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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8호] ‘오펜하이머’와 인권(박홍규)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3-09-27 09:23
조회
145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



영화 <오펜하이머> 포스터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고 그가 당시의 많은 과학자들처럼 공산당원이고, 아우나 약혼자나 아내나 친구들이나 대부분 공산당원이었으며, 캘리포니아 버클리 캠퍼스 교수로서 동료들과 노동조합 활동을 열심히 했고, 뒤에 소위 메카시 빨갱이 사냥 광풍이 불 때 청문회에 불려가기도 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그런데 더 놀라운 점은 그 영화에 대한 언론이나 방송에 나온 사람들이 그 점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오펜하이머가 천재라느니 원자폭탄을 어떻게 만들었다느니 하는 누구나 아는 뻔한 사실만을 뻔뻔하게 나열한다는 점이었다. 한국의 과학자들 중에 오펜하이머 같은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평생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오펜하이머의 좌파 활동에 대단히 놀랐는데, 아니나 다를까, 당연히 그런 한국에서는 오펜하이머의 좌파 활동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점은 그 영화의 가장 중요한 이야기가 아닌가? 그 이야기를 빼면 영화가 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좌파 활동가로서의 길


위 영화의 원작인 카이 버트와 마틴 셔윈이 쓴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2010)는 1100쪽이 넘는 방대한 책으로 당연히 오펜하이머의 사회활동에 대해 상세히 서술한다. 한국어판 서문의 둘째 문단에서 저자들은 오펜하이머가 1930년대에 공산당 활동에 깊이 관여한 ‘자유주의’ 성향의 공산당 동조자였지만 공산당에는 가입한 적이 없다고 한다.(7쪽) 여기서 ‘자유주의’란 한국에서 말하는 반공주의와 유사한 의미의 ‘자유주의’가 아니라 영어의 liberalism을 번역한 말로 한국식으로는 ‘진보주의’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을지 모르겠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는 오펜하이머가 어린 시절에 만난 많은 사회주의자들에 대해 언급한다. 그래서 18세에 하버드에 입학하자마자 당시 보수적이던 하버드의 대다수 학생들과 달리, ‘학생 진보 클럽’에 가입하여 사회활동을 하지만 정치문제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한 후였다.(191쪽) 당시 그는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버클리 분교의 교수였는데, 캘리포니아주는 사회주의 작가 업톤 싱클레어가 민주당의 주 지사 예비 경선에서 압도적 표 차로 당선되고 파업이 빈번하게 벌어질 정도로 진보적이었다.


출처 - 네이버블로그


영화 <오펜하이머>에서는 그 영화가 15세 입장가(미국에서는 19세 입장가)였음에도 불필요한 정사 장면을 넣어 중고생 학생들과 함께 그 영화를 본 그 학부모나 교사를 당혹하게 했는데, 그 장면에 나오는 오펜하이머의 약혼자 진 태트록은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에서는 당대 최고의 미인이자 지성으로, 일찍부터 무솔리니와 히틀러에 반대하고 미국보다 러시아를 높게 평가한 사회주의자로 묘사된다. 그녀의 영향으로 오펜하이머도 열렬한 사회주의자가 되고, 1935년에 처음으로 교수들도 가입할 수 있게 된 교원노조에 가입한다. 이는 한국처럼 법으로 가입이 허가되어서 아니라 노조가 가입을 허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전에는 노조 측이 교수들을 보수적이라고 보고 노조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다가, 오펜하이머 같은 진보주의자가 등장하자 노조의 문을 연 것이다.



교원노조 조합으로서의 활동


오펜하이머는 미국 역사상 최초의 교원노조 교수 조합원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 오펜하이머가 가입한 교원노조 지부는 몇 달 만에 100여 명의 조합원이 참가했는데 그중 40명이 교수이거나 조교였다.(214쪽) 1938년 오펜하이머는 스페인 공화정부를 돕기 위한 모금을 했고 스페인 공화정을 지원하기 위한 탄원서에도 서명했다. 1939년에는 미국 최대의 인권단체인 시민자유연맹의 캘리포니아 지부 최고집행위원으로 임명되고, 1940년에는 중국인민우호회의 발기에 서명했다.



미국의 교원노조는 여럿이지만, 그 중 대표적인 것은 1857년에 설립되어 320만 명의 회원을 거느린 전미교육협회(National Education Association: NEA)와 1916년에 설립되어 현재 퇴직교사 25만 명을 포함하여 1500만 명의 회원을 두고 있는 미국교사연맹(American Federation of Teachers; AFT)이다. 한국에서 퇴직자는 노조에 가입할 수 없다. 미국과 한국의 가장 큰 차이는 미국에서는 교사가 정당에 가입하고 근무시간 외에는 얼마든지 정치 활동을 할 수 있고, 선거 때에 노조는 특정 정당을 지지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한국에는 미국의 교원노조를 폄훼하는 기사나 책들이 너무 많아서 많은 오해를 낳고 있지만, 학생 인권은 물론 교사의 인권 향상에도 노조가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한편 미국 공산당은 1919년에 설립된 합법 정당으로 1930년대에 당원 수가 크게 늘었고 1984년까지 미국 대통령 선거에 후보를 냈으며 상당수의 공직자를 배출했으나 냉전 이후 엄청난 탄압을 받아 쇠퇴했다.



출처 - VOA


한국에는 왜 오펜하이머 같은 과학자가 없나


오펜하이머는 공산당 교수위원회의 명의로 발간된 많은 팸플릿을 직접 작성하고 강연을 하며 탄원서에 서명하여 당시 시급한 현안이었던 전쟁과 노조파괴에 반대하고 사회복지정책을 방어하기 위해 노력했다. “좋은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요건은 구성원들의 생명을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이다. 사회는 구성원들이 굶지 않도록 해주어야 하며, 그들을 폭력적 죽음으로부터 보호해야만 한다.”(255쪽) 오펜하이머는 숙청이 벌어진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 환멸을 느끼게 되지만 사회주의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는 “항상 스스로 자유롭게 사고하고 스스로의 정치적 선택을 할 수 있기를 바랐다.” 중요한 점은 그가 “사회경제적 정의를 위해 헌신했다는 것이고,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좌파의 편에 서기로 선택했다는 것이다.”(266쪽) 교원노조 소속 교수들이 1941년 해고되자 오펜하이머가 속한 ‘미국 민주주의 및 학문의 자유위원회’는 즉각 반발하는 성명서를 냈다. 오펜하이머는 인권선언이 신념의 자유와 함께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주장했는데 그것은 그가 평생 간직한 것이었다.(308쪽) 미국 박사가 흘러넘치고 성조기가 휘날리는 한국에, 오펜하이머 같은 인권의식을 갖춘 과학자는 왜 볼 수 없고, 권력이 ‘객관적, 과학적’이라고 주장하는 일본 오염수 방류를 지지하는 과학자만 넘쳐날까? 한국의 국가주의 과학교육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탓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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