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에 비친 인권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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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내게 가르쳐 준 것 (한겨레 07.03.28)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30 11:54
조회
189
한 대학에서 문학이론을 강의하다가 카를 마르크스의 이런 경구를 만났다. “인간의 존재를 결정짓는 것은 인간의 의식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인간의 의식을 결정짓는다.” 그때 몇몇 학생은 책상 위에서 까무룩 잠에 빠져 있었다. 졸고 있다는 것 역시 사회적 존재를 형성시키는 상황의 일부를 이룬다. 그들에게도 그 상황이 결정하는 고유한 의식이란 것이 있을 듯. 깨울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조는 학생의 책상 위에는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이 놓여 있었다. 마르크스와는 반대로, 이 책의 저자는 인간의 의식이 사회적 존재를 결정한다고 말한다. 그는 아우슈비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그는 아우슈비츠라는 야만 속에서 인간다움의 품위, 희망이라는 의식을 견지함으로써 자유인이 되었다고 말한다. 수용소에서는 극소량의 물이 배급되었다. 그 물을 생물학적 갈증의 해소에 사용했던 동료들은 끝내 수용소에서 병사했지만, 기이하게도 그 물로 인간다움의 품위를 유지하고자 제 몸을 씻었던 자신과 동료들은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졸고 있는 학생들의 빅터 프랭클과 깨어있는 학생들의 카를 마르크스 사이에서, 나는 선생 특유의 타협안을 제시했다. 인간은 의식으로 사회적 존재를 변화시킬 수도 있고, 반대로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결정하기도 하는 다층적 존재다. 마르크스나 프랭클이나 이 점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삶의 어느 국면에서 이 두 사람은 한 가지 선택을 해야 했다. 자신의 삶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모호성을 자기 식으로 지양해야 했기 때문이다.


때때로 청춘이 장전된 총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데 나아갈 과녁을 알 수 없는 총알 같은 삶이라면, 그 결과는 대체로 불행하다. 명중할 과녁이 없는 삶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테오 파드노스라는 미국의 한 인문학 전공자는 우드스턱 지방 구치소에서 미결수인 젊은이들에게 문학강의를 했는데, 그 강의의 기억이 〈장전된 총 앞에 서서〉라는 책이다. 이 책은 과녁 없는 청춘의 실패가 인문학을 통해서, 자신의 사회적 존재를 더 나은 방향으로 끌어올리기를 꿈꾸었던, 또다른 아름다운 실패의 기록을 담고 있다.


내가 이 책을 읽었던 것은 나 자신이 의정부 교도소에서 수용자들에게 문학을 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죄명을 갖고 있으며 비교적 장기수인 수용자들에게 문학은 과연 무엇일 수 있을까. 얼 쇼리스가 〈희망의 인문학〉에서 말한 것처럼, 그들은 인문학을 통해 과연 무서운 상황의 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같은 인간으로서 나와 그들 모두의 인간적 존엄이 회복될 수 있을까.


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시〉를 함께 읽어나가자, 한 수용자가 이 시는 윤동주의 내면적 성찰과 미래에 대한 희망의 모색으로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러자 다른 수용자가 직접적인 실천을 할 수 없는 한 내성주의자의 독백이라고 말한다. 또다른 수용자는 윤동주에게 동경의 다다미방은 감옥과도 같은 것이었다고 말한다. 교도관도 열띤 토론에 동참했다. 적어도 강의가 진행되는 그 두 시간 동안, 그들과 나 두루 순간적으로 우리의 사회적 존재를 잊었고,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회복했으며, 우리가 함께 있는 감옥이라는 장소의 성격을 마술적으로 바꿔냈다고 생각한다.


나는 세계에 대해서는 다소 비관적이지만, 적어도 사람에 대해서는 낙관주의자다. 그것은 이 세계의 비참을 강화시키거나 약화시키는 것 모두 사람의 몫이기 때문이다. 카를 마르크스와 빅터 프랭클이 그것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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