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익의 인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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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날 신자유주의타령만?(진보정치, 07.07.27)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10-23 16:53
조회
215

한 신문사의 주관으로 언젠가 북한인권문제로 북한민주화 ‘운동’을 한다는 사람을 만나 토론을 해본 적이 있다. 이 사람은 자주계열의 학생운동을 했다가, 시대정신이 그게 아니라며 ‘전향’을 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4시간쯤 토론을 했는데, 그는 ‘수령절대주의독재체제’란 말을 거의 2분에 한번씩 했다. 10자나 되는 긴 단어를 단 한번도 순서도 틀리지 않고 반복을 했다. 나 같으면 ‘절대주의수령독재체제’나 ‘수령독재절대주의체제’라면서 헛갈리기도 할 텐데, 그는 조금의 실수도 없이 같은 말을 반복했다. 마치 벽돌공장에서 찍어낸 똑같은 벽돌을 대하는 느낌이었다.


그의 말을 아무리 선의로 해석한다고 해도, 그는 똑같은 말을 반복함으로써 토론의 상대인 나를 설득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신문을 읽는 독자들도 설득하지 못했을 거다. 즐겨듣는 라디오에 나오는 공익광고도 마찬가지다. 대체로 좋은 이야기들이지만, 매일 반복 되면 싫증과 짜증이 겹쳐진다.


민주노동당 사람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 몇 가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입만 열면 자주, 민주, 통일, 미 제국주의를 되뇌고, 또 다른 사람들은 신자유주의를 입에 달고 산다. 습관적으로 쓰는 말, 관성적으로 쓰는 말은 말 자체가 담고 있는 살풍경한 현실과 달리 힘이 없어 보인다. 말을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긴장감이 떨어지긴 마찬가지이다. 판에 박은 말이 아니라, 생기가 넘치는 자신(그)들만의 말, 그래서 힘 있는 말을 민주노동당 사람들에게 듣기란 쉽지 않다.


신자유주의란 말만 해도 그렇다. 한 잡지의 대담에서 이정우 교수가 지적했듯이 신자유주의란 말 자체가 너무 어렵다. 해서 대중과 멀어지게 하는 효과가 있다. 자유주의가 꼭 나쁜 것만도 아니고, 게다가 새롭다니 자칫하면 신자유주의란 말 자체가 오히려 긍정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 교수의 말처럼 그냥 ‘시장만능주의’라고 하면 말하고자 하는 뜻도 분명히 전달되고, 듣는 사람도 알아듣기 쉬울게 아닌가.


그런데도 왜 어려운 개념어, 그것도 서양에서 직수입한 말을 써야 하는지 모르겠다. 한번만 더 생각해보았다면 훨씬 좋은 다른 말을 찾아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든다. 이렇게 어려운 말을 쓰는 경우가 한둘이 아니다. 운동권에서나 통용되던 은어와 줄임말 등도 너무 자주 쓴다. 말 자체가 너무 관성적이란 느낌이 든다.


한번쯤 살펴볼 만한 책 ‘코끼리는 생각하지마’(삼인)는 ‘프레임’을 통해 말이 주는 힘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책에 소개된 미국 우익의 분발은 새로울 것 하나 없는 한국의 극우세력이 우익은 ‘라이트’로 살짝 바꾸고, 거기다 새롭다는 ‘뉴’자 한 자만 붙여놓고는 재미를 보고 있는 것과 꼭 닮았다. 물론 이런 우익의 노력은 보태거나 뺄 것도 없는 화장발이다. 화장발에 조중동의 조명발까지 받으니 아무런 내용이 없는데도 뭔가가 있어 보이는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것이다.


진보세력은 화장발과 조명발을 기본적으로 싫어한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라는 그들의 진지함이 그나마 우리 사회를 이만큼이나 지탱하는 힘이 된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진지하다고 해서, 꼭 외국용어를 직수입해다 쓰면서 시장만능주의를 무슨 시대적 대세나 되는 것처럼 그게 아니면 새로운 것이기 때문에 희생이 있어도 받아들여야 하는 무언가로 여기게 할 필요는 어디에도 없다.


운동하는 사람들은 사회과학에 친숙한 탓인지, 말이 딱 부러진 개념어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운동하는 사람들끼리의 논쟁에는 명확한 개념어가 혹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만, 더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에는 별 도움이 못된다. 그나마 관성적으로 쓰면 역효과가 생기기도 한다. 오히려 사회과학적 말보다는 인문학적 말이 훨씬 바람직할 때가 많다. 민주노동당이 운동 엘리트, 운동 관료만의 정당이 아니라면 먼저 민주노동당 사람들의 말부터 바뀌어야 한다.


오창익 인권실천시민연대 사무국장
진보정치 33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