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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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오항녕(전주대학교 역사문화컨텐츠학과 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장발장은행장)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정범구/장발장은행장   현직 대통령에 의한 내란 시도는 12. 3 계엄선포 47일만에 윤석열을 구속함으로써 일단 한 고비를 넘기게 되었다. 그러나 영장 발부 이후 벌어졌던 서울 서부지방법원에서의 난동과 폭력 등은 한국 민주주의에 깊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2016년 촛불혁명 이래 우리 시민사회가 자랑으로 여겨왔던 평화적 시위 전통이 위협받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 사회 극우의 행태가 도를 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내란 수괴” 윤석열의 체포영장 집행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일련의 사태들을 통해 우리나라 기득권 층의 가려진 민낯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평생 “법치”를 입에 달고 살았을 뿐 아니라 그걸로 밥줄을 삼고, 입신출세하고, 끝내는 대통령 자리에까지 오른 자가, 더구나 쿠데타 실패 이후 “대국민 담화”를 통해서는 당당히 수사에 임하겠다고 큰소리 쳤던 자가, 체포영장 집행과정에서 보여줬던 추태는 그 어떤 막장 드라마 보다 더 역겨웠다. 더구나 자신의 체포를 피하기 위해 극우 시위대의 저항을 부추기고, 국민을 분열시키려 한 행위 등은 어떤 말로도 용서가 안된다. 그런데 그 막장 드라마의 주연 뿐 아니라 조연들의 면면도 역겹고 추하기는 마찬가지다. 체포영장 집행을 막기 위해 한남동 관저 앞으로 달려간 44명의 국힘 의원들. 그들의 충성 대상은 결국 국민이 아니고 헌정을 파괴하려 했던 “내란 수괴”였던 것인가? 이런 의심은 국회의원을 다섯 번 째인가 한다는 윤상현 의원이 극우 선동가 전광훈 앞에 90도로 엎드려 절을 하는 모습에서 더욱 확실해진다. 이들의 충성 대상은 결코 국민이 아니었다. 대한민국 헌법 제 1조, 제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조항이 무색해지는 장면들이다. 12. 3 내란 시도 과정에서 “내란의 조연”으로 동원되었던 경찰은 윤석열 체포 과정에서 일정 부분 명예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대행의 대행” 신분으로, 국회가 선출한 헌재 재판관 3명 중 두 명만을 선별적으로 임명하고, 국회가 송부한 법안에 대해서는 다시 거부권을 행사한 최상목 대행의 처신은 여전히 의구심을 자아낸다. 특히 윤의 체포 과정에서 보여 준 그의 행태는 단순히 그 한 개인의 성향 뿐 아니라 관료 사회 전반의 성향까지를 의문시하게 된다. 이른바 “영혼 없는 관료 집단”에 대한 오래 된 의문이다. “주권 재민”과 “삼권 분립”이 뼈대를 이루는 헌정 질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나라가 어디로 가는지 보다는 개인의 출세와 입신양명이 인생의 주요 목표였을 고시생 시절의 모습들도 오버랩된다. 12. 3 쿠데타와 그로 인한 내란 위협은 윤석열과 쿠데타 가담 세력들의 체포와 구속으로 일단 안정되는 것 같지만 내란을 지지, 엄호했던 ‘국민의 힘’에 대한 지지율이 다시 회복되고 있다는 소식은 많은 우려를 자아낸다. 일부 여론조사에서는 국힘과 민주당의 지지율이 역전됐다는 결과도 나온다. 탄핵심판 절차가 진행되면서 사람들 관심이 대선 국면으로 옮아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고, 여론조사에 응하는 보수 세력들이 과표집(過標集) 되고 있다는 분석들도 있지만 나 같은 사람 입장에서는 그저 황당하게 느껴질 뿐이다. 아니 모든 것을 다 양보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내란 비호 세력을 지지할 수 있다는 것인지, 민주주의를 공짜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이 대목에서 문득 옛날 생각이 난다. 과거 박정희 유신 시절을 겪은 사람들이라면 그 시절 상투적으로 듣던 말이 있다. 유신 체제에 반대하는 학생들과 반독재운동 세력을 향해 독재 정권이 각종 긴급조치와 계엄령들을 남발할 때 마다 써먹던 말이다. “이 조치로 인해 생업에 성실히 종사하는 대다수 선량한 국민들에게는 아무런 피해가 없다. 일부 극소수 극렬분자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반유신독재 투쟁에 동조하거나 지지하려는 주변 세력을 차단하기 위한 독재 정권의 통치 수법이었지만 사실상 “대다수 선량한 국민”들은 이 간판 뒤에 숨었다. 그리하여 “데모하는 것들과 선량한 자신들”을 분리하며 18년 유신 통치의 지지자 노릇을 했던 것이다. “까라면 깐다”라든가, “주면 주는 대로 먹고,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는다”라는 군대식 구호가 아무런 사회적 저항 없이 직장과 학교, 심지어 가정 내에서까지 공공연히 통용되었던 시절이다. 이후 박정희는 사라졌지만 독재자가 사라진 그 자리를 민주주의 교육이 메우지는 못했다. 민주주의가 공짜가 아니라는 것은 이후 1980년 광주에서의 엄청난 희생, 전두환 독재 7년간의 각종 공안 사건, “삼청 교육”, “녹화 사업”등의 국가 테러, 수 많은 학생, 노동자들의 투쟁과 희생을 통해 비싼 값을 치르고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교훈 역시 모든 국민이 배웠던 것은 아닌 듯 하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이 시민적 자유와 민주주의가 공짜인 것처럼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위와 같은 여론 조사 결과가 나올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 솔직한 나의 심정이다. 그러다 또 한편 생각해 본다. 오늘날 그나마 개선된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이나 환경은 오랫동안 이어져 온 노동 운동의 산물이다. 1970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 이래 노동 조건 개선을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은 어쨌든 노동조합을 통해 이루어지고 대변되었다. 그러나 한국 노총과 민주 노총으로 대변되는 한국의 노동운동 조직율(전체 노동자의 조합 가입율)은 여전히 10% 대에 머물러 있다. 노동조합의 투쟁으로 획득된 혜택은 모든 노동자들에게 돌아가지만 그 획득을 위해 노력하고 분투한 것은 온전히 10% 노동자들의 몫이었던 것이다. 노동운동의 기초가 연대(Solidarity)라면, 한국 노동운동은 다수의 무임승차에 의해 매우 가냘픈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는 셈이다. 마찬가지로, 여전히 내란 엄호세력을 지지한다고 하는 3-40%의 국민을 생각한다면 한국 민주주의의 기초도 노동운동의 그것처럼 그리 튼튼하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 내란 수괴 피의자는 이제 “안전한 곳”에 들어가 있다. 그러나 이후 재판 과정에서 또 얼마나 황당한 논리와 궤변으로 국민들을 분열시키고 피곤하게 만들지, 법 기술자로 평생을 살아온 그의 “진면목”을 두고두고 보아야 하는 국민들로서는 미리 짜증이 난다. 그러나 짜증보다 더 큰 걱정은 민주주의에 기생해 온 수 많은 무임 승차자들의 선동과 부화뇌동이다. “대통령의 계엄 선포는 고도의 통치행위이다. 고로 사법 판단 대상이 아니다” 박정희가 지하에서 관 뚜껑을 열고 박수 치면서 나올 것 같은 이런 시대착오적 발언을 공공연히 내뱉는 정치인이나 법 기술자들, 그리고 그런 말 같지 않은 소리들을 앵무새처럼 읊조리는 소위 “논객”들을 보면서 한숨이 나온다. 그런데 또한 이런 시대착오적인 선동에 부화뇌동하는 세력이 의외로 많다는데서 우리의 고민은 깊어진다. 민주주의는 공짜가 아니다. 민주주의를 지키고 잘 가꾸어 나가기 위해서는 시민적 각성과 실천이 중요하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 민주주의라는 기차에 꾸역꾸역 올라타고 있는 이 공짜 손님들을 과연 어찌해야 할 것인가?  
2025-01-21 | hrights | 조회: 19 | 추천: 0
서보학 / 인권연대 운영위원   윤석열은 내란죄의 수괴 검찰 특수본은 최근 김용현 전 국방장관을 필두로 내란에 가담했던 군장성들과 경찰청장 등을 내란중요임무종사죄와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로 구속 기소하면서 공소장에 윤석열을 내란죄의 수괴로 적시하였다. 한편 법원이 공수처의 신청으로 발부한 체포영장에도 윤석열은 내란죄의 수괴로 적시되어 있다. 윤석열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40-50년 후퇴시켜 유신시대의 부활과 장기 집권ㆍ독재를 꿈꾸었던 망상가이다. 유신시대가 어떤 시대였던가? 민주주의, 법치주의, 인권이 압살되고 공포정치가 지배했던 시대였다. 군인들이 법기술자였던 검사ㆍ판사들과 합작하여 국민들의 생명ㆍ인권을 유린한 시대였다. 자신의 정치적 무능ㆍ실정, 부인 김건희의 비리를 감추기 위해 유신시대의 부활을 꿈꾸며 내란을 획책한 윤석열은 박정희ㆍ전두환의 계보를 잇는 최악의 미치광이 독재자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전시계엄령을 선포하기 위해 북한을 자극해서 전쟁 발발을 유도하였다는 정황 앞에서는 치미는 분노를 감출 수가 없다. 국가의 안보와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외환유치를 시도한 윤석열은 매국노 이상의 국민배신자라고 욕해도 무색하지 않을 것이다. 윤석열은 만고의 역적이다. 이번 내란을 막아 내고 민주주의를 지켜낸 것은 국민들의 위대한 승리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헌법재판소에서는 늦어도 2월 안으로는 윤석열을 대통령에서 파면한다는 결정이 내려질 것이다. 윤석열의 파면으로 내란 사태가 진압되어야 나라도 안정되고 대한민국도 제2의 번영과 발전을 위한 새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과는 별개로 내란죄 수괴 윤석열 및 내란 참여 세력에 대해서는 철저한 수사가 이루어져서 이들 모두를 엄벌에 처해야 한다. 특히 내란죄의 수괴인 윤석열은 사형 또는 무기형에 처해 다시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국민통합을 명분으로 윤석열에 대한 사면을 언급하는 자나 정치세력은 결코 국민들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내란 가담 군장성에게 군사반란죄를 적용해야 한다 검찰 특수본은 12․3 내란 가담자인 군장성들을 형법상 내란중요임무종사 및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혐의로 구속 기소 하였지만 이들에게 군형법상 반란죄(군형법 제5조)를 적용하지는 않았다. 대통령이 주도하는 친위 군사쿠데타에 가담한 군인에게 군사반란죄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군사반란은 다수의 군인이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여 국권 내지 국가기관에 반항함으로써 성립하는 범죄이다. 국권에는 ‘군의 통수권 및 지휘권’이 포함된다. 현재 대한민국 법령은 군내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육ㆍ해ㆍ공군의 군사작전 및 군령 작용을 ‘합참의장’이 지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한 국군조직법 및 합동참모본부 직제(대통령령) 등은 합참의장이 계엄의 시행과 업무를 담당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계엄의 시행은 군부대의 이동과 병력 투입이 필수적 요소이다. 이는 북한과 대적하고 있는 상황에서 빈틈없는 전투준비태세를 유지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계엄 관계 법령이 합참의장으로 하여금 계엄업무를 통제하도록 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실제로 매년 실시하는 을지훈련(UFS 훈련)에서도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이 되고 합참에 계엄처를 설치하는 방법으로 계엄 시행 연습을 하고 있다. 여기에서 특기할 만한 사항은 계엄법은 국군조직법에 대한 특별법으로 볼 수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대통령도 군병력을 이용한 계엄을 시행할 때에는 기본법령에 따른 군의 조직체계, 임무체계, 지휘체계를 준수하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3 내란 당시 군장성들은 대통령 및 국방장관과 공모하여 그들의 위법한 명령에 따라 무장병력을 지휘ㆍ투입하여 헌법기관인 국회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무력화를 시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군장성들은 군내 작전(군령) 및 계엄업무의 최고책임자이자 현역 군 최고서열자인 ‘합참의장’에게 계엄이나 작전병력의 투입 등 관련한 사전 보고를 하지 않았고 지휘도 받지 않았다. 군장성들이 법령이 정한 군의 조직ㆍ보고ㆍ지휘체계를 따르지 않고 비선 조직으로 군병력을 동원해 헌법기관의 전복을 꾀한 것이다. 전형적인 군사반란에 해당한다. 이번 내란 사건은 군 최고통수권자인 대통령과 국방장관이 지휘하고 군장성들이 이에 따른 것으로 군사반란이 될 수 없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지난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신군부 계엄군의 행위가 군의 최고통수권자인 당시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나 승인 혹은 묵인하에 이루어진 것으로 반란행위에 해당하지 아니한다는 취지의 대법원 판결(대법원 96도3376 판결)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번 12․3 내란 및 군사반란사건에 위 판결의 논리가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다. 당시 최규하 대통령은 전두환의 강요에 의해 하자 있는 의사표시를 한 것이지만 스스로는 내란범이 아닌 정상적인 대통령으로서 적법한 승인 등 행위를 한 것이었고 또한 당시 계엄사령관인 육군참모총장(대장 이희성)은 군정권과 군령권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는 점 등에서 사실관계가 서로 다르다. 대통령의 군통수권은 초법적인 제왕적 권한이 아니다. 대한민국 군대도 대통령의 사병집단(私兵集團)이 아니다. 대한민국 군대는 국민의 군대이다. 대통령이 군의 최고통수권자이기 때문에 위헌ㆍ위법한 명령이라도 그의 명령을 따른 군인에게는 군사반란이 성립할 수 없다는 주장은 민주주의ㆍ법치주의 국가에서는 성립되기 어려운 반헌법적 주장이다. 대통령 개인과 육군사관학교 선배에게 충성하는 소수의 장성이 군의 정상적인 지휘체계를 무시하고 최고 지휘관인 합참의장 모르게 전투준비태세에 임하고 있는 군작전 병력을 움직여 헌법기관의 전복을 시도하고 안보태세에 구멍을 낸 행위가 군사반란이 아니라는 논리는 용납되기 어렵다. 이들의 행위는 누구의 명령에 따랐는지에 상관없이 군의 지휘통수체계를 침해한 것으로서 군사반란으로 평가해야 한다. 위헌적ㆍ위법적인 명령을 내리는 대통령ㆍ국방장관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하는 것은 군인정신도 아니고 면책될 수도 없다. 이번 내란 및 군사반란은 법령에 정하여진 정상적인 군의 조직체계와 지휘체계가 유지되었다면 절대 발생할 수 없었다. 내란 가담 군장성들을 군사반란죄로 처벌하는 일은 앞으로 대한민국에서 군사쿠데타라는 불행한 사건의 재발을 원천 차단하는 동시에 군사반란이 무엇인지를 규명하고 법치주의를 바로 세우는 일로서 대한민국의 헌법수호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군형법의 군사반란죄는 형법의 내란죄 보다 더 중하게 처벌된다. 내란에 가담해 불법적으로 군을 동원한 군장성들은 군형법상 군사반란죄의 수괴에 해당한다. 군사반란죄의 수괴는 사형에 처하도록 규정되어 있다(군형법 제5조 1호). 군장성들의 지휘를 받아 군사반란에 가담한 간부들 군사반란죄의 중요임무종사로서 사형ㆍ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형에 처해진다(군형법 제5조 2호). 군사반란에 부화뇌동하여 참여하거나 폭동에 관여한 자도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해진다(군형법 제5조 3호). 형법상의 내란죄 보다 훨씬 형이 중하다. 또한 군사반란죄는 내란죄 보다 가담자의 처벌 범위를 보다 넓게 인정한다. 예컨대 군사반란죄가 성립하는 경우 이에 적극적ㆍ소극적으로 가담한 군인들뿐만 아니라, 이를 알고도 묵인 군인까지 처벌할 수 있게 된다. 군형법 제9조는 반란불보고죄를 규정하여 군사반란을 알고도 이를 상관이나 관계관에게 지체없이 보고하지 않은 사람까지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란 가담 군장성들을 군사반란죄로 처벌해야 군사반란의 성사에 기여한 숨은 세력들도 식별하여 처벌할 수 있고 향후 군사반란 재발 가능성도 원천 차단할 수 있다. 군사반란를 주도한 윤석열의 책임은 어떻게 되는가?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통령의 군통수권은 적법하게 행사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대통령도 내란의 목적으로 위헌․위법한 군통수권을 행사한다면, 그 스스로 해당 군장성들과 함께 법령이 정한 군의 지휘통수체계를 침해하는 군사반란범이 되는 것이다. 윤석열도 군사반란죄의 공동정범이 되거나 최소한 교사범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윤석열에게는 사형이 선고될 가능성이 크다. 검찰 특수본은 조속히 내란 가담 군장성들을 군사반란죄의 수괴로 추가 기소해야 한다. 내란 사태가 남긴 군개혁의 과제 외적의 침입을 막고 국민의 생명을 지켜야 할 군인들이 국민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냥한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국민들에 대한 배신행위이다. 한국 민주주의의 진전과 더불어 군지휘관들도 민주화의 수준에 맞게 의식의 진보를 이루었으리라고 생각한 것은 착각이었다. 군인의 정치개입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지는 끔찍한 악몽이다. 철저한 단죄만이 군에 의한 제3, 제4의 쿠테타를 예방할 수 있다. 12.12 군사반란 이틀 후인 79년 12월 14일 서울 보안사령부 구내에서 기념촬영한 12.12 군사반란 반란군 가담자들 이번 내란 사태는 군에 대한 문민통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이제 우리나라도 국방장관에 민간인을 임명하여 군에 대한 문민통제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 많은 선진외국에서 민간인을 국방장관으로 임명하여 군에 대한 민간 통제를 철저히 하고 있는데 선진화된 우리나라에서 군출신만을 장관으로 고집할 이유가 전혀 없다. 또한 이번 내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군인들이 모두 육군사관학교 출신이라는 점에서 육군사관학교의 존재 이유 및 역할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 필요하다. 육군사관학교가 민주화 시대에 걸맞는 군지휘관을 길러내는 데 실패하고 군내 특권계급을 양성하는데 그치고 있다면 더이상 존립할 이유가 없다. 하나회 폐지로 군내 정치군인 및 특권적 사조직이 없어진 것으로 생각했던 국민들은 이번에 육사 출신 간부들의 내란 획책으로 큰 충격을 받은 상태이다. 육군사관학교의 폐지까지 포함해 군간부 양성제도의 획기적인 개혁이 있어야 한다. 나아가 군의 중요 보직 인사ㆍ승진에 있어서도 사관학교 출신들이 특혜를 받고 상하ㆍ좌우로 연결되어 사조직 결성의 폐단이 발생하지 않도록 군인사제도 개혁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이번 내란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군방첩사는 과감하게 폐지해야 한다. 군의 수사ㆍ정보기관인 방첩사는 과거 악명을 떨쳤던 보안사ㆍ기무사의 악습을 아직 그대로 이어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박근혜 정부에서도 계엄의 구체적 계획을 수립했던 곳이 바로 기무사였다.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암덩어리가 되어버린 방첩사는 즉시 폐지하는 것이 맞다. 아울러 이번 기회에 군사법개혁에도 적극 나서서 평시 군사법원과 군검찰을 폐지해야 한다. 전시가 아닌 평시에는 모든 군범죄도 – 사망사건과 성범죄 사건뿐만 아니라 – 일반 경찰이 수사하고 검찰이 기소하며 법원이 재판하도록 해야 한다. 평시 군사법원과 군검찰의 존재는 군의 폐쇄적 속성과 맞물려 군지휘관의 권한 남용과 군내 부패ㆍ비리를 은폐하는데 일조할 뿐이다. 이러한 폐단은 해병대 채상병 사건 은폐 외압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서보학 위원은 현재 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25-01-14 | hrights | 조회: 44 | 추천: 2
장경욱 / 인권연대 운영위원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긴급 담화문에 담긴 내용은 딱 한 가지로 요약된다. 국회는 ‘범죄자 집단의 소굴’이고,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탄핵, 특검, 예산 폭거, 입법 독재 등등 ‘패악질을 임상은 만국의 원흉 반국가세력’, 즉 국회를 척결하고 국가를 정상화시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고 한다. 국회에 대한 적개심만이 부각되다보니, 그가 내세운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한 비상계엄의 명분은 지나가는 말처럼 묻혀버렸다. 국회의 대통령 탄핵소추를 앞둔 대국민담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비상계엄의 명분으로 추가로 선거관리위원회에 대한 북한의 해킹 공격, 민주노총 간첩 사건, GPS 교란과 오물풍선, 국정원 대공수사권 박탈, 국가보안법 폐지 시도 등을 언급하며 또다시 거대 야당과 국회가 북한 편을 들어 정부를 흠집내기만 했다고 강변하였다. 기실 거대야당과 국회를 종북 반국가세력으로 보는 것은 반공의식이 강한 국민에게도 전혀 근거 없고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포장하여 비상계엄의 명분으로 삼을만한 단 한 개의 카드조차 남아있지 않은 막다른 정권의 위기 상황에서 저지른 내란범죄가 이번 친위 쿠데타의 실상이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윤석열 정권이 스스로 자멸을 초래하며 이 지경에 이른 구조적 문제를 냉정하게 이성적으로 바로 보는 것이다. 먼저, 임기 초부터 친미극우 반공적 입장에서 북과의 평화통일을 위한 타협과 협상을 전면 거부하며 미국을 추종하여 노골적인 대북적대정책에 몰두한 탓이다. 그렇기에 남북관계의 전면적 단절과 군사적 긴장격화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를 기화로 미국의 국익에 철저히 부합하는 한미일 군사동맹 구축과 한미일 대북핵전쟁연습의 강화가 정권이 내세울만한 바람직한 치적으로 선전되었다.  다음으로, 임기 초 국민의 신뢰를 상실하고 정권의 위기에 처하자마자 바로 정권의 위기에서 벗어나 권력의 강화를 위해, 국민 억압의 통치수단으로 국가보안법을 휘둘러 진보민중운동에 대한 끊임없는 종북몰이 공안탄압을 자행한 때문이기도 하다. 결국 이번 비상계엄 군사쿠데타는 윤석열 극우보수정권의 ‘주적으로서의 북’과 ‘선제타격론’의 대북강경 적대정책과 국가보안법에 의한 지속적 공안탄압이 누적되어 그 연장선상에서 벌어진 일이다. 실제로 군사쿠데타 실패 과정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한 내란주동자들은 비상계엄을 선포하기 위한 명분으로 북과의 전쟁을 유발하기 위해 평양에 무인기를 침투시켰는가 하면, 북의 오물 풍선 원점 타격을 지시했고, 서해 북방한계선 인근에서 포사격훈련을 강화하는 등으로 국지전을 시도하였다. 심지어 비상계엄 후 국군을 인민군으로 위장한 암살 작전까지 준비하였다고 한다. 끊임없이 북의 위협을 이야기하고 이를 구실로 진보민중운동을 비롯한 정치적 반대자들을 종북세력, 반국가세력으로 몰아 국가보안법으로 탄압하며 급기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전쟁을 조장하여 비상계엄을 조작함으로써 한반도와 동북아지역의 안정과 평화를 위태롭게 하며 민주주의를 파괴하여 군사독재시절로 회귀를 시도한 장본인이 친미극우 반공주의 정권이었음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한반도 및 지역의 불안정과 군사적 긴장의 모든 원인을 북의 위협으로 몰아 북의 책임으로 전가하는 것이 대북적대정책이고 이를 국내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국가보안법이다. 극우파시스트 정권을 산생, 유지, 온존시켜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극우파시스트 정권의 국가보안법에 의한 공안탄압과 군사쿠데타 및 전쟁 도발 책동이 끝간데 없이 벌어지는 곳이 우리가 살아가는 외국군 주둔의 대북적대 분단냉전체제의 한반도 현실이다. 이를 극복하지 않는 한 우리는 언제든지 친미극우 반공주의 정권의 비상계엄 군사쿠데타의 망령에서 벗어날 수 없는 악순환의 연속, 도돌이표를 그리는 세월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2025-01-02 | hrights | 조회: 541 | 추천: 7
오항녕 / 인권연대 운영위원 1. 아침 세수를 하면서 ‘언흐흐흐흐 언흐흐흐흐, 기다리던 으흐 아파트’ 흥얼거리는 나를 알아챘다. 그러다 또 알게 된 건 ‘아파트, 아파트, 어흐흐흐 …’도 섞어가면서 불렀다는 거다. 이게 뭐지? 뒤범벅인데! 어디서 왔지? 1. 2024년 12월은 다음의 실제 겸 표상으로 구현된다. 응원봉, ‘다시만난세계’, ‘아파트’, 깃발, 남태령-우금치, 열어라-차빼라!, 난방 버스, 핫팩, 떡볶이-김밥, 선결제 … 거기에 ‘님을위한행진곡’, ‘상록수’ …. [사진1: 젊은이들의 응원봉, 깃발…, 그리고 누군가 보낸 보온 버스. 이런 힘을 역사에서 본 적이 있는가!] 1. 난 소녀시대는 알았지만 ‘다시만난세계’는 첨 알았다. 여타 아이돌이나 심지어 BTS에 대해서도 아는 게 거의 없다. BTS 멤버는 물론 노래도 제대로 아는 게 없다. 학교 동료가 ‘정국’이를 좋아한다며 폰에 저장된 사진을 보여줄 때 난 ‘기생 오래비’ 운운하며 코웃음을 쳤다. 물론 그때 곁에 있던 학생의 싸늘한 눈길을 모를 정도로 둔감하지는 않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아무튼 다이너마이튼지 뭔지 하는 노래는 ‘다이너마이트’라는 말밖에 아는 가사가 없다. 특별히 알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젊은 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치냐고? 공감과 학습이 가능하겠냐는 우려다. 그럴 듯한 걱정이지만 실은 바보 같은 질문이다. 세상에 얼마나 배우고 가르칠 게 많으며, 다르면서 공감할 수 있는 영역이 얼마나 많은데! 1. 세월이 흐르면 사람도 세상도 변한다. 예순 넘은 내가 20대 학생들과 취미 또는 생각이 같거나 비슷하다면, 그리고 1979년과 2024년의 비상계엄이 같다면, 그건 나나 한국 사회가 내내 변치 않고 같다는 말이 된다. 허나 우주에 그런 일은 없다. 모든 게 변한다. 즉 달라진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말한다. “내 생각과 여러분 생각이 대부분 다른 것은 당연하다. 만일 같다면 그건 특수한 사건에 국한되거나, 나 또는 여러분이 뭔가에 갇혀 있을 가능성이 높다.” [사진2: 남태령을 넘은 새로운 역사. 달리 표현하기 어려운 새로운 힘, 역사를 만들어가는 힘!] 1. 이 칼럼을 쓰던 중, ‘남태령 대첩(大捷)’이 일어났다. 대첩이란, 한산대첩, 행주대첩의 예에서 보듯 ‘싸워서 크게 이겼다’는 말이다. 농민들이 윤석열 대통령의 파면과 구속을 요구하면서 트랙터를 몰고 서울로 올라왔는데, 전국농민회 총연맹 소속 농민들이었다. 이를 경찰이 사당동 넘어오는 남태령에서 막았다고 한다. 경찰은 경찰차로 차벽을 쳐서 농민들의 서울 진입을 막았다. 또 트랙터 유리창을 부수고 농민들을 연행하려 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시민들이 달려가 농민을 보호하고 응원했다. 남태령에 1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모였다고 한다. 아다시피 그날 밤은 매우 추웠다. 체감온도 영하 10도. 그곳에서 28시간을 버티며 결국 한남동 윤씨의 집으로 가는 길을 텄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걱정만 했다. ‘많이 추울 텐데 … , 경찰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1. 나는 추워서 그 시간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동상 핑계만이 아니라, 여의도공원 4시간도 버거운 체력 때문이다. 늙은 거다. 그래서 밤새 저렇게 못하는 거다. 그 의미는? 그렇다, 역사를 만드는 데 기여할 힘이 적다는 거다. 객사 집회를 다녀온 작은 아이는 ‘서로 교대도 해요’라며 문자도 보여주었다. 새벽에 알아서 서로 교대도 했단다. 거기에는 ‘난방 버스’라는 거침없는 후원 방식도 큰 도움이 되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나보다 훨씬 효율적이고 실천적이다. 1. 모든 미래가 그렇듯이 12.3 내란의 처리가 어떻게 흘러갈지 누구도 예언할 수 없다. 어떤 시나리오도 그대로 진행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불의와 정의를 말할 수 있을 것이고 그 달성을 위해 노력할 뿐이다. 응원봉을 들고 아파트를 부르고 댓글을 쓰고 걱정하거나 분노할 뿐이다. 그렇지만 이 거대한 혁명적 상황이 가져올 결과, 그 세상에 대해서는 조금은 희망을 가지고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국회의사당 앞 광장 바닥에서, 광화문, 한남동, 용산, 그리고 남태령 아스팔트 바닥에서 밤을 새는 저 젊은이들이 만들어갈 세상에 덜 방해가 되는 삶을 찾아보는 것이다. 혹시 작은 기여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물어보고 했으면 한다. 젊은이들이 권하지 않는 행동은 대개 나이 든 이들의 간섭이거나 자기만족을 벗어나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는 점, 이참에 다시 상기해본다. 그래도 이 난국을 이겨내고 새 세상을 만드는 데 끼어주면 좋겠다. 1. 아울러 미래를 위해 이렇게 실천할 것을 제안한다. 어머니/아버지, 할머니/할아버지께서 극우 또는 불의의 늪에 빠지셨는지 확인하고, ①단톡방 ‘나가기’를 해드리고, ②건강과 지성을 키울 단톡방이나 사이트를 안내하면 좋겠다. [사진3: 겸재의 〈비 개인 인왕산〉. 12월 14일, 여의도공원에서 곁에 있거나 스쳤던 젊은이들에게서 저 그림이 떠올랐다. 1991년 지곡서당 유학 시절, 유홍준 선생이 특강 중 저 그림을 슬라이드로 보여주었다. 그림을 보던 나는 ‘자신만만하군…’이라고 중얼거렸다.] 오항녕 위원은 현재 전주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24-12-23 | hrights | 조회: 208 | 추천: 5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어릴 때 학교에서 상대성이론을 배울 때 선생님은 이런 비유를 들었다. “즐거울 때는 시간이 후딱 지나가고, 괴로울 때는 시간이 겁나게 늦게 간다.” 글쎄 그게 정말 상대성이론을 설명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우리는 지금 무척이나 괴롭고 고통스런 시간을 통과하고 있다. 아직도 그 분 임기가 절반밖에 안 지나갔다. 다음 대통령 선거까진 3년이나 더 기다려야 한다. 진짜 욕 나온다. 무능한 정부, 할 줄 아는 것은 압수수색뿐 2022년 3월 대통령선거 직후 블로그에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착한척하고 무능력한 정부에 너무나도 실망한 끝에 안착하고 능력 있는 체하는 차기 정부를 선택했다.” 지금도 이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물론 한 가지는 수정해야겠다. 위선을 너무나 싫어한 나머지 능력 있는 척 하지도 않는다. 능력 없는 게 뭐가 문제냐고 당당하다. 할 줄 아는 거라곤 압수수색 뿐이다. 국정목표는 ‘이재명 감옥 보내주기’가 전부다. 물론 그마저도 제대로 못한다. 주변에 대통령에게 실망했다는 얘길 하는 분들이 가끔 있다. 이렇게 일을 못할 줄 몰랐다느니, 이 정도일 줄 몰랐다느니 한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이 정부에 전혀 실망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해주곤 한다. 애초에 기대가 없었으니 실망할 것도 없다. 어쨌든 덕분에 검찰이 능력 있는 집단이라는 환상은 확실하게 박살 났다. 김영삼이 통일 기반 마련을 위해 남북한 경제력 격차를 확실하게 줄여놓은 것 못지않은 업적으로 역사에 길이 남지 않을까 싶다. 군대에서 제대한 게 1998년이었다. ‘부산 앞바다에 손가락이 둥둥 떠다닌다’는 썰렁한 농담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외환위기 충격이 너무 고통스러워 김영삼 찍었던 자기 손가락을 잘라서 바다에 버렸다나 뭐라나. 그 뒤로도 대통령 선거를 여러 번 했는데 우리 국민들 손가락이 남아날까 걱정이 살짝 되는 게 사실이다. 공중목욕탕에서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칠냉팔온은 건강에 좋기라도 하지, 왜 우리는 5년마다 열광과 절망을 되풀이해야 하는 것일까. 대통령선거, 정도령 찾기 게임 이쯤에서 우리가 익숙하고 당연하게 여기던 상식을 다시 살펴봐야 하는 것 아닐까 싶다. 문제는 대통령을 잘못 뽑은 게 아니다. 애꿎은 손가락 탓할 게 아니다. 대통령 선거 자체가 문제인 건 아닐까. 현재 한국이 시행하는 5년 단임 대통령제는 비유하자면, 정도령 찾기 게임이다. 대한민국은 5년 내내 <정감록>에서 예언했던 바로 그 ‘정도령’을 찾아 헤맨다. 그리고 5년에 한 번씩 ‘이 분이 그 분이다’ 하며 정도령을 추대한다. 수백만 수천만 신도들이 구름처럼 정도령 주위에 몰려들어 열광한다. 정도령이 대통령이 되면 국격도 올라가고, 도로도 깔아주고 지역에 예산도 내려주실 거라 기대한다. 그렇게 5년마다 한 판 큰 굿이 벌어진다. 정도령은 임금님이 되기도 하고 ‘아름다운 패배’를 하기도 하는데, 물론 전혀 중요하지 않다. 5년 뒤 재림할 새로운 정도령을 기다리는 게 중요하다. 구중궁궐에 숨어있는 임금님을 잘근잘근 씹어주는 건 정도령을 맞기 위한 준비운동 되시겠다. 정도령에게 중요한 자질은 뭐니 뭐니 해도 기득권 정치권을 저주하며 국민들 막힌 속을 뚫어주는 사이다 발언이다. 그냥 열심히 떠들어주고, 가끔 신도들 앞에서 어퍼컷이라도 날려주면 그걸로 족하다. 정도령을 찾아 헤매는 중생들에게 중요한 건 정치를 바꾸고 나라를 개혁하는 게 아니라 그저 현실 정치를 욕하며, ‘나는 너희 같은 더러운 족속이 아니야’는 믿음에 부합하는 증거를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승리한 정도령은 더 이상 정도령이 아니다. 타파해야 할 기득권 정치인일 뿐이다. 어쩌면 정도령이란 프레이저가 쓴 신화연구의 고전 ‘황금가지’에 등장하는, 황금가지를 지키며 존경과 칭송을 누리지만 결국은 살해당할 운명인 신관(神官)일지도 모르겠다. 신도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신관을 죽인 사람을 새 신관으로 영접한다. 신도들에겐 그냥 신관이 있다는 게 중요할 뿐 누가 신관인지는 관심 밖이니까. ‘로미오는 죽어야 한다.’ 새로운 상상력의 세계로 우리는 그렇게 수많은 정도령을 5년짜리 임금님으로 세우고, 5년 동안 우리가 뽑은 정도령을 욕하며 다음 정도령을 기다렸다. 그렇게 우리는 1987년 이후 열광과 절망, 열정과 냉소를 되풀이하며 5년 주기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롤러코스터마저 제대로 작동을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내 질문은 이런 것이다. 오천만의 열망을 단 한 사람에게 투영하는 방식, 오천만의 꿈과 희망을 한 사람에게 몰아주는 건 승률이 너무 낮은 도박 아닐까? 정도령을 제대로 찾는 건 해답이 아니다. 소녀들에게 백마 탄 왕자님이 필요 없듯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정도령이 아니다.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건 정도령을 죽여버리고 새로운 게임의 규칙을 만드는 상상력 아닐까.
2024-12-04 | hrights | 조회: 255 | 추천: 12
정범구/장발장은행장 말 그대로 총체적 난국이다. 세계는 ‘돌아온 장고’ 트럼프의 컴백으로 뒤숭숭한데, 이런 난국에 대처해야 할 우리는 하필이면 지지율 20%를 오르내리는, 역대 가장 형편없는 대통령을 보유하고 있는 중이다. 유력한 대선주자인 야당 대표는 선거법 1심 판결에서 예상치 못한 중형으로 휘청거리면서, 이른바 ‘사법 리스크’라는 게 현실화하고 있다. 당장 김건희 리스크 등으로 코너에 몰려있던 윤석열 정권은 물 만났다는 듯 국면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나라 안팎으로 밀려오는 쓰나미에 관계없이 그 알량한 ‘정권’을 지키자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다. 정말 뭣이 중한디? 이순신을 다시 떠 올리다. 이런 어려운 때를 맞이할 때마다 옛날 일들을 떠올려 본다. 분명 옛날엔 이보다 더 힘든 때가 있었을텐데, 그 때는 그 위기들을 어떻게 넘겼었을까? 어려운 고비마다 싸움의 맨 앞장을 섰던 수많은 열사, 의사, 의병장, 영웅들의 면면을 떠올리다가, 그러다가 다시 이순신을 생각한다. 광화문 매연 속에 오늘도 서 계시는 그 분이 아니라, 명량(울돌목) 해전을 앞두고 온 밤을 하얗게 지새웠을, 마지막을 건 노량의 결전장으로 나가며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을, 그 고독한 이순신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이다. 원균이 다 말아먹은 조선해군. 거북선 3척을 포함해 판옥선 140여 척 등 조선해군이 보유한 모든 선단을 2만 병사와 함께 칠천량 앞바다에 수장시킨 원균은 육지로 올라와 도망치다 적군에 잡혀 죽었다. 칠천량 패전 후 다급해진 선조가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했지만, 돌아온 이순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폐허 속에 남은 달랑 열 두 척의 배였다. 그나마 이 배들은 경상우수사 배설이 칠천량 해전에서 끌고 도망쳐 살아남았던 것들이다. 조선 해군이 사실상 궤멸된 것은 선조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순신더러 수군을 해체하고 권율 휘하의 육군에 합류하라고 하였다. 그때 이순신이 그 유명한 장계를 올린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臣常有十二隻)” 이 대목에서 잠깐 생각한다. 이순신은 바보인가? 아니 이순신이 바보일 리 없다. 자신의 의지에 대한 지극한 신뢰요, 자신이 기반하고 있는 백성에 대한 믿음이며, 죽기를 각오한 자의 단호함이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는 대목이다. 누구보다 먼저 백성을 버리고, 궁을 버리고 도망치기에 바뻤던, 그러면서도 이순신의 의기와 용맹을 시기했던 용렬한 군주 선조 따위가 가늠해 볼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세상을 살면서 가장 억울한 일을 꼽으라면 아마 누명을 쓰는 일일 것이다. 자기가 하지도 않은 일로 모함받고 죄를 뒤집어쓰는 일, 자기가 책임질 일이 아닌데도 그 죄를 덮어쓰는 일. 이렇게 따지면 아마 인류역사상 가장 억울했던 이는 예수 아니었을까? 자기 죄가 아닌, 뭇 세상 사람들의 죄를 대신 덮어쓰고 십자가에 오르신.... 이순신도 자신의 생애에서 두 번씩이나 이런 일을 겪는다. 서른 두 살, 당시로서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무과에 합격하고 발령받아 간 곳이 함경도 북단 녹둔도란 곳이다. 오늘날은 러시아 영토로 되어 있는, 두만강 상의 섬인 녹둔도 둔전 관리 책임자로 있다가 여진족의 기습을 받는다. 격퇴했지만 조선군의 피해도 컸다. 당시 함경북병사 이일은 이 피해 책임을 하급 장교인 이순신에게 덮어씌우고 서울로 압송한다. 국경수비 장교에서 졸지에 사형수가 됐으나 선조는 파직시키고 백의종군하는 것으로 형을 감면한다. 그런데 이 패전은 애초에 이순신이 책임질 일이 아니었다. 국경 방어를 위해 꾸준히 병력증강을 요청했던 이순신의 요구를 무시했던 이일이 책임져야 할 일이었다. 어쨌든 이 일로 계급장 떼이고 백의종군해야 했던 이순신은 다음 해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적장을 사로잡는 등의 공을 세워 다시 관직에 복귀한다. 두 번째 백의종군은 다 아는 바와 같이 원균 등의 모함에 의한 것이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왜군은 부산포 주변의 남해안에 진을 치고 명나라와의 협상을 이어간다. 조정에서는 남해안 일대 왜군을 적극적으로 소탕하라고 이순신에게 명을 내리지만, 병력의 열세, 지형상 불리함 등 여러 가지 여건으로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그를 원균 등이 끝없이 비방, 모함한다. 싸우면 반드시 이겨야 하는 이순신에게 피아의 대비, 지형, 기후 등 승전에 필요한 여건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투에 나가는 것은 무모한 짓이었다. 그러나 의심 많고 속 좁은 선조는 이런 이순신을 항명죄로 몰아 삭탈관직하고 한양으로 압송한다. 이 대목에서 다시 한번 바보 이순신을 원망 해 본다. 그런 임금, 그런 군주에게 끝까지 목숨 바쳐 순종할게 뭐람.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본다. 그가 목숨 바쳐 충성을 바쳤던 것은, 아무리 왕조시대 윤리에 젖은 이순신일지라도, 왕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를 믿고 따르던 백성들, 무능한 임금과 지배층 때문에 전쟁의 참화에 휘말려야 했던 무고한 백성들과 산하 때문 아니었을까? 그가 아니면 조선은 1910년이 아니라 1592년에 진작 망했을지도 모른다. 임진왜란의 진행과정을 보면 이런 내 생각은 더욱 분명해진다. 파죽지세의 일본을 막아섰던 이순신 1592년 5월 23일 (음력 4월 13일) 부산포에 상륙한 일본군 20만은 19일만인 6월 11일(음 5월 2일) 한양에 도달한다. 그 사이에 상주 전투도 치르고, 신립 장군과의 충주 탄금대 전투도 치렀는데 말이다. 그냥 걸어와도 2주일이면 오는 거리를 20만 대군이, 전투까지 치르며 올라왔는데도 19일 밖에 안 걸렸다면 유의미한 조선의 군사적 저항은 거의 없었다고 봐야 한다. 그냥 무풍지대를 일본군이 치고 올라온 것이다. 이런 무풍가도에 시원한 일격을 가한 것이 바로 이순신이다. 1592년 6월 16일, 일본군이 텅 빈 경복궁을 함락시킨 나흘 후, 이순신의 첫 전투인 옥포해전이 벌어진다. 여기서 일본군 배 26척을 침몰시킨다. 전쟁 발발 후 조선군 최초의 승리인 것이다. 같은 날 오후 합포 해전에서 적선 5척 격파, 다음날인 6월 17일 적진포 해전에서 왜선 11척을 침몰시키면서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일본군을 바다에서 멈춰 세웠다. 20여일 후 사천 해전에서 일본 배 13척 격침. 이 전투에 처음으로 거북선을 투입한다. 이틀 후인 7월 10일 당포 해전에서 왜선 21척을 격침, 한 달 뒤인 8월 14일 그 유명한 한산도 해전에서는 적선 47척을 침몰시키고 12척을 나포한다. 임진왜란 3대 대첩의 첫머리를 연 이 한산도 대첩으로 일본은 바다에서는 완전히 우리 수군에 무릎을 꿇고, 이후 서해안을 통해 한양으로 북상하여 보급로를 확보하려던 계획이 완전히 무산된다. 한편 이 전투는 육지에서 연전연패하던 육군에게 승리의 용기를 주고, 각처에서 일어난 의병들에게도 승리의 희망을 안겨주었다. 이런 점에서 한산도 대첩은 임진왜란의 물줄기를 튼 중요한 전투였는데 이것은 오로지 이순신에 의해서만 가능한 승리였다. 그러나 삼도수군통제사직에서 쫓겨나고, 결국 원균의 칠천량 해전 패배 후 처참하게 궤멸된 조선 수군을 다시 물려받아야 했던 그의 심사는 어떠했을까? 특히 칠천량 패전 후, 아무것도 없는 맨손으로, 일본 대군과 다시 일전을 벌여야 했던 그의 속은 어땠을까? 1597년 8월 27일 칠천량 해전 후 꼭 두 달만인 10월 26일, 이순신은 13척의 배로 330척 일본 수군과 명량(울돌목)에서 맞선다. 경상우수사 배설이 칠천량에서 도망가는 바람에 남겨진 배 12척에 한 척이 더 추가된 것이다. 이 전투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 덕에 결국 적선 133 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지만, 전투를 앞둔 그는 얼마나 애간장이 타고 번민했을 것인가? 엄청난 열세에 싸우기를 두려워하는 휘하 장졸들을 어떻게 설득할 것이며, 어떤 전술을 써야 화력과 병력의 열세를 만회할 수 있을 것인지 등등 고민으로 그는 아마 밤을 하얗게 지새웠을 것이다. 그의 고민은 그의 일기에도 잘 나타나 있다. 명량해전 하루 전인 10월 25일(음 9월 15일) ‘난중일기(이석호 옮김)’에 그는 이렇게 썼다. “적은 수의 수군으로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치는 것이 불가하므로 진을 우수영 앞바다로 옮겨 여러 장수들을 모으고 약속하여 가로되, ‘병법에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사람을 두렵게 한다 했음은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 여러 장병들은 살 생각을 하지 말라.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길 때는 군법에 의하여 처벌할 것이다’.” 이른바 필사즉생(必死卽生)이요, 필생즉사(必生卽死)의 각오를 밝힌 것이다. 이순신의 절대고독이 느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자기를 믿고 따르는 부하들에게 ‘살 생각을 하지 말라‘고 주문하는 지휘관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이 시대의 이순신을 기다리며 총체적 난국이다. 위기는 겹겹이 쌓여 있고, 나라 안팎으로는 높은 파도가 몰아칠 것이 예상된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에 대응하고 풀어가야 할 리더십은 최악의 상태에 있다. 책임 있는 사람들 중에 이순신처럼 절박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자신이 쥐고 있는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면서 끝까지 꿀만 빨아먹겠다는 자들만 도처에 득실거린다. 그리하여 더욱 총체적 난국이다. 시대가 영웅을 낳는다고 했다.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고도 했다. 이순신도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이 없었다면 그 존재를 미처 드러내지 못했을 수 있다. 이 사회 어딘가에서 여전히 고군분투하고 있을 이순신들이 있기를 빌어본다.
2024-11-19 | hrights | 조회: 456 | 추천: 25
서보학 / 경희대법학전문대학원 11월에 두 개의 중요한 법원 판결 선고가 예정되어 있다. 11월 15일에는 이재명 민주당 대표에 대한 공직선거법 위반(허위사실공표죄) 사건 1심 선고가, 25일에는 위증교사 사건 1심 선고가 내려질 예정이다. 정부와 여당은 이재명 대표에게 유죄판결이 선고되어 여론의 흐름이 바뀌기를 간절히 기대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1월 7일 대국민담화에서 하나 마나 한 사과를 하고 김건희씨에 대한 변명으로 일관한 것도 법원의 유죄판결을 믿기 때문이리라. 법원의 유죄판결에 기대고 싶은 윤석열 정권 윤 대통령은 취임 이후 줄기차게 이재명 대표를 죽이기 위한 표적수사에 몰두해 왔다. 지난 2년 6개월간 각 검찰청에서 차출되어 투입된 검사만 70여 명, 압수ㆍ수색만 376회로 집계되었고 구속영장 청구도 2회 있었다. 그 결과 이재명 대표는 대장동 배임ㆍ성남FC 뇌물ㆍ백현동 특혜개발ㆍ공직선거법 위반ㆍ위증교사ㆍ대북 송금 대납 건 등으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고 있다. 우리 정치사에서 협치의 대상인 야당 대표를 죽이기 위해 검찰이 이렇게까지 집요하고도 무차별적으로 수사ㆍ기소에 나섰던 때가 있었던가? 기억에 없다. 우리 헌정사에 유례없는 검찰공화국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반면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한 검찰의 수사는 어떠한가? 대통령 부인 김건희씨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는 4년 6개월을 끌다가 지난 10월 17일 불기소처분으로 막을 내렸다. 김건희씨가 단순 공범을 넘어 적극적으로 주가조작에 가담했었다는 증거가 다수 드러났고 다른 공범들은 모두 2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았음에도 검찰은 시간만 끌다가 무혐의로 종결했다. 선진 외국에서는 주가조작이 시장경제질서의 기반인 사회적 신뢰와 공동체 다수의 경제적 이익을 해친다는 이유로 살인죄 이상의 중한 범죄로 다루고 있는데 한국 검찰은 ‘콜검’이라는 비아냥을 들은 굴욕적인 출장 조사 – 이때 검사들은 스마트폰도 압수당했다 - 끝에 김건희씨에게 무릎 꿇고 두 손으로 면죄부를 상납하였다. 그전에 이미 검찰은 김건희씨가 명품 가방을 받는 장면이 온 국민에게 영상으로 공개되었음에도 불기소처분을 내린 바 있다. 그 밖에도 김건희씨는 양평-서울 고속도로 비리, 양평 공흥지구 비리, 국민의힘 공천 개입 등 다양한 비리 의혹을 받고 있는데 이런 혐의에 대해서 검찰은 어떤 수사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다. 이재명 대표 부인 김혜경씨의 법인카드 10만4천 원 사용 의혹에 대해서는 130여 차례 압수수색을 하였던 검찰이 김건희씨의 비리에 대해서는 두 눈 감고 입도 뻥긋하지 못하는 바보가 되어 있다. 비겁함도 이런 비겁함이 없고 후안무치도 이런 후안무치가 없다. 윤석열 대통령이 외쳤던 ‘공정과 상식’은 쓰레기통에 버려진 지 오래다. 압도적 국민 여론은 ‘용산의 개’가 되어 버린 검찰에 대해 사망을 선고하였다. 야당 대표 죽이기에 혈안이 된 검찰 한국 검찰은 수사권, 강제수사를 독점하는 영장청구권, 기소독점권을 한 손에 쥐고 있다. 수사권과 기소권은 각각이 막강한 권한이다. 잘못 사용할 경우 한 사람의 삶을 억울하게 파멸에 이르게 할 수 있고 반대로 거악(巨惡)에 눈을 감을 경우에는 사회 전체를 위기로 몰아갈 수도 있다. 이런 이유로 선진 외국은 수사기관과 기소기관을 분리하여 상호 감시ㆍ견제하게 함으로써 권력의 남용과 부패를 방지하고 있다. 반면 한국 검찰은 수사권과 기소권을 한 손에 쥐고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사건을 조작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갖고 있다. 지난 2년 6개월간 지속된 이재명 대표에 대한 검찰 수사ㆍ기소는 진짜 범죄의 실체가 있어서 수사ㆍ기소한 것인지 아니면 아무 실체가 없는데 수사 과정에서 사건을 조작하고 가짜 시나리오에 근거해 기소한 것인지 외부에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수사와 기소를 검사가 독점하고 있고 외부에서는 구체적인 경과와 내부 정보를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2013년 서울시 공무원 유우성씨 간첩조작 사건에서 검찰이 조작된 증거를 법정에서 사용한 범죄가 드러난 바 있고, 지난 2015년 정치자금법 위반에 대한 유죄가 확정되어 옥살이를 한 한명숙 前 총리에 대해서는 검사가 허위 증언을 교사하는 등 조작에 가까운 검찰 수사가 이루어졌다는 정황이 언론보도로 드러난 바 있다. 지난 제17대 이명박 대선 후보의 BBK 의혹에서는 온 국민이 검사들의 거짓말 농단에 놀아나지 않았던가. 일단 기소가 되면 재판을 통해 진실이 밝혀지기까지는 수년이 걸릴 뿐만 아니라 최종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되더라도 검찰은 법원의 판단이 잘못된 것이라며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 권력에 아부하여 청부 수사ㆍ사건 조작을 한 검사는 승진으로 보답받고 억울한 피해자에게는 악전고투 끝에 상처뿐인 승리가 남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승리는 항상 검찰의 몫이다. 검찰이 수사권과 기소권을 한 손에 쥐고 있는 한 모든 시민, 모든 단체, 모든 기관은 언제든지 검사들의 사건 조작에 희생될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억지 기소와 증거 조작을 통한 사건 만들기 검찰의 사건 조작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분류할 수 있다. ‘억지 기소’와 ‘증거조작을 통한 사건 만들기’이다. 11월 판결선고가 예정된 이재명 대표 두 개의 사건도 이에 해당한다. 첫째, 이재명 지사를 공직선거법 위반(허위사실공표죄)로 기소한 것은 전형적인 억지 기소에 해당한다. 공직선거법 제250조 1항 허위사실공표죄의 허위공표 금지대상은 ‘출생지, 가족관계, 신분, 직업, 경력 등. 재산, 행위, 지지 여부’이다. 다수의 법률전문가들이 지적하였듯이 이재명 대표의 발언인 ‘시장 재직 시절에는 김문기를 몰랐다’라는 것은 ‘인식’ ‘의식’ ‘기억’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위 법문이 금지하고 있는 허위공표 대상에 속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검찰은 “시장 재직시에는 김문기를 몰랐다”고 한 말은 “김문기와 교유(交遊)행위가 없었다”라고 해석해야 하고 이것은 법문에 명시된 ‘행위’에 해당한다면서 억지 주장을 펴고 있다. 인식ㆍ의식ㆍ기억의 영역에 속하는 것을 억지로 ‘행위’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피고인의 유죄를 주장하는 것은 헌법이 금지하고 있는 유추해석에 해당한다. 이점을 법률전문가인 검사들도 명확히 알고 있음에도 억지 기소를 감행한 것이다. 검찰의 억지 기소가 낯선 일은 아니다. 예컨대 이명박 정부 때 검찰의 억지 기소로 사장직에서 쫓겨난 정연주 前 KBS 사장. 당시 정연주 사장은 국세청에 대한 1심 소송에서 승소한 후 법원의 조정 권고를 수용해 항소심을 취하하였다는 이유로 검찰에 의해 배임죄로 기소되었다. 검찰 내부에서도 '법원의 권고에 따른 것이 죄가 될 수 있나'라는 회의적인 시각이 있었지만 검찰은 기소를 감행했다. 이후 정연주 사장은 당연히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렇지만 이명박 정부의 의도대로 정연주는 KBS 사장직에서 물러나야 했고 그에 대한 검찰기소는 언론장악의 시발점이 되었다. 정권의 언론장악에 검찰이 총대를 맨 전형적인 억지기소였다. 둘째, 검찰이 이재명 대표를 위증교사로 기소한 사건은 억지 기소에도 해당하지만 증거 조작(증인의 진술조작)을 통한 사건 만들기에 해당한다. 이재명 대표가 김진성에게 “기억을 되살려 사실대로만 진실을 이야기해달라”고 이야기한 것은 형법 이론적으로 위증교사에 해당하지 않는다. 대법원은 증인이 자기의 기억에 반하는 진술을 하는 경우에만 위증죄가 성립하고 기억나는 대로 진술하는 것은 위증이 아니라는 입장을 명확히 하고 있다. 따라서 “기억을 되살려 기억나는대로 진술해 달라”라는 부탁은 명백히 위증교사에 해당하지 않는다. 이 점을 잘 아는 검찰이 기소한 것은 전형적인 억지기소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지점은 위증을 했다고 자백한 피교사자 김진성의 진술이 검찰의 조사가 진행되면서 계속 바뀌었다는 점이다. 당초 김진성은 사실대로 증언했다면서 위증한 사실을 부인했다가 추후 검찰의 주장과 동일하게 위증을 시인하는 방향으로 진술을 바꾸었다. 그런데 김진성은 사기ㆍ알선수재 등 3건의 범죄혐의로 검찰의 수사를 받았거나 기소되어 있다. 한 건은 경찰이 기소 의견으로 송치했음에도 검찰은 조사 한번 하지 않고 무혐의로 처리했고, 백현동 알선수재 범죄는 다른 공범은 2심 재판이 끝났는데도 아직도 기소 자체를 하지 않고 있다. 이재명 대표를 피고인에 묶어 두고 정치적 타격을 입히려는 검찰 위증죄에 대해서는 진즉 변론이 종결되었음에도 아직 검찰이 구형을 하지 않고 있다. 자신의 범죄로 검찰의 수사와 재판을 받고 있는 김진성은 ‘정치검찰의 거미줄에 걸린 나비’ 신세나 다름없는 처지이다. 검찰이 김진성의 궁박한 상태를 이용해 협박ㆍ공갈ㆍ형량 거래를 하고 그에게 허위진술을 교사했을 것이라는 강한 의심이 드는 지점이다. 검사가 유죄판결을 받아내기 위해 사건관계인에게 허위진술을 종용하는 것은 사건조작이라는 중죄를 범하는 것이다. 최근에도 쌍방울그룹의 ‘대북송금’ 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이화영 前 경기도 평화부지사가 검찰에 의한 위증교사가 있었다는 의혹을 폭로하여 파장이 크게 일었다. 수원지검이 이화영과 쌍방울의 김성태ㆍ안부수 등 공범들을 모두 한 자리에 불러 모아 연어회를 곁들인 술파티를 열어주고 이재명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해 진술을 서로 맞추도록 했다는 사실을 폭로한 것이다. 그동안 검찰의 행태를 생각하면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사실이다. 그 외에도 대장동의 유동규, 백현동의 정바울 등 이재명을 겨냥한 검찰의 수사ㆍ기소에는 어김없이 회유ㆍ협박, 기소 및 형량 거래 의혹이 불거져 있다. 게다가 2022년 개정된 검찰청법에 의하면 위증교사는 검찰의 수사개시권 범위에서 제외되어 있다. 그럼에도 검찰은 하위법령인 시행령을 근거로 수사하고 기소했다. 그런데 법률의 위임범위를 넘어 검찰의 수사권을 확대한 시행령은 명백히 무효이기 때문에 무효인 시행령에 근거해 이루어진 검찰의 수사ㆍ기소는 헌법ㆍ법률에 위반한 기소로서 무효에 해당한다. 검찰이 죽어야 나라가 산다. 검찰이 이재명 대표에 대해 사건조작 및 억지기소를 일삼고 있는 이유는 몇 년간 이재명 대표를 피고인의 지위에 묶어 두고 정치적 타격을 입히려는 데 목적이 있다. 정확하게는 차기 대선출마를 원천 봉쇄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는 것이다. 몇 년 후에 재판 결과가 유ㆍ무죄 어떻게 나오든 현재 검사들에게는 관심 사항이 아니다. 그때쯤이면 이미 정치적 목적은 달성되어 있을 것이고 자신들은 승진과 좋은 보직으로 보답을 받아 개인의 영달을 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권력의 개가 되어 온갖 악행을 일삼고 있는 검찰의 수명은 이제 다하였다. 더이상 개혁이라는 명분 아래 검찰을 고쳐 쓰려 해서는 안 된다. 일단 검찰에 사망선고를 내려야 한다. 시급히 검찰청을 폐지하여야 한다. 기소청을 새로 설립하여 엄격한 재임용 절차를 거쳐 손이 깨끗한 검사들을 채용한 뒤 기소 업무만을 전담하도록 해야 한다. 이제 검찰이 죽어야 나라가 산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검찰을 죽여야 한다. 공직 선거법 위반, 위증 교사 사건 모두 당연히 무죄이다. 이제는 법원의 시간이다. 법리적으로 두 사건은 당연히 무죄이다. 법원이 올바른 판단으로 무죄를 선고하여 검찰의 사건조작과 기소권 남용에 대해 철퇴를 내려 주기를 기대한다. 설혹 1심 재판부가 권력과 검찰의 압력에 굴복해 유죄를 선고하더라도 현명한 국민들의 판단과 지지가 흔들릴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여전히 정의의 여신 디케의 정신을 가진 판사들이 법원에 남아 있음을, 법원이 인권과 정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음을 이번 판결로써 증명해 주기를 희망한다.
2024-11-11 | hrights | 조회: 961 | 추천: 32
염운옥 / 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브롱크스 동물원의 사과 미국 야생동물보호협회는 2020년 7월 30일 과거 뉴욕 브롱크스 동물원이 콩고 음부티 부족 남성 오타 벵가(Ota Benga, ca. 1883-1916)를 감금하고 전시했던 잘못에 대해 사과했다. 당시 협회는 브롱크스 동물원을 운영하는 주체였다. 오타 벵가의 전시는 1906년에 일어난 일이니 114년 만의 사과였다. 크리스티안 샘퍼(Cristián Samper) 회장은 사과 성명문에서 더 일찍 사과하지 못해 후대에 상처를 줬다며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고 했다.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구조적 인종차별에 대해 맞서기 위해 협회가 책임 있는 역할을 다할 것이라는 약속도 했다. 그리고 협회 창립회원으로 동물원 운영과 전시에 깊이 관여했던 매디슨 그랜트(Madison Grant)와 헨리 페어필드 오스본(Henry Fairfield Osborn)의 우생학과 인종주의는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덧붙였다. 그랜트는 미국 자연보호운동의 창시자로 유명하지만 『위대한 인종의 소멸(The Passing of the Great Race)』에서 노르딕 인종의 우수성을 찬양하고 열등한 인종에 대한 우생학적 조치를 주장한 노골적인 백인우월주의자였다. 그랜트와 오스본은 1926년에 미국 우생협회(American Eugenics Society)의 설립을 주도했다. 왜 114년이나 지나서 사과했을까? 오타 벵가에게 닥친 잔혹한 운명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많이 알려져 있기에 그리 새로울 건 없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사과라니 늦어도 너무 늦은 사과가 아닌가? 과거 브롱크스 동물원의 운영 주체 야생동물보호협회의 ‘수상한’ 사과에는 맥락이 있다. 2020년 5월 25일 흑인 시민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가 경찰의 근거 없는 과잉 진압으로 사망했고, 곧이어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이하 BLM)’ 운동이 타올랐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미국 정부의 방역 무능력으로 인해 흑인과 히스패닉의 희생자가 속출하자 BLM 운동은 전국으로 번졌고, 남부 인종차별주의자의 동상부터 콜럼버스의 동상에 이르기까지 관련된 동상에 대한 공격과 훼손이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공공기관들은 혹시나 불똥이 튈까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선제적으로 인종주의나 우생학과 관련된 인물의 이름을 건물명이나 기관명에서 내리고 자발적 내부 비판에 나섰다. 동물보호협회의 오타 벵가 전시에 대한 사과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렇다고 BLM 운동에 대한 브롱크스 동물원과 관련 협회의 수세적 대응만으로 사과의 배경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구조적 인종차별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1960년대 민권운동 이래 반(反)인종주의는 시민사회에서 꾸준히 힘을 얻어왔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오타 벵가의 고향 콩고에서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가 천만 명에 달하는 아프리카인들을 학살하고 노예화하고 있을 때, 오타 벵가가 콩고에서 미국으로 끌려와 착취당하고 있었을 때부터 인간 전시의 부당함을 고발하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온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세인트루이스 박람회 오타 벵가가 미국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04년 세인트루이스 박람회장에서였다. 오타 벵가는 콩고 카사이강 인근에서 콩고 자유국 병사들의 공격을 받아 마을은 파괴되고 아내와 아이들을 잃었고, 선교사이자 탐험가, 사업가이자 사무엘 필립스 버너(Samuel Philips Verner)에 이끌려 미국으로 오게 되었다. 오타 벵가는 버너가 인간 전시를 위해 데려온 피그미 중의 한 명이었다. 미국의 눈부신 경제적 성장을 과시하는 장이었던 1876년 필라델피아 박람회와 1893년 시카고 박람회에 이어 세인트루이스 박람회에서는 미국 최초의 인간전시가 열렸다. 인간전시의 기원은 고대 이집트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종족학, 인류학과 결합된 볼거리로서의 근대적 인간전시는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원주민 촌 형태의 전시가 도입되면서 본격적으로 등장해 유럽 주요 도시에서 이미 유행하고 있었다. 인류학자 윌리엄 존 맥기(William John MacGee)는 세인트루이스 박람회 인류학 분과의 책임자로서 대규모 종족 전시를 기획하고 여러 부족을 모으는 역할을 담당했다. 줄루, 발루바, 피그미, 아파치, 에스키모, 아이누, 필리핀 원주민 등이 인간전시에 동원됐고 180만 명이 관람할 정도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피그미를 데려오는 일은 버너가 맡았다. 선교와 탐험을 위해 콩고를 다녀온 경험이 있는 버너는 맥기의 특별대리인으로 임명되어 거액의 돈을 받고 피그미 부족을 모아오고 박람회가 끝나면 돌려보내는 책임을 맡았다. 버너는 피그미인 수십 명뿐만 아니라 전시 무대를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해 원숭이, 앵무새, 종교의례 물품도 가져왔다. 오타 벵가의 일행은 오두막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관람객에서 보여주고, 기념사진에 모델을 서고, 음악대를 조직해 춤과 노래를 선보여 인기를 끌었다. 세인트루이스 박람회의 오타 벵가. 오른쪽 끝에 등을 보이고 있는 인물. “Pygmies from Central Africa dancing on platform in front of the Palace of Manufactures at the 1904 World's Fair on 28 July 1904” by Jessie Tarbox Beals, Missouri Historical Society. 출처: Maurice Tetne, “The 1904 World’s Fair in St. Louis: Between Ethnographic Display and Visual Exclusion of the Other,” TROPOS JOURNAL 42 (2024), p.185.[/caption] 세인트루이스 박람회에서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일은 오타 벵가와 제로니모의 만남이었다. 전설적인 아파치 전사 제로니모도 박람회 인간전시에 동원되어 관람객에게 화살촉을 팔고 있었다. 백인 4명 머리 가죽으로 담요를 짰다고 알려진 제로니모가 깃털 모자를 쓴 채 얌전하게 성조기에 경의를 표하고, 올가미 던져 수소를 잡는 모습을 연기하고, 10년 동안 만나지 못한 딸과 재회하고, 페리스 관람차를 타는 모습은 인디언에 대한 완전한 정복이라는 환상을 불러일으켰다. 피그미 마을에 이웃하고 있었던 제로니모는 피그미의 춤과 노래가 끝나자 오타 벵가에게 화살촉을 건네주고 그의 주위를 원을 그리고 돌며 오랫동안 엄숙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오타는 제로니모의 미소와 노래를 오래 기억했다. 1904년 12월 2일 박람회가 끝나고 콩고로 돌아간 피그미인들 일행 중에 오타 벵가도 있었으나 2년 후 그는 다시 버너와 함께 미국으로 가는 증기선에 올랐다. 버너가 처음 오타 벵가를 만났을 때 버너의 말처럼 노예로 팔릴 처지에서 구해준 것인지 아니면 버너가 노예로 산 것인지 알 수 없듯이, 이번에도 미국으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는 버너의 주장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벨기에 군대의 공격에 가족을 잃었고 재혼한 바트와족 아내마저 뱀에 물려 죽은 상황에서 콩고에도 마음 둘 곳이 없었으리라고 추측해볼 수 있을 뿐이다. 어쨌든 오타는 활과 화살, 침팬지 한 마리 데리고, 버너는 광물, 식물, 방울뱀 녹카를 포함한 동물, 민속공예품으로 가득 찬 수십 개의 나무상자를 싣고 6월에 콩고를 출발해 8월 초 뉴욕에 도착했다. 인간의 동물원 전시 버너는 오타 벵가와 침팬지, 동식물 수집품을 맡길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자연사박물관과 브롱크스 동물원을 방문해 협상을 벌였다. 브롱크스 동물원장 윌리엄 템플 호나데이(Willam Temple Hornaday)가 관심을 보였다. 1899년 11월 개원한 브롱크스 동물원은 워싱턴 동물원과 뉴욕 센트럴파크 동물원보다 몇 배나 더 넓은 규모를 자랑하며 최대한 자연 서식지에 따라 동물 사육한다는 원칙을 세워 세계적 수준의 동물원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초대 원장 호나데이는 동물학대에 반대하고 야생동물 보호와 야생동물 권리를 위한 권리장전을 발표한 인물로 쇼맨십과 연출 능력이 탁월한 인물이었다. 그는 대중의 관심을 집중시킬 좋은 기회로 오타 벵가에게 관심을 보였다. 오타 벵가의 침팬지는 동물원이 구입했고, 오타 벵가는 동물원에 두기로 버너와 협상을 체결했다. 이렇게 해서 오타 벵가의 동물원 전시가 실현되었다. 1906년 10월 9월, 오타 벵가는 동물원에 전시되었다. 안내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한 달 동안 원숭이 우리에 사람을 전시함. 이름: 오타 벵가(아프리카 피그미). 나이: 28세. 키: 150cm. 몸무게: 45kg. 버너 목사가 콩고에서 데리고 옴. 피그미란 성인 남자의 키가 150cm 이하인 인류 집단을 가리키는 용어임. 피그미들은 사냥과 채집으로 살아감. - 뉴욕 브롱크스 동물원 원장.” 원숭이 우리 주변에 동물의 뼈를 흩어놓아 수렵 채집 생활과 식인관습까지도 연상시키는 연출도 했다. 침팬지를 안고 원숭이 우리에 들어가 있는 사람을 보러 관람객이 모여들었다. 피그미는 사람과 원숭이의 중간 존재인가 같은 속류 진화론에서 주장하는 소위 ‘잃어버린 고리’의 증거일지도 모른다는 호기심이 대중을 자극했다. 같은 우리에 살고 있는 오랑우탄 도홍과 교감하는 오타 벵가의 ‘능력’은 문명사회의 인간이 되지 못한 ‘증거’, 원숭이에 더 가깝다는 ‘증표’로 해석되었다. Ota Benga at the Bronx Zoo, with Polly the chimpanzee Verner brought from the Congo, in 1906. 출처: Wikipedia.[/caption] 한 달로 예정된 전시는 단 며칠 만에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원주민 마을 형태의 인간전시는 종족적 특징과 생활양식을 보여주는 인류학 전시라고 변호할 수 있지만, 20세기 초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는 뉴욕에서 동물원에 인간을 전시하는 일은 불편하고 눈살 찌푸리게 하는 일이었다. 호나데이 원장은 피그미와 오랑우탄의 유사성을 연구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동물학과 인류학적 관점에서 유용한 전시라고 변명했지만, 가장 먼저 비판의 목소리를 낸 사람은 맨하튼 칼바리 침례교의 로버트 스튜어트 맥아더(Robert Stuart MacArthur) 목사였다. 그는 교회는 아프리카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인데 오히려 동물원에서는 아프리카인을 야만인으로 만들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어 브루클린 위크스빌에 있는 하워드 유색인 고아원의 책임자 제임스 고든(James Gordon) 목사와 유색인 침례교 목사들이 동물원을 항의 방문을 했고 뉴욕 시장에게도 호소했다. 원래 계획은 다음 해 봄까지고 전시를 계속할 작정이었지만 결국 20일 후 전시는 폐지되었고 안내판도 철거되었다. 감금과 전시로 인한 트라우마로 난폭한 행동을 하는 오타 벵가는 이제 골칫거리가 되었다. 호나데이는 다루기 힘들고 위험해진 오타 벵가를 포기하고 고든 목사의 유색인 고아원으로 보내기로 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버너의 허락이 필요했다. 버너가 호나데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버너는 “만일 그가 너무 신경질적이 된다면, 약간의 진정제를 투여하는 것이 좋을 수 있는데, 나는 아프리카 원주민들 사이에서 때때로 일어나는 황홀한 광란에서 자주 보았다”라고 했다.1) 실제로 진정제를 투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편지 구절은 버너가 오타 벵가의 강제 감금과 착취에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오타 벵가의 ‘친구’, ‘선생’, ‘보호자’로 자처하는 것이 얼마나 기만적인가를 보여준다. 친구라면 소란을 피운 친구에게 진정제를 놓으라고 말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버너는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학살에 눈감고 콩고에서 부와 명성을 추구했던 인물이었고 오타 벵가는 그가 야망을 추구하는 도구였다. 오타 벵가의 친구들 브롱크스 동물원에 전시된 오타를 석방하라는 운동을 벌인 사람들이야말로 오타의 진정한 친구들이다. 오타 벵가의 자유를 위해 싸운 사람들은 브루클린 유색인 고아원의 고든 목사를 비롯해 버지니아주 린치버그 신학교장 그레고리 헤이즈(Gregory Hayes), 교사이자 시인 앤 스펜서(Anne Spencer)였다. 고아원에 잠시 머물렀던 오타 벵가는 린치버그에 정착했다. 헤이즈 교장은 오타 벵가의 후견인이 되어 보살폈고, 스펜서는 자신과 남편이 가꾸는 정원 에단크랄(Edankraal)로 오타 벵가를 초대해 교류하며 위로와 안정을 선물했다. 스펜서는 할렘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여성 시인으로 버지니아에 평생 살면서 흑인 지식인들을 초청하고 흑인 공동체의 구심점 역할을 하며 흑인의 권리를 위해 평생 싸웠다. 스펜서의 부모는 모두 노예 출신으로 노예해방 이후 어린 시절을 보낸 세대였다. 아버지가 세미놀 인디언 혈통이었기 때문에 스펜서는 머리띠를 하고 사슴 가죽 재킷을 걸치는 인디언 복장을 즐겨 입었다. 오타 벵가는 그녀와 우정을 나누며 세인트루이스 박람회에서 만난 아파치 전사 제로니모를 떠올렸다. 1916년 3월, 오타는 권총 자살로 생을 끝냈다. 열 살 난 아들 천시(Chauncey)가 오타가 왜 죽었는지 묻자 스펜서는 “오타 벵가는 자신의 영혼을 아프리카로 보낸 것이란다”라고 말했다.2) 오타 벵가의 시신은 린치버그 구시가지 공동묘지에 묻혔다가 화이트 록 공동묘지로 이장했는데 위치는 정확히 모른다고 한다. 2017년 9월 16일 오타 벵가 메모리얼이 헤이즈 교장의 집 앞에 세워졌다. 길 건너편은 과거 린치버그 신학교가 있던 곳으로 현재 린치버그 대학이다. 메모리얼 제막식에는 콩고 대사를 비롯해 오타 벵가의 새로운 전기 『스펙터클: 오타 벵가의 놀라운 삶(Spectacle: The Astonishing Life of Ota Benga)』을 쓴 뉴욕대 저널리즘학 교수 파멜라 뉴커크(Pamela Newkirk)도 참석했다. 아카이브 자료를 꼼꼼히 읽어 오타 벵가의 삶을 다시 쓰는 과정에서 뉴커크는 벵가와 그의 종족을 무자비하게 착취했던 버너는 친구이자 구원자로, 벵가를 우리에 전시했던 호나데이는 고용주로 탈바꿈하는 과정을 밝혀내고, 진정으로 오타를 위해 싸운 사람들은 기억되지 않았다고 썼다.3) https://www.cipdh.gob.ar/memorias-situadas/en/lugar-de-memoria/marcador-historico-en-honor-a-ota-benga/[/caption] New memorial sets the record straight otory of Ota Benga 출처: https://www.equaltimes.org/new-memorial-sets-the-record?lang=en[/caption] 시인 박제영은 「안녕, 오타 벵가」라는 시에서 인간 전시에 경악하는 우리를 향해 눈을 돌려 곁을 보라고, 이웃의 오타 벵가에게 다정한 인사를 건네야 하지 않겠냐고 일깨운다. 중략) 믿을 수 없다고? 거짓말 같다고? 그렇다면 봐, 저기 오타 벵가가 지나가잖아. 오타 벵가가 웃고 있잖아. 안녕, 오타 벵가!4) 블랙’이 단지 색깔이 아니라 억압받는 모든 사람, 저항하는 모든 사람의 이름일 수 있듯이, ‘오타 벵가’는 인간 전시에 희생된 수백, 수천 명의 이름이며, ‘오타 벵가의 친구들’은 그들에게 ‘안녕’하고 손을 내밀어준 선한 사람들의 이름이다. 오타 벵가를 기억하는 것은 동시에 그의 친구들을 기억하는 것이다. 1) Pamela Newkirk, “Ota Benga in the Archives: Unmaking Myths, Mapping Resistance in the Margins of History,” Journal Of Contemporary African Art 38-39 (2016), p.170. 2) 필립스 버너 브래드포드, 하비 블럼, 손풍삼 옮김, 『오타 벵가: 동물원에 전시된 사람 이야기』 (고려원, 1994) [Phillips Verner Bradford and Harvey Blume, Ota: The Pygmy in the Zoo, New York: St. Martin’s, 1992]. 3) Pamela Newkirk, Spectacle: The astonishing Life of Ota Benga, New York: Amistad, 2015, p.90. 4)박제영, 「안녕, 오타 벵가」, 『안녕, 오타 벵가』 (달아실, 2021). https://blog.naver.com/sotong/222525227501
2024-11-07 | hrights | 조회: 357 | 추천: 7
장경욱 / 인권연대 운영위원 임기 초부터 오로지 대북강경적대정책과 외골수 공안탄압 종북몰이로 지지율 하락을 버텨온 윤석열 정권의 몰락이 급격히 진행 중이다. 몰락이 임박한 현 시점에서도 허세부리기는 끝이 없다. 그 행태에 역겨워 할 정도로 국민적 반발이 현실화되고 있다. 몰락을 자초한 스스로를 돌이켜 볼만도 하건만, 국민을 상대로는 물론 남북관계에서도 자신의 비뚤어진 잘못된 정책을 수습할 생각도 능력도 없다. 대책 없이 밀어붙이다 이제는 죽을 길을 알면서도 끝장을 볼 때까지 가볼 심산인 모양이다. 여전히 ‘반국가세력’ 타령에 민생 해결은 온데 간 데 없이 오로지 상전 외세의 패권 야욕에 앞장서 추종하며 대북적대의 전쟁열 올리기에 들떠있다. 그와 함께 공안풍이 심해지고 있다. 주역이 달라졌다. 임기 초에는 대공수사권 회복을 노린 국가정보원이 주도하던 공안탄압이었다면, 임기 중반의 현 시점에서는 경찰 안보수사대의 활동이 전국적 범위에서 나날이 공안탄압의 도를 더해가고 있다. 연일 압수수색과 소환조사 및 체포를 당하는 국가보안법 양심수들과 부대끼고 있다. 양심수들의 변호인으로 이들을 조력하여 요즘 거의 하루 내내 수사관들과 전화로, 문자로, 서면으로, 조사실 등 현장에서 양심수들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필사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묵비권을 행사하는 양심수들을 조사실로 불러 적대적 태세로 양심수들을 겁박하고 진술거부권을 포기케 시도하며 양심수들과 변호인 사이를 이간질하는 시대착오적 낡은 국가보안법 수사에 맞서 서로 힘을 모아 굳건히 대응하고 있다. 10월 28일 월요일 오후 3시 예정된 소위 ‘창원 간첩단’ 조작 사건의 공판준비기일의 준비를 위해 1박 2일 일정으로 창원에서 27일 일요일 오후 내내 변호인단 및 양심수들과 변론 점검회의를 하였다. 며칠 전부터 감기 기운이 심해 푹 쉬고 28일 오후 재판에 참여하기 위해 저녁을 먹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 공안탄압 저지 및 민주수호 제주대책위원회가 28일 오전 제주경찰청 앞에서 항의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연합뉴스] 28일 오전 일찍부터 핸드폰이 쉴 새 없이 울렸다. 28일 오전 주거지에서 소위 ‘제주 간첩단’ 조작 사건의 불구속 피의자들을 체포한 후 이들 양심수들의 변호인에게 체포 통지 및 피의자신문의 변호인 참여권을 고지한다는 명목으로 수사관들이 전화를 해온 것이다. 수사관들은“피의자신문을 할 예정인데 변호인 참여하실 겁니까”를 계속 물어왔다. 당장 비행기를 타고 제주로 달려가 이 허깨비 같은 저질의 양아치 수사관들을 혼내주고 싶었다. 수사관 전화기로 체포된 세 분의 양심수들과 통화하여 조사실로 강제 인치될 경우 “할 말 없으니 유치장으로 돌려보내라”고 요청하도록 조언을 드리고 다시 수사관들을 바꿔 체포 후에도 변호인의 조력을 받아 일체의 진술거부권 의사를 명백히 하고 있는 피의자들을 상대로 피의자신문을 강행하는 것은 불필요한 절차로 이를 강행하는 것은 오로지 진술강요, 진술거부권 행사를 포기케 하기 위한 직권남용의 범죄행위임을 경고하고 당장 피의자신문절차를 중단하고 조속히 석방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들 제주의 양심수들은 출석 요구서를 받은 즉시 자필 확인서로 일체의 진술거부권을 행사하겠다는 의사를 명백히 밝히며 무용한 피의자신문을 위한 출석요구를 취소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계속 출석 요구서를 수차 남발하며 정당한 이유 없이 불출석할 경우 체포 운운하는 협박을 하였다. 양심수들의 자존심이 이를 도저히 용인할 수 없었다. 이에 2024. 10. 7. 계속적으로 출석 요구서를 보내며 출석을 반복적으로 요청하는 제주경찰청 안보수사대의 행위는 헌법의 기본권인 진술거부권을 포기케 하고 진술을 강요하는 행위로 진술거부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기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쇼악법 국가보안법이 지배하는 야만적 사법체제에서 헌법과 형사소송법의 진술거부권과 적법절차는 무참하게 짓밟혀지고 말았다. 묵비권을 행사한다는 이유로 제주의 양심수들에게 체포영장이 신청, 청구되고 체포영장이 발부되었다. 이들 야만적 사법체제의 법 집행자들인 시대착오적 공안통치의 하수인들에 대한 준엄한 심판이 기필코 내려질 것을 다짐하며 분노가 하늘을 치솟았다. 체포를 당한 제주 지역의 세 분의 양심수들을 위해 제주 변호인단의 동료 변호사들과 전화로 긴급하게 대책을 의논하였다. 유엔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제14조 제3항(g)는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 또는 유죄의 자백을 강요하지 않을 권리를 명문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유엔규약이 보장하고 있는 피의자의 권리를 행사하였다는 이유로 체포를 하는 것은 명백한 자의적 구금이고 더군다나 이들 양심수들의 혐의내용은 유엔 인권이사회가 수십 년 전부터 수차례 폐지를 권고한 국가보안법위반이다. 체포적부심 청구는 아예 배제하였다. 그 이유는 2023년 소위 ‘창원 간첩단’ 조작 사건에서 대한민국 법원은 진술거부권 행사 의사를 명백히 밝히며 경찰의 출석요구에 맞서 싸운 양심수들을 체포, 구속한 선례가 있기 때문이다. 진술거부권을 행사할 것이 명백한 피의자들을 조사실에 대면하여 피의자신문을 하더라도 진술거부권 행사하고 퇴거할 것이므로 이러한 피의자신문절차는 불필요하고 무용한 절차이므로 소환 조사를 취소하고 소환 조사 없이 사건을 처리할 것을 요구한 것은 지극히 정당하고 헌법과 형사소송법, 국제인권규약이 보장하는 권리다. 양심수들의 정당한 권리행사가 출석 불응 및 불응 우려로 인정되어 체포영장이 청구되고 체포영장이 발부되는 현실이다. 이 야만적 파쇼악법과 이를 추종하는 야만적 사법체제에서는 양심과 자존심을 지키고, 진실을 지향하고 정의를 실현할 수가 없음을 다시 한 번 자각하게 된다. 도저히 참을 수 없다. 국가보안법이 전혀 통하지 않는 국제사회를 상대로 양심수들의 싸움판을 펼쳐야 할 때가 되었다. 국제사회의 여론전을 바탕으로 국가보안법에 짓눌려 세뇌된 우물 안 개구리로 갇혀 노예의 신세로 비참한 운명을 이어나가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타파해 나가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래서 체포를 당한 제주 양심수들을 위해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되었다. 10월 28일 오후 3시 창원 재판을 앞둔 상황에서 긴급하게 유엔 인권이사회 산하 ‘자의적 구금에 관한 실무그룹’에 진술거부권 행사를 이유로 자의적으로 체포, 구금한 것은 유엔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제14조 제3항(g)를 위반한 심각한 인권침해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긴급구제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오늘도 국가보안법 양심수들은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체포, 구속의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국가보안법 양심수로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우리 국민 모두의 인권보장을 위해, 국가보안법이 잉태한 국가폭력에 당당히 맞서 민주적 사법질서의 새로운 장을 개척하기 위해 맨 앞장에서 싸우고 있다.
2024-10-30 | hrights | 조회: 411 | 추천: 5
오항녕 / 인권연대 운영위원 나는 역사가 반복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관찰로는 반복되는 역사는 없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오랫동안 역사에서 교훈을 얻으려고 했다. 직업에 불리한 말일 수도 있는데, 사실 역사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다른 방식으로, 예컨대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때 배운 도덕, 공자님이나 부처님, 예수님의 가르침에 이미 다 나와 있다. 따라서 오늘 얘기도 교훈을 얻자는 취지가 아니다.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는 말이다. 굳이 교훈을 얻겠다는 분도 있겠지만, 있다 해도 몇 분 되지 않을 것이다. 1막 때는 조선 19대 임금 숙종 12년(1686), 숙종은 연인 장씨를 위해 궁궐 깊은 곳에 몰래 별당을 지었다. 사헌부에서 중지하라고 요청했지만, 숙종은 잘못 전해 들은 것이라고 둘러댔다. 이어 장씨를 종4품 숙원(淑媛)으로 올렸다. 궁녀로 들어와 왕자나 공주를 낳지도 않았는데 숙원이 되는 것은 특별한 조치였다. 며칠 뒤 장씨의 궁방인 숙원방(淑媛房)에 사패(賜牌, 임금이 내려줌) 노비 100명을 주었다. 홍문관, 사간원도 비판하고 나섰다. 숙종도 뭔가 말을 해야 했다. “역사 기록을 보니, 여자를 총애하다가 정신이 어지러워져서 정치를 망친 자가 많았으므로 내가 늘 한탄하였다. 더구나 나는 종묘사직을 부탁받았으니, 어찌 가볍게 행동하겠는가?” 거짓말을 했다. 2막 성균관 대사성 김창협의 상소가 들어갔다. “사헌부의 논계에 대해 전하께서는 사실과 어긋난다고 하셨는데, 실제로 별당을 지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목재를 구하는 관리가 빈번히 민간에 출입하고 있습니다. 별당을 짓는다면 그건 잘못이라고 지금 전하께서 하교하고는, 안에서는 급하지 않은 공사를 일으키고, 밖으로는 신하의 말을 막아 버리며 변명하시니, 이것은 스스로 속이고 또 남을 속이는 일입니다.” 그의 말은 숙종을 흔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존심 강한 숙종은 화를 낼 수 없었다. “억측이 지나치다”고만 답변했다. 숙종이 숨겼던 화는 그로부터 3년이 지나 터졌다. 1689년,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위하고 장희빈을 왕후로 책봉했을 때였다. 김창협의 아버지이자 영의정을 지낸 김수항은 이런 숙종의 조치를 반대하다 진도로 귀양을 갔다. 이른바 기사사화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숙종의 사약을 받았다. 김수항은 숙종이 여섯 살, 원자였을 때 스승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3년 전 아들 김창협의 비판으로, 임금의 마음에 불평이 생겨 아버지에게 화풀이를 했다고 말했다. [사진① : 드라마로 소환되는 장희빈 이야기. 실은 훨씬 복잡하고 깊은 주제가 숨어 있다. 어쨌거나 장희빈 역으로 기억에 남는 건 김혜수 님이다.] 3막 인현왕후는 숙종 7년(1681), 왕비에 간택되었다. 아버지는 민유중이다. 간택된 뒤 명성왕후(숙종의 어머니)는 민유중의 관직 교체를 금하는 하교를 내렸다. 원래 왕의 장인은 관직을 맡지 못하게 되어 있었는데, 그대로 관직을 맡게 한 것이다. 이유는 그가 군사, 경제 분야 전문가였기 때문이다. 그는 호조판서였을 때부터 형인 민정중과 함께 공납제 개혁에 열심이었다. 백성의 부담을 덜기 위해 공물과 왕실 진상을 줄였다. 삼남(충청, 전라, 경상) 지방을 중심으로 대동법의 성공이 확실해질 무렵, 대동법을 추진했던 정책가들은 공안 개정으로 에너지를 집중하기 시작했던 흐름의 연장이었다. 민유중은 기사환국이 시작되기 이태 전인 숙종 13년(1687)에 세상을 떴다. 딸이 왕비에서 폐출되는 험악한 꼴은 안 본 셈이니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1689년, 줄었던 공물 상납이 되돌려졌다. 호조판서 오시복은 각 전(殿)에 올리는 공상(供上, 왕실 물품 조달), 생일이나 명절에 바치는 선물을 예전대로 회복하자고 건의하여 숙종의 허락을 얻었다. 여기서 말하는 전(殿)이란, 대전, 대비전, 중궁전, 동궁전 등을 말한다. 이때 대비전은 이미 명성왕후가 세상을 떠서 없었고, 원자는 아직 어려서 동궁(세자)으로 책봉되지 않았으므로, 이 조치는 결국 숙종 자신과 왕후가 된 장희빈을 위한 공물의 회복이었다. [사진② : 필자가 Jtbc에서 강의한 숙종 시대 화면. 왕정은 종신제라 잘못하고도 개과천선한 뒤 좋은 일을 할 기회가 있다. 태조 이래 처음 환갑까지 산 숙종은 그런 점에서 행운이자 봐줄 만한 점이었다.] 4막 노양처종모법(奴良妻從母法), 종종 전공자도 오해하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개혁이다. 조선 전기 부모 한쪽이 노비면 자식이 노비가 되는 법[一賤則賤]을 개혁하여, 어머니가 양인이면 아버지가 노비여도 양인이 되는 법이다. 조선 전기 종모법이란 어머니가 노비면 자식도 노비가 되는 것이고, 조선 후기 종모법이란 어머니가 양인이면 자식도 양인이 되는 법이다. 이는 점차 노비를 줄이고 양인을 늘이는 정책이었고, 이는 후일 추세로도 증명되었다. 이 개혁법은 율곡이 발의한 이래, 근 100년 만인 숙종의 아버지 현종 10년(1669) 법제화되었다. 그러나 숙종 4년(1678) 폐지, 숙종 10년 재입법, 문제의 1689년에 다시 폐지되었다. 좌의정 목내선이 숙종에게 폐지를 청하였고, 권대운은 반대했으나 김덕원이 찬성함으로써 숙종이 파하라고 명하였다. 다시 입법이 되는 것은 영조 6년(1730)이고, 《속대전(續大典)》에 수록되었다. 5막 인현왕후를 폐위하던 날 오두인과 박태보 등 86명이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박태보, 오두인 등은 장희빈을 다시 불러들인 것이 인현왕후였다는 점,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가 인현왕후를 아꼈던 일을 상기시키고, “삼년상을 지낸 아내는 내보내지 못한다(與經三年喪, 不去)”는 말까지 거론하며 숙종의 조치를 되돌리려 하였다. 이들에게 돌아온 것은 모진 국문이었다. “압슬로 무릎을 빻고 능장(稜杖 모서리가 있는 곤장)으로 치니 좌우 사람들이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하였고, 살갗과 살점이 떨어지며 뼈마디가 드러났으며, 튀는 피가 숙종의 곤룡포 아래 떨어졌다.” 숙종은 인현왕후의 오빠인 민진후, 민진원이 배후에서 사주했다고 여겨서 이들도 하옥하고 심문했다. 오두인은 의주로 귀양을 가다가 파주에서, 박태보는 진도로 귀양을 가다가 과천에 이르러 국문으로 인한 중상으로 세상을 떴다. 오두인은 숙종의 사돈으로, 현종의 셋째 딸 명안공주 남편인 오태주의 아버지였다. 박태보는 박세당의 아들이다. 송시열은 박태보가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손들에게 ‘박태보’라는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하도록 경계하였다. 송시열도 6월에 전라도 정읍에서 사약을 받았다. 이렇게 숙종은 숱한 인재를 잃었다. 6막 숙종 19년(1693) 봄, 숙종은 태조와 태종의 잠저(潛邸)였던 개성 경덕궁을 찾았고, 글을 썼다. ‘경덕궁비계영경지비(敬德宮丕啓靈慶之碑)’이다. ‘비계영경’이란 ‘왕조를 위대하게 열었다’는 의미이다. 아래는 숙종이 그때 지은 시이다. 지난해 거듭 용이 나르시던 해 만났는데 去年重遇龍飛歲 오늘 흔쾌히 성스러운 조상의 궁 보노라 今日欣瞻聖祖宮 어찌 그리운 추모의 정이 곱절 뿐이랴 奚但羹墻追慕倍 큰 위업 생각하니 내 마음 끝이 없네 緬懷洪烈意無窮 ‘용이 나르시던’이란 우리가 아는 ‘용비어천가’의 그것이다. 1692년이 조선 건국 1392년(임신년)에서 5갑자 되던 해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이듬해 4월,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고 장씨를 희빈으로 다시 낮추었다. 이를 갑술환국이라고 부른다. 숙종은 과오를 반성하고 갑술환국을 단행하기 전에 경덕궁을 찾았다는 것은 국왕으로서 왕조에 대한 책임을 새롭게 인식했다는 뜻이다. 이대로 망해 먹으면 큰일이다 싶었을 것이다. [사진③ : 숙종의 글씨이지만, 숙종의 글씨가 아니기도 하다. 비석 글씨는 숙종 글씨를 놓고 글씨 잘 쓰는 사자관(寫字官) 등이 뽀샵을 해준 것이다.] 사랑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하지만 눈먼 사랑은 죄가 되고 대가가 큰 것 같다. 왕정은 종신제라 잘못했더라도 개과천선한 뒤 좋은 일을 할 기회가 있다. 태조 이래 처음 환갑까지 산 숙종이 그랬다. 1694년 갑술환국 이후, 대동법의 전국적 실시, 강화 농지 간척, 북한산성 구축, 진경 문화의 후원, 단종 복위, 균역법의 출발, 삼각 무역을 통한 경제 안정 등은 그런 증거였다. 그래서 숙종에게는 행운 외에 봐줄 만한 점이 있었다. 그나저나 왜 이번 칼럼 주제로 숙종과 장희빈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오항녕 위원은 현재 전주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24-10-23 | hrights | 조회: 529 | 추천: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