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목에가시

‘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길주희(인권연대 연구원), 김성은(서울신문 기자), 김태형(프리랜서 방송작가),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박용석(출판업),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춘천별빛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이동화(아디 사무국장), 이라영(문화평론가), 이승은(행정사), 이원영(전 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하루 0.7명, 그 숫자가 알려주지 않는 것(이승은)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6-05-19 10:58
조회
450

이승은/ 행정사


 

 

뉴시스가 〈미래세대가 병들고 있다〉 시리즈의 첫 기사로 내놓은 글을 읽다가 한 줄에서 한참을 멈췄습니다.

"초중고생 자살, 하루 0.7명. 가정·학업·대인관계의 삼중 압박."

계산해 보면 1년에 250명쯤 됩니다.

숫자라는 건 멀게 느껴지게 만드는 힘이 있어서, 0.7이라는 소수점이 오히려 이 비극을 흐릿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학교전담경찰관으로 수년간 일했던 저에게는 그 숫자가 멀지 않습니다. 전화 통화 너머의 숨소리로, 옥상으로 향하던 발걸음으로, 117에 걸려 온 한 마디로 떠오릅니다.

2022년 4월. 그 한 달, 제가 담당하던 학교들에서만 자살 관련 신고가 세 건이었습니다(각각 다른 학교). 중학생 A는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자살을 시도하기 직전에 1388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 한 통의 전화가 아이를 살렸습니다. 다른 중학생 B는 가정불화로 죽고 싶다는 문자를 담임 선생님께 남기고 사라졌다가 스스로 마음을 돌려 학교로 돌아왔습니다.

고등학생 C는 기숙사 안에서 폭행을 당한 직후 117로 신고하며 이렇게 물었습니다.

"자살하면 가해 학생들은 어떤 식으로 처벌받나요?"

이 한 문장을 저는 오래 잊지 못했습니다. 자기 죽음을 가해자에게 책임을 묻는 마지막 수단으로 떠올린 열일곱 살. 학교폭력 절차가 자신을 지켜 주지 못할 것이라는 절망이 그 안에 깔려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저는 학폭위 의견서 한 장, 행정심판 청구서 한 줄을 쓸 때마다 C의 그 질문이 어딘가에서 저를 바라보고 있다고 느낍니다. 절차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누군가는 결국 그 질문에 도달한다는 것. 그것이 제가 절차를 가볍게 다룰 수 없는 이유입니다.

A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그 아이는 친했던 친구 둘과 반이 갈렸다는 작은 변화를 견디지 못했습니다. 어른의 눈에는 "반이 나뉘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새 친구를 사귀렴." 한마디로 정리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A의 머릿속에서는 "앞으로도 새 학기마다 이런 식일 텐데, 나는 이런 식으로는 살기 힘들다"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른에게 사소해 보이는 관계의 단절이 아이에게는 앞으로 평생 반복될 패턴의 예고편으로 읽히는 것입니다. 이 차이를 보지 못하는 것이 우리가 매년 200명 넘는 아이를 잃게 되는 이유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A는 그 일 이후 잠시 학교를 쉬었다가 돌아왔습니다. 어느 날 청소년 문화센터로 데려다주던 차 안에서 BTS의 〈Magic Shop〉을 틀었더니, "선생님도 아미세요?" 하고 배시시 웃었습니다.

 

내가 나인 게 싫은 날,

영영 사라지고 싶은 날,

문을 하나 만들자.

-BTS의〈Magic Shop〉

 

노래 속의 그 '문'은 마음 안에 만드는 작은 피난처입니다. 너무 힘든 날, 도망쳐 들어가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자기만의 방. A에게는 그 노래가, 그리고 같은 노래를 알고 있는 어른이 함께 탄 차 안의 시간이 그날의 작은 '매직 숍'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옥상에서 1388을 눌렀던 아이가, 며칠 뒤 같은 노래를 알고 있는 어른과 같은 차에 앉아 있다는 것. 그 작은 마주침의 순간을 저는 학교전담경찰관 시절의 가장 중요한 기록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거창한 상담이나 위기 개입이 아니라, 같은 노래를 알고 있는 사람으로 같은 차에 함께 있어 주는 것 말입니다.

 

행정사로 학폭 사안을 맡은 지금도, 사건이 끝난 뒤에도 통화를 끊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강원도의 정연이(가명)가 그중 하나입니다. 학교폭력 행정심판이 인용으로 마무리됐지만, 통화할 때마다 아이의 목소리에서 분함과 외로움이 묻어납니다. 그럴 때마다 마음속으로 '자살'이라는 단어가 스칩니다.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습니다.

"제발 자살은 생각도 하지 말자" 같은 당부는 아이에게 위로가 아니라 단속처럼 들릴 수 있다는 걸, 현장에 있어 본 사람은 압니다.

다만 "많이 힘들면 시간 상관없이 전화해도 돼"라는 한마디, 단속이 아니라 문을 열어 두는 한마디는 끊지 않으려고 합니다. 제가 정연이에게 어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그것이라고 믿습니다.

 


AI 생성 이미지


 

이번 뉴시스 기획이 짚은 ‘삼중 압박’ —가정·학업·대인관계—라는 틀은 사실 현장의 교사들과 경찰관들이 오래전부터 입을 모아 말해 온 것입니다.

“아이가 자살을 고민하는 건 가정에서의 관계, 친구와의 신뢰, 자기 능력에 대한 믿음 같은 여러 요소가 한꺼번에 무너져 내린 결과”라는 한 교사의 진단이 그 안에 인용돼 있습니다. 그동안 청소년 자살의 원인을 ‘학업 스트레스’ 한마디로 묶어 버린 진단들이 얼마나 진짜 도움을 줄 자리를 놓쳐 왔는지를 다시 보게 됩니다.

​ 학원가의 성적 줄 세우기 현수막을 점검하는 일이 의미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그것은 빙산의 한 조각만 건드리는 일이고, 그 아래에는 집에서 단절되고, 또래에서 밀려나고, 그래서 어떤 어른에게도 신호를 보낼 길이 없는 아이들의 여러 겹의 위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위기의 신호가 보였을 때 그것을 받아 줄 어른 한 명이 곁에 있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시리즈 안에 인용된 한 초등 교사의 말이 가슴을 칩니다.

“아이들이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만 있어도 자살 시도로 잘 이어지지 않는다.”

어른이 직접 묻는 것이 위험을 키우지 않고 오히려 길을 열어 준다는 사실은 자살 예방 연구에서 오래전부터 확인된 바이기도 합니다. 어른 한 명. 부모일 수도 있고, 담임 선생님일 수도 있고, 학교전담경찰일 수도 있고, 행정사와 변호사일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의 자리가 어디인지보다 끊기지 않는 연결이 중요합니다.

여기까지 쓰고 잠시 멈춥니다.

지금 한국 사회는 어느 때보다 많은 의제를 한꺼번에 마주하고 있습니다. 6월 지방선거를 앞둔 정치 일정에서부터 한반도와 국제 정세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어떤 사회에서 살아갈지를 결정짓는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자신의 자리에서 진지하게 답을 찾고 있습니다.

다만 그 모든 의제 사이에서, 한 가지를 조심스럽게 묻고 싶습니다. 매년 250명쯤의 초중고 학생이 스스로 생을 등지고 있다는 사실. 이것이 우리의 관심과 우선순위에서 어디쯤에 놓여 있는지 말입니다.

정책의 무게중심에서, 예산의 배분에서, 뉴스의 머리기사에서, 일상의 대화에서, 이 250명의 자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건 누구를 탓하려는 질문이 아닙니다. 저 자신을 포함한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가장 중요하다고 모은 그 의제들조차, 결국은 살아 있는 아이를 전제로 할 때 의미를 가집니다. 그 전제가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쩌면 너무 오래 잊고 지냈는지도 모릅니다.

원점에서 다시 생각한다는 건 거창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 옆에, 조용히 누구를 살릴 것인가라는 질문을 한 줄 더 적어 두는 일입니다.

아이의 위기를 알아챌 어른 한 명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가정·학교·또래·지역사회의 어느 지점에서 신호가 흩어지고 있는가. 그 신호를 받아 줄 길은 누가 책임지고 만들 것인가. 이 질문이 정치의 한 자리, 정책의 한 줄, 예산의 한 항목으로 옮겨 오지 않는 한, 우리는 매년 옥상으로 향하는 아이들의 발걸음을 막지 못합니다.

노래 속 ‘매직 숍’은 아이의 마음 안에만 있는 곳이 아닙니다. 한 통의 전화, 한 마디의 안부, 같은 노래를 함께 듣는 차 안의 침묵 —어른이 만들어 주는 그 작은 자리들이 모여, 아이가 도망쳐 들어갈 수 있는 진짜 매직 숍이 됩니다.

 

A는 살아남았습니다. 정연이도 살아갈 것입니다.

다만 그 살아남음이 기적이나 운에 기대지 않고, 어른들이 제 자리에서 한 발씩 다가서는 응답에서 비롯되기를 바랍니다. 0.7이라는 숫자 뒤의 얼굴들을 더는 잊고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어느 진영의 어른이든 함께 적어 내려갈 수 있는 한 줄이라고 저는 믿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