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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책임이 실종된 사회(이라영)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6-02-24 11:50
조회
323
이라영/ 문화평론가
안희정이 지난 2월 7일 공식 석상에 등장했다. 2018년 비서에 의해 처음 그의 성폭력이 폭로된 이후 8년 만이다. 박정현 부여군수 출판기념회에 등장했고, 현장에 있던 의원들이 크게 환호했다고 알려졌다. 지방 선거를 앞두고 정치인들의 출판기념회가 곳곳에서 이어지는 중이다. 정치인의 출판기념회가 ‘출판’이 아닌 정치를 위한 자리라는 건 다 아는 사실이다.
‘8년만’이라고는 하지만 지난 8년간 안희정은 꾸준히 정치적인 몸이었다. 그의 수감 생활 중 모친상과 부친상이 이어졌고, 그때마다 정치권에서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 인간적으로 조문할 수는 있지만, 사회적 참사 희생자들이 정치에 휘말려 제대로 애도받지 못한 사건들을 떠올리면 성폭력 가해자 안희정을 둘러싼 이 ‘조문 정치’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직접 공식석상에 나타나기까지 했다. 형을 다 살았으니 그래도 괜찮을까. 비서를 성적으로 착취한 사람이 실형을 살고 난 후에 정치에서 다시 호명된다면 이 사회가 성착취를 사소하게 취급하는 신호라고 봐도 무방하다.
안희정의 등장을 비판하는 이유는 단순히 전과자의 사회 복귀를 막자는 게 아니다. 한국사회에서 ‘위력에 의한 성폭력’ 가해자로서 그가 끼친 악영향이 크다. 안희정은 2018년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고 2019년 2심에서 유죄가 되어 3년 6개월의 실형을 살았다. 1심에서는 도지사의 지위가 위력으로 인정되지 않았고, 2심에서는 위력 행사가 인정되었다. 이 판결은 위력에 의한 성폭력에서 그 ‘위력’의 개념과 범주를 구체적으로 인정한 중요한 사건이다. 여성 노동자의 노동환경이 권력에 의한 성폭력에 취약한 상황임을 공적으로 드러낸 사건이다. 그런 당사자가 사과와 반성도 없이 지지받으며 등장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지난 8년의 세월을 부정하는 것이다. 여성들은 ‘미투’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는데 현실 정치는 이에 부응하지 못한 채 인권의 시계를 계속 거꾸로 돌리고 있다.

안희정의 등장보다 문제가 있는 모습은 그의 등장에 환호하는 목소리다. 나아가 안희정의 정치 복귀를 비판하는 입장을 비난하는 목소리이다. 이들은 8년이나 시간이 지났고, 이미 수감생활까지 다 마쳤는데 뭐가 문제냐는 것이다. 일시적 해프닝일 수 있지만 결코 가볍게 넘기기 어렵다. 이는 위험한 전조증상이다.
민주당 출신 지자체장’들’의 비서 성폭력 역사를 복기하기 바란다. 폭력은 단 한 사람의 가해자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방관하는 주변인과 주제넘게 용서를 말하는 제삼자들의 담합으로 폭력의 구조를 만들어낸다. 안희정이 8년 만에 공식석상에 등장해 지지자들의 환호를 받는 모습은 역설적으로 그의 ‘위력’이 여전히 공고함을 방증한다.
법적 처벌을 받으면 죗값을 치렀다는 착각이 갈수록 팽배해지고 있다. 이 생각이 왜 위험한가. 법은 언제나 최소한의 도덕이다. 도덕이 위태롭게 유지될 때 법적 책임도 아슬아슬하게 지켜질 것이다. 정치적 책임 따위는 실종된 토양에서 자라나는 정치는 큰 우려를 자아낸다. 윤리적 책임이 파탄 난 사회에서 법적 책임은 잘 지켜질 수 있을까. 그럴 리 없다. 법적 책임에 함몰된 사회는 법적 책임조차 온전히 묻지 못한다. 법적 책임이 모든 책임을 다 포함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안희정의 폭력을 안희정 개인의 문제로 급격하게 좁히기를 원한다. 오직 안희정이라는 특수한 인물이 어쩌다가 저지른 잘못이기에 그의 수감생활로 죄를 씻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안희정’들’을 방관한다. 사실상 ‘법적으로는 문제 없다’라는 말은 사회의 윤리 체계를 파괴하는 말이다. 다시 말해 양심의 실종이다. 양심이 없어도 될 권리를 주장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 간절하게 필요한 책임은 정치적, 윤리적 책임이다. ‘정의를 위한 정치적 책임’(아이리스 매리언 영)이 필요하다. 법적 책임은 처벌받는 개인에게 책임의 범주를 좁힌다. 반면 윤리적, 정치적 책임은 법적 책임을 넘어서 더 많은 사람에게 구조적 책임을 묻는다. 다시 말해, 법적인 처벌을 다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안희정에게만 책임을 물을 뿐, 안희정들의 증식을 외면한다는 뜻이다. 개인적 책임에서 정치적 책임으로 나아갈 때 사회의 부정의한 구조를 바꿀 수 있다. 안희정들의 난립을 막고 싶다면 안희정의 정치 복귀를 단호하게 반대하자. 법적 처벌을 받았다는 것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정치적 책임을 다했는지 질문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