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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오항녕의 독사관견 사랑은 죄가 아니지만…장희빈 가고 단종 올 무렵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6-05-26 17:45
조회
38





[오항녕의 독사관견 讀史管見]사랑은 죄가 아니지만…장희빈 가고 단종 올 무렵



장희빈과 식어간 사랑도
환국의 이유 중 하나겠지만
숙종의 회한 깊은 한시에도
답이 들어있지 않을까





과거 오류에 대한 반성 이후
그는 대동법을 실시하고
북한산성을 보수하는 등
반전의 통치를 이루었다





단종과 사육신 복권도
숙종이 정신 차리며
이룬 역사 바로 세우기였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계기로 지난 4월 ‘독사관견’은 노산군-단종에 대한 칼럼을 썼다. 어떤 독자가 단종과 사육신의 복권이 장희빈 때이기도 하지 않느냐, 극과 극을 오가는 듯한 숙종의 처사가 납득하기 어렵다며 어찌 된 상황인지 이유를 물어왔다. 그래서 그 무렵 상황을 정리해보기로 하였다.


지난해 거듭 용이 날던 해를 맞아
(去年重遇龍飛歲)
오늘 성조의 궁을 흔쾌히 보았노라
(今日欣瞻聖祖宮)
그리운 추모의 정 어찌 곱절뿐이리
(奚但羹墻追慕倍)
큰 위업 생각하니 상념 한이 없네
(緬懷洪烈意無窮)


숙종이 지었던 한시(漢詩)다. 용비(龍飛)란 용이 날다, 곧 왕이 되어 나라를 건설했다는 뜻이다. 세종 때 지은 서사시 ‘용비어천가’의 그 용비다.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제목 ‘육룡이 나르샤’는 ‘용비어천가’의 첫 대목인데, 육룡은 세종 앞의 태종과 태조, 그리고 태조의 고조인 목조부터 아버지 환조까지 6명을 말한다.


숙종 18년(1692)은 임신년으로, 조선 건국(1392) 이후 60갑자가 다섯 번 돌았던 해이다. 요즘으로 치면 300주년 기념식을 할 만한 경사였다. 숙종은 그해 경기 개성에 위치한 태조와 태종의 잠저(潛邸) 경덕궁(敬德宮)을 방문했다. 건국 다섯 번째 회갑을 기념하는 축하 행사였는지도 모른다.


시 속에 회한이 있고


그리고 이듬해인 1693년에 앞의 시를 지었다. 다시 1년 뒤인 숙종 20년(1694) 4월, 인현왕후를 폐위시킨 조치를 반성하고 인현왕후 민씨에게 미안하다는 유감의 뜻을 표한 뒤 왕비로 복위시켰다. 바로 한 달 뒤인 5월, ‘경덕궁비계영경지비(敬德宮丕啓靈慶之碑)’를 세우면서 앞의 시를 비석에 새겼다. ‘비계영경’이란 ‘위대하게 왕조를 열었다’는 의미이다.


숙종 15년(1689)에 왕비가 되었던 장씨는 5년 만에 다시 희빈으로 낮추어졌다. 1694년의 이 변화를 ‘갑술년의 정국 변동’, 즉 갑술환국이라고 한다. 장씨의 입장에선 뭔 변덕인가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필자로서는 위 시를 본 순간 환국이 예정되어 있었음을 느꼈다.






조선 건국 300주년을 맞아 개성 경덕궁에 세운 비석. 숙종이 지은 시를 새겼다. 장희빈을 감싸며 사화를 일으켰던 군주가, 단종 복위라는 역사 바로 세우기의 주인공으로 바뀌는 징표였다.

조선 건국 300주년을 맞아 개성 경덕궁에 세운 비석. 숙종이 지은 시를 새겼다. 장희빈을 감싸며 사화를 일으켰던 군주가, 단종 복위라는 역사 바로 세우기의 주인공으로 바뀌는 징표였다.





갈라놓을 수 없는 사랑


장씨는 부유한 역관 집안에서 자랐다. 그는 인조 후궁 조귀인의 손자였던 동평군 이항(李杭)의 주선으로 궁녀가 되었다. 숙종 6년(1680), 첫 왕비 인경왕후 김씨가 천연두에 걸려 세상을 떴는데, 이 무렵부터 숙종은 장씨와 가까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무척 미모였다(頗有容色)고 알려진 장씨는 당시 22세였고, 숙종은 그보다 한 살 어렸다.


그런데 이듬해 숙종은 계비 인현왕후 민씨를 맞았다. 중전 민씨가 명성왕후(현종비이자, 숙종의 어머니)에게 장씨를 다시 궁중에 들이자고 건의한 것으로 미루어, 장씨는 어느 틈엔가 궁궐 밖으로 쫓겨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씨를 다시 들여오자고 건의하자, 명성왕후는 인현왕후에게 “내전(內殿·왕비, 즉 인현왕후)이 그 사람을 아직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오. 그 사람이 매우 간사하고 악독하다오. 주상이 평소에도 기뻐하다가 화내다가 하는 감정이 느닷없이 일어나는데, 만약 그의 꼬임을 받게 되면 말할 수 없이 나라의 화란이 될 것입니다. 내전은 나중에라도 내 말을 잘 기억해야 할 것이오” 하였다.


결국 명성왕후가 살아 있을 때 장씨는 궁궐로 들어오지 못했다. 그러나 명성왕후가 세상을 뜨고, 3년상을 마친 숙종은 바로 장씨를 불러들였다. 어머니의 반대를 차마 거역하지 못했지만, 연인도 잊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가 숙종 12년(1686) 2월. 곧 장씨는 숙의(淑儀)로 간택되었다.


긁힌 남자의 자존심


남자 숙종은 5년의 이별을 만회하려고 연인 장씨에게 뭐든지 다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해 9월 장씨를 위해 몰래 별당까지 지었는데, 이게 결국 신하들에게 들켜버렸다. 사헌부에서 공사를 중지하라고 청했지만, 숙종은 잘못 전해 들은 것이라고 둘러대며 듣지 않았다. 이 와중에 12월, 장씨를 종4품 숙원(淑媛)으로 올렸다. 궁녀로 들어와 왕자나 공주를 낳지도 않은 사람이 숙원이 되는 특별한 조치였다. 또 며칠 뒤 숙종은 장씨의 궁방인 숙원방(淑媛房)에 노비 100명을 내려주었다.


사헌부의 비판에 숙종은 “여자를 총애하다가 정신이 어지러워져서 실정(失政)하게 된 자가 많았으니, 내가 어찌 가볍게 행동하겠는가”라며 잘난 척 변명을 늘어놓았다. 대사성 김창협이 나섰다. “사헌부의 계(啓)에 대해 전하께서는 전해 들은 말이 사실과 어긋난다고 하셨는데, 실제로 별당을 지었습니다. 전하께서는 잘못을 아신다고 하면서도 안으로는 급하지 않은 공사를 일으키고, 밖으로는 신하의 간언을 막는 변명을 하셨으니, 이는 자신을 속이고 또 남을 속이는 일입니다.”


김창협의 말은 위언(危言)이었다. 위언이란 위험한 말이라는 뜻인데, 어떤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대치의 비판을 말한다. 김창협의 직언은 자존심 강한 숙종을 흔들었다. 숙종은 겉으로 화를 내지 않았다. 그냥 “억측이 지나치다”고만 답변했다.


사화(士禍), 그 참혹한 현장


가슴에 묻어두었던 숙종의 분노는 그로부터 3년이 지나 터졌다. 숙종은 장씨 소생의 왕자를 원자로 삼고, 왕비를 장씨로 교체하고 싶어 했다. 안팎의 비판이 쏟아졌다. 그중 김창협의 아버지 김수항도 있었다. 반대 상소를 올린 대가로 김수항은 전라도 진도로 귀양 갔고, 가장 먼저 사약을 받았다.


사관은 이를 두고 이렇게 적었다. “김수항이 사약을 받은 일을 두고, 혹자는 아들 창협의 직언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때 임금의 마음에 불만이 생겨 그의 아비에게 화풀이하게 된 것이라고 수군대며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김수항은 다섯 살짜리 원자였던 숙종의 보양관으로서 반년을 가르쳤던 스승이었다. 현종이 아들 숙종을 부탁한 고명대신(顧命大臣)이기도 하였고, 영의정을 지냈던 인물이었다. 숙종이 장희빈에게서 아들을 얻은 지 한 달 뒤 승지를 보내 김수항에게 의지하여 정치를 하고 싶다는 의향을 전하기도 했던 터였다. 그런 그가 사약을 받았으니 나머지 사람들이야 어떻게 되었겠는가?


잘못을 반성해야 산다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위하던 날 오두인과 박태보 등 86명이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삼년상을 지낸 아내는 내보내지 못한다”는 말까지 거론하며 숙종의 조치를 되돌리려 하였다. 이들에게 돌아온 것은 모진 국문(鞫問)이었다.


“무릎을 돌로 빻고 모서리가 있는 곤장으로 치니 좌우가 차마 눈을 뜨고 보지 못하였다. 살갗과 살점이 떨어지고 뼈마디가 드러났으며, 튀는 피가 숙종의 곤룡포 아래 떨어졌다.” 오두인은 의주로 귀양 가다가 파주에서, 박태보는 진도로 귀양을 가다가 과천에 이르러 각각 국문으로 인한 중상으로 세상을 떴다. 혹독한 사화였다.


기사년의 사화에서 갑술년 환국까지 5년 동안, 20대 초반 만났던 남녀는 30대 중반으로 접어들었다. 그사이 숙종은 숙빈 최씨와 가까워졌고, 나중에 영조가 되는 왕자를 얻었다. 이렇게 식어간 사랑도 환국의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처음에 소개한 숙종의 시에도 답이 들어 있지 않을까 한다. 자신은 300년 된 나라를 맡은 국왕이다. 그런데 명신, 충신들을 죽이고 귀양 보내 조정은 스산하다. 더 잘못 가면 나라가 망하겠구나, 숙종은 돌아보지 않았을까.


숙종은 이때 진지하게 반성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후 그는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실시하였고, 강화도 간척 사업을 통해 농지를 늘렸다. 조선~청~일본을 연결하는 중계무역으로 재정을 늘렸으며, 그 여력으로 북한산성을 수축하였다. 단종과 사육신 복권도 숙종이 정신 차린 뒤에 이루어진 역사 바로 세우기였다.


처음부터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인간이 어디 그런 존재이던가. 과오와 오류에 대한 부끄러움과 반성이 점점 사라져가는 듯한 일각의 세태를 보면 숙종의 태도는 오히려 좋은 약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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