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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박물관의 시신들(염운옥)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4-04-30 10:22
조회
280
염운옥 / 인권연대 운영위원


서전스홀 박물관(Surgen’s Hall)은 에든버러에 있는 의학박물관이다. 16세기에 설립된 명문 의과대학인 에든버러 왕립 외과의 대학(Royal College of Surgeons of Edinburgh)의 자연물과 인공물 컬렉션에서 출발해 공공박물관이 되었다. 어두운 빛깔의 석재로 지어진 신고전주의 양식의 서전스홀은 당대 스코틀랜드의 유명 건축가 윌리엄 플레이 페어(William Playfair)의 건축이다. 왕립 외과대학의 교육을 위한 해부학과 병리학 표본, 수술기구와 의료 장비에 더해 해부학자 존 바클레이(John Barclay)와 외과학 교수 찰스 벨(Charles Bell)의 기증으로 컬렉션이 너무 방대해지자 1832년 지금의 건물을 지어 공공박물관으로 개관했다. 현재 전시실은 2015년 대규모 리모델링을 거친 후 재개관한 것이다. 1839년 의료전문가가 아닌 일반 관람자는 10,256명이었고, 최근에는 연간 일반 방문객은 약 87,000명 정도라고 한다. 관광명소까지는 아니지만 에든버러를 찾는 국내외 관광객이 꾸준히 찾는 곳이다.


<서전스 홀 박물관> 사진: 염운옥


고풍스런 파사드를 지나 중정으로 들어서면 청동 조각상을 만난다. 의료 종사자 네 명을 등신대로 형상화한 이 동상은 코로나19 기간 동안 헌신적으로 방역에 종사한 NHS 의료 종사자들에게 헌정된 기념물이다. 조각가 케니 헌터(Kenny Hunter)의 작품 〈당신의 다음 숨결(Your next breath)〉로 2022년 제막되었다. 최전선에서 환자를 돌보고 근무 교대를 맞이하는 모습에서 함께 겪어온 팬데믹 위기를 돌아보고 전세계 의료진에게 대한 감사의 마음을 새기게 된다.


<케니 헌터 '당신의 다음 숨결'> 사진: 염운옥


서전스홀 박물관은 의과대학 건물들 사이에 자리 잡은 5층짜리 좁고 높은 전시실에 병리학, 외과학, 해부학, 생리학, 치과학, 첨단 의료 기술 등으로 주제를 나눠 전시하고 있다. 전시실 입구에는 해부극장(anatomical theatre) 모형이 설치되어 있는데 여기에 앉아서 박물관에 대한 설명을 듣고 외과학 소개 영상을 본다. 전시는 고대 외과술부터 최신 의료 장비에 이르기까지 외과학의 발전상을 보여준다. 외과수술 때 근육 벌리는 힘의 세기 어느 정도인지 레버를 관람자가 직접 당겨보게는 하는 체험 전시도 있고, 다빈치 수술 로봇은 직접 실연해볼 수도 있다.


인체 표본이 많기 때문에 윤리적 문제로 내부 전시실 사진 촬영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동물과 인간의 장기와 몸의 일부를 방부액이 든 병에 넣은 표본이 수없이 진열되어 있어 아찔해질 지경이었다. 생물의 내부를 들여다보고 파헤치려는 의학 지식의 권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도축된 소나 돼지를 매달듯 머리부터 갈고리로 매달린 인간 해골도 걸려 있다. 과학과 의학 진보의 제단에 봉헌된 인간과 비인간 동물의 무수한 시신들이 늘어서 있는 이곳은 박물관인가 아니면 무덤인가. 박물관의 어원인 뮤제이온(Museion)이 거대한 무덤을 뜻하는 마우솔레움(Mausoleum)과 어원적으로 멀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렸다.


해부학은 근대성의 핵심 중 핵심이다. “사페레 아우데(Sapere aude)” 즉 “과감히 알려고 하라”는 뜻의 라틴어 경구는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가 〈서간집〉(기원전 20년)에 처음 썼고, 칸트가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1784년)에서 인용하면서 계몽주의의 표어가 되었다. 죽음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인체 내부를 향하고 낱낱이 해부한다는 것은 미지의 영역을 남기지 않고 대상을 철저하게 알려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해부학이야말로 계몽의 정신을 상징한다. 죽은 인간을 카데바(해부용 시신)으로 만들어 해부대, 해부극장, 의학박물관에 놓이게 한 것은 바로 계몽의 정신이었다.


근대 초 이탈리아 파도바 대학의 해부극장에서는 베살리우스가 학생과 대중을 모아놓고 공개 해부를 실연했다. 17세기 네덜란드 레이덴 대학의 해부극장은 교양과 오락의 두 목적을 동시에 충족하는 독특한 시민문화의 장소였다. 레이덴 대학의 해부극장은 겨울 시즌의 시민 오락의 중심이었다. 의학자들에게는 죽음의 원인을 밝히는 곳인 동시에 일반 시민에게는 시체 해부를 직접 보려는 욕망을 충족시키는 곳, 엄숙한 과학적 관찰과 카니발적 오락이 결합된 장소가 근대 초 해부극장이었다. 관람자는 한편으로는 죽음을 밝히는 과학의 힘을 엄숙히 관찰하고 메멘토 모리를 마음에 새기는 동시에 시신 해부를 직관하며 호기심을 만족시켰다.


교양과 과학을 추구하는 계몽의 정신이 인간 시신을 해부대와 박물관에 놓이게 했다. 에든버러는 해부학의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 도시였다. 일찍이 해부학이 발달했던 이 도시는 악명높은 버크와 헤어(Burke and Hare) 사건의 무대였다. 당시 카데바로는 사형수의 사체를 썼는데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했다. 이에 착안한 윌리엄 버크와 윌리엄 헤어는 해부용 시신을 조달해 큰 돈을 벌기 위해 16명을 납치·살해하는 범죄를 저질렀다. 이 사건은 1832년 잉글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에서 해부법(Anatomy Act)이 제정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법은 시체 도굴과 매매를 금지하고 당사자와 친족의 동의를 명시하는 등 해부용 시신 공급에 대한 윤리적 규정을 처음으로 마련했다. 하지만 해부법은 불법적인 시신탈취를 완전히 막지 못했고 범죄자의 시신을 무연고자 빈민의 시신으로 대체했을 뿐이었다. 빈자의 시신이 해부실습용으로 제공되는 것을 합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버크와 헤어 사건은 2010년 영화화되기도 했다.


<영화 '버크 앤 헤어' 포스터>


시신 도둑이자 살인자 버크와 헤어가 처형된 후 버크의 데드마스크와 그의 가죽으로 만든 포켓북은 서전스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고, 버크의 해골은 에든버러 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 유해의 경우는 전시대에서 내려 수장고로 보내는 것이 최근 박물관의 추세이다. 버크와 같은 악명높은 범죄자의 시신이나 런던 헌터 박물관(Hunterian Museum)의 아일랜드인 거인 찰스 번(Charles Byrne)이라 할지라도 본인이 생전에 전시에 동의한 적이 없다는 윤리적 문제가 있다. 파리 인간박물관(musée de l'homme)에 있었던 남아프리카 코이코이족 여성 사르키 바트만(Saartje Bartman)의 경우는 탈식민화의 맥락에서 유해반환이 실현된 경우였다.


대부분의 의학박물관에 전시된 인간 장기, 분리된 신체 일부는 누구의 소유인지 명시되는 경우가 드물다. 의학박물관에 시신의 일부가 놓일 경우 윤리적 이유에서 익명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의료 윤리에서 익명성 유지는 사생활 보호와 환자 개인 이력이 의사에게 미칠 수 있는 편견을 최소화해야 하기 위해 중요하다. 전형적인 의학박물관인 서전스홀 박물관에서는 의료 윤리의 관점에서 익명성 원칙을 지키고 있다. 여기 전시된 신체 부위의 대다수는 익명이다. 신체 부위의 명칭과 전형적이거나 병리학적인 것을 기록하는 캡션의 형식이 정해져 있다. 이름, 출처 같은 개인 정보는 목록에는 기록되지만 전시 설명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예를 들면, 한 남성의 머리 표본은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Specimen GC12334. 상악골, 머리 관상동맥 부분의 앞쪽 부분, 왼쪽 부비동의 암종으로 인한 얼굴의 궤양을 보여주며, 현미경으로 재검사했을 때 세포 확산성 종양 성장이 확인되며 구상세포암 또는 육종일 가능성이 있다.” 이 표본은 찰스 벨 컬렉션의 일부로 1824년 왕립 외과의 대학이 구입한 것으로 되어있다. 환자의 사망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남자의 머리 부분은 방부제로 채워진 커다란 원통형 유리병에 들어 있다. 종양이 그의 얼굴을 심하게 변형시켰고 비강과 구강의 연조직을 침범했음을 관찰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병리학적 표본이 아니라 사람이었음을 떠올리고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방부제로 인해 얼굴과 머리카락은 옅은 노랑색이다. 눈이 감겨 있어서 표정은 편안해 보인다. 비인격화와 익명성은 구체적 인간을 지우고, 추상적 보편적 인간 신체를 탐구 대상으로 삼는 것이 가능하게 한다. 익명성의 전제 위에서 ‘사람’, ‘개인’은 ‘표본’, ‘유물’이 된다. 오랜 시간 세월에 거쳐 형성된 이 의학박물관은 카데바가 된 이름 모를 환자, 빈자, 무연고자, 범죄자의 몸 위에 세워져 있다.




염운옥 위원은 경희대학교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로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