 논란을 초래한 법안들을 만들었고, 그 법은 오늘도 유효하게 시행중이다. 국민이 선출한 국회라는 정당한 입법기관도 아니고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이 만든 법을 법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은 헌법상 너무도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법재판소는 이런 법률들이 위헌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헌법이 요구하는 최소한 요건을 갖추었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와 북한 공산주의자들과 대치하고 있는 현실적 상황 등을 고려하여 적법절차 원칙을 갖추고 있다.’는 등의 논리를 펼치며 헌법에 합치된다고 판시하고 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나 ‘국가보위입법회의’ 같이 군인들이 자의적으로 만든 법률에 대해서 권력분립과 법치주의에 비추어 위헌이라고 판시한 적은 불행스럽게도 단 한 번도 없었다. 헌법재판소 재판관들 중 국회에서 만들지 않는 법률들이 법치주의에 반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형식적 법치주의도 지켜지지 않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 법치주의의 현 주소다. 그러면 실질적 법치주의는 실현되고 있는 것일까. 헌법재판소는 ‘법률의 목적이나 내용이 인간의 존엄성 등의 기본권 보장이라는 헌법 이념에 부합해야 하고, 실질적 정의와 공평의 이념에 부합해야 한다’면서 실질적 법치주의를 누차 강조하여 선언하고 있다. 다음 판결을 한번 보자. 전두환 등 신군부의 12·12 군사쿠데타와 5·18 민주화운동 학살 사건에 대하여 검찰은 ‘국민화합과 국가발전’을 위하여 기소유예 한다고 발표하였다. 이에 대하여 헌법소원이 제기되자, 헌법재판소는 ‘1212 사건 등을 둘러싼 사회적 대립과 갈등의 장기화가 가볍다고만 단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검사의 기소유예 처분이 적법하다고 선언하였다. 헌법재판소가 실질적 법치주의를 강조하는 가운데 정의의 이름아래 정의를 모욕한 대표적인 사례다. 12·12 군사쿠데타와 5·18 민주항쟁에 대한 검찰과 헌법재판소 결정에 국민은 분노하였고, 그러자 김영삼 정부와 국회는 5·18 특별법을 제정하였다. 그러자 형사처벌을 소급하는 것이 헌법에 위반된다는 등으로 헌법소원이 제기되었고, 이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법치국가적 원칙이라는 역사적 과제 앞에서 이들을 처벌하는 것이 정의의 관념과 당위성에 비추어 정당하다’고 선언하였다. 두 개의 모순된 결정이 있는 동안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한 명도 바뀌지 않았다. 그런데 동일 사건을 두고 처벌하지 않는 것이 적법하다고 하다가, 갑자기 태도를 돌변하여 처벌하는 것이 정의에 부합하고 실질적 법치주의 요청에 부합한다고 말한 것이다. 훌륭하신 헌법재판관들이 견해를 바꾼 것은 하늘이 내린 정의를 그들이 받아들였거나 개과천선해서가 아니었다. 국민의 엄청난 분노가 그들을 바꾸게 한 것이었다. 사진 출처 - 헌법재판소 2014년 12월 스스로 정의의 파수꾼이라고 자칭하는 헌법재판소는 보잘 것 없는 난쟁이 정당 하나를 꼴까닥 해치워 버렸다. 그들 목숨은 파리 목숨처럼 보잘 것 없는 것이니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찬성 8명 대 반대 1명이 말해주는 사실이다. 10여 만 명의 정당원 중 일부의 행동이 부적절․불합리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법률에 근거가 없는데도 국회의원 신분까지 박탈하는 것을 보면서 높은 곳에서 법치주의를 부르짖는 자들의 폭력성이 섬뜩하게 다가온다. 정당해산이 민주주의 최후 수단이라고 말하면서도 엄격한 증거에 의한 재판도 외면해 버렸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무엇이라도 법과 정의의 이름으로 결정할 수 있다는 득의만만한 권력자의 의지가 읽혀진다. 미국에서 하나의 사례를 살펴보자. 오늘날에는 너무도 당연한 제도로 인정받고 있는 노동자의 최저임금제에 대하여 미국 연방대법원은 1936년 최저임금법이 ‘계약자유 원칙에 반한다’며 위헌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런데 1937년 ‘보호되는 자유는 사회적 조직 내에서의 자유다’라면서 최저임금법이 합헌이라고 태도를 완전히 바꾸었다. 우리 헌법재판소와 똑같이 이중처신, 이중기준이었다. 이 사이에 미국 대법관들 중 한사람도 바뀌지 않았다는 점도 동일하다. 이 같은 결과는 루즈벨트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면서 연방 대법관 숫자를 9명에서 15명으로 늘려 아예 대법원을 재구성하겠다고 대대적인 법적 공세를 시작하자 보수적인 연방대법원이 최저임금제 합헌 선언을 통해 항복 선언을 한 것이었다. 헌법재판소의 법과 양심에 따른 판결이라는 그럴듯하고 화려한 언사는 국민들로 하여금 정의에 대한 엄청난 착시 현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법조인들은 치밀한 듯 보이는 논리로 포장한 후, 법과 양심이라는 우산 속에 숨어서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문명을 짓밟고 있지 않는지 깊이 성찰할 시간이다. 슬프지만 법 논리적으로는 무슨 논리도 가능하다는 것을 현실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즈벨트 방식이 정답이 아닌가 생각된다. 정의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달콤한 금단의 사과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면서. 김희수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635 | 추천: 0
이지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네덜란드의 한 의사는 자신이 버는 수입의 약 60%를 세금으로 낸다. 그래도 그녀는 큰 불만이 없다. 국가가 시민들에게 그 정도 이상의 삶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핀란드 육가공업체 상속자인 살로노야는 속도 위반으로 17만 유로(약 2억 7,000만 원)을 물었다 그래도 도로 교통법상 고소득자는 전년수입의 최대 1/4까지 물어야 한다는 규정에 큰 불만이 없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이 정도는 되어야한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소득에 비례해 세금을 거두는 나라들은 그 사회의 공동체를 위해 세금을 지출한다. 스위스는 아무 조건 없는 기본소득, 즉 국민 누구에게나 지급하는 돈을 약 2,500프랑, 우리 돈으로 280만 원을 책정했고 2016년 국민투표를 통해 확정된다. 이런 통계가 있다. 상위 20%가 전체 개인 금융자산의 71%를, 상위 10%가 55%를, 상위 5%는 38%, 상위 1%가 19.4%를 차지한다. 전체 가구의 2.8%가 59%의 땅을 소유(10월 행자부 토지소유현황), 국민의 40%는 바늘 하나 꽂을 땅도 없다. 이 통계는 우리나라의 것이다(국민은행 자료). 그나마 2006년도 통계이니 그동안 양극화의 속도로 볼 때 이보다 나아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금이 어디서 나와야 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통계다. 부자 증세 혹은 세금폭탄이란 말이 있다. 돈 많은 이들은 세금 내기 싫어서 이 용어를 만들고, 가난한 사람들은 그 용어의 부정적 어감 때문에 또 찬성해 버린다. 많이 먹은 놈이 많이 싼다. 주지육림까지는 아니어도 저녁을 거하게 먹은 다음날 아침엔 화장실에 앉아 아랫배에 힘주는 시간이 길어지는 건 당연하다. 돈도 마찬가지다. 프랑스 같은 나라는 직접세 비율이 약 43%쯤 된다. 돈 많은 놈이 그만큼 토해낸다는 얘기다. 오죽하면 거부(巨富) 축에 드는 어떤 배우(제라르 드 빠르디유)는 세금내기 더럽다고 국적을 러시아로 옮길 정도다. 인근의 다른 나라들도 더하면 더했지 적지는 않다. 우리나라? 프랑스의 반쯤 된다. 약 20%를 상회한다고 하던가. 이런 통계도 있다. 우리나라 1,800만 임금노동자 중 월 급여 200만 원 미만이 49.7%다. 그중 12.4%는 100만 원 미만이다. 월급 200-300만원 수령자는 24.8%밖에 안 되고, 400만 원 이상은 고작 12.4%이다(‘2014년 상반기 지역별 고용조사-통계청). 상황이 이런데도 약 80%에 해당하는 세금은 소득과 관계없이 온 국민들이 사이좋게 낸다. 사진 출처 - 한겨레 그래도 좋단다. 나라사랑 정신에 투철한 국민(國民)들은 제 뱃속 골골대는 소리는 외면한 채 부자들 걱정에 여념이 없다. “1인당 GDP가 25,000불이라면서요? 4인 가족 따지면 우리 돈 1억이에요. 그 돈 당신네 집에서 법니까? 택도 없지요? 그럼 그 돈 다 어디 갔어요? 몇 안 되는 딴 놈 주머니로 들어간 거잖아요” 수익 양극화의 위험성을 알아듣게 설명한들 그야말로 쇠귀에 경읽기다. 대한민국의 모든 인간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났다”고 선언한 국민교육헌장의 위력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그래, 좋다. 많이 거둬가도 좋다. 다만 그 돈이 스위스처럼 기본소득은 아니더라도 다른 서구 유럽처럼 당연 교육에 당연 의료 살기 좋은 영구임대 주택제공은 아니더라도 길 잃은 노숙인에게 거처를 줄 수 있다면 배고픈 아이에게 빵을 줄 수 있다면 아픈 노인의 병원비를 낼 수 있다면 좋다. 그러나 아시는 것처럼 우리의 세금은 그렇게 쓰이지 못했다. 얼마 전 30년간 애용해오던 담배를 끊는다고 선언했다. 담뱃값을 2,000원 올리면 저소득층은 담배를 끊을 거라나. 돈 있는 자들은 담배를 계속 필 테니 궁극적으로 부자 증세 효과가 있다나 뭐라나. 이렇게 씨부리던 종자들이 드디어 일을 냈고, 당연히 고소득자가 아닌 나는 돈 없어서라도 담배를 끊어야 할 판이니 참 큰일이다. 담배를 끊는 게 큰일이 아니라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정부에 대한 모멸감을 참아 내는 게 더 큰일이다. 4500원 계산해서 하루 한 갑 따지면 연간 140만 원의 세금을 더 내는 게 더러워서 끊는 것인데, 담뱃값 올리니 흡연률 감소로 국민건강이 좋아졌더라 따위의 언사로 거들먹거릴게 뻔 한 저 치들의 면상이 역겨워서 더 큰일이다. 담뱃세 거부운동에 동참한 김에 다른 세금 거부할 게 뭐 있을까 찾아봤지만 딱히 없다. 차를 타도 세금, 물건 사면 세금, 술 먹어도 세금, 심지어 노래해도 세금 붙이는 나라에서 이때까지 어떻게 살았는지 신기할 정도다. 내년엔 기왕 이렇게 된 거 “간접세 안내기 운동”이라도 한번 벌려볼까. 이지상 위원은 현재 가수겸 작곡가로 활동 중입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541 | 추천: 0
위대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겨울이어서인지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힘든 하루입니다. 현관문 앞에 배달되어 있는 신문을 들고 와 헤드라인을 대충 훑어봅니다. 오늘 아침 식사는 고추장참치찌개로 얼큰하게 속을 풀어줍니다. 잘 닦아 반짝반짝하는 구두를 신고 지하철역으로 향합니다. 스마트폰을 꺼내 지하철안내앱으로 지하철 도착시간을 확인합니다. 앞 열차와의 간격조정으로 열차가 지연되고 있다는 기관사님의 안내방송이 나옵니다. 사무실에 도착하기 전 은행에 들러 아이 보육료를 계좌이체 합니다. 사무실 동료 직원들과 함께 바쁜 오전 근무를 마치고 삼삼오오 맛난 점심식사를 하러 나갑니다. 식사 후 아메리카노 한잔씩 들고 담소를 나누다 사무실로 돌아옵니다. 일하던 중 보험회사에서 암보험에 들라는 전화가 옵니다. 갑자기 서버가 다운 되어 급히 A/S를 받아 겨우 업무를 마칩니다. 일을 마치고 어린이집에 들러 아이를 데리고 같이 하원합니다. 아이가 장난감차를 보고 사달라고 하도 졸라 1,000원짜리 장난감차를 하나 사줍니다. 어제 인터넷 쇼핑몰에서 주문한 뽁뽁이가 택배로 도착했다는 경비실의 메모가 현관에 붙어 있습니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갔더니 음식물수거 쓰레기통은 벌써 깨끗하게 비워져 있습니다. 아이를 재우고 소파에 앉아 육아서를 보며 요새 부쩍 소리 지르는 일이 많아진 아이에게 어떻게 대할 것인지 생각해봅니다. 평범한 일상입니다. 하지만 이런 평범한 일상을 보내기 위해서 저는 하루 동안 정말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전날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 다니며 취재한 기자들과 인쇄소 직원들 덕분에, 그리고 신문배달부 청년 덕분에 이른 아침에 신문을 받아 볼 수 있었습니다. 선원들이 몇 달간 원양어선을 타고 힘겹게 잡아 만든 참치 통조림이 없었더라면 아침식사가 허전할 뻔 했습니다. 전날 구두방에서 구두를 닦아주신 아저씨의 덕분에 기분 좋은 하루가 시작되었습니다. 지하철안내앱 개발자 덕분에 아침이면 언제 지하철이 올 것인지, 몇 시에 집에서 나설 것인지 고민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조금 지연되기는 했지만 사무실까지 15km 이상 되는 먼 거리를 기관사, 부기관사, 역사근무자들 덕분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은행 직원들 덕분에 편리하게 아이 보육료도 계좌이체 할 수 있었습니다. 사무실 동료들의 도움으로 오전 근무를 탈 없이 잘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음식점과 커피숍에서 일하는 아주머니, 청년들 덕분에 맛난 점심식사와 디저트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보험회사 텔레마케터 직원의 전화로 얼마 전 해지했던 암보험에 다시 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서버 관리업체의 A/S직원의 신속한 서버 수리가 없었더라면 제시간에 일을 마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어린이집 선생님들의 보살핌으로 오늘 하루도 아이를 안심하고 맡기고, 아이도 손톱만큼은 더 의젓해진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장난감차 공장 직원들이 안 계시면 이렇게 값싸고 좋은 자동차 장난감으로 아이를 달래기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택배 아저씨와 모두 일터에 나나 텅 빈 아파트 단지를 지켜 주시는 경비 아저씨 덕분에 올 겨울 우리집을 따뜻하게 해 줄 뽁뽁이를 잘 받았습니다. 김장철이라 음식물 쓰레기양이 많은 데도 청소부 아저씨들 덕분에 집안에 음식물 쓰레기를 남기지 않고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육아에 신경 쓸 틈이 없었는데 평소 아이를 보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순간을 너무나 잘 정리해 준 육아서 저자 덕분에 한시름 놓아 봅니다. 차량을 타고 이동하는 환경미화원들 사진 출처 - 뉴스1 저는 이렇게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평범한 일상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무엇 하나라도 꼬이는 날이면 일상의 틀을 깨고 직접 많은 시간을 내어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고 따질 분들도 계시겠지만 저는 이렇게 많은 분들의 “노동” 덕분에 겨우 겨우 평범한 일상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제가 하는 노동도 다른 분들이 평범한 일상을 이어가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가끔 불편하기도 하지만 이렇게 함께 삶을 만들어가는 분들이 파업을 할 때면 다시 평범한 일상을 그리며 그 분들의 파업을 지지합니다.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업무방해 고소다, 손해배상이다, 가압류다, 징계다’ 하는 회사의 온갖 협박을 견디며 겨우, 힘겹게 만들어낸 파업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이런 노동을 천시하고 노동자를 발에 낀 때만큼도 여기지 않는 자본과 권력의 더러운 민낯을 자주 목도하게 됩니다. 역겹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본과 권력의 목소리가 마치 자신의 처지를 대변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노동자인 근로자들을 보면 안타깝기만 합니다. 위대영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633 | 추천: 0
이재승/ 인권연대 운영위원 형사소송에서 피고인의 권리는 그 나라 법문명의 질적 수준을 가늠한다. 부연하자면, 재판중인 범죄사실이 어느 나라에서나 범죄로 처벌할만한 것인지, 피고인이 소송에서 방어권을 합당하게 행사하는지, 나아가 재판부가 공정한 절차를 통해 합리적인 판단에 이르는지가 그 기준이다. 아마도 이미 14세기에 오늘날과 별반 차이가 없는 배심제를 확립한 영국을 서구에서는 가장 먼저 문명국이 되었다고 볼 것이다. 여담이지만 배심제가 우월한 제도임을 증명해주는 사례 하나를 언급해보자. 15-16세기 마녀재판으로 유럽이 달아오르던 때에 당시 유럽대륙에서는 전문법조인으로 구성된 재판부가 마녀로 기소된 피고인들을 거의 빠짐없이 유죄판결을 하였던 반면(형벌은 화형이었다!!), 영국에서 보통사람들의 배심법정은 과반수를 조금 넘기는 수준에서 유죄판결을 하였다. 마녀의 존재에 대해 보통사람들보다 전문법조인이 더 확신에 찼던 것 같다. 형사소송에서 가장 중요한 권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다. 나는 자기부죄금지권리(自己負罪禁止權利)-자신에게 죄가 있다는 점에 관해 자백이나 불리한 진술을 강요받지 않을 권리, 또는 묵비권-와 무죄추정의 권리-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 법적으로 무죄로 추정한다는 것에 대한 형사피의자나 피고인의 권리-를 가장 중요한 권리로 꼽고 싶다. 이러한 권리는 피고인의 권리와 국가의 의무를 동시에 규정한다. 자기부죄금지의 권리에서 고문이나 굴욕적인 취급을 하지 않을 국가의 의무가 도출되고, 무죄추정의 권리에서 피고인을 형사소송의 온전한 당사자로 대우할 의무가 나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권리들은 우리 헌법 제12조와 제27조에 규정되어 있다. 피고인이 흉악 범죄인지 아닌지에 관계가 없다. 그것이 권리이다. 헌법전은 과거 형사절차에서 만연한 고문과 조작을 기억하던 까닭에 형사소송법의 기본원칙을 헌법상의 기본권으로 명문화했던 것이다. 따라서 헌법전은 일방적인 권력판결이 아니라 합리적인 법정투쟁을 예정하고 장려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변호인은 따라서 피고인을 위해 힘써 변론해야 한다. 그의 변론활동은 헌법이 허용한 행위이고 변호사 직업의 존재이유이다. 그런데 요즘 피고인의 이의제기와 변호인의 옹호활동을 ‘대놓고 까는’ 재판부가 등장하였다. ‘대놓고 깐다’는 말을 쓰는 이유는 특별하다. 재판부가 피고인의 거친 이의제기를 이유로 은연중에 사실상 피고인에게 불리하게 판결에 반영했다는 사정이 아니라, 재판부가 ‘피고인의 거친 이의제기를 이유로 양형에 불리하게 판단한다’는 선언을 판결서에 명시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재판부의 이러한 언설이 판사의 윤리에 부합하는 것인지, 헌법의 원칙에 맞는 것인지 심각한 의문을 갖게 된다. 이 문제는 사소한 윤리의 주제가 아니라 헌법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논하려는 사건은 왕재산 사건(2013)과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사건(2014)이다. 그 사건들의 적용법조는 간첩죄와 내란죄(선동죄) 등 이 나라 정치형법의 대표적인 규정들이었다. 왕재산 사건에서 피고인과 변호인들은 검찰이 제출한 증거가 조작되었거나 오염되었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항의행태를 재판부가 불리한 양형자료로 삼는다는 내용을 판결서에 적어 넣었다.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사건에서도 재판부는 피고인과 변호인 측의 거친 무죄주장을 양형의 가중사유로 삼는다는 언설을 판결서에 적어넣었다. 재판에 지고 재판부에게 이러한 말까지 들은 변호인들과 변호인측 증인들은 자기들 때문에 형이 가중되었다고 가슴 아파 했을 것 같다.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에 대한 항소심 선고가 지난 8월 11일 서울고법에서 열리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영국의 철학자이자 대법관(Lord Chancellor)인 프란시스 베이컨은 <재판에 대해>라는 짤막한 에세이에서 폭력은 노골적일 때 가장 위험하고, 흉계는 은밀할 때 가장 위험하다고 말했다. 앞의 문제의 언설이 이 중 어디에 해당하는지 궁금하다. 판사는 재판에 임하는 피고인이나 당사자의 태도를 감안해서 사실인정을 하고 법적 판단을 내릴 것이다. 그것은 판사의 고유한 권한이다. 그런데 억지스럽지만 무죄추정의 권리는 이러한 판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판사가 유죄판결을 하였다면 유죄의 합리적 확신에 이른 순간에 무죄추정은 깨지므로 피고인이 지금까지 죄를 부인한 행태를 소급해서 뻔뻔스러운 짓거리라고 단죄하고 가중 처벌할 권리를 재판부가 이제 획득하게 되는 것일까? 물론 판사는 자신의 유죄를 솔직하게 인정한 피고인을 우호적으로 취급할 것이다. 그것은 허용된 것이다. 그러나 피고인은 (유죄임을 감추고) 진실에 대하여 침묵할 수도 있고, 책략적으로라도 자신의 무죄를 주장할 수 있다. 그것도 법적으로 허용된 것이다. 더구나 변호인이나 피고인이 아예 죄가 없다고 생각하거나 죄목 자체가 문명국가에서 보기 드문 것이라고 판단하거나 제시된 사실들이 어떠한 죄도 입증하지 못한다고 확신하는 때에는 그들이 무죄를 거칠게 주장할 더욱 합당한 이유가 존재한다. 물론 그 주장의 강도가 법정을 모욕할 정도로 탈선했다면 재판부가 법정모욕죄의 책임을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권리를 행사한 피고인이나 변호인에게 그 태도를 문제 삼아 형을 불리하게 반영했다는 재판부의 발언은 참으로 이상하다. 법원이 자신의 권리를 불퇴전의 용기로 주장하는 피고인을 더욱 엄벌하겠다고 선포한 것이기 때문이다. 공정한 재판의 모습이 사라진 권력판결의 위세를 본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만약 1심의 판결이 그 재판부의 판단과 달리 고등법원에서 파기된다면 앞서 말한 확신가중치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법관을 이제 확신범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법관의 확신은 무엇인가? 법적인 판단은 어느 경우에나 오류가능성이 있는 인간적 판단이지, 100% 진실 보증이 달린 판단이 아니다. 100% 진실 보증이 달린 판단은 인간에게 가능한 것이 아니다. 법관은 자신의 인간적 추론에다 100% 진실 보증이 달린 신적인 권위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 나아가 변호인들의 강력한 변론행동이 왜 피고인에게 불리하게 고려해야 하는지도 이해하기 어렵다. 변호인과 피고인이 범죄단체를 구성하여 재판부에 폭행을 가한 것도 아닌데 이러한 책임귀속이 개인책임에도 맞는지 의문이다. 결국 나의 추측은 이렇다. 아직 합리적인 확신에 이르지 못한 때에만 피고인을 상대로 법관의 확신이나 감정이 전면에 돌출할 것이라는 점이다. 합리적 확신은 누가 보아도 냉정한 이성의 귀결이자 추론의 영역이다. 작금의 판결 앞에서 칸트의 냉소적인 말이 다시 떠오른다. “법의 저울과 함께 정의의 칼을 상징으로 삼아온 법률가(국가권력의 대표자)는 법의 저울에 대한 외부의 온갖 영향요소들을 차단하기 위해 정의의 칼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저울 눈금을 자기 쪽으로 기울게 하려고 그 칼을 얹어 놓는다…”(칸트, 영구평화론). 최근 들어 세상을 압도하는 정치재판들, 야당의원 전용재판들에 대해 칸트의 의혹을 던져본다. 이재승 위원은 현재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504 | 추천: 0
서상덕/ 가톨릭신문 기자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끝났다. 별로 입에 올리고 싶지 않은 수능 얘기를 꺼내는 건, 이번에도 어김없이 예의 거짓말이 떠돌고 있기 때문이다. ‘평소 교과과정을 충분히 이해한 학생이라면 충분히 풀 수 있는 문제’라는 류의…. 수능을 즈음한 시기에 이 말은 어르신들의 ‘늙으면 죽어야지’라는 말과 장사꾼들이 ‘밑지고 판다’는 말, 노처녀가 ‘시집 안 간다’는 이른바 3대 거짓말마저 무색케 하는 듯하다. 통계에 따르면, 매년 수능시험이 치러지는 11월부터 입학시즌이 시작되기 전인 2월 사이에만 200명 남짓한 꽃다운 생명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한다. 하루 평균 1.5명꼴이다. 여기에 ‘자녀 낙방에 비관한 주부 자살’ 등 부모와 가족들의 죽음까지 합치면 하루 평균 2명이 넘을 거라는 말도 있다. 무엇이 이토록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내모는가. 살아가면서 적게는 수십 번, 많게는 수백 번 크고작은 시험을 치르게 되지만 유독 수능 성적이 당사자, 나아가 한 가족의 일생마저 좌우하는 ‘인간 가격표’로 통용되는 까닭이다. 자칭 타칭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런 현실이 학벌사회가 낳은 폐단이라고 진단하는 이들도 적지 않은 모양이다. 어떤 이들은 어린 세대의 유약한 심성 탓으로 돌리기도 한다(이 경우는 정말 너무한 것 같다.). 또 다른 이들은 전 세계적으로 수능시험 같은 일종의 통과의례가 없는 나라가 없다며 ‘수능 자살’을 감상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없다고 지적하기도 한다(참, 달린 입이라고…). 무엇이 정답일까. 수많은 삶이 얽히고설킨 문제여서 해답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만약 에볼라나 사스(SARS), 조류인플루엔자 등 어떤 질병으로 이렇게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주무 장관은 몇 번이나 자리에서 물러났을 테고 대통령도 국민 앞에서 머리 숙여 사과하고 특단의 대책을 강구하라고 난리를 피웠을 것이다. 그런데 채 피어보지도 못한 어린 학생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꽃다운 목숨을 스스로 끊고 있는데도 어른들은 가당찮은 분석에, 예의 거짓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다. “평소 교과과정을 충분히…” 해방 이후 지금까지 크게는 12회, 세부적으로 보면 무려 17차례나 대입제도가 바뀌었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강 건너 불구경’하는 거짓 놀음은 그치지 않고 있다. 참으로 이상한 사회다. 더 이상하게 생각되는 것은 무고한 죽음들 앞에서 누구도 이 사회가 정상적인지 비정상인지 묻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러니 백날 ‘비정상의 정상화’를 부르짖어도 될 턱이 없는 건 당연하지 않을까. 어린 학생들은 이중적인 약자다. 수직적이고 권위적인 사회에서 단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무시당하기 일쑤다. 또, 엄연한 국민임에도 투표권이 없다는 이유로 정치권에서도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한다. 사실상 관심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셈이다. 사진 출처 - 뉴스1 이러한 상황은 학교 안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주위의 무관심 속에 무수한 학생들이 학교를 떠나고 있다. 서울시 안에서만 초·중·고등학교 수업을 중단하고 학교를 떠나는 학생들이 매년 1만 명이 넘는다. 한창 공부를 하며 감수성을 키워야 할 나이에 학교를 떠난 학생 수는 2011년 1만 7,924명에 이어, 2012년에는 1만 6,126명에 이른다. 도대체 우리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가. 이런 현실을 극복하는 길은 의외로 간단하다. 아파하는 이들 곁으로 다가가 그들의 말을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자살을 마음먹은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자살률을 크게 낮출 수 있다고 한다. 누가 자신의 말을 들어주고 조금이라도 공감해준다는 사실이 그 사람에게 새로운 희망의 창을 열어주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위대한 능력은 타인의 아픔에 대해 공감하는 능력이라고 한다. 그리고 인간에게 가장 숭고한 행위는 그 공감을 바탕으로 함께 행동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감능력은 이미 2000년 전 예수님께서 잘 보여주셨다. 지난 8월 한국을 찾아 무수한 감동의 물결을 일으키고 간 프란치스코 교황도 궤를 같이한다. 교황은 세월호 참사의 전말을 잘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공감하고자 하는 의지를 행동으로 보임으로써 누구도 생각지 못한 감동과 위로를 안겨주었다. 신은 당신이 창조한 사람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심에도 당신 외아들을 인류에게 보내셨다. 우리와 함께하시며 공감하고 계심을 보여주고자 하셨음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아파하는 이들의 고통에 함께하시자 병이 낫는 장면을 수없이 보았다. 공감이 기적을 낳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가장 큰 은총이자 무기도 공감능력이라고 한다. 홀로 1등이 되기보다 함께 아파하고, 더불어 잘 살고자 하는 마음이 공감능력이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며 가장 먼저 키워야 할 수학능력은 아파하는 이들에 대한 감수성, 그리고 공감하는 능력이어야 한다. 이것이 모든 인류에게 심겨져 있는 소중한 사랑의 씨앗이자 수없이 쓰러져도 다시 일어서게 하는 힘이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457 | 추천: 2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10살짜리 아들 녀석이 개그 프로그램을 좋아해서 주말마다 함께 ‘본방 사수’를 하고 있다. 처음엔 <개그콘서트>만 보면 됐는데, 얼마 전부터 <웃음을 찾는 사람들>까지 보게 됐다. 둘 다 15살 이상 관람가인 데다 끝나는 시간이 너무 늦어서 어린 아이에게 좋지 않다고 생각했는데(티브이 자체가 좋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어찌하다보니 습관이 돼버려서 어쩔 수 없이 같이 보고 있다. 딱 한 가지 다행으로 생각하는 건, 아들과 나의 취향이 비슷하다는 사실을 확인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요즘 개콘은 전보다 재미가 없어졌다는 데 대해 아들과 나는 의견이 일치한다. 반면 참을성은 내가 더 없다(티브이 따위를 참을성 갖고 봐야하다니!). 개콘을 보다가 딴 짓(빨래 개기 같은)을 하거나 아예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개인적으로 개콘의 전성기는 ‘사마귀 유치원’이나 ‘애정남’ 같은 기발한 코너가 만발했던 지난해 말 무렵이었다고 생각한다. 거침없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약간의 정치풍자 같은 걸 시도하기도 했었다. 알다시피, ‘용감한 녀석들’이란 코너에서 개그맨 정태호가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에게 반말로 말을 걸었다가 ‘행정지도’ 조처를 받은 바 있다(“박근혜, 님 잘 들어. 당신이 얘기했듯이 서민들을 위한 정책, 기업들을 위한 정책, 학생들을 위한 정책, 그 수많은 정책들 잘 지키길 ,바란다. 하지만 한 가지는 절대 하지마라. 코미디는 하지마. 우리가 할 게 없어. 왜 이렇게 웃겨. 국민들 웃기는 건 우리가 할 테니까 나랏일에만 신경쓰기 바랍니다.”). 당시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이 발언이 “훈계조”여서 “정치풍자라고 보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럼 반말로 훈계하지 않고 존댓말로 부탁하면 정치풍자로 인정해준다는 말인가. 풍자냐 아니냐를 정치권력이 정해준다는 게 민주국가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개그는 개그일 뿐인데’ ‘개그를 다큐로’ 받으니 어떤 강심장 개그맨이 정치풍자를 한단 말인가. 과장된 분장과 윽박지르기, 옷 벗기기, 못생긴 여자 놀리기 따위 한심한 수준의 개그밖에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요즘엔 개콘보다 웃찾사가 더 재미있다는 데 대해서도 아들과 나는 동의한다. 덜 억지스럽고, 그나마 말의 성찬으로서 개그가 살아있다. 그런데 웃찾사마저도 인기가 많아지면서 풍자의 강도가 점점 약해지고 있다. 역시 유언무언의 압력이 들어간 결과가 아닐까 생각한다. 웃찾사 ‘LTE뉴스’는 특정 방송분이 인터넷에서 ‘실종’돼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과민반응인지 모르겠으나, LTE뉴스가 풍자의 대상을 청와대와 집권 여당에서 정치권 일반으로 뭉뚱그리는 모습도 보인다. 지난주 금요일(10월31일) 방송에서 개그맨 강성범이 건망증에 좋은 약을 국회의원들에게 갖다 주겠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방청객들이 고개를 끄덕거리는 ‘반응 숏’까지 넣어 편집한 것이다. 내게는 타깃을 흐려서 보복의 화살을 피해보려는 궁여지책으로 보였다. 지금 건망증에 걸린 집단은 대선 공약과 세월호 관련 약속을 대놓고 파기한 여당임이 분명한 데도 마치 여야 정치권 모두의 탓인 것처럼 본질을 흐리고, 거기에 방청객들이 동의하는 모습을 끼워넣어 국민들이 분노하는 대상이 정치권 일반인 것처럼 왜곡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정치냉소 혹은 정치혐오증은 극에 달한 상태다. 얼마 전 어느 대학생들이 국회 기둥에 “나 니들 시러”라고 쓴 낙서가 단적인 예다. 상당한 사람들이 이들의 행위를 응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니들’이라고 뭉뚱그려진 증오의 대상 속에는 우리 정치 현실에 대한 면밀한 성찰이 존재하지 않는다. 해결 방법도 찾을 수 없다. 그저 무조건 욕만 해댈 뿐이다. 잠시 스트레스가 풀릴지는 모르겠으나 스트레스는 그만큼 더 쌓일 수밖에 없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정치에 대한 막연한 증오감을 조장해온 게 보수언론과 현 집권세력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번 정기 국정감사 때만 해도 보수언론은 공무원들이 ‘하루 종일 기다려 15분 답변 하고 끝’, 이라는 식으로 국감 무용성을 줄기차게 주장했다. 이견과 갈등을 조정하고, 행정부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국회 본연의 기능 자체를 부정하려는 태도다. 세월호특별법 제정 당시 확인했듯이, 청와대의 원격 로봇이 된 여당이 쪽수를 앞세워 일체의 양보와 타협을 거부하니 국회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다. 그래놓고 협상이 결렬돼서 야당이 국회를 뛰쳐나가거나 하면 모든 책임을 야당으로 돌린다. 놀고먹으면서 세비는 타간다는 식으로 여론을 조작한다. 이런 짜고치는 공식이 관행처럼 반복돼 국회가 동네북 신세가 된 것이다. 덕분에 여당은 원인 제공자로서의 책임에서 자유로워진다. 모든 잘못은 국회 자체에 있지, 여당 잘못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증폭된 정치혐오현상은 투표율을 떨어뜨려 상대적으로 적극 지지층이 많은 여당이 선거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된다. 나는 이와 같은 ‘정치혐오증 조장’이 현 정부여당의 장기집권전략이라고 본다. 점점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어가고 있지만 조중동의 지지는 여전히 확고하고, 방송은 이미 완벽히 장악했으며, 종편이라는 신무기까지 장착한 상태다. 이런 마당에 한국의 새누리당이 일본의 자민당이 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김한길과 안철수와 박영선의 패배는 예정된 것이 아니었을까(전에 이 난을 통해서 말했듯이, 특히 ‘정치인’ 안철수는 대중적 정치혐오 현상의 산물이다). 그들은 여당이 짜놓은 프레임 안에서 놀았다. 선을 넘으면 큰 일 나는 줄 알았다. 이 프레임을 깨지 않는 한 당분간 야당이 선거에서 이기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요컨대 국회는 우리의 적이 아니다. 정치하는 놈들은 다 똑같다거나, 누가 되도 별 차이 없다고 말하는 자가 주변에 있다면, 유념하시라, 그 자가 바로 여당 지지자다.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493 | 추천: 0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사람들은 평화를 원하는 데 세상은 별로 평화롭지 못하다. 일부 여유 있는 개인들이 느끼는 탈사회적 내면의 안정감 같은 것을 제외한다면, 세상이 평화로웠던 적은 없던 것 같다. 일부 종교 공동체의 특정한 경험 같은 것 말고, 평화로운 사회 혹은 세계에 대한 증언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 왜 그런 것일까. 이유가 어찌 한 두 가지 정도랴. 욕망에 눈이 어두운 정치꾼이나 약자를 억압하는 권력자 탓을 할 수도 있다. 불평등을 조장하는 자본주의나 이념적 획일성을 획책하는 집단주의 탓을 할 수도 있다. 이기적 개인주의나 세상일에 무감(無感)한 이들 탓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무언가 이유가 있는 것은 분명한데, 한 가지 꼭 집어 말하기에는 세상이 너무 복잡하게 얽혀있다. 그래서 무언가 암담하고 답답함이 지속된다. 종교/학 현장에 있으면서도 그랬지만, 몇 해 전부터 평화학을 공부하면서도 비슷한 느낌이다. 평화를 묻고 바라는 이들은 많지만, 세상은 언제나 비평화적 상황 속에 있다. 평화에 대한 물음은 늘 시작일 뿐인 듯하다. 한 걸음 나아갔나 싶으면, 다시 평화를 물어야 하는, 불평등하고 폭력적인 상황은 지속된다. 세상의 비평화적 상황은 그만큼 구조화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묻고 바라지 않을 수 없다. 학자는 평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 사람들이 사회를 이루며 함께 살아가기 위한 근본적인 능력은 공감(共感)이다. 영어식 표현에 따르면, 공감에는 두 종류가 있다. 타자의 입장에서 타자에게 공감해 나가는 ‘empathy’와 자신의 입장에서 타자를 이해하려는 ‘sympathy’이다. 타자에 대한 공감은 평화를 위한 기초이지만, 리프킨(J.Rifkin)이 염려했듯이, 지배의 공감이 커지면 식민주의적 제국주의도 생겨나고, 소비의 공감이 커지면 지구가 위험해진다. 그저 자신의 입장에서만 ‘공감(sympathy)’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폭력적 상황에 일조하게 된다. 그 상황이 다시 자기를 향해 오는 폭력의 부메랑이 될 수도 있다. 타자의 입장에서 하는 공감, 즉 ‘empathy’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타자를 기준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empathy가 sympathy보다 더 평화적이다. 평화에 공헌할 가능성도 더 크다. 평화 공부도 운동도 empathy를 기반으로 할 때 진정성이 확보된다.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를 만드는 데 공헌한다. empathy는 종교적 천재들의 삶의 근간이자 기본 정서이기도 하다. 붓다의 자비(慈悲), 맹자의 측은지심(惻隱之心), 예수의 긍휼(矜恤) 등은 그저 특정 종교인의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empathy의 다른 이름들이다. 공감의 능력이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동력이라는 사실을 이들이 잘 보여준다. 물론 아무리 종교적 천재라 하더라도 언제나 측은지심이나 긍휼로 충만해있을 수는 없다. 자비, 긍휼 등은 그 자체로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원초적이고 즉각적인 감정이다. 고통에 대한 공감 자체가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폭력을 대면하는 일은 더 할 나위 없다. 붓다도 예수도 삶이 녹녹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타인의 고통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행위 자체가 심신의 온 에너지를 빨아들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감은 얼핏 마음 자세이자 정신 행위인 듯하면서도 그 어떤 신체 행위 못지 않게 힘들다. 이러한 종교적 천재들에게는 거의 미치지 못한다고 해도, 평화 연구자도 폭력적 상황 내지는 폭력으로 고통당하는 이들에 대한 공감을 연구의 동력으로 삼는다. 힘들어하는 이들에 대한 측은지심이 연구자의 의미 있는 추진력이 된다. 물론 측은지심이나 긍휼만으로는 설득력 있는 연구가 나오지 않는다. 공감 없는 연구는 공허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지만, 그렇더라도 공감만으로는 연구가 되지 않는다. 연구자 자신도 폭력적 상황에 처해있음을 주관적으로 인식하면서도 그러한 상황에서 다시 한 걸음 물러나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객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브르디외(P.Bordieu)의 “참여적 객관화”라는 말은 이것을 잘 말해준다. 평화 연구자가 스스로를 폭력적 상황 속에 참여시키면서 동시에 그 폭력적 상황을 객관화시켜 더 많은 이들로 하여금 폭력적 상황에 눈뜨게 할 때, 학문의 진정성 혹은 실천성이 확보된다는 뜻이다. 연구의 대상과 주체의 긴밀한 상관성을 전제하고서야, 학문적 성찰의 진정성이 확보된다는 말이다. 이반 힐리히 사진 출처 - 한겨레 이렇게 학자의 진정성을 드러내고 실천적 함의도 구체화시키는 출발점은 공감적 자세이다. 공감 없는 연구는 없어야 할, 없는 것이 나을, 말 그대로 ‘사족(蛇足)’이다. 종교에서 ‘죄’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학문에도 죄가 있다. 공감 없는 연구, 무감각한 정보의 나열, 무감(無感)이 죄이다. 그에 반해 고통에 대한 공감적 연구는 학문이라는 종교의 신앙이라 할 만 하다. 이반 일리히(I.Illich)가 함께 사는 ‘공생(conviviality)’에 대해 강조했는데, ‘더불어 삶’에 일조할 때, 학문도 구원의 길에 동참한다. 무감이 죄라면 공감이 신앙이고 공생이 구원이다. 무감에서 공감으로, 그리고 감성적 차원의 공감을 넘어, 공감적 공생으로 나아가는 그것이 학문의 길이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에 재직 중입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526 | 추천: 1
권보드래/ 인권연대 운영위원 <러브스토리>(1970)가 세계적으로 히트한 것이 벌써 근 반 세기 전이다. 호평도 악평도 많이 받은 이 영화는 ‘배럿 4세’라는 동부 명문가의 외아들 올리버와 가난한 이탈리아 이민 2세대 제니퍼의 사랑을 앞세워 1960년대 후반 뜨거웠던 위반과 반역의 기운을 달콤하게 버무려냈다. 그것이 기성 질서에 투항하기 직전의 에피타이저였을 가능성은 부정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러브스토리>는 대중적 연애 서사에서도 계급 횡단과 반전의 이념을 새겨 넣을 수 있었던 시절을 말해준다. 숨을 거두기 직전―신출내기 변호사가 감당할 법하지 않은 너른 1인용 병실에 환자복 대신 어여쁜 레이스 잠옷 차림인데― 제니퍼는 말한다. “크리스마스엔 군인들이 집으로 온대.” 명문대 출신 이 어여쁜 아가씨, 셰익스피어와 베토벤식 교양으로 중무장한―그렇지만 무척 자연스럽게 상소리를 뱉는― 이 아가씨마저 베트남전 한복판에 있는 군인들을 걱정한다. 죽기 직전에 말이다. “사랑은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 거야.” 영화 마지막에 이르면 올리버는 본래 제니퍼의 것이었던 이 유명한 대사를 아버지와 화해하는 데 써버리지만, 그래도 <러브스토리>가 볼 만 한 건 이런 디테일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사랑은 각종 사회적 위반과 결탁함으로써 비로소 사랑답게 될 수 있었다. 아무 금지도 제한도 없이 다만 열렬하고 달콤할 뿐인 감정이 무에 사랑이겠느냐. <맨발의 청춘>과 <러브스토리>와 <남과 여>와 <겨울 나그네>에 익숙한 세대라면 그렇게 생각하기 쉽다. 매끄럽게 일부일처제 핵가족에 정착하여 “그래서 그들은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니. 기껏 알콩달콩 사랑싸움 수준의 갈등이 서사의 전부라니. TV드라마 <질투>와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이후의 신세계에도 불구하고 극적 연애를 선호하는 심정은 아직 다 죽지 않았다. 사랑은 사실 서스펜스에 추리에 판타지와 SF까지 겸비한 장르다. 인생에서 경험하는 가장 막대한 에너지 중 하나, 그것을 삶과 세상을 바꾸는 데 쓰지 않으면 어디 쓰겠느냐. 나도 가끔 그런 심정이 되는 것이다. 위안하고 과시하는 데 다 소비하기엔 그 에너지가 너무 크다고 생각하면서. 헌데 대체, 뭘 어떻게 바꾼다지? 몇 해 전 어떤 후배가 사는 모양새를 보면서 지금이라면 나도 소위 기혼남과의 연애에 혹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위반이라니, 대체 뭘 위반한단 말인가. 일일드라마 속 등장인물도 아니고. 영화 '러브스토리' 사진 출처 - 씨네21 우리는 마침내, 성 자체도 위반이 되기 어려운, 누구나 다 난봉꾼-리베리탱(틴느)인 시점에 도달해 있다. 실제로 얽히면 욕해댈지 몰라도 어지간한 성적 자유는 쿨하게 접수해야 하는 시절이다. <마녀사냥>식 ‘섹드립’이 유쾌한 세월, ‘모태솔로’라는 말은 연애의 불가능성보다 성애에의 무능력을 더 강하게 일깨운다. 그러나 잠시 멈춰 생각해 보면, 하긴 성에 대한 이만큼의 자유나마 구가하기 위해 싸웠던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위반하고 넘어서야 할 것은 지금도 얼마나 많겠는가. 사라진 것은 다만 위반의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매력일 뿐일지도 모른다. <러브스토리>식, 신출내기 변호사의 어여쁜 아내마저 전쟁과 시민권 문제를 피해갈 수 없었던 그 무시무시한 구심력이 휘발됐을 따름인지도 모른다. 억압이 절로 보편을 구성해 주던 시절이 사라졌으니, 이제 스스로 보편을 만들어 가야 한다― 이렇게 발음해 보니 꼭 나쁜 기분은 아니다. 헌데 보편이란 말이 여전히 유효하긴 한가? <러브스토리> 이후 근 반세기, 이제 한국에서도 ‘합류적 사랑’이니 ‘유동적 사랑’이니 하는 말이 낯설지 않다. 지금은 A와 뜨거운 우정을 나누고 5년 후에는 이성인 B와 동거하고 한 20년 후에는 C와 안정된 동성애적 관계를 이루는― 이런 관계 속에서는 일 대 일에 대한 집착도 이성애 핵가족 모델의 위력도 희미해질까 싶긴 하다. 저마다 자기 법칙에 따라, 그러나 가능한 한 만남을 활성화하면서 살자는 이런 리듬대로라면 ‘보편 너머의 보편’이 가능할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거기까진 어떻게 이르나. 누구와 손잡고 누구와 어깨 겯고 가나. 세상엔 아직 용기 있는 사람들이 많아, 위반하고 창조하는 작은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누가 일어나고 누가 버텨야 어디서든 거드는 손길이 비롯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일러주는 소리가 꾸준하게 들려온다. <맨발의 청춘> 시절이건 <질투> 시절이건 <건축학개론> 너머건, ‘살고 사랑하기를’ 원하는 사람들 또한 이토록 많건만. 우리는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만날까. 권보드래 위원은 현재 고려대학교 국문학과에 재직 중입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466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