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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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학교 역사문화컨텐츠학과 교수), 이찬수(전 보훈교육연구원장),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장발장은행장)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정범구/인권연대 운영위원 - 장발장 은행장을 맡고 난 후 주요 일과 중 하나는 한 달에 한 번씩 있는 대출심사회의에 참석하는 일이다. 8월 심사위원회는 지난 26일 열렸다. 세 시간여 논의 끝에 열세 명에게 모두 3000만원 정도 돈을 대출하기로 결정하였다. 신청자는 60명이 넘었는데 이런저런 기준과 정황에 따라 심사하다 보니 최종적으로 대출이 결정된 것은 모두 열세 명이었다. 한정된 재원을 갖고 은행을 운영하려니 대출 심사가 필요하지만, 어쨌든 기대감을 갖고 대출을 신청한 모든 사람들에게 다 기회가 돌아가는 것은 아니라서 심사를 끝내고 나면 약간 우울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대출심사에서 기본적으로 배제하는 것은 음주운전이나 성폭력, 사기 등이지만 때로는 판단하기 애매할 때가 있기도 하다. 또 신청인의 사안이 얼마나 절박한가 하는 것이 당연히 고려된다. 어쨌든 이런 절차를 거쳐 신청자의 20% 정도가 대출을 받게 되었다. - 그런데 몇 시간 대출심사서류를 들여다보고 나니 온몸의 진이 다 빠지는 느낌이다. 우리사회 가장 낮은 곳에서 이런저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주는 무게가 어깨를 짓눌러 오기 때문이다. 대출신청도 당장 5:1의 벽을 넘어야 하지만 설사 대출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래서 벌금은 어찌어찌 해결한다 하더라도, 그들 삶의 근본 문제는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무겁다.  신청자 중에는 여전히 “전기통신사업법 위반”이나 “전자금융거래법” 위반이 많다. 당장 현금이 아쉬운 상황에서 금융권 대출도 어려운 이들을 대상으로 범죄조직이 다가온다. 이들의 어려운 형편을 이용해 대포폰이나 대포통장을 만들기 위해서다. 대출해 주겠다는 속임에 빠져 통장 사본과 통장 비밀번호를 넘기면 막상 사기조직이 약속한 대출은 받지 못하고 자신들의 통장이 이른바 대포통장이 되어 범죄에 이용되게 되는 것이다. 또 유심칩을 가져오면 개당 5만~10만원을 준다고 하니 당장 현금 한 푼이 아쉬운 입장에서는 쉽게 뿌리치지 못한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대포폰으로 피해자가 발생하니 이들은 본의 아닌 범죄자가 되게 된다. 엄밀히 보면 이들도 피해자인데 현행법은 이들을 범죄자로 단죄한다.  어린 아이가 셋이나 되는데 양육비, 생활비 한 푼 안주고 술만 마시고 돌아다니는 남편에게 부엌칼을 들고 덤벼들었다가 폭행죄로 벌금형을 받는 젊은 여인, 병석에 있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으면서 생계 때문에 예비군 훈련에 빠졌다고 벌금형을 받아야 했던 20대 청년, 이들이 당면하고 있는 근본적 문제들 - 구조적 가난, 위태로운 가족 관계 둥 –은 몇 푼 대출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대출 심사라는게 신청자들이 제출한 대여섯 장 서류들의 행간을 읽어내는 작업이지만, 그 몇 장 서류들 속에 들어있는 우리 이웃들의 삶이 신산스럽고 안타까워 대출 심사 작업이 끝나고도 마음은 물 먹은 솜처럼 무겁게 가라앉는다. 극히 작은 도움이지만 장발장 은행이 내민 손길이 이들에게 격려나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어디선가 자신들을 지켜보는 손길과 눈길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힘을 낼 수 있을까? - 살면서 이런저런 어려움들을 겪고 살겠지만 역시 경제적인 궁핍이 가장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 같다. 경제적 궁핍이 인간관계도 파괴하고, 가족관계도 어렵게 한다. 그러나 그 고비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이후의 삶이 결정된다.  누구에게나 세상을 살면서 가장 어려웠던 시절이 있을 것이다. 사람마다 경험도 다르고 처지도 다르겠지만 어쨌든 정말 밑바닥이구나 하는 걸 경험하는 때가 있다. 그러나 그 어려움이란 것은 결국 밑바닥까지 내려가지 않고는 반전의 기회를 잡기가 쉽지 않다. 바닥에 발이 닿아야 결국 다시 바닥을 차고 솟아오를 힘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장발장 은행 대출심사를 진행하다 보니 나도 지나온 세월을 더듬어보게 된다. 정말 바닥이라고 생각했지만 더 떨어지는 바닥도 있었고, 이제 더 이상 갈 데가 없다고 느꼈을 때 조차 밀리다 보면 더 밀리는 곳이 있었다. 그러나 정말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다고 느꼈던 때, 이제 더 이상 밀릴 곳이 없는 막다른 골목이라고 느꼈던 그 때, 바닥을 차고 오르는 힘을 얻고, 막다른 골목 끝에 살짝 열린 쪽문을 발견했던 기억이 있다.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밀어넣는 운명의 힘도 막강하지만 결코 ‘내일’을 포기할 수는 없다는 절박함이 또한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 추석 명절을 앞두고 이 글을 쓰고 있다. 명절 분위기로 온 세상이 흥청거리는 것 같지만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 사회 어느 구석에서는 좌절과 절망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 지금은 추락하고 있지만 어느 순간 반드시 바닥을 치고 다시 솟아오르기를 바란다. 그들과 함께 따뜻한 국수를 먹고 싶다. 국수가 먹고 싶다/ 이상국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을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정범구 위원은 장발장은행장입니다.
2024-09-19 | hrights | 조회: 7 | 추천: 0
서보학 / 인권연대 운영위원 2024년 6월 말, 유튜브 채널에 올라온 영상 하나가 세상에 충격을 던졌다. 영상 내용은 25세 여성이 임신 36주 차에 낙태수술을 받았고 수술비용으로 약 900만원을 지불했다는 것이었다. 보건복지부의 수사의뢰로 경찰이 수사에 착수하였고 영상의 내용은 사실인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 2019년 헌법재판소가 형법상 임산부의 자기낙태죄와 임산부의 촉탁을 받은 의사의 동의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고, 헌법재판소가 요구한 2020년 12월 말까지 국회에서 대체입법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낙태죄로 처벌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반면 사례가 많지는 않지만 임산부의 뜻에 반하는 타인에 의한 부동의낙태는 여전히 처벌된다). 만약 36주였던 태아가 산채로 배출된 이후에 사망하였다면 의사와 임산부를 살인죄로 처벌하는 것이 가능하다. 다만 해당 의사는 태아가 어미 뱃속에서 죽은 후에 태어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의료기록에도 사산(死産)으로 기재되어 있어서 현재는 살인죄로도 낙태죄로도 처벌이 어려운 상황이다. 지난 2021년 대법원은 임신 34주에 낙태 목적의 제왕절개술로 살아서 태어난 아이를 의사가 사망케 한 사례에서 낙태죄는 무죄, 살인은 유죄를 인정한 바 있다. 이 사건에서 정확한 사실관계는 경찰 수사가 더 진행되어야 밝혀질 것이다. 일반인의 생명관에 기초해 판단할 때 임신 36주의 태아는 사실상 사람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의학적인 기준으로는 임신 24주에 이르면 태아는 산모 바깥으로 배출되어도 독자적인 생존이 가능하다고 한다. 따라서 36주에 이른 태아를 임산부의 뱃속에서 살해하여 배출하였다면 사실상 사람을 죽인 것과 다르지 않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임산부에게 어떤 개인 사정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다 커버린 태아를 낙태시킨 임산부와 의사의 생명 경시가 너무 심했다는 생각을 부인할 수 없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현재 한국 사회는 낙태와 관련하여 입법공백 상태에 놓여 있다. 임산부의 자기낙태는 처벌되지 않지만 합법적인 상태에 놓여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임신중단이 합법적인 의료행위로 인정되는 것이 아니어서 임산부에게 국가의 의료혜택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낙태는 불법도 합법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지난 2019년 헌법재판소 판단(헌재 2019.4.11. 선고 2017헌바127 전원재판부 결정)의 핵심 내용을 살펴보자. 우선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헌법재판소가 임산부의 뱃속에 있는 태아의 생명보호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헌법재판소는 태아는 생성중에 있는 생명이지만 생명권의 주체이고 국가는 헌법 제10조에 따라 생명보호 의무를 진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 “모든 인간은 헌법상 생명권의 주체가 되며, 형성 중의 생명인 태아에게도 생명에 대한 권리가 인정되어야 한다. 태아가 비록 그 생명의 유지를 위하여 모(母)에게 의존해야 하지만, 그 자체로 모(母)와 별개의 생명체이고,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인간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태아도 헌법상 생명권의 주체가 되며, 국가는 헌법 제10조 제2문에 따라 태아의 생명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 헌법재판소는 형법상 자기낙태죄 조항은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서 정당한 입법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적합한 수단이라고 보았다. 다만, 헌법재판소는 현행 모자보건법에 규정된 합법적인 낙태사유 - 본인이나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강간 또는 준강간에 의한 임신인 경우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혈족인척 간 임신인 경우 ▲임신의 지속이 모체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고 있거나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 중 하나에 해당하면서 임신 24주 이내인 경우 - 를 제외하고는 임신기간 전체를 통틀어 모든 낙태를 전면적ㆍ일률적으로 금지하고 있는 것 그리고 모자보건법에 다양하고 광범위한 ‘사회적ㆍ경제적 사유’에 의한 낙태사유가 규정되어 있지 않는 것이 태아의 생명보호에만 치우쳐 있고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과도하게 제한하는 것이기 때문에 헌법에 합치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결론에 따라 헌법재판소는 태아가 모체를 떠나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시점인 임신 22주(※헌법재판소는 태아가 의료기술의 도움을 받을 경우 22주부터 독자적인 생존이 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내ㆍ외에 도달하기 전이면서 동시에 임산부가 임신 유지 또는 중단에 관한 자기결정권을 행사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보장되는 시기까지의 낙태에 대해서는 국가가 생명보호의 수단 및 정도(처벌 여부 및 정도)를 달리 정할 수 있다는 점 및 임산부가 처할 수 있는 다양한 ‘사회적ㆍ경제적 갈등상황’ 등을 고려하여 입법자로 하여금 늦어도 2020년 12월 말까지 개선입법을 이행하도록 요구하였었다. 현재 입법공백의 결과 임산부의 뱃속에 있는 태아는 출산 전까지는 언제든지 침해되어도 되는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고 국가는 헌법상 생명권의 주체인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지 않고 방치하는 중대한 임무해태를 저지르고 있다. 또한 합법적인 임신 중단에 대해 국가의 의료 및 지원이 전무(全無)함에 따라 임산부는 스스로 경제적 부담ㆍ건강상의 부담을 지면서 낙태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정부나 국회가 대체입법 마련에 소극적인 이유는 명백하다. 어떤 식으로 낙태죄 입법을 하든 낙태 찬성진영과 반대진영으로부터 모두 비난을 받을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입법의무 해태의 이유가 될 수 없다. 다양한 이해관계와 세계관ㆍ가치관이 부딪치는 문제들에 대해 공론의 장을 마련하여 다양한 의견을 듣고 수렴한 뒤 여러 기본권 주체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한 법안을 마련하는 것이 정부와 국회의 본래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입법공백 사태가 더이상 지속되서는 안 된다. 낙태죄 조항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을 더 수렴해야 하겠지만 헌법재판소가 제시한 3가지 원칙을 기반으로 설계를 하면 될 것이다. 첫째, 헌법상 태아는 생명권의 주체이고 국가는 태아의 생명을 보호할 의무를 진다. 둘째, 태아의 생명이 전적으로 모체에 의존되어 있는 임신 22주 내ㆍ외 시점까지는 임산부의 자기결정권 보장에 우선권을 둔다. 셋째, 임신 22주 내ㆍ외 시점의 합법적인 낙태사유에 임산부가 처한 ‘사회적ㆍ경제적 사유’가 포함되어야 한다. 국회는 이런 원칙을 기반으로 조속한 시일 내에 임산부의 임신 유지ㆍ중단의 결정가능기간을 어느 정도의 기간으로 할지, 다양하고 광범위한 ‘사회적ㆍ경제적 낙태사유’를 어떻게 설정할지, 상담요건이나 숙려기간과 같은 일정한 절차적 요건을 추가할 것인지 여부 등에 대하여 사회적 합의를 기초로 구체적인 입법조치를 취하여야 한다. 사람으로 자라고 있는 태아의 생명권도 무겁고 임산부의 자기결정권도 중요하다. 어느 하나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기본권이다. 정부와 국회는 하루빨리 공론의 장을 마련하여 태아의 생명보호와 임산부의 자기결정권을 조화하기 위한 접점을 찾아야 한다.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임신 중단을 결정한 임산부를 처벌하는 것만이 능사가 될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임산부들이 여러 개인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임신을 유지하는 결정을 할 수 있도록 국가 및 사회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임산부에 대한 경제적ㆍ사회적ㆍ문화적 지원체계를 갖추고 강화하는 것이 시급한 일이다. 물론 합법적인 임신 중단의 결정을 내린 임산부에 대해서도 국가 및 사회가 다양한 지원체계를 갖추고 지지하는 것 역시 필요한 일임은 재론을 요하지 않는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의 보호 그리고 임신으로 어려움에 처한 임산부에 대한 지지와 보호의 문제에 대해 인권단체를 포함한 사회 구성원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할 시점이다. 서보학 위원은 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24-09-09 | hrights | 조회: 90 | 추천: 2
염운옥 / 인권연대 운영위원 벤저민 레이(Benjamin Lay)는 흑인 노예제 폐지를 외친 18세기의 백인 영국인이다. 레이는 1682년 에식스주 콥퍼드의 넉넉지 않은 퀘이커 집안에 태어나 양치기, 장갑 제조공, 선원으로 일했고 바베이도스에서 잡화상 주인을 거쳐 필라델피아 퀘이커 공동체로 이주·정착해 작가, 예언자, 혁명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흔히 영제국의 노예제 폐지운동은 중간계급이 시작하고 주도한 운동이었다고 ‘오해’하지만, 역사학자 마커스 레디커(Marcus Rediker)가 지적하듯 가장 먼저 노예제를 비판한 급진주의자들은 대부분 변변찮은 노동자 출신이었다. 레이도 면면히 흘러온 ‘아래로부터의’ 노예제 폐지론 계보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2017년 레디커는 『두려움 없는 벤저민 레이: 최초의 노예제 폐지 혁명가가 된 퀘이커 저신장 장애인』1)을 출간해 대서양사와 노예제(폐지) 역사에서 잊혔던 이 인물의 삶을 복원했다. 레이는 혁명가일 뿐만 아니라 저신장 장애인(dwarf)이었다. 키가 120센티미터 정도로 작았으며 척추장애인(hunchback)으로 등이 구부러져 있었고, 다리는 몸에 비해 극도로 가늘어 지팡이에 의지해 걸었다. 아내 사라도 그와 마찬가지로 저신장 장애인이었다. 1735년 사라가 먼저 죽은 후에는 애빙턴 인근 동굴에 오두막을 짓고 1759년 사망할 때까지 채식주의자로서 자급자족의 검약한 삶을 살았다. 레이는 대서양 세계에서 최초의 혁명적 노예제 폐지론자 중 한 사람이었다. 독실한 퀘이커교도로서 노예제를 당장 끝낼 것을 촉구했고 노예제가 심어놓은 ‘지상의 악’을 철폐하고 이 땅이 모든 사람들과 동물들에게 낙원이 되는 삶을 꿈꾸었다. 그가 장애로 인해 겪은 소외와 배제는 흑인 노예에 대한 연민과 공감, 그리고 노예제 폐지를 위한 타오르는 열정의 바탕이 되었다. Benjamin Lay painted by William Williams, 1790(https://en.wikipedia.org/wiki/Benjamin_Lay) 정식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레이는 자신은 ‘무학자’라며 겸손해 했지만 선원으로 널리 견문을 쌓았고, 서적상을 하며 독학으로 배움을 얻었다. 애빙턴의 동굴 오두막 거처에는 200여 권의 장서가 있었다고 한다. 광범위한 독서를 바탕으로 레이는 『무고한 이를 속박하는 모든 노예 소유자들, 배교자들』2)을 썼다, 1737년 출판한 이 책은 대서양 세계 최초로 노예제 폐지를 주장한 글이다. 이 책에는 성경의 가르침, 요한계시록의 예언, 퀘이커 교리, 17세기 영국혁명기 윌리엄 델의 급진 사상, 고대 그리스의 디오게네스 철학 등 레이가 받은 사상적 영향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인 노예들의 절규에 이르기까지 다성적인 목소리가 담겼다.    Benjamin Lay, All Slave-Keepers That Keep the Innocent in Bondage, Apostates, Philadelphia: Printed for the Author, 1737.(https://en.wikipedia.org/wiki/Benjamin_Lay) 19세기가 되면 노예제 폐지론과 반(反)인종주의 저술에서는 피진어나 크리올어로 노예가 된 아프리카인들의 목소리를 직접 옮기는 경우가 드물지 않게 되지만, 18세기 말에 주인의 채찍질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흑인 노예들의 말을 가까이서 듣고 그대로 옮겨 놓은 레이의 책과 같은 텍스트는 거의 없었다. 레이는 30대 중반 선원에서 은퇴한 후 설탕 플랜테이션으로 악명높은 바베이도스에서 잡화상을 경영하면서 노예들의 고난을 두 눈으로 목격했고, 노예제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영혼의 죄악”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렇다면 노예 소유자는 “짐승의 표식”을 지니고 지상에서 사탄을 대리하는 악의 무리이기 때문에 교회에서 쫓아내 마땅했다. 하물며 퀘이커이면서 노예무역과 노예 소유에 관여하다니 레이에게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퀘이커 공동체는 적어도 장애를 이유로 대놓고 그를 배척하지는 않았다. 레이가 퀘이커 친구들과 불화한 이유는 노예제 문제였다. 교회가 노예제 소유를 용인하지 말아야 한다고 소리치자 퀘이커 노예 소유자들은 레이를 교회에서 쫓아내려 했다. 그들은 레이의 자격을 의심했고 가입 절차를 문제 삼았고 사라와의 결혼증명서도 발급해주지 않으려고 떼를 썼다.     타협과 두려움을 모르는 레이의 행동주의가 잘 드러난 일화가 있다. 책을 출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열린 필라델피아 퀘이커 연례회의에서 레이는 강렬한 항의 퍼포먼스를 감행했다. 포케베리 열매즙을 가득 채운 동물의 방광 주머니를 책 속을 파낸 공간에 숨겨 들어가서는 이를 칼로 찔러 ‘붉은 피’처럼 노예 소유자 퀘이커교도들을 향해 뿌렸다. 노예 소유자는 배교자이자 하나님의 적으로 그 죄는 피로써 앙갚음당해 마땅하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안 그래도 아웃사이더인 레이를 퀘이커 공동체가 더 멀리하는 결과를 낳았다. 펜실베이니아주 법무장관으로 필라델피아 연례회의 서기로 재임하던 권력자 존 킨제이는 공식 통지를 보내 레이의 책에 반론을 제기하고 레이를 추방했다. 또 이런 일화도 있다. 애빙턴의 이웃 퀘이커교도 부부가 한 흑인 소녀를 노예로 소유하고 있었는데, 풀어주라고 여러 차례 권유해도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자 레이는 부부의 여섯 살 난 아들을 자신의 거처로 데려가 해질 녘까지 놀아주었다. 놀란 부모가 아이를 찾으러 오자 “이제야 부모에게서 찢겨져 나와 노예로 잡혀있는 흑인 소녀의 슬픔을 이해하겠느냐”며 일갈했다. 레이가 전하고자 한 것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하라”는 진리였다. 물론 이 사건은 그의 평판을 더욱 나쁘게 했고, 이웃들과 더 멀어지게 했다. 퀘이커 교도 중에도 노예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있었으나 노예의 고통에 공감해서라기보다는 노예 소유주의 죄와 타락을 더 걱정하는 경향이 강했다. 노예의 도덕적 오점과 타락이 노예 소유주에게 전이되기 때문에 노예제는 부도덕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레이는 일찍이 이런 태도를 거부하고 노예의 고통을 똑바로 보았다. 다른 퀘이커교도들은 노예주의 영혼 타락이 관심사였던 반면, 레이는 노예의 몸에 가해지는 폭력을 노예제의 본질이며 악으로 보았다. 레이의 노예제 비판이 신랄하고 강력했던 이유는 그가 ‘일탈적인 몸’, ‘정상과 규범에서 벗어난 몸’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에 따른 고통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신장 장애인은 궁정의 어릿광대, 거리의 걸인, 프릭쇼의 배우로 호기심과 조롱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레이는 다른 삶을 살았다. 장애가 있지만 병약하지 않은 레이, 그는 그냥 ‘작은 사람’이지 작아서 무언가를 할 수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동물 착취에 반대했던 레이는 가죽 장화를 신지 않았고, 말이 끄는 마차를 타지 않았다. ‘작은 사람’ 레이가 먼 길을 타박타박 걸어가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역사적 인물 레이의 삶은 유진 그랜트(Eugene Grant) 같은 저신장 장애인 활동가에게 자긍심의 원천이 되어 준다. 저신장 장애인은 여전히 동정의 대상이거나 조롱과 학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랜트는 저신장 장애인으로서 레이의 삶을 축소하지 않고 주목한 레디커의 책을 읽고 “폐에 산소가 가득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3)고 했다. 비로소 숨통이 트였다는 말이다. 누구에게나 자긍심과 자존감은 중요하지만,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에서 편안히 숨쉬기 어려운 느낌을 항시적으로 경험하는 장애인에게 자긍심은 산소와도 같이 절실하다. 그랜트는 또한 나중에 아이가 생기면 잠자리에서 레이의 삶에 대해 들려줄 것이라고도 썼다. 레이를 통해 저신장 장애인 자신과 같은 장애를 갖고 태어날지도 모르는 그랜트의 미래의 아이도 마침내 역사 속에서 계보를 갖는 존재가 된다. 레이는 길쌈해서 직접 옷을 지어 입었다. 레이가 삼에서 뽑아낸 실이 시간을 타고 도르르 풀려나와 유진 그랜트를, 그리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묶어주는 듯한 기분이 든다. 1)  Marcus Rediker, The Fearless Benjamin Lay: The Quaker Dwarf Who Became The First Revolutionary Abolitionist (Beacon Press, 2017). [마커스 레디커, 박지순 역, 『벤저민 레이』 (갈무리, 2021)]. 2) Benjamin Lay, All Slave-Keepers That Keep the Innocent in Bondage, Apostates, Philadelphia: Printed for the Author, 1737. 3) 유진 그랜트, 「두려움 없이 나아간 벤저민 레이: 노예제 폐지 활동가이자 저신장 장애인인 그를 기리며」, 엘리스 웡 엮음, 박우진 옮김, 『급진적으로 존재하기: 장애, 상호교차성, 삶과 정의에 관한 최전선의 이야기들』 (가망서사, 2023), 382쪽.   염운옥 위원은 경희대학교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24-09-05 | hrights | 조회: 452 | 추천: 9
장경욱 / 인권연대 운영위원 한미일 3자 군사동맹의 강화와 확대 움직임으로 인하여 동북아시아의 군비경쟁이 격화되며 군사적 긴장이 나날이 고조되고 있다. 지난해 8월 18일 캠프데이비드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3국 안보협의체를 발족한 이후 한미일 3국 군사동맹이 더욱 강화, 확대, 가속화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겨냥한 군사동맹으로 세계화, 종합화, 일상화, 정례화의 길로 치닫고 있다. 3국은 지난 6월 27일부터 29일까지 제주 남방 공해상에서 ‘프리덤 엣지’이라는 이름의 3국 연합훈련을 실시했다. ‘프리덤 엣지’는 일회적 훈련이 아니라  3국의 첫 정기적인 군사훈련이었다. 또한 각 국의 군종별 부분적인 군사훈련이 아니라 한미일 함정과 항공기가 대거 참가해 해상 미사일 방어, 방공·공중훈련, 대잠수함 훈련, 수색·구조, 해상 봉쇄, 사이버 방어 등 다양한 분야에서 진행된 종합적 합동훈련이었다. 미국 핵추진 항공모함 '시어도어 루스벨트’(CVN-71)'. 24년 6월 부산. 사진: 뉴스1 해상이나 공중에서 수색·구조, 미사일 경보, 전략폭격기 호위 등 일회성 3국 군사훈련을 실시한 적은 있지만, 다양한 분야에서 정기적인 연합훈련은 '프리덤 엣지'가 처음인 셈이다. 한미일 당국은 지난 7월 28일 도쿄에서 3국 안보협력 프레임워크(TSCF) 협력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이 각서는 처음으로 한국과 미국, 일본이 미사일 정보공유, 3국 연합 군사훈련 등 3국 군사협력의 정례화, 일상화, 종합화, 세계화를 제도화한 문서이다. 한미일 3자 군사동맹이 핵 동맹으로 발전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다. 한미당국은 지난해 4월 워싱턴선언을 발표하고 한미 핵협의그룹(NCG)을 출범시켰고, 지난 7월 11일 한미 핵협의그룹(NCG) 공동대표들은 '한미 한반도 핵억제 및 핵작전 지침'에 서명하였다. 8월 19일부터 29일까지 실시하는 2024년 을지프리덤실드(UFC) 한미연합훈련에서는 처음으로 핵 작전 시나리오를 포함한 핵 작전 연습을 추가해 실시한다. 미일 당국은 미국의 핵을 포함한 전력으로 일본을 방위하는 확장억제에 관한 첫 공동문서를 정리할 전망이다. 1975년 유엔 총회의 유엔사 해체 결의 통과로 정전관리 기능 외에 다국적군 통합기구로서 역할을 상실하였던 유엔군 사령부는 한반도 유사시를 대비한 다국적 군사기구로 부활하고 있다. 지난 8월 2일 독일이 유엔군사령부의 18번째 회원국이 되었고, 일본도 유엔군사령부 참여를 희망하는 등 유엔군사령부는 회원국을 늘리며 다국적군 통합을 위한 군사기구로 확대, 강화되고 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일본 사무실 설치 움직임 등 나토는 그 관할 지역을 넘어 동북아시아 지역으로 진출을 꾀하며 이 지역의 문제에 개입을 시도하고 있다. 한미일 3자 군사동맹은 글로벌 동맹을 추구하는 미국의 전략에 따라 한반도 및 일본 유사시를 넘어 대만해협 위기, 남중국해 영해 분쟁 등에까지 개입하며 군사동맹의 역할을 확대하고 있다. 한미일 3자 군사동맹의 확대, 강화에 발맞춰 일본은 미국의 군사기지나 후방기지로서의 지위를 넘어 미군과 함께 해외에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집단적 자위권과 적 기지 공격능력을 보유하기에 이르렀다. 적 기지공격능력은 국제법과 일본 헌법에 의해 금지된 선제공격과 침략전쟁에 사용될 수 있다. 일본은 적 기지 공격 능력에 사용하기 위해 미국으로부터 많은 장거리 미사일을 구입하는 등 군비지출을 늘리고 있다. 전쟁 포기를 규정한 일본 평화헌법 제9조의 군국주의적 개정이 노골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한미상호방위조약과 미일안보조약에 기반한 한미일 3자 군사동맹은 세계적 차원에서 미국의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고 군사적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을 군사적으로 통제하며 활용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미국의 패권에 맞서며 걸림돌이 되는 국가들에 대해 적대와 대결, 고립, 압살, 포위를 추구하고 있다. 미국은 동북아시아 지역뿐만 아니라 세계적 범위에서 반북, 반러, 반중 군사동맹을 연계시키고자 혈안이 되어 있다. 2차 세계대전 후 미국 지배의 패권 질서는 분명 쇠퇴하고 있으나 세계적 차원에서 핵 패권을 유지하고자 집착하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패권야욕은 여전하다.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나라들에 대한 억제를 명분으로 하는 미국 중심의 군사동맹 확대, 강화가 전 세계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동북아시아 지역에서는 한미일 3자 군사동맹의 확대, 강화로 나타나고 있고 동북아시아 지역의 안보위기의 주된 요인이 되고 있다. 동북아시아 지역, 아시아태평양 지역 및 세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는 대규모 무력 충돌과 핵 전쟁 위기를 초래하는 미국의 패권정책을 종식시켜야 한다. 미국의 패권에 맞서거나 순응하지 않는 일체의 나라들에 대한 적대와 제재정책도 종식되어야 한다. 미국의 패권질서를 추종하여 쇠퇴, 몰락하는 패권 질서를 유지, 강화하는 데 악용되는 지역 군사동맹의 강화는 군사적 대결을 격화시켜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파괴할 뿐이다. 미국 중심의 군사동맹의 족쇄에서 벗어나야 한다. 미국의 패권정책과 적대정책이 야기하는 무력 충돌과 갈등에 이용당하는 추종국의 운명에서 벗어나야 한다. 세계 최대의 군사력을 가진 미국을 중심으로 약 2만 8500명의 미군이 주둔하는 군사작전기지를 가진 한국과 약 5만 5000명의 미군이 주둔하는 일본이 맺은 3자 군사동맹을 자위적, 평화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도발적이고 침략적인 한미일 3자 군사동맹에 반대하는 것이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전쟁위기를 막고 평화를 위한 길이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2024-08-19 | hrights | 조회: 773 | 추천: 5
오항녕 / 인권연대 운영위원 # 손잡고 일상 지키기 1. 꽤 오래 인권연대 ‘발자국통신’을 써왔지만, 점점 글을 쓰기가 힘들어진다. 몸이 늙어서? 공부를 안 하고, 생각을 안 해서? 천만에! 도대체 발자국을 내디딜 수 없을 만큼 쓰레기를 뿌려대는 어리석은 정부의 덕에 과제 상황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주제를 잡는 데만 무려 나흘을 고민하다가 역사학도가 할 수 있는 얘기 몇 마디만 하기로 했다. 매판세력이 주무르는 외교와 국방 1. 이 정권의 외교와 국방이 매판(買辦)의 성격을 띠는 건 오래되었다. 멀쩡한 독립국이 일본 극우 세력에게 도매금으로 팔리는 형국이다. 위안부, 강제 동원, 독도, 최근의 사도 광산까지, 대통령실에 간첩, 밀정이 있는 게 아니냐는 의심이 나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뿐이랴! 지금 대한민국이 원래 식민지였나, 하는 착각마저 든다.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오염수를 뿌릴 때도 일본 정부를 대변했던 한국 정부, 이번 사도 광산 등재 때도 강제 동원을 양해하는 한국 정부, 이게 식민지 총독부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네이버의 라인 지분 매각 같은 사소한(?) 일들은 빼고) 이 사안도 8월 15일 광복절을 기하여 역사 연구 및 교육 단체에서 비판 성명이 나올 것이다. [사진 : 역사의 농단. 결국 과거 사람들에 대한 폭력적 심성은 동시대 사람들에 대한 폭력와 무자비로 이어진다.] 1. “어떻게 하면 뿌리를 뽑을 수 있을까요? … 쏟아지는 비상식적인 사건과 정책들… 위기의식을 느낍니다.” 역사 현장의 후배가 보낸 장문의 문자에는 절박함이 배어있었다. 먼저 나는 3년 전 예언처럼 썼던 발자국통신 ‘드러내는 힘, 민주주의’(2021년 6월 9일)를 소개했다.  검찰 권력의 민낯이 드러나고 뉴라이트라고 일컬어지는 일본 극우 추종 세력이 실체를 드러내는 것, 방송, 외교, 국방, 역사를 말아먹는 권력인 줄 몰랐거나 뿌옜다가 다 드러나는 과정이 곧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그렇다, 드러나면 해결할 길이 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저도 좀 지겨울 때가 있고, 늘 조마조마합니다. 근데 연산군 때, 광해군 때는 얼마나 징그러웠겠어요? 왕은 종신이잖아요? 그래도 우리는 맥시멈 3년이고!! ① 선생님들은 하시던 대로 하면 됩니다. ② 댓글, 퍼 나르기, ‘수군수군’을 좀 더 즐겁게 강화하면 더 좋습니다. ③ 틈나는 대로 집회도 하러 가면 더 좋습니다. ④ 매일 운동(요가, 스트레칭, 명상, 걷기, 등산 중 되는대로)을 권합니다. ⑤ 친한 분들과 좋은 책 읽습니다.” 일상을 지키는 시민, 난세를 견디는 기본 동네 음식점이나 카페에 가면 코로나 때보다 더 장사가 안된다고 힘들어한다. 설상가상 코로나 발생이 급증하고 있다는 뉴스가 나온다. 물론 법인세 인하부터 금투세 폐지 논의까지, 이미 부자 감세로 인한 부담은 중산층 이하로 전가되었다. 이렇게 폭정(暴政 포악한 정치)이든 혼정(昏政 무지한 정치)이든 늘 사람들의 일상을 공격하는 법이다. 그렇기에 일상을 지키는 시민, 그럴 수 있도록 서로 돕는 시민, 이것이 난세를 견디는 기본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 현재를 위한 의심 1. “왕조시대에도 이러지는 않았다,” “지금이 조선시대냐?” 디올백 사건부터 정상적인 사람이 없는 장관급 인사, 편파적 검찰 권력 등이 드러날 때면 무심결에 나오는 말들…. 국회의원에서 언론인, 일반 시민들까지 참 쉽게 하는 말이다. 그런데 조선시대 왕비가 궁궐 밖에 사무실을 차려놓았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고, 검찰이라는 것도 없었다. 방통위가 없었으니 빵과 와인을 좋아해 법카로 횡령하는 사람을 위원장에 앉히는 일도 당연히 없었다. 그러니까 무의미한 푸념인 셈이다.  며칠 전 어떤 신문 칼럼에서 이런 서술도 있었다. “농경사회이고 신분사회였을 때 보통 사람들에겐 휴가는커녕 휴일도 없었다. 우리만 아니라 서구에서도 휴가는 오랫동안 귀족이나 부르주아에게만 허락됐다.” 틀렸다.  농민은 추수가 끝난 11월부터 이듬해 4~5월 모내기 전까지가 휴가였다. 부르주아가 득세하는 19세기부터 노동자는 무한 노동시간에 내몰렸고, 길고 긴 투쟁을 통해서 주6일, 주5일 노동을 쟁취했지만 지금도 이 땅의 노동자는 농민이 누리던 휴가의 반의반도 누리지 못하고 있다.  내 글을 오해하지 않았으면 싶다. 좋은 세상이냐, 나쁜 세상이냐를 떠나, 과거와 현재는 무엇보다 다른 세상인 것이다. 왜 우리는 이렇게 다른 세상을 두고 비교하길 좋아할까? 왜 다른 세상과 비교하길 좋아할까? 1. 이런 말을 하는 의식 속에는 지금 우리가 사는 현대사회에 대한 우월감이 들어있다. 이는 우리 사회와 문명의 형편없는 것조차도 과거 어떤 시대보다 낫다는 인식에서 나온다. 그 근거는? 자본주의+대의민주주의, 거기에 과학기술이 덧붙여진다. 이걸 역사학에서는 ‘진보사관’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건 허위의식이다. 우선, 진화생물학에서 볼 때 우리 몸은 4만년 전 현생인류보다 나을 게 없다. 인간 자체로 나아진 게 없다는 말이다. 둘째, 공해, 오염, 무한 노동시간, 빈부의 격차, 식민지배 등 당대의 부조리를 감춘다.  인류사의 선형(線型) 발전이라는 이데올로기는 19세기에 등장했다. 그 전에 인류는 늘 ‘과거보다 지금이 못하다’라는 논리로 자신들의 시대 과제에 경각심을 가져왔다. 19세기 이후 일부 인간들은 달랐다. 자기들이 문명인, 나머지 시대는 야만 또는 암흑이라고 규정했다.  물론 이런 이데올로기는 1차, 2차 참혹한 제국주의 전쟁을 겪으며 그 본산 유럽에서는 깨졌다. 냉전과 시장만능의 신자유주의가 그 수명을 늘리려고 했지만 이젠 누구도 속지 않았다. ‘이성, 자유, 평등’ 등 ‘진보사관’의 핵심 개념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19세기 이래 현대 문명은 이성만큼 광기를, 자유만큼 전제를, 평등만큼 불평등을 유감없이 노출하였다. 하긴 200년도 안 되어 인류 멸망의 징후를 곳곳에 드러내 보이는 문명 주제에 무슨….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2024년 우리들이다. 인류 멸망의 징후가 보이는 판에 진보는 무슨 1. 이는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 ‘진보사관’ 자체가 역사적 산물이라는 것이다. 둘째, 진보사관은 경험적으로 기각되었다는 점이다. 나는 이 진보사관이란 말이 형용모순이라고 생각한다. 진보 자체가 특정 국면이나 시대를 넘어 전체 역사에 적용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억지를 썼던 초역사적 관념이니, 이를 극구 역사관이라고 한다면 ‘네모난 삼각형’처럼 형용모순일밖에. 특정 국면이나 시대에 적용해도 증거 없는 주장이나 부정합일 경우가 많다. 한 마디로 무의미하고 증명되지 않은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1. ‘진보사관’의 폐해는 정작 다른 데 있는 게 아닌가 한다. 역사의 사실이야 뭐 잘못 알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그런데 진보사관을 과거 사람들에 대한 폭력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얘기가 다르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과거를 재단하는 앞의 사례에서도 나타났던 증상이다. 시야를 넓혀서 보면 19세기 이래 유럽 중심의 진보사관이 세계 인류의 삶을 뒤틀고, 그 왜곡을 바탕으로 노략질했는지는 무수한 조사와 연구가 나와 있다. 진보사관은 그 태생부터 과거 사람들이 누구건, 근거 없고 오만한 잣대로 포맷하는 폭력적 심성을 깔고 있었고 스스로 강화하였다. 유럽 중심의 진보사관의 폐해 이 지점에서 확인하자. 이 폭력 심성이 과거로만 향할까? 그럴 리 없다. 인간의 심성은 그렇게 이성적이지 않다. 결코 과거 사람들에게만 선택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 습관화된 심성은 과거 사람처럼 익명의 대상들에게만이 아니라 이웃, 친구 누구에게나 해악을 끼칠 수 있다. 이렇게 누군가에게 함부로 하는 정치와 세태에 한몫하지 않았다고 어떻게 장담하겠는가.  역사학도로서 두려운 지점이 여기이다. 처리되지 않은 19세기 문명의 쓰레기 ‘진보사관’이 만연하면서 퍼뜨리는 폭력의 심성, 그것은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 우리들의 문제이다. 거머리처럼 들러붙어 성실한 이해나 존중과는 거리가 먼 배설일 뿐인 그 폭력 말이다. 1. 하지만 진보는 태도로서 중요하다. 우리 앞에 놓은 불평등, 부패, 불의를 극복하려는 동력으로써의 진보적 태도 말이다. 말하자면 진보는 태도의 이슈이지, 사실의 이슈가 아니라고. 이를 혼동하면 현실-역사의 전개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왜 이렇게 반동과 좌절의 시대가 반복되는가, 안타까워하면서 말이다. 이해는 간다. 그런데 많은 선의와 헌신에도 불구하고 꼬이는 인생이 있듯이, 역사도 숱한 헌신에도 불구하고 난세를 맞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할 일을 하면서 희망을 이야기할 뿐이다. 결과는 누구도 모른다. 진보적 태도를 보이되, 역사의 진보라는 허상을 덜어내면 현실-역사의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줄어든 스트레스의 자리에 덤덤한 일상의 몫을 넓혀보면 어떨까. [사진 : 일상을 유지하는 힘. 전주에서 특강을 마치고, 같이 준비한 이웃들과 함께] 오항녕 위원은 현재 전주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24-08-16 | hrights | 조회: 432 | 추천: 8
이찬수 / 인권연대 운영위원 이스라엘과 가자 2023년 10월 7일에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군사 정당인 하마스가 이스라엘에 로켓 공격을 감행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이 하마스의 공격을 비판하면서도, 그 공격은 역사적 진공상태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며, 그동안 팔레스타인이 당했던 무고한 고난과 희생을 상기시켰다. 이스라엘은 구테흐스의 발언을 재비판하면서 ‘이때가 기회’인 양 가자지구를 멸절시켜 가고 있다. 몇 달 사이 가자지구 내 팔레스타인 민간인이 4만 명 가까이 희생되었다. 구테흐스의 발언에도 함축되어 있듯이, 이 사건의 배후에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사가 놓여있다. 대강의 역사는 다음과 같다. 이스라엘은 3천여 년 전 오늘의 팔레스타인 지역(당시로서는 가나안)에 국가를 이루며 살았다. 독립적 국가를 이룬 기간은 사백여 년 가까이 된다. 그 뒤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의 지배를 차례로 받다가, 급기야 기원후 70년경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이 초토화된 이후 유대인들은 삶의 터전을 떠나 유럽, 아프리카, 아라비아 등으로 흩어졌다. 이른바 ‘디아스포라’의 시작이다. 게토로부터의 해방과 시오니즘 유대교 안에서 생겨났지만 그리스와 로마 제국 하에서 유대교 분위기를 탈색시킨 기독교는 392년 로마 제국의 종교가 되었고, 유대교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유대인이 예수를 죽였다는 선입견이 민중 사이에 스며들면서 유대인 차별이 본격화되었다. 1215년 라테란공의회에서는 반유대주의를 천명했고, 유대인은 일정 지역에 모여 살 수밖에 없었다. 이 집단 유대인촌을 ‘게토’라고 한다.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 유럽 지성인들 사이에서는 계몽주의가 발흥했고, 인간 해방적 분위기가 커졌다. 그러자 유대인들도 점차 게토에서 해방되어 유럽인들 사이에 섞여 살기 시작했다. 모세 멘델스존 같은 유대인은 “서구인이 되라”는 모토를 내걸며 유대교의 진리를 서구적 합리성 차원에서 파악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인간 해방적 분위기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민족 회복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즈음 프랑스의 유대인 장교였던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1894년 스파이로 모함을 받아 유배를 가면서 프랑스인들 사이에서는 반유대주의가 들끓었고,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자신들만의 국가를 이루자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유대인들의 국가 회복 혹은 고향 귀환 운동이 이른바 ‘시오니즘’이다. 그 분위기 속에서 스위스의 신문기자인 테오도르 헤르츨이 『유대 국가』(1896)라는 책을 썼고, 이듬해 앞으로 50년 안에 ‘이스라엘’을 창건하자는 취지의 시오니즘 대회가 스위스에서 열렸다. 이때 헤르츨은 유대 국가의 후보지로 팔레스타인 외에도 우간다, 아제르바이잔, 아메리카 등을 염두에 두었다. 그러다가 유대인들의 정신적 유산이 큰 팔레스타인 쪽으로 방향이 정해졌다. 2000년 전에 자신들이 살던 곳이라는 정서가 크게 작용했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과 기독교 어떤 유대인들은 ‘타나크’(유대교경전, 기독교의 구약성경)에 기반해, 옛 가나안, 즉 현 팔레스타인에 대한 토지소유권을 주장하기도 했다. 자신들의 옛 문헌을 ‘땅문서’처럼 간주하면서, 팔레스타인을 유대인을 위해 준비된 ‘빈 땅’처럼 생각했다. 물론 타나크가 실제로 땅문서가 될 수는 없다. 만에 하나 그럴 가치가 있다고 해도, 그 땅이 어디서부터 어디를 의미하는지 경계를 측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냥 그렇게 생각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유럽의 일부 기독교인들도 유대인의 국가 건설을 지지했다. 심리적으로는 기독교 문화권에서 유대인에게 가한 상처에 대한 부채감을 덜기 위해서였다. 신앙적으로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배척했다가 나중에 국가를 회복하고 예수를 믿게 될 때 ‘천년왕국’이 시작되리라는 성경적 종말론을 구체화시키기 위해서였다. 유대인의 국가가 건립된 이후에 ‘하느님 나라’가 온다는 기독교적 종말론이 주요하게 작용했다. 이를 위해 일부 기독교인들이 영국 측에 유대 국가의 건설을 지지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영국의 이중 계략 영국은 20세기 초 팔레스타인을 지배하던 오스만제국(오늘의 튀르키예)을 해체하고 자기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였다. 그 과정에 아랍의 지도자 샤리프 후세인에게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던 아랍에 아랍인들의 국가를 건설하도록 지원할 테니, 전쟁(1차대전)에서 영국(연합국)을 지원해달라는 이른바 ‘맥마흔협정’(1915-1916)을 맺었다. 그와 동시에 외무장관 밸푸어는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의 건설을 지지한다는 이른바 ‘밸푸어 선언’을 했다.(1917) 이 선언문에는 “팔레스타인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비유대인 공동체의 시민권과 종교적 권리를 침해할 수 있는 어떠한 행동도 해서는 안 된다”는 문장도 담았다. 하지만 최강국 영국이 유대 국가를 지지한다는 선언만으로도 시오니즘 운동은 거센 불이 붙었다. 저마다 국가의 성립을 꿈꾸며 많은 이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몰려갔고 땅을 샀다. 오늘까지도 가장 위험한 분쟁지역이 된 근본 원인이다. 아랍인의 땅, 팔레스타인 물론 아랍인의 눈으로 보는 팔레스타인의 정체성은 다르다. 가령 타나크(특히 사무엘서)에는 이스라엘에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예루살렘 지역에 살던 원주민, 즉 여부스족 이야기가 나오는데,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자기들이 그 여부스족의 후손이라고 생각한다. 유대인이 가나안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 땅에 살아왔다는 것이다. (어쩌면 유대인이나 팔레스타인이나 모두 가나안인의 후손일 가능성도 있다. 일부 연구자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원래 가나안의 도시 엘리트에 반기를 든 가나안인 집단이라고 주장하는 연구자들도 있다.) 실제로 팔레스타인은 유대인 보다는 비유대인의 통치 기간이 더 길었고, 7세기 이후만 치면 아랍계 내지는 이슬람계가 땅의 실질적인 주인이었다. 연대기적으로 팔레스타인은 아랍(638-1071), 터키/셀주크(1071-1098), 파티미드(1098-1099), 십자군(1099-1291), 맘루크(1291-1517), 오스만(1517-1917), 이집트(1831-1840)의 지배를 받았고, 20세기 초중반에 영국(1917-1948)의 영향력 안에 있었다. 그러다가 1948년에서야 이스라엘이 건국되는 정도였다. 팔레스타인 원주민의 역사가 훨씬 오래되었다는 뜻이다. 더욱이 그 과정에 무수한 침략과 전쟁, 정착과 이주의 역사와 반복되었고, 인구 구성원도 혼재되었다. 이러한 혼합 과정을 고려하면 이스라엘만이 이곳의 소유자라고 할 수 없고, 누가 진짜 원주민인지 특정하기도 쉽지 않다. 분명한 사실은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실질적인 침략자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노골적인 침략자였던 것은 아니다. 초기의 유대인 정착민과 팔레스타인 사람은 사이가 괜찮았다. 국경이나 국가적 주권 개념이 없던 시절, 사람들이 국가 개념 없이 서로 섞이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팔레스타인 사람 중에는 유대인에게 거처를 제공하고 농사짓는 방법을 가르치던 이들도 제법 많았다. 이스라엘 정착민들이 사실은 자신을 정복하려고 온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저항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미국, 영국, 프랑스 등 구미 유력 국가들의 지지를 받으며 이스라엘의 점령사는 멈추지 않았다. 이 소박한 원주민들이 느꼈을 배신감을 생각하면 가슴이 짠하다. 네덜란드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 남아공의 정의 실험 2023년 12월 29일, 오랜 인종차별 정책(아파르트헤이트)을 극복한 경험이 있는 남아공이 이스라엘을 가자지구에 대한 대량학살(제노사이드) 혐의로 유엔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했다. 남아공은 이스라엘이 ‘집단 살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제노사이드 협약)’에 가입해 놓고도 약속을 어겼다는 이유를 들었다. 말레이시아, 튀르키예, 요르단, 볼리비아를 위시해 이슬람협력기구(57개 회원국) 등이 이 제소에 지지 의사를 밝혔다. 미국은 제소에 반대했다. 대량학살 증거가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남아공은 소장에서 그저 대량학살 혐의만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각종 폭력과 인종차별적 행위를 꼼꼼하게 정리해서 다각도로 문제를 제기했다. 남아공은 팔레스타인 민중과 연대해온 대표적인 나라이다. 통상 이런 국제 소송은 판결이 나기까지 몇 년씩 걸린다. 그러다보니 이스라엘에 시간을 벌어주는 빌미를 제공할 가능성도 있다. 그런 부작용을 없애기 위해 남아공은 ICJ에 이스라엘의 학살 행위를 당장 멈추게 해달라는 긴급 요청을 네 번이나 제기했다. 급기야 ICJ는 그중 일부를 인용하면서 지난 5월 24일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의 최남단인 라파에 대한 공격을 당장 멈추고, 가자가 이집트와 물자를 소통할 수 있도록 라파검문소를 개방하라고 명령했다. 후속 조처를 한 달 이내에 ICJ에 제출하라고도 요구했다.(가자에 억류중인 이스라엘 포로도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상황에 변화는 거의 없었다. ICJ의 긴급명령은 법적 구속력은 있지만, 강제로 집행할 권한까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ICJ를 맹비난하면서 라파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다. 이와 함께 지난 2022년, 유엔이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이 적법한지 판단해달라는 자문을 구했는데, ICJ는 그에 대한 조사 결과를 2024년 7월 19일 내놓았다. 반세기 넘게 진행 중인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은 불법이니, 가급적 빨리 중단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권고적 의견일 뿐, 강제적 집행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당연히 그 뒤에도 가자 지구를 둘러싼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도리어 점령지를 더 늘려가고 있다. 그런 식으로 지구촌에는 늘 법이 아닌, 힘이 지배하고 있다. 왜 남아공처럼 하지 못할까 남아공을 위시한 일부 국제사회의 정의 실험은 잠시 반짝거리다가 다시 묻힌다. 그나마 한국 정부는 이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없다. 정치적 ‘친미’에다가 미국과 얽힌 종교적 ‘친이’ 분위기를 반영하는 정권 탓이 클 것이다. 불행하게도 한국과 같은 나라들 때문에 팔레스타인에서의 무고한 희생은 계속되고 있다. 설령 다시 꺼진다 해도, 그나마 정의의 작은 불빛을 반짝이는 이들이 계속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만이 희망으로 남아 있다. 이찬수 위원은 전 보훈교육연구원장입니다.
2024-08-06 | hrights | 조회: 414 | 추천: 4
강국진 / 인권연대 운영위원  일본 히로시마를 방문한 적이 있다. 2005년 1월이었으니 벌써 19년이나 됐다. 돌이켜보면 일본을 처음 갔는데도 일본의 단점만 눈에 들어왔다. 단점만 눈에 불을 켜고 찾으려 하지 않았나 하는 반성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핵폭탄 피해자들을 추모하고 평화를 기원하기 위해 히로시마 한가운데 들어선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에서 느꼈던 불편한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당시에 쓴 글에는 이렇게 돼 있다. “ 안내 팜플렛 어디에도 ‘가해자 히로시마’는 없다. 오로지 ‘피해자 히로시마’가 있을 뿐이다. 짤막하게 소개된 군국주의화와 조선인 강제징용 등은 구색맞추기라는 느낌을 떨치기 어렵다. 그나마 몇 년 전에는 그런 내용조차 없었다고 한다.” 혼자 과격한 게 아닌가 싶어 히로시마에서 만난 재일동포 시민운동가에게 물어봤는데, 그 역시 이렇게 말했다. “가해는 기억하지 않고 피해만 기억하도록 함으로써 피폭이라는 기억을 체제 속에 포섭해 버린다.”  최근 인권연대 운영위원이 쓴 책(오항녕, 2024, <사실을 만난 기억>, 흐름출판사)을 흥미롭게 읽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세간에 상식처럼 거론되는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벌어진 기축옥사에서 전라도 선비들이 큰 피해를 입었고, 그 뒤 전라도는 과거급제 등에서 여러 차별을 받았다’는 인식을 검증한다. 검증 결과는 너무나 명확하다.  정여립이 전라도 전주 사람이고 주요 활동무대도 그 주변이었기 때문에 그 지역에서 희생된 사람이 많은 건 불가피했다. 하지만 과거급제자 통계를 살펴보면 기축옥사 이후 전라도가 차별을 받았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500년 동안 과거급제자의 이름과 고향, 조상까지 개인신상정보를 철저하게 기록했기 때문에 과거급제자 통계의 정확도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실 ‘차별받는 지역’이라는 인식은 사실관계와 무관하게 흔하다. 대표적으로 호남차별론은 현대 한국사회에선 엄연한 진실이지만, 그 뿌리를 조선시대 심지어 고려시대까지 캐다보니 배가 산으로 가버렸다. 당장 고려 태조가 ‘훈요십조’에서 호남차별을 언급했다는 얘기가 많이 거론되지만 연구가 쌓일수록 근거가 없다는 쪽으로 정리되고 있다.  당장 고려 태조의 최대 지지기반이 전라도 나주였다. 태조의 후계자인 혜종의 외가집이 나주다. 최대 곡창지대인 호남을 홀대한다는 것 자체가 애초에 말이 안된다. 조선 태조는 아예 ‘전주 이씨’다. 전주는 조선시대 내내 특별한 지위를 누린 도시였다. 기축옥사 얘기 역시 위에서 언급했듯이 사실과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홍경래 난(1811~1812) 이미지가 워낙 강해서인지 서북(평안도) 차별론도 광범위하게 상식처럼 통용된다. 물론 최근 연구에 따르면 역시나 근거가 적다. 일단 평안도는 군사와 외교적 가치 때문에 중앙정부에 세금을 내지 않는 조세특례지역이었다. 대외무역 중심지라 가장 부유한 곳이기도 했다. 서북 출신들이 과거급제에서 차별받았다는 얘기가 많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다. 조선시대 500년 동안 문과와 무과 급제자 가운데 8%가 평안도로 서울과 경기에 이어 가장 많다. 인구비중을 감안하면 차별론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결국 “차별받는 서북인”이란 반란세력의 프로파간다에 불과했다.  ‘피해자’ 의식은 힘이 세다. 함께 피해를 봤다는 인식은 ‘우리’를 강하게 의식하게 만들어 동질감과 단결심을 높인다. 가해자인 ‘저들’까지 함께 생각하게 되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물론 제3자가 보기엔 남사스러울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가령 중국은 ‘100년의 치욕’을 강조하고 딱히 틀린 얘긴 아니겠지만 이런 얘긴 이웃나라 사람들에게 할 때는 분위기 봐 가면서 하는 게 좋겠다. 핵폭탄 피해는 분명 마음아픈 얘기지만, 희생자 가운데 10% 이상이 식민지조선 출신이었다는 것 역시 잊지 말아달라고 당부하고 싶다.  피해자 의식이 좀 더 심해지면 적개심이 자라나고 자칫 우리가 저들에게 가해자가 됐는데도 여전히 ‘우리는 피해자니까’ 하며 분명한 현실에 눈을 가리게 될 수도 있다. 멀리 볼 것도 없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하는 짓을 보자. 가해자와 피해자를 익명처리한 뒤 사실관계만 건조하게 나열한다면 가해자가 나치 시절 독일이 아닌지 헷갈린다는 말을 들어도 크게 할 말이 없을 지경이다.  최근 잉글랜드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에서 뛰는 손흥민과 황희찬이 나란히 인종차별 피해자가 됐다. 먼저 손흥민은 토트넘에서 함께 뛰는 동료인 로드리고 벤탄쿠르가 지난달 우루과이 방송과 인터뷰에서 "난 당신의 유니폼을 가지고 있다. 다른 유명한 한국인 선수 유니폼을 줄 수 있냐"라는 질문을 받자 “손흥민 사촌 유니폼은 어떤가. 어차피 다 똑같이 생겼는데"라고 대답했다. 황희찬은 최근 연습경기에서 이탈리아 프로축구 코모 1907 소속 선수한테서 인종차별 발언을 들었다. 보도에 따르면 코모 소속 한 선수가 "동료에게 '황희찬을 무시해라. 그는 자신을 재키 챈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을 했다"라고 불렀다고 한다.  한국축구를 대표하는 손흥민과 황희찬조차 인종차별 피해자가 된다는 것은 가슴아픈 일이다. 많은 국내 축구팬들이 이 사건을 주목하며 인종차별에 분노했다. 이 분노는 정당하다. 인종차별은 발언이건 행동이건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맞다. 그럼 이런 사건은 어떤가.  지난해 한 프로축구 팀 선수들이 인스타그램으로 동남아시아 선수를 조롱하는 대화를 나눴다. 한 선수가 피부가 까무잡잡한 편이라고 다른 선수들이 놀리면서 인종차별 발언이 나왔다고 한다. 거기다 이 동남아 출신 선수는 경쟁관계에 있는 팀 소속이라 논란이 더 커졌다. 결국 문제의 대화를 나눈 선수들은 사과문을 올렸다. 이 선수들은 제재금 1500만원과 한 경기 출전 정지 징계를 받았다. 냉정히 말해서 ‘솜방망이’ 징계라는 비판을 피할 길은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손흥민, 황희찬이 피해를 입었다는 인종차별 발언과, 한국 프로축구 선수들이 가해자가 됐다는 인종차별 발언은 과연 얼마나 다른가. 손흥민과 황희찬에게 인종차별 발언을 한 선수들이 한 경기 출전정지 정도 징계를 받는다면 과연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혹시 우리는 우리가 피해자일 때만 더 크게 분노하는 것은 아닌가. 강국진 위원은 현재 서울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24-07-23 | hrights | 조회: 341 | 추천: 5
김희교 / 인권연대 운영위원 도널드 트럼프는 2024년 7월 14일 펜실베이니아주 버틀러에서 총격을 당했다 (AP Photo/Evan Vucci) 트럼프가 총에 맞았다. 20살 청년이 M16을 개조한 총으로 쐈다. 아직 저격을 한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아 왜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20살 청년이 M16을 들고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사회라면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대중들이 뽑아 놓은 지도자를 한 순간에 파멸시킬 수 있는 위험한 사회임이 다시 증명되었다. 150미터 거리에서 정조준을 해 사람을 쏠 수 있는 무기가 전국에 널려 있는 사회가 좋은 민주주의 국가가 될 리가 없다. 그런 점에서 미국 사회 위기의 한복판에는 미국 민주주의의 한계가 또아리를 틀고 있다. 총기사고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대의민주주의는 무력하다. 로비를 통해 의회를 장악하고 있는 총기상들에게 민주주의가 유린당하고 있는데도 미국은 여전히 어떤 근본적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불가능한 제도적 한계에 봉착해있다. 오바마 대통령이 코넷티켓 주 초등학교에서 일어난 총기사고에 대해 눈물을 흘리며 총기규제를 하기로 한 약속마저도 여전히 못지켜지고 있다. 총기상들이 원흉인데도 그들을 잡을 수 없을 때 등장하는 것이 대중을 호도할 수 있는 먹잇감을 던져주는 일이다. 총기사고가 났을 때 미국의 정치 엘리트들이 대중들에게 던져 주는 먹이감은 늘 인종주의였다. 그들은 총기사고가 유색 인종이거나 이민자 때문이라고 말한다. 물론 그런 말들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통계에 의하면 미국의 범죄율은 이민자보다 토착민의 비율이 더 높다. 경제학자 란 아브라미츠키의 연구에 의하면 이민자들은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에 비해 수감될 확률이 60%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미 인종주의적인 사고를 하고 있는 대중들에게 이 논리는 잘 먹힌다. 공교롭게도 미국 사회의 인종주의를 가장 많이 이용한 정치인이 트럼프이다. 그의 정치 논리의 한복판에는 늘 인종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이번 연설에서 총알이 날라오기 직전에도 그는 이민자들을 힐난하고 있었다. 그가 대통령이 된 가장 강력한 원동력도 인종주의였다. 그의 인종주의 발언과 정책들이 스윙보트 지역의 백인 노동자들을 움직였고, 결국 당선되었다. 당선되고도 그는 줄곧 인종주의적 정책을 펼쳤다. 오클라호마 대학의 국승민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코로나19 시기 트럼프가 인종차별적 트윗을 한번 올릴 때마다 미국 전역에서 인종차별적 트윗이 20% 이상 증가했고, 아시아인에 대한 범죄는 8%가 올라갔다. 미국 국내의 문제야 우리가 걱정한들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잘 해결되길 기도할 뿐이다. 문제는 우리다. 미국의 인종주의적 사고는 미국 국내의 문제로 국한되지 않는다. 미국의 인종주의는 군사주의와 결부되어 대외정책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다. 인종주의자 트럼트가 가장 강력한 총기사용 옹호자라는 사실도 우연은 아니다. 인종주의와 군사주의는 늘 쌍생아처럼 붙어다닌다. 바이든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대외정책에 관한 한 오히려 트럼프보다도 더 군사주의적이다. 바이든의 인도 태평양전략은 누가 뭐라고 해도 군사주의적 전략이다. 중국과 발생하는 경제적인 문제를, 그들의 정치적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안보 핑계를 대며 동맹을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 저격 사건이 벌어지기 직전 워싱턴에서는 나토 정상회의가 열렸다. 나토 초대사무총장 라이오넬 이스마이(Lord Hastings Lionel Ismay)가 밝힌 것처럼 나토는 “소련을 밀어내고, 미국을 끌어들이고, 독일을 눌러 앉히기 위해” 고안된 조직이다. 구소련이 붕괴될 때 이미 이 조직의 목적은 달성되었다. 따라서 1991년 바르샤바 조약이 붕괴될 때 해체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NATO는 고르바초프에게 "동쪽으로는 1인치도 확장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고 살아남았다. 우크라이나전쟁이 러시아의 침략전쟁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전쟁 책임의 절반은 나토가 져야 한다. 나토는 우크라이나를 나토에 끌어 들이고자 했다. 동유럽 국가들을 끌어들인 것을 넘어서서 북유럽과 우크라이나까지 확장을 시도한 것이다. 끌어들였으면 안보라도 책임져주었어야 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결국 처참하게 도륙당했다. 나토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하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바탕으로 우크라이나 국민의 생명을 걸고 도박을 벌였으나 실패한 것이다. 이미 30만명 이상이 죽었다. 젤렌스키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전쟁의 책임은 누구보다도 그에게 있다. 그는 나토를 믿고 러시아에 지속적인 도발을 일삼았다. 국민들의 생존권을 담보로 도박을 한 것이다. 전쟁은 그렇게 일어난다. 전쟁은 일말의 도적적 우위 따위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저 시작되면 전쟁의 논리로 진행될 뿐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누구도 그들의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주지 않는다. 전쟁기계들에게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생명이나 생존권 따위는 관심 밖의 일이다. 포린폴리시의 에이미 매키넌 기자는 이번 나토정상회의를 보고 이렇게 요약했다. “나토는 우크라이나의 싸움을 돕고 있지만, 승리는 돕지 않는다”. 아마도 우크라이나는 이렇게 나토와 러시아 사이에서 말라 죽어 갈 것이다. 나토는 절대로 러시아의 핵공격을 받을 각오를 하고 우크라이나를 돕지 않는다. 그렇다고 죽어가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을 가엽게 여겨 그들의 정치적 타격을 감수해가면서까지 평화협정을 맺을 생각도 없다. 그저 우크라이나를 통해 그들의 공포와 혐오의 대상인 러시아를 괴롭히는 끝나지 않는 전쟁을 계속할 모양새이다. 전쟁은 전쟁의 논리로 일어난다. 미국의 대표적인 외교관이자 현실 정치가로 꼽히는 헨리키신저는 1차 세계대전을 “종말론적 메카니즘(doomsday machine)”의 결과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종말론적 메카니즘이란 동맹과 군사훈련 네트워크를 말한다. 상대방에 대한 불신으로 과도하게 동맹과 군사훈련에 집착한 결과, 결국 전쟁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반면 그는 2차 세계대전은 인종차별주의자들의 메시아적 팽창주의의 결과물이라고 보고 있다. 1차대전이 군사주의적 메카니즘의 결과물이라면 2차대전은 과도한 이념의 결과물로 본 것이다. 전쟁의 당사자들은 서로 상대방이 구제불가능할 만큼 사악하다고 믿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들을 물리쳐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정작 위험한 것은 새로운 세력의 등장이 아니라 그런 강고한 믿음체계 그 자체가 문제였던 것이다. 지금 불행하게도 ‘차가운 평화의 시대’는 가고 충돌의 무질서의 시대가 왔다. 전 지구적으로 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종말론적 메카니즘과 메시아적 팽창주의가 부활하고 있다. 그들을 옹호하는 세력은 여전히 주류는 아니지만 언제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만큼 곳곳에서 득세하고 있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의 칼럼니스트 알렉스 로는 이번 나토회의를 ‘전쟁을 세계화하는 미국을 돕는 미개인들 모임’이라 칭했다. 미국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두 개의 전쟁을 끝내기는커녕 중국과의 무역전쟁을 실제 전쟁으로 만들기 위해 한국을 불러들인 것을 두고 한 말이다. 끔찍한 것은 이 ‘미개인들’ 모임에 참가한 윤석열 정부가 세계대전을 일으킨 두 가지 위험한 요인을 모두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가 왜 한일동맹과 실익과 상관없는 가치동맹에 그토록 집착하는지, 우크라이나 지원에 과할 정도로 열과 성을 다 하는지 그 원인을 알아내는 것은 전혀 다른 각도에서 따로 검토해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볼 때 분명한 것은 그가 종말론적 메카니즘과 메시아적 팽창주의에 빠져있다는 사실이다. 윤 대통령은 나토회원국도 아니면서 올해도 나토정상회의에 참석했다. 그가 집권한 후 가장 처음 참가한 국제회의가 나토였다. 한국 대통령 중 처음으로 참석한 것이기도 했다. 나토에 참가한 그의 핵심 논리는 놀랍게도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메시아적 팽창주의와 매우 닮아있다. 같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북한을 어떤 대화도 불가능한 절대악이라고 본다는 점에서 메시아적이다. 침략국 일본이나 나토와 연결고리를 가치연대라는 추상적 이데올로기에서 찾는다는 점에서도 메시아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그러나 그가 메시아는 아니다. 미국과 일본을 메시아적으로 숭배한다는 점에서 메시아적 광신도이다). 또한 한미동맹에 만족하지 않고 한일동맹, 나토확장까지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팽창주의적이다. 북러동맹에 대한 대응이라고 하더라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사드를 아무리 방어용 무기라고 우겨도 상대편에게는 공격용이다. 러시아도 몇 번씩이나 러북동맹을 방어용이라고 주장했다. 북러조약에 대한 대응으로는 이미 한미동맹만으로도 충분하다. 사실상 한일동맹도, 나토 지원도 별로 필요없다. 세계 7위 수준의 우리의 군사력이 북한을 상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이제 핵뿐이다. 핵은 일본도 주지않고, 나토도 주지 못한다. 나토를 끌어들인다고 해서 나토가 우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나토와 인도태평양 전략을 연결하는 것은 철저하게 바이든의 대중국전략이다. 물러나는 옌스 스톨텐베르그 사무총장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미국의 힘이 필요해 미국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었을 뿐이다. 러사아로부터도 자신들을 방어하지 못해 허우적거리는 나토가 러시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유럽에 대한 경제적 억지력을 가지고 있는 중국을 상대로 한 동아시아 전장에서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결국 우리가 나토를 위해 해야 할 일만 남는다. 전비를 대고, 군사비를 올리는 일이다. 국가를 전쟁형으로 만드는 것도 덤이다. 이번 정상회의 후에도 윤석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에 330억 원에 달하는 새로운 지원을 약속했다. 윤석열 정부는 시작부터 바이든의 인도태평양 전략의 전위부대 노릇을 자처했다. 한미일 군사동맹을 부르짖으며 동맹강화와 과도한 군사훈련에 집착하고 있다. 이미 충분히 종말론적 메커니즘에 빠져들었다. 한국전쟁은 북한의 남침이다. 그러나 우리가 잘 모르는 것이 있다. 북한이 어느 날 느닷없이 남한을 침략한 것이 아니다. 북한이 침략하기 이전 남북한 간에는 이미 200여 차례가 넘는 충돌이 있었다. 한반도전쟁 또한 종말론적 메커니즘이 작동한 결과물이기도 했다. 지금 세계는 3차대전의 문턱에 와 있다고 많은 전문가들이 주장하고 있다. 물론 나는 여전히 그럴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쪽에 서 있다. 그러나 중동 수준의 국지전 이상의 전쟁이 벌어진다면 그곳은 한반도가 될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우리는 윤석열 대통령 보유국이기 때문이다. 그가 메시아적 팽창주의자라는 사실은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일본의 극우를 대변하는 기시다와 한 편을 먹은 것만으로도 충분한 증거가 된다. 그가 종말론적 메카니즘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은, 남북간에 존재하던 어떤 충돌의 제어장치도 모두 없앴다는 사실 하나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오물풍선으로 시작된 남북한의 충돌이 종말론적 메카니즘의 전초전으로 보이는 것은 나만의 과민함인가? 한반도는 전 지구적 전쟁기계들이 잔치를 벌이기 딱 좋은 곳으로 이미 변해 있다. 윤석열 정부는 그들의 좋은 트로이 목마이다. 바이든과 기시다는 그를 전문용어로 ‘좋은 친구’라 부른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그 트로이 목마가 방아쇠를 당길 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필 그가 대통령이다. 윤석열 정부는 한국의 민주주의 토대를 완전히 무시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든 하는 또 다른 종류의 총기이다. 여기 이 땅은 이미 총기를 들고 거리를 활보하는 미국만큼이나 위험하다. 지금 윤석열 대통령은 원하면 무엇에도 아랑곳없이 언제든지 방아쇠를 당길 수 있는 통제받지 않는 종말론적 병기이다. 총알이 어디로 날라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총알이 트럼프 대통령을 비켜갔듯이 우리에게도 부디 신의 가호가 있기를. 김희교 위원은 현재 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24-07-16 | hrights | 조회: 732 | 추천: 20
정범구/인권연대 운영위원 “갈등, 대결의 정치 반복되면 미래로 갈 수 없어” “합리적 대화와 타협이 사라지면 고통은 국민에게 돌아간다.” 이 말들은 윤석열 대통령이 제 22대 국회개원과 관련하여 국무회의에서 했다는 말이다. 발언자가 누구인가를 빼고 본다면 이 말 자체를 갖고 시비 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니까. 그러나 발언자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면 이 말을 읽는 사람들의 반응은 180도 달라진다. 역사상 최초로 탄핵받은 대통령이 되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은 이른바 “유체이탈화법”으로 종종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다. “주어가 빠진” 발언을 자주 했기 때문이다. 유체이탈화법의 특징 중 하나는 “자기 탓”을 해야 할 대목에서 “남 탓”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윤 대통령의 위 발언을 보면 “유체이탈화법”은 물론이고 아예 언어파괴 수준으로 치닫는 것 같다. 언어가 “진실을 매개하는” 소통도구로서 전혀 기능을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길을 가다 마주치게 되는 어느 정당의 플래카드도 정신을 사납게 한다. “안보는 여야가 없습니다.” 무슨 이런 뻔한 소리를 하고 있나 생각해 보지만 그래도 이건 그나마 나은 편이다. 하나마나한 소리에 자원을 낭비하는 것이 아깝지만 뭐, ‘언론자유’가 있는 나라니까. 그러나 이런 펼침막을 대하면 막막해 진다. “언제까지 북한 옹호 할 겁니까?” 누가? 언제? 어디에서? 북한의 어떤 짓을? 왜? 어떻게? 플래카드 한 장을 읽으면서 질문이 속사포같이 쏟아진다. 명색이 여당인 정당이 국민들 대상으로 이런 헛소리를 늘어놓기 전에 우선 기본적인 우리말 시험이라도 먼저 보는게 낫지 않을까? 그리고 원인 없는 결과 없다. 아마 북한의 오물풍선에 대응한다고 국민을 대상으로 이런 유치한 말장난을 하는 모양인데, 차라리 이런 플래카드 내거는 돈과 시간을 아껴 탈북자 단체들이 북으로 올려 보내는 그 풍선들 부터 단속하는게 더 낫지 않을까? 그리고 그 풍선에는 달러도 넣어 보낸다는데 그런 비용들은 다 어디서 나오는지도 궁금하다. 탈북자들이 자기 돈 모아서 하는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일본과의 동맹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여당 의원들을 대상으로 “정신 나갔다”고 질타한 야당의원이, ‘정신 나간’이란 표현을 썼다고 ‘국민의 힘’으로 부터 공격받는 현실도 우리를 웃프게 한다.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어떻게 지금 일본과의 군사동맹을 말 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말을 오염시키는 데는 야당도 예외가 아니다. ‘민주당의 아버지는 이재명’이라고 했다는 어느 야당의원 발언도 실소를 자아낸다. 민주사회의 대표적인 공적(public) 조직인 정당을 아주 자연스럽게 사당화(私黨化) 시키는 발언이다. 혹시 이 말을 한 의원의 머리 속에는 ‘어버이 수령’ 비슷한,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의 강건한 봉건사상이 깊게 뿌리박혀 있는 것은 아닌지, 내가 생각해 봐도 스스로 말이 안되는 질문까지 해보게 된다. 언어는 ‘생각을 담는 그릇’이라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을 평가할 때 대개 그들이 하는 말을 보고 그 사람 생각을 읽어내고 판단하게 된다. 그러나 맨 위 윤대통령 발언처럼 유체이탈화법을 쓰는 경우 언어는 더 이상 생각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조롱의 대상이 된다. 영국 BBC 방송은 이런 표어를 내걸고 있다. News is nothing without context. 직역하자면, “맥락 없는 뉴스는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 맥락에도 닿지 않는 말을 그나마 ‘대통령의 말’이니 곧이곧대로 실어야 하는 뉴스업체 종사자들의 처지도 딱하지만, 그런걸 뉴스라고 앍어야 하는 시민들의 처지가 더 딱하다. 한국사회에서 정치는 이미 많은 것을 오염시키거나 파괴하고 있다. 사회경제적 양극화를 해결해야 할 정치권이 정치적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사회를 진영대결로 몰아가고 있다. 그 와중에 우리말까지 심각하게 오염시키거나 희화화시키고 있다. 그 가장 큰 책임은 윤석열 대통령에게 있을 것이다. 취임 초기, 국가의 주요명운이 걸린 한미 외교를 ‘~ 날리면’ 수준으로 희화화 시킬 때부터 이미 조짐이 좋지 않았지만, 이제 ‘갈등과 대결의 정치’ 책임을 야당에게 돌려 버리는 그의 유체이탈화법을 보면서는 국가 지도자로서 그의 말에 아무런 무게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 과연 정치가 이렇게 “아무말 대잔치”가 되어도 좋을 것인가? 정범구 위원은 장발장은행장입니다.
2024-07-08 | hrights | 조회: 392 | 추천: 5
염운옥 / 인권연대 운영위원 권력의 공간, 동물원의 기원 오늘날 동물원은 모순과 애증의 장소다. 동물을 감금, 사육, 전시하는 ‘폭력’이 매일 자행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동물원을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날로 거세지고 있다. 올해 5월 코스타리카는 최초로 동물원이 없는 나라가 되었다. 2013년 야생동물 포획·사육 금지법을 제정해 순차적으로 공영동물원을 폐쇄하고 있던 코스타리카에서 마지막 남은 두 공영동물원인 산호세의 시몬볼리바르 동물원과 산타아나주의 보전센터 두 곳 시설이 폐쇄된 것이다. 인간에게 길들여진 동물원 동물들은 야생에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생츄어리로 가게 된다. 생츄어리에도 울타리는 있지만 상업적 거래와 전시를 하지 않고 동물이 생을 다할 때까지 보호하기 때문에 동물원과는 다르다. 동물원은 이제 멸종위기 야생동물을 보호하는 ‘노아의 방주’, 시민들을 위한 생태교육장의 역할을 내세우며 존재 이유를 주장하고 있지만, 인간종중심주의의 ‘트로피 룸’이라는 비난을 피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렇다고 기존 동물원의 무조건 폐지도 답이 아니다. 생츄어리가 대안이 되겠지만, 한국의 현실에서는 당장 실현되기 어렵다. 영화 <생츄어리>(감독: 왕민철, 2024)는 인간이 길들인 사육동물에 대해 어떻게 책임져야 하는지 무거운 윤리적 질문을 던진다. 영화 <생츄어리> 포스터 동물원은 많은 것들이 그렇듯 근대 유럽의 발명품이다. 유럽 대도시에 오늘날과 같은 동물원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무렵이었다. 하지만 진귀한 동물을 한데 모아 사육하고 자랑한 역사는 더 오래되었다. 인류는 동물을 먹이로 삼거나 동물의 힘을 활용할 용도로 가축화하는 한편 신기한 동물은 외교적 선물이나 정복과 약탈의 전리품으로 따로 관리했다. 인간이 자연을 이용 대상으로 삼기 시작하면서, 동물은 더 이상 인간을 위협하는 경쟁자가 아니게 되었다. 늑대에서 가축으로 진화한 개는 인간의 반려가 되었고 소와 돼지와 닭은 인간의 식량이 되었다. 호랑이, 사자, 곰 같은 대형동물은 여전히 육체적으로 취약한 ‘털없는 원숭이 호모 사피엔스’에겐 두려운 존재였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로 인해 맹수를 굴복시키고 길들이는 능력은 권력의 과시가 될 수 있었다. 권력의 상징으로 동물을 사육해온 역사는 동물원의 역사보다 오래다. 기록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예는 이집트 멤피스 인근 사카라에 있었다고 한다. 기원전 2500년경 무덤 벽화에 그림과 상형문자로 영양, 가젤, 학, 개코원숭이, 비둘기, 따오기, 매 등을 사육했다고 적혀있다. 신성하다고 여겨진 개코원숭이, 매, 따오기 같은 동물은 미라로 만들어졌다. 기원전 1500년경, 이집트 18왕조 투트모세 1세의 딸 해트세프수트 여왕은 홍해를 통과해 “푼트의 땅”(소말리아로 추정)으로 야생동물 수집 원정을 보낸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역사상 최초의 야생 동물 수집 기록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우르에서도 인더스강 유역 문명에서도 중국에서도 멕시코에서도 동물의 사육과 전시의 기록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로마제국처럼 원형경기장 동물쇼를 위해 이국동물을 대규모로 사육하지는 않았지만, 고대 그리스에서도 곰과 사자의 순회 동물쇼가 성행했고, 종교적, 교육적 목적으로 동물을 수집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최초의 동물학 연구서로 알려진 『동물의 역사』를 쓸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 알렉산더 대왕은 동방원정에서 정보와 표본을 그리스로 보내기도 했다. 거대동물에 대한 욕망과 권력의 결합은 로마제국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로마제국 황제들은 속주에서 공수해 온 동물을 원형경기장에 풀어놓고 시민들에게 선보였다. 원형경기장은 로마 시민들에게 오락과 여흥을 제공할 뿐 아니라, 제국의 지배자라는 우월감과 일체감을 심어주는 정치적 공간이었다. 원형경기장에 북아프리카, 중부 유럽, 서아시아 등에서 잡혀 온 코끼리, 사자, 표범, 곰, 호랑이 같은 동물들이 동원됐다. 검투사 경기나 전차 경기의 식전행사로 펼쳐진 동물 공연에서 검투사와 맹수가 맞대결을 벌였고, 맹수에게 밥으로 던져주는 식으로 죄수를 처형했다. 티투스 황제의 로마 콜로세움 개장식 때는 신에게 봉헌한다는 명목으로 동물 수천 마리를 살육하기도 했다. 동물 거래의 수요를 자극한 또 다른 요인은 외교적 선물로 동물을 주고받는 관행이었다. 1972년 4월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의 역사적인 중국 첫 방문을 기념해 중국은 닉슨에게 수컷 판다 ‘싱싱’과 암컷 판다 ‘링링’을 선물했다. 중국의 판다 외교가 유명하지만 동물 외교는 훨씬 오랜 역사를 지닌다. 중세에는 로마제국과 같은 스펙터클은 사라졌지만, 외교적 선물로서 이국동물 교환은 계속 이뤄졌고 신성로마제국 황제, 잉글랜드와 프랑스 왕들은 자국의 중심 도시에 동물을 사육하며 권력을 과시했다. 1600년대 유럽 세력이 인도양 세계에서 인도나 일본과 무역을 할 때 동물 선물은 양자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윤활유 역할을 하기도 했다. 남아시아에서 코끼리는 왕권의 상징이자 전쟁터에선 유용한 무기였기 때문에 왕실은 코끼리의 유출을 제한하기도 했다. 이처럼 권력자가 동물 무역에서 교환을 장려할 수도 억제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은 동물 소유와 권력의 밀접한 관계를 드러내는 증거다. 대항해시대의 메나주리  대항해시대의 도래는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에서 이국 야생동물의 수집 네트워크가 본격적으로 작동함을 의미했고, 이제 왕족과 귀족뿐만 아니라 부유한 상인도 자신의 정원에 이국동물을 기르기 시작했다. 대항해시대를 거치면서 유럽 도처에 생겨난 동물 사육과 전시의 공간을 근대 동물원과 구분해 메나주리라고 한다. 근대 동물원은 동물정원(zoological garden) 혹은 동물공원(zoological park)을 줄여서 ‘주(zoo)’라고 부르는 반면, 근대 동물원 탄생 이전에 황제, 국왕, 귀족 등 유력자가 소유한 개인 동물원은 ‘메나주리(menagerie)’라고 구분해 부른다. 메나주리는 프랑스어에서 기원한 것으로 ‘관리’, ‘통제’라는 뜻의 ménage에 ‘장소’라는 뜻의 rie를 합친 말이다. 글자 그대로 메나주리는 동물을 관리하는 장소를 뜻한다. 감금, 지배, 통제의 대상으로 삼는 기준은 새로움과 신기함이었다. 먼 곳에서 온 특이한 동물, 돌연변이나 기형으로 노동에 활용되거나 식량이 될 운명에서 벗어난 동물 등이 메나주리에 갇혔다. 메나주리의 동물은 고대부터 가축과는 달리 특별한 정서적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종교 제의에 활용되는 등 문화적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16세기가 되면 유럽에는 일반 대중들이 이국 동물을 가까이 볼 수 있는 공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메나주리는 왕과 귀족을 위해 조성된 것이었지만 점차 시민들에게 개방되었다. 대항해 시대는 고대부터 이어져 온 이국동물에 대한 수요를 폭발적으로 증가시켰고, 이국동물 수집에 필요한 물적·인적 네트워크를 작동하게 했다. 네덜란드 총독 마우리츠와 프레데릭 핸드릭이 세운 헤이그 메나주리, 잉글랜드의 헨리 1세가 만든 런던의 왕실 런던탑 메나주리, 루이 14세가 1665년에 새로 조성한 왕궁 베르사유의 정원에 만든 메나주리 등이 손꼽혔다. 네덜란드 총독 마우리츠(Maurice)와 프레데릭 핸드릭(Frederick Hendrick)은 이국동물에 관심이 많았다. 프레데릭 헨드릭은 헤이그 인근 Huis ter Nieuburgh 성(城)에 메나주리를 운영했다. 총독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준 것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였다. 1623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중앙이사회에서 발행한 수입 희망 물품 목록에는 ‘진귀한 동물(rare gedierten)’이라는 항목이 있었는데, 특히 몰루카, 암본, 반다의 아름다운 희귀종 조류의 수요가 많았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선박은 화식조와 앵무새 같은 조류뿐 아니라 코끼리, 표범, 야생염소 같은 인도양 동물들을 암스테르담과 헤이그로 실어 날랐다. 긴 항해와 낯선 기후를 견디지 못하고 동물이 죽거나 선상 화재가 발생해 동물들이 희생되기도 했다. 동물 지식의 축적과 분류학 가까운 곳의 동물부터 먼 이국의 동물에 이르기까지 유럽인들이 동물을 이해하는 방식은 근대 이전에는 실용적·의학적 실천이나 종교적 실천과 관련이 있었다. 병에 들게 하거나 낫게 한다는 기준으로 동물을 나눈다거나, 동물의 본성을 통해 종교적 가르침을 주입하고자 했다. 라틴어 ‘나투라(natura)’는 ‘자연’을 의미할 뿐 아니라 사물의 ‘본성’을 의미하는 말이다. 중세인들은 자연에서 사물의 본질과 창조주의 지혜를 찾으려 했다. 『동물지』(Bestiarium)는 동물에 대한 중세의 이러한 인식을 잘 보여준다. 작자미상의 『동물지』는 10~15세기 동안 여러 판본으로 서양에서 읽혔던 동물의 상징에 관한 책이다. 『동물지』에서 늑대(Lupus)는 탐욕과 약탈의 상징으로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고, 암늑대(Lupa)는 매춘부와 동일시되었던 반면, 비둘기는 성령, 펠리칸은 그리스도의 상징으로 추앙되었다. 인간이 피해야 할 악덕과 본받아야 할 덕성을 동물에 빗대어 설파한 것으로 당대인들이 공유하는 ‘길들여진 상징’ 속에서 동물을 이해하는 방식이었다. 르네상스 후기부터 실존하는 동물의 분류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콘라드 게스너(Konrad Gessner)의 『동물사(De historia animalium)』(1551~1558)는 근대적 동물 분류의 첫 시도 중 하나였다. 종교개혁으로 등장한 프로테스탄트 신앙은 실용적 목적이나 종교적 교훈의 재료로 동물을 보던 방식에 변화를 가져왔다. 교회의 권위가 아니라 내면의 신앙을 중시하고, 성직자의 성경 강론에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성경을 읽으라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설교는 창세기에 적힌 내용을 자연에서 증명하겠다는 의지를 낳았다. 천지창조와 대홍수를 문자 그대로 믿고 자연에서 흔적을 찾으려는 성서 문자주의(Biblical literalism)의 가르침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는 태도를 심어줌으로써 지질학과 자연학 성립에 영향을 미쳤다. 성서 문자주의의 또 하나의 측면은 중세 교회가 주해를 통해 성서에 부여하던 우화적 이미지를 폐기함으로써 식물과 동물을 자연에 존재하는 그대로 묘사하고 서술하도록 추동했다는 점이다. 이제 동물은 교훈, 신화, 전설, 예언, 점성술 같은 세계와 분리되어 창조주의 현명한 설계와 개별 창조로 태어난 다양한 피조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로써 세계는 이성적인 신의 신성한 발명품이 되었고, 자연학(natural history)은 신의 설계를 탐구하는 학문의 위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 같은 성서에 바탕을 둔 자연사에 의하면 동물은 ‘가축’, ‘사나운 야생맹수’, ‘해치지 않는 야생동물’, 유니콘이나 리바이어던 같은 ‘의심스런 동물’ 등으로 구분됐다. 다윈의 진화론이 나오기 전까지 신학과 자연학의 관계가 조화로울 수 있었던 이유는 윌리엄 페일리의 『자연신학(Natural Theology)』에서 보는 것처럼 자연학은 신의 설계를 밝히는 신성한 학문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분류법을 의미하는 ‘Taxonomy’는 그리스어로 ‘배열하다’는 뜻하는 ‘taxis’와 ‘법, 질서’란 뜻의 ‘nomos’를 합친 말이다. 자연을 질서에 따라 배치한다는 의미다. 명명(naming), 기재(description), 분류(classification)로 구성되는 분류학의 세계는 완성을 모른다. 조류나 포유류는 거의 알려져 있고, 곤충류 특히 나비는 아름답기에 많이 연구됐지만, 바다생물, 미생물, 기생충은 덜 연구되었다고 한다. 매년 1만 종 이상이 새로 기재되고 있으며, 아직 알려지지 않은 종이 알려진 종보다 더 많다. 분류학을 곤란하게 만드는 더 근본적인 점은 분류 자체가 확고 불변의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분류의 범주가 해체되고 재구성될 가능성이 얼마든지 존재한다. 분류학은 자연을 이해하는 수단일 뿐, 복잡다단한 자연의 진실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조류, 포유류, 양서류, 어류 같은 익숙한 분류 범주가 자연을 이해하는 단 하나의 정답일 리도 없다. 그러나 유럽에서 시작된 근대 분류학은 자연에 질서정연한 구조가 있다는 전제 아래 식물계와 동물계를 나누고, 분류의 하위 범주들로 계통을 세워 자연의 비밀에 도달할 사다리를 놓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그 목표를 향해 매진했다. 근대적 분류학의 시조로 불리는 칼 폰 린네가 1753년 대작 『자연의 체계(Systema Naturae)』를 완성했을 때 그는 신이 창조한 이 세계에 이름을 붙이는 자는 바로 자신이라는 자의식에 충만해 있었다. 린네가 속명과 종명의 이명법(二名法)을 도입하면서 긴 수식어구가 딸린 이름을 붙이는 초기의 다명법(多名法)은 사라졌다. 린네가 근대적 분류법을 체계화한 이래 식물과 동물에 이름을 붙이고 분류함으로써 자연에 질서를 부여하는 작업에 학자들은 매료됐다. 자연학자들은 각자 자신의 방법으로 식물과 동물을 수집하고 라틴어 학명을 부여했다. 때로는 아름다운 종에는 발견자 자신의 이름을, 추하고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종에는 경쟁자의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린네의 동물 명명의 사례 찾아넣기) 자기애 넘치는 린네는 가장 좋아했던 식물 쌍둥이꽃(twinflower)에 ‘린나이아 보레알리스(Linnaea borealis)’라는 이름을 붙였다. 원래 이 풀은 캄파눌라 세르필리폴리아(Campanula serpyllifolia)라고 불렸다. 애초에 분류법에서 이름과 실재 사이에 어떤 필연성도 존재하지 않기에 가능한 일이다. 분류학자의 작업이란 영원히 완결되지 않는 일이다. 사전에 끊임없이 새 단어가 추가되는 것처럼 분류학자의 목록에도 계속해서 새로운 종이 추가된다. 분류학상의 오류가 정정되는 예도 많다. 린네의 목록도 오류가 수두룩했다. 린네는 박쥐를 영장류로 성게를 벌레로 분류했다. 오락과 과학의 동물원 메나주리와 구분되는 근대 동물원의 최초의 사례는 1752년 쉔브룬 궁전 동물원이다. 합스부르크가의 여름 거주지인 비엔나 외곽에 설립된 이 동물원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란시스 1세가 아내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동물 컬렉션을 선물하면서 성립했고 대중에게 개방되면서 비엔나의 사교와 문화생활의 중심이 되었다. 근대 동물원의 역할 중에서 대중오락의 중심이라는 기능이 쉔브룬 동물원에서 두드러졌다면, 또 다른 주요한 기능인 동물학, 분류학 연구의 장소로서의 동물원이라는 과학과의 연결성이 뚜렷한 동물원은 프랑스 국립자연사박물관 동물원과 런던 동물원이었다. 프랑스 국립자연사박물관 동물원은 1793년 파리식물원(Jardin des plantes)에 동물들의 피난처를 마련하면서 생겨났다. 베르사유 메나주리는 왕실 소유의 동물원이었기 때문에 프랑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프랑스혁명의 군중들이 1792년 베르사유를 습격했을 때 남겨진 동물들은 성난 군중들의 약탈 대상이 되었다. 군중들은 새를 잡아 구워 먹고 낙타를 팔아넘겼다. 인도 코뿔소 한 마리와 사자 한 마리를 포함해 고작 다섯 마리의 동물만 살아남았다. 왕의 소유물이었던 동물들은 폭군의 유물로 간주되었기에 처음에는 모두 죽여서 표본을 식물원에 기증하기로 했다. 그러나 식물원 관계자가 동물을 죽이는 것은 과학에 대한 범죄 행위라고 맹비난해 결국 동물들은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식물원으로 옮겨졌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약탈해온 동물들도 식물원에서 사육되었다. 파리식물원 내 동물원(Jardin des Plantes Ménagerie)은 나폴레옹 권력의 상징으로 공들여 지은 건축물들이 많고, 그 안에 육식동물, 초식동물, 새, 뱀 등으로 분류해 전시했으며, 동물 조각이나 회화와 함께 전시함으로써 동물원을 권력의 상징이자 종합예술의 공간으로 조성했다. 동물원 옆에 세워진 국립자연사박물관은 생틸레르를 비롯한 계몽주의 시대 자연과학자들의 연구기관으로 동물, 식물, 광물 아우르는 연구와 분류학, 비교해부학, 진화론 연구에서 대학들과 경쟁할 정도로 위상이 높았다. 파리 식물원 내 동물원은 동물의 형태와 습성을 관찰하고, 동물 실험과 해부를 통해 ‘과학적’ 연구를 하는 곳이라는 자의식이 넘치는 학자들의 전당이었다. 근대 동물원의 창시자와 지지자들은 귀족의 메나주리의 경멸받는 전제군주적 성격과 상업적 동물원에 따라다니는 수상한 오락의 낙인을 벗겨 내고, 동물원을 ‘공공성’과 ‘과학성’에 연결하고자 했다. 메나주리에서도 과학 연구를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근대 동물원 창시자들은 의식적으로 동물원을 과학의 반석 위에 올려놓고자 했다. 예를 들어, 자크 앙리 베르나르댕 드 생피에르(Jacques-Henri Bernardin de Saint-Pierre)는 국립 자연사 박물관(Muséum national d'Histoire naturelle)으로 전환되기 전에 식물원(Jardin des Plantes)의 마지막 감독관(intendant)으로 재직한 인물로 『파리 식물원에 동물원을 설치할 필요성에 관한 비망록』에서 “자연에 대한 연구는 모든 인간 지식의 기초”라는 말로 식물원 옆에 동물원이 있어야 할 당위성을 주장했다. 여기서 과학 연구는 동물 행동, 해부학 연구에서 도덕 및 정치 철학 원칙에 이르는 자연법칙의 인식을 포괄하는 계몽주의적 원리에 따른 것으로 구상되었다. 죽은 동물에 대한 해부학적 연구의 수행은 이중의 목적, 즉 사육 동물을 잘 돌보기 위한 목적과 동물에 관한 연구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수행되었다. 특히 파리 식물원의 경우, 비교해부학에 무게 중심이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동물 유해 표본을 소장했다. 19세기 자연학에서 비교해부학의 핵심적 위치 때문에 동물원에서의 과학적 관심은 역설적이게도 죽은 동물에 집중되었다. 특히 국립 자연사 박물관(Muséum national d'Histoire naturelle)의 교수인 조지 퀴비에(George Cuvier)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다. 해부학을 통해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규명하고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치켜세우는 인식은 국립자연사박물관 비교해부학 갤러리의 방대한 동물 유해 표본을 이끄는 인간 표본을 통해 형상화되었다. <파리 국립자연사박물관 비교해부학 갤러리> 사진: 염운옥 연구 공간으로서 동물원의 공공성은 동물을 공개하는 것을 통해 더욱 확보되었다. 도시민의 생활공간으로 들어온 동물원이 여가 및 오락과 교육의 이중적 기능을 하게 되는 사례는 런던동물원에서 잘 보인다. 1828년 개장한 런던동물원(London Zoo)은 도심형 동물원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세계 최초의 동물학회인 런던동물학회(Zoological Society of London)는 학회 설립 2년 뒤인 1828년에 과학 연구를 목적으로 리젠트파크 안에 동물원을 세웠다. 런던동물학회와 런던동물원은 싱가포르의 개척자 토머스 스탬퍼드 래플스(Sir Thomas Stamford Raffles)가 파리 식물원의 자극을 받아 설립을 주도했다. 동물학회 부속 동물원으로 출발한 런던동물원은 다양한 동물 종을 보유하고 보존 사육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오락성보다는 과학 연구와 교육에 더 중점을 두었다. 런던 동물원 협회와 동물원의 설립자들은 이 기관이 동물의 생활 습관에 관한 연구를 포함하여 자연 연구의 모든 양상에 기여하도록 만든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살아있는 동물에 대한 관찰은 주로 형태학 및 분류학 연구를 육성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동물학과 분류학 발달의 결과, 종 분류에 따른 동물원 공간 배치를 중시했다. 19세기 유럽 주요 도시에 등장한 동물원은 동물의 감금과 사육을 매개로 권력과 오락과 과학이 결합된 공간이었다. 1870년대 런던동물원 지도 출처: https://www.mirror.co.uk/news/uk-news/gallery/london-zoo-colour-striking-1870s-13667604 염운옥 위원은 경희대학교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24-07-03 | hrights | 조회: 499 | 추천: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