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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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오항녕(전주대학교 역사문화컨텐츠학과 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장발장은행장)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어릴 때 학교에서 상대성이론을 배울 때 선생님은 이런 비유를 들었다. “즐거울 때는 시간이 후딱 지나가고, 괴로울 때는 시간이 겁나게 늦게 간다.” 글쎄 그게 정말 상대성이론을 설명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우리는 지금 무척이나 괴롭고 고통스런 시간을 통과하고 있다. 아직도 그 분 임기가 절반밖에 안 지나갔다. 다음 대통령 선거까진 3년이나 더 기다려야 한다. 진짜 욕 나온다. 무능한 정부, 할 줄 아는 것은 압수수색뿐 2022년 3월 대통령선거 직후 블로그에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착한척하고 무능력한 정부에 너무나도 실망한 끝에 안착하고 능력 있는 체하는 차기 정부를 선택했다.” 지금도 이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물론 한 가지는 수정해야겠다. 위선을 너무나 싫어한 나머지 능력 있는 척 하지도 않는다. 능력 없는 게 뭐가 문제냐고 당당하다. 할 줄 아는 거라곤 압수수색 뿐이다. 국정목표는 ‘이재명 감옥 보내주기’가 전부다. 물론 그마저도 제대로 못한다. 주변에 대통령에게 실망했다는 얘길 하는 분들이 가끔 있다. 이렇게 일을 못할 줄 몰랐다느니, 이 정도일 줄 몰랐다느니 한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이 정부에 전혀 실망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해주곤 한다. 애초에 기대가 없었으니 실망할 것도 없다. 어쨌든 덕분에 검찰이 능력 있는 집단이라는 환상은 확실하게 박살 났다. 김영삼이 통일 기반 마련을 위해 남북한 경제력 격차를 확실하게 줄여놓은 것 못지않은 업적으로 역사에 길이 남지 않을까 싶다. 군대에서 제대한 게 1998년이었다. ‘부산 앞바다에 손가락이 둥둥 떠다닌다’는 썰렁한 농담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외환위기 충격이 너무 고통스러워 김영삼 찍었던 자기 손가락을 잘라서 바다에 버렸다나 뭐라나. 그 뒤로도 대통령 선거를 여러 번 했는데 우리 국민들 손가락이 남아날까 걱정이 살짝 되는 게 사실이다. 공중목욕탕에서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칠냉팔온은 건강에 좋기라도 하지, 왜 우리는 5년마다 열광과 절망을 되풀이해야 하는 것일까. 대통령선거, 정도령 찾기 게임 이쯤에서 우리가 익숙하고 당연하게 여기던 상식을 다시 살펴봐야 하는 것 아닐까 싶다. 문제는 대통령을 잘못 뽑은 게 아니다. 애꿎은 손가락 탓할 게 아니다. 대통령 선거 자체가 문제인 건 아닐까. 현재 한국이 시행하는 5년 단임 대통령제는 비유하자면, 정도령 찾기 게임이다. 대한민국은 5년 내내 <정감록>에서 예언했던 바로 그 ‘정도령’을 찾아 헤맨다. 그리고 5년에 한 번씩 ‘이 분이 그 분이다’ 하며 정도령을 추대한다. 수백만 수천만 신도들이 구름처럼 정도령 주위에 몰려들어 열광한다. 정도령이 대통령이 되면 국격도 올라가고, 도로도 깔아주고 지역에 예산도 내려주실 거라 기대한다. 그렇게 5년마다 한 판 큰 굿이 벌어진다. 정도령은 임금님이 되기도 하고 ‘아름다운 패배’를 하기도 하는데, 물론 전혀 중요하지 않다. 5년 뒤 재림할 새로운 정도령을 기다리는 게 중요하다. 구중궁궐에 숨어있는 임금님을 잘근잘근 씹어주는 건 정도령을 맞기 위한 준비운동 되시겠다. 정도령에게 중요한 자질은 뭐니 뭐니 해도 기득권 정치권을 저주하며 국민들 막힌 속을 뚫어주는 사이다 발언이다. 그냥 열심히 떠들어주고, 가끔 신도들 앞에서 어퍼컷이라도 날려주면 그걸로 족하다. 정도령을 찾아 헤매는 중생들에게 중요한 건 정치를 바꾸고 나라를 개혁하는 게 아니라 그저 현실 정치를 욕하며, ‘나는 너희 같은 더러운 족속이 아니야’는 믿음에 부합하는 증거를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승리한 정도령은 더 이상 정도령이 아니다. 타파해야 할 기득권 정치인일 뿐이다. 어쩌면 정도령이란 프레이저가 쓴 신화연구의 고전 ‘황금가지’에 등장하는, 황금가지를 지키며 존경과 칭송을 누리지만 결국은 살해당할 운명인 신관(神官)일지도 모르겠다. 신도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신관을 죽인 사람을 새 신관으로 영접한다. 신도들에겐 그냥 신관이 있다는 게 중요할 뿐 누가 신관인지는 관심 밖이니까. ‘로미오는 죽어야 한다.’ 새로운 상상력의 세계로 우리는 그렇게 수많은 정도령을 5년짜리 임금님으로 세우고, 5년 동안 우리가 뽑은 정도령을 욕하며 다음 정도령을 기다렸다. 그렇게 우리는 1987년 이후 열광과 절망, 열정과 냉소를 되풀이하며 5년 주기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롤러코스터마저 제대로 작동을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내 질문은 이런 것이다. 오천만의 열망을 단 한 사람에게 투영하는 방식, 오천만의 꿈과 희망을 한 사람에게 몰아주는 건 승률이 너무 낮은 도박 아닐까? 정도령을 제대로 찾는 건 해답이 아니다. 소녀들에게 백마 탄 왕자님이 필요 없듯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정도령이 아니다.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건 정도령을 죽여버리고 새로운 게임의 규칙을 만드는 상상력 아닐까.
2024-12-04 | hrights | 조회: 226 | 추천: 11
정범구/장발장은행장 말 그대로 총체적 난국이다. 세계는 ‘돌아온 장고’ 트럼프의 컴백으로 뒤숭숭한데, 이런 난국에 대처해야 할 우리는 하필이면 지지율 20%를 오르내리는, 역대 가장 형편없는 대통령을 보유하고 있는 중이다. 유력한 대선주자인 야당 대표는 선거법 1심 판결에서 예상치 못한 중형으로 휘청거리면서, 이른바 ‘사법 리스크’라는 게 현실화하고 있다. 당장 김건희 리스크 등으로 코너에 몰려있던 윤석열 정권은 물 만났다는 듯 국면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나라 안팎으로 밀려오는 쓰나미에 관계없이 그 알량한 ‘정권’을 지키자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다. 정말 뭣이 중한디? 이순신을 다시 떠 올리다. 이런 어려운 때를 맞이할 때마다 옛날 일들을 떠올려 본다. 분명 옛날엔 이보다 더 힘든 때가 있었을텐데, 그 때는 그 위기들을 어떻게 넘겼었을까? 어려운 고비마다 싸움의 맨 앞장을 섰던 수많은 열사, 의사, 의병장, 영웅들의 면면을 떠올리다가, 그러다가 다시 이순신을 생각한다. 광화문 매연 속에 오늘도 서 계시는 그 분이 아니라, 명량(울돌목) 해전을 앞두고 온 밤을 하얗게 지새웠을, 마지막을 건 노량의 결전장으로 나가며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을, 그 고독한 이순신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이다. 원균이 다 말아먹은 조선해군. 거북선 3척을 포함해 판옥선 140여 척 등 조선해군이 보유한 모든 선단을 2만 병사와 함께 칠천량 앞바다에 수장시킨 원균은 육지로 올라와 도망치다 적군에 잡혀 죽었다. 칠천량 패전 후 다급해진 선조가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했지만, 돌아온 이순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폐허 속에 남은 달랑 열 두 척의 배였다. 그나마 이 배들은 경상우수사 배설이 칠천량 해전에서 끌고 도망쳐 살아남았던 것들이다. 조선 해군이 사실상 궤멸된 것은 선조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순신더러 수군을 해체하고 권율 휘하의 육군에 합류하라고 하였다. 그때 이순신이 그 유명한 장계를 올린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臣常有十二隻)” 이 대목에서 잠깐 생각한다. 이순신은 바보인가? 아니 이순신이 바보일 리 없다. 자신의 의지에 대한 지극한 신뢰요, 자신이 기반하고 있는 백성에 대한 믿음이며, 죽기를 각오한 자의 단호함이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는 대목이다. 누구보다 먼저 백성을 버리고, 궁을 버리고 도망치기에 바뻤던, 그러면서도 이순신의 의기와 용맹을 시기했던 용렬한 군주 선조 따위가 가늠해 볼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세상을 살면서 가장 억울한 일을 꼽으라면 아마 누명을 쓰는 일일 것이다. 자기가 하지도 않은 일로 모함받고 죄를 뒤집어쓰는 일, 자기가 책임질 일이 아닌데도 그 죄를 덮어쓰는 일. 이렇게 따지면 아마 인류역사상 가장 억울했던 이는 예수 아니었을까? 자기 죄가 아닌, 뭇 세상 사람들의 죄를 대신 덮어쓰고 십자가에 오르신.... 이순신도 자신의 생애에서 두 번씩이나 이런 일을 겪는다. 서른 두 살, 당시로서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무과에 합격하고 발령받아 간 곳이 함경도 북단 녹둔도란 곳이다. 오늘날은 러시아 영토로 되어 있는, 두만강 상의 섬인 녹둔도 둔전 관리 책임자로 있다가 여진족의 기습을 받는다. 격퇴했지만 조선군의 피해도 컸다. 당시 함경북병사 이일은 이 피해 책임을 하급 장교인 이순신에게 덮어씌우고 서울로 압송한다. 국경수비 장교에서 졸지에 사형수가 됐으나 선조는 파직시키고 백의종군하는 것으로 형을 감면한다. 그런데 이 패전은 애초에 이순신이 책임질 일이 아니었다. 국경 방어를 위해 꾸준히 병력증강을 요청했던 이순신의 요구를 무시했던 이일이 책임져야 할 일이었다. 어쨌든 이 일로 계급장 떼이고 백의종군해야 했던 이순신은 다음 해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적장을 사로잡는 등의 공을 세워 다시 관직에 복귀한다. 두 번째 백의종군은 다 아는 바와 같이 원균 등의 모함에 의한 것이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왜군은 부산포 주변의 남해안에 진을 치고 명나라와의 협상을 이어간다. 조정에서는 남해안 일대 왜군을 적극적으로 소탕하라고 이순신에게 명을 내리지만, 병력의 열세, 지형상 불리함 등 여러 가지 여건으로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그를 원균 등이 끝없이 비방, 모함한다. 싸우면 반드시 이겨야 하는 이순신에게 피아의 대비, 지형, 기후 등 승전에 필요한 여건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투에 나가는 것은 무모한 짓이었다. 그러나 의심 많고 속 좁은 선조는 이런 이순신을 항명죄로 몰아 삭탈관직하고 한양으로 압송한다. 이 대목에서 다시 한번 바보 이순신을 원망 해 본다. 그런 임금, 그런 군주에게 끝까지 목숨 바쳐 순종할게 뭐람.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본다. 그가 목숨 바쳐 충성을 바쳤던 것은, 아무리 왕조시대 윤리에 젖은 이순신일지라도, 왕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를 믿고 따르던 백성들, 무능한 임금과 지배층 때문에 전쟁의 참화에 휘말려야 했던 무고한 백성들과 산하 때문 아니었을까? 그가 아니면 조선은 1910년이 아니라 1592년에 진작 망했을지도 모른다. 임진왜란의 진행과정을 보면 이런 내 생각은 더욱 분명해진다. 파죽지세의 일본을 막아섰던 이순신 1592년 5월 23일 (음력 4월 13일) 부산포에 상륙한 일본군 20만은 19일만인 6월 11일(음 5월 2일) 한양에 도달한다. 그 사이에 상주 전투도 치르고, 신립 장군과의 충주 탄금대 전투도 치렀는데 말이다. 그냥 걸어와도 2주일이면 오는 거리를 20만 대군이, 전투까지 치르며 올라왔는데도 19일 밖에 안 걸렸다면 유의미한 조선의 군사적 저항은 거의 없었다고 봐야 한다. 그냥 무풍지대를 일본군이 치고 올라온 것이다. 이런 무풍가도에 시원한 일격을 가한 것이 바로 이순신이다. 1592년 6월 16일, 일본군이 텅 빈 경복궁을 함락시킨 나흘 후, 이순신의 첫 전투인 옥포해전이 벌어진다. 여기서 일본군 배 26척을 침몰시킨다. 전쟁 발발 후 조선군 최초의 승리인 것이다. 같은 날 오후 합포 해전에서 적선 5척 격파, 다음날인 6월 17일 적진포 해전에서 왜선 11척을 침몰시키면서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일본군을 바다에서 멈춰 세웠다. 20여일 후 사천 해전에서 일본 배 13척 격침. 이 전투에 처음으로 거북선을 투입한다. 이틀 후인 7월 10일 당포 해전에서 왜선 21척을 격침, 한 달 뒤인 8월 14일 그 유명한 한산도 해전에서는 적선 47척을 침몰시키고 12척을 나포한다. 임진왜란 3대 대첩의 첫머리를 연 이 한산도 대첩으로 일본은 바다에서는 완전히 우리 수군에 무릎을 꿇고, 이후 서해안을 통해 한양으로 북상하여 보급로를 확보하려던 계획이 완전히 무산된다. 한편 이 전투는 육지에서 연전연패하던 육군에게 승리의 용기를 주고, 각처에서 일어난 의병들에게도 승리의 희망을 안겨주었다. 이런 점에서 한산도 대첩은 임진왜란의 물줄기를 튼 중요한 전투였는데 이것은 오로지 이순신에 의해서만 가능한 승리였다. 그러나 삼도수군통제사직에서 쫓겨나고, 결국 원균의 칠천량 해전 패배 후 처참하게 궤멸된 조선 수군을 다시 물려받아야 했던 그의 심사는 어떠했을까? 특히 칠천량 패전 후, 아무것도 없는 맨손으로, 일본 대군과 다시 일전을 벌여야 했던 그의 속은 어땠을까? 1597년 8월 27일 칠천량 해전 후 꼭 두 달만인 10월 26일, 이순신은 13척의 배로 330척 일본 수군과 명량(울돌목)에서 맞선다. 경상우수사 배설이 칠천량에서 도망가는 바람에 남겨진 배 12척에 한 척이 더 추가된 것이다. 이 전투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 덕에 결국 적선 133 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지만, 전투를 앞둔 그는 얼마나 애간장이 타고 번민했을 것인가? 엄청난 열세에 싸우기를 두려워하는 휘하 장졸들을 어떻게 설득할 것이며, 어떤 전술을 써야 화력과 병력의 열세를 만회할 수 있을 것인지 등등 고민으로 그는 아마 밤을 하얗게 지새웠을 것이다. 그의 고민은 그의 일기에도 잘 나타나 있다. 명량해전 하루 전인 10월 25일(음 9월 15일) ‘난중일기(이석호 옮김)’에 그는 이렇게 썼다. “적은 수의 수군으로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치는 것이 불가하므로 진을 우수영 앞바다로 옮겨 여러 장수들을 모으고 약속하여 가로되, ‘병법에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사람을 두렵게 한다 했음은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 여러 장병들은 살 생각을 하지 말라.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길 때는 군법에 의하여 처벌할 것이다’.” 이른바 필사즉생(必死卽生)이요, 필생즉사(必生卽死)의 각오를 밝힌 것이다. 이순신의 절대고독이 느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자기를 믿고 따르는 부하들에게 ‘살 생각을 하지 말라‘고 주문하는 지휘관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이 시대의 이순신을 기다리며 총체적 난국이다. 위기는 겹겹이 쌓여 있고, 나라 안팎으로는 높은 파도가 몰아칠 것이 예상된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에 대응하고 풀어가야 할 리더십은 최악의 상태에 있다. 책임 있는 사람들 중에 이순신처럼 절박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자신이 쥐고 있는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면서 끝까지 꿀만 빨아먹겠다는 자들만 도처에 득실거린다. 그리하여 더욱 총체적 난국이다. 시대가 영웅을 낳는다고 했다.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고도 했다. 이순신도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이 없었다면 그 존재를 미처 드러내지 못했을 수 있다. 이 사회 어딘가에서 여전히 고군분투하고 있을 이순신들이 있기를 빌어본다.
2024-11-19 | hrights | 조회: 413 | 추천: 25
서보학 / 경희대법학전문대학원 11월에 두 개의 중요한 법원 판결 선고가 예정되어 있다. 11월 15일에는 이재명 민주당 대표에 대한 공직선거법 위반(허위사실공표죄) 사건 1심 선고가, 25일에는 위증교사 사건 1심 선고가 내려질 예정이다. 정부와 여당은 이재명 대표에게 유죄판결이 선고되어 여론의 흐름이 바뀌기를 간절히 기대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1월 7일 대국민담화에서 하나 마나 한 사과를 하고 김건희씨에 대한 변명으로 일관한 것도 법원의 유죄판결을 믿기 때문이리라. 법원의 유죄판결에 기대고 싶은 윤석열 정권 윤 대통령은 취임 이후 줄기차게 이재명 대표를 죽이기 위한 표적수사에 몰두해 왔다. 지난 2년 6개월간 각 검찰청에서 차출되어 투입된 검사만 70여 명, 압수ㆍ수색만 376회로 집계되었고 구속영장 청구도 2회 있었다. 그 결과 이재명 대표는 대장동 배임ㆍ성남FC 뇌물ㆍ백현동 특혜개발ㆍ공직선거법 위반ㆍ위증교사ㆍ대북 송금 대납 건 등으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고 있다. 우리 정치사에서 협치의 대상인 야당 대표를 죽이기 위해 검찰이 이렇게까지 집요하고도 무차별적으로 수사ㆍ기소에 나섰던 때가 있었던가? 기억에 없다. 우리 헌정사에 유례없는 검찰공화국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반면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한 검찰의 수사는 어떠한가? 대통령 부인 김건희씨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는 4년 6개월을 끌다가 지난 10월 17일 불기소처분으로 막을 내렸다. 김건희씨가 단순 공범을 넘어 적극적으로 주가조작에 가담했었다는 증거가 다수 드러났고 다른 공범들은 모두 2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았음에도 검찰은 시간만 끌다가 무혐의로 종결했다. 선진 외국에서는 주가조작이 시장경제질서의 기반인 사회적 신뢰와 공동체 다수의 경제적 이익을 해친다는 이유로 살인죄 이상의 중한 범죄로 다루고 있는데 한국 검찰은 ‘콜검’이라는 비아냥을 들은 굴욕적인 출장 조사 – 이때 검사들은 스마트폰도 압수당했다 - 끝에 김건희씨에게 무릎 꿇고 두 손으로 면죄부를 상납하였다. 그전에 이미 검찰은 김건희씨가 명품 가방을 받는 장면이 온 국민에게 영상으로 공개되었음에도 불기소처분을 내린 바 있다. 그 밖에도 김건희씨는 양평-서울 고속도로 비리, 양평 공흥지구 비리, 국민의힘 공천 개입 등 다양한 비리 의혹을 받고 있는데 이런 혐의에 대해서 검찰은 어떤 수사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다. 이재명 대표 부인 김혜경씨의 법인카드 10만4천 원 사용 의혹에 대해서는 130여 차례 압수수색을 하였던 검찰이 김건희씨의 비리에 대해서는 두 눈 감고 입도 뻥긋하지 못하는 바보가 되어 있다. 비겁함도 이런 비겁함이 없고 후안무치도 이런 후안무치가 없다. 윤석열 대통령이 외쳤던 ‘공정과 상식’은 쓰레기통에 버려진 지 오래다. 압도적 국민 여론은 ‘용산의 개’가 되어 버린 검찰에 대해 사망을 선고하였다. 야당 대표 죽이기에 혈안이 된 검찰 한국 검찰은 수사권, 강제수사를 독점하는 영장청구권, 기소독점권을 한 손에 쥐고 있다. 수사권과 기소권은 각각이 막강한 권한이다. 잘못 사용할 경우 한 사람의 삶을 억울하게 파멸에 이르게 할 수 있고 반대로 거악(巨惡)에 눈을 감을 경우에는 사회 전체를 위기로 몰아갈 수도 있다. 이런 이유로 선진 외국은 수사기관과 기소기관을 분리하여 상호 감시ㆍ견제하게 함으로써 권력의 남용과 부패를 방지하고 있다. 반면 한국 검찰은 수사권과 기소권을 한 손에 쥐고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사건을 조작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갖고 있다. 지난 2년 6개월간 지속된 이재명 대표에 대한 검찰 수사ㆍ기소는 진짜 범죄의 실체가 있어서 수사ㆍ기소한 것인지 아니면 아무 실체가 없는데 수사 과정에서 사건을 조작하고 가짜 시나리오에 근거해 기소한 것인지 외부에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수사와 기소를 검사가 독점하고 있고 외부에서는 구체적인 경과와 내부 정보를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2013년 서울시 공무원 유우성씨 간첩조작 사건에서 검찰이 조작된 증거를 법정에서 사용한 범죄가 드러난 바 있고, 지난 2015년 정치자금법 위반에 대한 유죄가 확정되어 옥살이를 한 한명숙 前 총리에 대해서는 검사가 허위 증언을 교사하는 등 조작에 가까운 검찰 수사가 이루어졌다는 정황이 언론보도로 드러난 바 있다. 지난 제17대 이명박 대선 후보의 BBK 의혹에서는 온 국민이 검사들의 거짓말 농단에 놀아나지 않았던가. 일단 기소가 되면 재판을 통해 진실이 밝혀지기까지는 수년이 걸릴 뿐만 아니라 최종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되더라도 검찰은 법원의 판단이 잘못된 것이라며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 권력에 아부하여 청부 수사ㆍ사건 조작을 한 검사는 승진으로 보답받고 억울한 피해자에게는 악전고투 끝에 상처뿐인 승리가 남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승리는 항상 검찰의 몫이다. 검찰이 수사권과 기소권을 한 손에 쥐고 있는 한 모든 시민, 모든 단체, 모든 기관은 언제든지 검사들의 사건 조작에 희생될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억지 기소와 증거 조작을 통한 사건 만들기 검찰의 사건 조작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분류할 수 있다. ‘억지 기소’와 ‘증거조작을 통한 사건 만들기’이다. 11월 판결선고가 예정된 이재명 대표 두 개의 사건도 이에 해당한다. 첫째, 이재명 지사를 공직선거법 위반(허위사실공표죄)로 기소한 것은 전형적인 억지 기소에 해당한다. 공직선거법 제250조 1항 허위사실공표죄의 허위공표 금지대상은 ‘출생지, 가족관계, 신분, 직업, 경력 등. 재산, 행위, 지지 여부’이다. 다수의 법률전문가들이 지적하였듯이 이재명 대표의 발언인 ‘시장 재직 시절에는 김문기를 몰랐다’라는 것은 ‘인식’ ‘의식’ ‘기억’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위 법문이 금지하고 있는 허위공표 대상에 속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검찰은 “시장 재직시에는 김문기를 몰랐다”고 한 말은 “김문기와 교유(交遊)행위가 없었다”라고 해석해야 하고 이것은 법문에 명시된 ‘행위’에 해당한다면서 억지 주장을 펴고 있다. 인식ㆍ의식ㆍ기억의 영역에 속하는 것을 억지로 ‘행위’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피고인의 유죄를 주장하는 것은 헌법이 금지하고 있는 유추해석에 해당한다. 이점을 법률전문가인 검사들도 명확히 알고 있음에도 억지 기소를 감행한 것이다. 검찰의 억지 기소가 낯선 일은 아니다. 예컨대 이명박 정부 때 검찰의 억지 기소로 사장직에서 쫓겨난 정연주 前 KBS 사장. 당시 정연주 사장은 국세청에 대한 1심 소송에서 승소한 후 법원의 조정 권고를 수용해 항소심을 취하하였다는 이유로 검찰에 의해 배임죄로 기소되었다. 검찰 내부에서도 '법원의 권고에 따른 것이 죄가 될 수 있나'라는 회의적인 시각이 있었지만 검찰은 기소를 감행했다. 이후 정연주 사장은 당연히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렇지만 이명박 정부의 의도대로 정연주는 KBS 사장직에서 물러나야 했고 그에 대한 검찰기소는 언론장악의 시발점이 되었다. 정권의 언론장악에 검찰이 총대를 맨 전형적인 억지기소였다. 둘째, 검찰이 이재명 대표를 위증교사로 기소한 사건은 억지 기소에도 해당하지만 증거 조작(증인의 진술조작)을 통한 사건 만들기에 해당한다. 이재명 대표가 김진성에게 “기억을 되살려 사실대로만 진실을 이야기해달라”고 이야기한 것은 형법 이론적으로 위증교사에 해당하지 않는다. 대법원은 증인이 자기의 기억에 반하는 진술을 하는 경우에만 위증죄가 성립하고 기억나는 대로 진술하는 것은 위증이 아니라는 입장을 명확히 하고 있다. 따라서 “기억을 되살려 기억나는대로 진술해 달라”라는 부탁은 명백히 위증교사에 해당하지 않는다. 이 점을 잘 아는 검찰이 기소한 것은 전형적인 억지기소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지점은 위증을 했다고 자백한 피교사자 김진성의 진술이 검찰의 조사가 진행되면서 계속 바뀌었다는 점이다. 당초 김진성은 사실대로 증언했다면서 위증한 사실을 부인했다가 추후 검찰의 주장과 동일하게 위증을 시인하는 방향으로 진술을 바꾸었다. 그런데 김진성은 사기ㆍ알선수재 등 3건의 범죄혐의로 검찰의 수사를 받았거나 기소되어 있다. 한 건은 경찰이 기소 의견으로 송치했음에도 검찰은 조사 한번 하지 않고 무혐의로 처리했고, 백현동 알선수재 범죄는 다른 공범은 2심 재판이 끝났는데도 아직도 기소 자체를 하지 않고 있다. 이재명 대표를 피고인에 묶어 두고 정치적 타격을 입히려는 검찰 위증죄에 대해서는 진즉 변론이 종결되었음에도 아직 검찰이 구형을 하지 않고 있다. 자신의 범죄로 검찰의 수사와 재판을 받고 있는 김진성은 ‘정치검찰의 거미줄에 걸린 나비’ 신세나 다름없는 처지이다. 검찰이 김진성의 궁박한 상태를 이용해 협박ㆍ공갈ㆍ형량 거래를 하고 그에게 허위진술을 교사했을 것이라는 강한 의심이 드는 지점이다. 검사가 유죄판결을 받아내기 위해 사건관계인에게 허위진술을 종용하는 것은 사건조작이라는 중죄를 범하는 것이다. 최근에도 쌍방울그룹의 ‘대북송금’ 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이화영 前 경기도 평화부지사가 검찰에 의한 위증교사가 있었다는 의혹을 폭로하여 파장이 크게 일었다. 수원지검이 이화영과 쌍방울의 김성태ㆍ안부수 등 공범들을 모두 한 자리에 불러 모아 연어회를 곁들인 술파티를 열어주고 이재명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해 진술을 서로 맞추도록 했다는 사실을 폭로한 것이다. 그동안 검찰의 행태를 생각하면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사실이다. 그 외에도 대장동의 유동규, 백현동의 정바울 등 이재명을 겨냥한 검찰의 수사ㆍ기소에는 어김없이 회유ㆍ협박, 기소 및 형량 거래 의혹이 불거져 있다. 게다가 2022년 개정된 검찰청법에 의하면 위증교사는 검찰의 수사개시권 범위에서 제외되어 있다. 그럼에도 검찰은 하위법령인 시행령을 근거로 수사하고 기소했다. 그런데 법률의 위임범위를 넘어 검찰의 수사권을 확대한 시행령은 명백히 무효이기 때문에 무효인 시행령에 근거해 이루어진 검찰의 수사ㆍ기소는 헌법ㆍ법률에 위반한 기소로서 무효에 해당한다. 검찰이 죽어야 나라가 산다. 검찰이 이재명 대표에 대해 사건조작 및 억지기소를 일삼고 있는 이유는 몇 년간 이재명 대표를 피고인의 지위에 묶어 두고 정치적 타격을 입히려는 데 목적이 있다. 정확하게는 차기 대선출마를 원천 봉쇄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는 것이다. 몇 년 후에 재판 결과가 유ㆍ무죄 어떻게 나오든 현재 검사들에게는 관심 사항이 아니다. 그때쯤이면 이미 정치적 목적은 달성되어 있을 것이고 자신들은 승진과 좋은 보직으로 보답을 받아 개인의 영달을 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권력의 개가 되어 온갖 악행을 일삼고 있는 검찰의 수명은 이제 다하였다. 더이상 개혁이라는 명분 아래 검찰을 고쳐 쓰려 해서는 안 된다. 일단 검찰에 사망선고를 내려야 한다. 시급히 검찰청을 폐지하여야 한다. 기소청을 새로 설립하여 엄격한 재임용 절차를 거쳐 손이 깨끗한 검사들을 채용한 뒤 기소 업무만을 전담하도록 해야 한다. 이제 검찰이 죽어야 나라가 산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검찰을 죽여야 한다. 공직 선거법 위반, 위증 교사 사건 모두 당연히 무죄이다. 이제는 법원의 시간이다. 법리적으로 두 사건은 당연히 무죄이다. 법원이 올바른 판단으로 무죄를 선고하여 검찰의 사건조작과 기소권 남용에 대해 철퇴를 내려 주기를 기대한다. 설혹 1심 재판부가 권력과 검찰의 압력에 굴복해 유죄를 선고하더라도 현명한 국민들의 판단과 지지가 흔들릴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여전히 정의의 여신 디케의 정신을 가진 판사들이 법원에 남아 있음을, 법원이 인권과 정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음을 이번 판결로써 증명해 주기를 희망한다.
2024-11-11 | hrights | 조회: 913 | 추천: 31
염운옥 / 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브롱크스 동물원의 사과 미국 야생동물보호협회는 2020년 7월 30일 과거 뉴욕 브롱크스 동물원이 콩고 음부티 부족 남성 오타 벵가(Ota Benga, ca. 1883-1916)를 감금하고 전시했던 잘못에 대해 사과했다. 당시 협회는 브롱크스 동물원을 운영하는 주체였다. 오타 벵가의 전시는 1906년에 일어난 일이니 114년 만의 사과였다. 크리스티안 샘퍼(Cristián Samper) 회장은 사과 성명문에서 더 일찍 사과하지 못해 후대에 상처를 줬다며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고 했다.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구조적 인종차별에 대해 맞서기 위해 협회가 책임 있는 역할을 다할 것이라는 약속도 했다. 그리고 협회 창립회원으로 동물원 운영과 전시에 깊이 관여했던 매디슨 그랜트(Madison Grant)와 헨리 페어필드 오스본(Henry Fairfield Osborn)의 우생학과 인종주의는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덧붙였다. 그랜트는 미국 자연보호운동의 창시자로 유명하지만 『위대한 인종의 소멸(The Passing of the Great Race)』에서 노르딕 인종의 우수성을 찬양하고 열등한 인종에 대한 우생학적 조치를 주장한 노골적인 백인우월주의자였다. 그랜트와 오스본은 1926년에 미국 우생협회(American Eugenics Society)의 설립을 주도했다. 왜 114년이나 지나서 사과했을까? 오타 벵가에게 닥친 잔혹한 운명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많이 알려져 있기에 그리 새로울 건 없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사과라니 늦어도 너무 늦은 사과가 아닌가? 과거 브롱크스 동물원의 운영 주체 야생동물보호협회의 ‘수상한’ 사과에는 맥락이 있다. 2020년 5월 25일 흑인 시민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가 경찰의 근거 없는 과잉 진압으로 사망했고, 곧이어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이하 BLM)’ 운동이 타올랐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미국 정부의 방역 무능력으로 인해 흑인과 히스패닉의 희생자가 속출하자 BLM 운동은 전국으로 번졌고, 남부 인종차별주의자의 동상부터 콜럼버스의 동상에 이르기까지 관련된 동상에 대한 공격과 훼손이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공공기관들은 혹시나 불똥이 튈까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선제적으로 인종주의나 우생학과 관련된 인물의 이름을 건물명이나 기관명에서 내리고 자발적 내부 비판에 나섰다. 동물보호협회의 오타 벵가 전시에 대한 사과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렇다고 BLM 운동에 대한 브롱크스 동물원과 관련 협회의 수세적 대응만으로 사과의 배경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구조적 인종차별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1960년대 민권운동 이래 반(反)인종주의는 시민사회에서 꾸준히 힘을 얻어왔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오타 벵가의 고향 콩고에서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가 천만 명에 달하는 아프리카인들을 학살하고 노예화하고 있을 때, 오타 벵가가 콩고에서 미국으로 끌려와 착취당하고 있었을 때부터 인간 전시의 부당함을 고발하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온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세인트루이스 박람회 오타 벵가가 미국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04년 세인트루이스 박람회장에서였다. 오타 벵가는 콩고 카사이강 인근에서 콩고 자유국 병사들의 공격을 받아 마을은 파괴되고 아내와 아이들을 잃었고, 선교사이자 탐험가, 사업가이자 사무엘 필립스 버너(Samuel Philips Verner)에 이끌려 미국으로 오게 되었다. 오타 벵가는 버너가 인간 전시를 위해 데려온 피그미 중의 한 명이었다. 미국의 눈부신 경제적 성장을 과시하는 장이었던 1876년 필라델피아 박람회와 1893년 시카고 박람회에 이어 세인트루이스 박람회에서는 미국 최초의 인간전시가 열렸다. 인간전시의 기원은 고대 이집트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종족학, 인류학과 결합된 볼거리로서의 근대적 인간전시는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원주민 촌 형태의 전시가 도입되면서 본격적으로 등장해 유럽 주요 도시에서 이미 유행하고 있었다. 인류학자 윌리엄 존 맥기(William John MacGee)는 세인트루이스 박람회 인류학 분과의 책임자로서 대규모 종족 전시를 기획하고 여러 부족을 모으는 역할을 담당했다. 줄루, 발루바, 피그미, 아파치, 에스키모, 아이누, 필리핀 원주민 등이 인간전시에 동원됐고 180만 명이 관람할 정도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피그미를 데려오는 일은 버너가 맡았다. 선교와 탐험을 위해 콩고를 다녀온 경험이 있는 버너는 맥기의 특별대리인으로 임명되어 거액의 돈을 받고 피그미 부족을 모아오고 박람회가 끝나면 돌려보내는 책임을 맡았다. 버너는 피그미인 수십 명뿐만 아니라 전시 무대를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해 원숭이, 앵무새, 종교의례 물품도 가져왔다. 오타 벵가의 일행은 오두막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관람객에서 보여주고, 기념사진에 모델을 서고, 음악대를 조직해 춤과 노래를 선보여 인기를 끌었다. 세인트루이스 박람회의 오타 벵가. 오른쪽 끝에 등을 보이고 있는 인물. “Pygmies from Central Africa dancing on platform in front of the Palace of Manufactures at the 1904 World's Fair on 28 July 1904” by Jessie Tarbox Beals, Missouri Historical Society. 출처: Maurice Tetne, “The 1904 World’s Fair in St. Louis: Between Ethnographic Display and Visual Exclusion of the Other,” TROPOS JOURNAL 42 (2024), p.185.[/caption] 세인트루이스 박람회에서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일은 오타 벵가와 제로니모의 만남이었다. 전설적인 아파치 전사 제로니모도 박람회 인간전시에 동원되어 관람객에게 화살촉을 팔고 있었다. 백인 4명 머리 가죽으로 담요를 짰다고 알려진 제로니모가 깃털 모자를 쓴 채 얌전하게 성조기에 경의를 표하고, 올가미 던져 수소를 잡는 모습을 연기하고, 10년 동안 만나지 못한 딸과 재회하고, 페리스 관람차를 타는 모습은 인디언에 대한 완전한 정복이라는 환상을 불러일으켰다. 피그미 마을에 이웃하고 있었던 제로니모는 피그미의 춤과 노래가 끝나자 오타 벵가에게 화살촉을 건네주고 그의 주위를 원을 그리고 돌며 오랫동안 엄숙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오타는 제로니모의 미소와 노래를 오래 기억했다. 1904년 12월 2일 박람회가 끝나고 콩고로 돌아간 피그미인들 일행 중에 오타 벵가도 있었으나 2년 후 그는 다시 버너와 함께 미국으로 가는 증기선에 올랐다. 버너가 처음 오타 벵가를 만났을 때 버너의 말처럼 노예로 팔릴 처지에서 구해준 것인지 아니면 버너가 노예로 산 것인지 알 수 없듯이, 이번에도 미국으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는 버너의 주장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벨기에 군대의 공격에 가족을 잃었고 재혼한 바트와족 아내마저 뱀에 물려 죽은 상황에서 콩고에도 마음 둘 곳이 없었으리라고 추측해볼 수 있을 뿐이다. 어쨌든 오타는 활과 화살, 침팬지 한 마리 데리고, 버너는 광물, 식물, 방울뱀 녹카를 포함한 동물, 민속공예품으로 가득 찬 수십 개의 나무상자를 싣고 6월에 콩고를 출발해 8월 초 뉴욕에 도착했다. 인간의 동물원 전시 버너는 오타 벵가와 침팬지, 동식물 수집품을 맡길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자연사박물관과 브롱크스 동물원을 방문해 협상을 벌였다. 브롱크스 동물원장 윌리엄 템플 호나데이(Willam Temple Hornaday)가 관심을 보였다. 1899년 11월 개원한 브롱크스 동물원은 워싱턴 동물원과 뉴욕 센트럴파크 동물원보다 몇 배나 더 넓은 규모를 자랑하며 최대한 자연 서식지에 따라 동물 사육한다는 원칙을 세워 세계적 수준의 동물원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초대 원장 호나데이는 동물학대에 반대하고 야생동물 보호와 야생동물 권리를 위한 권리장전을 발표한 인물로 쇼맨십과 연출 능력이 탁월한 인물이었다. 그는 대중의 관심을 집중시킬 좋은 기회로 오타 벵가에게 관심을 보였다. 오타 벵가의 침팬지는 동물원이 구입했고, 오타 벵가는 동물원에 두기로 버너와 협상을 체결했다. 이렇게 해서 오타 벵가의 동물원 전시가 실현되었다. 1906년 10월 9월, 오타 벵가는 동물원에 전시되었다. 안내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한 달 동안 원숭이 우리에 사람을 전시함. 이름: 오타 벵가(아프리카 피그미). 나이: 28세. 키: 150cm. 몸무게: 45kg. 버너 목사가 콩고에서 데리고 옴. 피그미란 성인 남자의 키가 150cm 이하인 인류 집단을 가리키는 용어임. 피그미들은 사냥과 채집으로 살아감. - 뉴욕 브롱크스 동물원 원장.” 원숭이 우리 주변에 동물의 뼈를 흩어놓아 수렵 채집 생활과 식인관습까지도 연상시키는 연출도 했다. 침팬지를 안고 원숭이 우리에 들어가 있는 사람을 보러 관람객이 모여들었다. 피그미는 사람과 원숭이의 중간 존재인가 같은 속류 진화론에서 주장하는 소위 ‘잃어버린 고리’의 증거일지도 모른다는 호기심이 대중을 자극했다. 같은 우리에 살고 있는 오랑우탄 도홍과 교감하는 오타 벵가의 ‘능력’은 문명사회의 인간이 되지 못한 ‘증거’, 원숭이에 더 가깝다는 ‘증표’로 해석되었다. Ota Benga at the Bronx Zoo, with Polly the chimpanzee Verner brought from the Congo, in 1906. 출처: Wikipedia.[/caption] 한 달로 예정된 전시는 단 며칠 만에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원주민 마을 형태의 인간전시는 종족적 특징과 생활양식을 보여주는 인류학 전시라고 변호할 수 있지만, 20세기 초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는 뉴욕에서 동물원에 인간을 전시하는 일은 불편하고 눈살 찌푸리게 하는 일이었다. 호나데이 원장은 피그미와 오랑우탄의 유사성을 연구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동물학과 인류학적 관점에서 유용한 전시라고 변명했지만, 가장 먼저 비판의 목소리를 낸 사람은 맨하튼 칼바리 침례교의 로버트 스튜어트 맥아더(Robert Stuart MacArthur) 목사였다. 그는 교회는 아프리카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인데 오히려 동물원에서는 아프리카인을 야만인으로 만들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어 브루클린 위크스빌에 있는 하워드 유색인 고아원의 책임자 제임스 고든(James Gordon) 목사와 유색인 침례교 목사들이 동물원을 항의 방문을 했고 뉴욕 시장에게도 호소했다. 원래 계획은 다음 해 봄까지고 전시를 계속할 작정이었지만 결국 20일 후 전시는 폐지되었고 안내판도 철거되었다. 감금과 전시로 인한 트라우마로 난폭한 행동을 하는 오타 벵가는 이제 골칫거리가 되었다. 호나데이는 다루기 힘들고 위험해진 오타 벵가를 포기하고 고든 목사의 유색인 고아원으로 보내기로 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버너의 허락이 필요했다. 버너가 호나데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버너는 “만일 그가 너무 신경질적이 된다면, 약간의 진정제를 투여하는 것이 좋을 수 있는데, 나는 아프리카 원주민들 사이에서 때때로 일어나는 황홀한 광란에서 자주 보았다”라고 했다.1) 실제로 진정제를 투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편지 구절은 버너가 오타 벵가의 강제 감금과 착취에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오타 벵가의 ‘친구’, ‘선생’, ‘보호자’로 자처하는 것이 얼마나 기만적인가를 보여준다. 친구라면 소란을 피운 친구에게 진정제를 놓으라고 말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버너는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학살에 눈감고 콩고에서 부와 명성을 추구했던 인물이었고 오타 벵가는 그가 야망을 추구하는 도구였다. 오타 벵가의 친구들 브롱크스 동물원에 전시된 오타를 석방하라는 운동을 벌인 사람들이야말로 오타의 진정한 친구들이다. 오타 벵가의 자유를 위해 싸운 사람들은 브루클린 유색인 고아원의 고든 목사를 비롯해 버지니아주 린치버그 신학교장 그레고리 헤이즈(Gregory Hayes), 교사이자 시인 앤 스펜서(Anne Spencer)였다. 고아원에 잠시 머물렀던 오타 벵가는 린치버그에 정착했다. 헤이즈 교장은 오타 벵가의 후견인이 되어 보살폈고, 스펜서는 자신과 남편이 가꾸는 정원 에단크랄(Edankraal)로 오타 벵가를 초대해 교류하며 위로와 안정을 선물했다. 스펜서는 할렘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여성 시인으로 버지니아에 평생 살면서 흑인 지식인들을 초청하고 흑인 공동체의 구심점 역할을 하며 흑인의 권리를 위해 평생 싸웠다. 스펜서의 부모는 모두 노예 출신으로 노예해방 이후 어린 시절을 보낸 세대였다. 아버지가 세미놀 인디언 혈통이었기 때문에 스펜서는 머리띠를 하고 사슴 가죽 재킷을 걸치는 인디언 복장을 즐겨 입었다. 오타 벵가는 그녀와 우정을 나누며 세인트루이스 박람회에서 만난 아파치 전사 제로니모를 떠올렸다. 1916년 3월, 오타는 권총 자살로 생을 끝냈다. 열 살 난 아들 천시(Chauncey)가 오타가 왜 죽었는지 묻자 스펜서는 “오타 벵가는 자신의 영혼을 아프리카로 보낸 것이란다”라고 말했다.2) 오타 벵가의 시신은 린치버그 구시가지 공동묘지에 묻혔다가 화이트 록 공동묘지로 이장했는데 위치는 정확히 모른다고 한다. 2017년 9월 16일 오타 벵가 메모리얼이 헤이즈 교장의 집 앞에 세워졌다. 길 건너편은 과거 린치버그 신학교가 있던 곳으로 현재 린치버그 대학이다. 메모리얼 제막식에는 콩고 대사를 비롯해 오타 벵가의 새로운 전기 『스펙터클: 오타 벵가의 놀라운 삶(Spectacle: The Astonishing Life of Ota Benga)』을 쓴 뉴욕대 저널리즘학 교수 파멜라 뉴커크(Pamela Newkirk)도 참석했다. 아카이브 자료를 꼼꼼히 읽어 오타 벵가의 삶을 다시 쓰는 과정에서 뉴커크는 벵가와 그의 종족을 무자비하게 착취했던 버너는 친구이자 구원자로, 벵가를 우리에 전시했던 호나데이는 고용주로 탈바꿈하는 과정을 밝혀내고, 진정으로 오타를 위해 싸운 사람들은 기억되지 않았다고 썼다.3) https://www.cipdh.gob.ar/memorias-situadas/en/lugar-de-memoria/marcador-historico-en-honor-a-ota-benga/[/caption] New memorial sets the record straight otory of Ota Benga 출처: https://www.equaltimes.org/new-memorial-sets-the-record?lang=en[/caption] 시인 박제영은 「안녕, 오타 벵가」라는 시에서 인간 전시에 경악하는 우리를 향해 눈을 돌려 곁을 보라고, 이웃의 오타 벵가에게 다정한 인사를 건네야 하지 않겠냐고 일깨운다. 중략) 믿을 수 없다고? 거짓말 같다고? 그렇다면 봐, 저기 오타 벵가가 지나가잖아. 오타 벵가가 웃고 있잖아. 안녕, 오타 벵가!4) 블랙’이 단지 색깔이 아니라 억압받는 모든 사람, 저항하는 모든 사람의 이름일 수 있듯이, ‘오타 벵가’는 인간 전시에 희생된 수백, 수천 명의 이름이며, ‘오타 벵가의 친구들’은 그들에게 ‘안녕’하고 손을 내밀어준 선한 사람들의 이름이다. 오타 벵가를 기억하는 것은 동시에 그의 친구들을 기억하는 것이다. 1) Pamela Newkirk, “Ota Benga in the Archives: Unmaking Myths, Mapping Resistance in the Margins of History,” Journal Of Contemporary African Art 38-39 (2016), p.170. 2) 필립스 버너 브래드포드, 하비 블럼, 손풍삼 옮김, 『오타 벵가: 동물원에 전시된 사람 이야기』 (고려원, 1994) [Phillips Verner Bradford and Harvey Blume, Ota: The Pygmy in the Zoo, New York: St. Martin’s, 1992]. 3) Pamela Newkirk, Spectacle: The astonishing Life of Ota Benga, New York: Amistad, 2015, p.90. 4)박제영, 「안녕, 오타 벵가」, 『안녕, 오타 벵가』 (달아실, 2021). https://blog.naver.com/sotong/222525227501
2024-11-07 | hrights | 조회: 299 | 추천: 6
장경욱 / 인권연대 운영위원 임기 초부터 오로지 대북강경적대정책과 외골수 공안탄압 종북몰이로 지지율 하락을 버텨온 윤석열 정권의 몰락이 급격히 진행 중이다. 몰락이 임박한 현 시점에서도 허세부리기는 끝이 없다. 그 행태에 역겨워 할 정도로 국민적 반발이 현실화되고 있다. 몰락을 자초한 스스로를 돌이켜 볼만도 하건만, 국민을 상대로는 물론 남북관계에서도 자신의 비뚤어진 잘못된 정책을 수습할 생각도 능력도 없다. 대책 없이 밀어붙이다 이제는 죽을 길을 알면서도 끝장을 볼 때까지 가볼 심산인 모양이다. 여전히 ‘반국가세력’ 타령에 민생 해결은 온데 간 데 없이 오로지 상전 외세의 패권 야욕에 앞장서 추종하며 대북적대의 전쟁열 올리기에 들떠있다. 그와 함께 공안풍이 심해지고 있다. 주역이 달라졌다. 임기 초에는 대공수사권 회복을 노린 국가정보원이 주도하던 공안탄압이었다면, 임기 중반의 현 시점에서는 경찰 안보수사대의 활동이 전국적 범위에서 나날이 공안탄압의 도를 더해가고 있다. 연일 압수수색과 소환조사 및 체포를 당하는 국가보안법 양심수들과 부대끼고 있다. 양심수들의 변호인으로 이들을 조력하여 요즘 거의 하루 내내 수사관들과 전화로, 문자로, 서면으로, 조사실 등 현장에서 양심수들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필사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묵비권을 행사하는 양심수들을 조사실로 불러 적대적 태세로 양심수들을 겁박하고 진술거부권을 포기케 시도하며 양심수들과 변호인 사이를 이간질하는 시대착오적 낡은 국가보안법 수사에 맞서 서로 힘을 모아 굳건히 대응하고 있다. 10월 28일 월요일 오후 3시 예정된 소위 ‘창원 간첩단’ 조작 사건의 공판준비기일의 준비를 위해 1박 2일 일정으로 창원에서 27일 일요일 오후 내내 변호인단 및 양심수들과 변론 점검회의를 하였다. 며칠 전부터 감기 기운이 심해 푹 쉬고 28일 오후 재판에 참여하기 위해 저녁을 먹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 공안탄압 저지 및 민주수호 제주대책위원회가 28일 오전 제주경찰청 앞에서 항의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연합뉴스] 28일 오전 일찍부터 핸드폰이 쉴 새 없이 울렸다. 28일 오전 주거지에서 소위 ‘제주 간첩단’ 조작 사건의 불구속 피의자들을 체포한 후 이들 양심수들의 변호인에게 체포 통지 및 피의자신문의 변호인 참여권을 고지한다는 명목으로 수사관들이 전화를 해온 것이다. 수사관들은“피의자신문을 할 예정인데 변호인 참여하실 겁니까”를 계속 물어왔다. 당장 비행기를 타고 제주로 달려가 이 허깨비 같은 저질의 양아치 수사관들을 혼내주고 싶었다. 수사관 전화기로 체포된 세 분의 양심수들과 통화하여 조사실로 강제 인치될 경우 “할 말 없으니 유치장으로 돌려보내라”고 요청하도록 조언을 드리고 다시 수사관들을 바꿔 체포 후에도 변호인의 조력을 받아 일체의 진술거부권 의사를 명백히 하고 있는 피의자들을 상대로 피의자신문을 강행하는 것은 불필요한 절차로 이를 강행하는 것은 오로지 진술강요, 진술거부권 행사를 포기케 하기 위한 직권남용의 범죄행위임을 경고하고 당장 피의자신문절차를 중단하고 조속히 석방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들 제주의 양심수들은 출석 요구서를 받은 즉시 자필 확인서로 일체의 진술거부권을 행사하겠다는 의사를 명백히 밝히며 무용한 피의자신문을 위한 출석요구를 취소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계속 출석 요구서를 수차 남발하며 정당한 이유 없이 불출석할 경우 체포 운운하는 협박을 하였다. 양심수들의 자존심이 이를 도저히 용인할 수 없었다. 이에 2024. 10. 7. 계속적으로 출석 요구서를 보내며 출석을 반복적으로 요청하는 제주경찰청 안보수사대의 행위는 헌법의 기본권인 진술거부권을 포기케 하고 진술을 강요하는 행위로 진술거부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기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쇼악법 국가보안법이 지배하는 야만적 사법체제에서 헌법과 형사소송법의 진술거부권과 적법절차는 무참하게 짓밟혀지고 말았다. 묵비권을 행사한다는 이유로 제주의 양심수들에게 체포영장이 신청, 청구되고 체포영장이 발부되었다. 이들 야만적 사법체제의 법 집행자들인 시대착오적 공안통치의 하수인들에 대한 준엄한 심판이 기필코 내려질 것을 다짐하며 분노가 하늘을 치솟았다. 체포를 당한 제주 지역의 세 분의 양심수들을 위해 제주 변호인단의 동료 변호사들과 전화로 긴급하게 대책을 의논하였다. 유엔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제14조 제3항(g)는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 또는 유죄의 자백을 강요하지 않을 권리를 명문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유엔규약이 보장하고 있는 피의자의 권리를 행사하였다는 이유로 체포를 하는 것은 명백한 자의적 구금이고 더군다나 이들 양심수들의 혐의내용은 유엔 인권이사회가 수십 년 전부터 수차례 폐지를 권고한 국가보안법위반이다. 체포적부심 청구는 아예 배제하였다. 그 이유는 2023년 소위 ‘창원 간첩단’ 조작 사건에서 대한민국 법원은 진술거부권 행사 의사를 명백히 밝히며 경찰의 출석요구에 맞서 싸운 양심수들을 체포, 구속한 선례가 있기 때문이다. 진술거부권을 행사할 것이 명백한 피의자들을 조사실에 대면하여 피의자신문을 하더라도 진술거부권 행사하고 퇴거할 것이므로 이러한 피의자신문절차는 불필요하고 무용한 절차이므로 소환 조사를 취소하고 소환 조사 없이 사건을 처리할 것을 요구한 것은 지극히 정당하고 헌법과 형사소송법, 국제인권규약이 보장하는 권리다. 양심수들의 정당한 권리행사가 출석 불응 및 불응 우려로 인정되어 체포영장이 청구되고 체포영장이 발부되는 현실이다. 이 야만적 파쇼악법과 이를 추종하는 야만적 사법체제에서는 양심과 자존심을 지키고, 진실을 지향하고 정의를 실현할 수가 없음을 다시 한 번 자각하게 된다. 도저히 참을 수 없다. 국가보안법이 전혀 통하지 않는 국제사회를 상대로 양심수들의 싸움판을 펼쳐야 할 때가 되었다. 국제사회의 여론전을 바탕으로 국가보안법에 짓눌려 세뇌된 우물 안 개구리로 갇혀 노예의 신세로 비참한 운명을 이어나가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타파해 나가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래서 체포를 당한 제주 양심수들을 위해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되었다. 10월 28일 오후 3시 창원 재판을 앞둔 상황에서 긴급하게 유엔 인권이사회 산하 ‘자의적 구금에 관한 실무그룹’에 진술거부권 행사를 이유로 자의적으로 체포, 구금한 것은 유엔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제14조 제3항(g)를 위반한 심각한 인권침해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긴급구제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오늘도 국가보안법 양심수들은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체포, 구속의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국가보안법 양심수로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우리 국민 모두의 인권보장을 위해, 국가보안법이 잉태한 국가폭력에 당당히 맞서 민주적 사법질서의 새로운 장을 개척하기 위해 맨 앞장에서 싸우고 있다.
2024-10-30 | hrights | 조회: 367 | 추천: 5
오항녕 / 인권연대 운영위원 나는 역사가 반복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관찰로는 반복되는 역사는 없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오랫동안 역사에서 교훈을 얻으려고 했다. 직업에 불리한 말일 수도 있는데, 사실 역사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다른 방식으로, 예컨대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때 배운 도덕, 공자님이나 부처님, 예수님의 가르침에 이미 다 나와 있다. 따라서 오늘 얘기도 교훈을 얻자는 취지가 아니다.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는 말이다. 굳이 교훈을 얻겠다는 분도 있겠지만, 있다 해도 몇 분 되지 않을 것이다. 1막 때는 조선 19대 임금 숙종 12년(1686), 숙종은 연인 장씨를 위해 궁궐 깊은 곳에 몰래 별당을 지었다. 사헌부에서 중지하라고 요청했지만, 숙종은 잘못 전해 들은 것이라고 둘러댔다. 이어 장씨를 종4품 숙원(淑媛)으로 올렸다. 궁녀로 들어와 왕자나 공주를 낳지도 않았는데 숙원이 되는 것은 특별한 조치였다. 며칠 뒤 장씨의 궁방인 숙원방(淑媛房)에 사패(賜牌, 임금이 내려줌) 노비 100명을 주었다. 홍문관, 사간원도 비판하고 나섰다. 숙종도 뭔가 말을 해야 했다. “역사 기록을 보니, 여자를 총애하다가 정신이 어지러워져서 정치를 망친 자가 많았으므로 내가 늘 한탄하였다. 더구나 나는 종묘사직을 부탁받았으니, 어찌 가볍게 행동하겠는가?” 거짓말을 했다. 2막 성균관 대사성 김창협의 상소가 들어갔다. “사헌부의 논계에 대해 전하께서는 사실과 어긋난다고 하셨는데, 실제로 별당을 지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목재를 구하는 관리가 빈번히 민간에 출입하고 있습니다. 별당을 짓는다면 그건 잘못이라고 지금 전하께서 하교하고는, 안에서는 급하지 않은 공사를 일으키고, 밖으로는 신하의 말을 막아 버리며 변명하시니, 이것은 스스로 속이고 또 남을 속이는 일입니다.” 그의 말은 숙종을 흔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존심 강한 숙종은 화를 낼 수 없었다. “억측이 지나치다”고만 답변했다. 숙종이 숨겼던 화는 그로부터 3년이 지나 터졌다. 1689년,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위하고 장희빈을 왕후로 책봉했을 때였다. 김창협의 아버지이자 영의정을 지낸 김수항은 이런 숙종의 조치를 반대하다 진도로 귀양을 갔다. 이른바 기사사화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숙종의 사약을 받았다. 김수항은 숙종이 여섯 살, 원자였을 때 스승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3년 전 아들 김창협의 비판으로, 임금의 마음에 불평이 생겨 아버지에게 화풀이를 했다고 말했다. [사진① : 드라마로 소환되는 장희빈 이야기. 실은 훨씬 복잡하고 깊은 주제가 숨어 있다. 어쨌거나 장희빈 역으로 기억에 남는 건 김혜수 님이다.] 3막 인현왕후는 숙종 7년(1681), 왕비에 간택되었다. 아버지는 민유중이다. 간택된 뒤 명성왕후(숙종의 어머니)는 민유중의 관직 교체를 금하는 하교를 내렸다. 원래 왕의 장인은 관직을 맡지 못하게 되어 있었는데, 그대로 관직을 맡게 한 것이다. 이유는 그가 군사, 경제 분야 전문가였기 때문이다. 그는 호조판서였을 때부터 형인 민정중과 함께 공납제 개혁에 열심이었다. 백성의 부담을 덜기 위해 공물과 왕실 진상을 줄였다. 삼남(충청, 전라, 경상) 지방을 중심으로 대동법의 성공이 확실해질 무렵, 대동법을 추진했던 정책가들은 공안 개정으로 에너지를 집중하기 시작했던 흐름의 연장이었다. 민유중은 기사환국이 시작되기 이태 전인 숙종 13년(1687)에 세상을 떴다. 딸이 왕비에서 폐출되는 험악한 꼴은 안 본 셈이니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1689년, 줄었던 공물 상납이 되돌려졌다. 호조판서 오시복은 각 전(殿)에 올리는 공상(供上, 왕실 물품 조달), 생일이나 명절에 바치는 선물을 예전대로 회복하자고 건의하여 숙종의 허락을 얻었다. 여기서 말하는 전(殿)이란, 대전, 대비전, 중궁전, 동궁전 등을 말한다. 이때 대비전은 이미 명성왕후가 세상을 떠서 없었고, 원자는 아직 어려서 동궁(세자)으로 책봉되지 않았으므로, 이 조치는 결국 숙종 자신과 왕후가 된 장희빈을 위한 공물의 회복이었다. [사진② : 필자가 Jtbc에서 강의한 숙종 시대 화면. 왕정은 종신제라 잘못하고도 개과천선한 뒤 좋은 일을 할 기회가 있다. 태조 이래 처음 환갑까지 산 숙종은 그런 점에서 행운이자 봐줄 만한 점이었다.] 4막 노양처종모법(奴良妻從母法), 종종 전공자도 오해하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개혁이다. 조선 전기 부모 한쪽이 노비면 자식이 노비가 되는 법[一賤則賤]을 개혁하여, 어머니가 양인이면 아버지가 노비여도 양인이 되는 법이다. 조선 전기 종모법이란 어머니가 노비면 자식도 노비가 되는 것이고, 조선 후기 종모법이란 어머니가 양인이면 자식도 양인이 되는 법이다. 이는 점차 노비를 줄이고 양인을 늘이는 정책이었고, 이는 후일 추세로도 증명되었다. 이 개혁법은 율곡이 발의한 이래, 근 100년 만인 숙종의 아버지 현종 10년(1669) 법제화되었다. 그러나 숙종 4년(1678) 폐지, 숙종 10년 재입법, 문제의 1689년에 다시 폐지되었다. 좌의정 목내선이 숙종에게 폐지를 청하였고, 권대운은 반대했으나 김덕원이 찬성함으로써 숙종이 파하라고 명하였다. 다시 입법이 되는 것은 영조 6년(1730)이고, 《속대전(續大典)》에 수록되었다. 5막 인현왕후를 폐위하던 날 오두인과 박태보 등 86명이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박태보, 오두인 등은 장희빈을 다시 불러들인 것이 인현왕후였다는 점,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가 인현왕후를 아꼈던 일을 상기시키고, “삼년상을 지낸 아내는 내보내지 못한다(與經三年喪, 不去)”는 말까지 거론하며 숙종의 조치를 되돌리려 하였다. 이들에게 돌아온 것은 모진 국문이었다. “압슬로 무릎을 빻고 능장(稜杖 모서리가 있는 곤장)으로 치니 좌우 사람들이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하였고, 살갗과 살점이 떨어지며 뼈마디가 드러났으며, 튀는 피가 숙종의 곤룡포 아래 떨어졌다.” 숙종은 인현왕후의 오빠인 민진후, 민진원이 배후에서 사주했다고 여겨서 이들도 하옥하고 심문했다. 오두인은 의주로 귀양을 가다가 파주에서, 박태보는 진도로 귀양을 가다가 과천에 이르러 국문으로 인한 중상으로 세상을 떴다. 오두인은 숙종의 사돈으로, 현종의 셋째 딸 명안공주 남편인 오태주의 아버지였다. 박태보는 박세당의 아들이다. 송시열은 박태보가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손들에게 ‘박태보’라는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하도록 경계하였다. 송시열도 6월에 전라도 정읍에서 사약을 받았다. 이렇게 숙종은 숱한 인재를 잃었다. 6막 숙종 19년(1693) 봄, 숙종은 태조와 태종의 잠저(潛邸)였던 개성 경덕궁을 찾았고, 글을 썼다. ‘경덕궁비계영경지비(敬德宮丕啓靈慶之碑)’이다. ‘비계영경’이란 ‘왕조를 위대하게 열었다’는 의미이다. 아래는 숙종이 그때 지은 시이다. 지난해 거듭 용이 나르시던 해 만났는데 去年重遇龍飛歲 오늘 흔쾌히 성스러운 조상의 궁 보노라 今日欣瞻聖祖宮 어찌 그리운 추모의 정이 곱절 뿐이랴 奚但羹墻追慕倍 큰 위업 생각하니 내 마음 끝이 없네 緬懷洪烈意無窮 ‘용이 나르시던’이란 우리가 아는 ‘용비어천가’의 그것이다. 1692년이 조선 건국 1392년(임신년)에서 5갑자 되던 해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이듬해 4월,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고 장씨를 희빈으로 다시 낮추었다. 이를 갑술환국이라고 부른다. 숙종은 과오를 반성하고 갑술환국을 단행하기 전에 경덕궁을 찾았다는 것은 국왕으로서 왕조에 대한 책임을 새롭게 인식했다는 뜻이다. 이대로 망해 먹으면 큰일이다 싶었을 것이다. [사진③ : 숙종의 글씨이지만, 숙종의 글씨가 아니기도 하다. 비석 글씨는 숙종 글씨를 놓고 글씨 잘 쓰는 사자관(寫字官) 등이 뽀샵을 해준 것이다.] 사랑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하지만 눈먼 사랑은 죄가 되고 대가가 큰 것 같다. 왕정은 종신제라 잘못했더라도 개과천선한 뒤 좋은 일을 할 기회가 있다. 태조 이래 처음 환갑까지 산 숙종이 그랬다. 1694년 갑술환국 이후, 대동법의 전국적 실시, 강화 농지 간척, 북한산성 구축, 진경 문화의 후원, 단종 복위, 균역법의 출발, 삼각 무역을 통한 경제 안정 등은 그런 증거였다. 그래서 숙종에게는 행운 외에 봐줄 만한 점이 있었다. 그나저나 왜 이번 칼럼 주제로 숙종과 장희빈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오항녕 위원은 현재 전주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24-10-23 | hrights | 조회: 503 | 추천: 14
이찬수 / 인권연대 운영위원 팔레스타인에 대한 ‘땅문서’? 이스라엘-가자 전쟁이 확대되고 있다. 이스라엘은 시아파 무장 정파인 헤즈볼라가 가자의 하마스를 지원한다며 헤즈볼라의 거점인 레바논까지 공격하기 시작했고, 헤즈볼라를 지원하는 중동 지역의 맹주 이란이 이스라엘과 직접 전쟁을 벌일 가능성마저 커지고 있다. 이른바 중동발 3차대전이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이런 불행하고 참혹한 일은 왜 벌어지게 된 것일까. 여러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전쟁의 배후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 정점에서 유대인의 자기 정당화의 역사와 만난다. 일반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이 자기 조상 적부터 살던 땅이기에 현재 자신들이 거주하는 것은 물론 후손에까지 두고두고 물려주어야 할 땅이라고 믿는다. 유대인들은 대체로 이런 사실을 당연시한다. 나아가 일부 유대인은 단순히 역사적 사실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경전인 ‘타나크’(기독교의 구약성경에 해당)1)에 기반해 팔레스타인에 대한 토지소유권이 자신들에게 있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팔레스타인은 유대인을 위해 준비된 ‘빈 땅’이었고, 타나크는 그 빈 땅에 대한 일종의 ‘땅문서’처럼 간주하기도 했다. 물론 팔레스타인은 오랫동안 팔레스타인의 땅이었다. 거기가 빈 땅이었던 적은 없을뿐더러 일부 유대인의 주장과 달리 타나크는 실제로 땅문서가 될 수도 없었다. 만에 하나 그럴 가치가 있다고 해도, 그 땅이 어디서부터 어디를 의미하는지 경계를 측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에게는 그냥 그렇게 생각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더욱이 타나크는 일반 유대인들에게 익숙한 책이 아니었다. 일상적으로 사용된 유대교 문헌은 ‘탈무드’였고2), 타나크는 탈무드의 해설에 비추어야 읽히고 이해될 수 있는, 독립적이지 못한 문헌이었다. 타나크 중에 토라(모세오경) 정도가 그 줄거리와 상관없이 회당에서 일부 선택적으로 낭송되는 문헌으로 쓰이곤 했다. 구성된 민족의식 그러다가 20세기 전후해 타나크의 영향력이 커졌다. 자신들의 땅을 회복하려는 이들을 중심으로 타나크는 유대인의 단일한 기원을 강조하고 유대 민족주의를 강화하는 데 적절히 활용되었다. 이스라엘이 마치 수천 년 동안 단일한 민족의식 내지는 민족적 동질성을 유지해 오기라도 한 듯이,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들의 기억을 재구성했다. 타나크를 통해 오늘의 유대인들이 동일한 조상들과 시공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장대한 서사가 구성되었고, 팔레스타인은 자신들을 위해 오랫동안 준비되어 있던 ‘빈 땅’이라는 이미지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서사와 이미지가 이스라엘의 ‘자기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심 요소’가 되었다. 이스라엘이 들어오기 이전부터 팔레스타인에는 이미 사람들이 살고 있었지만, 이들은 유대인이 생각하는 민족적 정체성이나 역사의식을 공유하지 않기에 자신들의 땅인 팔레스타인에 살 자격이 없는 이들이라고 여겼다. 물론 이런 태도와 인식은 가공된 대중적 정서였다. 일반 유대인들은 역사적 사실이나 명백한 국제정치적 논리보다는 현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고 자연스럽게 정당화하는 흐름에 익숙했다. 이런 분위기가 크다 보니, 교수나 전문 연구자들도 대중적 정서에 도전하는 연구를 잘 하지 못했다. 했다 해도 대중은 물론 대중의 정서를 이용하고 소비하며 사는 정치인에게는 거의 인용되지 않았다. 이스라엘 역사학계는 자신들의 역사를 일반 역사적 사실이나 중동의 역사적 흐름과 단절시킨 채 자기만의 자기중심적인 연구를 수행해 왔다. 그들에게 ‘유대인’은 ‘이천 년 전에 추방된 민족의 후손’이었다. 이것을 거부하면 반유대주의자로 취급받았다. 신화를 역사로 만들기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시오니즘이 발흥하기 이전 유럽에서는 “모든 유대인들이 저들만의 기원을 가진 하나의 민족에 속한다”고 주장하면 당장 반유대주의자로 치부되던 시절도 있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유럽 및 세계 각지에 섞여 살며 얼굴 생김새도 천차만별이었던 유대인의 다양성을 무시하는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48년 이스라엘을 건국하고 난 뒤에는 상황이 반대 방향으로 흘렀다. 유대인들은 전 세계 유대인들을 하나의 민족처럼 여기면서, 이스라엘이야말로 유대인의 국가라는 사실을 고집해 왔다. 이러한 민족주의 혹은 민족의식은 근대에 들어 발명되고 구성된 개념이지만, 유대인들은 타나크의 이야기들을 근거로 강력한 민족주의적 신화를 재구성해 냈다. 유대 민족주의는 사실상 발명품이었지만, 이런 주장은 유대인 사회에서는 공론화되기 힘들었다. 급기야 ‘이스라엘 국가수립선언문’(1948)에서는 이렇게 선언했다. “자기 땅에서 강제로 추방된 이후에도 유대 민중은 디아스포라 시절 내내 신앙을 지켰고 그곳으로 돌아가려는 기도와 희망을 멈추지 않았다. 그곳으로 돌아가 정치적 자유를 회복하겠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출처: 이스라엘 외교부 홈페이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던 슈무엘 아그논(Shmuel Agnon)은 수상 수락 연설(1966)에서 이렇게 말했다: “로마의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이스라엘이 그 땅에서 추방당한 역사적 재난의 결과, 저는 유배된 도시들 중 한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저는 언제나 저 자신을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고향’, ‘만들어진 유대인’의 자기정당화의 정서는 강력했다. 그렇게 ‘신화’는 ‘역사’가 되었다. ‘역사가 된 신화’가 오늘날 이스라엘이 벌이는 폭력적 전쟁을 자기중심적으로 정당화시키는 강력한 동력이 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의 사고방식은 오로지 유대인만의 것이라는 사실을 세계는 물론 유대인들에게도 알리기 위한 외부인들의 노력이 필요한 때다. 1)타나크(Tanakh)는 유대교 경전이며 기독교의 구약성경에 해당한다. 토라(Torah, 모세오경), 느비임(Neviim, 예언서), 케투빔(Ketuvim, 성문서)의 약자이다. 2)유대인의 반로마전쟁(66-73년) 당시 유대교 랍비인 요하난 벤 자카이는 민족의 정치적 독립보다는 정신적 보존이 급선무라 생각하고 지중해 인접 지역인 야브네로 피신했다. 거기서 제자단을 이끌며 유대교의 교리와 율법의 체계화를 도모했다. 일관성 없이 흩어져 있던 유대교 경전들을 ‘토라’, ‘느비임’, ‘케투빔’으로 분류하면서 본격적인 경전 편찬 작업을 했다. 제자단은 기본의 구전 율법과 주석서들을 한데 모아 ‘미쉬나’를 편찬했다. ‘반복해서 배우는 구전 전통’이라는 뜻의 미쉬나는 모두 4천여 개 항목으로 구성된 랍비들의 율법 조항 집대성문이다. 바빌로니아에 흩어져 살던 랍비들은 미쉬나의 가르침을 자신들의 상황에 맞게 재해석했고, 미쉬나에 기록되지 않은 역사, 종교, 도덕에 관한 가르침을 다시 집대성했다. 6세기 초에 이르러 완성된 이 문헌을 ‘탈무드’라고 한다. 유대인의 신앙과 실천의 지침이 되는 모든 사항들이 백과사전처럼 집약되어 있다. 대부분의 유대인에게는 이 탈무드가 실질적인 경전의 역할을 해왔다고 할 수 있다. ‘공식적’ 경전인 타나크는 탈무드의 해설에 비추어서만 읽을 수 있는, 독립적이지 못한 문헌이었다. 이찬수 위원은 전 보훈교육연구원장입니다.
2024-10-15 | hrights | 조회: 993 | 추천: 8
강국진 / 인권연대 운영위원 일요일 아침 광화문역에서 밖으로 나오니 예배를 한다며 엄청나게 많은 엠프를 설치한 무대가 가장 먼저 눈에 보인다. 예배가 시작되면, 시끄럽다. 무슨 얘길 하는지 잘 들리질 않는다. 뭔가 떠든다는 건 알겠는데 목소리는 꽥꽥거리고 동시통역사까지 불러서 함께 떠들어대니 뭔 소리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하긴,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는 게 조금이라도 덜 속 터지긴 하겠다. 고래고래 몇 시간 동안 쉴새 없이 떠드는 통에 하늘에 계신 (저들의) 아버지는 안식일에 제대로 쉬지도 못하겠구나. 안쓰럽다. 역시 자식 농사는 잘 짓고 볼 일이다.   광화문 사거리에서 횡단보도를 지날 때는 시도 때도 없이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다’고 사람들을 협박하며 대단한 비밀이라도 알려준다는 듯 개똥철학을 늘어놓는 분들 때문에 정신이 혼미하다. 목소리는 또 얼마나 크고 카랑카랑한지 모른다. 자기가 좋아하는 예수 자랑만 하면 그나마 낫겠는데 가끔은 자기가 싫어하는 석가모니 흉을 보는 것도 민망한 노릇이다. 괜히 귀라도 후비적거리며 신호등만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신호가 바뀌면 재빨리 지옥의 손길에서 벗어나는 게 상책이다.   청계광장에선 몇 년째 코로나19 백신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수천명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며 농성하는 큼지막한 천막을 지나야 한다. 코로나19 백신을 맞은 사람이 한국에서만 수천만명인데 백신 때문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주장하는 게 의아한 노릇이다. 한켠에는 백신 자체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는 얘기도 등장하는데 몇 년 전에 크게 논란이 됐던 ‘안아키’(약 안 쓰고 아이 키우기)를 떠올리게 한다.   청계광장을 지나 파이낸스센터 앞을 지날 때는 수십미터에 걸쳐 사진과 여러 나라 국기가 펄럭인다. 그 많은 국기들이 비를 맞아 쭈글쭈글해진 걸 본 적도 여러번이다. 남의 나라에서 풍찬노숙하느라 참 고생이 많다. 사진들이란 한국전쟁 당시 미군과 유엔군, 이승만의 영웅적인 활약상과 조선인민군을 비롯한 공산군의 잔악상 뭐 그런 내용이다. 새로울 건 하나도 없다. 이미 초중고에서 지겹도록 배웠던 것들이다. 최신연구성과나 최신 발굴 사진은 물론 전혀 없다. 이 사진들 무리는 박근혜 탄핵 이후 조용히 사라졌다가 5년만에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3년째 저 자리에 그대로 있다. 굳이 말한다면 통행을 방해하는 야외전시인데, 관공서 허가를 안 받았다는데 내 돈 500원 걸겠다.   퇴근하러 광화문역을 향하면 어김없이 결기로 가득찬 무리와 마주친다. 마이크를 잡은 사람은 자신들이 떠받드는 목사 정명석을 위해 목소리를 높인다. 정명석은 억울하다, 정명석을 음해하는 방송은 허위 조작이니 믿지 마라, 정명석은 훌륭한 분이다 뭐 그런 얘길 끊임없이 주절주절 한다. 전부 듣고 싶지 않은 얘기다. 우리나라 대다수 목사들이 성경 말씀을 제대로 해석할 줄도 모른다거나 제대로 해석해주질 않는다는 얘기도 하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관심은 없다. 들리는 건 어쩔 수 없더라도 눈길이라도 피해야겠다. 일부러 고개를 돌려 눈길을 마주치지 않으려 한다. 억지로 전단지를 쥐어줄까 싶어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는 것도 잊으면 안된다.    그 모든 소음 중에서도 압권은 전투기 소음이다. 요즘 국군의날을 기념해 각종 첨단무기를 동원한 시가행진을 한다고 공군 전투기들이 광화문광장 주변을 날아다닌다. 전투기 엔진 소리에 비하면 목사들 고래고래는 갓난아기들 잠자는 소리에 불과하다. 국군의날 시가행진은 1956년부터 1978년까진 해마다 했지만 1979년부터 1990년까진 3년에 한번씩, 1993년부터는 5년에 한 번씩 열렸다. 2013년에 하고 나서 2018년엔 하지도 않았다가 10년 만인 지난해 열렸다. 2년 연속 하는 건 박정희 때 이후 처음이다.   고위력탄도미사일 현무-5도 공개한다는데 그렇게 무시무시하고 강력한 무기라면 동네방네 자랑하지 말고 꽁꽁 숨겨놓는게 국가안보를 위해 더 좋은 것 아닌가 싶다. 주한미군도 함께 행진한다는데 주최측에선 한미동맹 과시하는 게 자랑스러울지 모르겠지만 외국인들 눈에 어떻게 비칠지도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하긴 국군의날 행사이니 작전권 가진 분들이 참석하는 게 명실상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군대 안 갔다 온 대통령은 첨단무기 날아다니고 굴러다니면 눈이 즐겁고 엔돌핀이 팍팍 분출할지 모르겠지만 병장 만기제대한 개구리 처지에서 보면 후배 장병들이 얼마나 고생이 많을까 안쓰럽다는 생각부터 든다. 이거 준비한다고 작년에 103억원, 올해 80억원을 쓰고, 행사 준비하다가 장병 두 명이 중상을 입었다고 한다. 해병대1사단이 대민지원한다고 설레발쳤던 것과 국군의날 무력시위한다고 몇달간 뺑뺑이 굴리는 게 뭐가 다른지도 모르겠다. 10월 1일엔 광화문 주변엔 얼씬도 말아야겠다. 내 눈과 귀는 소중하니까.   광화문 주변은 눈과 귀를 어지럽히는 것들로 가득차 있다. 몇 분 걷는 것만으로도 정신사납다. 뭔가 꽉꽉 채우지 말고 비우는 쪽으로 고민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나마 광화문광장이 동상 두 개 빼고는 나무와 의자 뿐이어서 북악산 너머 구름에 걸린 북한산을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서울시에선 최근에 광화문광장에 엄청나게 큰 국기게양대를 세우겠다고 했다가 욕만 얻어먹고 꼬리를 내렸다는 소식이 들린다. 언제 또 무슨 괴상망측한 걸 아이디어랍시고 내놓을까 싶어 무서워진다. 강국진 위원은 현재 서울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24-10-02 | hrights | 조회: 374 | 추천: 15
김희교 / 인권연대 운영위원 “통일을 포기하자!”. 언론에 의해 보도된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의 말이다. 9·19 공동선언 6주년 기념식 기조연설 중 한 부분이다. 보도를 통해 파악되는 그의 진의는 “통일보다 평화가 더 중요하고, 통일에 대한 강박관념이 남북협력조차 불가능하게 만들어가고 있기에, 통일은 평화를 만든 뒤 약 30년쯤 뒤 후세대의 결정에 맡기자“는 주장으로 보인다. 그의 발언에 대해 대통령실은 “반헌법적 발상”이며 “자유 민주주의에 입각한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헌법의 명령이고 의무”라고 논평했다.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는 “북한의 김정은이 하는 말과 똑같다”고 발언했다. 그 당의 최고위원 한명은 “북한에 가서 사세요”라고 했고, 오세훈 서울시장은 “종북인 줄 알았더니 충북”이라고 빈정거렸다.   대통령실 발표대로 “통일을 포기하자”는 말만 놓고보면 반헌법적 발상일수는 있다. 그러나 헌법은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규정하고 있기도 하다. “반헌법적 발상”을 생각조차 할 수 없다면 그 국가는 이미 민주주의국가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그런 발상으로 진화해왔다. 임종석 전 실장은 국회의원에서 시민으로 돌아왔다. 그는 발상이 곧 행정으로 시행될 수 있는 공직자가 아니다. 현정부의 최근 수많은 공직자들이 쏟아내고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관련된 반헌법적 발언과는 다르다. “북한의 김정은이 하는 말과 똑같다”는 논리는 지난 반세기 동안 되풀이된 고장난 테이프 같은 소리이다. 한 때 유명했던 ‘주사파’가 한 말이기에 종북딱지를 붙이면 정파적 이익을 좀 볼 수 있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지금 이 시대 대한민국의 여당대표가 할 말은 아니다. 임종석 전 실장의 발언은 여당이 입만 열면 주장하는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통일”이 이제 불가능한 시대상황 때문에 나온 발언이다. 그런 시대 상황을 만든 책임으로부터 그들은 전혀 자유롭지 못하다. 한동훈대표가 차기 대권을 노린다면 윤정부의 실현불가능한 ‘평화통일독트린’과는 차별화된 자유민주주의 통일안을 내놓고 국민을 설득해야 할 시점이다. 이미 국민의 절반 이상이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는 통계가 나오고 있다. 그가 그런 정파적 싸움만 하고 있는 지금 이 시간에도 북한은 핵무기체제를 가속화하하고 있고, 적대적 2국가체제로 나아가고 있다. 여당의 최고위원이라는 자가 초딩과 같은 “북한에 가서 사세요”라는 식의 논평을 내고, 서울시장이라는 분이 “종북인줄 알았더니 충북”이라는 식의 말장난으로 언론플레이나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들에게 지금은 참 태평성대인 것 같아 울화통이 터진다. 미・중 충돌로 전후체제가 위기에 처해 있다. 그들이 모시는 미국은 이전과 달리 대북제재조차도 더 감행하지 못하는 허약함을 드러내고 있다. 미국만 따라가면 문제가 해결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북한은 러북신동맹으로 대북제재를 무력화하고 있고, 우리의 의사와 상관없이 자유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2국가체제를 준비해나가고 있다. 북한의 핵무기체제의 고도화는 바이든 정부의 각료들까지 북한의 핵을 인정하고 비확산을 막는 ‘비핵화 중간단계’를 준비하고 있게 만들고 있다. 미국 공화당뿐만 아니라 민주당까지 정강정책에서 북한의 비핵화 추진 방침을 이미 지웠다. 임종석과 말싸움에서 이기는 게 중요한 시기가 아니다. 그런 유치한 수준의 인식을 가지고 있으니 자유 통일과는 배치되는 힘에 의한 평화를 주장하며 국지전을 불사하는 온갖 정책이 난무하고 있는 것이다. 차기 대권을 노리는 한동훈 대표가 할 일은 자유 민주주의 통일을 할 수 있도록 국지전의 위험을 줄이고, 북한이 적대적 2국가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중국과 러시아와 협력체제를 구축하고, 미국에게 자유 민주주의를 만들 수 있는 협상테이블을 만들라고 독촉하는 것이다. 임종석 전 실장의 발언이 아쉬운 것은 분명하다. 통일운동가로서 돌아온 그는 기존의 통일담론의 정체에 많이 답답함을 느꼈을 것이라 짐작은 한다. 그러나 그는 사상의 자유를 가진 단순한 한 명의 학자가 아니다. 그가 이제 공직자는 아니지만 그는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냈다. 그만한 경험을 한 정치인이라면 그의 그 자리 발언이 어떤 파장을 몰고 올 지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원하던 원하지 않던 그의 견해는 문재인 정부를 대변한다고 판단되어질 수 있고, 민주당의 의견으로 비추어질 수 있었다.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그의 발언이 통일담론을 성숙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쟁이나 극심한 내부분열을 몰고 올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김민석 최고위원에게 ‘설익은 발상’이라고 비판받을만 했다.   문제는 지금부터이다. 통일담론 대신에 평화체제 담론이 우선되어야 하는 시대 상황인 것은 분명하다. 대통령실의 주장대로 자유 평화통일을 주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힘으로는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임종석 전 실장의 주장대로 통일부를 없애고, 헌법을 바꾼다고 해서 통일의 필요성 자체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임종석 하나 말싸움으로 죽인다고 북한이 가고 있는 적대적 2국가체제가 사라지는 것은 더욱 아니다. 통일은 포기할 수 없지만 기존의 통일담론은 폐기해야 할 시점이다. 폐기보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평화체제 담론을 세우는 일이다. 북한문제는 우리가 다수결로 결정하면 시행할 수 있는 국내문제와 다르다. 이미 복잡한 세계정세가 난마처럼 얽혀있는 국제문제이다. 정쟁이 아니라 전혀 다른 접근법이 필요하다. 여야를 불문하고 더 이상 임종석 죽이기에 힘을 쏟지 말고 평화체제 담론 만들기에 전력을 기울이자. 지금은 80년대 초반처럼 나라의 운명을 걸고 갈 길을 찾아야 할 백가쟁명이 필요한 시기이다. 김희교 위원은 현재 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24-09-25 | hrights | 조회: 455 | 추천: 16
정범구/인권연대 운영위원 - 장발장 은행장을 맡고 난 후 주요 일과 중 하나는 한 달에 한 번씩 있는 대출심사회의에 참석하는 일이다. 8월 심사위원회는 지난 26일 열렸다. 세 시간여 논의 끝에 열세 명에게 모두 3000만원 정도 돈을 대출하기로 결정하였다. 신청자는 60명이 넘었는데 이런저런 기준과 정황에 따라 심사하다 보니 최종적으로 대출이 결정된 것은 모두 열세 명이었다. 한정된 재원을 갖고 은행을 운영하려니 대출 심사가 필요하지만, 어쨌든 기대감을 갖고 대출을 신청한 모든 사람들에게 다 기회가 돌아가는 것은 아니라서 심사를 끝내고 나면 약간 우울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대출심사에서 기본적으로 배제하는 것은 음주운전이나 성폭력, 사기 등이지만 때로는 판단하기 애매할 때가 있기도 하다. 또 신청인의 사안이 얼마나 절박한가 하는 것이 당연히 고려된다. 어쨌든 이런 절차를 거쳐 신청자의 20% 정도가 대출을 받게 되었다. - 그런데 몇 시간 대출심사서류를 들여다보고 나니 온몸의 진이 다 빠지는 느낌이다. 우리사회 가장 낮은 곳에서 이런저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주는 무게가 어깨를 짓눌러 오기 때문이다. 대출신청도 당장 5:1의 벽을 넘어야 하지만 설사 대출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래서 벌금은 어찌어찌 해결한다 하더라도, 그들 삶의 근본 문제는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무겁다.  신청자 중에는 여전히 “전기통신사업법 위반”이나 “전자금융거래법” 위반이 많다. 당장 현금이 아쉬운 상황에서 금융권 대출도 어려운 이들을 대상으로 범죄조직이 다가온다. 이들의 어려운 형편을 이용해 대포폰이나 대포통장을 만들기 위해서다. 대출해 주겠다는 속임에 빠져 통장 사본과 통장 비밀번호를 넘기면 막상 사기조직이 약속한 대출은 받지 못하고 자신들의 통장이 이른바 대포통장이 되어 범죄에 이용되게 되는 것이다. 또 유심칩을 가져오면 개당 5만~10만원을 준다고 하니 당장 현금 한 푼이 아쉬운 입장에서는 쉽게 뿌리치지 못한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대포폰으로 피해자가 발생하니 이들은 본의 아닌 범죄자가 되게 된다. 엄밀히 보면 이들도 피해자인데 현행법은 이들을 범죄자로 단죄한다.  어린 아이가 셋이나 되는데 양육비, 생활비 한 푼 안주고 술만 마시고 돌아다니는 남편에게 부엌칼을 들고 덤벼들었다가 폭행죄로 벌금형을 받는 젊은 여인, 병석에 있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으면서 생계 때문에 예비군 훈련에 빠졌다고 벌금형을 받아야 했던 20대 청년, 이들이 당면하고 있는 근본적 문제들 - 구조적 가난, 위태로운 가족 관계 둥 –은 몇 푼 대출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대출 심사라는게 신청자들이 제출한 대여섯 장 서류들의 행간을 읽어내는 작업이지만, 그 몇 장 서류들 속에 들어있는 우리 이웃들의 삶이 신산스럽고 안타까워 대출 심사 작업이 끝나고도 마음은 물 먹은 솜처럼 무겁게 가라앉는다. 극히 작은 도움이지만 장발장 은행이 내민 손길이 이들에게 격려나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어디선가 자신들을 지켜보는 손길과 눈길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힘을 낼 수 있을까? - 살면서 이런저런 어려움들을 겪고 살겠지만 역시 경제적인 궁핍이 가장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 같다. 경제적 궁핍이 인간관계도 파괴하고, 가족관계도 어렵게 한다. 그러나 그 고비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이후의 삶이 결정된다.  누구에게나 세상을 살면서 가장 어려웠던 시절이 있을 것이다. 사람마다 경험도 다르고 처지도 다르겠지만 어쨌든 정말 밑바닥이구나 하는 걸 경험하는 때가 있다. 그러나 그 어려움이란 것은 결국 밑바닥까지 내려가지 않고는 반전의 기회를 잡기가 쉽지 않다. 바닥에 발이 닿아야 결국 다시 바닥을 차고 솟아오를 힘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장발장 은행 대출심사를 진행하다 보니 나도 지나온 세월을 더듬어보게 된다. 정말 바닥이라고 생각했지만 더 떨어지는 바닥도 있었고, 이제 더 이상 갈 데가 없다고 느꼈을 때 조차 밀리다 보면 더 밀리는 곳이 있었다. 그러나 정말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다고 느꼈던 때, 이제 더 이상 밀릴 곳이 없는 막다른 골목이라고 느꼈던 그 때, 바닥을 차고 오르는 힘을 얻고, 막다른 골목 끝에 살짝 열린 쪽문을 발견했던 기억이 있다.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밀어넣는 운명의 힘도 막강하지만 결코 ‘내일’을 포기할 수는 없다는 절박함이 또한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 추석 명절을 앞두고 이 글을 쓰고 있다. 명절 분위기로 온 세상이 흥청거리는 것 같지만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 사회 어느 구석에서는 좌절과 절망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 지금은 추락하고 있지만 어느 순간 반드시 바닥을 치고 다시 솟아오르기를 바란다. 그들과 함께 따뜻한 국수를 먹고 싶다. 국수가 먹고 싶다/ 이상국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을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정범구 위원은 장발장은행장입니다.
2024-09-19 | hrights | 조회: 674 | 추천: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