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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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학교 역사문화컨텐츠학과 교수), 이찬수(전 보훈교육연구원장),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장발장은행장)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최낙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소풍 가방에 김밥과 함께 싸갔던 것이 있었습니다. 사이다였습니다. 소풍 때나 먹을 수 있었던 맛있는 김밥을 허겁지겁 먹다가 목이 메면 사이다로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초등학교 소풍 때 마셨던 사이다는 그렇게 시원하지는 않았습니다. 몇 시간 동안 가방 속에 들어있던 사이다는 그저 미지근한 탄산 함유 설탕물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사이다’라는 말이 유행인가 봅니다. 인터넷을 검색하다 보면 ‘사이다 연기’, ‘사이다 발언’ 등등. 아무튼 시원하다, 혹은 답답한 속을 확 뚫어준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진 출처 - 구글 지난 주말에 아는 선배의 집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날씨도 화창하니 오랜만에 얼굴도 보고 겸사겸사 한 잔 하자는 선배의 초청에 그동안 무심했던 저와 또 다른 후배는 만사 작파하고 선배의 집을 찾았습니다. 선배는 서울에서 두 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는 곳(어디인가는 중요하지 않으니, 경기도 용문쯤으로 하겠습니다)에 내려가 글을 짓고 텃밭도 가꾸면서 삽니다. 서울을 떠나 그곳에 정착한 지 벌써 10여 년이 되었습니다. 용문역에 내려 하루 네 번밖에 다니지 않는 시골버스를 타고 30분 정도 지나면 마을이 있고, 그 마을에서 산길로 10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그 선배의 집입니다. 걸어 올라가는 길의 왼쪽에는 작은 개울이 있습니다. 5월 말, 오후 두 시의 햇볕은 생각보다 뜨거웠습니다. 개울 중간 중간에 벌써 개울물에 발을 담그고 있는 행락객들이 드문드문 보였습니다. 한 손에 삼겹살 담은 봉지를 든 저와 과일 봉지를 든 또 다른 후배 역시 연신 땀을 닦으며 산길을 올랐습니다. 또 다른 후배가 제게 물었습니다. “성준이가 올해 열일곱 살이 된 거지?” “그런가? 고등학교 2학년이면 열일곱인가?” 성준이는 선배의 외아들입니다(이름이 무언지 중요하지 않으니 그냥 성준이로 했습니다). 성준이는 다운증후군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선배가 서울을 떠나 이곳에 자리 잡은 이유 중 하나는 성준이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선배의 집에 거의 다다를 무렵, 마당 근처 길가에 혼자 쪼그리고 앉아 꽃을 만지고 있는 성준이가 보였습니다. 온통 꽃에 정신이 팔렸는지 저와 또 다른 후배가 제법 가까이 왔는데도 인기척도 느끼지 못 했습니다. 어떻게 놀라게 할까 하고 저와 또 다른 후배는 성준이 뒤로 살금살금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잠시 동안 성준이 뒤에 서서 지켜보았습니다. 성준이는 혼자 열심히 중얼중얼 하고 있었습니다. 꽃잎을 손끝으로 톡톡 건드리며 무언가 들꽃에게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는 것도 같았습니다. 저와 또 다른 후배는 놀라게 해줄 생각도 잊어버리고 성준이를 내려다보며 그냥 배시시 웃고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 어디서 나타났을까요. 선글라스를 낀, 50대 후반쯤 되는 아저씨가 저희 쪽으로 걸어왔습니다. 이 근처 개울가에 놀러 온 사람 같았습니다. 요즘 말로, 빙구 같이 웃고 있는 저희 얼굴을 쓱 훑어보던 50대 후반이 느닷없이 성준이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야 임마, 넌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그리고 50대 후반은 저와 또 다른 얼굴을 보며 씩 웃었습니다. 그 표정을 보니 선글라스 속의 한쪽 눈이 우리를 보고 찡긋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와 또 다른 후배는 너무나 황당한 상황에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성준이가 선글라스를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환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난 엄마가 좋아, 너는?” 50대 후반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성준이가 다시 물었습니다. “아이 참, 너는 누가 좋으냐고...?” 50대 후반을 바라보는 성준이는 천진난만 그 자체였습니다. 왠지 두 눈망울이 더없이 초롱초롱하게 보일 정도였으니까요. 50대 후반은 쉽게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몹시 당황한 그는 저와 또 다른 후배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엇험! 하고 헛기침을 하고는 산길을 내려갔습니다. 성준이를 데리고 집으로 갔습니다. 반갑게 맞아주며 선배가 물었습니다. “덥지? 뭐 시원한 거 줄까?” 또 다른 후배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습니다. “사이다!” 사이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사이다’라는 말의 느낌을 알 것 같았습니다. 그제서야 저는 사이다가 초등학교 시절 소풍 때 마시던 뜨뜻미지근한 설탕물이 아니라 더없이 시원한 청량음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낙영 위원은 현재 도서출판 '밭' 주간으로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6년 6월 8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646 | 추천: 0
- 해체 가능한 법 vs 해체불가능한 정의 김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위대한 역사적 투쟁의 근간인 끊임없는 주제 중의 하나는 평등에 대한 욕구다.’ 그 벅찬 평등에 대한 욕구인 희망의 언어를 유린하는 세상. 흙수저. 금수저, 헬조선이 시대를 웅변하는 상징어로 자리 잡은 대한민국. 20대 총선 결과는 이 불평등을 해결할 수 있을까. 불평등을 보여주는 지수는 전무후무할 화려한 성적을 과시하고 있다. 상위소득 10%가 전체소득의 45%를 가져가는 아시아 최고의 불평등 국가. 하위 50%의 자산이 전체 자산의 2%에 불과한 나라. 고용통계 작성 이후 청년실업률이 최고수치인 12.5%, 65세 이상 노인빈곤율 49.6% OECD 국가 1위 등등. 이 모든 숫자는 단순한 수치가 아니고, 고통스런 피눈물의 온도다. 불평등 문제는 단지 불편한 진실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며, 엄청난 불행의 근원이라고 지적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 책임져야 할 정점에 있는 대통령은 외국 방문에 항상 바쁘셔서 신경 쓸 틈이 없으시고, 4·13 총선에 참패해도 자성이나 성찰은 기대할 수도 없는 분위기다. 오로지 “너희들(국민, 여당)이 날 배신해”라는 분노의 표정이 읽혀질 뿐이다. 지금까지 그러하였듯이 대통령은 경제문제에 대해 앞장서서 노동자 탓, 국회 탓, 국민 탓이나 하는 ‘탓 놀음’을 흑마술 주문처럼 반복할 것 같다. 대통령과 보수 정치인들이 말하는 평등의 기준은 “네 탓이요. 네 탓이요”다. 열심히 노력하지 않고, 창조적 경제 능력이 부족한 당신 잘못이라고 꾸짖고 있다. 이는 차별을 은폐·기정사실화 하면서 “너는 열등한 놈이니 가만히 있으라.”는 말과 무엇이 다른가. 과연 그럴까.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가. 불평등 사회는 이미 100미터 달리기 골인 지점에서 시작하는 사람들과 아직 0미터 지점에서 출발도 못한 사람들 사이의 불공정 게임이다. 여기에는 기회의 평등마저도 사라지고 없다. 이런 불공정 게임 룰을 당연한 것으로 치부하는 세상은 우리가 꿈꾸는 미래가 아니다. 우리의 미래에 걸림돌이 되는 장애물일 뿐이다. 사진 출처 - 문화일보 단순히 ‘기회의 평등’만을 외치는 것도 면피성 주술일 뿐이고, ‘결과의 평등’이 보장되는 사회가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이고, 평등사회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몇 가지 불평등 탈출 해법은 이렇다. ① 비정규직을 없애는 것, ② 노동시간 8시간 법정제로 일자리를 나누는 방법, ③ 최저임금을 생활임금 수준으로 올리는 것, ④ 정부 고용 비중이 OECD 꼴찌인 6.5%인데 OECD 평균 15.5%로 고용을 늘리는 방법. 이런 방법은 의지만 있으면 충분히 가능한 해법들이다. 불평등 해소법을 모르고 있어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법을 바꾸고 만들면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 정답이다. 비정규직도 1998년, 2007년에 법을 만들어서 생긴 제도일 뿐이고, 원래는 비정규직을 보호하겠다며 만든 법이었다. 일부 법의 긍정적 작용도 부정할 수 없으나 거꾸로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차별을 합리화하는 정의훼손법으로 전락해 버린 법. 이런 법을 바꾸면 비정규직을 없애는 것도 가능하다. 법이 반드시 정의를 담보하는 이상적인 장치는 아니며, 정의를 구현할 수 없는 법은 없애고 바꾸어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의 표현을 빌리자면 “법은 해체 가능성이고, 정의는 해체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도 행정부 수반으로서 법을 만들어 국회에 제출할 수 있으나, 법률 제정권은 없다. 짐이 곧 국가라고 행세하는 경찰국가 대장 박 대통령에게 평등사회 구현을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와 같은 바보짓이라는 점도 익히 알고 있다. 보다 더 궁극적인, 권력의 주인이 국민이라는 것 또한 주지의 사실이지만, 대한민국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헌법 조항은 공허하고 허무한 문장으로 다가오고, 허수아비처럼 느껴지는 현실이다. 국가의 주인에 해당하는 집주인을 임차인에 불과한 권력자들이 구박하고, 핍박하고 거꾸로 쫒아내는 행위를 수없이 목도하고 있지 않는가. 평범한 시민이 느끼는 권력은 더러운 좀비의 칼일 뿐이다. 그동안 대통령은 물론 국회도 불평등 해소를 위한 법의 해체를 적극적으로 고민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총선에서 정당들은 더욱 보수·우경화의 깃발을 꽂았으니 앞으로 기대할 것도 별로 없어 보인다. 그래도 어찌 하겠는가. 현 정치지형에서 결국 기댈 곳은 입법기관인 국회밖에 없는 것을. 그런데 국회도 움직이지 않으면, 시민이 죽창 들고 불평등 세상을 바꾸어야 하는가. 그것은 가능한 일인가. 세계인권선언은 “인간이 폭정과 억압에 대항하는 마지막 수단으로써 반란을 일으키도록 강요받지 않으려면 인권보호가 필수적”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역사의 시간은 흘렀어도 폭군방벌론은 여전히 유효하며,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신학자까지도 “악한 군주에게 저항하는 것이 허용되는 것은 강도에게 저항하는 것과 같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이는 시민이 마지막 수단으로 죽창 들고 불평등 세상을 바꾸는 것이 정당할 수 있다는 역사적 진리를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시민이 마지막 반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할 막중한 책무가 20대 국회에 있다. 다시 헌법을 꺼내들고 읽어본다. 제11조(국민의 평등) ①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자유와 평등은 인간의 존재를 완성하기 위한 필수·필요조건이다. 자유와 평등은 헌법의 두 바퀴여서, 어느 한 바퀴만 제대로 굴러가지 않아도 넘어지고 나아갈 수 없다. 시민이 죽창들 필요 없는 자유와 평등 국가 실현을 20대 국회가 풀어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보태며. 김희수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이 글은 2016년 6월 1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589 | 추천: 0
- 부끄러움 모르는 사회 : 거짓말과 수치심에 대한 단상 서상덕/ 가톨릭신문 기자 꼭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십계명’이란 게 있다는 걸 모르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세상, 특히 오늘날 우리나라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고 있노라면 십계명 가운데 유독 자주 떠올리게 되는 계명이 있다. 바로 여덟 번째 계명인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다. 거짓이 난무하는 오늘날 거짓은 일상의 한 부분이요 사회생활의 필요악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이러다 보니 거짓을 뉘우치고 거부할 수 있게 하는 최소한의 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수치심마저 실종된 듯한 현실이다. 그리스도교의 구약성경에서는 거짓말의 죄악에 대하여 직·간접적으로 단죄하고 있다. 거짓말을, 하느님을 거역하는 행위이며 하느님을 욕되게 하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서는 재판에서 증언 여하에 따라 피의자의 생명이 좌우될 경우 날마다 주민을 소집했다. 따라서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는 이 계명은 동포인 이웃의 명예,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는 사상의 구체적 표현인 셈이다. 이 계명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유인으로서 모든 이스라엘 사람의 기본권을 보호하는 데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증언’에 따라 한 사람의 평판뿐 아니라 생명까지도 좌우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서는 거짓말을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계약을 깨뜨리고 불성실하게 행동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거짓 증언을 하는 자는 진실을 유린할 뿐 아니라 남에게 부당한 해를 끼치므로, 사회 공동체가 요구하는 성실성을 저버리는 것이 된다. 신구약 공히 거짓말을 하느님과의 대립이라고 보고 있다. 이 같은 성경의 정신에 따라 거짓말은 신앙인의 삶과 부합될 수 없는 것이다. 사진 출처 - 문화일보 사람에게는 타고난 수치심이 있다. 사람들은 이 수치심을 바탕으로 인간으로서 예의를 지킬 수 있는 힘을 얻고 건전한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도움을 받는다. 심리적 현상으로 볼 때 수치심은 사회성에 근거를 둔 것으로, 자기의 부족함이나 잘못된 것이 드러나거나 드러날 우려가 있을 때 느끼는 감정이다. 신앙적인 면에서 본다면, 진정한 수치심은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 앞에 하느님과 일치하고자 하는 진정한 겸손이 있을 때 생길 수 있는 또 하나의 신앙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거짓이 난무하고 거짓에 대한 수치심조차 상실된 오늘날 무엇보다도 위험한 것은, 자신이나 다른 이의 진실하지 않은 삶에 무관심하고 삶을 예사롭게 여기고 수치심을 모르는 사회풍조라고 할 수 있다. '일베(일간베스트저장소) 현상'이 대표적인 사례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약자에 대한 차별과 폄훼, 거친 막말, 안하무인격 행동 등에서는 조금의 부끄럼도 찾아보기 힘들다. 나쁜 친구의 말을 철썩 같이 믿고 그 말을 전하는 것은 잘못된 행동이고 결국 죄로 이어지게 된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는 가만히 있어도 죄를 짓게 만드는 죄의 구조가 널려있다. 신문 방송 같은 언론매체가 대표적이다. 사람들은 보통 언론에 등장하는 내용들은 전문가들이 만드는 것이라 믿고 쉽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실에서는 언론도 거짓을 전할 때가 적지 않다. 정부나 광고주 등의 부당한 압력에 굴복해서 진실을 왜곡시킬 때도 있다. 때로는 자발적으로 진실을 호도하는 일에 나서기도 한다. 이러한 왜곡이 벌어지는 이유는 이러한 행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종교적 가르침에 기반한 종교계 언론 기자들 가운데서도 일반 언론 기자들과 비슷한 고민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가톨릭교회에서는 8계명을 설명하면서 "대중매체를 통한 정보전달은 공동선을 위한 것이다. 사회는 진실과 자유와 정의와 연대 의식에 근거한 정보를 제공받을 권리가 있다.(…) 특히 대중매체는 그 이용자들에게 그 수동성을 길러주거나(…) 비판력이 부족한 소비자가 되게 할 수도 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494항)고 가르친다. 오늘도 우리 주위에서는 거짓 증언들이 넘쳐난다. 공신력이라는 가면을 쓴 언론에서는 더욱 교묘한 거짓이 쌓여만 가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거짓을 피하고 진리를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올바른 식별력이 요구된다. 참과 거짓을 가려내는 비판정신의 날부터 벼려야 할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거짓을 일삼는 이들과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키워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진리,“인간만이 부끄러움을 안다.” 이 글은 2016년 5월 25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637 | 추천: 3
이재승/ 인권연대 운영위원 하베아스 코르푸스(habeas corpus). 이 라틴어는 문자적으로 ‘당신이 그의 인신(人身)을 가지고 있다’를 의미한다. 인신보호영장(writ of habeas corpus)의 제도적 취지를 살린다면 ‘구금이 적법한지 심사할 수 있게 판사 앞에 구금된 자를 데려오라’는 의미다. 통상 인신보호법(Habeas Corpus Act)은 17세기 영국혁명의 결실로 알려졌지만 그보다 훨씬 전에 인신보호영장을 포함하여 다양한 영장들이 영국법에 등장하였다. 인신보호영장은 배심제와 더불어 영국인이 자랑으로 삼을 만한 제도다. 우리도 구속적부심사제의 형태로 이를 공유하고 있을 정도이다. 따라서‘하베아스 코르푸스’는 자의적 구금에 대한 포괄적인 항의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문명적 통제 수단에서 배제된 집단들이 지금 이 땅에도 존재한다. 불법 이주자와 탈북자가 그러한 실례들이다. 그들은 법 바깥에서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서 무법자(exlex)로 규정된다. 인권기준이 아니라 권력의 치밀한 욕망이 그들의 정신과 신체를 재구성한다. 최근에 중국의 북한 식당에 근무하던 지배인과 종업원 13인이 집단으로 탈출하여 제3국을 통해 입국하였다.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졸지에 이루어진 입국은 누군가의 작전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혹이 뒤따른다. 이 입국 사건은 북핵실험 이후 대북 경제제재가 효과를 발휘하는 사례로 매체에서 대서특필되었다. 물론 선거 결과에 당국자의 의도대로 유리하게 작용했는지는 의문스럽다. 최근에는 일부 종업원들이 비자발적으로 입국하게 되었다거나 단식을 계속하고 있다는 흉흉한 소문마저 돌고 있다. 물론 의혹은 입국과 그 이후 절차에 대한 법적 통제가 너무나 엉성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필자는 그래서 그 제도적 개선방안을 말하고 싶다. 필자의 논지는 ‘단적으로, 탈북자의 신체를 보여라!’는 것이다.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북한이탈주민법)은 국정원장으로 하여금 최장 180일까지 북한이탈주민(탈북자)에게 보호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최장 기한을 정했기 때문에 무한정 구금은 아니므로 과거보다 개선되었다. 그러나 국가정보원의 보호센터에 180일간의 구금은 결코 예삿일이 아니다. 이 기간 동안에 국정원이 어떤 목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조사를 진행할지는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로서 국정원은 탈북자들의 가족이나 친지, 변호인의 접근을 전면적으로 차단하고 있다. 국가는 탈북자를 법의 보호 바깥에 두면서 위헌적인 구금을 북한이탈주민법으로 합법화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법과 관행이 국제인권기준이나 헌법에 부합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 법을 혁신하거나 아예 ‘신자유주의적으로’ 철폐하는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 탈북자들은 아감벤이 말한 ‘호모 사케르’에 해당한다. 집단 탈북의 후폭풍은 이제 시작된 것 같다. 북한에 살고 있는 탈북자들의 가족이 납치라고 주장하고, 한국 정부에게 당사자의 접견을 요구하고, 유엔 인권기구들에게 진상조사를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호소가 CNN을 통해 국제적으로 전파되었다. 한국 정부는 북한 가족의 행태를 북한 당국의 정치공세쯤으로 간주하고 응수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는 한참 잘못된 생각이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권리에 기초하여 정치공세를 펼칠 수 있으므로 그들의 행태가 정치공세인지 여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북한의 가족들에게는 사건의 진실에 대한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남한 당국을 상대로 탈북자들과의 접견권을 직접적으로 행사하든지 신뢰할만한 제3자(유엔난민기구, 국가인권위원회, 국내인권NGO 등)를 통해 그 권리를 대리 행사하여 진실규명을 요청하든지 다양한 방법을 활용할 수 있다. 정부 당국은 탈북자의 보호를 내세워 가족의 권리를 묵살할 수 없으며, 가족의 요구에 응답해야만 한다. 보호센터(국정원이 운영한 과거 합동신문센터의 새로운 이름)에 대해서는 인권의 관점에서 추가적으로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 적지 않다. 일반적으로 한국에 망명하거나 귀화하기를 원하는 외국인은 국적법이나 난민법의 적용을 받는다. 그런데 탈북자는 북한이탈주민법의 적용을 받는다. 지배적인 학설에 따르면, (북한 국적을 가진) 북한 주민도 잠재적으로 한국 국적자이지만 남북 관계나 국제관계상 북한을 떠나 남한에 입국하는 때에 한국 국적자로 현실화된다. 그래서 탈북자는 일반 외국인과 달리 간편하게 한국 국적을 취득하게 된다. 물론 북한이탈주민법은 탈북자를 한국 사회에 안정적으로 정착시킨다는 더욱 중요한 과제도 안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업무가 국정원의 관할지에 속하는지는 의문이다. 최근 몇몇 사건에서 보듯이 탈북자들은 보호센터나 하나원이라는 어둡고 긴 터널을 통해서 특정한 정치적 의도에 종속된 인간으로 재탄생하거나 기관의 정책에 의해 간첩으로 탈바꿈되기도 하였다. 이번 총선을 앞두고 입국한 13인이 진정으로 한국 입국을 원했는지에 대해서는 풍문이 무성하지만 그것을 알 방도가 없다. 어쨌든 지금까지의 상황만으로 인권을 다각도로 침해하고 있다는 점은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당국자들이 13인의 탈북자가 본인의 희망에 따라 이 나라에 입국했다는 사정을 내세워 북한의 가족, 변호인, 여타 인권기구나 NGO의 접견 요구를 외면하고 있다. 국정원은 탈북자에 대한 현재의 보호조치가 수사 절차가 아니라 단순한 행정조사에 불과하므로 인신구속에 관한 헌법 및 형사소송법상 피의자(피고인)의 권리나 변호인의 권리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는 국정원의 희망사항일 뿐 인권기준은 그렇지 않다. 유엔난민기구의 지침 1) 나아가 유엔총회가 채택한 ‘피구금자 보호 원칙’ 2)은 이러한 변명을 명백히 거부한다. 보호 원칙은 억류 및 구금을 당한 모든 사람들을 포함해서 기준을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필자는 보호 원칙에 의존하여, 또는 이를 활용하여 억류중인 탈북자의 인권 상황을 모니터할 수 있는 권리로 네 가지 정도를 부각시켜 보겠다. 지난달 집단 탈출한 중국 저장성 닝보시 류경식당의 북한 종업원들이 단체로 찍은 사진이 12일(현지 시각) CNN에 공개됐다. 11일 탈북 종업원 3명의 가족은 CNN 인터뷰에서 이 사진을 공개했다. 사진 출처 - 허핑턴포스트 첫째로, 구금(억류) 된 탈북자들은 자신들의 법적 지위에 대하여 정보를 제공받을 권리를 가진다(원칙 10, 11, 13, 14). 탈북자들은 자신의 권리 상황에 대해 포괄적인 설명을 듣고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사회주의 법무 생활에 익숙한 사람들이 이질적인 자유주의 사회의 권리와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 등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탈북자의 보호 신청도 그저 허구적인 요식행위로 그칠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탈북자들이 신청의 의미를 문자적으로 이해하더라도 심리적 취약성과 문화적 정치적 이질성으로 인해 자신의 권리에 민감하게 행동하지 못할 개연성이 높다. 어쩌면 탈북자에게 열의를 가진 변호인만이 보호센터에서 유일하게 우호적인 친구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탈북자에게 변호인은 권리의 옹호자일 뿐만 아니라 자유사회의 문화적 통역자들일 수도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둘째로, 가족들의 접견교통권을 보장해야 하고, 친지 및 외부 세계와의 통신권을 보장해야 한다. 당국은 구금 및 조치를 가족들에게 통지해야 한다(원칙 16, 19). 현재 구금된 사람들은 독방에서 조사를 장기간 받거나 조사기간에 외부와의 연락도 차단되고 있다. 이들은 조사기간 동안 사실상 무권리 상태에 놓여있다. 그러나 구금된 자와 가족, 친지들과 접견, 전화 연락, 이메일 연락이 보장되어야 한다. 물론 해외나 북한에 있는 가족과의 통지는 남북 관계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신중한 절차를 밟아야 한다. 어느 경우에나 그들이 원하거나 구금자가 원하는 경우에는 당국자가 통지를 해야 한다. 셋째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단순히 변호인의 선임권의 보장이 아니라 정기적인 접견을 보장하고, 일정 시간 입회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 범죄수사에서도 입회할 수 있는데, 행정조사에서 변호인의 입회를 허용하지 않는 것은 부당하다. 이에 대해서 보호 원칙 18조는 매우 상세하게 정하고 있다. 특히 구금된 탈북자들에게는 국선변호인의 법률적 조력이 무상으로 제공되어야 한다. 변호인의 중요성은 앞에서 설명하였다. 넷째로, 보호센터에 대해 공정하고 독립적인 제3기구(국제인권기구, 국가인권위원회, NGO)가 정기적으로 모니터 해야 한다(유엔난민기구 지침 10). 집단입국과 관련하여 북한에 있는 탈북자들의 가족이 국제인권기구에 조사를 요구했으므로 그 후속절차에 따라 북한이탈주민법도 수정되어야 한다. 이미 2015년 11월 15일 유엔자유권위원회는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의 인권침해 가능성에 대하여 깊은 우려를 표명하였다. 인권기준에 적합한 보호센터의 관행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현재의 상황에서 보호센터의 인권친화성이나 보호조치의 적법성 여부보다 입국의 적법성 또는 정상성 여부가 더욱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비자발적인 입국을 차단하는 공정한 절차를 도입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탈북자를 국내입국과 동시에 신속히 법관 앞에 소환하여 입국의사의 진위를 확인하고 비자발적인 입국인 경우에는 희망에 따라 출국시킬 수 있는 입국적부심사제(入國適否審査制)로 요약된다. 그리하여 과도하게 긴장을 조성하면 진행되는 기획탈북도 합리적으로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구금기간의 연장에 대해서도 구금적부심사제를 통해 적절하게 통제해야 한다. 이제 정부도 북한 주민의 탈북 유도를 통해 체제경쟁 수단으로 활용할 것이 아니라 남한 입국 이후에 이들의 인권보호와 사회 정착에 깊은 관심을 두어야 한다. 집권세력이 아직도 남북 간의 체제 경쟁에 몰입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국내 정치를 위해서 기획탈북을 상투적으로 악용한다면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다. 실제로 탈북자들이 다시 한국을 떠나는 현상도 비일비재하다. 한번 왔다 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머물만한 곳으로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탈북자의 인권보장은 사회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측면에서 새로운 변화와 교육, 적응 프로그램을 요구한다. 국정원의 프로그램이 이러한 역할을 수행할지는 의문이며, 오히려 정치적으로 편향적인 견해를 가진 시민이 탄생하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민주적 세계관에 친화적인 인간, 그리고 자율적인 역량을 가진 시민은 어두운 복도에서 탄생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충성의 대상을 교체하는 것만으로는 아직 시민다움에 이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 UNHCR Guidelines on the applicable Criteria and Standards relating the Detention of Asylum-Seekers and Alternatives to Detention, 2012. 2) 모든 형태의 억류 구금 하에 있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원칙<Body of Principles for the Protection of All Persons under Any Form of Detention or Imprisonment, 9 Dec.1988 A/RES/43/173> 이재승 위원은 현재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6년 5월 18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746 | 추천: 0
이지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C는 나의 대학 후배다. 학생회관 5층 동아리 방에서 혼자 낯선 기도를 하거나 책을 뒤적일 때 슬며시 들어와 “형 뭐해?” 하고 옆구리를 찌르던 친구다. 목련이 지고 벚꽃이 한창이던 사월부터는 꽃향기에 실려 최루탄 냄새도 또아리를 틀던 시절도 있었다. 정문 옆, 병원 영안실 아래 초라한 자취방에 저녁이면 모여들던 후배들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라면 몇 봉지와 소주 한 병을 사들고 문을 열며 실없는 웃음 짓던 이가 C였다. 그가 광명에 자리를 잡았다는 얘기는 오래전에 들었다. 역시 벚꽃 활짝 피고 지던 어느 해 오월 즈음 동아리 방문을 살짝 열고 들어와 수줍게 인사하던 간호학과 S를 꼬드겨 연애를 하고 신혼방을 차린 곳이 그곳이었으니까. 광명 시민신문 대표를 했고 광명 아이쿱 생협 이사를 맡았다. 그 외에도 그는 지역의 현안이 있는 곳에 서슴없이 들어가 아픈 이들과 함께 아파하는 단 한 사람이 되었다. 그의 현재 직함은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 가족모임의 공동대표다. “2011년 6월 나래가 기침이 심했어요. 단순 감기 증상인 줄 알고 있었는데 한두 달 동안 증상이 지속되어 의심하고 있었죠. 그러다 호흡이 몹시 빨라지는 것을 엄마가 알게 되었어요. 서둘러 한밤중에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는데 의사가 ‘급하다, 치료를 장담 못 한다. 그동안 10명 중에 6명이 같은 증상이었는데 죽었다. 치료법도 없다’. 라고 말하더라고요. 결국 ‘원인미상 간질성 폐렴’으로 진단받고 입원했지요. 그전 4월 서울아산병원에서도 이미 임산부들이 같은 증상으로 죽고 언론에 많이 알려진 상태였어요. 나래도 이런 상황에서 어려움을 겪은 것입니다. 다행히 나래는 살아났지만 폐가 섬유화되고 손상당했어요. 지금도 감기에 걸리면 폐렴, 천식이 와요. 그 당시 폐가 약해져서……. 사실 우리 나래는 예외적인 케이스예요.”(2015.10 이슈in 아이쿱 인터뷰 중) C의 딸 나래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도 아마 2011년 겨울 즈음 술자리에서 였을 터이다. 가장 큰 문제가 된 ‘옥시싹싹’ 가습기 당번이 시판된 2001년 이후 첫 피해사례가 발표된 2002년부터 2011년 8월 31일 보건복지부 역학조사 결과 발표가 있기까지 무려 530여명의 피해자가 발생했고, 그중 146명이 사망(2015.5 환경부 2차 조사 결과) 했다는 얘기는 해를 넘겨 간간이 가습기 살균제 피해사례를 보도하는 뉴스를 통해 들었다. 그럴 때마다 C는 뉴스의 한쪽에서 피켓을 들고 서있었다. 광화문이나 정부기관 앞에 있었고 국회와 가습기 살균제 제조 회사 또는 판매매장 일 때도 있었다. 정부의 대응이라는 게 고작 2011년 역학조사 발표 당시 해당 제품의 구매와 사용을 자제해줄 것을 ‘권고’ 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으니 애초 그들에게 어떤 대책을 기대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4년을 이 사건에 매달렸지만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제품을 외국 기업과 국내 대기업들이 앞 다퉈 18년간 20여종을 팔았고 국민 800만 명이 사용해왔다는 사실이. 2011년 정부가 긴급 역학조사 결과를 발표하기 전까지 해당 기업은 물론이고 정부나 학계, 언론 심지어 환경단체 어느 곳 한 군데에서도 안전상의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로 인해 현재까지 사망자만 무려 142명이 발생했다는 사실이. 사건이 발생한 지 4년이 다 되도록 가해 기업이 일언반구 피해 대책은커녕 사과 한마디 안 한다는 사실이.” -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환경보건학 박사(2015.5.29. 한겨레 토요판 르포 중) 2015년 5월 나래가 아빠 일행을 따라 런던 외곽의 슬라우에 위치한 다국적 기업 ‘레킷벤키저’ 본사에서 시위를 벌였다. 그놈의 회사는 자기들이 만들어 판 물건 때문에 아픈 가슴 쥐고 먼 길을 날아온 어린 소녀에게 화장실도 내어주지 않았다. 일행은 볼일이 있을 때는 20분을 걸어서 슬라우 시립도서관 화장실까지 가야만 했다. 영국의 ‘가디언’지는 이 시위를, 나 몰라라 기업이 피해자를 영국까지 내몰았다고 보도했다. 나래는 땡볕 내리치는 이국의 낯선 거리에서의 고단한 일정을 불평 한마디 없이 소화해 냈다. 나래 어린이가 2015년 5월 영국 런던 근교 슬라우의 레킷벤키저 본사 앞에서 촛불을 들고 기도하고 있다. 환경보건시민센터 제공 사진 출처 - 한겨레 “해결된 게 하나도 없어요. 레킷벤키저는 영국의 100년 된 생활용품기업이에요. 국내 레킷벤키저는 본사가 아닌 지점이기 때문에 힘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환경단체 도움을 받아 일주일 동안 영국 본사 앞에서 시위하고 영국 국회 앞에서 투쟁하고 알리고 했던 거예요. 영국 가디언에도 보도가 됐지만 해결은 안 되었어요. 그들을 세 차례 만나서 공식 사과하고 피해 보상해라고 했는데 꿈쩍도 안 하더라고요. 자기네는 ‘오로지 소송으로 할 거다’라고만 말하는 거죠.”(2015.10 이슈in 아이쿱 인터뷰 중) 지난해 메르스 이후 한국을 휩쓸었던 ‘데톨’이라는 손 세정제도 옥시레킷벤키저 제품이었다는 것도 그의 인터뷰를 통해 처음으로 알았다. 검찰의 조사가 시작되었고 옥시레킷벤키저의 전직 대표이사가 소환되었다. 롯데마트나 홈플러스 같은 관련 업체들이 사과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에 대해 넋 놓고 있던 방송들도 연일 새로운 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그들의 진정성을 확신할 길이 없으니 답답한 일이나 일단은 환영할만하다. C는 지금 검찰의 더 정확한 조사와 처벌, 가습기 살균제 국회 청문회 추진과 특별법 제정의 한복판에 서있다. 살인죄는 공소시효가 없지만 업무상 과실치사상의 공소시효는 7년이다. 따라서 살인죄가 적용되지 않을 경우 피해자 중 상당수는 피해가 확인되더라도 보상받을 길이 없다. 하지만 특별법이 제정되면 공소시효가 해결된다. “세월호 사건을 지켜보면서 온 국민이 보내는 관심이 부러웠습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를 정부나 국회, 우리 사회가 소홀히 다뤘던 지난 시간은 정말 끔찍했습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특별법 제정과 특별조사위원회 구성에 국민들이 관심을 많이 가져주셨으면 합니다. 그래야 '안방의 세월호 사건'의 진상을 밝혀낼 수 있습니다.” 차라리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쏟아지는 국민들의 관심이 부러웠다는 C의 말을 들으며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그 오랜 시간을 만나왔으면서도 그가 분노를 토했던 저녁 술잔에 잔 한번 부어 주지 못 했다. 젊은 날 아픈 이들과 함께하며 예수 살이를 했던, 몸소 아픈 이가 되어있는 그에게 응원의 한마디 전하지 못 했다. 이지상 위원은 현재 가수겸 작곡가로 활동 중입니다. 이 글은 2016년 5월 4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627 | 추천: 0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한 사람 한 사람을 보면 괜찮은 이들도 제법 많은데, 왜 괜찮은 이들이 모인 사회가 폭력적일 정도로 문제투성이가 될까. 그게 종종 궁금했다. 개인이 개인을 대하는 일은 비교적 쉽다. 개인이 개인에 대해 면전에서 폭력을 쓰는 경우는 많지 않다. 가족이나 친지, 지인들이 모이면 서로에게 비교적 도덕적으로 대한다. 그런데 집단이 되고 사회가 되면, 그 집단이나 사회 전체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약해진다. 낯모르는 개인이나 집단을 가족이나 지인과 동일하게 대하기는 힘들다. 남의 불치병보다 제 손톱 밑의 가시가 더 다급한 문제이기 마련이다. 이것이 사회 전체가 암울해지게 되는 단순하고 근본적인 이유다. 국제정치학자인 라인홀드 니버가 1930년대에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책을 쓴 적이 있다. 제목 그대로 개인 간에는 서로 도덕적으로 대하는 자세가 가능하지만, 개인들을 몇 단계 건너가면 도덕성의 강도가 약해진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다. 개인 차원에서는 다른 이의 이해관계를 고려하기도 하지만, 집단으로 가면 개인들 간의 친밀도가 떨어지고 개인의 도덕성이 그다지 부각되지 않는다. 집단에서는 개인의 의도와 행위 사이의 차이가 직접 노출되지 않는다. 그래서 개인이 내적 의도와 외적 행위 사이에 거리가 있는 비도덕적 행위를 하더라도 집단 전체로서는 딱히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진 출처 - 문화일보 게다가 집단은 단순히 개인들의 총합이 아니다. 집단은 개인의 의도와 행위 사이의 차이가 중층적으로 얽혀 있으면서도, 그 차이들에 책임을 물을 수도 없는 복잡한 상황 속에 놓여 있다. 집단의 주체는 모호해서 전체를 인도하거나 통제 및 억제하기 힘들다. 다른 사람들의 욕구를 수용하는 능력도 개인과 개인 간의 관계에 비해 훨씬 결여된다. 그래서 개인과 같은 도덕성을 획득하기 어려워진다. 개인들의 이기적 충동이 중층적으로 결합된 집단주의 때문에 타자가 긍정적 행동을 하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개인은 비도덕적 집단 안에 자신의 도덕성을 숨기고, 자신의 책임은 면하면서 집단의 비도덕성에 합류한다. 이것이 폭력이 구조화하는 이유와 과정이다. 이런 문제는 종교인이 많아진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선량한 종교인들도 이러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국회의원을 잘 뽑아 놓았다고 해결될 리 만무하다. 이번 총선에서 상대적으로 변화와 진보 쪽이 힘을 얻은 듯 하여 그나마 다행스럽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세상의 평화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국회가 국민보다는 권력에 더 관심이 많은 곳이라는 식상한 이야기는 차치하고라도, 아무리 유능한 정치인이 모여도 복잡다단하게 얽힌 전 국민적 인간관계를 풀어나가기는 힘든 일이다. 지금으로서는 대의민주주의가 아닌 직접민주주의 체제로 옮겨가고, 개개인이 생활 정치의 주체가 되면 조금은 나아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는 정도다. 당분간은 여소야대 상황에서 정치판이 새로 짜이는 모습을 좀 즐기면서, 좀 더 구체적인 상상은 추후 기회 봐서 해보려 한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에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6년 4월 14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579 | 추천: 0
장경욱/ 인권연대 운영위원 지난 주말 홋카이도의 삿포로시를 다녀왔다. 관광명소로 중국인과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삿포로는 1972년 동계올림픽이 열린 눈의 도시로 유명하다. 홋카이도는 일본강점기 조선인들이 강제징용되어 노역에 시달리다 숨져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다 최근 유골을 발굴하여 그리운 고국으로 봉환되기도 한 식민시대의 한이 깃든 곳으로 일본의 최북단에 위치해 있다. 이번 삿포로 2박 3일의 일정은 매우 빡빡하였다. 삿포로 시내를 오전 나절 돌아본 것 외에는 관광은 전혀 하지 못했다.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후배 변호사와 함께 국가보안법 사건 피고인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증거 수집을 하는 일정이 있었다. 증거 수집을 해야 하는 대상은 자녀들 모두 조선학교 출신이고, 국적을 조선적에서 한국적으로 바꾼 대한민국 국민이고, 조총련 분회장의 신분을 가지고 지하철 역 입구에서 타코야키(밀가루 반죽 속에 잘게 썬 문어를 넣어 동그랗게 구워 파는 간식거리) 장사를 하는 분이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우리의 변호를 받는 피고인의 소위 상부선이라는 분이다. 그의 큰아들은 조선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에 유학을 다녀왔다. 그는 자녀 네 명을 모두 ‘우리학교’에 보내기 위해 타코야키 장사를 시작했다. 지금까지 30년째 운영하고 있다. ‘우리학교’는 김명준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에 나오는 홋카이도에 위치한 학교이다. 막내아들은 그 영화에 등장한다고 했다. 우리의 변호를 받는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피고인은 20대 후반, 일본 어학연수 및 유학 시절에 이 타코야키 장수에게 타코야키를 사먹다가 우리말로 대화하며 같은 동포로서 친해지게 되었다. 이후 그와 가족과 같은 사이로 친밀하게 교류하였다는 이유로 현재 대전 교도소에서 1심 3년형을 선고받고 항소심 계류 중이다. 우리의 의뢰인은 그의 큰아들이 고려대학교 유학 중이었던 2001년, 30년째 타코야키 장사를 하는 그곳, 지하철 입구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일본어 어학연수원 기숙사에서 지내며 일본어 공부를 하고 있었다. 의뢰인은 타코야키를 자주 사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에서 유학 온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게 되었고, 타코야키 장사를 하는 그는 한국에 유학 가있는 큰아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 분단이 강요하는 의구심과 경계심을 풀고 술친구로 가까워지게 되었다. 경계심을 허문 그들의 관계가 지금 국가보안법 위반 지령 수수의 관계로 둔갑하게 되었다. 포섭의 과정이 가관이다. 공소장이 그리는 포섭의 과정은 피고인이 그의 집에서 ‘불가사리’라는 북한영화를 본 사상학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신상옥 감독이 만든 ‘불가사리’는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불가사리’라는 쇠를 먹고 자라는 죽지 않는 괴물을 소재로 한 영화이다. 이것으로 사상학습을 받고 포섭되었다는 공소장과 1심 유죄 판결은 북한 어린이용 SF 괴기영화 ‘불가사리’보다 더 괴기스럽다. 시대착오적 국가보안법의 불가사의한 공포 괴담은 이렇게 북한영화 ‘불가사리’를 북한체제 찬양영화로 불온시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수사기관은 피고인이 한국 친구들을 데리고 그의 집에 머물며 삿포로 여행을 한 것을, 피고인이 그에게 포섭되어 상부선인 그의 지시를 받고 삿포로 관광을 빙자하여 사상교육을 통해 포섭하려 한 ‘유인’행위로 만들었다. 피고인과 친구들의 짧은 여행 동안 베푼 주인장의 호의는 친구들을 포섭하기 위해 ‘제주 4. 3. 사건’의 영상물과 ‘아리랑 축전’의 영상을 보도록 강요한 것으로 되었다. 제주 평화공원에서 국가적으로 추모하는 제주 4.3학살의 진실은 사상학습 도구로 단죄되었고 한국인들도 평양에서 관람이 허용되었던 ‘아리랑 축전’의 영상은 경계와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낡고 허름하며 비좁은 그의 집 거실. 그와 부인, 둘째 아들이 함께 있는 가운데 타코야키 재료를 써는 문어칼을 든 그가 사상학습 강요에 반기를 드는 피고인의 친구를 위협하면서 김일성, 김정일 사진 앞에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부르도록 강요한 무대로 날조되었다. 한국의 수사기관이 어디까지 허위진술을 조작할 수 있는지 그 끝을 모를 지경이다. 피고인은 불구속 수사과정에서 고등학교 선배라는 수사관의 회유와 구속에 대한 두려움으로 총련 동포인 그와 친하게 지낸 것도 ‘죄 아닌 죄’라는 것을 인정하고 구속을 피하고자 수사관의 유도신문에 허위자백을 하는 ‘우’를 범하였다. 피고인은 불구속 상태에서 오랜 시간 조사를 받으며 구속될 줄 모르고 허위자백을 했다가 구속이 되고 나서 자신의 누명을 벗고자 우리 변호인을 찾아 결백을 호소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집에는 북한 지도자의 초상화 사진이 없다. 7080년대의 이야기다. 오히려 거실 벽에는 정다운 가족들의 갖가지 사진들이 즐비하게 걸려 있었고 홋카이도 우리학교를 방문한 배우 감우성 씨와 그 그리고 그의 딸이 함께 운동장에서 찍은 사진이 걸려 있다. 배우 권해효 씨가 홋카이도 우리학교 행사에서 발언하는 사진도 있었다. 그에게는 홋카이도에 강제노역 된 조선인들의 유해발굴을 위해 앞장서는 일본인 친구가 있다. 강제징용 된 조선인들의 학살을 기록한 그 일본인 친구의 책도 ‘유인’ 행위의 불순한 행동으로 조작되었다. 피고인의 허위자백에는 그 일본인 친구까지도 조총련 사람으로 진술되어 있다. 피고인의 허위자백은 2014년에 발생한 ‘세월호 사건’을 2013년도에 그에게 보고한 것으로까지 되어 있다. 공소장은 그가 남한 정보를 마치 피고인으로부터 얻어내는 것처럼 그리고 있다. 그의 집에서는 1998년부터 유료로 위성TV가 설치되어 한국의 뉴스나 드라마를 생방송으로 시청할 수 있었다. 일본인인 그의 부인은 지금 한국 드라마 ‘열성 팬’이다. 그의 집 거실에는 피고인이 가져다준 대한민국 국기가 있었다. 그는 2002년 월드컵 당시 피고인과 함께 한국을 열렬히 응원하였다. 사진 출처 - 한겨레 피고인과 그의 관계를 의심하기 시작한 수사기관은 오랜 내사기간 동안 피고인과 그의 일본 및 국내에서의 일거수 일투족을 통신감청과 미행촬영으로 밀착 수사하였다. 일본에서는 일본공안당국과의 공조절차를 거치지 아니하고 일본의 주권을 침해한 미행 촬영을 하였음이 틀림없다. 그것을 수사기록에 버젓이 첨부하여 유죄의 증거로 제출하였다. 일본에서 빚어진 중앙정보부의 김대중 납치공작과 진배없는 파렴치한 나쁜 짓이다. 그렇게 오래도록 통신감청하였음에도 감청 내용 중에 문제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 사건에서 증거는 오로지 허위자백과 삿포로 여행에서 그를 만났던 친구들의 짜 맞춰진 허위진술뿐이다. 그의 집에서 구독하는 ‘조선신보’를 한국에 가져와 주변에 소개한 것도 국가보안법의 이적표현물 소지로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자처하는 우리 사회. 국가보안법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상황에서 북과 관련된 자유는 어디까지인가? 해외에 있는 북한 식당에 가도 되는가, 안되는가? 북한 식당에서 주문을 하고 밥을 먹는 것은 되는가? 그곳 종업원들은 북한 공작원인가, 아닌가? 일본에서 유학 온 총련 사람과 반대로 일본에 유학을 가서 총련 사람과 친해지는 것은 가능한가? 총련 사람은 공작원인가, 아닌가? 총련동포들이 다니는 조선학교에 우리는 국정원의 미행감시 두려움 없이 자연스럽게 들어가 구경하고 이야기하고 자유롭게 의사소통할 수 있는가? 사전 사후 신고를 해야 가능한가? 7080년대 일본에서 총련 사람들과 교류하였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으로 간첩조작 된 수많은 사람들이 재심에서 무죄를 받는 와중에 우리는 아직까지 그 그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증거수집의 대상이 된 그가 총련 동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삿포로 방문길을 주저하였다. 2박 3일의 짧은 삿포로 방문 길에도 가족들의 염려와 걱정 속에 한국을 떠났고 삿포로에서 귀국하자 가족들은 비로소 안도하였다. 삿포로에 도착하여 그를 만나기 전부터 공포와 경계심으로 숨죽이며 그를 만났다. 그를 만나 사건에 대한 문답서를 받으며 경계심을 허물 수 있었다. 사상교육의 진원지가 된 그의 집을 방문하여 단란한 가족들의 일상을 보면서 분단의 비극과 공포가 깊이 드리운 한민족의 현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지하철역 앞에 차량을 세우고 차량 안에서 타코야키를 열심히 팔고 살아가는 30년 타코야키 장사 이력의 그. 그의 치열한 생업을 보며 가장으로서 무거운 책임감이 느껴져 감동하였다. 그는 피고인의 억울한 누명을 풀기 위해 체포를 각오하고 한국의 법정에 설 것인가. 체포가 되면 타코야키 노점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어 가족들이 생계 곤란에 처할 수도 있다. 그는 지금도 선택을 고민 중이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733 | 추천: 0
권보드래/ 인권연대 운영위원 가끔 애 키우고 살림하는 일에, 가족 안팎의 관계에 치일 때면 10년만 참으면 되겠거니 생각한다. 10년 지나면 윗세대는 80대고 애들은 둘 다 20대다. 눌리고 돌볼 위아래가 느슨해지는 셈이다. 어른들이 편찮으실까 걱정이지만, 효가 지상 최대의 가치인 조선시대는 아니잖은가. 10년 후면 아직 50대 중반, 인생을 새로 시작해도 될 나이다. 마음껏 공부하고 멋대로 여행도 다녀야지. 죽는다는 과제에 대해선 일흔부터 골똘히 생각해 보고. 이대로 별일 없이 생활이 굴러갈 때의 시나리오이긴 하다. 병원 들를 때 이런저런 경고도 받게 됐고, 사고와 재해와 전쟁은 여전히 인간의 삶을 좀먹고 있으니, 기대 수명이란 한낱 허구이기도 쉽다. ‘4월은 잔인한 달’이란 「황무지」의 시구는 1차 대전 후, 탄식이자 예언과도 같은 말이었던가. 화창한 봄에, 벨기에 테러 소식에 이집트 항공기 납치 사건이 이어진다. 남북 간 대결 국면은 어느덧 익숙해져 좀체 귀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다. 2년 전 바다를 떠올리는 일은 더더구나 드물다. 헤아리기 버거운 불행 속에서, 그래도 기대 수명을 점치고 인생을 계획한다. 몇 해 전 ‘죽음의 시계(deathclock)’라는 사이트가 화제일 때 조카딸이 내 종생의 시기와 방법을 알려준 적이 있다. 아흔 몇 살 때 파도에 휩쓸려 죽는다나. 웃어넘겼지만 아흔 몇 살도 무섭고 파도도 무서웠다. 지금껏 아흔 몇 살은 아무래도 두렵다. 백세 인생이 코앞이라지만, 죽을 때까지 쓸 만 하고 죽을 때까지 할 일 확실한 인생이 얼마나 될까. 90대 중반인 고모할아버지 한 분은 거동을 못한 지 20여 년째다. 무릎 관절 수술을 한 것이 잘못됐다던가, 작은방 한 칸서 종일을 보내신다. 조용하고 사려 깊어 처조카들 집까지 너그럽게 챙기던 분이었는데. 80대 후반의 시이모께선 이른바 치매, 인지장애를 앓는 중이다. 남편마저 못 알아보는 일이 자주 있어 결국 요양병원에 입원하셔야 했다. 자태가 빼어나 젊은 시절엔 담 너머 기웃거리는 남학생이 한둘 아니었다던데. 주변 어른들이 70대를 넘기기 시작한 후, 그 밖에도 뇌졸중이며 파킨슨씨병이며, 온갖 병명이 흉흉하게 울린다. 늙기도 설워라커늘. 부모 상 다 치른 후 근 환갑에 자유분방한 사상을 펼치기 시작한 이탁오를 떠올린다. 노년에야 바라던 대로 살았고, 결국 여든 가까운 나이에 감옥에서 자결한 그 인생은 노년의 관습을 멋지게 비껴나간다. 브레히트 소설 속 “마지막 빵 한 조각까지” 알뜰히 챙겼던 할머니도 있다. 여든쯤 남편과 사별한 후 꽃단장하고 유랑패 따라 인생을 즐기기 시작했던가. 1백 세가 되도록 정력적으로 활동한 철학자 가다머도 생각나고 죽음까지 의연하게 처리한 니어링 부부도 기억난다. 사진 출처 - 한국일보 그래도 노년은 두렵다. 퇴직도 늦고 연금도 탄탄하리라는 직장을 꿰 차고도 그렇다. 내가 별 필요 없어졌다는 자의식을 어떻게 견딘다지. 지금은 가족도 있고 직장도 있어 그 때문에 삽네 하지만, 그런 알리바이가 다 사라진 후엔 어떻게 숨을 쉰다지. 노인도 일할 거리 있는 농경 사회도 아니고, 요령과 지혜야 이젠 인터넷 담당이고. 점점 외로워질 테고 몸은 하루가 다르게 삐걱거릴 텐데. 세월은 내 지식과 신념을 넘어 줄달음질 칠 텐데. 벌써 3년여 전 대통령 선거 직후, 6‧70대들과 만나 연속 인터뷰라도 하고 싶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한 적이 있다. 선거 전부터, 평생 야당이었던 어른들이 이번에야말로 기호 1번을 찍고 싶노라 하는 말을 여러 차례 들었던 터다. 왜 그런지 다 묻진 못했고, 답을 들어도 이해하진 못했다. 대부분 그분들 자신이 자기 행동의 속내를 다 헤아리지 못하는 듯 보였다. 우울과 분노와 배반당한 세월, 그건 정치 뿐만은 아닌 것 같았다. 무릎 맞대고 오래 대화하다 보면 속내가 조금은 짐작될까 싶었다. 그것 하나 못하고 무얼 하랴 싶었는데. 실제론 아버지나 시어머니와의 대화도 힘들어하면서, 해가 바뀌고 속절없이 나이만 먹는다. TV를 켜면 온통 젊은이 세상, 가끔 노년의 분위기가 어른거려 채널을 멈추면 어김없이 TV 조선이거나 채널 A다. 내가 노인이라도 그쪽에 채널을 고정시킬지 모른다고 생각해 본다. 이유가 뭐든 노년에 말 걸어주는 게 그쪽밖에 없다면. 밖에선 여전히 바쁜 척 하지만 텅 빈 집안, 속삭여주는 존재가 TV밖에 없다면. 히틀러라면 마침내 노년도 치우고 싶어 했을까. 장애인을 안락사시키고 유태인을 수용소로 몰아넣었듯. 누가 유용한 존재고 누가 쓸모없는 존재인지 결정하는 권력은 어느 손에 있는가. 알파고까지 등장하고, 유용성이란 기준에선 인류 전체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는 지금, 헌데 그 너머는 왜 이리 보이지 않을까. 함께 일구는 세상 속에서 우리 모두 가치 있는 존재라는, 사뭇 교과서 같은 발언은 왜 더 멀어지기만 하는 걸까. 그나저나, 나이 먹어 좋다고 쓰고 싶었는데 원. 주름살이 곱게 자리 잡히길 바란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이런. 7‧80대 어른들께도 균형 잡힌 삶을 기원하고 싶었는데. 백세 인생이라는데, 겨우 반환점이라는데 몽롱한 우울에나 첨벙거려서 어쩐다지. 지금 못하는 건 앞으로도 못하는 걸까. 10년 후부턴, 그때부턴 정말 자유롭게 늙어가고 싶은데. 권보드래 위원은 현재 고려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6년 3월 30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705 | 추천: 0
김창남/ 인권연대 운영위원 신영복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신지 어느새 두 달이 훌쩍 지났다. 장례를 치루면서 3킬로 정도 빠졌던 내 체중도 다시 원 상태로 회복되었다. 그렇게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늘 하던 대로 그럭저럭 살아간다. 여전히 ‘신영복 선생님 안 계신 세상’에 산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을 때가 많다. 언제든 전화 드리면 반갑게 받아주실 것 같고, 찾아뵈면 늘 그랬듯 정감어린 목소리로 이런저런 말씀을 들려주시고 특유의 유머 감각으로 나를 웃겨 주실 것 같다. 영결식 날 김제동 군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그냥 선생님 안 돌아가신 걸로, 늘 곁에 계신 걸로 생각하며 살고 싶다”던 말. 정말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신 선생님이 돌아가셨을 때 서너 군데 언론사에서 추도사를 청탁했지만 모두 거절했다. 추도사란 어느 정도 객관적 거리를 가진 사람이어야 쓸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 선생님을 부모처럼, 스승처럼, 형님처럼, 그리고 가장 가까운 친구처럼 생각하며 살아온 나는 사실 상주나 다름없는 처지였으니 추도사를 쓸 수 있는 마음 상태가 아니었다. 이제 두 달이 넘어 지나 조금은 마음을 추스르고 신 선생님에 대한 개인적 추억을 떠올리며 몇 자 적어볼까 한다. 지난 20년 성공회대에서의 내 삶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신영복과 함께 한 삶’이라고 할 것이다. 내가 이 학교를 사랑하고 이 학교의 일원임이 자랑스러웠던 이유를 단 하나만 대라면 여기 신영복 선생님이 계시고, 내가 바로 그 분 곁에 있다는 것, 그것이었다. 나는 늘 선생님이 하시는 일을 도우려 했고 가시는 길에 동행하고자 했다. 선생님은 모자란 나를 마다하지 않고 받아주시며 함께 해 주셨다. 하지만 언제나 지나고 생각해 보면 내가 신 선생님을 도운 게 아니라 그 분으로 부터 헤아릴 수 없는 도움을 받은 것임을 깨닫곤 했다. 신 선생님이 아직 퇴임하시기 전, 매일 아침 학교에 나오면 선생님 연구실에서 차를 마셨고 점심 식사를 마치고는 교수 휴게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다. 선생님은 언제나 그 자리에 어울리는 대화 소재를 갖고 계셨고 수많은 고전의 구절들과 징역살이의 일화들을 통해 숱한 배움을 주셨다. 도대체 어떻게 그 많은 지식과 기억들을 간직할 수 있을까, 늘 경이로웠다. 선생님은 어느 자리에서든 제일 재미있는 농담을 던지며 우리를 웃게 하셨다. 선생님과 함께 한 날은 딱 그만큼 즐거웠고 안 계신 날이면 딱 그만큼 허전했다. 수요일에는 함께 축구를 했다. “감옥살이 20년만큼 나이에서 빼야한다”는 말이 농담이 아니다 싶을 만큼 선생님은 건강하셨고 축구 솜씨도 빼어났다. 우리 축구단은 선생님이 즐겨 쓰시던 붓글씨의 글귀를 따 ‘여럿이 함께’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내가 신영복 선생님과 함께 축구를 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놀라며 부러워했다. 사진 출처 - EBS 신 선생님 정년퇴임 무렵부터 동료 교수들과 함께 선생님으로부터 서예를 배웠다. 나는 수제자를 자처하며 서예회장을 맡았지만 재주도 없는데다 게으르기까지 한 제자들이 선생님의 깊고 넓은 서도(書道)와 서예(書藝)의 경지를 흉내조차 내기 힘든 건 당연한 일이었다. 두 번의 전시회를 통해 학교에 장학금을 기탁할 수 있었지만, 그건 모두 게으른 제자들을 독려하며 한 자 한 자 써주다시피 하신 선생님의 헌신 덕분이었다. 물론 장학금의 대부분은 신 선생님 작품의 판매를 통해 얻어진 것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신 선생님이 퇴임하신 후 마지막 몇 년 간 인문학습원과 강연콘서트를 통해 함께 할 수 있었던 건 영광이자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인문학습원 일을 선생님 곁에서 조금씩 돕기 시작하다 결국은 내가 인문학습원장 자리를 물려받게 되었다. 밤늦게 강좌가 끝나고 나면 내 차로 선생님을 댁까지 모셔다 드렸다. 언젠가 내 차를 타고 가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다른 사람 차를 얻어 타면 자꾸 이것저것 물어보고 말을 붙여서 피곤한데 김 선생 차를 타면 아무 말 안하고 갈 수 있어 편해요.” 무뚝뚝하게 앞만 보며 운전하는 내 성격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선생님은 언제 누구와 함께 하든 상황에 가장 적합한 말씀으로 분위기를 유쾌하게 만드시곤 했다. 2009년 무렵부터 선생님과 더숲트리오가 함께 하는 강연콘서트를 다녔다. 두 번의 전국 투어를 포함해 수십 번은 더 다닌 것 같다.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자 모였다. 선생님은 늘 진심을 다해 강연하셨고 강연 끝내고 피곤하신 가운데에도 싸인을 받고자 길게 늘어선 사람들을 위해 시간을 내 주셨다. 강연콘서트를 함께 다니며 선생님의 강연을 여러 번 반복해 들었다. 선생님의 강연은 듣고 또 들어도 매번 재미있고 감동적이어서 똑 같은 얘기에 똑 같이 눈물이 핑 돌고 가슴이 짠해지는 경험을 숱하게 했다. 지방 강연을 가면 늘 선생님과 내가 한 방을 썼다. 그렇게 오랜 세월 많은 시간을 함께 했지만 단 한 번도 선생님이 허튼 소리를 하시거나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시는 걸 본 적이 없다. 늘 단정하고 겸손하고 누구에게든 진심과 배려로 대하시는 모습을 볼 때마다 도대체 어느 정도의 수양, 어느 정도의 내공이면 저렇게 될 수 있을까 감탄하곤 했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 거동 못하고 누워계신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마비가 다리 쪽부터 위로 올라오고 있어. 이제 가슴까지 왔네. 얼마나 다행이야. 위에서부터 내려오지 않는 게.” 선생님은 마지막까지 유머를 잃지 않으셨다. 신영복 선생님은 우리에게 세상을 보는 눈과 삶의 태도를 새롭게 가다듬게 만드는 수많은 지혜를 남기신 사상가셨다. 언젠가 선생님이 내게 해주신 말씀이 기억난다. 친구가 되지 못하는 스승은 좋은 스승이 아니고 스승이 되지 못하는 친구는 좋은 친구가 아니라는 말씀. 그 분은 내게 최고의 스승이고 최고의 친구였다. 지난 1월 15일 나는 최고의 스승과 최고의 친구를 한꺼번에 잃었다. 그 빈 자리는 아마 영원히 메워지지 않을 것이다. ● 이 글은 성공회대학보(vol.270)에 실린 ‘신영복 선생님을 추억하며’를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김창남 위원은 현재 성공회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6년 3월 24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707 | 추천: 0
오인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정신과 전문의 대부분이 절대로 할 필요가 없다고 반대하는 푸닥거리를 꼭 해야 한다고 홀리는 자가 있다면 선무당이거나 사이비 의사일 가능성이 높다. 선무당이나 사이비 의사는 십중팔구 사람을 잡는다. 역사학 분야의 전문가들 대다수가 할 필요도 없고 해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는 '국정화'를 곧 죽어도 해야 한다고 우기는 자가 있다면, 모리배이거나 얼치기 어용일 개연성이 크다. 모리배나 얼치기 어용은 십중팔구 사회를 망친다. 잡기는 쉬울 지라도 살리기는 어려운 게 사람 생명이듯이, 무너뜨리긴 쉬울 수 있어도 다시 세우긴 힘든 게 사회 윤리요 정의다. 그럼에도 '정치 선무당과 모리배'들은 남들이 죽건 말건, 세상이야 어찌되건, 역사가 퇴행하건 말건, 제 잇속만 챙기면 그만이라는 투로 극성스럽게 패악을 떤다. “함께 모인 사람들을 갈라놓아 약하게 만들 수 있다면, 겉으로는 조화를 이루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분열의 씨가 뿌려질 수 있다면, 또한 권리나 이해의 대립을 통해 상호 불신과 증오를 불어넣어 여러 계급을 억압하는 권력을 강화할 수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를 조장하는 통치자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무질서와 변혁 속에서 전제군주제는 그 추악한 머리를 서서히 쳐들어, 국가의 어느 부분에서건 선량하고 건전한 것이 눈에 띄면 닥치는 대로 삼켜버려 마침내는 법률과 국민까지 짓밟고 공화국의 폐허 위에 우뚝 서게 될 것이다.…… 전제 군주제가 입을 열자마자 고려해야 할 올바름이나 의무는 이미 사라지고, 극도로 맹목적인 복종만이 노예들에게 남겨진 유일한 미덕이 된다.” 루소의 『인간불평등 기원론』(주경복, 고봉만 옮김, 책세상)의 끝자락에 나오는 언설이다. 앙시앵레짐의 폐단과 통치 집단의 추악함을 고발하는 루소의 이런 언술에서 1756년 프랑스만이 아니라 2016년 지금 여기의 현실을 본다. 오호(嗚呼) 통재(痛哉)라! 오호 애재(哀哉)라! 아니, 혹세무민의 모리배들을 놓고 굳이 18세기 프랑스를 떠올릴 필요도 없겠다. 구한말, 이 땅의 언필칭 ‘통치계급’의 시나리오를 떠올려볼 수도 있으므로. "실정과 졸정 그리고 폭정과 악정을 거듭한 끝에, 밑으로부터 오는 심판을 두려워한 나머지, 본인들의 파멸을 면하기 위해서 차라리 나라를 파멸시켜 버린다는 시나리오"를(최인훈, 『바다의 편지』). 다른 것은 몰라도, 적어도 한국사 국정교과서를 강행하려는 이유의 일단은 이런 “두려움”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라고 시나리오를 써보자). 권력의 이익과 백성의 이익은 다를 수 있다는 것, 집권층의 운명과 국가의 운명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역사에서 배운 시민들이, 국민의 생명을 지키지 못하고 국가의 헌법마저 훼손한 '지배세력'을 심판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렇다! 앉으나 서나 뭐든지 '남 탓'만 하는 정치권력은 역사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민들이 촛불을 들어서…>, <부모가 자식의 죽음을 팔아서…>, <청년들 눈이 높아서…>, <여성이 출산을 기피해서…>, <노동자 임금이 높아서…>, <교사와 교수들이 좌파여서…>, <학생들이 물들어서…>, <농민이 시위를 해서…> 따위의 생각밖에 못하는 소아병적 집단이라면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일깨워주는 역사(교육)을 두려워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사진 출처 - 헤럴드경제 “너희는 '나라의 하인'일 뿐이다. 소수에 불과한 너희들 잇속 두둑하게 챙기자고, 닥치는 대로 매도하고 내동댕이친 다수의 시민-부모-청년-여성-학생-노동자-교사-학자-농민이야말로 국가의 주인(주권재민!)이로다!”라고 읊조리는 역사 가라사대를 지배집단이야 좋아할 턱이 있겠는가? 자신이 잘나서 지배자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하인(=국가의 공복)이고, 종 부리듯 막 대한 국민이 진짜 주인이라고 언술하고 떠들어대는 역사라니, '이런 젠장, 이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어!'라는 생각이 들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차제에 진짜 주인을 물리고 주구장창 주인해 볼 욕심으로 '역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역사 교과서 국정화(라고 쓰고, '내 맘대로 뜯어고치기'라고 읽는다)를 획책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저들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투철한 국가관이 부족하기에 헌법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다. 주인을 기만하고 주인의 생각에 반하는 짓을 하려는 하극상을 벌이는 것이니 국민적 동의를 얻기도 어렵다. 전문 역사가 집단을 무더기로 매도하고 능멸했으니 역사(학)의 지원을 받기도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사람 잡고 세상 망치고 역사를 뒤집으려는 망발을 멈추지 않는다면, 주인들이 줏대 있게 나서서 미쳐도 곱게 미쳐야 한다는 깨우침을 주는 수밖에는 없지 싶다. 어설픈 ‘종북’ 타령하지 말고 주어진 ‘종복’ 노릇이나 잘 하라고 지도(指導)해줘야 한다. 그리 안 하면 '역사의 멍석말이'를 당하는 법이라고 힘차게 편달(鞭撻)해줘야 한다. 눈 뜨고 못 볼 꼴을 다시 보지 않으려면! 루소는 앞서 인용한 구절에 이어서 주인노릇하려는 이들을 다음과 같이 응원한다. “오직 힘만이 지탱하고 있었던 전제군주를 타도하는 것도 힘뿐이다. 모든 일은 이와 같이 자연의 질서에 따라 이루어진다.” 거의 40년 전에 쓰인 에세이이지만 최인훈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주객전도의 목불인견(目不忍見)을 바로잡는 데 필요한 힘과 슬기를 얻을 수 있다. “*나쁜 과거를 숨기려는 자는 미래를 숨기려는 의도에서다. 그는 반드시 재범한다. *역사란 미래의 희망이다. *바쁜 사람은 역사를 읽을 틈이 없다. 역사를 만들고 있기 때문에. 다만 그가 나쁜 역사를 만들고 있을 때가 문제다. *그런 경우에는 그가 죽든지 그를 죽이든지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감정이 흐르는 하상」, 『바다의 편지』) 오인영 위원은 현재 고려대 역사연구소에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6년 3월 16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644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